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Lunatic Waltz
첫 증기 자동차가 나타난 지 200년.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대중교통 수단에서 가솔린 엔진의 연구 성과를 타고 완전한 개인 교통수단으로 변모하며, 도시의 거리에는 더 이상 말이 다니지 않게 되었다.
섀넌은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장점으로 더는 길에서 냄새나는 커다란 동물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점을 꼽았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모든 부분이 다 단점투성이였지만.
딸랑. 유리문이 열리며 작은 금속 풍경이 파르르 떨렸다. 단골 가게에서 담배를 사 들고 나온 섀넌이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홀트 씨.”
검은 차체에 기대선 남자가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포마드를 살짝만 발라 부드럽게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 몇 가닥이 가을바람에 살랑 흔들렸다.
섀넌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짓는 남자의 얼굴과 그 아래 말끔한 더블 슈트가 감싸고 있는 탄탄한 몸을 주욱 훑었다.
삐딱하게 기울어 있던 긴 다리가 땅을 딛고 바로 섰다. 먼지 한 톨 없는 구두 끝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 그의 눈을 마주한 섀넌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또 할 얘기가 남아 있었습니까.”
꽤 냉랭한 질문이었음에도 남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할 얘기는 없어도 데이트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섀넌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섀넌은 조수석 문을 활짝 열고 제게 타라는 듯 눈짓하는 남자를 그저 빤히 보기만 했다.
잠시 서서 그를 기다리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무릎 꿇고 애원이라도 해야 타시겠어요?”
“…….”
“진짜 꿇어요? 사람들 다 쳐다보게 큰소리로 노래도 부를 건데. 우리 홀트 씨, 게이라고 소문 다 나겠네…….”
설마 정말 그런 짓을 할까 싶다가도, 섀넌은 그가 정말 그런 미친 짓을 해서 이목을 끄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럼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어쩔 수 없겠다. 그렇죠?”
조수석 문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남자가 은근히 재촉했다. 슬쩍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결국 좌우를 살피며 마지못해 길을 건넜다.
“멘트가 이렇게 재미없어서야. 상대방이 잘도 데이트 신청에 응하겠습니다.”
남자와 마주 선 섀넌이 차가운 평을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눈이 휘어지도록 환히 웃은 남자가 조수석 문을 닫았다. 익숙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섀넌이 운전석에 앉는 남자를 힐끗 일별했다.
“운전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맞습니까? 매번 대동하던 기사는 어디로 가고.”
“일찍 퇴근시켰어요. 당신이랑 데이트하려고.”
“데이트 운운하면서 날 설득할 생각이라면 그만둬요. 분명 당신네 회사랑은 협업할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홀트 씨.”
한 손을 핸들에 얹은 남자가 섀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살짝 벌어진 그의 슈트 안쪽에서 쌉싸름한 청량감이 더해진 우디 계열의 향이 훅 풍겨 왔다.
“그런 말은 내일 아침에 침대 위에서 해도 늦지 않아요.”
“흠.”
섀넌은 남자가 제 옷깃의 먼지를 털어 주는 척하며 슬쩍 목덜미를 건드리는 것을 모르는 척 놔뒀다. 곧 검은 차체가 천천히 출발했다.
“주류와 향수는 최대한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좋은 분야입니다. 협업해 봤자 서로 브랜드 가치만 떨어진단 뜻입니다. 나라도 향수 브랜드 이름을 딴 한정판 와인은 구미가 안 당기는데.”
빠르게 지나가는 거리를 멀거니 보던 섀넌이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술은 맛이 아니라 향으로 마시는 거라면서요?”
“그렇다고 술 대신 향수를 마시는 머저리는 없잖아요.”
“어차피 향수도 알코올인데.”
“머저리 같은 소리.”
섀넌이 옆으로 살짝 틀어진 핸들을 바로 잡았다. 그제야 남자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핸들에서 손을 뗀 섀넌이 대시보드 아래에서 익숙하게 라이터를 찾아 꺼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인 그가 창밖으로 연기를 뱉었다.
“저 질투하라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무슨 소립니까.”
손을 뻗은 남자가 섀넌의 입에 있던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를 빼앗긴 섀넌이 화난 기색도 없이 그런 그를 바라봤다.
빨아들인 연기를 가늘게 내뱉은 남자가 서운하다는 듯 탄식했다. 그의 입술에 살짝 걸쳐진 담배가 움직임을 따라 위아래로 까딱였다.
“여기랑은 협업하셨잖아요. 향수 이름 딴 담배는 되고, 술은 안 된다?”
“내 맘입니다.”
섀넌이 남자의 입에서 다시 담배를 쏙 가져갔다.
“왜 맘대로 가져가세요?”
“원래 내 거였습니다. 전방 주시하세요.”
그가 남자의 턱을 잡아 다시 정면을 보게 했다. 한동안 말없이 전면 유리창을 응시하던 섀넌이 물었다.
“날 어디로 데려갈 겁니까.”
“바로 침대로 갈 건데요.”
“저녁 데이트에 그런 개매너가 어디 있습니까. 레스토랑 예약도 안 해 두고.”
“레스토랑 안 좋아하시잖아요.”
“상대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데 술 한 잔 사는 성의도 안 보인다니. 누구한테 배웠는지 연애 매너가 꽝이시네요.”
“그러게요. 제 첫 연애 상대가 좀 그런 편이었죠.”
평온하게 창밖을 보며 담배를 빨아들이던 섀넌이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당신의 첫 연애 상대가 아주 개새끼였다 이겁니까?”
“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오해하지 마세요, 홀트 씨.”
남자가 다시 섀넌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와 함께 핸들도 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운전할 땐 전방 주시하라고 몇 번을 말해.”
섀넌이 다시 핸들을 바로잡았다.
“다 보고 있어요…….”
“저번처럼 당황해서 핸들 뽑지 말고.”
“자꾸 고개가 돌아가요. 옆에 당신이 있어서.”
또다시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윈터의 턱을 잡아 다시 정면으로 돌린 섀넌이 스읍, 하고 경고했다.
“고개 돌리지 마.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운전하는 거 구경하고 싶으니까.”
“드라이브 그만하면 안 돼요?”
“차 출발한 지 30분도 안 됐어, 윈터.”
“그럼 여기 뽀뽀해 주세요.”
윈터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섀넌에게 뺨을 내밀었다. 하,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헛웃음을 흘리자, 윈터가 재촉했다.
“얼른요.”
창밖으로 담배를 버린 섀넌이 그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부우웅, 속도를 높인 차가 미끄러지듯 시내를 빠져나갔다.
“그래서, 진짜 우리 회사랑 협업 안 할 거예요? 당신 브랜드 이름 딴 와인 내고 싶은데.”
“할 거야.”
창밖으로 손을 내민 섀넌이 바람을 매만졌다. 낮게 깔린 석양이 길 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대신 올해 지나면 시작해. 내년 여름에 맞춰서 출시할 수 있게.”
여름은 옷 대신 향수를 입는 계절이거든……. 그가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한참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던 와중에 바퀴 아래 걸린 돌멩이들이 부딪히는 소음이 울렸다.
“……속도 줄여야지, 윈터.”
“네.”
여전히 눈을 감은 섀넌이 웃음을 흘리며 부드러운 은백색 머리칼과 귓바퀴를 만졌다. 짧게 머리칼을 헤집고 떠난 손을 다시 잡아챈 윈터가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 감촉이 간지럽고 사랑스러워, 윈터의 얼굴을 감싼 섀넌이 그의 뺨과 입술에 연달아 쪽쪽 입술을 부딪쳤다. 윈터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 내어 웃었다.
“앞에 보라면서요. 이러니까 자꾸 사고가 나지.”
“이런 데서 사고 낼 실력이면 운전을 안 하는 게 낫지.”
커브도 없이 일직선으로 뻥 뚫린 길이었다. 벌써 저 멀리 외곽에 우뚝 선 자신들의 대저택이 보였다.
윈터는 그날 결국 저택 철문에 차 옆면을 긁어 버렸다.
* * *
“이제 다들 퇴근하도록 해. 월요일 아침 일곱 시. 늦지 말고.”
서재 책상 위에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는 시종장을 향해 짤막한 말을 남긴 섀넌이 펜을 내려놓았다.
“주말 일정은 아직 변동 없으십니까?”
“응.”
“정말 저희가 주말 내내 저택을 비워도 불편하지 않으실는지요.”
“괜찮아.”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리말디 님.”
그린 듯 멀끔한 태도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시종장이 곧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나갔다. 섀넌은 일제히 아래로 내려가는 사용인들의 조용한 기척을 감지하곤 두 개의 빈 잔에 찻물을 채웠다.
메인 홀에 있는 축음기에서는 은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층 서재 바닥을 타고 잔잔하게 울리는 현악을 들으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들의 저택에는 달랑 한 명의 시종만 살지 않는다. 십수 명의 인간들이 1층에 머물며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한다. 모두 이름 뒤에 ‘카스티요’ 성을 단 자들이었다. 인간 중에선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가문이다.
이 ‘카스티요’들은 섀넌과 윈터가 운영하는 회사에도, 혹은 전혀 상관없는 법조계나 의학계, 온갖 분야에 퍼져 있었다. 일족들이 전부 엘리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각자 다방면으로 나름의 재능을 가져, 이제 그리말디는 언제든 손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러셀로부터 몇 대가 내려왔는지 정확히 계산해 본 적은 없지만, 이제 그의 후손이 꽤 가지를 많이 뻗은 것이다. 기실 섀넌은 지금이 너무도 편해서, 러셀 하나만을 달랑 부려 먹었던 세월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이요, 그 외의 모든 것은 결국 변하고야 만다.
섀넌은 찻잔을 손에 든 채 창가에 서서 사용인들이 차를 몰고 저택을 떠나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서재의 가장 안쪽에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손대지 않은 지 오래됐음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책등을 손끝으로 훑던 섀넌이 그중 한 권을 꺼냈다.
한때 타임라인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던 러셀의 일지를 시간순으로 정리해 깔끔한 가죽 표지를 입혀 제본한 것이었다. 물론 오직 윈터를 처음 만난 날 이후의 이야기부터 말이다.
정말로, 모든 것은 애석할 정도로 변해 버린다.
남의 환복 시중드는 직업은 질색이라던 카일은 왕족 전담 의상 디자이너가, 가끔 교양 주기가 돌아온다던 엘리자베스는 이번에 그 병이 제대로 도졌는지 돌연 수녀가 되었다.
심지어는 윈터와 자신도 변했다. 고작 1에이커도 안 되는 포도밭을 관리하지 못해 툭하면 포도 농사를 다 망쳤던 윈터는 이제 와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그가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툭하면 다 썩혔던 자신은 지금 향수 사업을 하고 있다.
새삼 돌아보면 정말 극적인 변화다. 이 책 속에 있는 과거의 자신들은 이러한 미래를 예상이나 했을까. 아마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으리라.
그렇게 모두가 다채로운 변화를 향해 달려가는 삶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다는 건 섀넌에게 매우 큰 버팀목이다.
“섀넌, 거기서 뭐 해요?”
뒤에서 윈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따뜻한 체온이 등을 감쌌다. 책을 다시 꽂아 넣은 섀넌이 몸을 돌려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냥, 잠깐 생각나서 보고 있었어.”
“갑자기?”
그의 허리를 감아 안은 윈터가 이마를 맞대며 물었다.
“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
“회사 맡기고 다시 잠적할까요?”
섀넌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래층에서 울리는 현악 소리에 맞춰, 그들은 서로를 마주 안은 채 춤을 추듯 뒤뚱뒤뚱 느리게 배회했다.
“한창 잘되고 있을 때 왜 손을 떼. 카스티요 놈들이 회사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섀넌을 가볍게 안아 올려 창턱 위에 앉힌 윈터가 그의 턱 끝과 목덜미에 입 맞추며 물었다.
“그러면 우린 언제쯤 쉬어요? 3년 뒤? 아니면……, 5년 뒤?”
“나이가 들어도 놀 생각만 하는 건 변하질 않네. 와인 사업 재밌다고 할 땐 언제고.”
“요즘 누가 자꾸 협업 제의를 거절해서 힘들어요.”
“향수를 마신다느니 자꾸 이상한 슬로건을 들고 와서 그렇잖아.”
하아……, 윈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궁색한 변명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거 제프리 아이디어였어요. 나는 분명 이상하다고 했거든. 근데 걔가 자꾸…….”
섀넌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칼을 꽉 움켰다. 그리고 끝없이 조잘거리는 입술을 제 입술로 어루만졌다.
“난 아직 재미있어.”
그가 맞닿은 입술 새로 가볍게 속삭였다.
“네 제안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재미있고. 너한테 혼나는 제프리 보는 것도 재미있어.”
입가와 뺨, 콧날에 아무렇게나 입술을 부딪은 섀넌이 윈터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가끔 길에서 우연히 널 마주치면 그게 또 새로워. 모르는 척 수작 부리는 것도 귀엽고.”
홀트 씨, 하고 부를 때 말이야. 그때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솔직히 좀 두근거려.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나잇값도 못 하고 주책이지…….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계속해서 말을 잇던 섀넌이 문득 고요해진 윈터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청회색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음악이 멎었다. 조잘거리는 대화도, 웃음소리도 사라진 서재에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아주 천천히 열리는 붉은 동공을 보며, 섀넌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뜨겁게 저를 감싸는 몸을 두 다리로 꽉 옭아맨 섀넌이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 오늘도 변함없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은밀한 속삭임이 맞닿은 입술 새로 오갔다. 검은 머리칼 위로 보이는 창밖의 밤하늘에는 둥근 만월이 걸렸다.
유리창에 등을 기댄 섀넌이 아름다운 제 연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 아이인 동시에 연인이자,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늘이자 절대적인 삶의 의미.
세상에 영원한 불변은 없다. 그러나 섀넌은 윈터가 함께라면 그 어떤 변화도 기꺼이 감내할 용기가 있었다.
내 아이는 계속 자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불변할 우리 두 사람만의 해피 엔딩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