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파이트(Romantic Fight) 1권
1. Stupid Fighter
트럭 안에서 보기에도 으리으리했던 건물은 내부로 들어서자 어쩐지 눈마저 시렸다. 온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사방을 두르고 있는 커다란 창에는 지문 하나 찍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건물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비싸 보이는 옷을 두르고 있다.
하얀색 정장, 검은색 정장, 아니면 세미정장…….
재승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낡고 추레한 청바지에 얇은 후드 티. 등에 메고 있는 까만 배낭에는 그보다 더 낡은 체육복이 들어 있고, 머릿속으로 떠올린 옷장에도 세미정장은커녕 너덜너덜한 체육복에,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옷만 몇 벌이 더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재승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폈다. 재승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마음속에서야 당연히 기가 죽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삶이었다.
난 당당한데 누가 날 무시해? 혹여나 그런 놈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무시한 놈에게 달려가 개처럼 짖어주리라.
재승이 잔뜩 날이 선 얼굴로 제 주변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렸다. 아주 뻔하지만, 돈 벌러 왔다. 돈을 벌러 왔다고 해서 성격을 죽이지는 않는 성격이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재승은 사납게 두리번거리는 짓을 관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투박한 핸드폰의 화면을 켜 층수를 확인한 재승이 때맞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승이 내려간 곳에는 작은 프런트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려 묶은 직원이 유니폼으로 보이는 연회색 정장을 입은 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
“스파링 왔는데요.”
재승은 직원이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자신이 이곳에 방문한 목적을 빠르게 읊었다. 사실은 아직까지 기가 죽어 있는 탓에 이유가 있어 왔다는 것을 어필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186cm 장신의 키에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가 빠르게 제 할 말만 해대는 모습이 어쩌면 직원의 눈에는 위협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측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으시고, 그 반대편 문이 체육관 입구입니다. 캐비닛은 아무거나 사용하시고 키는 꽂아두시거나 귀중품이 있는 경우 프런트로 돌아오셔서 맡겨주시면 됩니다.”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와 대비되는 빠른 속도로 설명을 끝마쳤다. 친절한 표정 뒤에 숨겨진 흔들리는 눈동자가 재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재승은 그런 그녀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재승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르쳐준 탈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실 재승에게 있는 귀중품이라고는 고작 현금 2천 원과 주민등록증이 전부였다. 키를 꽂아두라는 말을 한 직원이 절대 그걸 알 수는 없겠지만, 재승은 그저 그녀가 그 말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재승은 좋지 않은 기분을 애써 숨기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 뒤엔 가방에 들어 있던 까만 민소매와 반바지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신고 있던 낡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었다. 캐비닛에 옷과 신발을 던져 넣은 뒤, 배낭에 들어 있던 오픈핑거글러브를 꺼내 배낭도 던져 넣어버렸다. 준비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데 캐비닛 열쇠를 맡길까? 재승이 손에 쥔 키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곧 이제 와서 무슨, 그냥 체육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재승이 잠시 체육관에 들렀다가 관장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조신하게 있다 와. 알았지? 조신하게!’
평소 관장은 재승에게 일을 가져다주면서도 시비가 걸리든, 싸움을 일으키든 벌 수 있는 네 돈만 못 벌게 돼서 아까워지는 거니 알아서 하라고 말해왔었다. 그 탓에 돈이 급하면 최대한 참고, 만약 그랬는데 좆같으면 싸우기도 하며 재승은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왔다.
그런 관장이 일을 보내며 주의를 줄 정도이니, 관장의 소개로 하게 된 오늘 일은 평소에 하던 일들과 많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아니, 사실 ‘스파링’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평소 하던 일과 비슷하기는 했다. 다만, 여태껏 해왔던 일에 비교하면 액수가 현저하게 차이 났고, 져야만 했다.
일단 돈 얘기부터 하자면, 무려 스파링 한 번당 800만 원이다. 그러니 관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재승 또한 오늘은 작은 사고도 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약된 스파링은 총 세 번인데, 그 세 번을 다 하면 무려 2400만 원이다. 없어 보여서 무시를 당한다면…… 그래, 오늘만큼은 무시당해줄 수 있었다.
덕분에 자신은 지금 2400만 원을 3주 만에 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재승은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 중 그만큼 벌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신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탈의실을 빠져나온 재승은 반짝거리도록 닦여 있는 대리석 바닥을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에 착착 감기는 시원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 좋던 기분도 딱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재승이 멀뚱히 안쪽을 바라봤다. 꼴도 보기 싫은 남자 하나가 체육관 안쪽의 링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더욱이 짜증 나는 점은 남자가 한눈에 봐도 개중 가장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봐도 관장을 통해 2400만 원을 주는 사람이 저 남자일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탓에 재승은 ‘2400만 원을 3주 만에 벌 수 있는 사람은 여기 나밖에 없어!’ 하던 찰나의 즐거움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재승이 터덜터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돈 주는 놈이 아무리 싫은 놈이라고 해도, 이렇게 큰돈을 벌어들일 기회가 다시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재승은 다음 달까지 큰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사실상 재승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건 과거의 기억에 아무리 속이 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재승이 남자를 만난 일은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었고, 그를 볼 때마다 좋은 일도 없었다. 그중 남자가 가장 싫어지게 된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전. 올해 연초의 일 때문이었다.
그날은 20xx 이종격투기 무차별급 그랑프리의 타이틀매치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틀매치의 주인공은 남자와 재승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종격투기 선수 ‘천재승’의 스펙을 설명하자면, 키 186cm, 몸무게는 80kg을 매 경기마다 유지 중이다. 거기에 공식 경기 40전 35승 4패 1무의 전적으로, 미들급 그랑프리 우승과 챔피언,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 방어 3회의 성적을 가진 꽤 흥했다고 볼 수 있는 선수였다.
재승이 공식 선수생활을 한 지는 6년인데, 미친개가 사람을 물어뜯듯 정말 미친 듯이 시원하게 상대방을 패서 끝내는 KO, 혹은 TKO를 시키고 마는 플레이를 했다.
킥복싱을 베이스로 한 장거리 타격형 선수 중에서도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돌진하는 파이터는 처음이었던 데다가, 사람을 너무 화끈하게 패서 재승이 경기를 하면 링 위는 무조건 피투성이가 됐다. 이종격투기를 즐기는 사람조차 그 피 때문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재승이 유명세를 타고 수많은 이종격투기 팬들의 호감을 얻어내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아니었다.
덕분에 재승은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20xx 이종격투기 무차별급 그랑프리 타이틀매치의 우승 후보였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매치 상대인 남자 또한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우승 후보에 올라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칭이 잡힌 이후 관장을 통해 우승 후보의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 재승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남자가 전년도 말에 느닷없이 공식 경기에 튀어나온 놈이었다는 것인데, 그건 능력이 있었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너무나도 말이 안 됐다.
그러니까, 남자는 한국 그랑프리를 주최한 코리아 파이팅 챔피언십(Korea Fighting Championship 약칭 KFC)의 대표였다.
돈도 많고 어린놈이 아무리 스포츠를 좋아했다고 한들 굳이 프로 경기장까지 나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심지어는 우승 후보라니. 아무리 운동을 잘한다고 한들 어떤 의미로든 목숨을 건 사람들 속에서 물을 흐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재승은 기필코 남자를 이겨서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마냥 들이대고 보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나가기 전 남자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듣고 공부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남자의 이름은 이원영. 스펙 192cm, 102kg 헤비급. 장거리 타격형 선수. 남자는 베이스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온갖 격투기에 능통한데(태권도, 합기도, 쿵푸, 킥복싱, 극진공수도, 카포에라, 절권도 등) 상대의 머리까지 뻗어 나가는 하이킥이 남자의 필살기였다. 하이킥 한 번이면 모든 사람이 픽픽 쓰러진다던가? 덕분에 남자는 ‘수면 마술사’라는 별명까지 얻어낸 상태였다.
하이킥이 뻗어 나오는 순간을 조심해서 남자에게 파고들기만 하면 승산이 있다.
재승은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링 위로 올라갔다. 깔보는 듯한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기 위해 눈을 치켜뜨고 가드를 올렸다.
그리고 그날. 재승은 경기 시작 3초 만에 남자의 하이킥을 맞고 기절했다.
그 때문에 스포츠팬들의 ‘미친개’로 통하는 재승은 그날 경기 하나로 몇 개월째 인터넷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잘 재우는 수면 마술사, 미친개도 잠재우는 꿈의 발길질!’
버벅거리는 넷북으로 자신이 쓰러지는 움짤과 놀려대는 댓글들을 확인할 때면 재승은 부디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첫 만남이 강렬했던 탓에, 고작 하루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근래 재승이 악몽만 꾸면 나타나는 1순위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 돈에 팔려, 지기로 약속한 스파링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기는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정말 악연도 이런 악연은 없는 것 같았다.
*
마침내 원영의 앞에 선 재승이 눈알만 굴려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살면서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일이 손에 꼽았는데, 운동을 시작하고 난 이후부터는 드문드문 이렇게 올려다볼 일이 생겼다.
재승은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만큼은 절대 들어 올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턱의 위치를 의식했다. 유치한 생각을 하는 재승의 표정은 그와 어울리지 않게 쓸데없이 비장하기만 했다. 누가 보아도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눈치채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원영은 재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지한 고민을 했다.
이 남자가 도대체 어째서, 이곳에 체육복을 입은 채 서 있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은 평소 잘만 굴러다니던 뇌를 굳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원영이 비밀리에 주최한 오늘 스파링은 공식경기에 출전할 만큼의 실력자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재승 정도 급의 선수가 필요한 경기는 절대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결재 서류에 적혀 있던 금액조차 재승을 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아마추어에서 갓 프로가 된 아마추어 챔피언 타이틀 1회 이상의 선수. 딱 그 정도의 선수가 혹할 금액.
오늘 이 자리에 올 사람은 그 돈을 받고 일을 해줄 선수뿐이었다. 그런데 천재승이 왔다. 그 돈에 천재승이라고? 회당 파이트머니로 억 단위를 받을 국내 정상급 선수가 어째서?
그래, 약간의 용돈벌이와 재미를 위하여 스파링을 할 수는 있다고 쳐보자. 그런데 이번 스파링은 무조건 져야만 하는 스파링이었다. 그러니 천재승이 재미로 왔다는 전제는 애초부터 성립이 되지 않았다.
천재승이 어떤 선수인가. 원영은 타이틀매치가 끝난 후 궁금한 마음에 천재승을 조사해봤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40전 35승 4패 1무의 전적이었다. 재승의 4패는 모두 판정패였다. 그리고 그 당시 재승의 경기 영상들을 확인하면, 인정할 수 없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심판을 향해 달려들기까지도 했었다.
말도 안 통하는 심판에게 ‘I`m hate! You! 너 싫다고, 씨발!’이라며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소리를 치던 그가, 아무리 연습경기라지만 일부러 져야 하는 판에 그 푼돈을 받고 참가를 한다니. 원영은 자신이 아닌 그 누구라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자신이 KFC의 대표 자리를 받기 이전, 천재승에게 파이트머니 말고도 연봉까지 협상을 해주겠다며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제안을 거절당한 것도 이해가 안 갔던 것은 마찬가지라, 천재승이란 사람이 원래 이해 안 가는 행동을 자주 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원영은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을 억지로 이해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원래가 즉흥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겠지. 재승을 이해하지 못해 억지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스파링? 혹시, 스파링 왔어요?”
정상급 선수에게 묻자니 괴기하게마저 느껴지는 질문을 어렵게 입에 담으며 원영이 얕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려웠던 질문이 무색해지도록 재승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스파링 상대가 안 보이는데……요.”
“다른 계약서는 미리 사인받았는데 비밀유지 계약서는 보는 앞에서 직접 사인해야 돼서 조금 이르게 불렀어요. 따라오세요.”
원영은 재승에게 등을 보이며 성큼성큼 체육관 안을 걸어 나갔다. 의문이야 남는다만, 딱히 자신에게 나쁠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 푼돈에 이 좁은 체육관에서 천재승을 부릴 수 있을 테니까.
체육관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간 원영은 테이블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서류를 재승의 앞쪽으로 밀었다. 재승은 테이블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의자에 커다란 몸을 구기듯 앉았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원영이 자신의 만년필을 재승의 서류 옆에 내려놓았다.
계약서를 대충 눈으로만 훑어보던 재승은 테이블에 만년필이 놓이기 무섭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이 커다란 걸 감안하더라도 만년필을 쥐는 동작 자체가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원영은 그 손을 가만 바라보다가 짧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 확인해 보시고, 보다가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보세요.”
“에.”
어감이 이상하기는 했으나, 재승은 원영이 생각한 것보다 빠릿빠릿하게 대답을 했다. 다만, 그렇게 대답을 잘한 사람 치고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천재승].
계약서의 (인)이 적힌 부분마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새겨졌다. ‘천재’가 조금 더 굵고 ‘승’이라는 글자는 묘하게 옅었다. 글씨는 개발새발이지만,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만년필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모습은 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위치에서 좋을 것 하나 없는 계약서에 왜 이름을 적는 것인지. 역시나 궁금증이 일었다.
원영이 곰곰이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모든 곳에 이름을 써넣은 재승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원영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난 돈 받고. 3주 동안 세 명이랑 스파링하면서 적당히 맞고, 적당히 지고. 이거 했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안 그러면 내가 돈 내고. 맞잖아! ……요.”
중요한 무언가들이 빠졌지만 어떻게 보면 재승에게는 상관없는 내용이었고, 계약서를 요약하자면 대충 그런 내용이기야 했다. 원영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리기도 하고…… 대선배신데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
“……몸 풀고 계세요. 선수 곧 도착할 거니까.”
원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승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원영은 테이블에 그대로 올라가 있는 서류들과 만년필을 챙기고 재승을 뒤따라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무차별급 그랑프리 타이틀매치 때에도 재승에게 괜한 궁금증이 생겨 그의 뒤를 밟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 흐지부지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앞으로 두 번을 더 만나면 너무 궁금해져서 답지 않게 대놓고 꼬치꼬치 캐묻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타인에게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갖는 지금도 평소의 원영답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
적당히 맞고, 적당히 지고.
말은 쉬웠지만 ‘적당히’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어서, 재승은 무식하게 피했고 또 무식하게 맞았다.
스파링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도착하자 뒤늦게 온몸이 화끈거렸다. 허벅지며 배며, 붉게 피멍이 올라올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이종격투기 선수라면 으레 그렇듯 맞는 것에도 이골이 나 있었다.
마냥 두들겨 패기만 할 수 있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똑같이 죽자고 덤비는 놈들에게 맞지 않고 이기기란 실력이나 체급이 아무리 월등히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재승은 불가능에 가깝게 진 적이 있었다. 얼핏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구기던 재승은 그런 생각 따위, 이내 훌훌 털어내어 버렸다.
깽값으로 800이나 벌었으니까. 그게 엄청난 위안이 돼서, 아무리 처맞았어도 히죽히죽 웃음마저 튀어 나왔다.
스파링을 하며 입었던 피에 젖은 체육복과 속에 받쳐 입고 있던 타이즈, 오픈핑거글러브를 곱게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입고 왔던 옷을 다시 입은 뒤에는 곧장 운동화도 신었다. 발이 퉁퉁 부어 양말은 차마 신지 못하지만, 어차피 운전을 할 땐 지금 신은 운동화도 벗어버릴 예정이었다.
재승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방긋방긋 웃던 프런트 직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맞아서 얼굴이 추해졌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경기 시즌이 끝나 조금 죽어 있는 기분이었는데, 일부러 졌다고는 해도 운동을 했더니 그제야 살아 있는 듯했다. 생각보다는 장점이 많은 일이었다. 역시, 관장님이 소개해주는 일은 해서 나쁠 것이 하나 없었다.
재승은 어딘지 모르게 풀어진 얼굴로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 원영이 뒤늦게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지만 않았더라도 재승의 기분은 쭉- 상승곡선만을 그렸을 터였다.
“병원은 또 안 가요?”
원영이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을 해주는 질문이었으나, 재승은 그 질문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았다고 친한 척인지. 3초 만에 KO 당했다고 ‘잘 자는 미친개’라며 인터넷에서 까이고, 그 뒤에는 왜 그런 실수를 했냐며 관장님한테 까이고. 전에 없이 까이며 역대 휴식 기간 중 가장 좆같은 휴식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지금 살가운 척하고 있는 남자의 탓인데 말이다.
물론, 당장 돈이 급한데 일을 준 것은 감사하다만, 그건 진짜 서로 필요에 의해 계약을 맺은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당하게 물을 수 있었다.
“왜.”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할 거냐고.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재승은 원영의 질문에 섞인 ‘또’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라는 단 한 마디만으로 모든 대화를 단절시켰지만, 민망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재승은 안내음성과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작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당연히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건물의 주차장은 넓었고,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차들의 중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용달트럭 한 대가 시선을 끌었다.
파란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그 용달트럭은 차의 측면에 용달이라는 단어와 함께 핸드폰 번호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고, 연식이 오래돼 보였다. 사실, 겉보기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오래된 차였다.
재승의 학창시절에는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가 몰았고,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재승이 면허를 따서 직접 몰았다. 일할 때도 쓰고, 이동수단으로도 쓰고. 그렇게 꼬박 35년을 달린 차이니, 사실상 지금도 굴러가는 게 용하다고 봐야 했다.
재승은 그 낡은 용달트럭의 문에 당당하게 차키를 꽂아 넣었다. 그 뒤엔 차에 올라타 신발을 벗고, 몸을 잔뜩 찌그러트린 채 안전벨트를 맸다. 작은 용달트럭이라 덩치 산만 한 놈이 타기엔 운전석이 비좁았지만, 몸을 구겨 넣고 운전을 하는 데 익숙한 터라 재승은 그게 이상하기는커녕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집으로 출발할 준비를 끝마친 재승은 곧장 차에 시동을 걸지 않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 화면을 커다란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터치해가며 통화목록에 들어갔다. 재승의 통화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번호는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용달 고객들의 번호였다. 그 번호들의 사이사이에 관장님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었고, 그렇게 번호들을 열심히 제치고 나서야 큰아버지의 번호가 나왔다.
돈 버느라 바빠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큰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흘러 있었다. 하긴, 원래도 그렇게 자주 통화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재승이 가만 무언가를 떠올렸다.
재승은 큰아버지와 통화를 하면 꼭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재승의 부모님은 그가 갓난쟁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문에 재승을 키운 것은 그의 조부모님이셨다. 하지만 그중 할아버지는 재승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재승이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재승의 큰아버지는 조부모님의 살아생전에도 명절 하루를 빼면 잘 찾아오지 않았었다. 게다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상주를 재승에게 맡긴 채 장례식의 첫날과 끝날, 딱 두 번만 얼굴을 비췄으니까.
오죽하면 운구할 사람이 없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용달 하며 가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관을 들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체육관에서 얼굴이나 마주치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수고비를 쥐여줬었다.
그러니 재승이 큰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재승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큰아버지에게 두 명의 자식이 있는데, 재승은 그 아이들을 좋아했다.
큰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용달트럭을 타고 서울에 올라갔었다. 처음 보는 아기도 좋았고, 처음 구경하는 서울도 좋았다. 이후에 애가 하나 더 태어났고, 애들이 자신을 따르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물론 큰집의 아이들 또한 장례식장을 제대로 지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첫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둘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했었다. 그래서 놈들이 장례식장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재승은 이해했다. 자신은 생전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지만,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려면 고등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손자 녀석들은 누구든 다 예뻐하지 않으셨나. 그러니까, 재승은 큰집의 어른들만 미웠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거는 것은 모두 큰집의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짧은 회상을 멈춘 재승은 이내 통화키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기다릴 땐 꼭 길게만 느껴지는 신호가 여러 번 울렸다. 그러다 답답함에 화면을 확인하려고 할 즈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남자는 첫마디를 내뱉음과 동시에 목소리만으로 귀찮은 티를 냈다. ‘여보세요’라는 말의 뒤에 ‘귀찮게’라는 말이 따라올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재승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리어 싫은 사람의 목소리에 반가움을 느꼈는지 얼굴 가득 화색을 띠었다.
“큰아버지! 저 재승이예요.”
좁은 용달트럭 안에 재승의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게다가 통화의 목적이 목적이었던지라, 재승의 높은 목소리에는 뿌듯한 마음마저 담뿍 느껴졌다.
덕분에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던 상대방도 통화의 목적을 깨달은 듯했다. 사실 재승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큰집에 도움이 될 때면 재승은 늘 칭찬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칭찬을 해줘야 하는 큰아버지는 언제나 귀찮아서 모르는 척했고, 재승은 자기가 칭찬을 바라는지도 몰랐다.
분명 오늘도 반복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어어, 알지! 우리 덕수! 그래, 어쩐 일이야?
재승의 큰아버지는 언제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냐는 듯, 반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재승의 통화를 반겼다. 하지만, 시큰둥한 목소리를 들었을 땐 눈치채지도 못하던 재승이 지금은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개명한 지가 언젠데-”
-그래! 무슨 일이라고?
재승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큰아버지는 사설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금 전화의 목적을 묻는 통에 재승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덕수야, 뭐하냐!’ 뒤이어 큰아버지가 똑같은 이름을 다시 읊었다. 인상을 찌푸린 재승이 당장 욕을 내뱉기라도 할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재승은 다시 없을 인내심을 발휘해 욕지기를 참아냈다. 어차피 원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 같은 건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큰아버지랑 싸우지 말라는 말씀을 엄청 자주하셨다. 결국 재승은 별수 없이 말을 이었다.
“……저번 달에 집값 올랐다고 급하게 돈 필요하다고 하셨던 거요. 그거 오늘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아, 벌써? 그래, 고맙다! 원래 돈 보내던 통장으로 보내줘.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또 통화하자? 우리 덕수,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하고!
큰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말 끊어진 건가? 귀에 붙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재승은 이내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조수석 의자를 향해 핸드폰을 집어 던져버렸다.
요즈음 큰집 애들이 전화는 안 하고 문자만 보내서, 괜히 맞춤법이라도 틀렸다가는 창피하니 답장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애들이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 할 말만 하고.
한참을 혼자 구시렁거리던 재승이 내비게이션에 근처 우체국을 검색해 찍었다. 큰아버지에게는 불만이 많지만, 그 집에 같이 사는 애들은 죄가 없으니까. 통화하며 말했던 대로, 부쳐주겠다고 말한 돈만큼은 제대로 부쳐줄 요량이었다.
*
시내에 나와 있는 덕분에 우체국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재승은 우체국에 도착하자마자 통장정리를 하고, 그 뒤엔 대충 통장을 확인한 뒤 곧장 큰아버지의 통장으로 1000만 원을 송금했다.
기계를 빠져나온 통장을 펼쳐 그 안에 찍힌 큰아버지의 이름을 잠시 바라보던 재승은 이내 통장을 덮은 뒷주머니에 곱게 집어넣었다. 그 뒤 재승은 우체국의 내부를 크게 둘러봤다.
잘 배우고 잘사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라 그런지 고작 우체국인데도 정장 입은 사람이 넘쳐났다.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을 하며 바쁜 것은 똑같은데, 재승이 사는 동네에 비하면 이곳의 사람들이 조금 더 분주한 것도 같아 보였다. 재승은 바빠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찰나, 히죽 하고 웃었다.
자신이 정장을 입지는 않았지만, 이 좋은 동네에 일을 하러 왔으니 오늘만큼은 여기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좋은 동네로 좋은 나라로 경기를 하러 가면 재승은 늘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기분이 좋아지고는 했다. 그러니 기왕 좋은 동네에 왔는데 사람 구경이라도 조금 하고 가는 건 어떨까 싶었다.
많이 맞았고. 일부러 라고는 해도 졌고. 심지어는 집으로 돌아가 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근데 밖에 있으면 사람 구경도 하고, 어쩌면 이종격투기 팬을 만나서 잠깐 동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재승은 곧 그런 생각을 거둬들였다. 우체국 내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재승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꼭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을 보기라도 한다는 듯. 밖으로 나온 동물원의 맹수를 신기해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재승은 자신을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조금 전 제가 했던 생각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까짓 게 우리랑 비슷하다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 쓰나, 무식한 게.
성격만 더럽고.
할 줄 아는 건 주먹질밖에 없으면서.
이젠 그 주먹질도 한물갔지.
자주 확인하는 인터넷기사의 악플들을 조합해보면 사람들이 저를 비웃으며 할 말도 대충 짐작이 갈 수밖에 없었다.
“씨팔, 구경났나. 뭘 이렇게 야려대…….”
결국 재승은 미간을 잔뜩 모으며 으르렁거렸다. 재승의 욕지기에 한순간 우체국 안이 고요해졌다.
재승은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한 채 터벅터벅 우체국 안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몸도 욱신거리고 배도 고팠으니까. 애초에 집에 가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잊지 않고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재승이 우체국을 빠져나와 낡은 용달트럭에 몸을 싣기 무섭게 해는 빠른 속도로 저물어갔다.
환하지만 콱콱 막히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그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도 한참 동안 새로운 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가로등 하나 없이 컴컴하고 비좁은 비포장도로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재승의 집이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재승은 익숙한 듯 좁은 길로 산을 탔다. 헤드라이트로 비춘 정면에는 커다란 장승 세 개와 산길뿐이었다. 그렇게 장승을 지나 산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고 나자 곧 재승의 집이 보였다.
재승의 집은 담도 없이 덜렁 놓여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한때는 옥색이었지만 지금은 검게 때가 탄 기와지붕과 칠이 벗겨지다 못해 이가 나가기까지 한 시멘트벽 때문에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그러나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이라 할지라도 이 집은 재승이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다. 할아버지의 것이었다가, 할머니의 것이었다가, 결국은 자신의 것이 된 집. 어렸을 때부터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집이라 낡기는 했을지언정, 재승의 눈에는 절대 으스스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재승의 할머니는 재승에게 이 집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할머니는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노파심 가득한 얼굴을 하며 재승을 불러 앉혔었다.
‘물려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그냥 짐이라도 덜었다고 생각해. 다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집에는 미련 갖지 말고 큰아빠 따라가서 꼭 상속 포기한다고 말하고. 빚 생각하면 서운할 것도 없어. ……욕쟁이 영감, 애 놔두고 왜 이렇게 빨리 따라왔냐고 뭐라 하겠네. 잘 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듯 보였지만, 할머니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랐다. 재승의 할머니는 그 말만을 유언으로 남긴 채 돌아가셨다.
살아계신 할머니는 늘 과묵하기만 하셨고, 그 과묵한 노인네가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과묵한 모습조차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더욱 믿기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장례식장에서 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재승은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겨우 인정했다. 깨닫기 무섭게 너무 외로웠다. 그랬기 때문에 재승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더 이상은 두 분이 안 계신데, 두 분의 흔적이 남은 집조차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덕분에 세 식구가 살던 매매 3000만 원짜리 집은 재승의 것이 되었다. 덤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원비로 만든 4000만 원의 빚도 재승의 것이 되었다.
그때 재승의 큰아버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을 하며 재승보다 먼저 상속 포기 서류에 사인을 한 상태였다. 그러곤 갖고 싶지도 않아 했던 집을 재승에게 양보한 것처럼 굴었다. 재승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나서 허투루 돈 쓰는 법도 잘 몰랐다. 큰아버지는 그런 재승의 돈을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모두 재승의 할머니가 우려하던 그대로였다.
속는 재승이 속은 걸 모르니 배부른 놈만 계속해서 배가 불렀다. 재승을 속이는 사람이 비단 큰아버지뿐만이 아니었기에 재승의 빚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4000만 원이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확인한 재승의 통장에는 딱 180만 원 하고도 5천 원이 저축된 상태였다. 속고 있다는 걸 모르니 재승은 여전히 그게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집 앞에 대충 차를 세운 재승이 차키 옆에 달려 있는 열쇠를 쥐고 허름한 현관문을 열었다.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거실 불을 끄지 않는 습관이 들었던 탓에 문이 열린 집 안은 온통 환하기만 했다.
재승은 익숙한 집 안을 눈으로 슥 훑은 뒤, 휘적휘적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도 모르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내뱉고는 했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서 더 이상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는 낮은 밥상 위로 열쇠뭉치를 던진 재승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며 부엌으로 향했다. 재승이 부엌에 도착했을 땐 입고 있던 겉옷 전부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태였다. 재승은 드로즈 한 장만을 걸친 채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밥은 늘 그렇듯 달리 메뉴가 없었다.
밥솥을 통째로 꺼내 온 재승은 냉장고에 있던 김치, 콩나물, 참기름, 고추장을 들이부었다. 그리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계란후라이 다섯 개까지 만들어 넣고 수저로 비비며 방문으로 들어갔다.
재승의 생활패턴대로라면 텔레비전을 보며 한 솥을 다 비우고, 목욕을 하고, 텔레비전을 또 보고,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 터였다.
막 전원을 켠 텔레비전에서는 유명한 예능프로그램의 재방송분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화면의 중간에 서 있던 사람이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자 주변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조금이라도 사람 구경을 하고 올 걸 그랬지.
재승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비빔밥이 듬뿍 담긴 수저가 재승의 입안으로 들어가며 입 주변에 흔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원영이 엘리베이터에서 재승과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난 직후였다. 당당하게 멀어지는 재승의 뒷모습을 보면서 원영은 또다시 천재승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얼마 전처럼 흐지부지 사라져버릴 관심일 테지만, 지금 당장이 중요했다. 때문에 원영은 재승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이번엔 직접 그의 자동차를 따라 달린다거나 하는 식의 무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
원영은 자신의 비서에게 그에 관한 것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딱히 급할 것은 없었기에 시간은 넉넉하게 일주일. 다음 스파링이 치러지는 날, 천재승이 건물에 도착하기 전 즈음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원영의 일주일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일을 하고 있으면 순식간에 시간이 가다가도, 조금이나마 여유로워진다 싶으면 재승이 생각났다.
경기장에서 처음 봤을 때 ‘패기 넘치네.’하고 생각했던 것. 3초 만에 KO를 시키고 ‘패기만 넘치네.’하고 생각했던 것. 경기가 끝난 뒤 용달트럭 안에서 멍하니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고, 병원은 가지 않고 곧장 국도를 달리던 재승의 용달트럭이 떠오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서 스파링 중 지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부라리면서 억지로 맞던 모습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하며 자신을 노려보던 모습까지.
그 때문에 원영은 재승에 대한 관심이 흐지부지 사라지기는커녕, 비서가 도대체 어떤 것들을 알아올지 궁금해서 애가 탔다. 그리고 그렇게 재승이 궁금해지는 때마다 일전에도 지겹도록 돌려봤던 그의 과거 경기 영상을 더욱 지겹도록 돌려보는 것으로 풀었다.
덕분에 영상을 어찌나 돌려봤던지, 그가 선수로서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에 대한 논문을 쓰라 그러면 몇십 장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시간은 흘러 오늘이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KFC에서 평가 중인 선수와 재승의 스파링이 약속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하지만 원영은 점심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스파링이 있을 건물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원영의 비서가 그를 찾아왔다. 비서는 짧은 인사를 필두로 원영이 고대하던 ‘천재승 선수’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천재승 선수의 거주지인 파주의 단독주택…… 은 현 실매매가가 2천 800만 원 정도 나옵니다. 초창기 천재승 선수의 파이트머니는 3천만 원대였고, 가장 최근 대표님께서 함께 치르셨던 경기의 파이트머니는 3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내용에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그러나 원영은 더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질문하기 시작하면 주어진 시간 내에 준비된 모든 것을 못 들을 수 있고, 그러니 한꺼번에 몰아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금액은 천재승 선수가 다니던 킥복싱체육관의 관장인 김춘배에게 입금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 스파링 건도 김춘배가 계약을 잡았고, 그 사람 통장으로 입금됐습니다. 그래서 김춘배 관장이 천재승 선수의 매니지먼트적인 일을 전부 봐주며 책임을 다하고 있나 최대한 알아보았습니다…… 만. 그건 확실히 아닌 것 같았습니다.”
“……뭘 보고?”
“천재승 선수가 성격 논란이 있기는 해도 이종격투기 선수할 얼굴은 아니다, 잘생겨서 성격이 더러워도 매력 있더라…… 뭐 그러면서 흔치 않게 여성 팬덤까지 끌어모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스타성 있는 선수에게 대외 활동을 아예 시키질 않았습니다. 광고나 방송 출연, 하다못해 지면광고도 다 거절하고요. 그래서 선수를 아끼나, 싶었는데 공식경기도 아니고 선수 몸 망가트릴 법한 경기는 자주 뛰게 만듭니다. 이게 천재승 선수의 자의면 다행인데, 자의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원영이 비서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건 또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원영을 바라보고 있던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송 전 인터뷰에서 자기는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는 말을 무척 자주 합니다.”
원영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이 광고 제의를 거절하는 건 많이 이상하기는 했다. 자기가 말하고도 우스운지 원영을 따라 웃음을 터트린 비서가 이내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비서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지금 말씀드리려는 것부터가 중요합니다. 대표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천재승 선수는 과거 KFC의 매니지먼트를 거절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캐스팅부서에 확인을 해봤더니, 그게 천재승 선수가 직접 거절한 것이 아니라 김춘배가 거절을 했다더라고요. 자기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면서……. 나중에 천재승 선수를 따로 만나러 갔는데, 관장님이 하지 말라 그랬다며 계약 내용도 듣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원영은 흐음, 하고 신음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장이라는 사람에게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의심 정도에 그칠 만했다.
어쩌면 정말 아버지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믿을 만해서 매니지먼트의 권한을 넘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원영은 다시 비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천재승 선수 쪽으로 운동복 협찬을 넣었던 담당자의 이야기입니다만. 협찬 계약 당시에 김춘배가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해서 천재승 선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천재승 선수가…… 유명한 선수는 월급으로 천만 원도 버냐고…… 물어봤답니다.”
“……뭐?”
“자기는 월급이 아직 200만 원밖에 안 돼서, 매니지먼튼지 뭔지도 멋있지만,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관장님한테 하고 싶다는 말도 못 했다고…… 기타 등등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너무 많이 하기에 농담하는 줄 알고 그냥 웃었답니다. 그 선수 농담 너무 재미없다고…….”
“잠깐, 잠깐만.”
원영은 자신에게 열과 성을 다해 브리핑을 해준 비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두통이 이는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농담. 그래, 농담이면 참 재미없겠지만, 믿기지 않게도 그게 농담이 아닐 것만 같았다. 원영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놈은 자신이 맞아도 아픈 줄 모르고, 감기 같은 잔병에도 안 걸리고…… 뭐 그렇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고.
멍청함 덕분에 아픔에 둔감해지는 능력이 생긴다면, 게다가 본격적으로 운동할 수 있을 만큼의 체력과 신체조건이 된다면. 확실히 이종격투기 선수는 그 ‘멍청이’의 천직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천재승이라는 선수는 다른 건 몰라도 이종격투기에서만큼은 재능이 있는 선수다. 만약 천재승의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간에 선수가 천직이라고 틀림없이 말할 터였다.
……천재승이 천하에 다시없을 멍청이이기 때문이었던 걸까?
그렇구나. 어쩐지 병원을 안 가더라니.
“이거, 이거 멍청한 건가? 아니, 멍청해서 속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지?”
“……멍청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속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종학력은 중졸이더군요.”
“양아치 새끼여서 안 배운 거야, 돈이 없어서 못 배운 거야, 그것도 아니면 원래 어디가 좀 모자란 거야?”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들은 원영이 파하,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질문은 사실 비서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정말 너무나도 궁금해서 눈앞에 천재승이 있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근데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 정도의 멍청함이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었던 걸까? 이 정도로 멍청한 사람을 캐릭터로 만들면, 만약 시트콤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욕을 먹을 것 같은데 말이다.
원영이 미친놈처럼 피식거리며 재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쌍까풀 없이 커다란 눈을 홉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 마주칠 때마다 짓는 그 표정 하며, 말 놓으라 하기 무섭게 ‘그래’하고 대답해버리는 싸가지 하며.
절대 보통 성깔이 아니었던지라 아직도 그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은 것에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난생처음 보는 진짜배기 호구가 억대 파이트머니를 받는 선수라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체육관의 문이 열렸다. 링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고개가 막 열린 문 쪽을 향했다. 재승이 체육관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재승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 곧 눈치 빠른 비서가 원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서는 시키지도 않은 인사를 담백하게 하더니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비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원영이 이내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재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재승은 일주일 전 그대로 까만 민소매에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오픈핑거글러브를 낀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어째서인지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원영의 눈에는 그가 문명을 처음 접한 몸만 좋은 원시 부족처럼 보였다. 비서에게 들은 것이 완벽한 사실이라면, 지능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꾸 그에게 눈길이 갔다. 원영이 넋을 놓은 채 재승을 바라봤다.
링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재승은 이제 방향을 틀어 운동기구들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고 경기를 뛰는 것이 직업인 주제에, 운동기구를 보는 무표정한 얼굴에 얼핏 호기심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재승이 체육관 구석구석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는 동안, 원영은 비서와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런 재승의 뒤꽁무니를 눈으로만 졸졸 좇았다. 그러다 얼마 뒤, 겨우 정신을 차린 원영은 생각했다.
설마 내가 안 보이나?
물론 재승은 계약한 스파링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러니 원영과 딱히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원영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턱 끝을 긁다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비서의 브리핑이 생각보다 길었나 싶었지만, 시간은 오후 1시 반. 아직 2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인사성은 밝지 않으신데, 시간관념은 철저하신 모양이다. 원영은 어처구니없이 웃으며 재승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일찍 오셨네요.”
인사할 타이밍은 훨씬 지났다만, 그래도 다정해 보일 만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을 조물거리고 있던 재승이 흠칫 몸을 떨며 뒤를 돌아봤다. 재승의 얼굴은 다정했던 원영과는 다르게 반갑게 인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
재승은 대답이 없었다. 치켜뜬 눈알이 어찌나 살쾡이 같은지, 자신이 알고 보면 시비조로 말을 걸었던 게 아닐까,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원영은 답지 않게 더욱 방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설마 이 말조차 시비조로 들리진 않겠지. 원영이 재승의 눈치를 살폈다.
“…….”
재승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치켜뜬 눈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재승이 무언가 고민이 되기는 한다는 듯 눈알을 한 바퀴 굴렸다. 재승의 눈치를 살피던 원영은 만약 이 말도 씹힌다면 도대체 또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고민했다.
날씨? 날씨가 좋아졌네요?
그렇게 할 말을 정하고 입을 열려는데, 그 순간 다행히도 재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건물 식당에서 먹었는데 맛있더라.”
“아, 식당에서 사드셨어요? 저한테 식권 달라고 하시지. 제 번호 아세요? 없으면 지금 찍어 드릴까요? 다음에 오실 때 전화하시면 만나서 식권 받아 가셔도 되고, 그거 아니면 제가 괜찮은 식당 꽤 많이 아는데…….”
말하면서도 뭔가 너무 구구절절하지 싶기는 했다. 만약 단둘이 식사할 기회가 생긴다면 갖고 있던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리지 않을까 싶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반응을 얻을 만큼은 아니었을 텐데.
원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원영을 바라보는 재승의 눈이 별 수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 혹은 사기꾼을 알아본 선량한 시민이라도 된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좋은 뜻에서 한 말이니 의심하지 마라, 하는 의미에서 지어 보인 미소였지만, 그 미소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워 보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괴한 표정으로 원영을 바라보던 재승이 이내 원영에게서 시선을 떼고 등을 보였다.
“……나 이거 쓴다.”
재승이 샌드백 위에 툭툭, 가벼운 훅을 날렸다. 그리곤 원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샌드백을 끌어안고 니킥을 차기 시작했다.
팡! 팡! 팡! 팡!
일정한 속도로 시원한 타격음이 울렸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재승은 정신없이 니킥을 차면서 샌드백을 끌어안고 있는 고개는 절대 들어 올리지 않았다. 앞의 말은 무시를 당한 게 확실했고, 더불어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원영은 엉거주춤한 움직임으로 출입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선수가 몸 풀 땐 방해하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타이밍을 봐야 할 듯 보였다.
*
내리 10분 동안 샌드백과 데이트를 한 재승이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다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드세요.”
밖에 나갔으려니 하고 생각했던 원영이 어디선가 나타나 재승의 앞으로 생수병을 내밀었다.
재승은 내밀어진 생수를 바라보며 짧게 고민하다가,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생수병을 받아 들었다. 짧은 운동이라도 운동 후엔 꼭 시원한 생수를 마셔줘야 한다.
하지만 곧장 뚜껑을 따서 머금은 물은 시원은커녕 미지근하기 그지없었다.
꿀꺽, 꿀꺽, 꿀꺽.
연달아 세 모금의 물을 삼킨 재승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병을 내려다봤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놈이 계속 말을 거는 게 이상해서 무시를 했는데, 그래도 물을 가져다주더라니. 역시 저번부터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게, 이건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맞지 싶었다.
게다가 기분이 나쁘지 않고 묘한 것을 보면 아주 악질이었다.
꺼지라고 해?
말아?
재승이 짧게 고민하며 생수의 뚜껑을 닫았다.
“…….”
결국 재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게 아니었던지라 막상 화를 내기가 애매했던 탓이다.
심지어 그가 고용주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됐다. 아직 입금되지 않은 1600만 원의 돈이 남아 있으니까. 재승은 기간을 채워 스파링을 끝낸 후, 꼭 그 돈을 받아내고 싶었다. 아까워서 쓰지는 못하겠지만,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할 것 같았다.
그냥 거슬리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지 않겠느냐고 좋게 좋게 말해야겠다.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재승이 눈을 치켜뜨며 원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원영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고 있었나 싶어 기분이 나쁘다가도, 저를 보며 이렇게 방긋 웃는 사람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때문에 재승은 말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원영이 쓸데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미트 칠래요? 봐 드릴까요?”
순간 재승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어린아이에게 ‘사탕 줄까?’라고 물으면 볼 수 있을 만한 표정이었다. 재승은 뒤늦게 표정을 다잡았지만, 원영은 이미 미트가 쌓여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한 뒤였다.
재승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문 채 바쁘게 움직이는 원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이것도 시비를 걸려고 해준다고 그런 걸까? 하긴, 본인이 더 실력이 좋다고 생각해서 약 오르라고 물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재승의 미트를 봐주는 관장은 재승이 처음 운동을 배울 적에도 재승을 이기지 못했다.
게다가 미트 치면 자기가 맞을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시비가 될 수 있을까?
좋을 대로 생각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부정적인 생각이 서로 뒤엉켜 머릿속이 혼잡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재승은 미트가 엄청나게 치고 싶었다. 물론, 운동하는 사람 중에 미트 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터다. 하지만 재승의 입장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재승에게 미트는 관장의 기분이 좋고, 관장이 바쁘지 않은 날만 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초창기 운동을 막 배우던 때를 빼면 관장은 재승을 위해 미트를 들어준 적이 거의 없었다.
관장은 돈 내고 운동하러 오는 사람을 봐주고, 재승은 그냥 혼자 운동하다가 각종 스파링과 경기장에만 끌려다녔다. 게다가 도장에 친구라도 있으면 모를까, 친구도 없다.
아니, 도장에만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재승의 인생 자체에 친구는 없었다. 그러니 재승에게 미트를 봐줄 사람은 관장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재승에게 원영이 미트를 봐준다고 말한 것이다.
원영은 체급도 재승보다 크고, 선수 활동도 하는 데다가 재승을 이기기까지 한 선수였다. 재승은 지난주까지 그 ‘자신을 이겼다’는 부분에 마음이 상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덕분에 원영의 말이 더 유혹적이라고 느꼈다.
맘 놓고 쳐도 될 것이다. 아무리 세게 쳐도 관장처럼 욕을 하지도 않을 거고, 한 1분 도와줘놓고 힘들다며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하긴, 자기가 도와준다고 그래놓고 욕하면 그게 미친놈이기야 했다.
재승이 곰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준비를 마친 원영이 재승의 앞으로 다가왔다.
원영은 재승보다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양 팔목에 끼운 미트 두 쪽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정강이용, 복부용 미트까지 완벽하게 차고 있는 상태였다. 그걸 보자 내심 신나 하고 있던 재승의 마음이 조금 더 들떴다. 원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바로 갈까요?”
“……응. 근데, 양복 괜찮아?”
“괜찮아요.”
원영의 가벼운 대답에 재승은 들고 있던 생수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재승은 원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말이었다.
*
고급스러운 진회색 정장 위에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색의 미트들을 찬 남자가 링 위로 올라갔다. 곧이어 까만 체육복을 위아래로 입고 있던 남자가 링 위로 올라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진다. 남자의 까만 민소매 티가 하늘하늘거리며 링 아래로 떨어졌다. 상의를 벗어 던진 재승의 원시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다.
재승을 바라보던 원영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일주일 전에도 생각했지만, 경기 시즌이 아닌데도 체지방률이 10퍼센트 아래쪽으로 보이는 몸이었다.
사실 재승은 할 게 없어서 운동만 하고, 애초에 지방이 잘 생기지도 않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어제저녁에도 탄수화물 한 솥을 뚝딱 해치웠고, 오늘 점심에도 건물 식당의 밥솥을 반 통이나 해치웠다.
물론, 그 사실을 원영이 알 수는 없었다. 때문에 원영의 눈에 재승은 시즌 전에도 관리가 철저한 선수처럼 보였다.
“잽, 투, 원투, 원투, 원투.”
원영의 낮은 구령 소리가 끝날 때마다 재승이 미트에 주먹을 날렸다.
“원투 훅, 원투 어퍼, 킥.”
몇 번 더 구령을 붙여가며 재승의 움직임을 보던 원영은 이내 구령 없이 미트를 찬 팔로 재승에게 공격을 날렸다.
재승은 빠른 속도로 원영의 잽을 피하고, 다시 원영의 배에 킥을 날렸다.
“좋아요.”
칭찬과 함께 낮은 높이의 킥이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재승이 날아오는 원영의 다리를 붙잡고, 그의 배에 니킥을 넣었다. 다시 ‘좋아요’하고 재승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트를 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교과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일사불란했다. 재승은 워낙 다치는 것에 겁이 없는 편이라 상대방을 잘 바라봤고, 덕분에 원영의 움직임을 놓치는 일도 없었다.
미트와 주먹이 부딪치는 타격음, 반격기를 넣을 때마다 들리는 칭찬. 모든 것이 흡족해서 재승은 경기에 출전했을 때만큼 집중한 표정으로 미트를 쳤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 반격기를 맞고 다시 새로운 동작을 해야 하는 원영이 팔에 끼운 미트 두 개를 부딪쳤다.
“그만.”
원영이 짧게 말했다. 그 뒤 원영은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링을 빠져나갔다. 가드를 내린 재승은 벌써 끝인 건가 싶어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원영이 뒤를 돌아봤다. 재승의 표정을 확인한 원영이 픽 하고 가볍게 웃었다.
“10분 정도 친 것 같으니까, 좀 쉬었다 다시 해요.”
원영의 말에 재승은 언제 서운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번 더 픽 웃은 원영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원영이 링 밑으로 내려간 이유는 재승이 샌드백 밑에 내려놓았던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함이었다. 물병을 챙겨 든 원영은 다시 링 위로 올라가 재승에게 물을 건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재승은 저에게 물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재승이 반가운 얼굴로 물을 받았다. 원영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기 시작한 재승을 내려다보다가 또 픽,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궁금증 몇 개 풀어보겠다고 생전 해본 적 없는 물심부름을 해다 주고, 거기에다가 10분 뒤에 다시 미트를 치자는 말까지 해버렸다. 확실히 평소 원영이 하는 행동에 비해 효율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효율만 따지며 행동하기엔 원영은 생각보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재미있었다.
일단 재승과 미트를 치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운동을 좋아하니까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상대방이 천재승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 같았다.
재승은 딱 자신이 생각하는 움직임으로 미트를 치는 데다가, 쓸데없이 집중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원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재미의 포인트는 그를 칭찬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재승은 원영이 칭찬을 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원영은 그게……. 귀여웠다.
시꺼멓다 못해 덩치마저 사파리 속 짐승만 한 사내놈이 어쩌다가 귀여워 보였는지는 몰라도, 신기하게도 계속 귀여웠다.
어째서일까.
잠시 생각하던 원영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이를테면 길고양이를 길들였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 것 같았다. 원래 조금 관심이 갔는데, 따르니까 더 예뻐 보이는 그런 거.
물론 재승의 근육은 길고양이가 아니라 표범에 가까웠지만, 치타도 아프리카에서는 고양이 취급을 받으니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을 마무리 지은 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다시 칠까요?”
“그래.”
훈련 잘된 치타가 빠르게 대답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원영이 피식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역시 귀여운 게 맞는 것 같았다.
*
오후 2시 반. 재승과 미트를 친 원영은 입고 있던 정장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 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음을 인지했다.
대신에 원영은 재승과 사담을 나눌 수 있는 타이밍을 얻어낸 듯 보였다. 미트치기로 얻어낸 친밀감 덕분인지, 재승은 원영의 ‘목마르지 않아요?’ 하는 질문 한 번에도 쉽게 원영을 따라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원영은 재승을 프런트 근처의 자판기로 데려가 그가 고른 시원한 이온음료 두 캔을 뽑았다. 그 뒤 두 남자는 체육관 내부의 작은 방에 마주 앉았다.
캔을 따는 청량한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꿀꺽꿀꺽 음료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원영은 그 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캔을 땄다. 재승을 향한 원영의 내적친밀감과 물리적 친밀감은 상당해진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덥석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먼저 나눌 만한 적당한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재승이 먼저 말을 걸 일은 없어 보이기에, 이야기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원영이 골라야만 했다.
“……오늘 스파링이요.”
“어?”
“오늘 경기하는 애 주력이 주짓수거든요.”
“……그래?”
“실력은 지난주에 스파링 했던 애랑 비슷할 거예요. ……굳이 그때처럼 많이 맞아줄 필요 없다고요, 실력 차이도 많이 나는데. 그냥 잘 피하다가 바닥에 잡힐 때마다 한 3초 버티고 바로 탭 치세요. 그라운드형 애들이 힘만 세서…… 오래 버티거나 반격하다가 괜히 운 나빠서 어디 부러지고, 팔이라도 빠지면 안 되잖아요. 곧 시즌도 시작하는데.”
“오…….”
감탄사를 내뱉는 재승은 네가 왜 나를 걱정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딴에는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걱정해줄 만큼 친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느닷없이 말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원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어차피 인성 보려고 하는 경기인데, 너무 많이 맞으시니까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말을 끝내고 보니 정말 그때 당시에 마음이 조금 그랬던 것도 같았다. 물론, 경기에서 하이킥 한 방으로 기절을 시켰던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그때 짧게라도 뒤를 밟았던 이유가 사실은 마음이 조금 그래서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싸한데?
의외의 것을 깨달은 원영의 눈이 반짝하고 뜨였다. 그와 동시에 재승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대답을 한 재승의 표정은 얼떨떨해 보였다. 원영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저의를 가늠하다가 눈치 없는 자신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듯해 막 포기한 참이라 그랬다.
그 사실을 원영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원영은 딴에 다른 이야기로 말문도 틔웠겠다, 드디어 재승에게 궁금하던 것 중 한 가지를 묻기에 이르렀다.
“근데, 돈 관리를 관장이 해주나 봐요?”
원영의 질문에 재승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유는 당연히 관장 때문이었다. 관장은 재승에게 밖에서 자기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그냥 어떤 이야기든, 어느 장소에서든 말을 아끼라고 지시했다.
물론, 그런 지시를 처음 들었을 때야 재승도 관장에게 반항을 했더랬다. 하지만 ‘협찬사에서 네가 말을 많이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말 많이 하면 협찬을 빼버린다고 하더라.’ 라고 말하는데 할 말이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게 조금이라도 말을 많이 했다 싶으면 진탕 욕을 얻어먹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관장의 말대로 닥치고 있는 편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었다.
‘덕수야. 남자는 과묵해야 멋있다.’
재승은 살아생전 전혀 과묵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여태껏 정신승리를 해왔다. 타이틀매치 인터뷰에서 상대방 선수가 시비를 터도 열심히 참았고, 그러다 경기에서 묵사발을 만들어줬다. 그렇게 재승은 대체로 관장의 말을 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근래에도 성깔을 못 버려 말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무차별급 그랑프리 타이틀매치의 경기 전, 타이틀매치 인터뷰가 있던 날이었다.
이종격투기의 인터뷰는 일반 팀플레이를 하는 스포츠경기의 인터뷰와 분위기가 다르다. 치고 박고 싸워서 누구 하나가 기절하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사기를 잃어 항복을 해야만 하는 경기이기 때문이었다.
인터뷰가 있는 날이면 매치를 하는 선수 두 명은 각각의 테이블에 앉아 상대방의 약점을 헐뜯으며 공격하는 말을 한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어가며 싸움을 부추기고, 그날 선수들이 내뱉은 말들 중 가장 센 말을 추려 기사로 내보냈다.
서로를 헐뜯던 선수들은 화가 나서라도 사기가 충전되고, 지켜보는 관중들은 관중들대로 그들의 말싸움에 흥분한다. 원래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법인데, 그들은 곧 몸싸움까지 할 예정이니 그만큼 재미있는 게 없을 터였다.
기다란 테이블 두 개가 나란히 놓이고, 각각의 테이블에 원영과 재승이 앉았다. 본디 매치 인터뷰에서는 랩퍼들의 디스 전 저리 가라 하게 많은 대화가 오가지만, 재승은 쌈닭답지 않게 늘 몇 마디만 하고 인터뷰 내내 말이 없었다. 때문에 기자들은 재승이 쇼맨십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가 없었다.
오늘은 어떤 말실수를 할까. 제발 오랜만에 큰 거 하나 터트려줬으면.
대부분의 기자들은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재승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이크를 든 재승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신기일전 해서 경기에 임하는데, 이번에는 더 신기일전 할 예정입니다. 1라운드 안에 승부 봐야죠. 안 그러면 가오가 안 살잖아요.’
신기, 일전.
발음이 너무나도 또박또박했던 탓에 누가 들어도 사자성어를 정확히 모르고 사용했다는 것이 티가 났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실수야 재승에게는 늘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아주 무난하게 평소의 재승과 같을 뻔했다.
‘크흑.’
원영이 웃음을 터트리지만 않았다면.
KFC의 대표라는 놈이 대표질이나 잘하지 선수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고 안 그래도 원영을 고깝게 생각하던 재승이었다. 심지어 바로 전 마이크를 들었던 원영은 ‘이겨봐야죠.’라고 단 한마디만을 한 뒤 재승에게 발언권을 넘긴 상태였다.
재승은 상대방이 시비를 걸 때도 기분 나빠 했지만, 시비를 안 거니까 오히려 더 기분이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진짜 이길 수 있어서 말을 더 안 하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비웃음까지 당하니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던 자격지심이 철철 흘러넘쳤다.
결국 재승은 참지 못했고, 원영을 향해 소리쳤다.
‘야! 너 왜 웃어?’
‘아니…… 신기가 있으신가, 해서.’
‘……씨발, 뭐든!’
덕분에 상황은 흥미진진해졌다. 자기에 있던 기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자자, 이원영 선수는 원래 잘 웃지도 않으시고, 경기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걸로 유명하신데요. 이원영 선수가 관심을 가진 선수는 천재승 선수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번 싸워보고 싶었던 선수였을까요?’
‘글쎄요. 사람이 독특하기는 하네요.’
‘천재승 선수 또한 다른 경기에 비해 투지가 넘치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새끼가 알아들었으면 됐지 말꼬리 잡고 비웃잖아요! 그리고 투지가 넘칠 것도 없지. 어차피 헤비급 새끼들은 덩치만 크고 실속도 없지 않아요? 앉아서 돈이나 벌지 경기는 도대체 왜 기어 나왔대요?’
‘경기 뛰고 싶어서 대표도 받은 겁니다만.’
‘이번 경기에서 존나게 처맞아 봐야 다음부턴 아- 앉아서 구경이나 해야겠다, 그럴 건가? 내가 너 1라운드 안에 조진다. 상판대기부터 터트려줄 테니까, 경기 시작하면 마우스피스 잘 물어라.’
매치 인터뷰는 대충 그런 분위기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진짜. 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재승은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영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관심까지 가져주는 것에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고용주 말을 무시하면 좀 그렇지? 게다가 미트도 쳐주는 고용주니까. 심지어 남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대체 몇 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결국 재승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관장님이 세금이나 그런 거 잘 아니까. ……내가 숫자에는 좀 약해서.”
꽤나 길게 고민을 했던 것치고, 막상 재승이 한 대답은 별 게 없다. 재승 자신도 그렇게 느꼈지만, 말주변도 없는데 그래도 대답을 해준 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그보다 숫자에‘는’ 약하다는 말이 퍽 그럴싸하게 들렸다. 덕분에 재승은 자신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다.
*
한편 원영은 재승의 대답에 의문을 느끼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멀쩡히 돈을 받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인간이 아무리 멍청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원영은 뒤늦게 자신이 재승을 너무 띄엄띄엄 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영이 아아, 하고 작게 호응하며 다시 질문했다.
“그런 것까지 다 맡길 정도로 믿음 가는 사람이에요?”
“응. 그러니까 맡기지.”
“오오…… 관장이랑은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직접 운동 배우러 찾아갔다가?”
“아니. 열여덟 살 때 관장님이 체육관 이전한다고 용달 불러서 갔는데, 덩치 좋다고 운동 잘할 것 같다면서 운동해볼 생각 없냐고 그래서.”
“스카우트?”
원영이 말끝을 올리며 민소매 티에 가려진 재승의 가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운동을 해서 다져진 근육을 제외하고서라도 재승은 키나 골격까지 딱 운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듯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피지컬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재승의 관장은 능력이 있는 편에 속했다. 열여덟 살에 스카우트를 했는데 이 정도 수준의 선수가 될 때까지 키워놓았으면, 그가 재승으로 본전을 뽑으려고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카우트…… 맞나? 관장님이 돈 내고 도장 다녀볼 생각 없냐고 그랬었어. 근데 그땐 할아버지 할머니가 위험할 것 같다면서 반대하시기도 했고…… 돈도 없어서.”
“아…….”
“그래서 안 배운다고 그랬더니, 그럼 공짜로 가르쳐줄 테니까 몰래 나오라고 하시더라고. 뭐 배워볼 생각 없냐고 물어봐준 사람도 처음이고…… 재밌을 것 같았어.”
“예…… 운동, 재미있지요…….”
대답을 하는 원영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바로 전에 했던 생각들과 전혀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는 일렀다. 원영은 설마 하는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 채 재승을 바라봤다.
눈치 없는 재승은 원영의 반응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도 나눈다는 생각에 전에 없이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과거 또한 재승 딴에는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는 행복한 기억들이었다. 재승은 웃는 것처럼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채 말을 이었다.
“그날 밤부터 몰래 나갔는데, 첫날부터 기본기 가르쳐주시고, 일주일 뒤에는 스파링도 시켜주시고…….”
“배운 지 일주일 만에 스파링이요?”
원영이 느닷없이 목소리를 키우며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몸을 튕긴 재승은 이내 뭘 그런 것으로 놀라느냐는 듯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이겼는데? 그때 관장님도 놀라긴 하셨지. 이길 줄 전혀 몰랐대.”
재승은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원영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와중에 재승은 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조잘거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회상을 끝낸 재승의 눈이 쓸데없이 반짝거렸다.
“그 뒤부터 새로운 거 엄청 많이 가르쳐주셨어. 일 바빠서 도장 못 나가면 매번 전화도 주시고…… 할아버지 막 돌아가시고 나서는 운동 열심히 못 했는데,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관장님 만나서 운동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덕분에 돈도 많이 벌고…….”
말끝을 늘이던 재승이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용달 안 하고 어디서 300만 원을 벌겠어. 부수입도 많고……. 관장님한테 잘해야지.”
재승은 중얼거리듯 마지막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조용하고 좁은 방에 마주 앉아 있는지라 그 말은 원영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게다가 그 이후 이어지는 질문이 아주 가관이었다.
“넌 대표도 하고 선수도 하니까 매달 1000만 원도 넘게 버나?”
비서가 원영에게 해줬던 말에도 이 비슷한 질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본인의 입을 통해 듣는 질문은 충격이 남달랐다. 원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이 우매함을 차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나온, 일종의 감탄사 같은 말이었다.
원영이 대답을 했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재승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재승은 제 질문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눈을 뜬 원영이 그런 재승의 표정을 확인했다. 원영은 속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재승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오…….”
재승은 순순히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원영이 다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재승이 출전한 파이트머니를 월급으로 나누면, ‘적게 쳐도’ 월에 1000만 원은 훌쩍 넘었다. 아무리 악덕 회사라고 치더라도 선수에게 그 정도는 쥐여주었을 터다. 애가 저렇게 1000만 원에 집착하는데, 1000만 원 정도는 그냥 주지 않고.
하긴, 처음 들었던 금액은 월 200만 원이었으니, 과거에 비하여 그나마 월급이 오르긴 오른 것이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래, 사기꾼이 피해자 생각을 해주면 그게 사기꾼일까. 재승의 관장은 개새끼였다. 그것도 아주 악랄하고 악독한 개새끼.
재승은 관장을 자신의 은인쯤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지만, 현실은 관계가 시작된 이후로 내내 쓰레기 짓밖에 한 게 없었다.
스카우트는 개뿔. 운동을 제대로 시작한 놈도 아닌데 몸이 좋아 보이기에 손해 볼 생각은 전혀 없고, 그냥 ‘도장 다녀볼래?’하며 자기 도장 홍보를 했을 뿐인 거다. 그런데 천재승은 도장에 다닐 돈이 없었고, 그냥 버리자니 조금 아까웠던 거지.
그래서 조금 가르쳐 무급 용병으로 써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을 거다. 관장은 일주일 만에 기본기를 속성으로 가르친 후, 다른 회원에게만 스파링비를 받고 천재승을 링 위에 세웠을 터다.
근데 웬걸, 대충 처맞다가 질 게 빤해야 하는 놈이 오히려 스파링에서 이겨 버린 것이다. 관장은 그때가 돼서 천재승의 재능을 확신했을 것이다. 늦은 만남에 비해서 무척 빠른 재능 발견이었다.
재승이 방금 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학원 홍보하다가 능력 있는 호구를 문 운 좋은 관장의 성공 스토리였다.
심지어 재승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몰래 운동을 배우다가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까지 말해준 상태였다. 그 말인즉, 재승에게는 부모님이 안 계실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이다지도 진부하게 불쌍할 수가 있는지. 혀가 절로 내둘릴 지경이었다.
그러니 관장이 악마보다 더한 새끼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원영은 평소 동정심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편이었다. 그런 자신이 천재승에게 동정이 가는 걸 보면, 천재승은 보통 딱하고 불쌍한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관장은 그런 놈을 몇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속여먹고 있는 중인 거다.
이종격투기 선수에게 사기를 치다가 걸리면 운 나쁘면 맞아 뒈지는 엔딩까지도 생각을 해야 하지만, 천재승은 너무 멍청해서 끝까지 속일 자신이 있었을 테고. 주변에 너 속고 있다고 말해줄 사람도 없는 것 같고. 하다못해 부모님도 없고. 심지어 저를 속인 인간한테 고맙다고까지 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딱해지기만 해서, 원영은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신, 지금 자신이 알아차린 현실을 재승에게 가르쳐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으음…….”
원영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앓는 소리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캔 음료를 털어먹고 있던 재승이 원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영상 안에서 틈만 나면 욕을 지껄이고 미트를 치기 전까지만 해도 늘 노려보는 눈을 하던 사람인데, 그 얼굴이 원영의 눈에 그렇게 순하고 순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영은 말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서 몰래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준다고 치더라도, 굳이 가르쳐주지는 말자고. 바보는 바보인 채 계속 모르고 사는 편이 괜히 맘 아플 일도 없고 좋을 테니까. 조상들이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괜히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 게 원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호기심은 호기심이었다. 이쯤 되면 조금은 친해진 것도 같은데, 기왕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김에 이건 좀 물어보고 싶었다.
“근데, 진짜 중졸이에요?”
원영이 가벼운 어투로 재승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원영은 자신의 질문이 비좁은 방 안에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다는 환상을 느꼈다.
순박하고 착하던 재승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있는 게 보였다. 눈썹이 산 모양으로 휘었고, 입꼬리가 턱밑으로 축 처졌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재승은 원영에게 사나운 어투로 따지듯 물었다.
“……왜? 네가 알아서 뭐하게?”
누가 봐도 한마디 잘못 내뱉어 사람을 적대적으로 만든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수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원영의 비서가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재승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때문에 원영과 재승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원영은 아무래도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별수 없는 일이었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재승의 뒤를 따라 원영도 걸음을 옮겼다. 방 밖으로 나가자 재승이 링 안쪽으로 고개를 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턱밑을 긁적였다.
스파링이 끝나고 나서든, 아니면 그 이후든. 길게 대화할 기회가 다시 없지는 않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조금 불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선수가 원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선수를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인 원영이 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파링 아니고 비공식 경기다. 알지? 잘해.”
선수에게 해야 할 말을 끝마친 원영은 다시 재승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스파링 경기가 끝나면 재승의 기분은 더욱 안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말을 걸어야 좋을까.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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