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Untwist Turn(3권 완결) (9/18)

루나틱 왈츠 3권 (완결)

달혜나

1. Untwist Turn

달이 네 번 차오르고 봄이 만개했다.

봄의 케인타운은 여행객이 가장 활발하게 방문하는 시기라, 타지에서 온 사람들과 거리 악사들로 온갖 소음이 넘쳐흘렀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웃으며 걷는 사람들 사이로 어두운 쥐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빠르게 걸었다. 주변을 힐끗 둘러보는 콧잔등에 걸쳐진 은테 안경이 저녁 노을빛에 반짝였다.

마치 홀로 겨울인 것처럼 코트 깃을 여미는 가느다란 손끝은 추운 듯 떨렸고, 그 위로 보이는 창백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달라붙다 떨어졌다. 그 눈들을 의식한 남자가 코트 깃을 더 여미며 입술 위까지 덮었다.

인적이 드물어진 골목을 지나 낡은 선술집 앞에 선 그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 소리를 내며 닫힌 문 위로 ‘화이트팽’이라 쓰인 간판이 흔들렸다.

“그리말디, 오랜만이야.”

초저녁 화이트팽은 아직 손님이 없었다. 오직 손님을 기다리는 뱀파이어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 앞에 앉아 있던 로렌스가 한껏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고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일은?”

잠시 눈으로 바 안을 훑던 섀넌이 짧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랑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실걸.”

그의 대답을 들으며 벗은 안경을 바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친 섀넌이 로렌스에게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드러난 얼굴과 바 위에 얹는 손이 눈에 띄게 야위어서, 로렌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하카 뒤치다꺼리하더니, 식욕이 완전히 사라지기라도 했어? 예쁜 얼굴 다 망가졌네.”

바 안쪽으로 손을 뻗어 술병을 집던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그를 힐끗 노려봤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딴 소릴 지껄여.”

자신과 윈터의 맹약에 관한 소문이 누구 때문에 퍼지게 된 건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친구라고 해도 로렌스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일이야 귀찮을 정도로 늘 한결같이 제 곁에 있었지만, 로렌스는 백 년 넘게 교류할 일도 없었으니 남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제 자하카 보모 노릇 안 하는 거야?”

술잔을 채우던 섀넌이 짜증을 억누르며 낮게 대답했다.

“……맹약은 끝났어. 더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 개새끼 얘기 좀 그만해.”

별안간 곁으로 가벼운 바람이 휙 불어닥쳤다.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선 로렌스가 섀넌의 턱을 슬쩍 잡았다.

“근데 왜 너한테서 계속 개 냄새가 나지…?”

섀넌이 그 손을 쳐내며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시비 걸지 말고 꺼져.”

“와, 성질머린 여전하네.”

그러나 로렌스는 순순히 물러나 줄 것 같은 태도가 아니었다. 섀넌은 어쩐지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제 옆에 서서 저를 느물느물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역겨웠다.

최근에 케인타운으로 돌아온 그는 왜인지 제 눈에 자주 띄었다. 그때마다 섀넌은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어서, 일부러 그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정면에 시선을 걸어 둔 섀넌이 못마땅한 낯으로 물었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아, 그냥. 데리고 놀던 남창이 싫증 나서 죽였는데, 시신 뒤처리를 잘못한 게 좀 문제가 돼서 되도록 멀리 달아나야 했거든. 그러다 보니 다시 여기네.”

…아, 그러고 보니 놈이 남색을 했었지.

잊었던 사실을 상기한 섀넌이 말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켜는데, 로렌스가 그의 술잔을 느리게 가져갔다.

섀넌이 눈만 움직여 조용히 그 행동을 좇았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볼 때마다 궁금해.”

대꾸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귀찮게 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섀넌이 말없이 그의 손에 들린 잔을 다시 빼앗아 가려는데, 고개를 기울인 로렌스가 갑자기 호흡을 겹치며 바짝 다가왔다.

“씨발.”

순식간에 출입문 앞까지 몸을 확 빼낸 섀넌이 역겨운 얼굴로 입을 막은 채 욕설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놈과 입술이 닿을 뻔했다.

“…뭐 하는 짓이야.”

“아, …아직 아니야? 이제 한 번쯤 남자랑 붙어먹어 볼 때도 되지 않았어?”

“이 미친 새끼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섀넌.”

욕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가온 로렌스가 섀넌의 뺨을 쥐었다.

어쩐지, 이 새끼가 쳐다볼 때마다 기분이 더럽더라니…….

“첫 상대로 나 꽤 괜찮은데. 박는 것도 박히는 것도 아주 죽여주게 잘하거든.”

“…….”

“우리 섀넌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려나?”

그의 다른 손이 섀넌의 허리로 내려갔다. 섀넌은 저보다 살짝 키가 작은 로렌스를 무감한 눈으로 느슨하게 내려다봤다.

“박는 거? 박히는 거?”

섀넌의 아랫입술을 엄지 끝으로 쓸며 입술을 겹칠 듯 다가온 로렌스가 싱긋 웃었다.

그 뻔뻔한 낯짝을 냉랭한 눈으로 보던 섀넌이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작게, 뭔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어아윽……!”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로렌스가 제 손목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완전히 으스러져 너덜거리는 손목을 잡은 채 바닥에 엎어진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아아…, 너무 심하잖아, 섀너언…, 어우윽…….”

으드득, 어긋나고 부서진 뼈가 다시 빠르게 제자리를 찾는 소리가 바닥에서 작게 울렸다.

“으윽…!”

“하아…….”

욕도 아까운 새끼…….

“…씨발.”

생각할수록 열이 뻗친다. 욕도 아까운 새끼가 아니라 진짜 씨발 새끼가 아닌가.

섀넌이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그를 발로 걷어차며 몸을 돌려 눕혔다. 아직도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고간에 차마 손을 대는 것도 싫어서 구두 끝으로 콱 밟아 짓뭉갰다.

“아으아아악―!”

터진 고환은 어차피 다시 회복되지만, 그 고통까지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수컷끼리 하는 씹질이 그렇게 좋으면 언제든 말해.”

“악!”

치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무른 살갗이 터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고통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거의 혼절 직전인 로렌스의 고간을 구두 끝으로 콱, 콱 짓이긴 섀넌이 잇새로 억눌린 말을 내뱉었다.

“내가 손수 네 좆을 잘라다 그 입에 처넣어 줄 테니까.”

섀넌이 발을 떼자마자 로렌스의 손이 제 고간으로 들러붙었다. 그가 발작하듯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괴성을 질렀다.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기울이며 열 오른 한숨을 길게 내쉰 섀넌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아 손이 덜덜 떨렸다.

저 엿 같은 새끼가 자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든 소름 끼치고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흐트러진 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정돈한 그가 그대로 화이트팽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그가 방금 로렌스의 손목을 움켰던 제 손을 쥐었다 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몇 달간 흡혈이 부실했던 데다가, 갑자기 화가 치솟으니 빈혈이 일고 순간적으로 힘을 쓴 손이 아릿했다.

오늘은 꼭 사냥하려 했는데….

로렌스 때문에 입맛이 싹 달아나 버린 그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거리를 걸었다.

화를 내는 것도, 역겨운 상황을 곱씹으며 욕을 하는 것도, 다 기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지금 만사가 다 귀찮았다.

사냥도 귀찮아 차라리 굶어 죽기를 바랄 만큼.

인파가 몰린 거리로 나오자 다시금 시선이 들러붙었다. 습관적으로 품을 더듬어 제 안경을 찾던 섀넌이 술집 안에 두고 왔음을 깨닫고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지긋지긋한 동네…….

어느새 완전히 어둠이 내린 하늘 위에 만월이 떠올랐다.

인파 사이를 비척비척 빠져나가는 섀넌의 검은 머리칼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은 달빛이 집요한 음영을 드리웠다.

* * *

만개한 봄과 함께, 둥글게 차오른 달빛이 거대한 석조 성의 최상층까지 소리 없이 범람했다.

후욱, 후욱, 침대에 얼굴을 처박은 채 엎드려 몸부림치는 윈터의 입에서 열 오른 숨이 가파르게 쏟아졌다.

그는 케인타운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만월을 견디고 있었다.

케인타운에 있을 땐 숲으로 사냥을 나가 어떻게든 해가 뜰 때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 그랬다간 자칫 같은 시기에 발정을 겪는 동족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윈터는 이 실낱같은 이성을 놓쳐 버려 저와 같은 발정을 맞은 동족을 섀넌이라고 착각하며 안고 싶지 않았다.

굽어든 등 위로 바짝 조여든 근육이 울근불근 움직였다. 윈터의 손바닥만큼 작은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 둔덕진 굴곡을 따라 새파란 음영을 흘렸다.

‘아파…….’

너무 아팠다. 배출하지 못한 아래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핏줄이 솟아 있었고, 온몸은 열에 들끓어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윈터는 이제 제 발정기와 만월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발정기는 만월 전후를 지나간다. 다른 날의 발정은 그저 조금 불편한 정도였지만, 만월과 겹치면 거의 통제 불능의 고통이 찾아 온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강한 정기로 들어찬 몸속을 직격으로 관통하기 때문이다.

“아…….”

조악한 침대의 물소 가죽 시트를 긁어 대던 손이 웅크린 무릎 사이 고간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노팅이 시작된 성기는 누군가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귀두구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있지도 않은 내벽을 빠지지 않게 꽉 고정해 두고 사정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열이 바짝 올라 뜨거운 기둥을 손으로 쥐자 그 접촉만으로도 귀두 끝이 움찔거리며 체액을 토해 냈다.

‘안 돼…, 안 돼…….’

자위는 안 돼.

자칫하면 이성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끝까지 정신을 붙들어 매고 아침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나 그 의지와는 다르게, 어느새 윈터의 손은 제 것을 느리게 흔들고 있었다. 시트에 이마를 묻은 채 아래를 내려다본 윈터가 성기를 쥔 손에 남은 잇자국을 응시했다.

이제는 희미한 흉터만 남아 도드라지게 올라온 그 자국을 빤히 보는 윈터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찌걱찌걱, 질척한 소리가 달뜬 숨으로 가득한 방 안에 울렸다.

“후으…, 안 돼…….”

‘이렇게 껍질이 다 벗겨지도록 비벼 대니까 당연히 아플 수밖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흔들렸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이 윈터의 배를 타고 내려와 성기와 음낭을 뭉근하게 어루만졌다.

“안 돼…, 안 돼.”

윈터가 제 뺨을 탁탁 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도록 걸어 잠그고 아예 못을 박아 둔 침실 문을 힐끗 확인한 그가 다시 고개를 시트에 파묻었다.

성기를 쥔 손가락 새로 체액이 줄줄 흘렀다. 마치 누군가의 안을 드나들 듯 물소 가죽 시트에 비벼진 성기 끝이 왈칵왈칵 정액을 토해 냈다.

“흐윽…, 읏…….”

‘좋아……, 잘하고 있어, 윈터.’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윈터가 고개를 뒤틀며 시트에 젖은 눈을 비볐다. 식은땀이 흥건한 이마 위로 은백색 머리칼이 들러붙었다.

‘쉬…, 괜찮아.’

아니야, 아니야. 괜찮지 않아.

윈터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몸을 움찔거렸다. 시트 위로 농도가 짙고 희뿌연 정액이 흩뿌려졌다. 지옥 같은 쾌락이 그의 전신을 적셨다.

하아, 하아…, 안 돼…….

그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환영을 떨쳐 냈다.

‘조금만 더, 하아……, 깊이.’

그저 듣는 것만으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 달콤한 한숨과 차분한 목소리가, 촉감을 가진 무언가처럼 귓바퀴를 건드리고 흘러내렸다.

“섀넌…, 섀넌…….”

매혹적인 환영이 갈퀴처럼 그의 온몸을 붙들고 끝도 없는 심해로 끌어들이는 듯했다. 흰 팔이 윈터의 목을 감아 안고 머리칼을 헤집으며 뒤통수를 감쌌다.

‘좋아, 윈터, ……조금만 더, 하아…, 좋아…….’

“샤…….”

윈터는 제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하얀 얼굴을 손에 쥐었다.

‘하으, 윈터…, 하아…, 좋아, 읏…….’

손바닥에 쏙 감기는 그 뺨의 감촉,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신음, 어깨를 붙드는 가느다란 손, 움찔거리는 허리, 뜨겁게 조여드는…….

손끝에 걸린 물소 가죽 시트가 투두둑 찢어졌다.

이를 악물고 환영을 뿌리친 윈터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침대 구석으로 몸을 물렀다. 축축한 석벽에 등을 기댄 그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으로 바짝 곤두선 가슴팍이 발작하듯 오르내렸다. 화로의 열기로 달궈진 방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는 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직 굳게 잠겨 누구도 드나들지 않은 침실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윈터가 불규칙하게 날뛰는 숨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아무리 못을 박아 두었어도, 저 나무문은 자신을 가둬 두기엔 몹시 조악했다.

본능에 눈이 뒤집힌 자신이 언제든 우습게 부수고 나갈 수 있는 그 문을 바라보며, 윈터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터질 듯 발기해 있는 성기는 몇 번이나 정액을 쏟아 내어 희게 번들거렸다. 허공에 고개를 바짝 쳐들고 꺼떡이는 성기의 형태는 흉물스러웠다.

‘쉬…, 괜찮아. 윈터, 자연스러운 일이야.’

윈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연스럽지 않아. 이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야…!

입술을 꽉 깨문 이 끝에서 붉은 피가 금세 번져 나왔다. 윈터가 발발 떨리는 손을 뻗어 침대 옆 테이블 위의 물건을 쓸어 버렸다. 돌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촛대가 카랑카랑 요란한 소리를 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날붙이를 집어 든 그가 칼끝으로 제 고간과 성기 뿌리의 경계를 콱 찢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날뛰던 성욕을 잠시 덮었다.

도려내고 싶어.

이따위, 빌어먹을…….

‘이걸 자르면 사람이 될 줄 알았어?’

칼날을 꽉 쥐어 피가 줄줄 흐르는 손 위로 하얗고 서늘한 손이 뱀처럼 감겨 왔다. 비웃음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예민한 귀두 끝을 툭 건드렸다.

‘세상 모두가 널 더러 괴물이라 말해도, 심지어 너조차 그 말에 동감한다 해도, 너만은 너 자신을 괴물로 여겨선 안 돼.’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번들거리는 귀두 끝을 머금었다. 달콤한 사탕을 빨듯 감미로운 얼굴로, 붉은 눈이 윈터를 올려다봤다.

‘내가 널 미워한다면 이런 짓은 할 수 없겠지. 그렇지 않니?’

축축한 혀가 귀두 끝을 문지르고 적셨다. 입술 안쪽의 점막이 팽팽하게 부푼 선단을 뒤덮고 빨았다.

춥, 추웁, 질척한 소리 사이로 서늘한 숨결이 예민한 살갗을 스쳤다. 혓바닥의 작은 융기가 움찔거리는 요도구를 집요하게 문지를 때마다 윈터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요의가 치솟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성기 끝으로 치달았다.

너무도 실체 같은 그 환영에 매몰되어 있던 윈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칼을 떨어뜨렸다.

거의 넘어질 듯 침대 밖으로 튕겨 나온 그가 떨리는 눈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다행히…….

여전히 자신은 혼자였고.

정면에 보이는 거울에는 인간도 늑대도 아닌 괴물이 다리 사이에 피와 정액을 질질 흘리며 서 있었다.

* * *

어둠이 물러간 설원의 아침이 유난히 밝았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끈질기게 들이치는 햇볕에, 윈터의 감긴 눈이 일그러졌다.

―윈터, 윈터…? 안에 있어요?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뜬 윈터가 얼른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와 정액이 굳어 엉겨 붙은 다리 사이는 엉망이었고, 침대 시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얼른 침대 밖으로 나온 윈터가 짜증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문밖에서 약간 안도한 듯한 갈리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을 찾아 제 다리 사이를 닦던 윈터가 신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굳은 피가 떨어져 나가자 칼로 그은 상처가 아릿했다.

억지로 아픔을 참으며 얼른 흔적을 닦아 낸 윈터가 그것을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숨겨 놓고는 바지를 꿰입으며 문 앞에 섰다.

―뭐 하고 있어요? 옷 입어요?

“네, 잠깐 기다리세요.”

한 손으로 바지춤을 여미며, 다른 한 손으로 문에 박힌 못을 뜯어내던 윈터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못을 박아 두면 뭐 하는가. 이렇게나 쉽게 빼낼 수 있고 언제든 부술 수 있는데…….

다음번엔 갈리나에게 부탁해서 크고 단단한 자물쇠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윈터가 문을 열었다.

품에 뭔가를 가득 안고 문 앞에 서 있던 갈리나가 약간 의아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제법 오래 걸리기에 위아래로 옷을 다 갖춰 입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겨우 바지 한 장만 걸친 그를 보았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침실 문을 닫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 문에 새로 생긴 못 자국을 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만월이었지.

“…간밤엔, 잘 잤어요?”

어수선한 방 안, 흐릿하게 남아 있는 특유의 피 냄새를 맡은 갈리나가 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윈터가 말없이 셔츠를 양팔에 꿰입었다.

아직도 희미한 잇자국이 남아 있는 그의 어깨와 목덜미가 이내 흰 셔츠에 가려졌다.

“……그 옷은 안 불편해요?”

그걸 물끄러미 보던 갈리나가 질문을 보탰다. 손끝으로 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우던 윈터가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어딘가 냉랭한 특유의 음성이 고저 없이 대답했다.

“평생 입어 왔던 옷인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내 말은, 사람들 시선이 불편하지 않냐고요. 그런 옷을 입으면 늘 눈에 띄니까.”

갈리나가 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녀는 윈터의 편의를 위해 종종 시라트 밖에서 그의 치수에 맞는 옷을 몇 벌 주문해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당장 늑대족의 생활 양식을 온전히 따를 수 없는 그를 위한 배려였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가 자신들에게 동화되길 바랐다.

“내게 시선이 들러붙는 이유가 꼭 이 옷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내가 당신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달라지지 않을 시선인데.”

윈터가 반대쪽 소매 단추를 마저 채우며 대꾸했다. 어차피 이들은 제가 뭘 입고 뭘 하든, 제 몸에 자하카의 피만 흐르면 그걸로 된 족속들이 아닌가.

“…….”

잠시 머뭇거리던 갈리나가 품에 안고 있던 두꺼운 털 망토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럼 코트 위에 이거라도 걸쳐요.”

윈터가 제 앞에 내밀어진 짐승의 털가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슬라나 다른 늑대들이 입는 것처럼 결이 거칠지 않고 깔끔하게 가공되어 있었다.

갈리나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신경 썼다는 걸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망토의 털은 가지런하고 윤이 났다.

“냄새 안 나요.”

윈터가 말없이 그걸 내려다보고 있자 갈리나가 얼른 말을 보탰다.

“물론, 당신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장로들과의 회동이 있는 날이니까 이걸 입는 게 좋겠어요.”

그에게서 뭐라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갈리나가 조급하게 망토를 펼쳤다.

“내가 입혀 줄게요. 막상 입어 보면 편할,”

“됐어요.”

윈터가 갈리나의 손에서 망토를 가져갔다.

“제가 입을게요.”

“혼자 입을 수 있어요? …그, 가죽끈을 반대쪽에 고정하는 고리가,”

“이미 몇 달을 봐왔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봐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윈터가 셔츠 위에 코트를 다 갖춰 입고는 망토를 걸쳤다. 안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짐승의 가죽은 마치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묵직하고 미지근하게 그의 등에 감겼다.

양쪽 어깨에서 이어지는 가죽끈을 대각선으로 내린 윈터가 아무 말 없이 제 몸에 맞게 꽉 고정했다.

두 손을 맞잡고 그 모습을 보던 갈리나가 약간 초조하게 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윈터가 몸을 돌렸다.

“…이제 만족해요?”

그러나 그 순간 갈리나는 윈터의 옷매무새보다, 그의 표정이 더 눈에 들어찼다. 더없이 공허한 체념이 뒤섞인, 폐허 위의 잿빛 안개 같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그의 표정이.

‘내가 이곳에 아무리 정을 붙이려고 노력해도, 만약 그게 안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요.’

“……멋지네요.”

갈리나가 애써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서 이제는 갈 수 없는 저편을 내다보는 듯한 그의 눈은, 이곳에서 몇 달을 지냈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갈리나는 예전에 윈터가 케인타운에 있었을 때의 눈빛이 어땠는지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말디 곁에 있던 그는 적어도 지금보단 잘 웃고 꽤 쾌활했던 것 같다. 그런 그를 멀리서 지켜보며, 자신과 고향으로 돌아가도 금세 적응하리라고 짐작하기도 했으니까.

“잘 어울려요.”

갈리나의 칭찬에도 윈터는 대답 없이 그저 무감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생각했다.

자신이 데려온 남자는 자하카인가.

아니면 낯선 이방인인가.

언젠가 그가 시라트를 온전한 제 땅으로 여길 수 있을까.

‘……아직 한 계절밖에 안 지났잖아.’

내가 너무 조급한 거야, 그녀는 애써 불길한 생각을 갈무리했다.

츠즈즈즛, 남부로 떠나는 새들이 우는 소리가 손바닥만 한 창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겨우내 이곳에 머물렀다가, 봄철 산란기가 되어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윈터가 문득 창가로 다가갔다.

케인타운에선 여름이 되면 꼭 이 소리가 들렸었는데. 이곳에서 떠나온 새들이 우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떼가 하얀 하늘 위를 점점이 수 놓으며 남쪽으로 향했다.

창 옆의 석벽을 짚은 윈터의 손끝이 조용히 그 궤도를 따라 움직였다.

* * *

츠즈즈즛, 새 우는 소리가 여관 밖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그 틈새로 줄기차게 우는 매미 소리가 스며들었다.

여름은 따뜻한 대신 무척 소란스러운 계절이다.

그러나 이 여관 안은,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들은 하나같이 창백하고 앙상했다.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흰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을 간 역참에 딸린 작은 여관의 더러운 나무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은 섀넌이 바닥에 툭 부딪힌 제 손을 내려다봤다.

갑작스럽게 흡혈을 많이 한 탓에 가벼운 흥분이 일어 손끝이 떨렸다.

“섀넌, 다 끝났어?”

안으로 들어온 카일이 바닥에 있는 시신들을 아무렇게나 발로 밀어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셔츠 앞섶은 섀넌과 마찬가지로 온통 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섀넌이 피 묻은 손등 대신 손목과 엄지의 경계로 제 입술을 닦으며 어, 하고 대답했다.

위층에서 별안간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카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리즈는 아직 식사 중이신가 보네.”

그가 섀넌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두었다.

어쩐지 그 침묵 안에 기묘한 공허가 스며들었다. 포만감 뒤에 찾아오는 적막이었다. 섀넌이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얹었다. 맥없이 늘어진 손끝에서 진득한 피가 추욱, 축 떨어졌다.

카일이 말없이 섀넌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벽면에 뒤통수를 툭 기댄 섀넌의 눈이 느리게 열렸다 닫혔다. 방금 풍족한 흡혈을 마쳤음에도, 그의 눈은 어쩐지 허무하고 텅 비어 보였다.

카일은 저런 눈을 이미 예전에도 본 바 있다.

섀넌이 20여 년 전 서북부 저택에 칩거하고 있었을 당시, 혹시라도 그가 죽을까 봐 걱정되어 번질나게 찾아갔을 때마다 봤던 눈이었다.

별안간 맹약의 증표와 함께 나타난 늑대 새끼가 아니었더라면, 섀넌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

카일은 그가 십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 장담한다.

그리고, 섀넌의 앞날엔 이제 그 어떤 이변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를 붙잡을 만한 무언가가 전무하다는 뜻이다.

“……좀 어때, 기분이?”

카일이 넌지시 물었다. 힐끗 그에게 눈을 돌린 섀넌이 다시 정면에 시선을 걸어 두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카일이 다시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섀넌, 너 요즘,”

“빌어먹을, 좀 닥쳐 봐. 제발.”

기어이 카일의 말을 자른 섀넌이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흡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네 목소리가 고막에 직격으로 꽂힌다고.”

긴 한숨을 천천히 내쉰 섀넌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끄윽……,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위층에서 단말마 같은 신음이 작게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식사 중에 인간이 최대한 오래도록 의식을 잃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쳐다보는 걸 좋아한다.

별안간 섀넌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포만감 때문에 움직이기 귀찮은 카일은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서도 굳이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여관 밖으로 나온 섀넌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입을 틀어막은 섀넌이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흙 위로 새빨간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그의 손가락 새로 방금 흡혈했던 피가 줄줄 쏟아졌다. 코와 입에서 흐른 피가 턱과 뺨에 엉망으로 얼룩졌다.

구토 때문에 갑자기 체온이 낮아졌는지, 온몸이 혹한에 내던져진 것처럼 벌벌 떨렸다.

뱀파이어들의 흡혈은 본래 소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흡수되기 때문에, 인간의 음식을 억지로 삼킨 경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속을 게워 낼 일이 없다.

평생 살며 이런 구토를 거의 겪어 보지 못한 섀넌은 뱃속에서 액체가 역류하는 이 감각이 아직도 익숙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이 감겼다. 여름의 열기에 달궈진 여관 건물의 벽면은 누군가의 체온과 비슷했다.

잠시 그 자리에 기대어 서서 숨을 가다듬던 섀넌이 이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 * *

“오래 기다렸지? 이제 가자.”

레이스가 달린 흰 양산을 손에 든 엘리자베스가 계단을 내려오며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드레스의 앞이 온통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이곳에 올 때는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얬던 장갑은, 이제 완전히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제자리에 꼼짝 않고 주저앉아 있던 카일이 웃으며 일어났다.

“우리 자기, 옷 색깔 봐. 섹시하다. 체리 케이크 같아.”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았다.

“섀넌은?”

“아, 밖에.”

그녀와 밖으로 나가면서 고개를 돌린 카일이 고요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새 먼저 갔나.”

그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엘리자베스가 문득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가리켰다.

그걸 본 카일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급히 쏟아 낸 듯 보이는 그 피가 무얼 의미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뱀파이어가 흡혈한 피를 저렇게 다시 토해 내는 걸 평생 본 일이 없었다. 뱀파이어에게 섭식 장애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다. 간혹 극심한 우울감을 겪는 뱀파이어들이 아주 드물게 피를 흡수하지 못하고 게워 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섀넌에게서.

흥건한 피 웅덩이로 향해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엘리자베스에게 향했다.

“…….”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 * *

차가운 설풍에 섞여든 미지근한 여름 냄새가 온기 가득한 석조 성의 창 안으로 엄습했다.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곳이라지만 이 시라트에도 나름의 사계절이 있었다.

타지인이 느끼기엔 조금 더 춥고 조금 덜 춥고의 차이일 뿐이나, 이곳에 사는 모든 늑대족은 그 미미한 변화를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성 벽면의 균열마다 낀 이끼에서 녹진한 습기가 흘러내렸다. 윈터가 손을 뻗어 창턱 바깥쪽의 그 서늘한 물기를 만져 보았다.

‘S는 샤.’

…그때가 봄이었나, 아니 여름이었나.

세상이 온통 흑과 백으로 나뉜 것처럼 무미건조한 설원을 내려다보며, 윈터는 까마득히 먼 과거를 회상했다.

싱그러운 정원의 풀 냄새, 늘 자신을 안락하게 바라봐 주던 얼굴.

‘아직 네 이름도 못 쓰면서 내 이름은 어떻게 쓰는 거야.’

웃음기가 감도는 다정한 목소리가 훈훈한 여름 냄새에 섞여 제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섀넌.’

‘사넌.’

‘섀넌.’

‘샤….’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발음을 고쳐 주던 하얀 얼굴이 손에 감길 듯 떠올랐다. 섀넌은 제 아랫입술을 검지로 톡 누르고는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혀 모양을 느리게 보여 주곤 했다.

윈터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 순간이 좋았다. 온전히 제게 몰두하는 듯한 시선이 좋았던 건지, 발음을 보여 주려고 또박또박 입술을 움직일 때의 그 얼굴이 좋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모든 게 다 좋아서, 자신이 언제까지고 섀넌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당시 자신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일부러 못하는 척 연기라도 했으리라.

그랬으면 좀 더 오래 그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었을 텐데…….

“윈터.”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며 갈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윈터가 손수 제 옷을 들고 온 그녀를 보며 입꼬리만 살짝 당겨 올렸다.

“시종이 해야 할 일을 왜 직접?”

“오는 길에 마주쳐서 제가 대신 받아왔어요. 여기.”

갈리나가 잘 개어진 그의 셔츠와 바지를 건넸다.

“근데 이제 이 셔츠는 버려도 되겠어요. 뭘 모르는 제 눈으로 보기에도 너무 때가 탔네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만 입고 버릴게요.”

그는 아직 이곳 복식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맨몸을 보여 준다는 게 그의 상식선에선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그 복장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망토 안에 입는 옷들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제 앞에서 등판을 내보인 윈터의 모습을 빤히 보던 갈리나가 말했다.

“결국 흉터가 남긴 하네요. 치료를 제때 했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텐데.”

침대 위에 옷을 펼쳐 청결 상태를 확인하던 윈터가 힐끗 그녀를 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흉터요?”

“…잇자국이요. 몸의 흉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잇자국은 보기가 좀 그래서.”

“…….”

곧 곧고 두꺼운 등이 흰 셔츠에 가려졌다. 등을 돌리고 있어 윈터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오는 침묵에서 갈리나는 그가 이 얘기에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갈리나가 팔에 걸치고 있던 털 망토를 윈터의 어깨에 걸쳐 주려 펼치자, 윈터가 그녀의 손을 막으며 망토를 건네받았다.

그저 아주 사소한 도움일 뿐인데, 옷 하나 걸쳐 주는 것도 거부하는 윈터의 태도에 갈리나는 여전히 벽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짐승의 털이 풍성한 망토를 직접 제 어깨에 걸친 윈터가 가슴팍을 가로지른 가죽끈을 잘 고정했다.

“오늘은 특히 몸조심하세요. 어디서 갑자기 화살이나 칼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오늘은 시라트 서쪽 외곽 숲에서 사냥 대회가 열린다.

하슬라는 나이가 꽤 많아 사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막사에서 먹고 마시며 청년들이 사냥해 온 짐승을 구경하고 등수 따위를 매겨 상을 내리거나 할 것이다.

갈리나는 이런 날 기습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기실 윈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저를 가만 내버려 둔 하슬라가 하필 사냥하는 날 자신을 건드리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무 뻔했다.

“벌써 반년이나 하슬라가 날 그냥 뒀는데, 오늘이라고 다르겠어요?”

몸을 돌린 윈터가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대답했다. 갈리나는 그와 대화할 때마다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윈터는 무슨 얘기를 하든 늘 저렇게 입가를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웃고 있지 않아서, 그 기분을 짐작기 힘들었다.

“…언제든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갈리나가 진지하게 말을 붙였다. 윈터가 여전히 웃는 입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조심하죠.”

“……잔소리 듣기 싫어서 대충 대답하는 건 아니죠?”

“난 늘 조심하고 있어요. 죽더라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

“…….”

갈리나는 그의 뒷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짐짓 분주하게 침실을 나갔다.

검은 늑대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석조 성을 나와 아래로 내려온 윈터가 인근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듣다 보니 비명이 아니라 울부짖음이었다. 갈리나와 윈터의 시선이 곧장 그 방향으로 향했다.

해진 가죽을 다닥다닥 이어붙인 넝마를 대충 몸에 걸친 사내가 양손에 새빨간 무언가를 안아 들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윈터는 단번에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기형적으로 몸이 꺾이고 튀어나온 작은 늑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인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아…, 옆에서 갈리나의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막사 안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사내에게 울고불고 매달리며 알 수 없는 원망이 담긴 소리를 질렀다.

“……얼른 가요. 늦겠어요.”

갈리나가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윈터를 재촉했다.

그녀를 따라 방향을 튼 윈터가 힐끗 갈리나를 내려다봤다. 저런 광경을 봤음에도, 갈리나는 크게 안타까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저런 일은 흔해요. 너무 오래 쳐다보지 말아요. 괜히 저 사람들 심기만 더 불편해지니까…….”

“…발현 중에 죽는 경우가 흔해요?”

윈터의 물음에, 갈리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다섯 명에 두 명꼴로 그런 일이 발생하죠. 간혹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고.”

갈리나가 씁쓸한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래서, 전 당신이 어딘가 장애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어요.”

“…….”

“매일 밤 신께 기도드렸었죠. 늑대들도 종종 케어를 잘못해서 저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리말디가 해내기엔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거든요.”

“…….”

“근데 생각보다 너무 멀쩡해서 조금 놀랐었어요.”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지만, 윈터는 제게 발현이 찾아올 때마다 섀넌이 그 모든 순간을 함께 감내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쉬…, 괜찮아, 진정해. 겁낼 필요 없어, 자연스러운 일이야.

자신은 귓바퀴에 고이는 차가운 숨결과 그 따뜻한 목소리에 매달려, 온몸의 관절과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 냈었다.

“뭐, 맹약이 걸려 있으니 어떻게든 애를 쓴 거겠죠.”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머쓱해진 갈리나가 말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로 표현하기엔, 섀넌의 노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어요.”

친부모들도 종종 해내지 못하는 일을 섀넌은 완벽하게 홀로 감당했다.

자신이 그의 품에 안긴 채 토사물로 셔츠를 적실 때도, 안면 골격이 뒤틀려 눈알이 터질 뻔했을 때도, 그는 한 번도 제 앞에서 당황하거나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늘 그 차분하고 우아한 얼굴로 자신을 안심시키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온몸으로 제 고통을 감싸 주었다.

그런 노력을 고작 맹약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섀넌은 제게 너무도 많은 것을 쏟아부었고, 잔인하게도 자신은 그걸 이렇게나 먼 곳까지 와서야 아주 느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그를 헐뜯고 상처 주어서는,

……정말로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요, 윈터.”

갈리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윈터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목을 꽉 메운 응어리를 애써 집어삼켰다.

이따금 치솟는 감정은 발작과 비슷했다. 예고 없이 솟구쳤다가, 주변에서 저를 붙드는 동족의 음성에 억지로 가라앉혀야만 하는.

“…….”

힐끗 시선을 내린 윈터는 생각 이상으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갈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직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없어서 그래요. 잘 몰라서 그랬던 거지 그 사람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잔주름이 내려앉은 얼굴이 담백하게 제 실수를 인정했다. 이마 앞쪽의 잔머리가 희끗희끗한 갈리나를 내려다보던 윈터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나이가 이미 40은 훌쩍 넘은 듯한데, 그러고 보니 아직 혼자인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장장 반년 만에 인지하다니, 윈터는 스스로의 무심함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윈터가 계속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각인 안 했어요? 늑대들은 평생 한 사람과 짝으로 맺어진다면서요.”

그의 물음에 갈리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어요.”

“각인이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거였나요.”

“아뇨. 운 좋게 아직 없었을 뿐이에요. 사실 앞으로도 계속 없었으면 좋겠고요. ……지금 상황이, 시절 좋게 연애나 하고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그 뒤로는 계속 침묵이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간격은 여전히 일정한 거리로 벌어져 있었지만, 예전처럼 어색하지는 않았다. 윈터와 갈리나는 불편하지 않은 적막 속에 각자 내던져진 채 숲까지 함께 이동했다.

* * *

시라트의 숲은 기묘했다.

윈터가 처음 숲을 보았을 때 제 눈을 의심했을 만큼.

이 극지방에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활엽수와 온갖 계절 식물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은 흰 눈.

인간 사회의 상식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일 년 내내 혹한이 휩쓰는 이곳에 이런 풍족한 식물과 그 식물을 먹고 살아가는 초식동물이 있을 리 없었다.

갈리나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달의 여신이 내린 축복’이고, 그 신이 인정하는 왕은 오직 ‘자하카’뿐이며, 지금은 그릇된 자가 왕좌에 앉아 있어 숲에 흉조가 들고 사냥감이 점점 부족해 지고 있다고 하는데…….

윈터는 그게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느 정도 불가사의한 원인에 의해 이런 숲과 자원이 유지되고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잘못된 왕 때문에 흉조가 들어 자원이 부족해지고 있다는 건 그저 갈리나가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지어낸 말을 자기 자신도 어느새 믿게 된 것 같았다.

‘그 말이 사실이면 이렇게 사냥감이 풍족할 리 없지.’

윈터가 조용히 활시위를 당겼다.

쫘아악, 탄성 있는 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활대가 휘는 소리가 아주 작게 그의 손안에서 울렸다.

얼어붙은 나무뿌리 뒤로 잔뜩 몸을 웅크린 사슴 한 마리를 응시한 채 화살 끝을 겨누던 윈터가 어느 순간 활을 툭 내렸다.

가지 위에 나란히 앉아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는 붉은 눈 까마귀들.

어쩐지 원인 모를 기시감이 스쳤다.

그가 기척도 숨기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그 소리에 놀란 사슴이 파드득 달아났다.

윈터는 사냥감이 달아나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심쩍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숲의 정경을 훑던 윈터의 표정이 점점 더 의심스럽게 일그러졌다.

……분명 어딘가에서 섀넌 냄새가 난 것 같았는데.

너무도 희미해서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이제는 그 냄새를 맡지 못한 지 오래되어 다른 냄새와 헷갈리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며 후각을 곤두세워도 아주 찰나 간 맡았던 냄새는 다시 나지 않았다.

문득 윈터가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살폈다.

누군가의 발에 짓밟힌 나뭇가지, 흰 눈 위로 비어져 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묻은 외부인의 냄새, 조금 질질 끌린 듯한 작은 발자국, 중간중간 끼어 있는 손자국…….

사족보행도 이족보행도 아닌 애매한 걸음을 걷는 추격자들의 구부정한 자세가 떠올랐다.

별안간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었다. 박동이 지나치게 강해서 귀가 먹먹하고 어지러웠다.

추격자가 시라트에 잠입할 일이 뭐가 있을까.

섀넌이 보낸 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대체…….

다른 이유를 떠올려 보려 해도 마땅히 생각 나는 게 없다.

분명 아주 찰나 섀넌의 냄새가 났었다.

정말 섀넌이 추격자를 보냈을까. 왜? 내게 뭔가 전할 거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 그가 왜. 그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다신 날 보고 싶지도 않을 텐데 왜. 하지만 그게 아니면 추격자가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가…….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윈터!”

그와 동시에 갈리나의 고함이 가로질렀다. 더는 맡아지지도 않는 섀넌의 냄새를 좇으며 온통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겨 있던 윈터가, 그제야 뒤늦게 몸을 돌렸다.

“아.”

멍한 머리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어깨에 첨예한 통증이 엄습했다.

기울어지는 시야에 필사적인 얼굴로 제게 달려드는 갈리나가 보였다. 윈터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어깨에 꽂힌 화살을 내려다봤다.

“윈터, …윈터!”

하…,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큰 몸이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한심해……, 이딴 것도 하나 못 피해서는.

그래 봤자 작은 화살일 뿐인데, 아주 작은 화살일 뿐인데…….

그의 의식이 툭 끊겨 버렸다.

* * *

하슬라가 성큼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몰려와 있던 늑대들이 양옆으로 황급히 갈라졌다.

침상에 누워 있는 윈터를 본 그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갈리나? 저 손톱만 한 화살촉 하나에 애가 이렇게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됐다고?”

화살촉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검은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그 부위를 수건으로 틀어막으며 꾹 누른 갈리나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사려 물고 억지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화살에 독이 묻어 있던 것 같습니다.”

늑대가 사냥 중에 독화살을 쓴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 화살이 ‘실수로’ 윈터에게 날아온 건 아닐 텐데.

갈리나는 지금 이 상황이 모두 진절머리 나도록 역겹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독? 대체 어떤 놈이 사냥에 쓰는 화살에 독을 쓴단 말이야. 그딴 한심한 놈이 대체 누구야!”

표면이 거친 일갈이 하슬라에게서 터져 나왔다. 막사 안에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 일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당사자가 바로 당신이잖아. 대체 누구겠어.

마치 자신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는 듯 화를 내는 하슬라를 보며, 갈리나는 부글부글 치솟는 살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슬라가 제 뒤에 있던 카힌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윈터의 곁으로 밀쳤다.

“어떻게든 살려.”

불식 간에 내팽개쳐진 카힌이 두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흉흉한 살기가 어린 눈을 부릅뜬 하슬라가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일갈했다.

“네놈이 제대로 하는 일이라곤 이런 거밖에 없잖아. 응? 어떻게든 살려 내! 이제 겨우 더러운 불멸자 손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온 아이를 반년 만에 잃을 수는 없지. 안 그런가, 갈리나?”

“…….”

갈리나가 입술 안쪽을 꽉 짓씹은 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화살의 출처를 찾아내서 그놈 내 앞으로 끌고 와.”

모두가 듣는 앞에서 제 정예병들에게 명을 내린 하슬라가 미간을 꿈틀거리며 윈터를 내려다봤다. 그가 화를 짓씹듯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막사를 휙 빠져나갔다.

마치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느낌이었다.

하슬라를 호위하는 검은 늑대들마저 모두 빠져나가자, 막사 안엔 카힌과 갈리나, 그리고 몇몇 늑대들만이 남아 있었다.

* * *

“아.”

따끔해진 손끝에 빨간 피가 작게 맺혔다.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오늘 처음 입은 여름용 코트에 꽂혀 있던 시침 핀을 빼냈다.

“어머, 괜찮으세요? 가봉하면서 꽂아 뒀던 게 남아 있었나 봐요. 가끔 의상실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다니까…. 손수건 드릴까요? 어디 좀 봐요.”

“괜찮습니다.”

제 손을 살피려는 듯 들러붙는 여자를 밀어낸 섀넌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저택에 들이닥쳐 귀찮게 구는 바람에 끌려 나왔던 파티는 끔찍이도 지루했다.

게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를 뜨려는 저를 붙잡고 억지로 파트너를 붙여 준 카일의 저열함은 말도 못 하게 역겨울 지경이다.

섀넌의 마차에 함께 올라탄 여자가 그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은근히 제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흰 손을 무심히 일별한 섀넌이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

아, 제기랄.

카일이 제게서 뭘 확인하고 싶은 건지, 지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섀넌은 알고 있었다.

……제 정신 상태가 멀쩡하다는 걸 다른 방법도 아니고 굳이 이런 식으로 증명해야 하나.

과연 머릿속에 섹스와 유흥밖에 없는 새끼가 할 만한 행동이다.

‘더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군.’

물론 섀넌은 그런 그의 유치함에 장단 맞춰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적당한 핑계를 대어 여자를 집에 데려다주고는 자신 또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러셀, 출발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케인타운을 가는 건 처음이네요.”

여자가 살짝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의 귓불 아래를 입술로 매만지는 여자에게선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섀넌은 여자의 취향이 꽤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체취와 잘 어우러지는 향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고, 예전이었다면 제법 만족하며 품었을 만한 향이었다.

“술을 많이 드시던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해요? 나만 취한 것 같네….”

뺨과 귀 근처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흔들렸다.

제게 쏠려 있는 여자의 어깨를 감싼 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섀넌이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이유 모를 거부감이 살갗에 오스스 돋아났다.

섀넌이 살짝 몸을 뒤로 물려 제게 들러붙은 여자를 떼어 냈다.

“죄송한 얘기지만, 음, ……성함이?”

“아.”

여자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이미 파티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얘기를 나눈 게 몇 시간인데, 아무리 섀넌이 말수가 적었다 한들 제 이름까지 기억 못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셰일라에요. 셰일라 골든블렛.”

“음, 골든블렛 영애.”

섀넌이 애써 입꼬리만 올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어머, 그러신 것 같았어요. 내내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셔서.”

다행히 되돌아오는 빠른 수긍에, 섀넌 또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여자가 별안간 그에게 폭 안겨 왔다. 섀넌의 턱 끝에 여자의 입술이 부딪혔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뺀 섀넌이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을 땐 혼자 있는 것보다는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당신의 기분을 풀어드릴 수도 있는데…….”

파티에서 내내 술만 들이켜는 섀넌을 따라 저도 모르게 술을 마시다 주량을 넘긴 여자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기가 실린 그녀의 호흡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섀넌이 숨을 멈춘 채 나직이 말했다.

“저는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누군가를 안지 않습니다.”

“그럼 키스라도 할까요?”

여자가 섀넌의 가슴팍에 손을 대며 몸을 바짝 붙였다. 가느다란 손이 섀넌의 얇은 여름 셔츠 위를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제 뺨에 입술을 부딪는 여자를 놔둔 채 미동도 없이 화를 누르던 섀넌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

여자의 입술이 입가 근처에 닿은 탓이었다.

“…마차 안에서 이런 행각을 벌이는 건 영애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일 같은데요.”

인내심을 그러모아 입꼬리를 올린 섀넌이 그녀의 어깨를 제게서 밀어내자, 여자가 요령 좋게 웃었다.

“가는 동안 살짝 벗고 키스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럼 기분이 조금은 풀리실 것 같은데….”

‘좁은 마차 안에서 살짝 벗고 키스만 하는 것도 좋겠네요.’

섀넌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음성이 누군가와 겹쳐지고, 아까부터 이유 모르게 스멀스멀 살갗을 기던 불쾌감의 정체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커다란 몸으로 저를 벽까지 밀어붙이며 달라붙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저 마음만 앞서 서툴게 부딪쳐오던 단단한 몸, 사르르 녹아내릴 듯 접히던 눈꼬리, 호선을 그리는 입가, 이마 위로 흐트러진 한 올 머리카락,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뜨거운 숨….

짐승의 체취와 제가 쓰는 향수 냄새가 가득했던 그 마차 안이 지금은 이 여자의 향기로 가득했다.

“저도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당신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오늘 같은 밤은 놓치고 싶지 않,”

“러셀, 세워.”

섀넌이 그녀의 말을 낮게 잘랐다. 갑자기 마차가 멈추자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섀넌을 올려다봤다.

몇 번이나 떼어 냈음에도 여전히 제게 들러붙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손끝으로 천천히 밀어낸 섀넌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내려.”

“…네?”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

냉랭한 한기가 감도는 그의 눈을 마주한 여자가 그제야 스스로 몸을 물렸다. 몽롱한 술기운이 남아 있던 여자의 얼굴이 뒤늦게 조금 현실로 돌아왔다.

별안간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으로, 그녀가 물었다.

“…저, 집까지 데려다주신다고.”

“곱게 데려다주길 바랐으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어야지.”

“…….”

여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당혹으로 물든 얼굴 뒤로 마차 문이 열렸다. 열린 문과 섀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여자가 부채 끝으로 떨리는 입가를 가리며 홀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녀의 손을 잡아 준 러셀이 이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여자의 얼굴은 수치심과 의문,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섀넌은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제 손으로 마차 문을 닫아 버린 탓이었다.

마차 안에 홀로 남은 섀넌이 창을 열어 환기했다. 불쾌한 얼굴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립스틱 자국이 남은 제 뺨과 목덜미를 닦았다.

자국이 지워졌음에도 살갗을 다 벗길 듯 여러 번 문지른 그가 창밖으로 손수건을 던져 버렸다.

한여름의 온기는 늘 열이 들끓는 것처럼 뜨거웠던 누군가의 체온을 자꾸만 떠오르게 했다.

빌어먹을 그 온기, ……그 음성.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났다.

섀넌은 제 몸을 빈틈없이 휘감던 그 체온의 환영을 떨쳐 내며 눈을 내리감았다.

* * *

열이 들끓는 몸이 부드러운 시트에 감겼다.

습관적으로 이불을 끌어 올리던 윈터는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아치형 창을 보았다.

여긴 섀넌의 저택인가.

나는 여전히 케인타운에 있는 거고, 그저 긴 악몽을 꾼 것뿐인가.

‘아파…….’

입안과 목구멍이 온통 모래로 가득한 것처럼 버석버석했다. 온몸은 빳빳하고 열이 들끓었다. 어깨는 차라리 잘라 내고 싶을 정도로 첨예한 통증이 날뛰었다.

“화살을 맞았으니 당연히 아프겠지.”

서늘한 손이 이마 위에 덮였다. 눈을 깜빡이던 윈터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고요히 앉아 있는 섀넌을 바라봤다.

“…샤.”

“응.”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윈터의 표정에 이내 묘한 절망이 젖어 들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윈터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 꿈꿨나 봐요.”

“무슨 꿈.”

윈터가 손을 뻗어 섀넌의 손을 붙잡았다. 서늘한 살갗이 제 손안에 감겨 오자 그제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쏟아졌다.

“……내가, 내가 당신에게 모진 말을 하고, 상처를 줬어요.”

“너답지 않은 행동이네.”

가느다란 손끝이 윈터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상체를 숙인 섀넌의 얼굴이 윈터의 시야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왜인지 자꾸만 숨이 막혔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로 치솟는 열기가 눈꺼풀까지 번져 들었다. 이유 모를 그 열기를 무시한 채, 제 뺨을 감싸는 손에 뺨을 묻은 윈터가 메마른 입술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는……,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네깟 게 지칠 일이 뭐가 있다고.”

너무도 섀넌다운 대답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윈터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러게요, 섀넌. 내가 그렇게 쉽게 지쳐선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에요.

나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요, 당신한테.”

“…….”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냥 누구의 말도 듣지 말 걸 그랬어요.”

스스로 느끼기에도 두서없고 바보 같은 말이었다. 역시나 귓전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윈터는 자꾸만 초점이 엇나가는 눈으로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을 필사적으로 쳐다봤다.

“그냥…, 그냥 당신이 날 봐주기만 해도 그걸로도, 내겐 과분한 일이었는데……. 늘 나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여겼었나 봐요.”

한순간에 너무도 쉽게 무너뜨렸다. 알량한 자존심과 그를 향한 욕심이, 결국 모든 일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의 냄새도 맡을 수 없고 그의 얼굴도 볼 수 없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진 이곳에서, 자신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었는데.

“섀넌…, 내 말 듣고 있어요?”

섀넌.

뜨거워진 눈시울이 금세 젖어 들고 섀넌의 손을 적셨다. 그럼에도 윈터는 그 손에 매달렸다. 섀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엄지 끝으로 그의 눈물을 쓸어 닦아 주었다.

“섀넌…, 섀넌…….”

섀넌의 손바닥으로 제 눈을 덮고, 그의 손과 베개가 엉망이 되든 말든 윈터는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냈다. 그 허황된 체온에 매달려,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섀넌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꿈인 걸 안다. 제 말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도 다 안다. 그래도, 윈터는 차라리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빌어먹을 현실보다는 죽음 같은 환영이 백배 천배 나으니까…….

눈물에 젖은 은백색 속눈썹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윈터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어느새 제 손을 뒤덮고 있던 서늘한 체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여전히 이곳은 시라트였고, 제가 있는 곳은 손바닥만큼 작은 창이 뚫린 석벽으로 둘러싸인, ……석조 성의 침실이었다.

제 손으로 깨뜨려 버린 세상은 이제 이렇게 짧은 꿈에서밖엔 볼 수 없게 되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윈터는 눈앞의 현실에 절망조차 느끼지 못했다.

고요한 밤.

장작 타는 소리만이 낮게 깔린 제 침실 안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꾸벅 졸고 있는 갈리나가 있을 뿐이었다.

윈터가 어깨에 옅게 남아 있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윽.”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이 상당했다. 작게 신음하는 그 소리에 갈리나가 눈을 번쩍 떴다.

“…윈터.”

잠을 설치느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가 얼른 다가갔다.

“이제 좀 괜찮아요?”

한참이나 말없이 침실 안을 눈으로 둘러보던 윈터가 작게 말했다.

“……물 좀 주세요.”

금세 눈물이 고인 갈리나가 얼른 소매 끝으로 제 눈을 꾹 누르며 물을 따랐다. 그녀가 건넨 물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윈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갈리나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화살이었어요.”

“…….”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예요? 사냥 중도 아니었던 것 같고.”

윈터는 대답 대신 물었다.

“하슬라였나요.”

갈리나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슬라의 수하 중 한 명이요. 하슬라도 예상치 못했던 건 맞나 봐요. 좀 더 상황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윈터, 미안해요.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그랬다간 당신이 하슬라의 의심을 샀겠죠. 분명 경고를 해 줬음에도 정신 놓고 있었던 건 나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순간엔 추격자의 흔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발자국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반인반수의 보행이 남긴 자국이었다.

게다가….

‘……섀넌의 냄새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착란을 겪지 않는가.

시도 때도 없이 툭하면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보는 게 일상이고, 그래 봤자 어차피 다 제 망상이 만든 허상이고 착각이다.

윈터는 제 어리석음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 한심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요. 시간을 더 끌면 당신만 더 위험하겠어요.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유지할 수는,”

말을 멈춘 갈리나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홱 돌렸다. 소매 끝으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 그녀가 이내 젖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윈터에게로 돌아간 얼굴은 애써 갈무리한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미안해요. …아직도 병력이 부족해서, 이런 상태로는, 이렇게는…….”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다가도 급하게 말을 삼키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던 윈터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갈리나.”

갈리나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억지로 울음을 삼킨 갈리나가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여기서 죽으면….”

말문을 열자마자 불안하게 떨리는 갈리나의 눈을 보며, 윈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 시신을 섀넌에게 보내 줄래요?”

잔주름이 가득한 눈가에 금세 물이 찼다. 차마 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갈리나가 떨리는 손으로 윈터가 덮고 있는 이불 끝자락을 쥐었다.

그들 간의 거리는 아직도 딱 그 정도였다. 더는 좁혀지지 않는, 반년을 함께 있었음에도 함부로 손이나 어깨조차 잡을 수 없는…….

“윈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결국,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졌다. 반년 사이 주름이 더 깊어진 그녀가 눈가 주름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급히 훔쳤다.

“내가 당신을 죽게 놔둘 것 같아요?”

윈터는 그녀의 신념이, 그 집착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텅 빈 제 껍데기를 왕좌에 올리겠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그녀나, 기어이 이곳까지 오고 나서야 제 충동이 몹시 어리석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자신이나, 모든 게 다 어긋난 채 굴러가는 톱니바퀴 같았다.

아귀가 맞지 않은 채로 굴러가는 톱니바퀴는 결국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리고 윈터는, 그 바퀴가 무너질 때까진 계속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게 제 생에 굴레처럼 지워진 자하카로서의 의무니까.

“미안해요, 갈리나. 하지만 당신들도 내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잖아요.”

“…….”

“내가 이곳에서 죽으면……, 그때는 날 보내 주세요.”

“…….”

“그렇게 약속해 주면, 나도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왕좌에 앉아 줄게요.”

그의 말을 듣던 갈리나는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이마를 묻었다. 얇은 가죽을 걸친 마른 등이 떨렸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윈터는 그런 그녀가 안타깝게 느껴지면서도 굳이 위로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이 이상 그들에게 뭘 더, 자신이 그 무엇을 더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곳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설령 제게 더 맞는 삶이라 해도, 제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제 품에 무엇이 안겨지든, 섀넌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갈리나 또한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제 신념을 밀어붙이고, 결국은 기어이 자신을 왕좌에 올릴 그녀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운 갈리나가 충혈된 눈으로 윈터를 바라봤다. 그녀에게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속, 해 줄게요.”

‘차라리 웃어. 웃음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장 좋은 가면이니까.’

윈터는 당시 섀넌의 말을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웃음이란 게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길 수 있는 가면인지 너무도 잘 배웠다.

섀넌을 볼 때마다 치솟는 불안감과 의심, 제 내면의 추악한 욕망 같은 것을 윈터는 오랜 시간 웃음으로 잘 포장해온 것이다.

“고마워요, 갈리나.”

그래서 윈터는, 이번에도 가만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 *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 앞에 등을 둥글게 말고 엎드린 채 비는 사내를 보던 하슬라가 왕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윈터에게 화살을 쏜 당사자는 하슬라의 말단 수비병 중 하나였다. 그의 측근이 되고 싶은 승급 욕심이 지나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것이다.

“그저, 그저, …제 손으로 직접 놈을 없애면 하슬라 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놈이 너무 무방비한 상태로 있기에, 정말, 순간의 터무니없는 충동으로…….”

그가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하슬라가 잔뜩 주름이 파인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놈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미 시라트로 돌아온 날 그 다리 위에서 곧바로 놈을 밀어 버렸을 거야.”

이를 악문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왜 여태 그놈을 살려뒀을 거라 생각해, 응? 고작 사냥터에서 화살 맞아 뒈지는 걸 보려고 그랬을까? 네놈이 감히―!”

살벌한 일갈과 동시에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빠르게 단을 내려왔다.

“감히 내 의중을 무시하고 독단을 해?”

단번에 검은 늑대의 멱살을 움켜쥔 하슬라가 천천히 그를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잡혀 비틀비틀 딸려 올라간 늑대가 살려 달라고 빌며 울었다.

하슬라가 광기로 일렁이는 눈을 번뜩이며 그의 코앞에 대고 을렀다.

“그렇게 독단할 거면 네놈이 왕을 하지 그래! …아아, 그럴 생각이었나? 윈터 자하카도 죽이고, 검은 머리 하슬라 자하카도 죽이고! 네놈이 이 왕좌에 앉을 생각이었던 건가? 응? 그래?”

“살, 살려 주십시오, 하슬라 님…,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

“아직 아니야―!”

하슬라가 그의 목을 움킨 채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돌바닥에 뒤통수가 부서진 검은 늑대는 이미 즉사한 듯했다. 그의 머리를 중심으로 울퉁불퉁한 바닥의 균열을 타고 금세 핏물이 번져 흘렀다.

그럼에도 하슬라는 여전히 그에게 일갈하듯 소리쳤다.

“아직 아니라고! 알아들어? 윈터 자하카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니까! 너 같은, 빌어먹을, 멍청한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콱, 콱, 이미 부서진 머리가 수도 없이 돌바닥에 짓찧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단단한 소리는 곧 질척하고 둔탁한 소리로 바뀌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검은 늑대들이 숨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저 말은 자신들 모두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순찰 중 윈터의 침실을 지나며, 혹은 윈터의 호위를 명분으로 그 주변을 맴돌며, 당장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자하카가 눈앞에 있으니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자가 없었다.

윈터가 아무리 자하카일지언정, 평생을 설원에서 단련해 온 자신들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은 기실 서자의 신분이고, 눈앞에는 건드리면 쉽게 죽어 버릴 적통의 후계자가 있다. 하슬라의 수하들이라면 한 번쯤 윈터를 죽이는 상상을 다들 해 보았으리라.

물론, 그 어리석은 생각을 실행에 옮긴 자는 지금 머리가 으스러졌다.

검은 늑대들 사이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힌은 유독 겁을 집어먹은 듯 벌벌 떨며 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갈리나도 끼어 있었다.

하슬라가 저렇게까지 날뛰는 걸 보면 정말 의도치 않은 사고는 맞는 듯했다. 그래도 이왕 멍청한 수하가 저지른 실수, 그의 입장에선 그 핑계로 윈터를 그냥 죽게 놔뒀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살린 걸 보면 그리말디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광기를 쏟아 내던 하슬라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거칠게 귀 뒤로 쓸어넘겼다. 땀이 밴 두꺼운 손에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철썩 들러붙어 더 꼴사납게 엉켰다.

겨우 그 지저분한 머리를 정돈하고선 다시 단을 올라간 그가 왕좌에 앉자, 그제야 몇몇 늑대들이 움직여 머리 깨진 시신을 질질 끌고 나갔다.

“앞으로 누구든 저놈처럼 주제 파악 못 하고 함부로 윈터에게 손을 대는 자가 또 생기면, 내 반드시 그 손을 잘라 저놈 두개골에 꽂아 둘 테니 명심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화가 그대로 묻어나는 음성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다들 썩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투박한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손짓 한 번에 일렬로 서 있던 검은 늑대들이 일제히 물러나고 갈리나와 카힌, 몇몇 정예병만이 남았다.

작은 창으로 내리치는 햇볕이 대각선으로 홀을 가로질렀다. 그 빛기둥을 따라 부연 먼지가 소리 없이 떠다녔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저 먼지들뿐일 것이다.

“…음, 갈리나.”

한참이나 허공을 보며 화를 가라앉힌 하슬라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윈터의 상태는 좀 어떻지?”

이제야 흥분이 거의 진정된 듯, 그가 특유의 느린 말투로 물었다.

“…유능한 의관을 붙여 주신 덕분에, 다행히 빠르게 해독할 수 있었고 천천히 회복 중입니다.”

중앙으로 걸어 나와 여전히 진득한 핏자국이 남아 있는 자리에 무릎 꿇은 갈리나가 대답했다.

“그래, 그래……. 우리 카힌이 유능하긴 하지. 다행이군.”

왕좌의 팔걸이를 툭, 툭, 두드리며 갈리나를 잠시 내려다보던 하슬라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윈터를 죽게 놔두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란 걸 갈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꾸를 하든 말든, 혼자 길게 침음하던 하슬라가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윈터를 못 살렸으면, 그 소식을 들은 그리말디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

역시, 저자는 그리말디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게 맞다. 갈리나는 하슬라를 향한 조소를 숨긴 채 차분히 대답했다.

“아마 보름도 채 안 걸렸을 겁니다.”

“붉은 눈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 대고 시라트의 늑대들은 난리가 나겠지. 그래도 그자가 작정하고 나 하나만 노린다면 경계망을 뚫는 건 일도 아닐 거야.”

“…….”

“사냥 중 일어난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고 해도, 그자에게 그런 말은 씨알도 안 먹힐 테지.”

“…그렇게 된다면 시라트의 늑대족 절반 이상이 며칠 사이에 사라지겠죠.”

아아, 실제로 그리말디가 자신들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면 얼마나 모든 일이 쉬워졌을까. 갈리나는 새삼 그리말디가 가진 힘이 아까웠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렇게는.”

하슬라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가 그려온 완벽한 그림이 있는데, 허무한 실수 하나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몸을 삐딱하게 기울여 앉은 채 턱을 괸 하슬라가 느슨해진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이만 물러가서 귀한 조카님 몸이나 잘 살펴드려. 내가 아주 심히 걱정했었다고, 꼭 전해 주고…….”

“…예.”

갈리나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천천히 물러났다.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하슬라의 눈이 날카롭게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 * *

시라트의 장로회는 영향력 있는 열 개의 가문으로만 그 의석수가 채워져 있었다.

길고 두꺼운 오크 테이블에 둘러앉은 각 장로들이 조용히 양쪽 끝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나 더 늘어난 의자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공교롭게도 하슬라의 맞은편에 윈터의 자리가 생긴 것이다.

마치 대립하듯 각 테이블 끝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의 형세에, 장로들은 어쩐지 상석이 두 개가 된 것만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아직 안색이 좋지 않은데, 몸은 어떠하냐, 윈터?”

하슬라가 미간을 좁힌 채 저 맞은편에 있는 윈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내용은 퍽 다정했으나 말투와 목소리, 그의 표정은 매우 불편해 보였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대답하는 윈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 하슬라가 굵게 침음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두껍고 투박한 손으로 나무 테이블 위를 두어 번 두드리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번 일은 내 수하 중 하나가 윈터를 사냥감으로 착각한 탓에 실수로 발생한 일이네. 놈은 다들 보았다시피 그 시신을,”

“검은 늑대들은 약한 사슴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어려워 독화살을 쓰는 모양이죠?”

고저 없이 싸늘한 음성이 하슬라의 말을 잘랐다. 삽시간에 팽팽한 침묵이 장내를 휩쓸었다.

소리 없이 움직인 눈들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것을 무시한 채,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린 윈터가 말을 이었다.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뭐 숙부님께서 그렇다 하시니 실수로 믿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슬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수하 때문에 하마터면 저는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앞으로는 제 신변 호위를 검은 늑대들이 아닌 다른 가문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하슬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앞의 사냥감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뭘 믿고 제 등을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이라서요.”

멀리서 장로회를 지켜보던 갈리나가 상체를 앞으로 세우며 긴장했다. 게자르 가문의 장로이자, 갈리나의 아버지인 아즈낙 또한 회의석에서 조용히 눈만 굴려 상황을 관망했다.

“……그러나 지금껏 성의 수비와 자하카 호위 인력은 늘 내 혈족들로 채워 왔어. 검은 늑대 정예병들은 시라트에서 가장 강한 개체들이니, 그들이 자하카의 호위 의무를 맡는 건 당연한 이치야.”

하슬라의 말끝에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들러붙었다. 그 소리에, 하슬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헛웃음을 흘린 윈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독화살을 쓰시는군요. ‘가장 강한 일족’이라는 명성답게.”

이목구비가 짙은 하슬라의 안면이 일그러지는 게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갈리나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웃으세요, 숙부님.”

“…….”

“죽었다 살아 돌아온 조카 앞에서 그런 울상은 짓지 마시고.”

윈터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장로들을 한 번씩 둘러봤다.

“앞으로 제가 머무는 별채의 수비 병력은 각 가문에서 일정 인원씩 차출할 겁니다.”

그의 시선이 아즈낙 게자르에게 가 멈췄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 올 때부터 계속 갈리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제 신변 호위는 앞으로 그녀의 가문에게 맡기고 싶군요.”

지금껏 검은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언제 어디에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던 윈터는 가장 먼저 제 주변부터 바꿔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통같이 제 주변을 감시하던 검은 늑대들 대신 다른 가문의 사람으로 채우면, 조금이나마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더 편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머무는 별채의 경계 인력만 바뀌어도 검은 늑대들의 성 수비 체계에 유의미한 틈이 생긴다. 그 작은 균열은 훗날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른다.

“목숨을 잃을 뻔한 조카에게 이 정도의 처우는 당연한 일이라고 보는데요, 숙부님. 그렇지 않습니까?”

“…….”

하슬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로들을 향했다.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내리깔았지만, 윈터의 말에 반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슬라가 이를 악문 채 그런 그들을 노려봤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의 청을 수락하지 않을 수는 없다. 멍청한 수하 놈 하나 때문에, 아주 그럴싸한 명분을 윈터의 손에 쥐여 준 셈이다.

갈리나야 자신이 의도적으로 붙여 둔 것이기에, 윈터가 그녀의 가문을 신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각 가문에서 골고루 경계 인력을 차출하겠다 하니, 정확히 저놈 뒤에 붙은 세력이 어느 가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갈리나는 요즘 들어 모호한 말만 늘어놓고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 데다, 윈터가 어느 가문의 누구와 접선하는지조차 알아 오지 못하니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깟 게, 머리 좀 굴린다고 애쓰는 모양인데……, 하슬라가 이를 갈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래야지. 조카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원하는 대로 해 드려야지.”

“감사합니다, 숙부님.”

“그렇다고 완전히 뒤가 안전해지는 건 아니니 너무 방심하지 마라, 윈터.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도 제 걱정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입꼬리를 싱긋 올려 웃는 윈터와 미간 사이 주름을 깊게 구긴 하슬라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상체를 앞으로 내민 채 그 상황을 지켜보던 갈리나가 이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 * *

서늘한 가을바람이 숲을 한차례 휩쓸었다. 그 바람결을 타고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붉은 핏줄기가 치석 낀 더러운 이 사이로 후두둑 쏟아졌다. 꼴깍꼴깍 제 피를 삼키는 추격자를 내려다보며, 섀넌은 눈살을 찌푸렸다.

살갗이 아물기 시작하기 무섭게 섀넌이 손수건으로 제 손을 감쌌다.

사냥을 해도 제대로 몸에 흡수가 되지 않고, 그마저도 마지막 사냥이 여름이었던 섀넌의 입술은 이제 거의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추격자를 물끄러미 보며, 섀넌이 제 손목을 닦았다.

이런 식으로 몇 모금씩, 숱하게 뱀파이어들의 피를 마셔 왔을 늑대의 얼굴을 보는 섀넌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말을 더 잘 타시더라고요.”

쓸데없는 서두를 꺼내는 것을 싫어하는 섀넌의 성정을 아는 늑대가 본론부터 곧바로 꺼냈다.

“오래 있을 수 없어서 금방 빠져나왔지만, 잘 지내시는 것 같았지요.”

갈리나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툭하면 서쪽 외곽으로 함께 말을 타러 나오신다, 잘 지내신다……, 매번 듣는 비슷한 말에,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던 늑대가 조심스럽게 품 안에 지니고 있던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거. 시라트 외곽의 소각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말입니다요.”

그가 매번 시라트에 직접 다녀왔다는 증거로 그곳에서만 나는 식물이나 냄새가 밴 잡동사니 따위를 보여 주곤 했으므로, 섀넌은 이번에도 시큰둥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이상한 걸 가지고 왔다.

“아무래도 윈터 님 옷인 것 같아서…, 늑대들은 이런 옷을 입지 않으니까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얇은 드레스 셔츠를 섀넌의 앞으로 더 내밀었다.

“…….”

섀넌이 조심스레 셔츠를 받아들었다.

“윈터 님의 옷이 맞지요…?”

여러 번 입었는지, 이미 해지고 닳아 버린 옷은 윈터가 제 집을 떠날 때 안에 입고 있던 것과는 다른 셔츠였다. 옷에서는 다른 늑대들의 냄새가 많이 덮여 윈터의 체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갈리나가 맞춰 준 옷인가.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설원에서 이런 얇은 셔츠 따위로 버티다 탈이 나진 않았을까.

…대체 뭘 하고 살기에 소매 끝이 이렇게 새까맣게 닳았을까.

물론 제 저택에 살 때처럼 기껏해야 크리켓이나 하고 펜이나 쥐던 생활을 하진 않겠지만….

옷을 살피던 섀넌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셔츠의 어깨 부근이 꼭 칼이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찢어져 있고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탓이었다.

그런 그를 보던 늑대가 난처한 얼굴로 목을 쑥 움츠렸다.

“……이게 뭐야.”

“그, 사냥하다가 아마 화살을 잘못 맞은 모양입니다요. 사냥 대회 때 종종 그런 사고가 있거든요.”

늑대들이 사냥할 때 화살을 쓴다고…? 훌륭한 맹수의 몸을 놔두고 왜 이런 인간들의 무기를 쓴단 말인가. 사냥 중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암살 시도였을 게 분명하다.

셔츠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속을 꽉 메우고 있던 뭔가가 툭, 끊어졌다.

입술 안쪽 살갗을 이 끝으로 꽉 깨문 섀넌이 잠시 그대로 굳었다.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침묵에, 늑대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윈터의 모습이 보기에 어땠지?”

“제가 갔을 적엔 이미 다 회복되셨는지, 어디 불편해 보이는 곳 없이 잘 계셨는데…….”

“그런 지긋지긋한 말 말고! 네 눈으로 보기에 어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던 섀넌이 입을 확 다물었다. 일그러진 붉은 눈이 이내 흰 손에 가려졌다.

……저 빌어먹을 추격자 새끼가 먼 거리에서 그런 상세한 것까지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가 궁금한 것들은 모두 제 눈으로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일 뿐, 정작 추격자에게서 알 수 있는 건 정말 말 그대로 윈터의 생존 여부뿐이었다.

그것조차도, 고작 몇 주 전 모습일 뿐이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윈터가 화살을 맞는 순간에도, 자신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이딴 피 묻은 셔츠 쪼가리나 받는 게 전부 아닌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조차,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으니…….

때가 타 거의 회색에 가까운 셔츠를 손에 쥔 채 그런 생각을 하던 섀넌이 별안간 몰아치는 자괴감에 눈을 내리감았다.

대체 이게 무슨 등신 같은 짓인가.

벌써 이 짓을 몇 번째 하고 있다.

고작해야 ‘잘 지낸다’나 ‘말을 잘 탄다’, ‘화살을 맞았었으나 지금은 괜찮다’ 따위의 소식을 들으려고.

“……그럼, 다음에 또 여기서 뵐까요?”

조심스러운 늑대의 질문에, 섀넌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등신 같은 짓도 이젠 멈춰야 할 때였다. 이런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더는 자신은 아무것도…, 이따위 소용없는 짓을 해 봤자…….

“……됐어. 더는 볼 필요 없어.”

섀넌이 낮게 말하며 손에 든 셔츠를 꽉 움켰다.

* * *

비릿한 해풍이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을 온통 헤집었다. 초조하게 짓씹는 창백한 입술이 달달 떨렸다.

단 한 번도 밖에 입고 나온 적 없는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살아있는 망령처럼 비척비척 항구에 도착한 섀넌이 걸음을 멈췄다.

정강이 부근까지 오는 검은 가운 자락이 해풍에 휘날렸다. 그 안에 입고 있는 얇은 셔츠 안으로 냉랭한 바람이 아무렇게나 들이쳐 맨 살갗을 휩쓸었다.

“어디 가, 섀넌.”

섀넌이 제 앞에 서 있는 카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내내 기다린 건 아니지만 대충 비슷해.”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헛웃음을 내뱉으며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놈의 감시도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하군.”

“감시라니, 어감이 좀 그렇다.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섀넌이 말없이 카일을 응시했다. 능청스러운 말을 잘도 지껄여 대지만 평소보다 더 붉어진 눈이 그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는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카일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래.”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온 것뿐이야.”

“그 몰골로?”

카일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섀넌의 발끝에 닿았다. 고개를 숙인 섀넌이 축축한 땅을 밟고 있는 제 맨발을 인지했다.

“…….”

시발…….

“나는 네가 가운 차림으로 외출하는 걸 본 적도 없지만, 맨발로 그 더러운 땅 딛고 있는 것도 처음 봐.”

침착한 카일의 말을 어떻게든 받아치고 싶지만, 입이 열 개라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금방 들어갈 거니까 굳이 안 챙겨 신은 것뿐이야.”

“그럼 얼른 들어가자. 그 꼴로 시라트에 갈 수도 없으니까.”

“…….”

그와의 대화에서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섀넌이 무심결에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격랑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를걸. 차라리 듣지를 말걸…….

그 옷을 가져오지 말지. 그냥 평소처럼 잘 지낸다는 소리나 지껄이고 꺼졌어야지…, 그딴 거지 같은 걸 왜 들고 와서…….

“섀넌, 들어가자.”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카일이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섀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꼴사납기 그지없다.

빌어먹게 한심하고 등신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지 마, 섀넌.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이제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카일이 그의 양팔을 잡았다. 섀넌에게선 위스키 향이 진동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마른 몸이 덜덜 떨렸다.

“난 네가 그 애새끼랑 도망친다는 미친 소리를 할 때부터 군말 없이 도와줬어!”

카일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그깟 개새끼 소식 하나 듣겠다고, 섭식도 부실한 몸으로 반년 넘게 추격자 만나는 것도 다 눈감아 줬고!”

창백한 입술을 굳게 다문 섀넌의 얼굴을 보며, 카일이 애원하듯 소리쳤다.

“정말 진작에 둘이 도망이라도 쳤으면 모를까, 이미 한 번 시라트로 건너갔으면 걘 이제 자하카야. 네가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

이미 섀넌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카일은 한 번 더 짚어 주었다.

“그냥 네 꼴만 우스워질 거란 걸 모르겠어?”

그의 말투가 사뭇 냉랭했다. 이 땅의 필멸자들을 모두 제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함과 늑대족을 향한 경멸은, 그도 결국 다른 뱀파이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다들 널 주시하고 있는 거 몰라? 네가 시라트로 향하는 순간, 너는 윈터 하나만 구하고 다 잃는 거야. 아니, 윈터도 못 구할 확률이 더 높지.”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진 카일의 얼굴에서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내 친구가 그런 꼴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섀넌.”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어도, 그는 지난 반년간 섀넌의 상태가 매우 아슬아슬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하면 모른 척 지켜보려 했는데, 오늘은 섀넌의 인내심도 제 인내심도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 굳은 얼굴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섀넌이 메마른 입을 열었다.

“……그냥, 잠깐 보고 오는 건 안 될까.”

“…….”

해풍이 너무 강해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한 카일이 미간을 좁혔다.

카일의 앞섶을 움킨 섀넌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만이라도, …당장 윈터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특유의 차분한 음성 끝이 살짝 떨렸다.

카일이 소리 없이 얼굴을 굳혔다. 그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지금껏 살며 본 적이 있었던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섀넌의 몸이 조금 더 아래로 허물어졌다. 그가 카일의 가슴팍에 정수리를 툭 기댔다.

“내가, …시라트에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살아있는지만.”

그날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한다면 발목을 부러뜨려 침대에 사지를 묶어 놔서라도 어떻게든, 곁에 두어야 했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등신 같은 내가 널 기만하고, 네 진심을 외면했었다고. 그렇게 빌어야 했다.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그 말 한마디에, 섀넌은 마치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한 것 같았다.

자신을 막아설 뱀파이어들이 두려운 건 아니다. 그러나 제게서 모든 자격을 박탈해 간 윈터의 그 마지막 말은, 섀넌을 그 자리에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을 결박하는 절대적인 금제처럼…, 제게는 그 어떤 자격도 없다는 듯.

그냥 멀리서 단 한 번만,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안 되는 거냐고 그 절대적인 금제에 대고 묻고 싶었다.

“정신 차려, 섀넌.”

카일이 제 옷을 움키고 있는 섀넌의 손목을 잡았다. 섀넌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허물어진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반년 넘게 등신짓 했으면 이제 할 만큼 했어.”

카일이 섀넌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에게 양 손목을 붙잡혀도 끝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던 섀넌의 등이 크게 한 번 오르내렸다.

길게 심호흡한 그가 느리게 상체를 세웠다.

고개를 든 섀넌은 카일의 예상처럼 우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은 깨끗한 눈의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차분한 얼굴로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 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섀넌이 그의 옷을 놓고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애써 침착하게 들이켜는 숨이 살짝 떨렸다.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하고 목울대만 움직이던 섀넌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늘 똑같은 특유의 차분한 음성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없던 일로 해 줘. 그냥,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그래, 오늘 일은 잊고 있다가 한 십 년 뒤에 꺼내서 놀려 줄게.”

이런 농담에 으레 돌아오는 욕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가린 채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섀넌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를 일부러 담담한 얼굴로 마주하던 카일이 장난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들어가자, 섀넌. 신발도 없어서 사냥 다니기도 좀 그렇다. 그치?”

그러나 그 힘은 섀넌의 팔을 으스러뜨릴 듯 강압적이었다.

검은 머리칼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가을바람이 냉랭한 밤의 망망대해로 나아갔다.

* * *

잎을 다 떨궈 버린 낙엽송이 빼곡하게 둘러선 성내의 훈련장은 무척 넓었다. 마른 가지 사이로 늦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윈터는 날렵한 장검을 잡고 날의 방향을 가늠하듯 서늘한 가을 공기를 천천히 갈라보았다. 갈리나의 아버지인 아즈낙이 그런 윈터의 곧게 뻗은 팔과 자세를 응시했다.

늑대들은 저마다 손에 익은 무기나 몸에 맞는 보호구의 형태가 다른 탓에, 한데 모아 두면 같은 편의 군사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통일성이 적었다.

모두 다른 입성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가문의 문장을 새기거나 수 놓아서, 그 작은 부분으로나마 이들이 게자르 가문의 병사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윈터 님께선 그런 바늘 같은 장검보다는 큰 대검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그 검을 고집하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날이 기역 자로 휜 단도를 쥔 아즈낙의 손은 장로에 걸맞은 나이만큼 자글자글한 주름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윈터는 아무 생각 없이 제 검을 내려다봤다. 낯선 형태의 희한한 무기 중 그나마 이것이 제일 눈에 익어 보였기에 선택한 건데, 사실 아직까진 제게 잘 맞고 안 맞고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즈낙이 짧게 기합을 넣으며 단도의 날을 세우고 윈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본래 기척 없이 그림자처럼 빠르게 상대를 베는 것이 특화된 검사였지만, 윈터와 대련할 땐 일부러 기합을 넣어 그에게 미리 접근을 알려 주었다.

윈터의 검이 날렵하게 허공을 그으며 아즈낙의 단도를 막아냈다. 기역 자로 휜 날에 걸린 검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힘겹게 궤도를 그리고 뒤로 물러났다.

검을 받치고 있던 오른손이 아릿했다.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검 수련 때문에 엄지와 검지 사이가 늘 새빨갛게 쓸리고 손바닥은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

운동할 땐 조심하라니까.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고작 크리켓 따위나 하며 살짝 굳은살이 박이거나 긁힌 정도로도 인상을 쓰며 한참이나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흰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본격적으로 눈앞에 그려 보기도 전에, 그만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렸다.

옆에서 아즈낙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저마다 무기의 형태가 다르니 여러 사람과 대련을 해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무기에 어떤 맹점이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맹점은 없고 강점만 있는 그런 무기는 없나요.”

윈터의 질문에 아즈낙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맹점 없는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파고들면 다 장단이 있고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도, 물건도.

“그런 무기는 없으니까 그 장검 말고 다른 것도 쥐어 보세요, 윈터 님. 아무래도 그 검은 윈터 님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대화는 끊겼다. 훈련장엔 쇠 부딪는 소리와 기합 소리, 하마터면 제게 짓쳐 드는 단도에 팔을 베일 뻔한 윈터의 탄식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아즈낙과 몇 차례, 그리고 아즈낙의 수하들과 차례로 한 번씩 연달아 검을 부딪는 윈터의 온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범벅되었다.

검을 들고 있던 손은 달달 떨리고 감각이 없었다. 분명 다들 자신이 다치지 않게 나름의 조절을 하는 걸 텐데도 이렇게나 벅찼다.

그런 윈터를 보며, 아즈낙이 잠시 쉬라는 듯 수하들을 뒤로 물렸다.

“…나만 이렇게 더워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매로 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던 윈터가 물었다. 아즈낙이 대답 대신 그의 옷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윈터가 제 셔츠를 내려다봤다. 얇은 셔츠는 땀에 완전히 젖어 온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움직임이 더 둔해진 것도 같았다.

그가 훈련장에 있는 늑대들을 바라봤다. 저마다 팔이나 어깨에 간단한 보호 장비는 차고 있었지만, 몸을 이렇게 꽁꽁 감추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뒷짐을 진 아즈낙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결행은 겨울에 있을 겁니다. 병력이 여전히 부족해서 오래 걸리는 것도 있지만, 윈터 님께서 검을 이제야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들이고자 합니다.”

평생을 난투와 사냥, 검술로 다져진 늑대족들에 비해 윈터는 이 큰 체격이 아깝게도 너무 약했다. 물론 타고난 힘은 자하카답게 장사라 다른 늑대들에게 비견할 바가 아니지만, 요령이 부족했다.

싸움에서 힘이 하는 역할은 3할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숱한 훈련을 거치며 쌓아 온 경험과 기지가 순간의 생사를 가르는 법이었다.

아즈낙은 그런 윈터가 참으로 아까웠다.

만약 그가 이 시라트에서 자랐다면 지금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용의 장수이자, 하슬라 따윈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진정한 왕에 걸맞은 사내가 되어 있을 텐데…….

“야낙 님께서는 창을 잘 다루셨는데, 내일은 창을 잡아 보시겠어요?”

아즈낙의 권유에, 윈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손에 든 무기가 문제일까요. 사람이 문제겠죠.”

윈터도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곳은 남녀 구분 없이 오직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갈리는 사회라, 노소와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가 호전적이며 실제로도 싸움을 매우 잘했다.

만약 늑대족 여인에게 인간 사회에서처럼 ‘레이디 퍼스트’ 같은 소릴 지껄이며 같잖은 배려를 해준다면, 그들은 아마 그것을 모욕으로 여길 것이다.

“…꼭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나요.”

이번에는 윈터가 먼저 질문했다. 아즈낙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제 말은, …무기는 어차피 도구를 사용하는 손발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

아즈낙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내내 윈터는 인간의 몸을 완벽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늑대의 몸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자유로울 것이다.

“…본신으로 싸우셔도 좋지요. 그러나 만약 너른 설원에서의 전투가 아니라 좁은 성 안에서의 전투라면, 그 거대한 몸으로는 조금 힘드실 겁니다.”

윈터가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데도 내가 아직 자하카 같아요?”

이렇게 약하고, 가진 거라곤 껍데기뿐인 자신을 왕좌에 올려서 무슨 영예를 얻겠다는 걸까.

그러나 아즈낙의 얼굴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원래라면 은퇴를 하고 제 딸인 갈리나에게 장로직을 물려주어야 하는 나이였지만, 하슬라의 밑에서 충신 노릇을 하는 그녀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여태 장로직에 앉아 있는 자였다.

갈리나와 닮은 명정한 눈으로, 그가 말했다.

“윈터 님보다 오래 산 사람으로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20여 년은 인생 전체에서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윈터 님.”

“…….”

“당장은 모든 게 낯설고 윈터 님께 잘 맞지 않는 듯 보이시겠지만, 태생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요. 자하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윈터 님께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예, 그러시겠죠……. 윈터는 이미 갈리나에게서도 숱하게 들었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가 아즈낙에게서 떨어져 서며 훈련장 가운데로 물러나 말했다.

“…대련 다시 해요.”

그러다 문득 눈살을 찌푸린 윈터가 셔츠 단추를 풀어 신경질적으로 벗어 내렸다.

젖은 몸이 드러나며 그 열기에서 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흉터가 옅게 남아 있는 그의 몸은 전보다 조금 더 결이 거칠고 그을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구겨 쥔 셔츠로 얼굴과 몸의 땀을 닦은 윈터가 그 셔츠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안 되면 무기를 바꿔 보죠.”

* * *

짧은 가을은 겨울의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금세 물러갔다.

한겨울의 시라트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얼릴 기세로 날카로운 설풍을 끊임없이 토해 냈다. 바늘처럼 가는 눈발이 비스듬히 기울어 거대한 석조 성을 소리 없이 두드렸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갈리나가 손바닥만큼 작게 난 창으로 시선을 던지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싸늘한 한기가 시간의 흐름을 명백히 말해 주었다.

윈터가 이곳에서 지낸 지, 일 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 것이다.

“갈리나 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갈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안내하던 검은 늑대들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그녀가 얼른 왕의 알현실로 들어섰다.

석벽에 일정 간격으로 어른거리는 횃불이 갈리나의 얼굴에 불길한 빛을 드리웠다. 갈리나는 넓은 홀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하슬라를 보고 침을 삼켰다.

거대한 왕좌 주변과 그 아래 단에 검은 늑대들이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었다. 누군가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또 누군가는 완전한 짐승의 모습으로 느른하게 고개를 괴고 갈리나를 응시했다.

“…자하카.”

그 지척까지 걸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갈리나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다음 만월 때까지, 너희 게자르 가문에서 이 성의 수비를 좀 맡아 주어야겠어. 당최 너희 가문 외엔 믿을 만한 놈들이 있어야 말이지.”

하슬라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갈리나는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본래 호위하던 검은 늑대들의 정예병은 어쩌시고, 별 볼 일 없는 저희 게자르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십니까.”

갈리나가 애써 입가를 희미하게 올리며 물었다.

“아, 그놈들은 할 일이 있어서.”

“…한 달씩이나요?”

갈리나의 질문에 하슬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한 달 이상이 걸릴지도 몰라. 케인타운까지 가는 데만 최소 보름은 걸리니까…, 음.”

미간을 한껏 구긴 채 손가락으로 뭔가를 셈하는 하슬라를 보며, 갈리나는 방금 들었던 그의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케인타운이라니.

그 먼 곳까지 제 측근들을 보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만약 일이 쉽게 풀려 바로 그리말디를 생포해 올 수만 있다면 왕복 한 달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보다는 좀 더 길게 잡아야 할 거야.”

“…….”

갈리나가 제 귀를 의심하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누구를 생포한다고?

“…그리말디요?”

무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하슬라가 별안간 갈리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어쩐지 갈리나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 내 정예병들은 그리말디를 생포하러 케인타운으로 떠날 예정이야.”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들어찼다. 하슬라는 그런 갈리나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클클 웃었다.

갈리나의 시선이 그의 곁에 있는 카힌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카힌 역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지 그저 담담했다.

저 등신 새끼가…, 지금 하슬라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도시에 사는 불멸자를 건드리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겪은 바가 있지 않으십니까!”

갈리나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슬라가 그를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죽였을 것이다.

심지어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갈리나. 나는 그때 아주 똑똑히 배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하슬라의 시선이 카힌을 향했다.

“……카힌 또한 배운 게 있었고.”

카힌이 그 자리에서 얼른 무릎을 꿇었다. 성대가 망가져 쉬어 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슬라께 사역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갈리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하슬라가 그런 갈리나를 보고 낮게 웃었다.

그 음산한 웃음소리가, 갈리나의 불안함을 더 부추겼다.

“불멸자를 사하는 독은 존재하지 않아도, 그 징그러운 회복력을 멎게 하는 독은 배합이 가능하더군.”

“…….”

독? 갈리나는 또 한 번 제 청력을 의심했다.

불멸자를 상대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의 소름 끼치는 그 몸뚱이는 불가사의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어 상처에 스며든 독마저도 정화한다.

독이 묻은 화살, 검, 창 그 어떤 것도 효용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멸자가 왜 불멸자인가.

절대 죽을 수 없는, 이미 죽음에서 비롯된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사할 수 없는 존재니까 불멸자인 거다.

물론 그들이 스스로 독을 마셔 체내로 완전히 흡수되게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인간의 피 외에는 음용을 하지도 않는 그들을 상대로 독은 정말 비효율적인…….

“…갈리나.”

갈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된 것을 안 하슬라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녀를 낮게 불렀다.

“그리말디는 뱀파이어 중 유일하게 음용을 즐기는 자라지?”

갈리나가 눈만 굴려 아직 무릎 꿇고 있는 카힌을 바라봤다.

십 년 전 아치볼드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그리말디에게 심하게 목을 졸려 그 후유증으로 성대가 완전히 망가진 아이.

헨리 아치볼드란 이름으로 한때 아주 잠깐 케인타운에 머물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카힌이 갈리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듣기 싫게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말디가 차와 술을 즐긴다는 건 케인타운에선 비밀도 아니지요. 단지 인간들 앞에서 흉내만 내는 거라기엔 지나치게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요.”

“…….”

“…저희는 원한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갈리나.”

갈리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바닥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 또한 섀넌이 차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케인타운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섀넌이 위스키나 차를 입에 대는 시늉뿐 아니라 실제로 마시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게 꼭 인간들의 앞에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본인이 즐기기 때문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사소한 문제라 특별히 하슬라에게 숨겨야겠다는 생각도, 그게 약점이 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슬라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십 년 넘게 정말 그리말디가 무서워서 납작 엎드려 있었던 건 아니거든.”

“…….”

상체를 숙여 갈리나와 깊게 시선을 맞춘 그가 입가를 벌려 히죽 웃었다.

“어때. 이제 좀 안심이 되나, 응?”

* * *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담비 털 망토가 주인의 걸음을 따라 묵직하게 흔들렸다.

축축한 석벽에 간헐적으로 이지러지는 주홍색 횃불 빛이 은백색 머리칼을 스쳤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 걸음은 한 치의 헤맴도 없이 성큼성큼 나아갔다. 모퉁이를 도는 옆얼굴에 깊은 음영이 졌다.

이내 물먹은 흑단 나무문이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윈터.”

장로들과 함께 둥근 오크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갈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보는 장로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창가로 다가간 윈터가 창을 열어 까마득한 설원을 내려다봤다.

실내와 실외의 온도 차로 생긴 물기가 목조 건물 벽면을 적시다 이내 금세 얼어붙었다. 젖은 나무가 얼며 미세하게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혹독했던 성년식의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스치며 다시금 찾아온 겨울.

낯선 이방인이었던 윈터는 그 시간에 쉽게 매몰되어, 이제는 부쩍 설원을 닮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쬐는 해도 타는 듯한 열기도 미지근한 바람도 없는 시라트의 사계절은 아직도 윈터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얗고, 차갑고……, 손에 쥘 수 없는 환영처럼 늘 멀리에 있는 존재.

이젠 익숙해지다 못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제 동족들의 역겨운 체취 대신, 언제 맡아도 늘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그의 체취가 그리울 뿐이었다.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겠어요.”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부쉈다.

갈리나가 초조한 시선으로 윈터를 바라봤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등이 이내 돌아서며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언제로요?”

“…보름 뒤요.”

윈터의 한쪽 눈매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결행을 서두르는 이유라도?”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다음 만월까지 저희 게자르에서 성의 수비를 맡기로 했어요. 하슬라가 정예병 일부를 외부로 방출하거든요.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갈리나의 말에 다른 장로들도 조용히 윈터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윈터는 그들 앞에서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린 그가 무감한 얼굴로 물었다.

“하슬라가 갑자기, 왜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정예병을 외부로 방출합니까.”

갈리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그 미묘한 침묵에, 윈터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모른다?”

윈터가 코웃음 치며 갈리나의 말을 잘랐다. 검은 털 망토가 앞으로 기울었다. 상체를 숙이며 테이블에 손을 짚은 윈터가 말을 이었다.

“하슬라가 왕위에 오른 이래 단 한 번도 성의 수비 인력을 다른 가문으로 채운 적이 없다고, 갈리나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요.”

“…….”

“별채의 수비 인력을 바꾸는 것도, 내가 화살 맞아 죽을 뻔하고 나서야 겨우 수락한 자입니다.”

윈터가 장로들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갈리나가 침묵이 내려앉은 테이블 위의 얼굴들을 살폈다. 그 중엔 윈터의 태도에 반감을 갖는 이도 있었고, 면목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무는 이도 있었다.

추운 바깥의 기후와 실내의 홧홧한 열기에 단련된 윈터의 몸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약간 더 그을리고 탄력적으로 부풀었다. 목덜미와 어깨에 걸친 잇자국과 작은 관통상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 몸을 가로지르는 가죽끈과 흑담비 망토가 위화감 없이 매우 잘 어울렸다. 이제는 누가 봐도 늑대족이라 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겉모습과는 달리 냉랭하고 침착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그리말디의 특성을 닮아 있어, 그를 지켜보는 장로들은 은연중에 불쾌함을 느꼈다.

“여기에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분도 안 계세요?”

윈터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낮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모두 꿀이라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

물론 여기에 있는 장로들은 하슬라가 제 정예병을 외부로 방출하는 이유와 그 목적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갈리나에게서 사전에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예병들은 카힌이 완성한 독을 들고 그리말디가 있는 케인타운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빌어먹을 재생력만 없으면 그들의 몸뚱이는 거의 쓰레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 그를 시라트로 데려와, 모든 늑대들이 보는 앞에서 내 손으로 직접 살해하면 그것만큼 좋은 그림도 없겠지.’

물론 명분은 십 년 전 아치볼드가에서 죽은 카힌의 식솔들을 위한 복수다.

하슬라는 그것으로 제 강함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윈터의 앞을 단단히 막고 있는 그리말디라는 방패도 제거하고, 사랑받는 왕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이참에 그놈과 함께 내 애송이 조카 놈, 그놈 밑에 붙은 쥐새끼들도 깨끗이 처리하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다 끝인 거야. 지긋지긋하게 앓던 이를 빼는 순간인 거지…….’

그런 장로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던 윈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혀 뭘 모르는 얼굴들이 아닌데.”

갈리나의 아버지인 아즈낙 게자르가 마지 못 해 입을 뗐다.

“…그게, 사실은, 하슬라의 정예병들은 케인ㅌ,”

“아버지!”

갈리나가 필사적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아즈낙을 보고 있던 윈터의 시선이 소리 없이 갈리나에게 향했다.

“계속 말해 보세요, 아즈낙.”

윈터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즈낙에게 종용했다.

“……케인타운으로 갈 예정입니다. 해서, 저희 게자르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 생각보다 손쉽게 하슬라의 뒤를 노릴,”

“그들이 케인타운에는 뭐 하러 가는데요.”

“…….”

아즈낙은 갈리나와 시선을 맞대고 있었다. 갈리나가 절박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둘을 보던 윈터가 차분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갈리나만 남고 다들 나가세요.”

“…….”

“그녀에게 직접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

장로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터는 그들이 갈리나만 남기고 완전히 밖으로 물러날 때까지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들의 기척이 건물 밖으로 사라지자, 윈터가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있는 갈리나를 바라봤다.

“…윈터, 난 무슨 일이든 당신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냥, …그냥 날 한 번만 믿어 줘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하슬라의 정예병이 케인타운에 갑자기 무슨 볼일이 있는지 알아야겠으니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아슬아슬한 적의가 일렁이는 눈으로, 윈터가 갈리나를 응시했다.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갈리나가 눈을 감고 겨우 내키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말디를 생포하러요.”

눈을 뜨자 의중을 알 수 없게 가라앉은 윈터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갈리나를 보던 윈터가 물었다.

“그들이 그리말디를 어떻게 생포하는데.”

“……독, 독을 이용해서,”

“독.”

윈터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불멸자에게 그런 게 통합니까.”

“…그들을 사할 수는 없어도, 회복력을 멎게 할 수는 있다더군요. 그리말디가 음용을 즐기는 자라, ……하슬라가 이미 오래전부터,”

별안간 윈터와 갈리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테이블이 옆으로 쾅 밀려났다. 순식간에 갈리나의 앞으로 다가가 목을 틀어쥔 윈터가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말해 봐.”

“…….”

“이걸 나한테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는지.”

“커흑…, 윈, ……진정,”

“왜 숨겼을까. 내가 여길 뿌리치고 그리말디에게 달려갈까 봐? 그러면 당신들의 그 원대한 계획이 틀어지니까? 당신들의 고귀한 자하카를 왕좌에 앉혀 놔야 하는데, 기껏 고생해놓고 더러운 불멸자에게 다시 날 빼앗길까 봐?”

“…오해, 윽……, 오해예요, 윈터…!”

윈터가 내팽개치듯 그녀의 목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화를 삭였다.

틀어막혔던 숨통이 확 트이자 갈리나는 한참이나 바닥에 엎드려 기침을 토했다. 그녀가 쉰 목소리로 다급히 소리쳤다.

“이미…, 이미 늦은 일이잖아요! 나도 시간이 있었다면 그리말디에게 경고라도 해 줬을 거예요! 그것보다 검은 늑대들이 도착하는 시간이 더 빠를 거라고요!”

“시끄러워.”

“차라리 그들이 그리말디를 생포해 왔을 때 당신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윈터의 시선이 갈리나에게 휙 떨어졌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살기가 그 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들이 그리말디를, 사지 멀쩡히 생포해 올 거란 보장이 어디 있지?”

늑대족과 뱀파이어들은 아주 오랜 세월 서로를 지독히도 경멸해왔다.

이곳의 검은 늑대들 대부분은 평생 뱀파이어를 실제로 구경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런 이들이 섀넌을 처음 보고 할 생각이란 뻔했다.

윈터는 섀넌이 제 눈에만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란 걸 잘 안다. 놈들은 분명 그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힘이 섀넌에게서 사라진다면, 회복력도 온전치 않은 그 얄팍한 몸을 검은 늑대들이 가만둘 리 없지 않은가.

갈리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그래도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에요! 제발, 소용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윈터…….”

그러나 윈터는 갈리나의 말을 아예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내 시신을 섀넌에게 보내 줄래요?’

갈리나는 지난여름 윈터가 제게 했던 부탁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토록 숱하게 부정하고, 또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 애써 봤지만, 윈터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자신들에게 열린 적이 없었다.

그리말디와 그의 관계가, 단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하는가.

결국 자신들은 자하카를 완전히 잃어버린 걸까.

몸뚱이는 여기에 있지만 단 한 번도 시라트에 정을 준 적 없는 이 사내를…, 자신들이 너무 욕심냈던 걸까.

절망이 내려앉은 갈리나의 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이 물었다.

“그들이 언제 떠난다고 했죠.”

갈리나가 무너지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밤에, 해가 지면.”

윈터의 눈이 힐끗 창밖을 향했다. 이미 하얀 설원 저편으로 해가 넘어간 하늘은 파란 어둠에게 좀먹히고 있었다.

쾅!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갈리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가 떨리는 다리를 추슬러 다급히 일어나 윈터를 쫓아 나갔다.

“윈터…!”

그녀가 필사적으로 윈터의 앞을 막았다.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며 살기를 드리우는 그의 가슴팍을 짚은 갈리나가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

“……이쪽으로요. 이대로 나가면 하슬라가 눈치채니까.”

“…….”

“…제발요.”

그의 어깨를 덮은 털 망토를 움킨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윈터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서 차게 식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후문으로 나가서 무조건 서쪽 관문으로 달리세요. 그쪽 순찰병은 내가 잠시 시선을 돌려놓을게요.”

그녀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윈터가 자신들만의 자하카가 아니라는 것을.

* * *

은백색 털이 날카로운 설풍에 휩쓸리고 물결쳤다. 긴 주둥이 사이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얀 협곡의 절벽 끝에 선 늑대의 청회색 눈이 조여들었다.

‘시간을 오래 끌지는 못할 거예요. 당신이 나간 걸 하슬라가 눈치채겠죠.’

서쪽 관문을 통과한 윈터가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저 멀리서 갈리나가 순찰병들을 모아 놓고 뭔가 얘기하는 게 보였다.

‘무조건 달리세요. 일전에 내가 알려 줬던 곳에서 옷 챙겨가는 거 잊지 말고.’

그녀가 시선을 끄는 동안 윈터는 최대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했다.

전서구는 도중에 유실될 위험이 크고, 편지는 너무 느리다.

무모하지만 가장 빠르게 섀넌에게 위험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최대한 빨리 그에게 가는 것이었다.

가느다란 눈발이 윈터의 얼굴을 때리고 스쳤다. 그러나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은백색 털에 매달린 흰 눈 알갱이는 금세 녹아 버렸다.

눈 덮인 협곡을 쏜살같이 내달리며, 윈터는 조급함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드넓은 대륙을 반으로 접어, 순식간에 케인타운으로 건너뛰고 싶을 만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