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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겨울,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온 도시의 밤은 무척 길다.
매년 열리는 펜스포드 음대의 연말 행사를 치른 오후.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그 가족이 모인 연회장은 졸업 파티를 명목으로 한 상류층의 사교 활동이 한창이었다.
자제들의 소모임을 매개로 그 부모들이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조금 보수적인 집안은 미리 정략혼을 협의하기도 한다.
종달새 같은 웃음소리와 글라스를 부딪는 소리, 누군가 실수로 부딪혀 엎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높다란 케이크 장식과 반짝이는 조명 빛이 내려앉은 실크 드레스들 사이로 진회색 연미복을 입은 섀넌이 지나갔다.
“애쉬!”
중년의 귀부인들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바삐 입을 놀리고 있던 카일이 그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 도시에선 카일이 자신들의 숙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섀넌은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조금 장단이나 맞춰 줄까.’
“제 조카들이 절 닮아서 외모며 재능이며 빠지는 구석이 없긴 하죠, 하하!”
“어머, 그런가요? 사실 그리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경께서도 충분히 근사하시지만요. 그리말디가엔 전부 미인들만 있나 봐요.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들 훤칠하신지…….”
달짝지근한 향을 풍기는 색색의 펀치볼 중에서 적당히 하나를 골라 잔에 담은 섀넌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요, 애쉬. 오늘 연회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귀부인 중 하나가 섀넌에게 만개한 꽃 모양 글라스를 내밀며 웃었다.
“카일 경께서 준비하는 행사는 늘 반짝여서 좋아요. 이 잔 좀 봐요. 저 케이크 장식은 또 어떻고요. 전부 화려해서 어딜 봐도 눈이 부실 지경이라니까요.”
오자마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말소리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섀넌이 보기에 이 파티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숙부님의 취향이야 어딜 가든 늘 돋보이지요.”
그러나 그 속내를 입 밖으로 그대로 낼 수는 없어서, 그는 짐짓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과장되게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섀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자랑스러운 리안은 어디로 간 거야, 애쉬?”
섀넌 또한 마찬가지로 친근한 웃음을 가장하며 제 어깨에서 그의 손을 슬쩍 치웠다.
“글쎄요. 교수진에게 붙잡혀 향후 진로에 관한 상담을 받고 있겠죠.”
퍽 성의 없는 태도였으나, 카일은 아랑곳없었다.
“하하하, 제 조카들을 두고 이런 말은 낯부끄럽지만, 애쉬나 리안이나 교수들이 충분히 탐낼 만한 인재죠. 장차 수많은 아트홀에서 서로 초대하지 못해 안달일 겁니다.”
섀넌은 제 어깨를 퍽, 퍽, 두드리는 카일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다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었다.
“……숙부님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카일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마시지도 못하는 핑크빛 음료를 손에 들고 한껏 연극에 취해 있는 그를 보며, 섀넌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정말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특히 오늘 리안의 연주는 역대 수석 졸업생 중 최고였답니다!”
“기품이며 실력이며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어서……, 마치 명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리안이 연주한 솔로곡이 대체 뭔가요? 처음 듣는 선율인데……,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 번만 듣고 끝내기엔 아깝더군요.”
“아, 그건 말콤 교수가 오늘 최초로 공개한 곡인데, 오직 우리 리안을 위해 특별히…….”
귀부인들은 리안의 연주를 거듭 칭찬하고, 카일은 마치 자신이 그를 업어 키운 마냥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섀넌은 카일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오늘 낮에 있었던 윈터의 공연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의 첫 무대를 지켜보는 건, 섀넌에게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그간의 지루한 학교생활을 모두 보상받는 동시에, 조금 더 과장하자면 먼 과거 갓난쟁이였던 그를 보살펴야 했던 20년의 세월까지 환영처럼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명화의 한 장면 같긴 했지…….’
그가 원하던 왕립 아트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명 디자이너가 단독으로 직접 제작한 블랙 슈트를 빼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핀 조명을 받은 윈터의 모습은 명화 그 자체였다.
그가 연주하는 선율은 또 어땠던가. 다른 고만고만한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객관적으로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아주 예민한 소수만이 눈치챌 법한, 미세하게 흔들린 구간이 있긴 했다.
“……특히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땐 소름이 돋더라니까요? 아름다운 곡이었어요.”
“어머나, 맞아요. 리안이 연주했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 사실 그건……, 실수가 아니다. 그것 또한 연주의 아름다운 일부였다. 정말 완벽하고……, 완벽한 예술 그 자체였다.
오고 가는 귀부인들의 칭찬 속에서 홀로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한 채, 섀넌은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찰나의 생을 사는 인간들이 예술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겠느냐마는, 어쨌거나 저들의 찬양은 옳다.
윈터의 그 실수, ……아니 의도한 변주는 정말 천재적이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말콤 교수의 자작곡이 윈터의 손에서 비로소 완벽하게 탄생한 것이다.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그렇게 예쁘고 깜찍한지, 어쩜 그렇게나 신이 빚은 듯 사랑스러운지……!
아침까지 제 안을 드나들었던 커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건반 위를 내달리는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새삼 생각하는 거지만,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존재가 제 손아귀에 떨어진 건지 모르겠다.
섀넌은 마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 홀로 조용히 감동과 경이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다. 섀넌은 생전 처음으로 윈터의 연주를 들으며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살다 살다, 그런 충격과 전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다음엔 무용수를 시켜 봐야겠는데. 하지만 몸이 너무 커서 그를 받아 줄 스승이 있을지……. 아니, 인간들이 뭘 알겠어. 그 몸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예술인데. ……아니야,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히고 사람들 앞에 세우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야.’
“애쉬, 졸업 후엔 뭘 할…….”
‘아니면 첼로를 시켜 볼까. 손이 너무 커서 운지가 제대로 될지 모르겠군. 하긴, 피아노도 처음에는 건반을 부숴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 뭐든 배우면 잘할 거야. 내 윈터는 천재가 틀림없어…….’
“애쉬?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달갑지 않은 카일의 목소리가 섀넌을 깊은 망상에서 끄집어냈다. 윈터의 다음 진로를 계획하며 몇 분간 행복에 겨워 있던 섀넌으로서는 갑작스럽게 찬물을 뒤집어쓴 셈이다.
습관적으로 그에게 짜증을 낼 뻔한 섀넌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잘 듣고 있습니다, 숙부님. 다만, 저는 잠시…….”
홀 안을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멎었다. 이제야 겨우 교수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난 윈터를 발견한 섀넌이 카일과 귀부인들을 향해 급히 인사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카일이 뭐라고 몇 마디 더 건넨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장단 맞춰 줄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지나가는 서버의 트레이에 반절도 다 마시지 않은 펀치 잔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홀을 누비는 동급생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지른 섀넌이 결국 윈터에게 닿았다.
“애쉬……?”
별안간 손목을 잡힌 윈터가 살짝 의아한 눈으로 섀넌을 바라봤다. 섀넌이 그를 끌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졸업 예정자들과 그 일가까지 참석하는 파티라 어딜 가든 다 사람이 붐볐고, 어느 객실이든 다 만실이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도 사람들과 부딪히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요령 좋게 돌파하던 섀넌이 결국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복도 가장 끝에 있는 손님 코트 보관실 중 하나로 들어섰다.
문을 덜컥 잠근 섀넌이 곧바로 윈터의 뺨을 잡고 키스했다. 가지런히 걸려 있던 코트들이 그들의 몸에 밀려 이리저리 쏠렸다.
“샤, 갑자기……, 읏.”
윈터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섀넌이 잠깐 입술을 떼고 경고했다.
“조용히 해. 소리 들려.”
주인 기다리는 코트를 걸어 두는 것 이외의 용도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은 두 사람이 서 있기에 한참 부족할 정도로 협소했다.
아침에 손수 매어 준 크라바트를 휘휘 풀어 내리는 섀넌의 손을 잡은 윈터의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여, 여기서 하시려고요? 코트 보관실에서?”
“웬 망상이야. 그냥 키스만 좀 하자는 건데.”
“근데 옷은 왜…….”
“재미없게 굴지 마.”
윈터의 셔츠 단추를 용케도 뜯어 버리지 않고 요령 좋게 토도독 풀어낸 섀넌이 그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마구 더듬었다.
“내내 만지고 싶었거든. 여기.”
그가 엄지 끝으로 연갈색 유두를 슥 긁어내리자, 커다란 몸이 움찔 굳었다.
“읏.”
“쉬……, 조용히 하라니까.”
윈터의 입술이 잡아먹힐 듯 뒤덮였다. 입속으로 종알종알 항의하는 소리가 울렸으나 섀넌은 개의치 않고 키스에 몰두했다. 그들의 몸에 촤르륵 밀려난 코트들이 결국은 엉망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혀를 잘라먹을 듯 세게 옭아맨 섀넌이 그의 입안을 멋대로 헤집었다. 윈터에겐 단 한 점의 주도권도 넘기지 않은 키스는 거칠고 사납기 짝이 없었다.
그가 내뱉는 숨이 모조리 섀넌에게 빨려 들어갔다. 입가에 흐르는 타액마저 다 가져가며 턱 끝을 스친 입술이 목덜미와 쇄골 위를 마구 지분거렸다.
“섀넌……, 읏.”
가슴팍을 살짝 깨물고 지나간 치아가 유륜 위를 긁자, 인내심이 거의 바닥 난 윈터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다시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귓불을 지분거리는 섀넌의 뺨을 감싼 윈터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부딪는 순간, 갑자기 섀넌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하아…….”
그래 봐야 좁아터진 코트 보관실에서는 단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벌어졌을 뿐이었다. 떨어진 두 입술 사이로 긴 호흡이 흩어졌다.
돌연 차분하게 제 옷매무새를 정돈한 섀넌이 침착한 태도로 윈터의 단추를 하나하나 다시 잠그기 시작했다.
“섀넌……?”
“이제 됐어.”
“네?”
“내내 이렇게 하고 싶은 걸 참았거든. 이제 만족했으니까, 나머지는 파티 끝나고 침대에서 하자고.”
“…….”
불과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물고 빨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홀로 차게 식은 섀넌이 윈터의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널브러진 코트 위로 떨어진 크라바트를 주워 탁탁 털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진 윈터가 몇 초간 넋을 놓고 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양심…….”
대체 양심을 얻다 갖다 버리신 거예요.
섀넌은 이걸로 만족했을지 몰라도, 멋대로 건드려진 자신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홀로 침착하게 크라바트의 매무새까지 만져 준 섀넌이 마지막으로 연미복 코트의 단추를 잠가 주었다.
“설마하니 내가 이런 냄새 나는 싸구려 코트 더미에서 너랑 붙어먹을 줄 알았어?”
“그러면 좀 어때요?”
“그런 건 이제 막 졸업하는 20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우리한텐 어울리지 않는 짓이야, 윈터.”
아무리 급해도 품위는 지켜야지……. 섀넌이 윈터의 구겨진 코트 목깃을 탁탁 바로 잡으며 우아하게 중얼거렸다. 먼저 게걸스럽게 탐할 때는 언제고, 제 볼 일 다 봤다고 홀로 고고한 모습이었다.
윈터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섀넌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 세웠다.
“하고 싶으시다면서요?”
섀넌이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켰다.
“연주회 끝나면 날 대기실에 가둬 놓고, ……연미복을 엉망으로 찢어발기고 강제로 거칠게 범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애써 쥐어짠 듯한 윈터의 말에 섀넌이 짧게 코웃음 쳤다. 강제로 거칠게 범한다는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수줍어하는 것치고 망상은 저보다 한술 더 떴다.
그가 아주 귀여운 연인을 어르는 얼굴로 다정하게 윈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건 왕립 아트홀에서, 네가 수석 연주자 자격으로 성황리에 공연을 끝낸 후에, 온갖 하찮은 놈들에게 잔뜩 받은 꽃다발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대기실의 비싼 가죽 소파 위에서 품위 있게 붙어먹자는 뜻이었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품위 있게 붙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불결해서 싫어.”
“숲보다 불결하겠어요?”
“그땐 예외로 해. 네가 특별히 섹시했으니까.”
“지금은요?”
그가 섀넌의 허리를 확 당겨 안았다.
“지금은 아니에요……?”
맞닿은 아래가 묵직했다. 앞서 열심히 종알거렸던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유혹이었다. 터질 듯 발기한 살덩이가 옷을 사이에 두고 섀넌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
네? 섀넌…….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을 보며 섀넌은 잠시 갈등했다. 이렇게나 안쓰럽게 애원하니 좀 놀아 줄까 싶었지만, 오래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 지금의 유예가 오늘 밤 침대에서 더 큰 재미로 돌아올 것이었으므로.
결국 밖으로 나온 섀넌이 얌전히 제 뒤를 따라 나오면서도 불평을 멈추지 않는 윈터의 머리칼을 슬쩍 정돈해 주며 그를 달랬다.
“로건, 저기 좀 봐.”
계단 중간에서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로건이 누군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여자친구 클로에를 비롯해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이들의 눈길이 일제히 리안과 애쉬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쟤네 방금 코트 보관실에서 나왔어.”
로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런데’라니? 저 꼴을 좀 봐! 둘이 징그럽게 붙어서서 머리 만져 주는 꼴을 좀 보라고.”
흥분한 남학생이 소리치자, 로건이 괜스레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자제 시켰다.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야? 목소리 좀 낮춰. 들리겠어. 뭐……, 싸웠나 보지.”
모두의 얼굴에 석연찮은 표정이 떠올랐다. 저게 어딜 봐서 싸운 모습이란 말인가. 섹스한 뒤의 모습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여겼는지, 로건이 다시 한번 덧붙였다.
“……싸우고 화해했나 보지.”
“저 좁아터진 코트 보관실에서?”
로건이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제 친구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노먼……. 대체 무슨 빌어먹을 망상을 하는 거야?”
“너야말로 저놈들만 봤다 하면 이렇게 머저리처럼 구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내가 언제.”
“피앙세라느니 뭐니 지가 더 신나서 떠들어댈 땐 언제고…….”
“닥쳐, 노먼.”
로건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막았다.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던 주인공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탓이었다.
계단 한가운데에 둥글게 모여 있던 그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리안과 애쉬가 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무심하게 그들을 훑고 지나가던 붉은 눈이 로건과 찰나 스쳤다.
로건은 어쩐지 초조함을 느꼈다. 왠지 애쉬가 자신들의 역겨운 망상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불안함이 동반된 기묘한 감각이었다.
노먼의 말대로 머저리가 된 것만 같다. 그러나 애쉬의 저 눈은 정말 이상하지 않나.
정말로,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것처럼…….
“……로건, 로건? 정신 차려.”
누군가 뺨을 탁탁 때리는 감각에 문득 정신을 차린 로건이 눈앞의 클로에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아니 그냥…….”
로건이 계단 아래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애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애쉬와 리안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3-
훈풍에 넘실거리는 파도가 금빛 모래를 적시며 하얗게 부서졌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의 모래사장은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섀넌에게는 제격인 휴양지였다.
“섀넌 님, 오래 기다리셨죠?”
……이곳에 온 목적이 온전히 휴양뿐이었다면 분명 좋았을 것이다.
“마땅히 대접해 드릴 차가 없어서요. 이건 이곳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는 건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소박한 방갈로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햇살에 시큰해진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하니 바다를 보던 섀넌이 시선을 옮겼다. 흠집이 잔뜩 난 싸구려 도자기 잔 위에 붉은빛 찻물이 떨어졌다.
“오시는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했을 텐데요.”
러셀이 멋쩍은 얼굴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섀넌은 그런 그를 관찰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잔꽃 무늬가 화려한 셔츠를 느슨하게 걸친 러셀은 자신들을 떠난 지 불과 3년 사이에 완전히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 피부가 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한다고 이보다 더 나아지진 않았을 것 같으니 괜한 소리는 집어치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 섀넌이 차갑게 대꾸했다. 러셀은 안부도 묻지 않는 냉랭한 태도에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웃었다.
“에이, 그래도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정도면 섀넌 님께서도 제 소식이 조금은 궁금하셨던 거죠?”
부정하는 것조차 입이 귀찮은 일이라, 섀넌이 그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기한 휴가’를 내어준 지 3년.
그간 러셀의 소식이라면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정기적으로 생존 보고를 하라는 말이 러셀에겐 ‘너의 시시콜콜한 일과를 낱낱이 기록해 내게 보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 있습니다.’ 단 한 줄이면 될 편지를 그는 빌어먹게 구구절절 늘여 썼다. 한 번에 수십 장은 기본이요, 어쩔 땐 우편함이 그의 편지만으로 가득 차 결국 넘칠 지경이었다.
그의 생존 보고를 책으로 엮으면 한 권으로는 부족할 지경이니, 그 안에 담긴 지리멸렬한 내용이야 말해 무엇할까.
섀넌은 편지를 아예 읽지도 않았다. 그저 편지가 오면 ‘아직 죽지는 않아서 잘도 나불대는구나.’ 하고 아무 데나 던져두기 일쑤였다.
“거처를 옮겨, 러셀.”
그런 그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몸소 러셀을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예?”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란 러셀에게서 시선을 뗀 섀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가능하면 지금 당장도 괜찮고.”
“무, 무슨 일입니까?”
말아놓은 담배를 입에 문 섀넌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시급한 일인 듯 재촉한 사람치고 그 자신은 상당히 느긋해 보였다.
“새 뱀파이어가 태어났거든.”
담배 한 모금을 느리게 빨아들인 그가 연기를 다 뱉고 나서야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서.”
후덥지근한 여름 해변의 허공으로 부연 연기가 퍼져나갔다. 공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던 연기의 입자가 거의 사라져갈 즈음, 러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 언제요?”
“글쎄, 한 사흘쯤 됐을까.”
새로운 불멸자가 태어나면 모든 뱀파이어들은 그 탄생을 감지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뱀파이어가 얼마나 통제 불능인지는,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호기심에, 또 누군가는 갓 태어난 뱀파이어를 상대로 어른 노릇을 하고 싶어서, 새로운 불멸자가 탄생한 지역에는 필연적으로 뱀파이어들이 몰려든다.
“……그, 그러니까 이 마을에 곧 뱀파이어들이 득시글거릴 거다, 그 말이시죠?”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거주하는 인간들에겐 매우 비극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들은 코앞에 있는 위험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잠깐만……, 잠깐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마리아! 마리아―!”
러셀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의 몸에 밀려 뒤로 넘어진 의자가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해변에 있던 인간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잠시 몰렸다가 흩어졌다.
머리 위에 시뻘건 낫이 피를 뚝뚝 흘리며 드리워져 있는 줄도 모르고, 고작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며 세상 행복은 다 누리고 있는 듯한 얼굴로 해변을 거니는 이들을 섀넌이 말없이 바라봤다.
러셀은 이 지역으로 몰려들 뱀파이어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몇백 년에 걸쳐 쌓인 사회성과 절제력으로 이미 인간들 틈에서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는 뱀파이어 열 명이 위험할까, 갓 태어나 한창 식욕이 왕성할 뱀파이어 한 명이 위험할까.
보통 새로 태어난 뱀파이어 한 명이 마을 하나를 학살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하루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을 생각한다면 아직 이 마을이 이렇게 평온할 수 있다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다.
어쨌거나, 일단 러셀은 피신하게 했으니 다른 건 알 바 아니었다. 섀넌은 느긋하게 차를 홀짝이며, 저 멀리서 러셀의 못난 구석을 죄 빼다 박은 듯한 세 살짜리 아이를 안고 빙그르르 도는 윈터를 바라봤다.
애새끼가 못난 것과는 상관없이, 그걸 안고 있는 윈터의 모습은 보기에 퍽 예뻤다. 꺄르륵 웃은 아이가 몸을 들썩이며 뭐라고 떠들자, 윈터가 제 어깨 위에 아이를 앉혔다. 말도 똑바로 못하는 애새끼랑 노는 게 저리 즐거울까.
윈터가 평범한 필멸자로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다. 물론 윈터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는 저것처럼 못생기진 않았겠지만.
심상한 얼굴로 그들을 멀거니 보던 섀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퍽 흡족하게 감상하고 있던 풍경에 마리아가 얹어진 탓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윈터에게 손을 뻗었다.
흠……. 어쩐지 못마땅한 기분이 든 섀넌이 침음했다. 곧 마리아 앞에서 몸을 숙인 윈터가 아이를 땅에 내려서게 했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은 마리아와 윈터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섀넌의 마음에 퍽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필 마리아의 생김새가 꼭 시라트의 늑대족 여인들과 비슷해서 더 못마땅했다. 윈터가 제게 속하지 않고 늑대족 여인과 가정을 이뤘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아서였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윈터와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지그시 머문 청회색 눈이 반달 모양으로 사르르 휘어졌다. 유치한 생각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섀넌이 괜스레 그의 시선을 피해 애꿎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내리깐 시야에 그늘이 졌다. 의자를 끌어와 앉은 윈터가 섀넌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방금 질투했죠?”
섀넌은 딱히 부정할 생각 없었다. 종종 제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을 것이다.
“……말도 못 하는 애새끼랑 퍽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섀넌도 저 어릴 땐 잘 놀아 주셨잖아요.”
“물론 너와는 정말 즐거웠어, 윈터.”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강아지를 어르듯 윈터의 턱밑을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너는 저 애와 달리 똑똑하고 예뻤으니까. 그런데 방금 그 모습은…….”
“섀넌 님!”
다정한 대화 사이로 러셀의 고함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별안간 섀넌의 무릎 위에 달갑지 않은 게 올라왔다.
“잠시만 맡아 주세요. 마리아랑 저는 짐을 좀 챙겨야겠습니다!”
그의 품에 아이를 안긴 러셀이 다시 잽싸게 집으로 들어갔다. 섀넌은 졸지에 제 무릎을 차지하고 앉은 아이를 떨떠름하게 내려다봤다.
“…….”
아이는 그런 그와 멀뚱멀뚱 눈을 맞춘 채, 손에 움켜쥔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가와 앞섶이 온통 침과 초콜릿 범벅이었다.
섀넌의 눈에는 정말이지 불결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그가 질색하며 아이를 밀어내기 전에, 윈터가 얼른 아이를 가져가 안으며 말했다.
“후안이래요.”
“뭐가.”
“얘 이름이요.”
섀넌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름을 알아듣기는커녕 제 코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애새끼는 섀넌에겐 그저 불청객이나 다름없었지만, 윈터에겐 퍽 신선한 경험인 모양이었다.
“후안, 초콜릿을 옷에다 양보한 거야? 옷이 왜 이렇게 더러워? ……안기기 전에 손부터 좀 닦을까?”
섀넌은 턱을 괸 채 아이의 손에 눌어붙은 초콜릿을 부지런히 닦아 주는 윈터를 바라봤다. 어차피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애새끼한테 뭐 하러 저리 다정한 말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입만 아프게.
“아빠……, 쪼코.”
“저런.”
쯧, 섀넌이 혀를 찼다. 천지 분간 못 해서 아무한테나 아빠라고 하는 꼴 좀 보라지.
“안 돼. 아까도 두 개나 먹었잖아.”
“쪼코…….”
“나한테 졸라 봤자 난 아무런 권한이 없어, 후안…….”
윈터에게서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는지, 아이가 섀넌을 쳐다봤다. 그러나 섀넌이라고 들어줄 리 만무했다. 끈질기게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가만히 맞대고 있던 섀넌이 험상궂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 변화 한 번에, 아이가 금세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천지 분간 못 하는 나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자길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모양이었다.
섀넌을 보고 겁을 먹은 듯 윈터의 옷깃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던 아이가 순식간에 울음을 터뜨렸다. 생판 남일 구경하듯 턱을 괴고 있던 섀넌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섀넌, 애를 울리면 어떡해요?”
“내가 울린 게 아니…….”
흐아아앙! 섀넌의 변명 사이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청을 때리는 소음에 당황한 윈터가 아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도 몰라.”
정말이지 지랄 맞은 애새끼 같으니. 섀넌이 짜증을 억누르며 러셀의 집 현관 쪽을 힐끗거렸다. 애새끼 우는 소리가 이렇게 큰데 부모라는 놈들이 뭐 하느라 나와 보지도 않는 거야.
“후안, 갑자기 왜 우는 건데? 울지 마.”
경험 없는 윈터가 서툴게 달래 봤자 한 번 울음을 터뜨린 아이가 들어먹을 리 없었다. 보다 못한 섀넌이 결국 혀를 차며 팔을 뻗었다.
“이리 줘.”
당연하게도 아이는 섀넌의 품에 안기려 하지 않았다. 윈터의 품에서 떨어진 아이는 꼭 어디 팔려 가는 것처럼 더 서럽게 울어댔다. 섀넌이 익숙한 자세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뚝. 시끄러워.”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췄다. 섀넌이 심드렁한 태도로 짐짝을 내려놓듯 아이를 테이블에 툭 앉혔다.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얌전해져서는, 그저 멀뚱멀뚱 섀넌을 쳐다만 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윈터의 표정에 황당함이 묻어났다.
“말도 안 통하는 애새끼를 어떻게 달래겠어. 이럴 때 유용하라고 있는 능력이니 써먹어야지.”
세 살짜리 애를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미혹을 쓴 섀넌이 경악하는 듯한 윈터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이렇게 키웠어, 윈터. 내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잖아.”
“얘는 인간인데……, 그래도 되는 거예요?”
“어쩌다 한 번 정도는 괜찮아. 내가 설마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까.”
“지금 걸린 미혹이 몇십 년 뒤까지 영향을 미치면 어떡해요? 막 당신 좋다고 쫓아다니고? 수작 걸고?”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몇십 년 더 지나면 죽어. 인간이잖아.”
윈터가 뱀파이어들의 미혹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능력은 꼭 성애적인 현혹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런 의미로 홀리는 게 맞지만, 성애적 욕망은커녕 제 눈코입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영유아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들에 한해서 뱀파이어의 미혹이란 단지 일종의 최면에 가까운 셈이다.
“이게 다 누굴 키우면서 얻은 요령인데, 그것도 모르고 한다는 소리 하고는.”
윈터가 섀넌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당신이 그렇게 키운 아이가 지금은 당신이랑 섹스하는 사이라는 거 잊었어요?”
제법 귀여운 투정이었다. 섀넌이 코웃음 치며 그의 팔을 풀어냈다.
“안 잊었어. 지금도 저 모래사장에 자빠뜨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자극하지 마.”
윈터가 뾰로통한 얼굴로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금세 미혹이 풀려 다시 초콜릿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 아이를 안아 든 윈터가 낮게 힐난했다.
“……진짜 양심 없어.”
모래사장에 자빠뜨리고 싶다니. 저런 생각을 그저 말로만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섀넌은 파렴치한이고 양심 없는 게 맞다.
“후안, 엄마 아빠는 오래 걸리실 것 같으니까 우리끼리 저기서 좀 더 놀자.”
“우응.”
윈터가 한껏 토라진 티를 내며 테라스의 계단을 내려갔다. 웃는 낯으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섀넌이 별안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좁아터진 집구석에 챙길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며 들어간 것치고는 짐을 싸는 게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 하여간 굼벵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한낮에 도착했는데 벌써 석양이 너울졌다. 해변 한쪽에서는 대형 모닥불이라도 준비하는 모양인지, 인간들이 장작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면 저 현장은 축제가 아니라 생지옥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무심결에 방갈로 안쪽으로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조금 전까진 안에서 꽤나 분주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어째 고요하다.
결국 참다못한 섀넌이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방갈로 내부는 섀넌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좁고 비위생적이었다. 먼지 쌓인 오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섀넌은 예상치 못한 상대를 마주했다.
“흠.”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그저 그것뿐이었다.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당황한 건 아니었다. 단지 말 그대로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섀넌 님…….”
섀넌을 구명줄처럼 부여잡는 러셀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아하, 쟤야? 너와 맹약으로 묶여 있는 뱀파이어가?”
낯선 남자가 러셀과 섀넌을 번갈아 가리켰다. 검은 곱슬머리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 창백했다. 어울리지 않게 화사한 분홍색 바탕에 야자수 문양이 어지럽게 들어간 셔츠는 꼭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지나치게 품이 크고 어색했다.
새로 태어난 뱀파이어.
섀넌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마치 친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러셀과 마리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까딱일 때마다 두 사람은 기겁하며 얼어붙었다.
솔직히, 아예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바로 몇 발짝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테라스에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니.
고작 파도 소리와 인간들의 목소리에 휩쓸려 정작 이쪽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감각이 너무 느슨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실수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때문에 전혀 위기감이 안 느껴지는군.”
피하려고 했던 이를 공교롭게 맞닥뜨린 순간에 그깟 촌스러운 옷차림이 뭔 대수겠느냐마는, 정말로 섀넌은 그것밖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양하게 타고나는 외모만큼이나 갓 태어난 뱀파이어들도 각자의 성향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천지 분간 못 하는 야만인처럼 미쳐 날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개중엔 꽤나 무모해서 태어나자마자 기상천외한 짓을 일삼는 이도 있고, 식욕과 귀찮음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는 이도 있다.
섀넌의 경우엔 후자 쪽에 가까웠는데, 눈앞의 뱀파이어는 어쩐지 전자 쪽에 가까운 듯했다. 물론 무모함이 지나치면 어리석다는 평을 듣기 마련이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섀넌이 혀를 찼다.
“우린 너랑 놀아 줄 시간이 없어. 각자 갈 길 가도록 하지.”
자신이 오기 전까지 이 안에서 어떤 대치 상황이 벌어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섀넌은 제 할 일을 해야 했다. 저 애송이가 언제 변덕을 부리고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곳에 러셀을 계속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누가 그냥 보내 준대?”
남자의 말에 팽팽했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확히 말하면 러셀과 마리아에게만 그러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놈들 다 죽을 거야. 너네라고 예외가 될 것 같아?”
러셀은 눈만 겨우 굴려 섀넌의 눈치를 살폈다. 퍽 건방진 말본새에 진작 성질머리가 튀어나오고도 남아야 하는데, 섀넌은 시종 차분하기만 했다.
섀넌이 피로한 낯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네놈이 그 왕성한 혈기를 어디에 풀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떠날 거야. 그게 오늘 방문의 목적이거든.”
“네가 이놈들 데리고 꼬리 빠지게 도망을 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어쨌든 나는 안 보내 줄 건데?”
“네 허락 같은 건 구한 적 없는데.”
상대를 약 올리려고 작정한 것 같은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조용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기실 러셀은 이 상황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의 사소한 해프닝이길 간절히 바랐다.
다만 이쪽 뱀파이어가 하룻강아지인 건 틀림 없는데, 섀넌 쪽이 범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섀넌이 더는 참지 않고 얼른 이 건방진 하룻강아지에게 늙은 뱀파이어의 무서움을 보여 주길 기도했다.
“음, 이상하네. 왜 그런 대답을 하지? 내가 예상한 대화의 흐름은 이게 아니었는데…….”
섀넌의 대답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얘넨 여기서 죽어.”
마리아가 겁에 질린 헛숨을 내뱉었다. 남자가 웃으며 검지 끝으로 러셀을 가리켰다.
“이름을 가져야겠거든.”
* * *
흙에서 태어나, 처음 맞닥뜨린 인간을 먹고 그 이름을 취한다.
이는 모든 뱀파이어의 탄생에 필수적인 일이며, 일종의 본능이자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 관문이었다.
섀넌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썹을 매만지는 손 아래로 언뜻 보이는 얼굴에는 약간의 난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하필 저 애송이가 처음 맞닥뜨린 인간이 러셀이고, 러셀이 죽으면 자신은 맹약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되니 아무리 그라도 약간의 낭패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넌 그를 죽일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거든.”
물론 러셀에겐 이제 그를 대체할 만한 후손이 있다. 그러나 그 후손은 아직 자기 눈코입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미물이라 맹약의 대상으로 삼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많다. 하여 섀넌은 아직 러셀을 죽게 놔둘 수 없는 것이다.
“뭐, 그러면 이쪽은 괜찮은 거야?”
남자가 이번에는 마리아를 가리켰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마리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기실 그녀가 죽든 말든 섀넌은 크게 관심이 없어서, 하마터면 그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름으로 평생 조롱당하고 싶은 모양이군.”
섀넌의 대꾸에 남자가 흐흥,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팔을 살래살래 흔들며 다시 러셀을 가리켰다.
“그럼 역시 이쪽인데.”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뒈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섀넌은 영 의욕이 나지 않아 혀를 찼다. 일이 참 번거롭게 되었다……. 정말이지 귀찮고 짜증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은 늘 손해만 볼 뿐이다. 새파랗게 어린놈을 상대로 이겨 봤자 그저 본전이요, 행여 지거나 조금이라도 고전을 겪는다면 최소 향후 백 년간은 엄청난 조롱을 당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둘 놔두고 조용히 나가. 너한테 이름 부여해 줄 인간은 저 밖에 널렸으니까.”
“난 이미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들어 봤자 갓 태어난 목숨 부지하는 것보다 중요할까. 후회할 짓 하지 마.”
“내가 얘네를 놔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섀넌이 짧게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여전히 심드렁하기 그지없어서, 러셀은 그가 화가 난 건지 귀찮아하는 건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거래는 서로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성립되는 거란다.”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듯 퍽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연 섀넌이 차갑게 말을 맺었다.
“주제넘은 헛소리는 거기까지 하도록 해.”
러셀은 섀넌의 인내심이 이토록 길게 유지되는 것에 탄식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이 꼴을 보자마자 ‘내 노예를 건드리지 마!’ 같은 대사를 날리며 길길이 날뛸 거라는 기대까진 안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차분한 대화가 길게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섀넌은 굳이 화를 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남자는 섀넌의 말에 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자꾸 내가 원하는 대답과는 다른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예상한 흐름은 이게 아니었다고!”
러셀은 웬 멍청한 뱀파이어 놈이 벌이는 인질극에 운 나쁘게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금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이 뱀파이어가 멍청하다는 게 곧 자신의 안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지만…….
“재미없어! 내가 거래를 제안하면 넌 ‘원하는 게 뭔데?’라고 대답을 했어야지!”
어쨌거나 사회성이 까마득한 백지상태인 것 같은 뱀파이어는 마치 떼를 쓰는 아이처럼 열변을 토해냈다.
“그러면 나는 너한테 다가가서, ‘난 널 원해.’라고 대답했을 거야. 멋있지 않아?”
“…….”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무슨 개소리긴, 널 원한다는 뜻이지. 섹스 한 번으로 네가 아끼는 인간 둘을 살릴 수 있어. 어때? 솔깃하지?”
흠……. 섀넌이 낮게 한숨을 흘리며 이마를 매만졌다. 그가 차분히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빼내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목을 조인 크라바트를 느릿느릿 풀었다.
“날 원한다고.”
“맞아!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남자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러셀은 사회성이 부족한 이 얼간이가 눈치도 더럽게 없는 것을 속으로 기뻐했다. 누구라도 방금 섀넌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을.
“사실 넌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긴 해. 나 꽤 잘하거든. ……아직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잘할걸?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이름을 ‘얼간이’로 짓는다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뱀파이어의 멍청한 개소리에, 섀넌이 짧게 웃었다. 러셀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손으로 마리아의 손을 꽉 맞잡았다.
‘마리아, 내가 신호하면 이쪽으로 몸을 날려. 이제 섀넌 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실 거야.’
마리아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많은 그녀를 눈짓으로 설득한 러셀이 섀넌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주시하던 섀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몸이 휙 밀려난 러셀이 벽면의 선반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며 쓰러졌다. 단단하게 깍지 껴 맞잡고 있던 마리아의 손을 놓친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혼비백산했다.
“마리아, 마리아!”
부옇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희미한 마리아의 인영이 보였다. 러셀이 황급히 기어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마리아는 눈앞의 살풍경에 놀란 듯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무너진 방갈로의 잔해 위에 홀로 드러누운 얼간이는 목이 부러진 건지 찢어진 건지, 어쨌거나 보기에 처참할 정도로 피를 철철 내뿜었다. 나뭇등걸처럼 기괴하게 벌어진 손으로 남자의 목을 틀어쥔 윈터의 잇새에서 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섀넌이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호출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등장은 꽤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물론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조금 전의 그런 역겨운 멘트 같은 건 들을 일 없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다.
부서진 테이블을 성큼 밟고 윈터에게 천천히 다가간 섀넌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윈터, 살살해야지. 그러다 죽겠어.”
순간 섀넌을 올려다보는 윈터의 눈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마리아를 꼭 끌어안은 러셀이 그 몰골을 보고 기겁했다. 그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리아의 눈을 가리자, 마리아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내고 눈앞의 상황을 주시했다.
“이 정도로 안 죽어요.”
“머리랑 몸통이 분리되면 죽을 수도 있을걸.”
흥분으로 가쁘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지그시 누른 섀넌이 그를 달래듯 조용히 속삭였다.
“아직 어리잖아. 그쯤 해 둬.”
“…….”
정말 목을 끊어 버릴 기세로 파고들던 손이 이내 천천히 힘을 풀었다. 마침내 떨어진 손끝에서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쿨럭, 단말마처럼 터져 나온 기침과 함께 남자의 입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그의 위에 올라타 앉아 있던 윈터의 얼굴에도 붉은 피가 점점이 튀었다.
윈터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옷에 제 손을 닦았다. 야자수 패턴이 어지러운 분홍색 셔츠가 질척한 피로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저와 상관없는 남 일을 구경하듯 평온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섀넌이 윈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잠깐. 후, 후안은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아가 퍼뜩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윈터가 눈짓으로 테라스 쪽을 가리켰다.
아이는 그렇게나 큰 소음이 터졌음에도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 입가에 초콜릿을 치덕치덕 문대고 있었다. 마리아가 다급히 밖으로 나가자, 러셀 또한 벌벌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추스르며 뒤늦게 그녀를 따라 나갔다.
윈터가 제 위에서 완전히 비켜서자 그제야 남자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성대가 너덜너덜해진 목은 고통에 찬 신음 대신 피거품만 부글부글 뿜어댔다.
초주검이 되어 쓰러진 동족이 한쪽에서 그렇게 발작을 하든 말든, 태연하게 방갈로 안을 뒤져 깨끗한 수건을 찾아온 섀넌이 그것을 물에 적셔 윈터의 손을 닦아 주었다.
“셔츠가 엉망이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죽이고 싶어요, 저 새끼.”
“안 돼.”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도 저 새낄 살려 둬요? 당신은 누가 나랑 섹스하고 싶다고 하면 그 새끼 살려 둘 자신 있어요? 언제는 나랑 붙어먹는 새끼들 모가지 다 따 버릴 거라더니…….”
“안 붙어먹었잖아.”
“만약 내가 끝까지 안 왔으면, 진짜 저 새끼랑 섹스하려고 했어요?”
섀넌이 미간을 구겼다. 무의식중에 저 머저리 같은 애송이와 침대에서 뒹구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찰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말이지 말도 못 하게 징그럽고 역겨웠다.
말없이 새로운 수건을 물에 적신 그가 이번에는 윈터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방금 저 새끼한테 박는 상상했죠?”
“…….”
이런 건 좀 몰라도 되는데.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섀넌은 정말이지 불편했다.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통제한단 말인가.
각인으로 인해 윈터와 나눌 수 있는 유대감이 더 깊어진 건 좋았지만, 가끔 이렇게 원치 않는 순간까지 그에게 제 머릿속을 들키는 건 정말 사양이다.
“네가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렇잖아.”
“박고 싶어요? 저 새끼한테?”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에,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거 알면서 꼭 이러더라, 너는.”
약간의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제 얼굴을 닦는 데 여념이 없는 섀넌의 손을 잡은 윈터가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아닌 건 알아요.”
아닌 건 알아도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다는 건가. 남의 머릿속을 멋대로 들여다봐 놓고 유치하게 굴기는.
“알면서 왜 굳이 확인하려고 들어.”
섀넌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연인의 유치한 언사에는 똑같이 유치하게 받아치는 게 능사다.
“내가 누군가한테 박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 상대는 당연히 너일 텐데.”
“…….”
작게 숨을 들이켠 윈터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섀넌이 짓궂게 웃으며 한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살짝 움켰다.
“다행히 아직은 그럴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진심이었다. 박히는 즐거움이 너무 커서 그 반대는 아직 고려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물론 상대가 남자인 적은 없었지만, 박는 건 그 이전에 기억도 나지 않는 수많은 과거에서 지겹도록 해 봤다. 굳이 새로울 것도 없는 포지션으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리는 것보다는 무는 쪽이 좋거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찌푸린 윈터가 몇 초 후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수줍게 뺨을 붉혔다. 섀넌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이 맥없이 미끄러지며 손목을 슬며시 쥐었다. 청회색 눈이 이내 아래로 얌전히 내려갔다.
“……저도, 당신한테 물리는 게 좋아요.”
으으……, 한쪽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났다. 이제야 찢겨나간 목이 조금 회복된 남자에게서 나오는 신음이었다.
그러나 윈터와 섀넌은 아랑곳없이 마치 둘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하여간 짜증 나고 귀엽게 굴어.”
윈터의 뺨을 양손으로 마구 뭉갠 섀넌이 붕어처럼 톡 튀어나온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예쁜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을 꼼꼼히 닦아 주며, 깨끗해진 곳마다 도장을 찍듯 입술을 쪽쪽 부딪는 사이로 다시금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어으, 미친…, 히윽…….”
‘저 미친 새끼들.’
이름 모를 뱀파이어는 입 밖에서 완성되지 못한 욕설을 속으로 내뱉었다.
농담 좀 했다고 다짜고짜 사람 목을 찢어 놓고는, 자기들끼리는 아주 염병을 떨고 자빠지지 않았는가. 제대로 굴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쳐다봐요, 섀넌.”
무너진 방갈로 벽면 사이로 몇몇 인간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처럼, 멀쩡했던 건물 반절이 요란스럽게 무너져내렸으니 시선이 몰리는 게 당연했다.
“저 새끼가 알아서 하겠지. 우린 갈 길 가자고.”
어차피 곧 죽을 인간들인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저들과 이웃으로 잘 지낸 러셀과 마리아에겐 조금 슬픈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알 바 아니었다.
“보아하니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머저리 같은데.”
그 말인즉 아직 한 번도 인간을 사냥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당장 해변에 이렇게 인간들이 많은데 사흘 내내 한 명도 마주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저 촌스러운 옷은 그럼 누구에게서 빼앗은 걸까.
섀넌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름 있어.”
그가 아직 살이 붙지 않은 목을 부여잡고 부서진 잔해에 기대어 앉았다.
“내가 설마 사흘 내내 인간 하나 못 죽였을 것 같아? 시발, 살 만큼 산 새끼들이 농담도 못 알아먹어. 내가 진짜 너랑 자고 싶을 줄 알고? 아니 물론 네가 허락했다면 당연히, 사양은 안 했겠지만……, 아무튼! 그냥 장난 좀 쳐 본…….”
그에게 시선을 돌린 윈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주절주절 떠들던 입을 멈추고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는지, 그가 숨을 헐떡이며 윈터를 노려봤다.
“……시발, 야만적인 새끼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냐? 어?”
쿨럭, 쿨럭……, 흥분으로 목소릴 높인 그가 이내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그야말로 입만 산 뱀파이어가 아닐 수 없었다. 어으으, 어윽……, 부러진 뼈가 다시 붙는 소리와 신음이 이어졌다.
“야만적인 게 누군데.”
싸늘한 목소리에 움찔 놀란 남자가 고개를 들어 윈터를 올려다봤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감히 더럽게 누굴 건드려.”
섀넌은 제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 윈터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혈기 왕성한 애인이 곁에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시시콜콜한 일에 굳이 혈압 올릴 필요도 없고. 자신은 살아온 세월에 걸맞게 품위를 지킬 수 있으니.
섀넌이 흡족하게 웃으며 그 둘을 놔두고 테라스로 나갔다.
* * *
러셀과 마리아는 일생일대의 이혼 위기를 겪었다.
물론 마리아가 러셀의 상황을 모르고 결혼을 감행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말로 듣는 것과 눈앞에서 직접 살풍경을 보게 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 말했잖아……. 오늘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정말이야, 내가 약속할게.”
“당신이 약속하면 뭘 해? 애초에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인데! 오늘처럼 저런 미친 뱀파이어를 만나면 당신은 나도 후안도 못 지킬 거잖아!”
“그, 그건 나뿐 아니라 그 어떤 남자를 만나도 똑같을 거야, 마리아……. 최소한 우리한텐 섀넌 님이 계시잖아. 보통 인간이었어 봐, 지금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면 다인 줄 알아?”
러셀이 애 딸린 이혼남이 되든 말든 알 바 아닌 섀넌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임시로 거처하게 된 별장 야외 테이블에 앉아 유유자적 차를 홀짝였다.
“그 해변에는 언젠가 다시 가 봐야겠어. 꽤 살기 좋을 것 같더군.”
작은 마을이 정리되는 데에는 며칠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뱀파이어는 다른 도시로 이주할 테고, 아마 몇 년 뒤 그 해변에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아 고요해질 터였다.
다음 신분을 정할 때까지 잠적하기엔 최적화된 장소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니 다시 사람들이 모여 민가를 형성하기까지 시간도 꽤 걸릴 테고.
“다만 여름이 꽤 더울 것 같아서 너한테도 좋을지는 모르겠어.”
손을 뻗은 그가 윈터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전 당신이랑 있는 곳 어디든 다 좋아요.”
“그래. 넌 늘 그런 예쁜 말만 하지.”
섀넌이 그의 턱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 손에 이끌리듯 고개를 튼 윈터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섀넌이 별안간 짧게 웃으며 새삼스러운 것을 보듯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제는 너보다 더 어린 뱀파이어가 다 있고.”
이미 제 연인은 다 자란 지 한참이 지났다. 윈터보다 어린 뱀파이어가 생겼다 한들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기한지 모르겠다.
“더 어려도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은 평생 나랑만 사랑할 거잖아요.”
그러나 윈터는 그 말을 한참 다르게 해석했는지, 엉뚱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가 커다란 몸을 구부려 섀넌의 품에 안겼다. 섀넌이 한쪽 팔을 벌려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런 당연한 말은 왜 자꾸 하는 거야.”
“당신이 나보다 더 어리고 잘생긴 새끼한테 한눈팔까 봐요.”
섀넌이 코웃음 치며 담배를 물었다. 서로의 감정을 때로는 제 것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관계에서도, 늘 확인받고 싶은 심리는 고질병처럼 따라붙는가 보다.
사랑의 일면은 이렇게나 유치하다는 걸, 섀넌은 윈터 덕분에 깨달았다. 이런 유치한 질투심이나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도 늘 기껍게 받아 줄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이리라.
섀넌은 이제 입이 아플 정도로 수없이 반복한 고백을 다시 한번 성실하게 돌려주었다.
“딴 놈들한텐 관심 없어.”
불을 붙인 담배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섀넌은 이제 윈터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언젠가는, 각인으로 묶인 관계의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낄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윈터에 대한 사랑만은,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한텐 네가 제일 어리고, 네가 제일 예뻐.”
연인인 동시에, 언제까지고 유일한 자신의 아이인 존재.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죽고 다시 태어나 윈터가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해도, 섀넌에게 그는 영원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제 아이일 것이었다.
“너는 내가 빚은 내 아이니까.”
가늘게 연기를 내뱉은 입술 위로 뜨거운 체온이 덮였다.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허공에 흰 선을 그어 올리며 고요히 타들어 갔다.
그즈음 마리아와 러셀의 싸움도 소강상태에 이르렀는지, 어느새 별장 주변은 찌르르 매미 우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그 소란스러운 적요를 뒤로 한 채 섀넌과 윈터는 긴 키스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