3. Stupid sign
보름 하고도 하루 뒤, 오후 6시. KFC 타워 8층의 스튜디오는 계체량 측정 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덩치가 곰만 한 가드 두 명이 서 있었고, 스튜디오의 끝자락에는 흰색 천을 감싼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왕년에 운동깨나 하셨던 분들이 앉을 예정이었다. 아니, 벌써 도착한 몇 명의 운동깨나 하셨던 분들이 이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행사를 기다리며 노트북을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대체로 유머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무언가 중요한 자료라도 읽고 있는 듯 진중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준비를 하는 스태프들은 움직임을 더욱 서둘러야만 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눈치까지 보아야 한다니. 모든 스태프들의 얼굴에 짜증이 그득했다.
스튜디오 맨 앞쪽 무대의 스크린 밑에 이종격투기 후원단체의 명단이 늘어선 현수막이 걸렸다. 그 옆으로 대기실에서 나온 옥타곤걸 세 명이 빨간 핫팬츠를 맞춰 입은 채 일렬로 섰고, 스테이지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체중계가 놓였다. 그중 몇 명의 스태프가 체중계 옆에 서자 이벤트의 준비는 모두 완료가 되었다.
곧 스튜디오가 암전됐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어느새 현수막이 걸린 무대가 비치고 있었다. 이벤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입구를 통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까지 앞으로 30분이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마침내 30분 뒤. 사회자로 초빙된 아나운서가 삑, 삑, 마이크로 소음을 만들어내며 스튜디오 내부에 들어섰다. 그는 왼쪽 끝 편의 자리로 가 몇 가지 테스트를 마친 후 카메라를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스튜디오 내부의 모든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뒤이어 관람객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 내부를 가득 채웠다.
“KFC 주관 이종격투기, 무차별급 파이트전. 오늘 계체량 측정 사회를 맡은 김성규 인사드립니다.”
사회자가 정형화된 인사말을 내뱉자 잠시 조용해졌던 관객들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무대 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관객들이 하나같이 핸드폰 카메라를 켜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
“재승이 어디 가냐?”
소파 위에 누워 있던 관장이 맞은편에서 재승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관장과 재승은 스튜디오의 반대편에 있는 대기실에서 텔레비전 화면으로 스튜디오의 상황을 시청하던 중이었다.
여태 재승과는 대화다운 대화도 없이 누워만 있던 관장이었다. 늘 그렇기야 했지만, 근래 체육관에서는 잘 챙겨줬던 터라 재승은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설마 가지 말라고 할까 싶기도 하다. 힐끗 텔레비전 화면을 확인한 재승이 관장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화장실이요.”
“어어, 그럼 가야지. 갔다 와. 딴짓하지 말고 바로 오고.”
다행히도 관장은 재승에게 다녀오라는 말을 하며 소파 위로 퍼졌다. 재승은 잽싸게 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공식경기에서 그렇게 지고 난 이후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긴장이 되는지, 계속 소변이 마려웠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딴짓할 마음 같은 건 애초부터 가져본 적이 없었다.
관장님은 나를 그렇게 보고도 모르실까? 설마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니야?
그러나 재승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관장님이 가끔 서운하게는 하지만, 돌아가신 조부모님을 제외하면 관장님만큼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 관장님이 있는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구청 아줌마에게 결혼 안 하냐는 소리를 듣고 난 이후부터인 거 같았다. 부쩍 옛 애인들도 생각이 났다.
오늘처럼 긴장되는 날에 예쁜 애인이 응원이라도 하러 와준다면, 그리고 손이라도 꼭 잡아준다면 엄청 기운이 났을 것 같은데.
상처받을 게 두려워 연애 자체를 기피하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대시한다고. 그러고 보니, 일전 식당에서 만났던 여자들이 무대 위에 서 있던데…….
재승은 악수를 청하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근데 아무리 여자, 혹은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봐도 떨리는 마음은 도통 진정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찬물로 세수까지 했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재승이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는 재승 본인과 함께 멀리 문가에 기댄 남자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얍삽하니, 기분 나쁘게 생긴 게……. 분명 어디서 한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디서지? 재승은 거울을 통해 남자를 바라보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가물가물하니 기억이 날 듯 말 듯 해서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남자가 먼저 선수를 치듯 입을 열었다.
“슬슬 은퇴할 때 되지 않았어요?”
재승에게 물은 남자가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재승은 뜬금없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 말이 조롱조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 남자가 다시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마 잘 아물었네요. 이번엔 어디가 좋으려나……. 눈? 코?”
“아…….”
“나중에 봅시다. 덕수……, 아니, 헤이트 씨.”
개명 전 이름 공격에 이어 무식 조롱까지. 느닷없는 폭격을 맞은 재승이 멍하니 굳었다. 남자는 재승이 굳어 있는 그 잠깐 사이 거울 너머로 스윽, 재승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곤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안타깝게도 재승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가 멀리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저, 저, 씨발, 씨발 새끼가!”
재승은 커다랗게 욕을 내뱉으며 화장실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 건물 지하에서 치러졌던 마지막 스파링. 남자는 그 스파링에 섰던 놈이었다.
인성 보는 경기라더니 저런 놈을 뽑았나. 한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놈은 자신이 봐준 것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재승은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제 긴장 같은 것을 했냐는 듯, 그 새끼를 어떻게 패줄까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또, 저런 새끼를 인성 됐다고 키운다는 이원영을 꼭 뭉개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승의 눈에서 투지가 불타올랐다. 어쩌면, 이렇게 의욕이 나도록 도와준 남자에게 재승이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쿵쾅거리며 대기실 앞에 도착한 재승이 사나운 기세로 문고리를 돌렸다. 대기실 안에 있던 관장은 재승이 나갔을 때 모습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눈까지 감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속이 편안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났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듯하다.
재승이 관장이 누워 있는 반대편의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홍코너. KFC의 미래, 수면 마술사, 이원영!]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마침 재승이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이 호명됐다. 재승의 시선이 절로 화면을 향해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의 원영이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원영은 스파링에서 본 적 있는 비서를 대동한 채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계체량 측정을 하러 선수 신분으로 온 주제에 운동복이 아니라 저한테 딱 맞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선수들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선수들끼리 하는 계체량 측정은 어제였고, 오늘은 보여주기식으로 이종격투기 팬까지 모아서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KFC의 대표인 그는 대표랍시고 저런 옷을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걸 인정해준다고는 해도 재승은 그 꼴조차 보기 싫은 것이 당연했다. 재승이 참나, 하며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봤다.
무대 위의 원영은 생각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는 중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상의를 벗어낸 그는 당연하다는 듯 뒤에 서 있던 비서의 손에 자신의 옷을 넘겨준 뒤, 입고 있던 정장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그의 탄탄한 다리에서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의 바지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원영은 그의 이미지와 퍽 잘 어울리는 새빨간 색의 브리프만을 남긴 채 능글능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체중계 위로 올라갔다. 곧 사회자가 그의 몸무게를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225파운드!]
체중계 위의 원영이 양팔을 들어 이두박근을 과시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화면을 보는 재승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 타고난 덩치가 크기는 하지만, 노력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겠네.
재승이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탄탄한 이두박근도 이두박근이지만, 수술로 모양을 만들었나 의심이 들 만큼 예쁜 모양의 복근과 빵빵한 가슴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빨간 브리프 앞에 튀어나온 저거.
재승이 힐끗, 자신이 입고 있는 까만 운동복 바지를 내려다봤다. 분명 나 안 작다고 그랬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패배감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돈은 없지만, 열심히 단련해서 만든 몸만큼은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재승이었다. 근데 이원영한테는 근육량도 졌고, 경기에서도 졌고, 하다못해 거시기까지 지고만 느낌이었다.
화면 속의 원영은 어느새 체중계에서 내려와 청코너로 미리 체중을 잰 남자와 파이트 포즈를 취한 뒤 악수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유로운 얼굴이 어쩜 저렇게 재수가 없는지. 재승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구시렁거렸다.
경기 중에 로우블로우(low blow : 낭심을 가격하는 반칙 기술)나 당해라.
같은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저주라고 볼 수 있었다.
*
그렇게 재승이 원영을 향해 최고의 저주를 내리고 있던 그 시각, 아무것도 모르는 원영은 느긋하게 옷을 챙겨입고 무대 위에서 내려가고 있던 참이었다.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계단을 내려간 원영은 그림자처럼 스태프들이 서 있는 곳에 스며들어 갔다.
원영이 입술을 말아 물고 물끄러미 무대를 올려다본다. 그런 그의 모습은 방금까지 무대 위에 서 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꼭 아이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팬 같은 모습의 그가 퍽 설레하는 목소리를 내며 제 옆에 선 비서에게 물었다.
“천재승 선수. 계체량 측정 끝나면 매치 인터뷰 있다고 했었지?”
원영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오늘로만 벌써 10번째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 꼴에도 익숙해진 비서였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원영은 비서의 대답을 듣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는 덤덤하니 무대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혹시나 원영이 한눈을 팔까 봐. 오늘도 재승을 놓칠 순 없다는 듯 오히려 비서가 더욱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어제는 재승이 먼저 계체량 측정을 하는 바람에 그를 목전에서 놓치고 말았다.
거참,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아서야.
원영은 그렇게 쿨한 척 말을 했었지만, 그날 하루 종일 애꿎은 비서가 들들 볶였더랬다. 원영이 비서를 볶은 이유는 이거였다.
네가 스케줄을 개떡같이 받아와서 그렇잖아.
때문에 비서는 오늘 이른 아침부터 제 상관인 원영이 아니라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 재승의 스케줄을 확인해야 했다.
어제는 바로 다음 날에 만날 기회가 있어서 덜 쪼였다지만, 만약 오늘도 놓치면……. 라운드로 따졌을 때 못해도 일주일이다. 그 정신 갉아먹는 쪼임을 일주일 동안 버티라니, 게다가 운이 나빠서 천재승이 지기라도 한다면……. 아마 물리적 고문이 그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대표가 왜 이다지도 천재승에게 집착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비서의 대표는 맨 저 잘난 맛에 살던 인간이었다. 저 말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관심을 쏟을 성정이 못 되는 인간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도 있었다.
대표네 집안의 가업은 대체로 뒷골목의 일(사채회사, 그 사채를 불법 추심 할 인력, 나이트, 클럽 등의 밤 장사)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그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라든가 양심의 가책 같은 것들을 몽땅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때문에 얼마나 악독한지, 혼자서 하는 일도 많으면서 누가 따라다니는 게 귀찮다며 아무리 바빠도 비서는 늘 자신 하나만 썼다.
대표는 KFC를 제 것으로 만들고 난 이후, 집에는 밝은 빛을 보며 살겠다며 다른 일은 안 받겠다고 말했다더라. 근데, 어찌나 합법적으로 인간을 패는 스포츠만 찾아서 해대시는지. 때문에 비서는 일에 실수라도 할라치면, 맞아 뒈질 걱정부터 해야 하는 불쌍한 신세였다.
그런 대표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물론 천재승은 대표가 탐낼 만한 선수이기도 했고, 알아본바 쓸데없이 불쌍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까이고, 무시당하면서까지 그를 쫓아다닐 만한 메리트가 있을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라는 게 비서의 의견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이 인간은 어째서 아직도 건강한 건지. 아파서 좀 끙끙거려야 심부름도 덜 시키고 잔소리도 좀 덜하고…….
그렇게 비서가 재승에 이어 원영에게 2차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청코너, 프리한 영혼! 이종격투기의 미친개이자 미들급 챔피언의 신화, 천재승!”
드디어 재승이 무대 위에 등장했다.
딴짓 한번 안 하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원영은 재승이 무대에 서기 무섭게 박수를 쳐댔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서로 부딪치자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스태프들이 소리의 원흉을 찾아 힐끗거렸지만, 물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영은 그저 기분이 좋기만 했다. 특히 재승을 소개하는 저 문구. 자신이 요청했지만, 아주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었다.
재승을 보기 위해 보름하고도 하루를 더 기다린 그였다. 어제는 관장을 대동하지 않은 그를 놓친 게 너무 분해서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지만, 막상 오늘 재승을 보고 있자니 하루 가지고 뭘 그렇게 안달복달했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만나게 될 운명인데.
그렇게 자기가 왜 행복한지도 모르고 헛생각을 하던 원영은 어느 순간 박수를 멈춘 채 멍하니 굳어 버렸다. 무대 위의 재승이 옷을 벗기 시작한 탓이다. 꿀꺽, 원영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재승은 양손을 교차해 입고 있던 반소매 셔츠를 훌러덩 벗고, 고무줄 바지를 늘여 아무렇게나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한쪽 바짓단이 발에 걸려 안 벗겨지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바지를 잡아당기고는 일어났다.
재승의 발은 당연히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맨발이었다. 그 언젠가는 습관처럼 신발을 신지 않는 그의 모습에 원시 부족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나, 지금 원영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요정?
원영은 재승과 닮은 요사스럽고 아름답고 예쁜데 신발을 신지 않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떠올린 것들 중에서는 역시 천재승이 최고라는 생각도 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떠올린 것은 예쁘기만 한데 천재승은 섹시하기도 해서.
아무튼, 이렇게 보고만 있자니 바로 전에 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당장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177.8파운드!”
사회자가 재승의 몸무게를 소리쳤다. 체중계 위의 재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로 전에 원영이 취했었던 자세를 취해 보였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위로 하얀 조명이 비쳤다. 빛을 받고 반짝거리는 피부는 꼭 코팅을 입힌 밀크초콜릿 같았다. 꿀꺽, 원영이 저도 모르게 다시 목울대를 움직였다. 원영의 양 볼이 유독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재승이 무대에 올라가기를 기다렸던 시간은 길었지만, 재승은 금세 체중계 밑으로 내려왔다. 곧 사회자가 홍코너를 불렀다.
“홍코너, KFC의 떠오르는 루키! 장석환!”
이름을 불린 홍코너의 선수가 무대 위에 나타났다. 퍽 여유로운 얼굴을 한 그는 사회자가 설명한 대로 KFC에서 각 잡고 키워볼까 하는 루키였다. 동네마다 날린다는 놈들 셋을 모아 시험을 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유일하게 겸손을 떨었던 놈이 딱 저놈뿐이라 그랬다. 게다가 유일하게 재승의 얼굴에 흠집까지 내지 않았나.
하지만 원영의 눈은 단 한 번도 그를 향하지 않았다. 무대 오른쪽 끝 편에 서 있는 재승을 바라보며 잠깐 머릿속으로 얼굴이나 한번 떠올려주는 것이 원영이 루키에게 주는 관심의 전부였다.
다른 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 별수 없이 뽑기는 했지만, 딱히 이기라고 응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원영이 근래 들어 가장 자주 떠올리는 생각은 루키 그딴 걸 키우는 게 아니라 천재승이 자신의 회사에 들어오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184파운드!”
장석환은 재승처럼 아슬아슬하게 미들급에 턱걸이를 한 것이 아니라, 슈퍼미들급에 더 가까운 몸무게로 미들급에 들어갔다. 원래는 계체량 측정 전에 무게 조절을 해서 장석환처럼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급수의 몸무게를 맞추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니 굳이 슈퍼 웰터급에 더 가까운 몸무게로 불리하게 미들급에 들어가는 짓을 하는 사람은 지금 선수를 하는 사람 중에 오직 재승이 유일했다.
아…… 역시. 천재승만큼 탐날 선수는 생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원영은 재승을 바라보다 못해 그를 보며 입맛까지 쩝쩝 다셨다. 그때, 관중들이 와아아, 하고 환호했다.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무대 중앙에 있던 장석환이 히죽거리며 재승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카메라를 코앞에 둔 채 서로 주먹을 겨누며 포즈를 취했다. 여유로운 장석환의 표정과 달리 재승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재승은 다가온 장석환을 보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욕이지 않을까 싶은 입 모양이었다.
재승이 원체 패기가 넘치는 스타일이기는 하다만, 이 정도로 노려보고 심지어 쉴 새 없이 욕을 하는 일은 과거에도 드물었지 싶었다.
그날 일부러 져야 했던 것이 그렇게 화가 났었나. 아니면 상처 때문에 팬 페이지에서 놀림거리가 되었던 것을 재승도 확인한 걸까.
생각하는 원영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팼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원영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 속 터지는 꼴을 조금이라도 덜 보려면, 한시라도 빨리 재승을 설득해야 하니까. 오늘마저도 재승을 놓쳐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
하지만 원영은 아주 중대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무릇 대화라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합을 맞춰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상대방과 대화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백날 말을 걸어봤자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원영은 그 당연한 순리를 재승을 겨우 눈앞에 둔 지금에야 새삼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관장은 화장실이 급했는지 무대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화장실로 사라졌고, 덕분에 원영은 운이 좋게도 재승의 앞에 홀로 설 수 있었다. 원영은 서둘러 재승의 앞으로 다가갔더랬다.
“안녕하셨어요.”
그리고 철저하게 인사를 무시당하고 말았다.
불퉁한 표정의 재승은 인사하는 원영을 힐끗 노려보고는 화장실 입구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을 보고 있는 눈조차 뾰족하게 치켜 올라간 것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사나워진 것인지. 원영은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티를 내지는 못하고 재승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얘기 좀 합시다.”
“뭐.”
“제가 문자 드렸었는데.”
“그래서.”
그러나 대화는 도통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전에는 계약관계에 묶여 있어서 대답도 잘해주었던 것일지 몰랐다. 아니지. 그게 아니더라도 재승이 자신에게 화날 일이 있기는(많기는) 했다. 다시금 떠오른 기억에 원영은 답지 않게 재승의 눈치를 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재승은 그나마 원영을 바라봐 주기라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혹시, 팬 페이지 같은 거 자주 들어가셨습니까.”
원영이 재승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승은 대답 없이 눈썹을 추켜들기만 했다. 그게 꼭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라 원영은 안심했다. 자신이 재승에게 지은 죄는 그에게 중졸이냐는 질문을 했던 것뿐이리라. 하하.
원영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케이블 광고 모델로 선배님을 추천했는데, 이야기 들은 게 없으신가 해서요.”
찰나지만 재승의 얼굴에 ‘오…….’하고 감탄하는 표정이 비쳤다. 하지만 정말 찰나였을 뿐, 재승은 ‘사’로 시작하는 어떤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화장실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촘촘하게도 나 있는 새까만 속눈썹이 나풀거리는 게 보였다. 원영은 그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세어보기라도 할 기세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는 재승이 했을 법한 ‘사’로 시작하는 말을 떠올렸다.
사? 사……, 뭐지? ……사랑해?
그리고 그 순간, 원영의 말도 안 되는 헛생각을 질타하듯 재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장님이랑 얘기해.”
무뚝뚝하다 못해 차갑다고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내뱉은 말 자체도 대화를 거부하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면 제멋대로 사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은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제멋대로의 정석 이원영은 빈정이 상했다.
이러니까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다니죠, 천재승 선배님. 당신 관장은 당신 돈 벌게 하는 일로는 나랑 하고 싶은 대화가 없다는데. 그런 새끼랑 내가 무슨 대화를 합니까.
원영은 원래 같았다면 이미 쏟아내고도 남았을 말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다가 앗 하는 사이 의식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원영은 언제 언짢아했냐는 듯 그저 재승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의식 한편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생각이 불쑥 의식의 중앙으로 달려 나왔다.
이렇게 새침하게 구는 것도 사실은 너무 수줍어서 그런 건지 몰라. 처음 봤던 날을 생각해. 그땐 잘만 눈 맞췄다? 지금은 눈도 못 마주치는 게 이상하지 않아? 분명히 수줍은 거라니까?
일종의 밀고 당기기……, 자기한테 관심 가지게 하려고…….
원영의 망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까지 달려나간 후에야 질주를 멈추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원영 또한 ‘게이들에게도 취향은 있다.’라는 사실 정도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거다. 원영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기가 아주 많은 편에 속했다는 것.
대체로 그 주변의 여자들은 그의 성격을 몰랐을 때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에게 설레본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원영은 고백도 꽤 많이 받았고, 귀찮아서 많이 안 했던 것치고도 연애 경험이 풍부한 편이었다. 자기 자신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이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사람 다 비슷한데 게이한테라고 통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
……그런가? 진짜 그래서 이러나?
언짢음에 생각했던 말들은 잘도 내뱉지 않고 넘어갔던 원영이었으나, 의문을 풀고자 하는 유혹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참고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원영은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재승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과거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선배님께서도 우리가 체육관이나 경기장에서 만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그 기억은 원영의 머리통을 거세게 후려갈긴 뒤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덕분에 원영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수줍은 천재승 씨에게 직설화법은 안 된다. 만약 또 그딴 식으로 말했다가는 지금보다 더한 무시를 당하고 말 것이다.
원영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냥 묻지 말까, 하고. 그러다 순식간에 타협했다. 직설화법만 아니면 되잖아, 하고.
그래서 원영이 나름대로 타협한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이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당연하지만 원영은 묻는 즉시 자신의 선택을 조금 후회하고 말았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것으로 인해 부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긍정적인 면을 설명해 보자면, 재승은 화장실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원영에게로 되돌렸다.
단지 재승은 표정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원영은 재승이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욕을 생각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이 새끼 뭐 하는 새끼지?
원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코끝을 긁적였다.
“……착한 사람.”
“……오?”
“그리고 기왕이면 몸매 좋은 사람. 키도 좀 컸으면 좋겠고……, 머리는 짧은 게 섹시한 느낌이라 좋고, 운동도 좋아했으면…….”
생각과는 다르게 술술 답변을 내놓은 재승이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원영을 바라봤다. 꼭 무언가를 긴가민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원영은 좀 전과 다르게 재승이 하는 생각을 유추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역시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역시’는 재승의 답변이 자신과 퍽 맞아떨어진다는 뜻의 ‘역시’였다.
몸매 좋고, 키 크고, 머리는 짧은 편에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재승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들어도 이원영. 그를 설명하는 말들이었다.
물론 맨 처음으로 말했던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하였으나, 원영은 늘 그랬듯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땠을지 몰라도, 재승에게만큼은 잘해줬다. 게다가 ‘착한 사람’이란 말은 속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무조건 가져다 붙이는 말이지 않은가. 하하!
원영은 방긋 웃는 얼굴로 재승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재승이 다시 화장실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어, 관장님!”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승은 반가운 기색으로 관장을 불렀다. 자연스럽게 원영의 고개도 화장실 입구를 향했다.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관장은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관장을 보며 원영은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얼굴을 했다. 언제 진심으로 웃고 있었냐는 듯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입꼬리만 올린 상태였다.
“안녕하셨습니까. 따로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하하, 대표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그간 많이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좀…… 그랬지요. 근데, 여기서 말하기가 좀…….”
관장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심지어는 힐끗힐끗, 재승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수상하고, 재승에게 속이는 것이 있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재승은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얼굴로 멀뚱멀뚱 관장과 원영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간 원영은 재승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관장을 떼어놓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그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재승에게 의문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빨리 관장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만약 재승이 힘들어한다면 자신이 조금 보듬어주면 그만이고 말이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제가 일전에는 천재승 선수가 오는지 몰라서 금액을 너무 적게 책정한 것 같아서요. 회당 이천이라니…… 제가 장난쳤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의리 때문에 해주신 걸 텐데, 그 일로 계속 피하신 거라면 이번 일은 정말 받아 주셨으면 해서요. 매 시즌 천재승 선수 쪽으로 러브콜 보내는 케이블 측에 제가 협찬을 좀 넣었는데, 케이블 측에서 받는 모델료 제외하고 제가 1억 더 얹어드릴까 합니다. 사죄의 의미이기도 하고, 워낙 스타성이 있는 선수신데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리그에서 따냈던 상금도 억 단위였고, 파이트머니도 억 단위로 뛴 지 오래돼서 돈이 아쉽지야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제 체면 생각해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길기도 긴 말을 따발총처럼 쏘아댄 원영이 해냈다는 기분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재승은 원영의 말을 전혀 이해한 눈치가 아니었다. 별나라에 간 표정으로 멍하니 대리석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재승은 쓸데없이 얼굴만 고왔다. 이보다 더 쉽게 말할 자신은 없는데. 생각하던 원영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허허, 요즘 바쁘기도 하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럼……, 저희는 매치 인터뷰가 있어서. 재승아, 가자.”
관장의 부름에 재승이 고개를 들었다. 재승은 힐끗 원영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인사도 없이 관장을 따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재승의 뒷모습에 원영은 쓸데없이 가슴이 시렸다.
이 정도의 멍청함이라니. 이건 신이 그를 너무 사랑했든가, 너무 미워했든가.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원영은 그를 위해 전자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천재승에게는 조금이라도 상처 주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보다. 상처, 주지 말아야지.
그리고 원영은 오늘 재승과의 만남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오늘은 재승의 이상형을 알아내는 소득이 있었으며, 내일도 재승을 만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 재승을 회유할 기회는 아직 많다. 원영이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
‘사기꾼’과 헤어진 재승이 관장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의 끝 쪽에 자리를 잡고 선 재승은 멀뚱히 엘리베이터 안의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원영과 만난 것도, 대화를 나눈 것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바보처럼 보였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점점 머릿속이 시끄러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웃는 얼굴로(재수는 없지만 퍽 믿음이 가는 모양새였다) 광고 모델 추천을 해줬다기에 솔직히 조금 혹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순간 관장님께서 ‘그놈이 뭐라고 하든 말 듣지 마. 무슨 사기를 치려는지……. 나한테 계속 그런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개팅이라도 해줄 것처럼 이상형을 물어오는데, 그건 사기꾼이고 뭐고 유혹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마침 오늘따라 더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기를 당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면서도 재승은 나불나불 원영에게 자신의 이상형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의 상황. 원영이 눈앞에 있을 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재승은 사실 그 뒤의 상황 때문에 조금 화가 났었다.
그러니까, 관장이 막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재승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었다.
원영에게 이상형은 이미 나불나불 읊어버린 상황이고, 그가 소개팅을 시켜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관장님이 왔으니 적어도 자신에게 사기를 치지는 못하겠지 싶어 무척이나 안심하고 있었다.
재승은 원영이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원영은 관장님과 인사를 나눴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원영이 재승의 기대와는 다르게 하던 이야기를 싹, 입 닫아버렸다는 것. 심지어 그는 느닷없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야기들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시작한 이야기는 스파링비 2000만 원으로 시작해서 ‘억’이라는 금액이 나오고, 거기에 재승 자신의 이름이 드문드문 들어가 있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관장님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기에 안 듣는 척하기야 했지만, 재승은 사실 엄청 열심히 주워듣고 있었다. 다만, 그 이야기의 내용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서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영은 ‘2000만’이라는 금액을 말했지만, 자신은 스파링머니로 회당 800만 원을 받았고, 파이트머니가 ‘억’이라는 말을 했지만, 자신은 연봉으로조차 억 단위를 찍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관장을 의심해야 맞는 상황이었을 테지만, 재승의 관점에서 관장이 사기를 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관장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빼고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었으며, 선수로까지 키워준 사람이었고, 선수로서의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말을 끝마친 원영이 재승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했을 때, 재승은 자신의 한계치로 머리를 굴리며 가설을 세웠다.
하나. 이원영은 나에게 사기를 칠 수 없어 짜증이 났을 것이다.
둘. 이원영은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고, 그것으로 나를 골탕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셋. 관장님께서 나를 속이려고 했다기보다는, 굳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 한 가지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설을 세워가던 끝에 재승은 마침내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것은 관장님이 자신 말고 다른 선수를 키웠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리고 그 선수는 자신과 다르게 선수로서 아주 출중한 데다가 아마 무식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아주 확실히,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가 관장님의 밑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당연하지만 기분이 좋을 법한 결론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재승은 조금 서운할지언정, 관장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유야 뭐. 관장님이 그간 자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까닭을 알 것 같아서.
관장님은 분명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저물어가는 놈 기까지 죽지 말라고 신경을 써준 것이었을 터였다. 그런 관장님에게 배은망덕하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혹여 화를 낸다고 한들 우스워지는 것은 자신일 것이 빤하다는 생각도 했다. 게다가 어쩌면, 잠깐의 투정을 못 참은 대가로 아주, 아주 외로워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재승은 관장에게는 절대. 절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원영에게는 화가 났다. 아니, 단순히 ‘화’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났으면, 그냥 욕이나 주먹질을 하는 것이 서로 편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했다. 굳이 관장님까지 끌어들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무식하다고 그렇게 무시를 했으면서, 그럼 그냥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하든가.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것조차 돌려 말하는 바람에 그걸 해석하느라 안 돌아가는 머리까지 돌돌 굴린 게 너무나도 억울했다.
KFC의 루킨지 뭔지 하는 그 새끼도 천하의 씨발 새끼였다만, 이원영에 비하면 차라리 그 새끼가 양반이었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다 쥐어 터트려 버릴 것이라는 마음만은 같았지만 말이다.
재승이 좋지 않은 생각을 억지로 끊어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재승의 얼굴은 답지 않게 무척이나 덤덤해 보였다. 화가 나고 분노가 솟구치는 것은 물론 사실이었지만, 심장 박동은 평소에 비교하면 도리어 느린 것도 같았다. 게다가 마음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너무 화가 나면 그렇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데. 재승은 살면서 화날 일이 많았지만, 자신이 이 정도로 화가 난 일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띵동]
어느새 관장과 재승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내에 간결한 안내음성이 울렸다. 곧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의 문 앞에 서 있던 관장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며 먼저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그 뒤를 따라 재승이 밖으로 나가자, 관장은 재승에게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시간이 조금 남았네.”
짧은 중얼거림을 끝낸 관장이 밑도 끝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재승은 그런 관장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건물 구석의 한 자판기 앞이었다.
*
자판기 앞에 선 관장이 자판기에 카드를 찍었다. 관장은 삑, 하고 기계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버튼을 연달아서 눌렀다. 덜컥, 덜컥, 덜컥. 관장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음료가 나오는 곳에서 커다란 소음이 생겨났다. 곧 허리를 숙인 관장의 손에는 생수 한 병과 이온 음료 한 캔, 그리고 커피 한 캔이 들렸다. 관장이 커피 한 캔을 뺀 나머지를 재승을 향해 내밀었다.
“음료수는 지금 마시고, 물은 이따 들어가서 먹어.”
“……감사합니다.”
재승은 꾸벅 머리를 숙이며 생수와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그 뒤엔 생수를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관장이 마시라고 한 이온 음료의 캔을 땄다. 목이 탔다는 듯 벌컥거리며 음료를 들이켜자,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관장이 자판기 옆의 의자에 슬그머니 앉았다.
관장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가만히 재승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재승이 음료를 입술에서 떼어냈을 때, 괜스레 혀를 차듯 쯧 하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나 없을 때 KFC 대표가 뭐라고 하든?”
늘 그랬듯 재승을 떠보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관장의 물음에 재승은 들고 있는 캔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머뭇거리며 망설이기만 할 뿐, 도통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관장이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재승은 언제 주저했냐는 듯 빠르게 목소리를 냈다.
“……아뇨.”
그러나 그의 대답은 관장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참,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관장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며 얕게 경련했다. 그래도 관장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관장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재차 질문했다.
“보니까 막 웃더만. 그럼 웃으면서 무슨 얘기 했는데? 응?”
하지만 거듭된 질문에도 재승은 ‘진짜 아니에요.’ 하며 입을 꾹 다물려고만 했다. 평소에는 말 못 걸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행동하는 놈이 그러니, 관장은 재승이 여간 수상쩍었고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관장 자신의 말투는 나무랄 것 없이 완벽했기에 더 그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나도 좀 들어보자! 분명히 그렇게 들렸을 텐데…….
사실 관장은 원영이 저를 붙잡고 따발총처럼 쏘아댔던 말은 딱히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만약 재승이 그 말을 신경 쓰고 제가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관장의 생각이었으니까. 재승의 성격대로라면 ‘관장님이 저한테 어떻게 이래요.’ 그러면서 화를 내든가, 울고불고 서러워하든가. 그런 식으로 아주 크게 반응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관장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탈이 나서 화장실에 박혀 있던 사이, KFC의 대표 이원영이가 천재승이에게 무슨 감언이설을 했느냐였다.
득이 될 것 같으면 나서서 협상을 보고, 득이 안 될 것 같으면 재승에게 일일이 사기라고 일러주고. 뭐든 행동을 취하려면 일단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부터 들어봐야 할 텐데.
“거참. 뭔데 그래. 응?”
관장이 서 있는 재승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장난스럽게 껄껄거렸다. 천재승을 구슬릴 때는 먹을 것, 칭찬, 친구 혹은 가족 같은 스킨십이면 뭐든 다 됐다. 그건 오늘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 재승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흐히, 이, 이상형! 이상형 물어봤어요.”
“뭐?”
“케이블 광고 모델로 저 추천했다고 그러더니, 그다음에 이상형 물어봤어요.”
“…….”
관장이 입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턱 밑을 긁적였다. 대답이 너무 허무맹랑하다 보니 거짓말을 못 하는 놈인 걸 알면서도 불신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자 재승이 관장의 눈치를 봤다. 그러곤 기껏 묻는다는 말이 이거였다.
“근데요, 관장님. 케이블 광고 그거…… 진짜면 하면 안 돼요?”
덕분에 관장은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불안감까지 말끔히 사라지자 박하라도 먹은 것처럼 속이 개운-했다. 관장이 재승의 앞으로 손사래를 치며 한껏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야, 가짜. 나중에 받은 돈보다 더 달라 그런다? 그거 답도 없어. 아무튼, 쯧쯧. 그 사기꾼 새끼……. 그리고 이상형은 또 뭐야? 여자 사기꾼이라도 소개해 주려고? 참나…… 아주 웃기는 놈이야, 그거?”
관장은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원영의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욕은 재승이 음료수를 다 마시고, 두 사람이 인터뷰장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물론 재승은 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그거 말고는 딱히 별다른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재승은 당장 이원영이라는 사람이 별로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관장님이 자신에게 숨겼을 새로운 선수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관장님. 저 이번 시즌 경기 진짜 열심히 잘할게요.”
재승이 인터뷰 테이블에 앉으며 관장을 향해 다짐하듯 말했다.
“어? 그래, 그래야지. 열심히!”
의아한 듯 재승을 바라보던 관장은 이내 재승을 보며 한쪽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재승은 그런 관장의 반응을 오늘따라 유독 더 다정하시다고만 느꼈다. 그러니까 자신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관장님이 아예 다른 선수에게 눈을 돌리거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도록.
*
까맣게 불이 꺼진 관객석 내부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미 한 차례의 경기가 치러지고 난 직후라, 관객석은 관객들의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실내의 중앙에 볼록 솟은 팔각형 모양의 철장 경기장 위로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선수와 심판 대신 옥타곤에 들어가 있던 청소 인력이 바닥에 묻은 핏물을 걸레질한 뒤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곧, 옥타곤걸이 경기 시작 전을 알리는 팻말을 들고 팔각형의 철장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다음 경기를 기다리던 관객들이 선수의 등장을 기대하며 술렁거렸다.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해설자들은 테이블 위에 잠시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KFC 로고가 크게 박힌 마이크를 든 그들이 테이블에 비치된 작은 액정을 바라봤다. 작은 화면에는 생방송으로 중계 중인 방송의 화면이 그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전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마무리되자, 화면에 두 남자의 사진과 함께 프로필이 떠올랐다. 해설자 중 하나가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20xx KFC 주관 이종격투기 무차별급 파이트 전. 이번 경기는 천재승과 장석환. 38승의 천재승과 8승의 장석환이 되겠습니다.”
“키 186cm. 체급에 비교해 아주 큰 키를 자랑하는 천재승 선수가 되겠고요, 장석환 선수와는 9cm, 무려 9cm 차이가 납니다.”
“예, 하지만 무게에서는 장석환 선수가 184lb로 같은 미들급이지만 천재승 선수와는 6.2lb, 그러니까 대략 3kg의 차이를 보이는데요. 근육량으로 비교했을 때 천재승 선수보다 월등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서로 가지고 있는 장점이 다른 선수들이라 어떤 승부를 펼칠지 기대되는 가운데, 네! 천재승 선수! 천재승 선수가 먼저 출전하고 있습니다!”
프로필이 떠올라 있던 화면이 전환되며 가드에 둘러싸인 재승의 모습이 보였다. 재승은 회사들의 이름이 잔뜩 나열된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까만색 오픈핑거글러브를 낀 채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날 매치 인터뷰에서 장석환은 버릇이 없다 싶을 정도로 재승을 도발했었다. 하지만 재승은 잔뜩 굳은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독 재미없던 그 인터뷰 덕분에 재승의 매치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도리어 그가 어떤 모습으로 경기장에 입장할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경기장에 입장하는 재승은 관객석에서 뻗어져 나온 손들에 자신의 손을 쭉 부딪쳐가며 여유를 과시했다. 재승의 손을 만진 격투기 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네, 천재승 선수. 선수 생활을 참 오래했습니다. 출전 경험도 많고 승률도 아주 좋은 베테랑, 천재승 선수가 되겠습니다.”
“무차별급은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인 천재승 선수. 오늘 아주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모습입니다. 네. 많은 팬들의 성원을 받으면서 천재승 선수, 출전하고 있습니다.”
재승은 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옥타곤 밑까지 걸어갔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재승이 옥타곤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오늘 재승의 상대인 장석환의 얼굴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자, 이제 KFC의 신예. 장석환 선수가 출전 중입니다. 주짓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장석환 선수. 하지만 불같은 주먹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장석환 선수 되겠습니다.”
“이번 경기를 위해 수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실행했다는 장석환 선수입니다. 어제 매치 인터뷰에서는 천재승 선수를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며 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해설의 말대로 화면 속의 장석환은 재승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KFC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은 채 고개를 까닥거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피식피식 웃음까지 흘려가며 옥타곤을 향해 걸었다.
얼마 뒤, 옥타곤 앞에 선 장석환이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넣으며 옥타곤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두 남자가 팔각형의 옥타곤 위에서 서로 대치하자, 뒤이어 까만 옷을 위아래로 입은 심판이 두 사람의 있는 옥타곤 안으로 들어갔다.
심판의 입장과 함께 옥타곤의 철장은 닫혔다. 심판이 두 남자의 사이에 서서 양 선수를 한 번씩 손으로 가리켰다. 그 뒤 심판은 높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선수가 서로에게 다가서며 주먹을 쭉 뻗었다.
툭, 두 주먹이 가볍게 부딪혔다. 해설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네! 경기! 경기 시작됐습니다!”
*
“흣.”
재승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장석환을 향해 낮은 킥을 날렸다. 장석환보다 눈높이가 높고 다리가 길다는 조건 덕분에 재승은 장석환이 펀치나 킥을 날릴 사거리를 확보하기 이전에 먼저 공격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첫 공격은 무효가 되었다. 장석환이 빠르게 뒷걸음질을 쳐 발차기를 피했다. 그 뒤 장석환은 웃는 것 같은 얼굴로 양 주먹을 까닥이며 어디 들어와 보라는 식의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재승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보다 다리가 짧은 것은 장석환이기에 자신은 굳이 근처까지 파고들 필요가 없었던 탓이었다.
재승이 멀뚱멀뚱 스텝을 밟고 있자, 오히려 약이 오른 장석환이 재승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석환이 주먹을 날리기 위해 오른쪽 가드를 내렸다. 기회를 잡은 재승은 자신의 왼쪽으로 파고드는 그의 오른쪽 얼굴을 겨냥해 손바닥을 날렸다.
퍽, 짝!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찰진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재승은 조금이나마 기분이 상쾌해졌다.
방금 재승이 사용한 기술은 오픈 블로. 일명 싸대기 블로라고 일컬어지는 기술이었다. 복싱에서는 반칙이지만, 지금 두 사람이 선 경기에서는 허용이 되는 기술. 하지만 워낙 치는 사람이 추잡해 보이는 기술이라 웬만큼 양아치거나 기분이 많이 상하지 않은 이상 다른 선수들은 굳이 실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승은 평판 따위를 신경 쓰는 인사가 아니었다. 제 기분을 더럽게 만든 사람에게는 똑같이 더럽게 플레이를 해서 풀어왔다. 그래도 관장에게 ‘저 이번 시즌 경기 진짜 열심히 잘할게요.’라고 했던 재승의 말은 진심이었다. 재승은 장석환이 공격을 위해 다가올 때마다 그의 얼굴에 ‘열심히’ 싸대기를 갈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지하게.
*
그렇게 1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공(gong)이 울렸다. 라운드 내 재승은 미처 피하지 못한 장석환의 발차기를 한 대 맞았지만, 장석환의 양 볼에는 시뻘겋게 멍이 올라온 상태였다.
누가 봐도 재승이 신예를 가지고 놀았다고 보이는 경기였다. 옥타곤의 철장이 열리자 흥분한 기색의 관장이 순철과 함께 옥타곤 안으로 들어왔다. 재승은 순철이 가져온 낮은 철제 의자에 앉아 물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뺐다. 재승의 앞에 선 관장이 카메라를 의식한 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손짓했다.
“어, 재승이! 1라운드 수고했다.”
“예.”
“지금 너무 방어적이야. 공격적으로 나가야지. 기는 잔뜩 죽여 놨으니까, 지금처럼 거리 계속 주면서 큰 공격 위주로 나가.”
“예.”
재승은 관장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순철이 건넨 생수로 입을 헹구고 가슴에 얼음찜질을 받았다. 재승이 앉은 반대편에 똑같이 철제 의자에 앉은 장석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재승에게 이제 퍽 익숙한 남자, 원영이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장석환은 원영을 올려다보다가 재승이 앉아 있는 곳을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그곳을 바라보던 재승은 그런 장석환과 눈이 마주치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재승이 들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물었다. 관장님의 말대로 이제부터는 좀 본격적인 공격을 해볼까 싶었다.
*
대치하고 서 있던 두 선수가 심판의 손짓과 동시에 주먹을 부딪쳤다. 장석환은 2라운드의 시작과 동시에 재승을 향해 저돌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오른쪽, 왼쪽 주먹이 번갈아 가며 휘저어지듯 날아왔다. 재승은 춤을 추듯 몸을 틀며 장석환의 주먹을 피하고, 그의 무릎을 향해 킥을 날렸다.
공격하느라 미처 하반신을 방어하지 못한 장석환의 몸이 휘청거렸다. 재승이 재차 무릎에 킥을 날리자 장석환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장석환은 주짓수가 주력이기에 일어서서 싸우는 것보다는 상대를 끌고 바닥에 붙어 싸우는 것에 더 강했다. 재승은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떠올렸지만, 굳이 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잽싸게 쓰러진 장석환에게 다가간 재승이 장석환의 목에 팔을 걸었다. 목이 졸린 장석환은 재승의 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방어했다. 재승은 그러든 말든 장석환의 목을 조르며 그를 돌려 눕혔다. 장석환이 정면으로 눕혀지기 무섭게 재승은 장석환에게 마운트포지션(mount position : 누운 상대의 배 위로 올라탄 자세)을 취했다. 그러자 장석환이 주먹을 휘두르며 공격을 시도했다.
재승은 장석환의 주먹에 가슴을 맞았으나 당황하지 않고 장석환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듯 주먹을 메다꽂았다. 쾅! 머리를 맞은 장석환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재승의 옆구리에 손을 끼려고 했다. 마운트포지션을 벗어나기 위해 옆구리를 쥐어뜯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승은 장석환의 손을 피해가며 그의 이마에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결국 장석환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장석환은 피눈물을 흘리는 모양새로 고개를 들며 재승을 허리를 끌어안았고, 장석환의 머리에서 터져 나온 피가 재승의 가슴에 뭉개졌다.
재승은 장석환에게 안긴 채 그의 등에 곡괭이 질을 하듯 팔꿈치를 찍어댔다. 많이 아팠던지, 장석환이 생리적인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때문에 이마에서 흐른 피와 눈물이 섞여 장석환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 얼굴을 봤으면 속이 시원한 상태로 공격을 했을 테지만, 재승은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저 의무적으로 팔꿈치를 찍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재승은 자신을 끌어안은 장석환의 손에 힘이 풀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재승의 가슴에 붙어 있는 장석환의 얼굴도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재승은 장석환의 얼굴을 가슴에서 떼어냈다. 주먹을 날리자, 장석환은 그로기(groggy : 타격을 받아 비틀거리는 상황) 상태에 빠진 듯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심판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2라운드 3분 32초. 재승의 녹아웃(KO) 승리였다.
*
“KO승의 천재승 선수! 천재승 선수입니다!”
잔뜩 고양된 목소리의 해설자가 크게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설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화면에는 막 경기에서 이긴 재승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화면은 곧 전환되었고,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들고 일어선 해설자들은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카메라 한 대와 함께 옥타곤을 향했다. 멀리 옥타곤 안의 재승은 경기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으로 철장 위에 들러붙어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온몸에 핏물을 묻힌 채 그러고 있는 꼴이 재승의 별명처럼 꼭 옥타곤에 갇힌 미친개와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갇힌 개보다는 더 자유로울 것이다. 재승은 철장 위에 걸터앉아 와아악, 뜻 없는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옥타곤의 철장 밖에 스툴을 붙이고 선 카메라들은 하나같이 그런 재승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해설자들 또한 그런 재승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재승은 해설자들이 옥타곤의 앞에 중반쯤 도착하고 나서야 철장 위에서 사라졌다. 해설자들은 그때까지도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천재승 선수였습니다만, 오늘 경기에서는 확실히 재기하는 모습, 초심 그대로의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네. 특히 방어적인 부분에서도 아주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이번 시즌. 천재승 선수가 아주 이를 갈고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석환 선수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쥔 천재승 선수는 전 시즌 챔피언인 이원영 선수에게 챔피언 재도전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리벤지매치(revenge match : 복수전 혹은 재대결)를 도전하게 되면, 시합은 일주일 뒤 치러질 예정인데요. 컨디션을 회복하기에도 아주 촉박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나머지는 천재승 선수를 만나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재승 선수, 일단 승리하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겨우 옥타곤 안으로 들어선 해설자 중 하나가 재승을 향해 다가서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관장과 함께 서 있던 재승이 성큼 카메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미친 듯이 날뛰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 피를 칠한 채로도 무척이나 얌전을 떠는 모습이었다. 마이크를 받아 든 재승이 퍽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소감…… 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데. 내가 어제 말은 안 했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고요. 그냥 제가 이기는 게 당연한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석환 그 새끼 물 근육이에요!”
재승은 진지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느닷없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곤 이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해설자는 저게 진짜로 천재승이 하고 싶어 하던 말이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재승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그는 누가 보아도 신이 난 사람 같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비단 해설자뿐만은 아닐 터였다.
그때, 신나 보이던 재승이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힐끗, 카메라 뒤편을 살핀 재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 혼자만의 승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장님이 체육관에서 훈련이랑, 또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어……. 아! 절약을 많이 짜주셨습니다!”
“예……. 전략을 짜주신 관장님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말씀이신 거고요.”
“네!”
“긴장 없이 이길 만한 경기라 이겼다고 말씀을 해주셨고, 또 확실히 KO로 승부를 보셨으니 참 자랑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마운트포지션의 위치에서 장석환 선수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내기도 하셨는데요. 주먹을 맞으면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아…… 나 별로 안 맞았는데. 그리고 하나도 안 아파서…….”
재승이 애써 회상이라도 해보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만 깜박거리는 모습이 경기 도중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였다. 재승은 몰랐겠지만, 그건 재승이 장석환을 일부러 깔아뭉개는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재승의 말에 ‘예.’하고 추임새를 넣은 해설자는 장석환의 선수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느꼈다.
“천재승 선수는 이번 경기의 승리로 무차별급 챔피언 이원영 선수에게 재도전할 권리를 얻게 되었는데요. 리벤지매치에는 바로 도전하실 예정이신가요, 천재승 선수?”
해설자는 더욱 상품성이 있을 내용으로 말을 돌려버렸다. 재승에게는 방심하고 있는 찰나에 기습적인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승은 당황하기는커녕 눈을 희번덕거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장석환은 어차피 이길 거라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고, 관장님이랑 짜놓은 절약은 이원영을 이길 절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좆밥 선수나 키우는 이원영은 곧 망할 것 같습니다!”
재승이 역사에 다시 없을 폭탄 발언을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목소리로 내질렀다. 경기장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관중들도, 경기의 관계자들도. 모두 재승을 보며 ‘저 발언 괜찮은가?’라는 말을 속닥거리기 바빴다.
하다못해 재승에게 리벤지매치에 대한 각오를 물을 작정이었던 해설자조차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상황을 찍고 있던 카메라는 보람차 보이는 재승의 얼굴을 느닷없이 클로즈업 했다. 덕분에 당황한 얼굴의 해설자는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았으나, 인터뷰가 진행되어야 하는 옥타곤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
“이원영이 망하면 KFC가 망하는 건데, 그럼 너도 망하지 않겠냐, 인마! 생각이란 걸 좀 하고 말을 해야 될 것 아냐! 그리고 절약 아니고 전략! 사람 말을 좀 제대로 듣고, 어! 해설자가 정정을 해줬는데도 그걸 못 알아 처먹어!”
재승과 함께 옥타곤을 빠져나온 관장은 대기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재승을 향해 버럭버럭 호통을 쳐댔다. 때문에 재승은 자신이 인터뷰 도중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은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원영이 하는 말은 다 가짜고, 그 새끼가 하는 말은 다 사기라면서요. 사기꾼은 망해야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재승은 말대꾸하지 않았다. 고까운 눈으로 재승을 올려다보던 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은 일 있으니까, 체육관 나오지 말고. 집에서 훈련 잘해. 먼저 간다.”
관장은 시즌 시작부터 KO승을 거둔 재승의 기를 굳이 잔뜩 죽여놓고, ‘그래도 잘했다.’라는 칭찬 한마디 없이 대기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재승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선수 대기실에 딸린 샤워 시설로 들어갔다. 곧, 재승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오…….”
무릇 선수 샤워실에 비치된 세면용품이라 함은, 샴푸 린스가 합해진 올인원 제품과 때 비누가 전부일 텐데. 여긴 무슨 샴푸, 린스도 따로따로에 바디워시까지도 구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샤워 시설 구석의 저거.
“오오…….”
1인용 습식사우나의 문을 열어본 재승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뿌옇게 수증기가 차올라 있는 습식사우나는 후끈후끈하니 시원할 것 같아 보였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목욕이나 실컷 하고 가야지. 재승이 흥얼거리며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재승의 몸을 더럽히고 있던 새빨간 피가 흐르는 물에 줄줄 씻겨 내려갔다. 그 뒤 재승은 물도 제대로 묻지 않은 머리에 샴푸를 퍽퍽 짜냈다.
눈을 감고 있는 재승의 얼굴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물론, 사실이 그랬다. 관장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린 참이었으니까. 모두 경기의 승리와 목욕탕의 시설 덕분이었다.
*
시원하게 목욕을 끝낸 재승은 입고 온 까만 반바지와 하얀 반소매 티셔츠, 그리고 까만색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은 탓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전혀 찝찝하지 않았다.
재승은 차가 세워진 야외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제 어깨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며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몸도 마음도 상쾌하니, 나쁠 것 없는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항아리 우유가 없다는 것 정도일까. 항아리 우유를 생각하던 재승이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재승은 마침 도착한 자신의 용달트럭에 키를 꽂아 넣었다. 커다란 몸을 용달트럭 운전석에 구겨 넣고, 그나마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를 벗어 조수석 위에 던져 넣었다. 그 뒤 재승은 조수석 앞의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재승의 투박한 손이 잡동사니가 가득 실린 글로브 박스 안을 휘저었다.
그렇게 재승이 글로브 박스 안에서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포장이 뜯긴 담배와 라이터였다. 담뱃갑 안의 담배는 이미 절반 정도가 비워진 상태다. 재승은 그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낸 후, 다시 담뱃갑을 글로브 박스 안으로 던져넣었다. 딸깍, 라이터를 켠 재승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곧 재승이 문 담배의 끝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재승은 활짝 열린 운전석 문 쪽으로 한쪽 다리를 뺀 채 불이 붙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발을 까닥거리며, 차창 문 너머로 해가 저문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담배 한 개비가 절반 정도 재로 변했을 무렵, 재승의 용달트럭 맞은편에 세워져 있던 까만 SUV에서 헤드라이트가 쏟아져 나왔다.
“…….”
재승이 인상을 찡그리며 맞은편을 바라봤다. 환한 불빛이 쏟아지는 통에, 운전석에 앉은 사람에게는 검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때문에 얼굴은커녕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 하는 새끼야, 씨발.”
재승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그 순간, SUV의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곧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익숙해 보이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걸음이 빠르다고 느껴졌다.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가까워진 남자가 마침내 용달트럭의 운전석 문 앞에 섰다. 남자는 재승의 입술에 물린 담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담배를…… 피우십니까?”
재승은 자신에게 질문한 남자와 눈을 맞췄다. 용달트럭은 차체가 높았기 때문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 있는 사람과 대략적인 눈높이가 맞았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참……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재승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그 남자. 이원영을 노려봤다.
남이야 담배를 피우든, 마약을 하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저런 표정을 지으며 면박을 주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기분이 아주아주 띠꺼웠다.
게다가 이원영이 굳이 자신을 찾아온 것은 이유조차 빤하지 않은가. 인터뷰에 대해서 따지거나 시비를 걸기 위함일 테지. 아무래도 기분 좋게 집에 가기는 그른 것 같다. 재승이 원영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왜.”
원영에게 사납게 물은 재승은 그가 서 있는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운전석 문에 굴러다니던 박카* 병을 집어 들었다. 입에 물고 있던 꽁초를 집어넣자, 병 속에 조금 남아 있던 물기 때문인지 꽁초가 치이익, 기운 빠지는 소리를 내며 불씨를 꺼트렸다. 재승은 확인 사살을 하듯 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퐁퐁, 좁은 병 입구로 흘러나온 마지막 연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
하지만 그때까지도 원영은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시비든, 할 얘기든. 어서 할 것 다 하고 눈앞에서 좀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는데. 장석환을 상대로 고전했다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해도 실제 경기라는 건 체력소실이 컸다. 게다가 배도 고프다. 재승은 귀찮은 말싸움 대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다. 어제 미리 사둔 삼겹살 두 근이 집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갈 고기를 생각하던 재승이 이내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원영은 물끄러미 재승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재승이 다시 사납게 물었다.
“왜! 뭐!”
“씻고 나오셨나 봐요.”
“…….”
“머리가 젖어 있기에…….”
재승의 서슬 퍼런 눈빛에 원영은 변명도 안 되는 말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다른 말은 없이 눈만 깜빡거리고 서 있었다.
놈도 계속 이러고 있을 만큼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은 아닐 터였다. 아니, 만약 그가 바쁘지 않다고 한들, 자신보다는 바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KFC의 대표인 그라면 그를 찾는 사람도 많이 있을 거고, 그가 해야 할 일도 많이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재승은 원영과 가만히 눈을 맞추고만 있었다. 저놈은 바쁘니까 곧 본론으로 들어갈 텐데, 자신은 그만큼 바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그가 무슨 시비를 거는지부터 자신이 직접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체감상 한참이 지나도 그는 멀뚱히 눈만 맞춘 채 서 있었다. 워낙 선비셔서 먼저 싸움 같은 건 걸지 않는 주의인 건가 싶다. 그렇다면 싸움을 먼저 걸어드려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인터뷰에서 이미 적의를 한껏 발산해 놓은 데다가, 그것 때문에 관장님에게 혼을 났던 것이 문제가 됐다.
재승이 원영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주제라고는 사기꾼과 좆밥 선수나 키우는 놈, 그렇게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기꾼은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일 것이 빤하고, 좆밥 선수나 키우는 곧 망할 놈이라는 욕은 했다가 관장님한테 혼이나 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 두 가지를 뺀 이원영은 재승이 보기에도 퍽 완벽해 보였다. 없는 사실 만들어내면서 싸움을 거는 건 재승이 당해본 적은 있어도 직접 할 수 없는 일이다.
머리 안 쓰면서 욕하는 방법 중에 최고는 부모님 욕을 하는 것이라는데 그건 재승이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욕이고. 그렇다고 선비인 척하는 놈에게 느닷없이 쌍욕을 날리자니 그건 무시만 당하기 딱 좋은 일이 될 터였다.
재승은 자신도 원영처럼 치졸해지고 싶었으나, 치졸해지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얼굴만 왕창 구겼다. 재승이 원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
물론, 원영에게 질문하면서도 절대 그렇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눈깔에 헤드라이트를 팍팍 쬐기까지 하던 놈이니 고작 그거나 물어보려고 이곳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씻지 말고 피칠한 채 집에 가는 게 너랑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배고파서 기운 빼기 싫었는데, 만약 그런 말이었다면 기운을 조금 더 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늘도…… 검진은 안 가시고……?”
하지만 원영은 재승의 생각과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재승이 눈썹을 추켜들었다. 그러자 재승의 얼굴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던 원영이 말을 덧붙였다.
“병원이요. 병원 안 가시나 해서.”
원영이 핫핫, 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말의 뜻이 이해가 갔다고 해도,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새끼는 병원 못 가서 지병이라도 얻었나. 왜 매번 멀쩡한 사람한테 병원 안 가냐는 소리를 하는 거야. 생각하던 재승이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별로 맞지도 않았는데 내가 병원을 왜……?”
재승이 순간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굳혔다. 말을 하다 보니,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스파크가 튀어 오른 탓이었다.
방금 이원영이 한 ‘병원 안 가시냐’는 질문은, 알고 보면 그의 ‘선비식’ 시비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한 말의 진짜 의미는 ‘제가 당장 병원에 가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가 맞을 것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기분 나쁜 깨달음을 얻었기에, 재승의 눈은 순식간에 활활 불타올랐다. 덕분에 여태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사기꾼은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를 키우고 있었다. 사기꾼 새끼라 그런지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더 이상 그의 연기에 속지 않았다. 재승이 그를 향해 야무진 쌍욕을 준비했다.
“씨-”
“사실은!”
“…….”
“사실은, 제가 꽃등심 맛있는 집을 아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저번에 식사 사드리고 싶다고 제가 그랬었잖아요. 같이 꽃등심 먹으러 갈까요.”
말을 끝마친 원영이 생긋,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치 없는 재승이 듣기에도 그가 내뱉은 말은 얼핏 사탕 준다며 꼬시는 납치범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재승은 남자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꽃등심. 그 세 글자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재승의 머릿속을 훨훨 날아다녔다.
재승은 애써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기를 떠올렸다. 평소 먹는 한 근에 7천 500원짜리 고기가 아니라, 무려 한 근에 9천 원이나 하는 아주 맛있는 삼겹살. 하지만 어제 재승이 갔던 정육점의 꽃등심 가격은 한 근에 7만 원이었다.
재승이 가격을 알고 있는 이유는, 고기를 아주 유심히 보았고 가격을 물어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재승은 꽃등심이라는 놈의 맛이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이원영이 무려 그 꽃등심을 사준다고 말했다.
와……. 비싼 고기. 얼마나 맛있을까. 먹고 싶다.
생각만 해도 절로 침이 고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 분명하리라. 재승은 부티 나는 원영의 얼굴을 새삼 요리조리 뜯어 보았다.
그러나 재승은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고인 침을 꿀떡 삼킨 재승은 다시 표정을 정비했다. 재승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내가 너랑 왜 밥을 먹어. 네가 사주는 거 안 먹어.”
말하면서도 속이 쓰렸지만, 재승은 기어코 말을 끝마쳤다. 사기꾼이 사주는 밥을 맛있게 냠냠 먹으면, 잠시나마 입은 아주아주 즐거울 터였다. 하지만 관장님이 짜장면을 사줄 때마다 말씀하시길, 얻는 게 있는 날은 무언가를 잃거나 혹은 평소보다 더 큰 노동이 따르는 법이랬다.
물론, 재승 자신은 사기꾼이 아무리 돈을 뜯어 가려고 해도 뜯길 돈이 없었다. 다만, 관장님도 힘드시다는데 관장님한테까지 피해가 가지 않겠는가. 재승은 그래서 꽃등심을 포기했다. 배가 고파서 속이 쓰린지, 꽃등심을 못 먹어 속이 쓰린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사기를 당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왜 제가 사주는 건 안 먹는데요. 혹시 장석환 때문에 화나서 그러시는 거면, 걔 오늘부로 KFC 소속 아닙니다. 드셔도 돼요. 그리고 그 새끼가 화장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대신 사과도 드릴게요. 선배도 장석환 대, 아니, 머리 차셨으니까 조금이라도 화 풀리셨을 거 아닙니까.”
하지만 원영은 재승이 싫다고 하는데도 말이 많았다. 게다가 그 말의 내용이라는 게 재승의 마음을 어떤 의미로든 흔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황한 재승이 원영을 향해 새되게 물었다. 그랬더니 웃기게도 원영 또한 당황을 하는 기색이 되었다. 원영은 수상할 정도로 눈알을 흔들며 재승에게 대답했다.
“선배님 아까 카메라에 잡히셨어요.”
원영이 한 대답은 재승이 장석환의 머리를 발로 찼다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재승은 경기가 끝난 직후 심판 몰래 장석환의 머리를 걷어차 줬었다. 경기야 이기긴 했지만, 사과를 받은 것은 아니니까. 경기는 경기고 복수는 복수다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좆도 아닌 게! 멍청해져라!’
욕과 함께 저주를 내리며 괘씸한 놈을 살살 걷어찼더니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는 게 얼마나 상쾌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더 날뛰면서 소리를 질렀더랬다. 근데 그게 카메라에 잡혔었다니. 그렇다면 관장님은 모르는 척해주셨던 걸까?
아주 궁금하기는 하다만, 장석환의 머리를 걷어찬 것은 뚫린 공간에서 한 짓이었다. 그러니 걸릴 것 정도는 애초부터 각오하고 한 행동이라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랑 장석환 만난 거, 네가 어떻게 아는데?”
재승은 오랜만에 똑 부러지고 명확한 질문을 누군가에게 던졌다. 질문을 들은 누군가는 재승의 똑똑함에 놀랐다는 듯 눈을 키웠다. 그러다 이내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며 그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CCTV……. 봤는데요.”
수상하기는 하지만, 대답에는 거짓이 없는 듯했다. KFC의 대표가 KFC 타워의 CCTV를 돌려볼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원래 같았다면 재승도 ‘아, 그렇구나.’ 하고 충분히 넘어갈 만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재승은 배가 고팠고, 바쁜 사기꾼이 자신에게 어째서 꽃등심을 사주려고 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재승이 수상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걸 왜 봤는데?”
“…….”
원영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원영의 눈이 트럭 안쪽 어드메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렇게 원영이 대답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재승의 눈은 점점 더 사납게 일그러져만 갔다.
역시 사기를 치려고 그랬구나.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CCTV를 돌려보면서, 나한테 어떻게 사기를 칠지 고민을 한 거구나. 도대체 나한테서 뭘 건져가려고?
재승은 원영이 자신에게 칠 사기를 심도 깊게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뭐가 되었든 화가 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재승의 얼굴이 거의 도깨비를 연상케 할 만큼 흉흉해졌을 때였다. 원영이 재승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밥부터 먹고, 남은 얘기는 술이나 같이 마시면서 풀까요? 그다음에는 케이크도 좀 먹고…….”
“왜?”
“그야, 선배가 오늘 이기셨으니까-”
“너는 장석환 위로주 마셔야지 왜 나랑 승리를 즐기려 그래?”
“장석환 이제 KFC 소속 아니라니까요.”
원영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러나 재승은 차게 식은 눈으로 원영을 바라보며 제 나름대로의 일침을 가했다.
“의리 없는 새끼.”
정말 의리 없는 새끼였다. 장석환이 아무리 좆밥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졌다고 바로 버릴 수가 있는지. 역시 이런 새끼는 하루라도 빨리 망해야만 했다. 재승은 뻔지르르한 원영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으며, 저 비싼 정장이 어디서 나왔을지를 생각했다.
KFC 대표를 해서 산 게 아니라, 사기를 쳐서 샀을 거다. 남한테 사기 친 돈으로 나한테 고기를 사주고, 내가 그걸 먹으면 그 고깃값은 적어도 만 배가 되어 돌아오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시비를 걸어라, 이 사기꾼아!
재승이 그렇게 적의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원영이 느닷없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트럭 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근데 진짜 저랑 리벤지매치 하실 거예요?”
뜬금없는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그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었다. 그럼 진짜 하지, 가짜 하나. 그래서 애초부터 원영과 자신의 고기 파티가 성립되지 않는 일이 된 것인데 말이다.
일주일 내내 적의를 부풀려 키워도 모자랄 판에 이원영은 우정을 빙자해서 사기를 치려고 하는데. 만약 이원영이 사기꾼인 것을 몰랐다면 자신은 아마 홀라당 넘어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럼 경기 때 의리 상할까 봐 얼마나 불안해했겠느냐 이거다. 킥, 아니, 주먹이나 제대로 날릴 수 있겠어?
그런데,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영이 다시 질문을 해왔다.
“제가 거절하면요……?”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리벤지매치라는 것은 승자에게 진행의 권한이 있었다. 패자야 리벤지매치에서 승리를 하면 위신이 살겠지만, 승자가 리턴매치(승리한 입장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에서 져 버린다면 생각보다 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으니까. 때문에, 도전자가 도전 의사를 밝히면 승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종격투기에서는 리턴매치를 거절하는 순간 놀림거리(질 것 같아서 안 받았네)가 되기 십상이고, 리벤지매치라는 게 대부분 돈이 되는 경기이기 때문에 만약 선수가 싫다고 해도 소속사 등이 설득을 하며 거의 추진을 하는 편이었다.
KFC의 대표인 이원영은 안 한다고 하면 안 해도 될 것이고, 재승이 워낙 화려하게 졌던 탓에 놀림거리가 될 일도 없을 터였다.
원영은 곤란하다는 듯 턱밑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재승은 허무와 허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몸을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경기에서 뚝배기를 깨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뚝배기를 깨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장 정당방위를 노려봐야 하는 시점인 것인가.
재승은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을 바꿔가며 고민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원영이 턱밑을 긁던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거절한다는 소리는 아닌데요. 이미 받았어요. 진짜.”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해?”
“그냥……. 선배랑 싸우기 싫어서요.”
이미 받았다면서 그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재승이 인상을 구긴 채 원영을 훑어보자, 원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그럼 싸움은 그때하고. 지금은 승리 기념 축하주랑 꽃등심 먹으러 갈까요?”
그 말을 들은 재승은 생각했다. 사기꾼이어서 그런가.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 아주 탁월한 솜씨가 있는 듯 보인다고. 그러나 재승은 이번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재승이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운동선수가 무슨 술이야? 나 술 같은 거 안 마시는데!”
말을 끝마친 재승은 퍽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원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원영은 기가 죽는다든가, 화를 낸다든가 하는 등의 재승이 바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승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원영의 시선이 재승이 들고 있는 박카* 병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다시 얼굴로 올라온 원영의 눈은 ‘담배 피우는 거 다 봤는데, 무슨 소리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리어 당황한 재승은 원영에게 소리쳤다.
“어, 어쩌라고! 넌 간병화로 일찍 죽을 거야!”
재승이 문 앞에 서 있는 원영의 몸을 손으로 밀쳐냈다. 불시에 당한 기습공격은 커다란 덩치의 원영을 휘청하게 만들었다. 재승은 그 틈을 타 쾅! 용달트럭의 문을 닫아버렸다. 안전벨트도 메지 않은 재승이 차를 출발시켜 버렸다.
그렇게 재승이 떠나간 주차장에는 덩치 커다란 남자 하나가 덜렁 남았다.
“간경화요……. 그것도 틀린 말이지만…….”
남자는 혼잣말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도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뒤늦게 안전벨트를 맨 재승은 차가 잠시 신호에 걸린 틈을 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사기꾼의 마수를 피해 일단 자리를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도망을 친 느낌이라 기분이 영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참으로 희한한 것은, 평소보다 외롭지 않다고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게 원영 덕분인지, 유독 좋았던 샤워장의 시설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승리 기념 축하주랑 꽃등심 먹으러 갈까요?’
원영이 했던 쓸데없이 다정했던 말을 되새김질하며 재승은 힐끗, 담배꽁초가 든 유리병을 바라봤다. 사실 그는 일반 흡연자들처럼 제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전혀 피우지도 않으면서, 굳이 큰 경기가 끝났을 때마다 한 번씩 입에 담배를 물곤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유추되다시피 당연히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재승이 처음 큰 경기에 서고,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옥타곤에서 내려온 재승은 많이 들떠 있었다. 경기를 이긴 것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것도 모두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체육관 사람들과 관장이 축하 파티를 열어준다거나, 혹은 소소한 뒤풀이라도 해줄 것이라고 기대를 했더랬다.
하지만 역시 유추되다시피 관장은 재승을 버려둔 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홀로 남은 재승은 오늘처럼 샤워실에서 목욕을 했고, 그 뒤엔 용달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했다.
재승은 관장을 이해했다. 관장에게는 가족이 있고, 경기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으니까. 그러나 너무 아쉽고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도중 마트에 들렀다. 재승이 마트에서 산 물건은 막걸리 두 병과 삼겹살이었다.
재승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스버너를 꺼내 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맛있게 익은 다음엔 대접을 가져와 막걸리를 따랐다. 그리고 쭉- 들이켜려는데…….
문득 자신이 너무 초라한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이 났다.
만약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운동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진짜 만약 살아계셨더라면, 오늘 같은 날 나를 축하해주셨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걸리 사발을 보고 있자니,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생전 할아버지께서는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었다.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다.’
할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재승이 아주 어릴 때부터 한 잔씩 막걸리를 나눠 주시고는 하셨다. 재승은 할아버지와 마시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결국 재승은 막걸리를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굳이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 이번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사 왔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혼자 담배를 피우는 것이 덜 처량 맞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꽤 맞는 생각이어서, 재승은 여태까지도 꾸준히. 경기가 끝나면 담배를 물었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유독 더 외롭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역시 이원영 덕분이 맞을 것이다. 놈에게는 왜 나랑 승리를 즐기려 하느냐며 면박을 주었지만, 놈이 하는 말들이 죄다 달콤하게 느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재승은 답지 않게도 이미 지난 일에 미련을 가졌다.
만약 이원영이 사기꾼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꽃등심이라는 놈도 먹어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술도 마셨을 텐데. 그리고 이원영과는 친구가 되었을지 몰랐다. 그런데 놈은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친구가 많을 거고, 외롭지도 않겠지.
생각하던 재승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외롭지 않을 그놈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탓에.
그렇게 우울한 생각을 잔뜩 하며 집에 도착한 재승은 적막함을 지우기 위해 텔레비전의 소리를 잔뜩 키워서 틀어놓았다. 그 뒤엔 버너를 꺼내 고기를 굽고,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옮겨붙은 사람처럼 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근당 9천 원짜리 삼겹살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덕분에 고기를 거의 다 비워갈 즈음에는 나빴던 기분도 아주 많이 풀린 상태가 되었다.
[전화 해봐, 전화!]
재승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유명한 예능의 재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연예인들은 방송국으로 친구를 불러들이는 미션을 받았다. 서로 유명한 지인을 부른다며 계속해서 전화 통화를 돌려대는데 나오는 패널마다 얼마나 친구가 많은지. 보는 재승은 그저 신기하고 부럽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원영이 언젠가 자신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말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재승은 밖으로 뛰쳐나가 잊고 있던 핸드폰을 트럭에서 꺼내왔다. 저번 날에는 그냥 넘어갔었는데 지금은 문자가 조금 궁금한 것도 같아서. 딱 확인만 해보고 답장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고 문자 어플을 열자 확인하지 않은 스팸 문자들이 화면에 쭉 늘어섰다. 재승은 눈으로 대충 읽으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저 밑에 가라앉은 원영의 문자가 보였다.
이원영입니다……
재승이 원영의 문자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름부터 읊어주는 그의 친절함 덕분이었다. 역시 똑똑한 놈은 문자 보내는 것도 다른가 보다. 재승이 문자를 터치했다.
20XX년 X월 X일
이원영입니다. 주말에 시간 어떠십니까. 오전 11:14
뭐 대단한 문자라도 보냈나 싶었지만, 문자는 참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문자를 보냈었다고 말을 한 다음에는 이상형을 물어봤었던가. 그럼 주말에 시간 있냐고 물어본 건 진짜 소개팅 주선이라도 해주려고 했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외롭다. 친구도 없지만 애인도 없다. 만약 애인이 생긴다면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따위는 하나도 안 날 것 같았다. 물론, 과거에는 진짜로 그랬었다. 그래서 재승은 지금이라도 답장을 해볼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일랑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기꾼이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소리는 놀부가 흥부한테 쌀가마니 준다는 소리만큼 허무맹랑한 소리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관장님도 말하지 않았나. 이원영이가 너한테 여자 사기꾼이라도 소개를 해주려는 모양이라고. 사기꾼이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소리는 재승 또한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외로워서 사기꾼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인 거다. 아주 잠깐.
아쉬운 마음에 문자를 한 번 더 읽은 재승이 화면을 닫기 위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가? 생각하던 재승이 이내 눈을 크게 키웠다. 발신자는 한동안 전화 올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던 재승의 큰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가까웠다. 재승은 혹여 전화가 끊어지기라도 할까 봐 허둥지둥거리며 전화를 얼굴에 붙였다. 그러자 볼에서 진동이 느껴지고 벨소리가 울렸다. 뒤늦게 통화키도 누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재승이 볼에 붙였던 핸드폰을 다시 떼어냈다. 그렇게 꼬물락거리며 통화 키를 누르자, 외로운 차에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 받았네. 덕수야, 큰아빠다! 잘 지냈지?
큰아버지는 전화를 걸면 으레 해오던 틀에 박힌 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그런 인사조차도 재승에게는 기껍기 그지없었다. 재승이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핸드폰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네, 잘 지냈어요. 큰아버지도 잘 지내셨죠?”
똑같이 틀에 박힌 인사였으나 재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 조금 더 살가웠다. 큰아버지도 그걸 느끼기는 한 모양인지 껄껄 호탕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잘 지냈지. 못 지낼 건 또 뭐냐.
“아…… 덕영이랑 수진이는요?”
-어어, 안 그래도 애들이 너 텔레비전 나왔다고 그래서 전화했지.
그 말에 기대도 않고 있던 재승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생들이 자신의 멋있는 모습을 봐 주었다니. 조금은 덜 외로워지는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와중에도 큰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경기에서 이겼다면서? 덕수 네가 운동을 잘하기는 하나 보더만, 아주 멋있게 이겼다던데! 텔레비전도 나오고 완전 연예인 같으네! 응? 덕수 너 멋있다, 야.
큰아버지는 어쩐 일로 재승이 듣기 좋을 말을 길게도 하셨다. 그러니 재승의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승은 ‘별로, 아니에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목소리에서조차 우쭐함을 감추지 못했다. 기색을 눈치챈 큰아버지가 핸드폰 너머에서 껄껄 웃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대단하고만.
“진짜, 별거 아닌데……. 덕영이랑 수진이는 옆에 있어요?”
재승이 민망함에 말을 돌렸다. 아니, 사실 딱히 민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큰아버지한테 칭찬을 듣는 것도 좋지만, 동생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경기를 본 것도 큰아버지가 아니라 동생들이니까. 동생들이 전화를 받으면 그 김에 조금 으스대기도 하고 말이다.
-아……. 잠깐 나갔어.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논다고. 애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밤 아니면 놀 시간도 없잖냐.
하지만 오늘도 동생들과 전화 통화를 하기는 그른 듯 싶었다. 재승이 아쉬움에 탄식했다. 오늘 경기를 보려고 시간을 내준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전에도 시간 날 때 전화 한 통이나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때, 잠시 조용했던 큰아버지가 재승을 불렀다.
-그보다 덕수야.
“……예.”
재승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아버지가 큼큼, 눈치를 보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큰아버지의 눈치 보는 척은 얼마 가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이내 안부 따위를 묻는 것보다 전화의 본론에 가깝게 들리는 이야기를 해왔다.
-경기에서 이겼으면, 여윳돈 좀 생겼겠다. 그치?
전화의 목적은 역시나 돈이었던 듯 싶었다.
*
한편 원영은 재승보다 늦게 출발하였으나 그보다 일찍 집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역시나, 천재승 갤러리를 염탐하는 중이었다.
경기 직후라 그런지 새로운 글이 올라오는 속도가 평소에 비교해 무척이나 빠른 편이었다. 스크롤을 내려 새로고침이 될 때마다 새로운 글들이 마구마구 생성됐다. 하지만 원영은 시큰둥하게 인터넷 화면을 그저 스크롤하기만 할 뿐이었다. 소파에 누운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권태로워 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올라온 글을 하나라도 더 읽어보겠다며 속도를 내었을 원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승과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냥 대놓고 우리 회사에 들어올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걸. 그럼 똑같이 기회를 날리더라도 조금은 덜 억울했을 것 같았다.
재승을 회유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원영도 당연히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원영이 생각해낸 회심의 일격이 바로 꽃등심이었다. 일전에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듯 보였었으니까. 근데 그 꽃등심이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터라 원영은 무척이나 마음이 썼다.
밍숭맹숭한 닭가슴살 셰이크로 저녁을 때우고 소파에 누워 인터넷이나 보는 신세라니.
원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가 처량 맞아진 것에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죄가 있었다. 다만, 조금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히…… 분명히 나를 이상형으로 꼽았잖아!
경기를 일으키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원영이 기다란 다리를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이상형이! 눈앞에서! 꽃등심을 사준다는데! 어째서 그렇게 칼같이 거절을 하고 도망을 칠 수가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리벤지매치도 그랬다. 도대체 자신과 왜 싸우고 싶어 하는 건지. 이상형이라며?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원영은 재승을 만나지 못한 보름하고도 하루 동안 재승을 어떻게 KFC 선수로 만들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솔직히, 아주 조금은. 게이인 천재승이 만약 자신에게 고백을 해온다면 그냥 받아줘야겠다는. ……그래, 그런 생각도 했었더랬다.
물론 자신은 게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연애는 게…… 상대방과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만 따져보면 되는 것 아니던가. 원영은 천재승과 키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로, 그와 연애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면 일도 같이 하고, 연애도 하고, 그 김에 재승에게 현실을 가르치면 좋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보호해주면 그만이고…….
어느새 발버둥을 멈춘 원영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천재승이 사내연애를 혐오한다든가, 그래서 일적으로 다가오는 자신에게 선을 긋는다든가…….
원영은 재승을 생각하기만 하면 늘 그랬듯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부웅- 하고 진동했다.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려던 원영은 괜히 제 발이 저린 듯 화들짝 놀라며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그러면서도 보나 마나 일 때문에 비서에게 온 연락이겠거니, 하고 문자에 대한 기대는 일절 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웬걸? 발신자는 무려 천재승이었다.
화면에 뜬 이름부터 확인한 원영이 신줏단지 모시듯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원영은 심호흡까지 해가며 마음을 추스르고, 그래도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느끼며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 천재승
20XX년 X월 X일 11:14 AM
이원영입니다. 주말에 시간 어떠십니까.
20XX년 X월 X일 08:45 PM
ㅗㅗㅗㄴㄱㅌ
눈으로 보고도 믿겨 지지 않았으나, 문자의 내용은 보이는 그대로였다. 모음 세 개와 자음 세 개. 때문에 문자를 바라보는 원영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게 뭐지? 왜 이런 문자를 보냈지? ……욕? 욕인가? 아니, 아닌 것도 같고…….
원영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문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ㅗ’ 세 개는 중지를 올리는 욕이라고 쳐도, 나머지 자음 세 개의 뜻이 모호했다. 굳이 욕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원영은 문자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망상만 하는 것보다야 그나마 생산성 있는 활동인 것 같았으나, 그래봤자 망상이라는 결은 같았다. 원영은 거의 한 시간을 내리 고민에 빠졌고, 그렇게 내린 문자의 해석은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 ‘ㅗㅗㅗ’는 중지를 올리는 욕이 맞다. 영어로는 Fuck You. 뜻은…… 널 강간하겠어.
그래서 ‘ㄴㄱㅌ’는 위의 욕과 조합했을 때 ‘내가 탑’이라는 뜻이라는 것이 가장 유력할 듯 보였다.
그러니까 그 말은, 천재승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원영은 그 결론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래야 재승이 자신과 싸우고 싶어 하는 이유도 대충 짐작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저 가설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재승이 자신과 리벤지매치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깔고 싶은 상대를 힘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일전에는 내가 졌으니 다시 한번 너한테 덤벼보겠다.’ 정도로 함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같은 수컷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랄까?
결론을 내린 원영은 그저 픽 하고 웃었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재승이 안기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는데, 그런 생각을 오늘 처음 해보고 나니 문득 우스워졌던 것이다.
하긴 천재승이 게이라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가 누구한테 안기고 싶어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닫는 자신도 참, 눈치가 없었지 싶었고 말이다. 물론, 재승이 박히는 걸 더 좋아했다면 그 반전미에 더욱더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아쉽긴 해도 이것 또한 나쁘지는 않았다.
이기면 되고, 수긍시키면 되겠지.
원영은 오래간만에 승부욕이 아주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원영은 이내 재승에게 보낼 답장을 작성했다.
< 천재승
20XX년 X월 X일 11:14 AM
이원영입니다. 주말에 시간 어떠십니까.
20XX년 X월 X일 08:45 PM
ㅗㅗㅗㄴㄱㅌ
20XX년 X월 X일 09:46 PM
잘 알겠습니다.
띄어쓰기와 마침표까지 완벽한 문자였다. 원영은 곧장 전송 버튼을 눌렀고, 그의 손은 떨림 하나 없이 단호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처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경기까지 D-day 7. 그렇게 원영의 밤은 깊어만 갔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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