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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Next step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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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네가 펠리사 부인의 외손녀 되신다고?”

숱이 많지 않은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이 느릿느릿 안경을 찾았다. 테이블 위의 안경을 집어 코에 걸치는 간단한 일조차 한참 걸리는 손이 이리저리 배회했다.

겨우 안경을 눈 위치에 맞게 걸치고 엘리자베스 쪽으로 고개를 내민 노부인이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오……, 그래. 정말 빼닮았어. 부인께서 젊었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군…….”

말끝을 흐린 노부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펠리사 부인께선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 내가 기억하기론 오롯이 혼자 사셨거든.”

엘리자베스는 입가에 미소를 내건 채 약간의 낭패감을 느꼈다. 과거 이곳에서 아이린 펠리사로 잠시 머물렀을 때 자신의 컨셉이 독신 노인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부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잘못 안 거겠지, 뭐. 늙으면 기억이 오락가락해. 머릿속에 안개가 낀다니까…….”

노부인은 아이린 펠리사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어루만졌다.

“부인께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지. 그분의 장례식이 아직도 생각나. 온 마을이 슬픔에 잠겨서……, 몇 달 동안은 정말 조용했어.”

먼 허공을 가늘게 응시하는 눈은 마치 당시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땐 나도 젊었는데……. 고작 50대였거든. 당시엔 50대도 청춘인 줄 몰랐어. 꼭 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더라고…….”

다시 상념에서 빠져나온 눈이 제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한 명씩 살폈다. 엘리자베스, 카일, 윈터, 그리고…….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린 노부인의 시선이 섀넌에게서 멈췄다. 노안으로 초점이 흐려진 눈이 반짝 생기를 찾았다.

“오, 전에 꼭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어. 이렇게 허여멀겋고 잘생긴…….”

섀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얼른 그녀의 말을 잘랐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아……! 기억났어. 그래, 맞아. 펠리사 부인의 장례식이었지. 어디라고 했더라……, 무슨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다고…….”

그러나 노부인은 완전히 그 시간 속에 푹 빠진 사람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청년이 어찌나 잘생겼던지, 마을 처자들이 몇 달간 그 얘기만 했었지……. 내가 생각해도 그 남자는 정말 보기 드문 미청년이었어. 나이가 들어도 미남 얼굴은 잊지 않는다고들 하잖는가? 미녀는 많아도 미남은 흔치 않은 법이니까.”

그녀가 클클 웃으며 다시 한 번 섀넌을 응시했다.

“자네가 꼭 그 미청년을 닮았구먼.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믿겠…….”

“부인.”

섀넌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노부인의 손등을 지그시 덮었다.

“실례지만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볼까 합니다.”

“……벌써?”

아무래도 노부인은 말동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녀는 수십 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 혹은 대도시로 떠난 사람, 남의 저택 담장을 넘어 멋대로 정원을 뛰어다니던 꼬마가 커서 어엿한 가정을 이루는 것까지도.

이 마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그녀를 존경하는 이들은 많아도, 그녀와 마주 앉아 편안한 수다를 떨어 줄 친구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자네들이 그 언덕의 새 주인이라니……. 나야 환영하는 것 말고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우리 마을에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들어온 건 정말 오랜만이야. 요즘 청년들은 다들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거든…….”

기실 지금 그녀가 한 말은 한 시간 전 엘리자베스 일행이 이 자리에 막 앉았을 때 이미 했던 말이었다.

“게다가 자네가 펠리사 부인의 외손녀 되신다고?”

별안간 노부인이 마치 엘리자베스를 처음 봤을 때처럼 반갑게 손을 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굴을 자세히 확인해 봐야겠구먼. 부인과 얼마나 닮았을지…….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 안경을 써야…….”

노부인의 손이 테이블 위를 배회했다. 그러나 안경은 이미 그녀의 콧잔등에 걸쳐져 있다는 걸 그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섀넌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엘리자베스를 낮게 불렀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저기……, 프리틀 부인?”

“가만 있어 보자……. 안경이 어딨더라.”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손님 된 도리가 아니니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아니, 조금 더 있다가도…….”

“어머, 정말 피곤하시겠어요. 배웅하지 마셔요. 바람이 차답니다.”

그녀가 노부인의 말을 자르며 급히 포옹했다. 상대의 의사 따윈 고려치 않은 일방적인 작별 인사였다. 말없이 일어난 섀넌과 윈터, 카일이 그녀를 향해 묵례하고 빠르게 응접실을 나갔다.

“이래서 내가 너무 이르다고 했잖아.”

싱그러운 잔디 위로 따스한 햇볕이 골고루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저택 앞 정원을 가로질러 뻗은 대로를 지나며,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존경받는 노인 행세에, 장례식을 그렇게나 요란하게 치러놓고 고작 30년도 안 돼서 여길 다시 기어들어 와 살자고? 미친 짓이지.”

엘리자베스가 모자 위로 뒤집어 놓은 망사를 얼굴 아래로 끌어내리며 웃었다.

“얘, 너는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니? 프리틀 부인은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잖아. 나라고 뭐……, 저 애가 네 얼굴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걸 예상이나 했겠니?”

걸음을 멈춘 섀넌이 어이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머리가 있으면 그 정도는 당연히 생각했어야지. 인간들이 너처럼 붕어 대가리인 줄 아나? 대부분은 날 한 번 보면 무조건 기억한다고.”

여전히 모자와 머리 모양새를 만지기에 여념이 없는 엘리자베스를 보던 섀넌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맺었다.

“나만큼 잘난 놈이 흔치 않으니까.”

이번에는 엘리자베스가 걸음을 멈췄다.

“어머……, 쟤 좀 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해? 강아지야! 네 애인 병 있는 거 아니니? 자기애가 너무 심하잖아. 강아지야, 강아지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녀는 이미 저만치 앞으로 가 버린 두 사람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섀넌이야 원래 저런 놈이라 그렇다 쳐도, 윈터는 정말이지 가끔 얄미울 때가 있다.

“쟤도 은근히 제 애인이랑 하는 짓이 똑같다니까……? 이젠 강아지도 아니야. 하나도 안 귀여워. 싸가지 없는 여우 새끼. 어릴 때부터 내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날 무시해?”

“자기야.”

그녀를 가볍게 불러세우며 어깨를 잡은 카일이 모자의 리본 장식을 고쳐 주었다.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저 노부인 하나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왜 꼭 이런 시골 바닥에서 살아야 해? 아직 우리가 갈 만한 도시가 많아. 일단 섀넌이랑 윈터가 다녔던 학교 인근이랑 그 주변 지역만 피하면…….”

“리안 그리말디가 너어무 유명하셔서, 대도시에는 아직도 기억하는 놈들이 많잖아. 그러길래 쟤네는 왜 쓸데없는 짓을 했대? 수석 연주자 앙코르니 왕립 아트홀 독주회니, 요란은 자기들이 다 떨어 놓고 왜 나한테…….”

카일이 손에 들고 있던 흰 양산을 촥 펼쳤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씌워 주며 씩 웃었다.

“우리 자기 왜 이렇게 화가 많을까? 그럼 쟤네만 두고 우리는 다른 데로 가면…….”

“그건 싫어. 같이 지낼 거야.”

엘리자베스가 이제는 너무 멀어져 버린 섀넌과 윈터를 바라봤다. 양쪽으로 열린 철문 사이로 대기 중인 마차가 보였다.

“후안이 너무 귀엽잖아.”

그녀의 시선이 마차 앞에 서 있던 후안에게 향했다. 그는 일찌감치 제게 다가오는 섀넌과 윈터를 발견하고 마차 문을 여는 중이었다.

“저 쥐방울만 한 것. 너어무 괴롭히고 싶게 생겼어.”

작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이 귀여운 것을 보듯 몸서리친 엘리자베스가 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누가 뭐래도 저 쥐방울 동정은 자신이 직접 떼어 줄 거다.

“못생긴 아비한테서 어떻게 저런 귀여운 놈이 나왔나 몰라.”

섀넌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 못생긴 러셀의 동정도 엘리자베스가 가져갔다. 하물며 후안은 어미의 고운 이목구비 일부를 물려받아 러셀보다 더 나았다. 그러니 엘리자베스에겐 정말 탐나는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손에서 양산을 빼앗아 든 엘리자베스에게 팔을 내민 카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온 남자라면 어떻게든 건드려 보고야 마는 성미를 누가 말리겠는가.

물론 자신도 그렇다. 그러니 이렇게나 서로 잘 맞는 한 쌍인 거다. 팔 안으로 들어온 가느다란 손을 좀 더 제 쪽으로 당긴 카일이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군.”

마차 안에 앉아 엘리자베스와 카일을 멀거니 보던 섀넌이 창문을 탁 닫았다.

“후안, 출발해.”

“……두 분이 아직 안 왔는데요?”

“알아서 하겠지.”

저들이 남의 저택 정원에서 한가롭게 산책이나 하든 말든, 섀넌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부인과 한 시간 가까이 마주 앉아 있던 피로감으로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양발을 움직여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어 던진 섀넌이 옆에 앉은 윈터의 허벅지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그의 발을 쥔 윈터가 발목부터 종아리를 천천히 주물렀다. 벽에 등을 기댄 섀넌이 긴 한숨을 흘렸다.

“죄 단점밖엔 없는 지역이야. 촌구석인데 시끄럽기까지 하고, 그 노부인은……. 어차피 오래 살진 못하겠지만 이래저래 간섭도 많을 것 같고.”

“그래도 언덕 아래가 평지라 포도밭 일구기 좋을 것 같아요.”

포도밭……? 들린 단어가 너무 뜬금없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섀넌이 자세를 바로 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

“네. 포도 키울래요.”

“……네가?”

또다시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렸다.

“포도를 키운다고?”

윈터가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농작물을 키우겠다니. 도대체 그걸 왜? 그런 땀 흘리는 노동은 질색이다. 섀넌의 사전에서 포도는 와인으로나 마시는 거지, 키우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냥 키워 보고 싶어요.”

“윈터, 농사라는 게 생각보다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야.”

섀넌은 자신도 해 본 적 없으면서 꼭 경험이 있는 선배처럼 조언했다.

“쉽지도 않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지루한 반복 노동에, 또 노력한다고 그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알아요.”

“그런데 그걸 왜 직접 해. 포도 농장이 갖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 줄 테니 고용인을 써.”

“그냥 제가 해 볼래요.”

“…….”

섀넌은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방향으로 튄 연인의 장래희망에 잠시 사고가 멎었다. 상류층 중심의 편견이 다소 강한 그는, 오만하게도 생산업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섀넌이 생각하기에 윈터는 육체노동과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물론 누구보다도 강한 몸을 지녔지만, 저 외모를 하고선 어떻게 흙먼지 맞는 노동을 한단 말인가. 저 고결하고 금욕적인 얼굴 하며, 저 우아한 근육을 왜 포도밭 일구는 데에 써먹겠다는 건지…….

저 팔근육을 고작 거름 뿌리는 데에나 쓰고, 흙을 뒤엎는 데에나 쓴다고……?

섀넌이 생각한 윈터의 진로란 주로 예술이나 인문학 쪽이었다. 예쁘고 두꺼운 몸에 착 감긴 슈트를 입고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놀린다거나, 혹은 악기를 다룬다거나 붓을 만진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아니면 아예 저 아름다운 몸을 다양한 체위로 활용할 수 있는 무용이라든가.

물론 다른 직업군도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거기에 흙을 뒤엎거나 거름을 뿌리고 손수 포도를 따는 일 같은 건 결코 없었다.

“그래, 해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섀넌은 흔쾌히 허락했다. 자신의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윈터의 생각이었다.

윈터가 하고 싶은 일, 윈터가 살고 싶은 곳, 윈터가 원하는 그 모든 것.

“……나도 갑자기 여기가 좋아질 것 같네.”

어쩐지 덩달아 섀넌도 이 마을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네가 포도 농장 주인이 되면 나는 네가 키운 포도로 와인이나 만들면 되겠어.”

반쯤은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입 밖으로 내니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 차와 술을 입에 대고 살았는데, 단 한 번도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후안.”

마부석으로 연결된 창을 연 섀넌이 지시했다.

“우리 저택이 있는 언덕에서 남쪽 아래에 있는 농지.”

“예.”

“누구 소유인지 확인해서 사들여. 그리말디 명의로.”

“……예.”

“대답이 왜 늦지?”

말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춘 후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번도 직접 부동산 거래를 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리고 소유주는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만약 소유주가 땅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그땐 또 어떻게 해야…….”

“모자란 놈.”

탁, 창문을 닫은 섀넌이 혀를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쳐가며 사람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러셀은 말똥 치우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시절부터도 알아서 다 했다. 시행착오로 혼나는 한이 있어도 무식하게 부딪혀 스스로 일머리를 키운 것이다.

“요즘 애들이란.”

다시 몸을 기댄 섀넌이 윈터에게 다리를 뻗었다. 발끝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감촉을 습관적으로 꾹꾹 누르며, 그는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으로 계획했다.

농장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을 것이다. 일손이 부족하면 그만큼 사람을 고용하면 되고. 중간에 윈터가 싫증을 내어 포기하더라도, 일꾼들을 시켜 그해의 포도는 모두 수확하게 해야겠다.

그걸로 포도주를 만들어 윈터가 자랄 때마다 기념으로 오픈해야지…….

“샤.”

노동으로 땀에 젖은 윈터의 상반신, 갈라진 팔근육과 우아한 손으로 포도 따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섀넌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헐벗은 상상 속과 달리 눈앞의 실제 윈터는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을 하고선 귀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그만 누르세요. 마차 안이잖아요.”

그의 다리 사이를 힐끗 확인한 섀넌이 태연하게 발끝을 계속 움직였다.

“이건 그냥 습관이야, 윈터.”

바지 아래에 누워 있는 물건의 형태를 덧그리듯 발끝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윈터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숨 쉬는 거랑 똑같은 거지.”

들숨 날숨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듯, 이것 또한 그렇다. 그냥 거기에 있으니 만지고, 거기에 있으니 건드리는 거다.

“마차가 무슨 상관이람.”

숲에서 섹스하는 건 괜찮고, 사방이 막힌 마차 안에서 옷 위로 좀 만지는 건 안 되나?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한결같이 귀여울 수가 있지.

“좁고 흔들려서 싫어요.”

윈터는 머리를 갈라 보면 분명 뇌도 귀여울 거다. 시종일관 깜찍한 소리만 해 대는 걸 보면 당연히 저 두개골 속도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겠지.

다리를 살짝 굽힌 섀넌이 윈터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웃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길래 좁고 흔들리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윈터가 섀넌의 양쪽 발목을 잡아당겼다.

“당연히 섹스요.”

그에게 몸이 딸려온 섀넌이 자연스럽게 양다리로 윈터의 허리를 감고 올라앉았다.

언젠가 한 번 달리는 마차 안에서 섹스하다 차체가 내려앉아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들에게 큰일은 아니고 마부석에 있던 후안에게 말이다.

“당신이 위에서 움직이면 될 것 같아요.”

섀넌의 생각을 읽었는지, 윈터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니면 예전처럼 살짝 벗고 키스만 해도 좋고…….”

커다란 손이 검은 머리칼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마주하고 있던 두 콧날이 엇갈리며 곧 빈틈없이 맞물렸다. 덜컹 흔들리는 마차 천장에 섀넌의 정수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감싸준 윈터가 더 깊게 입술을 얽었다.

갈색 말이 이끄는 마차가 햇살 쨍한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 그 길의 끝에는 두 사람이 정착할 새 저택이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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