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틱 왈츠 (외전2)
1. Passing Changes
-1-
귀부인의 장례식은 생전 그녀처럼 기품 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소외된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늘 자애를 베푸셨던 아이린 펠리사 부인께서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이린 펠리사는 8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년 전쯤 홀연히 마을에 나타난 그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다 가진 여인이었다.
평생을 명망 높은 귀족 가의 영애로 귀하게 살아온 것 같은 우아함을 지닌 동시에 그 인품 또한 보기 드물게 훌륭하여, 거리낌 없이 빈민가를 드나들며 손수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위한 구빈원을 지어 아낌없이 후원했다.
그 신실함과 드높은 성품으로 귀부인들에게 더없이 좋은 멘토가 되어 주었던 그녀의 사망은 마을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슬픔이었다.
“그녀는 비록 영면에 들었지만, 생전 베풀었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섀넌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엄숙한 얼굴로 장례를 지켜보았다.
“펠리사 부인께서는 영면하신 모습도 어찌나 우아하신지. 꼭 자는 사람 같았다니까요.”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니, 마지막 모습도 그리 아름다운 거겠지요.”
열린 관에 누워 있는 펠리사 부인을 향해 꽃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귀부인들은 여전히 입을 모아 그녀를 칭송했다. 가만히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섀넌이 관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들의 얼굴에는 인품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은 평온하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생전에 그녀가 어떤 사랑을 베풀었을지, 평소에는 어떤 표정을 자주 지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죽은 몸에 감긴 쪽빛 실크 드레스는 멋들어지게 잘 어울려 그녀의 품위를 말해 주었고, 하얗게 센 백발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게 틀어 올려져 있어 시신을 수습한 이들의 정성이 느껴졌다.
꽃을 내려놓은 섀넌은 예를 다해 펠리사 부인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다. 그리고 남은 장례 절차를 차분히 따랐으며, 그녀의 관이 땅에 묻히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우리 마을에선 한 번도 못 뵌 것 같은데, 누구시죠?”
젊은 귀부인 하나가 섀넌을 향해 말을 걸었다. 비감이 짙게 깔린 장례 와중에도 다들 알게 모르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섀넌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예전에 펠리사 부인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제 학비를 지원해 주셨죠.”
“아…….”
펠리사 부인이 생전 후원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한둘은 아니었기에, 다들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혼인 듯한 젊은 여자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느 학교에 재학 중이신지?”
“펜스포드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그들을 지켜보던 주교가 크게 헛기침하며 주의를 분산시켰다. 고인을 추모해야 하는 자리에서 별안간 사람들의 관심이 웬 잘생긴 청년에게 쏠렸으니, 그의 입장에선 어서 올바른 분위기로 인도해야 마땅했다.
그가 추모 행렬을 이끌며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섀넌은 행렬의 가장 뒤에서 주교의 인도를 착실히 따르고, 마침내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 사람들이 다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해가 다 저문 밤 묘지에 홀로 앉아서, 섀넌은 비석을 훑어보았다.
신께 사역되기 위해 다시 돌아가노라.
-아이린 펠리사.
어디에서 본 듯 만 듯 진부한 구절이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일어나.”
밤이 내려앉은 묘지는 소름 끼칠 만큼 적막했다.
“……지랄 그만 떨고 일어나라고.”
이슬에 젖은 땅이 조금씩 진동했다. 섀넌이 훌쩍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관뚜껑과 흙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옷과 구두에 튄 흙먼지를 태연하게 털어낸 섀넌이 다시 그 앞으로 다가가 움푹 파인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빌어먹을 그리말디! 진짜 짜증 나게 굴어!”
펠리사 부인이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을 사납게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너는 어떻게 사람이 죽어도 이렇게 매정하니? 인정머리 없이!”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섀넌은 무심한 얼굴로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던졌다.
“얼굴이나 닦아. 정말 못 봐주겠으니까.”
“이 얼굴이 어때서? 가끔 좋다고 달려드는 애들도 많았거든?”
“좋다고 달려들어? 너 같은 노인한테?”
쪽빛 드레스 자락을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감아쥔 펠리사 부인이 훌쩍 땅 위로 올라섰다. 그녀가 묘지 한쪽에 있는 수돗가에 다가가 손수건을 적셨다.
“늙는다고 어디 갈 미모가 아니거든, 내가 또.”
젖은 수건으로 제 얼굴을 박박 닦는 백발노인을 보며,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늙으면 뭐, 섹스도 못 한다니?”
그녀가 얼굴을 닦을 때마다 얇게 풀을 발라 인위적으로 만든 주름이 하나둘 펴지고, 허옇게 말라붙은 풀이 밀려 나왔다.
“오, 이 눈주름. 좀 봐 봐, 그리말디. 보여?”
윙크하듯 한쪽 눈을 게슴츠레하게 구긴 그녀가 섀넌을 향해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이건 정말 지우기 싫은데. 매력 포인트였단 말이야. 웃을 때 자글자글하게 파이는 게 얼마나 고혹적인지…….”
아깝다는 듯 제 눈가를 매만지던 펠리사 부인이 마침내 주름을 다 지우고 물로 얼굴을 씻어 냈다. 수돗가에서 한참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87세의 펠리사 부인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그리말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엘리자베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염색제로 물들인 머리는 차마 이곳에서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백발이 성성했다. 다만 얼굴이 젊어진 탓에 노화의 증거라기보단 본래 그런 색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섀넌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참으로 추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한심한 짓을.”
엘리자베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얼굴을 닦았던 손수건을 제 무덤 아래로 휙 던져 버렸다.
“그냥. 궁금해서.”
“뭐가.”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댈 거 아니니? 그런 걸 겪어 보고 싶었어.”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오늘 낮 동안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얘길 떠올렸다.
펠리사 부인께선 정말 덕이 많으신 분이야. 이렇게 선한 분은 분명 신께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천국으로 인도하실 거야. 살면서 저런 훌륭한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어차피 그들이 너에 대해 하는 말은 다 거짓이잖아.”
그들이 장례식 내내 칭송하던 인물은 기실 엄연히 따지면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섀넌은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궁금하면 진짜로 죽든가.”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천진난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죽으면 그 꼴을 볼 수가 없잖아. 그럼 무슨 재미야? 그 칭송을 내 귀로 직접 들어야 의미가 있지.”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원이란 허상이자, 절대 이루지 못할 꿈과 같다. 무릇 생명이란 얻음과 동시에 죽음을 향하며, 머지않아 늙고 병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부여되는 생, 로, 병, 사 중 오직 한 가지만 누릴 수 있는 뱀파이어들은 간혹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세 가지를 향해 강한 미련을 보일 때가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필멸자들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 쇠락에 관한 것들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자베스처럼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뱀파이어는 본 적이 없는데…….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죽음을 가장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경우는 흔해도, 이렇게 직접 시신 노릇을 하며 사람들의 조문을 엿듣는 짓은 섀넌이 생각하기에 좀 괴팍한 사치였다.
섀넌은 묘지 비석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엘리자베스가 제 무덤을 원래대로 덮는 과정을 지켜봤다.
엘리자베스가 돌연 잠적한 것은 3년 전쯤이었다. 카일의 말로는 그와 크게 다툰 후 사라졌다고 했으니 처음엔 두 사람이 완전히 결별한 줄 알았다.
그렇게 홀로 남은 카일은 한 1년 정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았다. 그러다 점점 넋을 놓는 일이 많아지더니, 급기야는 아예 저택에 틀어박혀 시름시름 앓았다.
섀넌은 그런 그가 무척 귀찮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가끔 찾아가 약간의 관심을 던져 주었다. 예전에 자신이 백 년 가까이 저택에 틀어박혀 있던 동안 번질나게 드나들어 살펴 준 카일의 수고를 생각한 일종의 보답인 셈이다.
그런데 그 짓도 한두 달을 넘어서니 지긋지긋했다. 카일은 백 년을 참아 줬을지 몰라도 섀넌은 인내심이 그리 강한 성격이 못되었다.
수백 년을 징글징글하게 살아온 놈이 여자친구와 처음 헤어진 십 대 애새끼처럼 별 유난을 다 떨어대는 걸 2년이나 지켜봤으면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그러던 중에, 뜻밖에도 섀넌에게 먼저 소식을 알려 온 엘리자베스는 웬 시골 마을에서 선량한 귀부인 행세를 하며 생각 이상으로 매우 잘살고 있었다.
「그리말디, 재미있는 구경 하러 올래?
주소지는 화이트팽에 남겨 뒀어.
추신: 카일한텐 비밀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잘 죽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윈터는 왜 같이 안 왔어? 너희 혹시, 헤어졌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윈터는 카일을 감시하고 있어.”
“왜?”
“그 새끼가 툭하면 죽겠다고 지랄 발광을 해 대는데 어떻게 혼자 둬.”
“어머.”
걔가 나 때문에 죽겠대? 어린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진짜 죽었으면 참 재미있었을 텐데……. 엘리자베스가 견딜 수 없이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손끝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치미는 짜증을 삼킨 섀넌이 말했다.
“……그쯤 했으면 이제 가자고.”
“어딜?”
“어디긴 어디야. 카일한테 가야지. 그 등신 같은 놈한테 가서 뺨이라도 날리고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아니면 말로만 죽지 말고 진짜 죽으라고 하든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죽겠으니까.”
그러나 되돌아오는 대답은 태연하다 못해 경쾌했다.
“벌써? 으응, 싫은데.”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돌아올 것도 아니면서 왜 이딴 장례식에 오라고 초대했단 말인가? 관 안에서 혼자 썩든지 말든지 자신은 알 바 아닌데 말이다.
“그냥 구경이나 하라고 부른 거지. 너무 재미있지 않니? 장례식 말이야.”
“그럼 나 말고 카일을 불렀어야지.”
카일이라면 이 꼴을 자신보다는 좀 더 재미있어했을지도 모르겠다.
“카일이랑은……, 한 2년은 더 안 볼 생각이었거든.”
치맛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던 엘리자베스가 돌연 몸을 돌려 섀넌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왕 이별할 거라면 길게, 서로의 생사조차 몰라야 해.”
“……뭔 소리야.”
“너 모르는구나? 재회 섹스가 얼마나 짜릿한지.”
“…….”
살다 살다 이런 개소리는 처음이었다. 한심하다는 듯한 섀넌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엘리자베스가 즐거운 투로 노래를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헤어져 있던 기간이 길수록 오르가슴도 길어지는 법이라고.”
정말이지 희대의 개소리가 아닐 수 없다. 고작 그런 이유로 몇 년을 잠적한 거라고?
“사실 좀 질렸거든……. 너라면 이해하지? 연애를 오래 하면 어느 정도는 변주가 필요한 법이잖아. 카일은 좀, 뭐랄까. 패턴이 너무 똑같고, 침대 위에서는 정말이지…….”
섀넌은 딱히 알고 싶지 않은 그들의 내밀한 사정을 귀에 담고 싶지 않아 무시했다.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내린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염색제로 하얗게 물들인 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 넘실거렸다. 엉킨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엘리자베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의외로 좀 고상한 구석이 있어서……. 가끔은 우아하게 선행도 베풀고, 정숙한 사제 노릇도 해 보고 싶고 그래.”
“……입만 열면 개소리군.”
“가끔 그런 주기가 돌아오는 법이야……. 교양 주기.”
엘리자베스가 섀넌을 앞질러 걸으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하……, 섀넌이 헛웃음을 흘리며 차갑게 말했다.
“교양 주기는 무슨. 결국 섹스 때문에 몇 년을 이 지랄 떨어 놓고.”
“그냥 대충 좀 알아들어. 하여간 매사에 삐딱한 건 여전하다니까, 재수 없게.”
섀넌은 더 이상 그녀의 헛소리에 대꾸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냥 윈터나 얼른 보고 싶었다.
* * *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윈터…….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응? 섀넌이 이렇게 하라고 시키디……?”
“얼어 죽고 싶다고 창을 열어 둔 건 카일 본인이시잖아요.”
“…….”
한껏 오만상을 찌푸린 카일이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숨어들었다. 윈터가 한숨을 내쉬며 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섀넌이 보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를 따라가는 건데…….
카일의 유난이 도를 넘어서며 자해로까지 이어지니, 둘 중 누군가는 남아서 그를 지켜봐야 했다. 섀넌은 이런 카일을 몹시 짜증스러워하면서도 그가 정말 영영 죽게 놔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말로는 단지 예전의 빚을 갚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윈터는 그가 아주 조금은 카일을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각인 이후 좋은 점은 이렇게 이따금 연인의 감정을 제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윈터는 섀넌의 미세한 감정 변화도 곧잘 캐치해 내곤 했다. 때로는 섀넌 그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감정도 말이다.
그리하여 윈터는 섀넌이 생각보다 그리 굳건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것처럼 매사에 늘 무심하지만, 그런 섀넌의 내면에도 종종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
“추워, 시발, 진짜 더럽게 춥다고…….”
이불 속에서 카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섀넌과 윈터가 방학 때나 주말에 가끔 머무르던 수도 인근의 별장이었다. 윈터는 자신과 섀넌의 추억이 깃든 이곳에서 카일이 저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윈터의 생각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이불 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카일이 그를 노려봤다.
“왜, 내가 네놈들 떡 쳤던 침대에서 거지같이 질질 짜고 있으니까 우스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그건 새 침대예요, 카일.”
“어쨌든 떡은 쳤을 거 아니야! 여기서도! 저기서도! 빌어먹을 커플 새끼들!”
카일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손가락으로 온갖 곳을 가리켜 댔다. 물론 여기서도 저기서도 떡을 친 건 맞지만, 어쨌든 윈터는 말을 아꼈다.
“다 소용없어, 윈터……. 인생은 그냥……, 엿 같은 거야…….”
곧 죽을 사람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그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섀넌이 지금은 잘해 주지? 그것도 다 한때라고. 다 무의미한 짓이란 걸 네가 알아야 돼……. 그 새끼가 옛날에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 알아? 너도 곧 버려지게 될걸……. 너희 늑대들 각인이란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그런 것 따위로 그 새낄 완전히 옭아맸다고 착각하지 마…….”
“곧 섀넌이 엘리자베스와 함께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개소리하지 마!”
널 뛰는 감정의 기복을 따라 카일의 목소리도 종잡을 수 없이 가파르게 날뛰었다.
“리즈는 안 와, 안 온다고! 내가 그렇게나 빌어도 어디 있는지 행방조차 안 가르쳐 주는데 섀넌이라고 다를 것 같아?”
“말했잖아요. 편지가 왔다고.”
“안 믿어, 빌어먹을. 안 믿어……. 설령 걔가 리즈를 찾아냈다고 해도 리즈는 절대 안 따라올걸. ……그렇게 쉽게 돌아올 거였으면 진작 왔겠지! 씨발, 다 필요 없어! 창문 열어, 차라리 얼어 죽어 버리게…….”
윈터는 그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말도 안 통하는 미친놈을 계속 상대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섀넌이 저 꼴을 봤다면 그나마 한 오라기만큼 있던 동정심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원래 친구끼린 닮는다지 않나? 그리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임에도 카일은 섀넌과 어쩜 저토록 다른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 어떤 일이 닥쳐도 품위만큼은 잃지 않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섀넌에 비해 카일은……, 좀 그렇다. 섀넌이 어떻게 저런 사람과 이리도 오래 친구 관계를 유지했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섀넌은 친구가 아니라 ‘공생 관계’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침대에서 우당탕 일어난 카일이 창을 활짝 열며 구시렁거리는 것을 못 들은 척 놔둔 윈터가 저택의 지붕 가장 높은 곳에 걸터앉았다.
어쨌거나, 카일이 이상한 짓을 일삼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리 걱정할 것도 없다.
……다만 섀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벌써 닷새나 되었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미 돌아오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인데, 대체 왜 아직도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겠다.
각인한 반려가 죽으면 나머지 한쪽이 그걸 느낄 수 있다는데,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의 시시콜콜한 상황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가까이 있을 땐 그가 느끼는 감정을 간헐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일정 거리 이상이 벌어지면 마치 그와의 결속이 완전히 끊긴 것처럼 막막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고작 닷새도 이렇게 힘든데 그 예전에는 어떻게 1년을 헤어져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어린 치기 하나로 오래도 버텼던 것이다…….
어쨌든 오늘 밤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윈터는 카일이고 나발이고 섀넌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왕복 이틀 정도가 걸리는 길이니 이미 그는 엘리자베스를 만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이토록 안 오는 거지…….
당신은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봐. 분명 금방 온대 놓고…….
그는 하늘에 걸린 그믐달이 섀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꿎은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보고 싶어.
그때 문득 머릿속에 이질적인 목소리가 치고 올라왔다. 수면 아래에서 웅웅거리는 것처럼 불확실한 음성이었지만, 분명 윈터 그 자신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윈터의 몸이 앞으로 훅 밀려났다. 등을 감싸는 체온이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차가운 손이 뱀처럼 파고들어 윈터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따뜻해…….”
귓불 아래에 닿은 차가운 입술이 달싹였다. 녹아들 것 같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윈터가 짐짓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윈터, 얼굴 좀 보여 줘.”
이윽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뺨을 감싼 손이 고개를 돌리게 했다. 윈터가 섀넌을 피해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미안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제가 찾아가려고 했어요.”
“그랬구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래, 미안해.”
섀넌이 윈터의 뺨을 잡아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얌전히 내리깐 은백색 속눈썹이 달빛에 반짝였다. 고작 며칠 간의 공백일 뿐인데, 못 본 사이 제 연인은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여전히 불퉁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섀넌이 웃으며 손끝으로 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네.”
“…….”
“어떻게 풀어줄까, 응?”
이내 그의 몸을 돌린 섀넌이 웃으며 더 깊이 입술을 겹쳤다. 한껏 삐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완강히 거부하지는 못해 소극적으로 벌어진 입술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자신을 슬쩍 밀어내는 듯한 윈터의 혀를 단호하게 옭아맨 섀넌이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젖은 입천장과 볼 안쪽의 여린 살갗, 치열을 하나하나 혀끝에 새기듯 마음대로 헤집은 섀넌이 남아 있는 타액을 모조리 빼앗아 삼켰다.
윈터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섀넌은 윈터가 내는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나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 제 입술 안에 거칠게 가두고 멋대로 그의 안을 탐했다.
섀넌을 안지 않고 허공에 띄워져 있던 윈터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만, 그만해요, 섀넌. 그의 애원은 질척하게 얽힌 섀넌의 혀끝에 전부 사그라들었다.
만족할 때까지 마음껏 윈터의 입술을 빨아들이던 섀넌이 어느 순간 입술을 조금 뗐다. 갑작스럽게 멎은 입맞춤 탓에 입술 밖으로 반쯤 내밀어진 윈터의 혀끝에서 가느다란 타액이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기분 좋지, 윈터?”
“…….”
“지금 엄청 느낀 것 같은데.”
혹시 여기도 젖었어? 고간을 슬쩍 터치하는 손과 귀를 간질이는 은밀한 속삭임이 윈터의 얼굴을 확 붉어지게 만들었다.
섀넌이 엄지 끝으로 그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닦아 주며 느슨히 웃었다.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몰라요.”
“나 보고 싶었지?”
“……네.”
“다시 만나서 좋아, 안 좋아.”
“좋아요.”
수줍게 대답하는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몸이 섀넌의 품으로 안겨 왔다. 정말 사랑스럽기도 하지……. 낮게 웃은 섀넌이 속삭이며 그를 마주 안았다.
“저기요, 신사분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팔짱을 꼈다.
“나 아직 여기 있거든?”
고개를 돌린 섀넌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 꺼지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가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 윈터를 숨기듯 끌어안으며 말했다.
“도착했으면 얼른 내려가서 네 한심한 애인 놈이나 돌볼 것이지.”
“안 그래도 가려고 했거든요?”
유난은 지들이 떨어 놓고 나한테 난리야. 엘리자베스가 진절머리를 내며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샤…….”
품 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윈터가 섀넌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얼른 집에 가요, 우리. 눈가가 발갛게 물든 그가 낮게 속삭였다.
* * *
“그래서, 정말 단지 그 이유 때문이래요?”
부서질 듯 젖혀진 저택의 문 안으로 두 인영이 엉킨 채 들어왔다. 현관 옆의 사이드 테이블에 걸터앉은 섀넌이 두 다리로 윈터의 허리를 감으며 대꾸했다.
“그렇대. 헤어져 있던 기간이 길수록, 하아……, 섹스가 더, 짜릿하다고…….”
어깨 아래로 내려간 셔츠 대신 윈터의 입술이 살갗을 덮었다. 맨살에 닿는 서늘한 공기에 움츠린 것도 잠시, 뜨거운 온기를 품은 입술이 쇄골 부근을 질척하게 머금자 섀넌의 입에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살결을 제 온기로 녹이려는 듯 진득하게 쓸어내린 손이 추위에 곤두선 유두를 지분거렸다. 허리를 바짝 세운 섀넌이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섀넌도 그 생각에 동의해요?”
가벼운 질문과 함께 윈터의 입술이 작은 돌기 위를 뒤덮었다. 고개를 젖힌 섀넌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느 정도는…….”
축축한 혀가 유두를 길게 핥아 올릴 때마다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꼿꼿하게 선 정점을 희롱하듯 간질이는 혀끝을 따라 찌르르한 전율이 흘러 허리 아래에 고였다.
“으응…….”
“어느 정도는?”
타액에 젖은 유두 위로 재차 질문이 스몄다. 한 손을 은백색 머리칼 사이사이에 찔러넣은 채 다른 손을 아래로 내려 윈터의 바지 버클을 풀던 섀넌이 눈가를 찌푸리며 다소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해. 하아……, 그렇다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하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그러나 벌어진 바지 속으로 다급하게 고간을 찾아 쥔 손에 닿은 건, 웬 가죽과 사슬의 미지근한 감촉이었다.
“아.”
그가 짜증스럽게 탄식했다.
“이걸 계속 차고 있었어?”
“당신 없는 동안 하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섀넌이 윈터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제가 없는 동안 딴 놈한테 아랫도리 보일 일 없게 하라는 의미에서 반쯤 장난으로 채워 둔 정조대가 지금은 몹시 성가신 걸림돌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가 혀를 차며 작은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터질 듯 발기한 성기가 가죽과 사슬로 고정된 정조대 안에 꾸역꾸역 힘겹게 갇혀 있었다.
열쇠. 열쇠를 어디에 뒀더라……. 시발, 이딴 걸 왜 채워 놔서는.
떠나기 전에 윈터에게 맞는 정조대를 특수 제작하고 공들여 열쇠를 숨겨 놓았던 보람도 없이, 하얀 손끝이 금속 자물쇠를 우습게 뜯어냈다.
‘이렇게 쉽게 열어 주려고 만든 게 아니었는데.’
만월까지 채워 놨다가 재미 좀 보려고 했건만, 지금은 정조대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의 연인이 너무 귀여워서 안 되겠다.
자물쇠와 연결되어 있던 사슬이 짤그락 소리를 내며 느슨하게 풀렸다. 그걸 완전히 끌어내리는 섀넌의 손길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섀넌……, 아파요.”
귀엽게 칭얼거리는 연인의 재촉에 초조해진 섀넌이 복잡하게 채워진 고리를 마구 끊어 정조대를 열어젖혔다. 윈터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흘렀다. 터질 듯 팽창한 성기는 오랫동안 가죽 구속구에 눌려 있던 자국이 선명했다.
그저 자유를 되찾은 것만으로도 움찔거리며 눈물을 흘려대는 윈터의 성기를 섀넌이 거칠게 쥐고 주물렀다. 섀넌의 목덜미와 어깨 곳곳에 도장을 찍듯 배회하던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얼른, 윈터…….”
섀넌이 윈터의 목을 끌어안으며 재촉했다. 관자놀이가 불거지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 윈터가 초조한 손길로 섀넌의 바지를 속옷과 함께 끌어내렸다.
바지와 함께 벗겨진 섀넌의 구두가 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 두 다리로 윈터의 허리를 감은 그가 보채듯 끌어당겼다.
“넣어 줘, 얼른…….”
“갑자기 넣으면 아프잖아요.”
“괜찮아, 하아……, 괜찮아. 빨리…….”
“평소엔 갑자기 넣는 거 싫어하면서.”
윈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잇새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섀넌이 팽팽하게 부푼 귀두 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네가 충분히 젖었잖아, 윈터……, 이 정도면 충분해.”
투명한 체액이 그의 손끝에 끈적한 시럽처럼 뭉그러졌다. 한껏 다리를 벌린 채 테이블을 짚은 섀넌이 그의 것을 제 구멍에 성급하게 맞췄다. 섀넌의 아랫배에 바짝 올라붙은 연분홍빛 성기가 맑은 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요, 섀넌.”
“읏…….”
미처 풀리지 않은 작은 틈새가 벌어지며 둥글게 부푼 귀두를 빠듯하게 담았다. 입구의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검붉은 기둥을 오물오물 삼켜대는 모습을 붉어진 눈으로 지켜보던 윈터가 천천히 허리를 밀어 올렸다.
“아아.”
벽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섀넌의 몸이 그를 따라 밀려 올라갔다. 어깨를 짚고 있던 하얀 손이 윈터의 셔츠를 꽉 움켰다. 한 번에 다 박아넣지 않고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가 다시 천천히 밀어 넣길 반복하는 윈터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안이 미친 듯이 좁았다. 매번 끈질기게 길을 들여놓아도, 몇 시간만 지나면 섀넌의 안은 마치 첫 순간을 겪는 것처럼 윈터의 침입을 거부하며 꽉 다물려 있었다.
그 압박감은 윈터에게도 섀넌에게도 고통이었다. 그래서 늘 온몸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애무하며 뒤를 풀어 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흐읏, 아…….”
도무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윈터가 뒤로 물러나려 하자, 섀넌이 두 다리로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가지마, 계속해.”
삽입이 조금 더 깊어지며 내벽 안에 맺힌 윈터의 체액이 점점이 뭉그러졌다. 소리 없이 질금질금 뱉어내는 쿠퍼액이 안을 부드럽게 만들고, 꽉 닫혀 있던 내벽은 오직 윈터의 모양에 딱 맞는 길을 내기 시작했다.
“섀넌, 너무 좁아요……. 터지겠어요.”
“처음도 아니면서 엄살 부리지 마.”
불멸의 재생력을 가진 몸은 늘 처음처럼 닫혀 있을지 몰라도, 섀넌에게 삽입의 고통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전희처럼 여겨지는 감각이었다.
아직 반절도 다 들어가지 못한 윈터의 것을 채근하듯 그가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 사이가 팽팽하게 벌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더 삼키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꾸역꾸역 성기를 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이 사뭇 외설적이었다.
“잠깐만. ……힘 좀 풀어 줄래요.”
섀넌의 양쪽 볼기를 움켜쥔 윈터가 낮게 속삭였다. 그게 사전 경고라는 것을 익히 아는 섀넌이 애써 몸을 더 열어 보려 하기도 전에, 굵직한 성기가 단번에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배 속을 치받는 압박감에 터져 나온 신음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섀넌은 윈터의 목을 더 꽉 끌어안고 그의 귓불이며 목덜미를 깨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좋아요, 섀넌은?”
“좋아, 윈터, 하아……, 좋아.”
차가운 손이 열 오른 뺨을 감쌌다. 곧게 떨어지는 콧날과 작은 송곳니가 살짝 비어져 나온 입술에 아무렇게나 제 입술을 부딪으며, 섀넌이 몽롱하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윈터.”
나른하게 흘리는 목소리완 달리, 아래는 윈터의 것을 쥐어 터뜨리겠다는 듯 바짝 조이는 섀넌의 몸짓에 윈터가 옅게 눈을 찌푸렸다.
넘칠 듯 말 듯 위태롭게 고여 있던 충동이 결국 기준선을 넘어 버렸다.
“아, 으응……! 윈터, 흐으…….”
잔잔한 바다와 같던 저음이 가냘픈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윈터는 제게 박힐 때 섀넌이 내지르는 특유의 그 교성을 매우 좋아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서도 안 되고 들을 수도 없는, 오직 자신만이 독점하는 목소리였다.
매달리듯 안긴 섀넌의 볼기를 움킨 그가 거칠게 안을 짓찧었다. 덜컹, 덜컹, 하얀 엉덩이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테이블이 빠르게 흔들리며 덜걱거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아주 깊은 곳, 내벽에 난 길이 급격히 좁아지는 지점까지 치고 들어온 귀두 끝이 여린 점막을 짓뭉갰다.
아아, 섀넌에게서 새된 비명과 비슷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서 내는 소리인지, 좋아서 내는 소리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그러나 윈터는 그가 어느 때보다 강력한 환희에 몸을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누구보다 몸이 가깝게 연결된 상태에서, 제 연인의 감각을 들여다보는 것쯤은 이제 쉬운 일이었다.
“하으, 윈터……, 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야하게 굴어요, 섀넌.”
테이블이 덜컹거리는 소리, 윈터의 다리에 반쯤 걸쳐진 정조대의 사슬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섀넌의 외마디 신음과 살 부딪는 소리가 어두운 저택 안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빠르게 치닫듯 쳐올리던 윈터가 어느 순간 그의 안에 깊게 박아넣은 채 허리를 돌렸다.
“흐읏……, 아.”
울먹이듯 길게 늘어진 신음과 함께 섀넌의 성기 끝에서 하얀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미처 다 벗지 못한 윈터의 셔츠 자락을 적신 체액이 단단한 근육으로 곤두선 그의 아랫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절정으로 바짝 조여들었던 내벽이 스르르 풀어졌다. 윈터는 이제야 겨우 딱 알맞은 강도로 제 것을 감싸고 있는 점막을 천천히 비볐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이 파드득 몸서리치며 남아 있는 정액을 몇 차례 더 뱉어냈다.
윈터가 소리 내어 낮게 웃었다. 그런 여유가 못마땅했는지, 섀넌이 투정 부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같이 가야지. ……나만 가면 불공평하잖아.”
“오늘은 안 적셔 줘도 잘 느끼는 것 같아서 참고 있었어요.”
평소엔 섀넌이 갈 때쯤 윈터도 함께 절정을 맞으며 첫 사정의 속도를 맞추는 게 그들의 섹스 습관이었다.
섀넌은 윈터가 쏟아 내는 것으로 제 안이 채워지는 감각을 꽤 흡족해했고, 아무리 풀어 줘도 조금 빠듯했던 내벽이 질척하게 젖으면 감도가 더 좋아지곤 했다. 위아래로 물이 많은 애인을 두고 윤활유 따위를 쓰는 건 낭비라는 게 섀넌의 주장이다.
“그래도…….”
윈터는 들릴 듯 말 듯 제 귀에 작게 속삭이는 섀넌의 말을 못 들은 척 되물었다.
“그래도, 뭐요?”
“안에…….”
“네?”
“안에 얼른 싸 줘. ……나만 기분 좋은 것 같아서 별로야.”
윈터가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그가 내벽의 굴곡진 부분을 제 귀두 끝으로 천천히 비비며 섀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흐읏…….”
“침대로 가요, 섀넌.”
섀넌의 귓가로 다정한 속삭임이 스몄다. 배 속을 오가는 성기의 움직임이 느리고 끈질겼다. 섀넌이 얕게 오르는 전율에 몸서리쳤다.
허벅지에 걸리적거리게 매달려 있던 정조대를 툭 끊어 바닥으로 던져 버린 윈터가 섀넌의 몸을 안아 들었다.
다급히 매달리는 섀넌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윈터의 목덜미에 뭉그러졌다. 무게만큼 깊어지는 삽입 탓에, 허리를 감은 다리가 긴장으로 달달 떨렸다.
“아, 읏…….”
몸이 연결된 채로 옮겨지는 건 섀넌에겐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배 속을 쿵쿵 울리는 압박감이 못 견디게 자극적이라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계단, 살살…….”
“살살요? 이보다 어떻게 더 살살 걸어요.”
정말 얄밉기 그지없는 대꾸였다. 자신이 애원하며 매달리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 같은 태도라, 괜스레 약이 오른 그가 윈터의 머리채를 세게 움켰다.
“일부러 침실까지 뜸 들이는 거지. 혼자만 여유 부리면 다야?”
“네?”
계단참에서 멈춰 선 윈터가 섀넌을 가볍게 고쳐 안았다. 위로 살짝 들린 몸이 다시 아래로 푹 내리꽂혔다.
“아……!”
“저 지금 여유 없어요, 섀넌. 엄청 참고 있는 건데…….”
섀넌이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리고 혀를 내어 그 입술 위를 살살 핥았다.
“참지 마. 나흘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잘 참는 거 괘씸하니까.”
섀넌을 보는 청회색 눈에는 어느새 피처럼 붉은 석양이 내려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분명한 욕망의 증거였다. 섀넌은 흥분할 때면 유독 붉은 기가 산란하는 윈터의 눈을 보면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그 눈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별안간 섀넌의 등이 계단참 벽면에 약하게 부딪혔다.
“아, 으……!”
등을 부딪친 충격보다, 아래를 치받는 충격에 놀란 섀넌이 짧은 비명을 뱉었다.
“나흘 아니에요, 섀넌.”
닷새예요……. 하루 차이가 얼마나 큰데 그걸 착각해요? 윈터가 허리를 깊이 밀어 올리며 항의했다.
“아, 아흐윽……!”
윈터의 허리를 감고 있던 두 다리가 허공을 내저었다. 그러나 디딜 곳이 없어 충격을 상쇄하지 못한 탓에, 애꿎은 윈터의 어깨만 꽉 짚은 섀넌이 버둥거렸다.
“나는 하루가 일 년 같았는데, 당신은 닷새를 나흘로 느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았나 봐요?”
아직도 삐쳐 있었을 줄이야. 벽에 등을 대고 어떻게든 몸을 지탱하려 애쓰던 섀넌이 낭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두 다리로 윈터의 허리를 바짝 감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윈터. 내가 실수했어.”
무서운 기세로 섀넌의 둔부를 휘어잡은 윈터가 그의 몸을 아래로 찍어 내렸다. 안을 파고들었던 성기가 가장 깊은 곳까지 콱 처박히자, 섀넌은 숨통마저 틀어막힌 것 같은 충격에 몸을 떨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헉, 하고 짧게 끊기는 숨을 들이켜는 섀넌의 귓가로 낮은 음성이 속삭였다. 뜨거운 성기가 쿠퍼액으로 질척해진 점막을 느리게 비비며 파고들었다.
“떨어져 있던 동안 내 생각 얼마나 했어요?”
“아, 흣……,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하으…….”
미간을 사납게 구긴 윈터가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살 부딪는 소리가 어두운 계단참에 울렸다.
“예상보다 하루 더 늦어졌을 땐? 그때도, 하아……, 내 생각했어요? 내가 보고 싶긴 했어요? 엘리자베스를 재촉해서 더 빨리 돌아올 생각은?”
허릿짓이 점점 더 빨라졌다. 벽에 쿵쿵 부딪히던 등이 커다란 손에 덮였다.
“다음부턴 나 떼어 놓고 가지 말아요, 섀넌.”
섀넌의 몸을 완전히 옭아맨 윈터가 그의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흐읍……, 읏, 아읍.”
“버림받은 것 같아서, 너무……, 너무 슬펐어요.”
겨우 닷새 가지고 무슨 그렇게까지……. 그러나 섀넌은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었다.
“으응, 아…….”
엉겨 붙은 아래가 하나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찌르르 차오르는 열기가 새빨간 핏물처럼 질척하게 번져 들었다.
“하아, 좋아, 윈터……, 으응, 흣…….”
부푼 성기가 내벽을 쓸고, 깊은 곳을 찌를 때마다 봇물 터지듯 원초적인 쾌감이 치솟았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윈터의 신음마저 살갗을 긁는 애무가 되었다.
“보고, 싶었어, 하으……, 정말이야.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계속 말해 주세요.”
“보고 싶었, 흐읏……, 보고, 싶었어.”
윽……, 잇새로 나온 낮은 신음이 콰득 깨물린 어깨로 스몄다. 섀넌의 어깨에 이를 박은 윈터가 그의 안에 깊숙이 제 것을 찔러넣고 파정했다.
“아아, 응……!”
급격히 부푼 쾌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배 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달콤한 희열을 실어 왔다. 허공에 들린 몸이 벌벌 떨렸다.
툭, 투둑, 융단이 깔린 계단참 바닥으로 점성 있는 체액이 떨어졌다. 빈틈없이 안을 꽉 메운 성기 탓에, 안에 내어놓은 것들이 틈을 비집고 뚝뚝 흘러나왔다. 더불어 섀넌의 배 위에도, 그 자신이 분출한 체액이 희멀겋게 튀어 올랐다.
“하아…….”
땀에 젖은 목을 끌어안은 섀넌이 그 여운을 즐기듯 아래를 조였다 풀며 윈터의 배에 제 것을 비볐다. 그런 그의 눈가로 윈터의 입술이 닿았다.
“……허리 아파.”
눈을 감은 섀넌이 제게 떨어지는 입맞춤을 음미하며 말했다.
“침대로 가자.”
* * *
흡족한 섹스와 허리의 통증은 비례한다. 섀넌은 몇 분 뒤면 사라질 아래의 뻐근한 고통을 온전히 누렸다.
기운이 없다는 핑계로 침대에 꼼짝 않고 널브러져 침실 곳곳을 돌아다니는 윈터를 감상하다가, 그의 수발을 받으며 몸을 씻고 상쾌한 기분으로 너른 품 안에서 여유롭게 잠드는 순간.
섀넌에게 그 일련의 과정은 일종의 후희이자 완벽한 섹스의 마무리였다.
행위의 흔적으로 너저분한 시트 위에 몸을 굴리던 그가 엎드려 턱을 괴고 윈터를 감상했다. 바닥 여기저기에 내팽개쳐진 옷을 줍는 윈터의 팔을 타고 멋들어지게 짜인 근육이 움직였다.
우둘투둘하게 핏줄이 불거진 손이 커튼을 잡고 양옆으로 열어젖힐 때, 날개처럼 갈라지는 저 단단한 등 근육은 또 어떠한가.
저 바윗덩이 같은 어깨 위로 와인을 부으면 갈라진 근육의 결을 따라 또르륵 흘러내리는 새빨간 줄기가 장관이었다. 그 꼴을 보려고 기껏 어렵게 구한 한정판 프리미엄 와인을 맛도 보지 못하고 그의 몸에 다 쏟아부은 적도 있었더랬다.
그야말로 보는 재미가 있는 몸이다. 희롱하는 재미는 더더욱 있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그런 윈터를 흡족하게 감상하던 섀넌이 어느 순간 몸을 돌린 그와 눈을 마주쳤다.
“…….”
섀넌의 시선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예쁘장한 얼굴에서 가슴팍 중앙을 가르는 선을 타고, 그 아래의 복근과 장골 부근에서 멈춘 시선을 그는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흉흉한 핏발이 선 성기가 다리 사이로 곧게 늘어져 있었다. 밤새 안을 들쑤셨던 그 사랑스러운 물건을 보며, 섀넌이 무의식중에 혀를 내어 느릿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애꿎은 윈터의 얼굴만 소리 없이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귓바퀴와 관자놀이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입술을 말아 문 윈터가 말없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있던 바지를 주웠다.
애인의 몸을 더없이 집요하게 관찰하던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입지 마.”
“그럼 그만 감상하세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소릴 들은 듯 황당한 얼굴로 몇 초 침묵하던 섀넌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더는 안 클 줄 알았더니, 이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많이 컸네……. 그가 베개에 뺨을 기대며 웃었다.
“그래도 윈터, 방금 그 말은 퍽 서운했어. 넌 내 거니까 언제든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막 바지를 꿰입으려던 윈터가 그 말에 행동을 멈췄다. 몸을 굴려 천장을 보고 누운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바라봤다. 거꾸로 뒤집힌 얼굴이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는 게 싫어?”
툭, 윈터의 손에 들려 있던 바지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한 손으로 눈을 덮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게 아니라…….”
섀넌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간 윈터가 눈을 내리깔고 작게 말했다.
“그런 눈으로 계속 보면 또 설 것 같단 말이에요.”
“그거야 네 물건이 지나치게 몰염치한 탓이지. 쳐다보는 내 탓은 아니잖아.”
섀넌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미 반쯤 힘이 들어가 버린 성기를 쥐자, 위에서 짧게 내뱉는 숨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고개를 세운 섀넌이 윈터의 성기 끝을 혀로 건드리다가, 이내 그 끝을 살짝 물었다.
시선만 닿아도 세우는 연인은 아직도 이토록 미숙한 20대 청년처럼 민감하기 그지없어서, 몇 번만 빨아 줘도 금세 질척한 쿠퍼액을 흘려댔다.
“그만 빨아요, 섀넌…….”
윈터가 퍽 건방진 말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낯은 아까보다 더 터질 듯 달아올라 있어서, 정말이지 깜찍했다. 그의 것을 계속 손으로 쓸던 섀넌이 혀끝으로 귀두 끝을 꾹 눌렀다.
“싫은 척하지 마. 허리 아픈 연인 앞에서 파렴치하게 세우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윈터의 귀두 끝에서 울컥 내뱉어진 쿠퍼액이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섀넌이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말투로 물었다.
“이것 봐, 윈터. 얼굴은 그렇게 순진한 척하고 있어도 여기선 물이 질질 흐르는데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어린 연인을 희롱하는 변태 노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윈터를 올려다보며 열심히 귀두 끝을 빨아들였다.
윈터의 잇새에서 열 오른 숨이 흩어졌다.
“샤,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섀넌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움킨 그가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하는 말은 여전히 순진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무의식중에 제 입천장에 귀두 끝을 비비는 윈터가 귀여워서, 섀넌이 그의 것을 문 채 눈을 휘어 웃었다.
“아…….”
윈터의 허릿짓이 좀 더 깊어졌다. 습관적으로 한 손을 내려 섀넌의 턱 아래를 매만진 그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지점을 확인하며 조금 더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인상을 찌푸리고 섀넌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이제 귀여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음험했다. 얼핏 사납게도 보이는 표정이었다.
문득 섀넌의 머리칼을 움키고 있던 손에 약한 힘이 들어갔다.
“섀넌, 혹시 아직 허리 아파요?”
섀넌은 윈터의 이 왕성한 혈기가 특히나 사랑스러웠다.
“씻기 전에 한 번 더 할까요?”
정말이지 귀엽고 포악하기 그지없는 몸이 아닐 수 없었다.
섀넌은 대답 대신 눈을 휘어 웃었다. 윈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일렁였다. 별안간 섀넌이 물고 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불식간에 양 손목을 잡힌 섀넌의 시야가 빙글 뒤집혔다. 침대에 무릎을 대고 섀넌의 위로 올라탄 윈터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 옆을 지탱한 채 입술을 매만졌다.
“당신 입속은 너무 얕아서 마음껏 박을 수가 없어요.”
섀넌이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제는 아래가 너무 좁아서 힘들다더니, 불평이 많기도 하지.”
고개를 내린 윈터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신 몸이 너무 작은 탓이에요. 괴롭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부서질까 봐.”
섀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6피트에 달하는 장신에 그 누구에게서도 무엇이든 작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윈터의 눈에는 다른 모양이었다. 객관적으로 자신이 작지 않은 건 분명하니, 그만큼 제 연인이 뭐든 크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그가 윈터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짐짓 불퉁하게 물었다.
“내가 너만큼 거대하길 바라는 거야?”
커다란 몸이 이내 섀넌을 꽉 끌어안으며 무게를 실었다.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런 걸 물어요?”
당신이 손바닥만큼 작은 요정이었어도 사랑했을걸요……. 그가 작게 속삭이며 섀넌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뭉툭한 성기 끝이 아직 조금 풀어져 있는 틈새를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읏…….”
단단한 성기가 배 속을 벌리고 빈틈없이 짓치는 압박감을 견디며, 섀넌은 생각했다.
……정말 내 몸이 손바닥만큼 작았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런 섹스는 절대 못 했을 텐데. 잘도 좋아했겠다.
그 발상 자체는 귀엽기 그지없었으나, 뻣뻣하게 곤두선 성기를 흉기처럼 제 몸에 밀어 넣고 있는 이 순간에 내뱉기엔 지나치게 순진한 말이었다.
아, 으응……. 섀넌이 신음했다. 오밀조밀 주름진 구멍이 꾸역꾸역 벌어지며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모조리 삼켰다. 이미 안에 흠뻑 싸질러 놓은 것들이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가 손을 뻗자 윈터가 상체를 숙였다. 곧 흰 팔이 그의 목에 감기고,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이 섀넌을 완전히 덮었다. 맞닿은 살갗에서 윈터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더는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서로를 너무도 닮아 버린 향기였다.
섀넌은 자신과 같은 속도로 뛰는 윈터의 심장 박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오직 이 세상에 자신과 그밖에 없는 듯한 깊은 일체감이 섀넌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당신도, 알죠……, 섀넌.”
“흣, 아아…….”
살짝 뒤로 물러났다가 더 깊게 밀고 들어오는 양감이 오싹할 정도로 버거운 동시에 짙은 희열을 몰고 왔다. 윈터의 등을 꽉 끌어안은 섀넌의 허리가 살짝 허공으로 들렸다.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느끼고 있죠.”
“아, 읏.”
위로 살짝 들린 섀넌의 장골을 한 손으로 누르며 자세를 고친 윈터가 각도를 달리하며 계속 진입했다.
“응? 섀넌……. 대답해 봐요.”
“하아……, 알아.”
섀넌이 양손으로 윈터의 뺨을 감쌌다.
“너도 알고 있지, 윈터.”
속눈썹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열 오른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섀넌이 당부하듯 물었다.
“내가……, 널 얼마나, 읏, 아끼는지.”
윈터의 성기가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가장 굵은 귀두 끝이 완전히 삼켜진 이후에는 조금 더 수월했다. 반쯤 넣었다 다시 허리를 뒤로 물리고 다시 밀어 넣기를 끈질기게 반복할 때마다 삽입이 더욱 깊어졌다.
“하, 으…….”
“알아요.”
불에 달군 듯 뜨거운 성기가 그의 안에 끝까지 밀려 들어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원래부터 서로 연결된 채 태어난 것처럼 꼭 맞는 모양새로.
윈터는 한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섀넌을 내려다보았다. 섀넌은 제 배 속에서 쿵쿵 뛰는 맥박을 느꼈다.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벽에 빈틈없이 가득 들어찬 성기의 울근불근한 윤곽이 손에 잡힐 듯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 나만 알아, 섀넌.”
섀넌은 그의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유대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어떤 순간에는 이러한 일체감이 지나쳐 자신이 곧 윈터가 된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꼭 맞는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완벽하게 맞물릴 수 있는 유일한 관계다.
윈터가 살살 허리를 움직였다. 앞선 행위로 이미 질척하게 젖어 있던 내벽을 천천히 어루만지듯 툭 툭 허리를 쳐올리자 연인에게서 예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윈터는 제 눈에 한없이 작아 보이는 그 몸을 빈틈없이 품에 가두고 눈가와 뺨, 입가에 쉴새 없이 입을 맞췄다. 내내 뺨과 입가를 배회하는 입술을 쫓아가 입을 맞춘 섀넌이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돼, 윈터.”
“…….”
“내가 아니까.”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던 윈터의 허릿짓이 아주 찰나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종종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려 해도, 똑똑한 섀넌은 여지없이 제 감정을 눈치채곤 했다.
그러니 이렇게 서로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순간에는 어떻겠는가. 절제되지 않아 흘러넘치는 상대의 감정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온전히 와 닿는 순간에는, 그 어떤 것도 쉽사리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윈터는 그에 저항하는 대신 조금 분한 얼굴로 자신의 유치한 독점욕을 인정했다.
“그래도 조금 속상해요.”
이 사람이 날 이만큼이나 좋아한다고, 누구나 탐낼 만큼 아름다운 그가 진정으로 탐내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앞으로 그 어떤 날이 와도 그에겐 나밖에 없을 거라고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 그런 욕심 말이다.
“내 윈터는 참 속상할 일도 많네.”
여유롭게 웃던 섀넌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뒤로 길게 뺐다가 거세게 짓쳐 올리는 윈터의 허릿짓에, 섀넌의 몸이 침대 끝까지 주욱 밀려 올라갔다. 아, 흑……. 섀넌의 입에서 울먹이는 듯한 신음이 길게 뒤따랐다.
윈터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근육이 곤두선 가슴팍이 섀넌의 몸을 짓눌렀다. 섀넌의 목덜미에 따끔한 통증이 스쳤다. 곧 피가 빨리는 듯 뻐근한 감각이 뒷골까지 싸하게 엄습했다.
물렸다 놓인 살갗 위로 습한 숨이 떨어졌다. 아, 제기랄……. 작게 욕설을 내뱉는 윈터의 목소리 끝이 사납게 떨렸다.
“샤…….”
그러나 처음 말을 배웠던 순간부터 입에 붙게 된 애칭을 담는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온순하게 뒤바뀌었다.
“나는 왜,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날까요.”
위아래로 길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섀넌은 제 연인의 귀여운 질문에 속으로 웃었다.
“너무 좋아요. 당신이 너무 좋아서,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그의 뺨을 감싼 섀넌이 눈물 맺힌 눈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나도 그래.”
나도 네가 너무 좋아서 못 견디겠어, 윈터. 가끔은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네가 너무 좋아서.
배 속을 오가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그를 세게 끌어안은 윈터가 허리만 퍽퍽 쳐올렸다. 끼익, 끽, 침대가 흔들리는 소음이 그 움직임에 맞춰 요란하게 울렸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팔 안에 옴짝달싹 못 하게 갇힌 섀넌이 쾌락에 흐느끼며 흔들렸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안정감과 행복감에, 섀넌은 더없이 흡족했다.
그 이후 일어난, 아주 사소하지만 몹시 어색한 해프닝만 없었다면 완벽한 재회의 밤이 되었을 것이다.
* * *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새벽. 섀넌은 못마땅하게도 홀로 눈을 떴다.
몇백 년을 질리도록 산 그는 나른한 잠으로 시간을 무의미하게 건너뛰는 일을 퍽 좋아했지만, 아직 팔팔한 그의 어린 연인은 수면 없이도 살 수 있는데 굳이 잠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며칠 만에 재회한 건데 어떻게 날 혼자 둘 수가 있지?
잠에서 깼을 때 곁에 윈터가 없는 건 매우 짜증 나는 일이다. 섹스 후라면 더욱더. 버릇없는 제 연인이 일종의 후희를 망친 셈이었다.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꿰어 신고 침실을 벗어났다. 고함이라도 질러 그를 당장 눈앞으로 끌고 올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직접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보나 마나 간밤의 섹스로 엉망이 된 계단의 카펫을 치우고 있거나 비슷한 이유로 박살 난 현관 앞의 사이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거나 하겠지.
러셀이 없으니 이런 시답잖은 잡일을 모두 윈터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꾸 자신이 잘 때 자리를 비우고, 이런 짜증 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릴까.
부서진 테이블 다리로 괘씸한 연인의 볼기짝을 내려쳐 시퍼런 멍이 들었다가 사라지는 걸 구경하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엉덩이가 다 짓무르도록 괴롭힐 거라고 으르고 혼을 낼까.
아니면 분리불안 증세라도 있는 환자처럼 벌벌 떨며 그의 멱살을 쥐고 매달려 볼까.
전자라면 아프다고 귀엽게 울어댈 거고, 후자라면 미안하다고 울어댈 거다.
예쁜 청회색 눈에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흡족하게 감상하는 상상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섀넌은 저택 밖 정원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현관을 열었다.
“……윈터?”
분명 윈터의 기척이었다.
이 시간에 정원에는 왜 나와 있는 거야. 하여간 늑대들이란. 쓸데없이 기력만 넘쳐서는……. 아니면 몰래 사냥이라도 갔다 온 건가. 섹스 후 잠든 연인을 혼자 두고?
괜히 짜증이 치솟은 섀넌이 혀를 차며 현관 앞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섀…….”
기습적으로 나타난 그림자의 형태에 찰나 소스라치게 놀란 섀넌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
졸지에 목을 틀어 잡힌 윈터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섀넌은 그의 표정을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아’ 하는 목소리에 묻어난 당혹감을 읽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윈터는 지금 평소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섀넌이 얼른 손을 뗐다. 콰드득, 콰드득, 관절이 마찰하며 뼈가 줄어드는 소리가 섬뜩했다. 순식간에 몸을 줄인 윈터와 눈을 마주한 섀넌이 침착함을 가장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
곤두선 신경이 다시 가라앉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중에 윈터의 목을 틀어쥐었던 행동까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잖아.”
“저 여기 있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뱀파이어한테 ‘갑자기’라는 상황이 가당키나 해요?”
윈터의 말투는 여느 때처럼 유순하기 그지없었으나 역시 숨길 수 없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래로 툭 굴러떨어진 시선에는 노골적인 서운함이 묻어났다.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기겁하실 필요는…….”
“그림자를 보고 놀란 거야. 널 보고 놀란 게 아니라.”
섀넌이 변명하듯 다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 모습은, 평소에 자주 보지 않으니까. ……사전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면 놀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내 모습을 보는 게?”
“…….”
치명적인 말실수였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섀넌은 금세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바보 같이 침묵해야 했다.
물론 제 깜찍한 연인의 다양한 모습은 이미 알고 있다. 아예 짐승의 형태를 한 그와 연달아 며칠을 보낸 적도 있고, 인적 드문 북부에 칩거할 때는 재미 삼아 목줄을 채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방금 본 그 모습은, 그러니까 인간들이 목격한다면 반인반수의 괴물이라 부를 만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늑대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 그 모습은 그리 자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금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하자면, 정말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윈터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단지 반사적인 반응이었다는 뜻이다.
평생토록 마주치면 목부터 꺾어 놓기 바빴던 형상이니, 습관처럼 손이 먼저 나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분명 그의 냄새를 느꼈고, 그의 기척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단지 위화감을 넘어서, 반사적인 경계가 솟구칠 수밖에 없는 형상이었기 때문에.
“말했잖아. 그림자 때문이라고. 실루엣만 보고 어떻게 너인 걸 구분하겠어.”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라 조금 민망해진 섀넌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낭패감 짙은 한숨 뒤에는 좀 더 솔직해진 인정이 따라붙었다.
“……그래, 너인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머리보다 손이 먼저 나간 거지. 단지 그뿐이야. ……정말 그뿐이었어.”
이렇게 난처할 수가. 안 그래도 간밤의 섹스 중에 온갖 서운함을 다 쏟아 내던 이에게 괜한 실수를 해 버렸다.
“……됐어요. 변명이 길어지니까 더 마음 상해.”
윈터가 담요를 펼쳐 섀넌의 몸을 감쌌다. 너무도 난처한 기분에 사로잡혀 추운 줄도 모르고 있던 섀넌이 그제야 가볍게 몸을 떨었다. 괜히 민망하고 미안해진 그가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정원에는 왜 나와 있어서 사람을 놀라게 해.”
“저거 치워 뒀어요. ……당신은 자고 있고, 밤이라 괜찮을 줄 알았어요.”
윈터가 가리킨 정원의 한구석에는 간밤의 격렬한 정사로 다리가 부러진 사이드 테이블의 잔해들이 장작처럼 쌓여 있었다. 섀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의 손끝을 쥔 그가 작게 사과했다.
“미안해. 놀라서.”
담백한 사과에 따뜻한 입맞춤이 돌아왔다.
“나야말로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찬 바람에 식은 입술을 제 온기로 녹여 준 윈터가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런 모습을 본 건 손에 꼽으니까. 오랜만에 보면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그런’ 모습이라고 하지 마. 부정적인 의미 같잖아.”
섀넌이 그의 품에 안기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이번 일은 분명 내 실수지만 네 입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건 그냥 못 넘어가, 윈터.”
“그럼 뭐라고 해요?”
슬리퍼 하나만 달랑 신고 정원으로 나온 연인을 번쩍 안아 든 윈터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뭐, 그것도 너니까, 네 얼굴이고 네 몸인 거지. 뭐라고 하긴 뭐라고 해.”
“방금 당신 반응으로 봤을 땐 괴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던데요.”
섀넌이 그의 머리채를 꽉 움켰다. 여하간 한 번 꽁해지면 2절 3절까지 간다니까.
“괴물은 맞아.”
그가 양손으로 윈터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괴물. 심미안이 아주 훌륭한 뱀파이어가 하는 말이니까 의심하지 마.”
누구 작품인데. 감히 ‘그런’ 따위의 하찮은 수식어를 붙여.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한테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걸작이야. 내가 빚었으니까.
얼핏 화를 내는 말투였지만, 윈터는 그게 섀넌의 애정 표현 방식이라는 걸 잘 알았다. 평생토록 누군가에게 아첨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고고한 연인이 오직 제게만 해 주는 최고의 사탕발림.
그러니까 그가 받아들이기에, 제 연인은 지금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윈터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자주 보여 줘. 익숙해지면 다시는 네 목을 꺾을 시도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싫어요. 그러다 정말 다른 늑대를 마주쳤는데 나인 줄 알고 덥석 안기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라는 걸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나.”
금세 표정이 싸늘해진 섀넌이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허공에 달랑달랑 흔들리던 발을 툭 굴러 발끝에 걸려 있던 슬리퍼를 떨어뜨린 섀넌이 윈터의 팔에 목을 감았다.
“얼른 침실로 가. 나 잘 때 곁 비우지 마. 진짜 짜증 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옆에 누워서 내 숨소리나 들어.”
“…….”
비스듬히 뺨에 닿은 윈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웃느라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한 번만 더 혼자 눈 뜨게 하면 네 사랑스러운 본신에 개 목줄을 채우고 번화가를 활보할 거야.”
섀넌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동시에 과연 그러한 플레이가 누구에게 더 손해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개처럼 산책 당해야 하는 윈터일까. 아니면 지나가는 인간들이 제 연인을 개 취급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자신일까.
상상만으로도 빌어먹게 짜증이 나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네, 섀넌. 다시는 안 그럴게요. 눈뜰 때까지 꼭 곁에 있을게요.”
그러나 윈터에게서 돌아온 성실한 대답에, 섀넌은 금세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그의 품에 고개를 툭 기댔다. 어쨌거나 자칫 어색하게 끝날 뻔했던 작은 해프닝은 그럭저럭 다정하게 마무리된 셈이다.
‘정말 다 컸어.’
예전이었다면 절대 지금처럼 가볍게는 지나갈 수 없었으리라. 갓 스무 살이 된 필멸자 시절의 윈터였다면 말이다. 제법 마음이 넓어지고 어른다워진 연인의 성장에, 섀넌은 새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제 연인은 시무룩해 하고 홀로 꽁하는 대신 제 앞에서 여과 없이 삐친 티를 낸다. 서운한 감정은 금세 휘발되고 그 자리엔 이해와 믿음만이 굳건히 남는다.
이렇게 안정적인 관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퍽 험난했다는 건 알지만, 그것마저 자신들에겐 이미 점점 먼 과거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 * *
펜스포드 음대는 그 명성만큼이나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있다.
오랜 전통과 영예를 등에 업은 명문가, 신흥 대부호, 중산층, 세간을 팔아야만 빠듯하게 학비를 댈 수 있는 수준의 무산층, 혹은 그것조차 불가능해서 그저 빛나는 재능 하나만을 쥐고 후원자들의 눈에 띄어 겨우 발 들인 가난한 영재들까지.
이 중 극히 소수에 속하는 명문가 자제들은 단연 눈에 띈다.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자라온 그들은 태생적으로 오만하고, 몇 마디 통성명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금세 알아보고 저들끼리의 연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형제 중 예술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로 이곳에 입학하게 된 로건 카시아르 또한 그런 부류였다.
작위를 승계받아야 하는 형과는 달리, 그저 세간에 내보이기에 그럴싸한 타이틀만 달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인생.
그러나 그토록 쉬워 보였던 ‘수석 졸업’ 타이틀은 온갖 실력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건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이룰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번번이 그 자리에 견고하게 못 박혀 있는 단 한 사람 때문에.
“야, 저길 좀 봐.”
로건과 함께 1층 휴게소에 둘러앉은 이들 중 하나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저기 저놈이다. 빌어먹게 윤기 나는 은백색 머리와 큰 키, 저 잘난 낯짝 때문에 어딜 가든 늘 시선을 끄는 녀석.
리안 그리말디.
저 무식한 덩치를 보면 피아노 건반을 다루는 섬세한 예술과는 영 인연이 없어 보이는데, 매번 반전 없이 오직 저 녀석만이 과 수석을 차지하니 정말이지 이가 갈렸다.
죽도록 노력해서 아깝게 차석까지도 올라가 본 로건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졸업까지는 1년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지만, 과연 그때라고 해서 달라질까.
로건은 이제 리안만 보면 세상만사 의욕이 꺾일 지경이었다.
“쟤넨 뭐가 그리 대단해서 저렇게 늘 고개가 뻣뻣하신지.”
리안을 눈엣가시로 삼는 게 비단 로건뿐은 아닌지, 누군가 빈정대기 시작했다.
“뭐, 오래된 가문이라잖아.”
“그럼 뭐 해. 이제 딱 몰락하기 직전인 것 같던데. 저 건방진 낯짝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왕족인 줄 알겠어.”
“퀸턴 왕조 당시엔 그리말디가가 정권을 꽉 잡고 있었대. 이그리트 수도원에 가면 사방이 죄다 그리말디 문장으로 뒤덮여 있다던데?”
“퀸턴? 그게 대체 언제적 왕조야. 역사 수업 시간에나 지긋지긋하게 들은 이름이잖아. 한물간 집안인 거 맞네, 뭐.”
그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리말디 일가는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라고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집안에 어른이라고는 젊은 숙부밖에 없는데 그 숙부라는 사람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보면 볼수록 진짜 소름 끼치는 집안이라니까.”
리안과 그의 동생 애쉬, 그들의 숙부인 카일까지. 한 번이라도 그리말디 일가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일단 그들의 숙부인 카일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젊어 보인다는 점, 셋 다 하나같이 낯짝들이 반반하게 잘 빠졌으나 도무지 혈육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닮은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점이 그렇다.
명문가라기엔 들은 적 없는 이름이고, 그렇다고 아예 근본 없는 신흥 부호라기엔 그 역사가 굉장히 길다. 그러니 그들은 어디에 있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꼭 그런 문제가 아니어도, 쟤네 둘은 좀 다른 의미로도 이상하지 않아?”
로건의 옆에 있던 코넬리아가 불쑥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로건과 달리 리안의 곁에 있는 애쉬 그리말디에게 머물러 있었다.
형인 리안과 달리 신기할 정도로 새까만 흑발을 가진 청년. 살며 한 번도 햇볕을 쐬지 않은 사람처럼 창백한 애쉬는 마치 생기 없는 인형 같았고, 리안과는 다른 의미로 남녀 모두의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생김새부터 모색까지……, 형제가 어쩜 저렇게 딴판일 수 있을까. 혹시 이복형제인가? 행여 그렇대도 같은 아버지의 씨에서 비롯되었다면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뭐가 이상한데?”
로건의 여자친구인 클로에가 물었다. 그때, 잠시 멈춰 선 애쉬가 리안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로비에는 다른 학생들이 많았지만, 두 사람이 워낙 장신이라 도무지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도드라졌다.
눈살을 찌푸린 로건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게 아니라 재수 없는 거지. 저 꼴을 좀 봐.”
그가 검지를 들어 리안과 애쉬를 빙글빙글 가리켰다.
“너네 저렇게 사이좋은 형제 본 적 있어?”
애쉬와 리안은 이제 숫제 한 몸처럼 붙어서서는 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로비가 그렇게 소란스러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간지럽게 서로의 귓속에다가 속닥거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을 관찰하던 누군가가 말했다.
“쟤네 친형제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
순간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솔직히 그렇잖아. 생긴 것도 그래. 저게 어딜 봐서 형제야? 차라리 다른 관계라고 하는 게 더 그럴싸하지. 이를테면…….”
가볍게 그 적막을 깬 남학생이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 미묘한 뉘앙스에서 문득 뭔가를 알아챈 클로에가 몸서리쳤다.
“나 지금 좀 소름 돋았어. 대체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클로에, 세상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꽃밭만 있는 건 아니라고.”
“과 수석인 리안이야 그렇다 쳐도, 애쉬는 피아노에 영 재능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둘이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클로에는 귀를 씻고 싶은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하지 마.”
“축제 때 파트너 한 번 안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여자 끼고 데이트하는 꼴은 더더욱 못 봤지.”
“아니, 잠깐, 잠깐만!”
주거니 받거니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를 관망하던 코넬리아가 다급히 그들 사이를 가르듯 허공에 손사래를 쳤다.
“……그럼 설마 지난 3년간 쟤네가 계속 싱글이었다고? 데이트 한 번 없이? 저 상판을 하고선?”
그녀가 로건의 턱을 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이렇게 생긴 놈도 연애를 하는데?”
그 농담에 제일 크게 웃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에였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제 편이어야 할 여자친구마저 그러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진 로건이 코넬리아의 손을 탁 쳐냈다.
“연애하는데 얼굴이 무슨 상관이야. 너 그거 아주 차별적인 발언이야, 코넬리아. 사람은 인성이 중요하다고 안 배웠냐?”
“네 인성도 썩 좋지는…….”
“저 새끼들 건방 떠는 걸 봐. 누가 저런 놈들이랑 데이트하고 싶겠어? 몇 시간도 안 돼서 학을 뗄걸.”
똑같이 인성 글러 먹은 놈들이면 차라리 상판이라도 예쁜 쪽이 낫지 않아……? 코넬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못 들은 척 무시한 그가 단언했다.
“쟤네 게이가 분명해.”
로건의 말과 동시에, 애쉬가 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입술만 안 붙었을 뿐이지 완전히 연인의 그것이었다.
“지금도 봐, 무슨 피앙세 대하듯 하잖아. 변태 호모 새…….”
옆에 있던 클로에가 경악하며 로건의 입을 틀어막았다.
“공공장소에서 말 좀 가려서 해, 로건……!”
어떻게 그런 역겨운 발상을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의 눈빛이 뒤따랐다. 그녀의 손에 입이 막힌 로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웅얼거렸다.
“우리끼린데 뭐 어때서……. 면전에 대고 욕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도 말 못 해?”
……요즘 애들이란.
섀넌은 아기 새처럼 사랑스럽게 종알거리는 윈터와 다정하게 눈을 맞춘 채 생각했다. 정말이지 글러 먹은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장차 이 사회를 이끌어갈 명문가 자제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의 수준이 고작 저따위라니.
저 애들이 나중에 늙어서는 현자라도 되는 양 점잔을 떨어대고 ‘요즘 어린 것들은 철딱서니가 없다’며 개탄할 것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요,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우리 둘만, ……샤?”
조잘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이 그제야 윈터의 말에 귀 기울였다. 미간을 좁힌 윈터가 불퉁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생각은 무슨. 네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었지.”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다 듣고 있었어. 카일이 드디어 별장을 비웠으니 이번 주말엔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자는 뜻이잖아.”
윈터가 습관적으로 섀넌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
“나한테 온전히 집중 안 했죠?”
자신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들러붙어 있는 것을 익히 아는 섀넌이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정신 차려, 리안. 여기 학교 로비야.”
“알아요.”
그래도 윈터는 섀넌에게서 거리를 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새끼들은 어차피 우리가 뭘 하든 다 이상한 눈으로 보잖아요.”
“남들이 짐작하는 거랑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는 거랑은 달라.”
섀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졸업 후 진로는 생각 안 해? 괜히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었다간 왕립 아트홀에서 공연할 자격은커녕, 어쩌면 학위까지 박탈당할 텐데.”
단지 윈터가 피아노를 배우길 바랐다면 이렇게 수고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냥 자신이 옆에서 가르치고 말지, 뭐 때문에 새파랗게 어린놈들 틈에 부대끼며 대학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섀넌이 윈터의 옷을 다정하게 정돈해 주며 말했다.
“나는 네가 학위도 따고, 예술가로서 사회적인 명성도 얻고, 오직 국왕의 옷만 담당한다는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연미복을 입고 왕립 아트홀에서 연주하는 것도 보고 싶어.”
크라바트를 다정스레 매만지던 손이 별안간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저항 없이 딸려와 허리를 숙인 윈터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스몄다.
“공연이 끝나면 널 대기실에 가둬 놓고 그 예쁜 연미복을 엉망으로 찢어 버릴 거야.”
“…….”
“너는 여기저기서 잔뜩 안겨 준 꽃다발을 내팽개치고 나만 안으면 돼.”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네가 모조리 삼켜야 할걸. 대기실 밖에 있는 다른 놈들이 그 소릴 듣지 못하게 하려면 말이야.
이내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섀넌이 천진한 얼굴로 웃었다.
“좋은 계획이지, 리안? 그러려면 일단 네가 아주 유명해져야 해.”
습관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출 뻔했던 윈터가 제 어깨를 밀어내는 손길에 제지당했다. 홀린 듯 넋을 놓은 시선을 섀넌에게 고정하고 있던 그가 곧 찌푸려진 얼굴을 한 손으로 덮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네 상상력이 지나치게 좋은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윈터의 코트 깃을 여며 불룩해진 아래를 가려 준 섀넌이 천천히 단추를 채웠다. 때와 장소도 구분할 줄 모르는 아랫도리 같으니……. 물론 자신은 그의 이런 점을 무척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리안, 수업 시간 다 됐어.”
그가 윈터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윈터가 조용히 긴 숨을 내쉬었다.
“같이 안 들어가요?”
“난 누구와는 다르게 학사 경고만 면하면 돼서.”
얄미운 웃음을 흘린 섀넌이 그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입학 후 1년 정도는 수업에 집중하는 윈터를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지만, 3년째가 되어 가니 재미 보다는 더럽게 못 가르치는 교수를 향한 짜증이 더 우세해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수업 들어간 애인을 기다리며 낮잠이나 자는 쪽이 더 생산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윈터가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섀넌이 경쾌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 * *
클로에와 코넬리아가 사이좋게 수업을 들어간 사이, 로건은 개인 연습을 핑계 삼아 휴게실에 함께 있던 학생들과 시간이나 죽일 요량으로 빈 강당에 들어섰다.
대강당은 큰 행사 때가 아니고서야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괜히 오가는 교수들을 마주쳐서 훈계를 들을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체스판 여러 개를 이어 붙여 간이 포커판을 만든 학생들이 주루룩 둘러앉았다.
“로건, 이따 수업 있지 않아?”
“아직 두 시간 정도 여유 있어.”
“오늘 테스트 아니야? 연습 안 해?”
“야, 됐어……. 지금 연습해서 뭐 하냐? 이미 망했는데…….”
분주하게 카드를 돌리며 대꾸한 로건이 자신의 패를 들어 확인할 때였다. 저 멀리, 단상 바로 앞 의자 등받이 위로 검은 머리통이 불쑥 솟아났다. 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애쉬잖아?
로건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애쉬의 옆에는 보통 리안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리안은 조금 전에 클로에가 들어간 수업을 듣는 것 같던데……. 필수 과목이라 빠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쯧쯧, 로건이 속으로 혀를 찼다. 참으로 답도 없는 놈이었다. 저러니 성적이 매번 그렇게 바닥을 기지.
성실하게 학업에 임하는 것도 모자라 매번 과 수석을 놓치지 않는 형과 달리 애쉬는 매우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저렇게 수업을 빼먹는데 경고를 받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애초에 입학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건지 신기할 정도로, 애쉬는 피아노에 재능이 없었다.
저러다간 졸업 못 할 텐데……. 한심한 놈.
긴 의자 등받이 아래로 다시 검은 머리통이 쑥 꺼졌다.
“야, 뭐 해? 네 차례잖아.”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일으킨 로건이 다른 학생들의 손에 잡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로건, 수작 부리지 마. 안 통해.”
옆에 있던 친구가 그의 팔을 툭 쳤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나듯 문득 정신을 차린 로건이 얼른 칩 하나를 던졌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애쉬가 누운 의자 등받이에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로건은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하필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 시끄럽지도 않나?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무방비하게 드러누워서 자도 되는 거야?
“로건, 네 차례야.”
원래 여기 자주 왔었나? 지금까진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아무리 빈 강당이라지만 그렇기에 더욱 온갖 이상한 놈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작년에 어떤 2학년 커플은 이곳에서 몰래 섹스하다 걸려 퇴학을 당한 적도 있었다.
어떤 놈이 올 줄 알고 저렇게 누워 있어? ……저 새끼 일부러 저러나?
“아, 진짜 게임 못 해 먹겠네. 저기요, 선생님. 선생님? 제 말 들리십니까? 거기 계세요? 야, 이 새끼 진짜 정신 나갔나 봐.”
누군가 로건의 눈앞에서 딱딱 손가락을 튕기며 욕을 했다. 그제야 겨우 다시 포커판 위로 시선을 돌린 로건이 억지로 게임에 집중했다.
아니,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로건은 연신 콜만 외치다 허무하게 돈을 잃으면서도 별달리 화도 나지 않았다. 게임의 승패보다는 다른 쪽에 완전히 신경이 쏠린 탓이다.
“야, 이제 너 가 봐야 하지 않냐?”
“……어, 가 봐야지.”
“나도 수업 있어서. 이만 해산하자.”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로건이 반쯤 정신을 빼놓고 있는 사이, 그의 친구들이 하나둘 포커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 억지로 강당을 나와 조금 걷던 로건이 문득 멈춰 섰다.
“……나 뭐 놓고 온 것 같아.”
“뭘?”
“……악보집.”
“음? 네 손에, ……로건? 어디 가?”
로건은 정말 뭐라도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를 붙잡으려던 친구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쟤 손에 들려 있는 게 악보집 아니야?”
* * *
강당은 매우 어두컴컴했다. 창을 가린 적갈색 암막 커튼 틈으로 이따금 새어 들어오는 실낱같은 빛이 그나마 시야에 도움을 주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긴 의자가 양옆으로 늘어선 통로를 빠르게 걷던 로건이 가장 앞자리에서 멈췄다.
“…….”
역시나, 여전히 애쉬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로건은 괜히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진짜 웃긴 새끼네, 이거. 어떤 변태 새끼한테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어?
‘아니지.’
내가 지금 사내 새낄 상대로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심지어 이 녀석은 자신보다 한 뼘 이상 키가 크다. 지금도 저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의자 밖으로 달랑달랑 걸치고 있지 않은가.
로건의 손에 들려 있던 두꺼운 악보집이 툭 떨어졌다.
자신은 지금 절대 그를 염려하는 게 아니다. 그저 못 견디게 거슬리는 것뿐이다.
이 새낀 하필 왜 여기에 처자빠져 있어서 괜히 신경 쓰이게 하는지 모르겠다. 로건이 그를 깨울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
신경질적으로 다가간 손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애쉬의 이마 위 허공에서 멎었다.
……역시 이 새낀 얼굴이 좀, 그렇다.
잘생겼다면 잘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단지 그렇게 표현하기엔 어딘지 묘한 구석이 있다.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흰 이마를 지나, 곧은 콧날과 흠결 하나 없는 뺨을 따라간 시선이 석류알처럼 붉은 입술에 닿았다.
다른 곳은 다 창백하면서 어떻게 입술만 이렇게 붉을 수가 있지……. 이러니 인형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오로지 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에만 쓸모가 있는, 명인이 최고로 예쁘게 깎아 만든 한정판 도자기 인형.
로건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풀어 내린 크라바트를 느슨히 손에 감아쥔 채 잠이 든 애쉬의 셔츠 깃 사이로 흰 목이 보였다. 아주 느리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따라 셔츠가 살짝 벌어지고, 그때마다 빗장뼈가 언뜻 보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긴 목선 위로 톡 튀어나온 목울대는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쯤 로건은 어느새 제 상체가 앞으로 쏠려 있음을 깨달았다. 애쉬가 누워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지탱한 그가 조금 더 상체를 숙였다.
흰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셔츠 단추와 단추 사이의 틈새, 그 안에 살짝 비치는 살은 역시나 얼굴만큼 희다. 로건은 그 틈새를 벌려서 더 보고 싶었다.
어차피 상대는 죽은 듯 자고 있으니 조금 건드려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절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단추 몇 개만 풀고…….
홀린 듯 다가간 손이 셔츠 깃에 닿기 직전, 미동 없이 고요했던 목울대가 울컥 일렁였다. 문득 시선을 올린 로건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휘청 물러났다.
“히익……!”
언제부터인지 애쉬가 빤히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주친 눈이 찰나 기이할 정도로 붉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만큼.
“……정말이지 시끄러워서.”
느리게 상체를 일으키는 애쉬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로건은 조금 전 자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갔음을 인지했다. 애쉬가 눈살을 찌푸리며 두어 개 풀려 있던 셔츠 단추를 태연하게 잠갔다.
“뭐, 뭐야. 왜 사람을 놀라게 해!”
로건이 벌컥 화를 냈다. 조금 전 있었던 일련의 상황들이 너무 창피한 동시에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방금 저 새끼한테 뭘 하려고 한 거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아…….
그야말로 낭패가 따로 없었다.
“적반하장도 좀 정도껏 해야지. 누가 누굴 놀라게 했다는 거야, 이 변태 새끼가.”
“벼, 변태라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로건 카시아르.”
돌연 저를 부르는 음성에, 로건의 움직임이 멎었다. 애쉬가 그런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리 와.”
“……뭐? 네, 네가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야?”
입으로 내뱉는 말과 달리 로건은 그를 향해 홀린 듯 한 발짝 내디뎠다. 애쉬가 한 번 더 손가락을 까딱했다.
“조금 더 가까이.”
“왜, 왜 그러는데…….”
“조금 더.”
“…….”
로건은 어느새 애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눈높이에 맞춰 엉거주춤 무릎을 굽힌 채로. 겨우 한 뼘 정도의 거리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을 맞출 수 있는…….
딱!
“아!”
별안간 눈앞이 번쩍 명멸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몰려온 통증이 이마를 엄습했다. 로건이 반사적으로 이마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딱밤을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머리가 징징 울리는 것만 같았다. 찬물을 끼얹는 듯 냉랭한 목소리가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아아, 아파, 씨발…….”
말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확 맑아지고 시야가 밝게 개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밤길 조심하고. 그렇게 정신 놓고 살다간 악귀한테 쉽게 홀리니까.”
“……악귀?”
다급히 이마를 문지르던 로건이 웬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건이 생각하기에 ‘악귀’라는 말은 흔히 쓰지 않는 단어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들먹이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에서나 쓸 법한 단어다. 아니면 오컬트 문화에 과하게 빠져 있는 주술 동아리의 괴짜들이라든가.
로건이 이마를 긁적이며 쭈뼛쭈뼛 물었다.
“무슨, 뭐, ……악마나 유령 같은 걸 말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질 나쁜 존재일 수도 있지.
모호한 답만을 내놓고 다물린 입에서 더는 그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로건은 어쩐지 그런 뒷말이 들린 것 같았다.
무표정한 애쉬의 붉은 눈이 유독 시선을 잡아챘다.
‘악귀보다 더 질 나쁜 존재’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왜인지 머릿속에 애쉬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웅웅 울렸다.
어떻게든 그 이상한 현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써 눈앞의 현실을 직시한 로건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이마에는 혹이 남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아무튼, 그……, 여,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눈은 뒀다 뭐 해. 자는 사람 실컷 훔쳐본 건 너잖아.”
“내, 내가 언제……!”
저도 모르게 발끈한 로건이 급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놈은 저렇게나 고고하게 앉아서 사람을 깔보는데 혼자 당황하고 열을 내는 건 꼴 사나운 짓이었다.
“너 같은 변태 호모 새끼한테 관심 없거든?”
시종일관 차분하던 얼굴에 아주 살짝 금이 갔다. 눈살을 찌푸린 애쉬가 조용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팔짱을 낀 로건이 애써 태연한 척 헛웃음을 흘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습관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욕을 그대로 다시 반복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네, 네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징그럽게 붙어 다니니까 그런 별명이 생기는 거야. 알아? 한 집안 형제가 같은 학교에서 설치는 것도 꼴사나운데, 웬 게이 새끼들처럼…….”
별안간 뒷골이 싸늘해진 그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너무 지나쳤다. 당혹을 감추느라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 버린 것이다.
애쉬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명백한 모욕을 당했음에도 열을 내긴커녕 도리어 더 차분해진 얼굴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니, 로건은 괜스레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우린 피를 나눈 형제야.”
침묵 끝에 나온 말이 조금 기이했다. 무슨 저런 당연한 말을? 황당해하는 로건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차분한 말이 더 보태어졌다.
“소문처럼 이복형제 따위도 아니고. 완벽하게 같은 피를 나눈 형제지. 위급할 땐 서로에게 수혈을 해 줘도 될 만큼.”
“누, 누가 그걸 몰라?”
애쉬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세우며 물었다.
“그럼 네놈 머릿속이 얼마나 시궁창이기에 멀쩡한 친형제를 두고 그런 망상을 하는 거지?”
“말했잖아. 그건 네놈들이…….”
“네 머릿속이 더러운 걸 왜 우리 형제 탓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방금까지 누워 있는 나를 두고 실컷 변태 호모 짓 한 건 본인일 텐데.”
“뭐, 뭐? 말이면 다인 줄…….”
“시끄럽게 꽥꽥 대지 말고 얌전히 새겨들어.”
꼴사납게 펄펄 뛰는 로건의 말을 차분히 자른 애쉬가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네놈이 평소에 얼마나 역겨운 망상을 하고 살든 알 바 아니지만, 망상은 망상으로 끝내.”
붉은 눈이 로건의 얼굴을 천천히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눈길이 로건의 다리 사이에 꽂혔다.
“이런 식으로 때와 장소 구분 못 하고 설쳐대면 네 인생만 곤란해지는 거야.”
“무, 무, 무슨…….”
이 새끼가 뭔 해괴한 소릴 지껄이는 거야.
애쉬의 눈을 따라 시선을 내린 로건이 제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그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너 뭐야.”
그때 강당 후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거구인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로건은 별다른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곧 로건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의 코앞으로 다가간 리안이 낮게 물었다.
“왜 남의 동생한테 얼쩡거려?”
로건의 귀에서는 자연스럽게 ‘동생’이라는 단어가 ‘피앙세’나 ‘애인’으로 치환되었다. 자신을 보는 리안의 눈빛이 꼭 세상 다시 없을 파렴치한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로건은 너무도 억울했다. 그가 금세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리안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변태 새끼가, 터진 아가리로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나 봐?”
깊게 가라앉은 음성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위에서 찍어 누르듯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이 싸늘함을 넘어서 오싹했다. 까딱하다간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이었다.
정말이지 로건은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누가 보면 내가 애쉬를 추행이라도 한 줄 알겠어. 내가 미쳤다고 저딴 사내새끼를…….
“얼쩡거리긴 누, 누가 얼쩡거려! 그게 아니라 난, 저 새끼가, 아무 데서나 함부로 처자빠져 자고 있으니까…….”
하지만 변명하자니 눈치 없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제 중심부만 더 궁색해질 뿐이었다. 로건은 바닥에 떨어진 제 악보집을 주워 추잡하게 움막을 치고 있는 다리 사이를 엉거주춤 가렸다.
“뭐 하고 있어? 안 꺼지고.”
불거진 오해를 바로잡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뒤에서 얌전히 제 크라바트를 단정하게 매는 데 여념 없던 애쉬가 로건을 향해 무심히 말했다.
리안을 피해 뒤로 주춤 물러나던 로건의 시선이 다시 애쉬에게 향했다.
“……뭐, 뭐라고?”
멍청하게 되묻는 로건을 바라보는 붉은 눈에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등신 같은 짓도 잠깐이어야 재미있는 거지. 적당히 넘어가 줄 때 얼른 꺼져.”
“응, 어, 그래…….”
지은 죄도 없이 비난을 들었음에도, 로건은 화를 내는 대신 그저 홀린 듯 수긍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가 눈을 깜빡이며 현실을 직시하려 애썼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자신은 정말 멍청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고 어지러웠다.
애쉬의 말마따나 뭐에 홀렸는지, 아주 잠깐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내가 여길 왜 다시 온 거지? 저 새낄 보려고……?
내가 왜?
내내 나사 빠진 놈처럼 군 것도 모자라 남자 새끼를 상대로 좆을 세우다니……. 미친 거 아니야?
맹세코, 정말 맹세코 자신은 동성에게 단 일말의 흥미조차 없는 사람이다. 특히 저렇게 재수 없게 생긴 놈한테는 더욱더.
저딴 얼굴은 여자애들이나 좋다고 난리 치겠지. 같은 남자로서 애쉬의 용모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못 견디게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 징글맞은 상판을 보고 있으니 발기했던 아래마저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나한텐 클로에뿐인데, 제기랄…….
점차 기분이 말도 못 하게 더러워졌다. 마치 깨끗한 이불 속인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 보니 시궁창에 몸을 뒹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한 소름이 돋으며 시야가 확 맑아졌다.
이제는 한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로건은 마치 언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불쾌한 악몽에서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가 사라진 문 쪽을 무심히 보던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혀를 찼다.
“……가끔 저런 새끼들이 있다니까.”
미혹을 쓰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서 잘 현혹되는 타입.
단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혹은 그저 멀리서 잠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뜬금없이 사로잡혀 스스로 목에 올가미를 거는 타입.
쾌락에 지나치게 약한 인간들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저런 유형의 인간들이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밤길이나 악귀 따위가 아니었다. 밤에 길을 가다 뱀파이어를 만날 확률보다는 도박에 빠지거나 알코올, 혹은 마약 중독자가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섀넌의 옆에 앉은 윈터가 반쯤 정리하다 만 그의 크라바트를 잘 매어 주며 말했다.
“샤, 당신은 너무 친절해서 탈이에요.”
어깨를 으쓱인 섀넌에게서 가벼운 대꾸가 돌아왔다.
“내가 원래 좀 착하잖아.”
“저는 당신이 조금만 덜 착했으면 좋겠어요.”
윈터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왜 저런 새끼들한테도 상냥하게 대해 줘요? 당신 앞에서 그 더러운 물건을 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가만둘 수 있어요? 그가 투정을 부리듯 섀넌의 허리를 꽉 안았다.
“단지 운 나쁘게 걸려든 인간일 뿐이야.”
단내를 풍기는 케이크 조각에 개미 한 마리가 꼬였다 한들, 그 개미를 굳이 증오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눌러 죽이거나, 가만히 지나가게 놔둘 뿐.
“걸려든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무방비한 사람을 추행한 건 저 새끼의 자유의지잖아요. 그것도 단지 운이 나빴다고 넘길 일이에요?”
연인의 마땅한 논리에 섀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 머저리는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그렇게 하게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행여라도 제게 손을 댔다면 저렇게 두 발로 멀쩡히 강당을 걸어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기실 제 연인은 지금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불필요한 분노를 소모하고 있는 셈이다.
섀넌은 그러한 점을 지적하는 대신 그를 달래는 쪽을 선택했다.
“여긴 학교잖아, 윈터. 시골 산중이 아니라. 알고 있지?”
“몰라요…….”
커다란 몸을 구부린 윈터가 그의 품에 안겼다. 섀넌은 귀엽게 칭얼거리는 연인의 등을 짐짓 인자하게 다독였다.
“같이 수업 듣는 친구한테 그러면 돼, 안 돼.”
“저런 새끼랑 친구 한 적 없는데요?”
허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섀넌이 짧게 웃으며 윈터의 뺨을 감쌌다.
“그럼 어떻게 해 줄까.”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듬는 듯한 눈길로, 섀넌이 달콤한 밀어처럼 속삭였다.
“당장 쫓아가서 저 새낄 죽일까.”
잘게 토막 내서 네 먹이로 던져 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
“…….”
섀넌은 자신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당장 그 말을 실행할 것이다. 코끝을 맞댄 채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윈터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섀넌의 말대로 이곳은 대도시다. 누구 하나가 갑자기 죽어 나가면, 그것도 명문대를 다니는 부호의 영식이 죽어 나가면 그만큼 긴 소란이 뒤따를 거라는 뜻이다.
아무리 유치한 질투심에 눈이 멀었어도, 앞뒤 생각 없이 그저 떼만 쓰는 연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역시 내 윈터는 참 착해. 이해심이 많기도 하지.”
섀넌이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약간의 투정이 담긴 입맞춤이 섀넌에게 떨어졌다.
“대신 앞으로 수업 빠지지 마세요.”
섀넌이 짐짓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탓도 아닌데 그건 너무하잖아, 윈터.”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요?”
“지루한 수업을 견디는 게 싫은 것뿐이야.”
“가둬 두고 싶은 걸 참는 중인데 이 정도 부탁은 좀 들어주셔도 되잖아요.”
어쩔 도리 없이, 섀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배은망덕하고 깜찍한 말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날 가두려면 너도 같이 갇혀 있어야 할걸.”
“어쩔 수 없죠. 자퇴하는 수밖에…….”
굵은 팔이 섀넌의 몸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옥죄었다. 섀넌은 본격적인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한 연인이 귀여워서 또다시 할 말을 놓쳐 버렸다.
그때, 낮게 끄는 목소리가 귓가를 지분거렸다.
“……하고 싶으시다면서요? 대기실에서.”
고개를 조금 뒤로 빼고 그를 보는 섀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줍게 웃은 윈터가 어린 동생을 달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럼 같이 수업 듣는 것 정도는 감내해야지, 애쉬. 내 학위는 너한테 달려 있는데.”
“…….”
괘씸한 연인의 도발에,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그의 머리채를 살짝 움켰다.
“영악하기는.”
정말이지 여우가 따로 없는 행동이었다.
* * *
“섀넌 님!”
한껏 들뜬 목소리가 이제 막 저택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했다.
남부로 긴 휴가를 떠났던 러셀의 갑작스러운 귀환이었다. 그를 발견한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새 햇볕에 조금 그을린 러셀은 온몸으로 휴양지에서 팔자 좋게 뒹굴다 온 티를 내고 있었다.
‘시일 내로 돌아오겠다고 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나타나.’
섀넌이 혀를 찼다. 3년 만에 돌아온 제 노예 놈은 이제 눈치를 보는 기색도 없이 아주 당당하시다.
“놀다 온 놈이 뭘 자랑이라고 그렇게 떳떳하게 서 있는 거야. 왔으면 청소부터 하지 않고.”
“허……, 나 참. 할 말이 그거밖에 없으십니까? 적어도 잘 지냈느냐는 안부 정도는…….”
“안부 같은 소리 하네.”
섀넌이 그의 살가운 인사를 차갑게 거절했다.
모셔야 하는 주인이 둘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윈터가 제 역할을 대신해 주리라 여겼던 걸까. 언젠가부터 러셀은 거리낄 것 없이 툭하면 휴가를 떠나고 말도 없이 기한을 훌쩍 넘겨서 돌아오곤 했다.
물론 섀넌 또한 그런 러셀의 일탈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윈터와의 오붓한 시간을 종종 러셀이 방해할 때가 있었으므로.
“딱 봐도 내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잘 놀고 온 티가 나는데 그런 걸 꼭 물어야 하나?”
러셀이 서운함으로 발끈하기 직전, 윈터가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러셀. 잘 지냈죠?”
입을 삐죽이며 섀넌을 흘기던 러셀이 그제야 윈터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없었어요.”
“다행이네요……. 저, 그리고, 음. 두 분께…….”
하등 관심 없는 태도로 그를 지나쳐 가려던 섀넌의 앞을 잽싸게 가로막은 러셀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섀넌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었다.
“저, 그게…….”
“어디서 또 무슨 사고를 친 건지는 몰라도 알아서 해. 난 해결 안 해 줄 거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툭하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놈인 줄 알겠습니다? 참나……, 몇 년 만에 만난 건데 정말 사람 서운하게.”
“그럼 비켜.”
“잠깐만요.”
러셀이 한 번 더 섀넌을 막아섰다. 섀넌이 한계에 달한 인내심을 꾹꾹 누르며 그를 바라봤다.
“저, 그게 말입니다. 두 분께 소개해 드리고픈 사람이 있는데요…….”
그 순간 제일 먼저, 섀넌의 시선이 응접실의 열린 문틈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그 문으로 누군가가 스윽 걸어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윈터와 섀넌의 표정이 비슷하게 일변했다.
“마리아예요.”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한 여자의 옆으로 러셀이 재빨리 붙어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 섀넌 님, 그러니까, 저희가 작년에…….”
“약혼한 사이라서요.”
마리아가 그의 뒷말을 성급히 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던 섀넌의 미간이 펴졌다.
“…….”
그래, 그러니까 어쨌든 이건 사고가 맞았다.
수백 년을 산 뱀파이어조차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정말이지 급작스러운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 * *
마리아 카스티요.
그녀는 동글동글하고 순한 인상의 앳된 여인이었다.
소파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찻잔을 쥔 채로, 섀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기이한 표정을 하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니까, 둘이 남부 해변에서 처음 만났다고.”
“네, 맞아요.”
마리아가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마다 섀넌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러셀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허허 웃으며 분주히 말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라 잠깐의 인연으로 끝날 줄 알았죠. 이렇게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실 마리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단순한 우연은 아닌…….”
섀넌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귀에 인이 박이도록 실컷 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떠들어도 돼, 러셀.”
‘우연이 세 번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하던가요?’로 시작하는 러셀의 연애 이야기는 이미 장장 한 시간의 긴 여정을 거치고 마무리된 참이었다.
섀넌은 한쪽 귀를 쑤시고 들어온 그의 연애사를 다른 쪽 귀로 줄줄 흘려보내며 시간을 죽였다. 기실 그들이 무슨 연애를 얼마나 알콩달콩 치열하게 즐겼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약혼을 했다는 거다.
섀넌이 말없이 러셀을 빤히 응시했다. 옆에 있는 마리아조차 그 시선에 조금 당혹스러워할 때쯤, 윈터가 섀넌의 손을 잡아 살짝 흔들며 주의를 환기했다.
마치 밀랍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러셀에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이 그제야 옆으로 스르륵 움직여 마리아에게 향했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은 섀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카스티요 씨. 내가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마리아가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일곱이요.”
파스락, 이제 막 테이블에 내려진 찻잔이 섀넌의 손아귀에 부서졌다. 균열이 간 도자기 틈으로 불그스름한 홍차가 줄줄 샜다. 마리아가 조금 놀란 듯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윈터가 말없이 그의 손에서 찻잔을 빼내고 손바닥을 살폈다. 살에 박힌 예리한 조각을 부지런히 털어낸 뒤, 흠집난 살갗이 다시 아무는 걸 확인한 윈터가 쏟아진 홍차를 치웠다.
“……러셀, 잠깐 나 좀 볼까.”
“예? 아, 예…….”
마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섀넌이 러셀을 향해 일어나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엉거주춤 일어난 러셀이 말없이 응접실을 나가는 섀넌을 뒤따랐다.
졸지에 윈터와 둘만 남겨진 마리아가 멀뚱멀뚱 그를 바라봤다.
“…….”
윈터가 조용히 깨진 찻잔을 정리하던 그때, 별안간 밖에서 뭔가가 콰당탕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놀란 마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윈터가 몸을 일으키자, 마리아가 황급히 물었다.
“밖에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요?”
“아뇨, 별일 아니니 그대로 계세요. 곧 돌아올게요.”
마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는 거구의 남자를 망연히 눈으로 좇았다. 방금 터져 나온 소음으로만 따지면 별일 정도가 아니라 뭔가 큰 사고라도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를 쫓아가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 저택에서는 절대 함부로 허락 없이 움직여선 안 된다고 러셀이 사전에 경고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마리아가 알 수 있었던 러셀의 비밀이었다.
* * *
“이 쓰레기 새끼가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윈터는 순식간에 폐허가 된 주방으로 성큼 달려들어 섀넌을 끌어안았다.
“샤, 진정해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새끼가 스물일곱 살짜리 애를 꼬셔서 홀라당 약혼까지 해 버렸다잖아.”
찬장에 있던 찻잎 통이 죄 머리 위로 쏟아졌는지, 러셀의 정수리에는 마른 찻잎이 수북했다.
“당장 밖에 나가 그 어떤 노인을 붙잡아도 저 새끼보다 어리다고! 그런데, 뭐? 스물일곱? 저, 저 쓰레기 새끼가…….”
“저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젊은 줄 알고 만났겠습니까? 아니 그리고, 좀 만나면 또 어떻습니까?”
“뭐가 어째?”
“제가 이래 봬도 밖에 나가면 다들 창창한 30대인 줄 안다고요! 저라고 뭐 무덤에서 파낸 백골하고만 연애해야 합니까?”
섀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평생 연애라고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고자인 줄 알았던 놈이 갑자기 저런 개소리를 해 대니 기가 막혔다. 하도 어이가 없어 꽉 막힌 말문을 억지로 연 그가 욕설을 쏟아 냈다.
“그 백골도 너보다는 어려, 이 파렴치한 새끼야! 멍청하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네가 어떻게 그 나이에 감히 앞날 창창한 20대 여자를 건드려.”
“양심이요……?”
허, 하고 헛숨을 내뱉은 러셀이 어이없다는 듯 윈터와 섀넌을 번갈아 가리켰다.
“누가 누굴 보고 양심을 운운하시는 겁니까? 막말로, 제가 파렴치한이면 섀넌 님은 저보다 더한……, 악!”
섀넌이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물건을 러셀에게 마구 집어 던졌다. 윈터가 그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샤, 화내지 마세요. 일단 좀, 진정하세요……!”
옴짝달싹 못 하게 그의 품에 갇힌 섀넌이 이제는 숫제 허공에 발길질하며 심한 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 배은망덕한 놈. 살려 두는 대신 저 더러운 아랫도리를 제일 먼저 거세해 버렸어야 했는데, 이제껏 자비를 베풀어 멋대로 휘두르든 말든 내버려 뒀더니 결국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 인생을 망쳐 놔……! 저, 저, 썩어 문드러진 시체보다 못한 새끼가!
러셀이 그의 발길질을 피해 벽면으로 바짝 붙어섰다.
“그, 그러는 섀넌 님이야말로 양심 좀 있어 보시라고요!”
“내가 저딴 변태 새끼를 이제껏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씨발…….”
윈터가 그를 더 꽉 끌어안으며 어떻게든 러셀에게서 떼어놨다. 섀넌이 이렇게까지 크게 화를 내는 건 아주 예전에 자신이 시라트로 떠날 때 이후로 처음 보았다.
그 맞은편에 있던 러셀 또한, 섀넌이 이토록 기운 좋게 펄펄 날뛰는 모습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윈터가 눈도 못 뜬 털 뭉치였던 시절 카펫 위에 실수했던 날 이래로 저렇게까지 노발대발하신 적은 없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 대던 러셀은 돌연 말이 없어졌다.
……만약 여기에서 그를 더 화나게 할 일이 보태어진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 윈터 님……, 섀넌 님을 좀 더 꽉 붙잡아 주시겠어요?”
윈터가 의아한 눈으로 러셀을 바라봤다.
왜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세요. 지금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러셀……. 그의 눈이 그렇게 간청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 섀넌의 시종 노릇을 해 온 러셀은 이왕 맞을 매라면 한 번에 몰아 맞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섀, 섀넌 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마리아랑 결혼할 겁니다. 해야만 한다고요!”
섀넌을 안고 있던 윈터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러셀을 극구 말렸다. 그러나 한 번 열린 그의 주둥이는 멈출 줄을 몰랐다.
“왜냐면 마리아가, ……마리아가 제 아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
눈을 질끈 감은 러셀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예상했던 욕설이나 물건 같은 것은 날아오지 않았다. 돌연 내려앉은 적막에, 그가 슬쩍 눈을 떴다.
고요한 섀넌의 얼굴은 놀랍도록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 *
“섀넌.”
명상하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섀넌의 정수리 위에 얼음주머니를 얹어 준 윈터가 그의 옆에 앉았다. 머리에 얼음을 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불쑥 중얼거렸다.
“어쩐지 심장이 두 개더라니…….”
마리아와 한 공간에 있을 때부터, 섀넌은 그녀의 배 속에 존재하는 미약한 박동을 감지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나이는 영원히 20대에 멈췄지만 몸속은 온갖 골병이 들어 있는 제 노예 새끼가 아직 ‘그 기능’을 할 수 있을 줄은…….
먹은 것도 없건만 속이 좋지 않다. 섀넌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작게 몸서리쳤다.
종종 러셀이 누군가와 눈이라도 맞아 가정을 이뤘으면 하는 생각은 했었다. 대대손손 이어지는 그의 혈육을 노예 삼고, 그 지긋지긋한 얼굴은 그만 봤으면 싶었다.
그러나 기준이 높은 자신의 심미안에는 고사하고 인간들의 미적 기준에도 한참 못 미칠 것 같은 그 못난 껍데기를 생각하면 영 글러 먹은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게 현실이 되다니.
마리아 카스티요라는 여자는 섀넌이 지금껏 본 그 어떤 인간보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녀는 러셀을 일컬어 ‘몸에 골병이 들고 귀가 좀 어둡고 한쪽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단점을 빼면 나머진 모두 완벽한 남자’라고 했다.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별안간 맞닥뜨린 러셀의 연애 실상이 역겨운 것과는 별개로, 기실 섀넌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기는 건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일상에 변화가 생겨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일단 아이가 생겼다고 하니 이 집에선 내보내야겠지.’
내 집에서 애새끼 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신선한 피가 흐르는 낯선 인간을 둘씩이나 집에 들이고 싶지도 않고.
같은 이유로, 러셀의 빈자리를 대신할 다른 고용인을 부르는 것도 싫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제 정체를 숨기고 가내 시종들을 고용하는 것 같지만, 오랜 세월 러셀 하나만 부려 먹는 게 익숙해진 섀넌으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다. 그 변태 새낀 갑자기 왜 그딴 징그러운 사고를 쳐서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섀넌,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윈터가 섀넌의 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제 쪽으로 돌렸다. 섀넌의 정수리에 얹어져 있던 얼음주머니가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윈터가 얼음을 다시 집어 섀넌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 위의 얼음팩을 팽개쳤다.
“빌어먹을 얼음 좀 치워. 차가우니까.”
불과 십 분 전엔 열이 뻗쳐서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얼음이라도 가져오라고 재촉해 놓고는, 이제 필요 없다고 쳐내는 섀넌의 히스테리를 윈터는 가만히 받아 주었다.
“이리 와요.”
그가 섀넌을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잠시 짜증을 내며 버티던 섀넌이 이내 그의 가슴팍에 툭 고개를 기댔다.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주면 러셀이 출퇴근하겠대요. 전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섀넌.”
“……당연히 그래야지. 제깟 게 그럼 계속 놀기만 할 것도 아니고.”
섀넌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좀처럼 심란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일상에 생긴 예기치 못한 변수 탓이리라.
“아니면 이 뒤에 있는 별채를 내어줄까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한껏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고개를 들었다.
“별채는 안 돼. 애새끼 우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아? 그 조막만 한 핏덩이가 목청은 왜 그리 좋은지…….”
애 울음소리는 윈터를 키우며 겪은 걸로도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윈터였기 때문에 견딘 거지, 이제 와서 또 남의 애새끼 우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근처에 매매를 내놓은 집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할게요.”
쯧, 섀넌이 혀를 차며 다시 윈터의 품에 기댔다.
“……그 새낀 왜 갑자기 이딴 사고를 쳐서는, 성가신 일을 만들어.”
머리 위에서 윈터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마 위로 짧게 내려앉은 입맞춤과 함께 어이없는 혼잣말이 떨어졌다.
“귀여워.”
고개를 든 섀넌이 눈썹을 비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귀엽다는 거야.”
“심술부리고 짜증 내는 거요.”
윈터의 대답에 섀넌이 여전히 신경질적인 얼굴로 짧게 코웃음 쳤다.
“그런 건 얼마든지, 더 본격적으로 해 줄 수 있어, 윈터.”
그가 윈터의 턱을 거칠게 쥐었다.
“그땐 네 입에서 감히 귀엽다는 말 같은 건 나오지도 못할걸.”
눈을 내리깐 윈터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더 해 주세요…….”
섀넌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너른 등을 잔뜩 구부린 윈터가 그의 품에 안기며 졸랐다.
“더 심술부려 주세요, 섀넌. 보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화내니까……, 귀여운데 너무 멋있고, 너무 멋있는데 귀엽고, 사랑스럽고 섹시해요. 사실 아까 조금 설 뻔했어요. 당신이 러셀한테 막 화내고 난리 칠 때, 나한테도 그렇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쉴새 없이 종알거리는 그의 헛소리를 듣던 섀넌이 결국 희미한 웃음을 터뜨렸다. 냉랭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미약한 온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윈터가 그 위로 천천히 입을 맞췄다. 차가운 살갗에 제 체온이 옮아 미지근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정성을 들인 입맞춤이 이어졌다.
눈을 감은 섀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와 눈꺼풀, 관자놀이와 뺨, 콧날과 입가에 지그시 눌리는 입술이 따뜻했다. 그 온기를 좇아 따라간 입술이 윈터의 입술을 덮었다.
그의 체온이 와 닿을 때마다 심란했던 기분이 서서히 날아가는 듯했다. 얽히는 혀 틈새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말캉한 살갗을 베어 물고 그 체취를 들이켜던 섀넌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입술을 떼고 윈터와 시선을 맞춘 섀넌이 습관처럼 그의 이마와 눈가, 콧날과 뺨을 제멋대로 더듬으며 물었다.
“……너도 내가 양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해?”
“네?”
놓쳐 버린 입술을 다시 겹치려던 윈터가 멍하게 되물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까 러셀이 했던 말 때문에 그래요?”
“…….”
섀넌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꽁하게 구겨진 미간 위로 입을 맞춘 윈터가 그를 소파에 눕혔다.
“전혀요, 섀넌.”
목덜미를 더듬던 손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콧날을 비스듬히 맞대고 느릿하게 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윈터가 낮게 속삭였다.
“전 당신이 더 파렴치했으면 좋겠어요.”
“이미 충분히 그러고 있어.”
섀넌이 윈터의 바지 버클을 풀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내가 양심 없는 파렴치한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다 너 때문이야, 윈터.”
장골근이 갈라진 결을 따라 내려간 손이 반쯤 발기한 윈터의 성기를 쥐었다.
“네가 내 양심을 다 가져가서 그래.”
섀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윈터가 짧게 웃었다.
“맞아요. 아마 러셀의 양심도 마리아가 다 가져가 버렸는지도 모르죠.”
“……그 새끼는.”
섀넌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습관처럼 윈터의 성기를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그 새끼는 골병이 들었잖아. 양심이 있으면 그 나이에, 그 못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어떻게 그런 젊은 여자앨 건드려.”
“맞아요.”
목덜미 위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하아……, 낮게 한숨을 흘린 윈터가 조금 전까지 손끝으로 굴리던 유두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섀넌…….”
그래, 내 말이 맞지. 그 새끼가 나보다 백 배 파렴치한 놈이고 쓰레기 새끼인 거지……. 홀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윈터의 머리칼을 헤집던 섀넌이 문득 눈을 떴다.
……어쩐지 뭔가 못마땅했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윈터의 말투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걸로 억지를 부리는 아기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좁힌 섀넌이 제 가슴팍에 들러붙어 물고 빨기에 여념이 없는 윈터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이제 막 제 바지춤을 풀어 내리는 손목을 잡아 제지한 섀넌이 순식간에 몸을 뒤집으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샤……?”
양 손목이 머리 위로 짓눌린 윈터가 놀란 눈으로 섀넌을 올려다봤다.
“맞긴 뭐가 맞아.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든 다 맞다고만 하면 그만이야? 그렇게 무조건 장단 맞춰 준다고 내 기분이 풀릴 줄 알아?”
“……네?”
영문도 모르고 혼난 윈터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제 유두를 물고 빠느라 마찰로 붉어진 입술이 얄미워서, 섀넌이 혀를 찼다. 한없이 유순한 눈을 하고 있지만 이 얼굴은 정말이지 요사스럽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
섀넌이 그의 손을 놓으며 불퉁하게 말했다.
“섹스할 기분 아니야. 사냥 나갈 거야.”
“네? ……지금요?”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윈터가 상체를 살짝 세웠다. 벌어진 바지춤 사이로 흉흉하게 드러난 성기가 벌써 눈물을 질질 흘리며 애처롭게 곤두서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또 내 탓 하는 거야? 쳐다만 봐도 아무 데서나 잘만 세우는 주제에.”
섀넌이 차갑게 그에게서 몸을 떼며 흐트러진 바지춤을 정리하고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조금 멍한 얼굴로 그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을 지켜보던 윈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양심 없어.”
옆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말에, 섀넌이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한껏 뾰로통해진 연인이 거기에 있었다.
“이건 정말 양심 없는 짓이에요, 섀넌.”
“나 원래 양심 없는 놈이야, 윈터. 그걸 이제 알았어?”
“파렴치한.”
“그거 정말 안 됐네. 네 애인은 네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파렴치한 사람이거든.”
이제 막 셔츠 단추를 다 잠그고 몸을 일으키려는 섀넌의 팔을 잡아 다시 앉힌 윈터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꼭 지금 가야 해요……?”
“마지막으로 사냥 나간 게 언제인지 알기나 해? 허기는 채워야 할 거 아니야.”
“나로 채우면 안 돼요?”
네? 섀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사냥은 다음 주에 가기로 했잖아요…….
세상 다시 없을 배신을 당한 것처럼 처연한 표정으로 애원하는 얼굴을 보자니 정말 기가 찼다. 섀넌이 그의 머리칼을 꽉 움키며 짐짓 화난 투로 말했다.
“굶주려서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애인을 상대로 그렇게 좆을 쑤셔 박고 싶어? 파렴치한 같으니.”
열심히 칭얼거리며 애원하던 윈터가 순간 말을 멈추고 아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데 그렇게 억울해할 일인가?”
섀넌의 허리를 꽉 감고 있던 팔이 결국 힘을 풀었다.
“진짜 너무해요.”
몸을 일으킨 섀넌이 그의 턱밑을 살살 긁으며 놀리듯 말했다.
“너무한 건 너지. 이런 말을 듣고도 계속 세우고 있잖아.”
“당신이 만져 놓고 무슨…….”
별안간 윈터의 머리칼이 바람에 휙 나부꼈다. 그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서재엔 허공에 폴폴 날리는 종이 몇 장만이 섀넌의 부재를 알려 주고 있었다.
“……아, 진짜.”
매번 이런 식이다. 제 연인은 왜 꼭 중요한 순간에 늘 이런 식으로 내빼는지 모를 일이다.
휑하게 열린 창문을 허탈하게 보던 그가 인상을 쓰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작게 혀를 찬 입안에서 신경질적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눈앞에서 멋대로 사라지지 말라니까.”
윈터는 곧장 섀넌을 쫓아가는 대신 그저 천천히 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그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감히 섀넌의 잔상조차 좇지 못하고 바보같이 홀로 남겨져야 했겠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으므로.
* * *
모처럼의 사냥이었다. 그러나 섀넌은 기실 그리 허기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심란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산책에 가까웠다. 물론 그 김에 윈터를 더 자극해 오늘 밤 침대 위에서 재미도 좀 보고…….
그러나 변두리의 산중 깊은 곳에서 인간 하나를 좇던 섀넌은 도리어 자신이 쫓기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금방이라도 윈터가 제 발치를 낚아챌 듯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약 올렸나?
굵은 나무 둥치를 가볍게 도약하며, 섀넌은 생각했다. 빠르게 휙 지나가는 시야에 더는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윈터를 피해 재빨리 방향을 바꾸는 게 고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는 사냥이 아니게 되었다. 아니, 어디까지나 섀넌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역으로 사냥을 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청회색 홍채가 둘러싼 붉은 동공이 활짝 벌어졌다. 우중충한 새벽하늘을 담은 눈에 새빨간 색욕이 번지며 보랏빛 잔상을 남겼다.
“아……!”
젖은 흙을 잘못 밟고 미끄러진 섀넌이 아주 찰나 주춤하는 그 순간, 결국 그는 윈터에게 덜미를 잡혀 버렸다.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등을 감싼 온기가 오싹할 정도로 뜨거웠다. 목덜미로 쏟아지는 숨결은 흰 입김이 되어 섀넌의 시야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거 싫다고 분명 몇 번이나 말했는데?”
본능적으로 치솟은 오싹한 위기감이 익숙한 연인의 목소리에 금세 누그러졌다. 섀넌이 태연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금방 잡을 거잖아.”
낮게 가라앉은 윈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싫어요.”
그 목소리가 종국에는 거의 으르렁거리듯 사나워졌다. 평소와 달리 다소 거칠어진 음성을 들으며, 섀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윈터가 제 앞에서 아무리 꼬리를 말고 있어도, 어쨌든 늑대는 늑대였다. 눈앞에서 도망치는 사냥감은 어떻게든 추격하고야 마는 본능을 지녔다는 뜻이다.
섀넌은 혹시 윈터가 방금 자신을 ‘사냥감’으로 여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예전에 딱 한 번, 오랫동안 굶주린 윈터가 늑대의 모습으로 다른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지켜본 적 있는 섀넌은 그의 사냥 방식이 꽤 짓궂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상대를 단번에 제압하지 않는다. 일부러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좁히길 반복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냥감을 몰아넣는다. 공포에 질린 사냥감이 더는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놓일 때까지.
그건 윈터 나름의 유희였고 섀넌은 그의 사냥 방식을 존중했지만,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몸을 돌린 섀넌이 윈터와 눈을 마주했다. 분노인지 성욕인지 모를 흥분으로 젖은 눈이 아까보다 조금 더 붉게 곤두선 안광을 내고 있었다.
“혼자 두고 가지 좀 말아요…….”
그러나 그 표정만은 유순하기 그지없어서, 조금 안심한 섀넌이 살짝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 따라올 걸 알았으니까 사라진 거야. 네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는 절대 이런 짓 안 해.”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섀넌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윈터가 투정을 부리듯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윈터. 송곳니 집어넣어야지.”
“아프라고 깨문 거 맞아요.”
섀넌이 짧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런 귀여운 심술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 요량이 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그르렁거리는 숨결이 입안으로 훅 끼쳤다. 몇 발짝 밀린 몸이 등 뒤의 고목에 부딪혔다. 입술 안쪽이 파이도록 깨물린 섀넌이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플 정도로 빨리는 혀끝에 피 특유의 비릿한 쇠 냄새가 감돌았다.
“읍, 윈터, 그만, 아프, 읏…….”
옴짝달싹 못 하도록 몸이 짓눌렸다. 딱딱한 나무와 윈터 사이에 낀 섀넌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약하게 두드리며 밀어냈으나, 돌덩이 같은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읍……, 하아…….”
겨우 고개를 뒤틀어 입술만 놓여난 섀넌이 문득 마주친 눈을 보고 멈칫했다.
“왜요?”
윈터의 눈은 이제 완전히 동공이 열려 붉은빛이 형형했다. 윗입술 아래로 살짝 비어져 나온 송곳니 끝과 입술 안쪽이 섀넌의 피로 젖어 있었다. 혀를 내어 스스로 입술을 느릿하게 핥은 윈터가 섀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요, 섀넌?”
표면이 거친 목소리가 코앞에서 낮게 물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섀넌이 침착하게 말했다.
“……숲에서 하는 건 싫다고 했잖아.”
“한 번은 봐줘야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기울인 윈터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투둑, 툭, 단추가 뜯겨 나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 지금 죽을 것 같아요. 낮부터 계속 서 있던 게 가라앉질 않아……, 터질 것 같아.”
퍽 애처롭게 들리던 애원이 뒤로 갈수록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당신은 날 두고 도망이나 가잖아요.”
섀넌은 낭패한 기분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인 윈터의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그의 손끝이 아직 말랑한 유두 위를 더듬었다.
“옷은……, 하아, 옷은 찢으면 안 돼, 윈터. 집에 돌아갈 때를 생각해.”
“노력해 볼게요.”
그 대답이 무색하게도, 어깨 아래로 급하게 끌어내려 진 셔츠의 소매 봉제선이 결국 조금 찢어졌다. 가을이라 바람이 그리 찬 건 아니었지만, 체온이 낮은 섀넌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드러난 살갗에 약한 소름이 일었다. 추위로 솜털이 곤두선 어깨를 커다란 손이 쓸어내렸다. 조급한 손길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섀넌이 스스로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이것마저 찢어지면 정말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 난처해질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지켜야 돼, 이건 온전히 벗어야…….
그러나 섀넌의 소망은 윈터의 손에 종잇장처럼 날아가 버렸다. 제대로 벗기도 전에 제 다리를 휑하게 떠나가 낙엽 깔린 바닥으로 떨어진 바지를 망연히 보던 섀넌이 제 턱을 쥔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 잠깐…….”
그가 무슨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사나운 숨결이 입술을 뒤덮었다. 섀넌은 더는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윈터의 체온에 갇혀 얌전히 안겨 있는 게 고작이었다.
도망을……, 괜히 가서는.
자신들의 관계에 우위를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섀넌은 평소 윈터가 늘 스스로 목줄을 걸고 얌전히 순종하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가끔,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정말이지 어떤 계기도 전조도 없는 일이라 그와 몇십 년을 함께한 지금까지도 섀넌은 그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어떤 날엔 이보다 더한 도발로 며칠을 애태워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그가, 어떤 날엔 아주 작은 건드림만으로도 훌쩍 선을 넘어오는 것이다.
그게 하필이면 지금일 게 뭐람.
섀넌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저 귀엽게 토라진 모습을 보고 싶어서 조금 장난을 친 것뿐인데 그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윈터는 바짝 약이 오르다 못해 약간 맛이 간 상태고, 자신은 기대했던 침대 위가 아닌 야외에서 졸지에 찢어진 셔츠 한 장만 겨우 지킨 채 헐벗게 되어 버렸으니 통탄할 일이다.
“윈터, 추워. 일단 잠깐…….”
“곧 따뜻해질 거예요.”
섀넌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귓가에 속삭여진 말과 함께 몸이 거칠게 돌려졌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짓누르는 손에 어쩔 도리 없이 허리를 숙인 섀넌이 둔부를 잡아 벌리는 손길에 놀라 몸을 뒤틀었다.
“윈터, 뭐 하는……, 이렇게는 싫어, 잠깐, 일단 진정, ……아!”
그를 만류하던 말은 결국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굵은 성기가 예고도 없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윤활유도 전희도 없이 메마른 틈새를 억지로 꾸역꾸역 벌리고 들어오는 압박감에, 섀넌은 더 이상 그 어떤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까치발을 하고 땅을 겨우 디딘 다리가 달달 떨렸다. 뒤로 뻗어진 손이 윈터의 몸을 밀어내려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윈터가 마저 허리를 밀어붙였다.
“아, 아아……! 아흑…….”
고통에 움츠러든 섀넌의 손끝이 윈터의 팔을 긁었다. 핏줄과 근육이 곤두선 팔에 붉은 생채기가 그어졌다가 찰나에 사라졌다.
목덜미와 등줄기를 따라 입맞춤이 떨어졌다. 따뜻한 손길이 어깨 아래로 내려간 셔츠를 끌어 올려 주는 듯하더니, 아예 엉덩이가 다 드러나도록 말아 올렸다.
“……찢어졌네.”
등 뒤에서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제 몸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걸 그렇게 무식하게 쑤셔 넣는데 그럼 안 찢어질……, 아흑……! 윈터, 잠깐, 하, 윽…….”
“잘 아물고 있어요, 섀넌. 괜찮아요…….”
쉬……, 이제 그렇게 아프진 않죠? 달래는 말과 달리 윈터는 멈추지 않고 내벽 안을 더 파고들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디던 섀넌이 결국 체념하며 삽입이 수월하도록 조금 더 허리를 낮췄다. 꼴사납게 저항해 봐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섀넌은 자신이 상당히 너그러운 연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대신 제 연인의 유희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윈터가 이렇게 눈이 돌아가는 일은 정말 흔치 않으므로, 순순히 내어주고 다음에 몇 배로 갈취하면 되는 거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감히 이런 발칙한 짓을…….
섀넌이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헐떡일 때, 커다란 손이 그의 둔부를 달래듯 토닥였다.
“긴장 조금만 풀어 봐요, 응? 어떻게 하는지 알잖아요.”
“밖에서 그게 쉬울 것 같아?”
섀넌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런 급습은 침대 위에서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밖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숲에서 꼴사납게 알몸을 드러낸 건 오래전 윈터와 북부의 겨울 숲에서 몸을 섞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때처럼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섀넌은 야외에서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여긴 방금까지 자신들이 사냥을 하던 곳이다. 그 말인즉, 언제든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목이란 거다.
사방이 다 뚫린 숲에서……, 그것도 조금 전까지 사냥감을 쫓던 곳에서 도리어 사냥감이 된 양 제압당하는 건 정말이지 기껍지 않은 일인데.
“흑…….”
잠시 정체되어 있던 성기가 다시 내벽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섀넌의 허리가 바짝 곤두섰다. 추위로 미약한 소름이 돋은 등으로 온기가 와 닿았다.
그의 등에 제 상체를 바짝 붙인 윈터가 그의 유두를 손끝으로 비틀며 속삭였다.
“여기가 늘 벌어져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죠?”
귓바퀴에 바짝 붙은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을 때 언제든 바로 들어갈 수 있게요.”
“하으, 읏……, 응…….”
“열흘 정도는 이미 시도해 봤으니까, 이번에는 한 보름 정도로 늘려 볼래요? 보름 밤낮으로 계속 품고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여기가 내 모양을 기억하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아, 흣……, 소리 하지 마……!”
발끈한 섀넌이 짧게 끊기는 신음 사이로 소리쳤다. 일전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구멍을 늘려 놓겠다는 명분으로 이어진 강행군에 결국 실신해 버린 일이었다.
당시 윈터의 물건은 열흘 내내, 단 한 시도 섀넌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섀넌은 그의 것을 품은 채 기절했고, 깨어나서도 계속 그의 것을 품은 채였다.
침대에 누워서도, 벽난로 옆으로 옮겨져서도, 윈터의 허벅지 위에 겨우 상체를 세우고 앉아서도, 욕조에서도, 그 외 계단과 응접실 테이블, 주방 선반 등등 온갖 장소에서도…….
크리켓 경기도 선수들의 컨디션을 고려한 재정비 타임이 있고 하물며 가만히 앉아 관람만 하는 관객에게도 막간 휴식이란 게 있기 마련인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짓이었다.
결국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반나절 정도가 걸렸던가. 과장 좀 보태어 허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다 망가졌다가 다시 회복되었던 걸지도.
어쨌든, 몇 시간 만에 다시 원래대로 다물린 구멍을 지분거리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차던 윈터의 표정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개를 돌린 섀넌이 그를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만약 또 그런 짓을 했다간 내가 널 가만두지 않, 흐읍…….”
무의미한 위협이 습한 입술 안으로 모조리 뭉개졌다.
이런 파렴치한……, 짐승 같은…….
“아, 흑……!”
“하아……, 섀넌…….”
“윈터, 읏, 살살, 아, 흑…….”
어떻게든 깊은 삽입을 막아 보려 밀어내는 손은 고스란히 윈터에게 잡혀 결박되었다. 팔이 뒤로 당겨져 억지로 상체를 세운 섀넌의 몸이 윈터의 품에 안착했다.
목덜미로 젖은 숨이 쏟아졌다. 아래를 강하게 치받히는 동시에 단단한 양팔에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옥죄어졌다. 무자비한 손은 유두를 희롱하고,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흘러 허공에 덜렁이는 성기를 쥐었다.
“흐읏, 아, 윽…….”
뿌리 끝까지 처박힌 성기가 잔뜩 경직되어 좁은 내벽을 쑥 빠져나가고, 다시 콱 틀어박혔다. 내장이 죄 밀려 올라가는 듯한 감각에 어떻게든 충격을 상쇄하려 몸부림치던 섀넌이 길게 흐느꼈다.
“아, 아, 흐읏, 윈, ……조금만, 천천, 히익…….”
제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누르고 비벼대는 성기의 움직임이 정말 파렴치하기 그지없었다. 예열 없이 급격하게 끌려 올라간 자극이 너무 강해서 눈물이 나왔다.
“하윽…….”
느릿하게 점막을 가르고 들어온 성기가 여러 각도로 안을 헤집고 어루만졌다. 옴짝달싹 못 하게 윈터의 품에 갇힌 채 느끼는 곳을 강제로 자극당한 섀넌이 진저리쳤다. 발끝으로 겨우 서 있던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윈터, 거기 하지 마, 너무, 으응……!”
그의 몸이 반동으로 크게 튀어 올랐다. 윈터가 한 번씩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마른 낙엽 위로 흰 정액이 투둑, 툭 떨어졌다. 공중으로 뜬 다리가 겨우 윈터의 발등을 디뎠다가 미끄러지고, 종국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달달 떨렸다.
“하, 으…….”
허리를 감은 팔에 의지해 겨우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결국 중심이 흐트러진 섀넌이 나무를 짚으며 무너져내렸다. 그의 엉덩이에 하체를 붙이고 선 윈터가 그를 따라 자세를 낮추며 안전하게 받쳐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섀넌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윈터의 허벅지 때문에 양옆으로 벌어진 무릎이 흙바닥을 겨우 디뎠다.
“윈터, 이제, 그만…….”
“무슨 말이에요, 섀넌.”
아득하게 흐려진 감각으로 선명한 목소리가 스몄다.
“난 아직 싸지도 못했는데.”
야외라는 불안함과 추위로 몸이 잔뜩 경직되어 있던 탓인지, 한 번 사정을 한 것만으로도 약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섀넌이 다시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한 윈터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그냥, 흣……, 일단, 집에 가서 하면 안 될…….”
그의 턱을 쥐고 고개를 돌리게 한 윈터가 사납게 입을 맞췄다. 말 그대로 잡아먹히는 것 같은 키스였다. 입안을 멋대로 헤집은 혀가 혀를 옭아매고, 입술이 꽉 깨물렸다. 내뱉는 숨이 모조리 그에게 훅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훅 끼쳐 왔다. 호흡마저 통제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무를 짚어 흔들리는 몸을 지탱한 섀넌의 손끝이 희게 샜다. 마른 나무껍질이 그의 손톱에 까득까득 긁혔다.
“흡……, 읏, 으응.”
젖지 않아 뻑뻑했던 내벽이 삽입을 거듭할수록 아주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내벽에 뭉개지는 쿠퍼액이 안을 조금 더 찰기 있게 만들고, 그에 따라 날카로웠던 통증도 점차 가라앉았다.
“하으…….”
이렇게 불결한 곳에서 꼴사납게 느끼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계속 불평하기엔 기분이 너무 좋다. 이제는 능숙하다 못해 제 몸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어린 연인은 아직 혈기가 왕성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몰아 붙여질 때면 섀넌은 속절없이 그의 손에 통제권을 빼앗기고야 만다.
“아아, 섀넌…….”
등 뒤로 쏟아지는 목소리가 유독 상기되어 있었다. 나무를 짚고 있던 섀넌의 팔을 잡아 옴짝달싹 못 하게 끌어안고, 윈터가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흣! 으응…….”
“섀넌, 섀넌…….”
지나치게 낮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목 뒤를 잘근잘근 깨무는 힘이 조금 아플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다리 사이를 흐물흐물하게 녹이는 쾌락에 몰두한 섀넌에겐 그다지 신경 쓰일 거리가 못 되었다.
“당신, 밖에서 할 때 더 잘 느끼는 거 모르죠. 지금 여기 엄청 조여요.”
긴장한 탓이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행여 윈터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매번 밖에서 하는 건 정말 사양이다.
섀넌은 아득해진 눈을 반쯤 내리뜬 채 헐떡이며 생각했다. 아주 많이 양보해서, 이런 야외 섹스는 십 년에 한 번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아아, 흣……, 윈터, 아, 잠깐, 으응!”
다시금 빠르게 끌어 올려진 절정에 섀넌이 몸서리쳤다. 배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집요하게 파고든 성기가 툭, 툭,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섀넌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파정이었다.
목덜미를 꽉 깨문 잇새로 낮게 갈라진 신음이 흩어졌다. 그 소리가 얼핏 낯설게 느껴지는 찰나, 질척하게 젖어 드는 점막을 느리게 짓이기던 성기가 빠르게 팽창했다.
“윈터, 잠깐, 아흑…….”
“왜요……?”
헉, 숨을 들이켠 섀넌의 입이 벌어졌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계속 잠깐이라는 거예요, 섀넌.”
팽팽하게 벌어져 있던 아래가 더, 더, 한계를 모르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섀넌은 조금 전 생각을 다시 후회했다. 밖에서 하는 섹스는 정말이지 엿 같다.
“노팅은, ……노팅은 하지 마. 여기서는 싫어, 안 돼, 윈터…….”
한 번 노팅이 시작되면 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무슨 변수가 생겨도 아래를 접붙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내장이 파열될 각오로 빼내든가.
이러다 운 나쁘게 여길 지나가는 인간에게 이 꼴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물론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섀넌은 감히 자신들의 행위를 목격한 그 인간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갈기갈기 찢어 버릴 예정이지만, 애초에 서로 간에 그런 민망하고 난처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멈춰, 윈터, 정말 화낼 거야, 아, 으, 흑…….”
“제발 그래 주세요. 막 때리고, 욕도 하고……. 아, 방금 엄청 조였어. 화낸 거예요? 너무 귀여워…….”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거칠었다. 섀넌은 아까부터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장을 한계까지 벌리며 부피를 키우는 성기의 압박감을 견디는 게 전부였다.
윈터가 그의 손을 잡아 배에 갖다 댔다.
“잘 느껴 봐요, 섀넌. 노팅 안 해.”
그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배 속을 가득 메운 성기가 빠듯하게 밀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뱃가죽 위로 불거진 성기의 움직임이 손바닥으로 여실히 전해졌다.
“흣……, 아, 아.”
“내가 아무리 짐승 새끼여도, 밖에서 멋대로 그런 위험한 짓을 할 것 같아요?”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는 정말로 이상했다.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거의 그르렁거리는 늑대의 소리에 가까웠다.
제 몸을 꽉 옥죄고 있는 단단한 팔 안에서 겨우 빼낸 손을 뒤로 가져간 섀넌이 윈터의 뺨을 감쌌다. 그는 손으로 잠깐 만져 본 골격의 모양새만으로도 윈터의 상태를 곧장 알아챘다.
“…….”
지금 그는 이 숲에 좀 더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지나가는 인간이 본다면 짐승, 혹은 반수의 괴물이라고 짐작할 만한.
“……윈터, 입 맞추고 싶어.”
고개를 돌린 섀넌의 시야에 익히 예상했던 형상이 들어왔다. 먼 과거에는 흉측하다고 혐오했던,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존재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연인의 얼굴이었다.
“흣, 응…….”
다시 배 속을 파고드는 압박감에 신음하며,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윈터는 이제 아예 말이 없었다. 그저 아주 느리게 섀넌의 안을 드나들며 떨리는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 순간 섀넌은 평소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제 연인은 언제든 제 손바닥 아래에서 아양을 떨 수도, 혹은 제 손을 결박해 멋대로 꺾어 버릴 수도 있는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섀넌의 머리통을 한 번에 움키고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게 벌어진 손의 골격은 마른 나무뿌리처럼 울퉁불퉁한 동시에 짐승처럼 위협적이었다. 섀넌이 그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몸을 내맡겼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옥죄인 채, 저와는 완전히 다른 짐승의 성기에 꿰뚫려 흔들리는 이 순간 섀넌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원래라면 이런 무력감은 굴욕과 수치를 동반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통제할 수 있는 상대가 윈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섀넌은 모든 게 괜찮았다.
그를 이렇게 빚은 게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이 결국 제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섀넌은 오로지 욕정에 눈이 돌아 무자비하게 몸속을 짓치는 연인의 파렴치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 흐읏.”
긴 혀가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날카로운 이빨이 살갗을 꿰뚫었다. 마치 어깨의 살이 통째로 그에게 뜯어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섀넌은 다시 한 번 절정에 달했다.
“하윽……, 하아……, 으읏.”
내장이 다 짓무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허릿짓이 이어졌다. 평소보다 길고 굵어진 음경은 그 형태마저 인간의 것을 한참 벗어나서, 내벽을 긁는 감촉마저 날카롭고 자극적이었다.
“으응……! 아, 흣!”
섀넌이 경련하듯 허리를 떨며 진저리쳤다. 그의 다리 사이로 맑은 물이 줄줄 쏟아졌다. 후욱, 깨물린 통증이 남은 살갗 위로 뜨거운 숨이 끼쳤다.
빈틈없이 맞물린 틈새를 비집고 짙은 정액이 비어져 나왔다. 잇새로 그르렁거리는 신음을 흘린 짐승이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살갗이 세게 부딪히며 폭력적인 마찰음이 울렸다.
사정을 거듭할수록 그는 도리어 여유를 놓친 사람처럼 다급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손안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하얀 팔을 옭아매듯 붙잡고, 그가 긴 숨을 내뱉었다. 조금 전 빨아들인 섀넌의 피 냄새가 섞인, 완연한 짐승의 숨결이었다.
“……안을래.”
그 숨결을 좇아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려던 섀넌이 낮게 속삭였다. 안고 싶어, 윈터.
그 말과 함께 몰아치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둘 사이에 격동하는 건 잇새로 터져 나오는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섀넌의 눈 위로 뭔가가 덮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실크 소재의 크라바트가 섀넌의 시야를 가렸다.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얼굴을 마주 보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마치 그런 섀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윈터가 낮게 말했다.
“조금만요. 지금 말고, ……조금만, 가리고 있어요.”
이제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섀넌은 제 몸을 천천히 돌려 눕히는 팔을 붙잡았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그는 마치 거대한 덩굴이 자신을 휘감고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젖은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찝찝함은 아랑곳없이, 섀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천천히 더듬었다.
평소보다 거친 피부 결을 손끝으로 덧그리듯 어루만지자, 윈터가 그 손목을 잡아 제 얼굴에 갖다 댔다. 그는 마치 적응할 시간을 주듯 섀넌이 제 이목구비를 샅샅이 확인하는 것을 가만 놔두었다.
“……아, 아읏.”
다시 몸이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다리로 윈터의 허리를 옭아매자, 털이 풍성한 꼬리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종아리를 간질였다.
“으응, 하아…….”
섀넌은 제 몸을 드나드는 쾌감에 얕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계속 윈터의 얼굴을 더듬어 나갔다. 골격이 도드라진 이마와 눈썹의 경계, 그 아래로 움푹 파인 눈꺼풀, 얼핏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굴곡이 깊어진 이목구비를.
평소에는 잘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섀넌에겐 그리 문제 되지 않았다. 이런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 존재는 그에게 윈터가 유일할 것이다.
더는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거친 숨소리도, 길어진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도, 뾰족한 귀와 은백색 갈기도, 사납게 구겨진 콧잔등도, 하나하나가 다 매혹적이기 그지없었다.
물론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별안간 마주친 반인반수의 그림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꺾을 뻔했던 해프닝이 있었으니까.
그 이후 윈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연결된 상태에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게 그의 입장에선 몹시 꺼려지는 모양이다.
한참이나 윈터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던 섀넌이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미미한 힘에 휙 딸려온 거대한 몸이 섀넌을 온전히 뒤덮었다.
“아, 아아……, 읏, 윈터, 기분 좋아…….”
제 속삭임에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뿐이었지만, 섀넌은 그를 더 꽉 끌어안고 계속해서 밀어를 속삭였다.
굵은 나무뿌리처럼 울근불근한 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섀넌이 조용히 눈을 가리고 있던 크라바트를 벗었다.
“…….”
그는 자신과 확연히 다른 존재인 동시에 제게서 비롯된 존재를 마주했다. 관성처럼 발동하는 혐오를 동반한 경계 사이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애정이 샘솟았다.
“……익숙해지고 싶어.”
더는 이런 모습의 그를 봐도 놀라지 않을 만큼, 이 모습마저 자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연인의 양면이라는 걸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괴물의 숨결이 입술 근처로 쏟아졌다. 섀넌의 머리통을 한 번에 씹어 삼킬 만큼 큰 주둥이 아래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치아는 마치 작은 종유석 같았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손이 갈기로 뒤덮인 어깨를 훑고 가슴팍에 닿았다. 넓게 벌어진 상박을 배회하는 제 손이 유난히 아이의 손처럼 작게 느껴져서, 섀넌이 살며시 웃었다.
윈터가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땐 늘 익숙하게 성감을 자극하는 루트가 있는데, 제 몸을 완전히 뒤덮고도 한참이나 남는 이 거대한 괴수의 몸은 어디를 어떻게 만져 주어야 좋아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짐승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땐 귀를 건드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탄탄한 가슴팍을 배회하는 섀넌의 손 위로 커다란 괴수의 손이 뒤덮였다. 그의 손을 가져가 제 뺨에 갖다 댄 윈터가 천천히 허리를 밀어 올렸다.
“읏…….”
잇새로 꾹 삼킨 신음이었음에도 배 속을 파고들던 성기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엄지 끝으로 그의 눈가를 매만지던 섀넌이 또 한 번 웃었다. 그의 손끝에 살짝 닿은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르륵, 하는 숨소리와 함께 윈터의 등 근육이 급격히 경직되었다. 크기가 커지니 근육의 움직임도 더 격렬해 보였다. 더는 물러나지 말라는 듯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섀넌이 조심스럽게 심호흡했다.
“하아……, 조금 더, 들어와도 될 것 같아. 읏, ……아주 조금만. 다는 안 돼, 흐읏……, 조금만 더.”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전진했을 뿐인데,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다. 성기의 형태 또한 낯설었다. 눈으로 보이는 외양의 변화까지 더해져 꼭 윈터가 아닌 다른 존재와 몸을 섞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리안.”
안을 파고들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붉은 기가 섞인 청회색 눈에 약간의 의아함과 당황이 스쳤다. 상체를 세우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윈터의 아랫배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섀넌이 짓궂게 웃었다.
“리안.”
그르륵, 낮은 숨을 흘리는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애인 오기 전에 얼른 끝내.”
장난삼아 던진 한마디에 예상보다 큰 반응이 돌아왔다. 윈터의 숨이 단번에 거칠게 달아올랐다.
“아, 흣……, 아, 아!”
안을 짓치던 움직임이 순식간에 거세어졌다. 배 속을 멋대로 헤집으며 빠르게 몰아치는 성기의 압박감에 놀란 것도 잠시, 금세 익숙해진 섀넌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윈터가 느끼는 분노와 대상 없는 질투, 서운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섀넌에게도 그대로 쏟아졌다. 퍽, 퍽, 장골과 둔부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배 속을 얻어맞는 듯 얼얼한 쾌락이 찾아왔다.
“아, 하으……, 응, 아…….”
섀넌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괴수가 제 몸을 종잇장처럼 붙잡고 멋대로 뒤흔드는 감각에 오싹한 희열을 느꼈다. 얼핏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흉흉하게 곤두선 보랏빛 안광을 마주하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아, 으응, 리안, 살살…….”
섀넌은 부러 그의 화를 더 돋우며 가슴팍을 약하게 밀어냈다. 윈터의 성기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짓찧을 때마다 그의 귀두 끝에서 맑은 체액이 핏, 핏 터져 나왔다.
“안에, 싸지 마, 읏……, 애인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 와중에도 섀넌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본래 반응이 크면 더 놀리고 싶은 법이었다.
그의 머리 양옆을 지탱하고 상체를 세운 윈터의 몸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양손으로 잡기에도 둘레가 부족할 만큼 두꺼운 팔을 애틋하게 매만지며, 섀넌이 눈가를 발갛게 붉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리안…….”
그 순간 윈터에게 절정이 찾아왔다. 분출액으로 아랫배를 흠뻑 적신 섀넌은 동시에 제 내벽이 흥건한 물기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질척하게 젖어 들어가는 점막을 짓이기며, 윈터는 남은 것을 쥐어짜듯 느리게 허리를 흔들었다. 섀넌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여운을 좇았다.
벼락처럼 온몸을 조이던 절정이 완만하게 가라앉으며 저릿한 후희를 남겼다. 하반신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그르륵, 그르륵, 날 선 숨소리가 섀넌의 목덜미로 쏟아졌다. 찌걱, 찌걱, 평소보다 많은 양의 정액이 내벽에 다 담기지 못하고 틈새로 질척하게 새어 나왔다.
가끔, 극도의 분노는 성적 흥분감과 닮는 때가 있는 법이다. 섀넌은 지금 윈터가 매우 화가 난 동시에 엄청나게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젖은 낙엽에 짓이겨지고 구겨진 것으로도 모자라 체액에 젖어 엉망이 된 코트 위에 누운 채, 넝마처럼 찢어져 걸리적거리는 셔츠를 저 멀리 던져 버린 섀넌이 제 손목을 잡아 결박하는 괴수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는 더 이상 집에 돌아갈 때 입어야 할 옷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깊은 숲에서, 그 숲을 닮은 흙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괴수에게 범해지는 즐거움에 비하면 그깟 옷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 * *
“…….”
눈을 뜨자마자 연인과 눈이 마주친 섀넌이 소리 없이 빙그르 웃었다.
달콤한 악몽처럼 격렬히 몰아쳤던 숲의 섹스는 온데간데없이, 보송보송한 침대 시트와 이불에 푹 파묻힌 채 깨어난 게 기분 좋았다. 그가 손을 뻗어 윈터의 뺨을 매만졌다.
“리안.”
다 쉬어 빠진 목소리가 달콤하게 부르는 이름에, 윈터의 눈이 순간적으로 뾰로통하게 구겨졌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단호한 거부에 섀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이것도 네 이름이잖아.”
내가 부를 때마다 잔뜩 싸지르면서 흥분한 주제에. 섀넌은 굳이 뒷말까진 다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른한 한숨을 흘린 섀넌이 제 위로 올라타는 윈터의 얼굴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이마를 가린 은백색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고, 눈썹뼈와 그 아래 움푹 파인 눈꺼풀, 콧날과 뺨을 아주 느리게 덧그렸다.
이 골격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뒤틀리는 것을 수없이 봐 왔음에도, 섀넌은 여전히 신기했다. 윈터의 속눈썹이 그의 손끝을 간질였다.
……어떻게 속눈썹 한 올마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한 번 마주친 이라면 누구든 홀릴 것 같은 이 기기묘묘한 눈은 또 어떻고.
손이 섬세한 장인이 아주 정교하게 빚어낸 조각상처럼, 윈터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손이 섬세한 장인’이란 의심의 여지 없이 섀넌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예뻐죽겠다. 정말 빌어먹게 예뻐서 마구 뭉개 버리고 싶다. 입안 가득 와삭와삭 깨물어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능숙하게 숨긴 섀넌이 희미하게 웃으며 가볍게 입 맞췄다.
늘 그랬듯 맹목적인 순종을 담은 눈이 잠시 섀넌을 바라보다가, 얌전히 내리 감겼다. 숲에서 그렇게나 흉흉한 눈으로 저를 찍어누르고 범하던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여린 얼굴이었다.
섀넌은 다시 제 손 아래로 들어와 얌전히 목줄을 내맡기는 연인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자신들은 절대 타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기질을 가졌다. 이는 포식자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오직 서로에 한해서 자신의 통제권을 믿고 쥐여줄 수 있는 이 관계가, 섀넌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자신보다 더 거대한 존재에게 무력하게 범해지는 기분 같은 건 윈터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각이었기 때문에.
섀넌은 윈터에 한해서 가끔 그런 무력함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색다른 유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이랑 하니까 좋으셨어요?”
……물론 윈터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진 모양이지만.
“두 번째 말하는데, 어쨌든 그것도 네 이름이잖아.”
“그래도 싫어요. 이상해요. 학교에서 부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섹스 중에 그러는 건 정말 싫어요.”
단호하게 불평을 쏟아 낸 윈터가 제 입가에 입을 맞추려는 섀넌을 피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섀넌이 그런 그의 뺨을 잡아 다시 제 쪽으로 돌리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냥 색다른 시도였어. 싫으면 다음부턴 안 할게.”
“……섀넌은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게 좋아요? 혹시 계속 나랑만 해서 질렸어요?”
“…….”
이런. 그에게서 몸을 돌린 섀넌이 낭패한 기분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옆에서 한숨이 들렸다.
“……왜 그렇게 흥분했어요? 지금보다 그 모습이 더 좋아요? 앞으로는 계속 섹스할 때마다 바꿀까요? 그럼 매번 침대가 온전히 남아나지 않게 될 텐데.”
“…….”
또 시작이군. 섀넌은 속으로만 조용히 혀를 찼다. 토라진 연인은 퍽 귀엽지만, 이럴 때마다 결국 난감해지는 건 섀넌 자신이었다.
“솔직히 너도 흥분했잖아.”
“흥분한 게 아니라 화가 났던 거예요.”
귀엽게도 제 연인은 아직 분노와 성적 흥분의 상관관계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러니까 서로에 한해서는, 격렬한 분노가 격렬한 쾌락과 희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몸을 돌려 다시 윈터의 품으로 파고든 섀넌이 그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간질였다.
“화내는 거 되게 섹시하더라.”
“……네?”
허리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간 손이 굵직한 살덩이를 슬며시 쥐었다.
“네가 너무 세게 잡아서 내 손목이 아작났잖아.”
“…….”
“인간이었으면 못 버티고 죽었을걸. 내가 그렇게나 그만하라고 애원했는데……, 무자비하게 쑤셔 박고 멋대로 싸지르고 말이야.”
힐난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너무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내가 우니까 눈이 반쯤 돌던데. 그 모습이 정말……, 정말 야했어. 네 숨소리만으로도 쌀 뻔했다고.”
“…….”
“네 물건이 내 몸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알아? 아래가 아직도 얼얼해. 안쪽이 덜 아물었나 봐.”
제 손을 제지하려는 듯 잡아채는 손에 깍지를 낀 섀넌이 그것을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살짝 곤두선 기둥과 여린 회음부를 지나 아직도 약간 부어 있는 틈새에 윈터의 손끝을 갖다 댄 섀넌이 나직이 물었다.
“한 번 만져 볼래?”
싫으면 말고. 귓바퀴에 습한 숨결과 함께 달콤한 권유가 스몄다. 윈터로서는 선택지가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틈새를 꾹 누르는 섀넌의 손에 이끌려 부드러운 점막 안으로 진입한 중지와 약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나른하게 갈라진 신음을 토해낸 섀넌이 그의 손을 더 깊게 이끌었다.
“그래도, 다른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
“하아……, 정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 싫은 거 맞아? 내가 리안이라고 부를 때마다 네 물건이 더 커져서, 아……, 내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짓누르던데…….”
아직 덜 아문 것 같다는 섀넌의 말과 달리 내벽 안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했다. 손끝을 살짝 구부려 위쪽으로 밀어 올리자, 그의 팔을 꽉 잡은 섀넌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다 아문 것 같아요.”
“아아……, 좀 더 잘 만져 봐. 찾았어?”
“찢어진 곳, ……없는데.”
낮게 대답하는 목소리 사이로 열 오른 호흡이 드문드문 따라붙었다.
“당연하지. 네 물건은 이보다 더 깊게 들어가 있었으니까.”
완전히 발기한 두 성기가 뚝뚝 체액을 흘려댔다. 제 손목을 잡고 위아래로 이끄는 섀넌의 움직임에 맞춰 소극적으로 응하던 윈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우드득, 배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진동하며 내벽이 벌어졌다. 순간 놀란 섀넌이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찌푸려진 미간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춘 윈터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사실 조금 좋은 부분도 있었어요.”
“…….”
“당신이 다른 이름 부르는 거 빼고요.”
섀넌은 제 배 속에 있는 손의 골격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크기를 부풀려 가는 오싹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읏.”
“당신이랑 밖에서 붙어먹는 게 좋아요. 숲이든, 겨울 호수든…….”
“아, 흣.”
“꼭 밖이어서 좋다기보다는, 당신이 나한테 의지하는 게 좋아요.”
춥다고 짜증 내다가도 예쁘게 울면서 매달리고, 조금이라도 누군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지면 초조한 얼굴로 내 품에 숨는 것도, 아래는 잔뜩 긴장해서 내 좆을 잘라먹을 듯 조여대는 것도, 그만하라고 애원하면서 바닥이 다 젖도록 질질 싸는 것도…….
귓가로 낮게 읊조리는 말은 외설적이기 그지없었으나, 그 목소리는 마치 신 앞에 올리는 고해성사처럼 정결했다.
골격이 도드라진 손가락이 안을 헤집기 시작하자 섀넌의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열띤 숨을 내뱉는 입술에 살포시 제 입술을 겹친 윈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고백했다.
“……정말 너무 좋았어요.”
“꼭 그런 곳이 아니어도 난 늘 너한테 의지하고 있어, 윈터.”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절대 그에게 목줄을 내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서로를 보호하고 아끼는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도리어 온전히 통제하고 통제당할 수 있는 거다.
다만, 섀넌은 ‘의지’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윈터와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그에게 윈터는 연인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아이이기도 했다. 그의 세계를 형성하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고 다시 빚은 것 또한 자신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난관이 생겼을 때 기대는 쪽은 늘 윈터여야 하고, 자신은 늘 그를 지탱해 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섀넌이 말하는 의지란 건 어디까지나 ‘내 몸을 멋대로 할 수 있게 허락하는 유일한 존재’ 혹은 ‘가끔은 보호받는 기분이 들어도 괜찮은 존재’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섀넌은 그런 견해의 차이까지 시시콜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윈터가 제게 바라는 ‘의지’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의 미묘한 간극을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신음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참 벗어난 윈터의 손은 굵기도 길이도 남달라서,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성기를 품은 것과 거의 비슷한 이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윈터, 읏, 좀 더, ……으응, 거기, 아……, 좋아.”
“당신 지금 되게 야해요.”
“그런 당연한 말은 하지 마.”
그저 뒤를 자극당했을 뿐 아직 한 번도 만져진 적 없는 성기가 혼자 고개를 쳐든 채 쿠퍼액을 줄줄 흘려댔다.
“……손톱, 세우지 말고.”
“미안해요……. 흥분돼서.”
그의 뒤통수를 감싸 제게로 당긴 섀넌이 고개를 기울여 깊게 입술을 겹쳤다. 윈터의 무게가 실려 시트 아래로 푹 꺼지는 감촉이, 맞닿은 체온이, 그에게 근본적인 안온함을 안겨 주었다.
떨어진 입술이 턱 끝을 스치고 목덜미로 향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은백색 머리칼이 빗장뼈 위를 간지럽혔다. 곧 말캉한 입술이 유륜을 머금고, 축축한 혀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유두를 빨아들였다.
“하아…….”
깊게 오르내리는 탄탄한 배를 타고 내려간 입술이 쿠퍼액으로 젖은 성기 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은회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눈을 감은 섀넌이 긴 한숨을 흘렸다.
잠기운을 몰아내는 데 섹스만큼 좋은 것도 없지. 가볍게 한 발 빼고, 윈터도 한 발 빼 주고,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
-섀넌 님! 윈터 님! 저 왔습니다!
……빌어먹을.
아래층에서부터 우당탕 부산스럽게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배 속을 헤집던 윈터의 손이 멎었다. 섀넌이 스르륵 눈을 떴다.
-여기 계신가? ……없네. 섀넌 님! 윈터 님! 어디 계세요?
휴가를 다녀와서인지, 아니면 쾌활한 사람과의 연애가 그에게 어떤 활력을 불어넣은 것인지, 러셀은 전에 없이 활기찼다.
-의논 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계속해.”
“침실 문 안 잠갔어요.”
섀넌이 윈터의 머리 위로 훌쩍 이불을 덮어씌웠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깟 게……, 봐서 뭘 어쩔 건데.”
조금만 더 하면 절정이 코앞이었다. 윈터의 뒤통수를 눌러 제 성기를 다시 물게 한 그가 애써 집중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 신혼집을 알아봤는데요, 마침 좋은 매물이 나왔는데 그 집이 좀 비싼 관계로……, 섀넌 님?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가까워진 발소리가 침실 문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렁찬 목소리가 꼬리처럼 길게 뒤따랐다.
-섀넌 님! 윈터 님! 그리말디이―! 리아안? 애쉬이? 아니 이 정도 불렀으면 좀……. 벌써 나가셨나? 아니지……. 우리 섀넌 님이 그렇게 부지런할 리가! 섀넌 님! 섀넌 님! 어디 계십니까?
끝까지 무시하고 좀 즐겨 보려던 섀넌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일어난 윈터의 머리 위에서 이불이 흘러내리며 부스스한 머리칼이 드러났다. 이제 막 섀넌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던 입술이 아쉬움을 담고 벌어져 있었다.
“……저렇게 기력이 넘치는 러셀이라면 좀 따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목소리만 들어도 성가시다. 단지 불필요한 군식구를 늘리기 싫어서 한 선택이지만, 내내 한집에서 저렇게 소란을 떨어댄다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한 일이니 진작 내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여기 있어, 러셀. 침실에.”
짜증이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였다. 섀넌은 윈터가 건네주는 가운을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걸쳤다.
-섀넌 님! 정말 벌써 수업 가신 건가……? 시간이 아직 이른데…….
귀가 어두워 제 말을 듣지 못하는 노예 새낄 놔둔 채 가운을 꿰입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 윈터가 침실 문을 열었다.
“러셀, 이쪽이에요.”
“엇! 윈터 님! 거기 계셨습니까? 아, 침실을 옮기신 모양이네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엉뚱한 곳만 기웃거렸습니다, 하하…….”
“아침부터 왜 이렇게 부산스럽게 굴어.”
가운을 여미고 침대를 박차고 나온 섀넌이 윈터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칼이 사방으로 부스스하게 뻗친 섀넌을 보며, 러셀이 속없이 웃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섀넌 님? 아직 차 안 드셨죠? 제가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안녕이고 나발이고 네 신혼집을 왜 나한테 의논해. 알아서 할 일이지.”
“아, 하하……. 들으셨겠지만 이 근방에 좋은 매물이 나왔는데 그 비용이……, 조금 만만치 않아서요.”
“모아 둔 돈도 많은 놈이.”
“…….”
갑자기 말이 없어진 러셀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징그러운 얼굴을 짜증스럽게 보던 섀넌이 뭔가를 깨닫고 차갑게 말했다.
“설마 나한테 그 집을 사 달라거나, 일부를 보태 달라거나 하는 개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결혼 축하 선물인 셈 치면 안 될까요……?”
어이가 없어진 섀넌의 입이 삐뚜름하게 벌어졌다. 윈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그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옆에 있는 화병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렸다.
“……나가.”
섀넌이 낮게 말했다. 러셀이 문밖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양손을 모았다.
“저, 사실, 제가……, 모아 둔 돈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섀넌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일그러졌다.
“그동안 받은 급여는 다 얻다 쓰고.”
“뭐……, 이것저것 사는 데에 썼죠…….”
“저택 관리에 들어가는 일체 비용 외 식비도 따로 지급해, 그놈의 약학 대학 학비도 대 줘, 도대체 네가 돈 쓸 일이 뭐가 있었다고.”
섀넌이 제 허리에서 윈터의 팔을 풀어내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은 아니라, 윈터도 러셀도 조금 긴장을 풀었다.
“뭐, 일단, 약학 연구 비용으로도 많이 나갔고……. 제가 아무리 급여를 모아도 이 대도시에서 집을 살 만큼 큰돈이 모이는 건 아니라서요…….”
러셀이 보통 인간과 같은 수명을 지녔다면 이 말은 아주 조금이나마 설득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섀넌과 거의 비슷한 세월을 살았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개소리보다 더한 헛소리였다.
“그러니까…….”
말을 멈춘 섀넌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러셀을 바라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저축도 안 하고 집 한 채 장만할 경제력도, 이렇다 할 작위도, 업적도 일군 적 없는 새끼가 젊은 여자를 덜컥 임신부터 시켰다고.”
“…….”
“그리고 나한테 와선 신혼집을 ‘선물’해 달라……?”
윈터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섀넌을 안았다. 그러나 섀넌의 손이 그보다 더 빨랐다.
“아악!”
냅다 머리를 움츠린 러셀의 정수리를 스친 화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화병을 맞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을 뒤집어쓰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흐물흐물하게 시든 수국 몇 송이가 그의 정수리에 젖은 미역처럼 안착했다. 엑스 자로 팔을 교차해 머리를 감싼 러셀이 속사포 같은 변명을 쏟아 냈다.
“노, 노, 노, 농담입니다! 선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고요! 그냥 조, 조금만 보태 주시면 됩니다! 이 근처에 매물이 그 집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아예 시외로 나가야 하는데, 그럼 거리가 멀어서 출퇴근도 유연하지 못할 것 같고요! 이게 다 섀넌 님을 생각해서 그러는…….”
“놔 봐, 윈터. 내가 오늘 저 새끼를 죽여야 성이 풀릴 것 같으니까.”
“섀넌 님, 아침부터 혈압 올리지 마시고 조금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아악.”
러셀이 제 쪽으로 휙 밀쳐진 사이드 테이블을 피하곤 아예 아래층으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그의 머리에 엉겨 붙어 있던 꽃줄기가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며 카펫을 적셨다.
“…….”
중간에서 매번 그들을 말려야 하는 처지인 윈터로서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 저러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전의 러셀도 그리 과묵한 성향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저렇게까지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않았다. 마치 3년의 휴가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전날 러셀이 쫓겨나는 것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섀넌의 분노는 아침부터 다시 활활 타올랐다.
* * *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자산 관리를 모조리 러셀의 손에 맡기고 살아온 섀넌으로서는 제 노예 새끼의 재정 상태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러셀의 급여가 늘 당대 시종장의 평균 급여를 훨씬 넘어섰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그 긴 세월 러셀이 제 자산을 대신 관리하면서 뒤로 빼돌린 돈이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섀넌 님 돈이 제 돈이고, 제 돈이 섀넌 님 돈 아니었습니까? 굳이 목숨 내놓고 빼돌릴 이유가…….”
그러나 러셀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멍청한 놈이었다. 저 머리통은 오직 약학 연구 이외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들도 제 가족 먹여 살릴 밑천 정도는 이루어 놓고 죽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그의 몇 배를 살아온 러셀이 이렇게까지 경제관념이 없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 그에게 돈 관리를 맡겨 온 섀넌도 기실 그리 경제관념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저 어디 하나 크게 비는 일 없이 그대로 있으니 알아서 잘하는 줄 알았지, 저런 정신머리를 가졌을 줄이야…….
그나마 러셀이 도박에 흥미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돈 관념이 없으니 제 재산을 따로 축적할 욕심도, 섀넌의 재산을 굴려 뭔가를 시도해 볼 욕심도 없었던 셈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굳이 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너보다 어린놈들도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사는데…….”
더는 욕을 하는 것도 입 아파서, 섀넌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마부석에서 다시금 변명이 돌아왔다.
“그놈들은 저보다 빨리 죽지 않습니까. 제한 시간이 있었다면 저도 아마 열심히 살았을 겁니다…….”
저 머저리 같은 놈. 말이라도 못 하면.
그 마리아인지 뭔지 하는 여자는 대체 저런 놈 어디가 좋아서 덜컥 약혼까지 해 버렸을까.
외모가 봐 줄 만한 것도 아니고, 보나 마나 정력도 시원찮을 것이며, 돈도 한 푼 없이 내세울 거라곤 끔찍하게 긴 세월 쌓아 온 질병과 약학 지식뿐일 터.
웬만한 취향은 존중해 주자는 게 섀넌의 평소 신념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여자는 머리가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어리고 멀쩡한 놈들 놔두고 하필 저런 머저리를…….
학교 후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가 멈춰 섰다. 섀넌이 혀를 차며 윈터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네 시에 와서 대기해. 집 매매 문제는 수업 끝나고 다시 의논하지.”
섀넌의 차가운 말에 러셀의 표정이 오히려 밝아졌다. 마치 이미 집 한 채를 선물 받은 듯한 그 눈빛에, 섀넌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새끼가 아직 덜 처맞아서 저렇게 실실 쪼개고 있는 건가…….
“샤, 수업 늦겠어요.”
윈터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애교가 잔뜩 묻어나는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진정한 섀넌이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집 안에서야 뭐가 부서지고 터지든 괜찮지만 길에서는 괜히 이목만 끌 뿐이다. 결국 화를 억누른 섀넌이 러셀에게서 휙 몸을 돌렸다.
“다녀오십시오!”
러셀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다시 고삐를 쥐었다.
“어지간히 성가시게 해.”
섀넌이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결혼하는 놈 뒷바라지는 그 부모나 하는 짓이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제 노예 새끼가 결혼을 하든 애를 싸지르든 하등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은 섀넌으로서는 이런 사소한 문제가 불거지는 게 번거로울 뿐이었다.
아침부터 모처럼 산뜻했던 기분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안 그래도 기분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 멍청한 애새끼들 사이에서 그들보다 더 멍청한 교수진의 지루한 수업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입학을 괜히 해서는. 그냥 집에 틀어박혀 등교하는 윈터 옷이나 입혀 주고 가끔 따라가 청강이나 할 것을.
짧게 한숨을 내쉬는 섀넌의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한 윈터가 그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학교 가지 말까요? 오늘 수업도 한 개밖에 없는데.”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으나, 섀넌은 내색하지 않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툭하면 수업 빠질 생각이나 하고. 이래서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겠어?”
“나중에 교수님께 사정을 잘 말하면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섀넌은 퍽 고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뭐, 네가 정 원한다면 한 번 정도는.”
그가 짐짓 마지못한 척 허락했다. 윈터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섀넌을 안고 빙글 돌았다. 마치 노는 걸 허락받아 잔뜩 신이 난 아이 같은 얼굴이라, 섀넌이 결국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윈터의 코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노는 것만 좋아해.”
“세 살이요.”
“네가 세 살 때 이렇게 컸다면 나도 그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섀넌이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겉으로만 보면 윈터가 떼쓰고 자신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기실 그가 제 기분을 배려해서 한 제안이라는 걸 섀넌도 모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기특하고 발칙한 연인이다.
학교의 후문에서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모퉁이를 돌아선 윈터가 섀넌의 입가에 짧게 키스하며 물었다.
“어디 갈까요?”
“어디든. 지긋지긋한 학교 건물이 안 보이는 곳으로.”
섀넌이 웃는 낯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 걸음이 사뭇 가볍고 경쾌해서, 윈터가 소리 없이 웃었다.
* * *
아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이 도피한 곳은 작은 교외의 광장이었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거리는 도무지 조용할 수 없는 장소지만, 그래도 명문대가 속한 대도시의 소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광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은 섀넌이 거리를 지나는 이들을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종업원이 다가갔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그녀에게서 메뉴판을 건네받은 섀넌이 목록을 확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이 덜컹 흔들렸다.
“토비, 손님한테 이러면 안 된댔지?”
허리를 숙인 종업원이 테이블 밑을 향해 스읍, 하고 주의시켰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테이블 아래에서 나와 얌전히 두 발을 모으고 앉은 개가 양쪽 귀를 바짝 눕혔다.
“…….”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담배를 비벼 껐다. 노골적인 경멸이 담긴 표정에 당황한 종업원이 얼른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 녀석이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널린 게 사람인데 하필이면.”
입속으로 중얼거린 불평은 다른 소음에 묻혀 종업원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섀넌이 의례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여전히 개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이 조금 못마땅했다.
“가장 인기 메뉴는 이거예요. 향이 아주 좋거든요.”
개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뗀 섀넌이 종업원에게 메뉴 추천을 받는 동안, 다시 몸을 일으킨 개가 섀넌의 무릎에 올라앉으려는 듯 엉겨 붙었다. 갑자기 앞발을 들고 달려드는 개의 정수리에 부딪힌 테이블이 또 한 번 흔들렸다.
“…….”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짜증이 치민 얼굴을 한 섀넌이 의자를 뒤로 빼며 개에게서 물러났다. 당황한 종업원이 목줄을 잡아당기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토비, 앉아. 앉아!”
여전히 섀넌을 향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개가 마지못해 다시 바닥에 앉았다. 제대로 보지도 않은 메뉴판을 덮어 버린 섀넌이 그녀를 향해 대강 손짓했다.
“추천해 주신 걸로, 두 잔.”
이만 개를 데리고 빨리 꺼지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민망해진 종업원이 더욱 목소릴 낮추며 엄히 꾸짖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오늘따라 얘가 왜 이래? 토비, 이리 와. 얼른!”
그러나 개는 그럴수록 섀넌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엉겨 붙을 뿐이었다. 아예 그의 바짓단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아대자, 종업원이 더욱 당황하여 개를 떼어 놓으려 애썼다.
“토비, 제발 앉아. 너 자꾸 이러면 앞으로 안 데리고 나온다? 집에 혼자 있고 싶어? 말 좀 들어, 제발!”
그때 돌연 몸을 바짝 낮춘 개가 컹컹 짖기 시작했다. 섀넌의 옆으로 다가와 앉은 윈터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개 관리 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평소엔 이렇게까지 말을 안 듣는 애가 아닌데……. 토비, 그만 짖어. 스읍, 이리 와. 조용히 해. 너 정말 왜 이래?”
그녀가 목줄을 아무리 잡아끌어도 윈터에게 고정된 개의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다. 몇 번 맹렬히 짖던 개는 점점 더 경계가 심해지더니, 이번에는 납작 엎드리며 낑낑 울기 시작했다.
좀처럼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개를 거의 들어 옮기다시피 해서 겨우 그들로부터 떼어 낸 종업원이 거듭 사과하며 멀어졌다.
“별일이야.”
섀넌이 개의 코에 닿았던 바지를 손수건으로 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싫어하고 경계한다. 그렇기에 평생 개의 관심을 받아 본 적도, 관심을 준 적도 없는 섀넌으로서는 황당한 경험이었다.
“이래서 내가 당신을 혼자 두기 싫어하는 거예요.”
윈터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섀넌이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영역표시를 잘 해 뒀어야지, 윈터. 인기 있는 애인을 뒀으면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이보다 어떻게 더 하지…….”
당신한테서 내 냄새 진동하는 거 모르죠? 여기에 아예 이름이라도 새겨 놓을까요? 내 거라고.
목덜미를 스치는 입술이 간질이며 속삭이자 섀넌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곧 종업원이 차를 받친 트레이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불쌍한 토비는 카운터에 묶인 채 시무룩하게 엎어져 있었다. 마리골드 한 송이가 띄워진 황금빛 차가 담긴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건 서비스예요. 토비 때문에 죄송해서.”
그녀가 살짝 웃으며 조각 케이크와 오트밀 쿠키 몇 개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먹지도 못하고 입에 대지도 않을 음식이지만, 섀넌이 적당히 의례적으로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뭔가 더 말을 건네려던 그녀가 그 차가운 태도에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차림새로 보나 말투로 보나 타지인인 듯하고, 더는 모르는 이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분위기가 풍긴 탓이었다.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며, 섀넌은 이쪽을 보고 낑낑 우는 개를 멀거니 바라봤다. 금빛 털이 풍성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가 돌연 피식 웃었다. 여전히 개는 싫고 그 냄새도 끔찍하지만, 가끔 저런 광경을 멀리서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윈터의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저 개를 좀 봐, 윈터. 애교가 많은 녀석인가 봐.”
“언제부터 그렇게 개를 좋아하셨는데요?”
윈터의 가슴팍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섀넌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가 윈터의 코끝을 검지로 톡 치며 웃었다.
“설마 개새끼한테도 질투한다는 말은 하지 마.”
“당연히 질투하죠.”
윈터는 조금 전 지켜봤던 광경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실 원래의 섀넌이라면 아직도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개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게다가 개가 그렇게 엉겨 붙는데도 크게 화를 내거나 밀어내지도 않고, 심지어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는 모습이 정말이지…….
근처에만 있어도 냄새가 난다며 진저리를 쳤던 과거의 태도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왜 그렇게 친절해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질문에 섀넌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가 당신 앞에서 함부로 좆을 세워도 그냥 넘어가더니, 이제는 아예 무릎 위에 올라타도 다 받아 줄 거예요?”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그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좆을 세운 자와 무릎 위에 올라탄 자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그 덜 떨어진 로건을 말하는 것 같고, 후자는 저 토비인지 뭔지 하는 개를 말하는 것 같은데 윈터는 그냥 다 같은 하나의 개새끼로 싸잡아 비난하고 있었다.
“굳이 화낼 가치조차 없는 일들이잖아.”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런 일에 일일이 다 화를 내며 사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물론 예전에야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직성이 풀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윈터의 품에 안긴 섀넌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다 귀찮아.”
화를 내는 것도 어쨌든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라, 섀넌은 굳이 자신이 그런 소모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이 뭘 하지 않아도 곧 윈터가 나타나 대신 화도 내주고 알아서 다 해결해 줄 텐데, 뭐 하러 불필요하게 혈압을 올린단 말인가.
그러니 제 성격이 유해진 것의 원인을 찾자면 바로 이 기특한 연인 때문인 것이다.
“……다 너 때문이야, 윈터.”
그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윈터가 턱 끝을 섀넌의 정수리에 툭 얹었다.
“제가 뭘요?”
“그냥, 내가 뭔가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다 너 때문이라고.”
“…….”
윈터가 말없이 섀넌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정수리를 내리누르고 있던 턱이 사라지고, 작게 내뱉는 숨결이 머리칼을 간지럽게 스쳤다. 섀넌이 그의 품에 더 깊이 몸을 기대며 웃었다.
“기분 좋아졌지?”
“……네.”
순순히 돌아오는 대답이 귀여워서, 손을 뒤로 뻗은 그가 은백색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근데 러셀한테는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그 새끼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섀넌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새끼 일은 네가 대신 화내 줄 일이 아니니까.”
섀넌이 상체를 세우며 몸을 돌려 윈터를 마주했다.
“평생 마구간에서 구르다가 죽을 놈을 살려 놔서 여태껏 먹이고 재워 줬더니, 그놈이 은혜도 모르고 이제는 나한테 신혼집까지 바라잖아.”
내가 자기 부모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노예 새끼 주제에……. 그가 못마땅한 낯으로 찻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정말 나빠요.”
윈터의 대답에 그의 눈이 도리어 심술 궂게 가늘어졌다.
“편을 들려면 좀 더 성의있게 해.”
잔을 내려놓은 섀넌이 윈터의 턱을 쥐고 살짝 흔들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무조건 어르고 달래면 좋다고 넘어가는 줄 알아?”
“그런 적 없는데…….”
윈터가 생긋 웃으며 섀넌을 제 품으로 다시 끌어왔다.
“거짓말은 더 나빠.”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섀넌은 윈터에게 편하게 몸을 기댔다. 그의 품에 안기면 어쩔 수 없이 모든 언짢은 감정이 둥글게 무뎌지곤 했다.
예민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순한 양이 되어,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섀넌은 어느 순간부터 그런 느슨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 따갑거나 낯선 개가 자신들을 자꾸 쳐다보는 등의 사소한 일 따위는 그의 기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곁에 윈터가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여유로움이다.
사방에서 인간들의 소음이 들끓었다. 저마다 기쁘거나 혹은 심각한 얼굴로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막상 귀 기울여 들어 보면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별일도 아닌 것으로 웃고, 슬퍼하고, 마치 그게 제 인생의 전부인 양 몰두하고 걱정하며, 부지런히 걷고 부지런히 말하고 또 누군가는 상점 주인과 부지런히 실랑이를 벌였다.
찰나와 같은 생을 살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열정적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고작 몇십 년이 지나면 모조리 땅에 묻힐 존재라는 걸 스스로 알면서도 저토록 부지런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고작 몇십 년뿐인 삶의 유한성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연인들, 혹은 가족들, 친구들이 삼삼오오 일행을 이루어 자유롭게 노니는 위로 쨍한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윈터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채 그 광경을 한참이나 감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이 나직이 말했다.
“처음부터 러셀에게 급여를 줘 가며 일을 시킨 건 아니었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화제였음에도, 윈터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당신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요?”
“응. 그리말디가는 재산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태어나자마자 처음 마주친 인간이 하필 가난한 신학자 집안인 건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뱀파이어들이 그러하듯, 섀넌 그리말디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그가 최초로 한 일은 그리말디가의 씨를 말리고 그 자신이 유일한 그리말디로 남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리 내력이 긴 가문은 아니라 학살은 쉬웠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리말디 일가의 저택에서 마구간 지기 러셀을 만났다.
아무리 가난해도 저명한 신학자 집안으로서 구색을 갖추려면 가신이 필요했던 모양인지, 당시 그리말디가의 일꾼들은 거의 무보수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처지였다.
“러셀의 입장에선 오히려 날 만난 게 행운이었을지도 몰라.”
……물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오직 섀넌 혼자만의 생각이다.
“한 1년 정도……, 부호들 집만 골라서 부지런히 들쑤시고 다녔어. 내 허영을 채워 줄 보석과 돈이 필요했으니까.”
테이블에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든 섀넌이 그것을 입에 물며 말했다.
“그런 허영의 일환으로 러셀에게도 괜한 자비를 베푼답시고 정당한 고용 계약을 운운했지. 그때만 해도 러셀은 나만 보면 벌벌 떨었고…….”
달칵, 라이터를 켠 윈터가 그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자긴 아무리 궁해도 사람 죽여 번 돈으로는 먹고살고 싶지 않다는 거야. 질리기도 질렸겠지. 그땐 놈이 보는 앞에서도 서슴없이 사냥을 했으니까…….”
느릿느릿 흰 궤도를 그리다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섀넌이 말을 이었다.
“무상으로 부려먹는 게 딱히 미안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놈이 하도 그런 소릴 해 대니까 나도 점점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어지더군.”
“…….”
“내가 바보 천치도 아닌데 하찮은 인간들 틈에서 합법적으로, 품위 있게 살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 싶었어.”
그렇게 처음으로 인간 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오직 제 성욕과 식욕을 채워 줄 인간만을 찾아 일회적인 유희만 누리던 섀넌이 처음으로 제 터전을 꾸리고 살아가게 된 셈이다.
“그땐 어디서 살았는데요?”
“글쎄, 정확히 어느 지역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처음 태어난 곳이 서북부였으니까……, 아마 그쪽 어디였겠지.”
너무 오래된 일인 데다 지금은 지명도 다 바뀌었고, 딱히 ‘처음’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첫 학살, 첫 섹스, 처음 소유했던 집, 처음 다녔던 학교……. 분명 세상사 모든 일엔 자신도 ‘처음’이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신기할 정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즈음 엘리자베스를 처음 만났는데, 러셀이 거의 죽을 뻔했어. 엘리자베스는 나와 러셀이 맹약으로 묶여 있는 걸 몰랐거든.”
섀넌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웃었다.
“그놈 어깨에 아직도 엘리자베스한테 찢긴 흉터가 남아 있어. 내가 직접 꿰매 줘서 잘 알지. 어찌나 엄살이 심하던지……. 러셀이 약학 연구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게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야.”
그때의 일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러셀의 상처를 꿰매면서 자신이 얼마나 성가셔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한심한 노예 놈을 보며 다시는 그 누구와도 이딴 개 같은 맹약은 맺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어쨌든 그즈음 나도 학교라는 걸 처음 가 봤어.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인데, 그때는 엘리자베스가 내 고모가 되어 일종의 후견인 노릇을 해 줬지.”
희미한 기억을 내다보는 눈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거창한 신분 위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변변찮은 시골 기숙 학교였어.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게 처음이라 여러모로 미숙했고……. 룸메이트는 기억 안 나. 너무 자주 바뀌었거든. 당시의 나로서는 짜증 나는 놈들을 그냥 두고 참아 줄 만한 인내심이 없었으니까……. 러셀은 내가 치는 사고 뒷수습하기 바빴고.”
“그럼 카일은요? 듣기로는 섀넌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맞아. 카일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건 기숙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어. 그즈음엔 러셀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도리어 그놈을 학교로 보내 버렸지. 러셀이 내가 졸업한 기숙 학교를 입학하고 약학 대학에 진학하는 동안 나는 카일과 어울려 다니면서 늑대들 사냥에 재미를 붙였어.”
그때 즈음 네 선조를 만나 기억도 나지 않는 맹약을 맺었던 거야. 사실 그 일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나답지 않은 짓이었어…….
다 식은 차를 비우고 새로 주문한 차가 다 비워질 때까지, 그리고 섀넌의 손에 들린 담배가 몇 번이나 새것으로 교체될 때까지. 섀넌은 먼 과거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윈터에게 들려주었다.
아쉽게도 그리 체계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실제 자신의 기억인지도 불분명했다. 이를테면 마치 전생의 일과 같았다.
윈터와 지내며 있었던 일은 세세하게 잘 기억할 만큼 모든 순간이 반짝였지만, 그 이전의 삶은 신기할 정도로 흐릿했다.
어쩌면 이름 모를 늑대와 맹약을 맺었던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기나긴 암전이 아니었을까. 윈터를 만나기 전까지의 공백기 같은 것 말이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에 섀넌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기나긴 삶 전부가 윈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니. 말도 안 된다. 누가 들어도 유난이라 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착각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기억 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러셀이 부러워요.”
두서없는 얘기였음에도 끝까지 흥미롭게 경청하던 윈터가 섀넌의 손에 끼워진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나도 해 보고 싶어요.”
“뭘?”
입술 새로 연기를 내뱉는 윈터를 보며 섀넌이 짧게 되물었다.
“내내 따라다니면서 잔소리하고, 당신이 사고 치고 다니면 내가 다 수습해 주고, 챙겨 주고. 보호자처럼.”
보호자라는 말에 섀넌이 작게 코웃음 쳤다.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누굴 보호해. 물론 아주 일정 부분 러셀이 표면적으로 제게 보호자 ‘역할’을 했었다는 건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역할일 뿐이었다. 일종의 상황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호자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어진 주종관계야.”
섀넌의 대꾸는 한 귀로 흘렸는지, 윈터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를 마주 보고 다시 물었다.
“그런 건 앞으로도 절대 경험 못 하겠죠? 당신의 보호자가 되는 거.”
어린 애인 기분 맞추자고 이 나이 먹고 철없는 사고나 치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섀넌은 짐짓 심각한 사안을 고려하듯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런 걸 원해? 네가 정 원하면 해 줄 수 있는데.”
그가 검지 끝으로 윈터의 콧날을 톡 쳤다.
“대신 러셀처럼 잔소리 같은 건 하지 마. 넌 그것보단 한 번 우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
윈터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눈물이다. 적어도 섀넌은 그렇게 생각했다. 울 듯 말 듯 눈시울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로 제 앞에서 알짱거리면 정말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섀넌은 그가 우는 걸 달래면서 희열을 느끼고, 또 그를 더 울리면서 희열을 느낀다. 윈터도 아마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제 눈물이 잘 먹힌다는 걸.
“……집 정도는 해 줘도 되겠지.”
섀넌이 별안간 툭 결론을 내렸다. 필터까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깊게 고민할 일도 아니야. 선물 같은 의미도 절대 아니고. 따로 살기로 했으니까, 시종장에게 출퇴근할 집 정도 장만해 주는 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안 그래?”
그가 윈터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나누던 화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음에도, 윈터는 의아해하는 기색 같은 건 없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침묵을 지키는 그를 향해 섀넌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지?”
“그래요. 당신 말이 다 맞아요, 섀넌.”
“좋아.”
왜인지, 윈터에게 대답을 듣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섀넌이 홀가분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감사합니다, 섀넌 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죠. 제가 섀넌 님께 이런 선물을 받는 날도 다 오고요! 그것도, ‘신혼집’을요! 하하하하하.”
“신혼집이 아니라 쫓겨나는 거야.”
섀넌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러셀의 들뜬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쉬지 않고 화통한 웃음을 쏟아 내던 그는 한 20초쯤 지나고 나서야 섀넌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하고 겨우 웃음을 멈췄다.
“앞으로 더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아침 일곱 시 출근, 저녁 여섯 시 퇴근. 정확하죠?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심야 근무도 언제든 괜찮습니다.”
심야 근무도 언제든 괜찮습니다……? 하, 섀넌이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주인인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지 노예 새끼가 괜찮고 말고를 논할 게 아니었다.
그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자, 러셀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 가방은 뭡니까? 이것도 설마, 절 위해 준비하신……. 허, 참,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가 양손을 비비며 깍지를 껴 맞잡고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단 얼른 등기 서류를 보고 싶군요. 이런 대도시 한복판에, 남부럽지 않은 2층 저택을 제 명의로 갖게 된다니요! 명의만 제 것인 섀넌 님 저택이 아니라, 오롯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집이라니, 하하하…….”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로 러셀의 주책을 가만히 견뎌 내던 섀넌이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다는 듯 곁에 있는 윈터를 향해 눈짓했다.
윈터가 바닥에 있던 커다란 슈트 케이스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묵직한 가방을 보는 러셀의 눈에 기대가 들어찼다.
“일단, 러셀이 원했던 25번가의 그 집은 사지 않았어요.”
“……예?”
마리아를 데리고 아예 나가 살라고 한 순간부터 러셀이 제 신혼집으로 점찍어 둔 2층짜리 대저택은 안타깝게도 새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순식간에 빛을 잃은 러셀의 얼굴을 보던 윈터가 슈트 케이스의 잠금쇠를 풀었다.
“그 대신에 다른 선물을 준비했는데, 러셀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좋아하든 말든 그딴 건 상관없어. 그리고 정확히 말해 두는데, 이건 ‘선물’도 아니고.”
윈터의 말을 단박에 자른 섀넌이 그 내용을 전부 부정했다. 곧 러셀의 눈앞에 현금 더미를 가득 담고 입을 벌린 가방이 내밀어졌다.
“섀넌 님, 이, 이게 무슨…….”
“무기한 휴가.”
이 의아하고도 이상한 순간을 섀넌이 짧게 명명했다.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러셀을 향해 윈터가 대신 설명했다.
“출퇴근하지 않아도 돼요. 마리아와 함께 어디든 살고 싶은 곳에서 사세요. 돈도 자력으로 버시고, 밑천이 충분하니까 뭐든 시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
“대신 주기적으로 생존 보고는 꼭 하셔야 하고, 웬만하면 다른 뱀파이어가 있는 지역은 피하시고요. 신분에 관한 서류는 밑바닥에 있어요.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세요.”
윈터의 말이 거듭될수록 러셀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화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본 적 없으시잖아요. 평범하게 가정도 꾸리고, 아이도 만들고, ……물론 이미 생겼지만요. 어쨌든 러셀도 한 번쯤은 평범한 인간의 삶을 누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출퇴근한답시고 툭하면 그 징그러운 애새끼 데려와서 시끄럽게 구는 꼴 보기 싫으니까, 눈에 안 띄는 곳에 처박혀서 멋대로 살라고 해. 등신같이 죽지는 말고.’
……라는 자신의 말을 퍽 예쁘게 포장하는 윈터의 사회성에 섀넌은 나름의 이해심을 발휘하며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이 미간을 움찔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저런.”
“흑…….”
섀넌의 낭패 어린 감탄사 끝에 러셀의 울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꺼흑, 흑, 흑……. 양손에 얼굴을 묻은 러셀이 급기야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섀넌 님께서……, 절 이렇게까지 아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오해야.”
“저는 섀넌 님께서 저를 그저 그런 노예 놈 정도로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맞아.”
“이런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주시다니요…….”
“선물이 아니라니까…….”
“감사합니다, 섀넌 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휴가라지만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제가 비록 굼벵이처럼 느린 놈이지만 섀넌 님께서 부르시면 만사 제치고 눈썹 휘날리도록 달려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연신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는 그를 보다 못한 윈터가 손수건을 건넸다. 한바탕 요란스럽게 코를 푼 러셀이 질척하게 젖은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섀넌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봤다.
저 빌어먹을 걸레짝과 테이블은 윈터를 시켜서 태워 버려야겠다. 그가 더러움에 작게 몸서리치며 윈터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나저나 제가 없으면 이 저택 살림은 누가 합니까? 다른 사람을 고용하실 겁니까? 아시다시피, 우리 섀넌 님께서 좀 까탈스러우셔야죠. 누굴 고용해도 분명 한 달도 못 버틸 텐데…….”
감동을 끝낸 러셀은 이제 섀넌의 면전에서 평소라면 삼켜 버렸을 말을 서슴없이 해 댔다. 손수건에 쥐어짜 낸 눈물 콧물에 겁대가리와 생존본능을 같이 흘려보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은 고용 안 해. 모르는 인간 놈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칠 생각도 없고.”
고개를 끄덕인 러셀이 별안간 윈터 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윈터 님만 고생하시겠군요……. 섀넌 님께서 손 하나 까딱하실 리 없으니…….”
“내가 젊은 애인 부려 먹는 망할 변태 노인으로 보이나?”
예……,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뻔했던 러셀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목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반사적인 행동 반응까지 막지는 못해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뇨……, 그렇게는 안 보입니다. 물론 섀넌 님께서도 퍽 번거로우실 겁니다. 저택 살림이 뭐……, 별것 아닌 일 같아도 신경 쓸 부분이 무척 많거든요.”
윈터 님, 가구 디자인은 늘 세세히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섀넌 님께서 부숴 먹으면 똑같은 걸로 감쪽같이 바꿔 놔야 하거든요……. 조금이라도 디테일이 달라지면 그걸로 또 성질을 엄청 내시니까요……. 찻잎은 개봉하고 한 달이 지나면 무조건 버리세요. 단 하루라도 지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히스테리를 부리신답니다. 그리고 계단 난간에 조금이라도 먼지가 쌓여 있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분노하십니다. 또, 진열장에 있는 술은 반드시 라벨이 보이게, 주종과 지역 순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렬로 두셔야…….
“그만.”
섀넌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는 러셀의 조언을 가장한 넋두리를 일축했다. 더 험한 말이 이어지지 않도록 윈터가 얼른 대꾸했다.
“말씀 안 하셔도 다 알아요, 러셀.”
“아, 물론 그러시겠죠. 두 분이 함께한 세월도 이젠 그리 짧지 않으니까요……. 이것 참, 감회가 정말…….”
“언제까지 계속 떠들 거야.”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슈트 케이스를 쾅 닫은 섀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을 쏟아 냈다.
“단 한 마디라도 더 놀렸다간 이 돈은 다시 회수할 거니까 그리 알아. 머저리 같은 놈. 무일푼으로 손가락이나 빨다가 일가족이 사이좋게 굶어 뒈지고 싶으면 어디 그 아가리를 계속 나불대 보든지.”
“…….”
러셀이 거짓말처럼 입을 닫았다. 이제야 그들 사이에 안온한 침묵이 감돌았다. 착, 착, 슈트 케이스를 닫아 번쩍 든 러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석연찮은 얼굴로 버티는 그를 현관까지 몰아내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침묵은 계속 유지되었다.
“…….”
현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잠시 머뭇거리던 러셀이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급히 적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이렇게 그냥 가야 합니까?」
눈앞에 내밀어진 메모를 본 섀넌이 눈썹을 치켰다. 작별 인사는 얼어 죽을 작별 인사. 심기 불편한 얼굴을 본 러셀이 급히 또 뭔가를 적었다.
「포옹이라도 한 번 할까요?」
섀넌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급히 수첩을 품에 넣은 러셀이 잽싸게 현관 앞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렇게, 러셀은 ‘무기한 휴가’를 떠났다. 아주 그들다운 방식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 * *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다고 하는데, 섀넌은 딱히 알지 못했다. 지난 몇 년간 휴가를 떠났던 러셀이 잠깐 나타나 약간의 소란을 일으키고 다시 떠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신 조금 짜증 나는 것은 앞으로도 하찮고 잡다한 일들로 윈터가 곁을 비울 때가 많을 거라는 점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 혼자 다 하지 마.”
트레이 위에 올린 빈 찻잔들을 정리하던 윈터가 섀넌을 쳐다봤다.
“그럼 누가 해요?”
“나는 뭐 장식인 줄 알아? 같이 하면 되지. 재정 관리나 우리 신변에 관련된 문제는 앞으로 내가 본격적으로 관리할 거고. ……뭐, 청소도 같이하고.”
“청소요? ……당신이?”
되묻는 윈터의 말투에 어쩐지 미덥지 않은 기색이 묻어났다. 그 반응에 괜히 자존심 상한 섀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라고 평생 청소 안 해 봤을까 봐? 그깟 게 뭐라고. 기숙 학교 생활 경험이 몇 년인데.”
“…….”
물론 그간의 행적이 이런 오해를 낳을 만했으리라는 생각은 한다. 윈터와 함께 사는 동안 굳이 청소 같은 허드렛일은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니까. 변명하자면 자신이 나서기 전에 윈터가 먼저 나섰기 때문이다.
섀넌은 자신이 청소와 아예 담쌓은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윈터에게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은 청소를 못 하는 게 아니다. 단지 직접 하는 것보다는 남을 시키는 데에 더 유능할 뿐이었다.
여전히 못 미더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윈터 앞에서, 그가 보란 듯 테이블 위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 러셀이 온갖 더러운 눈물 콧물을 쏟아 낸 그 손수건이었다.
검지와 엄지로 손수건의 끄트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린 섀넌이 그것을 벽난로에 던졌다. 그리고 성냥에 불을 붙여 그 위로 떨어뜨렸다.
섬유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가 순식간에 코를 찔렀다. 손수건을 집어삼키며 울컥 연기를 토해내는 불길을 보던 섀넌이 약간 의기양양한 태도로 윈터를 돌아봤다.
“봐. 이 정도면 훌륭하지. 나도 청소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야. 눈앞에 더러운 게 보이면 스스로 치울 줄도 알고. 하찮은 인간 놈들이 할 줄 아는 건 나도 똑같이 다 할 줄 안다고.”
“네……, 정말 잘하시네요.”
윈터가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손 좀 씻어야겠군.”
방금 손수건을 만졌던 손을 허공에 애매하게 걸어 둔 섀넌이 찝찝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윈터가 여전히 제 청소 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조금 전 행동 이상으로 딱히 뭘 더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환기 좀 시켜야겠어. 공기가 탁해.”
다짜고짜 합성섬유를 태워 실내 공기를 오염시킨 장본인이 불평하며 밖으로 나가자, 윈터가 말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
휑한 창밖으로 연기가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윈터는 섀넌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용인을 구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다. 물론 완벽한 제 연인은 뭐든 다 잘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능숙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니다. 능숙하지 못하다는 표현은 감히 제 연인에게 쓰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능숙하지 못한 게 아니라, ‘흥미가 없는’ 것으로 하자.
곧 밖에서 아주 깜찍한 소리가 났다. 섀넌이 손을 씻는 소리였다.
-윈터, 욕조에 미리 물 좀 받아 놔.
면적도 얼마 되지 않는 그 작은 손을 씻고 또 씻으며 우아한 말투로 명령을 내리는 그가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
귀여워……. 너무 귀여워. 말아 문 입술 안으로 새삼 벅차오르는 감정을 조용히 삭이는 윈터에게 다시금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너는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얌전히 기다려.
“…….”
-……진짜 귀여운 게 뭔지 네 몸으로 직접 보여 줄 테니까.
아무래도 흘러넘치는 감정이 섀넌에게 감지된 모양이었다. 종종 서로의 감정을 제 것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조금 유감이었다.
섀넌은 여전히 그 자신도 연인에게 귀여움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연인에게 말이다.
윈터는 섀넌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마다 침대 위에서 유독 거칠어진다는 걸 잘 알았다.
“……네, 섀넌. 옷은 미리 벗을까요?”
-그런 당연한 건 묻지 마.
윈터가 빠르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들에게 밤은 무척 짧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