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Natural Pivot
가느다란 눈발이 저택의 창을 두드리다 이내 멎었다.
눈을 한바탕 퍼부을 것 같던 케인타운의 하늘은, 결국 소금 알갱이처럼 가는 싸락눈 몇 가닥만을 흩뿌리고는 이내 잠잠해졌다.
러셀이 어두운 침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침대 옆으로 비어져 나온 앙상한 손목을 본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섀넌의 모습은 거의 시체 같았다. 푹 꺼진 눈과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도드라진 빗장뼈 사이로 조용히 숨이 오르내렸다.
“섀넌 님.”
“…….”
“…섀넌 님?”
“…….”
“그리말디!”
개미 같은 목소리로 몇 번 섀넌을 부르던 러셀이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흘리며 부스스 몸을 일으킨 섀넌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린 채 러셀을 바라봤다.
“저번에 사냥 나간다고 하시더니, 또 그냥 오셨죠?”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제 목덜미를 쓸던 섀넌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야.”
러셀은 장장 2주 만에 깨어난 제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섀넌이 저런 무방비한 얼굴로 잠에서 깨는 걸 이전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러셀이 알기로 섀넌의 사냥은 지난여름이 마지막이었다. 예전에 서북부 저택에서 칩거할 때보다 더 심하게, 섀넌이 섭식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뱀파이어가 지나치게 굶으면 어떻게 되는지 러셀은 최근 섀넌 덕분에 상세히 알게 되었다.
힘이 약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움직임 또한 현저히 둔해지는 데다가, ……놀랍게도 몸이 마른다.
러셀은 느릿느릿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는 섀넌을 말없이 바라봤다. 슬리퍼를 찾겠다고 이리저리 헤매는 발등과 발목뼈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도드라져 있었다.
불멸자가 왜 불멸자인가. 병들지 않고 쇠하지도 않으며, 인간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을 늘 변함없이 간직하기 때문에 불멸자다.
일전에는 섀넌이 이렇게까지 오래 굶은 적이 없었으므로, 러셀은 뱀파이어도 지나치게 굶으면 인간처럼 살이 빠진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러셀이 작게 혀를 차며 그의 발 앞으로 슬리퍼를 찾아다 주었다. 앙상한 발에 슬리퍼가 헐겁게 감겼다.
비척비척 걸어 테이블에 놓인 디켄터를 잡은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러셀을 일별했다. 디켄터를 잡아 빈 잔에 기울이는 마른 손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결국 잔 밖으로 술을 조금 흘린 섀넌은 개의치 않고 잔을 들어 곧바로 들이켰다.
“뭘 그렇게 쳐다봐.”
빈 잔을 내려놓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러셀을 쳐다봤다.
“……한 시간 뒤에 카일 님과 엘리자베스 님께서 오신댔어요. 오늘은 꼭 섀넌 님을 데리고 갈 데가 있으시다고….”
섀넌이 제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 마나 또 억지로 끌고 나가 사냥하게 하려는 거겠지.
카일은 카일대로 귀찮지만 엘리자베스의 집요함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일전에는 침실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 아직 피가 굳지 않은 인간의 시체를 침대 위에 냅다 던져 놓지 않았던가.
시발, 어련히 알아서 처먹을까.
그 둘은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섀넌은 그 둘이 미친 것 같았다.
“계속 그렇게 굶으실 겁니까?”
그리고 러셀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했잖아. 귀찮은 것뿐이라고.”
“…….”
“안 죽어. 어련히 죽을 때 되면 알아서 처먹을까.”
남의 끼니에 왜 이렇게들 관심이 많아, 미친놈들이…….
다시 술잔을 채우던 섀넌이 문득 디켄터를 툭 내려놨다. 갑자기 울컥 치솟은 응어리가 목을 꽉 틀어막은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가 제 가슴팍을 매만지며 가만히 심호흡했다.
러셀이 그런 그를 염려스러운 얼굴로 관찰했다. 달달 떨리는 손끝과 불안정하게 갈라지는 호흡이 무척 아슬아슬해 보였다.
한참이나 긴 숨을 내쉬며 갑작스러운 떨림을 진정시킨 섀넌이 이내 차분히 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가 입고 있던 나이트가운을 벗으며 침실을 나가자 러셀이 그 뒤로 얼른 따라붙었다. 드레스룸에서 아무 코트나 잡아 걸친 섀넌이 그대로 나가려는 듯 창을 열었다.
러셀이 급히 그 팔을 붙잡았다.
“또 어딜 가십니까?”
“……걔들 오면 나 사냥 나갔다고 해.”
“진짜 사냥하고 오실 겁니까?”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그의 팔을 뿌리쳤다.
“이번만 믿고 보내드립니다. 꼭 사냥하고 오세요…! 이젠 진짜 흡혈하셔야, …섀넌 님? 섀넌 님! 야이, 그리말디이―!”
러셀이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주인 대신 휭 열려 있는 창밖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 위쪽 지붕에 앉아 그 소릴 다 듣고 있던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제깟 게 보내 주긴 뭘 보내 줘……, 시발. 내가 지 허락받고 나가야 하나.
별안간 섀넌이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 겨우 이 정도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숨이 찼다.
……정말 사냥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섀넌이 문득 제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마신 위스키가 안에서 역류하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 * *
시내로 나온 걸음은 무기력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척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것은 흔한 취객이나 한량의 모습인지라, 섀넌을 힐끗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내 흩어졌다.
발이 얼어붙을 듯 시렸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섀넌은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고, 점점 짙어지는 해풍을 따라 항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사냥감을 찾는 것도 귀찮으니 화이트팽이나 갔으면 좋겠지만, 거기서 또 전처럼 로렌스를 마주치는 낭패는 겪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 비척비척 걷던 걸음이 별안간 느려지다 멈췄다.
“…….”
창백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등 뒤에 엄습하는 익숙한 냄새를 감지한 섀넌이 머릿속에 치솟은 생각을 의심하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며 내딛는 발이 점점 빨라졌다. 슬리퍼가 벗겨지고 몇 번이나 꺾인 발 때문에 몸이 휘청였다.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박동이 너무 거세면 그건 구토 증세와 비슷해진다.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은 섀넌의 걸음이 쫓기듯 다급해졌다.
그러나 일정 속도 이상은 내지 못해서, 도망을 치는 건지 상대를 유인하는 건지 모를 모습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외곽까지 와서도 섀넌은 그저 인간처럼 빠르게 걸었다. 등 뒤에선 계속 그를 쫓는 기척이 덮칠 듯 말 듯 속도를 유지하며 다가왔다.
종내에 섀넌은 달리기 시작했다. 숲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부턴 더욱 속도를 내어 달아났다. 아니, 상대를 이끌었다. 나무가 빼곡한 언덕을 지나 산새가 험한 협곡 근처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숲의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온 섀넌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몇 발짝 떨어진 뒤에서 덩달아 멈춰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가끔, 환영은 잔인하리만치 선명할 때가 있다.
쿵쿵 뛰는 박동 사이로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혀왔던 환청이 흔들렸다. 이곳까지 오느라 혹사한 몸이 떨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섀넌은 입술 안쪽을 질끈 깨문 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붉은 눈이 내리 감겼다. 열기가 터질 것 같은 눈꺼풀을 누르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은 섀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섀넌은 자신이 환각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다시 내 눈에 띄면 박제할 거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결국 그 환각에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요.”
등 뒤에서 들려온 너무도 익숙한 음성에 섀넌은 무너져내릴 것 같은 마음을 다시 억지로 부여잡아야 했다.
……목소리 하나에 쉽게 무너져선 안 된다. 단지 제 망상이 빚어낸 착란일 뿐.
어차피, 돌아서면 보이는 건 아무것도…….
희게 굳은 얼굴로 돌아선 그가 몇 발짝 앞에 선 윈터를 마주했다.
“…….”
서로를 향한 시선이 지독하게 얽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상대를 응시하는 두 사람 사이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파스스, 앙상한 가지 끝에 맺혀 있던 서리가 아래로 추락했다.
그 미세한 소음이, 아슬아슬한 침묵을 산산조각 냈다.
별안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붙었다.
그것은 입맞춤이라기보다 요령 없는 충돌이었다. 냉랭한 살갗 위로 포악하리만치 뜨거운 숨이 엉키고 서로를 뒤덮었다.
윈터의 뺨을 감싼 채 다급하게 입술을 부딪친 섀넌이 낮게 신음하며 그의 혀를 집요하게 빨아들였다. 타액이 뒤엉키는 젖은 소리가 온통 귓가를 간질였다.
입술 안팎으로 온통 쏟아지는 짙은 숨결에, 지난 일 년간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양 뺨을 눌러 그 안쪽 점막과 입천장, 치열을 하나하나 훑으며 섀넌은 그제야 온전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렇게나 생생하다면, 한낱 환영이라도 좋아.
“읏…, 흡…….”
아주 작은 호흡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급하게 자신을 밀어붙이는 걸음에 발이 엉킨 섀넌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섀넌.”
섀넌을 밀어 넘어뜨린 윈터가 그 위에 올라타 다급하게 그의 옷을 잡아 벌렸다. 두꺼운 코트와 안에 입은 얇은 셔츠가 우습게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아….”
만지고 싶다. 늘 환영 속에만 존재했던, 손에 쥐고 싶고 안고 싶고, 때로는 입에 가득 넣어 힘껏 빨아들이고 싶었던, 그 실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걸 윈터는 실오라기 한 올도 남김없이 모조리 찢어 없앴다.
추운 야외에서 갑작스럽게 나신이 되어 움츠러든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윈터가 눈을 감은 채 그의 체취를 들이켰다. 향긋한 체취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간 숱하게 그렸던 환영 속과는 사뭇 다른, 안타깝게 야윈 몸이 파르르 떨렸다. 흰 살갗이 추위로 안쓰럽게 곤두섰다.
제 코트와 셔츠를 벗기려는 섀넌의 손이 맥없이 자꾸 엇나가서, 윈터가 스스로 제 코트와 셔츠를 빠르게 벗어 던졌다.
“왜 이렇게, 말랐어요…….”
상의를 탈의한 강건한 몸이 섀넌을 빈틈없이 덮였다. 뜨거운 체온이 섀넌의 온몸을 옥죄고 휘감았다. 맨 살갗에 와 닿는 박동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다급한 손길이 그의 허리를 쓸어 올렸다.
“응…? 흡혈 안 해요?”
꽉 메인 듯 억눌린 음성이 귓바퀴에 머무르다 위태롭게 스몄다. 섀넌이 그의 양 뺨을 잡아 입술을 부딪었다.
쏟아지는 숨, 새벽하늘 같은 청회색 눈, 아름다웠던 은백색 머리칼…….
손에 만져지고, 온몸의 살갗에 와 닿는.
“……윈터.”
이게 환영이라면, ……빌어먹을 환영이라면.
모조리 삼키고 또 삼켜서, 차라리 매몰되어 죽고 싶었다.
“윈터….”
더 깊어지고 어른스러워진 그의 이목구비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혹여라도 눈을 깜빡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시큰한 눈꺼풀을 내리감지도 못한 섀넌이 그와 애써 눈을 맞췄다.
“…샤.”
청회색 눈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감정이 툭, 무너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가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섀넌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그에게서 질척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섀넌의 옆구리를 쓸어 올리며 심장이 뛰는 가슴 부근을 어루만졌다. 어깨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른 어깨에 눈을 비비던 윈터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안해요, 섀넌, 미안해요…….”
이렇게나, 이렇게나 애달픈 몸을 어떻게 놓아 버릴 생각을 했던 걸까.
손끝에 걸리는 빗장뼈가, 딱딱한 골격이 만져지는 어깨가, 앙상한 마디가 툭 튀어나온 손가락이.
다 애달프고 미안해서.
“너무 그리웠어요….”
이 끝에 짓이겨진 윈터의 아랫입술에 금세 핏기가 울컥 맺혔다. 그는 살짝 벌어져 있는 섀넌의 윗입술을 물었다. 자연스레 섀넌이 그의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말캉한 혀끝이 찢어진 입술 표피를 핥았다. 윈터의 목을 끌어안은 섀넌이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윈터의 아랫입술이 세게 빨리고 입안으로 침범한 혀가 타액마저 모조리 앗아 갔다.
섀넌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상체를 일으킨 윈터가 그의 허벅지를 잡아 제 위에 올라앉게 했다.
앙상한 골격이 톡 튀어나온 무릎이 윈터의 양옆 흙바닥을 디뎠다. 비스듬히 엇갈린 코끝에 서로의 뺨이 짓눌리고 질척한 호흡이 흩어졌다.
추위로 솜털이 곤두선 마른 몸을 제 품 안으로 더 깊게 끌어당겨 안은 윈터가 야윈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섀넌.”
“…….”
“잘, …지냈어요?”
무의미한 질문과 동시에 위태롭게 젖어 있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대답 따윈 들을 필요도 없는, 너무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움푹 파인 뺨과 푹 꺼진 눈꺼풀, 조금 전 제 타액으로 적셔 주었으나 금세 메말라 버린 창백한 입술, 작게 떨리는 턱 끝을 덧그리듯 만지던 윈터는 결국 소리 내어 흐느끼며 눈물을 쏟아 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섀넌…, 내가, 너무…….”
그렇게 가까웠음에도, 늘 한 꺼풀 장막이 덧씌워진 그의 마음을 온전히 갖지 못한 것 같아 애가 닳고 속이 끓었다. 아무리 움켜도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신기루처럼…, 늘 멀게 느껴졌던 사람.
너무도 욕심이 많아 그가 내어 주는 애정에 만족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다 뜯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나 좀 혼내 줘요…, 응?”
두서없이 쏟아지는 건 말이라기보다 울음에 가까웠다. 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물을 떨구는 윈터의 머리와 목덜미를 손으로 매만지던 섀넌이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양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꺼풀에 엉망으로 젖은 은백색 속눈썹이 물기를 머금고 축 처져 있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시울이 계속해서 차오르는 눈물을 비워 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그 연약한 섬모를 타고 눈물이 뚝뚝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우는 걸 보니까.”
섀넌은 그 눈가를 혀로 핥으며 짠맛이 도는 눈물을 모조리 삼켰다.
“환상이 아닌 건 확실하네.”
금세 다시 물기가 차오른 청회색 눈을 들여다보며, 섀넌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눈…, 지난 세월 자신이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제 아이의 눈.
이제야 피하지 않고 마주 보게 된 그 아름다운 눈이 온통 물기로 너울져 내렸다.
“만월은…, 어떻게 보냈어.”
제가 한마디 할 때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윈터를 보며, 섀넌은 그제야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가 이렇게 울어 대니, 자신은 웃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른 손이 윈터의 가슴팍을 훑고 목덜미와 턱 끝, 입술을 아무렇게나 매만졌다. 눈물 때문에 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윈터와 애써 시선을 맞춘 채, 섀넌이 다정하게 말했다.
“거기선 오히려 더 편했으려나. 너와 같은 이들이 많을 테니…….”
윈터가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이 양옆으로 튈 만큼.
“그럼, …혼자서 어떻게 견뎠어. 열도 많이 났을 텐데.”
대답 대신 흐느낌만 들려왔다. 제 몸을 놓칠세라 그러안고 우는 윈터의 머리를 두 팔로 꼭 껴안은 채, 섀넌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그와 맨 살갗을 맞대고, 몸 안에서 생동하는 체온과 박동을 느끼니 모든 게 괜찮아졌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게, 다.
“괜찮아, 윈터. …이제 다 괜찮아.”
기특한 내 아이.
자신이 시라트로 가는 것보다, 그가 여길 오는 게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걸 이 아이는 항상 먼저 해낸다. 늘 먼저 다가와 주고, 먼저 용기 내고, 먼저 붙잡아 주고, 먼저 매달리고…….
“…내내 당신 생각만 했어요.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한심할 정도로…….”
지금도 제가 할 말을 이렇게 먼저 해 버리지 않는가.
윈터가 코끝으로 그의 목덜미와 귓불 아래, 어깨와 가슴팍을 어리광 부리듯 스치고 비볐다.
섀넌이 그런 제 아이의 뺨을 잡아 입술을 겹쳤다. 애틋하고 농밀하게, 그의 혀를 옭아매고 빨아들이며 어깨와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나도 너와 같아, 윈터.”
그가 윈터의 입술 안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네게 욕정하고, 너를 원하고, 정말 한심할 정도로 너만 생각했고, 후회했고…….”
윤리적 양심이나 죄책감 따위도 아닌, 그저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던 제 감정을 섀넌은 아주 천천히 털어놓았다.
“평생 곁에 두고 싶었어.”
눈물로 엉망이 된 청회색 눈에 파문이 일었다. 소리 없이 조여들었다가 느슨하게 벌어지는 홍채를 들여다보며, 섀넌이 그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게 일그러졌다.
보답 받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흐르기만 했던 제 감정에 처음으로 응답을 받은 아이의 표정은 온갖 의문과 놀라움, 탄식과 경이로움으로 뒤섞여 엉망으로 젖어 들었다.
섀넌이 쓴웃음을 흘리며 아직도 핏기가 맺혀 있는 그의 입술을 핥았다.
아이는 정말이지 홍수가 난 것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다독이던 섀넌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어릴 때도 이렇게까진 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간 탈수증이 일겠다. 그가 계속 울어 대니 저까지 기분이 이상해져 열기가 울컥 치솟았다.
사방이 훤히 뚫린 숲에서, 한겨울에, 홀랑 옷을 벗고 서로를 부여안은 채 우는 건 사양이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었다.
“…윈터.”
낮은 부름에 윈터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을 맞춘 섀넌이 아까부터 제 볼기 사이를 툭툭 건드리고 있던 단단한 기둥을 바지 위로 슬쩍 문질렀다. 섀넌의 눈이 짓궂게 가늘어졌다.
“……울면서 여기 세우면 돼, 안 돼.”
“…….”
갑작스러운 말에 윈터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섀넌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하…, 허탈한 숨이 그에게서 새어 나왔다.
“…진짜 뜬금없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섀넌의 가슴팍으로 긴 한숨이 떨어져 내렸다.
“방금 고백해 놓고 갑자기 그런 말 하시면 어떡해요….”
“아까부터 세우고 있던 주제에, 그렇게 순진한 척 울면 누가 모를까 봐.”
윈터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한 섀넌이 장난스레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쳤다.
“누가 빚어놓은 건지, 얼굴은 귀엽게 생겨 가지고.”
불룩하게 솟아 있는 기둥을 제 다리 사이에 가두고 지그시 누른 섀넌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읏, 그만해요, 섀넌….”
방금까지 그렁그렁 차 있던 눈물이 이제야 겨우 살짝 가라앉았다.
섀넌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는 품에 꼬옥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아이가 원하는 건 늘 자신이었고, 그건 나이를 먹었어도 변함없으니까.
“읏…….”
섀넌의 허리를 옥죄고 있던 두꺼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바지 안으로 들어온 차가운 손이 윈터의 성기를 쥐었다.
윈터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눈시울에 남아 있던 눈물을 툭 떨궜다. 제 손이 닿은 것만으로 질금질금 체액을 흘려 대는 기둥을 잡은 섀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제 아이는 위로든 아래로든 눈물이 많아서 탈이다.
달래듯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짧게 물러났다가 다시 부드럽게 덮였다. 그의 입술을 머금으며 귀두 끝을 살짝 누르자 입술 위로 달콤한 신음이 와 닿았다.
“읏, …왜 자꾸 만져요.”
고개를 약간 뒤로 물리며 입술을 뗀 윈터가 아직 눈물이 남아 있는 얼굴로 물었다.
보자마자 사람 옷은 홀랑 다 벗겨 놓고 이제 와서 왜 만지냐고 따져 묻는 태도가 어이없어서, 섀넌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데선 싫다면서요.”
섀넌이 기억을 더듬듯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네. 분명 그때…,”
갑자기 말을 멈춘 윈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혹시 그 사이에 취향이 바뀌셨어요?”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섀넌의 둔부를 천천히 쥐었다. 청회색 눈이 울멍울멍 흔들렸다.
“저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랑 밖에서 해 본 적 있으세요…?”
아직도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주제에, 저런 표정으로 무슨 저런 질문을.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가 언제를 말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다. 어차피 그와 자신이 몸을 섞은 건 단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네가 처음이니까, 아무 데서나 안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고.”
섀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아무 데서나 자빠뜨리고 멋대로 범해도 성이 안 풀릴 것 같은데.”
“…….”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윈터의 눈가와 광대, 관자놀이와 귓바퀴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고개를 푹 수그리며 섀넌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열이 잔뜩 올라 뜨끈한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며, 섀넌이 웃었다.
“왜, 이런 곳에선 싫어?”
“아뇨, 아뇨…, 싫지는, ……않은데.”
허리를 조금 든 섀넌이 풀어헤친 바지춤 사이로 꺼낸 그의 성기를 제 회음부에 밀착한 채 천천히 문질렀다. 이미 투명한 체액을 질질 흘리던 성기가 미끌미끌하게 그의 볼기 사이를 드나들었다.
“…아.”
섀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윈터의 몸이 움찔거렸다. 짓궂은 얼굴로 웃음기를 지운 섀넌이 천천히 허리를 들어 윈터의 성기를 위로 세웠다.
귀두 끝에 와 닿는 말캉하고 여린 살갗의 감촉에, 윈터가 당황하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자, 잠깐, 섀넌, …아직.”
“아직은 무슨. 일 년을 참았는데.”
뭉툭한 선단이 주름진 틈을 꾹 눌렀다.
“아니면…, 그때처럼 깨끗한 침대에서 아기처럼 어르고 달래가며 안아 줄까.”
차분한 음성이 귀 안쪽을 툭툭 건드렸다. 여전히 섀넌의 손목을 잡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윈터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섀넌…, 읏……, 그게 아니라, 당신 몸이, 너무 말랐, …아.”
“하아……, 기다려 봐.”
선단에 맺혀 있던 체액이 뭉개지며 미끌미끌하게 틈새를 파고들었다. 꽉 닫혀 있던 구멍이 힘겹게 움찔거리며 귀두 끝을 느리게 빨아들였다.
섀넌의 윗입술 아래로 송곳니가 살짝 비어져 나왔다.
“아픈 건 잠깐이야…….”
고개를 기울인 섀넌이 윈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으읏…….”
까득, 귓불 아래 맥이 뛰고 있는 살갗에 이를 박아 넣는 그의 붉은 눈이 내리 감겼다.
섀넌의 둔부를 움킨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흰 엉덩이 사이로 검붉게 핏대를 세운 성기가 아주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굶주린 불멸자에게 힘껏 피를 빨리는 감각은 뭐라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찔하다. 극한의 공포와 극한의 희열, 고통과 쾌락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윈터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는 듯한 아득함과 동시에, 성기가 뜨거운 내벽에 오물오물 삼켜지는 쾌감에 짧은 숨을 터뜨렸다.
“아아…, 섀넌, 흣…….”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피와 함께 그의 신음이 귓가에서 흔들리자, 섀넌은 어쩐지 제가 순진한 아이를 강제로 범하며 피까지 쪽 빨아먹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윈터의 몸은 어쩔 줄을 모르고 경직되어 쾌감에 발발 떨고 있었다.
“으읏, 섀ㄴ…….”
여전히 그의 살갗에 이를 박은 채, 섀넌이 그의 너른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달래지긴커녕 더 달아오르기만 한 아이는 제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꽉 껴안았다.
섀넌은 한 번 더 그의 목을 세게 빨아들였다. 혀를 타고 물씬 퍼지는 피를 삼키기 무섭게 온몸으로 나른한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아래에서 질척한 소리가 났다. 제게 피를 빨리며, 아이가 사정한 탓이다.
“하아……, 잘했어, 윈터.”
비로소 그의 목에서 입술을 뗀 섀넌이 피에 젖어 붉어진 입술을 귓가에 붙이고 속삭였다.
아직도 사정의 여운이 남아 파르르 떨리는 윈터의 눈가에 입을 맞추자, 섀넌의 입술을 적시고 있던 피가 그의 눈꺼풀에 살짝 묻어났다.
“이것 봐, …아픈 건 잠깐이잖아.”
말끝에 낮은 한숨이 꼬리처럼 길게 흩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힌 섀넌이 아주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 그의 허리를 잡은 채 윈터는 어쩔 줄을 모르는 눈으로 섀넌의 아래를 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뱃가죽 위로 성기가 드나드는 윤곽이 너무도 선명해서, 윈터는 살짝 겁이 났다.
이러다 여길 뚫고 나오면 어쩌지…….
“섀넌, 아…, 조금만, 살살, 윽, 조심….”
“아파?”
“아뇨, 아뇨…, 읏, 당신이 아플까 봐…….”
윈터의 손에 깍지를 끼며 제 성기를 쥐게 한 섀넌이 느슨하게 웃었다. 흙바닥을 디딘 무릎에 힘을 준 채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니 배 속을 터뜨릴 듯 가득 메운 성기의 압박감이 어느 정도는 견딜 만했다.
“아프면 여기가 이렇게…, 하아…, 되진 않았겠지.”
섀넌이 윈터의 손으로 제 귀두 끝을 덮었다. 몽글몽글 맺혀 있던 체액이 뜨거운 손바닥에 짓뭉개지고 문질러졌다.
어느새 윈터의 눈물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후으……, 섀넌….”
“하아…, 읏…….”
한 손으로 섀넌의 허리를 잡아 천천히 그에게 맞춰 아래를 움직이기 시작한 윈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가 이끌리듯 섀넌의 가슴팍에 입술을 붙였다. 높은 콧대로 살갗을 그어 내리며 섀넌의 심장 박동을 느끼던 그가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감미롭게 빨아들였다.
석류알보다 작은 유두를 금방이라도 끊어낼 듯 이 끝으로 살살 짓이기다 혀로 옭아 힘껏 빨아들일 때마다 섀넌의 허리가 뒤틀리고 몸이 경직되었다.
오돌토돌한 유륜을 혀끝으로 둥글게 핥자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싼 섀넌이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은 윈터가 깊게 주저앉히며 아래를 밀어 올렸다.
“후윽…….”
섀넌이 깊이를 조절해 조금 덜 들어가 있던 성기가 마침내 뿌리 끝까지 잠겨 들었다.
뭉툭한 귀두 끝이 꽉 닫힌 내벽을 더 벌리고 깊게 파고들며 예민한 지점을 지그시 문질렀다. 하반신이 완전히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전율이 퍼져 나갔다.
“하으, 으…, 아.”
마찰로 붉게 물든 섀넌의 유륜 주변을 세게 깨문 윈터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성기의 감각에만 몰두했다.
성년식의 밤, 단 한 번의 섹스. 윈터는 당시의 모든 순간을 아직도 세세히 다 기억하지만, 눈앞의 실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이 마치 처음처럼 경이로웠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늘 꿈속에서 움키지 못해 사무치도록 공허했던 작은 몸이 지금 제게 들러붙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애끓던 감정은 이내 온몸을 적시는 쾌락이 되어 흘러내리고 또 채워졌다. 고운 살결을 모조리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그렇게라도 하나가 되고 싶은 희열은 찬 겨울바람과 숲의 흙냄새를 모두 잊게 만들었다.
“섀넌, 당신 느끼는 곳…, 되게 깊은 곳에 있어요…….”
여전히 섀넌의 젖꼭지를 머금은 채, 윈터가 속삭였다. 그 낮은 음성이 예민한 살갗 위로 진동했다.
하얀 볼기를 잡아 살짝 벌린 윈터가 천천히 허리를 쳐올리며 좁은 내벽 안에 제 것을 끝까지 파묻었다.
“흐읏, 으.”
“완전히, 뿌리 끝까지…, 으스러지게 쑤셔 박아야, 하아……, 당신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툭, 툭, 내뱉어지는 호흡에 덮인 유두가 축축한 점막으로 금세 빨려 들어갔다. 섀넌은 아주 느리게 배 속에서 치미는 전율에 몸서리쳤다.
“아아, 아……!”
적당한 감도로 부드럽게 스미던 쾌감이 일시에 확 차올랐다. 갑작스럽게 끌어올려 진 열기에 섀넌이 밭은 숨을 내뱉었다.
하아…, 더운 숨이 가슴팍을 가로질러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맥없이 벌어진 아랫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이 쪽쪽 와 닿고, 턱 끝에도 쪼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지금 그랬다간 부서지겠죠…?”
“…안 부서져, 윈터.”
섀넌은 제 안을 느리게 드나드는 아이의 뺨을 잡아 눈을 들여다봤다. 서로 몸이 연결된 채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시선을 맞대고 있었다.
이제 더는…, 그 어떤 벽도 없이.
“설령 부서져도, 이제 나는 널 있는 힘껏 끌어안기로 했으니까.”
온전히 제게 열려 있는 붉은 눈을 올려다보며, 윈터는 이 순간을 제 온몸에 각인하듯 음미했다.
섀넌의 안이 그의 것을 잡아채듯 더 깊이 끌어당겼다. 그의 목덜미와 빗장뼈 사이에 입을 맞춘 윈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홀쭉한 뱃가죽이 제 성기의 윤곽으로 들썩이는 걸 확인하며, 그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돌렸다. 긴장으로 확 조여든 점막이 윈터의 성기에 차지게 들러붙었다.
각도를 달리해서 섀넌의 안을 짓누를 때마다 발발 떨리는 작은 몸이 쾌락에 바르작거렸다. 윈터는 그 안쓰러운 몸을 더 깊이 안으며 배 속을 느리게 드나들고, 그 속살을 핥듯 제 성기로 집요하게 문질렀다.
“흣, 윈ㅌ, 아, 아아….”
윈터의 손안에 갇혀 있던 성기 끝에서 흰 정액이 핏, 핏 쏘아졌다. 윈터는 섀넌의 허리를 더 당겨 깊숙이 제 것을 파묻은 채 그대로 꽉 고정했다.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쾌감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가로 쏟아졌다. 윈터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더 먹어요, 섀넌.”
윈터가 섀넌의 체액으로 젖은 손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물어 주세요…, 샤. 얼른.”
따끔한 감촉이 이내 살갗을 파고들자, 윈터가 미간을 옅게 일그러뜨리며 안도하듯 웃었다.
배 속을 치닫던 성기가 어느 순간 끝까지 콱 처박힌 채 길게 사정했다. 뜨거운 체액을 토해 내는 뭉툭한 선단이 섀넌의 배 속을 애무하듯 짓누르고 어루만졌다.
“아아…….”
윈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세상이 희게 뒤집히고 온몸에 서늘한 희열이 내달렸다. 뜨겁고 달콤한 내벽이 제 성기를 녹일 듯 핥고, 동시에 쭉쭉 피가 빨리는 그 오싹한 감각이 그를 전율케 했다.
이대로 시간이 멎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 피를 다 빨려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윈터가 깔아 둔 코트 위에 누운 채, 섀넌은 단단한 팔에 머리를 괴고 조용히 윈터의 체취를 들이켰다.
그의 살갗에서는 더는 제가 쓰는 향수 냄새 따윈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야생의 흙과 풀 냄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섀넌이 손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부드러웠던 촉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피부의 결이 전보다 더 거칠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흠집처럼 가느다랗게 베인 흉터를 보던 섀넌은 확인하듯 어깨 부근의 화살 자국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볼록 튀어나온 상처가 만져지는 순간 어쩐지 목이 메어서, 억지로 열기를 쫓은 섀넌이 일부러 다른 얘길 했다.
“그새, …더 많이 큰 것 같네.”
제 품에 안겨 있는 섀넌의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던 윈터가 고개를 숙여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눈 밑이 푹 꺼지고 뺨이 야윈 섀넌의 입술은 조금 전 제가 흥분을 못 이겨 깨문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회복이 왜 이렇게 느려요.”
윈터가 그 흔적을 지우려는 듯 그의 입가를 핥고 빨았다.
“…내 피 조금 더 먹을래요?”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
섀넌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입술을 천천히 빨던 윈터가 제 얼굴을 따라 움직이는 붉은 눈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제가 뭘 하든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며, 윈터가 풀썩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세요.”
“……네가 자라는 순간을 또 놓칠까 봐.”
섀넌의 손이 윈터의 뺨을 덮었다.
“일 년 가까이 놓쳤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안 놓치려고.”
“내가 그렇게 달라졌어요?”
“완전히 늑대족이 된 것 같은데.”
“난 원래부터 늑대였는 걸요.”
“…….”
섀넌이 말없이 그의 얼굴을 면면히 훑었다. 아이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늘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은백색 머리칼, 깊은 눈과 그 안에 담긴 찬란한 만월…….
목이 메도록 아름다운 존재.
“…그래, 넌 늘 늑대였지. 난 뱀파이어고.”
가볍고 농밀하게 떨어진 입맞춤이 수 초간 섀넌의 입술에 머물렀다. 표피가 금세 메말라 버리는 그의 입술을 적셔 준 윈터가 싱긋 웃었다.
분명 예전과 똑같이 예쁜 얼굴로 웃고 있는데, 예전과 같지 않았다. 섀넌이 눈을 내리깔았다.
“…시라트가 네게 더 잘 맞았나 봐.”
몸도 일 년 새 더 커지고 근육은 더 세밀하게 갈라져 울근불근하게 부풀었다. 여러모로 아이는 제가 모르는 새 훌쩍 자라 버린 모습이었다.
“…하긴, 내 저택보단 더 편했겠지.”
윈터가 그런 섀넌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야윈 뺨을 쓰다듬었다. 특유의 차분하고 우아한 어투가 지금은 어쩐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서운함을 잔뜩 억누른 티가 난 탓이다.
윈터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편하긴요. 시라트의 청결 관념에 대해 들으면 섀넌은 정말 기함할걸요.”
“어떤데?”
그가 할 말을 고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섀넌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음, …일단 목욕물은 최소 네다섯 번씩 재활용해요.”
섀넌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거긴 사방이 다 눈이잖아.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저도 몰라요.”
옅게 쓴웃음을 흘린 섀넌이 윈터의 허리 위에 제 한쪽 다리를 걸치며 물었다.
“그리고?”
윈터가 그의 다리를 당겨 안고는 마른 허벅지와 볼기를 매만지며 말했다.
“거기선 직접 담근 혼성주를 마시는데, 그 안에 뭔지 모를 불순물이 엄청 많아요. 그리고 술잔이 섀넌 머리통만 하고…, 그 손잡이랑 잔 밑바닥에 물때가 엄청 껴 있는 걸로 봐선, 식기를 제대로 안 씻는 것 같아요.”
으…, 섀넌이 생각만으로도 더럽다는 듯 작게 진저리쳤다.
“그곳 사람들은 향수를 쓰지 않죠. 상의는 남자고 여자고 거의 입지 않고 지내는 데다, 아까도 말했듯이 몇 번이나 썼던 목욕물을 다시 쓰니까…, 아마 그 체취를 맡으면 섀넌은 곧바로 토할지도 몰라요.”
섀넌이 윈터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놓고는 물었다.
“너도 그렇게 살았어, 그동안?”
“네.”
윈터가 섀넌과 시선을 마주했다. 엄지 끝으로 섀넌의 눈가와 뺨을 한참이나 어루만지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환경이 제게 맞는 점도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다 나와 같은 존재들뿐이고…,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아도, 몸에 꼭 맞는 수트를 갖춰 입지 않아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삶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어요.”
목이 탁 막혀 왔다. 섀넌은 이미 짓무른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열기를 쫓아냈다.
“그래…, 네게는 그 모든 게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렇게나 너와 내가 다른 존재고.
“……근데 왜 너한테선 아직도 이렇게 좋은 냄새만 날까.”
어쩐지 애가 닳아 윈터의 목덜미와 어깨를 매만지던 섀넌이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코끝을 비비고,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춘 섀넌이 그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입술로 더듬었다. 살의 표면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그 살갗 아래에 흐르는 피 냄새……, 모든 게 황홀할 정도로 좋은데.
“일 년도 채 안 있었잖아요. 더 오래 있었으면 내게서도 그런 역겨운 냄새가 날걸요.”
“……아냐.”
섀넌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체취를 들이켰다.
“아냐, 윈터. 일 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야.”
그가 윈터의 양 뺨을 잡은 채, 입술 사이로 호흡을 나누며 천천히 말했다.
“그 일 년이, 난 지금 너무 아까워.”
자신과는 같은 시간을 살지 않는 아이의 일 년이 어떻게 짧을 수 있단 말인가.
단 하루도, 단 몇 초도 이렇게나 애달픈데…….
시간이 피와 같은 물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가 자라는 그 모든 찰나를 어떻게든 자신이 삼키고 싶었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런 당연한 건 묻지 마.”
그의 품에 뺨을 기댄 섀넌이 눈을 감았다. 살갗 아래로 느껴지는 윈터의 심장 박동과,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숨소리, 제 목덜미를 상냥하게 쓸어내리는 손길. 그 모든 것이 숨 막히도록 그리웠다.
머리 위에서 조심스러운 물음이 들렸다.
“혹시, 추격자 보낸 적 있어요?”
“……살아있는지라도 알아야 하니까.”
윈터가 웃으며 섀넌의 뺨을 잡았다. 이제 거의 흔적이 사라져 깨끗해진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 빨아들이고, 자꾸만 마르는 표피를 적셔 주었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가끔 서쪽 외곽에서 섀넌 냄새를 맡은 적이 있거든요.”
“내가 놈한테 피를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내 냄새가 날 만도 하지.”
“편지라도 보내 보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네가 왔을까.”
“…….”
윈터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아마 금방 돌아가진 못했을 거예요.”
“진짜 편지라도 보냈으면 더 꼴사나워질 뻔했군.”
섀넌의 대꾸에 윈터가 풀썩 웃었다. 엄지 끝으로 그의 뺨을 덧그리며 한참을 물끄러미 보던 윈터가 입술을 내렸다.
“세상엔 가끔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몸도 마음도 한 뼘만큼 더 자란 아이를, 섀넌은 지그시 바라봤다. 저는 모르는 세상에서, 제가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들을 배워 온 아이의 얼굴은 예전보다 한결 안온해 보였다.
제 곁에 있는 동안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안달 냈는지를 아는 섀넌은 그런 그의 얼굴이 새로웠다. 윈터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섀넌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예전엔 내가 늑대라는 걸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괴롭고 두려웠어요. 당신이 내가 늑대라는 걸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섀넌이 미간을 얕게 구기며 웃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야.”
“맞아요. 근데 그땐 그랬어요.”
한쪽 눈을 가늘게 찡그린 윈터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제일 무서웠을 때는, 당신이 갑자기 늑대 모습 보여 달라고 졸랐을 때.”
잠시 기억을 더듬던 섀넌이 아, 하고 작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보고 싶은 걸 보고 싶다고 말도 못 해?”
“제일 좋아하는 사람한테 제일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받을 수 있을까요?”
“그게 왜 수치스러운 모습이야. 정말 예뻤어. …물론 다른 늑대들도 다 예쁘다는 말은 못 해. 그들은 아직도 경멸스러우니까. 하지만 너는…….”
꽉 막힌 목으로, 섀넌이 나직이 말했다.
“너는 내가 지금껏 알던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어.”
“…….”
“난 그런 네게 어쩔 수 없이 매료된 거야.”
윈터는 오직 저만 비추는 붉은 눈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이역만리 떨어진 설원까지 가고 나서야 알게 되다니, 너무도 비효율적인 학습이었다.
“미안해요, 섀넌…. 너무 오래 걸려서.”
“네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야.”
단호한 얼굴로 섀넌이 낮게 말했다.
“세상이 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너 혼자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흐트러진 은백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어 넘겨 주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 그냥, …환경 탓인 거지.”
윈터가 제 뺨을 감싼 섀넌의 손에 제 손을 덮었다.
“당신이 많이 그리웠어요. 단 하루도 당신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어요. 숨 쉴 때도, 눈을 감을 때도, 사냥할 때도…, 늘 당신 생각만 했어요.”
“…….”
“편지 따위 안 보냈어도, 당신에게 다시 돌아왔을 거예요.”
섀넌이 시선을 내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시라트가 잘 맞았다면서, 이제 와서 그런 얘길 한다고,”
“당신이 훨씬 더 좋아요.”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섀넌의 목울대가 한차례 위아래로 일렁였다. 까마득한 아래로 심장이 추락하는 듯한 이 섬뜩한 기분을 윈터는 얼마나 오래전부터 느꼈을까.
“매일 향수를 뿌리고 꽉 끼는 수트를 입어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안 그래도 작은 고기를 더 작게 잘라 먹고 살아야 한대도, 난 당신 곁이 더 좋아요.”
“…….”
“내겐 당신이 유일하다는 거 알잖아요.”
섀넌의 양 뺨을 잡은 윈터가 이마를 맞댄 채 그를 응시했다. 속눈썹 끝이 맞닿을 만큼 가깝게 마주한 눈이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봤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난 그렇게 당신 곁에 있었을 거예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섀넌…, 달큰한 숨결과 따뜻한 고백이 입술 안으로 쏟아지고 이내 빈틈없이 뒤덮였다.
온통 그의 체온에 갇힌 채, 섀넌은 말없이 그 모든 찰나를 하나하나 마음에 새겼다.
아까운 줄 모르고 숱하게 지나쳐 왔던 순간들을 이제는 결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섀넌.”
윈터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한참이나 섀넌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있던 그가 코끝과 이마에 차례로 키스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눈을 뜬 섀넌이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설마.
“난 다시 시라트로 돌아가야 해요.”
“…….”
햇살 같은 안도감이 순식간에 저 멀리 달아났다. 날카로운 설풍이 심장을 관통해 지나가는 듯했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섀넌이 상체를 일으켰다. 저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는 윈터를 보며, 섀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왜?”
윈터가 섀넌의 등을 감싸며 희미하게 웃었다.
“난 자하카잖아요.”
제 입으로 자신을 자하카라고 칭하는 윈터를 섀넌은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아직도 자신은 윈터 그리말디가 더 익숙한데,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윈터는 자하카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내 삶의 모든 페이지는 당연히 섀넌뿐이지만, 그 첫 페이지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이 있고, …자하카로서 짊어져야 하는 일도 있으니까.”
윈터는 스스로의 담담함에 조금 놀랐다. 그의 앞에서, 제 입으로 이걸 인정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토록 그의 입을 막고 초조해했을까.
아무리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도 결국 제 태생은 자하카라는 걸, 왜 그리도 외면하고 싶어 했을까.
섀넌의 눈이 순식간에 발갛게 충혈되었다. 윈터는 섹스 중에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 외에, 그의 눈시울이 이렇게 빨리 달아오르며 눈물에 젖는 걸 처음 목격했다.
“……섀넌.”
윈터는 그 흰 뺨을 쥐고 잠시 어쩔 줄을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모든 걸 놓고 그에게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이제야 겨우 손에 닿은 그인데, 이제야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그를 두고 떠날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가야 했다.
당장 섀넌과 숨어 버리는 건 쉽다. 그러나 갈리나가 있는 한, 그리고 하슬라와 카힌이 있는 한, 언제 또 자신들에게 비극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 시라트에는 불멸자의 회복력을 멎게 하는 독이 존재한다. 갈리나가 제게 악역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녀가 섀넌에게까지 선역이 될 수는 없다.
그 독의 존재가, 앞으로 섀넌에게 어떤 변수를 끼칠지 모른다는 뜻이다.
윈터는 자하카로서 그 모든 걸 제 손으로 끝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섀넌의 안전을 위해서는…, 꼭 그래야만 했다.
시라트에는 자신을 보호해 줄 이들이 많지만, 섀넌을 위해 그 독을 완전히 폐기해 줄 이는 오직 자신밖에 없으니 말이다.
“자하카로서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하면, 그때는 죽을 때까지 당신의 그리말디가 될게요.”
그는 섀넌이 함부로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도움을 청하면 고민 없이 손을 잡아 주리란 것도 잘 알았다.
지금껏 섀넌이 저를 위해 해 온 희생이 적지 않은데, 또 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눈꺼풀 안으로 차오르는 열기를 억지로 쫓아낸 윈터가 단단하게 마음을 굳혔다. 떠난다는 소리를 해놓고 또 그의 앞에서 등신처럼 울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깜빡이는 섀넌의 입술 위로 윈터의 입술이 지그시 부딪혔다.
“그러니까, 지금은 가야 해요.”
“……윈터,”
윈터가 고개를 저어 섀넌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그의 양 뺨을 감싸 깊게 시선을 얽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섀넌.”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하는 청회색 눈에, 지금껏 없던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당분간은 절대로, 절대로 인간의 피 외에 다른 건 마시지 마세요.”
섀넌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커다란 손이 작은 귓바퀴와 흰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슬라가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어요.”
섀넌의 표정이 점점 더 의문스럽게 변해갔다.
“무슨 선물.”
“독이요.”
“그걸로 뭐 어쩌겠다고.”
“당신을 생포해서…….”
윈터가 입에도 담기 싫은 말을 상기하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시라트의 모든 늑대들이 보는 앞에서 죽일 거라고 하던데요.”
“……날 생포한다고?”
“필멸자들은 가끔 집요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 집착이 가끔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길을 찾아낼 때도 많아요.”
윈터의 말을 들으며, 섀넌이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에게서 대답이 없자 윈터가 재차 물었다.
“섀넌, 내 말 알아들었죠?”
그가 단호하게 당부했다.
“절대, 절대 당분간 술이나 차는 입에 대지 마세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제발, 내 말대로 해 주세요.”
두려움과 염려가 담긴 그의 눈을 보며, 섀넌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슬라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윈터가 왜 다시 시라트로 돌아가려 하는지. 그리고 갈리나가 윈터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란 것도…….
“부탁이에요.”
결국 섀넌은 몇 번이고 거듭 애원하는 그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알았어.”
불안한 듯 섀넌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윈터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런 순간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건 여전하네요.”
윈터가 엄지 끝으로 섀넌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 내내 네 생각만 했는데.”
“정말?”
섀넌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너만 생각해. 지금도.”
“근데 왜 가지 말라고 안 붙잡아요.”
“…붙잡아도 갈 거잖아.”
“…….”
윈터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오래도록 섀넌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손길에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 미련과 그럼에도 가야만 한다는 단호한 의지가 두서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 애달픈 감정은 섀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섀넌은 그저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제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정돈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한동안 그의 머리칼이며 귓바퀴, 뺨을 매만지던 윈터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가 섀넌의 허리를 감싸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바닥에 깔려 있던 제 코트를 주워 흙을 터는 윈터를 보던 섀넌이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아.”
그의 마른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던 윈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파요?”
“그게 아니라…….”
투둑, 툭, 섀넌의 다리 사이로 흐른 흰 체액이 마른 낙엽 위에 떨어졌다. 안에 고여 있던 윈터의 흔적이었다.
“……좀 적당히 쌌어야지.”
“아.”
윈터가 찢어진 그의 셔츠를 집어 섀넌의 다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닦으며 귓바퀴를 새빨갛게 붉힌 채 말했다.
“…미안해요. 다음부턴 잘 참아 볼게요.”
지금 그렇게 수줍어할 상황이 아닌데…,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퍽이나 참겠네.”
“두 번 중에 한 번…, 아니, 세 번 중에 한 번은 참아 볼게요.”
그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섀넌이 작은 목소리로 툭 대답했다.
“됐어. ……나도 덜 아프고 훨씬 좋으니까.”
체액이 말라붙은 섀넌의 허벅지 안쪽을 닦던 윈터가 힐끗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
시선이 마주치자 윈터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눈가와 뺨, 정수리,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며, 섀넌이 소리 없이 코웃음 쳤다.
…그나저나.
문득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주변을 둘러봤다. 제 옷은 갈기갈기 다 찢어져 버렸고 윈터의 옷 중에서도 그나마 성한 건 코트뿐이라, 불행히도 섀넌은 그의 커다란 코트 한 장만을 알몸 위에 달랑 걸쳐야 했다.
소매에 양팔을 꿴 섀넌이 제 팔보다 한 뼘 이상이 길어 볼품없이 흐느적거리는 소매 끝을 들어 보였다.
“이 꼴로 어떻게 집에 가라는 거야.”
윈터가 코트의 가장 아래 단추부터 차곡차곡 채워 섀넌의 목 끝까지 잘 여몄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 덕분에 몸이 지나칠 정도로 다 가려지긴 했다.
……그가 맨발인 것만 빼면.
“…신발 어딨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의 옷 다 찢어 버린 건 너잖아.”
섀넌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밖에 나왔을 때부터 이미 슬리퍼 차림이었고 그것마저 오는 길에 벗겨졌지만, 윈터에게 굳이 그런 걸 말하진 않았다.
제 구두를 벗는 윈터를 보던 섀넌이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구두를 섀넌의 발 앞에 내려놓은 윈터가 무릎을 굽힌 채 그를 올려다봤다.
“…이건 좀 그래요?”
“……됐어.”
섀넌이 그의 구두에 발을 넣었다. 앙상한 발이 중간에 걸림도 없이 쑥 들어갔다. 여유가 많이 남는 뒤꿈치 때문에, 꼭 아빠 구두를 몰래 신은 소년의 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꼴사납네, 진짜.”
그 발을 내려다보던 섀넌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발이 왜 이렇게 작아요, 섀넌.”
“네 발이 큰 거지 내 발이 작은 게 아니야. …너는 뭐든 지나치게 다 크잖아.”
평생 누군가에게 작다는 소릴 들어본 일이 거의 없는 섀넌은 어쩐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도대체가, 또래들보다 작고 약하던 애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크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제 키를 넘어섰을 때 이상한 걸 느꼈어야 했다.
제가 너무 잘 먹여 키운 탓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자하카이기 때문에 이렇게 큰 걸지도…….
섀넌의 퉁명스러운 얼굴을 보던 윈터가 웃음을 흘리며 그를 꼭 안았다.
그가 섀넌의 이마 위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내내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지워지고, 눈을 내리감는 윈터의 표정에는 섀넌으로선 알 수 없는 비감이 서려 있었다.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섀넌.”
“…….”
사과는 왜 하는 건데. 너무 커서 미안하다는 거야 뭐야…….
섀넌의 시야에는 위아래로 울컥 일렁이는 윈터의 목울대만 보일 뿐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섀넌이 문득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안 데려다줄 거야?”
“이 꼴로 시내에 내려갈 수는 없잖아요.”
웃고 있는 윈터는 섀넌의 체액이 얼룩진 바지 한 장만 겨우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섀넌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꼴로 시라트까진 갈 수 있고?”
“아, 그건 당연하죠.”
순간 섀넌의 머리칼이 확 나부꼈다. 찰나 눈을 감았던 섀넌이 제 얼굴 앞으로 훅 끼쳐오는 열기에 눈을 떴다.
“…….”
자세를 낮춘 채 저를 올려다보는 커다란 늑대의 순한 눈망울이 어이없을 정도로 귀여워서, 결국 섀넌이 헛웃음을 흘렸다.
보드라운 정수리를 손으로 하염없이 쓰다듬고는 상체를 숙인 그가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털이 풍성한 목덜미에 뺨을 묻은 채, 섀넌이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
“사랑해, 윈터.”
“…….”
“이제 나는 널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눈이 나른하게 감긴 윈터의 귀가 뾰족하게 섰다가 옆으로 축 처지길 반복했다. 섀넌이 제게 뺨을 기대어 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윈터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절대 내 걱정은 하지 않기로. 네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는 거야.”
“…….”
“알겠지?”
섀넌이 그의 목덜미와 뺨, 정수리, 귀와 콧잔등과 주둥이에 아무렇게나 쪽쪽 입을 맞추고 귀 뒤쪽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긁어 주었다.
쉬…,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살살 어르면서 그의 턱밑을 손으로 가볍게 만져 준 섀넌이 한 발 물러났다.
“얼른 가.”
커다란 수정구 같은 청회색 홍채가 확 조여들었다가 다시 느슨해졌다.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의 의미를 아는 섀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명심할 테니까, 안심하고 얼른 가.”
잠시 섀넌을 지그시 보던 윈터가 이내 휙 몸을 돌려 쏜살같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숲을 내달리는 은빛 잔상을 끝까지 눈으로 좇던 섀넌이 이내 몸을 돌렸다.
느슨한 미소가 남아 있던 얼굴은 어느새 차게 식어 있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이번엔 절대 놓지 않아.’
그는 한 번 놓쳤다가 다시 손에 쥔 것을 순순히 보내 놓고 얌전히 기다릴 만큼 인내심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 * *
“음.”
하슬라가 굵게 침음하며 왕좌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손가락마다 끼워진 투박한 반지가 자기들끼리 부딪쳐 쩔그럭 소리를 냈다.
윈터가 돌연 자취를 감춘 지 열흘째.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장로회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별채에 칩거하기 시작한 건 그보다 더 오래되었으니 정확히 언제부터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윈터의 침실이 비어 있는 게 확실한가?”
“예, 요 며칠 거기에서 나오는 세탁물이 단 한 개도 없었고, 식사를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의혹으로 꿈틀거리는 짙은 눈썹 아래 그늘진 눈이 번들거렸다.
얼마 전 갈리나가 서쪽 관문 순찰병들을 데리고 숲을 정찰하는 바람에, 잠시간 그 관문 경계가 뚫린 일이 있었다.
그때 갈리나는 순찰 인력 교대 시간을 착오해 생긴 실수라고 했지만, 윈터가 갑자기 칩거하게 된 기간과 어쩐지 맞물리지 않는가.
윈터가 만약 시라트를 나갔다면…….
“카힌, 가서 갈리나를 데려와.”
“예.”
그의 곁에 있던 카힌이 안 그래도 굽은 허리를 더욱 수그리며 대답하고는 단을 내려갔다. 넓은 홀을 허약한 다리로 가로질러 느리게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하슬라가 손을 살짝 들었다.
“아니, 잠깐.”
“…….”
“그냥 놔둬.”
왕좌의 팔걸이를 꾹 짚은 그가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키며 말했다. 끙, 하고 앓는 한숨과 함께 심해처럼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한번 지켜보자고.”
* * *
“……꼴이 그게 뭡니까?”
큰 자루에 묶여 얼굴만 내민 것 같은 섀넌의 꼴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훑던 러셀이 물었다. 섀넌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런 그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카일이랑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까지 있다가 가셨습니다. 옆 도시로 사냥을 나가신다던데요.”
역시나, 사냥 가는 길에 자신을 끌고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자리를 피하길 잘했다 여기며, 섀넌이 짧게 일렀다.
“오늘은 좀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리지 마.”
“또 어디 가시는데요?”
덜걱덜걱 벗겨지는 큰 구두를 끌며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섀넌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습관적으로 제 이마를 짚으려고 올린 섀넌의 손은 기다란 코트 소매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우스운 제 소매를 보고는 다시 손을 툭 내린 섀넌이 대꾸했다.
“어딜 가겠어. 사냥하러 가지. 좀 씻어야겠으니까 욕조에 뜨거운 물 좀 채워 놔.”
“……방금은 어디 다녀오셨는데요?”
“제기랄, 그만 좀 캐물어.”
몸을 완전히 돌린 섀넌이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러셀이 목을 쑥 움츠렸다. 아무리 그가 큰 코트를 자루처럼 뒤집어쓰고 긴 소매를 팔랑거려도 그 살벌한 성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러셀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일단 목욕물 준비하겠습니다.”
“잠깐.”
드레스룸을 나가려는 러셀을 불러 세운 섀넌이 잠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대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러셀.”
차분히 말하는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의아한 얼굴로 그런 섀넌을 보던 러셀의 표정에 문득 긴장이 서렸다.
* * *
숲속의 밤은 이르게 찾아온다. 서쪽에서 시작된 어둠이 어느덧 동쪽까지 퍼렇게 번지고 있었다.
윈터는 맹목적으로 산맥을 따라 내달렸다. 시야 양옆으로 메마른 겨울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북쪽에서 케인타운으로 진입하는 경로는 여러 갈래가 있다. 하슬라가 보낸 검은 늑대들은 조를 나눠 각자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보다 빨리 케인타운에 도착해 섀넌을 먼저 만난 건 다행이지만, 여러 경로로 오고 있는 그들을 혼자서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윈터가 이렇게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섀넌이 독을 마시지만 않는다면 어차피 늑대들은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케인타운엔 카일과 엘리자베스도 있다.
미리 섀넌에게 경고를 해 주었으니,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섀넌을 찾아갈 늑대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여 그의 번거로움을 덜어 주는 일이었다.
그가 차디찬 겨울 공기에 미약하게 섞여 든 동족의 냄새를 따라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이내 저 앞에서 기척이 다가왔다. 마른 낙엽이 지르밟히며 부서지는 소리, 바람이 갈라지며 울리는 파공음…….
윈터는 청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채 제게 다가오는 늑대들의 머릿수를 가늠해 보았다. 열, 아니…, 열다섯, 그 이상…….
둘레가 큰 거목을 등 뒤에 두고 멈춰 선 윈터가 살기를 곤두세우며 털을 부풀렸다. 반인반수, 혹은 늑대의 모습을 한 검은 그림자들이 어슬렁 그 주변으로 다가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역시 하슬라 님 말이 맞았어.]
검은 늑대들이 윈터를 향해 고개를 낮추고 으르렁거리며 저들끼리 떠들었다.
[아직도 그리말디의 개 노릇이나 하는 거냐?]
[그리말디와 이놈을 같이 끌고 가는 게 어때? 하슬라께서 엄청 예뻐해 주실걸.]
사나운 기세를 팽팽하게 부풀린 윈터가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자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수그러든 늑대가 귀를 양옆으로 바짝 접은 채 애써 컹컹 짖었다. 자신들보다 월등히 크고 강한 늑대에게 느끼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가진 거라곤 자하카 이름뿐인 서자 밑에서 개 노릇을 하는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야.]
털을 잔뜩 부풀린 은빛 늑대의 입에서 하얀 김이 훅훅 새어 나왔다. 그가 상대를 찍어누르듯 맹렬히 압박하며 코앞에서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륵!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 아슬아슬한 대치는 금세 깨져 버렸다. 검은 늑대들이 순식간에 윈터에게 달려들었다.
죽은 낙엽과 흙이 맹렬히 뒹굴고, 온통 검은 것들에게 뒤덮인 은빛 늑대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콰르륵, 콰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울음이 진득하게 뒤섞였다.
둘레가 큰 거목으로 검은 늑대 한 마리가 휙 날아와 부딪혔다. 목이 거의 반 이상 뜯겨 나간 늑대는 마지막 단말마 같은 숨을 내뱉고 즉사했다.
촤악,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짙은 포효와 함께 뒹굴던 검은 늑대들이 일제히 둥그렇게 물러났다.
누군가에게서 뜯어낸 살점을 입에 물고 있던 윈터가 그것을 뱉고 그들을 응시했다.
길게 드러난 이는 피에 젖어 새빨갰다. 섬뜩한 살기를 뚝뚝 흘리며 콧잔등을 구긴 채 으르렁거리는 그의 모습은 늑대라기보단 차라리 괴수 쪽에 가까웠다.
반쯤 귀가 물어뜯기고 군데군데 발간 살갗이 드러날 정도로 부상을 입은 그는 얼핏 보기엔 검은 늑대들보다 더 위중해 보였으나, 어쩐지 검은 늑대들은 쉽사리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납작 엎드린 채 켕켕 짖기만 했다.
해가 저물어 어두운 산속에서, 서로를 향해 첨예하게 얽혀 있는 눈들이 서슬 퍼런 안광을 빛냈다.
순혈 자하카에게, 열댓 마리 정도의 늑대는 그다지 위협적인 머릿수가 아니었다.
* * *
시라트 성곽 안, 작은 목조 건물.
테이블에 둘러앉은 장로들이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윈터가 늘 앉았던 자리에는 윈터 대신 갈리나가 앉아 있었다.
갈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불안한 얼굴로 제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윈터가 떠난 지 보름이 조금 넘은 시점.
일이 잘 풀렸다면 중간에 검은 늑대들을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그리말디를 만났을 것이다.
‘당신들의 왕좌를 내팽개치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모든 준비는 다 끝내 두세요.’
그녀 입장에선, 윈터에게서 다시 돌아오겠단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시라트의 왕좌를 내팽개치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주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하슬라가 수비 인력을 점점 더 우리 쪽으로 채울 거예요.”
그리고 하슬라는 윈터가 사라진 걸 어느 정도는 눈치챈 듯하다. 갈리나가 끌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정예병을 계속 외부로 보내고 있거든요.”
그게 시라트 밖으로 나간 윈터를 잡기 위함이라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윈터 님이 그리말디와 함께 돌아올 가능성은 없는 거야?”
“하슬라가 자기한테 독을 먹이려고 했다는 걸 알면 그리말디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은데.”
“그자가 우리 편에 선다면 완전히 우리가 이긴 싸움이라고 봐야지.”
여기저기서 그리말디에 관한 얘기가 화두에 올랐다. 갈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런 그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일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선, 갈리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느낀 탓이다.
서로를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는 종족이 단지 맹약 하나로 묶여 20여 년을 보낸다 한들, 그들처럼 견고할 수 있을까.
갈리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리말디가 윈터에게 적지 않은 헌신을 해 왔다는 것 하나는 이제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윈터의 목숨을 부지해 준 사람이 아니다.
윈터의 세상을 만들고, 그를 생동하게 했으며, 그를 더없이 빛나는 존재로 빚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건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말디에 대한 기대는 접으세요.”
테이블을 짚고 있던 손이 움츠러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린 이미 그에게서 너무 많은 걸 받았으니까…….”
그렇게 헌신하며 아껴 준 자하카를 자신들에게 내어 준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약속된 의무를 다하지 않았는가.
신념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때로 지나치게 뻔뻔하고 어리석어지기도 하는 법이고,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실, 시라트의 영좌를 세우는 데 불멸자의 희생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오직 자신들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고, 그게 더 옳은 길임을 갈리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성 경계 병력의 절반이 우리 쪽 사람들로 채워지면 그때부터 시작인 거예요. 아마 그때쯤이면 윈터 님도 돌아오시겠죠. 일단 이쪽 도개교를 미리 열어 두면…….”
시라트의 지형지물이 올라가 있는 상황판 위로, 갈리나가 검은색 목각을 들어 어느 지점 위에 올려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윈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최소 보름.
그 시점에 맞춰 모든 일이 시작될 것이다.
검은 늑대들의 개체 수에 비하면 아무리 힘을 합쳐도 자신들의 병력이 살짝 밀린다. 그래서 갈리나는, 성의 수비 체계가 허술한 지금만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검은 늑대가 그 왕좌에 앉지 못하게 할 것이다.
천 년 넘게 이어온 자하카의 왕좌를, 그녀는 어떻게든 되돌려놓을 작정이었다.
* * *
검은 늑대들이 케인타운에 도착한 건 윈터가 섀넌을 만나고 떠난 며칠 뒤, 보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바얀, 그거 그렇게 매는 거 아니야.”
서버들이 매는 고동색 크라바트를 목에 이리저리 두르던 바얀이 제 동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오늘 그리말디가 참석한 파티의 서버로 잠입한 참이었다.
“이리 내 봐.”
바얀의 동료가 그의 목에 크라바트를 대신 매어 주며 물었다.
“이 파티에 그리말디가 온다는 게 확실한 정보야?”
“그렇다니까.”
“……그리말디가 우리 냄새를 진짜 못 맡을까?”
“며칠째 도시 안에 버젓이 들어와 있었는데도 아무 일 없는 거 보면, 못 맡는 게 분명하지. 카힌이 이런 쪽으로는 도가 텄잖아.”
체취를 지우는 향수 역시 카힌이 만든 거였다. 그 향수와 함께 들고 온 독을 손에 쥔 바얀이 그것을 조명에 대고 작게 흔들어 보았다.
작은 유리에 담긴 맑은 물처럼 투명한 독은 아무런 냄새도, 맛도 나지 않는다.
“…이거 근데, 효과가 확실한 거야?”
“카힌이 십 년 넘게 연구한 거면 믿을 만할걸. 하슬라께서 그만한 확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실까.”
“그 별 볼 일 없는 애를 왜 그렇게 옆에 끼고 도시나 했더니, 뒤에서 이런 걸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누군가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동료가 매어 준 어설픈 크라바트를 거울로 확인한 바얀이 입꼬리를 애써 올려 웃으며 긴장감을 떨쳐 냈다.
“이야, 이러니까 영락없는 인간 같다.”
“이거 윈터 그놈이 옛날에 입었던 옷이랑 비슷하지 않냐? 어때, 나도 좀 귀족 왕자님 같아?”
누군가는 윈터의 억양과 행동을 흉내 내며 한껏 멋진 척을 해댔고,
“옷이 좀 불편해. 꽉 껴.”
누군가는 못마땅한 얼굴로 제 가슴을 옥죄고 있는 셔츠의 앞섶을 매만졌다.
그런 동료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친 바얀이 트레이 위에 즐비하게 놓인 잔 중 하나에 신중하게 독을 부었다.
“야, 그걸 지금 부으면 어떡해?”
“어어, 다른 잔이랑 안 섞이게 조심해…! 맹독이라 애먼 인간 입으로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즉사란 말이야.”
“…그냥 이대로 들고 나가면 안 돼?”
제 옷매무새를 살피던 검은 늑대들이 트레이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다소 어설프고 왁자지껄한 모습이었으나, 그들 나름의 긴장을 풀기 위한 방어 기제였다.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살아 돌아갈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실패하면 그다음 조가, 그 조가 실패하면 또 그다음 조가 똑같은 독을 들고 몇 번이고 그리말디에게 접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 시도가 거듭될수록 그리말디는 이상함을 느낄 테고, 임무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제발 한 번에 성공하자….’
잔을 받친 트레이를 든 바얀이 한차례 심호흡으로 긴장을 가라앉혔다.
* * *
늑대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인간들의 낯선 복식과 화려한 조명, 파티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홀 안 가득 온갖 인간들의 향수 냄새가 뒤섞여 후각이 둔감해진 것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었다.
“……왼쪽.”
누군가 바얀을 스치며 낮게 말했다. 바얀의 시선이 무심결에 왼쪽으로 향했다가, 제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리말디를 발견하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벽면의 작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그를 몰래 훔쳐보았다.
섀넌 그리말디.
무려 십 년 넘게 하슬라께서 이를 갈던 불멸자. 카힌의 식솔을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도륙하고 그 머리만을 돌려보낼 정도로 잔혹하고…….
‘아름답다.’
바얀은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나온 탄식을 얼른 틀어막았다. 징그럽게 창백하고 빼빼 마른 악귀처럼 생겼다던 카힌의 말과는 너무도 다른 외양이었다.
불멸자들이 그렇게나 인간을 홀릴 정도로 아름답다더니…, 진짜였네.
홀을 느리게 돌아다니는 섀넌은 이미 손에 위스키 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바얀은 그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잔을 다 비울 때를 기다렸다.
앞에 있는 누군가의 말을 듣던 섀넌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그와 잔을 부딪쳤다.
바얀이 트레이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다. 붉은 입술 안으로 황금빛 위스키가 가늘게 흘러 들어갔다.
‘진짜 술을 마시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불멸자가, 인간의 피 외에 다른 걸 음용한다니.
잔 안의 위스키가 모조리 섀넌의 입술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바얀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바얀은 숨도 쉬지 못했다. 중간에 다른 인간이 그의 트레이에 있던 술을 가져가려 해서 몹시 놀랐지만 다행히 제 동료가 얼른 끼어들어 막아 주었다.
마침내 바로 지척까지 다가가자, 섀넌이 고개를 돌려 바얀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빈 잔을 바얀의 트레이에 내려놓으며 새 위스키가 든 잔을 집어 들었다.
바얀에겐 그 순간이 지독히도 느리게 느껴졌다. 술잔을 곧장 입으로 가져가며, 섀넌의 눈이 아주 찰나 간 그와 마주쳤다.
느슨하게 내리깐 붉은 눈이 바얀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입술 안으로 황금빛 위스키가 빨려 들어가고, 그 술을 삼키는 흰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꺽, 일렁였다.
바얀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섀넌을 지나쳤다. 바얀은 곧바로 크게 한숨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를 악물었다.
마셨어…!
그리말디가, 내가 건넨 독을 마셨다고……!
세상 그 어느 늑대도, 이런 시도를 성공한 이는 없을 것이다.
최초로 불멸자의 회복력을 멎게 하는 독을 만든 건 카힌이지만, 그 독을 그리말디에게 먹인 것은 자신이다.
분명…, 훗날 역사에는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최초로 불멸자에게 독을 먹인 자, 바얀.
자신들의 실패를 대비해 기다리고 있을 다음 조의 활약은 안타깝게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말디에게 독을 먹이고, 그를 생포해서 시라트로 돌아가는 건 자신들이 될 테니까……!
인간이 가득한 홀을 벗어나 제 동료들이 있는 서버들의 대기실로 향한 바얀이 그제야 승리감에 도취된 한숨을 터뜨렸다.
* * *
여전히 갑갑한 수트를 입은 채 대기하고 있던 검은 늑대들이 돌연 파티장 밖으로 나가는 섀넌을 보고 깜짝 놀라 뒤를 쫓았다.
‘갑자기 도중에 어딜 가는 거지?’
‘파티가 지겨웠나 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린 연회장에서 중간에 사라지는 사람 거의 없잖아? 술에 취해서 업혀 가는 거면 몰라도.’
인간의 연회를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들은 갑자기 그리말디가 예고도 없이 파티장을 나가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더욱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리말디가 마차도 타지 않고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사냥하러 가는 건가?’
‘그럴지도.’
그러나 불멸자가 사냥을 하러 산을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리말디가 늑대족이라 짐승을 사냥하는 거면 몰라도…….
바얀을 비롯한 검은 늑대들은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야, 괜히 긴장하지 마. 어차피 잘된 거야.’
‘맞아, 쫄 필요 없어.’
지금 케인타운 외곽을 둘러싼 산맥 곳곳에 검은 늑대들이 얼마나 진을 치고 있는지 안다면, 그리말디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들을 눈치채고 일부러 이곳까지 유인한 거라 해도 이미 한 시간 전에 독효가 몸 안에 퍼졌을 테고, 그렇다면 충분히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그때 별안간 섀넌이 멈춰 섰다.
“……여기까지 쫓아왔으면 네놈들끼리 지껄이지 말고 나한테도 말 좀 거는 게 어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늑대들의 기척이 조여들었다. 섀넌이 침착한 얼굴로 목을 조이고 있던 크라바트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사방에서 반인반수의 늑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산속에서 시푸른 안광 수십 쌍이 흉흉한 살기를 흘렸다.
섀넌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자신을 포위한 늑대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바얀의 동료들이 그와 눈을 마주치자 주춤했다. 섀넌이 겁내지 말라는 듯 자애로운 얼굴로 눈썹을 가볍게 치켰다.
“시간 끌지 마.”
그가 제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향해 낮게 말했다.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
수십 마리의 검은 늑대들이 일제히 섀넌에게 달려들었다.
* * *
어느새 까만 밤이 내려앉은 케인타운 외곽 숲.
싸늘한 한기를 타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
섀넌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미 그의 주변엔 몸이 온전히 붙어 있지 않은 늑대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 없으니까 좀 빨리.”
바얀을 비롯해 아직 살아있는 늑대들은 두려움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회복력을 앗아 가면 뭐 하는가. 눈에 잘 뵈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 소름 끼칠 지경이다. 저런 독사 같은…, 아니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같은 놈…….
섀넌이 얼른 오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저 유약해 보이는 손으로 그는 몇 번이나 늑대들의 목을 으스러뜨리고 살가죽을 갈기갈기 찢었으며 심장을 맨손으로 끄집어 내어 내팽개쳤다.
악귀가 해사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새빨간 피가 튄 그의 흰 얼굴을 보던 바얀은 저도 모르게 작게 몸서리쳤다.
뒷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바얀의 옆에 있던 늑대가 이를 악물고 욕을 내뱉었다.
“씨이팔…, 쫄지 마.”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다른 그 어떤 늑대들보다 심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쫄아 있는 제 동료에게서 시선을 뗀 바얀이 볼썽사납게 부러진 제 긴 손톱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바얀이 허리춤에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단도를 꺼내 칼날이 아래로 향하도록 역수로 쥐었다.
어떻게든 한 번만, 치명상을 입히면 그다음은 더 쉬워질 터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영웅이 될 수 있다.
바얀의 옆에서 덜덜 떨던 늑대가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듯 휙 달려들었다. 섀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 틈을 타 바얀이 순식간에 섀넌의 뒤로 돌아갔다.
섀넌이 제게 짓쳐 드는 늑대의 손목을 잡아 꺾는 동시에 바얀의 칼이 그의 옆구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뱀파이어의 피 냄새…….
바얀의 심장이 섬뜩하게 요동쳤다.
그가 눈을 부릅뜬 채 섀넌을 응시했다. 조금 전 달려들었던 늑대의 위에 올라타 이제 막 그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린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
아주 천천히,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얀과 몇몇 늑대들이 그 광경을 숨도 못 쉬고 지켜봤다.
옆구리가 깊게 베여 살갗이 벌어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 손으로 제 옆구리를 쓸어 생경한 눈으로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던 섀넌이 고개를 기울였다.
몇 초 만에 아물어야 할 상처가 계속 벌어져 있으니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당혹보단 신기함에 가까웠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바얀의 동료 중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섀넌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일으킨 섀넌이 옆구리가 벌어진 부상으로 주춤할 때, 긴 손톱을 세운 그가 섀넌을 덮쳤다.
동시에 여러 마리의 늑대가 그 위를 연달아 덮었다. 가까스로 그들 사이를 홱 벗어난 섀넌의 옷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짙어지는 뱀파이어의 피 냄새에, 늑대들은 안도하는 동시에 경계했다.
흙바닥에 무릎을 댄 채, 섀넌이 천천히 제 팔을 들어 올렸다. 흰 팔을 가로질러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살갗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았다.
“아…, 빌어먹게 아프네…….”
그 손끝이 달달 떨리는 것을 본 바얀이 침을 삼키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섀넌이 맥없이 흙바닥 위로 쓰러졌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몹시 따분해 보였다. 찰나 스친 그 표정을 본 바얀이 멈칫했지만, 이내 그의 앞섶을 움키고 흰 얼굴을 주먹으로 연달아 콱 내려쳤다.
입술이 터지고 짓뭉개지는 질척한 소리가 퍽, 퍽 울렸다. 붉게 부어오른 섀넌의 입가가 양옆으로 길게 당겨졌다.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 *
시라트의 석조 성.
습기 어린 탕실의 작은 창으로 하얀 김이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목욕을 마치고 시중들에게 몸을 맡긴 하슬라가 흠, 하고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들이 물기를 잘 닦을 수 있도록 양팔을 벌린 하슬라가 말했다.
“내 정예병들이 시라트를 나간 게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말이야, 아직 무소식이군.”
갈리나의 아버지인 아즈낙을 비롯한 게자르 가문의 병사 두 명이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이 갑자기 하슬라의 신변 호위를 맡게 된 건 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 아무리 성의 경계 임무를 맡길지언정 절대 제 등을 내보이지 않던 그가, 별안간 아즈낙에게 신변 호위를 명한 것이다.
그 바람에 아즈낙은 같이 있던 말단 병사 두 명과 얼결에 하슬라를 수행해야 했다.
시종들에게서 바지를 건네받은 하슬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말디가 내 정예병들 목을 죄 꺾어 놨을까. 아니면 갑자기 시라트를 뛰쳐나간 윈터가 꺾어 놨을까…….”
“…불멸자를 생포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그자에게서 회복력을 앗아간다 한들, 눈 깜짝할 새 움직이는 그들의 민첩함을 우리가 당해낼 수는 없으니까요.”
아즈낙의 대답에 하슬라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렇겠지……. 허리춤으로 끌어올린 바지를 여미며 몸을 돌린 하슬라의 뒤로 아즈낙과 병사들이 붙었다.
“…….”
수욕실이라니.
이렇게 내밀한 곳에, 검은 늑대 호위 하나 없이 자신들이 직접 하슬라를 호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뜨거운 목욕물에 담겨 있다 나온 탓에 몹시 노곤해 보이는 하슬라의 그을린 등판을 노려보던 아즈낙이 조용히 제 손만 변형시켰다. 주름진 손끝에서 길고 짙은 손톱이 소리 없이 비어져 나왔다.
윈터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하슬라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밖에는 제 가문의 순찰 인력이 대기하고 있다. 잘하면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일이 간단해질지도 모른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나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슬라가 이곳을 나가기 전에, 일격에 그의 목을 꿰뚫으면…….
“으음…, 아즈낙, 그런데 말이야.”
그때 갑자기 하슬라가 몸을 확 돌려 아즈낙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흑…!”
양옆에 있던 병사 두 명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하슬라가 한 손으로 그중 한 명의 허리춤에 걸린 단도를 빼냈다.
그와 동시에 능숙하게 병사 한 명의 목을 벤 하슬라의 칼끝이 연속으로 궤도를 그리며 다른 병사의 눈에 박혔다.
“…….”
아즈낙의 목을 움킨 채 오직 한 손으로,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빠른 건 나도 뒤지지 않거든.”
“끄윽…….”
허공으로 들린 아즈낙의 발이 버둥버둥 흔들렸다.
“네놈들의 그 더러운 속내를 내가 몰랐을 줄 알고?”
움푹 파여 그림자가 진 깊은 눈이 아즈낙을 응시했다. 무쇠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하슬라의 손등이 아즈낙의 손톱에 깊게 베여 피가 철철 흘렀다. 경악으로 부릅뜬 아즈낙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아즈낙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허리춤을 뒤져 단도를 꺼냈다. 어떻게든 하슬라의 목에 박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필사적이었다.
제게 살기를 세우고 다가오는 기역 자 단도의 날을 혀로 길게 핥은 하슬라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아즈낙을 향해 입가를 늘여 헤죽 웃었다.
그의 투박한 손이 더 움츠러들며 아즈낙의 목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캉, 카랑, 아즈낙의 손에 들려 있던 날붙이가 돌바닥에 추락하는 소음이 울렸다.
이내 습기 어린 탕실 안은 그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창천했다. 표면이 거친 그 소리는 마치 악을 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에 안으로 들어온 검은 늑대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놀란 기색도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들어오며 열린 문밖으로는 순찰 중이던 게자르 병사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가서 장로들을 싹 다 끌고 와.”
악랄한 웃음소리가 점점 더 거세게 들끓었다. 아즈낙이 할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제 가슴팍을 한 번 쓸어내린 하슬라의 얼굴에 광기 어린 희열이 번들거렸다.
“어디 이 시라트가 검은 설원이 될 때까지 해보자고. 응?”
근육이 곤두선 가슴팍에 붉은 피가 길게 묻어났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웃음소리가 묵직하게 석벽을 때리며 복도 밖까지 울려 퍼졌다.
* * *
“러셀, 러세엘.”
쾅쾅, 저택 문을 두드린 엘리자베스가 문손잡이를 쥐었다.
“오랜만에 왔다고 문도 안 열어 주고 너무한 거 아니야아? 우리 왔어.”
그녀가 말끝을 길게 끌며 짓궂은 얼굴로 저택 문을 바스락 열고 들어갔다. 지하실에서 우당탕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러셀이 황급히 올라왔다.
“어억, 그거 또 그렇게 부수시면……!”
그가 엘리자베스 손에 들린 저택 문손잡이를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부를 때 재깍 나왔어야지. 이건 미안.”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곁에 있던 사이드 테이블에 문손잡이를 내려놨다. 허리가 잘록하게 재단된 여성용 수트를 위아래로 빼입은 그녀가 흰 레이스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섀넌은? 아직 자?”
“…….”
러셀이 대답을 미뤘다. 카일과 엘리자베스는 한동안 옆 도시에서 풍족한 사냥을 했는지, 평소보다 안색이 더 좋아져 있었다.
“……혹시 오늘도 인간 시체 싣고 오신 건 아니죠?”
러셀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웃었다.
“어우, 야. 옆 도시에서 그걸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와. 근데 섀넌은 어딨냐니까? 자?”
엘리자베스가 한 팔로 품에 안고 있던 선물 상자를 풀어 그 안에 있는 커다란 디켄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 디켄터에 담긴 시뻘겋고 걸쭉한 액체를 설마 하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러셀을 지나친 카일이 계단 위로 한 발 디디며 물었다.
“보나 마나 자고 있겠지, 뭐. 위층에 있지?”
“아뇨.”
러셀이 얼른 대꾸하며 그를 잡았다.
“…….”
붉은 눈이 의문을 품고 러셀을 돌아봤다. 엘리자베스의 시선 또한 러셀에게 꽂혀 있었다.
“어디 나갔어?”
“그 몸으로 어딜?”
“……며칠 동안 사냥을 열심히 하셔서 몸 상태는 좋아지셨습니다.”
러셀이 진지하게 대답하며 어쩐지 긴장한 눈으로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힐끗거렸다.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핥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러셀을 빤히 보던 카일이 계단에 올려뒀던 발을 내리며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이 사뭇 싸늘하게 일변했다.
“……설마 시라트에 갔다는 소린 하지 마.”
러셀이 긴장으로 발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 시라트에, 가긴 가셨는데요…….”
“제기랄.”
이런 씨발, 카일과 엘리자베스에게서 동시에 다른 욕설이 튀어나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 미친놈이 기어이…!”
러셀이 얼른 카일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아니, 아직! 제 얘기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러셀이 달달 경련하는 얼굴을 애써 풀며 흉흉하게 저를 보는 두 뱀파이어와 시선을 맞댔다.
“그게…, 섀넌 님 발로 간 게 아니라요. 검은 늑대들이 섀넌 님을 끄, 끌고 간 건데요…….”
말 같지도 않은 황당한 소릴 들었다는 듯,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늑대들이 걜 어떻게 끌고 갔다는 거야?”
하……, 달달 떨리는 한숨이 러셀의 입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그게 말입니다…, 하고 운을 뗀 그를 보는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눈에 아슬아슬한 분노가 차올랐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두 불멸자는 소리 없이 그리말디 저택을 떠났다.
* * *
떠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시라트.
마침내 그 경계가 지척이었다. 멀리서 풍겨 오는 설원의 냄새를 감지한 윈터가 잠시 멈춰서 긴 숨을 훅 내뱉었다.
반쯤 찢어진 귀와 뒷다리, 옆구리와 턱이 새빨간 피에 젖어 있었다. 그의 턱밑에서 진득한 핏물이 축 늘어져 뚝뚝 떨어졌다.
케인타운으로 갈 땐 최대한 빠른 경로를 골라 되도록 검은 늑대들을 마주치지 않게 피해갔는데, 다시 돌아올 땐 케인타운으로 가고 있는 늑대들을 상대하느라 예상보다 너무 늦게 도착했다.
[…….]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듯 누운 윈터가 제 상처를 핥았다. 발톱 하나가 빠져 피를 철철 흘리는 앞발을 핥고 옆구리의 상처를 핥던 그가 어느 순간 고개를 홱 들었다.
차가운 흙을 딛고 일어서는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너무도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오며, 중간중간 만난 검은 늑대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입을 벌린 채 헉헉 숨을 내쉬던 윈터의 귀가 어느 순간 옆으로 바짝 누웠다가 일어섰다. 느껴지는 기척은 고작 수십이 아니었다. 지금껏 상대했던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았다.
……아무래도 시라트 안에선 이미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다.
바짝 조여든 청회색 눈이 저 앞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는 늑대들을 응시했다.
시라트 경계선이 이 정도면 저 안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외부에서 시라트로 들어가는 관문은 이곳 말고도 세 군데가 더 있다.
일단 방향을 틀어 그들을 피해 가려던 윈터의 양옆과 앞으로 매복하고 있던 검은 늑대들이 훌쩍 뛰어들었다.
그르르르…, 악귀의 그림자처럼 새까만 늑대들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을렀다.
[…….]
머릿수를 세는 게 의미 없을 만큼 많은 늑대들이 그의 뒤와 양옆을 바짝 포위하며 다가왔다. 윈터가 등을 바짝 낮춘 채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윈터의 몸 곳곳을 적신 피와 상처가 너무도 잘 보여서, 검은 늑대들은 그가 몹시 지쳐 있는 상태라는 걸 쉽게 알아챘다.
콰륵! 등 뒤에서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고개를 홱 돌린 윈터가 컹 짖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맹렬한 살기가 사방에서 조여들었다.
그때, 별안간 붉은 모색을 가진 늑대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새까만 대열을 가르고 그들을 덮쳤다. 흙먼지와 거친 울음이 극렬하게 뒤엉키다 흩어지고 다시 얽혔다.
흙을 디딘 발아래로 무거운 울림이 전해졌다. 가파른 기슭을 타고 쏟아지는 말발굽 소리가 낙뢰처럼 일대를 휩쓸었다.
반인반수의 몸으로 군마를 타고 선두에서 달려온 갈리나가 커다란 대검을 허공에 대각선으로 내린 채 검은 늑대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천 번을 벼리고 담금질한 칼날이 자비 없이 검은 짐승의 몸을 가르고 꿰뚫었다.
흐트러진 대열을 뚫고 들어온 게자르 가문의 늑대들이 순식간에 윈터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윈터의 앞을 가로막은 갈리나가 검은 늑대들을 향해 말 머리를 돌렸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세요. 엄호할 테니까.”
갈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말의 갈기를 확 당겼다. 그들의 칼날이 허공을 긋고 휩쓸 때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진득한 피가 들러붙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퇴로를 따라, 윈터는 제 동족들과 함께 쏜살같이 산길을 내달렸다.
검은 늑대들이 그 뒤로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갈리나를 위시한 반인반수의 기마병들이 철통같이 그 앞을 막아서며 창칼을 그었다.
* * *
바얀이 제 앞에 맥없이 앉아 있는 섀넌을 바라봤다.
크라바트로 단단히 눈이 가려진 섀넌은 굵은 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함거 안에서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미혹을 쓸지도 모르니 예기치 못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바얀은 그런 그와 한 함거 안에 갇혀 있었다. 그것 또한 섀넌의 돌발행동을 면밀히 감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섀넌이 별안간 혼자 헛웃음을 흘렸다. 바얀이 엉망으로 짓이겨 놓은 입술이 다시 터져 피가 줄줄 흘렀다.
“…….”
뭐가 저렇게 우습지. 넝마 같은 몸뚱이로 아무것도 못 하고 끌려가고 있는 주제에.
단지 회복력을 잃었다는 것만으로, 뱀파이어는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본래는 목줄을 매어 끌고 갈 예정이었으나 섀넌이 도저히 걷지 못하겠으니 마차를 대령하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려서, 어쩔 수 없이 함거에 싣고 이동해야 했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는 대우였다.
“…….”
바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가려진 눈 아래로 보이는 콧잔등과 입술이 피로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야.”
그 입술이 갑자기 말을 했다.
섀넌이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란 바얀을 보고 한바탕 비웃었으리라.
“그만 좀 쳐다봐.”
“…….”
바얀이 놀란 눈으로 그를 의심스럽게 살폈다. 크라바트는 그리 얇은 재질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섀넌은 앞이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
“시발, 목말라.”
섀넌이 두 다리를 뻗어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그 구두 끝이 하마터면 바얀에게 닿을 뻔해서, 바얀이 움찔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목마르다고.”
바얀이 미간을 좁힌 채 함거의 끝에 몸을 바짝 붙였다. 뱀파이어가 목이 마르다는 게 무슨 뜻인가.
지금 끌려가고 있는 주제에, 흡혈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거야 뭐야…….
“물 좀 줘.”
“…….”
바얀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유일하게 음용을 하는 뱀파이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물을 달라는 그의 말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물 없어.”
바얀이 겨우 대답을 쥐어짰다.
“그럼 술은?”
이 와중에 술이라니……. 제정신인가. 바얀이 한심한 눈으로 섀넌을 훑었다. 지금 자신이 뭐 때문에 저 꼴로 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르나?
“술은, …있어.”
바얀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섀넌의 고개가 휙 들렸다.
“좀 줘. 목말라.”
특유의 억양이 유난히 인상적으로 귀에 꽂힌다. 평생 동족들과 살아온 바얀은 인간들의 말투가 무척 간지럽다는 건 알았지만, 어쩐지 섀넌의 억양이 유독 더 그렇게 느껴졌다.
바얀이 함거 곁에서 같이 걷고 있는 반인반수의 동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료가 혀를 차며 허리춤에 있던 가죽 수통을 내밀었다.
수통의 마개를 연 바얀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섀넌은 이상하게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흔들리는 함거에 몸을 맡긴 채 늘어져 있었다.
“……입 벌려 봐.”
혹시라도 돌발 상황이 생길까 봐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바얀이 긴장한 얼굴로 수통을 내밀었다.
“아.”
고개를 든 섀넌이 입을 벌렸다. 바얀이 정확히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 아는 듯, 입을 벌린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어쩐지 섬뜩하고 기이했다.
“…아.”
피가 터져 붉은 아랫입술 경계로 혀가 살짝 나왔다. 바얀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에게 더 다가갔다.
수통의 주둥이에서 쏟아진 맑은 술이 섀넌의 입안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렸다. 놀란 바얀이 얼른 수통을 세웠다. 그러나 섀넌은 말없이 제 입안에 조금 떨어진 술을 삼켰다.
흰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꺽 움직이고, 턱에서 흐른 술이 그의 목덜미를 천천히 가로질러 셔츠 안쪽으로 타고 내려갔다.
“조금만 더.”
어쩐지 거기에 시선이 붙들려 있던 바얀이 섀넌의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며 다시 수통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한 손길이었다.
쪼로록, 섀넌의 입안으로 안착한 술이 이내 그의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바얀이 기울인 수통의 방향을 일부러 엇나가도록 조금 틀었다. 저조차도 이유 모를 충동이었다.
빗나간 물줄기가 섀넌의 아랫입술과 턱에 부딪혀 목덜미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 흰 목덜미와 흠뻑 젖은 셔츠 앞섶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바얀이 어느새 길게 비어져 나온 섀넌의 송곳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수통에서 쏟아진 술이 함거의 나무 바닥을 적셨다.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섀넌이 가볍게 웃었다. 꼭 자길 올려다보며 웃는 것 같아서, 바얀은 기분이 이상했다.
“……왜, 뱀파이어 송곳니 처음 봐?”
물론 자신들의 이빨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송곳니였다. 그러나 바얀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설만큼 두려웠다.
“네 피 냄새가 내 식욕을 제법 건드려서.”
섀넌이 제 입술을 적신 술을 혀로 핥았다.
“…….”
그의 흰 목울대가 소리 없이 위아래로 일렁였다.
바얀은 어쩐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윗입술 밑으로 비어져 나온 뾰족한 송곳니 끝을 볼 때마다 오싹한 소름이 끼치며 알 수 없는 전율이 흘렀다.
그가 다시 다가와 섀넌의 얼굴 위로 수통을 기울였다. 길게 드러난 목덜미 아래로 흐트러진 셔츠 앞섶은 고개를 조금만 기울여도 그 안에 자리한 빗장뼈가 얼핏 보였다.
쪼록, 수통의 술이 다 동날 때까지 홀린 듯 멎어 있던 바얀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가 수통의 마개를 닫자 섀넌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짧은 머리칼 아래로 흰 목이 드러났다. 바얀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 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함거 끝에 등을 붙인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바얀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슬쩍 제 고간을 내려다봤다.
…왜인지 아래가 터질 듯 발기해 버렸다.
“……좀 빨리 가.”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든 바얀이 함거 밖에 있는 동료에게 재촉했다.
함거를 끌고 가던 늑대가 속도를 올렸다. 고르지 못한 숲길을 골라 빠르게 내달리는 함거가 덜거덕거릴 때마다 섀넌의 몸이 같이 흔들렸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시라트로 향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리던 늑대들이 시라트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도 며칠이 더 지난 뒤였다.
* * *
성곽 밖으로 쫓겨난 갈리나의 군대는 서쪽 외곽 숲에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조악한 진지는 아직 갖추지 못한 게 많았다.
하슬라가 돌연 성 안에 있던 게자르 가문의 병사들을 기습한 후 며칠간, 갈리나의 군대는 미처 준비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검은 늑대들과 몇 차례나 접전해야 했다.
그나마 시라트로 돌아오는 윈터를 구하려고 다급히 정비한 병력이 이곳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윈터와 함께 돌아왔을 땐 수가 현저히 줄었다.
윈터는 높은 협곡에 서서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진 성곽을 내다보았다.
그가 시라트에 다시 돌아온 지 벌써 닷새째. 바다와 맞닿아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하슬라가 들어 있는 견고한 성벽은 철의 요새였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쫓겨나온 상태라 굶주린 군마들은 난폭해졌고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냥으로 간간이 버티고 있었지만 이 외부에도 검은 늑대 파수병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성에 있던 우리 가문의 병사들은 모조리 죽었겠지만, 그래도 저 안에는 아직 발각되지 않은 우리 세력이 많아요.”
“…….”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면 그들과 합류할 수 있겠죠.”
찢어진 살갗을 급히 봉합한 탓에 검붉은 실이 철로처럼 다닥다닥 가로지른 손으로, 갈리나가 성곽의 정문을 가리켰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필패다.
죽든 살든 이제는 저길 뚫어야 한다.
윈터가 홱 몸을 돌렸다. 무장한 병사들을 지나쳐 물소 가죽을 다닥다닥 이어 붙인 막사 안으로 갈리나와 함께 들어선 윈터가 물었다.
“내가 전쟁에 대해 아는 건 없어도, 이 병력으로 저 정문을 뚫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은데요.”
갈리나가 부족한 병력으로 이만큼 버틴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앞으로도 그런 기적을 바라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안에 있을 우리 아군들과 합류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어요.”
“하슬라가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면서요. 혹시라도 그들이 발각되면?”
“장로들이 쉽게 입을 열진 않을 거예요.”
윈터에게선 한숨만이 돌아왔다. 시라트의 지형지물이 깎인 상황판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잠시 말이 없던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갈리나가 먼저 깼다. 갈리나가 상황판 위에 있는 하얀 목각을 손끝으로 쓰러뜨리며 조용히 말했다.
“하슬라가…, 하슬라가 날 그토록 불신하고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언제부터 확실히 알게 된 건지는 모르,”
“됐어요, 갈리나.”
윈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런 말은 나중에.”
갈리나가 쓰러뜨려 놓은 하얀 목각을 다시 세워 놓으며, 윈터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성안에 있는 당신 아버지와 식솔들 시신을 무사히 안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그것만 생각하세요.”
갈리나가 말없이 마른 침을 삼키며 꽉 막힌 목울대를 움직였다. 입가의 주름이 더 깊어지고 그녀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필사적으로 뭔가를 참고 있는 갈리나에게서 무심히 시선을 뗀 윈터가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절반의 병력을 떼어 이쪽으로 은밀히 이동하면,”
그때, 막사 밖에서 요란한 새 울음소리가 창천했다.
갈리나와 윈터가 단번에 서로를 쳐다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막사 밖으로 휙 뛰어나간 그들이 하늘을 바라봤다.
끼에에엑, 끼엑, 설원의 잿빛 하늘을 뒤덮은 붉은 눈 까마귀의 높은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점점이 수 놓이던 그것들이 더욱 짙게 창공을 뒤덮으며 울어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갈리나가 윈터를 쳐다봤다.
“……그리말디한테, 경고 안 해 줬어요?”
윈터가 불길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
“했어요.”
“그런데 왜…….”
시라트 설원에만 사는 붉은 눈 까마귀는, 불멸자의 기운을 감지하면 특유의 울음소리를 통해 저들끼리 신호를 주고받는다.
한 까마귀가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을 들은 다른 까마귀들이 울며 그 소리가 시라트 전역을 순식간에 뒤덮는 것이다.
그래서 시라트의 늑대들은 절대로, 불멸자가 자신들의 영토에 발을 들이는 순간을 모를 수 없었다.
* *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섀넌은 설원의 냄새를 맡는 동시에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눈 까마귀 울음소리가 정말 끔찍하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겪어 본 적은 없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까마귀가 우는 소음 때문에 바로 지척에서 얘기하는 늑대족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진정해. 하슬라 님 명을 수행 중이니까.”
“회복력을 잃은 불멸자라고. 그저 연약한 벌레일 뿐이야. 괜히 겁먹고 날뛰지 마.”
무슨 상황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섀넌은 자신이 지금 시라트를 통과하고 있다는 건 잘 알았다.
“얼른 하슬라 님께 가야 하니 길을 열어.”
그것도 늑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아주 당당히.
“지금 전란 중이니까 저쪽 경로로만 직진해. 엄호는 우리들이 한다.”
순찰병인 듯한 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자신이 타고 있는 함거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불멸자의 몸에서 회복력 하나만 앗아 가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걸 섀넌은 깨달았다.
‘체력이 엉망이군.’
게다가 사방팔방에서 풍기는 역겨운 늑대들의 냄새가 후각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라, 웬만큼 지척이 아니면 윈터의 냄새를 감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붉은 눈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계속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아주 예전에 카일이 구해 왔던 시라트 내부 지도를 본 일이 있어, 눈을 가렸어도 움직이는 방향을 통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나 쉽게……, 시라트의 심처까지 들어갈 수 있다니.
손이 묶인 나무 기둥에 머리를 툭 기대며, 섀넌이 희미하게 웃었다.
* * *
“울음소리는 남쪽 관문에서 시작된 거라고 합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하슬라가 외부로 보냈던 검은 늑대들이 함거에 뭔가를 싣고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막사로 들어온 병사가 말했다. 붉은 눈 까마귀가 하늘을 뒤덮은 이유를 정확히 알아 오기 위해 내보냈던 정찰병이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시작된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그 정도면 지금쯤은 하슬라가 있는 성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윈터와 갈리나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말디를 만난 게 확실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윈터를 보며 갈리나가 불안한 얼굴로 막사 안을 서성였다.
“그럼 대체 지금 들어온 불멸자는 누군데요?”
“…….”
윈터는 자신과 시선을 맞춘 채 순순히 수긍하던 섀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저는 여전히 당신의 생각을 알 수 없다고 웃었었다. 섀넌이 자신을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뭐였던가.
‘이제 나는 널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설마…….
이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자신이 떠날 때 왜 쫓아오지 않았을까.
대체 왜…….
굳이 검은 늑대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 손에 끌려와야만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절대 내 걱정은 하지 않기로. 네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는 거야.’
“…아.”
한 손으로 제 눈을 덮은 윈터가 짧게 탄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깟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감히 헤아리기 힘든 그의 의중을 자신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지금 시라트에 발을 들일 만한 불멸자는 섀넌뿐이고, 중요한 건 그가 모든 걸 알면서도 스스로 독을 먹고 끌려왔다는 거다.
자신은 뱀파이어들의 깊은 사정 같은 건 모른다. 섀넌이 굳이 저런 위험을 무릅쓴 건 분명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안심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절대 당신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라니.
섀넌은 너무도 불가능한 당부를 제게 하였다.
“…가야 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제 연인이 강해도, 회복력이 멎은 몸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그 몸이 늑대들에게 어떻게 짓밟히고 찢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섀넌의 당부를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네…?”
윈터의 말을 잘 듣지 못했는지, 갈리나가 되물었다. 윈터는 대답 없이 지나치며 급히 상황판을 내려다봤다.
“예전에, 당신이 날 처음으로 이곳에 데려왔을 때 통과했던 터널.”
그의 손끝이 그 산맥을 가로질러 성 안으로 향했다.
“그 터널을 통하면 바로 성벽 안으로 진입할 수 있잖아요.”
터널을 나오자마자 발아래 펼쳐진 민가들과 높다란 석조 성, 얼기설기 이어진 다리와 그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하슬라.
그날의 풍경을 윈터는 아직 생생히 기억했다.
갈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지만 그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나오는 건 까마득한 절벽이고, 일정 이상의 인원이 올라타면 끊어질 것 같은 낡은 다리 하나뿐이에요. 병력을 끌고 거길 지나갈 수는 없어요. 게다가 하슬라의 병사들이 거기까지 진을 치고 있을 확률이 더 높,”
“내가 혼자 갈게요.”
윈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즉시 고개를 젓는 갈리나를 무시한 채,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정문으로 공격을 시작하면 하슬라의 병력도 그쪽으로 집중될 거예요. 그사이에 나는 이 터널로 성곽 안에 진입하는 거고.”
윈터가 상황판의 목각들을 옮겨 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게 더 하슬라에게 접근하기 쉬울 수도 있어요.”
하슬라에게 접근하는 동시에, 섀넌을 최대한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윈터가 급히 검을 챙겨 들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한 건 똑같으니,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하는 게 더 나았다.
그들이 섀넌을 끌고 갈 곳이 어디겠는가.
터널을 나오기만 하면, 하슬라가 있는 성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 윈터를 보던 갈리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자신을 말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윈터가 그녀의 팔을 뿌리치려 하자, 갈리나가 더 단호하게 그 팔을 붙들었다.
“우리가 성문 앞에 당도하면 그때 출발하세요. 그래야 시차가 맞을 것 같으니까.”
갈리나의 명정한 눈이 흔들림 없이 윈터를 마주했다.
* * *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난다는 건데?”
“곧 끝날걸. 하슬라 님께선 일부러 시간을 더 끌고 계시는 거 같긴 하지만.”
바얀이 못마땅한 듯 창살 안에 있는 섀넌을 힐끗거렸다. 그는 여전히 손이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얌전히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언제까지 감시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 것까지 내가 해야 돼?”
“여기 순찰 인력이 죄다 외부로 불려 나가서 완전 비상이야. 그리고 어차피 오는 동안 네가 계속 저놈이랑 붙어 있었다며. 그럼 못할 게 뭐야.”
결국 바얀이 간수의 손에 들린 철창 열쇠를 낚아 챘다. 염병할 새끼가, 불멸자랑 가까이 있는 게 겁나서 그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위층 다 돌고 세 시간 뒤에 다시 올게.”
그가 바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멀어지는 횃불 빛을 노려보던 바얀이 섀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새는 여전히 송곳니가 비어 나와 있었다.
……아직도 내 피가 그렇게 탐나나.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 바얀이 그를 외면한 채 창살에 등을 기댔다.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 감옥은 천장에 맺힌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한동안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일정한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져서, 바얀은 얕은 졸음이 밀려오는 걸 참고 있었다.
“바얀.”
그때 별안간 낮은 음성이 축축한 지하에 울렸다.
갑작스럽게 깨진 침묵에, 노곤한 졸음이 확 물러났다. 바얀은 어쩐지 온몸의 털이 쭈뼛 설만큼 소름이 돋았다.
“목말라.”
옆으로 홱 돌아간 눈을 따라 뒤늦게 고개가 움직였다. 뻣뻣한 목을 돌린 바얀의 시선이 섀넌에게 향했다.
“……목말라.”
또 술을 달라는 소리인가.
바얀이 무심결에 제 허리춤에 걸린 수통을 매만졌다. 조금 전 성에 도착해서 순찰병들에게 새 수통을 받긴 했다.
물론 오는 길에 먹인 술은 인간들이 마시는 위스키였고, 이곳에서 받은 건 시라트의 혼성주였으므로 그가 좋아할지는 미지수였다.
“…바얀.”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갈퀴처럼 청각을 잡아 끈다.
빌어먹을 뱀파이어 새끼……. 아주 종처럼 부려 먹네. 바얀이 이를 악문 채 열쇠로 창살 문을 열었다.
수통에 들어 있는 술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자 섀넌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갈증이 심하긴 한 모양이다.
풀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보이는 빗장뼈와 오목하게 고인 그림자가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였다.
바얀이 무릎을 굽혀 그의 곁에 가까이 앉았다. 그가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섀넌이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살짝 앞으로 나온 붉은 혀가 제 입으로 떨어질 술을 기다리며 입술을 핥았다.
그걸 보던 바얀은 저도 모르게 그와 똑같이 혀를 내밀었다가, 이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술이 부어지길 기다리며 움직이는 목울대와 벌어진 입속의 붉은 속살이 바얀의 눈에 어쩐지 짙게 들어찼다.
바얀이 떨리는 손으로 수통의 마개를 열었다. 그러나 수통이 기울어지기도 전에 바얀의 얼굴이 그의 입으로 먼저 다가갔다.
한 번만…,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데.
고개를 내밀고 있던 섀넌의 코앞까지 온 바얀의 뒤통수로, 별안간 우악스러운 손이 휘감겼다.
“윽…!”
그의 머리채를 움키는 동시에 눈을 가리고 있던 크라바트를 벗겨 낸 섀넌이 싱긋 웃었다.
부어터진 입술과 콧잔등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바얀은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저 바얀은 지금껏 시라트에 살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게 세공된 붉은 원석 같은 눈을 보고 감탄했다.
아…, 입에서 새어 나온 탄성은 이내 고통스러운 단말마로 이어졌다. 그의 뒤통수를 틀어쥔 채 목에 이를 박아 넣은 섀넌이 감미로운 신음을 흘리며 피를 빨았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당장 타는 목을 축이는 데 맛을 가릴까.
* * *
광활한 설원 위에 우뚝 선 성곽은 마치 세상을 절반으로 뚝 나눈 것처럼 높고 장대했다.
그 거대한 성벽을 앞에 둔 갈리나의 군대는 너무도 초라했다.
본래였다면 훨씬 많은 정예군이 함께했겠지만 지금 갈리나가 이끄는 군대는 고작해야 3백 남짓의 기마병과 2백 남짓의 반인반수 보병, 백 남짓의 늑대들뿐이었다.
둥, 둥, 적의 침입을 알리는 북소리가 성곽 안쪽에서 울렸다.
매복할 참호도 없이 그저 희게 펼쳐진 평원 위에 도열한 그들을, 성곽의 늑대들은 진즉부터 발견한 상태였다. 활시위를 당긴 채 대기하고 있는 궁수들의 불화살이 성곽 위를 빼곡하게 둘렀다.
갈리나가 말의 갈기를 쥐었다. 성곽으로 접근하면 머리 위로 저 화살 비가 쏟아질 것이다.
무기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신들의 몸체만 한 방패를 든 군사들의 시선이 갈리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위로 들자, 그 곁에 있던 기수가 게자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기치를 번쩍 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죽음을 각오한 기합과 설원을 때리는 말발굽 소리가 물결치며 광풍처럼 일대를 휩쓸었다.
수백 발의 화살 비가 불의 궤도를 그리며 검은 창공을 날았다. 물결처럼 달려나가는 게자르 군사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방패가 일제히 뒤덮였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촘촘히 뒤덮인 금속 방패 위로 화살이 깡, 깡, 내리꽂혔다.
선두에 있던 갈리나의 병력이 끊겨 있는 도개교를 훌쩍 뛰어넘어 성문에 격돌했다.
윈터는 그 모든 광경을 서쪽 외곽 절벽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성문에 부딪히는 갈리나의 군대는 멀리서 바라보면 더욱 하찮고 무모해 보였다. 달걀로 바위를 깬다는 비유로는 부족할 만큼.
성곽 위쪽에선 다시 화살을 장전해 그들을 향해 쏘아 댔으나, 다행히 조금 전처럼 압도적이진 않았다.
아마도 성곽 안쪽에서 검은 늑대들과 함께 수성전에 참여한 아군들이 품에 숨겨 둔 반란군의 깃을 드러내고 그들의 수비 대열을 흐트러뜨린 모양이었다.
간헐적으로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불화살과 개미 떼처럼 성벽으로 몰려드는 병력을 잠시 지켜보던 윈터가 말의 갈기를 쥐고 방향을 틀었다.
이제 자신은 터널로 향해야 할 때였다.
* * *
하늘을 뒤덮은 붉은 눈 까마귀의 울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 소리가 깊은 터널 안까지 뚫고 들어왔다.
일 년 전 갈리나와 걸었던 터널을, 이제 윈터는 열댓 명의 병사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갈리나가 그를 혈혈단신으로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무척 오래 걸린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도 터널이 끔찍이도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천장이 급격히 낮아지는 구간이 있어 윈터는 거의 말 위에 바짝 엎드린 채 긴 터널을 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윈터는 끝까지 몸을 변화시키지 않고 인간의 몸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너른 설원에서의 전투가 아니라 좁은 외길에서의 전투가 이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드디어 찬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저 너머에 아군이 있을지 적군이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윈터 님.”
같이 달리던 병사들 몇이 말 갈기를 쥐어 당기며 속도를 늦췄다. 윈터도 그들도, 앞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각자가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윈터 또한 허리춤에 찬 장검을 뽑았다. 아직 한 번도 피를 묻히지 않은 그의 장검은 지난가을부터 내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였다.
이내 시야에 터널 끝이 들어왔다. 그 앞에 있던 반인반수 형상의 검은 늑대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제 막 다리에 연결된 밧줄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윈터를 발견한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야, 저길 봐!”
윈터가 이를 악물고 말의 옆구리를 차며 쏘아져 나갔다. 성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다. 여기까지 와서, 코앞에 목적지를 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윈터의 검이 가장 앞에 있는 자의 목을 꿰뚫었다. 늘 대련만 해 왔던 그의 검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쓰는 순간이었다.
짚 인형을 뚫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무른 살갗과 딱딱한 뼈가 걸리는 느낌이 검신을 통해 윈터의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절벽 앞에서 기겁하며 앞발을 쳐드는 말의 갈기를 움킨 채, 윈터는 첫 살인의 감상을 느낄 틈도 없이 곧바로 검을 그어 내렸다.
그 뒤로 윈터의 병사들이 잇따라 짓치며 터널 끝 절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쇠가 마찰하는 소리와 고함이 창천하던 절벽에서, 검은 늑대 하나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칼날이 박힌 철퇴가 붉은 머리에 꽂히고, 윈터가 휘두르는 장검이 곧바로 철퇴를 든 검은 늑대의 팔을 갈랐다.
한쪽 밧줄이 끊어진 다리가 휘청였다. 급히 반대쪽 밧줄도 끊으려 단도를 쥔 손이 눈 깜짝할 새 절단되어 피를 내뿜었다.
“으아악!”
손이 잘려 고함을 지르는 검은 늑대의 가슴팍을 발로 차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윈터가 말 갈기를 잡은 채 뒤를 돌아봤다. 제 병사들은 아직 검은 늑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병사 하나가 얼른 가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얼기설기 이어진 나무판자에 몇 발 디딘 말이 주춤하며 펄펄 날뛰었다. 한쪽 밧줄이 끊어져 심하게 휘청이는 다리 위를 디뎠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윈터가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다리 위를 내달렸다. 자신을 지켜 줄 아군들은 많지만, 이곳에서 섀넌을 지켜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즈음, 위태롭게 흔들리던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윈터가 뒤를 돌아보자 검은 늑대 하나가 목이 졸린 채 다리 위 밧줄을 끊고 있었다.
윈터의 병사가 쥔 단도가 그의 목을 긋는 속도보다, 검은 늑대가 쥔 칼날이 밧줄을 끊는 게 먼저였다.
윈터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휙 꺼졌다. 끊어진 다리를 붙잡은 그의 몸이 아찔한 허공을 가로지르며 절벽에 콱 부딪혔다.
“윽.”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아래는 설풍이 휩쓰는 까마득한 허공이었다. 떨어지면 저 하얀 눈밭에 추락해 그대로 온몸이 부서질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본 윈터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몸을 끌어올렸다. 축축한 돌 위에 힘겹게 팔을 걸치고 긴 숨을 내뱉는 그의 입에서 흰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부딪힌 충격으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반년 내내 아즈낙에게 배웠던 전투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빌어먹을 다리…….
처음 시라트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은 이 낡은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상대의 칼에 맞아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가능성에 추락사도 넣어야 하지 않을까.
겨우 절벽 위로 올라선 윈터가 건너편을 돌아봤다. 살아남은 아군들 몇이 그를 지켜보다가, 완전히 안전한 곳으로 올라서자 그제야 십 년 감수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다리는 끊겼고 성곽 안으로 들어온 자는 윈터 하나뿐이었다. 그들과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윈터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제 뒤를 지켜 준 아군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윈터는 섀넌에게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 * *
툭, 앙상한 손이 미세하게 경련하며 차디찬 지하 감옥 바닥에 떨어졌다. 마디가 굵고 손톱이 길게 비어져 나온 반인반수의 손이었다.
“하아…….”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기울인 섀넌이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흡혈 직후의 가벼운 흥분으로 눈가가 잘게 떨려서, 그가 손바닥으로 제 눈을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제 팔과 몸을 내려다보며 상처를 확인했다.
가장 깊었던 옆구리의 상처가 이제야 다 나았다. 찢어졌던 팔과 다리도 깨끗해졌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붉게 얼룩진 셔츠만 아니면 누구도 그가 다쳤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았다.
…내 노예 새끼가 다른 건 몰라도 제약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검은 늑대들은 불멸자의 회복력을 멎게 하는 독을 자신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자부했겠지만, 기실 그들보다 더 까마득한 과거에 처음으로 그 독을 만들었던 자는 러셀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러셀은 그 해독제 또한 만들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의 해독제 효과가 생각보다 좀 느렸다는 거다.
시라트에 들어서는 동시에 혀 밑에 숨겨 두었던 캡슐을 깨물었는데, 그 효과가 이 깊은 지하까지 내려와서야 나타나는 바람에 섀넌은 예기치 못하게 시간을 지체하는 중이었다.
지하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을 발로 대충 밀며, 그가 빠르게 출구를 찾았다.
어디로 나가야 하지.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아마 이동해 온 방향으로 봐선 남쪽 관문을 통과한 듯하고, 남쪽에서 자신을 가둬 둘 만한 곳이라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성의 지하 수용소.
아까 듣기로 전란 중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윈터와 하슬라의 군대가 대치 중인 모양이고.
시라트 내부의 지도를 본 바 있지만 지하 수용소나 성 내부의 구조까지는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 탓에 섀넌은 아까부터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좆같이도 지어 놨네, 시발.”
촌각을 다투는 와중에 이런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빌어먹을 지하는 대체 어디까지 파놓은 건지,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마주치는 늑대들 때문에도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저 앞쪽에서 또 늑대들의 기척이 들렸다. 섀넌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 뭐야.”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선 늑대들이 섀넌을 발견하고 주춤했다.
“저, 저거.”
누군가가 섀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황했다. 옷차림새, 외형적인 특성만 봐도 섀넌이 누구인지 모를 수 없었다.
“……배, 뱀파이어잖아?”
“빨리 다른 층에 있는 새끼들한테 알려, 얼른!”
저들끼리 다급하게 지껄이는 소리에,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시끄럽게 소리쳐.”
흰 얼굴이 검은 늑대의 코앞으로 휙 다가왔다.
“으아악!”
뒤로 넘어질 듯 주저앉으려는 그의 털 망토를 움켜 당긴 섀넌이 사납게 을렀다.
“빨리 날 지상으로 데려가.”
* * *
성곽 안쪽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하늘에서 울어 대는 붉은 눈 까마귀 떼의 소음이 더 이상 귀에 인지되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민가는 불에 타고, 하슬라가 있는 성과 그 별채 주변은 칼 부딪는 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가 피처럼 붉게 흐드러졌다. 여기저기에서 삶과 죽음이 갈리고 뒤엉켰다.
윈터는 그 아비규환 속에서 수도 없이 목이 날아가거나 배가 갈라지고 내장을 쏟아 내는 시신을 봐야 했다. 그런 광경에 딱히 놀란 건 아니지만, 그 시신들이 제 검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조금 낯선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감상을 느낄 마음의 여유는 있지 않았다.
건물끼리 이어진 회랑을 빠르게 달리며 윈터는 저를 발견하고 뭐라 소리치는 검은 늑대를 사선으로 베었다. 처음 몇 명까지는 벨 때마다 숫자를 셌었는데, 이제 자신이 죽인 사람의 수가 몇 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뒤섞인 늑대들은 얼핏 보기엔 적군과 아군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건 반란군의 기를 두른 병사들보다 검은 늑대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뿐이었다.
휙! 윈터의 콧잔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화살이 바로 옆 목제 기둥에 콱 박혔다. 즉각 고개를 숙이는 윈터의 머리 위로 연달아 화살이 날아왔다.
윈터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을 화살이 그의 머리 위 기둥에 꽂혀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다시 제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몸을 숙이며 코너를 돈 그가 바로 앞에 있는 석조 성을 바라봤다. 제가 머무르던 별채였다.
일단 저기까지만이라도 가면…, 별채와 본관이 연결되어 있으니 어떻게든 섀넌에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윈터에게 달려들었다.
“윽!”
난간에 등을 부딪치며 주저앉은 윈터가 제 앞에 있는 검은 늑대를 바라봤다. 그가 허리춤에서 낫처럼 휜 곡도를 뽑으며 윈터에게 다가왔다.
“우리 예쁘장한 자하카 왕자님께서 여기 계셨네?”
그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치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윈터 자하카가 여기에 있다―! 다들 여길 보라고―!”
하하하하, 웃는 소리가 너무 커서 까마귀의 울음을 이길 정도였다.
윈터가 손에 쥔 장검을 들어 올리려다가, 문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남자가 그의 장검을 지그시 밟고 있는 탓이었다.
“왜, 우아하게 검이라도 휘두르시게?”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그에게 상체를 숙였다. 날카로운 곡도의 날이 윈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윈터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소매 안쪽에 있던 작은 단도를 조용히 쥐었다.
그리고 남자가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었을 때, 그의 단도가 순식간에 남자의 목을 그었다. 은백색 머리칼과 이마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제 위로 쓰러지는 시체를 발로 차 밀어낸 윈터가 그 밑에 깔린 제 검을 주워 들 틈도 없이 달아났다. 이미 남자의 고함을 들은 검은 늑대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물론 반란군 또한 윈터를 발견한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일 순위로 보호해야 할 주군이 혈혈단신으로 이 아수라장에 들어와 있는 걸 본 그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검은 늑대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들은 윈터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윈터가 좁은 통로를 빠르게 내달리며 눈에 보이는 화로와 집기들을 있는 대로 갖다 던졌다.
“덩치도 큰 게,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간다니까.”
제 앞으로 쓰러진 화로를 넘어서며 검은 늑대 하나가 씩 웃었다. 긴 창이 윈터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두 손으로 창대를 탁 잡은 윈터가 그대로 남자를 확 밀어붙였다.
“으아악.”
뒤로 크게 나동그라지는 남자에게 우르르 밀린 늑대들이 이내 다시 집요하게 윈터에게 들러붙었다. 무의식중에 검을 고쳐 쥐려던 윈터는 제 손에 들린 게 아주 작은 단도 하나뿐이라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
검은 늑대들이 그 꼴을 보고 조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큰 장창을 위협하듯 윈터에게 훅, 훅, 휘두르는 자도 있었고, 사냥감을 몰 듯 큰 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악다문 잇새로 하얀 입김이 훅 뿜어져 나왔다. 제 코앞으로 휘둘러지는 창을 피해 뒷걸음질 치던 윈터가 이제 막 몸을 변형시키려 할 때였다.
별안간 지축을 흔드는 울림이 맹렬하게 다가왔다.
수십의 군마가 땅을 때리고 달려드는 소음은 까마귀 울음소리로 둔감해진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그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이쪽으로 돌진하는 중인지는 아주 잘 보였다.
가장 선두에서 대검을 아래쪽으로 내린 채 달려오는 갈리나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랑에 있던 검은 늑대들이 거의 자신들을 들이박을 기세로 달려드는 말을 피해 밖으로 뛰어내리는 동시에, 갈리나의 군마가 목조 난간을 막무가내로 부수며 들이받았다.
말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듯 내려온 갈리나가 곧바로 윈터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내가 너무 늦었어요?”
등 뒤에서 한숨이 들렸다.
“…아뇨.”
“얼른 가세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갈리나가 윈터의 손에 달랑 쥐어진 단도를 바라봤다. 그녀가 제 대검을 윈터에게 넘겼다.
“이거 가져가요.”
“그럼 당신은,”
“난 됐어요.”
제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은 갈리나가 숨을 몰아쉬며 낮게 말했다. 사방에서 뒤엉켜 싸우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그들이 대화를 나눌 만한 틈은 길지 않았다.
“…고마워요.”
윈터의 말에 그와 힐끗 눈을 마주친 갈리나가 애써 가볍게 대꾸했다.
“거봐요. …전부터 대검이 더 잘 어울린다고,"
그들에게 달려든 검은 늑대의 포효가 갈리나의 뒷말을 덮었다. 뒤로 휙 물러난 갈리나가 곧바로 몸을 틀어 늑대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녀가 뒤를 돌았을 땐, 이미 윈터는 저 앞에서 검은 늑대들을 베며 달려가고 있었다. 갈리나가 제 주위에 있는 아군들에게 빨리 그를 엄호하라고 소리쳤다.
* * *
쾅! 연회장의 커다란 철문이 크게 들썩였다.
그 안에 모여 있던 장로들이 그 소리에 움찔 떨며 목을 움츠렸다.
연단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하슬라는 미동도 없이 그 문을 응시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음의 까마귀 울음소리와 더불어 문밖에서 들리는 비명과 쇳소리가 장로들을 두렵게 하는 것 같았다.
본보기처럼 중앙에 끌려 나와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은 밖에서 날뛰는 반란군 세력의 장로들이었다.
저들은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저 문을 뚫고 들어오는 이가 갈리나나 윈터이길 바라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커다란 뿔잔에 담긴 술을 마시며, 하슬라가 느리게 말했다. 찢어지는 까마귀 울음 사이로 그의 저음은 달갑게 느껴질 정도로 장로들의 귀에 확 꽂혔다.
문을 향해 돌아가 있던 장로들의 고개가 일시에 그를 향했다. 검은 늑대들에게 끌려와 이곳에 갇힌 채 며칠을 보냈는데, 어느덧 또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장로들은 피로와 극도의 긴장으로 몹시 수척해졌다. 그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시종들이 어둑해진 연회장 벽면 곳곳에 횃불을 걸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장로들은 노쇠한 눈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장로 한 명당 두 명의 검은 늑대들이 서 있었다.
물론, 덜미에 칼날을 들이댄 채였다.
“반란군의 창칼을 내리고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는 그대로 안전히 내 옆자리로 모시겠어.”
팔을 벌린 하슬라가 연단의 양옆에 길게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두꺼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촛불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뭐, 계속 싸우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봤자 떨어지는 건 쓸모없는 노인네의 머리뿐이니까…….”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 가문은 반역과는 상관없…!”
맺지 못한 말끝에 질척한 피가 솟구쳤다.
누군가의 머리가 돌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장로의 주름진 얼굴에 피가 튀었다. 제 얼굴에 튄 피를 닦지도 못한 채,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떨었다.
하슬라가 잔을 내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 그딴 쓸모없는 말을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
“내게 충성을 맹세해. 반란군을 항복시키겠다고 말해. 그거면 돼.”
벌써 세 명의 장로가 목숨을 잃었다. 살아 보려 어떻게든 입을 놀리다가 죽은 이들이었다. 장내는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하슬라는 그 적요가 몹시 흡족했다.
발밑의 지하에는 회복력을 잃어 걸레짝 같은 몸뚱이를 웅크린 채 떠는 뱀파이어가 있고, 이 연회장엔 쓸모없이 입만 산 늙은이들이, 저 밖에는 검은 늑대들의 칼에 휩쓸리는 반란군들이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순간인가.
고막을 괴롭히는 까마귀 울음소리조차 감미롭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연회장의 철문이 다시 한 번 크게 들썩였다. 턱을 살짝 든 하슬라가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일을 구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멀거니 문짝에 시선을 걸어 두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참 뒤 새까만 밤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때 그들을 찾아온 것은 하슬라가 예상한 검은 늑대도, 윈터의 군대도 아니었다.
* * *
…도대체가, 훈련 내내 배운 건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상황판 위에 검고 흰 목각을 올려놓으며 상상했던 모든 건 우스운 체스일 뿐이었고, 전쟁은 그저 병력과 병력이 부딪치는 머릿수 싸움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숱하게 목숨 빚을 지며 단 몇 초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상황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윈터는 별채 건물의 외곽을 나선형으로 휘감은 계단을 필사적으로 뛰어 올라갔다. 겨우 합류했던 갈리나와는 아수라장에서 진즉 갈라졌고, 윈터를 엄호하던 다른 아군들은 이미 죽었다.
윈터는 팔을 길게 가로지른 상처를 지혈도 하지 못한 채 좁은 계단 난간을 잡고 있었다. 아래에서 그를 쫓아 올라오던 검은 늑대들이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어딜 그렇게 올라가셔?”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아니면, 본관으로 이어진 다리 위에서 장렬하게 전사라도 하시려고?”
타고난 체급 차이로 나름 잘 버티고는 있었으나, 평생을 싸움만 하며 살아온 늑대들과 윈터의 격차는 너무도 컸다.
늑대의 본신으로 화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계단 폭이 너무 좁았다. 드넓은 설원이었다면 상황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날이 둥글고 커다란 검이 윈터의 머리를 반으로 가를 듯 코앞에서 내리꽂혔다.
부러진 대검을 쥔 팔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윈터가 제게 짓쳐 드는 검을 겨우 맞받아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저릿한 통증이 스몄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펄펄 날뛰었다.
윈터가 고개를 살짝 돌려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아래에선 아직도 검을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창천하고, 횃불이 넘어지는 소리와 그로 인해 번진 불길이 섬유와 살갗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찰나의 실수로 자신 또한 언제든 저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모든 소리가 멀어지며 눈앞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 앞에서 웃는 검은 늑대들조차 아주 느리게 보였다.
윈터의 시선이 잠시 남쪽의 먼 허공에 걸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석양이 가로지른 하늘을 뒤덮은 까마귀들 사이로 녹색 신호탄의 연기가 소리 없이 궤도를 그리고 올라갔다.
까마귀의 울음이 찢어질 듯 계속되는 와중에, 아까부터 남쪽 관문에서 검은 늑대들이 연달아 신호탄을 계속 터뜨려 대는데 대체 저게 뭔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 저게 뭐면 어떤가.
눈앞에 죽음이 다가와 있는데.
계단 폭이 좁아 한 번에 한두 명만을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다행이지만, 제 앞에 있는 늑대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이다.
자신은 신념을 위해 검을 든 것도, 대군과 싸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섀넌이 있는 곳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것조차 이렇게나 어렵다니…….
“……역겨운 새끼들.”
한숨과 함께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그 낮은 목소리에, 가장 앞에 있던 남자의 표정이 사납게 일변했다.
“뭐…?”
윈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혐오감과 경멸을 여과 없이 입 밖에 내었다. 그건 정말 무념무상으로 튀어나오는 탄식과 같았다.
“역겹다고. 씨발…, 빌어먹게 냄새나고 미개한 새끼들.”
남자의 승모근이 바짝 곤두섰다. 찰나 살기가 이글거리던 얼굴에 별안간 다시 웃음이 터졌다.
“불멸자 흉내나 내는 잡종 주제에, 빨리 뒈지고 싶어서 아주 환장하셨나 봐? 응?”
그가 윈터의 코앞으로 도끼를 훅, 훅, 휘둘러 대며 다가왔다. 윈터가 위협적으로 스치는 도끼를 피해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근데 이걸 어쩌나, 널 지켜 줄 그리말디는 이제 없는데? 그 넝마 같은 몸뚱이는 지금쯤 걸레짝처럼 온갖 연놈들한테 돌려지고 있을걸.”
“…….”
한 번 더 고개를 기울여 도끼의 날을 피하는 윈터의 눈에 찰나 살기가 스쳤다. 검은 늑대가 입가를 길게 늘이며 사납게 웃었다.
그럴 리 없어…, 섀넌이 벌써 그렇게 됐을 리 없어. 절대…, 그런 일은…….
윈터는 이를 악문 채 뒷걸음질 쳤다. 저런 도발에 함부로 넘어가선 안 된다. 그는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최상층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올라가면, 하슬라가 있는 본관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다.
거기까지만 가면 돼. 거기까지만…….
“빨리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건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야.”
윈터가 허리춤에서 불꽃탄을 꺼내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그것을 툭 떨어뜨렸다.
안의 심지가 발화되어 흰 연기를 내뿜는 작은 대나무 통이 검은 늑대들의 다리 사이로 톡톡 굴러떨어졌다.
이내 그들의 다리 사이에서 짙은 불꽃이 콱 터졌다.
“으악!”
작은 폭발의 충격이 좁은 돌계단을 뒤흔들었다. 별채의 외벽을 타고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운 나쁘게 그 바로 앞에 있던 이들이 기겁하다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그들 사이에 피어올랐다.
“씨팔, 그냥 불꽃이야! 진정해!”
그저 조금 놀라게 하고 시야를 방해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타격을 주지 못하는 불꽃은 순간의 충격만을 남기고 금세 꺼져 버렸다. 검은 늑대들이 흰 연기 사이로 무작정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윈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 이 쥐새끼 같은…….”
검은 늑대들이 욕을 내뱉으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 *
주름진 손끝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간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해 일어서는 갈리나를 병사 하나가 얼른 부축했다.
“…윈터 님은, 윈터 님은 어디에 있어.”
이미 한계까지 지칠 대로 지친 갈리나가 그 병사의 가죽 견갑을 거칠게 휘어잡으며 물었다.
“우리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별채 쪽으로 몰리셨습니다.”
“그런데 갈리나 님, 아까부터 남쪽 관문에서 신호탄이 계속,”
병사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갈리나에게 푹 엎어졌다. 그의 얼굴을 관통한 도끼를 뽑아낸 검은 늑대가 갈리나를 보고 입술을 비틀었다.
“배신자 갈리나가 여기 있었네. 네년은 하슬라 님께 끌고 가야겠다.”
검은 늑대가 입가를 길게 늘이며 갈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갈리나가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손이 단검을 움켰다.
그때, 별안간 검은 늑대의 몸이 옆으로 퍽 기울었다.
갈리나는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눈앞의 상황에 그저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새까만 머리가 허리까지 구불구불 내려온 여인이 그의 위에 올라타 목을 콱 틀어쥐었다. 바닥에 머리가 으스러지도록 여러 번 짓이긴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성가셔.”
그 긴 머리가 귀찮다는 듯 위로 틀어 올리던 여자의 시선이 문득 갈리나를 향했다.
놀란 갈리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새빨간 입술을 혀로 핥으며 웃었다.
갈리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남쪽 관문에서 아까부터 그토록 신호탄을 쏘아 댄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까마귀들이 계속 울고 있어서…, 아무도 이들의 침입을 모를 테니까…….
“얼른 일어나, 이년아. 네가 지금 이럴 때야?”
희고 가느다란 손이 갈리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얼결에 그 손을 단단히 맞잡고 일어선 갈리나는, 이미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다른 사내의 이름도.
그들은 그리말디와 케인타운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다른 불멸자들이었다.
“윈터 님이 저쪽 별채에 계세요…!”
갈리나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짧게 웃음을 흘리며 멸시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너희들 자하카는 너희들이 알아서 지켜야지. 난 내 친구가 더 중요해서, 이만.”
“엘ㄹ…!”
갈리나가 뭐라 애원하기도 전에,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갈리나가 지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의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귀를 괴롭히던 까마귀의 소음이 멀어지고, 단 두 명의 검은 머리 불멸자가 그들과 같은 머리 색을 가진 검은 늑대들을 잔혹하게 가르고 찢는 것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거대한 재난이 닥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불멸자의 출현에 놀란 아군들이 그 규환 속에서 황망하게 달아나는 게 보였다.
현저히 적은 수로도 죽음을 불사하고 용맹하게 검은 늑대들과 맞섰던 군사들이, 고작 두 명의 뱀파이어를 보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두 불멸자는 아군 적군 구분 없이 제게 달려드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가르며 하슬라가 있는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 곁을 스치는 반란군 하나를 낚아채듯 붙잡은 갈리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군들을 모조리 별채로 보내. 이제 우리 임무는 바뀌었어.”
“가, 갈리나 님,”
“윈터 님을 안전하게 엄호하는 게 너희들이 할 일이야.”
두려움과 당황으로 굳어 있던 병사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내팽개치듯 밀친 갈리나가 아군들을 발견하는 족족 별채로 가라고 사납게 다그치며 본관으로 뛰어갔다.
* * *
바깥은 이미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연회장 안은 그만큼 더 밝아졌다.
벽면의 횃불이 홧홧하게 일렁이는 그 안에서, 장로들은 부서질 듯 흔들리면서도 끝내 열리지 않는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때, 이제 막 지하에서 올라온 듯한 수용소 간수 하나가 헐레벌떡 하슬라에게 달려갔다. 온갖 소음에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늑대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몰렸다.
“하, 하슬라 님…! 도망,”
“지하를 대체 얼마나 깊게 파놓은 거야, 시발.”
난생처음 듣는 부드러운 억양과 나직한 목소리에, 미간을 좁힌 하슬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둘은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슬라.”
“그ㄹ…!”
그러나 하슬라는 끝내 그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순식간에 다가간 섀넌이 그의 목을 틀어쥔 탓이었다.
코앞으로 흰 얼굴이 확 들이쳤다. 새빨간 살기가 이글이글 흘러내리는 눈이 그를 응시했다.
파고드는 듯 날카로운 웃음이 섀넌의 입술에 걸려 있었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눈앞의 믿을 수 없는 존재를 경악한 채 바라봤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선 별안간 나타난 불멸자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살인귀였다.
장내에 있던 이들은 모두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찬탄을 동시에 느꼈다.
저들을 마주치면 무조건 홀린다고 했던가.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밤처럼 새까만 흑발이, 이 와중에도 시선을 잡아 끄는 건 몹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피식자를 매혹하는 것에 특화된 저들의 태생적인 권능이리라.
섀넌이 하슬라의 목을 움킨 채 그를 들어 올렸다. 도저히 의자에서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하슬라의 육중한 몸이, 저 가느다란 손에 우습게 달랑 들어 올려지는 광경을 늑대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봤다.
그의 손에 딸려 올라가며 발버둥 치던 하슬라가 몸을 변형시켰다.
골격이 툭툭 벌어지고 두꺼운 살덩이는 더 크게 부풀었다. 검게 색이 죽은 긴 손톱이 비어져 나와 섀넌의 손등과 팔을 마구 할퀴었다. 그어지는 경로를 따라 붉게 파인 상처가 순식간에 다시 아물며 사라졌다.
쾅―! 하슬라의 몸이 허공을 휙 날아가 연회장 한쪽으로 고깃덩이처럼 처박혔다.
별안간 무서운 속도로 내던져진 그의 몸에 휩쓸린 늑대들 몇몇이 함께 나동그라지고, 그 충격에 부서진 석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섀넌이 순식간에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귀신 같은 움직임에, 장로들이며 검은 늑대들이며 할 것 없이 그가 있는 반대편으로 기어가거나 달아났다.
방금까지 서로 적대관계였던 늑대들은 마치 불가항력의 재해를 맞닥뜨린 것처럼 연회장 한구석에 몸을 딱 붙인 채 덜덜 떨었다.
하슬라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킨 섀넌이 벽면에 걸린 횃불에 그대로 쾅 내리찍었다. 살 타는 냄새와 하슬라의 비명이 창천했다. 그의 얼굴 반쪽 살갗이 녹아 뚝뚝 흘러내리고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그의 손에서 놓여나자마자 바닥에 널브러진 하슬라가 제 얼굴을 감싸며 거친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소리는 마치 평소 그의 웃음소리와 닮아 있어서, 어쩐지 장로들은 괴괴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하슬라는 한쪽 눈을 완전히 잃은 듯했다. 눈을 꽉 누른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쏟아져 나왔다.
“윈터는 지금 어디에 있지?”
섀넌이 하슬라의 앞섶을 거칠게 움켰다. 괴로운 비명을 지르던 하슬라의 입이, 어느 순간 헤죽 벌어졌다.
“이거 어쩌나…, 너무 늦어서.”
비명은 곧 끅끅거리는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그를 보던 섀넌의 눈이 일그러졌다.
앞니가 다 부러지고 피에 흥건히 젖은 입은 점점 더 찢어질 듯 벌어졌다. 절반이 녹아내린 얼굴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이 되었다.
“윈터 자하카는…, 지금쯤 벌써 죽었을걸.”
뭉개진 발음과 입안의 피가 들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 여태 사지 멀쩡히 살아있겠냐고, 응? 안 그래?”
으흐, 흐흐흐, 하슬라가 해괴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섀넌의 얼굴이 점점 더 짙은 의혹으로 일그러지던 그때, 지독히도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둔중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밤의 찬 공기가 열기 가득한 연회장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그리말디!”
열린 문 사이로 파고든 설풍이 무섭게 휘돌며 벽면의 횃불을 모조리 꺼뜨렸다. 갈리나의 절박한 음성이 석벽에 쩌렁쩌렁 부딪혔다.
고개를 돌린 섀넌이 카일과 엘리자베스, 그리고 갈리나를 차례로 훑으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뭐야, 섀넌? 멀쩡하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섀넌의 시선이 단번에 갈리나에게 꽂혔다.
“하슬라는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당신은 별채로 가서 윈터 님을 찾…!”
그가 갈리나의 앞으로 휙 다가갔다. 육안으로는 그 잔상조차 좇을 수 없을 만큼 신묘한 움직임에 소름이 끼친 갈리나의 몸이 바짝 굳었다.
망령처럼 허여멀건 얼굴에 기이한 광기가 스쳤다.
“너, 윈터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칼날 같은 살기가 조여드는 목소리에 갈리나는 숨을 멈췄다. 새빨간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그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쥐어짰다.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 두었어요.”
갈리나의 앞섶을 움킨 섀넌이 그녀를 벽으로 순식간에 밀어붙였다. 벽에 뒤통수가 세게 부딪힌 갈리나가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끝까지 곁에 붙어 있었어야지. 애를 데려갔으면 그 정도는, …빌어먹을!”
그녀의 몸이 스르륵 아래로 허물어졌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이 사라진 탓이었다.
* * *
덜덜 떨리는 손이 옆구리를 꽉 눌렀다. 울컥 배어 나온 피가 손가락 새로 줄줄 흘러내렸다.
극한의 상황에 몰릴수록 윈터의 시야는 점점 더 맹목적으로 좁아졌다. 오직 섀넌에게 닿는 것만이 그의 전부인 것처럼, 다른 길이나 방법을 생각할 만한 사고가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갈리나에게 받은 대검은 부러져 버린 지 오래였고, 윈터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할 정도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검은 늑대들이 본관으로 연결되는 이곳 흔들다리는 끊어 놓지 않았다는 거다.
냉랭한 설풍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섞여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찢어진 상처 위로 따가운 눈 알갱이가 내려앉고, 윈터는 단단한 땅을 딛고 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힘이 풀린 걸음으로 위태로운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다.
어쩐지, 이 모든 발악이 이미 다 소용없게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섀넌의 앙상한 몸이 떠올랐다.
차마 닳아 버릴까 손대는 것조차 애달팠던 그 작고 마른 몸이 결국.
넝마가 되었을까. 정말…, 그렇게 되었을까.
…그 몸이 더러운 것들에게 짓밟히고, 걸레짝처럼, …씨발, 돌려지고…….
조금 전 검은 늑대들이 함부로 지껄여 댔던 말이 귓가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 환청은 날카로운 장창이 되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미 섀넌이 시라트에 들어온 지 반나절이 한참 지났다. 자신들의 병력은 너무 적었고, 하슬라가 있는 연회장의 철문은 단단했으며, 그 안에 있을 섀넌에게 자신이 닿기엔…….
자신은 너무도 부족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정말…,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윈터는 그럼에도 관성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어떻게든 섀넌에게 닿아야 한다. 그를 한 번은 봐야 했다. 그를 한 번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그가 아득하게 꺼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건너편 본관에 거의 다다랐을 즘, 허리가 굽고 깡마른 실루엣을 마주했다.
“……카힌.”
다른 검은 늑대들과 함께 오지 않고 그가 홀로 있는 게 이상했다.
“꼴이 아주 우습네.”
뒷짐을 진 채 다리 끝에서 윈터를 가만히 응시하는 카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원래 소용없는 일에 끝까지 매달리는 타입이었나 보지?”
망가진 성대로 내는 목소리는 머리 위의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몹시 작았지만, 윈터는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섀넌 어디에 있어.”
그 질문을 듣는 카힌의 얼굴에 강한 희열이 차올랐다.
“십일 년 전에 그리말디가 그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 윈터는 어디에 있냐고.”
지금은 그와 반대의 상황이 되니 카힌은 매우 짜릿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난 그때도 지금도 너희들이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줄 거야.”
당장 달려가 그의 멱을 움키고 싶었지만, 윈터는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출혈 때문인지 눈앞이 자꾸만 부옇게 꺼지고 판단력이 흐려졌다.
카힌이 그런 그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불멸의 권능이 없는 뱀파이어의 몸뚱이는 하찮기 그지없더군.”
난간을 겨우 붙잡은 채 몇 걸음 나아가던 윈터의 무릎이 휙 꺾였다. 다시 힘을 주어 일어나는 윈터를 보며, 카힌이 담담하고 느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걸레짝 같은 몸뚱이로도 성깔은 여전하던데. 당연히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카힌이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어 다리와 연결된 밧줄을 슥슥 베었다.
“사지를 잘라서 바다에 던져 버렸어. 마지막 남은 다리 하나를 자를 땐 거의 울던데…….”
자꾸만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카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을수록 머릿속에 저절로 펼쳐지는 끔찍한 환영이 심장을 부술 듯 내리치고 짓이겼다.
아까부터 섀넌의 냄새가 났던 이유가 이거였나. 그를 만진 카힌에게서 나는 냄새였나.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일까.
윈터의 시선이 다리 아래의 망망대해로 향했다.
……아.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섀넌도 구하지 못했고 하슬라도 죽이지 못했으며, 그저 아주 한심하게…, 한심하게 발악만 하다 이렇게 끝날 터다.
날카로운 통증이 저미는 온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사무쳤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 결국 양쪽 무릎을 툭 디딘 채 주저앉은 윈터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껏 섀넌은 숱하게 자신을 보호해 줬는데, 자신은 고작 단 한 번도 그를 구해 내지 못해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
작년 겨울 자신이 그런 식으로 섀넌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그가 굳이 위험할 걸 알면서 여기까지 자청해 끌려올 일은,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차라리 십일 년 전 아치볼드가에서의 그 일이 없었다면, 섀넌을 겨냥하고 만든 그런 독 따위는 세상에 존재할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결국은 다 자신 때문에, 하찮은 저 하나 때문에…….
그의 곁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쓸모없고 등신 같은 자신은, 결국…….
툭, 툭, 허공에 걸쳐진 흔들다리가 한 번씩 크게 휘청였다. 밧줄이 하나하나 끊기면서 생기는 타격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간을 붙잡고 일어난 윈터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카힌이 밧줄을 끊는 속도가 더 빨랐고, 거의 지척까지 다다랐을 때 윈터의 몸이 무너지는 다리와 함께 아래로 휙 꺼졌다.
이미 한 번 부딪힌 바 있던 어깨가 다시금 절벽에 콱 부딪혔다. 어깨가 으스러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마지막 남은 밧줄 하나를 꽉 부여잡은 채, 윈터가 다른 손을 뻗어 카힌의 발목을 움켰다.
“윽…!”
카힌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두 몸이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했다. 날카로운 혹한의 한기가 살갗을 아프게 때렸다.
검은 바다로 삼켜지는 마지막 순간에, 윈터는 어쩐지 제 이름을 부르는 섀넌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 *
섀넌이 윈터를 발견한 건 그의 추락과 거의 동시였다.
까마득히 높은 석조 성 지붕에 착지한 섀넌은 성끼리 연결된 긴 다리가 끊어져 와르륵 무너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윈…!”
그가 지붕 위에서 몸을 날리는 것보다, 윈터의 몸이 아래로 추락하는 게 먼저였다.
섀넌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가장 무거운 윈터가 제일 먼저, 그다음으로 섀넌이, 그다음으로 카힌의 종잇장 같은 몸이 차례로 검은 심해에 삼켜 들어갔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심해는 장장 세 사람을 삼켰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함없이 거센 파도로 절벽을 때리고 물러났다.
시커먼 물속은 눈이 밝은 섀넌조차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탁했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주저앉은 갈빗대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며 폐부를 압박하는 고통이 이어졌다.
그 죽음 같은 심해 속에서, 섀넌은 필사적으로 제 아이를 찾아 발버둥 쳤다.
언젠가 겪어 본 적 있는 두려움이다.
숱하게 꾸었던 어느 날의 악몽에서든, 제 망상 속에서든…….
“……!”
그러나,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물살이 거센 바닷속을 필사적으로 가르며 악을 쓰는 섀넌의 입에서 커다란 공기 방울이 올라갔다. 바닷속은 싸늘했고 묵직했으며, 산 자의 숨통을 농도 짙게 조여왔다.
섀넌이 그 물살을 가르며 고개를 마구 뒤챘다. 저 아래, 탁한 물살 너머로 은백색 머리가 보였다. 섀넌의 몸이 곧장 그리로 쏘아져 나갔다.
가까워질 듯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닿지 않는 달을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은 막막함이 그를 잠식했다.
* * *
얼굴의 반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녹아내린 하슬라는 거의 혼절한 듯 보였다.
굵은 사슬로 그를 빈틈없이 포박하는 병사들, 아직도 공포에 덜덜 떠는 장로들과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늑대의 사체들을 보던 갈리나가 막막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내내 계속되는 까마귀 울음소리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녀가 병사 하나를 붙잡아 뭔가를 명하려 할 때, 연회장 안으로 누군가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갈리나 님…!”
갈리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자신이 급히 붙잡아 윈터가 있는 별채로 가라고 명했던 병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갈리나가 다급히 물었다.
“윈터 님은.”
“그게, 지금, 그….”
“빨리 말해.”
그녀가 병사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 흔들며 재촉했다.
“저희가 갔을 땐 이미 다리가 끊겨 있었고, 윈터 님은,”
“그리말디는. 그리말디가 갔을 텐데?”
갈리나의 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며, 병사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소식을 전했다.
“…그리말디가 바다에서 그분을 건졌습니다. 가까운 침실로 일단 옮겼는데,”
갈리나가 그를 홱 밀치며 연회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옆으로 넘어진 병사가 얼른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 * *
“섀넌.”
카일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섀넌의 입술은 추위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의 머리칼과 온몸을 적신 바닷물은 이미 소금처럼 하얗게 얼어붙었다.
윈터의 위에 올라탄 섀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흉부를 압박했다. 섀넌이 한 번씩 힘을 실어 누를 때마다 그의 입에서 바닷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섀넌…!”
“윈터, 윈터, 눈 좀 떠 봐.”
보다 못한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그의 팔을 붙들어 윈터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 섀넌이 그들을 뿌리치며 계속해서 윈터의 가슴팍을 눌렀다.
억지로 그를 붙들려다 순간적으로 손목이 홱 비틀려 금이 간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구기며 제 손목을 매만졌다.
“늦었어, 섀넌…! 정신 차려!”
윈터의 몸은 얼핏 보기에도 산 자의 몸이 아니었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으스러진 갈빗대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고, 아마 폐와 내장은 더욱 성치 못할 것이다. 전투 중 찢어진 상처와 멍이 그의 온몸을 뒤덮어 끔찍했다.
엘리자베스와 카일은 윈터에게 별다른 미련은 없었지만, 꼬마였을 적부터 성장을 지켜봐 온 이의 죽음을 보는 건 그들에게도 역시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윈터…, 안 돼, 윈터……, 제발.”
섀넌은 눈이 완전히 돌아 그의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며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근육이 완전히 이완된 윈터의 몸은 섀넌이 흔들 때마다 눈꺼풀이 맥없이 살짝 열렸다 닫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섀넌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와 시선을 맞추려 애썼고, 카일과 엘리자베스는 몇 시간 뒤면 저 흐물흐물한 몸이 사후경직으로 빳빳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갈리나가 문 앞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막으며 주저앉았다.
이제 섀넌은 침대 옆 테이블 위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누가 머물렀던 곳인지 모를 침실 안을 거의 뒤집듯 샅샅이 훑던 그가 작은 날붙이를 찾아 손에 쥐었다.
“…뭐 하는 거야, 섀넌.”
카일의 물음에도 섀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제 손목을 확 그었다.
“섀넌…!”
엘리자베스가 놀라 소리쳤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윈터의 입에 가져다 댄 그가 다물린 입술을 벌려 그 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나 윈터가 뭔가를 삼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가 쏟아 내는 피가 그의 입 밖으로 넘쳐 흐르는 걸 몇 번이고 쓸어 담던 섀넌이 이제는 윈터에게 입술을 겹친 채 그 피를 필사적으로 넘겨 주려 애썼다.
“…섀넌, 그만해. 정신 나간 짓 하지 마.”
카일이 재차 섀넌의 팔을 붙잡았다.
별안간 섀넌이 그 팔을 홱 뿌리치며 카일의 목을 움켰다. 진짜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악력이었다. 카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살기와 광기 그 어디쯤, 카일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한 붉은 눈이 번들거렸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섀넌이 카일을 확 밀쳤다. 문 앞까지 휙 밀려난 카일의 몸이 석벽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금이 간 석벽에서 떨어진 돌 부스러기가 그의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쿨럭, 카일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닦은 그가 헛숨을 흘렸다.
침대에서 내려온 섀넌의 눈이 새빨갛게 이글거렸다.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그러모은 듯 떨리는 음성이 억눌린 채 흘러나왔다.
“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너 진짜 미쳤어?”
섀넌에게 다가가려는 카일 앞을 막아선 엘리자베스가 그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일단 나가. 지금은 건드리지 마. 일단 놔둬.”
문 앞에 몰려와 그 광경을 보던 늑대들까지 그들에게 밀려 침실 밖으로 완전히 쫓겨났다.
갈리나는 끝까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버티다가, 엘리자베스가 거의 죽일 기세로 으르며 멱살을 잡고 밀어붙이자 그제야 억지로 끌려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침실 문을 봉쇄하듯 탁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윈터의 위에 올라타며 그 몸을 부여안는 섀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 * *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윈터, 제발…….”
심장은 완전히 멎어 버렸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난 그렇게 당신 곁에 있었을 거예요.’
아이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윈터.”
섀넌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차게 굳은 윈터의 뺨 위로 흘렀다. 그의 위에 올라타 거의 몸을 겹치듯 감싸 안은 섀넌은 어디를 만져도 차갑기만 한 제 아이의 온몸을 부여안았다.
제게 닿으려고 얼마나 필사적으로 애썼는지 그의 온몸에 들러붙은 상처가 말해 주고 있었다.
왜, 왜 모든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한 번만 윈터에게 제 계획을 말해 주었다면, 미리 알렸더라면.
왜…, 여전히 자신은 빌어먹을 오만함으로, 제 아이는 끝까지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여겼을까…….
“윈터…….”
가엾고 애달픈 내 아이.
평생 제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 부족함만 한탄하며 죽어갔을, 가엾은 내 아이….
안 돼, 제발, 안 돼……. 섀넌은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애원을 하며 밀랍인형처럼 굳은 얼굴에 아무렇게나 입을 맞췄다.
물기가 얼어붙어 빳빳해진 은백색 머리칼은 빛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매일 향수를 뿌리고 꽉 끼는 수트를 입어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안 그래도 작은 고기를 더 작게 잘라 먹고 살아야 한대도, 난 당신 곁이 더 좋아요.’
‘내겐 당신이 유일하다는 거 알잖아요.’
미친 듯이 덜덜 흐느끼는 소리에도 차가운 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분명 섀넌이 이토록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들었다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을 리 없을 텐데도.
……그때는 죽을 때까지 당신의 그리말디가 될게요.
윈터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는 섀넌의 등이 크게 오르내렸다. 질척한 흐느낌이 차가운 주검 위를 적셨다.
본래 그에게 죽음이란 매우 가벼웠다. 그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처럼 그저 죽고 싶을 때 죽으면 그만인.
단지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잠을 자는 것일 뿐.
그러나 윈터의 죽음은, 그에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낯선 충격이었다.
섀넌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윈터의 뺨을 감쌌다. 눈가와 콧날, 입술에 지그시 입을 맞추고 이마를 맞대며 애끊는 상탄을 토해 냈다.
다시는 자신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청회색 눈을 볼 수 없고, 다시는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다시는…, 그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없다니.
이렇게 끔찍하고 애통한…….
이런 게…, 이런 게 죽음이라니.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내 아이만큼은…, 다른 건 몰라도 내 아이의 죽음만큼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차가운 몸을 부여안고 있던 섀넌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틀어졌다. 흠뻑 젖어 짓무른 눈을 내리뜬 그가 윈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차가운 살갗을 꿰뚫었다. 아직 생의 온기가 미약하게 남아 있는 윈터의 피가 섀넌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섀넌은 그것을 힘껏 빨아들였다.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이고, 살가죽이 점점 창백하게 내려앉을 때까지 그의 피를 계속해서 흡수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윈터의 몸 곳곳을 칼로 찢어 흐르는 피를 마셨다.
그래…, 어차피 제 아이는 필멸자다.
설원에서 태어난,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유한한 수명을 가진 아이.
처음부터 그는 설원의 필멸자였고, 자신은 그와 상관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불멸자.
어차피 영원히 한데 섞이지는 못할 관계라면, 그렇다면.
섀넌은 오늘 여기서 자신과 그의 존재를 완전히 멸할 생각이었다.
* * *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설마 윈터 님을 먹으려고 저러는 건가요?”
갈리나가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인 눈으로 항의하며 다가갔다. 엘리자베스는 침실 문을 막듯이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키우던 애가 죽었는데 너희는 안 미치고 배겨? 좀 놔둬 봐. 사후경직이 시작되면 섀넌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갈리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죽어 버린 몸이라면 그 피라도 취해서 영양분 삼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적 있는 뱀파이어라면 누구든 그런 짓은 한 번쯤 해 봤으리라.
갈리나가 엘리자베스의 옷깃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그리말디가 만약 윈터 님을 먹는다면, 그랬다간 우리도 가만,”
“제기랄, 너 아까부터 자꾸 먹는다, 먹는다 하는데. 우리가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식인귀로 보여?”
그녀의 손을 확 뿌리친 엘리자베스의 눈에 새빨간 식욕이 드글드글 차올랐다.
“진짜 앞뒤 분간 못 하는 식인귀가 어떤지 보여 줘?”
윗입술 아래로 날카롭게 비어져 나오는 송곳니에, 그곳에 몰려 있던 늑대들이 숨을 삼켰다.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수트 차림에 검고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징그러운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금방이라도 갈리나를 찢어 버릴 듯 살벌한 눈으로 낮게 을렀다.
“내 인내심 건드리지 말고 입 닥쳐. 너희가 윈터와 함께한 건 고작 일 년이지만, 섀넌은 20여 년을 같이 있었어. 애를 데려가서 결국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네가 이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
“우리 방식으로 보내 줄 수 있게 그냥 두란 말이야.”
그 방식이 어떤 건지 엘리자베스도 사실 잘은 모른다. 나중에 피가 다 빨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윈터의 시체를 보면 이들은 경악할 것이다.
‘빌어먹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낀 엘리자베스가 맞은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카일을 바라봤다.
짧게 토해 냈던 피가 말라붙은 입을 가린 채, 카일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섀넌이 자신을 공격한 게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충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앙상한 주검은 골격마다 어딘가 하나씩 어긋나고 부러져 있었다.
생기 없는 살가죽이 그 골격을 얄팍하게 감싸고 있었으나, 어떤 부분은 부러진 뼈가 꿰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몸 안의 오장육부는 이미 죄 주저앉은 갈비뼈에 찔려 찢어졌고, 물이 가득 찼던 폐 또한 완전히 물크러졌다.
그 뱃가죽을 서슬 퍼런 날붙이가 가르고 지나갔다.
내장이 드러날 만큼 벌어진 살갗 위로,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
처음엔 주루룩 흐르던 양이 나중엔 거의 퍼부어졌다. 엉망으로 망가진 배 속에 체온 낮은 피가 뒤섞이고, 채워지고, 스며들다 넘쳐흐르고 다시 뒤섞이길 반복했다.
피에 젖어 새빨간 손이 그 위를 감싸듯 덮었다. 죽음 같은 입맞춤이 가슴팍 중앙부터 갈라진 살갗 위에 내려앉았다.
우드득, 부러진 갈빗대가 떨어진 아귀를 찾아 이어졌다. 한 차례 더 피가 쏟아졌다.
창백한 살갗을 타고 흐른 새빨간 피가 고깃덩이와 다름없는 몸 위로 넘쳐 흐르고 스며들기를 반복했다.
뭉개졌던 폐부와 내장이 다시 원래의 위치를 되찾고, 서서히 부풀며 형태를 되찾아갔다. 차갑게 굳어 있던 육신이 한 차례 경련하며 움찔 떨렸다.
그 위로 가느다란 손이 덮였다.
쉬…….
서늘한 숨결이 귓바퀴와 목덜미를 타고 가슴팍으로 흘렀다.
이건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
절대 두려워해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
밀랍 같은 얼굴 위로 속삭임이 떨어졌다. 모양 좋은 콧날이 비스듬히 스치고, 붉은 입술이 핏기없는 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설원을 휩쓸던 바람마저 숨죽인 밤.
가늘게 허공을 가로지르던 흰 눈이 완전히 멎었다.
죽음처럼 잔잔한 입맞춤이 싸늘한 육신 곳곳에 내려앉았다.
* * *
섀넌과 윈터가 든 침실 문이 닫힌 지 며칠이 지났다.
그간 갈리나는 엘리자베스와 숱하게 싸웠으며, 항의하고 또 억지로 문을 열려고 시도하다 카일과 엘리자베스에게 막히길 반복했다.
“벌써 나흘째라고요!”
그 정도면 사후경직이 되고도 시신이 부패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주변은 이내 다시 긴장감이 차올랐다.
며칠간 잠을 거의 자지 못한 갈리나가 퀭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마주했다.
“언제까지 계속 놔둬야 하는 건데요!”
“아, 시끄러워.”
엘리자베스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 까마귀들을 닥치게 할 수 없으면 네 입이라도 좀 다물어, 갈리나.”
며칠 내내 계속 울어 대는 까마귀 소리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좀 기다려 봐요. 그리 빨리 진정되는 게 아니니까.”
늑대들도 나름의 조치를 취하는 중이었다. 설원에서 자라는 특정 풀을 말려 태우면, 그 연기가 까마귀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이 안에 들어와 있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금세 저 소리를 진압할 수 있을까.
까마귀가 단 한 마리만 그들을 감지해도 울음소리가 삽시간에 다시 퍼진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얼른 나가면 되는 거잖아요? 대체 며칠째 저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데요! 내 말이 틀려요?”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 번 들여다볼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미 죽어 버린 시신을 끌어안고 저 식인귀가 괴괴하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당신들도 솔직히 이상하잖아. 그럼 한 번이라도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라고요! 대체 그리말디가 자하카의 주검을 가지고 무슨 소름 끼치는 짓거리를 하는,”
“아, 거 참.”
카일이 갈리나와 엘리자베스의 사이를 가르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갈리나를 내려다봤다.
“말 많네, 진짜. 어차피 시신이잖아. 시신이 어딜 가겠어? 응?”
카일이 갈리나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 뻔뻔한 표정에, 갈리나가 헛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 시신을 가지고 나흘씩이나 한 침실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당신들한텐 자연스러운 일인가요?”
“자연스러운 일을 따지려면 애초에 우리 같은 식인귀한테 애를 맡긴 네놈들 행동이 자연스러웠는지부터 따져야지.”
금세 장난기가 지워진 얼굴이 싸늘하게 일변했다. 카일이 경멸을 담은 눈으로 갈리나를 응시했다. 허리를 굽혀 그녀와 완전히 시선을 맞춘 그가 경고하듯 말했다.
“오늘까지야. 우리도 이 냄새 나는 곳에서 더 버틸 생각 없어. 당장 너희들을 다 씹어 삼키고 싶은 걸 참는,”
그때였다.
별안간 고막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
한순간에 까마귀들의 울음이 멎은 것이다.
며칠 내내 귀를 괴롭히던 소음이 불식 간에 확 물러나자, 그 적막은 오싹할 만큼 숨이 막혔다.
모두가 행동을 멈춘 채 허공으로 눈만 굴렸다.
위쪽을 노려보던 엘리자베스와 카일의 시선이 갈리나에게 향했다. 그들이 무슨 풀을 태워 까마귀를 진정시키고 있다고 했으니, 그 효과가 이제 나타난 거냐고 묻는 눈이었다.
그러나 갈리나는 두려운 얼굴로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한순간에 갑자기 조용해지지는 않는다. 까마귀들의 울음은 상호 연쇄 반응이라,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울음을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기묘한 적막은 마치 살갗을 조여들 듯 진득했다. 전율과 비슷한 소름이 끼쳐 솜털이 곤두섰다.
눈만 굴려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살피자, 그들의 얼굴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다시 까마귀들이 울음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끼에엑, 끼엑,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이 일시에 터져 석벽 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갈리나는 온몸에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
갑자기 창천하는 소음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카일이 참지 못하고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갈리나와 엘리자베스, 그곳에 함께 있던 늑대들이 빠르게 그 안을 보려 몰려들었다.
“…….”
갈리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엘리자베스와 카일은 지금껏 그들이 지은 적 없던 기이한 표정으로 침대에 한 발짝 다가갔다.
갈빗대가 다 어긋나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던 몸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강건하게 부풀어 있었고, 전투 중에 생겼던 멍과 찢어진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윈터의 옆에, 마른 고목처럼 뼈만 남은 손이 툭 걸쳐져 있었다.
그 곁으로 더 다가간 엘리자베스의 입이 벌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침대에 고개를 묻고 엎드린 섀넌의 육신이 거의 죽은 자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 * *
‘설원의 필멸자야, 너는 최초의 존재가 된 거란다.’
어떤 소리는 귀가 아닌 살갗으로 와 닿을 때가 있다.
온몸을 두드리고, 결국에는 스며들고, 살 아래 흐르는 피와 뼈, 결국에는 온 정신을 뒤흔드는 소리.
삶의 궤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그런 소리가.
그 소리는 선율 없는 이상한 음악과 같았으며, 몸속에 퍼지는 공명이었다.
숨을 어루만지고 이성과 본능을 단번에 낚아채는 손아귀였다.
현재인지 과거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잔상이었다.
절대 두려워해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되는…, 이것은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질 거야. 진정해, 겁낼 필요 없어.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찮아.
자연스러운…….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 장 자 연 스 러 운일절대두려워하지말되내가너를부정해서도안되는절대 죽 게 놔 두 지 않 을 테 니난인간을먹어정확히는그들의지극히자 연 스 러 운 일취향은아니지만너희같은짐승을네가나를경멸해도상관없어이것은 너 에 게 일 어 날 수 있는가장자연스러운괜찮아도망치지마너는계속내울타리안에이제나는널 절 대 버 리 지 않을거야네동족을잡아먹는게역겹다고진정해느껴져도어쩔수없어네가내울타리안에있는한은널절 대 버 리 지 않 을 거야겁낼필요없어네가나를경멸한대도나 는 너 를
절대 죽게 놔두지 않을 테니…….
내장이 뒤틀리고 관절이 억지로 벌어지며 생기는 끔찍한 공명 사이로 악마의 속삭임이 온 신경을 매혹적으로 휘감았다.
그것은 터질 듯 부풀었다가 쑥 꺼지고, 콱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물러나고, 젖어 들고, 조각조각 두서없이 흩날리며 날카롭게 꽂혀 들었다.
온몸의 관절이 역으로 꺾이고 비틀렸다. 희고 아름다운 음성이 닿는 곳마다 극도의 고통과 찬란한 환희가 내달렸다. 냉랭한 설풍이 온몸에 스미는 듯 첨예하게 조여들었다.
처음으로 윈터는 제 존재를 인지했다.
자신은 시라트에 있었고,
섀넌을 구하러 가는 중이었으며,
……결국 그에게 닿지 못하고 카힌과 함께 추락했다.
윈터는 자신이 심해 끝까지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다.
그 짠 바닷물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오장육부를 가득 채운 것으로 모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신경을 건드리고 휩쓸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제 심장을 갈퀴처럼 붙들고 억지로 박동하게 했다.
아냐, 네 심장은 스스로 뛰고 있는 거야.
……아직 멎지 않았어.
너는 아직.
살아있어.
“…….”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매달린 은백색 속눈썹 위로 아주 작은 먼지가 둥둥 떠다녔다.
윈터는 제가 바다에서 구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서, 회복하는 데 필요한 어떤 약물의 효과로 잠시 신경이 이상해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이 기이한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고, 석벽의 작은 틈새를 흐르는 습기와 허공을 떠다니는 아주 작은 먼지마저 날카롭게 시야를 긁었다.
“윈터.”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윈터는 제가 환각을 겪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섀넌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말라 해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흰 셔츠와 검은 바지만 간단하게 걸치고 있는 섀넌의 몸은 옷 위로 보기에도 뱀파이어에게 피를 다 빨린 시체처럼 앙상했고 두 눈은 퀭하게 파여 있었다.
“……섀넌.”
윈터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나오려다 무심결에 손을 짚은 테이블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윈터는 잠시 그것을 이상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섀넌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심해서 움직여.”
“섀넌, 당신 몸이 왜 이,”
“아아, 윽…!”
무심결에 섀넌의 어깨를 잡은 윈터가 놀라 손을 뗐다.
그저 한 발 그에게 다가서며 손을 뻗은 것뿐인데, 어느새 자신은 섀넌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고 그의 어깨를 움키고 있었다.
그리고 섀넌은 지금 그 깡마른 몸을 접어 웅크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섀,”
“만지지 마.”
섀넌이 급히 손을 들어 그의 접근을 차단했다.
저를 향해 내밀어진 앙상한 손끝이 달달 떨렸다. 무심결에 그의 어깨를 또 짚으려 했던 윈터가 그대로 굳었다.
“일단, 아주 천천히……, 한 발만 물러나.”
저도 모르게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인 윈터가 조심스럽게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 아무것도.”
“……섀넌, 당신, 몸이 왜 그래요?”
“이건 곧 괜찮아져. 그러니까…, 일단 너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 봐.”
까드득, 부서진 어깨뼈가 제 자리를 되찾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며, 윈터는 혼란스러워졌다.
그저 살짝 짚은 것뿐인데 섀넌의 어깨가 저렇게 으스러졌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조금 전 부서진 테이블에 닿았다. 허공에 들고 있던 손을 돌려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윈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으….”
섀넌은 꽤 오랜 시간을 괴로워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며 움직이는 골격이 훤히 보일 정도로 그의 어깨는 앙상했고, 회복도 지나치게 느렸다.
윈터는 지나칠 정도로 선명해진 시야와 손만 대도 부스러질 정도로 약해진 섀넌을 비롯해 모든 게 다 이상했다. 그러나 섀넌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그저 굳은 듯 멈춰 있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깨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차분히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움직이거나, 날 만지지 마.”
“…….”
윈터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조차 뭔가 해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섀넌이 그런 그에게 다가가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시선을 내려 자신을 보는 청회색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동공은 붉은색. 홍채는 여전히 청회색.
그다음으로 살핀 건 머리칼이었다. 손가락으로 윈터의 머리칼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섀넌이 그 색을 확인했다.
……머리도 여전히 예쁜 은백색.
섀넌은 나체 상태인 윈터의 몸으로 시선을 흘렸다.
변화 직전의 상처들은 깨끗이 아물었지만, 그 훨씬 전에 생겨 이미 흉터가 된 흔적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와 꼬리를 자르려다 실패해 희미하게 남은 자국, 자신이 윈터의 목덜미를 깨물어 난 자국, 시라트에서 지내는 동안 화살을 맞거나 긁힌 자국…….
윈터의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섀넌이 그의 등 뒤에 섰다.
“가만히.”
윈터의 목과 어깨 부근을 손끝으로 쓸던 섀넌이 그의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게 하며 속삭였다. 까치발을 들어 윈터의 뒷목에 입술을 갖다 대자, 긴장한 근육이 바짝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쉬…, 움직이지 마.”
섀넌이 도드라진 경추 뼈 부근에 이를 박아 넣었다. 투둑, 툭, 살갗이 꿰뚫리는 선득한 소리에 윈터는 오싹해하면서도 꼼짝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피를 빨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섀넌의 입술이 곧 떨어졌다.
섀넌은 방금 만든 제 잇자국을 살폈다. 꿰뚫린 살갗은 몇 초 되지도 않아 순식간에 아물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섀넌의 표정이 묘하게 일변했다. 윈터의 면면을 살피는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컥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돌아와 붉은 청회색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온몸으로 경이와 전율이 관통했다.
이 아이와 영원히…….
이 아이가, 자신과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며칠에 걸쳐 제 손으로 만든 기적이, 이제야 새삼 와 닿았다.
“……안지 말고,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네?”
윈터와 마주한 섀넌이 별안간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가슴팍에 뺨을 묻었다. 윈터는 그의 마른 몸을 마주 안고 싶어 그저 손끝만 움찔거렸다.
섀넌은 이 기적이 안겨 준 기쁨을 홀로 조용히 만끽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의 심장 박동을 듣고, 뜨겁게 생동하는 체온과 숨 쉬는 단단한 몸을 느꼈다.
꽈악, 섀넌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윈터의 미간이 옅게 일그러졌다.
“…으스러질 것 같아요, 섀넌.”
“가만히 있어 봐. 이제 으스러져도 죽을 일 없으니까.”
“…….”
윈터가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의식이 없던 중에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섀넌이 한참 뒤에 팔을 풀고 그를 올려다봤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티가 역력한 얼굴을 보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윈터 자하카는 내가 죽였어.”
“…네?”
의아함으로 크게 뜨인 눈이 낯설었다. 작은 창으로 들이친 햇살이 그의 눈을 가로질렀다. 다시 보니 청회색 홍채에 아주 옅게 붉은 기가 섞여 있었다.
그 오묘한 눈을 들여다보며, 섀넌이 다정하고 자애로운 어투로 말했다.
“너는 이제 완전히 그리말디가 된 거야.”
아직 제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듯 의심이 뒤섞인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표정이 딱해서, 섀넌이 그제야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윈터의 눈에는 그 웃음이 어쩐지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그저 가만히 섀넌의 말에 귀 기울였다.
“너는 더는 설원에서 태어난 필멸자가 아니란다, 윈터.”
윈터의 턱밑을 가볍게 어루만지던 섀넌이 그의 영혼에 제 말을 각인시키듯 선연히 내뱉었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불멸자가 된 거지.”
붉은 기가 옅게 감도는 청회색 눈에 파문이 일었다.
* * *
바다에서 윈터를 건져 올린 건 열흘 전이었다.
윈터는 자신이 열흘이나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윈터는 아직도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아무것도 만지지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섀넌은 그런 그를 관찰하며 그의 뺨이나 몸을 마음대로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윈터가 굳은 입술을 겨우 열었다.
“당신이, …날 변화시켰……, 그래서, 제가…….”
제대로 맺어지지 못하는 말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눈을 혼란스럽게 움직이며 제 손과 팔, 몸을 내려다보던 윈터가 물었다.
“……난 그럼, …이제 뭐죠?”
“뭐긴 뭐야.”
섀넌이 차분히 대꾸했다.
“넌 그 무엇도 아닌 존재인 거지. 최초의, 앞으로도 다신 없을, 내가 만든 나만의 아이일 뿐.”
섀넌의 아이…, 윈터는 그 말을 몽롱하게 반복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그래서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환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와 한데 묶이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 철없는 어린 시절의 갈망이, 사후에도 집요하게 이어져 이런 지독한 환영을 겪는 걸지도 모른다.
섀넌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찼다. 퀭하고 볼썽사납게 야위었지만, 윈터의 눈에는 늘 아름답고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한참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윈터는 숨도 쉬지 않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거 꿈이죠.”
제 질문 하나로 이 꿈이 깨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야윈 얼굴이 단호하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게 네게 악몽일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현실이고 이제 더는 윈터 자하카는 없어.”
최초의, 앞으로도 다신 없을.
그의 아이…….
그 말을 반복해 되뇔수록 눈꺼풀에 열이 올랐다.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가 어렵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당신은요. 당신은…, 날 이렇게 만든 당신은.”
그가 무의식중에 섀넌의 어깨를 짚으려다, 차마 손대지 못하고 허공에 멈췄다.
섀넌이 고목처럼 앙상한 손을 대수롭지 않게 설레설레 흔들었다.
“괜찮아, 한두 달 회복하면, …아.”
고개를 젓던 섀넌의 몸이 별안간 크게 휘청였다. 윈터가 얼른 손을 뻗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또 그의 몸이 부서질까 봐 겁이 났는지, 최대한 충격을 완화하려 아래로 내려간 손은 섀넌이 거의 바닥에 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안전하게 그의 몸을 받칠 수 있었다.
“이……, 이게 괜찮은 거라고요?”
위태롭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발개진 눈시울이 떨렸다.
…아. 젠장 또 울리겠네.
섀넌이 맥없는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너무 오래 서 있었던 게 문제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약간 버거웠는데, 고개를 저으니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내려앉았다.
그가 윈터의 팔에 제 몸을 지탱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날 좀 침대로 옮겨 줘 봐.”
울음을 참으려고 꽉 깨문 입술이 보였다. 등과 무릎 아래를 받친 팔은 긴장으로 바짝 곤두서 있어서, 섀넌에게도 그 단단함이 전해졌다.
아주 천천히 섀넌을 들어 올린 윈터가 침대 위에 솜털을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앉히고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차마 섀넌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지 못한 손이 주먹을 꽉 움킨 채 뒤로 물러났다.
“……날, …날 이렇게 만든다고 당신 몸까지 상하게 하면 어떡해요.”
결국 발갛게 고여 있던 응어리가 툭 떨어졌다. 섀넌은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쓸어 주며 차분히 말했다.
“안 상해. 안 죽어. …사실 둘 다 죽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천만다행이지. 섭식 잘하면 금방 다시 돌아와.”
축축한 눈물이 손끝을 적셨다. 온몸에 눈물을 건드리는 신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섀넌의 손이 닿을 때마다 윈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거야 원.
제 아이는 정말이지, 눈물이 많아서 이토록이나 사랑스럽다.
“울지 마, 윈터.”
“미안해요, …미안해요, 섀넌.”
섀넌의 손가락 새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당신을 구하지 못하고…, 또 짐만 되어서…….”
“아니야, 윈터.”
섀넌이 그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날 봐.”
젖어서 축 처진 속눈썹이 위로 들렸다.
“……네가 날 구한 거야.”
저를 올려다보느라 눈매가 약간 동그래진 아이의 순한 얼굴을 보며, 섀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먼 케인타운까지 직접 달려와 준 너의 그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너 스스로를 구하고 나도 구한 거라고.”
이미 늦은 일이라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직접 올 게 아니라 전서구나 편지를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고, 다른 늑대들을 대신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윈터는 그 수많은 방법을 놔두고 미련스럽게도 제게 직접 오는 것을 택했다.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와 제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다시 또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 돌아가는, 지독히도 비효율적인 동시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네가 내게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면 러셀에게 해독제를 만들게 하지도 않았을 테고, …아마 내가 모르고 독을 마셨다면 그 이후의 일은 나도 장담할 수 없었겠지.”
윈터의 마음속에 하나하나 각인을 새기려는 듯 확신 어린 말투였다.
“혹시라도 다른 늑대들에게 해독제에 관한 사실이 새어 나갈까 봐 너한테까지 내 계획을 함구한 건, …나도 잘한 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
“그래도 결과적으론 다 잘된 일이지. 너를 영원히 내 곁에 박제하게 되었으니.”
희미하게 웃은 섀넌이 엄지 끝으로 그의 눈가를 쓸어 닦았다.
“그러니까, 지난 일은 후회하지 마.”
윈터의 뺨을 감싼 그가 천천히 이마를 맞대었다. 그의 손등 위로 윈터의 손이 살짝 와 닿았다가, 이내 다시 떨어졌다.
그에겐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만약 윈터가 죽었다면 섀넌은 사무치도록 지난 모든 선택의 순간을 후회했을 것이다.
제 오만함이 불러온 참사에 이미 반쯤 미칠 뻔하지 않았던가.
그는 지난 열흘간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고 한심했는지 윈터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내 피라도 먹어요, 섀넌.”
윈터가 절실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당신이, …얼른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또 습관적으로 섀넌의 손을 잡으려던 그가 차마 만지지 못하고 손을 웅크렸다. 섀넌이 짧게 웃으며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뺨을 살짝 꼬집었다.
“이제 네 피는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고 영양분도 되지 못해.”
“…….”
“네 몸에는 나와 같은 피가 흐르니까.”
잠시 가라앉았던 눈물이 또 그렁그렁 차올랐다. 섀넌은 복잡한 감정이 몰아치는 그의 눈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이의 눈에 더는 예전의 그 맑은 새벽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잿빛 구름 중앙에 톡 떨어진 한 방울 피처럼 붉은 동공, 그 피가 옅게 번져나간 듯한 청회색 홍채를 섀넌은 유심히 관찰했다.
기기묘묘하고, 찬란하다.
제 평생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었다.
“나도…….”
한참을 말도 없이 눈물만 떨구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가 울음을 참느라 갈라진 목소리로 머뭇머뭇 물었다.
“…나도 당신 안아 봐도 돼요?”
“그건 아직은…….”
말을 멈춘 섀넌이 난처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제 아이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섀넌이 조심스럽게 몸을 조금 앞으로 당겼다.
“자.”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상태로, 그가 양팔과 다리를 벌렸다.
“날 안는다 생각하지 말고, 아주 천천히…, 허공에 팔을 걸어 둔다 생각하고 움직여 봐.”
윈터가 머뭇거리다 그에게 다가갔다. 섀넌이 그런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무릎으로 바닥을 디딘 채 다리 사이로 들어온 커다란 몸이 살짝 맞닿고, 그의 몸이 확 곤두섰다.
“…….”
윈터는 감히 숨도 쉬지 못했다. 바짝 굳어 있던 팔이 조금씩 움직였다. 팔 안으로 앙상한 몸이 닿았다. 그 몸을 가만히 감싼 윈터는 끝내 손을 섀넌의 등에 대지 못하고 그 지척에서 멈췄다.
힘주어 안았다간 부서진다. 이제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다. 늘 자신보다 강하고 절대적이었던 존재가 지금은 얇은 유리처럼 위태로웠다.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끝내 아래로 떨어져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이 침대에 앉아 있는 섀넌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섀넌의 목 언저리에 윈터의 뺨이 닿았다. 열기가 후끈했다.
“나…, 이제 계속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섀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영원히…?”
“그래, 영원히.”
짧은 한숨이 끊기듯 터져 나왔다. 섀넌은 제 아이가 또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섀넌을 마주 안으려고 들어 올려진 손이 다시 애매하게 허공에 놓이고, 침대에 놓이길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우는 거야.”
“서러운 거 아니에요.”
가슴팍에서 웅얼웅얼 짓뭉개진 목소리가 다급히 대답했다. 침대에 놓인 그의 손이 홀로 주먹을 꽉 움켰다.
“너무 기쁜데…, 너무 좋고, …벅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미칠 것 같아요…….”
울음 섞인 말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섀넌은 윈터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속으로만 조용히 웃었다. 미친 포식자에게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힌 줄도 모르고, 기쁘다고 감격해서 우는 아이가 퍽 귀여웠다.
커다란 등을 잠시 다독이던 섀넌이 고개를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푹 젖은 속눈썹을 매달고 벌겋게 짓무른 눈가,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깨무는 입술을 본 섀넌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아.
돌겠네, 진짜.
섹스할 기력도 없는데 괜히 아래가 뻐근했다. 이렇게 귀엽게 계속 우는 건, 먹어 달란 어필 아닌가?
섀넌이 그의 뺨을 잡고 빠르게 입술을 겹쳤다. 짭조름한 눈물에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눌러 가르고 혀를 옭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놀란 윈터가 빳빳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윈터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지며 그의 뺨을 짓누른 섀넌의 콧잔등을 적셨다. 읏…,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신음을 집어삼킨 섀넌이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머금었다.
뺨을 쥐고 있는 손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윈터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맨 살갗에 그의 손이 닿자 입술 안으로 뜨거운 숨이 훅 끼쳤다.
깨끗하게 연결된 쇄골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섀넌은 그의 입속에 혀를 쑤셔 넣고는 마음대로 헤집고 빨아들였다.
질척한 혀가 뒤엉킬수록 섀넌의 손바닥 아래에 있는 가슴이 단단하게 뭉쳐졌다. 그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리고 한 손 가득 움켜쥐자 윈터의 몸이 팔딱 뛰었다.
“읏, 섀넌, 안…, 흐읍…….”
“조금만, …조금만 더…….”
침대를 짚고 있던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섀넌의 몸이 한쪽으로 휘청였다.
“…….”
제 손에 눌려 부서진 침대 한쪽이 푹 꺼지자 놀란 윈터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경직되었다.
섀넌이 잠시 입술을 뗐다. 윈터가 말없이 고개를 뒤로 물리며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찰나, 섀넌은 그의 입술 새로 살짝 비어져 나온 송곳니를 보았다.
그 송곳니는 늑대의 것이 아니었다.
“…다치게, ……다치게 할 것 같아요.”
먼 평원을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처럼, 윈터가 가파른 숨을 헐떡이며 낮게 말했다. 귓바퀴와 뺨이 터질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너 따위가 날 어떻게 다치게 할 건데, 그 말이 습관처럼 입 안까지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섀넌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 지금은 좀 위험하긴 하네.”
너무 세게 빨려 살짝 부어오른 윈터의 아랫입술을 응시한 채, 섀넌이 그의 가슴팍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