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tupid Feel
며칠 사이에 날씨가 후덥지근해졌다. 핸드폰으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 원영은 이른 비 소식에 밖으로 나가서 하는 조깅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원영은 믹서기에 곱게 갈린 닭가슴살 셰이크와 태블릿을 들고 거실 창가에 놓여 있는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차창 밖으로 서울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원영은 푸르스름하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태블릿을 거치대에 고정하고 러닝머신을 작동시켰다.
-야! 너 왜 웃어?
-아니…… 신기가 있으신가, 해서.
-……씨발, 뭐든!
원영이 러닝머신을 달리는 동안, 태블릿에서는 원영과 재승의 타이틀매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왔다. 팬들이 재편집한 영상은 예능방송처럼 알록달록한 자막들이 나와서 그때의 상황을 더 재미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원영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재승의 머리 위로 ‘옥타곤에서 작두 탈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그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솟아났다. 원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몇 번째 같은 영상을 보고 있는 원영이었지만, 자막을 단 사람이 매번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볼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재승이 두 번째 스파링을 한 날도 오늘로부터 벌써 6일 전의 일이 되었다. 그날 중졸이 맞느냐는 질문을 하고 난 뒤로 원영은 재승과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다. 고로, 내일이면 다시 재승과 만날 수도 있고 그와 대화도 나눌 예정이었다.
원영은 재승과 다시 만나길 고대했다. 만나봤자 딱히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꼭 첫사랑에 빠진 사람이나 아이돌에게 푹 빠진 사람의 모양새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원영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물론 며칠 전에는 왜 이렇게 천재승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한지, 왜 그가 보고 싶은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몇 번이나 봤다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게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기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봤더니, 그저 재승을 자신의 회사에 데려오고 싶어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재승에게는 쓰레기 같은 관장이 있다. 하지만 재승은 관장을 좋아하고, 원영은 그런 재승의 환상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재승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를 자신의 회사에 데려올 수는 없을 터였다. 때문에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고……. 무의식중에 재승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이 분명했다.
원영은 그렇게 생각한 뒤부터 자신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재승의 기사나 영상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하고 만 것이다. 누가 봐도 천재승이 단 것 같은 댓글을.
그러니까 원영이 처음 발견한 댓글이 달려 있던 영상은 재승이 심판을 향해 ‘I`m hate! You! 너 싫다고, 씨발!’이라고 소리쳤던 그의 4패 영상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재승의 것으로 보이는 댓글은 이미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가장 상위에 표시되는 베스트 댓글이 된 상태였다.
†동영상 업로더님이 고정함
ㅊㅈㅅ 5개월 전
한국 사람이 한국말만 잘하면돼지 왜들 그러케 지랄인지?? 그리고 나는 천재승이 왜 젓는지 이해 안됀다. 피따완보다 천재승이 더 낳지 앉았나? 피따완은 피떡됬는대 천재승은 만이 안 맛았음. 심판이 폄파판정 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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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천재승선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ㅋㅋㅋㅋㅋㅋ
⌞우리 덕수 한국말 잘하는 거 맞지? 국어도 다시 배우고 와야 될 것 같은데ㅋㅋㅋㅋ
⌞어휴 빠가야 넌 그냥 댓글을 달지마,, 매번 걸리면서 지치지도 않고 달더라 철면피 ㅇㅈ
⌞맞춤법 일부러 저렇게 틀리라 그래도 틀리기 어려울 듯
⌞진짜 천재승이에요?
댓글의 좋아요와 대댓글 수는 무려 2만 개가 넘어갔다. 재승이 무식한 것은 사실이고, 자신도 마음속으로 재미있어하기야 했다만…… 남들이 욕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원영은 재승의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아래에 달린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좋아요와 싫어요를 열심히 누르기 시작했다.
원영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짓을 반복했다. 그리곤 그게 의무가 되기라도 한 듯 일을 하다가도 잠시 여유가 생기면 그 짓을 하러 유튜브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또 발견하고 만 것이다.
이번에 원영이 발견한 것은 무려 재승의 팬 페이지로 넘어가는 링크였다.
원영은 홀린 듯 링크를 눌렀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해 온갖 영상과 글들을 섭렵해가기 시작했다. 천재승 갤러리에는 재미있는 글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게 원영이 지금 운동을 하면서까지 천재승의 영상을 보고 있는 이유였다.
30분 동안 러닝머신을 달린 원영이 러닝머신의 전원 버튼을 누른 후 기계 위를 벗어났다. 원영은 운동을 하며 조금씩 마시고 있던 셰이크를 한 번에 비운 뒤, 태블릿의 화면을 껐다. 컵을 싱크대 안으로 대충 던져 넣은 원영이 욕실로 들어갔다. 슬슬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원영은 곧장 차를 타고 자신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점심 전까지 체육관에서 트레이닝을 하고,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는 소속 선수와의 미팅을 위해 KFC 타워로 차를 타고 달려갔다. 선수와 미팅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건물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올라가서 결재서류를 검토해야 했다.
우선은 오늘 만난 선수를 포함해 세 명의 선수에게 들어가는 협찬을 정리해야 하고, 곧 경기 시즌이 시작되기에 관련 서류도 한 더미다. 그렇게 사무실에 틀어박혀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됐다. 원영은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멀리 가는 것도 귀찮아 회사 내부의 뷔페식당으로 들어간 원영은 닭가슴살과 삶은 달걀을 접시 한가득 담아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재승은 내부식당의 음식이 맛있다고 했었지만, 글쎄. 워낙 조미료를 강하게 쓰는 터라, 식당을 처음 만들었을 때나 몇 번 요리를 먹었고 그 이후에는 늘 회사에 가끔 들르는 선수들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닭가슴살과 삶은 달걀만 축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천재승은 돈도 그따위로 받는데,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사는 형편인 걸까. 그렇다면 내일은 맛있는 식당에 데려가 요리라도 사주면서, 저번 만남에서 말 한번 잘못했다가 한없이 내려간 점수를 조금이라도 복구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생각을 하던 원영이 젓가락 끝으로 닭가슴살 한 덩이를 꾹 찔렀다. 삶아서 물기가 있는 닭가슴살은 원영이 쇠젓가락으로 찌르자 결이 갈라지며 젓가락을 탄력 있게 감쌌다.
원영은 젓가락에 꽂힌 닭가슴살을 물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어쩐지 조급한 움직임으로 인터넷 페이지를 눌렀다. ‘천재승 갤러리’의 과거 글들도 아직 다 섭렵하지 못했는데, 바빴던 사이 오늘 하루분의 정보가 더 쌓였을 터였다. 안 봤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갤러리의 첫 페이지가 원영이 처음 보는 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원영은 새로운 글들의 제목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제목만 보고 이전 글들을 먼저 읽을 생각이었지만, 흥미가 생기는 제목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웠다.
결국 원영이 가장 눈에 띄던 제목을 터치했다.
천재승 갤러리
최근 방문 갤러리◁ 천재승
오늘 등산 갔다가 미스터 헤이트 실물 영접함. 썰푼다.
ㅇㅇ(111.22) | 20xx.05.0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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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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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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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등산 관심은커녕 혐오하는 21살 인간임. 근데 오늘 엄마랑 할머니가 비 그치니까 등산 갈 건데 같이 가자고 계속 그러는 거. 당연히 싫다 그랬는데 자식새끼 다 키워놔도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고 계속 뭐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음.
엄마랑 할머니는 등산 하도 다녀서 평지 걷듯이 산 타심. 근데 난 캠퍼스 걷는 것도 힘든 멸치라,.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핸드폰 하면서 걷다가 엄마랑 할머니 놓치는 바람에 나 딴에는 제일 빠른 속도로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거든? 근데 아무리 산이라도 경사가 진짜 말도 안 되는 구간이 나온 거야. 길도 더럽게 좁았음 ㅇㅇ
그래서 존나 헉헉대면서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뒤에서 누가 지나갑시다, 이러는 거.
힘들어서 짜증나있는데 비키라 그러니까 빡치잖아. 그래서 인상 팍 찡그리면서 뒤로 돌았지.
근데 와,, 나 그렇게 잘생긴 사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임.
우리 재승이 형 무식한 거로는 까여도 생긴 거로는 까는 사람이 없더니 그 이유 존나 잘 알겠더라.
실환가 싶기도 하고 그냥 놀라서 피해줬는데, 내가 인상 찡그려서 빡쳤는지 미간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 까딱함. 그것도 잘생김ㅇㅇ
그리고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뒷모습 보고 존나 터졌음ㅋㅋㅋ 하얀 난닝구에 무슨 할배 팬티 같은 체크 무늬 반바지ㅋㅋㅋ 심지어 한쪽 손에 약수통 2개씩 양손에 총 4개 들고 있더라ㅋㅋㅋㅋ
문제는 웃기긴 한데 몸이 좋아서 그런지 개까리함. 내가 백날 운동해봤자 그 몸은 안 되겠지만 보니까 운동하고 싶어지더라.
아무튼, 가고 나서 뒤늦게 사진 못 찍은 게 아쉬운 거.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산 탔지. 토할 것 같은 거 참아가면서 정상까지 올라갔더니 천재승은 약수통에 물 받고 있더라. 근데 우리 할머니가 총각 총각 하면서 계속 말 걸고 있는 거 ㅋㅋㅋㅋ
천재승 인성 탑 쓰리 안에 든다고 이종격투기 게시판에서 존나 까이는데, 유교정신만큼은 철철 흘러넘침. 한쿡사람 맞다. 진심 존나 굳은 얼굴로도 우리 할머니가 말 거는 거에 꼬박꼬박 대답 다 하더라ㅋㅋㅋㅋ
아무튼, 약수통 4개에 물 다 받고 안절부절하는 거 계속 훔쳐보고 있다가 내가 팬이라고 사진 같이 찍어주면 안 되냐고 할머니 말 끊었거든. 할머니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 천재승은 빵끗 웃더라. 그다음엔 우쭐한 표정으로 사진 같이 찍어주더니 꽉 찬 약수통 네 개 들고 순식간에 산 내려갔음. 닌잔 줄.
주작이라고 할까봐 사진 올린다. 얼굴 비교돼서 내 얼굴은 가렸다.
*한 줄 요약
팔자에 없는 산 타러 갔다가 천재승 만났는데 개 잘생겼고 생각보다 착한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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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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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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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은 길기도 긴 글을 끝까지 완독했다. 그 뒤 원영이 남긴 감상은 ‘부럽다’ 였다. 원영은 글쓴이가 올린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까만 펜으로 가린 사람의 옆에 재승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승의 표정은 글쓴이의 말대로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빵끗 웃었다고 표현했을 때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실물을 처음 본 사람도 그런 표정을 봤다는데. 자신은 그 누군가보다 재승을 훨씬 더 많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억울했다.
원영은 괜히 아쉬운 얼굴을 한 채 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자신의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했다. 그 뒤엔 언제 아쉬워했냐는 표정으로 새로운 닭가슴살을 젓가락에 찍어 올렸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닭가슴살을 입에 문 원영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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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일기장이냐? 말 존나 많네. 읽다가 빡쳐서 내림
욕하거나 찬양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ㅂㅅ아ㅋㅋㅋㅋㅋ 돌려까고 있어 ㅋㅋㅋㅋ
천재승 게이라는 말 많잖아. 니가 취향이었나 보네ㅋ
게시글에 달려 있던 댓글의 개수는 총 3개였다. 읽었던 글의 길이에 비하여 턱없이 적고 짧았지만, 원영은 그 댓글 중 하나에 빠져 곰곰이 그 댓글을 곱씹었다.
천재승 게이라는 말 많잖아. 취향이었나 보네.
자신의 비서가 알아 왔던 재승의 정보는 사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영역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사적인 내용의 루머가 도대체 어디서 퍼진 것일까. 재승의 영상을 그렇게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댓글에서는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원영은 사이트 내부의 검색창에 검색을 하기에 이르렀다. 검색의 내용이 ‘천재승 게이’였다는 사실은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도로를 달리던 재승의 파란 용달트럭이 KFC 타워의 주차장을 향해 머리를 틀었다. 용달트럭은 곧 주차장의 차단기 앞에 멈춰 섰다. 차를 인식한 차단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가만히 차단기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재승이 곧 있으면 건물에 가려지고 말 하늘을 힐끗하고 올려다봤다.
어제는 아침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더니 오늘은 이른 새벽부터 어찌나 화창한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오히려 세상이 멸망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날 산을 타야 하는 건데.
잠시 생각하던 재승은 이내 히죽 웃으며 차단기를 지나갔다. 문득 어제 산정상에서 봤던 안개 낀 풍경이 떠올랐는데 그것도 좋았던 것 같아서. 게다가 어제 나간 덕분에 흔치 않게 자신의 팬도 만나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면 유명해지는 것도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돈도 많이 벌 거고, 운동만 할 수 있고. KFC의 체육관만큼은 못 하더라도 관장님네 체육관 정도의 체육관을 직접 열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에 신기한 운동기구들을 잔뜩 들여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것만큼이라도 KFC의 체육관처럼.
재승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바보천치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다 주차를 마치고 나서는 도리어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재승의 기분이 순식간에 상한 이유는 모두 주차장 안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들 때문이었다. KFC 타워의 주차장은 오늘도 값비싼 차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 차들 중에 가장 저렴한 차 하나를 골라도 지금 재승이 사는 집보다 훨씬 비싼 값일 것이다. 하지만 재승은 차들이 멋있다는 생각은 하더라도 그 차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저런 차는 원래부터 돈 많던 사람들이나 타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느닷없이 기분이 확 상해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그런 차들을 살 수 있는 돈은 영원히 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러면 방금 했던 즐거운 상상은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싶어서. 그게 조금 슬펐다.
그래. 이종격투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 멍청한 거 빤히 다 아는데 누가 나한테 배우러 오겠냐. 관장님도 그렇게 말했었고.
괜찮아지겠다고 한 생각에 도리어 기분만 더 상한다. 재승은 침울해진 표정으로 마침 찾은 주차 자리에 차를 밀어 넣었다. 좌 스포츠카, 우 세단. 하필이면 주차 자리마저 재승의 기를 죽이기 딱 좋은 자리였다.
재승은 차창을 통해 보이는 차들을 보며 기죽어하면서도, 괜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입술을 삐죽였다.
돈 주는 이원영은 회사 대표라서 월급으로 천만 원을 넘게 번다던데. 그럼 이 회사에 다른 직원은 다 사장밖에 없나 보지. 그러다가 확 다 망해버려라.
근데, 아무리 속으로 구시렁거려봤자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재승이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조수석에 놓여 있던 배낭을 챙겨 들었다.
늙은 차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차가 끼이익 거리며 소음을 만들었다. 꼭 ‘나 좀 그만 놔주지?’ 하며 차조차 저에게 따지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만 그럴 것이다. 재승은 훔쳐 갈 것도 없는 차의 문단속을 한 뒤 한쪽 어깨에 배낭을 메며 빠르게 주차장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배가 고파서 기분이 나쁜 거지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면 언제 더러웠냐는 듯 기분은 풀릴 테다. 게다가 즐거울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이면 지기만 해야 하는 싸움도 끝이 나고, 통장에는 기분 좋은 흔적만 남을 텐데.
물론 지금까지의 재승이라면 자신이 번 돈이 아까워서 차마 쓰지도, 그렇다고 빚을 갚는 똑똑한 행동을 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차라리 빚부터 갚는 게 큰아버지에게 삥을 뜯기지 않는 방법일 테지만, 원래 모르는 놈은 손해를 보는 것이다. 재승의 작은 머리는 늘 그렇듯 먼일은 절대 생각하지 않았고, 당장의 끼니만을 떠올렸다.
재승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식당이 있는 지하 1층에 도착했다. 체육관은 지하 2층에 있고, 식당은 지하 1층에 있었다. 관장이 재승에게 가르쳐 준 곳은 그렇게 딱 두 군데뿐이었다. 덕분에 길을 찾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 다행이었다. 재승은 헤매지 않고 식당 입구의 자동화기기 앞에 멈춰 섰다.
자동화기기의 화면에는 ‘1인’, ‘이만오천 원’이라는 글씨가 떠 있었다. 재승이 평소 먹는 음식에 비하면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두 번째 스파링을 했던 날은 가격 때문에 고민하다가 결국은 먹고 싶어 돈을 뽑으러 은행을 다녀왔었다. 그리고 이미 맛을 본 오늘은 미리 돈을 뽑아왔다. 재승은 신중한 표정으로 1인 버튼을 누른 뒤, 지폐 투입구에 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문득 맛있는 식당을 많이 안다는 둥, 식권이 필요하면 저를 찾아오라는 둥, 친절한 척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던 원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게다가 뭔가 이상해서 무시했었는데. 그래도 미트를 봐주고 그러면서 좋다고 잘한다고 칭찬도 해주길래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랬다.
그러다가 중졸이냐고 무시당했다. 물론 무식하다고 무시를 당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원영에게는 이전에도 무시를 당한 적이 한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입이 썼고, 다른 사람보다 원영이 훨씬 더 미웠다. 무시할 거면 좋은 것을 해주지도, 칭찬해주지도 말지. 그냥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밥 사준다고, 식권 준다 그럴 때 좋아했으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밥 사 먹을 돈도 없냐면서 비웃음이나 당할 뻔했다. 눈치 안 보고, 비웃음 안 당하고. 내 돈 주고 실컷 먹어야지.
직원에게 식권을 내민 재승이 깨끗한 접시를 호기롭게 집어 들었다.
갈비, 밥.
재승은 커다란 접시 위를 그 두 가지 음식만으로 가득 채웠다. 경건하게 자리에 앉은 재승이 접시 위의 갈비를 손으로 집었다. 입에 들어온 갈빗살은 짭조름하게 간이 잘 되어 있고 부드러웠다.
재승은 단 두 입 만에 깨끗하게 고기를 발라 먹고는 쌀밥을 듬뿍 퍼 입안에 넣었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단순무식해도 좋은 점이 하나 정도는 있는 모양이다. 재승은 고작 갈비와 밥 한 수저 덕분에 언제 우울했냐는 듯 행복해진 상태였다.
“우와, 천재승 선수다!”
“어, 진짜.”
“안녕하세요!”
느닷없는 호명과 인사 소리에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재승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승을 부른 것은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들이었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거리감이 꽤 있는 곳. 멀리 식당 입구 쪽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무리가 보였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 셋은 멀리서 봐도 키가 크고 늘씬한 미녀들이었다. 빨간색 짧은 반바지를 맞춰 입은 그녀들은 막 고개를 든 재승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본 적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재승은 그 사람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대신 그녀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커다란 인영만큼은 재승이 아는 사람이 맞았다.
재승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원영과 여자들을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곧 재승은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들이 너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가까워지다간 자신에게 또 말을 걸거나, 혹은 자신의 옆에 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재승은 원영이 제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것도 싫었다. 아직 오늘 분의 스파링이 남아 있어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할 텐데 또 무시를 당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장서 걷고 있는 여자들이 다가오는 것은 원영이 싫은 것과는 다른 의미로 싫었다. 남들은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혹여나 자신이 저 세 명 중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재승은 늘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가 있으면 잔뜩 긴장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재승의 테이블에 앉는 것은 재승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재승의 맞은편에는 여자 세 명이 조르르 앉았고, 재승의 왼편에는 원영이 자리 잡았다. 앞, 옆으로 달갑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여자 셋은 퍽 초롱초롱해 보이는 눈으로 재승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없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천재승 선수,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반가워요!”
……왜 반가울까요.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제 팬이신가요.
“이번에 KFC에서 스폰 받으시나 봐요. 실물 진짜 잘생기셨다.”
고마워요. 근데 스폰? 그게 뭐죠. 아닌데요.
“이번 시즌 어느 경기 나가세요? 저희는 무차별급 서거든요. 아, 예전에 선수님 **미들급 방어전 하실 때 제가 한 번 섰었어요. 기억 안 나시죠?”
기억 안 납니다. 그리고 어디 나갈지는 나도 몰라요.
재승은 그녀들의 말에 속으로만 열심히 대답했다. 원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모르는 사람만 말을 거니) 불편함은 배가 됐지만, 적어도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몸도, 표정도 계속 굳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재승은 생각한 대로 대답을 하기는커녕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악수해요. 저는 전지영이고 KFC 소속으로 옥타곤걸 활동 중이에요.”
그런 재승을 향해 맞은편 가운데에 앉아 있던 여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한 여자는 재승을 보며 방긋 웃었다. 재승은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손‘만’ 바라봤다.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해서 재승은 차마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악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이 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갈비 때문에 손까지 엉망이지 않은가.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승이 고개를 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을 뻗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안함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여자는 결국 뻗고 있던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
“……고기! 손에 고기…… 때문에 좀 그러셨나 보다. 하하.”
“우, 우리 식사부터 받아 올까요? 아, 배고프다.”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두 명의 여자가 싸늘한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 뒤 맞은편의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앉은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님 식사하셔야죠?”
“예.”
“나눌 얘기 있으시면 천천히 오세요. 저희는 먼저 받으러 가볼게요.”
여자의 말에 원영이 고개를 작게 까닥거렸다. 늘 눈치 없는 재승이었지만 긴장하고 있었기에 옆자리의 기척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 여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그제야 재승은 다행이라는 듯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돼서 숨도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는데. 싫은 놈과 단둘이 남았지만, 차라리 숨통은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기는 했다. 뒤늦게 악수는 갈비를 집지 않은 손으로 했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탓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재승은 다시 제 앞의 접시를 바라봤다. 접시에는 아직도 먹지 못한 갈비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재승은 아무렇지 않은 척 쌓여 있던 갈비 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입에 넣어 쪽 빨아들이자 순식간에 뼈와 살이 분리됐다. 살코기는 짭조름한 게 아직도 맛났다. 이제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을 테니 맛나게 갈비나 쪽쪽 빨아먹으면 되겠지. 재승의 입이 우물우물, 바쁘게도 움직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지만, 아까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만, 재승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여자를 어렵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승도 한때는 마음대로 좋아도 해봤고, 그러다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아 연애라는 것을 해본 적도 있었다.
다만, 같은 성인끼리 만났음에도 재승은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순수했다. 아니, 굳이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재승은 그녀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멍청했다. 재승의 그녀들은 연애의 초반 한없이 지고지순한 그에게 설레했다. 다만 연애 몇 달 후, 이 남자와 미래를 함께하기에는 내가 너무 골 아프겠구나, 하는 현실을 무조건 깨닫고야 말았다.
만약 멍청함이 끝이었다면 그녀들 중 하나쯤은 재승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재승의 무지와 순수함을 끝까지 보듬어준 그녀도 존재했다. 그러나 재승을 이루는 요소 중 단점이 될 만한 것이 딱 무식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재승의 빚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재승이 사는 집을 방문했으며, 재승의 큰아버지가 매번 재승에게서 돈을 받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확인한 그녀는 이놈과 평범하게 살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다. 결국 당연한 수순으로 그녀 또한 재승과 헤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 뒤로 재승은 연애를 포기했다. 외롭게 지내는 것이 헤어짐의 슬픔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던 탓이다.
하지만 여자를 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점은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도 마음대로 고쳐지지 않는 게 난처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종격투기가 워낙 폭력적인 운동이라 여자 볼 일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점 정도일까.
재승은 우울한 낯짝을 하면서도 열과 성을 다해 갈비를 뜯었다. 그렇게 쌓여 있던 갈비의 반이 사라졌을 즈음,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조용하던 옆자리에서 느닷없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짜네.”
재승은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 원영의 얼굴이 보였다. 원영은 눈 밑이 퀭한 것이 어째 재승이 보던 중 가장 낯빛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퀭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짓고 있는 표정만큼은 상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떨는지 몰라도, 재승의 눈에서만큼은 시큼했다.
참고로 재승은 편식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 주의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리는 음식이 있는데, 신 음식만큼은 극도로 질색하는 편이었다.
“저도 좀 가져와야겠네요. 고기 더 드실 겁니까?”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산뜻하니 같은 남자가 들어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좋은 목소리로 또 어떤 엿을 먹일까 생각하니 분노 조절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듯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원영은 그런 재승과 눈을 마주쳤지만, 정말 엿을 먹이기라도 하려는지 오히려 더 산뜻한 얼굴을 해 보였다. 퀭하면서 해맑은 얼굴의 원영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드시고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
원영은 친절한 목소리를 자리에 남긴 채 성큼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원영의 뒷모습을 멀뚱히 노려보던 재승이 휙 고개를 틀었다. 먹는다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아주 해석이 제멋대로였다.
*
음식을 받으러 나온 원영은 접시를 들고 한 번, 재승이 먹던 갈비 앞으로 가며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그래봤자 원영에게 보이는 것은 멀리 테이블에 앉은 재승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럼에도 원영은 재승의 몫과 제 몫의 음식을 퍼 담으며 계속해서 재승이 앉아 있는 곳을 뒤돌아봤다.
딱히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혹시라도 재승이 도망을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멀리 원영과 함께 재승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이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승을 힐끗거리다가 그 무리를 발견한 원영은 바로 전의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무안을 받은 사람에게는 원영 또한 유감을 표하는 바였다. 하지만 원영은 그녀 덕분에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은 상태다. 그 사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천재승이 게이라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가설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어제 저녁 식사 시간.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검색창에 ‘천재승 게이’를 검색했던 원영은 집으로 돌아가서까지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했더랬다. 원영은 늦은 새벽이 되도록 인터넷을 뒤졌다. 그래서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천재승 게이설’의 시초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천재승 게이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재승에게 막 여성 팬이 생기고 난 직후였다.
nn년 어느 날, 운동광인 남자 친구의 취미를 이해해 보고자 이종격투기 경기장을 찾은 김모 씨는 경기 시작 전 관장과 함께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재승을 보고 그 까리함에 탄복하여 한 카페에 영상을 찍어 올리게 되는데. 재승의 얼굴과 몸이 핫한 만큼 카페의 반응 또한 핫했다고 하더라.
카페의 글은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퍼 날라졌고, 재승은 특정 마니아층의 여성 팬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말이, 사실 잘생긴 놈이 패든, 못생긴 놈이 패든 이종격투기가 잔인한 것은 매한가지란다. 하지만 잘생긴 놈이 얻어터지는 것은 이상하게 섹시해 보이는 것 같고, 잘생긴 놈이 못생긴 놈을 팰 때면 그게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다고.
아무튼 그래서, 다시 nn년의 어느 날. 팬심이 불타오른 그녀들은 ‘천재승 갤러리’ 이외의 다른 팬카페를 창설했고, 팬카페의 인원을 모아 그의 경기를 참관하러 가자고 하기에 이르는데. 천재승 게이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해프닝의 시발점은 바로 여기였다.
카페 설립자는 카페에 모집 글을 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상 경기를 참관하러 가겠다고 한 인원은 총 3명뿐이었다. 그래서 그 인원이 누구인고, 하니. 한 명은 재승의 영상을 보고 최초 카페를 설립한 설립자 본인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남자 친구의 취미를 이해해 보고자 했던 김모 씨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카페 설립자의 가장 절친한 친구 정모 씨였다.
물론,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카페 설립의 초기이기도 했던 데다가 이종격투기에서 사람이 맞고, 피를 흘리고, 뼈가 부러지는 상황은 공포영화같이 지어낸 상황이 아니라 전부 실제일 테니까.
실제로 세 사람을 뺀 이외 다른 카페 회원들이 단 댓글에는 ‘경기장 내에서 풍길 땀 냄새는 차치하더라도 사람이 실제로 맞는 걸 보는 게 좀…… 만약 피 냄새가 나기라도 한다면 구역질을 할지도 모른다.’라는 의견이 과반수를 이뤘다.
모집자는 결국 세 사람분의 티켓팅을 하기로 했다. 한때 아이돌 팬클럽 회장의 이력을 가진 설립자는 아이돌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재빠른 티켓팅을 했고,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용감한 그녀들은 꺼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당당히 경기장에 입성했다. 선점된 세 자리는 옥타곤이 한눈에 보이는 상석이었다.
그런데 세 사람 중 단 한 사람에게만 문제가 생겼다. 그날 경기 매치 표가 어찌 된 영문인지 유독 과격한 선수들로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치킨과 맥주를 뜯으며 관람하던 세 여자 중 이종격투기 관람에 가장 초심자였던 정모 씨는 치킨은커녕 제 몫의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전광판에 비친 선수 하나가 코피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곤 결국 느닷없는 요의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재승의 메인 이벤트 경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정모 씨는 두 사람을 남겨둔 채 경기장 밖의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화장실에 간 정모 씨는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가, 운이 좋게도 다른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던 천재승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재승에게 사인을 받고 있던 것은 척 봐도 운동깨나 좋아하게 생긴 남자 두 명이었다. 그들은 재승에게 사인을 받았고, 기념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으며 평소 어떻게 운동을 하면 좋냐는 둥의 짧은 대화까지 한 다음에야 재승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에서 그들이 자리를 떠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정모 씨는 마침내 ‘팬이에요!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하고 재승을 불렀는데…….
재승이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대답도 없이 제 갈 길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직접 겪은 정모 씨는 기분이 묘했단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정모 씨는 팬카페에 ‘아무래도 천재승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리게 되고, 그게 천재승 게이설의 시초가 됐다.
원영은 그 카페의 글에 무수히 달린 ‘성지순례 왔습니다.’라는 댓글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글을 아무리 읽고 댓글을 아무리 확인해도 ‘도대체 그게 뭐?’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다른 일이 더 있었나 인터넷을 뒤지느라 잠까지 설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날이 새도록 인터넷을 뒤져봐도 위와 비슷한 일화가 우르르 쏟아질 뿐 천재승이 남자를 사귀었다든가, 직접 ‘내가 게이요!’하고 소리쳤다는 내용의 글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루머일 뿐이었구나, 하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물론, 그 결론은 딱 오늘 아침까지만 해당하는 일이 됐다.
막상 인터넷에서 본 내용과 비슷한 일을 직접 겪은 지금, 원영은 다른 확신이 섰다. 남들이 천재승에게 어째서 게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재승은 확실히 여자를 싫어했다. 인상을 구겼고, 귀찮아 보였고, 그녀들이 사라진 뒤에는 짜증 나서 죽을 뻔했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기도 했다.
임을 봐야 뽕을 따든지 말든지 할 텐데. 재승이 쭉 그딴 식으로 행동을 했다면, 절대 ‘여자’와는 연애를 해봤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원영은 천재승이 게이가 맞을 거라고 다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욕심나는 선수 천재승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다만, 재승이 게이니까 자신이 어떻게 해보겠다는 소리는 절대 아닌데,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는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원영은 여태까지 쭉 이성애자였다. 때문에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여자보다 남자가 좋을 수 있는지. 재승이 신기하기만 했다.
“드세요.”
분주하게 음식을 담아 온 원영이 재승의 앞으로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 뒤 원영은 당연하다는 듯 재승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원영이 제 몫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다봤다.
원영의 접시에는 늘 먹는 닭가슴살과 샐러드가 반 정도 담겨 있었고, 거기에 웬일로 고기도 담겨 있었다. 재승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이게 그렇게 맛있던가, 하고 느닷없이 고기의 맛이 궁금해졌던 터였다. 원영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으며 재승에게 말했다.
“일찍 도착하면 저 찾아오시라니까…… 제가 이거보다 맛있는 거 사드리려 그랬는데.”
말을 끝낸 원영은 막 집은 고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뼈를 발라낸 후 열심히 씹자 한동안 익숙했고 그럼에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조미료의 맛이 혀를 자극했다. 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뒤 원영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허겁지겁 샐러드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샐러드로 입가심을 마친 원영이 뒤늦게 재승의 얼굴을 확인했다. 말을 걸고 나서 적어도 1분은 지난 것 같은데, 재승에게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
원영이 확인한 재승은 확실히 말이 없었다. 그는 원영의 말에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새로 받아다 준 접시에 코를 박고 고기를 먹는 중이었다. 하긴, 새롭게 알아낸 사실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일전에 영 좋지 않은 곳에서 대화가 끊기기는 했었던 것이다.
아니, 근데. 만약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삐져 있는 것이 맞다 하면, 자신이 가져다준 고기도 먹지 않아야 맞는 게 아닌가.
원영이 퍽 타당한 생각을 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막상 언짢아한다고 해도 신경 써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원영은 KFC의 대표가 되기 이전부터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생활을 해왔었다. 때문에 혼자 말하고, 심지어는 무시를 받기까지 하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승은 그다지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도 어쩐지 재승만큼은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원영은 알아서 표정을 풀었다. 젓가락에 닭가슴살 한 덩이를 찔러 넣은 원영이 다시 재승을 바라봤다.
“……고기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데 체중조절은 안 하셔도 됩니까? 아, 혹시 이번 시즌은 헤비급을 노리시…….”
원영이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기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재승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헤비급 새끼들은-’으로 시작하는 욕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 욕을 한 사람이 설마 헤비급을 나가려고. 자기가 생각이 짧았지 싶었다.
“좀 닥티고 밥이나 처먹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쌍욕을 먹을 줄은 몰랐는데. 조용하던 사람에게 느닷없이 욕을 얻어먹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재승은 음식도 다 삼키지 않은 상태로 욕을 해놓고, 다시 와구와구 고기를 집어 먹더니 애꿎은 테이블을 노려보며 으르렁대는 중이었다.
식탁에서의 괜한 말싸움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원영은 재승이 바라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대신 원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들이 가득했다.
일단 첫 번째로 든 생각은 가까이서 보는 재승이 멀리서 보는 그보다 조금 더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었다.
매번 얻어터지고 재생성 되는 게 일이라 그런가?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피부가 더럽게 좋아 보였다. 지금은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더 커다란데 외꺼풀임에도 원체 눈이 컸고, 그 안의 흰자위도 자주 터져서 그렇지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얬다. 심지어 눈동자가 새까만 게 어찌나 초롱초롱한지, 사람보다는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코는 또 고양이처럼 오뚝하다. 체구에 비해 작은 머리통이 오밀조밀 아주 예쁘게도 채워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또다시 그가 게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저렇게 잘생겼으니 괜스레 아깝다 할까. 인기도 많을 것 같고…… 아니, 실제로도 많고. 근데 괜히 남자를 좋아해서 연애나 제대로 해봤을까 싶은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혹시 자신에게 두근거렸었는데 중졸이라고 물어봐서 이렇게 화가 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재능도 있는 사람이 쓰레기 밑에서 썩고 있는 게 안쓰럽고 딱해서, 뭐 도움이라도 주고 싶고, 데려오고 싶고, 그래서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재승에게 오해를 불러들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다 자신을 좋아하면? 느닷없이 고백이라도 받게 된다면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원영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점점 망상을 부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별나라로 가버린 원영의 생각은 재승과 함께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재승이 몸을 푸는 내내 이어졌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대임을 잊은 채. 홀로 심각하게.
*
마지막 스파링 상대는 생각보다 주먹이 빨랐다. 물론 자신에 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초짜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슬슬 져야 할 텐데, 하고 방심하는 사이 얼굴로 날아온 주먹은 꽤나 야무졌다.
제대로 된 경기였다면 시원하게 복수를 해주었을 텐데.
곰곰이 오늘의 스파링을 회상하던 재승이 아쉬움에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재승의 용달트럭은 이제 막 서울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정체 구간에 진입한 상태였다. 이도 저도 못 하게 꽉 막힌 도로가 영양가 없는 생각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재승은 브레이크 위에 올려놓은 발가락을 꼼질거리다가, 코앞에 있는 룸미러를 힐끗거렸다. 그러다 결국 룸미러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 만다. 작은 거울 안으로 매끈하던 이마가 아주 예쁘게도 터져버린 것이 보였다.
재승은 건강과 회복력을 빼면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인간이었다. 덕분에 멍 정도는 늘 일주일도 안 돼서 빠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터져버려서, 잘하면 일주일이 지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을지도 몰랐다. 생각하다 보니 역시 복수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다. 재승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꾸 룸미러로 가는 시선을 겨우 정면으로 되돌렸다. 그래. 언제부터 일일이 상처를 살폈다고.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만큼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같이 경기 한 선수는 저가 이겼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고용자인 원영만큼은 자신이 그저 열심히 일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는가.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은 미리 구기고 있던 얼굴을 회복 불가능할 만큼 더욱더 구겨댔다. 이유야 당연히, 걔가 그렇게 생각해 줘도 하나도 고맙지가 않아서.
이원영이라는 인간은 보면 볼수록 밉상이었다. 재승의 머릿속에 아무렇지 않게 깐족거리는 원영의 얼굴이 동동 떠올랐다.
‘……고기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데 체중조절은 안 하셔도 됩니까? 아, 혹시 이번 시즌은 헤비급을 노리시…….’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점심 식사 도중에 느닷없이 깐족거리던 원영의 말이었다. 이번 시즌은 헤비급을 노리냐고 묻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절대 그게 아니다.
운동을 그렇게 하는데도 근육량이 안 늘어나네. 미들급 챔피언 좀 먹었다던데, 그래봤자 영원히 헤비급은 도전 못 하겠지?
아마 원영이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맞을 터였다. 예전에 돌려서 까도 멍청해서 모른다며 하도 무시를 당했던 터라, 이제는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게 그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재승이 욕을 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급한 불은 이미 껐고, 그래서 당장은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기분 상했다는 티를 내고 싶었던 거다.
근데 욕을 얻어먹은 원영이 진짜로 입을 다문 것은 의외였다. 정말 조용히 밥만 먹기에 솔직히 조금 감동도 했었다. 갑자기 미안해져서 반성이라도 하는 건가? 역시 좋은 놈이었던 건가? 그렇게 또 멍청한 착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식사 후 체육관으로 내려가서, 원영은 미트 치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체육관 중간에 멀뚱히 서서 링만 노려보고 있었다. 재승은 운동을 하며 드문드문 원영을 힐끗거렸다. 먼저 욕을 한 게 자신인지라 쪼잔하다고 하기도 뭐하다지만, 속으로는 내심 서운하기만 했었다. 그렇게 스파링 시간은 다가와 버렸고 재승은 이마가 터졌다.
‘굳이 이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괜찮다니까. 하아, 예쁜 얼굴을…….’
스파링이 끝나기 무섭게 재승의 앞으로 달려온 원영은 곤란한 듯 미간을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재승은 그게 자신과 화해하자는 신호인 줄 알았고, 걱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 탈의실까지 뒤쫓아온 원영은 재승을 향해 이렇게 조잘거렸다.
‘선배님께서도 우리가 체육관이나 경기장에서 만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그러니까, 결국은 또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선수끼리 경기장에서 만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니. 같은 선수지만 저랑은 급이 다르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재승은 원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뛰어 내려갔었다. 달리는 재승의 머리 뒤로 ‘오늘은 꼭 병원 가세요!’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재승은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짐했었다. 언젠가 경기장에서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기필코 그 상판대기를 뭉개 놓을 거라고.
화나는 생각을 했더니 시간이 퍽이나 잘 간다. 힐끗, 오디오 플레이어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한 재승이 다시 정면 유리창을 바라봤다. 일렬로 늘어선 차들의 미등이 드문드문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가만 보고 있으면 연말 트리 장식 같아 예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예쁜 불빛을 달고도 도통 앞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그저 답답함을 부추기는 불빛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재승은 브레이크 위에 놓여 있는 발가락을 다시금 꼼지락거렸다. 생각이 끊어지고 나자 시선이 거듭 거울을 향하려고 했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재승은 결국 기분이 나빠질 것을 각오하고 거울이나 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기분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니까. 사실 더 나빠질 기분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승은 원래 거울 보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마음속으로 변명까지 해가면서 거울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원영 때문이었다.
‘하아, 얼굴을……. 아작을 내놨네…….’
그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재승은 제 얼굴이 정말 아작까지 나버린 것인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슬쩍 확인해 봤을 때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시비 거는 인간이 걱정할 정도면 남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이나 싶어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재승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룸미러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콘솔박스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거울로 향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린 재승이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이내 허둥지둥거리며 그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어, 나다.
재승이 통화 아이콘을 스크롤하기 무섭게 핸드폰에서는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래간만에 울린 전화의 발신자는 다름 아닌 ‘관장님’이었다. 관장의 목소리를 들은 재승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활짝 폈다. 방금까지 더 나빠질 기분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어어, 뭐 일 있어야지 전화하나. 아까 돈 입금했는데, 봤지?
“네! 800만 원!”
재승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하. 핸드폰 너머로 관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활짝 핀 재승의 얼굴에서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곧 부자 되겠네. 그, 주말 되기 전에 체육관 한번 들러. 할 일 있으니까.
“네. 아침에 일찍 갈까요?”
-아무 때나 와. 그렇다고 또 너무 일찍 오지는 말고. 전화해, 전화. ……근데, KFC 대표가 너한테 뭐라고 안 하든?
관장의 질문에 재승이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뭐라고 하기야 많이 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탓이었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시비 걸었던 이야기를 먼저 이르려고 마음을 먹었더니, 관장은 그제야 말을 덧붙였다.
-그 있잖아, 일적으로다가.
그 말인즉, 재승이 방금 하려고 마음먹었던 이야기들을 궁금해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소리였다.
재승은 조금 서운했지만, 곰곰이 그가 일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기억나는 것도 당연히 없었다. 재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뇨?”
-아아, 그래?
관장은 떠보려는 것도 같고, 다행이라는 것도 같은 말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재승은 그냥 관장님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몇 초 뒤, 관장이 허허,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놈이 뭐라고 하든 말 듣지 마. 무슨 사기를 치려는지……. 나한테 계속 그런다.
“네? 어떻게요?”
-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니까 됐어. 그럼 올 때 연락하고.
“네. 그-”
관장이 전화를 끊을 것 같아서 할 말은 없지만 무언가 한마디라도 더 말해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전화는 이미 허무하게 끊어진 뒤였다. 재승은 한동안 귓가에 핸드폰을 붙이고 있다가, 결국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콘솔박스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일 있어야 전화하느냐더니. 결국은 일 있어서 전화한 것이 맞았으면서.
문득 관장에게 반항심이 들려고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얼마 가지 않을 마음이었다. 오래전에는 굳이 할 말이 없더라도 자신을 위해 곧잘 안부 전화를 주시던 관장님이셨으니까. 어쩌면 자신이 애교가 없어서 통화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지셨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이번 체육관 가는 날에는 약국에 들러서 비타민 음료라도 사 가야겠다. 운동 잘해서 이쁨받는 것과 이쁨받을 행동을 해서 이쁨받는 것은 또 다르지 않겠는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였지만, 재승을 돈줄로 보는 관장에게는 통할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승은 제가 꽤 기특한 의견을 냈다는 생각에 그저 뿌듯해할 뿐이었다.
마침 꽉 막혀 있던 도로의 정체도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한 듯 보인다. 재승은 한층 가벼워진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재승의 낡은 용달트럭이 느릿하게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읏차.”
힘찬 신음과 함께 약수통 네 개를 마루 위에 내려놓은 재승이 입고 있던 하얀 러닝셔츠를 끌어당겨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 뒤 재승은 식수로 쓸 통 하나만을 마루 위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 약수통 세 개를 집어 든 채 마당을 돌아갔다.
재승이 마당을 돌아 들어간 곳은 집 뒤편의 다용도실이었다. 다용도실은 말이 다용도실이지, 아주 오래전에는 부엌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다용도실의 중앙에는 아직도 커다란 아궁이가 놓여 있었다.
물론, 재승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이미 기름보일러와 가스레인지는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때문에 아궁이는 사실상 더 이상의 용도가 없어야 맞았지만, 재승은 아직도 이 아궁이를 사용했다. 기름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니, 비단 기름값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재승은 아궁이에 땔감과 연탄을 넣고 불을 붙인 뒤, 아궁이에 미리 올라가 있던 커다란 솥 안으로 약수를 부었다. 그 후엔 다용도실 구석에 박혀 있던 물때 낀 나무 욕조를 꺼내고, 구석 선반에 놓여 있던 목욕용품들을 꺼내 욕조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아…….”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수건과 새 옷을 찾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 재승은,
[그 애, 당신 애야.]
느닷없이 튀어나온 아침드라마 대사에 정신이 팔려 넋을 놓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승이 다용도실에 돌아왔을 땐, 이미 아궁이에 올려놓은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상태였다.
재승은 다용도실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냄비로 끓는 물을 퍼서 나무 욕조에 담았다. 뜨거운 물로 나무 욕조를 반 정도 채운 다음에는 끓이지 않은 약수를 욕조에 넣고 섞었다. 그렇게 겨우 목욕 준비를 마친 재승은 그제야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작은 나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으어, 시원하다.”
재승이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여유롭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사실 재승은 오늘 등산을 할 예정도, 약수로 목욕을 할 예정도 없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 관장님께 전화를 했더니만, 오늘은 오지 말고 내일 11시에 오라는 통보를 받고 만 것이다.
그럴 거면 아무 때나 오란 소리를 말든가.
잠시 관장에게 불만을 가지기도 했지만, 역시 얼마 안 가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고, 등산을 하고, 약수로 깨끗하게 목욕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좋아하는 일에 가까웠다.
어제는 기분이 안 좋을 만해서 안 좋았던 건지, 신기하게 오늘은 관장님에게 거부를 당해도, 등산객 할아버지가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시비를 걸어와도 기분이 그냥 그랬다.
멍하니 눈을 감고 있던 재승이 뜨거운 물을 손으로 퍼 얼굴에 끼얹었다. 그때, 멀리 벗어놓은 옷가지 속에서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눈을 감고 있던 재승은 번쩍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옷가지를 바라보는 재승의 얼굴에 얼핏 기대감이 차올랐다. 혹시 관장님의 마음이 바뀌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울린 진동은 한 번뿐, 재승의 핸드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재승은 기대감을 지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관장님은 문자같이 귀찮은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 방금 울린 저 진동은 어차피 스팸 문자일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었다.
*
근 한 시간가량을 목욕에 소비한 재승이 개운한 표정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원영을 반하게 만든 매끈한 피부의 비결은 일주일에 몇 번이고 하는 이 반신욕 덕분인지도 몰랐다. 물론 재승은 제 피부가 원영을 반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방금 피부관리를 했다고는 생각하는 눈치였다.
매끈해진 몸을 거칠한 손으로 이리저리 쓸어보다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맨발로 속옷을 끼워 입었다. 그렇게 재승이 느긋하게 콧노래라도 한 곡 뽑아 보려던 순간이었다.
멀리서 나이 지긋한 여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계세요! 안 계세요!”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짜증이 가득했다. 놀란 재승이 서둘러서 바지를 주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바지를 입으며 다용도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재승은 이내 맨발로 뒷마당을 뛰기 시작했다.
“예! 가요!”
커다랗게 소리를 치며 앞마당에 당도하자 멀리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보였다. 여자 또한 재승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봤다.
처음엔 잔뜩 화난 표정으로 뒤를 돌았지만, 웃통을 벗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재승을 발견한 그녀는 이내 한층 너그러워진 표정으로 재승을 기다려줬다. 마침내 재승이 여자의 앞에 서자 그녀가 홍홍홍,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여기 사시는 분 맞죠?”
“예에.”
“3주째 왔다 가는데 올 때마다 안 계셔서.”
그녀의 말에 재승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도 지지리도 없어 하필이면 스파링이 계약된 3주 중 스파링 날에만 집에 들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도통 집에 찾아온 용건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재승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시선은 재승의 상체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무슨 일로……?”
“아.”
재승의 근육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던 여자는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재승은 눈치채지 못했다. 멀뚱히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그녀가 다시 아, 하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차트를 재승의 앞으로 내밀었다. 재승이 그녀가 내민 차트를 받아 들었다.
실거주자…….
재승은 가장 큰 글씨로 쓰여 있는 제목조차 끝까지 읽지 않았다. 글씨가 너무 많고 심지어 한자까지 드문드문 섞여 있었던 탓이다. 재승이 이게 뭐냐는 듯 여자를 내려다봤다.
재승을 처음 보는 여자는 그가 대충이라도 차트를 훑어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친절한 표정으로 막 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을 재승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차트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구청에서 왔어요. 등본에 등록되어 있는 주소가 실거주 중이 맞는지 확인해야 해서요. 불은 켜져 있는데 계속 안 계셔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랬네요. 여기 사인하시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재승이 커다란 손바닥 위에 차트를 올려놓은 채 이름을 써넣었다. 천, 재, 승. 또박또박 초등학생 같은 글자가 쓰이는 것을 보던 그녀가 가만 재승의 얼굴을 바라봤다.
“총각인 것 같은데. 혼자 살아요?”
“예.”
“어머머, 외롭겠다.”
여자가 짝, 느닷없이 커다란 박수를 쳤다. 그녀의 호들갑에 놀란 재승이 흠칫하며 눈을 키웠다. 여자는 그러든 말든 눈을 빛내며 재승을 향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여기 뒷산 있잖아요. 근래에 어떤 회사에서 매입했다던데,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된대요? 내가 여기 골프장 만든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으응? 여자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사실 그녀가 이 집에 찾아온 것은 일보다 이것이 더 목적이었다. 그녀는 궁금했던 나머지 귀찮은 외근을 3번이나 자처했다. 부동산 하는 친구에게 듣기로, 개인소유였던 뒷산이 어떤 회사에 시세보다 비싼 값으로 팔렸다는데, 뒷산에 붙어 있는 허름한 집과 콩알만 한 땅만 여태 팔리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부동산 친구도 그녀도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 됐다.
도대체 얼마에 팔려고? 거기서는 얼마에 팔라는데?
이 근처 땅값 집값이야 뻔하고 빤했다. 만약 뻥튀기가 두 배 그 이상이라면? 여자는 어느 뒷산이든 냉큼 낡고 허름한 집 하나라도 사놓을 작정이었다.
“…….”
하지만 막상 대답을 해줘야 하는 젊은 총각이 입을 다물고 있다. 젊은 총각이 좋은 것 혼자 알겠다는 속셈인가. 여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재승은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인 데다가 만약 들어본 소리라 했을지라도 집을 팔 생각이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재승의 표정을 살피던 여자의 표정도 풀어졌다. 여자가 다시 물었다.
“총각은 들은 거 없구나?”
“예.”
“여기서 혼자 살면 더 외롭지 않나? 사람도 없고…… 장가는 안 가요?”
“…….”
재승이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외롭고, 장가도 가고야 싶다만……. 그래서 다 장가들 수 있으면 이 세상에 노총각은 어째서 있겠는가 이 말이다.
무식하다고 무시 받고, 가난하다고 무시 받고, 이제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노총각이라고 무시를 받으려나 보다. 재승이 미간을 팍 찡그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홍홍홍, 그냥 인기 많을 것 같아서……. 아니 근데, 이마는 왜 그렇게 됐대요? 잘생긴 얼굴이 그게 뭐야. 조심하지.”
재승의 굳은 얼굴에 당황한 여자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그녀의 순발력은 꽤나 출중했다. 덕분에 잠시 상했던 재승의 기분이 다시금 좋아졌다. 인기 많을 것 같고, 잘생겼다니. 운동(혹은 싸움) 잘하네, 멋있다. 다음으로 재승이 가장 좋아하는 말들이었다.
여자도 재승의 표정 변화를 느꼈다. 다만, 그가 단순히 칭찬에 즐거워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젊은 총각이 재테크하려고 집 사서 잠시 후진 곳에서도 살고. 계속 이러고 살려니 결혼은 귀찮은가 보다. 그러니까…… 그래! 이게 요즘 말로 듣던 그 욜로인지 절로인지 하는 그거구나! 하긴, 이런 집에 이렇게 젊고 탱탱한 총각이 살 줄 누가 알았겠나. 총각도 생각이 있으니까 살고 있겠지.
확신을 얻은 여자가 다시금 눈을 반짝였다.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물 건너간 듯 보이니, 이번에는 혹시 모를 영업이라도 해볼 작정이었다.
“그보다 총각 돈은 좀 있겠다.”
“……예?”
“아니, 내 딸이 저축은행에서 일하거든. 근데 거기서 결혼자금 마련하기 좋은 상품이 나왔어요. 연이자가 구 퍼센트! 적금 들면 이자 많아봤자 이 퍼센트 삼 퍼센튼데, 1000만 원만 넣어도 이자가 90만 원이 들어오는 거잖아. 목돈 만들기 진짜 좋아요. 심지어 이렇게 이자가 높은데 납입 금액 제한도 없다니깐?”
“오…….”
재승이 무척이나 혹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필 수중에 1600만 원이 남은 재승을 유혹한 그녀는 딸의 성장에 이바지하는 최고의 영업왕인지도 몰랐다.
재승이 미끼를 물었다는 것을 느낀 그녀가 재승의 손에 있는 차트를 서둘러 가져갔다. 그 뒤 그녀는 볼펜을 꺼냈던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재승에게 내밀었다.
[노각오이 저축은행. 팀장 김**. Tel 010********]
명함을 건네받은 재승의 머릿속으로 KFC 타워의 체육관과 운동기구가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때문에 재승은 빠져나올 수 없는 강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재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00만 원 저금하면 얼마 더 줘요?”
질문을 들은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띠링띠링,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그녀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친다.
“144만 원!”
유독 호탕하다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다음 날, 재승은 기어코 저축은행을 찾아갔다. 전날 집에 찾아왔던 여자의 딸을 찾아가 ‘어머니가…….’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녀의 딸은 재승을 한눈에 알아봤다.
노각오이 저축은행은 재승이 다니던 은행보다 손님이 적었다. 덕분에 재승은 얼마 기다리지 않고도 계약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여자는 설명서와 계약서를 내려놓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재승은 늘 그랬듯 설명서와 계약서를 제목만 빼고 간단히 무시해줬다. 어차피 우체국 은행에 저금했던 돈을 노각오이 저축은행에 다시 저축하는 것뿐이니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싶어서 더 그랬다.
재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돈은 저금하는 것뿐이고, 그런데도 1년 뒤에는 144만 원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당장 쓸 수 없는 돈이 됐지만, 자신은 돈을 쓰지 않았다고. 그래.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다. 실제로도 재승은 돈을 안. 썼. 으. 니. 까.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행을 나서는 재승의 등 뒤로 친절하기 그지없는 인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승은 부푼 가슴을 안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모으는 돈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체육관도 운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들뜨다 못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파란 용달트럭 앞에 멈춰선 재승이 가벼운 움직임으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의 조수석에는 이미 박카*과 비타**이 다소곳이 앉아 재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마음도 뿌듯한데 외롭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재승이 기운차게 시동을 걸었다. 이제 관장님이 계신 체육관으로 갈 시간이었다.
*
“얌마, 그렇다고 가드를 내려!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체육관 문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관장의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봤자 적은 인원이었으나, 무언가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재승은 서두르듯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체육관 구석에 자리한 링이 한눈에 올려다보였다.
“훅, 후욱…….”
링 위에는 처음 보는 두 명의 사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대치 중이었다. 두 남자는 가끔 우스갯거리 소재가 되곤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며 서로에게 주먹을 뻗었다.
“습, 스읍!”
“훅!”
사운드는 꽤 그럴싸하다. 하지만 가드를 올린 폼도, 주먹을 뻗는 움직임도 재승의 눈에는 그저 어리숙해 보이기만 했다.
재승은 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리고 체육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초짜들의 스파링은 치고받는 맛이라도 있어야 재미가 있지. 저 두 놈은 서로 겁을 먹어 허공에 주먹질만 해대니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맞는 게 무섭냐! 그럴 거면 킥복싱은 왜 배워 이것들아!”
관장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당연히 재승과 엇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취미로 배우는 애들한테까지 저렇게까지 열을 올릴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했다. 물론, 그게 관장의 스타일이니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재승은 관장의 혈압이 조금 걱정되었다.
삑삑삑삑! 삑삑삑삑!
라운드가 끝났는지 스톱워치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람은 몇 번 울리지 않고 이내 조용하게 멈췄다. 소리를 꽥꽥 지르던 관장이 스톱워치를 손에 든 채 링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관장은 어느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만하면 잘하는 거지 뭐. 링 위에서 겨룬 두 사람을 향해 칭찬 아닌 칭찬을 내뱉는 관장의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 퍽 정겹다고 느껴졌다.
링 주변에 몰려 있던 원생들이 와글거린다. 어디서 어디를 때렸어야 하는데, 킥을 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훈계들이 두 사람을 향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멀찍이 앉아 사람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승은 그제야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움보다 재미있는 말들 때문인지,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린 상태였다.
“어어, 천재승 선수.”
“관장님! 선수님 오셨는데요!”
관장보다 먼저 재승을 발견한 무리가 호들갑스럽게 관장을 부르며 달려 나갔다. 재승은 미소를 걸고 있던 입매를 굳혔다. 관장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혹여나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물론, 관장이 재승에게 얕잡아 보이니 말을 하지 말라 하는 건 사기를 들키지 않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게다가 재승은 모르지만, 관장의 체육관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승의 팬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힐끗거리는 건 선수한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고, 말 걸면서 웃는 건 비웃는 게 아니라 잘 보이고 싶어서 웃는 거였다.
재승이 아무리 무식하다 한들, 일반인이 보기엔 운동에서만큼은 까일 구석이 없는 것이 맞았다. 실제로 재승은 몇 번의 경기를 빼면 대체로 승승장구했기에 롤모델로 삼아도 좋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매스컴도 그렇다. 재승이야 늘 악플 하나하나에 부들대지만, 인터넷에서는 하다못해 대통령조차 욕을 하지 않는가. 물론, 재승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유는…… 뉴스를 안 보니까.
“어어, 천재승이! 언제 왔어!”
재승을 발견한 관장이 끙끙대며 링을 빠져나왔다. 관장은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까 봐 다급한 걸음으로 재승의 앞에 섰다. 재승은 그게 그저 반가워 그런 줄 알았다. 생전 예쁨 받을 일이 없다 보니, 체육관에 올 때라도 받는 이 반김은 재승을 늘 고대하게 만들었다.
“11시 조금 안 돼서 왔어요.”
재승이 관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는 얼굴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뒤늦게 재승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발견한 관장이 그건 뭐냐 물었다. 재승은 또 히죽 웃으며 들고 있던 음료 상자를 관장에게 건넸다. 하지만 관장님 드시라고 사 온 상자는 관장님이 오롯이 가지지 않았다. 박스를 받아 든 관장이 뒤로 돌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야야, 이거 마시면서 가라! 재승이가 사 왔단다!”
관장의 고함에 주변으로 바글바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눠 먹으면 좋은 거지 뭐.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재승은 못내 관장에게 서운했다. 하지만 모여든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작은 상자 두 개를 받아 든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상자 하나에서 꺼낸 비타민 음료를 재승과 관장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재승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음료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재승을 힐끗거리며 멀어져갔다. 재승은 잠시 동물원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조금 우울하려고 그랬다.
“넌 애가 왜 이렇게 바지런을 떨어. 좀 더 자다 나오지.”
비타민 음료 한 병을 단숨에 비워낸 관장이 입술을 훔치며 말한다. 그 뒤 재승의 얼굴을 올려다본 관장은 재승의 이마를 보곤 떼잉, 하며 혀를 찼다. 그래도 눈보단 낫다. 커다랗게 중얼거리는 관장의 목소리가 영 못마땅했다.
“노인이냐, 아침잠이 없게. 그러다 빨리 늙어. 젊을 때 관리해야지.”
못마땅한 김에 굳이 필요도 없는 잔소리를 주절거리던 관장은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을 보며 이내 허허,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재승은 가만히 기다렸다. 곧, 체육관에 딸린 작은 골방으로 들어간 관장이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관장은 재승의 앞에서 훌렁훌렁 포장지를 깠다. 그리고 그 포장지 속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새 경기복이었다. 느닷없이 선물을 주려고 부르셨나. 그렇다면 어제, 그제 서운했던 것도 싹 다 가실 것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한 재승이 기대감에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가방 내려놓고 이거 좀 입어 봐.”
관장이 재승에게 새 경기복을 건넸다. 재승은 일단 받아 들었지만,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복은 협찬을 받아도, 혹은 관장님이 사주셔도, 늘 경기장에서만 입은 것이다. 물론 한번 입고 나면 체육관이나 집에서 운동할 때 입게 되기야 하지만, 새것을 체육관에서 입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아주 의아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관장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재승은 곧 의문을 풀었다.
“순철아! 가서 사진기 들고 와라!”
아무래도 어제, 그제의 일은 계속 서운해야 할 모양이었다. 재승이 한결 시무룩해진 얼굴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웃옷은 그냥 벗을까? 어떠냐, 순철아?”
시험 삼아 찍어본 사진 몇 장을 확인한 관장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관장이 말을 건 순철이라는 남자는 몇 년 전부터 체육관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순철은 관장의 옆에 서서 관장에게 카메라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관장이 질문하자 다시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눈을 가져다 댔다.
“옷 입은 상태로 조금만 더 찍고 벗어요.”
관장에게 대답한 순철이 뷰파인더 너머로 재승을 바라봤다. 관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순철의 의견을 수긍해주는 눈치였다. 하긴. 쥐꼬리 월급을 받고 있는데, 그 월급으로 좋은 카메라를 사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는가. 게다가 관장의 주변에는 고상하니,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오직 순철밖에 없었다.
“재승아. 포즈 잡아야지, 포즈!”
다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작 재승에게만 발언권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입든 벗든, 그 행동을 실행해야 하는 사람은 재승이다. 하지만 재승은 시키는 일을 할 뿐, 정작 지금 자기가 사진을 왜 찍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재승은 불만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다. 재승이 관장의 지시대로 멀뚱히 카메라를 보며 포즈를 궁리했다. 사진이라면 재승도 꽤나 많이 찍어보았다.
지금 재승이 취하려는 포즈는 매치 인터뷰 포토존에 가면 개나 소나 다 한다는 전설의 포즈. 일명 파이팅 포즈였다.
재승이 한쪽 손만 불끈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린 채 카메라를 바라봤다. 찰칵,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를 든 순철은 몇 번 더 셔터를 눌렀고, 그 옆의 관장은 엄지를 척, 추켜올렸다.
“역시, 재승이가 인물이 좋네!”
관장이 과장된 칭찬과 함께 껄껄껄, 호쾌한 웃음을 흘려댔다.
재승은 오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음 포즈를 잡았다. 양손을 주먹 쥐고 하는 방어 자세였다. 카메라를 바라보자, 다시 찰칵,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야, 관장이 소주라도 한잔 걸친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번엔 놀고 있던 다른 손까지 들고서 엄지를 척, 척, 추켜올리는 중이었다.
“기본기가 훌륭해서 그런가? 뭘 해도 멋있어! 재승이, 아주 최고네!”
한층 업그레이드 된 칭찬에 재승의 표정이 흐물흐물해졌다. 관장은 이것을 노린 거였다. 칭찬은 호구를 춤추게 한다. 그리고 춤추는 호구는 뭘 시켜도 열심히 할 터였다.
*
소풍 기념촬영만도 못한 사진 촬영은 쓸데없이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재승은 체육관의 링 옆에서, 혹은 관장과 함께, 또는 체육관 간판 앞에 홀로 서서 사진을 찍혔다. 그렇게 관장의 욕심을 한껏 채우고 난 뒤에야 촬영은 끝이 났다.
순철과 관장은 촬영을 끝내기 무섭게 사진을 본다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중이었다.
재승은 멀찍이 체육관의 한복판에서 주섬주섬 입고 있던 경기복을 벗었다. 모델을 한 당사자이지만 결과물이 어떨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게 아주 관심이 없다거나, 귀찮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칭찬을 실컷 들었으니까. 혹여나 조금 못생기게 나왔다고 한들 그게 뭐 어떤가 싶어서 그랬다.
재승은 한동안은 기분 나쁠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체육관에 올 때 입고 왔던 자신의 반소매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촬영하며 입었던 경기복은 관장님이 이번 시즌 경기에서 입으라고 그랬다.
재승은 경기복을 차곡차곡 예쁘게 개서 가방에 고이 넣었다. 돈 벌러 경기에 나갈 때만 아껴 입을 예정이었다. 비싼 경기복이니까.
물론, 가끔 협찬으로 비싼 운동복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관장님 사비로 이렇게 비싼 운동복을 사주신 일은 손에 꼽았다. 재승이 애착을 갖는 경기복은 대부분 이렇게 관장이 어떤 이유에서 사비로 사주는 경기복이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승아. 배 안 고프냐.”
멀리서 순철과 대화를 하고 있던 관장이 재승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재승은 가방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저에게 다가오고 있는 관장을 바라봤다.
배고프냐는 말을 들었더니 그제야 허기가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아침은 조금밖에 먹지 않았고, 은행에 가서 나름대로 머리도 쓴 상태다. 여태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게 용할 정도였다.
그런 재승의 표정을 읽었는지 관장이 호쾌한 얼굴로 큰소리를 쳤다.
“모-델도 해줬는데 밥은 먹여야지. 야, 순철아! 짱깨 시켜라! 탕수육 대짜! 재승이 밥은 뭐 먹냐?”
“어…… 짬뽕……?”
“임마, 날도 더워 죽겠는데 무슨 짬뽕이야. 짜장면 먹어, 짜장면. 순철아, 짜장면 곱빼기로 세 개! 야, 순철아! 듣고 있냐!”
“예에! 지금 시켜요!”
골방에 들어가 있던 순철이 커다랗게 대답하며 밖으로 나왔다. 순철은 곧 핸드폰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했다. 짬뽕을 거부당한 게 못내 아쉬웠던 재승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문득, 원영과 같이 먹었던 점심 식사가 떠올랐다.
인간 자체는 마음에 안 드는데, 밥 먹을 때 중간중간 계속해서 음식을 가져다줬었다. 대부분은 고기였지만, 고기가 아닌 음식을 가져다줘도 그것조차 신기하게 자신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었다. 어린놈이라 센스가 좋은 건지. 다른 건 다 싫어도 그건 참 좋았는데 말이다.
재승이 헛생각을 하는 사이 주문을 마친 순철과 관장이 포토샵이 어쩌구 하는 대화를 나누며 쪽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둘의 대화에 낄 수 없던 재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체육관 구석에 매달려 있는 허름한 샌드백을 치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가볍게 잽을 날리자 샌드백이 팡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렸다. 분명 KFC 타워의 것만은 못 하지만, 집 마당에 있는 샌드백을 칠 때보다는 기분이 나는 것 같았다.
얼마 안 있어서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배달원이 철가방 안의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자, 체육관 내부에 기름진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재승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음식의 포장을 뜯었다.
곧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돌아가고, 세 사람이 체육관 바닥에 빙 둘러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관장에게 서둘러 인사를 한 재승은 얼굴보다 커다란 그릇에 코를 박고 짜장면을 흡입했다. 배가 진짜로 고프긴 했었는지 원래도 잘 넘어가던 음식이 오늘따라 술술, 잘도 넘어가는 것 같았다. 재승은 그렇게 짜장면 반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재승이 탕수육을 집으며 관장을 바라봤다.
“관장님. 근데 사진은 왜 찍었어요?”
물어도 한참 전에 물었어야 할 질문을 이제야 한다. 관장은 재승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관장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씹으며 재승의 질문에 성의 없이 대답했다.
“전단지가 오래됐잖아. 체육관은 맨 오던 놈들만 오고. 이 새끼들은 하루가 멀다 하게 출근하면서 나한테 돈이나 깎아달라 그러는데, 내가 어떻게 돈을 벌겠냐. 안 그러냐, 재승아.”
말을 끝마친 관장이 맨손으로 탕수육을 집어 먹었다. 관장이 재승에게 한 말이라는 시점에서 악마가 들었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체육관을 이렇게 열심히 운영하면서 자신의 경기까지도 따라다녀 주는 게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만약 원영이 들었다면 아주 게거품을 물며 데굴데굴 굴렀을 생각이었다.
더워 죽겠는데 짬뽕이 웬 말이냐던 관장이 후루룹,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제 몫의 국물은 이미 다 마셨고, 지금은 순철의 국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감사는 감사고, 국물은 국물이다. 재승은 혹여 제 국물을 빼앗길까 봐 아끼던 국물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그 뒤에는 탕수육을 입안으로 쏙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맞은편에서 꺼억, 트림 소리가 났다.
“아, 잘 먹었네. 참, 재승이 너 이번 시즌 경기 무차별 나가니까 그렇게 알고.”
트림을 시원하게 한 관장은 재승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 하듯 했다. 관장이 트림을 하든 말든 해맑게 탕수육이나 씹고 있던 재승이 관장 앞에서 처음으로 눈썹을 추켜세웠다. 경기에서 졌던 날과 원영의 얼굴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던 탓이었다.
힐끗, 그런 재승의 얼굴을 확인한 관장이 대단한 충고라도 하는 모양새로 말을 덧붙였다.
“한번 졌다고 미들 나가면 이겨도 무시당해. 이길 때까지 해봐야지. 아니면, 질 때 지더라도 좀 멋있게 지든가.”
“…….”
“거, 정 걱정되면 경기 전에 체육관 나오면서 방어 연습 좀 해. 공격은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느냐만, 방어는 좀 연습해야지. 처맞으면서 덤비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 이마 터진 것 좀 봐라. 좀만 더 나이 먹으면 그것도 늦게 아문다.”
“예.”
곧장 튀어나온 재승의 대답에 관장이 껄껄껄 호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재승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선수가 된 이후로는 체육관에 출근 도장을 찍는 건 피하라고 하셨는데. 연습 나오라는 말 덕분인지, 기분이 썩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관장님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이원영도 무차별에 나오는 것 같아 불안하기는 했다. 대표나 잘하지. 꼴에 타이틀 방어전까지 꼭 해야 했을까 싶었다.
재승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며 마음을 다졌다. 또 지라는 법은 절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처음 겨뤘을 때보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열심히 하고, 근육량도 지금보다 늘리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이기면 좋고, 혹여나 또 지더라도 자신은 괜찮을 것이다. 욕이라면 그전에도 충분히 먹었으니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뺀질뺀질한 낯짝 정도야 터트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재승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짜장면을 빨아들였다.
재승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링 위에 올라가 주먹질을 하는 모습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시뮬레이션을 돌릴수록 의욕이 샘솟아 올랐다. 재승은 이럴 때가 참 좋았다.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경기 날짜는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다. 재승은 역시 운동을 생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벌써부터 그날을 고대했다.
*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퇴근을 준비하는 늦은 오후 시간. 원영은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고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전혀 집중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영의 머릿속에는 며칠 내내 핸드폰 문자 하나가 동동 떠다니는 중이었다.
< 천재승
메시지
11:14 AM
이원영입니다. 주말에 시간 어떠십니까.
재승에게 이 문자를 보낸 날은 그가 마지막 스파링을 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원영은 저 문자를 보낸 뒤로 몇 분당 한 번씩, ‘도대체 천재승은 어째서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하며 도돌이표 같은 생각만 떠올리는 중이었다.
원영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향했다. 그의 핸드폰은 책상 저 끝자락에 떨어질 듯 말 듯 위태하게 놓여 있는 상태였다. 옆에 두거나 주머니에 넣자니 계속 눈이 가고 손이 가는 통에 아예 멀리 떨어트려 놓아버린 참이다. 하지만 도리어 더 힐끗거리게 되니……. 제가 생각해도 정말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애써 서류를 바라보던 원영이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안에 착 감겨드는 핸드폰의 감촉이 괜스레 낯설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떨어트려 놓은 지 이제 고작 20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원영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어이가 없고 황당한지 몰랐다.
“참나…….”
굳이 캘린더에 들어가 날짜를 확인하던 원영이 투덜거리듯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문자를 씹힌 지도 오늘로 벌써 일주일째였다. 쓸데없이 아기자기하게 생겼다 했더니만, 아기자기한 만큼 속이 좁은 모양이었다.
원영은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렸던 일이 전무했다. 때문에 이 상황이 짜증 났고, 더 나아가 아예 재승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따지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찾아갈 명분이 부족했다.
‘내 문자 왜 씹어요.’
그런 말로 따지기에는 자신 또한 살면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던 문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무시해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또 어떻게 행동했던가. 이런 스토커 같은 행동이 어쩌구…… 자신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원영은 재승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도 않고, 그에게 정색을 당하는 것도 사절하고 싶었다. 그러니 차마 그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문제는 재승의 관장이 냄새를 맡았는지 그마저 원영의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한 상태라는 것이다. 때문에 원영이 재승을 만나는 방법은 그가 문자에 답장을 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꼼짝없이 계체량 측정 날까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 이게 가장 문제였다. 계체량 측정 날까지는 앞으로도 보름이나 남았다는 거. 그건 지금까지 재승의 문자를 기다린 시간보다 더욱 긴 시간을 기다려야 재승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소리다.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야 설득을 하든, 대화를 하든 할 텐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만큼 선수를 생각하는 대표가 어디 흔한 줄 알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는 재승이 답답하기만 했다. 캘린더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원영은 이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캘린더를 닫아버렸다. 그러곤 한다는 행동이, 고작 인터넷 창을 켜는 일이었다.
원영은 서류를 볼 때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인터넷 창이 켜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이미 ‘천재승 갤러리’의 메인 페이지가 띄워진 상태였다. 서류를 보던 때와 다르게 집중에 필요한 시간은 단 3초면 충분했다. 원영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천재승 갤러리의 가장 큰 이슈는 재승의 무차별급 경기 매치 상대에 대한 추측 글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메인 페이지를 눈으로 훑어 내려가던 원영의 얼굴은 점점 의문에 휩싸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원영이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원영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페이지의 첫 글을 클릭했다. 마음속으로는 재승에게 벌어진 일이 나쁜 일은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화면을 바라보던 원영은 곧 자신의 예감대로 나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때문에 원래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원영의 얼굴은 그 이상 나빠질 수 없어 보이는 얼굴로 변했다. 마치, 원영 자신이 보고 있는 글처럼 더러운 표정이었다. 원영이 댓글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베스트 댓글
현재 게시판 상황 이해 안 가는 사람들을 위한 이슈 시작 글 링크 http://cheonjaesueng.gallery.com/&1212123=url
마침 원영을 위해 준비라도 된 듯, 발화점이 된 글의 링크가 베스트 댓글로 올라와 있었다. 원영은 당연히 그 링크를 눌렀다. 곧 ‘씨팔’하는 쌍욕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
그러니까 발화점이 된 글의 제목은 [천재승 부업도 하냐?]였다. 그리고 글의 내용은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글의 시작에 올라와 있는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탓이었다.
사진 속의 재승은 허름한 체육관의 내부, ‘춘배 체육관’이라고 쓰인 간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채 예쁘게 짜여 있는 근육을 과시하는 포즈를 취한 상태였다.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얼굴은 원영이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꽤나 사랑스러웠다.
다만, 원영의 눈에 그랬다는 거지, 생판 남인 사람이 보기에는 썩 좋아 보이는 몰골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마 정중앙에 파란 멍과 빨간 피딱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스파링을 하다가 생긴 바로 그 상처였고, 원영이 확인했을 때보다 색이 더 진해진 모습이었다.
사진에는 조잡하게 포토샵을 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상처는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고, 도리어 그의 이마를 더 괴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를테면 그것 같았다. 파랗고 빨간색의 홍채를 가진 눈.
그래서 눈 세 개 달린 캐릭터와 비교당하며 놀림거리가 된 건가. 그것도 팬 페이지에서?
생각하던 원영이 다시 ‘씨팔, 진짜.’하고 욕을 지껄였다. 원영이 처음 눌렀던 글에도 사진이 있었다. 그 눈 같은 모양에 선을 입혀 진짜 눈처럼 그림을 그린 뒤, 원영 자신과의 경기에서 기절했던 재승의 얼굴 위에 그 눈을 합성한 사진이었다.
커다란 사진 한 장. ‘형 아직 안 잔다.’라는 문구 하나. 그 두 가지만으로 기분은 충분히 최악이 되었으나, 그의 기분을 더럽히는 것은 사이트 내의 조롱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 화면을 내린 원영이 통화기록에서 비서의 이름을 찾아 통화키를 눌렀다. 뚜르- 신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울리지 않은 상태에서 끊어졌다. 곧 핸드폰을 통해서 비서의 깍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 대표님. 전화 받았습니다.
“김춘배 있잖아.”
-……예?
“내가 저번에 김춘배 통해서 천재승 케이블 광고 넣으라고 얘기했잖아.”
-아, 예.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김춘배가 거절했고, 이후에 전화 통화가 계속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 한번 방문했는데…….
“그럼 넌 알았겠네.”
대뜸 말을 자르며 원영이 묻자, 비서가 조용해졌다. 원영은 결국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원영이 이내 커다란 소리로 호통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김춘배가 천재승 케이블 광고 까고 자기 체육관 전단지나 찍게 한 거! 넌 알았던 거 아냐! 근데 나한테 왜 보고 안 했어! 왜!”
갈 곳 없던 화가 비서를 향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화가 난 것은 김춘배 관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승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일단 그를 제 손안에 묶어 둔 뒤에나 김춘배를 건드릴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원영의 짜증은 오롯이 비서가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비서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비서라고 딱히 잘한 것은 없다는 게 원영의 의견이었다.
-궁금하지 않으실 것 같아…….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내가 이만큼 알아내라 계약해라 이것저것 시켰으면! 아-! 대표님이 뭐든 다 궁금해하시겠구나! 막, 어? 그런 생각이 안 들어? 넌 눈치가 없어? 다음부턴 알아낸 거 있으면 토씨 하나 빠트리지 말고 다 보고해!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비서와의 통화를 끊고 나서도 원영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재승에게 답장 오지 않던 일주일 동안 그가 일산, 파주 근처에서 가끔 용달을 부르면 나타나기도 한다(즉, 부업으로 용달 일을 아직도 한다)는 것을 비롯해 기타 등등의 속 터지는 이야기들을 무척이나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천재승이 만약 KFC 소속의 선수였으면. 그런데 그가 휴식기에 돈이 없어 부업을 하겠다고 그랬으면. 원영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라도 재승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을 터였다. 아니, 사비가 뭔가. 만약 사비가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만들어줬을 거다. 물론 원영은 통장 잔고가 억 단위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아무튼. 그렇게 재승을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리였다.
다만, 원영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재승이 이미 일을 당했으면 그걸 아주 없었던 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대충 보아하니, 팬 페이지는 한동안 이 상태를 유지할 것 같았다.
“하……. 미치겠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원영이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낀 채 눈을 감았다. 정말 욕이 나오는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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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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