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Running Weave
섀넌, 그리말디.
아아, 어째서 그는 이름마저 섀넌인가.
볼드윈 부인은 이름과 외모가 갖는 상관관계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연령에 걸맞지 않게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남자였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제 취향에 들어맞는, 훌륭한 피조물.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가 오늘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드레스에 신경을 쓰고 가는 거였는데…….
“근데 오늘 그 사람 봤어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아, 그리말디 경?”
양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볼드윈 부인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부인들을 바라봤다. 오전에 전시회를 다녀온 후 평소 친한 부인들과 가진 티 타임에는, 늘 그랬듯 그리말디가 화두에 올랐다.
“항상 옆에 끼고 다니던 커다란 피후견인은 웬일로 안 보이더라고?”
“볼드윈 부인께선 뭐 아는 거 없어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그나마 그들 중 섀넌 그리말디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볼드윈 부인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교계에서 유일하게 그를 파트너 삼은 경험이 있었던 여인이었으므로.
볼드윈 부인이 제게 몰린 시선을 의식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섀넌이 아주 잠시라도 자신과 사교계 파트너로 지냈던 건, 그의 피후견인인 윈터가 제 아들에게 한 짓이 있어서라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아들의 상처가 다 낫자마자 칼같이 자신과의 관계를 끊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피후견인의 진로를 위해 대도시로 이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같던데,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볼드윈 부인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윈터 그리말디가 이튼홀을 졸업한 직후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말이었다.
부인들은 금세 그녀에게 흥미를 잃고선 저들끼리 떠들었다.
“내가 봤을 땐 몸 어디에 하자가 있는 것 같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손을 막 떨고 있더라니까?”
“어머, 혹시 알코올 중독?”
“그거야 모르지. 여하튼 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데도 본체만체하고, 영 이상했어.”
“맞아요. 나도 슬쩍 인사했는데, 눈이 마주쳐 놓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글쎄.”
볼드윈 부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안심했다. 섀넌이 제 인사만 무시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가 제게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웃어 준 게 대체 언제던가.
어느 파티장에서 카드리유를 출 때였고, 좀처럼 다가갈 틈을 주지 않는 그와 유일하게 춤을 출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당시 그가 쓰고 있던 심플한 은테 안경이 매우 잘 어울렸다는 것도 생생히 기억했다. ‘혹시…, 이 저택에서 개를 키우나요?’ 하고 뜬금없는 질문을 해오던 그의 수려한 저음도.
하…, 볼드윈 부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화를 멈춘 부인들의 시선이 순간 그녀에게 몰렸다.
“왜요, 그리말디 경을 생각하니까 저절로 한숨이 나오나 봐?”
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악의 없는 농담이라, 볼드윈 부인도 그저 맥없이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그녀의 허벅지를 약하게 때리며 말했다.
“그래도 부인은, 우리 중에선 그리말디 경 손이라도 잡아 본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 정도면 됐지 뭘.”
볼드윈 부인이 작게 쪼갠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다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랬지…, 그랬었지.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약간 서늘하고 부드러운, 그 기다란 손이 제 손을 단단히 맞잡던 찰나의 느낌은 아직도 늘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서릿발이 풀풀 날려 감히 다가가지도 못할 사람이지만, 그가 정말 이곳을 떠날 생각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볼드윈 부인의 소망과는 달리, 이후 섀넌 그리말디의 행보는 점점 더 이상해지기만 했다.
급기야는 그가 정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교계에 아예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이따금 거리에서 섀넌을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은 눈에 띄게 야윈 그를 보며 소문이 사실임을 확신했으며, 볼드윈 부인은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몇 번이나 그의 저택에 선물이나 초대장을 보내 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참고 참다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그의 저택을 직접 찾아갔던 어느 겨울날.
볼드윈 부인은 황량한 그리말디 저택 앞에 수북이 쌓인 우편물을 마주했다.
저택은 텅 비어 있었으며, 그렇다고 매물로 내놓은 것도 아니었다. 이후 그와 관련한 소식을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어떤 만남은 예기치 못한 소나기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차양이 드리워진 레스토랑 앞으로 뛰어든 볼드윈 부인이 옷 위를 적신 빗물을 털어 냈다. 빗물에 젖은 흰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하며 이리저리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그녀의 옆으로 누군가 훌쩍 다가왔다.
저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청년을 위해 옆으로 비켜선 볼드윈 부인이 무심결에 그를 힐끗 일별했다.
“…….”
정면으로 돌아갔던 볼드윈 부인의 고개가 순간 멈칫하며 다시 남자를 향했다.
“…아.”
저도 모르게 나온 탄식에, 남자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밤처럼 새까만 머리칼, 붉은 눈, 흠결 없이 하얀 피부에 차가운 눈매.
볼드윈 부인이 제 눈을 의심하며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가볍게 묵례하며 입꼬리만 올려 보이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모르는 사람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얼른 시선을 돌린 볼드윈 부인이 어깨에 걸친 숄을 여미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보기만 했을까. 한때는 꽤 마음을 애태우기도 했던 남자였다.
볼드윈 부인이 충동적으로 그를 불러 보았다.
“……그리말디?”
차양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를 가늠하던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볼드윈 부인을 향해 돌아갔다.
내리깐 눈이 그녀의 흰 머리와 이마를 훑다가 멈췄다. 마주친 시선에 볼드윈 부인이 숄을 여미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아서.”
남자가 의례적인 미소를 띤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본 늙은이가 길에서 괜히 말을 붙이니 달갑지 않을 거라는 건 이해하지만, 볼드윈 부인은 어쩐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말디 일가 사람 아닌가요?”
“…….”
여전히 비 내리는 거리에 시선을 걸어 둔 채, 남자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괜스레 무안해진 볼드윈 부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많이 닮아서. 늙은이의 착각이라면 그냥 웃어 넘겨요. 오래 살다 보면 가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으니까.”
남자에게선 이번에도 대답 대신 성의 없는 묵례만 돌아왔다. 차양 밖으로 내리는 비를 만져 보던 그가 이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어쩐지 서늘할 것 같은, 그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해 두고 있던 볼드윈 부인이 이내 갈 곳 없는 눈을 이리저리 방황하며 계속 말을 붙였다.
“예전에, 우리 아들 교육 때문에 잠깐 케인타운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거든. 케인타운 알아요? 남부에 있는데, …아, 지금은 지명이 바뀌었지. 여하튼 그때 알았던 남자와 댁이 무척 닮았어요. 흔치 않은 외모인데…, 그 눈 색도 그렇고. ……그래서 혹시 같은 일가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변명하듯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보니, 볼드윈 부인은 그제야 남자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말을 할 때마다 그저 의례적인 미소만 지어 보일 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저 혼자 떠든 게 창피해진 볼드윈 부인이 괜히 헛기침하며 숄을 여몄다.
“비가 언제 그칠는지, 이것 참…….”
그때, 검은 사륜마차가 젖은 거리를 미끄러지듯 굴러오다 멈춰섰다. 이내 마차 문이 열리고, 검은 우산이 촥 펼쳐졌다.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볼드윈 부인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어쩐지 조금 낭패한 듯한 표정이었다.
“섀넌.”
그의 앞쪽에서 들려오는 이름에, 볼드윈 부인은 이번엔 제 청력을 의심했다. 손으로 제 머리 위를 가볍게 가린 남자가 차양 밖으로 나오자, 방금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그가 방금 섀넌이라고 부른 사내의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
“비 다 맞겠어요.”
볼드윈 부인의 얼굴은 이제 거의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체면 따위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녀의 시선은 이제 두 사람에게 완전히 못 박혔다.
두 남자의 모습이 그 옛날 케인타운에서 살던 ‘그들’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볼드윈 부인은 상대에게 우산을 더 기울여 씌워 주는 은백색 머리칼의 사내와, 제게 기운 우산을 다시 지그시 밀어내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세상에 저렇게 큰 체구에, 저런 수려한 외모에 은백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흔할까.
저 검은 머리칼의 아름다운 사내는 또 어떻고.
게다가 방금 저 남자가 ‘섀넌’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던가.
“……세상에.”
볼드윈 부인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작게 탄식했다. 검은 머리가 은백색 머리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연인이라도 되는 듯 상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은백색 머리의 시선이 흘긋 볼드윈 부인을 향했다.
생면부지의 늙은이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그들은 볼드윈 부인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검은 머리를 먼저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올라탄 은백색 머리의 시선이 다시 볼드윈 부인에게 짧게 향했다가 흩어졌다.
탁, 마차 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볼드윈 부인은 자신이 길 한복판에서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검은 차체는 이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비에 젖은 텅 빈 거리에 시선이 못 박힌 채, 볼드윈 부인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머니, 제가 너무 늦었지요?”
그녀의 아들 로빈이 우산을 씌워 주며 다가왔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여전히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얼굴로, 볼드윈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얘, 너 아직 머리에 그 흉터 있니?”
뜬금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힌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흉터요?”
“왜, 너 어릴 때 친구랑 싸워서 병원에 입원한 적 있었잖아. 닥터 코넬, 기억하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로빈이 뒤늦게 떠오른 일이 있었는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대체 언제적 일인가.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제 어머니의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었고 자신 또한 곧 손주를 볼 나이인데, 이제 와 뜬금없이 웬 옛날얘기를 다 꺼내시지.
“어머니도 참, 기억력도 좋으셔. 그 일은 갑자기 왜요?”
눈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웃는 아들을 보며, 볼드윈 부인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생각 나서.”
그녀가 제 아들의 팔에 팔짱을 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 쳤다.
“늙으니 나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야.”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어떤 만남은, 한여름 백주의 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너무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나면, 사람은 자연스레 제가 본 현실을 부정하는 법이었다.
* * *
“밖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랬잖아.”
비에 살짝 젖은 윈터의 어깨를 털어 주며, 섀넌이 볼멘소리를 했다. 윈터가 비에 젖은 우산을 마차 벽에 기대어 두며 말했다.
“옆에 볼드윈 부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볼드윈 부인?”
“아까 그 할머니요.”
눈을 가늘게 뜬 섀넌이 생각에 잠겼다. 제 얼굴을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언젠가 알던 사람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윈터에게 듣고 나서야 그 노인이 누구였는지 기억 난 섀넌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네 성년식 파트너는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남의 어머니 얼굴은 잘도 기억하네.”
윈터가 그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겨왔다.
“섀넌을 침실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잊어요?”
“…….”
정말 별걸 다 기억하는군.
그에게 몸을 기댄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 부인 아들 머리를 박살 낼 뻔한 건 기억 안 나고?”
“…….”
윈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섀넌이 그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
“못 들은 척하지 마.”
“밖에 좀 봐요, 섀넌. 비가 많이 와요.”
윈터가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괜히 말을 돌리는 윈터가 어이없어서, 섀넌은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의 귀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아아.”
그가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며 웃었다.
“어릴 때 얘긴 꺼내지 마세요.”
누구나 어릴 때를 생각하면 수치스러운 기억이 몇 개쯤은 있다. 그리고 섀넌은 제 연인인 동시에 자신의 철없던 어린 시절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불공평해.”
윈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섀넌이 짧게 웃으며 그의 뺨을 꼬집었다.
“…오늘 면접이 마지막이죠?”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는 그의 질문에 결국 섀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섀넌은 윈터가 다니고 있는 명문대의 하반기 입학 면접을 볼 예정이었다.
‘네가 피아노를 잘 쳤으면 좋겠어, 윈터. 내가 듣고 싶은 곡이 있을 때 네가 그 곡을 쳐줬으면 좋겠거든. 건반 누르는 손도 구경하고, 연주하는 얼굴도 보고 싶어.’
2년 전 섀넌이 윈터에게 피아노를 쳐주며 했던 아주 사소한 말 때문에, 윈터는 작년부터 음대에 입학해 공부 중이었다.
처음에 섀넌은 그런 윈터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
물론 단순히 피아노를 치는 것 정도야 제가 직접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학위도 따고 그에 따라오는 사회적인 명성과 더불어 멋진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다니는 학교는 수많은 궁정 음악가를 배출한 명문 음대였다. 단지 자신에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어려운 명문대 입학시험을 치르고, 성실히 학업에 임하는 모습이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금 지나니 학교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잠시라도 그와 떨어져 있는 게 싫었던 섀넌은 결국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떡해요?”
윈터가 그의 옷깃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그럴 일 없어.”
섀넌이 짧게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여기 수석 졸업생보다 내가 더 피아노를 잘 칠걸.”
미혹을 쓰거나 학교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는 따위의 수고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만큼 섀넌은 자신만만했고, 면접 결과 또한 그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 *
면접을 치르고 나온 섀넌이 저 앞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윈터를 발견했다. 건물의 중앙 계단을 빠르게 내려온 섀넌이 그에게 달려갔다.
벤치에서 일어난 윈터가 제게 달려드는 섀넌의 허리를 양팔로 폭 끌어안았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쪽, 하고 부딪은 윈터가 물었다.
“잘 봤어요?”
“당연하지.”
물론 면접 태도에서 약간의 마이너스가 있긴 했지만.
섀넌은 뒷얘기는 쏙 빼놓은 채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습관적으로 키스를 하려던 섀넌은 이곳이 대학 교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그에게서 물러났다.
아직 환한 낮이었고, 갑작스럽게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면서 학생들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가 윈터의 손을 잡고 이끌며 말했다.
“좀 시끄러워지겠는데.”
한 가문의 형제가 이런 명문대에 함께 입학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다른 학교에 입학하거나 같은 시기를 피하는 것이 귀족들의 관례였다.
그런데 형제가 한 학교에, 그것도 같은 학과를 전공하게 되었으니 한동안은 이목이 쏠릴 터다.
“그래도 좋아요. 이제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윈터의 말에 섀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윈터가 걸음을 멈췄다. 잡고 있던 손이 뒤로 당겨지자 섀넌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방금,”
윈터가 옅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얼른 가요, 그가 걸음을 다시 옮기며 애써 웃었다.
* * *
대도시의 화이트팽은 다른 변두리 지역과 달리 매우 화려했다.
연고 없는 노동자계급보다는 귀족이나 부호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사냥보다는 아지트의 역할에 조금 더 충실한 공간이었다.
“크롬 가 레스토랑 앞에서 볼드윈 부인을 마주쳤어.”
섀넌이 제 맞은편에 앉은 카일에게 말했다.
“…음?”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카일을 보며,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케인타운에 살 때 네 사업 도와준 부인 말이야.”
“아하.”
그래도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는 표정으로, 카일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대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어?”
테이블 밑으로 제게 다가오는 윈터의 손을 깍지 껴 잡아 준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 시대라니. 그래 봐야 고작 30여 년 전인데.”
당시 왕위에 오른 자가 아직도 왕을 해 먹고 있었다.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 부인은 이미 꽤 나이가 많지 않았나? 윈터만 한 애가 있었잖아.”
“70대 백발노인이 되었던데.”
하…, 카일이 길게 탄식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술이 쓸데없이 계속 발전하니까 인간들 수명도 쓸데없이 계속 늘어난다니까. 옛날엔 70이 뭐야, 40대만 넘어도 장수한단 소리 들었는데. 전염병 한 번 돌면 마을 하나가 싹 다 전멸이었다고.”
“시답잖은 소리. 어쨌든 그 부인이 여기에,”
섀넌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제 손을 잡고 있던 윈터의 손에 별안간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섀넌이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은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으나, 섀넌은 금세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섀넌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 부인이 여기에 계속 사는 건지, 아니면 잠시 머무르는 건지 알아봐야,”
그러나 그는 결국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별안간 제 쪽으로 확 기운 윈터의 몸에 밀린 탓이었다.
카일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섀넌과 윈터를 번갈아 바라봤다.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자세가 공공장소에서 보기엔 영 껄끄러웠다. 섀넌을 거의 덮칠 기세로 밀어붙인 윈터가 그에게 키스하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어, 강아지야. 아무리 네 애인이 좋아도 지금 여긴 보는 눈이 많거든.”
그가 눈만 굴려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목소릴 낮춰 속삭였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너네 지금 형제야.”
빠르게 등 뒤를 짚어 다행히도 완전히 드러눕지 않은 섀넌이 윈터의 가슴팍을 슬쩍 밀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윈터.”
윈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섀넌이 차분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방이 뚫린 홀에서, 온갖 귀족과 대부호들이 오가는 가운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만월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발정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혹여 발정기가 왔다고 해도, 윈터는 이런 식으로 공공장소에서 무식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제 연인은 적어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절제하고 참을 줄 아는 남자였다.
“……죄송해요.”
작게 사과한 윈터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그의 정강이에 부딪혀 밀린 테이블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잠깐 이목을 끌었다. 제 입을 손으로 가린 윈터가 ‘잠깐 실례할게요.’ 하는 말을 겨우 남기고는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섀넌이 멀어지는 윈터를 보다가, 카일과 시선을 마주했다. 섀넌보다 더 당황했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인 카일이 난감한 얼굴로 양손을 들어 보이더니 검지로 제 아래를 슬쩍 가리켰다.
“그, ……쟤 그거 아냐?”
아래를 가리킨 손가락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발정기?”
“아니야.”
섀넌이 단호하게 일축했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짐승 취급하지 마.”
“…아니 방금, 살짝 분간 못 한 것 같은데?”
눈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카일을 노려본 섀넌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너도 그 부인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야겠어.”
섀넌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이 어색한 얼굴로 얼른 가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성큼 홀을 가로지른 섀넌이 조금 전 윈터가 나간 후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억센 손길이 그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벽에 등을 부딪친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윈터를 쳐다봤다.
“무슨 짓이야, 밖에서.”
“하아…, 섀넌…….”
얼굴로 쏟아지는 윈터의 숨결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나 몸이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문제인데. 꼭,”
섀넌이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발정기가 온 것 같잖아.”
카일에겐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지만, 하는 행동이나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을 봐선 명백한 발정기였다. 그런데 그때 윈터가 이상한 소릴 했다.
“당신 목소리밖에 안 들려요.”
“……뭐?”
“당신 냄새만 나고…, 당신, ……하아.”
윈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겹치려 했다. 그를 밀어낸 섀넌이 주변을 살폈다.
“……일단 집으로 가자.”
그가 윈터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 * *
윈터가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면접을 보고 나온 섀넌이 제게 안겼을 때였다.
평소였다면 섀넌의 체취에 섞인 다른 냄새가 느껴졌을 텐데, 그 순간엔 어쩐지 감각이 둔해지며 오직 섀넌의 체취만이 코끝에 짙게 스몄다.
그리고 그다음엔 목소리였다.
도시엔 많은 소리가 있고, 인간보다 오감이 예민한 귀에는 잡다한 소음이 늘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며 오직 귓가에 그의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과 섀넌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그 기이한 증상이 심해진 건 섀넌이 카일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멀어지며 오직 섀넌에게만 온 신경세포가 붙들려 있는 듯한 느낌.
그 상태가 지속되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섀넌만 보였다. 그에게 닿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루트로 러셀에게 전보를 보내 둘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섀넌이 침착하게 그의 뺨을 쓸며 말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 또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윈터의 몸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쇠하거나 병들 일 없는 불멸자의 몸에 이상이 생기다니.
그건 자신이 윈터의 순리를 거스르고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일까.
“……아니지.”
섀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에게 전보를 보내는 것보다 의학 지식이 뛰어난 다른 뱀파이어를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러셀도 인간인데 그가 뭘 알겠는가.
“일단 화이트팽에 가서…,”
“섀넌.”
확 밀어붙이는 몸에 밀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은 섀넌이 제 몸을 덮은 윈터를 바라봤다.
“가지 마세요…, 그냥 곁에 있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해야 할 일은 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
윈터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는 열이 오르다 못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발정기라기보다는 심한 열병을 앓는 인간처럼 보였다.
섀넌이 일단 그의 옷을 벗겼다. 땀에 젖어 축축한 셔츠의 단추를 푸는데 윈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샤…, 나 너무 이상해요.”
“…….”
“하아…, 진짜 왜 이러지.”
옷을 벗기려던 건 섀넌인데, 이제는 윈터가 그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아니, 잡아 뜯고 있었다.
……이래서, 학교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섀넌은 홀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일단 병을 핑계로 휴학을 시키고, 원인을 파악해야겠다. 문제를 알면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해 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선 같이 죽더라도 어떻게든…….
하아, 더 가팔라진 숨이 쏟아졌다. 형편없이 갈가리 찢긴 섀넌의 옷이 소파 아래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윈터, 잠깐, 뭐 하는,”
섀넌이 숨을 멈췄다. 그의 손목을 결박한 윈터가 온몸으로 그를 짓눌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섀넌은 별안간 모든 감각이 멀어지는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절정에 달했을 때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과 비슷했으나, 그보다 훨씬 짙고 강력했다.
“……샤.”
마주친 시선이 뜨거웠다. 섀넌은 그 순간 윈터의 눈에 화인처럼 새겨지는 무언가를 목도했다. 아니, 화인이 새겨지는 것은 그의 눈이기도 했고 제 눈이기도 했다.
아, 섀넌이 짧게 신음했다. 마치 식물의 줄기가 접붙는 것처럼, 온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며 윈터를 향해 휙 딸려 갔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울 만큼 생경한 이끌림이었다. 그것은 닫힌 창을 깨부수고 들이쳐 온몸을 적시는 소나기였고, 소리 없이 스미는 달빛이며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손아귀였다.
통제되지 않는 감각이 윈터에게 모조리 넘어갔다.
섀넌은 윈터의 시야를 통해 손목이 결박된 채 짓눌려 있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고, 동시에 윈터의 모습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온몸이 불에 지져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오후에 잠깐 소나기가 쏟아졌던 어느 여름날.
섀넌은 온전히 윈터의 손안에 떨어졌다.
각인의 굴레였다.
* * *
거꾸로 뒤집힌 시야에 까만 창이 보였다. 어느새 밤이었다. 고개가 한껏 뒤로 꺾인 채 깨어난 섀넌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커다란 손이 제 뒤통수를 받쳐 주고 나서야 고개를 세울 수 있었다.
“……윈터.”
섀넌은 여전히 긴 소파에 드러누워 윈터의 몸에 짓눌려 있었다. 눈을 내리깐 윈터가 그의 가슴팍을 천천히 쓸며 낮게 말했다.
“어떡해요, 섀넌.”
“흐읏.”
섀넌이 몸서리치며 신음했다. 윈터의 음성이 온몸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윈터가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흘렸다.
“괜찮아요?”
섀넌이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윈터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랜 시간 잠에 빠져 있다 건져진 것처럼,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섀넌이 겨우 말을 내뱉었다.
“……나 좀 일으켜 봐.”
등 밑으로 뜨거운 손이 들어오고, 상체가 천천히 들렸다. 그를 안아 제 품으로 당겨 안은 윈터가 뒤통수를 감쌌다.
안정적으로 윈터의 어깨에 뺨을 기댄 섀넌이 오래도록 숨을 골랐다.
“……평생 각인할 일 없을 거라며.”
한참 이어지던 침묵이 깨졌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섀넌은 제 몸을 옭아매던 것의 정체를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각인이 아니라면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대체 뭐겠는가.
윈터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 그 누구보다 밀접해진 듯한 느낌.
자석처럼 그에게 당겨지고, 제 신경이 그의 신경과 가닥가닥 접붙어 뒤섞인 느낌.
이게 각인이 아니고서야…….
윈터가 각인을 한다면 그건 당연히 일방적인 현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분명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자신은 늑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윈터의 각인이 제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지금껏 제가 뿌리내리고 있던 세계의 모든 것을 뒤흔들 만큼, 막대한 굴레가.
“……어떡해요, 섀넌.”
윈터의 음성이 온몸을 옥죄었다. 섀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떡해요….”
“읏….”
“……이제 당신 나 없으면 못 살아요.”
아,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은 섀넌이 몸을 뒤틀었다. 원래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이렇게 자극적이었던가?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계속 이 상태는 아닐 테니까….”
“하으, …말, 하지 마.”
희게 질린 손끝이 윈터의 어깨를 긁어 내렸다.
다행이다.
섀넌은 별안간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제 생각인지 윈터의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윈터가 제게 각인한 건 다행인 일이었고, 윈터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나 늦게,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불쑥 찾아오다니….
각인마저 어쩜 이리도 그다울까.
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겁고 피곤했다. 섀넌은 윈터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좀 더 자요, 섀넌.
좀 더 쉬어요.
* * *
며칠 뒤 입학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러나 우편함에 툭 꽂힌 통지서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통지서를 확인해야 할 당사자들이 다른 유희에 푹 빠져 있는 탓이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침실에 낮은 웃음소리가 깔렸다. 섀넌이 윈터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들은 벌써 이레째 접붙어 있었다.
만월도, 발정기도 아닌 날에.
내키는 대로 섹스를 하고, 서로 끊임없이 몸을 부대끼는 나날이었다. 온전히 서로를 향해 있는 본능은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섀넌은 각인 이후 윈터를 향해 더욱 예민하게 열린 감각을 충분히 음미했다. 다른 것보다 더 우선으로 와 닿는 그의 목소리와 체취가 생경했다. 때로는 그의 감정이 자기 것처럼 느껴졌고, 반대로 제 감정이 그에게 동화되는 순간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평생 누구와도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유대감이자, 황홀한 일체감이었다.
“…이래서 학교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사이가 엄청 좋은 형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남의 일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윈터는 사람들 또한 자신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을 거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섀넌은 그에게, 또는 자신에게 얼마나 쉽게 시선이 들러붙는지 잘 알았다.
“사람들이 너처럼 그렇게 순진하진 않아, 윈터.”
윈터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던 섀넌이 엄지 끝으로 그의 손금을 덧그렸다. 그러다 문득, 잊었던 것을 떠올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합격 통지서 올 때가 됐는데.”
“확인해 볼까요?”
섀넌이 웃음을 띤 채 그의 손을 잡고 침대 밖으로 내려왔다. 셔츠와 바지를 대강 주워 입고 가운을 걸친 두 사람이 정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우편함에는 밀린 편지가 쌓여 있었다. 합격 통지서를 발견한 섀넌이 놀랄 것도 없이 그것을 윈터에게 건네주고, 다른 편지들을 확인했다.
윈터의 입학과 동시에 짧은 휴가를 떠났던 러셀이 시일 내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보내왔고, 나머지는 각종 모임 초대장과 시에서 보낸 공문 같은 것들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섀넌이 편지들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뒤따라오던 윈터가 습관적으로 그것들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의 등 뒤로 섀넌의 몸이 붙었다. 그가 윈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기껏 정돈한 편지들을 손끝으로 다시 툭툭 튕겨 냈다. 자길 봐 달라는 심술이었다.
웃음을 흘린 윈터가 몸을 돌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심장 박동을 타고 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저를 향한 섀넌의 감정은 그동안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애틋하고, 어딘지 아릿하며 애달팠다. 그의 눈에 자신은 몹시 사랑스러웠고, 이제 윈터는 온전히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윈터는 섀넌의 미지근한 온기와 체취를 느끼는 동시에 제게 열려 있는 그의 감정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섀넌은 늑대와 각인으로 묶인 최초의 불멸자다.
마치 자신이 최초로 그에게서 비롯된 존재가 된 것처럼.
윈터에게 그것은 단순한 해피 엔딩을 넘어선 기적이었다.
그 어떤 이변도 사고도 없을, ……언제까지고 불변할 행복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