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Next step (16/18)

2. Next step

-1-

겨울의 혹한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느긋한 모양이다.

추운 지방에서 따뜻한 남부의 해변으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카를로는, 꽁꽁 여민 옷의 두께만큼이나 인색하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고향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주민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었다.

특히 마을 주민 대다수가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뜨내기들이라는 점에서, 그는 더욱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토박이가 많은 곳은 그만큼 텃새가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카를로 씨, 안녕하세요?”

“세이디 씨.”

무거운 장작더미를 한가득 안고 있는 세이디를 발견한 카를로가 급히 그것을 받아 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오늘 저녁 파티에 쓸 장작이요. 늦가을이라 밤에는 꽤 춥답니다.”

카를로는 그녀가 북부의 추위를 한 번이라도 겪어 봤다면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오늘은 또 무슨 파티를 여는 건가요?”

“셸비가 새벽에 아기를 낳았대요! 맙소사,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도대체 셸비를 임신시킨 놈은 어떤 놈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셸비’는 주인도 없이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아무 데나 제집처럼 드러눕고 멋대로 생선을 강탈해 가는 뚱뚱한 치즈 태비 고양이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던 뱃살의 미스터리가 밝혀졌다며 세이디가 웃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잘 얻어먹고 다녀 살찐 건 줄 알았는데, 사실 그 푸둥푸둥한 배 속에는 새 생명이 네 마리나 있었다며…….

“아,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같이 셸비 보러 가실래요?”

그러니까 몇 달간 임신한 줄도 몰랐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유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원래 이렇다. 아무 이유든 다 갖다 붙이며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파티를 열고, 꼭 파티가 열리지 않아도 저녁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래사장에 모여 다 같이 술을 마신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죠?”

마치 카를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세이디가 물었다. 그러나 카를로는 진심으로 이런 파티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 이주한 이 마을이 퍽 마음에 들었고, 이왕이면 이웃 사람 모두와 친해져 얼른 정착하고 싶었다.

“그래도 적응하셔야 할 거예요. 여긴 늘 그렇거든요.”

이곳에 사는 이들은 대다수가 연고 없는 떠돌이 신세다. 사연이야 다양하겠지만, 멀리서 보면 대강 비슷한 모양새다.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혹은 누군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인척도 친구도 없이 일용직만 전전하며 살다 정착한 이들.

이곳이 어느 부호의 사유지인지 아니면 주인 없이 버려진 국유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모여 이렇게나 쉽게 정착한 걸 보면 분명 후자일 거라고 카를로는 짐작했다.

비어 있는 방갈로에 마음대로 짐을 풀고 몇 달을 살아도 세를 받으러 오는 주인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아, 오늘 파티는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참석하거든요. 심지어는 그리말디 부부도 오신다고 했어요.”

그리말디 부부라. 카를로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정식으로 결혼했을 리 없는 게이 커플도 이곳에서는 부부라고 칭하며 너그럽게 봐주는 모양이다. 고리타분한 편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가득한 고향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카를로 또한 그리말디 부부에겐 조금 관심이 갔다.

듣기로는 그 커플이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지냈다고 하는데, 자그마치 십 년이 넘게 이곳에 터전을 꾸리고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외모로 짐작되는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데 십 년이라니. 십 대 청소년 시절부터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온 건 아닐 테고, 고향에서 눈이 맞아 타지로 가출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기엔 그자들은 돈이 많아 보이던데……. 아담한 방갈로가 옹기종기 군집을 이룬 이 마을에서, 그들만이 홀로 동떨어진 위치에 큰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런 해변에 대저택을 짓고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추려면 십 년으로는 턱도 없다. 그자들의 나이가 못해도 40대, 혹은 그 이상이라면 모를까.

그럼 원래 돈 많은 집안의 자식들인가?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땅끝에 처박힌 마을에 정착하려 하진 않을 텐데.

경제활동이 한창일 20대 초반의 젊은 게이 부부가 마치 은퇴한 노부부처럼 이런 마을에 처박혀 살고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산 지 십 년이 넘었단다. 하나부터 열까지 위화감으로 가득한 이야기였다.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 정말 궁금하다.

기실 카를로는 그 두 사람이야말로 이 마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직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자신보다 더 이방인 같은 자들이었다.

옷차림부터 성격, 낯빛, 생활 방식까지. 그들을 두르고 있는 모든 게 이질적이었고, 그런 점이 어쩐지 벽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했다.

생각에 잠긴 카를로가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속마음을 내뱉었다.

“음, 그분들은……, 어딘지 좀 이상해요.”

“네? 어떤 점이요?”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해서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 많은 이상한 점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부분을 꼽는다면 단연 그들의 ‘표정’이다.

……그렇다. 그들은 도통 웃지를 않는다.

카를로는 그들이 다른 사람과 웃으며 대화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언젠가 딱 한 번, 유난히 눈이 빨리 떠진 새벽. 그는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조용히 텅 빈 해변을 거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카를로가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본 건 그때가 유일했다. 서로를 보는 다정한 눈,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웃는 얼굴. 그저 여느 커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어쩐지 오싹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카를로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적당히 우회한 표현을 꺼냈다.

“그분들은 마을 사람들과 잘 교류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세이디가 웃으며 손사래 쳤다.

“하하, 아니에요. 물론 사교적인 분들은 아니시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분들은 아니세요. 특히 시본 씨는 정말 친절하답니다.”

“친절이라면, 어떤?”

“음……, 시본 씨의 친절에 대해서라면 저는 정말 할 말이 많아요.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이디가 눈을 반짝였다. 카를로 역시 흥미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오래된 얘기예요. 5년 전에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을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답니다.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밤이 되면 정말 무서웠어요. 어쨌든, 언젠가 도시에 나갔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그녀는 정말로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물론 여긴 정말 살기 좋은 곳이긴 하지만, 아주 가끔……, 섬뜩한 일도 일어나곤 하거든요. 빈집이 쭉 늘어선 골목을 밤에 혼자 걷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파도에 밀려온 시신이나 갑자기 하루아침에 실종된 사람들 같은, 바닷가가 인접한 마을이라면 으레 떠도는 괴담을 곁들인 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카를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인내심 있게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니까 세이디가 이 마을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지금은 꽤 많이 채워진 방갈로의 대부분이 빈집으로 버려져 있던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도시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세이디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갈길을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지척에서 몰아치는 스산한 파도 소리뿐이고, 늘어선 방갈로가 유령처럼 그림자를 드리운 길을 지나려니 저절로 공포가 엄습했다.

왜 램프를 챙겨 오지 않았는지 후회하던 그때, 저 앞에서 희미한 불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거기 누구세요?”

세이디는 한 줄기 희망과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인적 드문 마을에 나타나는 수상한 연쇄 살인범이라도 되는가 싶어 점점 더 불안해지는 차에, 다행히도 늦지 않게 상대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 마을에 저토록 피부가 하얗고 새까만 머리칼을 가진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시본 씨……?”

램프의 불빛 때문인지 유난히 더 창백해 보이는 시본이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아주 찰나 난처함이 스쳤지만, 누구라도 안면이 있는 이를 마주치길 간절히 바랐던 세이디에게 그런 사소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맙소사……, 시본 씨! 세상에, 정말 다행이에요!”

그 순간 세이디에게 시본 그리말디는 거의 구세주와 같았다. 자신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시본을 향해 세이디가 얼른 달려갔다.

“이렇게 마주쳐서 얼마나 안심인지……, 아!”

별안간 자갈을 밟고 미끄러져 발을 헛디딘 세이디가 앞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아아…….”

뾰족한 돌에 찍힌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게다가 발목은 완전히 접질렸는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엄습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세이디가 제 발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그때, 그녀의 앞으로 깨끗한 구둣발이 다가왔다.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시본 씨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마음이 급했나 봐요.”

세이디가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당연히 잡아 줄 거라 기대했던 손은 허공에 그대로 내버려진 채, 대신 다른 게 그녀의 옆으로 딸깍 떨어졌다.

“…….”

긴 장대였다. 그 의미를 몰라 머뭇거리는 그녀의 눈앞으로 이번에는 불빛이 환한 램프가 내밀어졌다.

“아……, 가, 감사합니다, 시본 씨.”

세이디가 손을 뻗자 램프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하얀 손이 쑥 거둬졌다. 하마터면 램프를 잡지 못하고 놓칠 뻔한 세이디가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시본 씨는 램프가 필요 없으신가요? 이렇게나 어두운데……, 밤길은 역시 위험하니까 같이 가는 게…….”

장대를 짚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그녀가 돌연 사라진 시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본 씨, ……시본 씨?”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신 거 있죠? 불빛도 없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신 건지 모르겠어요.”

말하는 데 집중하느라 앞에 돌부리가 있는 것도 모르고 걷던 세이디가 카를로의 손짓에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전 장대를 짚고, 시본 씨의 램프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뭐랄까……, 그 순간에는 시본 씨가 정말 구세주 같았어요.”

“……음.”

카를로는 뭔가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듯 흥미진진한 투로 이어졌던 이야기의 싱거운 결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친절이라기엔 너무도 사소한 일이었다. 세이디는 참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가 보다. 그러나 카를로는 그녀와 달랐다.

애초에 시본이 거기에 없었다면 그녀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일도 없었을 게 아닌가?

그리고 눈앞에서 넘어진 사람을 부축해 주지는 못할망정, 장대 따위를 던져 주고 그냥 가 버리기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그냥 우연히 만난 거 아닌가요? 의도한 친절은 아닌 것 같은데요.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세이디 씨를 만났다면…….”

세이디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아뇨, 아직 끝이 아니랍니다. 그날 저는 무사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이제야 본론을 말하듯,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글쎄, 그 이튿날 아침에 바닷가에서 시신이 발견된 거 있죠……! 그 당시 마을에 저보다 먼저 와서 살던 주민 중 한 분이었어요.”

갑자기? 시신이……? 너무도 급작스러운 전개에, 카를로가 미간을 찡그렸다.

“시본 씨 말로는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진 것 같다고 했죠. 하지만……, 제가 봤을 때 그 시신은 좀 이상했어요. 예전에 검시소 청소부로 일한 적이 있어서 잘 알거든요.”

마치 수사관이라도 된 것처럼,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세이디가 낮게 말했다.

“물에 부풀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죽은 지 반나절도 안 된 시신이었어요……. 그리고 분명……, 시신에는 피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요…….”

카를로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무섭고 놀라운 얘기이긴 하나, 그래서 그게 시본 그리말디의 친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시본이 베푼 친절인가 한밤중에 일어난 살인사건인가.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날 밤 시본 씨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 또한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았겠어요? 범인은 늘 혼자 있는 사람을 노리는 법이니까요…….”

세이디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는 듯 몸서리쳤다.

“시본 씨가 절 지켜 주신 셈이죠.”

“음…….”

세이디의 말에 반박하려던 카를로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세이디는 간과한 것 같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범인은 잡혔나요?”

“아뇨.”

“……그럼 아직도 그 범인이 이 마을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요?”

“에이, 그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때 살던 사람들은 지금은 다 떠나고 없거든요. 시본 씨네 부부와 저만 남은 거죠. 그러고 보니 제가 시본 씨네 다음으로 이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이 되겠네요.”

“…….”

……뭔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옆에서 계속 들려오는 세이디의 수다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카를로는 금세 생각을 그만두었다.

“얼마나 친절해요? 그냥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도시 사람들은 각박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때부터 전 시본 씨에게 늘 감사하고 있답니다. 물론 그분과 친하지는 않지만, 따지자면 저한텐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녀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기엔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너무도 많았지만, 카를로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 세이디가 카를로의 팔을 툭툭 쳤다.

“어머, 마침 저기 지나가시네요. 세상에, 혹시 저쪽에서 우리 얘기가 들렸을까요? 그러면 너무 부끄러운데…….”

“그럴 리가요. 저렇게 멀리 있는데.”

“다행이에요……. 시본 씨, 라샤드 씨!”

그에게 작게 속닥거린 세이디가 한껏 목청을 돋워 그들을 불렀다. 두 사람이 마치 한 몸처럼 동시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카를로는 이번에도 이유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세이디가 크게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이 이쪽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이윽고 그들이 세이디와 카를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 두 사람은 자갈 깔린 길을 어떻게 저리 흐트러짐도 없이 유유히 걷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유령처럼.

그는 어쩐지 조금 날씨가 추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품에 안고 있던 장작이 아니었다면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카를로 씨와 저는 셸비를 보러 간답니다! 두 분도 같이 가실래요?”

카를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나 해맑을 수 있는 세이디의 사교성에 내심 감탄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저희는 일정이 있어서.”

남부에 오래 살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피부가 창백한 시본이 대답했다. 역시나 카를로가 예상한 그대로, 말투는 친절하지만 기묘한 냉랭함과 오만함이 느껴졌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듯한 그들의 옷차림을 살핀 세이디가 물었다.

“도시에 나가시나 봐요? 저녁에는 돌아오시는 거죠? 파티에 오시면 정말 좋을 거예요. 오늘 두 분께서 참석한다고 하니까 글쎄 앨런 씨가…….”

“죄송하지만 그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세이디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시본의 목소리가 사뭇 차가웠다.

“아……, 그러시군요.”

민망해진 세이디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라샤드가 아주 약간의 친절을 보태듯 그의 말을 보충했다.

“오늘 안에는 못 돌아올 것 같아서요.”

라샤드는 꽤 장신인 카를로가 보기에도 첫눈에 헉 소리가 날 만큼 거구의 사내였다. 무뚝뚝한 표정 아래로 늘어뜨린 손은 시본과 정답게 깍지를 껴 맞잡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을 아래위로 주욱 훑어보던 카를로가 라샤드와 눈을 마주치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왠지 속내를 꿰뚫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 무슨 일이시기에…….”

세이디가 자신 있게 묻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편하게 캐묻기에는 벽이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시본의 목소리에 약간의 친절이 묻어났다.

“먼 친척에게 부고가 날아와서, 장례식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저런, 유감이에요.”

“파티는 다음에 참석하도록 하지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파티는 언제나 열리는 거니까. 집은 언제까지 비우시나요? 곧 태풍이 올 텐데, 제가 대신 두 분의 집을 살펴 드릴까요?”

얕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던 대화가 몇 초 끊겼다. 그 약간의 침묵에서, 세이디는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웃들이 장기간 집을 비울 때 서로의 집을 무람없이 드나들며 단속해 주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 둘은 그런 성향이 절대 아니었다. 괜히 친절을 베푼답시고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상대에게 과한 말을 한 것이다.

거절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대화를 마무리해야 민망하지 않을까 궁리하던 차에, 시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텐데요.”

“네? 정말요? 저야 당연히, 기꺼이 해 드릴 수 있죠!”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시본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세이디가 얼른 손을 뻗어 그것을 건네받았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혹시라도 태풍이 오면 제가 대신 가서 덧창을 잘 잠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카를로와 세이디를 향해 가볍게 묵례한 두 사람이 이윽고 그 자리를 떠났다. 시본의 어깨를 감싼 라샤드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한쪽 뺨을 덮어 바닷바람을 막아 주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세이디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저 두 분은 단 한 번도 집에 사람을 초대한 적이 없거든요.”

세이디가 신난 얼굴로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낯은 좀 가리시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품에 장작을 안고 그녀를 따라가는 카를로의 생각은 역시나 달랐다. 카를로는 고향에서 저런 얼굴을 종종 본 적이 있다.

대체로 터전을 버리고 영영 떠나는 사람들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가 버리곤 한다. 어차피 다신 돌아오지 않을 곳의 다신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조금 전 세이디에게 열쇠를 건네는 시본의 표정이 딱 그러했다.

마치 그녀의 손에 집을 맡기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정말로 사연이 궁금한 자들이었다.

* * *

필멸자들의 삶은 정말이지 찰나와 같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적어도 그이가 나보다 일찍 죽을 일은 없을 거 아니에요? 정말 어마어마한 장점이죠.’

……라고 말하며 속없이 웃던 스물일곱 살의 마리아 카스티요는 51세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운 나쁘게 걸린 독감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약학에 능통한 남편을 두어 몇 년 정도 죽음을 뒤로 미룰 수는 있었으나,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다.

인간들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그리 이른 죽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상이라기엔 조금 아쉬운 세월이었다. 러셀은 그녀와 겨우 20여 년을 함께한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죽은 지 1년.

“섀넌 님은…….”

병자의 침실은 늘 특유의 냄새가 난다.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고, 무기력하고, 죽음에 한층 가까워진, 그런 냄새가.

“여전히 팔팔하시네요.”

러셀이 이불 밖으로 손을 뻗으며 생전 안 하던 소리를 했다. 그 자신이 몸져누워 있으니 별게 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악수를 청하듯 내밀어진 손을 무시한 섀넌이 혀를 찼다. 그는 단 1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빨리 늙을 수 있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그 몸속은 병마가 진탕 칠지언정 외모만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던 러셀의 얼굴은 마치 오늘내일하는 노인처럼 시들어 버렸다.

단지 그에게 후손이 생기면서 맹약의 의무가 사라져서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슬픔이 커서였는지, ……아니면 그 전부 때문인지.

추측할 이유는 많았으나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내로 곧 죽을 것처럼 생겼군.”

습관처럼 불퉁하게 내뱉은 말을 섀넌은 곧바로 후회했다. 실제로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시비 건 보람이 없다.

“언젠가는 이런 때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요…….”

러셀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와서 그런 말 해 봤자, 죽기 싫다고 꼴사납게 군 세월이 좀 길었어야지.”

삶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나 대단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죽음에 초연한 수도승처럼 구니 어이가 없었다.

섀넌은 주름 자글자글한 러셀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차라리 몸을 돌려 다른 쪽을 보는 편을 택했다. 안 그래도 못난 얼굴에 노화가 직격으로 관통하니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꼴이 된 탓이다.

“……정말 어쩔 생각이야, 러셀.”

한참을 침묵하던 섀넌이 내키지 않는 질문을 입 밖에 내었다.

“그런 얘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섀넌 님.”

러셀은 대답을 회피했다. 어차피 섀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종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섀넌이 결국 왈칵 짜증을 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

섀넌이 그러한 것처럼, 러셀 또한 타인의 죽음에 꽤나 무뎌져 있는 사람이었다. 긴 세월 크고 작은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가 터득한 요령이란 결국 회피하는 거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지 않고.

그런 러셀이 왜 갑자기 마리아를 만나 이런 상황에 오게 된 건지 섀넌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 자신이 윈터를 사랑하게 되면서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던 것처럼, 러셀 또한 마리아를 만나 어떤 변화를 겪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냥 인간 하나야.”

“…….”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잊혀. 그 여자 얼굴도 생각 안 날 거라고.”

“전적도 있으신 분께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러셀이 섀넌의 말을 잘랐다. 원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행동이었지만,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섀넌 님은 뭐 안 그러셨습니까?”

섀넌의 옆에 죽은 듯 얌전히 있던 윈터를 검지로 가리킨 러셀이 발끈하며 따졌다.

“윈터 님이 지금도 이렇게 살아 계신 건 다 섀넌 님이 윈터 님이랑 같이 죽으려고 미친 짓 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저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것뿐입니다. 섀넌 님은 그렇게 유난을 떠셔 놓고 저는 왜 안 됩니까?”

“당연히 나는 되고 너는 안 되지, 러셀.”

섀넌이 뻔뻔할 정도로 평온하게 대꾸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때 뒈졌어야지. 맹약은 왜 맺어서 이렇게 성가시게 만들어. 그렇게나 죽기 싫다고 아등바등 매달리더니 이제 와서 사랑 타령? 정말 웃기지도 않아. 매번 아주 등신 같은 짓만 골라서 하지, 너는.”

다소 심하게 느껴지는 비난에도, 러셀은 화를 내지 않았다. 화낼 기력도 없었지만 이런 말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탓이었다.

그리고 제 주인의 막말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이 정도면 섀넌치고는 퍽 온건하게 끝난 편이었다.

“……러셀, 후안을 생각해서라도 조금만 기운을 차려 보세요.”

가만히 그들의 아슬아슬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윈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섀넌이 더 심한 말을 하기 전에 화제를 전환하려는 나름의 배려였다.

“후안이 누구야.”

그러나 섀넌은 제 연인이 발휘한 배려를 짤막한 질문 한마디로 파사삭 날려 버렸다.

“러셀 아들이요. 예전부터 되게 여러 번 말했는데…….”

윈터가 섀넌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러셀을 위한 배려였다.

“후안인지 뭔지 알게 뭐야. 내가 남의 애새끼 이름까지 알아야 돼?”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섀넌이 자신의 무지를 러셀에게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 러셀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편지에 그렇게나 후안 얘기를 많이 했는데, 어떻게 여태 애 이름도 모르십니까?”

그 편지를 단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굳이 알 필요 없잖아.”

“내가 어쩌다 이런 뱀파이어를 만나서는……. 앓느니 죽었어야 했는데…….”

러셀이 별안간 신세를 한탄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일말의 여지없는 헛소리였겠으나, 정말 오늘내일하는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전혀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노쇠한 눈을 가물가물 깜빡이던 러셀의 시선이 원망을 담고 아주 잠깐 반짝였다.

“하필 만나도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뱀파이어를…….”

“피도 눈물도 없는 나를 만나서 네가 여태껏 잘도 살아 있는 모양이군. 한심한 놈 같으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종노릇도 똑바로 못하는 놈이 뭐가 그렇게 당당해.”

“당당하지 못할 건 뭡니까? 어차피 이제 저는 죽어도 상관없으시잖아요? 이제는 저도 어엿한 후손이 있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말씀이라도 좀 좋게 하셔야…….”

섀넌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표정 변화를 보고, 러셀도 더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중히 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하던 섀넌이 나직이 말했다.

“……후손들한테 못 할 짓이라 혼자 다 짊어지겠다고 할 땐 언제고.”

“…….”

러셀의 침묵은 섀넌의 것보다 훨씬 길었다. 냉정하게 팔짱을 낀 채 그런 그를 보던 섀넌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윈터의 손을 잡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아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후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마침내 러셀이 긴 침묵을 깼다.

“이제 애 이름도 좀 기억해 주시고요. 앞으로는 그 애가 제 역할을 대신하게 될 텐데, 이름 정도는 제대로 불러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윈터의 손등을 덮은 섀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몹시 짜증 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그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중간에 사람 바뀌면 번거로운 일투성이인데, 굳이 입에 붙지도 않는 이름까지 신경 써야 하나? 앞으로 내게 올 놈들 이름은 러셀 고정이야. 어차피 다 고만고만한 놈들일 테니까.”

“꼭 고유명사 같네요.”

“뭐, 비슷하지.”

지극히 섀넌다운 대꾸에 러셀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은 지금껏 살아왔던 그 어떤 때보다 죽음에 가까워진 이 순간이 가장 평온해 보였다.

섀넌은 정말로 그 점이 이상했다. 죽음이 이렇게 기꺼울 거였다면 그동안 삶에 왜 그리도 집착한 건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이토록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특별할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 여자를 만나 별안간 가정을 이루고, 결국은 그녀를 잃은 상실감을 어쩌지 못해 수백 년간 집착해 온 삶을 버린다니.

세상은 넓고 인간은 개미처럼 많다. 러셀의 연애사 따위 자신이야 알 필요 없지만, 그의 인생에 마리아보다 더 매력 있는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지는 않았을 거다. 사람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꿔 놓을 정도로 마리아가 대단한 여자였는가 하면, 그건 정말 아니라는 뜻이다.

당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노예 앞에선 도통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섀넌이 이런 무례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자, 시종일관 곧 죽을 병자처럼 빌빌대던 러셀이 별안간 개안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참나, 저도 두 분 볼 때마다 그런 의문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거든요? 차라리 수명이 같은 뱀파이어를 만났다면 모를까, 뭐 대단한 것도 없는 윈터 님을 만나서 그 유난을 떠셨습니까?”

“……죽을 때가 되니까 눈에 뵈는 것도 없어지는 모양이군.”

“그리고, 마리아가 특별할 게 왜 없습니까? 나의 마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특별한데요! 예쁜 건 뭐 당연하고, 착하고, 현명하고! 하여간 세상 특별한 건 다 끌어다 모은 게 바로 나의 마리아라고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섀넌은 끝내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러셀이 바닥까지 남은 기력을 닥닥 긁어모아 구구절절 마리아 찬양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오, 후안. 이리 오렴.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때 문을 열고 들어선 후안을 향해 러셀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낯깨나 가리는 청년으로 성장했는지, 그가 섀넌과 윈터를 힐끗거리며 쭈뼛쭈뼛 다가와 러셀의 곁에 앉았다.

섀넌은 성장한 후안의 얼굴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찬찬히 관찰했다. 딱 제 아비를 닮아 왜소하고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라, 그나마 어미를 닮아 위치 선정이 잘 된 듯한 이목구비의 장점마저 가려졌다.

“오해하지 말아라, 후안. 저분은 너한테 원한이 있는 게 아니란다. 원래 누구에게든 늘 저런 표정이셔. 천천히 적응하도록 해.”

러셀이 제법 아버지답게 근엄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네 이름은 러셀이라고 하시더라. 그깟 이름 하나 외우는 게 뭐가 그리 힘드신지……. 발음하기 까다로운 이름도 아닌데, 자기 입에 붙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게 말이 되니? 하지만 저분은 매사에 그런 식이니 이것 또한 네가 적응해야 한단다.”

조언을 가장한 헐뜯기였다. 섀넌이 바로 앞에서 멀쩡히 듣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모든 일에 초연해지긴 하는 모양이다. 섀넌은 그런 러셀에게 이제는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가 떠드는 말에 거짓이나 과장은 없었으므로.

“예, 아버지…….”

후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 무던한 건지 소심한 건지, 이후에도 그는 러셀이 구구절절 쏟아 내는 말에 토 한 번 달지 않고 계속 예, 예,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적어도 러셀의 경솔한 주둥이는 닮지 않아서 시끄러울 일은 없겠어. 섀넌이 팔짱을 낀 채 그런 그를 대강 살피며 생각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군.”

러셀의 헐뜯기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섀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벌써 가시는 건 아니죠?”

“기다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장례는 질색이야. 청승 떠는 놈들 틈에서 며칠씩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거기, 너는 네 아비 장례 끝나면 곧바로 나에게 와. 위치는 테이블 위에 적어 뒀으니 알아서 찾아오도록.”

후안을 향해 대충 할 말을 마친 섀넌이 몸을 돌린 그때, 러셀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잡힌 소매를 내려다본 섀넌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뭐야. 또 무슨 건방을 떨려고.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마지막 순간에.”

떨쳐내는 섀넌을 양손으로 붙든 러셀의 눈에 간곡한 애원이 담겼다.

“섀넌 님이 곁에 있어 주신다면 안심이 될 것 같아요.”

“…….”

장례 치르는 건 정말이지 질색인데.

섀넌이 내키지 않는 순간을 외면하듯 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연인의 잔잔한 청회색 눈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섀넌이 러셀의 손을 빼내고는 소맷자락을 툭툭 털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지.”

* * *

숲의 호수를 가로지르는 둥근 아치형 다리 위에서, 섀넌은 홀로 조용히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휴가가 끝난 러셀이 돌연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부터, 어쩌면 자신은 이런 순간을 예견했던 것 같다.

러셀이 경거망동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유난히 화가 치밀어 길길이 날뛰었던 것도, 곁에 두고 계속 부려 먹어도 무방할 것을 굳이 무기한 휴가 운운하며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게 한 것도, 그 후손의 이름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생각해 보면 다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케이스를 연 섀넌이 한숨을 삼키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성냥갑을 찾아 주머니를 더듬거리던 손이 이내 멎었다.

치익, 얇은 종이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참 찾았잖아요, 섀넌.”

어느 틈에 다가와 불을 붙여 준 윈터가 성냥을 호수 위로 떨어뜨리고는 섀넌의 어깨를 감쌌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흰 연기가 부옇게 흩어졌다.

“장례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러셀 주제에 정말 건방진 부탁이야.”

“더 일찍 올 걸 그랬어요. 그럼 러셀과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요?”

윈터의 말에 섀넌이 미간을 찌푸리며 코웃음 쳤다.

“그놈이랑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그 후손 놈이나 나한테 멀쩡히 보내 주면 그걸로 끝인데.”

말없이 팔을 쓸어내리는 온기에, 섀넌이 조용히 그의 품으로 기댔다.

“차라리 오지 말걸. 괜히 성가시게 됐어.”

“…….”

“지금이라도 그냥 가 버릴까. 장례야 그 후손 놈이 알아서 하든 말든.”

“조금 더 있다 가요. 여기 풍경이 마음에 들거든요.”

윈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섀넌이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뭐, 네가 정 그렇다니 기다려 줄 수밖에.”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이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잠시 그 손길을 내버려 두던 섀넌이 이내 품에서 빠져나와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다시 빨아들였다.

담배가 끼워진 손등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그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간 윈터가 저도 한 모금 빨았다. 콜록,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기침에, 섀넌이 헛웃음을 흘리며 그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갔다.

“제대로 피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꾸 뺏어 가는 거야.”

“나도 배울래요. 다시 잘 가르쳐 주세요, 섀넌.”

“싫어. 가르치는 보람이 없어.”

“나 그거 하고 싶어요. 예전에 당신이 해 줬던 거.”

윈터가 섀넌의 손을 잡아 담배를 빨게 했다. 연기를 머금은 입술이 벌어지기 전에, 윈터가 그의 입술을 덮었다. 빨아들이는 호흡을 따라 그에게 숨을 내어준 섀넌이 입술을 맞댄 채 작게 웃었다. 두 입술 틈새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건 제대로 배우는 게 아니야, 윈터.”

“한 번 더 해요.”

윈터가 그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졸랐다. 커다란 몸을 붙여 오며 끌어안는 통에 몸이 뒤로 밀린 섀넌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그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윈터 또한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섀넌은 윈터가 제 기분을 살피려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기실 이렇게 신경 써 줄 정도로 러셀의 죽음이 제게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기특한 연인의 노력을 굳이 비웃거나 뿌리칠 필요 있을까.

“귀엽기도 하지.”

초승달처럼 예쁘게 휜 눈가를 매만지던 섀넌이 호수 위로 담배를 던져 버리며 짧게 웃었다.

* * *

러셀의 집에 머무르면서 섀넌은 한 번도 그의 침실을 다시 찾지 않았다. 아니, 기실 집에 머물렀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그는 밖으로만 나돌았다.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갈 것이지,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얘, 너는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니?”

엘리자베스가 커다란 슈트 케이스를 열었다. 내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집 안에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러셀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 한가롭게 휴양이나 하면 다야?”

열어젖힌 케이스에서 술이 끝도 없이 나왔다. 정작 관광을 온 것 같은 건 그녀였다. 엘리자베스가 응접실 앞을 지나가는 후안을 불러세웠다.

“아가야, 저기, ……이름이 뭐였더라?”

대답하기 전 섀넌을 힐끗 본 후안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러셀이요.”

“아하, 리틀 러셀이구나? 번거롭지 않아서 좋네. 이거 선물이거든. 너희 아빠한테 갖다 줘.”

섀넌이 속으로 코웃음 쳤다. 러셀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건강을 끔찍이도 챙기는 놈이었다. 섀넌이 처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도 얼마나 잔소리를 했던가. 섀넌을 위한 게 아니라 옆에서 그 연기를 같이 들이마실 자신의 폐 건강을 걱정해서였다.

늘어선 술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후안이 짧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진 술 안 드시는데.”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그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지금은 마실지도 몰라. 일단 가져가 봐. 좋아할걸?”

피로한 낯으로 한숨을 내쉰 섀넌이 후안을 향해 나가라고 손짓했다. 엘리자베스를 보는 섀넌의 눈에 숨길 수 없는 한심함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곧 뒈질 거라는 걸 굳이 애한테 그렇게 간접적으로 알려야 하나.”

“무슨 소리야? 어차피 쟤도 알 건 다 알아. 내가 러셀을 좀 아끼니? 인정머리 없는 너는 몰랐겠지만, 난 가끔 들러서 쟤 커 가는 거 다 봤거든.”

소파에 반쯤 드러눕듯 몸을 기댄 엘리자베스가 한 손으로 카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라면서 러셀한테 숱하게 들었을걸. 마음의 준비는 이미 하고도 남았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술병을 섀넌의 앞으로 주욱 밀었다.

“이건 다 네 거. 선물이야.”

섀넌이 혀를 차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테이블 한구석에 엎어져 있던 잔을 뒤집었다. 그가 술병 중 아무거나 하나를 오픈해 빈 잔에 채우는 걸 지켜보던 카일이 넌지시 말했다.

“좀 우울해할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섀넌이 당치도 않은 소릴 들었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우울할 일이 뭐가 있어. ……부리던 사람이 바뀌어서 당분간 좀 불편하긴 하겠지.”

카일이 마시지도 않을 술잔을 채워 섀넌의 손에 들린 잔에 챙, 하고 부딪혔다.

“저 애가 알아서 잘할 거야. 어쨌든 쟤도 러셀이니까.”

“러셀 2호라고 하자.”

엘리자베스가 재미있는 말장난을 찾은 것처럼 손뼉을 치며 뿌듯하게 말했다.

“러셀 2호, 3호, 4호……. 앞으로는 수많은 미니 러셀들이 생길 거야. 어차피 후손이니까 그놈이 그놈이잖아? 애초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러셀 1호가 좀 유별났던 거지…….”

“…….”

섀넌이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들의 농담을 유쾌하게 받아칠 만한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러셀이 좀 유별나긴 했다. 적당히 살다가 후손이나 내놓고 죽었다면, 대를 거듭하며 불어난 방계까지 합쳐 지금쯤은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수많은 러셀들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달랑 한 명에게 모든 짐을 다 지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직계 중 누군가는 재정을 관리하고, 누군가는 저택 살림을 관리하고, 체계적으로 분업화도 가능하지 않은가.

대대로, 온전히 그리말디를 보좌하는 가문. 자신은 그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거다.

섀넌은 그런 허황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가지를 뻗도록 놔두었다. 애초에 그렇게 해야 했다. 러셀 하나만 달랑 부려먹는 건 정말이지 비효율적이었다.

‘진즉 죽었어야지.’

그는 마음 한구석에 거스러미처럼 일어난 어떤 감정에 대해,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 * *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요란한 인사를 남기고 떠난 지 사흘 즈음 되었을 때, 섀넌은 다시 러셀의 침실을 찾았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요, 섀넌 님. 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그렇게들 마시는 건가 했는데,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요.”

술잔을 든 러셀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선물을 퍽 마음에 들어 했지만, 고작 한 잔도 다 마시지 못했다. 섀넌이 그의 잔에 물을 부었다.

“이렇게 하면 좀 마실만 할걸.”

희석되어 색이 엷어진 술을 들여다본 러셀이 다시 한 모금 들이켜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맛없는 건 여전하네요.”

“독주라 그래.”

콘솔 위에 술잔을 내려놓은 러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노인의 얼굴이라 그런지, 그저 허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회한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섀넌은 그런 우수에 찬 표정 따위에 속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러셀은 철없는 소년 같은 소리를 해 댔다.

“제가 죽고 나서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겠죠?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요? 더 오래 살면 또 모르잖습니까? 정말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그런 신기한 일이 생길 지도요.”

섀넌이 가만히 술을 들이켰다. 오래 살다 보면 가끔은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놀라운 사건이 한 번씩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윈터가 찾아온 것처럼, 혹은 러셀에게 마리아가 찾아온 것처럼.

그러나 섀넌은 그의 말에 동조하는 대신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오래 살고도 몰라? 그런 일은 없어. 다 비슷비슷한 나날이지.”

“그래도 모르는 거죠. 아주 가끔 놀라운 일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저만 그걸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억울해요.”

“네가 죽고 나서도 세상은 늘 비슷할 거야. 윈터와 나도 늘 똑같을 거고.”

“어느 날 갑자기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생겨서 인간들이 모두 흡혈귀가 된다면요? 만약 대홍수가 일어나서 인간의 절반 이상이 다 죽으면 뱀파이어들은 뭘 먹고 살죠? 아니면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세상이 와서 윈터 님이 아이를 갖게 되실지도요.”

일어날 가능성이 전무한 일들이었다. 한마디로 헛소리라는 뜻이다. 정말이지 죽기 직전까지 이렇게 헛소리만 하다 가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섀넌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좀 작작…….”

게다가,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는데 왜 윈터가 임신을 한단 말인가?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임신 가능성이 있는 쪽은 그의 정액받이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자신이다.

러셀은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만한 가치도 없어서 섀넌은 그저 짜증을 냈다.

“그렇게 억울하면 죽지 말든가. 계속 살아 봐. 어디 윈터가 임신하는 날이 오나 두고 보지.”

러셀이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이내 기침으로 바뀌었다. 노쇠할 대로 노쇠한 몸은 이제 웃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도, 마리아를 만난 기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저는 이제 마리아를 만나러 갈 거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

결론은 또 그놈의 사랑 타령이군.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이쯤 되니 섀넌에게도 더는 마리아라는 존재가 사소하지 않게 되었다. 대대손손 이어질 러셀의 후손들은 그녀의 성을 따 ‘카스티요’라는 가문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러셀은 애초에 사창가에서 태어난 노예 신분이라 성이 없었지만, 신분을 위장하며 붙인 가명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어도 되었을 텐데 구태여 마리아의 성을 붙인 것이다.

섀넌은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제 와서 성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 러셀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 아들놈을 좀 불러 주시겠어요?”

섀넌은 그의 침실에 후안을 들여보내 놓고, 그 자신은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이나 복도를 서성이는 그의 곁으로 윈터가 다가왔다.

“섀넌.”

“…….”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일을 유예하듯,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연인의 어깨를 감싼 윈터가 그를 데리고 러셀의 침실로 들어섰다.

후안의 손을 잡고 있던 러셀이 섀넌을 보고 미소 지었다.

“섀넌 님.”

그가 섀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에 걸쳐진 채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가만히 보던 섀넌이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담백하게, 악수를 나누듯.

“저, ……그동안 좋은 사람이었나요?”

섀넌은 러셀과 이토록 오랜 시간 눈을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다. 백내장으로 한쪽 색이 옅게 바랜 눈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섀넌이 짧게 대답했다.

“아마도.”

맞잡은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러셀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안도감이 내려앉은 얼굴에서, 시간의 흐름이 사라졌다.

이렇게, 러셀의 시간은 영원히 멎어 버렸다.

“…….”

빛이 꺼진 얼굴을 가만히 보던 섀넌이 그의 손을 이불 위로 살며시 내려놓았다. 감기지 않은 눈꺼풀을 닫아 주려던 그가 이내 허공에서 손을 거뒀다.

“네 아버지 눈 감겨드리고, 장례 준비 시작해.”

대신 맞은편에 서 있는 후안을 향해 짤막한 지시를 남기고 돌아섰다. 곧바로 침실을 나가지 못한 발걸음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췄다.

이윽고 손등에 따뜻한 온기가 스쳤다. 옆에 선 윈터의 손을 힐끗 내려다본 섀넌이 그 손을 맞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후안과 러셀, 둘만을 남겨 놓은 침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 * *

장례는 사흘 동안 치러졌다.

조문객의 대부분은 러셀과 한마을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부부가 불과 1년의 터울을 두고 이렇게 연달아 비극을 맞이한 것에 대해 무척 애통해했다.

어쩌다 후안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며 양친을 모두 잃은 그를 위로했다. 덕분에 장례식은 내내 비통한 울음소리와 한숨 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이들 틈에서 섀넌은 단연 차분했다. 이튿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짜증을 낸 것 말고는, 정말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주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추모사를 진행할 때였다. 섀넌은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다분했지만, 망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조문객들에게 한마디 정도는 남겨야 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느끼는 참담함과 비애가 클 것으로 압니다.”

엄숙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조문객들은 으레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를테면 ‘그러나 그가 생전 베풀었던 사랑만은 늘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며…….’ 따위로 시작하는 흔한 위로나 감사의 인사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첫마디를 뗀 섀넌은 도통 그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

마치 할 말을 다 한 것처럼 차분하고 오만하게 장례식장을 나가 버렸다. 조문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수군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이상하게 끝난 추모사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섀넌은 내내 그런 상태였다. 자신과는 전혀 연이 없는 남의 일을 구경하듯, 혹은 다소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듯. 때로는 조금 허탈한 얼굴을 하고선.

구둣발로 젖은 흙을 밟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조문객들이 삽으로 흙을 퍼 러셀의 관을 덮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윈터는 그런 그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서로 간에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섀넌은 윈터가 여전히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윈터는, 섀넌이 지금은 그 어떤 염려도 위로도 받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해가 저무는 저녁, 조문객이 다 떠난 묘지 위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한 구름이 비를 떨궜다.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던 우산의 손잡이를 윈터에게 넘긴 섀넌이 그의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긋지긋한 비도 이제 끝이군.”

습기와 추위에 예민한 몸이 작게 떨렸다. 코트를 벌려 섀넌을 품으로 끌어온 윈터가 한 손으로 그의 차가운 뺨을 덮어 온기를 나눠 주었다.

“그래도 러셀에게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실소를 흘렸다.

“살아 있을 때 실컷 했잖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요.”

헛소리를 지껄여도 인내심 있게 다 들어 주고, 임종까지 지켜 줬으며, 빌어먹을 장례식도 참석했다. 도대체 여기에서 뭘 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건지.

“그 정도면 됐지, 무슨 대우를 더 바라.”

“대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이에요. 지금 해 두지 않으면 매년 기일마다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

기일? 윈터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가 못마땅한 눈을 치켜떴다. 기일 같은 소리 하네. 의미 없는 흙더미에 매년 찾아와서 꽃이나 바치는 짓은, 그런 건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섀넌.”

윈터가 제 코트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의지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잖아요. 좀 슬퍼하면 어때요? 그래도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고 안 해요.”

별안간 섀넌이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 질색하는 얼굴로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던 우산이 떠나자 검은 머리칼 위로 반짝반짝 빗방울이 맺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의지를 해. 러셀과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

“나는 그 누구한테도 의지 안 해. 그걸 아직도 몰라?”

한 발짝 다가가 섀넌의 머리 위로 다시 우산을 드리운 윈터가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왜 몰라. 누구보다 당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난데.”

“…….”

그의 태도에서 위압은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섀넌은 어쩐지 막다른 길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욕스러운 누명을 쓴 것처럼 억울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스운 꼴을 들킨 사람처럼 굴욕감마저 느껴졌다.

“나는,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윈터.”

정말이지 짜증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각인으로 묶인 이 관계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져 본 적 없었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다 안다는 듯 굴 때마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한참 잘못 짚은 주제에, 나에 대해 알긴 뭘 안다고.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섀넌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신은 지금껏 살면서 단 한 순간도 타인에게 의지해 본 적이 없다.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그만한 능력이 되니까.

그렇게 혼자 살아온 인생인데, 하찮은 노예 새끼 한 마리 죽은 게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새로운 러셀이 제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놈이길 바랄 뿐이었다.

“거창한 의미 갖다 붙이지 마. 러셀이 징글징글하게 오래 살긴 했어도, 나한테 그 정도 의미가 있는 놈은 아니야.”

“그럼 이 상실감은 누구 건데요.”

“…….”

섀넌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윈터와 언쟁 비슷한 것을 벌였다. 지나치게 마음이 잘 통하는 관계가 때로는 충돌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가 윈터의 가슴팍 정중앙을 검지 끝으로 툭 눌렀다.

“그건 네 거야. 네 안에 있는 감정이지, 나한텐 없어. 너는 원래부터 정이 많은 아이니까, 러셀이 죽은 게 슬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처럼 나약하지 않거든.”

섀넌은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아무리 홧김이라 해도 너무 지나친 언사였다. 윈터는 연인인 동시에 영원히 자신이 품어야 할 제 아이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약한 존재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을 인정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므로.

섀넌은 끝까지 가시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여 네게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기다려 줄 수는 있어. 너는 그래도 돼. 하지만 나는,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같잖은 위로 집어치워.”

그들이 한 우산 안에서 그렇게 다툼을 벌일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후안이 오늘 장례를 진행한 주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오열하든 말든 시종일관 덤덤하게 제 할 일을 하던 그는 주교 앞에 홀로 남게 되자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난처한 얼굴로 윈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섀넌은,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후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은 도무지 낯설고 이상했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윈터의 대답에 섀넌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져 버렸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 일어난 이 거스러미 같은 감정 한 올을 빨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거추장스럽게.”

비에 젖은 묘지를 멀거니 보던 섀넌이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윈터가 급히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우며 따라갔다.

마침내, 신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멜빈 브롬워치.

어디에서 본 듯 만 듯 진부한 구절이 적힌 비석과 그 아래 적힌 러셀의 가명을 확인한 섀넌이 혀를 찼다.

마침내 신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아.

이런 초연한 글귀는 러셀에게 걸맞지 않았다. 삶에 징글징글하리만치 집착했던 놈이니까.

섀넌은 묘비 앞에 서 있는 제 한심한 꼴을 행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신경 쓰였다. 발밑에 묻혀 있는 것은 이미 고깃덩이가 된 한낱 육신일 뿐인데, 대체 이 앞에서 궁상맞게 뭘 하라는 건지.

“…….”

그래, 러셀은 이제 고깃덩이가 되었다.

덥고 습한 지역이니 썩은 육신은 수년 안에 백골이 되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

생각해 보니,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퍽 많다.

이를테면 첫 기숙사 학교에서 홧김에 죽인 룸메이트를 뒷산에 함께 묻었던 일, 남편이 있는 귀부인과 뒹굴며 침실 앞에서 러셀에게 망을 보게 했던 일 같은, 섀넌이 철없이 날뛰던 시절에 저질렀던 한심한 실수들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삶에 흥미를 잃고 백여 년 가까이 북부 저택에 칩거하는 동안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어린 윈터를 키우는 동안 제게 찾아온 심경의 변화와, 또 그것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꼈는지도.

카일과 엘리자베스조차도 모르는, 오직 섀넌을 가까이에서 시중들어온 러셀만이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와 특별한 정서적 유대감을 나눈 것도 아니요, 정이 들었다고 할 만큼 애착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섀넌은 무언가 큰 전환점 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윈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낱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러셀이 제게 어떤 버팀줄 노릇을 해 준 부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필멸자들이 태어나고 스러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는 영겁의 생에, 자신의 시작과 현재의 모든 과정을 기억해 주는 이가 있었고…….

이제는 없다.

“흠.”

별다른 감흥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던 섀넌이 돌연 주위에 있던 삽을 몸소 집어 들었다. 우아하고도 약간은 서툰 동작으로 흙을 조금 퍼담은 그가 무덤 위에 대강 얹었다.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삽의 머리 부분으로 흙 위를 톡, 톡, 두어 번 두드린 그가 삽을 내팽개치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기일 같은 건 안 챙길 거야.”

윈터를 향해 몸을 돌린 섀넌이 들고 있던 손수건을 떨어뜨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끝.”

이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기억을 공유하는 이가 사라졌다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제 이전의 삶은 러셀의 죽음과 함께 정말 영영 사라지고, 윈터를 만난 이후의 삶만이 남은 것 같았다.

윈터가 그의 손등을 덮었다. 섀넌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조용히 맞잡았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섀넌에게 첫 인정의 순간이 조용히 찾아왔다. 이 기특하고 발칙한 연인 때문에,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카일, 엘리자베스, 러셀……. 제 인생에 배치되어 있던 조연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실낱만큼 작을지라도, 자신 또한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 첫 인정의 순간은, 그에게는 매우 큰 도약이었다.

그리고 그런 섀넌이 가장 기꺼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윈터다.

“……내 수치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놈이 죽어 버리니 정말이지 홀가분하군.”

“이제는 내가 다 기억할게요.”

저조차도 모르는 본심을 알아주고, 보듬어 줄 줄 아는 유일한 연인.

윈터의 크라바트를 살짝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어온 섀넌이 웃으며 말했다.

“안타까워서 어쩌지. 난 이미 살 만큼 살아서 별달리 부끄러운 짓을 할 일이 없거든.”

그가 손끝으로 윈터의 콧등을 톡 건드렸다.

“대신 네 철없는 시절은 내가 다 기억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귀엽고 경솔하게 살아. 그런 널 지켜보는 게 내 삶의 낙이야.”

“나도 이젠 어리지 않아요, 섀넌.”

다소 심통이 난 듯 뾰로통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윈터가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저 주교보다 내가 더 나이 많단 말이에요.”

섀넌은 윈터가 말하는 주교를 힐끗 바라봤다. 70세는 족히 되었을 것 같은 백발노인에게서 다시 윈터에게로 시선을 옮긴 섀넌이 그의 귓불을 매만지며 웃었다.

“내 눈엔 아직도 이렇게 아기인데? 저 주교도 분명 그 부모 눈에는 영원히 아기일걸.”

그러나 윈터는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섀넌을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물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나이를 추월할 수는 없겠죠. 평생 당신보단 어릴 거야.”

손가락 사이로 온기가 파고들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이나 자랐다는 건 알아주세요.”

섀넌보다 한마디 이상이 더 긴 손가락이 깊게 얽혔다.

“때로는 기대도 되고, 당신의 안위를 온전히 맡기고 내 뒤에 숨어도 돼요. 그래도 당신을 감히 비웃을 사람 아무도 없어. 내게 아무리 의지해도 당신은 여전히 섀넌이고, 늘 강할 테니까. ……그러니 제발,”

그의 턱을 쥔 윈터가 고개를 기울였다. 엇갈린 코끝이 서로의 뺨을 눌렀다.

“당신도 내게 의지해 주세요.”

내가 그늘이 되게 허락해 주세요. 간절한 속삭임과 함께 입술이 맞닿았다. 살갗을 타고 자르르한 온기가 전해졌다.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음이 가득한 우산 안에서, 사랑해마지않는 연인과 짧은 입맞춤을 끝낸 섀넌이 그의 입술 안으로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애원하지 않아도…….

“넌 예전부터 내 그늘이었어, 윈터.”

누군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이 꼭 나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제 섀넌은 안다. 이만큼이나 살았음에도 어린 연인에게서 배울 게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제 또 이렇게 자란 걸까. 다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제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다 꿰뚫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일깨워 줄 만큼 말이다.

정말이지 기특하고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섀넌과 윈터는 마을 외곽의 대로를 천천히 걸었다. 마차를 빌리기 위해선 장례식장을 벗어나 마을 어귀까지 가야 했다.

이따금 그들은 누군가가 뒤에서 잘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마을의 풍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너.”

별안간 걸음을 멈춘 섀넌이 뒤를 돌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러셀……, 이요.”

후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네 원래 이름 말이야.”

후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헷갈렸다. 분명 ‘앞으로 네 이름은 러셀이니까, 멍청한 실수하지 말고 똑바로 기억해 둬.’라며 몇 번이나 못 박았던 것 같은데…….

뭔가 유별난 방식의 테스트라고 여겼는지, 잠시 눈을 굴리며 섀넌과 윈터의 눈치를 살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러, ……러셀 카스티요?”

곧바로 섀넌의 얼굴에 짜증이 스몄다. 후안이 재빨리 답을 고쳤다.

“후안! 후, 후안입니다.”

“후안.”

흠……, 작게 침음한 섀넌이 입속으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반복해 되뇌었다. 좀 촌스러워도 썩 나쁜 이름은 아니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턱을 치켜들고 후안을 바라봤다.

“굳이 죽은 사람 이름을 계속 쓸 필요는 없겠지.”

“어……, 그럼 계속 이 이름을 써도 되는…….”

“대학은, 졸업했나?”

“아뇨. ……아버지께 기본 교육 정도는 받았습니다.”

몇 걸음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위아래로 못마땅한 듯 훑던 섀넌이 고개를 저었다.

“난 고학력자를 원해.”

“…….”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지식이 중요하거든. 네 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에 있어선 꽤 괜찮았어.”

낡은 구두, 장례식 때문에 급하게 구입한 듯 몸에 맞지 않는 싸구려 슈트와 구겨진 크라바트를 찬찬히 살핀 눈이 다시 위로 올라와 후안의 얼굴로 향했다.

생전 러셀이 정말 돈 욕심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궁상맞게 살 정도였으면 제게 와서 말이라도 한 번 해 볼 것이지. 욕은 좀 했겠지만 돈은 부족함 없이 줬을 거다.

정말이지 가르칠 것이 한둘이 아니군. 섀넌이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몇 년간은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대학 졸업이나 하도록. 회계를 전공하면 도움이 되겠지만, 네 아버지처럼 아예 엉뚱한 분야에 꽂혀도 좋아. 다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할 거야.”

“예…….”

“앞으로 넌 그리말디를 위해 일하는 총괄 집사가 될 거고, 나이가 차면 결혼도 해야 하고, 그 하찮은 씨를 부지런히 뿌려서 카스티요 가문을 이어가야 하니까.”

“아……, 예…….”

“축하해.”

“……예?”

“적어도 앞으로 돈 걱정하고 살 일은 없을 테니.”

할 말을 마친 섀넌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저기 그럼, 혹시 급여는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그다음 순간, 후안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갈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고 허무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네. 성질머리…….”

그가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내어 버린 말을 얼른 틀어막았다. 그 말투는 꼭 제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 * *

섀넌은 다음 정착지를 고민하며 잠시 머무는 별장에서 한가롭게 누워 윈터를 구경하고 있었다. 굼벵이처럼 느려터진 후안이 자신들에게 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무래도 윈터는 러셀의 죽음이 아직 슬픈 모양이었다. 러셀이 생전 보낸 편지를 제본까지 엮어 성실히도 모아 두더니, 이제는 그걸 몇 번이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잔정이 많기도 하지.”

러셀의 편지를 엮은 제본은 서재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도 모자라 저택 지하 창고에도 쌓아 두어야 할 정도였다.

자긴 아무리 그래도 그 지긋지긋한 편지들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데, 생각보다 윈터가 러셀에게 정을 많이 주었던 모양이다.

귀여워라. 그리움에 젖어 있는 저 얼굴 좀 보라지.

“…….”

흐뭇하게 웃던 섀넌이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도대체 그 많은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 거야. 러셀이 아무리 수다스러워도 그렇게나 할 얘기가 많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페이지를 넘기던 윈터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가 옆으로 눈을 쓱 굴리더니, 이내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얘기요.”

“이런저런 얘기?”

섀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수상해도 단단히 수상했다. 왜 이제야 눈치챈 건지 모르겠다. 편지를 읽는 윈터의 얼굴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한다기보다는, 어딘지 조금 기묘했기 때문이다.

“……나도 한 권 줘 봐.”

섀넌이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대고선 손을 까딱였다. 그 순간 윈터가 그의 눈치를 보며 제본을 탁 덮었다.

“지루해요? 나갈까요?”

“아니. 전혀.”

“…….”

“그거 이리 내.”

“봐 봤자 별거 없는…….”

섀넌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까딱였다. 윈터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자신이 읽고 있던 것을 섀넌에게 내밀었다. 빼앗듯 제본을 낚아챈 섀넌이 아무 페이지를 대강 펼쳤다.

「이 방탕한 흡혈귀가 또 외박을 했다. 나야 놈이 집에 안 들어오면 편하지만, 꼭 며칠씩 외박하고 들어온 날에는 평소보다 성질이 더 더러워지니 좀 불안하다.

이번에는 또 며칠 뒤에나 들어올지……, 또 무슨 일로 트집을 잡아 사람을 달달 볶아 댈지. 신께선 뭐 하시나, 저런 놈 안 데려가고. 천국은 물론 지옥에도 발 못 디딜 종자라 신께서도 포기하신 건지…….」

“……음.”

섀넌이 낮게 침음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러셀의 편지에는 익히 예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놈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음식의 맛은 느끼지 못해도 향은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도, 가끔 내가 마시는 차에 흥미를 보인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놈을 독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놈이 차를 입에 대는 날이 온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날은 요원할 것 같다.

어쨌든 오늘부터 나는 약학 공부를 시작했다. 저 흡혈귀 놈이야 병들 일도 늙을 일도 없으니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이니 무병장수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래서는 병든 몸으로 수백 년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중략)…….

우선, 저놈이 나를 좀 적당히 부려 먹어야…….」

「놈에게 이 일지를 들킬 뻔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정말 들켜 버릴 것을 대비해서 좀 공손해져야 할 필요가 있겠다. 날 죽이지는 못해도 혹시나 눈이 돌면 무슨 짓을 할지……(중략)…….」

「섀넌 님께선 오늘도 외박을 하셨다. 그래도 집으로 여자를 들이는 것보다는 밖에서 그러시는 편이 훨씬 좋다. 언제 돌아오시겠다는 언질이라도 좀 해 주시면 더 좋으련만……(중략)……그냥 섀넌 님이 영영 안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제발, 그 뱀파이어 놈이 길 가다 머리라도 세게 부딪혀서 날 기억하지 못하게 해 주세요!」

“…….”

당연한 말이지만, 섀넌은 이 일지의 존재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진즉 알고 있었다. 러셀이 한두 번 들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지가 수백 년 지난 지금 제 연인에게 다시 읽히는 건 참으로 개탄스러운 사태다. 정말이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섀넌은 제 앞에 미리 무릎 꿇고 있는 연인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나 몰래 그 새끼랑 이런 걸 주고받았어?”

“몰래는 아니고. ……당신이 러셀 편지에는 워낙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윈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으레 자기가 불리한 상황이면 지어 보이는 불쌍한 표정을 짓고선.

“언제부터.”

“거의 처음부터……?”

하, 섀넌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면 러셀의 편지를 성실히 읽고 답장을 쓰는 건 늘 윈터의 몫이었다.

그저 착하고 기특한 연인이 저 대신 훌륭한 사회성을 발휘해 러셀의 지긋지긋한 수다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괘씸하게도 어찌나 잘 숨겼는지, 각인한 연인이 이걸 읽고 또 읽는 내내 자신은 까맣게 몰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윈터의 말에 따르면, 절반 정도는 러셀이 편지에 끼워 직접 보냈고 또 어떤 것들은 일지가 보관된 저택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고 했다.

물론 러셀이 기록해 온 모든 일지가 다 보존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았던 저택 중 일부는 불에 타 사라지기도 하고, 또 허물었다가 다시 짓기도 하는 등의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 창고에 쓸데없이 먼지만 쌓여 있던 그놈의 ‘연구 일지’들을 진즉 다 불살라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이건 연구 일지가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폭로하는 일종의 고발 일지다. 적어도 섀넌에겐 그랬다. 이것들은 응당 땅에 묻힌 러셀과 함께 사라졌어야 마땅했다.

「뱀파이어의 정력은 정말 징글징글하다. 차라리 외박이라도 하시면 좋으련만 요즘 섀넌 님은 툭하면 여자를 데려와 며칠씩 침실에 처박혀……(중략)……시끄러워서 못 살겠다. 아주 섹스에 미친놈이 따로 없 혹시 뱀파이어가 가진 회복력이 정력과 성욕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까.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연구 주제……(중략)…….」

“흠…….”

섀넌이 짧게 침음하며 일지를 덮었다. 그는 이미 죽은 러셀을 다시 죽이고 싶었다. 관에서 꺼내 그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다. 죽어서까지 쓸모없는 노예 놈 같으니라고.

“읽지 마. 다 태워 버릴 거야.”

“이미 다 읽었어요.”

파스락. 섀넌이 손에 있던 일지를 반으로 쪼갰다. 두꺼운 제본이 그의 손길 한 번에 부드러운 카스테라처럼 뭉개졌다.

“이미 본 걸 또 보는 건 더더욱 시간 낭비지.”

한 번 읽은 것을 읽고 또 읽고 반복해 읽으면 그만큼 기억에 잘 남기 마련이다. 섀넌은 러셀의 죽음과 함께 영영 흙 아래로 묻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들을 굳이 제 연인의 머릿속에 심어 두고 싶지 않았다.

“늦었어요. 이미 당신이 만났던 여자들 이름까지 다 꿰고 있는데요.”

“…….”

아아……, 정말이지 짜증 나는 노예 새끼.

화를 삭인 섀넌이 어이없는 얼굴로 윈터를 노려봤다.

“언제 철들래?”

“철들면 질투도 못 해요?”

“수백 년 전 과거 일을 질투하는 건 철든 어른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

“어차피 난 영원히 아기라면서요? 그냥 계속 아기 할래요.”

“하…….”

빌어먹을 노예 새끼 같으니.

섀넌은 관에 있는 놈을 꺼내서 두 번 세 번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다. 아비는 죽고 없으니 그 아들놈에게라도 이 화를 풀어야겠다. 억울하다 한들 알 바 아니었다. 아비가 죄를 짓고 죽었으니 그 죗값은 응당 그 아들놈이 치러야만…….

“그래도……, 러셀 덕분에 내가 몰랐던 당신의 시간들을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배신감과 복수심에 활활 타오르던 섀넌이 저 혼자 행복하게 웃고 있는 윈터를 바라봤다. 그는 섀넌의 손을 가져가 제 뺨에 댔다.

“그때의 당신을 만날 수는 없어도 이렇게 기억해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무슨 그런 유치한…….”

연인의 뺨을 감싸며, 섀넌은 곤두선 신경이 다시 눅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가 곁에 있으면 늘 이렇게 화를 표출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다. 저 불리할 때면 유독 더 예쁘고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기 때문이다.

쯧, 섀넌이 혀를 차며 그의 뺨을 꼬집었다.

“그래도 이건 허락 못 해.”

그가 윈터를 놔두고 침대에서 휙 벗어났다.

별장 앞 공터에 순식간에 장작이 쌓였다. 섀넌은 마치 죄인의 화형식이라도 거행하듯 신중하게 곳곳에 불을 놓았다. 2층 서재 창문이 왈칵 열리며 두꺼운 제본들이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와서 태워 봤자 소용없다니까요, 섀넌. 여기 있는 것들은 이미 다 읽었어요.”

윈터가 위층에서 뭐라고 쫑알거리든, 섀넌은 아랑곳없이 땅에 떨어진 제본을 주워 불길 안으로 던져 넣으며 제 부끄러운 과거들을 청산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엿 같은 노예 새끼.”

종이를 살라 먹은 불꽃이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며 화르륵 타올랐다.

“살면서 이룩한 거라곤 이딴 비루한 연구 일지밖에 없는 놈이.”

제본 한 권이 불 속으로 날아갈 때마다 욕설이 한마디씩 따라붙었다. 러셀이 들었다면 관 속에서도 벌떡 일어날 만큼 신랄한 내용이었다.

윈터가 위층에서 던져 주는 것들을 주워 부지런히 불길 안으로 팽개치던 섀넌이 쯧쯧 혀를 차며 한 권을 펼쳤다.

「지긋지긋한 뱀파이어 놈 성질머리.」

“시발.”

제본을 갈기갈기 찢어 던져 버린 섀넌이 또 다른 제본을 주웠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맞는 밤이라 그런지, 간밤에 늑대는 계속 울기만 했다. 섀넌 님은 여전히 술만 쳐드시고……(중략)…….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꾸 개 냄새가 난다는데 당최 코딱지만 한 동물한테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자기야말로 개의 후각을 가진 개차반이 아닌가? 툭하면 냄새 때문에 못 살겠다며 창을 활짝 열고 환기하는데, 또 툭하면 춥다고 지랄지랄을 하며 창문을 닫으라 마라……(중략)…….

늑대는 매우 어리다. 눈도 반밖에 못 뜬 주제에 성깔이 꽤 있는 것 같지만, 그래 봤자 지금은 강아지다. 이가 작아서 고기를 제대로 씹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내일은……(중략)…….」

「섀넌 님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다. 이럴 땐 되도록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생필품 마련과 심부름을 핑계로 최대한 집을 오래 비워야겠다.

게으르고 성질 나쁜 뱀파이어와 단둘이 저택에 남아 있어야 할 늑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맹약이 걸려 있으니 설마하니 죽이진 않으시겠지…….」

「이상하다. 정말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없는 사이 늑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둘의 사이가 퍽 다정해 보인다. 늑대를 곁에 두고 한가롭게 책을 읽는 섀넌 님의 모습은…….

정말, 정말……,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섀넌 님이 돌아 버린 모양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사람이 미쳐 버린다더니, 뱀파이어도 예외가 없다.

집을 괜히 비운 걸까? 미친 뱀파이어와 한 저택에 있으려니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섀넌은 제본을 던져 넣길 멈추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오물과 다름없던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갑자기 반짝이는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뒤에서 낚아채는 듯한 손길이 섀넌을 끌어왔다.

“불 앞에 너무 가까이 있지 마세요. 그러다 당신도 타 버리면 어떡해요?”

허리를 감은 윈터의 팔에 손을 얹은 섀넌은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 눈살을 찌푸린 그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타임라인이 아주 엉망이군.”

“러셀이 무작위로 보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르게 훑어 내용을 확인한 섀넌이 그것을 불길에 던져넣는 대신 품에 안았다.

“이건 안 태울래.”

다른 건 몰라도 윈터를 만난 이후의 이야기는 남겨 두고 싶었다. 물론 당시의 일들은 두고두고 기억하지만, 혹시 자신은 모른 채 러셀 혼자만 알고 지나간 윈터의 순간들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다른 책들을 주워 내용을 확인하며, 섀넌이 조금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음했다.

죽기 전에 아주 약간의 쓸모는 남겨 두고 간 노예 새끼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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