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Natural Spin Turn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 앉은 갈리나가 저를 보고 있는 장로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긴 숨을 내뱉었다.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과 현 시라트의 상황에 혼란스러우실 줄로 압니다.”
갈리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항의와 비슷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슬라는 지금 어디에 있소?”
“지하 수용소에 가둬 두었습니다.”
“그리말디는 원래부터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거요? 그걸 왜 우리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갈리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하슬라가 언제부터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하슬라를 지지하던 세력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요?”
“검은 늑대들의 개체 수가 아직 많아요. 그들을 다 가둬 두기엔 수용소가 부족할 겁니다.”
“아직 잡히지 않아 숲에 은신한 이들도 많습니다.”
“윈터 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항간엔 죽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불멸자들은 왜 아직도 시라트에서 나가질 않는 거요? 벌써 보름이 넘었습니다! 붉은 눈 까마귀들을 진정시키느라 계속 연기를 피우는 것도 못 할 짓이에요!”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말을 한참이나 가만히 듣던 갈리나가 조용히 손만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하슬라가 자신들을 기습하고, 서쪽 외곽 숲까지 쫓겨나고, 윈터가 돌아오고, 부족한 병력으로 철의 요새를 뚫고 치열하게 부딪혔던 순간은 통틀어 열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뒷수습은 그의 몇십 배가 더 걸릴 테고, 설원을 적신 전흔은 그보다 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본래 전쟁이란 그 뒤에 남는 자들의 고통이 긴 법이었다.
“하슬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해 성곽에 효수할 겁니다.”
갈리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과거에 다리야 님이 당했던 것처럼.”
장로들이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쳐다봤다. 하슬라와 함께 이 연회장에 갇혀 생사의 갈림길을 앞에 두고 지샜던 밤, 그날 나타난 소름 끼치는 뱀파이어와 그가 남긴 흔적들이 아직도 석벽 곳곳에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여기에 머무는 것을 문제 삼지 마세요. 그들이 없었다면 지하 수용소에 있는 건 하슬라가 아니라 우리가 되었을 테니까요.”
“…….”
갈리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윈터 자하카는,”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갈까 봐, 윈터의 죽음과 그 변화를 목격한 늑대들을 아무도 모르게 가둬놓은 갈리나는 아직 세상에 그 일을 밝히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윈터 자하카는 결국 죽었다, 아니면 윈터 자하카는 불멸자가 되었다, 그것도 아니면 윈터 자하카는 아직 살아있다.
세 가지 모두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사실이었으나, 세간에 알리기엔 전부 부적절한 말이었다.
“일단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민가를 보수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다음에,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윈터 님은 결국 죽은 겁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거라도 말해 달라는데 그게 힘든 건가요?”
“……아직 모릅니다.”
갈리나의 대답에, 연회장이 순식간에 달갑지 않은 말들로 웅성거렸다.
전쟁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나도록 자하카의 생사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들은 갈리나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필멸자가, 그것도 늑대족이, …불멸자로 화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일이 세간에 밝혀지는 건 윈터에게도 섀넌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그 두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지금, 자신이 멋대로 입을 놀릴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받을 도움 다 받고 나니까 이제 와서 우리가 필요 없게 된 건가? 대체 왜 우리한테 아무런 말도 해 주질 않…!”
그중 화를 이기지 못한 장로 하나가 연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게자르 가문의 병사들이 빠르게 그를 막아섰다.
무장한 이들이 일렬로 연단을 막고 서자, 연회장 안은 이전과 다른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침묵이 깔린 장내를 둘러보던 갈리나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전란으로 무너진 민가를 재건하는 일에 대해 의논해 봅시다. 이 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마세요.”
* * *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섀넌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흡혈을 해야 몸이 회복될 텐데 이 설원에서 늑대족을 상대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실 당장 시라트 밖으로 나갈 기력조차 없었다.
뼈와 핏줄이 튀어나온 손등이 꼭 늙은이의 손 같았다. 자신이 늙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섀넌은 쓰게 웃음을 흘렸다.
그때 침실 문을 열고 윈터가 들어섰다. 섀넌과 눈이 마주친 그가 조금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췄다가,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투박한 백랍 쟁반에 얹어진 큰 잔을 본 섀넌이 눈을 옅게 찡그렸다. 윈터가 난처하게 웃으며 침대 옆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걱정 마세요, 깨끗해요.”
“여기서 나오는 건 뭐든 마시기 싫다니까. 대체 뭘 가져온,”
제게 내밀어지는 잔 안을 들여다본 섀넌이 순간 말을 멈췄다. 이 냄새를 못 맡다니, 제 몸이 넝마가 되긴 한 모양이다.
“……인간의 피잖아.”
새빨간 피가 가득 담긴 큰 잔을 내려다보며, 섀넌이 낮게 말했다.
“시라트 밖까지 나갔다 오는 게 이제는 몇 시간도 안 걸리더라고요. 당신을 데려갈까 생각해 봤는데…, 아직은 좀 위험할 것 같아서.”
윈터의 설명을 들으며, 섀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잔 안을 들여다봤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신선한 피였다.
“어떻게 이럴 생각을 했어.”
피를 컵에 담아 마신다는 발상 자체가 섀넌은 너무도 낯설어 황당할 지경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가르쳐 줬어요.”
“어떻게 한 건데.”
윈터가 눈을 내리깔며 머뭇거렸다.
“……그런 건 묻지 마세요.”
하, 섀넌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 무슨 내숭을 부리는 거야. 앞으로 숱하게 같이 사냥을 하게 될 텐데, 계속 저럴 건가.
섀넌이 잔을 받아들었다. 진흙을 구워 만든 두꺼운 잔이 너무 무거워서, 그의 손목이 힘없이 꺾이자 윈터가 조심스레 받쳐 주었다.
섀넌은 낯선 기분으로 그것을 마셨다. 이렇게 마셔도 흡수가 될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알려 준 거라니 전혀 소용없는 짓은 아니겠지….
“……음.”
제 얼굴만큼 큰 잔의 반을 비운 섀넌이 나른하게 신음을 흘리며 잔에서 입술을 뗐다.
그걸 응시하는 윈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간 섀넌이 그것을 비우는 동안, 입술 안쪽을 꽉 깨문 윈터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생각보다 괜찮네.”
섀넌이 비운 잔을 윈터에게 내밀며 말했다.
파스락, 무심결에 그것을 잡은 윈터의 손에서 뭉개지듯 깨져버린 잔이 침대와 바닥으로 쨍그랑 떨어졌다.
“…….”
잔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피가 윈터의 손을 적셨다. 허공에 애매하게 걸린 손이 그대로 굳었다. 잔을 가져오는 내내 의식하고 조심했는데, 조금만 방심해도 이렇게 되어 버린다.
“아직 힘 조절은 잘 안 되는 게 당연한 거야.”
섀넌이 침착하게 말하며 그 손을 잡았다. 그가 천천히 윈터의 손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묻은 피를 혀로 할짝이자, 윈터의 목과 어깨를 잇는 승모근이 바짝 곤두서는 게 보였다.
“흡혈은 해 봤어?”
“……아뇨, 아직.”
여전히 윈터의 손에 제 입술을 묻은 채, 섀넌이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치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뱀파이어가 얼마나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지 섀넌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이 또한 당연히 그러할진대, 아직 흡혈을 한 번도 안 해 봤다니.
“왜?”
아이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덜컥 놀란 섀넌이 물었다.
“……다 나으면 하려고요.”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섀넌이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그의 말 앞에 생략된 주어가 자신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인간의 피를 이렇게 잔에 담아 올 정도면 사냥을 못 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 식욕을 미련하게 참고 있었단 말인가.
“네가 굶는다고 내가 빨리 낫는 건 아니야, 윈터.”
“당장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당신을 놔두고 제가 어떻게 배를 채우겠어요.”
진지한 윈터의 얼굴을 보며, 섀넌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대체 그 갈증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참는다고 참아지나. 보통은 태어나자마자 며칠 사이에 수십의 인간을 학살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죽음에서 비롯된 존재’라고 하는 거다.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의 손에서 핥은 인간의 피가 아직 혀끝에 맴돌고 있었다.
그가 윈터의 뒤통수를 당겨 기습적으로 입술을 겹쳤다.
놀라 굳은 윈터가 양손을 허공에 애매하게 걸어 둔 채 멈췄다. 입술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혀에서 형언할 수 없는 맛이 감돌았다.
“흐, 읏.”
윈터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뒤챘다. 그의 입 안을 짧게 헤집고 떨어진 섀넌이 타액에 젖은 입가를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이런 맛이야.”
“…….”
“흡혈을 하면 더 좋겠지.”
숱하게 먹어온 날고기에서 느끼던 피 맛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좀 더 달콤한…, 아니, 달콤하다기엔 너무, 청량하고, 짙은……. 윈터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필멸자였던 자신이 알던 그 맛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자신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걸 통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섀넌은 불멸자로서 첫 피 맛을 본 제 아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새빨간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홍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숨이 진정되지 않은 윈터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헐떡였다.
그가 느끼는 미각은 당연히 그 전과는 다를 것이다.
처음 사냥하는 순간도 직접 봤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제 아이는 어떤 방식으로 사냥을 했을지 궁금했고, 그 첫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다. 물론 직접 흡혈을 한 게 아니라 컵에 피를 담아 왔으니 그리 온건한 사냥은 아니었으리라.
“흥분으로 눈이 돌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음껏 식욕을 채워 둬.”
섀넌이 그의 뺨을 잡고 당부했다.
“넌 지금 누구보다 강해야 해. 실제로 강하기도 하고.”
갓 태어난 뱀파이어들의 힘이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그 혈기와 체력만큼은 그 어느 뱀파이어들보다 월등하다.
섀넌이 가볍게 웃으며 윈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야 네가 날 지켜 주지.”
여전히 격렬하게 떨리는 호흡을 가늘게 흘리며, 윈터가 가까스로 목소릴 쥐어짰다.
“……알겠,”
그러나 애써 내뱉은 것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섀넌의 입술에 삼켜졌다.
“샤, 잠, 잠ㄲ…….”
윈터의 말을 무시한 채, 섀넌이 웃으며 그를 더 당겨 왔다. 아주 약한 힘이었음에도 마치 불가항력인 것처럼, 윈터는 쉽게 끌려 왔다.
그런 제 아이를 보며 웃음을 흘린 섀넌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겹쳤다. 차마 그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윈터가 그대로 굳었다.
“사냥은 어떻게 했어? …미혹은, 써 봤어?”
섀넌이 입술을 맞댄 채 조근조근 속삭였다.
“아뇨, …그냥, 읏…….”
그러나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빳빳하게 굳은 아이의 뺨을 잡아 입술 틈새를 가르고 혀를 옭아매자, 짙은 숨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겹치는 아이의 몸이 달뜨는 게 섀넌에게도 느껴졌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으며 혀로 핥고, 느리게 진입한 혀가 입천장과 뺨 안쪽 점막을 부드럽게 비볐다.
“흡, 읏…….”
섀넌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어느 순간 윈터가 뒤로 확 물러났다.
이제 막 그의 가슴을 만지려던 섀넌의 손이 허공을 움켰다.
침실 문 앞까지 순식간에 물러난 윈터가 제 입을 덮은 채 웅얼거렸다.
“안 돼요, 섀넌.”
“…….”
섀넌이 허공에 걸린 제 손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래, 뭐, 안 되는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저렇게 멀어져 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예전에 자신이 저런 식으로 멀어졌을 때 윈터의 기분도 이랬을까.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낮게 물었다.
“그냥 조금만 물고 빨다 놔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돼?”
윈터의 얼굴은 그 커다란 손에 하관이 가려져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호했지만, 고개를 젓는 모습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섀넌이 말없이 낙담했다.
아니, 제가 뭐 섹스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입술만 조금 빨겠다는데 그것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는 건가?
“하…….”
그가 앙상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아이는 까딱하면 저번처럼 제 어깨를 으스러뜨릴까 겁을 내는 듯했다.
“알았어. 안 건드릴 테니까 이리 와.”
윈터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셋 세기 전에 와. 안 그러면 확 덮쳐 버릴 거니까. 하나.”
순식간에 섀넌의 앞으로 다가온 윈터가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섀넌이 윈터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빨리 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도요.”
윈터가 침대 시트를 조용히 움키며 대답했다.
“그래도 첫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방금 잔을 부쉈는데요…?”
“…뭐, 적어도 날 만질 땐 더 조심하니까.”
그가 애꿎은 침대 시트를 쥔 윈터의 손을 가져가 제 뺨을 만지게 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손끝이 마른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섀넌은 그 손을 아주 느리게 아래로 내려 제 귓불과 목덜미, 가슴팍을 스치고 허리를 쓸어내리게 했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셔츠 아래를 파고들다 흠칫 물러나길 반복했다.
“넌 날 절대 해치지 않아, 윈터.”
“…….”
“나는 널 믿는데, 너는 너 자신을 왜 그리 못 믿어.”
윈터의 손에 제 손을 지그시 겹친 섀넌이 제 옷 안으로 그의 손을 넣었다. 이내 커다란 손이 홀쭉한 배를 쓰다듬었다.
윈터의 손은 긴장으로 땀에 젖어 촉촉했다. 배를 쓸던 손이 갈빗대가 앙상한 위를 지나 가슴팍을 스쳤다.
섀넌은 미동도 없이 그가 만지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조금만 움직임이 어긋나도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라,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만지면 되는 거야.”
섀넌의 가슴에 손을 살짝 얹은 채, 윈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렸다. 이마 위로 솜털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아 간질였다. 곧은 콧날과 윗입술로 뜨거운 호흡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뺨에 얹어진 입술의 감촉에 섀넌은 눈을 내리감았다. 스치는 콧날이 귓불과 목덜미를 그었다. 떨리는 호흡이 툭, 툭, 끊어져 목 언저리에서 부서졌다.
이내 윈터의 고개가 뒤로 물러났다. 섀넌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붉게 일렁였다. 천천히 눈을 뜬 섀넌이 그의 뺨을 쥐고 가만히 입술을 부딪었다.
“……갈리나가 와요.”
“알아.”
조용히 호흡을 나누던 두 사람이 떨어졌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돼요?
“네.”
윈터가 대답했다. 열린 문 사이로 갈리나가 고개를 집어넣었다. 섀넌과 윈터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뜻을 알아챈 윈터가 섀넌을 바라봤다. 섀넌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금방 다시 올게요.”
윈터가 그의 뺨에 입술을 살짝 얹었다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 * *
성의 지하는 매우 음습했다.
땅 밑에서 토해 내는 한기는 사나운 설풍이 부는 지상보다 어쩐지 더 오싹하고 냉랭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섀넌의 말로는 지하가 엄청 깊다던데, 그렇지도 않네요?”
“그리말디가 갇혀 있던 수용소는 이보다 한참 더 밑에 있어요. 지금 그 수용소엔 검은 늑대들과 하슬라가 갇혀 있죠. …여긴 자하카의 넋을 안치하는 곳이고.”
“하슬라는 죽은 자들보다 더 낮은 곳에 갇혀 있는 셈이네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의 긴 복도를 보며, 윈터가 조용히 말했다. 갈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오늘 그들의 목적은 수용소에 있는 죄인들을 보러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춘 갈리나가 몸을 돌려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 또한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그들 사이로, 적막한 복도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기분이 어때요?”
“무슨 기분요.”
“불멸자가 된 기분.”
그 질문에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당장 내 몸이 달라져서 신경 쓰이는 것보단 섀넌 몸이 더 신경 쓰여서.”
“……앞으로 그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갈 텐데, 두렵지 않아요? 순리를 거스르는 악귀로 평생을 사는 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죠.”
“사실, 사실 난…,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요.”
갈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말디가 멋대로 당신을 변화시킨 거잖아요. ……당신은 혼란스럽지도 않고, 화도 안 나나요…? 내 말은, 보통은 다들 그럴 테니까 묻는 거예요.”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던 윈터의 얼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들이 불멸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갈리나가 아무리 저를 위해 애써 준 자라도, 그들에게 불멸의 생을 사는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뭔가를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부드러운 미소가 가신 윈터의 얼굴이 지하의 한기처럼 냉랭했다.
“난 애초에 섀넌의 소유고, 그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든 난 아무런 상관없어요. 그의 손안에만 있으면 되니까.”
“…….”
“그리고 최초로 그의 손에 날 떨어뜨린 건 당신이야.”
굳어 있던 갈리나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그 얼굴을 보며, 윈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날 화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건 늘 당신들이었지, 섀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
“윈터 자하카는 죽었다고 공표하세요, 갈리나.”
갈리나가 제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떨림을 가라앉혔다.
이미 예상한 말이었다. 꼭 죽었다 살아나지 않았어도, 윈터는 왕좌에 오래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윈터가 동족에게 각인하거나 혼인하면, 어쩌면 그를 붙잡아 둘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했었는데…….
윈터가 싱긋 웃으며 다시 한 번 그녀의 기대를 박살 냈다.
“차라리 당신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더 마음이 편할 테니까.”
태생이 필멸자인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아마도 큰 혼란이 생길 것이다. 늑대족뿐 아니라 섀넌을 제외한 다른 뱀파이어들에게도 제 존재가 그다지 달갑지 않을 거라는 걸 윈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왕좌는….”
갈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자리에 자하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앉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왕좌에 누구를 앉혀야겠냐고 윈터에게 따져 묻는 건 지금에 와선 지나친 미련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시라트에 속하는 자도 아니니, 자신들이 알아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당신이 왕이 되면 되잖아요.”
그런데 윈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질문임에도 이미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답을 내려놓은 윈터가, 긴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정식 양위서는 내가 작성해 주죠. 사경을 헤매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작성한 거라고 하세요. 음…, 거짓말이 너무 허술한가. 인간 사회에선 그런 경우가 왕왕 있던데. 여기선 양위서 자체를 안 쓰려나.”
혼자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는 윈터를 따라 긴 복도를 걷던 갈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목 언저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난 왕좌에 오를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윈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걸음을 멈춘 윈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갈리나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은,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윈터에게 다가갔다.
“그리말디에게서 처음 당신을 데려올 때부터, …난 진실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차마 윈터를 만지지는 못하고 그의 소맷자락을 살짝 쥔 갈리나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고백했다.
“당신을 아끼는 그의 마음을 이용하려고도 했고, ……그게 안 되니까 나중엔 당신에게 거짓말도 했었죠. 그리말디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당신들을 갈라놓으려고요.”
“…….”
“…난, ……난 말도 못 하게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이런 내가 자하카의 왕좌를 더럽힐 수는,”
윈터가 소매를 붙잡고 있는 갈리나의 손등을 덮었다. 제 손을 떼어 내려는 것인 줄 안 갈리나가 얼른 그의 소매를 놓았지만, 윈터의 손은 떨어지지 않고 그 주름진 손에 그대로 덮여 있었다.
그 손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던 갈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잿빛 안개에 붉은 피 한 방울이 산란한 것 같은 기묘한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정말 무의미한 말이네요.”
“…미안해요. 나도 내가 뻔뻔하다는 거 잘 알,”
“당신은 그 거짓말로 영영 자하카를 잃은 셈이니까.”
어떠한 비난도 원망도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말이었다.
갈리나는 목 안으로 치미는 애석함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저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의도가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건 사실이다.
억지로 시라트에 데려왔지만, 자신은 끝까지 윈터를 지키지 못했고 그리말디는 그만의 방식으로 결국 윈터를 지켜 내고야 말았다.
자신들의 자하카를 영영 데려간 것이다.
윈터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나한텐 이게 해피엔딩이에요.”
“…….”
그는 손끝만 달달 떠는 갈리나를 내려다봤다. 일 년 전 자신이 이 얘길 들었다면 아마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과연 갈리나를 완전한 악역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윈터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그 어떤 증오도 경멸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용서를 빌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섀넌에게 가서 비세요.”
그 어떤 호오好惡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눈이 갈리나를 잔잔하게 응시했다.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갈리나를 보며, 그가 담담한 얼굴로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내가 봤을 땐 지금 상황에선 당신만큼 왕좌에 적격인 자도 없어요, 갈리나.”
갈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신들은 대대로 왕을 모시는 가문이었지,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건 돌아가신 제 아버지도, 그 위의 윗대도 똑같았을 것이다.
충성을 맹세하는 데 가장 특화된 자가 갑작스럽게 타인의 충성을 받아 내야 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숙고가 필요한 문제였다.
“난 정말 왕이 될 만한 그릇이 아니,”
“그 많은 사람들이 얼굴도 모르는 날 20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잖아요, 당신은.”
윈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정도의 능력이면 야낙도 인정할걸요.”
덮여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저를 쳐다보는 갈리나를 놔두고 무심하게 몸을 돌린 윈터가 계속 걸었다.
갈리나는 한참이나 그런 윈터를 보다가, 그가 너무 멀어져 완전히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려 할 때가 되어서야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다.
역대 자하카의 유해가 안치된 복도를 걷는 그들의 발소리가 축축한 돌벽에 부딪혀 기묘한 울림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죽은 자들이 일렬로 시대순에 맞춰 주르륵 안치된 복도의 끝, 죽은 다리야와 야낙이 들어갈 유골함은 텅 빈 채로 열려 있었다.
보통은 시신을 태워 그 뼛가루를 안치하는데, 야낙이나 다리야는 태울 시신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아쉬운 대로 나름의 안치를 해야 했다.
성곽에 효수되어 있던 다리야의 두개골을 수습해 태운 뼛가루를 조심스럽게 그 안에 넣은 갈리나가 이번에는 작은 머리 장식을 꺼냈다.
거기에 감긴 야낙의 머리칼과 함께, 섀넌의 피가 스며들었던 머리 장식도 마치 세상으로의 이별을 고하듯 야낙의 칸에 안치되었다.
이제 이곳에 안치되는 자하카의 넋은, 이들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윈터는 저와 상관없는 제 혈육의 유골함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렇게, 결국 모든 일은 매듭지어졌고 윈터 자하카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 사라졌다.
어쩐지 조금 허무했다.
“…이렇게 끝인가요.”
윈터의 질문에 갈리나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들의 곁에 안치했으면 그걸로 된 거예요. 따로 절차는 필요 없어요.”
야낙의 유골함 위로 갈리나의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얹어졌다. 야낙의 유해는 고작 장식에 감긴 머리카락 한 줌이 전부라, 두개골만 남은 다리야보다 더 초라했다.
갈리나는 저 머리 장식을 다리야의 손에 쥐여 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죽고 다리야가 야낙의 유품을 이곳에 안치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결국은, 살아남은 누군가가 해야 마땅한 일.
자신은 살아남았고, 이 땅의 자하카는 이제 완전히 소멸했다.
“…….”
한참이나 유골함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긴 갈리나의 곁에서 윈터는 그저 침묵했다.
윈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날을 기다려 왔던 갈리나의 심정은, 그로서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횃불 빛으로 너울지는 석벽에 긴 어둠을 그었다.
* * *
섀넌은 윈터가 늘 두르고 다니던 털 망토를 담요처럼 온몸에 두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시라트에 온 지 벌써 보름이 되었다.
윈터를 변화시킨 뒤 며칠 간은 제 몸이 심히 위태롭다는 이유로, 그리고 요 며칠은 윈터가 갈리나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많은 관계로 떠나지 못했다.
붉은 눈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섀넌은 창문도 작은 이 축축한 방이 지긋지긋했다.
사방이 석벽에 둘러싸인 침실은 윈터의 냄새가 난다는 것 외에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개도 없다.
제가 잠깐 갇혀 있던 지하 수용소와 다른 점이라곤 창문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구멍과 침대와 테이블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이 시라트의 왕이 머무는 성이라는데, 성 안의 침실이 이 모양이면 보통 늑대들의 주거지는 대체 얼마나 형편없을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를 무릎으로 디딘 섀넌이 벽면에 난 작은 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제 얼굴 크기만 한 창으로나마 밖을 내려다보려던 섀넌은 안팎의 온도 차로 인해 습기가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벽면에 혹여 몸이 닿을까 싶어 윈터의 털 망토를 꼭 둘렀다.
“…….”
이 습기.
이 빌어먹을 습기는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제가 딛고 있는 침대 시트 끝을 적셨다. 그 시트를 손으로 살짝 눌러 벽면과 맞닿아 있는 틈을 벌려 보면 미세하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벽에 습기가 이토록 많은데 왜 침대를 이렇게 벽면에 붙여 놓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섀넌은 그것 때문에 처음 며칠은 편히 잠들지도 못했다. 지금도 윈터의 품 안에 최대한 웅크려 침대에 몸이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야만 불쾌함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윈터가 없는 지금은 여의치 않다. 섀넌은 찝찝한 물소 가죽 시트에 절대 닿기 싫어서 윈터의 털 망토를 발끝까지 다 여미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살살 누웠다.
윈터는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다른 늑대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어디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을 텐데, 뭐가 그리 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물론 종일 제 곁에 붙어 있는 윈터가 저를 혼자 두는 건 시라트 밖에서 인간의 피를 공수해 오거나, 갈리나와 따로 할 일이 있어 두어 시간 자리를 비우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섀넌은 잠깐 헤어져 있는 그 몇 시간이 지루해서 참을 수 없었다.
촛불 빛만 일렁이는 어두운 침실에 혼자 있자니 섀넌은 제가 감금된 게 아닐까 살짝 헷갈렸다. 그러나 밖에 나갔다가 다른 늑대를 마주치는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어서, 하염없이 윈터만 기다렸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주 깊은 밤이 되어서야 침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선잠에서 깨어난 섀넌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눈만 떴다. 달칵, 문이 열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윈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섀넌, 자요?”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따뜻한 손이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졌다. 섀넌이 제 곁에 눕는 그에게 등을 바짝 붙였다.
“오늘은 유독 늦었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웅크린 몸을 뒤에서 폭 끌어안으며, 윈터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팔에 머리를 괸 채 나른함을 즐기던 섀넌이 고개를 돌려 윈터와 눈을 맞췄다.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언제 떠날 거야.”
“한 사흘 뒤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요, 섀넌.”
“할 일이 그렇게 많아?”
“제가 죽었다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나름의 조치가 필요해서요. 그것까진 지켜봐야 하고 또 갈리나한테 따로, 읏.”
섀넌이 말없이 그에게 입술을 부딪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핥기를 한참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윈터가 조심스럽게 혀를 내어 그에게 응해 주었다.
제 뺨을 감싸는 커다란 손의 온기에 눈을 감은 섀넌이 살짝 몸을 돌리며 그와 조금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젖은 혀를 제 입 안으로 끌어들여 옭아매고, 입천장과 치열을 집요하게 훑자 윈터의 몸이 잠시 그대로 미동 없이 굳었다.
“……섀넌.”
아랫입술이 섀넌에게 여전히 깨물린 채, 윈터가 낮게 그를 불렀다.
“그…, 만.”
윈터가 섀넌의 손목을 살짝 잡아 제게서 떼어 냈다.
“그만 하세요.”
섀넌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린 윈터가 그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제 뒤통수에 와 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섀넌은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가, 그와 자신이 마지막으로 진득하게 키스를 이어 나간 게 대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만큼 윈터는 좀처럼 제게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도 혼이 빠지도록 키스를 해 줘도 모자랄 판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꽉 결박하고 있으니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윈터.”
“잠깐만요.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키스 조금 한다고 안 부서져. 대체 언제까지 계속 이럴 거야.”
윈터가 실수로 집기를 부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걸 섀넌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도 제 변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자신을 거부하는가.
“그게 아니라,”
뒷목을 타고 미약하게 떨리는 한숨이 흘러내렸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아요.”
“안 터져, 대체 내 몸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제가요.”
윈터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순간 말문이 막힌 섀넌이 눈을 깜빡였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평소보다 몇 배 뜨거웠다. 그에게 거의 몸이 결박되듯 폭 안겨 있던 섀넌은 문득 제 엉덩이를 꾹 누르는 감촉을 뒤늦게 인식했다.
“……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다.
갓 태어난 뱀파이어들이 얼마나 피에 굶주리고, ……또 얼마나 성욕이 들끓는지를.
그래서 요즘 들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했군.
손만 대면 순식간에 몇 발짝 뒤로 훌쩍 물러나 버리고, 조금만 입술을 섞으면 빳빳하게 굳어 버리는….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그 괘씸함이 사라지진 않는다.
“……참을 수 있어요, 섀넌.”
등 뒤에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키스는, …키스는 조금 나중에, 제가 좀 더 잘 참게 되면 그때,”
윈터의 목소리가 멎었다. 섀넌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해요….”
섀넌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당장 자신이 어떻게 해 줄 기력이 없어 유감이었다.
제 아이의 크기가 조금만 적당했어도 받아 줬을 텐데, 지금 제 몸으로 그의 물건을 품는 건 아무래도 조금 위험하다. 가벼운 손장난을 하든 뭘 하든, 그것도 다 약간의 기력이라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번 싸고 기절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손을 뒤로 뻗어 윈터의 뺨을 감싼 섀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나아야겠네.”
“제가 더 잘할게요. …빨리 나을 수 있게.”
이보다 얼마나 더 잘한단 말인가. 그나마 윈터가 잔에 담아 오는 피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제 몸은 해골처럼 앙상했을 것이다.
윈터가 제 회복을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건 잘 알았지만, 그 이유에 이런 상황이 포함되니 어쩐지 섀넌도 조금 초조해졌다.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큼 자신은 순진하지 않았다. 윈터는 그런 순진한 시절이 있었기에 참는 게 가능할지 몰라도, 자신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순진했던 적 없는 존재다.
그런데 치솟는 이 성욕을 몸의 기력이 따라주지 못하니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섀넌.”
목덜미에 툭 툭 끊겨 와 닿는 숨이 덥고 습했다. 조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감싸고 있는 팔 근육이 울근불근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잘 자요.”
섀넌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비비며,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른 자요…, 얼른 자요, 섀넌……. 마치 그건 섀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
숨이나 좀 가다듬고 말하지. 그런 목소리로 잘 자라고 하면 퍽이나 잠이 오겠다.
더 깊이 윈터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제가 움직이면 그를 더 자극할까 봐 미동도 없이 눈만 감은 섀넌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너도.”
아이의 열기를 의식하니 괜스레 감각만 더 곤두서는 밤이었다. 섀넌이 애써 제 의식을 침대 시트 아래로 푹 끌어 내렸다.
* * *
“섀넌.”
혼곤한 정신을 잡아채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섀넌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윈터가 상체를 약간 숙인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작은 창으로 힐끗 시선을 돌린 섀넌이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창밖은 파란 동이 트고 있었다.
“……안 잤어?”
“당신 몸이 너무 불편해 보여서요.”
섀넌이 털 망토를 꼭 쥐고 있던 손과 저도 모르게 잔뜩 경직되어 있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조금 불편하긴 했다. 몸이 찝찝하고 이 침실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트에 닿기 싫어 온몸을 구기고 잤더니 관절 마디마디가 녹슨 것처럼 빳빳했다.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푹 담그면 좋으련만.
“씻으러 갈래요? 물 데워 뒀는데.”
“…….”
참 시기적절하게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제안이었다.
아까 저를 안고 발기한 좆을 흉흉하게 내세우고 있던 아이는, 제가 자는 사이 펄펄 끓는 물을 욕조에 들이붓는 것으로 정력을 소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몸을 담그고 싶지는 않은데…….
욕조가 깨끗할지도 의문이고…….
어쩐지 떨떠름한 섀넌의 표정을 본 윈터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그의 등을 받쳐 조심스럽게 일으켜 주며 말했다.
“깨끗해요. 욕조도 물도 새 거 맞아요.”
그래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지, 섀넌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윈터가 그의 몸에 털 망토를 빈틈없이 꼭 둘러주고는 등과 무릎 아래를 받쳐 안아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절대 안 들어갈 거야.”
“네.”
웃음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윈터의 온기가 묻어 있는 따뜻한 털 망토 안에서, 섀넌이 몸을 뒤척이며 그에게 기댔다.
침실 밖 복도는 고요했다. 그들이 머무는 층을 중심으로 그 위아래까지 텅 비어 있었다. 갈리나가 그 주변을 싹 통제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탓이다.
섀넌은 윈터에게 안겨 가는 동안 석벽이 둘러싸인 복도를 낯선 눈으로 훑었다. 어디든 다 습기가 있고 홧홧한 횃불이 일렁였다.
윈터가 코너를 돌자 섀넌의 발끝이 그 축축한 석벽에 살짝 스쳤다. 섀넌이 찝찝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망토 안으로 발끝을 쏙 집어넣었다.
윈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저를 안은 팔이 곤두서자 섀넌이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랫입술을 깨문 윈터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발 오므리는 거 귀여워……. 그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이없어진 섀넌이 윈터의 머리칼을 꽉 움켰다.
“아, 아파요, 섀넌.”
“아프라고 당기는 건데.”
그의 말에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밉지 않게 흘기던 섀넌이 문득 몸을 움츠렸다.
복도 끝으로 다가갈수록 찬바람이 휭 불어왔다.
씻으러 가자더니 대체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섀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내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추운 곳에서 설마, 날 밖으로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윈터가 복도 끝의 커다란 석문을 한쪽 발로 가볍게 열었다.
문이 열리자, 섀넌의 눈앞에 시푸른 새벽하늘이 펼쳐졌다. 커다란 대리석 욕조에서 펄펄 끓어 오르는 김이 파란 허공에 면사처럼 하느작거렸다.
섀넌이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 내내 좁은 침실 안에 있다가 갑자기 하늘이 훤히 뚫린 테라스로 나오니 신선한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방 안으로 욕조를 들일까 했는데, 시라트 나가기 전에 여긴 꼭 한번 보여 주고 싶어서요.”
윈터가 천천히 난간 쪽으로 섀넌을 데려갔다. 높다란 석조 성의 지붕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서쪽 외곽 숲이었다.
시큰둥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섀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세상 곳곳 안 가본 곳이 없고 못 본 절경이 없었지만, 그런 섀넌에게도 시라트는 처음 발을 들이는 곳이었다.
이런 만년설이 얼어붙은 영토에 숲이 있어 봐야 뭐 얼마나 다채로울까 생각했던 섀넌은 생각 이상으로 기묘하고 아름다운 정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흰 눈꽃을 잔뜩 뒤집어쓴 온갖 계절 나무들이 빼곡하게 도열한 숲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신비로웠다. 원래라면 한 지역에서 공생할 수 없는 식물들이 다채롭게 뒤엉켜 조화를 이루고, 그 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강에는 새파란 새벽빛이 내려앉아 비단결 같은 물비늘을 반짝였다.
“이런 추위에 어떻게 저런 나무가 살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뱀파이어 중 이 풍경을 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최초일 것 같네.”
윈터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섀넌의 얼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가만히 눈에 담았다.
섀넌은 지금껏 제게 숱하게 많은 첫 경험을 선사해 주고, 제 세상을 만들어 준 존재다. 윈터는 이렇게라도 자신 또한 섀넌에게 첫 순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 감사했다.
내려 줘, 섀넌이 작게 말하자 윈터가 그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서게 도와주었다.
윈터의 털 망토를 목 끝까지 두른 채 한참이나 그 풍경을 자세히 살피던 섀넌이 제 등 뒤에 와 닿는 체온에 몸을 돌렸다.
“……섀넌.”
윈터가 그의 어깨에서 털 망토를 내리고,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어깨 아래로 셔츠를 벗겨 내리며 그를 내려다보는 윈터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찬바람에 작게 움츠러든 어깨와 가슴팍에 뜨거운 입술을 내린 윈터가 무릎을 굽혀 그의 바지까지 벗겨 내렸다.
골격이 튀어나온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섀넌이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윈터의 어깨를 짚었다. 옷을 다 벗으면 추울 거라 생각했는데, 테라스에 온통 부옇게 서린 김 때문에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 몸에 조심스럽게 스치는 윈터의 입술이 델 듯 뜨거웠다. 상황만 보면 몹시 에로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제 몸 상태를 보면 에로틱과는 거리가 멀었다.
윈터는 마치 성스러운 것을 영접하듯 살집 없이 앙상한 허벅지와 고간, 아랫배와 옆구리, 가슴에 천천히 입술을 스쳤다.
윈터가 떨리는 손끝으로 튀어나온 골반과 드러난 갈빗대, 팔과 어깨를 어루만졌다. 늘 보얗고 예뻤던 피부는 생기 없이 죽어 있었다.
애달픈 손길과 시선이 찌르듯 온몸에 와 닿았다. 모든 게 다 볼품없이 쪼그라든 몸을 한참이나 입술로 더듬자 괜히 머쓱해진 섀넌이 윈터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들었다.
“그만 봐. 또 질질 울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안 울어요.”
그러나 말과 달리 윈터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제 감정을 갈무리하는 듯 보였다. 몇 차례 눈꺼풀에 몰리는 열기를 쫓아낸 그가 섀넌을 안아 욕조로 함께 들어갔다.
하얀 김이 얇은 장막처럼 수면 위에 펄펄 나부꼈다.
“아…….”
발끝부터 뼛속까지 녹일 듯 뜨거운 물에 잠겨 들자 섀넌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곳에 머무는 내내 긴장으로 꽁꽁 얼었던 몸이 흐물흐물하게 탕 안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완전히 몸을 담그자 욕조 밖으로 물이 촥 흘러넘쳤다. 섀넌의 앙상한 다리를 쥔 윈터가 그의 발목부터 종아리를 천천히 주물렀다.
욕조 난간에 등을 기댄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온몸에 군데군데 응어리져 있던 피로가 사르르 녹는 듯한 전율이 흘렀다.
“…시라트에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정도는 있었네.”
이 뜨거운 노천탕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사흘 정도는…, 하아……, 더 참을 수 있겠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온 손이 허벅지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성적인 의도는 전혀 담기지 않은, 정성스럽고 애틋한 손길이었다. 섀넌의 손끝과 손목, 팔, 어깨를 한참이나 느릿느릿 주무르며 올라온 손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눈을 뜨자 제 코앞에 다가와 있는 윈터의 얼굴이 보였다.
“섀넌, 우리 오늘 떠나요.”
갑작스러운 말에 섀넌이 눈을 깜빡였다.
“…사흘 뒤에 간다며.”
“아까 갈리나와 미리 얘기해 뒀어요.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더는 안 되겠더라고요.”
“할 일은 다 했고?”
“네, 나머지는 굳이 제가 없어도 될 것 같아요.”
섀넌이 별안간 윈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딸려 간 윈터가 얼른 욕조 난간을 짚으며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요?”
“하루만 더 있었으면 미쳤을 거야.”
노천탕과 풍경은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시라트가 지긋지긋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섀넌이 그의 뺨을 쥐고 입술을 부딪었다. 젖은 셔츠가 들러붙어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 윈터의 몸이 바짝 곤두서고 꿈틀거렸다.
부푼 가슴팍을 얇은 셔츠 위로 진득이 쓸어내리며, 섀넌이 웃었다. 난간을 짚은 팔에 울근불근 힘이 들어가는 게 그의 눈에 여실히 보였다.
“옷은 왜 입고 들어온 거야. 이러니까 더 흥분만 되잖아.”
귓바퀴를 새빨갛게 붉힌 윈터가 주저하다 물었다.
“…벗을까요?”
“됐어.”
윈터의 입술을 깨물고 힘껏 빨아들인 섀넌이 이내 입술을 떼고는 그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그의 발끝이 윈터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터질 듯 발기해 있는 아래를 벌주듯 꾹꾹 누르자, 윈터가 끊기는 숨을 내뱉었다.
“……저 지금 진짜 열심히 다른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 노력이 아주 헛되다는 걸 섀넌은 제 발밑에 눌리는 단단함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여기나 좀 가라앉히고 해.”
“그건, …그건 제 의지가, 하아…, 아니란 말이에요.”
윈터가 작게 신음을 삼켰다. 웃음을 참은 섀넌이 짐짓 낮게 명령했다.
“발목이나 더 주물러.”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윈터가 그의 발목과 종아리 아래쪽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아…,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만족스러운 탄성을 흘렸다.
* * *
흰 설원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
갈리나는 제 앞에 선 두 불멸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윈터의 옆에서 시큰둥한 얼굴로 서 있는 섀넌에게 향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못한 그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퀭했으나, 턱을 살짝 치켜들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그 특유의 오연함은 한결같았다.
눈이 마주친 섀넌이 제게 뭐 할 말 있느냐는 듯 눈썹을 가볍게 치켰다.
갈리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생경한 눈으로 그 손을 내려다보던 섀넌이 이내 떨떠름하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굳은살이 박여 까칠하고 주름진 손에 단단한 힘이 들어갔다.
“고마웠고, …정말 미안했어요.”
“이미 지겹도록 들은 그 낯뜨거운 사과는 집어치우고, 내가 진짜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해.”
“…카힌이 만든 독은 모두 폐기했어요. 그 배합법도 마찬가지로. 역사에도 이번 일은 절대 남지 않을 거예요.”
이미 몇 번이고 윈터의 입을 통해 확인한 일을 다시 한 번 갈리나에게 확인받으며, 섀넌이 그제야 악수하듯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멸시도 혐오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손아귀는 생각보다 상냥하다는 걸, 갈리나는 깨달았다.
섀넌의 손을 놓은 그녀가 윈터를 쳐다봤다.
내내 단단하게 벽을 세우고 있던 갈리나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치솟는 감정을 추스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꽉 메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자하카.”
이렇게 부르는 것도 마지막일 터다.
그래서 윈터는, 그 이름을 부정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가끔 편지할게요.”
갈리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곁에 섀넌이 없었다면 윈터는 저런 얼굴로 웃지도, 편지하겠다는 빈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떠나면 이제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도, 그를 볼 수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갈리나는 그저 가만히 마주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강녕하세요.”
갈리나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윈터와 끝까지 시선을 맞췄다.
그들이 제 눈앞에서,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때까지.
“…….”
갈리나의 눈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 대신 민가를 재건하고 있는 시라트의 영토로 향했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질끈 닫으며, 그녀는 한참이나 제 마음을 갈무리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시라트에 고개도 돌리지 않을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달 뒤에, 갈리나는 윈터도 아닌 섀넌에게서 상상치도 못한 것을 받게 된다.
그건 그녀가 왕좌에 오른 뒤의 얘기였다.
* * *
“시라트에 들어올 때 정말 이런 터널을 지났단 말이야?”
“네.”
일 년 전 갈리나와 단둘이 걸었던, 그리고 얼마 전 게자르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뛰었던 그 터널을 이제는 섀넌과 걷게 된 윈터가 대답했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건 둘째 치고, 빌어먹게 춥군.”
섀넌이 겉에 두르고 있던 윈터의 털 망토를 여몄다. 그나마 그 망토에서 윈터의 냄새가 나기에 망정이지, 시라트에서 만든 다른 옷이었다면 절대 걸치지 않았을 그였다.
“업어 줄까요?”
윈터의 말에 섀넌이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망설임 없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짧게 웃었다. 묻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가. 아까부터 업어 주고 싶은 걸 섀넌이 거절할 거라 여겨 참았는데, 더 일찍 물어볼 걸 그랬다.
“다리 아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빨리 제 앞에 와서 앉으라는 듯 고갯짓했다.
윈터가 얼른 섀넌의 앞에 등을 내밀고 앉았다. 곧바로 가벼운 몸이 등에 닿았다. 가느다란 양팔이 목을 감싸고, 서늘한 체온이 안정적으로 감겨 왔다.
그를 단단히 업은 윈터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섀넌이 너무 가벼워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 어릴 때 이렇게 업어 주신 적 있어요?”
“음, 가끔.”
등 뒤에서 차분한 대꾸가 들려왔다.
“근데 업어 준 건 몇 번 안 돼. 넌 앞으로 안아 주는 걸 더 좋아했거든.”
목덜미로 섀넌의 머리카락과 뺨이 와 닿았다.
“등에 업으면 얼마 못 버티고 몸을 뒤채면서 안아 달라고 칭얼거렸지.”
그의 말에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업히면 섀넌의 얼굴을 못 보니까 그랬겠죠.”
귓불 아래와 목덜미에 입술을 가볍게 비비던 섀넌이 낮게 대꾸했다.
“…그러게. 막상 업히니까, 되게 별로네…….”
섀넌이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입술을 쪽 하고 부딪힌 그가 다시 윈터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빨리 가. 힘들어.”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속도를 올렸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시라트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 * *
시라트에서 멀지 않은 북부의 어느 별장.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섀넌이 그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는 엘리자베스와 카일을 바라봤다.
섀넌과 윈터보다 훨씬 더 먼저 시라트를 떠나 미리 이곳에 머물고 있던 카일과 엘리자베스는 이곳 생활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원래는 시라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려 했지만, 섀넌의 몸 상태가 아직 좋지 않은 관계로 일단 가까운 곳에 잠시 터를 잡기로 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팔짱을 끼고 앉아 섀넌을 빤히 노려봤다. 섀넌이 그 시선을 담담한 얼굴로 받아쳤다.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러셀의 해독제에 관한 얘길 꼭 그렇게 우리한테까지 숨겼어야 했을까, 우리 섀넌은?”
섀넌이 피곤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윈터한테도 안 해 준 얘기를, 내가 너희들의 뭘 믿고 얘기해 줘야 하지?”
“와, 얘 말하는 것 좀 봐. 진짜 못됐어.”
엘리자베스가 짓궂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섀넌을 흘겼다. 물론 진심으로 화난 건 아니어서, 이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었다.
“…뭐, 러셀 연기가 형편없긴 했지. 좀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었어.”
그러나 카일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해독제 있는 거 알았어도 우린 갔을 거야.”
그가 섀넌을 싸늘하게 일별하며 말했다.
“네가 아무것도 말 안 해준 바람에, 괜히 눈 뒤집혀서 다른 놈들한테 지원 요청하다 자존심만 구겼잖아.”
섀넌은 그저 말없이 눈썹만 치켰다. 그러라고 말 안 한 거다.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지원 요청을 하라고…….
그들이 그 요청에 응하든 응하지 않든, 그건 필요한 절차였다. 곧 일어날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갖다 댈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괜히 제게 볼멘소리를 해 대지만, 엘리자베스와 카일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섀넌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에게 향했다. 그가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윈터에게 이상한 걸 가르쳤던데.”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대체 그런 방식으로 피를 마시는 발상은 언제부터 한 거야.”
엘리자베스가 다리를 꼬고 비딱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오래 살다 보면 별의별 연륜이 다 생기는 법이거든.”
“아직 사냥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애한테 이상한 것 좀 가르치지 마.”
섀넌의 말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야, 걔가 나보다 더해. 너 아직 윈터 사냥하는 거 못 봤지. 난 앞으로 걔랑은 절대 사냥 안 할 거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엘리자베스가 작게 몸서리쳤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직접 그 내장을 꺼내어 보여 주길 좋아하는 그녀가 보이기엔 과장된 반응이라, 섀넌이 눈을 가늘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어떤데?”
엘리자베스가 흐흥, 하고 웃었다. 나중에 직접 보라며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뱀파이어랑 늑대족이 한몸에 깃들면 사냥 방법도 아주 다채로워지는 법이지…….”
윈터는 엄밀히 따지면 완전한 뱀파이어도, 그렇다고 늑대족도 아니었다.
영생을 사는 것은 맞되 여전히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아서, 늑대의 습성을 간직하고 있고 몸을 변형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섀넌은 변화 후 윈터가 사냥을 하거나 늑대의 몸으로 화하는 걸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청회색 홍채를 간직한 눈 색깔이나 은백색 머리, 변함없이 뜨거운 체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윈터는 뱀파이어에게 속한 자도 아니요 늑대족에 속한 자도 아닌, 말 그대로 자신에게만 속한 제 아이인 셈이다.
자신의 피로 빚어지고, 자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아이.
섀넌은 그 사실이 무척 흡족했다.
“……이걸 다른 놈들이 모를 리 없을 거야.”
그리고 그와는 상관없이, 이 일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다.
“새로운 불멸자가 세상에 나면 모든 뱀파이어들은 다 알게 되어 있으니까.”
카일의 진지한 말에 애써 전환했던 분위기가 다시 냉랭해졌다. 섀넌과 엘리자베스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흙에서 태어난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최악의 상황에선 그들이 윈터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고.”
카일은 그래서 윈터의 변화를 달갑게 여길 수 없었다.
불멸자가 필멸자에게 영생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런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앞으로 어떤 혼란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카일은, 차라리 윈터를 필멸자의 순리대로 죽게 놔뒀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섀넌 또한 그를 따라 죽음을 택했으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카일의 표정은 평소 그의 가벼운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만큼 이 일이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란 뜻이다.
“너무 과장된 생각이야.”
잠시 침묵하던 섀넌이 차분히 말했다.
“놈들은 윈터를 죽이지 못해.”
“그야 물론 윈터가 지금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할 시기이긴 하지.”
카일이 그의 말에 일견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로 빚어진 지 얼마 안 된 윈터는 왕성한 식욕과 성욕만큼이나 살욕이 들끓는 시기다. 갓 태어난 뱀파이어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한때 그 시기를 거쳐왔던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하다고 무조건 이긴다면 세상에 남아 있을 약자가 얼마나 될까. 카일이 표정을 바꾸며 섀넌의 말을 반박했다.
“근데 섀넌, 놈들이 다 몰려오면 일단 머릿수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고. 윈터가 혼자 강해 봤자 그놈들을 다 이길 수는,”
“우리가 이길 거라는 뜻이 아니야, 카일. 놈들이 윈터를 죽이지 않을 거란 뜻이지.”
그가 카일의 말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러는 너는 겪어 봤고?”
“…….”
어차피 모두가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당사자인 윈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변화시킨 섀넌, 곁에서 그들을 지켜본 카일과 엘리자베스 또한 이 일이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뱀파이어들도 같을 것이다.
결국,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 빌어먹게 지루하네.”
이 무거운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별안간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사냥이나 실컷 해야겠어.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하니까.”
마치 재미있는 농담을 한 것처럼 가볍게 웃은 그녀가 창을 열었다. 창턱에 걸터앉은 엘리자베스가 바깥쪽으로 다리를 내리며 카일을 쳐다봤다.
“…….”
착잡한 눈으로 섀넌을 물끄러미 보던 카일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사라졌다.
* * *
“섀넌.”
혼자 남아 창가에 여전히 시선을 걸어 두고 있던 섀넌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윈터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열려 있는 창을 본 윈터가 물었다.
“카일이랑 엘리자베스는 어디 갔어요?”
“글쎄, 놀러 나갔거나 사냥 갔겠지.”
가볍게 대꾸하는 섀넌의 앞으로 커다란 유리잔이 내밀어졌다. 그가 그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자꾸 이러면 버릇 드는데.
“얼른 마셔요.”
섀넌이 말없이 그 잔을 넘겨받았다. 그래도 이제는 혼자서 컵도 들 수 있고 꽤 오래 걸을 수도 있으니, 시라트에 있었을 때 비하면 몸이 많이 회복되긴 한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진짜 고약한 걸 알려 줬다니까.”
“왜요, 이젠 사냥 나가고 싶어요?”
윈터가 웃으며 물었다. 컵에 담긴 붉은 피를 천천히 다 마신 섀넌이 빈 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냥보다는 섹스가 더 급한데.”
윈터의 눈이 둥그레졌다. 순진하게 커진 눈을 보며, 섀넌이 짓궂게 웃었다. 방심하고 있는 아이를 이런 식으로 도발할 때가 제일 짜릿하다.
역시나, 입술을 갑자기 말아 무는 윈터의 귓바퀴와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말 하기 전에 예고라도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무슨 예고를 해. 섹스하자는 말도 예고하고 해야 해?”
“……지금 하자고요?”
“아니 지금 하자는 게 아니라,”
“되게 오해하게 말씀하셨어요, 방금.”
“…음, 그랬나.”
섀넌이 떨떠름한 얼굴로 제 눈썹을 매만졌다. 손가락 새로 힐끗 본 윈터의 눈이 거의 보랏빛이었다.
본래의 색을 간직한 그의 눈은 흥분하면 붉은 기가 더 짙게 감돌아 오묘한 보라색을 띠다가, 동공이 확장되며 확 붉어진다.
섀넌을 빤히 보던 윈터가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심 놀란 섀넌이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입을 가린 채 한참을 머뭇거리던 윈터가 작게 물었다.
“……같이 산책할래요?”
섀넌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애써 윈터의 얼굴에 붙들어 두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시야 아래쪽에 언뜻 보이는 그의 물건이 바지를 뚫을 듯 흉흉하게 일어서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섹스하자는 말만 들어도 저렇게 벌떡 세우는 주제에.
……저 순진한 얼굴로 산책가자고 하는 꼴 좀 보라지.
예전 같았으면 좆이 아파요, 좆이 섰어요, 같은 노골적인 말을 벌써 백 번은 했을 텐데, 이제 좀 컸다고 도리어 다른 말을 하며 내뺄 줄도 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와 귓바퀴, 녹녹하게 짓무른 윈터의 눈빛을 관찰하던 섀넌이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이든 뭐든 찬 바람을 쐬어 저 아랫도리를 식히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윈터는 지금 찬 바람이 아니라 시라트의 지하수라도 퍼다가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두꺼운 코트를 입히고 커다란 모포를 섀넌의 몸에 꼼꼼하게 둘러 준 윈터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한 손으로 모포를 여민 섀넌이 그 손에 깍지를 끼며 그에게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윈터는 이런 사소한 접촉이 때로는 섹스보다 더 오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최근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제게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오는 섀넌의 애정 표현이 아직 익숙지 않은 윈터가 이번에도 입술을 말아 문 채 조용히 귓바퀴만 붉혔다.
* * *
겨울 숲은 고요했다. 가지마다 흰 눈이 뒤덮여 바람이 불 때마다 싸락싸락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춥지 않아요?”
윈터가 섀넌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시라트에 비하면 여긴 여름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섀넌은 모포 자락을 더 끌어 올려 더 깊게 여몄다. 하관을 완전히 덮고 눈만 내놓은 그를 보며 윈터가 짧게 웃었다. 그가 몸을 돌려 섀넌을 제 품으로 깊이 마주 안았다.
섀넌은 변화 이후에도 윈터의 체온이 그대로인 게 마음에 들었다. 단지 그의 체온 한 겹 덮였을 뿐인데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따뜻해졌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걷지를 못하잖아.”
섀넌이 그의 가슴팍에 뺨을 가만히 기대며 말했다. 윈터가 웃으며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섀넌이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의 엉덩이를 안정적으로 받치며 모포 자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잘 감싸 준 윈터가 싱긋 웃었다.
“이렇게 하면 걸을 수 있어요.”
“……이래서는 산책이 소용없겠는데.”
“뭐 어때요. 둘 중 하나만 걸으면 되지.”
섀넌이 헛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포드득, 포드득, 윈터가 천천히 눈을 지르밟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몸 다 나으면 다시 케인타운으로 돌아갈까요?”
“글쎄, 거긴 너무 오래 머물러서.”
“리버펠에 우리가 지냈던 별장이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윈터와 지내며 두 번의 이주를 했지만, 두 번 다 살던 저택을 모조리 전소시켜 남은 게 없었다.
섀넌은 이제 와 그게 조금 아까웠다. 물론 그땐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조금 번거롭더라도 저택을 보존하는 쪽을 고려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것들이 이렇게나 아까워질 줄은, 당시의 자신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러셀은요?”
“소식 듣고 지금쯤 부지런히 오고 있을걸. 뭐, 한참 걸리겠지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섀넌이 윈터의 뺨을 잡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케인타운의 저택은 그대로 남겨 둘 테니까, 한 70년 뒤에 다시 돌아가자. 그때면 우릴 아는 사람이 다 죽고 없겠지.”
“…….”
윈터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섀넌이 70년 뒤나 100년 뒤, 혹은 그 이후를 얘기할 때마다 새삼스러운 놀라움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질 때도 된 그 단순한 사실이 경이로운 햇살처럼 온몸에 스며들었다.
자신은 늙지도 쇠하지도 않으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섀넌과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매 순간이 기적 같아요, 섀넌.”
“나도 그래.”
섀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죽었다 살아난 건 윈터지만, 섀넌은 어쩐지 자신 또한 그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윈터는 자신에게서 일방적으로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다고 여길지 몰라도, 기실 그보다 더 일찍 윈터에게서 새 삶을 부여받은 쪽은 자신이다.
“…나도 네가 기적 같아.”
섀넌의 입술이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제 아이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서로의 체온과 호흡을 느끼고 옥죄어 안는 팔의 힘, 심장의 박동을 온전히 음미하며, 그들은 한참이나 숲길을 걸었다.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숲의 아주 깊은 곳까지 당도한 윈터가 바위에 걸터앉으며 섀넌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였다.
섀넌이 모포 자락을 여미며 티끌 없이 깨끗한 수면을 바라봤다.
“그거 알아요, 섀넌? 여기 호수는 얼지 않아요.”
윈터가 손을 뻗어 물에 담갔다. 섀넌이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렇게 굳이 안 보여 줘도 알아. 시라트 인근에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가 있다는 건 나도 들었어.”
무의식중에 그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 하고 입김을 불어준 섀넌이 저보다 윈터의 손이 더 뜨겁다는 걸 알고 그저 입술을 묻었다.
맑고 시린 물기가 묻은 손은 신기할 정도로 체온이 그대로였다. 그가 불멸자인 동시에 늑대족인 게 장점인 부분이었다.
그의 손에 입술을 문지르던 섀넌이 눈살을 옅게 찌푸렸다.
“음,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요?”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섀넌이 자세를 고쳐 윈터의 몸에 편하게 기대며 물었다.
“리버펠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나?”
“글쎄요,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눈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 꿈이었는지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꿈을 회상하던 섀넌이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윈터를 바라봤다. 본래는 조그마한 윈터가 제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커진 아이가 반대로 저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섀넌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입술을 부딪었다. 찬 바람에 식은 살갗이 윈터의 뜨거운 입술에 닿으며 녹아내리는 듯했다. 흘러내린 모포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윈터의 손이 닿았다.
맞닿은 입술이 더 깊게 섞이는 건 금방이었다. 온기를 찾아 그의 입 안을 헤집고 타액을 빨아들이던 섀넌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고 싶은데.”
섀넌의 뺨과 귓불 아래에 내리그어지던 윈터의 입술이 멎었다.
섀넌은 저를 안은 윈터의 팔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든 윈터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난처하게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섀넌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아랫입술이 가볍게 깨물렸다. 윈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섀넌의 입술만 핥고 빨기를 반복했다.
……잘 참을 수 있다더니, 제 아이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잘 참고 있었다.
그나마 시라트에선 한 침대에서 잠들었지만, 이곳 별장에 온 이후로 윈터는 자신과 한 침대에 누우려 하지도 않았고 키스 이상의 다른 스킨십은 도무지 허락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중에 그의 고간으로 손을 내렸다가 눈앞에서 확 물러나 버리는 그를 본 게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헛헛했던 제 마음은 또 어떻고.
게다가, 오늘은 만월이다.
아직 완전히 달이 뜬 건 아니지만, 숲은 어느새 파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리 제 몸 상태가 평소와 같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거부하고 참을 일인가.
섀넌이 윈터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몸을 기대었다. 다리 사이로 터질 듯 발기한 그의 물건이 느껴졌다.
들끓는 본능을 제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 제법 애쓰고 있었지만, 섀넌은 그의 잔잔한 눈에 한 꺼풀 가려진 잔혹한 욕망이 마치 제 것처럼 잘 보였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제 다리 사이에 있는 성기를 압박하며 문질렀다. 윈터의 입술 새로 뾰족한 송곳니가 비어져 나왔다.
“……나를 괴물로 만들지 말아요, 섀넌.”
“너 지금 괴물 맞아.”
섀넌 또한 갓 태어났을 땐 원초적인 본능에 미친 괴물이었고, 지금의 윈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에게 몹쓸 짓하고 싶지 않아요.”
“누가 몹쓸 짓 하래?”
섀넌이 한 손으로 능숙하게 그의 바지춤을 풀었다.
“…그냥 좀 즐기자는 거지.”
섀넌의 허리를 잡은 윈터가 고개를 숙이며 그를 떼어 놓으려 했다. 섀넌이 그런 그의 목에 팔을 더 꽉 두르며 몸을 붙였다.
“…섀넌, 잠깐,”
“잠깐은 자꾸 뭐가 잠깐이야.”
섀넌이 그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또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
“네가 그럴 때마다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아?”
미간을 찌푸린 윈터가 항변하듯 대꾸했다.
“섀넌은 맨날 그랬잖아요.”
“난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돼. 괘씸하니까.”
“…….”
“도망가면 더 쫓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다정하고도 냉정한 말투로, 섀넌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윈터가 괴로운 얼굴로 애원했다.
“…안, 돼요, 섀넌. 참을래요, 참을래요, 당신 다 나으면 그때…, 읏.”
쉬…, 아이를 달래듯 입술을 맞부딪으며 속삭인 섀넌이 그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것 봐, 또, 또, 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선 여긴 이렇게나 축축한 걸 보라지.
“진짜 어이가 없네.”
섀넌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 좀 수상하다.
“……너 나 잘 때 몰래 내 앞에서 자위한 적 있지.”
윈터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좌우로 마구 흔들리던 고개가 이내 조금 느려졌다.
그리고 아주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한 번밖엔.”
“한 번?”
눈을 가늘게 좁힌 섀넌의 추궁에 아주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두어 번 정도.”
“두어 번.”
“다섯…, 몇 번 없어요. 진짜예요. 문 앞까지 멀리 떨어져서, 만지지도 않고 그냥 보기만 했어요.”
“…….”
“…침대 옆에서.”
윈터가 섀넌의 어깨에 이마를 푹 기댔다. 열이 펄펄 올라 뜨거웠다.
“……입만 맞췄어요. 그 이상의 더러운 짓은 정말…, 안 했는데.”
섀넌은 종종 잠에서 깰 때마다 바로 옆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침대 위에 팔을 괸 채 저를 보고 있는 윈터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참질 못했겠지.
“끝까지 하지는 말고, 조금만 즐길까.”
섀넌이 그런 그의 뺨과 귓바퀴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몸을 뒤로 물리며 일어선 그가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윈터의 가슴팍을 밀어 등 뒤의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게 했다.
능숙하게 그의 바지춤을 풀어헤친 섀넌이 속옷을 살짝 내리자 안에 갇혀 있던 성기가 퉁 튀어 올라왔다. 선단에 맺힌 체액이 진득하게 늘어져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제가 아무리 요즘 잠귀가 그리 밝지 못하다 해도, 제가 자는 사이 아이가 혼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섀넌은 아이의 모든 순간이 제 통제 아래에 놓이길 바랐다.
제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앉는 섀넌을 내려다보던 윈터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제지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섀넌. 하지 마세요.”
그러나 말과 달리 손길은 단호하지 못했다. 섀넌이 그의 성기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뿌리 끝에 입술을 내린 그가 윈터를 올려다봤다. 제 얼굴보다 긴 성기를 붙잡고 뺨에 붙인 모습이 지독히도 색스러웠다.
“…싫, 싫어요, 하지 마세, 읏…….”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억지로 범하는 줄 알겠어.”
뭐, 그런 기분도 나쁘지만은 않지만.
혀를 내어 그의 성기를 살짝 건드릴 때마다 움찔 굳는 커다란 몸이, 가학심을 느끼게 할 정도로 귀여웠다. 이렇게나 괴롭히고 싶은 생명체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귀두 끝을 손으로 매만지며 뿌리 부분을 짧게 핥던 섀넌이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 여기 왜 이래.”
윈터가 얼른 손을 내려 제 고간을 가렸다. 허벅지 안쪽 깊이, 성기의 뿌리 부분에 여러 차례 베인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섀넌이 그의 손을 치우며 흉터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누구한테 물어 뜯겼어?”
아닐 거라 생각은 들면서도 일단 물었다.
다시 보니 이빨에 물어뜯긴 자국은 아닌 것 같고…, 날카로운 것에 베인 흔적인 것 같은데 대체 뭘 하고 살았기에 여기가 찢어질 일이 있단 말인가.
윈터가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섀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를 쳐다봤다.
“……만월에,”
“만월…?”
섀넌의 얼굴이 더욱 짙은 의혹으로 물들었다.
“……못 참겠어서.”
앞뒤 다 잘린 짧은 말이었으나 섀넌은 곧바로 그 뜻을 알아챘다.
이건 윈터가 변화한 이후에 생긴 상처가 아니다. 그랬으면 흔적도 없이 회복되었을 테니까.
자신과 윈터가 헤어져 있던 기간에, 숱하게 지나온 만월마다 생긴 상처였다.
“…아.”
섀넌이 탄식하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씨발,”
열 받아.
어릴 때도 그렇게 귀와 꼬리를 못 잘라서 안달이더니, 툭하면 제 몸을 못살게 구는 윈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 잘라 버리려는 사고방식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난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그의 몸에 남은 흔적들이 옥에 티처럼 여겨져 못마땅해 죽겠는데, 제가 모르는 곳에 이런 흉터를 숨기고 있었다니…….
자꾸만 그 흉터를 가리려 하는 윈터의 손을 치워 낸 섀넌이 그 부위에 입술을 묻었다.
“이게 네 마음에는 안 들지 몰라도, 나는 이걸 환장하게 좋아하거든.”
“…….”
윈터가 소리 없이 입술 안쪽 살갗을 짓씹으며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앞으로 다시는, 다시는 네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읏….”
쪽, 쪼옥, 볼록하게 올라온 흉터 위를 입술로 어루만지고 빨아들이며, 섀넌이 낮게 경고했다.
“네 몸은 내 거니까. 망가뜨리는 것도 다시 빚는 것도 나야.”
이 끝으로 그 부위를 얕게 깨물며 짓이긴 섀넌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은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알아들었어?”
손등으로 제 입을 막은 윈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오래도록 흉터 위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기둥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손으로 어루만지며 뭉개진 체액이 섀넌의 손가락 새로 미끌미끌하게 감겼다.
혀를 살짝 내민 섀넌이 그의 귀두 끝에 맺힌 체액을 혀끝으로 훑었다.
“아, 읏…….”
하아…, 더운 숨이 민감한 귀두 위를 감싸고 이내 축축한 점막으로 뒤덮였다. 윈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떨리는 손으로 섀넌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쥐었다.
“아, 아아, 섀넌….”
체액을 흘려대는 요도구의 바로 아래쪽을 혓바닥으로 문지르며, 귀두 전체를 입 안에 머금은 섀넌이 눈만 들어 그를 쳐다봤다.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해 주고 있다는, 게다가 그게 남자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 어떤 놀라움이나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섀넌에겐 그저 제 아이의 사랑스러운 몸의 일부를 입에 머금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짠맛이 감도는 체액이 몽글몽글 맺히고, 곧바로 제 혀에 뭉개지길 반복했다. 어느새 섀넌의 머리칼을 꽉 움킨 윈터의 낮은 한숨이 섀넌의 이마 위로 쏟아졌다.
더 깊이 머금어 볼까. 길이나 두께로 보아 다 넣을 수는 없겠지만, 잘하면 반절 정도는 들어갈 것 같은데.
조금 더 욕심내어 그의 것을 깊게 머금은 섀넌의 이 끝이 여린 살갗을 살짝 찔렀다.
“아.”
윈터가 눈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섀넌이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뱉어 내며 물었다.
“아파?”
“…아뇨.”
섀넌은 이가 닿지 않게 남의 물건을 빨아 준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윈터는 처음부터 제가 가르쳐 주는 대로 차분히 잘했었다.
섀넌은 제가 살아온 생의 십 분의 일도 살지 않은 아이가 저보다 더 능숙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둘레가 조금만 작았어도 쉬웠을 텐데.”
그가 나직이 말하며 다시 커다란 기둥을 입에 머금었다. 자신은 윈터처럼 다 빨아 주지는 못하니 삼키지 못하는 반절은 손으로 잡아 흔들어야 했다.
“아, 윽, 섀넌, 하아…….”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느슨해지길 반복했다. 더 깊게 처박고 싶은 걸 참는 듯, 그 손이 어쩔 줄 모르고 섀넌의 귓불과 뺨을 배회했다.
한계까지 벌어져 있던 입술 새로 타액이 흘렀다. 섀넌이 살짝 옆으로 고개를 틀자 제 귀두 끝에 찔린 그의 뺨이 뭉툭하게 튀어나왔다.
“하아….”
오싹한 전율이 몸속을 관통했다. 윈터가 섀넌의 머리칼을 세게 움켰다. 얼른 빼야 하는데…, 빼야 하는데…….
“읏.”
빼기 싫어.
한차례 사정을 참은 윈터가 스스로 제 것을 잡고 섀넌의 입 안을 얕게 드나들었다.
섀넌이 자유로워진 양손을 그의 셔츠 아래로 집어넣어 아랫배와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바짝 굳어 올라온 근육의 굴곡이 손바닥에 여실히 느껴졌다.
“아아, 섀넌…, 아.”
윈터의 허리를 끌어안은 섀넌이 고개를 더 깊이 내렸다. 윈터가 다급히 그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으나, 어긋난 타이밍 탓에 이미 늦어 버렸다.
“윽…….”
섀넌의 입 안과 입술, 뺨과 콧날, 속눈썹과 이마에 걸쳐 흰 체액이 흩뿌려졌다. 윈터는 낭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정을 멈추지 못했다. 농도가 짙은 정액이 몇 차례나 섀넌의 얼굴 위로 길게 쏘아져 흘렀다.
“읏, 어떡해, …미안해요, 섀넌. 미안해요.”
“…….”
눈을 감고 있던 섀넌이 침착하게 손끝으로 제 속눈썹에 엉겨 붙은 정액을 훑었다. 그러나 눈꺼풀에 붙어 있던 정액이 눈을 뜨자마자 진득하게 떨어졌다.
그게 눈 안으로 들어갔는지, 섀넌이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제 입가에 묻은 정액을 손끝으로 훑어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단 맛이 괜찮네.”
윈터가 커다란 손으로 얼른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미안해요, 섀넌. …빼려고 했는데, 진짜 이러긴 싫었는데…….”
섀넌은 저 말을 믿지 않았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속눈썹에 매달린 체액을 털어 내던 섀넌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윈터를 보고 짧게 웃음을 흘렸다.
“꿈에서 수도 없이 해 온 일이라며. 그럼 좀 의연해져 봐.”
“…….”
윈터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표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얼굴은 제법 그럴싸하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의연하지 못했다.
섀넌이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진짜 사람 돌게 하네.”
낮게 중얼거린 섀넌이 그의 앞섶을 빠르게 움켜 아래로 당겼다. 놀란 얼굴이 눈앞으로 휙 다가왔다. 섀넌의 몸에 둘려 있던 모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로 두 몸이 풀썩 쓰러졌다.
섀넌의 머리 양옆을 짚은 윈터가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렸다. 아직도 사정의 여운이 남아 녹진해진 눈을 보며, 섀넌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자, 윈터.”
“…….”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그가 윈터의 옷을 빠르게 벗겨 내렸다. 윈터가 그 손을 다급히 잡아 제지하며 말했다.
“그럼 여기 말고, 여기 말고요.”
“안 돼, 지금 해.”
틈을 줬다간 제 손아귀에서 또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섀넌, 잠…, 여긴 너무 춥잖아요.”
단추 몇 개를 풀다가 인내심이 동난 섀넌이 그의 셔츠를 확 벌렸다. 셔츠에서 사방으로 튕겨 나간 단추들이 젖은 잔디 위를 소리 없이 구르고 호수의 수면에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추운 거 알면 좀 따뜻하게 해 주든가.”
두꺼운 모포와 코트를 둘둘 껴입는 것보다 차라리 윈터와 맨 살갗을 맞대는 게 더 따뜻할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망설이는 얼굴로 제 셔츠 안쪽에 손을 넣는 윈터의 체온이 델 듯 뜨겁게 와 닿았다.
섀넌이 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며 제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는 윈터를 바라봤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새빨갛게 확장된 동공에 아슬아슬하게 물결치는 욕망이 거울처럼 아주 잘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면서도 안달복달하는 그 모습이 자신을 더 동하게 한다는 걸, 이 아이는 언제쯤 알게 될까.
파란 달빛이 그의 머리칼에 부딪혀 눈부시게 산란했다. 여전히 섀넌이 좋아하는 특유의 서늘함을 간직한 머리칼이었다.
주저하며 섀넌의 바지를 벗긴 윈터는 그의 셔츠는 완전히 벗기지 않고 놔두었다. 다 벗기면 정말 추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섀넌.”
윈터의 손이 그의 가슴팍과 허리, 아랫배를 찬찬히 쓸었다. 전보다는 살이 올라와 아주 앙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섀넌의 몸은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천천히 하면 돼. 그럼 충분히 날 기쁘게 할 수 있어, 윈터.”
그가 조심스럽게 섀넌의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에 무릎을 딛고 상체를 숙였다. 한참이나 모양 좋은 콧날을 입술로 스치며 그의 허리를 만지던 윈터가 낮게 물었다.
“……그럼 나 해 보고 싶은 거 하나만 허락해 줄 수 있어요?”
섀넌이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대답했다.
“뭔지 들어보고.”
“일단 해 보고, 싫으면 말하세요.”
섀넌의 무릎과 허벅지 안쪽으로 쪽쪽 입술을 내린 윈터가 한 손으로 그의 성기를 쥐며 회음부를 길게 핥았다.
“…읏.”
곧바로 예민한 반응이 되돌아오자, 윈터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귀두 끝을 머금었다.
보들보들한 귀두의 표면을 혀로 감싸고 문질러 주면 섀넌의 입에서 예쁜 소리가 나온다는 걸 윈터는 잘 알고 있었다. 살짝 경직되었던 섀넌의 몸이 나른한 한숨과 함께 풀어졌다.
정성스럽게 그의 성기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조이며 애무하고, 좋아하는 곳을 문질러 주니 착실하게 발기한 성기가 이내 단단해졌다.
체액과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를 한 손으로 감싸 천천히 흔들며, 윈터가 입술을 내렸다. 긴장으로 바짝 올라붙은 여린 음낭을 코끝으로 어루만지며 내려간 입술이 꽉 다물린 주름 사이를 배회했다.
“읏…, 잠ㄲ, 윽.”
생소한 부위에 윈터의 입술이 닿자 기겁한 섀넌이 허리를 뒤틀었다.
“왜요.”
“아…!”
혀끝이 여린 구멍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혀의 미세한 융기들이 예민한 부위를 진득하게 핥는 감각에 섀넌은 소름이 돋았다.
“먹고 싶어요. 혀도 넣어 보고 싶어요. 다 만져 보고 싶어요…, 섀넌.”
섀넌은 윈터의 노골적인 말에 소리 없이 경악했다.
절대로, 절대로 남에게 핥아질 수 있는 부위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물론 진입 이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애무라고 해도, 그의 상식선에선 아직까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중에. 거긴…, 아무리 나라도, 흐읏….”
구멍을 쭈욱 빨아들인 입술이 그 주변을 지분거렸다.
“조금만, 조금만요, 응…?”
춥, 츄웁, 틈을 금방이라도 가르고 들어올 듯 혀를 뾰족하게 세운 그가 하얀 볼기를 두 손으로 벌리고 주름진 살갗을 세게 빨아들였다.
아, 으…, 섀넌이 진저리치며 허리를 뒤틀었다. 윈터의 코끝에서 나오는 숨결이 제 볼기 사이를 간질였다.
“윈터, 제발…, 읏…, 거긴, 그만…….”
섀넌이 윈터의 머리를 움키며 애원했다. 입술을 떼고 고개를 살짝 든 윈터의 목덜미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섀넌의 다리를 잡아 몸을 돌렸다. 셔츠 아래로 들어온 손이 엎드린 등을 쓸어내렸다.
바닥에 깔린 모포에 뺨을 댄 채 고개를 돌린 섀넌이 윈터를 바라봤다. 그만할 줄 알았는데, 아예 본격적으로 하려고 제 몸을 엎어 놓는 그가 괘씸했다.
“……싫으면 말하라더니.”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윈터를 노려봤다. 윈터가 난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말만 하라고 했지 멈춰 준단 얘긴 한 적 없는데…….”
섀넌의 볼기를 잡아 벌린 윈터가 다시 입술을 내려 꽉 다물린 구멍을 머금었다. 틈새를 핥고 빠느라 질척하게 울리는 민망한 소리만이 겨울 숲에 조용히 깔렸다.
“아흐, 읏…!”
부드럽게 손가락 새로 짓뭉개지는 엉덩이를 천천히 주무르며 그 사이를 핥을 때마다 섀넌의 허리가 뒤틀리고 신음이 튀어나왔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는 없으나 한 손을 아래로 내려 쥔 그의 성기는 아직 허공을 향해 단단히 고개를 세우고 체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아무래도 싫지는 않은 것 같다.
윈터가 눈을 내리감으며 엷은 주름이 감싼 구멍을 혀로 녹이듯 살살 문질렀다.
“읏, 아, 그만, 거기…….”
바닥에 깔린 모포에 뺨을 비비며, 섀넌이 숨을 헐떡였다. 못 견디게 간지럽고 어색하고 축축했다. 섀넌이 손을 뒤로 뻗어 제 볼기를 잡은 윈터의 손을 떼어 내려다 엇나갔다.
“아…!”
말캉한 혀끝이 틈새를 가르고 들어왔다. 꽉 닫힌 구멍을 힘겹게 드나들며, 안쪽 점막을 한참이나 공들여 핥았다. 섀넌은 제 엉덩이 사이에서 나는 질척한 소리에 괜히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으, 간지러워, 읏….”
구멍과 맞닿은 입술에서 샌 타액이 회음부를 따라 음낭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작게 몸서리치는 섀넌의 등이 아래로 바짝 휘었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억지로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벽을 비비고, 주름 위를 핥는 감촉이 소름 끼쳤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정신없이 흘려 댄 끝에 마침내 윈터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붉게 상기되어 움찔거리는 주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윈터가 물었다.
“싫어요?”
“진작, ……아까 싫다고 말했잖아.”
“여기가 평소보다 더 많이 젖어서 좋아하는 건 줄 알았어요.”
윈터가 섀넌의 끈적끈적한 요도구를 검지 끝으로 톡톡 어루만졌다. 엄지와 검지, 중지로 귀두 끝을 감싸며 쓰다듬는 감촉이 미끌미끌했다. 젖어 있는 선단을 내려다보던 섀넌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자기 말은 안 듣고 걔 말을 듣는단 말인가. 좆이 본체도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해 두면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요.”
“아아, 윽….”
예고도 없이 손가락이 쑤욱 들어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깔린 제 코트와 모포에 얼굴을 묻은 채, 섀넌이 신음했다.
“그때…, 바로 넣으니까, 여기가 찢어지고 부어 있어서,”
“흣, 아으….”
“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케인타운 외곽 숲에서 섀넌과 정사를 나눴을 때, 윈터는 섀넌의 그곳이 빨갛게 부어 있는 걸 처음 목격했다.
그때도 섭식이 부실해 회복력이 더뎠기에 볼 수 있었던 거지, 평소였다면 섀넌의 어디가 어떻게 찢어지고 어떻게 부어오르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한 번 목격하고 나니 다시는 제 무식한 물건을 섀넌의 아래에 막무가내로 꽂고 싶지 않아졌다.
“아아, 흣…….”
끝까지 꽂힌 손가락이 빙글 돌아가며 내벽을 어루만졌다. 아래로 휘어 내려간 섀넌의 등이 달달 떨렸다. 그의 머리 쪽으로 흘러내린 셔츠는 그의 허리와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게 했다.
윈터가 그 위를 덮듯 상체를 숙이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다른 손으로 셔츠를 더 걷어 올린 그가 섀넌의 등에 입술을 부딪었다.
긴장으로 조여들었던 내벽이 점차 느슨하게 풀리며 섀넌에게서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올 때까지,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의 안을 만지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잠, 잠깐, 윈터.”
두꺼운 성기를 잡아 흔들며 볼기 사이의 틈새를 귀두 끝으로 꾹 누르는 윈터의 손목을 섀넌이 급히 잡았다.
구멍을 열정적으로 빨아 대느라 발갛게 통통해진 입술을 보며, 섀넌이 낮게 말했다.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좋아.”
“…아.”
미안해요, 안 그래도 새빨갰던 얼굴이 더 화르륵 달아오른 윈터가 얼른 섀넌의 몸을 다시 돌려 눕히며 사과했다.
그가 섀넌의 이마와 콧잔등, 입술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맞닿은 피부에 땀이 밸 정도로 그의 온몸이 열로 들끓었다.
핏줄이 울근불근 돋아난 커다란 손이 섀넌의 머리 옆을 짚었다. 새빨간 흥분이 넘실거리는 눈이 섀넌을 응시했다. 한 손으로 성기를 잡아 구멍에 맞춘 윈터가 여전히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조심스럽게 그의 안에 진입했다.
긴 숨을 토해 내는 섀넌의 입술을 다정하게 핥으며, 윈터가 눈을 내리감았다.
천천히, 천천히…. 제발 천천히.
떨려서 죽을 것 같았다.
이제 제 몸은 예전과 달라서, 전처럼 그를 몰아붙이다간 정말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섀넌은 늘 자신을 유리처럼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다뤄도 모자랄 때였다.
“흣…….”
섀넌에게서 짧게 끊어지는 듯한 숨이 터져 나왔다. 타액으로 적셔 두고 손가락으로 충분히 풀어 둔 내벽 안으로 뭉툭한 귀두 끝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뜨거운 손이 섀넌의 뺨과 목덜미를 쓸었다. 이물감으로 구겨진 콧잔등에 쪽쪽 내려온 입맞춤과 함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춥죠.”
“…조금, 아윽.”
말을 붙이는 동시에 조금 더 밀고 들어온 성기가 배 속을 꽉 메웠다.
“잠깐, 윈터, 잠깐 멈춰.”
섀넌이 다급하게 말했다. 괜히 하자고 고집부렸나……. 더 들어가면 정말 힘들 것 같은데.
섀넌의 말이 어떤 금제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멈춘 윈터가 미동도 없이 눈만 깜빡이며 그를 내려다봤다.
“……어느 정도, 들어갔지?”
윈터가 살짝 고개만 내려 제 성기를 확인했다.
“반 정도요.”
“조금만…, 조금만 더.”
하아…, 윈터가 억눌린 숨을 내뱉으며 조금 더 허리를 밀어붙였다. 츠즈즛, 차진 내벽을 가르는 성기의 감촉이 섀넌에게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안을 훤히 벌리는 동시에 들어차는 묵직한 양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거기까지만.”
아무래도 다 넣는 건 안 될 것 같다. 힘줄이 불거진 단단한 팔을 매만지며 버티던 섀넌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허리에 제 다리를 감았다.
“여기요?”
윈터가 그렇게 물으며 조금 더 허리를 밀어 올렸다.
“아읏, …그래, ……거기.”
상체를 세운 윈터가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섀넌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흉흉하게 핏발이 선 채 드러나 있었다.
“여기까지만 넣으면 돼요…?”
제 손으로 그 길이를 재보며, 윈터가 재차 물었다.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섀넌이 고개만 끄덕였다.
“잘 참을게요. 아프게, 하긴 싫으니까…….”
그 손을 떼어 내 바닥에 내리누른 윈터가 상체를 숙이며 그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하아…, 섀넌의 목덜미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린 윈터가 조금 전 가늠했던 지점까지 정확히 밀어 넣었다 다시 빼기를 반복했다.
“흐읏, 하아…….”
늘 배 속을 주먹으로 얻어맞는 것처럼 격렬했던 정사는 오늘 밤엔 없을 예정이었다. 고통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찌르르하게 온몸을 괴롭히는 쾌감도, 오늘은 강도를 낮춰 천천히 스몄다.
“괜찮아요…? 아프지는 않아요?”
윈터가 얕게 허리를 움직이며 물었다. 섀넌이 그런 그의 양 뺨을 잡아 콧날을 비비며 좋아, 하고 속삭였다.
“아아…….”
낮은 신음을 쏟아내며 섀넌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윈터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따뜻한 내벽을 얕게 들락거리던 성기가 어느 순간 깊게 박혔다가 빠르게 물러났다.
“방금 너무, 깊었죠…, 미안해요.”
“…괜찮, 아.”
“안에…, 안에 적셔 줄까요? 지금, 좀…, 하아……, 쌀 것 같긴 한데.”
여유를 놓쳐 버린 음성이 귓바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섀넌이 그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윈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섀넌이 아주 작게 허락의 말을 속삭였다.
윈터에게서 억눌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짝 조여든 등 근육과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 넣으면 안 돼, 조금만 더,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섀넌의 목덜미를 깨문 채 저도 모르게 힘주어 허리를 쳐올리던 윈터가 급히 제 성기를 뒤로 물리며 사정했다.
“하아, 하아….”
미리 섀넌과 약속했던 딱 그 지점에서 멈춘 채, 그의 몸이 확 경직되었다. 여전히 섀넌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몰아쉬던 그가 다시 성기를 뒤로 물렸다가 확 박았다.
“아흣……!”
“…어떡해요, 섀넌.”
고개를 든 그가 섀넌과 시선을 맞췄다. 발개진 눈시울이 왈칵 젖어 들었다.
윗입술 아래로 비어져 나온 송곳니와, 원래의 색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핏빛으로 일렁이는 그의 눈을 보고 섀넌은 소리 없이 전율했다. 붉은 눈 위에 나풀나풀 매달린 긴 은백색 속눈썹이 기묘했다.
“조금만, 더, 깊게 넣어도 돼요? 아…, 진짜 미치겠는데.”
뾰족한 송곳니가 튀어나온 채로 제 아랫입술을 얕게 깨문 윈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 들어가지 못하고 얕게 움직이는 허리가 내벽 안을 더 휘젓고 싶어 안달 난 듯 뭉근하게 움직였다.
“아니에요, 싫어요. 참을래요…, 잘 참을 수 있어요.”
섀넌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푹 떨군 윈터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렸다. 두꺼운 등 근육은 아슬아슬한 인내심으로 꿈틀거렸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끝까지 넣지 않으려고 바짝 곤두서는 둔근이 섀넌의 손바닥 아래로 여실히 느껴졌다. 그의 엉덩이와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안을 적시는 쾌감을 음미하던 섀넌이 한숨을 흘렸다.
…아무래도 못 참는 건 자신 쪽이 될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밀어낸 섀넌이 상체를 일으켰다. 윈터가 위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게 지금은 안전할 것이다.
“착하네….”
윈터가 그의 허리를 잡은 채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잘 싸고, 잘 참고…….”
윈터의 머리 양옆을 짚은 섀넌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그의 눈가에 키스했다. 눈꼬리에 녹진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섀넌의 입술에 뭉개졌다.
“흐윽…….”
“잘 울고…….”
제 허리와 등을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의 감촉과, 가쁘게 오르내리는 강건한 가슴팍이 제 살에 와 닿는 게 좋았다.
추위는 완전히 가셔 버렸다. 셔츠를 어깨 아래로 내린 섀넌이 윈터의 뺨을 잡아 깊게 입술을 겹치며 조금 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사전에 약속해 두었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섀넌은 본능을 따라 위아래로 일렁였다. 배 속에 들어 있는 윈터의 몸이 제게 줄 쾌락과 기쁨을 알고 있었다.
“하아…, 윈터…….”
섀넌이 아래로 깊게 주저앉았다. 미처 다 들어가지 못했던 성기가 배 속에 길을 내며 빠듯하게 파고들었다.
“아, 읏…, 샤, …잠깐, 윽.”
허리를 잡고 있던 윈터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아래에서 시작된 전율에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만월을 가로지르는 제 발정기는 매우 짙고 끈질기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지금은 안 돼, 안 돼, 참아, 안 돼….
윈터는 스스로 목줄을 잡아채듯 안 된다는 말만 기도처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시라트의 흰 설원, 그 냄새 나는 온기 가득했던 연회장, 독한 혼성주와 시끄러운 사람들……. 살짝 비어져 나온 그의 손톱이 섀넌의 허리에 생채기를 남겼다.
윈터가 무슨 번뇌에 휩싸여 있는지도 모른 채, 섀넌은 제 쾌감을 위해서만 달렸다.
아래를 가득 채운 양감이 기꺼웠다. 핏발 세운 제 아이의 물건이 질척한 배 속을 비비고, 뒤로 물러났다가 파고들 때마다 미지근한 쾌감이 찰박찰박 몸 안에서 터져 흘렀다.
“아, 좋아…, 윈터.”
“…갈 것 같아요, 섀넌.”
이를 악물고 있느라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섀넌이 그런 그의 뺨을 감싸며 턱 끝과 뺨, 입가에 아무렇게나 입술을 부딪었다.
“괜찮아, …하아, 적셔 줘, 윈터, 좋아…….”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를 더 깊게 품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섀넌이 허리를 바짝 내리며 안을 조였다. 내벽을 빈틈없이 핥던 성기가 가장 깊은 곳까지 빠듯하게 맞물리고, 예민한 극점을 짓눌렀다.
찌르르한 쾌감이 아랫배에 번져 들었다.
“아, 읏…!”
섀넌의 몸이 확 움츠러들며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섀넌의 성기를 쥐고 있던 그의 손과 아랫배가 분출된 정액으로 흥건했다. 참았던 만큼 농도가 짙은 흰 체액이 성기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마른 등을 쓸어내려 준 윈터가 그의 가슴팍에 입술을 묻은 채 달뜬 한숨을 흘렸다. 정액을 질질 토해내는 섀넌의 성기를 거의 틀어쥐고 있던 그가 허리를 움직이며 참았던 쾌감을 터뜨렸다.
“…흐윽.”
다급하게 조여든 팔 근육이 섀넌의 몸을 옥죄었다. 찌걱찌걱,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좁은 내벽 안에 쏟아진 정액이 틈새로 하얗게 삐져나왔다. 윈터가 섀넌의 가슴팍에 제 이마를 마구 비비며 한숨을 흘렸다.
“아아…, 섀넌…….”
그런 그의 턱을 거칠게 움킨 섀넌이 입술 안으로 제 혀를 쑤셔 넣었다. 헐떡이느라 마른 입 안을 적셔 주고 헤집으며 짧고 깊은 키스를 나눠 준 섀넌의 몸이 완전히 윈터에게 무너졌다.
하아…, 하아…, 맞닿은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그 사이로 줄줄 흐르는 땀이 질척했다. 제 안을 적신 윈터의 물건은 아직도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으나, 윈터는 더 이상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섀넌을 끌어안고 있었다.
윈터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가쁜 숨을 흘리던 섀넌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이쯤 되면 으레 한 번 더 하자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윈터는 발갛게 물든 눈을 질끈 감은 채 사정의 여운을 조용히 붙잡고만 있었다.
“…예쁘네.”
섀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콧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조르지도 않고.”
안 그래도 변화 직후 성욕이 넘칠 시기에, 만월에 발정까지 겹쳤으니 본래였다면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들며 윈터의 성기를 빼냈다. 귀두 끝까지 뽑아내듯 빼내고 나자 섀넌의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윈터의 고간에 뚝뚝 떨어졌다.
윈터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섀넌을 품에 꼭 안았다.
“너무…….”
빨개진 얼굴을 섀넌의 어깨 위로 푹 떨군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좋았어요, 섀넌. 이걸로 다음 만월 때까진 더 잘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그때쯤이면 참을 필요 없을걸. 내가 그렇게 오래 비실대진 않을 테니까.”
“…제가 더 열심히 사냥해 올게요.”
윈터의 진지한 대꾸에 섀넌이 짧게 웃었다. 그러나 잔에 담은 피를 식도로 넘기는 것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이제는 정말 사냥을 나가야 할 때였다.
섹스할 기력이 있는 걸 보면 사냥도 나갈 수 있겠지…. 섀넌이 그런 생각을 하며 윈터의 귓바퀴를 손으로 매만졌다. 윈터가 괜히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틀었다.
“미안해요, 다 나을 때까지 제가 좀 더 잘 참았어야 했는데…….”
“이 정도로 참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윈터. 나였다면 이러지 못했을걸.”
“…섀넌도 처음 태어났을 땐 이랬어요?”
윈터의 질문에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며칠 밤낮을 섹스하며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어서, 짧게는 하룻밤에도 몇 명, 길게는 이틀에 한 번꼴로 갈아 치웠던 것 같아.”
“……그렇게 많이?”
“보통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이틀째가 되면 힘들어해. 어르고 달래 가며 안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그럼 나도 식어 버리니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잇던 섀넌은 문득 윈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처진 걸 보니 기분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윈터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설마 이런 걸로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그를 올려다보던 윈터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섹스의 여운이 남아 얼굴이 붉었지만 수줍어서 눈을 내리깐 건 아니었다.
미묘하게 굳어 내려간 입매, 애써 의연한 척하느라 느리게 깜빡이는 눈. 그가 저런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다는 건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임을 섀넌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질투 나죠.”
아니나 다를까 윈터에게서 작게 대답이 들려왔다. 섀넌은 기가 막혀 짧게 웃고 말았다.
“네 조부모의 조부모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을 가지고 무슨 질투를 해.”
“섀넌은 질투 안 해요? 내가 성년식 때,”
윈터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굴리고는 말을 이었다.
“…로잘린이랑 춤출 때 질투 안 났어요?”
“…….”
로잘린이 아니라 레일라인데.
조금 더 그럴싸한 예를 들지.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상대를 가지고 제게 뭘 바란단 말인가. 섀넌이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난 그딴 거 안 해.”
그가 윈터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대신 네가 나 몰래 다른 연놈이랑 붙어먹다 걸리면,”
차분한 얼굴로 윈터와 시선을 깊게 맞춘 섀넌이 경고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그 새끼도, 너도, 둘 다 모가지를 부숴 버릴 거야.”
“…….”
윈터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홀린 듯 멍한 눈이 은백색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잠시간 섀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진짜 섹시했어요, 섀넌.”
그 눈이 사르르 접혔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반할 것 같아요. 아니, 난 원래 매 순간 섀넌한테 반하긴 하는데…, 방금은 진짜…, 진짜 너무 좋았어요.”
섀넌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그가 한 번만 더 말해 달라고 새처럼 종알대며 졸랐다.
그가 짓궂게 윈터의 머리칼을 꽉 움켰다.
“…모가지를 부숴 버리겠다는 말이 좋아?”
“네, 섀넌이 그런 말 하니까 너무 야해요. 좆이 터질 것 같아요.”
노골적인 표현에 어이없어진 섀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으니 윈터도 덩달아 눈을 접으며 웃었다. 더 둥글게 휘는 순종적인 청회색 눈이 귀여웠다. 섀넌이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사랑스러운 제 아이의 눈에 한참이나 쪽쪽 키스를 퍼부은 섀넌이 슬슬 일어날 생각으로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둘러봤다.
옷이야 대충 주워 입으면 그만이지만….
“돌아가면 엘리자베스와 카일이 있을 텐데. 이 냄새를 풍기며 갈 수도 없고…….”
비릿한 체액과 땀 냄새를 달고 돌아가는 건 누가 봐도 ‘우리 방금 섹스하고 왔어요’라고 알리는 꼴이 아닌가.
뱀파이어들과 한 별장에 있다는 건 은근히 불편한 일이었다. 워낙 오감이 예민하니, 한 건물에 살면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려야 할 수 없는 탓이다.
“여기서 씻고 가요.”
윈터의 말에 섀넌의 시선이 힐끗 호수로 향했다.
……저게 아무리 얼지 않는 호수라지만 그렇다고 온수는 아닌데.
저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담그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윈터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며 가볍게 웃었다.
“안 춥게 할게요. 나 믿고 한 번만 들어가 봐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섀넌이 호수의 온도를 가늠이라도 하는 듯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봤다.
“……아픈 연인을 한겨울 호수에 담가 버리는 사람은 세상에 너뿐일 거야, 윈터.”
결국 섀넌이 윈터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그런 그를 양팔에 가두듯 폭 끌어안은 윈터가 몸을 일으켰다. 섀넌이 반쯤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긴 그가 천천히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으.”
발끝으로 시린 물이 닿자 섀넌의 몸이 금세 움츠러들었다.
어떻게든 자신과 빈틈없이 몸을 겹치고 체온을 나누려고 달라붙는 몸이 작고 안쓰러웠다. 윈터가 그런 그의 팔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물 안으로 몸을 담갔다.
“…….”
잔뜩 움츠러들었던 섀넌의 몸이 조금씩 이완되었다. 물은 생각보다 그리 차갑지 않았다. 아니 차갑기보단 약간 미지근하고, …놀랍게도 점점 따뜻해졌다.
윈터의 몸에서 퍼진 열기가 그를 중심으로 수온을 높게 만든 탓이다. 꿈틀, 근육이 더 부풀어 오른 그의 몸에서 흰 김이 올라왔다.
“……늑대족은 참 좋겠어.”
섀넌이 윈터에게서 몸을 조금 떼며 말했다. 윈터가 싱긋 웃으며 그의 몸에 물을 살짝 끼얹었다.
“대신 여름엔 못 견디잖아요.”
섀넌에게 여름은 그저 가장 따뜻한 계절이었고, 겨울은 혹독했다. 그래서 저와는 완전히 반대로 계절을 느끼는 윈터가 신기했다.
“여름은 북부에서 나고, 겨울은 남부에서 나야겠네.”
“…좋아요.”
윈터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런 그의 코끝을 살짝 쥐고 흔든 섀넌이 그의 어깨와 가슴팍에 살살 물을 끼얹었다.
잘게 일렁이는 물비늘에 반사된 달빛이 반짝반짝 산란했다. 사방이 뚫린 곳에서 이러고 있자니 새삼 우스웠다.
“……살다 살다 내가 숲의 호수에 몸을 담그는 날이 오다니.”
“한 번도 없었어요?”
윈터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는 막연히 섀넌이 세상에 경험해 보지 못한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섀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살아온 불멸자가 아닌가. 그런데 야외에서 몸을 담그는 것조차 안 해 봤다니 뜻밖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윈터의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대답했다.
“음, 굳이 이런 호수에 알몸으로 몸을 담글 일은 없지. 집에 가면 깨끗한 목욕물이 담긴 욕조가 있는데 뭐 하러.”
“……그럼 밖에서 섹스해 본 적은?”
섀넌의 눈이 금세 달갑지 않게 돌변했다.
“…네가 들어서 기분 나쁠 것 같은 질문은 아예 하지를 마.”
윈터가 섀넌의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작게 대꾸했다.
“저도 묻고 싶지 않은데, …자꾸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튀어나와요.”
궁금한 걸 어떡해요? 제게 혹사당한 섀넌의 다리 사이와 좁은 틈새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윈터가 눈을 흘겼다.
섀넌은 그런 그가 그저 귀여웠다. 연인 사이에 과거 일을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텐데, 연애도 섹스도 모든 게 다 처음인 윈터가 그런 걸 알 리 만무했다.
“단지 경험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게 경험은 그냥 경험일 뿐이야. 기억도 안 날 만큼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감흥도 없는 옛일이지.”
섀넌이 윈터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지금껏 숱한 세상사를 겪었지만, 그 무엇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섀넌의 다리 사이를 씻겨 주던 윈터의 손이 멎었다. 윈터에게 그건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남몰래 숨겨 놓은 비밀을 털어놓듯, 섀넌은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
“내 마음이 뒤흔들린 모든 순간은 네가 처음이었어, 윈터. 나조차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할 만큼…, 조금은 두려운 순간이기도 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지.”
“…….”
제게만 맹목적으로 열려 있는 청회색 눈을 보며, 섀넌은 담담하게 제 마음을 그 안에 다 내려놓았다.
언제부터 그가 제 몸과 마음을 온통 쥐고 흔들었던 건지, 섀넌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부쩍 커 버린 얼굴로 제게 노골적인 마음을 고백하며 다가오던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방싯방싯 웃으며 제게 작은 손을 뻗었던 그때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흑요석 같은 조그마한 눈을 반질거리며 제게 꼬리를 흔들던 그때부터였을까.
윈터는 제게 아직도 모든 게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경이롭고 애달픈, …세상에 이렇게나 찬란한 이는 다시 없을 것이다.
“내게 그런 존재는 앞으로도 네가 유일할 거야.”
섀넌은 그대로 윈터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한동안 그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제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이의 마음에 오래오래 각인되도록.
한참의 침묵 끝에 둘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섀넌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윈터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하늘 위로 완전히 떠오른 만월이 온 숲에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잔잔한 물소리와 두 사람의 안온한 웃음소리만이 차가운 겨울 숲에 낮게 깔렸다.
* * *
아스라한 절벽 끝에 서서, 한기가 도는 허공을 등진 채 선 두 불멸자 사이에 가볍지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절벽 쪽으로 몸을 반쯤 틀고 쭈그려 앉아 따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엘리자베스, 조금 긴장한 듯 굳어 있는 카일이었다.
눈에 젖은 낙엽 하나를 주워 든 엘리자베스가 그걸 반으로 찢으며 물었다.
“섀넌은?”
“……지 애새끼랑 같이 있겠지, 뭐.”
힐끗 그녀를 내려다본 카일이 정면으로 시선을 다시 돌리며 낮게 말했다.
낙엽이 가루가 되도록 손안에서 찢고 짓이기던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손을 털어 버린 그녀가 까마득한 허공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걘 성깔이 너무 더러워서 좋게좋게 해결할 일도 꼭 싸움을 만드니까.”
바람에 휩쓸린 긴 머리칼이 그녀의 뺨에 들러붙었다. 성가시다는 듯 그 머리칼을 떼어 낸 엘리자베스의 눈이 새빨갛게 일렁였다.
“하여간 늙은이들 걸음은 빌어먹게 느려 터졌다니까.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어.”
엘리자베스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고 카일은 평소와 달리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윈터의 변화를 누구보다 복잡한 감정으로 지켜본 그로서는, 아직도 그 심경을 갈무리하지 못한 듯 보였다.
파스락, 마른 가지가 쓸리는 소리와 싸락싸락 눈 떨어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냉기를 타고 흘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엘리자베스가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조여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젊은 남녀들이 소리 없이 카일과 엘리자베스 주변으로 모였다.
한때 가깝게 어울렸던 자들, 그리고 아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교류가 없던 자들까지.
누군가는 모호한 얼굴로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유심히 살피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전혀 관심 없는 시큰둥한 얼굴로 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길까 싶어 따라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중에는 이미 송곳니를 드러내며 노골적인 적의를 티 내는 자들도 있어서, 카일이 엘리자베스의 앞으로 살짝 나오며 눈만 굴려 그들을 확인했다.
긴 생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겨 하나로 묶은 사내가 뒷짐을 진 채 담담한 얼굴로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을 익히 아는 카일이 딱딱하게 인사했다.
“…세바스티안.”
세바스티안은 그 인사를 받는 대신 제 할 말을 했다.
“뱀파이어 셋이서 시라트를 아주 휘저어 놓았다더군.”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비딱하게 틀어 올리며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로렌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가 지원 요청할 땐 그렇게 딴청을 피우시더니, 그새 다른 놈들한테 조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거야, 로렌스? 근데 이 씨발 새끼가, 중요한 얘긴 쏙 빼놨네?”
로렌스가 불쾌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노려봤다.
“일러바친 게 아니라 당연히 알려야 할 사실을 알렸을 뿐이야. 내 언젠간 네놈들 사고 칠 줄 알았지. 섀넌은 늑대족이랑 붙어먹고, 네놈들은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를까 봐?”
카일이 그 앞을 막아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고개를 기울인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삐딱하게 웃었다.
“입 다물어, 로렌스.”
그의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이 금세 차게 식었다.
“놈들이 불멸자의 회복력을 사하는 독을 만들었다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둬. 너희들은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독을 마신 친구가 놈들에게 끌려갔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구하러 간 것뿐이야.”
태연한 카일의 말에 뱀파이어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두 사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걸 명분으로 시라트의 내전에 개입한 건 아니고?”
누군가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자베스의 코웃음이 따라붙었다.
“네놈들 의리 없는 건 내가 아주 잘 알지. 지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새끼들.”
북부의 혹한이 휩쓰는 겨울 산 한 중턱에 모인 그들 사이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아슬아슬한 대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카일이 세바스티안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그놈들이 만든 독에 너희들은 당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해? 지금이야 음용을 해야 흡수되는 독이라지만, 나중에는 그 독이 어떻게 변화할 줄 알고. 너희들이 사냥하는 인간의 몸에 그 독이 주입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
“당장에 네놈들 안위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원 요청도 싹 무시한 주제에, 너희가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이를 드러낼 자격이 있나?”
어떤 여자가 카일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잖아, 카일. 결백한 척하지 마. 우스워 보일 뿐이니까.”
“순리를 거스른 불멸자가 태어났어.”
“우린 오늘 그놈한테 더 관심이 가는데 어디에 숨긴 거야?”
새빨갛게 넘실대는 살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압박하듯 다가온 몇몇이 물었다.
입을 다문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는 입은 쉽게 말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무슨 항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말했다.
“순리를 거스른 필멸자가 뭐 걔밖에 없어? 맹약으로 평생 종노릇하며 지금껏 살아온 인간 놈도 있는데.”
세바스티안이 화를 씹어 내뱉듯 대꾸했다. 훤칠하게 드러난 그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권능을 지니지 못한 채 맹약의 구속력만으로 명줄만 이어온 인간 놈과 지금의 상황이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엘리자베스.”
“…….”
“공교롭게도, 그 종놈 또한 그리말디의 밑에 있는 놈이 아닌가? 그놈이 필멸자들에게 유독 헤픈 모양이군.”
“참 더럽게도 들러붙네.”
그때 별안간 나타난 섀넌이 성큼성큼 그들 사이를 지나쳐,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앞에 서며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으셨는지.”
푹 파여 있던 섀넌의 뺨은 며칠 새 살이 조금 차올라 있었다. 모처럼 멀끔한 얼굴로 수트를 다 갖춰 입고, 포마드 젤을 발라 머리를 깔끔하게 세팅한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윈터는 어디에 두고?”
그녀의 물음에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어.”
“아아.”
사냥 보냈구나? 엘리자베스 역시 사소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 그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로렌스가 물었다.
“네 남창 어디에 숨겼어, 섀넌?”
그를 발견한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남창이라니. 굳이 네 소개를 할 필요는 없어, 로렌스. 이 자리에 네가 남창인 거 관심 있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그의 말에 소리 내어 웃는 건 엘리자베스뿐이었다. 모욕을 당한 로렌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러운 개새끼랑 붙어먹는 주제에…….”
“내 아이가 개새끼인 건 맞는데, 너만큼 더럽진 않아. 박아 달라고 조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누가 누굴 보고 감히 더럽다는 거야.”
섀넌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보다 키가 작은 로렌스가 눈을 치키며 그를 노려봤다. 허리를 약간 숙여 그런 그와 눈을 맞춘 섀넌이 느슨하게 웃었다.
“표정을 보니 아직도 나한테 박히고 싶어 뒤가 근질근질한 모양인데.”
“무슨…!”
섀넌이 로렌스의 뺨을 툭툭 치며 그의 말을 잘랐다.
“생각 있으면 그때처럼 비굴하게 조르지 말고 언제든 말해. 구둣발로 그 쓸모없는 후장을 다 짓이겨 줄 테니까…….”
로렌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가 금방이라도 섀넌의 목을 잡아챌 듯 이를 드러냈다.
“헛소리 지껄이면서 시간 끌지 마라, 그리말디.”
세바스티안이 그에게서 로렌스를 떼어 놓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아아, 그렇지. 그대들은 지금 내 아이에게 관심이 있겠지.”
섀넌의 눈이 소리 없이 뱀파이어들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모두가 자신들에게 적의를 가진 건 아닌 듯 보였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가 태연함을 가장한 웃음을 제 얼굴에 덧씌웠다. 음…, 낮게 침음하던 섀넌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최초가 존재하는 법이야.”
“…….”
“세상엔 늘 이변이 존재하고, 그 이변이 ‘최초’를 만들거든.”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며, 섀넌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이었다.
“최초의 늑대족이 인간과 짐승의 교미에서 탄생한 것처럼, 최초로 뱀파이어에게서 비롯된 늑대가 나올 수도 있는 게 세상사지.”
“그딴 걸 지금 궤변이라고 늘어놓는 건가?”
세바스티안의 말에 크게 코웃음 친 섀넌의 입가가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웃음기가 날아간 그의 얼굴에 섬뜩한 한기가 감돌았다.
“네깟 놈들한테 궤변을 늘어놓을 만큼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없는데.”
“그리말디, 더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네놈들은 몰랐던 사실을 난 알았고, 그걸 시도한 것뿐이야.”
“그런 말로 수습하기엔 너무도 큰 짓을 저질렀어. 필멸자에게 우리가 가진 권능을 나눠 준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거야.”
제게 단호하게 쏟아지는 비난을 들으며, 섀넌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그들 사이를 거닐며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하던 섀넌이 낮게 말했다.
“세상에 우리 같은 불멸자는 한 줌이고, 필멸자는 발에 차이도록 많아.”
붉게 일렁이는 시선이 세바스티안에게 꽂혔다가 이내 그 옆으로, 또 그 옆으로 옮겨갔다.
“이제 네놈들도 내가 아는 사실을 다 알아 버렸으니, 앞으로 살면서 한 번이라도 날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없을 것 같아?”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뱀파이어들은 복잡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아쳤다.
“정말 평생 날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래, 얼마든지 날 멸시하고 혐오해도 좋아. 너희들한테 사랑받고 싶은 마음 나도 없으니까.”
그들의 표정은 매우 다양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섀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또 누군가는 그동안 숱하게 손에서 놓아 버렸던 필멸자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 중엔 맹약으로라도 어떻게든 수명을 이어 붙이려다 실패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수명의 격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애끊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보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결코 자신을 비난할 수 없으리란 걸 섀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필멸자로 태어나 감히 불멸의 권능을 누리는 존재가 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우리에게 어떤 위험이 돌아올지,”
“내 존재가 당신들의 안위에 무슨 큰 영향이라도 끼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당신들은 원래 그렇게 겁이 많은 모양이죠?”
그때 그들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윈터를 보는 섀넌의 표정이 찰나 구겨졌다. 안전한 곳으로 최대한 멀리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이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잘 쫓아온다.
“다들 내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쉽게 올 기회 아니니까 잘 봐두세요.”
윈터가 양손을 천천히 머리 옆으로 들어 올리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호기심, 혹은 살의가 가득한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 내리꽂혔다. 캬악,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이를 드러낸 그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숨 막히게 들러붙는 시선은 이미 시라트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윈터는 담담한 얼굴로 그 시선들을 마주했다.
누군가 자세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다가와 윈터의 용모를 살피자, 이내 하나둘 몇 사람이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구경거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섀넌은 미동도 없이 눈만 움직여 그 상황을 날카롭게 관망했다. 너무 가깝다. 뱀파이어들과 윈터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그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았다.
“…체온이 느껴져.”
“모색은 원래 이렇게 타고난 거야?”
“눈 색도 우리와 완전히 같진 않은데.”
윈터를 살피던 누군가 작게 말했다.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고, 누군가의 적의는 더 짙어졌다.
얼굴이 유독 창백한 사내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주변의 분위기를 금세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를 악문 채 그를 주시하는 섀넌의 턱 근육이 바짝 경직되었다.
“세상에 저런, 저런 말도 안 되는 돌연변이는,”
“돌연변이가 아니에요.”
윈터가 상대의 말을 잘랐다. 아슬아슬하게 깨질 것 같았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가 서늘한 눈으로 얼굴도 모르는 뱀파이어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나는 완전히 당신들에게 속한 존재도 아니고, 피만 마시고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며, 짐승의 몸으로 날고기를 뜯는 늑대이자 그리말디의 피를 이어받은, 그에게 속한 자입니다.”
말없이 그 상황을 지켜보던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라트에서 나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에요. 이 일을 아는 건 이곳에 있는 당신들뿐이라는 뜻이죠.”
윈터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바라봤다.
“당신들의 권능을 받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나는 물론이고 날 변화시키는 섀넌도,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필멸자에게 자기 권능을 나눠 줄 뱀파이어는 많지 않을 것 같고,”
윈터의 말은 매우 침착했으나, 그들을 설득하려는 어떤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섀넌만이 포착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게다가 이 일을 당신들이 나서서 함부로 떠벌릴 게 아니라면 세상에 알려질 일도 없을 텐데. 굳이 이렇게 몰려와 과민한 반응을 보여야 할 이유가…?”
“넌 필멸자의 순리를 거스른 거야!”
“흙에서 태어난 당신들도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야.”
윈터의 말을 마지막으로 절벽 위는 지독한 적막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미동 없이 서 있는 섀넌의 입술이 추위로 새파랗게 질리고, 윈터를 관찰하는 시선이 하나둘 흩어질 때까지 계속된 침묵을 끊은 것은 세바스티안이었다.
“……그리말디.”
“…….”
“이걸 처음으로 알아낸 게 누구지? 분명 넌 아닐 테고. 누가 네게 그걸 알려 주었나.”
마른 침을 삼키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쉰 섀넌이 차분히 대답했다.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그저 다리야 자하카가 알고 지냈던 놈이라는 것밖엔. 이미 죽은 자일 수도 있고,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을 수도 있겠지.”
굳어 있던 표정을 애써 풀고 담담하게 고개를 돌린 섀넌이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북부와 남부를 오가는 추격자 한 놈이 있어. 그가 추격자 중 가장 오래되었다더군. 최소 40년 이상은 살았을 텐데 그 외모는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야.”
그런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섀넌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네놈들이 죽여 없애야 할 건 그 추격자 놈들이지. 내 아이가 아니야.”
로렌스의 곁을 스치며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진 섀넌이 윈터의 앞을 막아서듯 섰다.
“더 자세한 얘긴 그놈에게 가서 들어. 그놈은 딱히 숨기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까. 네놈들이 지금껏 추격자들에게 의뢰를 맡기며 먹인 피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할 테지.”
추격자의 존재를 마땅찮게 여기면서도, 제 편의를 위해 알게 모르게 한두 번씩 그들을 이용해 본 자들은 그저 침묵했다.
“하지만, …피를 먹이는 것만으로 우리의 권능을 나눠 주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그건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 이미 실험한 사례가 숱하게 많다고.”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어떤 여자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섀넌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며 차분히 말했다.
“고작 몇 cc의 피만으로 내 아이를 살린 게 아니야.”
“…….”
“정확한 방법을 알아서 한 행동도 아니었어. 그저…, 그저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 지금껏 우리 중 그 누구도 자기 목숨을 걸고 이런 시도는 해 보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운 좋게 성공한 거고.”
“추격자와 번질나게 어울리더니, 머릿속에 아주 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그리말디.”
누군가의 대꾸에 섀넌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맞아. 놈들을 겪지 않았다면 나도 그런 미친 발상은 하지 못했을 거야.”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이들을 향해 경고했다.
“하지만 추격자와 어울린 건 나뿐만이 아니지. 지금껏 그들이 존속한 이유에 네놈들은 포함 안 된다고 생각해? 이 모든 걸 내 죄라고만 하기엔, 너무 양심 없다는 생각 안 드나?”
그때 별안간 누군가 순식간에 섀넌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 새끼가 말이면 다인 줄,”
콰르륵! 그와 동시에 사나운 포효가 터졌다.
거대한 늑대가 맹렬한 기세로 그들 사이를 갈랐다. 흰 눈이 은빛 늑대의 발치에서 먼지처럼 부옇게 산란했다.
섀넌을 보호하듯 막아서며 몸을 부풀린 늑대가 광포하게 으르렁거렸다.
희게 드러난 날카로운 이가 새빨간 피로 젖어 있었다. 섀넌의 앞섶을 움켰던 뱀파이어가 너덜너덜하게 찢긴 손을 부여잡고 훌쩍 뒤로 밀려났다.
수십 쌍의 붉은 눈이 그와 늑대를 빠르게 오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동시에 살갗이 아물기 시작한 제 손을 보던 뱀파이어가 입술을 덜덜 떨며 치욕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르르르…, 콧잔등을 사납게 구긴 늑대가 기세를 더욱 부풀렸다. 새파란 짐승의 안광에 붉은 살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눈을 보는 뱀파이어들의 얼굴엔 혼란과 불안, 놀라움과 흥미로움, 적의 같은 다채로운 감정이 드리워졌다.
구겨진 앞섶을 천천히 정돈하는 섀넌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날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내 아이는 불멸의 권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고개를 살짝 치켜든 그가 느슨하게 웃었다.
“……개새끼라 물기도 잘 물거든.”
처음부터도 한마음이 아니었던 뱀파이어들의 회동은 광포한 늑대의 포효에 금세 균열이 생겼다. 아슬아슬하게 흐르는 침묵과 그들 사이를 오가는 시선은 서서히 결속력을 무너뜨렸다.
“……굳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싸워야 해?”
본능적으로 기세를 누그러뜨린 뱀파이어 하나가 그렇게 말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늘 천박하고 하찮다고 멸시하기만 했던 짐승의 눈에, 자신들과 같은 핏빛 살기가 흐른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갓 태어난 뱀파이어가 가진 살욕을 여과 없이 드러낸 늑대를 보니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갓 태어난 뱀파이어, 혹은 천박한 늑대와 뒹굴며 꼴사납게 싸우고 싶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 깔끔하게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던 이들 중 하나가 짧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재미없네. 난 이만 가야겠어. 차라리 추격자 놈들이나 족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여기에 저 무식하게 힘만 넘치는 애송이를 굳이 없애고 싶은 사람은 몇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세바스티안이 굳은 얼굴로 조용히 뱀파이어들을 바라봤다.
윈터가 늑대의 모습을 하자 노골적인 적의를 품은 이들보다는 뜻밖에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또 누군가는 늑대를 향한 흥미가 더해져 도리어 미약한 호의가 생기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아.”
그의 말에 동조한 이들이 하나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필멸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이상,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앞으로 섀넌의 입장이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만약 자신이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함께 죽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끝까지 곁에 두고 싶은 필멸자가 생긴다면.
최초의 선례를 온건히 남겨 두어야 그다음이 편해지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선례가 무려 저 자하카 늑대라면, 나중에 혹시라도 자신들의 권능을 이어받은 인간 하나쯤 더 생긴다고 문제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로렌스는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으나, 뒤로 물러나는 이들은 절반이 넘고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긴장으로 팽팽해진 일대를 파고들었다.
세바스티안이 조용히 머릿수를 가늠해 보았다. 자신들 쪽엔 얼간이 같은 로렌스와 역시나 별 볼 일 없는 몇몇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저 늑대인지 돌연변이인지 모를 애새끼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이겨 봤자 본전이고, 지면 그것만큼 굴욕이 없을 것이다.
“…미쳐 날뛰는 애송이를 상대하는 건 역시 귀찮은 일이지.”
침묵을 깬 세바스티안의 낮은 목소리가 한기에 덧씌워졌다.
바람에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칼 몇 올을 단정하게 쓸어 넘기며, 세바스티안이 낭패감으로 물든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지만, 우리들 눈에 함부로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말디. 앞으로 네게 줄 도움 같은 건 없으니까.”
“나도 네놈들에게 도움받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이만 꺼져.”
섀넌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를 향해 이를 갈던 로렌스와 세바스티안을 위시한 이들이 가장 먼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은백색 늑대를 관찰하던 이들도 하나둘 자리를 벗어났다.
아마 그들은 한동안 추격자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될 것이다. 추격자를 잡아 족치든, 더 자세한 얘길 들어보고 싶어 하든, 모종의 실험을 하든, 어느 이유로든 말이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모두 멀어질 때까지, 섀넌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윈터는 그의 다리에 몸을 부대끼며 그 주위를 느리게 맴돌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꼰대들 하여간 말은 엄청 많아.”
카일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문득 섀넌과 눈을 마주친 그가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섀넌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가장 쉽게 윈터의 변화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라트에서부터 내내 그가 취해 온 태도는 섀넌에겐 몹시 뜻밖이었다.
그가 평소 아무리 스스럼없이 추격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고, 섀넌에게 윈터를 데리고 도망치라고 제안했을 만큼 나사 빠진 생각을 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누구도 자신들의 권능을 감히 넘볼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오만함이 그를 여유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섀넌과 윈터로 인해 그 경계가 무너진 지금은, 그에게선 평소 같은 관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불편할 일이 좀 많겠네.”
카일이 낙담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신분 위조 서류는 세바스티안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데…….”
영생을 살며 꼭 필요한 신분 관련 문제를 지금껏 그가 해결해 주었는데, 이제는 바랄 수 없게 되었다.
“됐어, 뭐 세상에 뱀파이어가 그놈밖에 없나.”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문득 윈터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에 아까부터 억누르고 있던 호기심과 흥미가 반짝 서렸다.
“강아지야, 좀 만져 봐도 돼?”
윈터의 콧잔등을 향해 손을 뻗는 엘리자베스의 손등을 섀넌이 찰싹 때렸다.
“만지면 물어.”
“아, 치사해. 닳는 것도 아니고.”
“닳아. 남의 애인 얼굴 만져서 뭐 하려고.”
섀넌이 그녀의 말을 일축하며 윈터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하…, 애인이래,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 상대로 진짜 양심도 없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제 말을 무시한 채 윈터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귓가에 뭐라고 작게 속삭이는 섀넌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상태로 대화가 통하긴 해?”
섀넌이 윈터의 귀 뒤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털을 쓰다듬었다. 섀넌의 뺨을 핥고 그의 냄새를 맡던 윈터가 몸을 낮추고 그의 앞에 엎드렸다.
“통해.”
섀넌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짧게 대꾸했다.
청회색 홍채 가운데 핏물이 떨어진 것처럼 붉은 동공이 천천히 조여들었다. 명백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그 눈을 빤히 보던 카일이 이내 시선을 떼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편해서 좋겠네. 늑대족도 됐다가, 불멸자도 됐다가. 저 유리한 쪽으로 여기저기 다 붙을 수 있고.”
카일의 말에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섀넌이 그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너도 날 좀 이해해 봐, 섀넌. 난 그동안 숱하게 널 이해해 줬잖아. 하루아침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라고, 이건.”
“나한테 처음 추격자를 연결해 준 건 너잖아.”
그게 아니었으면 섀넌은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영영 알 수 없었을 거다.
개개인은 각자 다른 목적을 갖고 움직이지만, 모든 일은 유기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순간순간의 그 모든 선택들이 결국은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었고, 그게 아마도 인간들이 말하는 운명이 아닐까 섀넌은 생각했다.
카일과 엘리자베스, 러셀, 그리고 갈리나와 다리야, 심지어 하슬라까지도.
윈터와 자신을 관통한 이 운명의 끈은 그들 모두의 손을 탄 것과 다름없다.
“……제기랄.”
작게 욕을 뱉은 카일이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에서 떨어진 눈 알갱이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칼에 내려앉았다.
“어디 가?”
힐끗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본 카일이 대답도 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쟤는 할 말 없으면 꼭 저러더라.”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따라 일어섰다. 그녀가 윈터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강아지야, 오늘 잘했어. 다음에도 마음에 안 드는 새끼 있으면 콱 물어 버려. 응?”
섀넌의 무릎에 고개를 괸 채 눈을 감고 있던 늑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커다란 눈이 엘리자베스를 힐끗 향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엘리자베스는 그저 짧게 웃고는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윈터가 고개를 들어 섀넌의 턱과 입술을 핥았다. 훅 끼치는 숨에 짐승 특유의 날 것을 담은 열기가 실려 있었다.
섀넌이 커다란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짐승의 육신에 둘러싸인 제 아이의 눈은 조금 더 이질적이다. 늑대의 안광이 서린 청회색 홍채와 뱀파이어의 붉은 동공의 조합은 위화감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확실히, 다른 뱀파이어들이 보면 괴이하다고 할 만한 눈이었다.
“…음.”
뭐, 제 눈에만 예쁘면 됐지 남의 눈에도 예뻐 보일 필요 있을까.
그래 봐야 성가신 일만 생기지…….
섀넌이 몸을 일으키자 따라 일어선 윈터가 어슬렁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보기에 조금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늑대가 제 걸음에 맞춰 졸졸 따라오는 게 귀여워서, 문득 섀넌은 언젠가 한 번 윈터에게 목줄을 채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섀넌이 저를 올려다보는 윈터의 순한 눈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목에 가죽 구속구를 채우고, 단단한 끈을 연결해 끌고 다닐 상상을 하니 자꾸만 웃음이 샜다.
아니, 그보다는 윈터가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 때 침대 위에서 목줄을 채우는 쪽이 더…….
“…….”
걸음을 멈춘 섀넌이 한 손으로 제 입을 덮었다.
…씨발.
섀넌이 갑자기 멈춰 서자 덩달아 멈춘 윈터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털이 풍성한 꼬리가 살랑, 살랑, 유연하게 움직였다.
“…….”
입술을 말아 문 채 잠시 윈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섀넌이 어느 순간 휙 사라졌다. 그를 쫓아 쏘아져 나가는 늑대의 은빛 잔상이 아무도 없는 흰 눈밭 위를 가로질렀다.
* * *
파스스, 가지가 크게 흔들리며 그 위에 쌓인 눈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오가던 섀넌의 앞으로 거대한 은백색 늑대가 섬광처럼 달려들었다.
“아…!”
폭신한 눈 위를 구른 섀넌이 순식간에 제 위로 덮쳐든 윈터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입을 벌려 제 머리를 삼킬 듯 조여든 시선이 첨예하게 섀넌을 응시했다.
“…….”
섀넌은 순간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코앞까지 고개를 내민 윈터는 그저 혀를 조금 내밀어 그의 뺨과 입술을 핥을 뿐이었다.
헥헥 숨을 몰아쉬는 짐승의 몸을 쓸어내리던 섀넌이 천천히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고 웃었다.
[사람을 절벽에서 그렇게 밀어 버리시면 어떡해요.]
“꽤 빠르네. 전속력으로 달려도 못 벗어나겠어.”
묘하게 어긋난 듯한 대화에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윈터가 얼른 몸을 변형시켰다. 순식간에 부피가 줄어든 몸이 섀넌의 위를 덮었다.
섀넌이 급히 몸을 틀어 그의 위에 올라탔다. 제 아이는 숲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나신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가 제 코트를 벌려 윈터의 몸을 감쌌다.
윈터에게서 풀썩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데서나 홀랑 벗고 다니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웃겨.”
“짐승의 몸으로는 당신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으니까.”
“굳이 대화 안 나눠도 불편한 거 모르겠는데.”
그가 지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제 말을 부정하는지 긍정하는지 정도는 무리 없이 알아챌 수 있는 섀넌은 한 번도 늑대인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답답하다 여긴 적 없었다.
그러나 윈터는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따지고 싶은 게 많을 때는 더욱더.
“사람을 절벽에서 그렇게 밀어 버리는 게 어딨어요?”
“그래도 죽을 일 없잖아.”
“진짜 놀랐어요.”
“그 정도면 올라오는 데 꽤 오래 걸리겠다 싶어서 그런 건데.”
윈터가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섀넌의 허리를 안았다.
“나 따돌려서 뭐 하려고요. 어차피 그들이 날 못 찾아낼 것도 아닌데.”
“널 보여서 괜히 놈들을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어.”
제 권능을 이어받은 늑대족을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건 가장 최악의 결과를 끌어낼 법한 짓이라고 섀넌은 생각했었다.
물론, 생각 외로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근데, 섀넌.”
윈터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내린 섀넌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왜.”
“로렌스와는…, 무슨 관계였어요?”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섀넌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대체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난입하기 전에 상황은 조금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헛웃음을 흘린 섀넌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로렌스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해요?”
“음, 구둣발로 그놈 좆을 뭉개 버린 적은 있었지. 그뿐이야.”
윈터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섀넌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섀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됐어. 그 얘긴 그만해. 그딴 쓰레기는 신경 쓸 가치도 없으니까.”
그가 윈터의 입술에 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 입맞춤을 잠시 받고 있던 윈터가 나직이 말했다.
“……나중에 만나면 그 좆을 아예 재생도 못 하게 잘라서 개 먹이로 던져 줘야겠어요.”
“…….”
섀넌은 놀라울 정도로 가끔 자신과 비슷한 말을 하는 제 아이를 새삼 바라봤다. 저런 발상을 일부러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사랑스러운 구석이 아닐 수 없다.
섀넌이 상체를 세우자 윈터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코트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 준 섀넌이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고 핥았다.
“코트 입어요, 섀넌. 난 하나도 안 추운데.”
“나도 안 추워.”
섀넌이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아, 하는 짧은 신음이 들렸으나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습한 숨이 입술 사이로 부딪혔다. 그저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락하고 따뜻한 몸을 어루만지며, 섀넌이 정신없이 그의 입술을 탐했다.
“섀넌, 읏, 잠…….”
그에게 밀려 다시 뒤로 눕혀진 윈터가 고개를 뒤챘다.
“쉬…, 조용히 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이며, 섀넌이 상기된 한숨과 함께 나직이 말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어르고 달래며 윈터의 양손을 바닥에 내리누른 그가 아예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입술을 덮어 버렸다.
입술을 모조리 빼앗긴 윈터가 섀넌의 허리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그만하라는 신호인 걸 알았지만 섀넌은 멈추고 싶지 않아 그저 더 깊게 입술을 겹치며 그의 몸을 아무렇게나 만져 댔다.
“섀넌, 잠깐, 러셀이,”
“섀넌 님…?”
윈터의 말을 가로지른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키스를 멈춘 섀넌이 고개를 돌려 저 앞에 서 있는 상대를 바라봤다.
손에 커다란 짐가방을 든 러셀이 그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던 섀넌이 차분하게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이럴 땐 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줄도 알아야지.”
코트를 들어 윈터의 나신을 가린 섀넌이 러셀을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분위기 다 깨졌네.”
* * *
“숲이 조용해서 멀리서부터 소리 다 들렸다고요.”
러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조금 전 윈터가 늑대로 변화하는 것을 보고 벌벌 떨며 주저앉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윈터가 옷을 입으러 간 사이, 섀넌은 모처럼 재회한 러셀과 나란히 서 있었다.
“그랬으면 좀 알아서 조용히 지나가지 그랬어. 애가 놀랐잖아.”
섀넌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고개를 돌린 러셀이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
뺨에 닿은 그 시선을 의식한 섀넌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키우던 짐승 새끼랑 흘레붙을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일로 이상하다는 듯 굴지 마.”
“누가 뭐랬습니까?”
참나…, 러셀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언젠간 두 분 이렇게 되실 줄 알았습니다, 뭐.”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저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고요.”
코를 훌쩍인 러셀이 추위에 언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한 저택에 살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아아악―!”
러셀이 별안간 와락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앞으로 휙 나타난 윈터에게 놀란 탓이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헛것을 본 표정으로 멍하게 물었다.
“…윈터 님?”
“미안해요, 놀랐어요?”
윈터가 난처하게 쓴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됐어, 알아서 일어나게 놔둬.”
섀넌이 러셀에게 내밀어져 있는 윈터의 손을 잡아 제 뒤쪽으로 끌어왔다.
러셀은 그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제 엉덩이가 차가운 눈에 젖어 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별것도 아닌 걸로 시끄럽게 굴어.”
쯧, 하고 혀를 찬 섀넌이 얼른 일어나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놀란 숨을 삼킨 러셀이 억지로 떨리는 다리를 추슬렀다. 나신인 윈터가 갑자기 늑대로 변화하는 것을 봤을 땐 그저 무서워서 주저앉았지만, 지금 느끼는 두려움은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러셀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자꾸 주저앉자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휙 일으켜주었다.
그의 손에 거의 딸려 올라가다시피 일어난 러셀이 이상한 얼굴로 윈터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윈터 님, 원래, 그 눈 색깔이, 그렇게…….”
청회색 홍채 정중앙에 떨어진 붉은 동공을 보던 러셀의 표정이 기이하게 굳었다. 그가 천천히 섀넌에게 시선을 옮겼다.
조금 낭패한 얼굴로 한숨을 짧게 내쉰 섀넌이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이곳까지 오는데 러셀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길이 고되었는지, 그의 얼굴은 까칠했고 코는 추위로 새빨갰다.
이제 막 테라스로 나오다가 그를 발견한 엘리자베스가 눈을 반짝였다. 난간에 팔을 걸친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러셀에게 손을 살살 흔들었다.
“어머, 러셀! 오랜만이야. 굼벵이처럼 기어서 이제야 왔네? 잘됐다, 2층 청소 좀 해 줘. 먼지가 너무 많,”
입이 댓 발 튀어나온 러셀이 그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간을 좁힌 엘리자베스가 그 뒤로 이어서 오고 있는 섀넌과 윈터를 바라봤다.
“쟤 왜 저래?”
“놔둬. 심란하겠지.”
섀넌은 윈터를 보는 러셀의 눈이 어땠는지 굳이 엘리자베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오면서 윈터의 변화에 관한 말을 간단히 전해 들은 직후, 러셀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일종의 배신감과 서운함, 놀라움, 그 복잡한 감정들을 숨길 생각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낸 채.
엘리자베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당겼다.
“지가 심란할 일이 뭐가 있어…?”
그녀의 말에 윈터는 그저 난처하다는 듯 웃기만 했다. 섀넌이 그런 윈터를 놔두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러셀.”
주방에서 뭔가를 정리하던 러셀이 힐끗 고개를 돌려 섀넌을 보고는 말없이 제 할 일을 했다.
“언제까지 그런 표정으로 있을 거야. 딱 말해. 그때까진 참아 줄 테니까.”
섀넌이 마실 차와 술을 선반에 올려 두던 러셀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잎 케이스를 툭 내려놨다.
한참을 침묵하던 등이 숨을 삼키며 살짝 굳었다.
“…윈터 님은, 저랑은 다른 거죠? 저처럼 병들지 않고, 어디 하나 망가질 일도 없고…….”
“그래.”
“…그런, ……그런 방법이 있는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하지만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야. 너한테 내 피를 나눠 주는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몸을 돌려 섀넌을 마주한 러셀의 표정이 볼 만했다. 섀넌은 저를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실패할 확률도 높을뿐더러, 내가 널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해야 할 필요는 없지. 너도 굳이 서운해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인간의 몸으로 긴 세월 고통을 감내한 러셀의 얼굴에는 회한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 오른쪽 귀와 백내장이 옅게 진행되다 멈춰 색이 바랜 왼쪽 눈, 그간 살며 생긴 흉터들이 덕지덕지 그어진 손을 보던 섀넌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온갖 병마와 싸우느라 고통의 세월을 보내온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불멸자가 된 윈터를 보고 당장 심란해지는 마음이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걸 이런 식으로 제게 대놓고 표현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적당히 기어올라. 어차피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섀넌의 말을 들은 러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택요…? 그럼 그 상황에서 누가 의연하게 죽음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야.”
섀넌이 싸늘해진 눈으로 러셀을 노려봤다.
“난 분명 네게 다 설명했어. 맹약은 절대 끊어질 수 없는 규율이라고.”
“…….”
“당사자가 지키지 못하면 그 ‘후손’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라고.”
자신은 분명 그에게 제안했다.
그리말디가의 마구간 지기였던 러셀은 사창가에서 태어난 노예 신분으로, 부모가 누구인지 몰라 성조차 가지지 못한 이였다.
그런 그에게 따로 가문의 이름을 하사하고, 대대손손 훈작사 작위를 내려줄 테니 그 후손 중 한 명씩만 제 아래로 보내 주면 된다고.
그렇게 본인이 지키지 못한 맹약을 후손에게 잇게 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은 분명 러셀에게 그런 선택지를 다시 내민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네가 스스로 영생을 자처하고 여태껏 살아있던 거잖아.”
‘저택 관리인’은 엄연히 따지면 노동자 계급이지만, 그중엔 허울 좋은 작위를 가진 이들도 많았고 그 생활이나 대우를 보면 가난한 귀족들보다 더 나았다.
대대로 한 가문의 대소사 관리를 일임하는 이들은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최상위였고, 작위 없는 부호들은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한다.
이름도 성도 없는 마구간 지기에서 그 정도의 신분 상승이라면 러셀에게도 손해는 아니지 않은가.
러셀이 스스로 제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섀넌은 자신이 매우 관대한 주인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마저 내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대대손손 뱀파이어 노예 노릇이나 하는 게 뭐가 좋습니까?! 그 후손들은 무슨 죄고요!”
러셀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섀넌의 눈이 가늘게 이지러졌다.
“…같잖게 있지도 않은 후손들 생각하는 척하지 마.”
“…….”
“세상에 너처럼 욕심 많은 인간도 드무니까.”
그의 말에 반박하려 입을 달싹이던 러셀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화는 나는데 화를 낼 자격은 없다. 섀넌은 제 속내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대대로 이어질 제 후손에게 그저 뱀파이어의 노예 노릇을 계속하게 두느냐, 아니면 자신이 그 고리를 계속 짊어지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시험하느냐 하는 것은, 러셀에겐 별달리 고민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은 필멸자 중 가장 오래 산 존재다. 제가 그렇게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온갖 의학 연구에 몰두하며, 불멸의 권능이 주어지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도 그들과 같은 영생을 살고 병마 또한 이겨 내고 싶었다.
한때는 섀넌의 지원으로 약학 대학을 다니며 교육의 혜택도 누려 보았고, 그의 종노릇을 하며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의 휴가를 받은 적도 왕왕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가끔 섀넌을 원망하고, 아예 그런 맹약이 맺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를 탓하기도 했다.
“…다 압니다. 저도 알아요. 섀넌 님 탓하면 안 된다는 거, …압니다.”
러셀이 고개를 떨궜다. 모든 게 제가 자처한 일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인간 중 누구에게라도, 영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 자신과 같은 시도를 해 보지 않을까.
필멸자들에게 영생만큼 매혹적이고 간절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누군가는 순리대로 늙어 죽는 게 가장 좋은 거라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제게 주어진 짧은 수명을 비탄하지 않기 위해 만든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러셀은 생각했다.
“합리화하지 마. 모든 인간들이 너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아, 러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러셀이 어떤 사고의 흐름으로 제 선택을 정당화하고 있을지 이미 아는 섀넌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보통 인간들은 아무리 뱀파이어와 그런 맹약을 맺게 된다 하더라도 그 의무를 제 후손에게 넘기지, 러셀처럼 저렇게까지 긴 세월을 영생에 집착하는 이는 없다.
저놈도 여간 미친놈이 아니다. 섀넌은 제 노예 새끼가 살짝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놈이라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선택으로 그대를 몰아넣은 건 나니까, 이렇게 주제넘은 짓을 해도 다 봐주는 거야.”
섀넌이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더는 선 넘지 마, 러셀.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놈도 어지간히 질기다.
차라리 어디서 누군가와 눈 맞아 가정이라도 꾸렸으면 좋겠건만, 이제는 저 몸이 번식 기능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난 내 아이와 좀 더 오래 살아볼 계획이라 당장 널 죽일 수 없거든. 그러니까 그대가 내 눈앞에서 좀 사라져 줘야겠어.”
“…….”
“5년만 내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머리 식히고 와.”
…본래는 이런 식으로 주려던 휴가가 아니었는데.
섀넌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에서 러셀의 공은 실로 매우 컸다.
불멸자의 회복력을 멎게 하는 독을 러셀이 과거에 만들어두지 않았더라면, 또 그가 그 해독제까지 미리 연구해 두지 않았더라면, 과연 시라트에서 자신과 윈터가 함께 무사히 살아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그 독을 처음 만들 당시 러셀의 의도는 당연히 선의가 아니었다.
섀넌은 러셀이 얼마나 이를 갈며 오랜 시간 공들여 그 독을 만들었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차마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혼자 지레 겁을 먹어 그 해독제를 만든 과정 또한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 까마득한 과거에 했던 일이 지금에 와서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좋게 좋게 포상을 주려던 거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5년 너무 깁니다.”
여전히 입이 튀어나와 있는 러셀이 작게 말했다. 어이없어진 섀넌이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아주 멋대로 기어오르는군. 윈터 살살 구슬려서 그 혈청 받아다 연구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물론, 구슬린다고 넘어갈 아이가 아니긴 하지만.
저놈이 호시탐탐 윈터의 피를 뽑겠다고 기회를 노리는 꼴을 어떻게 두 눈 뜨고 지켜 보겠는가.
“목적지 정해지는 대로 준비해서 꺼져. 5년 이내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섀넌이 그대로 몸을 돌리려 하자, 러셀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번엔 또 뭐야,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섀넌이 그를 쳐다봤다. 러셀이 비장한 얼굴로 심호흡했다.
* * *
두 달 넘게 지냈던 북부의 별장은 이제 버렸다.
그곳에 카일과 엘리자베스만 남겨 둔 채, 섀넌과 윈터는 주거지를 옮겼다. 잠시 머물 곳이 아니라, 그들은 이곳에서 꽤 오래 지낼 생각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섀넌이 눈앞의 풍경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백 년 가까이 칩거했던, 그리고 20년 전 윈터를 처음 만났던 서북부의 구식 저택이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마부석에서 내려선 러셀이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섀넌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섀넌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 저택을 유독 아까워하는 것 같더라니.”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관이 대충 비슷하죠? 내부는 더 감쪽같습니다.”
케인타운에서 윈터가 자라는 동안, 러셀이 섀넌 몰래 조금씩 공을 들여 이곳 저택을 복원해 둔 것이다.
물론 지금 시대에 그 저택을 복원할 만한 실력을 가진 장인들은 없었지만, 최대한 도면을 상세하게 그리고 공사 과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뭐, 제법 능력이 좋네.”
섀넌이 짧게 치하했다. 평소 칭찬에 아주 인색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이라, 러셀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듯 실실 웃었다.
굳이 직접 모셔다드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걸 생색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러셀이 몹시 뿌듯한 얼굴로 괜히 으스대며 마부석에 다시 올랐다.
그런 러셀에게 섀넌이 뭔가를 내밀었다.
“가자마자 이걸 보여 줘.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로 한심하게 벌벌 떨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그에게서 편지 하나를 건네받은 러셀이 고삐를 잡은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 막 간단한 짐을 내리고 섀넌의 옆에 선 윈터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러셀.”
러셀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두 분 잘 지내세요. 가끔 편지하겠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섀넌의 차가운 인사에도 러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내 고삐를 내려친 그의 마차가 서북부 저택의 높다란 담장으로부터 멀어졌다.
윈터가 섀넌을 뒤에서 안으며 저택 쪽을 돌아봤다.
“…여기가 당신이 살았던 곳이에요?”
“완전히 그 집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터는 맞아.”
낯선 눈으로 천천히 저택을 둘러보는 윈터에게 고개를 돌린 섀넌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아주 잠깐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그래요?”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섀넌이 저를 안은 윈터의 팔을 풀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몇백 년 전 양식으로 지어진 거라 케인타운의 저택과는 많이 다를 거야. 조명이 없어 층마다 촛불 켜는 것도 일이지.”
“그런 건 시라트에서 이미 익숙해졌어요.”
“…아무리 그래도 거기처럼 원시적이진 않아.”
수심이 얕고 폭이 좁은 해자를 가로지른 도개교를 건넌 그들이 저택의 고풍스러운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곧 천천히 올라간 도개교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혔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소리였다.
* * *
친애하는 갈리나.
미안하지만 한 5년만 내 집사를 거기서 좀 맡아 줘야겠어.
시라트의 약학을 배우고 싶다는군. 그에게 연구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내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길 바라.
되도록 그곳의 수석 의관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어. 내 집사는 그대들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약학 연구에 몰두한 자라 그 분야에선 최고라고 할 수 있거든.
뭐, 그대들이 내게 끼친 민폐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
윈터는 잘 지내고 있
그럼 이만 줄이도록 하지.
추신: 답장은 필요 없어. 편지든 증표든 그 어떤 것도 보내지 마. 그대의 대답은 딱히 궁금하지 않으니까.」
희끗한 머리칼이 흘러 내려온 이마를 긁으며, 갈리나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선 사내와 편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군데군데 지워진 자국이 지저분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이 편지는 사실상 통보였다. 제 의사 따위 상관없는, 부탁의 가면을 쓴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저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러셀을 힐끗 본 갈리나가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 표정은 점점 헛웃음으로 바뀌었다.
…정말이지, 그리말디가 제게 생각지도 못한 걸 보냈다.
“이곳에 온 용건은 잘 알았어요.”
얼굴에 남은 웃음기를 갈무리한 그녀가 편지를 내려놓으며 러셀을 바라봤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하하.”
러셀이 애써 긴장을 풀며 대꾸했다. 갈리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내 아랫사람에게만 하대합니다. 당신은 인간 사회에선 그래도 꽤 대우받는 노동자 계급이 아닌가요? 내가 이곳의 왕이라고 해서 내 백성도 아닌 당신에게 함부로 할 이유는 없죠.”
분위기를 느슨하게 풀어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다가가려던 러셀의 시도는 실패했다. 자연스럽게 선을 긋는 갈리나의 태도에 러셀은 괜히 머쓱해지고 말았다.
갈리나가 그런 그를 조용히 관찰했다. 그리말디가 저자를 보낸 것이 단순히 저자의 청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모를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시라트에서 한 번 그런 독이 만들어졌으니, 그리말디는 앞으로 발견될 새로운 독의 가능성마저 제 손바닥 아래 두고 싶은 것이다.
…근데 저렇게 어수룩하게 생긴 자가 그렇게나 약학 분야에 뛰어나다는 걸 믿을 수가 없겠는데.
저보다는 젊어 보이는 외형에, 살아온 세월은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이상한 남자. 불멸자는 확실히 아니되 필멸자의 약한 몸으로 시간의 순리를 거스르고 있는 남자.
갈리나는 턱을 괸 채 그런 러셀의 면면을 조용히 살폈다.
“…….”
러셀이 말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을 응시하는 늑대족 특유의 서슬 퍼런 눈빛에, 그는 돌연 조금 무서워졌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이를 드러낼 것 같은 눈이었다.
하긴, 늑대들은 인간을 먹지는 않아도 찢어 놓을 수는 있는데…….
자신이 약학 연구에 눈이 멀어 너무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인 건 아닐까.
그러나 자신은 20년이 넘게 걸려 만들었던 독을 시라트에선 11년도 채 걸리지 않아 만들어냈다.
분명 이 설원에서만 자라는 불가사의한 식물에서 비롯된 시라트의 약학은 인간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러셀은 그게 너무 탐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시라트의 약학에 대해 모두 공개할 수는 없어요, 러셀.”
그러나 갈리나의 말이 그의 기대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그리말디의 부탁이니 당신을 이곳에 머무는 건 허락하겠지만, 도움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아, 물론 필요한 모든 건 원하는 대로 다 지원해 줄게요. 그 이외에 시라트에서 쌓아 온 약학 지식이나 서적을 요구하는 것만 불가하다는 뜻이에요.”
“아, 예….”
그렇게 알고 싶으면 네 힘으로 알아내라는 뜻이었다. 러셀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뭐…….
그나저나, 그럼 5년은 너무 짧겠는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갈리나를 올려다본 러셀이 문득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움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불멸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텼죠? 맹약 때문이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보아하니 몸도 성치 않은 것 같은데, 윈터 님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니까…….”
러셀이 자꾸만 수그러드는 고개를 들며 이마를 벅벅 긁적였다. 갈리나와 힐끗 시선을 마주쳤다 다시 눈을 돌린 그가 더듬더듬 운을 뗐다.
“어, 그냥…….”
“…그냥?”
“그냥, 정신을 놓고 살면 됩니다.”
하하하하…, 러셀이 어색하게 계속 웃었다. 그러나 갈리나는 농담을 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턱을 괸 채 그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갈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이 너무 많으면 힘들죠. 전 아마 오래 못 살겠어요.”
“…….”
이곳 늑대들은 농담이란 걸 모르나.
러셀은 당최 저와 잘 맞지 않는 시라트의 왕을 보며 앞으로의 생활이 꽤 순탄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갈리나가 손끝으로 제 이마를 살짝 긁었다. 러셀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제 이마를 벅벅 긁적였다.
* * *
긴 손가락 사이로 흰 연기가 가늘게 올라갔다. 햇살이 부유하는 창가에 선 채, 섀넌은 을씨년스러운 정원을 바라봤다.
저택의 외형은 예전과 같지 않을지언정 정원과 담장, 육중한 철문은 예전의 그것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섀넌은 21년 전 다리야가 머뭇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던 그 시간 속에 다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내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팔을 타고 내려온 체온은 담배가 끼워진 손등을 감쌌다.
“담배 다시 피우시네요.”
섀넌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간 윈터가 그것을 생소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제 섀넌은 더 이상 제 앞에서 급하게 담배를 끄지도 않았고, 손에서 빼앗아 가는 걸 못 하게 막지도 않았다.
“가만 보면 섀넌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담배를 피우는 것 같던데.”
“그거야 널 키울 때나 그랬고, 예전엔 그저 숨 쉬듯 달고 살던 거야.”
윈터가 제 손에 끼워진 담배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빨간 불씨 끝에서 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무슨 느낌이에요?”
“글쎄, 직접 피워 보든가.”
더는 그의 폐병을 걱정할 일 없는 섀넌은 매우 관대해졌다. 윈터가 머뭇거리다 담배를 제 입에 갖다 댔다. 한 모금도 채 빨아들이지 못한 그가 콜록 기침을 토해 냈다.
섀넌이 귀엽다는 듯 그의 뺨을 만지며 웃었다. 그가 윈터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갔다. 윈터가 그의 허리를 끌어와 안았다.
“다시 해 볼래요.”
제 아이는 자신이 즐기는 건 뭐든 같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섀넌이 그런 그의 입술을 쓸었다.
“바로 삼키지 말고, 입 안에서 굴리다 조금씩 삼켜.”
“…….”
“키스할 때처럼.”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엄지 끝을 살짝 넣어 윈터의 입을 벌리게 한 섀넌이 손끝으로 그 혀를 만지며 말했다.
윈터의 눈이 초승달처럼 사르르 접혔다.
“……그건 잘할 수 있는데.”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겹치려 하자, 섀넌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틀어 담배를 한 모금 짧게 빨아들인 그가 이내 윈터에게 입술을 겹쳤다.
조금씩 혀를 옭아매며 옮겨간 연기가 두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마른 잎을 태운 알싸한 연기가 입 안을 맴돌다 이내 옅어졌다.
창턱을 짚은 섀넌의 손에 끼워진 담배 끝에서 올라온 연기가 햇살에 닿아 희게 부서졌다.
맞닿은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혀끝과 혀끝에서 이어진 타액이 길게 늘어지고, 윈터는 기침을 하지 않았다.
몸에 해로운 짓을 거리낌 없이 제 아이와 나누고 있는 이 순간이 새삼 좋아서, 섀넌은 소리 없이 웃었다.
제가 빚어 놓은 이 아름다운 육체는 영원히 쇠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박제처럼.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 위에 툭 떨어뜨린 섀넌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부딪혀오는 그의 단단한 몸과 그 뜨거운 체온이 기꺼웠다.
둘 사이를 맴돌던 연기는 스멀스멀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젖은 입술이 비벼지는 질척한 소리만이 방 안을 적셨다. 한 번 시작된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섀넌은 윈터의 입술이 제 입술을 집어삼킬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혀와 간헐적으로 그의 목 안에서 낮게 울리는 신음을 손에 잡아채고 싶었다.
“읏….”
몸이 뒤로 밀린 섀넌이 제 허벅지 뒤쪽에 부딪힌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곧바로 그 위로 올라와 섀넌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디딘 윈터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그가 뭔가를 가늠하듯 섀넌의 가슴팍과 아랫배를 느리게 쓸었다.
얇은 셔츠 사이로 느껴지는 몸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사냥을 귀찮아하는 섀넌을 위해 열심히 피를 공수해 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헐떡이느라 가쁘게 오르내리는 빗장뼈 사이의 굴곡이 그의 마음을 미친 듯이 동하게 만들었다. 윈터의 손끝이 섀넌의 허리를 스치며 바지 버클 위를 닿을 듯 말 듯 배회했다.
“…섹스, 할까요?”
“음, 글쎄.”
섀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내 몸이 동하지 않아서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섀넌은 윈터의 손이 제 바지 위에 닿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고간을 본다면, 손으로 그 윤곽을 만지기라도 한다면 곧장 알아챌 것이다.
지금 자신도 터질 듯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그러나 섀넌의 목 언저리와 얼굴에만 몰두한 윈터는 그의 것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섀넌의 손을 잡아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가기만 했다. 뜨겁고 단단한 부피감이 바지 위로도 여실히 느껴졌다.
“아프지 않게 할게요. 진짜 오늘은 잘할 수 있어요. 응…?”
윈터가 그의 입술을 핥으며 졸랐다. 하아…, 한숨과 함께 앞섶 사이로 살짝 들어온 손끝이 떨렸다.
“넣고 싶어요…, 섀넌.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귀여워. 섀넌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제 아이가 조금 더 안달 낼 때까지 기다렸다.
새벽하늘처럼 맑았던 청회색 눈이 탁한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새빨간 빛이 어린 동공에서 색정적인 욕망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눈을 보던 섀넌이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윈터.”
“네, 섀넌.”
“…설마 너 지금 나한테 미혹 쓰는 거야?”
섀넌이 그의 양 뺨을 감싸며 물었다. 윈터가 사르르 웃으며 섀넌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그럼 내가 섀넌 말고 누구를 미혹하겠어요?”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같은 뱀파이어끼린 미혹 안 먹혀. 사냥감이나 홀리라고 있는 거지.”
윈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사냥감을 왜 홀려야 하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뱀파이어들처럼 대상을 미혹해서 사냥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늑대인 윈터에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윈터가 미혹을 쓸 대상은 섀넌밖엔 딱히 없었다.
“…섀넌한테 안 먹히는 거면 이거 정말 쓸데없는 능력이네요.”
약간 시무룩해진 윈터가 침대를 디디고 있던 무릎으로 섀넌의 허벅지 안쪽을 은근히 꾹 눌렀다.
“당신한테 써 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섀넌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한테 이걸 써 보고 싶어서 그동안 내내 참았을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귀여웠다.
“……그런 거 안 써도 충분해.”
섀넌이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제 다리 사이로 내렸다. 손에 잡히는 단단한 감촉을 느낀 윈터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섀넌의 바지 위로 솟은 단단한 윤곽을 덧그리듯 느리게 매만지던 윈터가 이내 말없이 상체를 세워 제 겉옷을 벗었다.
그가 바지 밖으로 뺀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모습을 섀넌은 숨도 쉬지 않고 지켜봤다. 하나둘 벌어지는 셔츠 깃 사이로 언뜻 보이는 굴곡에 어쩐지 갈증이 나 침을 삼켰다.
마침내 가장 아래 단추까지 풀어지는 걸 보며, 섀넌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당장 저 셔츠를 잡아 찢고, 그의 몸을 입술로 어루만지고 싶어 자꾸만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느릿느릿 단추를 풀어 내린 윈터가 셔츠를 바로 벗지 않고 바지춤을 풀었다. 어쩐지 초조해진 섀넌의 손이 이끌리듯 셔츠 사이로 들러붙자, 윈터가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그 손을 피했다.
“…….”
“나도 애태우고 싶어요.”
커다란 손이 바지의 단추를 풀고 그 위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섀넌은 그 손에 시선이 못 박혔다. 스스로 제 바지 안으로 손을 넣은 윈터가 제 성기를 꺼냈다.
색이 붉게 상기된 귀두 끝과 울근불근 핏발이 선 살 기둥이 그의 손 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선단에 맺힌 체액이 길게 늘어지며 추욱 떨어졌다. 그걸 내려다보던 섀넌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윈터의 귓바퀴와 목덜미가 금세 새빨갛게 익었다. 입술 경계로 살짝 비어져 나온 혀가 아랫입술을 핥고 들어갔다.
“당신이 그런 얼굴로 날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모르죠.”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제 성기를 위아래로 느리게 훑었다. 뿌리 끝부터 귀두까지 주욱 훑자, 맑은 체액이 몽글몽글 맺혔다.
섀넌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디디고 있던 윈터의 허벅지가 그의 고간을 지그시 눌렀다.
“하아…….”
입술을 얕게 깨문 섀넌이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만져 줄까요?”
섀넌의 바지 단추를 풀고 속옷에 손가락을 걸어 살짝 당긴 윈터가 눈을 휘어 웃으며 물었다. 섀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젠 제법 여유로운 척도 할 줄 아네.”
“당신이 먼저 나 애태웠잖아요.”
섀넌의 손을 가져가 그 손가락과 손바닥에 쪽쪽 입을 맞춘 윈터가 그대로 입술을 묻은 채 섀넌을 바라봤다. 손바닥을 적시는 호흡이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몸을 내린 윈터가 섀넌의 아래에 제 성기를 겹치며 천천히 비볐다. 체액이 몽글몽글 맺힌 귀두 끝이 섀넌의 기둥을 핥듯이 어루만졌다. 곤두선 근육의 굴곡이 벌어진 셔츠 사이로 언뜻 보였다.
“…아.”
낮은 한숨을 흘린 섀넌이 그의 셔츠 앞섶을 쥐고 확 당겼다. 한 손으로 섀넌의 옆을 지탱한 윈터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섀넌은 어쩐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성마른 숨이 얽히고 뒤섞이며 섀넌의 입술이 따뜻한 점막으로 뒤덮였다. 삼켜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말캉한 살덩이가 밀려 들어왔다. 온몸이 오싹오싹하게 달아올랐다.
한 손으로 두꺼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눈을 뜬 섀넌이 아까부터 내도록 저를 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피처럼 붉은 석양이 내린 잿빛 하늘 같은, 그 아름다운 눈이 자신에게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꼭 사냥감을 보는 맹수의 눈 같아서, 섀넌은 설핏 웃었다.
……잡아먹힐 것 같아.
그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윈터의 입술을 빨았다. 윈터는 키스하는 내내 눈을 감지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헐떡이지도 않았다. 그저 집요할 정도로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착하네, 오늘은. 아기처럼 칭얼거리지도 않고.”
“평소에 내가 그래요? …아기처럼?”
여전히 섀넌을 응시하며 그의 입술을 빨던 윈터가 낮게 물었다.
섀넌이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성기를 쥐고 훑었다. 델 듯 뜨거운 온기가 손바닥에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윈터가 눈을 얕게 찡그리며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큰 아기가 어딨어요.”
크다는 건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어쩐지 제가 성기를 쥔 타이밍에 그런 얘길 들으니 한 가지 의미로만 들렸다. 물론 제 아이는 여러모로 모든 게 다 크긴 했다.
섀넌이 그의 셔츠를 벗겨 내리자 굴곡진 어깨와 팔이 드러났다. 침대를 딛고 있는 한쪽 팔 근육이 꽉 당겨져 있었다.
그 결을 따라 손끝을 흘리던 섀넌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허리를 낮춘 윈터가 제 성기로 그의 성기를 꽉 누른 탓이었다.
숨을 들이켜느라 부푼 가슴 위로 윈터의 손이 닿았다. 섀넌의 셔츠 단추를 몇 개 풀던 그가 이내 그 옷을 잡아 벌렸다. 튕겨 나간 단추가 바닥으로 톡톡 떨어졌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입술을 내린 윈터가 말랑한 유륜을 입술로 덧그리듯 살짝 머금었다.
“…너무 예뻐요, 섀넌.”
“읏….”
작은 유두를 이 끝으로 살살 짓이기다 축축한 혀로 둥글리길 반복할 때마다 섀넌의 입에서 한숨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부러 더 젖은 소리를 내며 쪽쪽 빨아 주자 윈터의 머리칼 사이로 섀넌의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아….”
얼얼해질 만큼 한참이나 물고 빨리던 가슴이 이내 허전해졌다. 대신 더 아래로 입술을 내리는 윈터의 머리칼이 유륜 위를 간지럽혔다.
“오늘도, 조금만 넣어야 해요?”
“하아…, 무슨…….”
무슨 소리지 그게.
“끝까지 넣어도…, 되는 건지, 묻는 거예요.”
쪽, 쪽, 말 중간마다 살갗에 입술을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해진 유두를 손끝으로 굴리며, 윈터의 입술이 아랫배와 옆구리를 진득이 스쳤다. 침대를 딛고 있던 그의 무릎은 어느새 바닥을 딛고 있었다.
섀넌의 성기 끝에 입을 맞추며, 그가 양손으로 바지를 벗겼다. 발 아래로 빠져 나간 바지를 툭 떨어뜨린 그가 섀넌의 다리를 벌려 허벅지 안쪽을 세게 빨아들였다.
섀넌이 허리를 비틀며 신음했다.
“읏…, 하아……, 끝까지…, 다 넣어도 돼.”
“노팅, …해도 괜찮아요?”
춥, 추웁, 귀두 끝을 사탕처럼 혀로 굴리며 윈터가 혼잣말처럼 작게 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송곳니가 비어져 나왔다. 내리깐 눈꺼풀에 매달린 은백색 속눈썹 사이로 새빨간 안광이 스쳤다.
“나 오늘은, 좀…, 못 참을 것 같은데.”
부드러운 은백색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숨을 몰아쉬는 섀넌에겐 닿지 않을 말이었다.
하아, 하아…, 섀넌은 그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프지 않게, 오늘은 잘할 수 있다고, ……그랬으니까.
* * *
시트를 쥔 손이 희게 샜다. 어느새 파란 새벽빛이 내려앉은 침실은 온통 젖은 소리와 신음만이 나뒹굴었다.
“아, 아흣….”
엉덩이만 높게 쳐든 채 시트에 뺨을 묻은 섀넌이 배 속을 치받는 압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뜨거운 물에 푹 담겨진 것처럼, 섀넌은 노곤해진 몸으로 배 속을 짓이기는 달콤한 쾌락을 이기지 못해 달달 떨었다.
온몸이 축축했다. 몸 구석구석 어디 하나 윈터의 혀와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윈터는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아주 오랫동안 제 몸을 공들여 핥고 적시며 제가 넣어 달라고 닦달할 때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였다.
그리고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힘들어요? 아래에 베개 받쳐 줄까요?”
윈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베개를 한 손으로 끌어와 섀넌의 아랫배에 받쳤다.
“흐읏…, 윈터, 그만, 아윽…….”
섀넌은 제 쾌락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윈터의 손에 완전히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
이제 제 아이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
도리어 저보다 힘이 강해진 그를 이제 자신은 통제하지 못한다는 걸, 섀넌은 새벽까지 연달아 열한 번쯤 사정했을 때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조금만 더요…, 오늘따라 섀넌 안이, 흣, 너무…, 너무 뜨거워서,”
“하윽…….”
“계속 있고 싶어요….”
옴폭 들어간 척추를 따라 손끝을 느리게 훑은 윈터가 상체를 숙여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가슴 만져 줄까요?”
시트 위에 맞닿은 섀넌의 가슴팍으로 커다란 손이 쑥 들어왔다. 이미 잔뜩 빨리고 깨물려 퉁퉁 부어오른 유두가 그의 손끝에 다시 쓸리자, 섀넌이 새된 신음을 내뱉었다.
“하으…!”
“아, …방금, 엄청 조인 거 알아요? 좆이 녹을 것 같아.”
“윈터, …윈, 너무 깊…, 이 자세, 는, 으읏…….”
귀두만 살짝 걸쳐질 때까지 뒤로 쑥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젖은 구멍 안으로 길게 파고들었다.
“하아…, 섀넌이, 힘들다고 해서, 이렇게 바꾼 건데……, 얼굴 보면서 하고 싶어요?”
섀넌이 도리질 치며 시트 안에 제 신음을 묻어 버렸다. 얼굴을 보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흐윽…, 그만…….”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섀넌의 허리가 뒤틀렸다. 튀어나온 날갯죽지 가운데 움푹 파인 부분을 손으로 짓누른 채, 상체를 세운 윈터가 끈질기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때마다 폭신한 베개에 섀넌의 성기가 짓눌리고 비벼졌다.
울컥, 또 한 차례 정액을 내뱉은 섀넌의 몸이 벌벌 떨렸다.
“하윽…, 흣…….”
“아파요? 더 천천히 할까요?”
섀넌의 볼기 한쪽을 잡아 벌리고 제 것이 드나드는 걸 보던 윈터가 물었다. 그러면서도 느리게 안을 가르고 들어갔다가, 다시 느리게 빠져나오는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저들끼리 딱 들러붙어 있던 내벽을 뭉툭한 머리가 치고 들어가며 길을 냈다. 약한 점막과 성기가 질척하게 비벼지고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섀넌은 제 배 속이 그의 성기와 빈틈없이 딱 맞물려지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뾰족한 쾌감이 바늘처럼 온몸을 조이고 제멋대로 관통했다.
“여기, 읏…, 뺄 때마다, 당신 속살이 살짝 딸려 나오는 거 모르죠.”
“아흐, 하아…….”
“속살도 붉어…, 너무 예뻐…….”
“아…!”
그의 장골이 섀넌의 볼기를 꽉 짓누를 정도로 세게 치달았다. 찌걱, 과즙이 흥건한 무른 과일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흰 체액이 뒤로 주르륵 빠져나오는 윈터의 성기에 엉겨 붙어 번들거렸다.
이미 앞서 사정한 정액으로 축축해진 베개 위로, 다시 하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섀넌이 허리를 바짝 내린 채 몸서리치며 절정에 달했다.
“흐읏, 하으…….”
“이제는, 하아…, 만져 주지 않아도, 잘 가네요, 섀넌.”
시트에 이마를 비비느라 숙여진 흰 목선을 따라 경추 뼈가 도드라졌다. 톡 튀어나온 그 부분을 손끝으로 만지자 섀넌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앙증맞게 튀어나와 있던 경추 뼈가 살 안으로 쏙 사라졌다.
바르작대느라 도드라지는 날갯죽지와 넓은 어깨, 일직선으로 뻗어 있던 척추가 곡선으로 휘며 비틀어지는 걸 보던 윈터가 허리를 숙이며 그와 완전히 몸을 밀착했다.
“아, 아읏……!”
뒤로 쑥 밀려났던 성기가 다시 앞으로 콱 전진했다. 섀넌의 등에 제 상체를 딱 맞붙인 채, 윈터는 그의 안에 잘게 도장을 찍듯 허리만 콱콱 쳐올렸다.
배 속의 예민한 부분이 계속 건드려지는 동시에 베개에 비벼지는 성기의 자극이 너무 세서, 섀넌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무릎으로 침대를 디디려 애썼다.
베개와 아랫배 사이로 살짝 틈이 생기자 시트를 쥔 섀넌의 손을 떼어 낸 윈터가 깍지를 끼며 섀넌의 아랫배에 갖다 댔다.
“여기…, 만져 볼래요?”
“하으, 흐읏….”
“내가 들어 있는 거, 느껴져요?”
아랫배를 감싼 손바닥으로 배 속에서 요동치는 성기의 뭉툭한 윤곽이 느껴졌다.
약간은 경악한 심정으로, 섀넌은 말없이 그 감촉을 지그시 눌렀다.
아…, 귓바퀴를 깨문 입술 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윈터를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경직된 몸이 섀넌을 꽉 짓눌렀다.
“아, 섀넌…, 좋아요…, 하아…, 읏, 뜨겁고, …부드럽고….”
사정을 하면서도 체액을 더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듯 윈터는 끝없이 허리를 밀어붙였다. 성마른 호흡은 더 가빠지고, 여유 없는 몸짓은 인정사정없이 섀넌의 안을 짓찧었다.
“아흐, 아, 으응, 앗…!”
“당신도 좋아요?”
섀넌이 좌우로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 …좋아, 좋아, 좋은, 데……, 너무, 하으, 너무…….”
“너무, 좋다고요?”
윈터가 허리를 길게 쳐올리며 되물었다.
“하아, 으…….”
“저도…, 저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귓바퀴와 목덜미로 습한 숨이 흘러내렸다. 낮은 음성이 신음과 함께 섀넌의 살갗을 오싹하게 건드렸다. 곧 뾰족한 이 끝이 섀넌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아…!”
그에게 물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섀넌은 제 살갗을 파고든 게 짐승의 이빨이 아니라, 저와 같은 뱀파이어의 그것임을 느끼고 경악하며 전율했다.
“윈, 하으, 윈터, 뭐, 뭐 하는, 아윽……!”
빨린다.
무언가가 제 안을 주륵주륵 적시는 동시에 아득하게 빠져나가는 것 같은 오싹함이 관통했다. 더불어 배 속이 터질 듯 팽창했다.
장기가 밀려 올라가는 느낌이 선득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은 지나치게 민감해졌다. 움직이지 못하게 내장을 꽉 붙든 성기가 빈틈없이 내벽을 메웠다.
섀넌은 굳이 아랫배를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성기가 인간의 형태를 한참 벗어났다는 것을.
“윽…, 하아…….”
귓가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피 냄새가 났다. 향기로운 냄새는 아니었다. 그저 비리고, 음습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게 격동했다.
뜨거운 체액이 한껏 예민해진 내벽에 쏘아졌다. 온몸이 그의 정액으로 흠뻑 젖어 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그게 어떤 자극이라도 된 듯, 섀넌은 온몸을 해일처럼 범람하는 기나긴 절정에 숨을 멈췄다.
질식할 것 같았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 온몸이 쭈뼛 곤두서며 소름이 내달렸다. 몸을 지탱하는 시트와 베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제 안을 헤집는 감촉만이 아득하게 남았다.
그러나 섀넌은 아주 작게 몸부림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두꺼운 팔이 그의 몸을 꽉 휘감고, 옭아매고, 결박한 탓이었다.
서쪽으로 넘어간 달빛이 커다란 창 안으로 드리워졌다. 새파랗게 밝아진 새벽하늘에 걸린 만월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만월…, 시발, 오늘이 만월이었어.
시트에 뺨을 묻은 채, 섀넌은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귓불이 세게 깨물렸다. 그 아래와 목덜미, 어깨에 까득까득 날카로운 이가 박혔다. 시트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초점이 엇나가고 시야가 흐려졌다.
섀넌은 짐승에게 피를 빨리며 다시금 황홀한 절정에 달했다. 뭉툭한 성기가 아주 천천히 내벽을 어루만졌다.
드나들기도 벅찰 만큼 빠듯한 틈을 벌리고 둥글게 돌리며, 비정상적으로 부푼 성기가 집요하게 쾌락점을 건드리고 끌어올렸다. 허벅지 안쪽이 경련하고 허리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하으, 하아……, 윈터, 으읏…, 흑….”
“움직이지, 마세요…, 읏, 다친단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배 속에 몽글몽글 뭉쳐 있던 쾌락이 팍, 터져 흘렀다.
“윈터, 하아……, 하…, 읏.”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아릿한 절정이 온몸을 적셨다. 덜덜 떨리는 섀넌의 등 위로 두꺼운 몸이 덮였다. 귓불이 세게 깨물리고 낮은 신음이 축축하게 쏟아졌다.
“샤…, 너무 좋아요……, 계속 빨아 주세요, 읏……, 아….”
빨아 달라는 말에 섀넌은 안 그래도 뜨거웠던 얼굴이 터질 듯 확 달아올랐다.
확실히, 자신은 지금 뒤로 윈터의 것을 힘껏 빨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경련하는 배 속에 꽉꽉 힘이 들어갔다. 터질 듯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가 그때마다 질척한 체액을 쏘아댔다.
“아흣…!”
섀넌의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절정에 몸부림치는 그 몸을 꽉 옥죄며, 윈터는 제 성기를 꽉 머금고 핥아 대는 내벽을 마음껏 짓찧었다.
섀넌의 턱을 쥔 윈터가 입술을 부딪었다. 숨을 헐떡이느라 바싹 마른 입 안을 적셔 주며, 윈터가 낮게 속삭였다.
“시트가 너무 많이 젖었는데.”
“…….”
아랫배를 받치고 있던 베개가 옆으로 빠져나왔다. 섀넌은 그제야 베개와 시트가 물기로 완전히 흥건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건드리면…,”
“아윽! 아!”
“계속 나와요, 섀넌.”
윈터가 허리를 쳐올리며 내벽 어딘가를 짓누를 때마다 맑은 체액이 섀넌의 성기 끝에서 주르륵 흘러나왔다.
몸의 수분이 꽉 쥐어 짜이는 기분이었다. 어디까지가 절정의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끝도 없는 전율이 온몸의 신경을 내려쳤다.
“많이 좋아요?”
“아흑….”
위로든 아래로든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노팅에, 흡혈에, 씨발…, 이 파렴치한……. 섀넌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튀어나오는 욕과 울음을 삼켜 버렸다.
“그ㅁ, 너무, ……아흑…, 죽을 것 같…….”
“죽을 것 같다고요?”
섀넌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볼기가 꽉 짓눌리도록 장골을 치대며, 윈터가 허리를 천천히 돌렸다.
“아응, 하, 아, 앗…!”
“나도, …죽을 것 같아요, 섀넌…….”
“진짜, 죽을 것 같, 흐윽…….”
“나도 그래요.”
노팅을 끝낸 그의 성기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그가 싸질러 놓은 정액으로 흥건한 섀넌의 안은 끓어오를 듯 뜨거웠다.
홧홧한 체온이 등을 뒤덮으며 섀넌의 몸을 짓눌렀다. 섀넌이 몸을 뒤채며 그를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강건한 가슴팍은 절대 뒤로 밀리지 않았고, 섀넌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었다.
“잠, 잠깐, 윈터…, 안 돼, 조금만…, 쉬었다가, 조금만…, 하아…….”
섀넌이 발끝에 힘을 주며 힘겹게 앞으로 기어갔다. 안에 가득 차 있던 성기가 주르륵 빠져나가며 내벽이 쓸렸다. 섀넌은 그 감각에 몸서리치면서도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마찰로 발갛게 부푼 귀두가 힘겹게 뽑혀 나가는 걸 보던 윈터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새빨간 동공에 짙은 육욕이 번들거렸다.
그는 섀넌이 몇 발짝 앞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기이한 눈으로 지켜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팔꿈치와 어깨, 마른 근육이 감싸고 있는 팔과 툭 튀어나온 날갯죽지가 애처롭게 좌우로 비틀리는 게 그의 눈에 깊게 새겨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으로 시트를 디딘 채 필사적으로 기어 침대 헤드를 잡으려던 섀넌의 발목이 악마 같은 손아귀에 휘어 잡혀 주르륵 끌려갔다.
“아…!”
섀넌이 손끝을 세워 시트를 움켰다. 투두둑, 시트가 뜯어져 나가고, 별안간 그의 허리 아래로 손이 쑥 들어왔다. 단단한 손이 그의 몸을 천천히 뒤집었다.
그 순간 섀넌은 제게 완전히 몰두한 짐승의 눈을 마주했다. 끝까지 확장된 새빨간 동공에서 사냥하는 자의 살기와 성욕이 날카롭게 일렁였다.
저와 같은, 포식자의 눈이었다.
“…왜 도망가요, 섀넌.”
젖은 성기가 다시 구멍 안을 밀고 들어왔다. 쑤욱 밀려 들어오는 성기의 감촉은 비정상적으로 핏발이 서고 우둘투둘했다.
그르륵, 귓바퀴를 깨문 입술 새로 짐승의 사나운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으읏….”
“도망가면 더 잡고 싶어지는 거라고…, 섀넌이 그랬잖아요.”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입술 위를 뒤덮고, 섀넌은 위아래로 흔들리며 울었다. 시트에 내리눌러지는 손목을 비틀며 섀넌이 애원했다.
“안 돼, 윈터, ……제발, 힘들어, 흑….”
“힘들어요?”
“힘들어서…, 흐읏, 죽을 것 같…….”
“힘들면 조금만 천천히 할까요?”
윈터가 상체를 바짝 숙였다. 밤새 벌어져 있던 섀넌의 다리가 다시 양쪽으로 활짝 벌어지며 허벅지 안쪽이 달달 경련했다.
별안간 몰아치던 허릿짓이 멎었다.
“…넣은 채로 잠깐만 쉴까요?”
그 대신 이마와 구겨진 콧잔등, 입술과 뺨, 눈가에 아무렇게나 입맞춤이 쏟아졌다. 섀넌은 그 입맞춤에 응할 여유도 없이 숨만 헐떡였다.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네요, 섀넌…….”
“…….”
“그만해 달라고 우는 거 너무 귀여워요.”
안쪽을 파고든 성기가 꿈틀 움직였다. 윈터가 허리를 살살 돌리며 눈을 휘어 웃었다.
“아흐, 안 돼, 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깊게 넣어 줘요?”
조금만 더 쉬자고…, 사납게 제 입술을 뒤덮은 윈터의 입술 안에 그 말을 속절없이 흘려보낸 섀넌이 울며 흔들렸다.
“윈, 터…, 흐읍…….”
“샤, 조금만요, 조금만 더, 하아……, 진짜 이게 마지막.”
섀넌의 몸을 두 팔로 꽉 옭아맨 채 깊이 허리를 밀어붙인 윈터가 그의 안을 마음껏 헤집으며 전율했다.
“아윽, 흑……!”
“더 울어요, 섀넌. 더 울어 주세요….”
낮게 갈라진 그의 음성이 섬뜩했다.
* * *
섀넌은 늑대족의 습성을 간직한 불멸자가 어디까지 무서워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시트 위에 젖은 반죽처럼 엎어져 있던 섀넌이 눈만 굴려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는 윈터를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요, 섀넌. 물 데우고 있어요.”
“…….”
프레임과 헤드가 다 부서져 주저앉은 침대는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어 매우 불편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팔을 겨우 들어 올린 섀넌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내내 눈물과 땀과 정액에 젖어 있던 손끝이 쪼글쪼글했다.
축축한 시트는 말도 못 하게 찝찝했다. 매트리스까지 완전히 푹 젖어 있었다.
자신도 많이 쌌지만 남의 배 속에 양심도 없이 가득 싸지른 윈터의 뻔뻔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시트를 적셨을 뿐이지만, 윈터는 제 배 속에 엉망으로 쏟아부었으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나중에는 그가 싸는 것들이 섀넌의 안에 고여 있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넘쳤다. 배 속이 흐물흐물한 액체로 변한 듯했고 그 와중에 단단하게 제 내벽을 짓치는 것은 윈터의 성기뿐이었다.
쾌락에 절이고 절여져 물러 터진 몸을 끌어안고, 섀넌은 괘씸함에 이를 갈았다.
만월은 진즉에 지나갔다.
제게서 윈터의 몸이 떨어져 나간 것은 처음 옷을 벗고 닷새가 지난 뒤였다.
……자신이 필멸자였으면 어쩔 뻔했는가.
생의 마지막 황홀경을 붙잡고 처절하게 죽어갔으리라.
섀넌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윈터만큼이나 혈기 왕성했을 때, 제게 울며불며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이들의 심정을 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헤아릴 수 있었다.
시발…….
그래도 나는 이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았는데.
빌어먹을 제 아이는 완급 조절이란 걸 몰라서, 제가 힘들어하면 온몸이 흐물흐물하게 절여질 때까지 살갗을 핥고 입맞춤을 퍼붓거나 몸 안의 수분이 꽉꽉 쥐여 짜일 때까지 거칠게 몰아붙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도무지 중간이 없는 섹스였다.
잠시 침실을 나갔던 윈터가 돌아와 섀넌의 몸을 덮었다. 또 하려는 줄 알고 움찔 몸을 움츠리는 섀넌의 어깨에 쪽쪽 입을 맞춘 그가 섀넌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더는 안 돼.”
“알아요.”
윈터가 그의 어깨를 감싸 조심스럽게 안으며 말했다.
“씻으러 가요, 섀넌.”
“조금만…, 조금만 더 쉬었다가.”
지금은 몸을 일으킬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만 쉬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별안간 윈터의 팔 안에 안긴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섀넌이 순간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땀에 젖어 끈적끈적한 몸이 찰싹 들러붙었다.
“괜찮아요, 섀넌은 그냥 가만히 쉬세요.”
윈터가 사르르 웃으며 그의 뺨에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엉덩이 사이로 주르륵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에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그 표정을 보고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난처하게 웃은 윈터가 사과했다.
섀넌이 어이없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 말 한마디로 지난 며칠의 만행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부터는 잘 참아 볼게요.”
퍽이나.
“……분명 전에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섀너언…….”
윈터가 살살 눈을 접어 웃으며 그를 품으로 꼭 당겨 안았다.
“그동안 많이 참았으니까 이번에는 좀 봐주세요, 응?”
하,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헛숨을 흘렸다.
“다음 만월에도 똑같은 소리 할 거잖아.”
며칠 내내 실컷 물고 빨려 통통하게 짓무르고 부어오른 입술을 다시 머금으며, 윈터가 웃었다. 입맞춤이 아니라 입을 막는 것 같은 행위였다.
“……다음엔 더 잘할게요, 섀넌.”
윈터는 제 할 말만 내려놓은 채 섀넌의 입술을 쪽쪽 빨며 욕실로 향했다.
부연 김이 서린 욕실로 들어선 윈터가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발을 넣었다. 섀넌을 안은 채로 몸을 내린 그가 천천히 물에 잠겨 들었다. 촤악, 욕조에 담긴 물이 바닥으로 넘쳐 흘렀다.
“하아…….”
뜨거운 물이 온몸을 감싸자 섀넌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뜨거워요?”
“아냐, …딱 좋아.”
“좋아요?”
“…….”
섀넌은 이제 윈터에게서 뜨겁냐, 좋냐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아릿했다. 배 속에 아직도 그의 성기가 들어차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윈터가 그의 몸에 살살 물을 끼얹으며 경직된 어깨를 주물렀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어깨에 뺨을 붙이고 있던 섀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발정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 거야. 하루만 가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음, 정확히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만월 전후로 지나가던데.”
“늑대들은 원래 그렇게 한 달에 며칠씩이나 침대에 처박혀 있나?”
“아뇨, 그 정도는 아니고…, 나이를 먹으면 안정되어서 어느 정도는 괜찮아진대요.”
나이를 먹으면……. 섀넌이 미간을 구기며 그 말을 곱씹었다.
윈터는 나이가 들지 않는다. 그럼 언제까지고 계속 이 상태일 거란 뜻인가? 그건 무척, 무척 곤란한 일이었다.
지난 며칠간은 갓 태어난 뱀파이어의 왕성한 혈기와 늑대족의 발정이 겹쳤으니 과했던 것도 이해는 되지만, 섀넌은 이러다간 정말로 윈터가 무서워질 것만 같았다.
섀넌이 작게 몸을 떨었다. 그는 제 몸의 쾌락이 온전히 윈터의 손아귀에 떨어져 너덜너덜하게 쥐어짜진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그건 오랜 세월 살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침해당한 적 없던 선을, 불식 간에 침해당한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새파랗게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이렇게 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섀넌은 앞으로 사냥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혈기왕성한 제 아이의 체력을 따라잡고, 다시 그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원체 사냥이나 흡혈을 귀찮아했던 그로서는 몹시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윈터가 푸스스 웃었다.
“왜요, 걱정돼요?”
“그럴 리가.”
섀넌이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윈터가 그의 뺨에 입술을 내리그으며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언젠간 능숙하게 참을 날도 오겠죠.”
“읏….”
등줄기를 쓸던 윈터의 손가락이 볼기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에 고인 거 빼 줄게요.”
“그건 내가 알아서, 읏…….”
중지와 검지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꽉 다물린 내벽을 벌리자 안에 고여 있던 게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득했다.
“하아…, 윽……, 조금 더, …손끝을 세워서.”
“이렇게요?”
손톱이 약한 내벽을 긁지 않도록 조심해서 손끝을 세운 윈터가 점막을 느리게 훑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간 다시 자극을 받을 것 같아서, 섀넌이 허리를 살짝 세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윽….”
두껍고 긴 손이 내벽을 긁어내고 뒤로 물러날 때마다 그가 몸서리쳤다.
“……근데 섀넌,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한참이나 내벽을 만지던 윈터가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제 손은 여기까지밖에 안 닿는데, 제가 싼 건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잖아요.”
윈터가 손을 더 깊이 넣으며 미끌미끌한 점막을 살살 훑었다.
“손으로는 다 못 뺄 것 같은데…….”
섀넌이 저를 올려다보는 윈터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 좆으로 여기 안쪽까지 긁어 주면 다 뺄 수 있지 않을까요?”
“…….”
순진한 눈으로 파렴치한 생각을 하는 제 아이의 이마를 그가 손가락으로 딱 때렸다.
“아.”
“수작 부리지 마.”
그 이마에 입술을 쪽, 하고 내린 섀넌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느껴졌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은 탓이다. 제 아랫배를 툭툭 치는 굵직한 성기를 내려다본 그가 아연한 심정으로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는 모르는 척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이없어진 섀넌이 낮게 말했다.
“…당분간 섹스 금지야.”
“네…?”
윈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치 충격적인 선고를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또 좆을 세워선 안 되지, 윈터.”
“…세우지도 말라고 하시는 건 너무하잖아요. 그건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닌데…….”
눈꼬리가 축 처진 윈터가 눈을 내리깔고 섀넌의 가슴팍에 입술을 비볐다. 섀넌이 낙담하며 제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렇게 강아지처럼 굴어도 지금은 하나도 귀엽지가 않았다.
뒤를 메우고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섀넌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윈터가 그의 성기 끝을 물속에서 톡톡 두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섀넌도 섰어요.”
“…….”
아무리 그래도 섀넌은 지금 또 그와 섹스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까딱하다간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사흘, 나흘이 되어 버린다는 걸 잘 아는 탓이다.
별안간 섀넌이 몸을 확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렸다. 윈터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내 건 지금부터 죽일 생각이야.”
나직이 말한 그가 윈터의 짧은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한 손을 그의 턱 아래로 내린 섀넌이 윈터의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눌러 열게 했다.
“송곳니 집어넣어.”
윗입술 아래로 비어져 나와 있던 송곳니가 천천히 쏙 들어갔다. 윈터가 순종적인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혀 내밀고.”
순순히 내어 놓는 붉은 혀에 제 성기 끝을 느리게 문지른 섀넌이 그의 뒤통수를 감싸며 제 쪽으로 깊이 당겼다.
“읍….”
단번에 목구멍으로 치닫는 성기에 순간적으로 섀넌의 골반을 잡고 움킨 윈터가 짧게 신음했다.
“힘 빼고….”
섀넌이 그런 그의 머리채를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입 안을 천천히 유영하고 드나들며, 섀넌이 느슨한 한숨을 뱉었다.
닷새간 제 구멍을 너덜너덜하게 탐한 이 괘씸한 아이에게 이런 짓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윈터가 목을 더 열어 그의 것을 깊게 머금었다. 머리 위로 섀넌의 신음이 길게 떨어졌다.
욕조 난간에 한쪽 무릎을 디딘 채, 섀넌은 제 성기를 차지게 빨아들이는 윈터의 얼굴을 집요하게 내려다봤다.
…목줄을, 시발.
언젠가로 미룰 게 아니었다. 몸이 회복되면 당장 시내에 가서 그것부터 주문해야겠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사지를 꽁꽁 묶어 놓고 괴롭히면 제 아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예쁘게 울 것이다.
섀넌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에 소리 없이 전율하며 윈터의 입속을 마음껏 헤집었다.
Epilogue.
어두운 하늘 위로 불꽃이 펑펑 터졌다. 형형색색의 불씨들이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며 검은 창공을 가로질렀다.
섀넌과 윈터가 머무는 서북부 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은 겨울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광장에서 모여 흥겨운 음악에 아무렇게나 춤을 추고, 머리에 화환을 쓰거나 목에 꽃목걸이를 건 연인들은 자유롭게 키스하고, 누군가는 노상에서 술을 마시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즐겼다.
평범한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두 불멸자 또한, 노상에 즐비하게 늘어선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아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작은 놋쇠 잔에 담긴 달짝지근한 무화과주를 입에 머금은 섀넌이 아까부터 내도록 제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윈터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
섀넌이 테이블 위에 있는 장식에서 붉은 카멜리아 한 송이를 빼내어 그의 귀 뒤에 꽂아 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봐.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조금 전 제 아이는 무화과주를 한 모금 마셔보고는, 흙 맛도 맹맛도 안 난다며 얼굴을 찌푸렸었다.
“섀넌 술 마실 때 엄청 섹시한 거 모르죠. 예쁘고 야해요.”
윈터가 가볍게 웃으며 섀넌의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 섀넌이 그 손에 뺨을 기대며 대꾸했다.
“그런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감흥이 없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머리에 꽃이나 꽂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사랑스럽다고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 짧게 웃는 섀넌의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살 빗어 넘겨주며, 윈터가 물었다.
“무슨 맛으로 드시는 거예요?”
미각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제 아이의 질문에 섀넌은 그저 가볍게 웃었다.
“맛이 아니라 향으로 넘기는 거야.”
“향은 굳이 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요.”
“목으로 넘길 때의 향은 그저 코로 맡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지.”
섀넌의 뺨에 콧날을 그으며 그의 체취를 들이켜던 윈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옅게 찌푸렸다.
“어떻게 다른데요?”
“음.”
섀넌이 무화과주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짝 둘러봤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머금고는 윈터에게 입술을 겹쳤다.
기다렸다는 듯 벌어지는 입술 새로 혀를 옭아매며, 달짝지근한 술을 그의 입 안으로 흘려 주었다.
윈터의 귀 뒤에 꽂혀 있던 카멜리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얽고 섀넌의 술을 모조리 앗아갔다. 섀넌은 제 입천장과 치열, 뺨 안쪽 살갗을 혀로 꼼꼼히 핥는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콧속으로 달달한 알코올 향이 물씬 올라왔다. 달큰한 숨이 훅 끼쳤다가 다시 사라지고, 뒤엉키길 반복했다.
입 안에 옅게 맴돌던 무화과주의 맛이 완전히 다 사라질 때까지 질척하게 얽혀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거리가 벌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달아요.”
윈터가 타액에 젖은 섀넌의 입술을 손끝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알 것 같아요.”
그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섀넌이 웃으며 윈터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쪽쪽 빨았다. 그의 입가에 조금 남아 있던 무화과주가 달짝지근하게 혀끝에 감겼다.
축제가 한창인 이런 작은 마을에선, 낯선 타지인들이 남자끼리 키스를 하든 손을 잡든 신경 쓰지 않는다. 고향에서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으니, 여행 삼아 잠깐 머무는 마을에서 분위기에 취해 애정 행각을 벌이는 이들이 이미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맞춤이 과해지자 조금씩 오래 들러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지나쳤나, 섀넌이 머쓱해진 기분으로 제게 고개를 더 기울여 다가오는 윈터를 밀어내고는 일어나자고 속삭였다.
윈터를 끌고 향한 광장은 인파가 더 심했다. 단상에서 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이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그걸 보러 몰려온 사람들의 소음이 냉랭한 겨울 공기에 뜨겁게 들끓었다.
겨울인 데도 후끈한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몰려 있는 군중 안에서, 섀넌은 단상을 보는 윈터의 옆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의 축제는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문화를 반영한 축제들이 있는데, 섀넌은 앞으로 천천히 윈터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축제들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들은 섀넌에게야 더는 새로운 게 아니었지만, 윈터에겐 다를 테니 앞으로 섀넌은 그의 모든 처음을 곁에서 다 지켜볼 생각이었다.
윈터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섀넌에게 고개를 돌렸다. 깍지껴 잡은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보는 건 재밌긴 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요, 섀넌.”
“이런 것도 견뎌야지. 어차피 계속 필멸자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할 텐데.”
“식량이 굴러다니는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섀넌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된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아무래도 사람 많은 축제는 아직 그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다. 다음에는 차라리 인적이 드물고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에 데려가야겠다고, 섀넌은 조용히 제 계획을 수정했다.
그가 윈터의 목을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 있어.”
끝없이 행렬이 이어지는 인파 한가운데에서, 그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술과 분위기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누군가 하늘로 치솟든 땅으로 꺼지든 별 관심이 없었다.
* * *
“와, 멀리서 보니까 진짜 사람 많다.”
절벽 끝에 다리를 내리고 걸터앉은 윈터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었던 마을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광장에 와글와글 모여든 인파는 개미처럼 작았고, 하늘 위를 수놓던 불꽃은 한층 가까워져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음과 희미한 음악이 바람을 타고 높다란 절벽 끝까지 올라왔다.
그 옆에 서 있던 섀넌이 제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래를 구경하고 있는 머리통이 귀여웠다.
은백색 머리칼 사이에 조금 전 제가 꽃을 꽂아 주며 떨어진 작은 이파리가 꽂혀 있었다. 섀넌이 손끝으로 그 이파리를 살짝 떼 주었다.
윈터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것 봐요, 섀넌.”
혼잡하게 모여 있던 인파가 어떤 규칙성을 띠고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둥글게 모여 춤을 추는 사람들이 이 위에선 하나의 패턴처럼 보였다.
지그재그로 뒤섞이다 다시 원을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는 그들의 표정을 윈터는 하나하나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섀넌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풍경 대신 그걸 내려다보는 윈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도 춤,”
고개를 든 윈터의 말이 잠시 멎었다. 섀넌이 아까부터 내도록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춤출까요?”
가볍게 웃은 섀넌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몸을 일으킨 윈터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 놓고, 다 잊어버린 모양이네.”
이미 제 허리를 안고 손을 잡는 동작에서부터 서투름이 느껴져서, 섀넌이 살풋 웃었다.
그래도 뭐, 지금에 와서 춤을 잘 추고 못 추고가 무슨 문제가 될까.
윈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섀넌이 그의 발에 맞춰 아무렇게나 발을 디뎠다. 더는 발이 꼬이거나 부딪히지 않고 서로의 스텝을 자연스레 맞춰가는 두 몸이 절벽 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예전에요.”
“응.”
그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윈터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내 피후견인하고, 내가 당신 후견인이 되기로 했던 거 기억나요?”
“…당연하지.”
“다음에 갈 도시가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정말 그렇게 해 볼래요?”
섀넌이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음, 난 또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기숙 학교나 아카데미, 수도원, 대학 생활을 이미 지겹게 해 본 적 있는 섀넌은 그 단조롭고 규칙적인 생활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작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건 너잖아.”
“그럼 같이 학교 다녀요. 형제처럼.”
“형제라….”
뭐,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일 것 같기도 하고.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앞으로 한 몇십 년간은 이대로 한량처럼 흘려보내도 좋을 것 같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아마 살다 보면 윈터도 경험해 보고 싶은 일이 생길 테고, 어차피 자신이 그의 모든 처음을 함께할 테니.
“…지금은 이대로가 딱 좋아.”
윈터의 입술이 섀넌의 뺨에 내려앉았다.
“저도요.”
하늘을 수놓던 불꽃은 어느새 멎었다. 절정까지 타오르고 남은 흰 연기만이 검은 허공에 천천히 부유했다.
섀넌의 몸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윈터는 필멸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어리석고, 무모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자신을 지켜봐 주는 섀넌이 있었다.
제가 넘어지고 일어서고 자라온 모든 순간을 한결같이 뒤에서 버티며 지켜 준, 유일한 존재.
“……사랑해요, 섀넌.”
“…….”
“사랑해요…, 사랑해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진부한 고백을 몇 번이고 그의 귓가에 내려놓으며, 윈터는 조용히 맹세했다.
그 언젠가 우리가 흙이 되어 이 세상에서 소멸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자신이 그를 지켜주겠노라고. 더 열심히 자라서, 영원히 그의 그늘이 되어 주겠노라고.
뺨을 오가던 입술이 섀넌의 입술 위를 덮고, 온기가 뒤섞였다. 윈터의 목을 끌어안으며 가볍게 입술을 문지른 섀넌이 짧게 웃었다.
은백색 머리칼 뒤로 까만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섀넌은 늘 한결같았던 제 아이의 청회색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이 눈을 최초로 보게 되었던 순간에 제 몸과 마음을 관통하던 전율을, 섀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흑백의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이변이었고, 존속과 멸망의 경계가 없는 제 삶에 던져진 파문이자 기적이었다.
이마에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에, 섀넌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그에게 닿지 않을 말을 은밀히 새겼다.
나의 유일한 달.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신기루.
죽음 같은 권태 끝에 찾아온 너는, 내 두 번째 생이자 생애 첫 기적이었다고.
목이 메도록 아름답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괘씸하며, 마음이 저미도록 사랑스러운, 너는 하나뿐인 내 아이.
……영원한 내 연인.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