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Turning Lock (8/18)

4. Turning Lock

이곳은 뭐든 중간이 없었다.

인간 사회의 문명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건지, 아직도 촛불로 조명을 밝히는 실내는 땀이 날 정도로 홧홧했고 밖은 순식간에 그 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윈터는 추위보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짙은 체취를 내뿜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 실내의 더위가 더 끔찍했다.

시라트의 연회장은 왕이 머무는 석조 성의 지상층에, 모든 벽을 다 트고 기둥만 드문드문 세워진 넓은 홀이었다.

그렇게나 넓은 홀에 그다지 빼곡하게 사람이 차 있는 것도 아닌데, 윈터는 이곳이 어쩐지 너무 어수선하고 북적거린다고 느껴졌다.

허리가 굽은 노예들은 끊임없이 피가 줄줄 흐르는 날고기를 통째로 날라다 테이블 위에 쿵쿵 내려놓았고, 끼리끼리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은 꼭 그렇게 해야만 예의인 것처럼 잔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부딪혀 댔다.

“윈터, 윈터, 윈터…….”

표면이 거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몇 번 음미한 하슬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뿔잔에 남아 있는 술을 들이켠 그가 턱 끝으로 흐르는 술을 훔치며 탄식했다.

“참 간지러운 이름이야.”

윈터만 빼고 모두가 웃었다. 윈터는 제 잔에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혼성주를 가득 따르는 자에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속이 텅 빈 물소 뿔 밑동을 잘라 나무판을 대고, 겉면에 바른 법랑이 군데군데 벗겨진 술잔은 청결 상태를 짐작하기 싫을 정도로 손잡이와 밑바닥에 때가 껴 있었다.

“자하카보다는 그리말디 앞에 붙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그렇지 않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윈터를 향해 고개를 쑥 기울인 하슬라가 히죽 웃었다.

그런 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윈터가 주름 하나 고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리말디에게서 자랐으니 그리말디와 더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

“…….”

온갖 냄새와 소음으로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양옆으로 찢어질 듯 벌어져 있던 하슬라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이내 웃음기가 차게 지워진 그를 응시하며, 윈터가 낮게 말했다.

“그딴 말을 설마 조롱이라고 하신 건 아닐 테고, 칭찬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하슬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물론, 제 이름이 숙부님 칭찬을 듣자고 지어진 이름은 아니지만.”

날 선 눈이 서로에게 첨예하게 부딪쳤다.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하슬라가 오크 테이블 위에 잔이 깨지도록 쾅 내려놨다.

천장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 뜨거운 촛농이 바닥과 테이블 위로 뚝, 뚝, 떨어져 하얗게 굳었다. 실내의 온기로 축축해진 석벽이 주홍빛 눈물을 흘렸다.

적막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눈만 굴려 그런 하슬라를 숨죽여 바라봤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윈터를 응시하던 하슬라의 몸이 별안간 들썩였다. 그의 목 안에 깔린 낮은 웃음이 점점 커지며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칼날처럼 쩌렁쩌렁하게 파고드는 웃음소리가 석벽에 부딪히고 장내를 살벌하게 휩쓸었다. 그 소리에, 상석에 앉은 두 사람을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던 이들이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갈리나가 애써 입꼬리만 당겨 올리며 윈터를 바라봤다.

하…, 눈물이 글썽이도록 웃은 하슬라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말디가 애를 참 잘 키웠군. 응? 그렇지 않은가?”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이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슬라가 술을 가득 채운 커다란 뿔잔을 윈터에게 내밀었다. 방금까지 그가 마시던 잔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누가 뭐래도 자하카지.”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자하카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짜가 ‘진짜 자하카’에게 내미는 잔이었다.

표정 변화 없이 하슬라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윈터가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간 윈터가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술을 넘기는 목울대가 울컥울컥 일렁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목을 뒤로 젖혀 끝까지 술을 비운 윈터가 그에게 다시 잔을 넘겼다.

큰 놋쇠 단지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린 윈터가 그 잔에 술을 채웠다.

넘치도록 콸콸 부어지는 술은 잔을 잡고 있는 하슬라의 손을 적시다 못해 바닥까지 흥건히 쏟아졌다. 술을 따르는 건지 그냥 쏟아붓는 건지 모를 풍경이었다.

애써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적막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롭고 냉랭했다.

단지 안의 술을 다 쏟아 버린 윈터가 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하슬라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치며 한쪽 눈썹을 가볍게 까딱였다.

“…드셔야죠, 숙부님.”

입꼬리를 올린 그가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하슬라의 손과 잔 밑바닥을 타고 흐른 술이 바닥으로 투둑 툭 떨어지는 소리만이 그들 사이에 얕게 울렸다. 그가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쾅,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빈 잔을 내려놓고 수염 끝에 맺힌 술을 닦은 그가 조용히 명했다.

“……술을 더 가져와.”

조마조마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갈리나가 커다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라도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부들부들 떨리는 낯을 다 들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윈터는 저를 조롱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닌 듯했다. 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슬라를 도발하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말디의 성깔을 빼다 박은 듯하네.”

그녀의 옆에 있던 누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리나가 제 옆에 앉은 이를 힐끗 일별하고는 다시 윈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리말디는 어떻게 합류할 예정이지? 불멸자는 시라트 경계선을 통과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텐데.”

들려오는 질문에 갈리나가 눈을 내리깔며 낮게 대꾸했다.

“……그리말디를 포섭하는 건 실패했어요.”

“다리야의 예상이 빗나갔군.”

상석에서 멀리 떨어진, 둥근 오크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티 나지 않게 윈터를 향했다.

“둘이 꽤 애틋하다고 하지 않았어, 갈리나?”

갈리나 대신 누군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목숨까지 걸긴 싫었겠지. 그 이기적인 습성이 어디 가겠어. 그놈들이야 늘 우리를 하찮은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는데, 제 손으로 자하카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게 말이나 돼?”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그곳에 모여 앉은 이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를 사지 멀쩡히 돌려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해.”

불멸자들은 지독한 개인주의 성향이다. 애초에 그 삶 자체가 파렴치한 살생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들인데, 그런 이들에게서 무슨 헌신과 인정을 바라겠는가.

잠시 조용해진 그들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촛불 빛이 이지러졌다. 모두가 떠들썩한 연회장에서, 오직 그들 테이블에만 적막이 내려앉은 듯했다.

“……그럼, 부족한 병력을 어떻게 채우지?”

“조금만 시간을 더 들여요. 윈터가 귀환했으니,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가문도 서서히 우리 쪽으로 돌아설 겁니다.”

“그때까지 하슬라가 윈터를 살려둘까.”

“쉽게 죽이진 못할 거예요.”

갈리나가 극도로 목소릴 낮춰 말했다.

하슬라는 모두에게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왕이었다. 20년 전 다리야를 성곽에 효수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지만, 그 이후에도 온갖 구설에 시달려 민심을 잃은 지 오래인 것이다.

왕이 바뀌니 시라트에 흉조가 들어 숲이 시들어 가고 사냥감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은밀히 그런 소문을 내고 분위기를 조성한 건 갈리나를 위시한 세력이었고, 저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은 걸 아는 하슬라는 지금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안 그래도 평판이 위태로운데, 윈터 자하카가 귀환하자마자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 의심의 화살이 하슬라에게 꽂힐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시간을 오래 벌지는 못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병력을 모아서 한 번에 쳐야겠죠.”

쯧쯧쯧…, 누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마땅한 그의 눈이 윈터를 향해 있었다.

“……어쩐지 불쾌해.”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챈 갈리나가 걱정스럽게 윈터를 쳐다봤다.

깨끗하고 긴 손가락이 휘감고 있는 투박한 뿔잔은 윈터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보기 좋게 가공되지 않고 내장만 발라낸 채 통째로 올라간 멧돼지와 물소의 날고기, 색이 바랜 오크 테이블과 놋쇠 단지,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있거나 그 위에 털가죽을 걸치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그는 물에 섞인 기름처럼 홀로 튀었다.

케인타운의 파티장에서 윈터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갈리나는 그가 몹시 유약해 보였다. 야성적인 시라트의 늑대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각 가문의 장로와 검은 늑대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윈터를 보니, 그는 다른 의미로 확실히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자하카의 핏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늑대들에 비해 월등히 큰 체격과 키, 그리고 뱀파이어들 특유의 우아함과 관능이 공존하는 그에게선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위압적이라기엔 몹시 매혹적이었고, 마냥 매혹적이라기엔 세공되지 않은 강인함이 날카롭게 숨어 있었다.

누구라도 그를 몇 분만 지켜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불멸자의 손에서 자란 자하카라는 것을.

윈터의 그런 점은 늙은 장로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었다.

“꼭 잡종 같아.”

누군가 함부로 내뱉은 말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동감은 하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갈리나가 조용히 그 분위기를 일축했다.

“지금이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시간이 지나면, 저분도 온전한 자하카가 될 겁니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술을 자제하며 진득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런 윈터를 관찰했다.

저를 낱낱이 살피는 시선을 느낀 건지, 하슬라의 옆에 있던 윈터는 이따금 명료한 눈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윈터 자하카의 귀환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열린 연회는, ‘축하’의 의미에 걸맞지 않게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다.

* * *

시라트의 혼성주는 냄새가 시큼하고 걸쭉하며 몹시 독했다.

놋쇠 단지에 가득 든 그 빌어먹을 술을 따르다 보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정체 모를 불순물이 잔으로 딸려 들어왔다.

윈터는 그게 싫어 마지막 남은 술은 모조리 하슬라에게 부어 주었고, 하슬라는 결국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금세 취해 측근들에게 업혀 나갔다.

손때로 색이 바랜 뿔잔에 그 술을 받아 마시면서, 윈터는 우아하고 기다란 손가락과 그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깨끗한 크리스털 잔을 생각했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황금빛 위스키가 흘러 들어가는 붉은 입술도.

“…….”

애써 생각을 떨쳐 내며 침실 문을 걸어 잠근 윈터가 침대를 가만히 손으로 눌러 보았다.

가공된 면 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물소 가죽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대체 언제 갈았을지 모를 더러운 깃털과 지푸라기였다.

겉옷을 벗고 셔츠 단추를 느슨히 푼 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아래로 푹 꺼지는 시트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는 제 몸을 덮은 곰 가죽에서도 풍겼다. 차라리 후각이 마비되었으면 싶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냄새였다.

숨만 쉬어도 고역인 그 방 안에서, 윈터는 자신조차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레 수마에 잠겼다.

제 입술 근처를 배회하던 향긋한 숨결과 연약하게 부딪혀 오던 체온과 우는 소리를 내뱉던 흰 얼굴 따위를 떠올리면서, 아주 느리게.

* * *

이름 모를 시종은 오늘 윈터에게 보내진 특별한 선물이었다.

석조 성끼리 연결된 다리 위를 건너가는 그녀는 알몸 위에 아주 얇은 모직 담요 한 장만을 두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추위를 뚫고 윈터의 침실을 찾았다.

미리 받은 열쇠로 어렵지 않게 윈터의 침실 문을 연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있는 윈터를 바라봤다. 침대 아래로 발이 삐져나올 만큼 그는 길쭉했고 체구는 상당히 컸다.

곰 가죽을 다닥다닥 이어 붙여 만든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 덮은 그는 셔츠의 단추 몇 개만을 푼 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시종은 그게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윈터가 입고 있는 셔츠는 이곳에선 아예 볼 수 없는 복식일뿐더러, 잘 때 저렇게 옷을 위아래로 다 갖춰 입고 자는 사람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신은 오늘 그의 침대를 덥혀 주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사방이 화강암인 석실은 훈훈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온기로 적당히 달궈진 돌을 맨발로 딛고 선 그녀의 몸에서 얇은 담요가 스르륵 허물어졌다.

윈터의 곁으로 다가간 시종이 그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그 기척에 잠이 깬 듯 낮게 앓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가슴팍까지 덮인 이불을 슬며시 끌어 내리고 익숙지 않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기 시작했을 때, 은백색 속눈썹이 매달린 눈꺼풀이 소리 없이 열렸다.

불에 탄 폐허 위의 하늘처럼 무감한 청회색 눈이 서늘하게 드러났다. 눈이 마주친 시종이 뭔가를 말하려 입을 벌리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시종은 한순간 제 몸이 휙 밀쳐졌다고 생각했다. 사나운 손아귀에 목을 졸려 숨통이 틀어막힌 시종은 눈 깜짝할 새 미지근한 석벽에 뒤통수가 부서질 만큼 처박혔다.

“……뭐야.”

서슬 퍼런 날붙이가 발끝부터 파고드는 듯 예리하고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통증조차 잊을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 …살려,”

“뭐냐고 묻잖아.”

“하, 끅…, 하슬라께서…, 보, 내셨…….”

“하슬라가 왜.”

“…잠자리, 시, …시중을, 윽…!”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숨통이 확 트였다. 시종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어진 채로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다.

신경질적으로 던져진 모직 담요가 시종의 등 위로 휙 떨어졌다. 머리까지 푹 덮인 담요를 다급히 끌어 내린 그녀가 윈터를 올려다봤다.

“역겨운 짓 하지 말고 꺼져.”

“하, 하지만 하슬…!”

“입 다물어. 당장 그 머리통을 터뜨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짧은 은백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움키듯 쓸어 올린 윈터가 분노로 열 오른 숨을 내뱉었다.

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잠든 지 고작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등신 같아…….’

무의식중에 아직도 자신이 그리말디 저택의 침실에서 자고 있다고 착각했던 윈터는 하마터면 제 몸 위로 올라오는 무게감조차 섀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이곳은, 더는 안락하고 조용한 그의 대저택이 아니라.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냄새나는 동족들이 우글거리는, 늑대의 소굴이었다.

“하지만 하슬라께서, …날이 밝을 때까지 침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명을 어기면 저는…,”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너희는 왕의 명이면 상대의 허락도 안 받고 침실을 멋대로 침입하나?”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제 발치에서 훌쩍거리는 시종을 내려다보던 윈터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하슬라에게 그대로 전해. 진정 내가 즐겁길 원한다면 내 앞에서 네 가랑이 사이로 무릎 꿇고 기어가는 모습을 보여 보라고. 네 발 아래 납작 엎드려 꼬리를 말고 벌벌 떨며 비는 모습도.”

“…….”

“정말 네가 그와 함께 다시 온다면 기꺼이 내 침실 문을 열어 주겠어.”

시종이 떨리는 눈으로 윈터를 올려다봤다. 무감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은 소름 끼칠 만큼 황폐하고 공허했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그 시선에, 결국 그녀가 떨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일어났다. 침실 문을 잡은 채 잠시 윈터를 보던 시종이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그대로 문을 닫았다.

윈터가 제 양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은 가느다란 손금을 따라 반짝이는 땀이 흥건했고, 아직도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침실 시종과 암살자는 한 끗 차이일 뿐이다. 누가 봐도 자객이라 할 만큼 내밀한 침입이지 않은가.

독한 술기운과 약간의 안일함이, 문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그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윈터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랐다. 하슬라가 언제 어디서든 제 턱밑에 손쉽게 칼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자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하슬라가 당장 당신을 죽이지는 못해도, 언제든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로, 성의 수비 병력은 검은 늑대들이 모조리 장악하고 있어요. 당신 침실 밖 순찰을 돌던 이들이 언제 문을 열고 칼을 꽂을지 모른단 뜻이죠. 늘 조심하셔야 해요.’

갈리나의 말을 떠올리며, 그가 침실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매우 고단했지만, 정신은 절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 * *

리버펠은 눈이 잘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섀넌은 눈앞의 상황이 몹시 이례적이라고 여겼다.

“샤, 이것 좀 바!”

아이가 작은 손에 흰 눈을 뭉쳐 내밀었다. 여린 손에 뭉개진 눈이 축축하게 녹아내렸다.

섀넌이 그 손의 물기를 얼른 털어 내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온몸이 몽글몽글하고 자그마한 아이는 마치 터지기 쉬운 수플레 같아서, 섀넌은 그를 안을 때마다 혹여나 망가질까 조심스러웠다.

아이가 헤실헤실 웃으며 섀넌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뺨에 와 닿는 아이의 손이 차가웠다. 섀넌이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 호, 하고 입김을 쐬어 주었다.

“또 감기 걸려서 고생하려고.”

아이가 짧은 다리를 바동바동 구르며 몸을 들썩였다.

“내려 줘, 더 놀 거야. 하얀 흑 만질래요.”

“이건 흙이 아니라 눈이라는 거야.”

무릎을 굽혀 눈밭에 앉은 섀넌이 제 허벅지에 아이를 앉혔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얼음 알갱이 같은 거지.”

그가 기다란 손으로 눈 한 줌을 집어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 손바닥 위를 적신 눈을 검지로 폭폭 짓누르던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예뻐. 예쁘고 하얗고 차가워. 꼭 샤 같아.”

“안 추워?”

“응! 매일 매일 흑이 하얬으면 좋겠어요.”

흑이 아니라 흙이고, 이건 눈이라고 말해 주려던 섀넌은 발갛게 상기된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저 웃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캉하고 보드라운 아이의 뺨에 입술을 묻고, 찬바람이 스며든 은백색 머리칼에 코를 비볐다.

데운 우유 냄새 뒤로 짐승의 체취가 스쳤다.

“…….”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 맞나. 아니면 그냥 허상인가.

리버펠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나?

문득 머릿속에 든 이상한 생각에, 섀넌이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꿈도 아니고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눈앞의 이건 현실인데,

…틀림없는 현실인데.

“샤, 내려 줘. 나도 흑 만질래요.”

손을 아래로 뻗은 아이가 섀넌의 품에서 벗어나려 상체를 숙였다.

그 순간 온통 하얬던 눈밭이 유리처럼 조각조각 갈라지며 암흑으로 사라졌다. 온 세상이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품 안에 있던 아이가 끝도 없는 아래로 추락했다. 휑하게 멀어지는 그 작은 몸을 잡으려 뛰어든 섀넌의 몸이 이내 심해에 푹 잠겨 들었다.

시커먼 물속은 눈이 밝은 섀넌조차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탁했다. 그 죽음 같은 심해 속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제 손에 쥐고 있던 뭔가가 있었는데…, 분명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한다고 하여 죽을 몸은 아니지만, 어쩐지 섀넌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필멸자들이 죽음을 앞에 둔다면 이럴까 싶은, 온몸의 말단이 차게 식는 듯한 공포였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향한 공포는 아니었다.

무언가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랑해요, 섀넌.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사랑해 주세요. 내게는 당신이 유일해요.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좋아요…? 섀넌…,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요…, 당신은, 섀넌, 내 박제조차, 샤…….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몇 배는 농도가 짙은 심해 속 허공에서 발을 구르자, 몸이 잠시간 위로 확 솟으며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섀넌이 질겁하며 고개를 뒤챘다. 검은 해초처럼 들러붙는 머리칼 사이로 아주 작은 은백색 해파리가 보였다.

제 손톱보다 더 작게 보여 해파리인 줄 알았던 그것은, 누군가의 머리칼이었다.

섀넌이 필사적으로 양팔을 가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 은백색 머리칼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닿지 않는 달을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은 막막함이 그를 잠식했다.

“……!”

악을 쓰는 섀넌의 입에서 커다란 공기 방울이 올라갔다. 계속해서 물을 가르며 끝도 없이 아래로 내려간 섀넌의 시야에 드디어 은백색 머리칼과 흐느적거리는 흰 셔츠가 들어왔다.

손끝에 그 가느다란 머리칼이 걸렸다. 필사적으로 양팔을 뻗은 섀넌이 마침내 그를 끌어안았다.

늘 뜨겁고 단단했던 윈터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아름다웠던 얼굴은 석고상처럼 희게 굳어 있었다.

“흐윽……!”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가 적막한 침실에 갑작스럽게 울렸다. 크게 헛숨을 들이켠 섀넌이 무언가에서 튕겨 나오듯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윈터…….”

제 머리칼을 쥐어뜯듯 움킨 그가 한숨처럼 제 아이의 이름을 내뱉었다. 희미한 달빛이 스미는 창을 한 번 바라본 섀넌이 아직도 발작하듯 가쁘게 터져 나오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 달달 떨리는 손끝이 차게 식어 있었다.

빌어먹을 악몽이었다.

* * *

“다시 가면 절 죽인댔어요……. 흑, 하슬라 님…, 제발…….”

아직 술기운이 다 깨지 않은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하슬라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제 발밑에 엎어져 있는 시종을 내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했다고?”

“…제 가랑이 사이로 무릎 꿇, 고…, 기어가는, …하슬라 님을, 보고 싶으시다고…….”

죽을 각오를 하고 힘겹게 말을 잇는 시종을 보던 하슬라가 그녀의 어깨를 발로 찼다. 그 타격에 나동그라진 시종이 얼른 다시 이마를 땅에 대고 엎어졌다.

미간을 꿈틀거리며 화를 삭이던 하슬라가 누군가를 향해 휘적 손짓했다.

“카힌.”

침실 문 앞에 있던 왜소한 청년이 앞으로 나왔다. 하슬라가 끙, 하고 앓는 소릴 내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년 끌어내. 시끄러우니까.”

카힌이 벽에 붙어 서 있는 호위 병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병사들이 다가와 제 팔을 붙잡자, 겁에 질린 시종이 살려 달라 빌며 울었다.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미간을 한껏 좁힌 하슬라가 홀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윈터의 침실에 시종을 들여보낸 건 선물인 동시에 경고가 맞긴 했다.

윈터 또한 그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종을 제게 다시 돌려보낼 줄은, 그것도 저런 말과 함께 돌려보낼 줄은 정말 몰랐다.

윈터는 제 경고에 확실한 액션을 취한 것이다.

“……카힌.”

이제 막 호위들과 함께 시종을 몰아내고 침실 문을 닫은 카힌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슬라가 한동안 가만히 벽난로의 불길을 응시했다.

마치 거기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노려보는 시선이었다.

“가서 갈리나를 데려와.”

* * *

밤중에 갑작스럽게 불려온 갈리나가 긴장한 얼굴로 하슬라의 침실에 들어섰다.

하슬라는 여전히 술기운이 남아 있는 듯 피곤하고 무방비해 보였지만, 그의 곁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검은 늑대들의 경계는 늘 한결같이 날카로웠다.

“…자하카.”

갈리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턱을 뒤덮은 구불구불한 수염을 매만지던 하슬라가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마치 깊은 동굴 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표면이 거칠고 묵직한 울림이 있는 그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갈리나, 네가 보기엔 윈터가 어때 보이지?”

“…….”

갈리나가 그저 대답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야심한 시간에 사람을 불러다 앉혀 놓고,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빌어먹게 눈부신 머리칼 하며 곱상한 이목구비는 야낙 쪽을 좀 더 닮은 것 같고…, 그 큰 체구를 생각하면 선대 자하카나 다리야 쪽을 완전히 빼다 박았단 말이야.”

“…그렇습니까.”

“대대로 자하카에 충성해 온 너희 게자르 가문이 참 좋아할 것 같은 외모야.”

“…….”

하슬라의 시선이 닿아 있을 뒷덜미부터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대답이 늦어선 안 된다. 갈리나가 애써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저 지금 왕좌에 계신 분께 충성을 바칠 뿐입니다.”

별안간 갈리나의 시야에 하슬라의 얼굴이 쑥 들어왔다.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하슬라가 고개를 쭉 내밀어 시선을 맞춘 탓이었다.

“‘진짜’ 자하카가 돌아왔는데, 검은 머리 왕을 섬긴다?”

“……하슬라께서도, 자하카이시지 않습니까.”

흐, 별안간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짧게 터졌다.

그 작은 웃음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갈리나가 티 나지 않게 몸을 굳혔다. 덕분에 미동 없이 엎드려 있는 몸은 고요했으나, 그녀의 심장이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

“그래, 그래…….”

하슬라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너희 가문이 지난 20년간 내게 보인 충성을 생각하면, 가끔은 우리 검은 늑대 놈들보다 더하단 말이지.”

하슬라가 별안간 갈리나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쭈그리고 앉은 채 엉금엉금 기어오는 자세로, 제게 바짝 고개를 내미는 하슬라의 시선을 피한 갈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말이야.”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윈터 뒤에 누가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

갈리나가 소리 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바로 대답을 했다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슬라가 진지한 얼굴로 미간을 깊게 구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다른 게 아니라 애가 너무 건방져. 뒤에 비빌 만한 배후가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까지 내게 기어오르기도 힘들 터인데…….”

갈리나가 살짝 고개를 들어 하슬라를 쳐다봤다.

하슬라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왼쪽 허공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녹슬어 다 삭은 철사처럼 결이 거친 수염이 그의 입술과 턱을 가리고 있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호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우리 장로들 중, 윈터와 은밀히 접선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던 하슬라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침실 안을 서성였다. 갈리나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치 고질병처럼 툭하면 치솟는 의심이, 윈터의 귀환과 동시에 더 심해질 거란 건 이미 예견된 일이지 않은가.

하슬라는 본인이 사랑받지 못하는 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그가 몰두한 건 제게 조금이라도 불충하는 자를 찾아 숙청하는 일이었다.

“…그런 자들은 이미 다 제거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갈리나 또한 그런 하슬라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 일에 어느 정도 가담한 바 있었다.

“그거야 예전 일이고. 본래 쥐새끼들은 죽여도 죽여도 계속 새끼를 치는 법이니, 지금은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갈리나는 자신이 하슬라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지금 당장 윈터를 죽이지 않는 것은 단지 세간의 이목이나 민심 따위를 신경 써서가 아니었다.

“나는 윈터뿐 아니라 그놈 뒤에 붙은 내가 모르는 쥐새끼들까지 깨끗이 치워 버리길 원해. 윈터를 없애는 건 간단하지만, 그런 쥐새끼들은 살려 두면 또 다른 놈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설쳐서 두고두고 후환이 되니까.”

이참에 제게 반하는 세력을 찾아 깨끗이 쓸어 버리기 위해 윈터를 두고 보는 것이다.

애초에 사랑받는 왕이 되는 일 따위엔 관심 없는 그는, 흰 설원 위에 오직 검은 늑대들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제게 불충하는 자들을 절대 살려 두지 않을 만큼 무자비하고 어리석은 자였다.

“잘 생각해 봐, 갈리나. 내가 그대를 왜 굳이 윈터 곁에 붙여 놨겠어. 응? 케인타운에 석 달씩이나 붙어 있다 여기까지 윈터를 데려왔을 정도면, 그대가 아무것도 모를 수 없을 텐데…?”

바닥을 향해 있는 갈리나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 쪽 사람들에게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도, 당장 하슬라가 윈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만큼 강력한 무언가…….

“사실…,”

“사실?”

갈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차분히 가다듬으며 말했다.

“……윈터 뒤에 아직 그리말디가 있습니다.”

하슬라가 천천히 턱을 당겼다. 그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갈리나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맹약은 끝나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만…….”

하슬라뿐 아니라 호위병들의 시선까지 제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는 것을 느낀 갈리나가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말디와 윈터의 관계가, …몹시 가까워서.”

“어떻게 가깝다는 뜻이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내밀합니다.”

케인타운에서 내내 윈터와 섀넌을 지켜보면서, 갈리나는 그들의 사이가 일반적인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거리감은 이상하리만치 가깝고 기묘했던 것이다.

그런 점을 비약적으로 부풀려 하슬라에게 말한 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기 위한 기지였다.

“아마 윈터에게 당장 무슨 일이 생기면 그자는 하슬라 님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자의 주변엔 몇 명의 뱀파이어가 더 있어요. 그리말디가 무슨 짓을 해도 발 벗고 도와줄 이들이죠.”

“…….”

“한 명의 뱀파이어가 늑대족 몇을 죽일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들이 시라트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리말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해 올 겁니다. 그자의 성정은 집요하니까요.”

십 년 전 아치볼드가에서의 그 참변 이후, 하슬라가 그리말디를 몹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직접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 그를 매우 두려워한다는 뜻이었고, 지금 갈리나는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리말디를 직접 써먹지 못하면 그의 허상이라도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 그리말디에게 암살당할지 몰라 평생을 성 안에 숨어 사실 게 아니라면, 당장은 윈터를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슬라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그러니까 시건방진 조카 놈을 없애려면, 그 전에 그놈 뒤에 있는 독사부터 죽여야 한다?”

하, 네깟 게 감히 그를 죽일 수나 있고? 십 년 동안 그자를 건드리지도 못한 주제에…….

갈리나는 그를 향한 경멸을 감춘 채 차분히 말했다.

“…그게 아니라 괜한 화근을 남겨 두시지 말라는 겁니다. 20년 넘게 아이를 키운 정이 그리 쉽게 한순간에 정리되는 건 아니니, 시간이 좀 더 흐르기를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못마땅한 듯 낮고 굵은 침음이 위에서 들려왔다. 갈리나가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은 숨 막히는 심해처럼 끈질겼다.

“늘 그놈의 그리말디가 문제지. 십 년 전에도, 지금도……, 아주 지긋지긋해.”

진득하고 깊은 한숨이 떨어졌다.

“다리야가 머리를 참 잘 썼단 말이야…….”

윈터가 그리말디의 보호 아래 있지 않았다면 하슬라는 윈터를 이렇게 오래도록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놈이 윈터 뒤에 버티고 있다니, 하슬라의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일 터다.

갈리나는 그저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앞으로는 윈터 뒤에 있을 그 어떤 쥐새끼보다도, 그 단 한 명의 뱀파이어가 하슬라에겐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갈리나, 그대가 케인타운에서 석 달간 그리말디를 지켜봤잖아.”

“…예.”

“그자에게 정말 눈곱만큼의 허점도 없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설령 있다 해도 꼭꼭 숨겨야 할 판국에, 하슬라에게 말해 줄 허점 따위 있을 리 없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조금의 틈도 없어? 그자만 가지고 있는 습관이라든가, 약점, 그 어떤 거라도 좋아.”

의중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짙은 눈썹 아래 그늘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갈리나가 시선을 내리깔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말디에게 약점 같은 게 있었다면, 진즉 하슬라 님께 말씀드렸을 겁니다. 저 또한 그놈을 없애고 싶은 건 똑같으니까요.”

그 순간 하슬라의 눈 한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짙은 눈썹 아래 살짝 가늘어진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갈리나를 꿰뚫을 듯 첨예하게 조여들었다.

그러다 갈리나가 고개를 들자, 하슬라의 시선이 순식간에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그래, …뭐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금세 무료해진 얼굴로 갈리나를 내려다보던 하슬라가 뜬금없이 카힌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벽에 그림자처럼 붙어 서 있던 카힌이 말없이 그 곁으로 다가갔다.

“카힌…, 카힌.”

두껍고 투박한 손이 카힌의 양 뺨을 감쌌다.

“너도 갈리나 말 똑똑히 들었겠지.”

카힌은 다른 검은 늑대들에 비해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하슬라가 옆에 끼고 친자식처럼 귀여워하는 청년이었다.

윈터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몹시 왜소한 그는 하슬라의 수석 의관이었다. 어릴 때부터 약학 연구에 두각을 드러내 하슬라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십 년 전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된 그는, 그 똑똑한 머리가 아니었다면 진즉 도태되어 추방당했을 것이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그 징글징글한 불멸자 놈이 우리 앞길을 막는구나, 응? 그렇지? 아주 바퀴벌레 같은 놈이란 말이야.”

징그러운 벌레 같은 놈…. 그 말을 강조하며 몇 번이고 반복한 하슬라가 카힌의 뺨을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까칠까칠한 손에 얼굴이 마구 꼬집힌 카힌이 얼른 무릎을 꿇었다. 하슬라의 귀여움을 받는 것치고, 그는 지나치게 과묵한 청년이었다.

“갈리나, 그대는 이만 물러가 봐.”

무의식중에 그들을 빤히 보고 있던 갈리나가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이유 모를 불길함이 등골을 훑었다. 제가 움직이는 경로를 고요히 좇는 검은 늑대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갈리나는 숨죽여 침실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원인 모를 불안함에 집중하는 대신 눈앞의 현실을 직시했다.

비록 허상일지라도, 어쨌든 윈터의 뒤에는 그리말디라는 깨지지 않는 방패가 있었고, 그 존재를 아는 이상 하슬라는 당장 함부로 그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은, 시간을 벌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성의 계단을 내려가며, 갈리나는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을 가정해 보고 제 말에 허점이 없었는지를 계산해 보았다.

* * *

겨울은 어둠이 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눈을 뜬 러셀이 어둑한 복도를 더듬더듬 지나쳐 섀넌의 침실로 향했다.

맹약이 끝난 지 보름이 지난 시점.

그러나 제 주인이 잠에서 깨어 있던 시간은 다 합쳐도 채 하루가 되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주인을 위해 벽난로의 불을 시간마다 확인해야 했던 러셀은 뜻밖에 텅 빈 침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어딜 가셨지…?”

꺼져가는 벽난로의 불씨가 일렁이며 빈 침실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쩐지 한기를 느낀 러셀이 작게 몸서리치며 선반에 있던 램프에 불을 붙였다.

“…섀넌 님……?”

그가 램프를 들고 복도를 거닐며 제 주인을 찾았다. 아예 나가신 건가? 말도 없이…? 이 드넓은 저택에 밤새 저 혼자 있었던 거라 생각이 들자 어쩐지 오싹했다.

1층까지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제 주인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홀의 조명을 훤히 밝힌 러셀이 혼자 먹을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 옆에 딸린 식재료 창고로 들어갔다.

“…….”

창고에 들어선 그의 걸음이 딱 멎었다. 그가 램프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조명을 찾았다.

창고 어둠 저편에, 웬 검은 실루엣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탓이었다.

기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한 쌍의 붉은 안광이 선연했다.

“술 보관을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으와아아악!”

러셀이 손에 들고 있던 램프를 아예 던지다시피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진 램프가 박살 나 불이 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섀넌이 순식간에 다가와 그 램프를 한 손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내 노예 새낀 목청이 아주 좋으시군.”

안 그래도 섭식이 부실해서 현기증이 일던 차에, 램프를 잡으려고 무리해서 움직이니 머리가 어지러워진 섀넌이 한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 그, 기, 기척이라도 좀 내시지 그러셨어요!”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러셀에게 다가가 램프를 내밀었다. 그 램프를 받으려던 러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제게 램프를 내민 섀넌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르르륵…, 램프 손잡이의 이음새가 그 진동으로 인해 작은 소음을 냈다.

아주 찰나 그걸 본 러셀이 얼른 램프를 받아들자, 섀넌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제 손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아니, 당연히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 침실에 안 계셔서, 나가신 줄 알고, 저택에 저 혼자 있는 줄 알았…….”

러셀이 횡설수설하며 벌벌 떨리는 다리를 추슬러 몸을 일으켰다.

“창고 관리가 왜 이 모양이야. 그동안 나한테 준 술이 다 이 먼지 속에서 구르다 나온 거란 말이야?”

섀넌이 손끝으로 선반을 훑어 러셀에게 보여 주었다. 뽀얀 먼지가 묻은 그 손끝을 본 러셀이 면목 없는 얼굴로 창고의 조명을 밝혔다.

“…창고는 원래 이틀만 놔둬도 먼지가 금방 쌓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신 게 열흘 전이셨잖아요. 러셀은 그 뒷말을 삼키며 섀넌을 유심히 살폈다. 눈이 저렇게 붉고 송곳니가 비어져 나온 걸 보니, 이유는 몰라도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이따 카일 님이 오실 겁니다. 오늘 엘리자베스 님 아트홀 전시회 행사가 있으시다고…….”

“알아.”

손은 떨고 있을지언정 차분한 얼굴로 제 머리칼을 쓸어올린 섀넌이 짜증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는 내내 카일이 찾아와 아주 시끄럽게 그 소릴 지껄여대더군…, 매일 매일, 아주 지긋지긋하게…….”

“…죄,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막겠어요. 마음먹으면 저택 문도 부수고 들어오실 분인데…….”

러셀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출 준비, …하실 겁니까? 목욕물을 데울까요?”

섀넌이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을 보니 이번에도 역시나 외출은 그른 것 같았다.

카일이 제 침실까지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도록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 나올 듯한 표정이라, 러셀은 이미 낙담하고 있었다.

“……준비해.”

그런데 섀넌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러셀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웬일로 안 주무시고 외출을 다 나가실까.

“…예.”

그러나 제가 고민해 봐야 뭘 알겠는가. 맹약이 끝나며 잠깐 무너졌던 일상이 다시 돌아오려는 모양이라고, 러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복원된 옛 명화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생기 없는 인간의 육체는 아름다웠고, 그 반대편에는 신이 손을 뻗고 있었다. 무릎 위에 툭 걸쳐진 인간의 손끝은 신과 닿지 않았음에도 마치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신이 그 손끝으로 인간에게 제 권능을 전하고 있다는 게 그림을 향한 세간의 해석이다. 그러나 섀넌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인간 또한 신에게 뭔가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적당히 한두 번 봤을 때나 드는 감상이지만.

이미 평생 살며 수십 번을 질리도록 봐온 작품을 무감한 눈으로 훑던 섀넌의 뒷짐 진 손을 누가 톡 쳤다.

“섀넌, 너 손.”

“…….”

카일이 그의 옆으로 붙어 서며 가볍게 물었다.

“사냥을 얼마나 안 했으면 손이 그렇게 달달 떨릴 정도야?”

“…떨긴 누가 떨어.”

섀넌이 등 뒤에 둔 손을 움츠리며 몸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명화를 감상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도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긴, 늘 곁에 있던 윈터가 없으니 다들 한 번씩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슬슬 여길 떠나야겠어.”

섀넌이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빌어먹을 소도시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다. 지긋지긋한 대저택도, 사람들의 시선과 소음도, 비릿한 바다 냄새도…….

“뭐…?”

몸을 돌린 카일이 섀넌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조금 심각했다.

“한동안 내내 잠만 자더니, 너무 뜬금없는 결정 아니야?”

섀넌이 그를 힐끗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 계속 여길 뜨자고 노래를 부른 건 너야, 카일. 이제 와서 웬 간섭이야.”

“…어디로 갈 건데.”

그림에서 몸을 돌린 섀넌이 천천히 갤러리 안을 거닐며 대답을 보류했다.

최근 케인타운에는, 섀넌으로선 얼굴도 모르는 뱀파이어들이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섀넌 그리말디가 과연 자하카와의 연을 완전히 끊었을까. 혹시 자신들 모르게 은밀히 시라트에 연을 대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그리말디는 지금 어떤 꼴일까. 그 늑대 새끼에게 꽤 정을 준 것 같다는 소문이 있던데…….

딱 그 정도의 의심과 흥미를 이유로, 이 별 볼 일 없는 변경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케인타운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는 순간, 그 시선들이 경계 어린 감시로 바뀔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카일이나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제게 윈터를 데리고 도망치는 일에 협조해 주겠다며 나사 빠진 소리를 해 댔어도,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불멸자인 탓이다.

진작 둘이 도망이라도 쳤으면 모를까, 윈터가 이미 시라트로 건너간 이상 그는 자하카라.

만약 자신이 계속 윈터를 보호하려 들면 결국 시라트의 왕좌 다툼에 개입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건 어떤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는 선이었다.

이 땅의 유일한 포식자인 자신들이 천박한 늑대족과 엮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불멸자가 제 손으로 직접 늑대족들의 왕을 세운다니, 그들은 그런 수치를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로렌스도 돌아왔고, 얼마 전엔 세바스티안도 들렀다 갔어. 그들이 왜 왔는지 너도 모르진 않겠지.”

그의 곁에서 걷던 카일이 낮게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여길 떠나는 건 나도 찬성이긴 하지만….”

“…….”

“…설마 북부로 갈 건 아니지?”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기어이 직설적인 말이 나왔다.

“시라트 인근으로 가 봤자 이제 걔 소식은 못 들어.”

뒷짐을 진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 섀넌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울컥 움직였다.

“……그딴 생각한 적 없으니까 사람 좀 그만 감시하라고 전해.”

치미는 짜증을 꾹꾹 누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감시는 무슨. 그냥 다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우리 섀넌은 말을 참 예쁘게 한다니까.”

금세 표정을 바꾼 카일이 능청을 떨며 무안하다는 듯 웃었다.

걱정은 무슨…, 시발 새끼들.

그들이 얼마나 뼛속까지 이기적인 족속들인지 섀넌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 또한 그들과 같기 때문이다.

“…북부는 지긋지긋해. ……여긴 더 지긋지긋하고.”

진심이었다. 저택 곳곳에는 아직도 빌어먹을 짐승의 체취가 남아 있었고, 그건 섀넌을 끈질기게 현실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모든 게 끔찍이도 지긋지긋했다. 섀넌이 피로한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낮게 말했다.

“……어디로 갈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지.”

“그래, 일단 지금 당장은 말고 느긋하게,”

“샤말란 경…!”

그때 누군가 카일을 불렀다. 카일이 섀넌을 힐끗 보고는 잠시 그 곁을 비웠다.

혼자 남은 섀넌이 갤러리 벽면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봤다. 두 눈은 평소보다 더 붉었고, 표정은 누가 봐도 그리 안온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티를 내니, 괜한 의심만 더 받고 있지 않은가.

시선을 내린 그가 아직도 진정되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단지 섭식을 못 해서 생긴 떨림은 아니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악몽 때문이다.

생전 그렇게 꿈자리가 사나워 본 적은 처음이었다. 눈만 감으면 시작되는 그놈의 지긋지긋한 악몽 때문에, 이제는 잠조차 편히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

섀넌이 말없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제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그는 이걸 단순한 사고의 후유증이라 여기기로 했다.

따지자면 모든 건 사고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맹약에 걸려들 게 된 것도, 그 때문에 윈터를 키우게 된 것도,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에게 정을 주게 되었던 것도.

그 모든 건 다 사고였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제 긴 생애에 비하면 아주 짧은 해프닝에 불과한….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제기랄.”

한 손으로 제 눈을 덮은 섀넌이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 * *

절벽 끝에 세워진 석조 성은 몇 개의 별채가 아우르고 있었다.

윈터가 머무는 별채는 본관의 바로 옆, 왕의 직계 가족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예전엔 다리야가, 그리고 윈터 자신이 눈도 뜨지 못한 갓난쟁이였던 시절에 잠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별채는 본관과 다리 하나만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조악한 다리는 까마득히 높은 최상층에 걸쳐져 있었다. 이 다리를 통해 검은 늑대 수비병들이 성을 오가고, 윈터의 침실 앞까지 드나든다.

휩쓰는 바람에 낡은 목제 다리가 끼긱 비명을 지르며 휘청였다.

갈리나와 그 다리를 건너면서, 윈터는 다리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깎아지른 절벽은 어디 하나 디딜 곳 없이 아뜩했고, 새까만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만약 떨어지기라도 하면 생존의 여지 없이 즉사할 것이다.

절벽에 철썩 부딪힌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이지러졌다. 그 포말이 꼭 아가리를 벌리고 떨어질 먹이를 기다리는 수귀의 이빨 같았다.

하필 왜 성을 이런 절벽 끝에 세웠을까. 바다를 등지면 최소한 적에게 포위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 걸까.

윈터는 머릿속에 들러붙는 다른 생각을 지우려 필사적으로 주변 풍경에 집중했다.

석조 성끼리 이어진 다리를 건너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축축한 석벽이 둘러싸인 계단에는 지독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간밤에 하슬라가 들여보낸 시종을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늘 그랬듯 갈리나였다. 윈터가 힐끗 그녀를 일별했다.

“숙부님께서 내리신 선물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저 선물을 다른 방식으로 내려 주시면 어떻겠느냐 제안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그의 낮은 물음에 갈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어제의 일은 시종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받아들이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냥 돌려보내면 하슬라는 조카가 제 선물을 거부했다고 트집을 잡을 테고, 반대로 쉽게 받아들이면 나중엔 배 속에 칼을 품은 시종을 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래도, 그런 방식은 너무 아슬했어요. 물론 하슬라에게 필요 이상으로 굽힐 필요도 없지만, 지켜보는 제 입장에선 조마조마합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어요.”

냉랭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날 이곳까지 데려왔으면, 애초에 그런 게 내게 닿기 전에 당신이 알아서 컨트롤 했어야죠.”

“…미리 알지 못해 미안해요. 하슬라가 첫날부터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윈터에게선 대답 대신 긴 한숨만이 돌아왔다. 그 한숨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갈리나가 미안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았다.

“앞으로는 그런,”

그녀가 말을 멈췄다. 윈터가 제게 잡힌 팔을 빼냈기 때문이다.

“…….”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은 것도, 거칠게 뿌리친 것도 아니었지만, 갈리나는 그게 명백한 거부의 표현이라는 걸 잘 알았다.

갈 곳 잃은 손을 홀로 맞잡은 갈리나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당분간 당신은 이곳에 적응하는 것만 신경 쓰세요.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윈터에게서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침묵 앞에, 갈리나는 애써 표정을 유지해야 했다.

석조 성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걷던 윈터의 발이 느려졌다.

그가 제 앞을 지나가는 익숙한 동물을 보고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늑대가 말도 타나요.”

“인간처럼 무기도 쓰고 말도 타요. 당신처럼 늑대의 형질을 많이 타고난 경우는 직접 달리는 게 더 편하겠지만, 보통은 인간의 형질을 더 많이 타고났거든요.”

갈리나가 성실히 대꾸했다.

이곳의 분위기는 매우 자유로웠다. 어떤 자는 사람의 형태로, 어떤 자는 반인반수의 형태로, 또 어떤 자는 늑대의 형태로 각자가 편한 모습을 하고는 한 울타리 안에서 스스럼없이 섞이고 어울렸다.

윈터는 그 광경이 몹시 이질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부러웠다. 동족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삶. 자신 또한 이런 삶을 막연히 꿈꿔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섀넌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희미하게 머릿속에 그려 보던 상상은 금세 미련 없이 흩어지곤 했다.

“사냥은 언제든, 마음껏 할 수 있어요. 이따가 숲을 보여 줄게요.”

윈터는 이제 갈리나의 말에 별달리 놀라지도 않았다. 이 혹한에, 보이는 거라곤 흰 눈밖에 없는 이곳에 숲이 있고 풍족한 사냥감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뭔가 생각하던 윈터가 낮게 물었다.

“……여기에 불멸자가 들어온 적은 있나요. 아무리 경계선에 순찰병이 있다고 해도, 추격자들이 잠입할 정도면 불멸자들은 더 쉽게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갈리나가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리말디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녀가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왜요, 혹시라도 그리말디가 이곳으로 당신을 찾으러 올 것 같아서요?”

“…….”

윈터가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그런 것까진 감히 바란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저 이런 곳을 섀넌이 보면 뭐라고 할지, 이런 풍경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어떨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불멸자들은 이곳에 절대 발 들이지 못해요. 순찰병 때문이 아니라, 시라트에서만 사는 붉은 눈 까마귀 때문에요.”

“붉은 눈 까마귀.”

낮게 제 말을 반복하는 윈터를 보며 갈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트에 발 들이는 불멸자의 기운을 감지하면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죠. 한 까마귀가 울기 시작하면 그 소리를 들은 다른 까마귀들이 울고, 순식간에 시라트 전역에 온통 그 울음소리가 뒤덮이는 거예요.”

그녀의 가벼운 대꾸에 윈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모를 수 없겠네요.”

옹기종기 쭈그리고 앉아 사슴의 털가죽을 맨손으로 벗겨내던 여자 두 명이 윈터를 발견하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여자들의 키는 섀넌과 거의 비슷할 만큼 컸다.

윈터는 위아래로 자신을 훑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돌집의 겉면에 젖은 흙을 발라 보수하는 자들, 혹은 불을 피우거나 짐승의 사체를 손질하는 자들, 말에게 먹일 건초를 구유에 옮기는 자들 사이를 지나던 윈터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고삐도 매이지 않은 커다란 말의 갈기를 잡고 이끌던 남자가 갑자기 몸의 골격을 변형시키며 몸에 걸치고 있던 가죽 넝마를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길목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인반수로 화하고는 상의를 탈의한 남자는, 제가 벗은 옷을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습관처럼 익숙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늘 변화를 억누르고, 인간의 몸을 유지하며 사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던 윈터에겐 조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윈터, …안 불편해요?”

옆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요?”

윈터가 갈리나를 힐끗 내려다봤다.

“야낙 님은 거의 늑대의 몸으로 지내셨거든요. 당신도 늑대의 형질을 많이 타고났으니 그게 더 편할 텐데. 이곳에 와서 한 번도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아서요.”

윈터가 입술 안쪽을 얕게 깨물다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눈치 볼 거 없어요. 물론 하슬라 앞에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건 조금 자제하는 게 좋겠지만, 평소엔 당신이 편한 모습으로 얼마든지 있어도 돼요.”

갈리나의 그 마법 같은 말에, 윈터는 마치 꿈이 현실이 된 것 같아 미약한 소름을 느꼈다.

더는 제 변화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본능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 사방에 동족이 있어 더는 제 존재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환경….

그러나 섀넌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것만으로 이 꿈은 제겐 악몽이었다.

자신이 늘 두려워하던 최악의 악몽이, 눈앞에 펼쳐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윈터는 새삼 자신과 섀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실감했다. 북부 끝인 이곳은, 섀넌이 있는 남부 케인타운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평생 이렇게나 그와 멀리 떨어져 지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

갑자기 치솟은 열기가 목을 꽉 메웠다. 윈터는 눈을 내리감으며 하얀 풍경을 차단했다.

저 혼자만 매달리는 일방적인 관계에 이제는 완전히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동족들을 볼수록, 섀넌에게 바랐던 감정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를 더 확실히 깨닫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섀넌이 제게 줄 수 있는 애정은 한계가 있었을 테고, 애초에 짐승인 자신은 감히 그 이상을 바랄 수 없는 거였는데.

어쩌자고 그런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렸을까.

섀넌이 자신을 버린다 한들, 자신은 절대 그를 버려선 안 되는 거였는데.

저를 두고 갈등하는 시선이 아니라 경멸이든 혐오든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매달리고 빌며, 차라리 그의 시야 안에서 넝마가 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어쩌자고 그런 모진 말을 쏟아 내고, 그토록 쉽게 그와의 세상을 제 손으로 박살 내버렸을까.

“윈터.”

“…….”

“윈터…?”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윈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열리는 시야로 다시 흰 설원이 들어찼다. 자신과 같은 동족들이 우글거리는, 흰 눈이 가득한 이곳이 제 현실이었다.

‘…그래, 이해해, 윈터. 날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해.’

아름다운 섀넌과 향긋했던 그의 체취는 이제 아주 머나먼 꿈이 되어 버렸다.

‘가. 난 늘 말했어. 네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당장 내 앞에서 꺼지고 시라트에 가서 그놈의 왕 노릇 하며 잘 살아.’

가장 갈망했던 꿈은 도리어 더 멀리 사라지고, 가장 원치 않았던 악몽만이 눈앞에.

“괜찮아요?”

갈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윈터는 제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한참 멀리 건너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윈터가 말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저기, 윈터.”

부연 안개가 낀 듯한 눈은 그 어디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이 어쩐지 불안해서, 갈리나가 조급히 말을 붙이며 그를 따라갔다.

“…말을 타 본 적은 있어요? 원한다면 가르쳐 줄게요.”

끈질기게 제게 들러붙는 그녀를 향해 윈터가 시선을 내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윈터는 저를 보는 갈리나의 시선에 늘 담겨 있는 초조함과 절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이곳에 정 붙이게 하고 싶은, 자신들의 자하카를 되찾고 싶은 갈망.

형태는 다르지만, 그 갈망은 섀넌을 욕심냈던 자신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신은 결국 섀넌을 갖지 못했지만, 이들은 자신을 기어이 이곳으로 데려왔다.

“…갈리나.”

윈터가 저 앞에서 함께 걷는 반인반수의 모녀에게 시선을 걸어 둔 채 낮게 물었다.

“내가 왕좌에 앉으면, 좋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리나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윈터의 얼굴은 의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 내가 좋은 왕이 아니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그런 말이 어딨어요?”

갈리나의 목소리 끝이 높아졌다.

“목소리 낮추세요.”

윈터가 차분히 그녀를 일축했다.

순간 너무 당황하고 흥분해 저도 모르게 약간 언성을 높인 갈리나가 얼른 몸을 바로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검은 늑대들이 윈터의 신변 호위를 명분으로 자신들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윈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만 보니 당신들은 올바른 왕을 추대하는 것엔 관심이 없어 보여서요.”

그가 낮게 말을 이었다.

“…그저 당신들이 선택한 왕이 무조건 옳아야 하는 거지.”

“…….”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갈리나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누가 뭐래도, 자하카 외에 왕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없으니까.”

그녀의 신념에 타협의 여지 같은 건 없다. 지긋지긋하게 되돌아오는 대답에 윈터의 눈이 일그러졌다.

옆에서 그걸 올려다보는 갈리나는 그의 표정에서 덩달아 절망을 느꼈다.

“내가 이곳에 아무리 정을 붙이려고 노력해도, 만약 그게 안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요.”

“…….”

“내가 끝까지 이곳에 전혀 미련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당신들은 자하카를 왕좌에 앉혀놓으면 그걸로 되는 건가요.”

“하루 만에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윈터.”

절박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불안하게 목 언저리를 배회하는 손끝이 떨렸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신념이었다면, 애초에 그를 불멸자에게 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들을 멸시하는 악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그를 살리지 않았을 거란 뜻이다.

“제발…, 조금만 살아 봐요. …여기가, 당신 고향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다른 늑대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갈라진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이미 그리말디는 당신을 버렸어요. 대체 왜 그자에게 이렇게까지 미련을 갖는 거예요? 하루빨리 당신을 떠나보내려고 전전긍긍한 쪽은 그리말디고, 하루빨리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쪽은 우리라고요…!”

윈터가 몸을 돌려 갈리나와 마주했다. 결코 속을 알 수 없는, 그 특유의 무감한 눈이 싸늘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치솟는 감정을 꽉 억누른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알아. 굳이 그 사실을 내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갈리나.”

목구멍을 꽉 채우는 열기를 집어삼킨 갈리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물론 그리말디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 시작엔 우리가 있었다는 걸 절대 잊지 마세요.”

“…….”

“우리가 당신을 허무하게 놓아 버리려고 여태껏 버텨 온 건 아니니까. 애초부터 당신의 생엔 자하카로서의 의무도 늘 함께였다는 뜻이에요…!”

갈리나에게서 느리게 시선을 뗀 윈터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들 정말 미쳤군.”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와 체념이 내려앉은 그 눈에, 갈리나는 가슴 한편이 섬뜩해졌다. 함께 시라트로 오는 내내 지겹도록 봐 온 그 눈이었다.

윈터에게선 더는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갈리나는 여기서 더 절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끝내 그에게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땅만 바라봤다.

‘이제 겨우 하루야.’

윈터가 귀환한 지 이제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다.

결국은 모든 게 시간 싸움이라고 갈리나는 생각했다. 병력을 모으는 것도, 윈터의 마음을 붙잡는 것도, 그 모든 건 결국 시간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 * *

코트 깃을 여민 섀넌이 구둣발로 냉랭한 겨울 산을 올랐다.

되도록 빠르게 움직이고 싶었으나 섭식을 못 한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현기증이 도지고 숨이 찼다.

이제는 눈앞이 새까맣게 돌 지경이니, 조금만 혈압을 올려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맹약이 끝난 지도 벌써 한 달.

섀넌은 여러 이유로, 아직 케인타운을 떠나지 못했다.

“영속의 권능을 누리는 악마이자, 만부의 피로 빚어진 선신이여…….”

숲 깊은 곳까지 겨우겨우 당도하자 그의 옆으로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함께 낯뜨거운 칭호가 들려왔다.

가쁜 숨을 달래느라 허리를 약간 굽힌 채 가슴팍에 손을 얹고 있던 섀넌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벌써 다섯 번째 만나는 추격자였다. 그 전에 만났던 추격자들은 모두 섀넌의 의뢰를 거절했다.

일전에 추격자 중 하나를 죽인 일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는 탓도 있었지만, 다른 뱀파이어들의 압박 때문에 누구도 섀넌의 의뢰를 함부로 받으려 하지 않는 탓이 컸다.

“영을 부어 주실 건가요?”

몹시 어려 보이는 늑대가 헤죽 웃으며 물었다. 이 지역에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원래 남부 근처까진 잘 안 오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 의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지요.”

“…너 혼자야?”

섀넌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예, 저는 원래 혼자 움직입니다요.”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진 섀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낮게 말했다.

“…의뢰받을 거야, 말 거야.”

“받으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요?”

늑대가 히히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추격자들이 모두 섀넌을 피해 다닐 때, 이자만 당돌하게 찾아와 그의 의뢰를 받으려 한다.

어린 늑대 주제에 벌써 연륜이 묻어나는 태도를 보아하니, 빌어먹게 간이 크고 수완이 좋은 자인 모양이라고 섀넌은 생각했다.

“그 의뢰가 혹시, 자하카와 관련된 겁니까요?”

섀넌이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자하카가 윈터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걸 한 박자 늦게 인지한 탓이다.

“외람되지만, 자하카께 직접적으로 뭔가를 전달하는 거라면 다른 뱀파이어분들께 그것을 보여드려야 할 수도,”

“아니, 그냥….”

섀넌이 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늑대가 의아한 눈으로 말을 재촉했다. 핑핑 도는 머리를 애써 가라앉힌 섀넌이 말을 이었다.

“그냥 윈터가, ……살아있는지만 보고 와.”

늑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게 다입니까요?”

섀넌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늑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일단 시라트로 직접 잠입하는 건,”

“알아. 네놈이 원하는 빌어먹을 피는 얼마든지 쏟아 줄 테니 지금 당장…….”

빈혈로 눈앞이 자꾸 새까맣게 꺼지는 걸 참던 섀넌이 말을 멈췄다.

추격자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보통 늑대들과는 달리 느려 터져서, 시라트를 오가는 것만 왕복 한 달이 넘게 걸린다. 그 시간이면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직접 보러 가면 좋을 텐데.

한 번이라도 보고 오면, 그가 잘 지내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돌아올 수 있는데.

하지만 시라트 영역에 불멸자가 은밀히 발을 들이기란 불가능했다.

들어가자마자 발각되면 어디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윈터가 있는 곳까지 가능할까.

그 앞에 가서 죽더라도 일단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미친 생각이야.’

순간적으로 치솟은 충동이 스스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섀넌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소리 없이 제 어리석음을 비난했다.

그런 그를 보며 늑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순히 그것만 보고 오는 거라면 해 드릴 수는 있지만, 아시다시피 위험수당이 붙습니다요. 다섯 배 정도…….”

“…….”

전에 만났던 추격자들은 위험 수당이 두 배였는데.

섀넌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알았으니까, 바로 출발해.”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제 손목을 그었다. 빠르다 못해 조급해 보이기까지 한 동작이었다. 그 모습을 조금 놀란 듯 보던 늑대가 얼른 그 아래로 입을 벌렸다.

몇 초 만에 금세 아물어 버리는 살갗을 달달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베어 피를 쏟아 내는 섀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뚝, 뚝, 깡마른 손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피 한 방울마저 흘릴세라 열심히 받아먹던 늑대가 입맛을 다셨다. 섀넌은 그저 이를 악문 채 그 역겨움을 견디고 있었다.

“저, 그러면, 알고 싶으신 게 단순히 자하카의 생존 여부입니까요? 그런 거라면 왕복으로 한 달 반, 넉넉잡아 두 달 정도면 될 겁니다.”

한참이나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던 늑대가 설명했다.

섀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완 좋은 늑대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의뢰 수행하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제 손해일지도 모르지만, 섀넌 님의 생각보다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닐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하슬라는 윈터 님께 그리 쉽게 손대지는 못할 겁니다요.”

섀넌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하슬라가 누군데.”

“지금 왕좌에 있는 검은 늑대요. 다리야 님께서 말씀하시길, 윈터 님은 처음부터 늑대의 몸으로 빚어졌다더군요. 그런 분께 하슬라 따윈 상대도 안 되지요! 비록 병력이 조금….”

“잠깐.”

빈혈 때문에 이마를 짚고 있던 섀넌이 그의 말을 잘랐다. 이마에서 천천히 손을 뗀 그의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이 시점에 또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이름이었다.

“다리야가 네놈한테 그런 얘길 했다고?”

“…예, 그렇습죠?”

“네놈이 다리야를 어떻게 아는데.”

“어떻게 알긴요? 제가 이래 봬도 추격자 중 가장 긴 경력을 자랑하는 놈입니다요.”

어깨를 으쓱한 그는 제 자랑에 입이 터진 듯 신나게 말을 늘어놨다. 어떻게든 섀넌과 건너 건너 연이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저는 다리야 님께서 어린 늑대였던 시절부터 친우처럼 아주 오래 알고 지냈는걸요. 그분이 저를 시라트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주셨지요.”

섀넌이 말없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도태되거나 태생적으로 하자가 있는 늑대들은 거의 살지 못할 지경이 될 때까지 동족들에게 물어뜯기다 추방당한다.

그렇게 시라트 밖으로 방출된 늑대들은 스스로 사냥할 힘도 없어 금세 죽어 버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 놈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피를 요구하며 추격자 노릇을 하기 시작한 게 대략 30년 전……, 그때 자신은 서북부에 칩거하고 있을 때라, 그저 카일에게 그런 이슈를 스치듯 전해 듣기만 했었다.

“큰 고초를 당하기 전에 다리야 님께서 구해주셨어요. 그리고 시라트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려 주셨습니다요. 그 이후에도 계속 왕래했지요.”

“…….”

“…마지막으로 뵌 건 다리야 님께서 검은 늑대들에게 끌려가기 직전이었습니다요. 그 길로 다시는 못 뵐 줄은 몰랐지만.”

늑대는 우습게도 몹시 오래된 과거를 들여다보듯 노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섀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가 20년 전 다리야를 처음 봤을 때 이미 다리야는 최소 40대는 넘어 보였다.

그럼 이 늑대가 그 훨씬 전부터 다리야를 알고 있었단 건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늑대는 아무리 많게 봐 줘야 20대 초반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기형적으로 작은 체구와 흉물스럽게 이빨을 늘어뜨린 그 못생긴 외모를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순간 섀넌의 눈이 기이하게 돌변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늑대의 용모를 다시 찬찬히 살폈다.

“……다리야가 너희들 탈출을 돕고, 시라트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려 줬다고.”

“예,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리처럼 도태된 늑대들이 시라트 밖에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요. 그 은혜는 정말…, 말로 다 못하지요.”

섀넌은 20년 전의 어느 날을 생각했다.

서북부 저택의 그 단조로운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닮은 잿빛 머리의 사내가 나타났던 순간도.

다리야를 처음 만났던 날의 음성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영속의 권능을 누리는 악마이자, 만부의 피로 빚어진 선신이여.’

그가 자신을 어떻게 불렀던가.

‘뜨거운 밤의 환희이며 영혼을 태우는 차가운 불이시여.’

제 앞에 무릎 꿇고, 추격자들이나 쓴다는 낯뜨거운 칭호를 쓰지 않았던가.

“……네놈들이 우리에게 쓰는 그 이상한 칭호.”

“예?”

“그것도 다리야가 알려 준 건가?”

“아, 예! 그렇지요. 뱀파이어들이 그런 칭호를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물론 지금껏 일하면서 그 칭호를 진짜 좋아하는 분은 거의 못 뵈었긴 했지만, 가아끔 아주 즐기시는 분들이 있습죠오….”

늑대가 앳된 얼굴로 히히 웃었다.

번거로운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대가로 불멸자의 피를 받아먹는, 그 기괴한 짓을 최초로 이들에게 가르친 게 다리야라니.

애초에 그가 제 앞에서 썼던 칭호가 어설프게 추격자들을 따라 한 게 아니라, 도리어 그 자신이 추격자들에게 알려 준 거라니…….

그 진중하고 투박한 남자를 생각하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섀넌이 말이 없자 웃음기를 쏙 숨긴 늑대가 눈을 뒤룩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앳된 얼굴을 무서울 정도로 빤히 응시하던 섀넌이 불쑥 물었다.

“그동안 뱀파이어의 피를 얼마나 마셨지?”

“아유, 그런 걸 어떻게 다 일일이 계산합니까요?”

“…….”

섀넌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다 이내 현기증이 도졌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출발해.”

도무지 이성적인 생각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눈앞이 팽글팽글 돌며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제 눈을 덮은 섀넌은 당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단 윈터의 소식을 뭐라도 들어야겠다.

그래야만 이 빌어먹을 떨림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 * *

하슬라는 높은 곳을 매우 좋아했다.

시라트에서 가장 거대한 자신의 성마저 작게 보일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제 영토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습관이었다.

하슬라의 호위 정예병 중 하나인 바얀은 오늘도 그런 그의 뒤에 붙어 걷고 있었다. 오른쪽 옆은 깎아지른 듯 아찔한 절벽이었다.

깍, 까악, 침엽수 가지 위에 나란히 앉은 붉은 눈 까마귀가 짧게 울었다.

“음, 잠깐.”

좌우로 흔들리는 가마 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하슬라가 손을 들었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가마꾼들이 멈춰 서며 가마를 내렸다.

저들끼리 몸을 딱 붙이고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붉은 눈 까마귀와 메마른 침엽수림을 응시하던 그가 가마에서 내렸다.

바얀을 비롯한 그의 정예병 모두가 외부인의 냄새를 감지했다.

“…서쪽 관문 경계망이 기어이 또 뚫린 모양이군.”

“추격자일 겁니다.”

하슬라가 바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여간 쥐새끼 같은 놈들, 소리 없이 잘도 기어들어 오지…….”

툭하면 이곳에 잠입하는 추격자를 잡아 족친 게 벌써 몇 번째던가. 십 년 전 아치볼드가 사건 이후, 전부 그리말디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하슬라는 이곳에서 추방당한 늑대들이 불멸자들의 개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하슬라가 제 어깨 위로 손을 까딱여 뒤에 있는 카힌을 불렀다.

“혹시 그리말디 냄새가 나는지 잘 맡아 봐.”

카힌이 말없이 나와 땅을 짚고 엎드렸다. 등에서부터 후드득 돋아난 골격이 이내 온몸으로 번지며 뾰족한 귀와 꼬리, 긴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숲을 빠르게 훑으며 냄새를 맡던 카힌이 하슬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약간 무료한 얼굴로 그를 보던 하슬라의 표정이 일변했다.

“……갈리나의 말이 사실이었군.”

윈터 때문이 아니라면 그리말디가 시라트에 추격자를 보낼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말없이 하슬라를 지켜보는 바얀과 정예병들은 조금 긴장했다.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인 탓이다.

싸늘한 설풍이 휘도는 절벽 끝은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그 설풍에 감긴 누군가의 냄새를 눈으로 좇기라도 하듯 허공을 노려보던 하슬라가, 별안간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연회 때 그리말디 얘기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거였어. 그래서 내게 그토록 건방지게 굴었던 거고…, 누구라도 자신을 건드리면 달려와 이를 드러낼 불멸자가 버티고 있으니까.

불멸자 하나는 천군만마와 같다. 그 한 명이 단번에 상대할 수 있는 늑대족 수는 감히 헤아리기도 힘들다.

만약 윈터가 이곳에서 은밀히 제 세력을 만들어 반란을 도모하고 그리말디가 합세한다면, 반란군 쪽 병력이 조금 부족한 것 따윈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절대 깨지지 않을 방패를 앞세우고 진군하는 격이지….”

갈리나의 말만 들었을 땐 불확실했던 모든 게, 그리말디의 냄새를 묻히고 들어온 추격자의 흔적까지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명확해졌다.

“카힌, 나는 이 상황이 참 유감인데…, 네놈은 지금 기분이 어떻지?”

그때 하슬라가 뜬금없이 카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얀이 의아한 눈으로 카힌과 하슬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카힌이 입을 열었다. 성대가 망가져 듣기 싫게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송구합니다.”

하슬라가 고개를 저으며 카힌의 목에 팔을 둘렀다.

“등신 같은 놈.”

그러고는 한 손으로 스스럼없이 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 흔들었다.

“내가 부모도 없는 널 그간 먹여 키운 시간이 있는데, 아직도 내 하문에 고작 한다는 대답이 ‘송구합니다’뿐이라…….”

그 손길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의 두꺼운 손에 고개가 이쪽저쪽으로 밀리는 카힌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작게 대답했다.

“심려케 해드려 송구합니다, 자하카.”

그가 카힌을 내팽개치듯 밀쳤다. 하슬라에 비하면 막대기처럼 왜소한 카힌의 몸이 풀썩 옆으로 기울었다. 바로 옆이 아득한 절벽이라, 하마터면 절벽으로 떨어질 뻔한 몸을 바얀이 얼른 받쳐 막았다.

“추격자를 잡아 올까요?”

바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하슬라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굳이 지금 들쑤셔서 그리말디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몸을 돌린 그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석조 성과 민가를 둘러싼 성곽 밖 너른 설원에서 말을 달리는 늑대족들 사이로, 갈리나와 윈터가 보였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하슬라가 붙여 둔 검은 늑대 호위들이 빈틈없이 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또 추격자의 흔적이 발견되면 내게 보고만 하고, 모르는 척 놔둬. 놈이 얼마나 자주 추격자를 보내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하슬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갈리나와 윈터를 응시했다.

각자 한 마리씩 말을 끌고 온 그들은 서로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갈리나는 윈터에게 뭔가를 설명하듯 말 등에 손을 얹으며 쉼 없이 입을 움직였다.

“갈리나를 불러올까요.”

그의 시선이 갈리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바얀이 물었다. 추격자의 흔적을 발견했으니, 갈리나에게 따로 명을 내릴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하슬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그리말디와 관련한 모든 건 극비야. 이곳에 있는 너희들 이외에 다른 누구도 절대 이 사실을 모르게 해.”

바얀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하슬라는 검은 머리를 가진 제 측근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자였다.

갈리나가 아무리 충신이어도, 검은 늑대가 아닌 그녀를 신뢰하는 것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내 조카님은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말고 아주 소중히 대해 줘야겠군.”

하슬라의 시선이 윈터와 갈리나에게 조여들었다. 심해처럼 검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 * *

“윈터, 너무 빨라요.”

말의 갈기를 쥐고 평원을 달리는 윈터의 곁으로 갈리나가 바짝 쫓아왔다. 저도 모르게 속도를 내고 있었던 걸 깨달은 윈터가 얼른 속도를 늦췄다.

갈기를 쥔 손은 너무 힘이 들어가서, 저도 모르는 사이 반인반수의 형태로 골격이 벌어져 있었다. 윈터가 조용히 제 손을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고삐를 쥐고 당기는 대신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멈추게 한 그가 제 옆으로 다가온 갈리나를 일별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에서 훌쩍 내려선 윈터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한 달밖에 안 됐는데 꽤 잘 타시네요. 하긴, 역대 자하카들은 몸으로 하는 건 뭐든 다 잘했죠.”

갈리나가 웃으며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말이 한차례 투레질하며 가쁜 숨을 골랐다.

윈터가 대답 없이 그저 제 말의 목덜미를 다독였다.

자신이 말을 잘 타는 건 이튼홀에서 이미 기초적인 승마를 배운 바 있는 덕분이다. 결국 섀넌의 손에서 나온 교육 혜택 덕분이지, 제가 자하카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늘 이유를 잘 갖다 붙인다.

자신이 뭔가를 잘하면 그건 자하카의 핏줄이기 때문이고, 서툴면 그건 그리말디의 손에서 자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이러다 내가 낙마로 죽으면, 당신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네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벌써 이렇게 잘 타시는걸요.”

“만약 전란이라 치면, 잡고 지탱할 만한 고삐가 없어서 검을 한 번만 부딪쳐도 쉽게 중심을 잃고 떨어질 것 같은데. …그땐 또 그리말디를 탓할 건가요.”

걸음을 멈춘 갈리나가 윈터를 쳐다봤다. 비록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그녀는 마냥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윈터에게 승마를 배우라고 권유한 건 단지 유희 거리 삼으라는 뜻이 아니라, 가까운 훗날에 있을 검은 늑대들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게 맞기 때문이다.

윈터 또한 그 뜻을 명확히 알고 있는 듯해서, 갈리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불편하다면 당신을 위해 고삐를 매어 줄 수는 있어요.”

“고삐가 웬 말이야, 갈리나. 우리 윈터 님께 그런 수치를 안겨 줄 작정이야?”

누군가가 농담을 던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변에 있던 몇몇 이들이 가볍게 웃었다.

“늑대족은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말을 다룰 수 있습니다, 윈터 님. 안장이나 고삐는 약한 인간들이 말을 통제하려고 억지로 씌워 놓은 굴레일 뿐이죠.”

저들은 항상 제 주변을 맴돌다 꼭 이렇게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티를 낸다. 갈리나와 같은 게자르 가문이거나 혹은 다른 가문의 젊은 청년들, 늙은 장로들이었다.

윈터가 무감한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

기실 이곳에 머무는 지난 몇 주간, 윈터는 도망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실행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신을 향한 저들의 집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제가 어딜 가든 끈질기게 들러붙는 시선들, 그 시선에 담긴 어떤 의심과 걱정, 기대, 불안 같은 감정들…….

제 바람과는 상관없이, 제 몸에 자하카의 피가 흐르는 이상 그것들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설령 지금 도망친다 하더라도, 얼굴도 모르는 자신을 향해 20년 넘게 꺼지지 않았던 저들의 집착은 언제까지고 자신을 괴롭힐 거란 뜻이다.

그리고 그 집착은 섀넌까지 덩달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윈터는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곳에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어떻게든 자신은 저들이 원하는 결말을 보여 줘야 하리라.

“……익숙해지겠죠. 계속 타다 보면.”

낮게 말한 윈터가 말에 올라타자 갈리나도 덩달아 제 말에 올라탔다. 말의 갈기를 쥔 채 가볍게 말 옆구리를 찬 그가 제게 들러붙은 시선들을 뿌리치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귓전을 때리는 강한 바람 사이로 갈리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였다.

“윈터, 천천히 가요.”

평원을 때리고 달려가는 말의 발치로 흰 눈이 먼지처럼 부옇게 산란했다. 휘몰아치던 설풍이 광활한 설원 위를 내달렸다.

서로 다른 속내를 가진 자들 사이를 무람없이 휩쓸며 오가는 건 오직 바람뿐이었고, 그 혹한 속에서도 시간은 얼어붙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고, 또 누군가는 원하지 않았던 시간은 그렇게 홀로 조용히 흘러갔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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