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Overturn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 성긴 구름이 음울하게 떠다녔다.
어차피 파티는 밤에 시작될 거지만, 그래도 성년식이 치러질 날에 이런 날씨라니 사람들은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섀넌은 온통 윈터에게 집중하느라 날씨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손끝으로 윈터의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향기로운 포마드 젤로 은백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쓸어올리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테일 코트를 멋들어지게 입혀 놓은 윈터는 까다로운 섀넌의 눈에도 흡족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 아이가 시라트의 기준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섀넌은 어쨌든 제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를 보살폈고 제가 사는 이쪽 세상에서 윈터는 모자람 없이 완벽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섀넌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그 어떤 얘기도 함구한 채 여태껏 버틴 건, 어디까지나 제 양육 과정에 발생할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맹약의 기한이 반나절도 남지 않은 시점.
윈터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마지막으로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한 섀넌이 제 소매의 커프스 링크를 채우며 말했다.
“지금쯤 프레스턴가에 미리 마차를 보내 두는 게 좋겠어. 아니면 네가 레일라 양을 직접 데리러 가도 좋고.”
“음, 마차만 보내는 쪽으로 미리 합의했어요.”
“그래? 뭐, 그럼. 시간이 조금 남겠군.”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열어 본 섀넌이 이제 막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을 확인하고는 다시 닫았다.
“바로 출발할까요?”
러셀의 질문에 섀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리 연회장에 도착해 있는 건 아직도 파트너를 못 찾은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테일 코트를 들고 있던 러셀이 그의 양팔에 그것을 꿰어 주었다. 어깨 위로 올라오는 검은 테일 코트를 입으며 거울을 보고 있는 섀넌의 뒤로 윈터가 다가왔다.
“오늘 섀넌의 파트너는 누구예요?”
“글쎄, 난 오늘 춤을 출 생각이 별로 없어서.”
제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살피며 가다듬는 섀넌의 목 언저리로 윈터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비뚤어진 옷깃을 바로 잡아준 윈터가 뒤로 물러났다.
“레일라와 첫 곡을 추고 난 후 당신에게 춤 신청을 하면 안 되겠죠?”
그 말에 섀넌이 짧게 코웃음 치며 단 위를 내려왔다.
“당연하지. …러셀, 차 좀 준비해 둬. 한 시간 정도 뒤에 출발하면 시간이 딱 맞겠어.”
“섀넌.”
방을 나가려는 그의 팔을 윈터가 붙잡아 세웠다.
“시계.”
테이블에 내려놓고 깜빡한 회중시계를 손에 든 윈터가 그것을 섀넌에게 내밀었다. 기다란 손안에 담긴 은빛 회중시계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섀넌이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어쩐지 오늘은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게 될 것 같았다.
* * *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옛 영주의 저택은 주거용이라기보단 거대한 갤러리나 아트홀 같았다.
실제로 도시의 큰 기념행사나 파티가 열릴 때를 빼고는 늘 깨끗하게 비워져 있으니, 어쩌면 저택이라기보다는 공공건물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까딱하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만큼 다양하게 조성된 정원과 넓은 홀, 스테인드글라스가 덮인 아치형 창과 거대한 원형 천장의 화려함은 곧 성인이 될 청년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자의 파트너를 팔에 낀 그들은 호화로운 분위기에 취해 이리저리 홀을 누볐다. 그중 몇몇은 이미 파트너가 되기 이전부터 연인 관계였던 이들도 있었고, 어쩌면 오늘 밤 연인이 될 확률이 높은 이도 있었고, 그런 로맨틱한 상황과는 거리가 먼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관계의 파트너건, 성년식의 첫 왈츠를 함께 추는 순간만큼은 즐겁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부드러운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율에 따라 형형색색의 드레스 자락이 화사하게 만개했다.
메인 홀을 누비는 건 곧 성인이 될 청년들이 주였고, 그 부모들이나 다른 참석자들은 2층에서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거나 그저 한쪽으로 물러나 술을 기울였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 본 섀넌이 2층 난간에 팔을 걸친 채 홀을 내려다봤다.
시침은 어느덧 여덟 시를 넘기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춤 실력이 형편없었던 윈터는 이제 몹시 능숙하게 상대를 리드했다. 서로 교차하고 엇갈리는 손끝이 마치 우아한 한 쌍의 백조 같았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레일라는 청초해 보였고, 기품 있는 태도로 그녀와 춤을 추고 있는 윈터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검푸른 색감의 테일 코트를 입은 윈터의 은백색 머리칼이 화려한 홀의 조명 아래에서 신기루처럼 반짝였다.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흰 드레스가 둥글게 퍼졌다. 다시 윈터의 팔 안으로 안착한 레일라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와 팔을 교차했다.
지나치게 밝게 웃지 않으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한 몸처럼 움직이는 두 사람은 이 홀 안의 수많은 커플 중에서도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 만큼 관능적이고 매혹적이었다.
윈터는 레일라와 춤을 추는 동안 단 한 번도 섀넌이 있는 2층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엄마 찾는 어린아이처럼 두리번거리지 말고, 춤을 출 땐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하라고 섀넌이 신신당부한 탓이었다.
“…….”
그럼에도 어쩐지 섀넌은 조금 아쉬웠다.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멋들어진 자태로 춤을 추는 아이를 보며 마냥 안도하고 흐뭇해할 수 없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홀을 둘러보던 섀넌은 복도로 연결된 통로 중 하나에 서 있는 갈리나를 발견했다.
이번에도 드레스에 꽤나 신경을 쓴 것 같았지만, 이곳 문화가 익숙지 않은 그녀는 역시나 이 연회장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툭 튀었다.
그녀가 저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 섀넌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맹약의 기한이 끝난다고 해서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자정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신데렐라가 타고 온 황금 마차가 썩어 문드러진 호박과 더러운 시궁창 쥐로 바뀌듯이, 그녀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드레스가 누더기로 바뀌듯이.
그렇게 윈터와 자신의 관계가 모조리 뒤바뀔 것 같은 착각.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유리 구두 한 짝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라지길…….
지금껏 윈터에게 쓰였던 모든 마음들이 다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걸 자신이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더듬어 회중시계를 꺼냈다. 여덟 시와 아홉 시 사이를 가리키는 시침을 확인한 섀넌이 다시 갈리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섀넌은 2층에서, 갈리나는 그 아래 홀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열렬히 눈이 맞은 남녀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열려 있는 회중시계를 들어 갈리나를 향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네 멋대로 해보라는, 일종의 허락이기도 했다.
섀넌을 올려다보는 갈리나의 목울대가 한차례 일렁였다. 섀넌이 난간을 한 손으로 주욱 쓸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제 머리 위로 온 섀넌을 올려다보느라, 갈리나가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있었다.
수직으로 맞닿은 시선이 첨예하게 얽혔다.
느슨하게 눈을 내리깐 채 그녀를 보던 섀넌이 손안에 있던 회중시계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가느다란 체인이 차르륵 일직선을 그리며 아래로 낙하했다.
놀란 갈리나가 코앞으로 떨어지는 회중시계를 얼결에 두 손으로 받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섀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뒷걸음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갈리나를 끝까지 시선으로 조용히 좇던 섀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에서 몸을 돌렸다.
이제 제 의무는 끝났다.
* * *
“다음 상대는 누구야? 그리로 데려다줄게.”
레일라를 한 바퀴 돌린 윈터가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작게 물었다. 아까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하던 그녀가 착잡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온 것 같아.”
“어쩌지. 네 다음 상대가 올 때까지 내가 기다려 줄 순 없어.”
“알아. …마주르카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가 와 줬으면 좋겠는데.”
대열에 맞춰 보폭을 크게 휘돌며 이동한 레일라가 주변을 힐끗 보다 물었다.
“너도 진짜 춤을 추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었지?”
윈터가 대답 없이 그저 입가만 살짝 올렸다. 레일라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뭐 어때, 어차피 너나 나나, 서로한테 별 기대 없잖아. 난 너와 공식적인 첫 파트너였던 걸로 만족해.”
그녀가 목소릴 낮춰 속삭였다.
“봐, 다들 날 엄청 부러워하고 있거든.”
서로 팔을 교차하며 빙그르르 돈 두 사람이 다시 손을 맞잡고 붙어섰다.
“마음에 둔 상대와 파트너가 되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한 거야?”
윈터의 물음에 레일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턱짓으로 제 부모님이 계신 쪽을 가리켰다.
“우리 엄마 눈 되게 높거든. 너 아니면 다른 남자애들은 눈에도 안 찰걸.”
“…섀넌도 그랬어.”
“네 후견인?”
두 사람이 동시에 쓴웃음을 흘렸다. 우아하게 반원을 그리며 돌던 레일라가 어딘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입 모양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속삭였다.
“왔다. 오른쪽, 일곱 시 방향.”
윈터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스텝을 밟았다. 그들이 자연스레 대열 사이를 지나치며 홀 한쪽으로 이동했다.
“오늘 즐거웠어. 네 성격이 원래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매너 있게 잘 해줘서 고마워.”
춤을 추며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던 윈터가 어색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대꾸했다.
“……나도 인사치레해야 해?”
“됐어, 바보야.”
레일라가 웃으며 윈터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벽면에 서서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청년에게 윈터가 물 흐르듯 부드럽게 레일라의 손을 넘겨 주었다.
전체적인 대열을 크게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능숙하게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는 레일라와 청년을 뒤로한 채, 윈터가 자연스레 홀을 빠져나갔다.
* * *
“애를 납치라도 해 가려는 거야, 뭐야.”
테라스에 나와 어둠에 잠긴 정원을 보던 섀넌의 옆으로 카일이 다가오며 투덜댔다.
“내내 하이에나처럼 숨어 있더니, 저년은 하필 왜 오늘 나타나서 우리 섀넌의 심기를 건드릴까.”
엘리자베스가 섀넌의 반대쪽 옆으로 붙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고선 마시지도 않는 술잔을 섀넌의 손에 들린 술잔에 챙, 하고 부딪쳤다.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난간에 걸치고 있던 팔을 풀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모르지. 자정 지나면 곧바로 납치해 데려갈는지도.”
물론 갈리나가 진짜 그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 윈터에게 접근을 시도하긴 하겠지. 오늘 밤은 내내 레일라와 붙어 있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윈터가 그 여자를 따라 시라트로 귀환할지 의문이다.
그리도 제게 살갑게 굴어 놓고 별안간 마음이 돌변해서 갈리나를 따라간다 해도 이상할 것 같았고, 귀환을 거부해도 곤란할 것 같았다.
물론 윈터를 보내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마음 한구석이 공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정 지나면 사냥해도 돼?”
그때 엘리자베스가 제 입술을 살짝 핥으며 농담을 던졌다.
“안 그래도 빌어먹게 거슬리는데, 그냥 이 도시에 있는 늑대족들 싹 다 처리하는 건 어때. 윈터랑 저년 둘 다 깨끗하게 치워 버리는 거야. 어차피 맹약도 끝났으니 더는 거리낄 것도 없겠다, 해피엔딩이네.”
섀넌이 한심하다는 듯 엘리자베스를 잠시 노려보다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반쯤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해도, 완전히 진심은 아닌 말인 걸 알고 있기에 그다지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디 가, 섀넌?”
“바람 쐬러.”
테라스에서 내려가 정원을 가로질러 어둠 너머로 사라지는 섀넌의 뒷모습을 보던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렸다.
섀넌은 정원의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내디딜수록 저택에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도 희미하게 멀어졌다.
묵직한 구름이 잔뜩 껴 어두운 밤이었지만, 섀넌에게 이런 어둠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겨울인데도 이곳만큼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따뜻한 지역에서 공수해온 붉은 장미와 갖가지 초록 식물들은 마치 여름처럼 물기를 담뿍 머금고 있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다른 지역이었다면 한겨울에 이런 정원을 조경하진 못했을 것이다. 케인타운이 타지에 비해 포근한 기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파티가 무르익으면 이런 곳이 으레 연인들의 밀회 장소가 되기도 한다. 마치 그들을 위해 작정하고 만든 것처럼, 정원은 초록 덩굴진 담장이 미로처럼 꺾여 있었다.
멀리서 겨우 음률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음악이 들려왔다. 섀넌이 숨을 깊게 들이켜며 향긋한 풀 내음을 폐부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어딘가 꽉 막힌 듯 답답한 가슴이 나아지질 않았다.
자신은 원래 이런 마음의 불편함을 오래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뭔가를 결정할 때에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 불멸자에게 선택은 매우 가벼웠다. 몇 번이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경솔하게 만드는지, 인간들은 꿈에도 짐작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제게 윈터는 단 한 번뿐이었다.
단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 앞으로 다신 없을 존재.
…그래서, 아직 그는 윈터를 보내는 게 진정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축축한 잔디를 구둣발로 느리게 밟는 소리에 섀넌은 파티가 무르익기도 전에 벌써 밀회 장소를 찾는 연인이 있는 건가 짐작했다.
그러나 발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었고, 그게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섀넌은 그 기척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주머니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하려던 섀넌이 더는 제게 회중시계가 없음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이 시간에 여길 왜 와. 레일라는?”
자정이 되면 단체로 축배를 들고 성년식을 축하하며 춤을 추는데, 아직 파티의 절정이 오지도 않은 시점에 윈터가 홀로 떨어져나온 게 의아했다.
“다른 파트너와 춤추고 있겠죠.”
윈터가 제 어깨에 붙은 풀잎을 떼어 내며 대답했다. 복잡한 미로 정원을 제법 오래 헤맨 듯, 구두 끝이 흙으로 젖어 있었다.
섀넌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날까지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나만 쫓아다닐 거야?”
“원래 성년식 첫 파트너는 부모님이 원하는 상대로 채우고, 두 번째가 진짜라던데요.”
“누가 그런 말을 해?”
“레일라가.”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런 걸로 아이에게 화를 내기엔 안 그래도 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물이 말라 방치된 분수대에 걸터앉으며 볼멘소리만 내뱉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그런 것만 어디서 잘 주워듣고 다니네.”
“알잖아요, 섀넌.”
그에게 다가온 윈터가 손을 뻗었다.
“내가 이럴 거 알고 여기서 기다리신 거 아니에요?”
물론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고 적당히 자리를 피해 숨어 있었던 거다. 그의 말이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라서, 섀넌이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피해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자. 자정도 안 지났는데 연회장 밖을 돌아다니는 건 눈에 띄는 짓이야.”
“여기 누가 오겠어요, 이 시간에.”
그런 섀넌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윈터가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같이 춤춰요, 섀넌.”
“뭐?”
황당하다는 듯 웃는 섀넌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느리게 얽은 윈터가 고개를 기울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제 두 번째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웃기지 마.”
“연회장에서 대놓고 추지는 못해도, 이런 곳이라면 한 번쯤은 받아 줄만 하지 않나요.”
구름이 걷히며 미약한 달빛이 초록색 정원을 옅게 뒤덮었다. 혼자 그 달빛을 다 끌어모은 듯한 은백색 머리칼 아래로 새벽하늘 같은 청회색 홍채가 일렁였다.
“섀넌.”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섀넌을 부추기듯 간질였다. 바람을 타고 희미한 바이올린 선율이 흘렀다.
어느새 제 손을 잡고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싼 채 장난스레 웃고 있는 윈터에게 이끌린 섀넌이 결국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한 번 정도는.”
섀넌이 한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대신 아주 잠깐만이야.”
그가 가볍게 속삭이며 윈터에게 맞춰 발을 옮겼다. 그리 넓지도 않은 미로 정원 안에서, 두 사람은 그저 장난치듯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몇 번 섀넌의 어깨나 윈터의 등이 덩굴진 벽에 스치면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설렁설렁 움직이다 윈터의 스텝이 꼬여 섀넌의 발을 밟았을 때는 두 사람 다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실전에서 강한 타입인가? 다른 사람과는 실수 없이 잘만 추면서.”
“떨려서 그래요.”
나직한 목소리가 소곤소곤 귓가에서 흔들렸다. 표정과 태도는 능청스러워 보일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맞닿은 손이 땀으로 촉촉해서 섀넌은 윈터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떨림의 대상이 잘못됐어.”
섀넌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처음에도 그다지 열심히는 아니었던 춤은 어느새 그저 서로를 안은 채 가만히 잔디 위를 거니는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어쨌든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선 능숙하니 다행이네. 나중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땐,”
“좋아해요, 섀넌.”
숱하게 들었던 고백이 다시 가느다랗게 쏟아졌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말이 가슴 언저리에 부피를 가진 무언가처럼 무겁게 와 닿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뿐이에요. 알잖아요.”
“……그래, 알아.”
윈터가 저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기울이는 걸 알면서도, 섀넌은 좀처럼 그의 어깨에 뺨을 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도 널 많이 아끼니까.”
한동안 왜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나 했다.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뗀 섀넌이 눈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래도 이제는…, 읏.”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입술이 덮였다. 맞닿은 입술 새로 더운 숨이 끼쳤다.
미약하게 떨리는 호흡이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안으로 사라지고, 입술 안쪽으로 축축한 혀가 밀고 들어왔을 때 섀넌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몇 달간 공백이 있었던 접촉은 이전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윈터가 내내 선을 넘었다면 이렇게 놀란 듯 심장이 뛰지는 않았을 거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엇갈리고 다시 맞붙는 입술을 머금으며, 섀넌은 이 지나친 떨림의 원인을 굳이 정의 내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윈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섀넌에게 밀려 담장에 등을 댄 윈터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뒤바뀐 키 차이에 익숙해져서, 고개를 들며 더 깊게 입술을 엇갈리는 섀넌에게 맞춰 윈터가 자연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입안을 휘젓는 혀는 마치 갈증을 느끼는 듯 점점 조급해졌고 섀넌의 허리와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점점 더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다. 맞닿은 하체로 금세 열기가 쏠렸다.
“읍, ……흣….”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는 섀넌의 몸이 밀렸다. 발이 엇갈리며 뒤로 넘어지는 섀넌의 등을 단단히 받친 팔이 그를 잔디 위에 살포시 내려놨다.
어느새 흐트러져 벌어진 코트 안으로 윈터의 손이 들어왔다. 한 손으로 그 안에 있는 웨이스트코트의 단추를 끄르며, 윈터는 계속해서 섀넌의 입술을 깨물고 그 안쪽을 혀로 핥았다.
“읏…, 윈터…, 윈, 흡…….”
떨어질 줄을 모르는 입술 사이로 섀넌이 다급히 중얼거렸다. 귀를 괴롭히는 젖은 소리와 한 겹씩 가까워지는 체온에 놀란 그가 고개를 뒤틀며 윈터를 밀어냈다.
잔디 위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양옆으로 손을 짚은 채, 상체를 살짝 세운 윈터가 열 오른 숨을 내쉬며 그를 내려다봤다.
“…싫어요?”
“여기서는…, 읏….”
묵직하게 짓눌리는 하체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그의 허릿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섀넌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이잖아. …이런 천박한, 곳에서, 는…….”
너의 처음을 이런 곳에서 치르게 하고 싶지 않다. 두서없이 뒤엉킨 말이 윈터의 입술 안으로 사그라졌다.
“난 상관없는데.”
입술을 붙인 채 나직이 속삭이는 윈터의 목소리가 메마른 모래처럼 갈라졌다. 흥분으로 상기된 그 숨소리를 들으며, 섀넌은 애써 그에게서 입술을 뗐다.
“여기 말고…, 일단 여긴 싫어.”
물론 각자 닳을 대로 닳아 침대에서의 정사가 식상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섀넌은 윈터의 처음을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인 남의 저택 잔디 위에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거의 으르렁거리듯 초조한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들어왔다. 그런 윈터의 입술을 한 번 거칠게 빨아들였다 놓은 섀넌이 그를 밀어내며 상체를 세웠다.
흐트러진 옷을 대강 정돈한 그가 윈터의 손목을 잡고 일어났다. 이리저리 꺾인 초록의 담장을 거의 달리듯 빠르게 벗어났다.
후문 쪽으로 나오자 빈 마차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서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을 주인을 기다리는 마차였다.
지나가던 서버 한 명을 불러 세운 섀넌이 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와 소매의 커프스 링크를 아무렇게나 잡아 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몇 달 치 급료를 대신할 만큼 값나가는 장신구를 삯으로 받은 서버는 사정을 캐묻는 대신 눈치껏 얼른 말고삐를 잡았다.
누구를 기다리던 마차인지도 모른 채 올라탄 두 사람은 마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입술을 부딪었다.
잠시 떨어져 있던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붙은 입술은 서로를 절박하게 빨아들이고 탐닉했다.
* * *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저택 문 안으로 다급히 서로에게 엉킨 두 쌍의 구둣발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계단에 멈춰선 발 옆으로 검은색 테일 코트가 툭 떨어졌다.
뒷걸음질로 계단을 오르면서도 제게서 입술을 떼지 않는 섀넌의 허리를 감싸 번쩍 안아 든 윈터가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은 섀넌이 안정적으로 제 몸을 받친 윈터의 품에 안긴 채 입맞춤에 몰두했다.
“하아…….”
어쩌면 오래도록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접촉은 그를 빠르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윈터의 몸을 휘감고 있는 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섀넌은 제가 정성 들여 세팅해 놓은 그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입을 맞추다가, 역시나 제가 정성 들여 입혀놓은 수트를 아무렇게나 벗겨 내렸다.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오르는 구둣발 아래로 주인 잃은 청금석 단추가 똑똑 굴러떨어지고 엉망으로 구겨진 코트가 짓밟혔다.
부서질 듯 열린 침실 문으로 완전히 뒤엉킨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그즈음 윈터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해 섀넌을 안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푹신한 시트가 등에 닿음과 동시에 뜨거운 체온으로 들끓는 윈터의 몸이 섀넌의 몸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 무게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섀넌이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는 동안 이미 거의 풀어 헤쳐진 셔츠를 어깨 아래로 벗기려는 윈터의 허리를 다리로 감은 섀넌이 그대로 몸을 확 돌렸다.
별안간 시야가 뒤집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윈터가 섀넌을 올려다봤다. 그의 위에 올라타 상체를 세운 섀넌이 저를 보는 청회색 안광을 마주한 채 천천히 셔츠를 벗었다.
드러난 살갗 위로 이끌리듯 윈터의 커다란 손이 들러붙었다. 조심스럽게 제 가슴팍과 옆구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놔두고 그의 바지 버클을 풀던 섀넌이 어느 순간 행동을 멈췄다.
저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섀넌의 표정이 묘하게 뒤바뀐 것을 보며, 상기된 숨을 몰아쉬던 윈터가 물었다.
“왜요?”
좀처럼 당황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섀넌의 표정은 쉬이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더듬더듬 운을 뗐다.
“너, …그, ……포지션 말이야.”
“네?”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윈터를 내려다보며, 섀넌은 예상치 못한 낭패감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그와 몸을 섞는 상황을 가정해보지 않아서 직면한 문제였다.
“……네가 박는 쪽인…, 거지?”
윈터가 영문 모를 얼굴로 그저 눈만 깜빡였다.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해 버린 것을 깨달은 섀넌이 헛숨을 내뱉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 섀넌은 그저 막연히 지금까지의 섹스와 똑같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들은 둘 다 남자였고, 박는 쪽이 있으면 남은 한 사람은 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 아닌가.
벌어진 제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오던 특유의 움직임, 허릿짓…, 젠장, 그때 이미 인지하고 있었어야 했다.
“……아, 섀넌.”
그제야 섀넌이 직면한 문제를 눈치챈 윈터가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거의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윈터가 낮게 속삭였다.
“전 상관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다 좋아요.”
그의 뺨을 감싸며 가볍게 입술을 부딪은 섀넌이 고개를 저었다.
“다칠 수도 있어. 나도 남자는 처음이라…….”
남자에게 박아 본 적도, 박혀본 적도 없지만, 동성 간의 결합은 이성 간의 그것보다 까다롭고 위험하다는 걸 섀넌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만약 자신이 절제하지 못한다면…….
고개를 기울인 섀넌이 윈터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빨며 그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섀넌?”
윈터의 몸 위에서 내려온 섀넌이 자연스럽게 그가 다시 제 위로 올라타도록 몸을 돌렸다.
자신이 위에서 직접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윈터에겐 이 모든 게 첫 경험이니 그가 리드하게 해 주고 싶었다.
섀넌이 그의 바지춤 안으로 손을 넣어 터질 듯 발기한 물건을 쥐었다.
“읏….”
“어떻게 빚은 몸인데, …찢어지게 할 수는 없지.”
행여 다치더라도 눈 깜짝할 새 회복하는 자신이 박히는 게 이래저래 안전하지 않은가. 그 어떤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제 몸이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무엇이든 그와 제 관계에서, 품는 쪽은 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섀넌이 제 벌어진 다리 사이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윈터의 바지를 벗겼다. 드레스를 벗긴 적은 있어도 이렇게 남자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 본 적은 없었는데…….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침실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걸 의식하진 않았는데, 이제 와 조금 어색했다.
“섀넌…, 혹시 고통도 못 느껴요?”
침대에 누운 섀넌의 머리 옆으로 손을 짚은 윈터가 한 손으로 그의 바지를 벗기며 물었다. 그가 쉽게 벗길 수 있도록 허리를 살짝 들어 준 섀넌이 옅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럼 아플 수도 있잖아요.”
그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당겨온 섀넌이 나직이 속삭였다.
“아프기만 하진 않을걸. …아마도.”
침대 아래로 섀넌의 바지가 툭 떨어졌다. 두툼한 근육이 불거진 상체가 섀넌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섀넌은 경직된 아이의 등줄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평소 윈터를 안심시킬 때 으레 하던 행동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윈터의 몸은 더 달아오르기만 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발기해 있던 아래는 이제는 너무 피가 몰려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윈터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고간에 닿은 단단한 성기가 몹시 뜨거웠다.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윈터의 손끝이 섀넌의 이마와 콧날, 턱과 목을 차례로 느리게 오갔다. 그가 홀린 듯 섀넌의 면면을 바라봤다.
“섀넌…, 너무 멋있어요.”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달빛이 내려앉은 흰 몸은 아름다웠다. 마냥 여리지만은 않은 몸은 조각처럼 잘 짜인 근육과 판판한 가슴이 강인한 음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불거진 빗장뼈와 그 위로 오목하게 파인 그림자는, 묘한 가학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납작한 가슴 위로 도드라진 옅은 색의 유두는 당장 입을 대고 빨아들이고 싶을 만큼 색정적이었다.
제 몸을 느리게 훑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춘 것을 눈치챈 섀넌이 그의 목덜미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던 제 젖꼭지가 그의 시선에 덴 듯 공연히 예민해졌다.
윗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그 위로 달뜬 숨이 흩어졌다. 섀넌이 그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겹쳤다.
옆구리를 쓸어올린 손끝이 유륜을 따라 덧그리다 톡 튀어나온 정점을 건드렸을 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숨이 윈터의 입술 안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하아…, 섀넌.”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 위로 윈터의 한숨이 쏟아졌다. 열 오른 숨결이 귓불 아래와 목 언저리까지 흩뿌려졌다. 그저 숨결만 닿아도 짜릿한 감각이 살갗 위로 번졌다.
섀넌은 제 목덜미와 가슴팍을 지분거리는 윈터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며, 그 감각을 음미했다.
“흣…….”
윈터의 손끝이 예민해진 유두를 더듬었다. 엄지 끝으로 둥글게 짓누르자 금세 도도록 올라온 돌기가 작은 열매처럼 꼿꼿하게 곤두섰다. 색기를 머금어 붉은 기가 도는 젖꼭지는 당장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윈터는 당장 빨아들이고 싶은 작은 돌기 위로 코끝을 스치듯 비볐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켜고 내쉬길 반복하며 콩알보다 작은 유두에 제 입술을 비볐다.
섀넌의 살갗에선 어디든 향기가 났다. 설탕을 태우는 듯한 단내와 물에 젖은 장미 향이 뒤섞인 것 같은.
희미한 최초의 기억이 닿아 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늘 맡았던, 포근하고 달큰하면서도 미치도록 매혹적인 향이었다.
윈터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머금었다.
“하아…, 읏.”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빨릴 거라 상상해 본 적 없는 부위가 축축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섀넌은 난생처음으로 기묘한 간지러움을 느꼈다.
말캉한 혀가 젖은 소리를 내며 돌기를 건드리고 살살 돌릴 때마다 섀넌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예민하게 곤두선 유두가 끊임없이 그의 혀에 쓸리고 빨렸다.
젖꼭지가 아릿해질 정도로 쪽 빨렸을 땐 의지와 상관없이 허리가 뒤틀리고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듯 단단한 강철 같은 어깨를 손톱 끝으로 긁어내리며, 그가 신음을 삼켰다.
“윈터, …거긴, 그만…, 읏……, 간지러워.”
살집 없는 가슴을 손으로 살짝 그러모으며 혀끝으로 유두를 짓누르고 희롱하길 여러 번.
“간지럽기만 해요?”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유두 위로 윈터가 속삭이는 음절마다 툭, 툭 뜨거운 숨이 불거졌다. 한껏 민감하게 부어오른 돌기는 이제 그저 바람만 닿아도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듯 소름이 돋았다.
다리 사이로 느리게 내려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귀두 끝에 와 닿자, 섀넌이 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윈터가 그의 귀두 끝을 엄지로 끈질기게 비비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너무 많이 젖었는데…….”
알고 있었다. 배 위로 툭툭 흐르는 맑은 체액이 윈터의 몸에 눌려 짓뭉개지는 걸 섀넌도 분명 느꼈다.
그러나 제 가슴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부드러운 감촉은 그에게 너무도 낯선 자극이었다.
그는 본래 인간이 제 살갗에 혀를 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탓에 이런 진득한 애무를 제대로 받아본 적도, 즐겨본 적도 없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숨만 몰아쉬는 섀넌을 잠시 보던 윈터가 가슴팍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손끝으로는 계속해서 유두를 희롱하며, 탄탄한 굴곡이 진 배와 옆구리를 지난 입술이 배 위에서 까딱이는 성기 끝에 닿았다.
귀두 끝에 맺혀 있던 체액이 그의 입술 표피에 문질러지는 게 섀넌에게도 선연히 느껴졌다. 윈터는 이전처럼 서툴게 이를 세우지 않았다.
“하아, 읏…….”
섀넌의 허리가 위로 살짝 들렸다. 너무 세게 빨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쥐고 당기는 움직임이 전보다 유연했다.
섀넌이 소리 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제 성기를 축축하고 뜨겁게 조이는 점막의 감촉이 너무도 달콤해서 소름이 돋았다.
아…, 시발, 쌀 것 같아.
“으, …윈터, 읏, …그만.”
입술을 뗀 윈터가 그를 올려다봤다. 섀넌이 멋대로 헤집어 흐트러진 머리칼은 달빛으로 뜬 거미줄이 뒤엉킨 듯했다.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을 보며, 섀넌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제 반응 하나하나에 몇 번이고 멈추는 그 조심스러운 행동이 귀여웠다.
“별로예요?”
“…아니, 괜찮아.”
섀넌이 손을 뻗어 그런 그의 뺨을 감쌌다. 자연스레 제게로 당긴 그가 콧날을 맞부딪으며 속삭였다.
“잘하고 있어…….”
이미 단추가 다 떨어져 양옆으로 벌어진 윈터의 셔츠를 어깨 아래로 내리려다가, 이내 그의 살갗을 더듬었다. 터질 것처럼 부푼 근육이 단단하게 올라붙은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대자, 윈터의 숨이 더 가빠졌다.
윈터가 제 가슴팍에 올라온 섀넌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가느다란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섀넌…, 긴장돼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섀넌은 대답 대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 입을 맞췄다. 마른 입 안을 적셔 주며 치열과 입천장을 훑자 윈터에게서 흥분 섞인 한숨이 쏟아졌다.
끈적한 체액이 묻은 손이 섀넌의 성기를 쓰다듬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연약한 살갗이 감싸고 있는 음낭을 지나 회음부를 훑는 감촉에 섀넌은 어쩔 수 없이 약간 경직되었다.
음식을 먹지 않아 단 한 번도 배출조차 해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 안으로 뭔가 드나들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역시나 해 본 적 없었다.
입술을 뗀 섀넌이 뒤늦게 대답했다.
“……조금.”
“나도요.”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어 꽉 다물린 구멍에 비해 윈터의 손가락은 너무도 두꺼웠다. 오밀조밀한 주름이 둘러싼 여린 살갗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던 그가 손끝을 세웠다.
윈터의 뒤통수를 감싼 채 입을 맞추던 섀넌의 호흡이 어느 순간 가파르게 끊겼다. 은백색 머리칼을 움킨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읏…….”
허벅지 안쪽이 저절로 경직되어 윈터의 허리를 조였다. 생소한 감각이 아래를 꿰뚫었다.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을 뿐인데, 마치 생살이 꿰뚫린 듯 찌르르한 감각이 꼬리뼈까지 치달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반지를 낀 것처럼 손가락 마디를 꽉 조이는 입구에, 윈터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섀넌의 구겨진 콧잔등과 아픔으로 비틀린 입술 위에 새처럼 쪼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섀넌…,”
“…….”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그저 벌어진 입술 안쪽의 점막을 그가 부드럽게 축여 주었다.
“숨 쉬어요.”
“아…!”
윈터의 손가락이 주르륵 빠져나옴과 동시에, 섀넌이 참았던 숨을 그제야 짧게 터뜨렸다. 그의 입가와 뺨에 여러 번 입맞춤을 퍼부은 윈터가 상체를 세우며 거추장스러운 셔츠를 잡아 뜯듯 벗어 버렸다.
목과 어깨를 두툼하게 잇는 승모근과 너른 가슴으로 이어지는 근육의 결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뒤틀렸다. 가파른 숨을 몰아쉴 때마다 두드러지는 목덜미의 뼈대 위로 희미한 달빛이 우묵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뭐가.”
“윤활유가 필요할 것 같은데…….”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섀넌이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런 것이 제 침실에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당연히 윈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응? 뭘, 읏…….”
윈터가 섀넌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별안간 빠르게 끌어올려 지는 열기에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안에다 싸 주세요, 섀넌.”
“뭐 하는, 아아, 잠깐, 윈터…, 천천, 흣…….”
귀두 끝이 뜨겁고 축축한 점막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 성기를 입에 문 채 기둥을 빠르게 잡고 흔드는 윈터의 손짓에 섀넌은 속절없이 신음하며 고개를 뒤챘다.
아까부터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쾌락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뻐근하게 차올랐다.
“그만, 읏……, 이러면, 금방…, 갈 것 같…, 흐읏…….”
목구멍 아주 깊숙한 곳까지 섀넌의 것을 깊이 머금은 윈터가 입 안을 조이며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 아아, 높은 신음을 내뱉는 섀넌의 허리가 위로 바짝 휘어 올라갔다.
윈터의 입천장에 귀두 끝을 문지르며 툭 툭 끊기는 듯한 숨을 내뱉던 섀넌이 그의 머리칼을 움키며 파정했다. 아랫배에서 급하게 달음박질친 전율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 지경이었다.
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며, 섀넌은 아득한 눈으로 커다란 손에 제 정액을 뱉는 윈터를 쳐다봤다. 그가 섀넌의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방금 체내에서 분출된 정액은 아직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회음부를 지나 조금 전 꿰뚫린 아릿함이 아직 남아 있는 틈새에 그 뜨거운 체액이 짓뭉개졌다.
……경험도 없는 주제에 잘도 이런 융통성을 발휘하는군.
도대체가, 능숙하든지 서툴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는데.
“흐읏….”
섀넌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다시금 제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은 이전과 달리 축축하고 미끄러워서 더 기묘한 감촉을 실어왔다.
끝까지 담긴 손가락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가 진입하길 느리게 반복했다. 한 손을 섀넌의 어깨 옆에 지탱한 채 그를 내려다보는 윈터가 뭔가를 참는 듯 낮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너무 좁아요.”
“통로로 쓰이던 곳이, 아니니까, …읏, 당연히…….”
짐짓 여유로운 척 차분히 대꾸하던 섀넌의 미간이 금세 찌푸려졌다.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며 신음을 참는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분해할 듯 살피며, 윈터가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한 개만으로도 빠듯했던 구멍은 곧 찢어질 듯하면서도 차지게 조이며 무리 없이 빨아들였다.
“아, 어떡하지…. 아파요?”
찰나의 통증으로 눈물이 맺힌 시야에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윈터의 얼굴이 보였다. 섀넌이 미간을 찌푸린 채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유리 다루듯 하지 않아도 돼.”
섀넌이 제 다리 사이에 있는 윈터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뒤로 빠져나오는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친 섀넌이 개수를 늘려 다시 느리게 집어넣었다.
서로 얽힌 네 개의 손가락이 다시 좁은 틈 안으로 감춰졌다. 섀넌은 단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제 내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보통 인간보다 체온이 낮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축축한 점막은 몹시 뜨거웠다. 윈터 또한 이 감각을 함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 손가락보다 마디 하나가 더 긴 윈터의 손이 더 깊은 곳까지 찌르고 들어왔다.
“흐읏….”
윈터와 손을 겹친 채 스스로 제 안을 쑤시던 용기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섀넌은 구멍이 벌어지는 섬뜩한 감각에 제 손을 빼지도 못하고 몸서리쳤다.
이 기묘한 느낌이 정말 쾌감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아주 찰나 의심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아아…! 흑, 윈터…….”
안을 넓히려는 듯 빙글 돌아간 손가락 하나에 섀넌이 크게 허리를 들어 올렸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듯 붙어 있던 내벽이 벌어지며 아래가 휑하게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흐읏, 그, 그만…! 읏….”
“그만?”
윈터의 손에 엉겨 붙어 있던 정액이 조금씩 내벽을 부드럽게 적셨다. 제 배 속을 섬세하고 꼼꼼히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섀넌은 진저리를 치며 신음했다.
차라리 안을 꽉 메워 버리면 이 소름 끼치는 감각이 조금 덜해지지 않을까. 윈터의 것은 제법 컸으니…….
“그냥, ……그냥 빨리 넣어.”
단호한 그의 말에 깊이 담그고 있던 손가락을 느리게 빼낸 윈터가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섀넌의 정액이 아직 묻어 있는 손으로 제 성기를 훑었다.
그 손안에서 흉흉하게 꺼떡이는 검붉은 성기를 힐끗 본 섀넌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법이 아니라 지나치게 컸다는 걸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저 물건 때문에 의상실에서 옷을 맞출 때마다 애를 먹었었지. 도저히 티 나지 않게 수납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한쪽 바지 둘레를 늘려야 했다.
‘앞일도 모르고 아이가 이렇게나 잘 컸다고 속으로 흐뭇해했었지.’
그저 손에 쥐고 흔들 때도 별달리 문제 될 것 없었는데, …저걸 직접 제 몸에 넣는다고 생각하니 섀넌은 이제야 조금 겁이 났다.
손가락 네 개도 빠듯했는데 제 주먹보다 큰 저 물건이 과연 들어갈 수 있긴 할까. 가랑이를 아예 반으로 갈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조금 전 손가락 네 개를 삼켰던 구멍은 언제 열렸냐는 듯 다시 꽉 닫혀 있었다. 주름진 입구에 제 귀두 끝을 꾹 누르며, 윈터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찢어질 것 같은데…….”
상상만 했던 섀넌의 몸 안은 실제로는 너무도 여리고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여기에 제 것을 넣는 게 맞긴 한가.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인가?
자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섀넌이 불멸자라지만 이걸 그의 안에 넣었다간 어딘가 크게 잘못될 것만 같았다.
“…섀넌, 혹시, ……내장 파열되면 당신 죽어요?”
머뭇거리던 윈터가 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섀넌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몸만 큰 제 아이는 가끔 이렇게 귀여운 소릴 해서 그를 미치게 만든다.
섀넌이 윈터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제게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윈터와 입술을 부딪었다. 긴장으로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가슴팍을 쓸던 흰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안 죽어.”
섀넌이 윈터의 성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옭아맸다.
“…다 들어가게 되어 있어.”
물론 좀 찢어질 수는 있겠지만……. 뒷말을 삼키며 양팔로 윈터의 목을 감싸 안은 섀넌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얼른 채워 줘.”
열 오른 숨이 귓불 아래 목덜미로 훅 끼쳤다. 상체를 세우고 한 손으로 섀넌의 허벅지를 잡아 올린 윈터가 속삭이듯 말했다.
“……넣을게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귀두 끝이 틈을 벌리고 꾸역꾸역 들어왔다.
벌어지지 않는 구멍을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성기의 압박감에 섀넌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투둑, 툭, 늘어난 얇은 살갗이 찢어지는 느낌이 선득했다.
“으…, 섀넌……, 아.”
아직 다 들어가지 못한 기둥을 쥔 윈터가 접합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 미치겠다…….”
그가 혼잣말처럼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허리를 밀어붙였다.
츠즈즛,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그 구멍이 움찔거리며 천천히 제 성기를 삼키는 걸 내려다보던 윈터가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
“…찢어졌잖아요.”
“……섹스 중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애써 누르며, 섀넌이 차분히 말했다.
손을 제 다리 사이로 내린 그가 아직 반절도 들어가지 못한 윈터의 성기를 잡고 스스로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아, ……씨발.”
아슬아슬한 눈으로 그걸 내려다보던 윈터가 별안간 작게 욕을 내뱉으며 섀넌의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렸다.
그와 깊게 시선을 맞춘 윈터가 단번에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와 동시에 윈터의 낮은 신음이 그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깊숙한 곳을 무자비하게 짓찧은 성기는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달군 쇠몽둥이가 내장을 지지며 파고드는 듯한 고통에 섀넌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아아, 섀넌…….”
윤활유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는 걸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윈터가 섀넌의 안에 진입하자마자 파정한 탓이었다.
아플 정도로 조여 오는 점막이 경련했다. 무언가 침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윈터의 것을 다시 뱉어내려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반대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후으, 어떡해…, 아, 미치겠어요, 섀넌…….”
윈터는 섀넌의 안쪽에 깊이 처박은 채 그대로 멈췄다. 배 속에서 사정액을 흩뿌리며 경련하는 그의 성기가 윤곽 그대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두껍고 긴 기둥과 도드라진 핏줄, 내벽을 긁는 귀두의 둘레까지…….
“하아…, 진짜, 좋아…….”
그저 넣은 것만으로도 진저리를 치며 전율하는 윈터의 커다란 등을 끌어안은 섀넌이 통증을 참으며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짐승의 체취가 코끝에 스몄다.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비어져 나온 송곳니가 땀으로 젖은 살갗을 파고들었다.
입 안에 비릿한 피가 감돌았다.
“아…, 윈터…….”
찌푸려져 있던 섀넌의 눈가가 느슨히 풀렸다. 향긋한 피 때문에 아래의 통증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든 윈터가 섀넌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때 멀리서 둔중한 종소리가 울렸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였다.
희미하게 귓가에 아른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섀넌은 윈터와 제 사이를 지독히도 옭아매고 있던 붉은 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영을 보았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섀넌.”
침묵을 깬 고백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갈구한다.
가슴이 먹먹해진 섀넌이 그의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윈터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서,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맹약의 끈 대신 온몸으로 그를 품었다.
팔로 안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두 다리로 옭아매고 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
혀를 얽으며 음탕하게 그의 입 안을 휘젓던 윈터가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읍, 읏……, 윈터, 흣…, 아직, 움직이지…….”
잊고 있던 고통이 다시 밀물처럼 엄습하다 쑥 빠져나갔다. 기이한 공허감을 섀넌이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다시 윈터의 성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흑……!”
너무 많이 들어와 내장이 다 망가질 것만 같았다. 내벽이 빠듯하게 쓸려 올라가는 그 소름 끼치는 느낌에 섀넌은 온몸을 달달 떨면서도 윈터를 꽉 끌어안았다.
망가진 내장은 어차피 회복되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시간.
“……키스해 줘.”
조급한 숨결과 함께 입술이 빨려 들어가듯 덮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은 오직 입술 새로 흩어지는 서로의 호흡만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위아래로 일렁였다.
“하아…, 섀넌…….”
낮은 한숨이 곧 으르렁거리듯 거친 소리로 뒤바뀌었다. 청회색 홍채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확장된 동공이 맹목적인 욕망을 담고 번들거렸다.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던 등 근육이 점점 더 부풀며 단단하게 굳어갔다. 몸의 골격이 벌어지고 이목구비가 더 깊어졌다. 가느다란 은백색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귀가 튀어나왔다.
더불어 배 속을 채운 그의 성기가 내벽을 섬뜩하게 벌리고 부피를 더욱 키워갔다.
“아윽……!”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할 정도로 내장이 팽팽하게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섀넌은 온몸이 작살에 꿰인 듯한 고통을 느끼며 덜덜 떨었다.
다른 이였다면 절대로, 절대로 이런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가 윈터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아끼는 제 아이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격통이었다.
지나치게 부피를 키운 성기가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 안에 뜨겁게 사정했다. 섀넌은 귀두구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배 속에 딱 들러붙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제 몸 안에 깊숙이 박힌 성기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꽉 끼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아, 후으…, 어떡하지, 읏……, 어떡하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숨을 헐떡이는 윈터의 입술 새로 뾰족하게 길어진 치아가 언뜻 비어져 나왔다.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이 섀넌의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요, 샤…, 미안해요…, 아, 으…, 어떡하지…….”
시트를 움키고 있던 흰 손이 힘겹게 올라와 그의 뺨을 감쌌다.
“괜, 괜찮아…, 괜찮아, 윈터…, 읏…….”
야수처럼 흉측하게 벌어지는 입술에 입을 맞추며 뺨을 어루만지는 손이 목덜미를 따라 어깨와 가슴팍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숨…, 숨 쉬어.”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가 너덜너덜하게 찢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느 극점을 넘어선 고통은 절정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쉬…, 괜찮아…….”
두려운 듯, 혹은 감당 못 할 희열에 다다른 듯 헐떡이는 제 아이를 달래며 섀넌은 이미 턱 끝까지 차올라 모자란 제 숨마저 그에게 차분히 나누어 주었다.
시시각각 얼굴의 형태가 다시 돌아왔다. 윈터가 제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쾌감을 이기지 못해 저도 모르게 변이하려는 몸을 억지로 절제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샤…, 흐읏……, 어떡해요, 읏……, 너무, 좋아서, …좋아서, 후으….”
“…좋아, 잘하고 있어…….”
울먹이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제 안에 체액을 쏟아내는 아이의 귓가에 섀넌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배 속을 다 찢어 놓을 듯 부풀었던 성기가 다시 원래의 부피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본능을 애써 억제하는 윈터의 등 근육이 괴로운 듯 툭툭 불거지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다리가 활짝 벌어진 채 제 몸 안에서 꿈틀대는 윈터의 성기를 힘겹게 감당하는 섀넌은 이 순간을 온전히 음미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의 것을 배 속 가득히 품고 있다는 게, 자신을 향해 열렬히 쏟아지는 그 욕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는 게, 고통을 잊게 할 정도로 황홀하고 경이로웠다.
꼭 아프지만은 않을 거라는 제 예상은 맞았다. 아래가 반으로 갈라진다 해도 자신은 이 행위를 절대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섀넌, ……섀넌….”
내벽이 금세 젖은 소리를 냈다. 윈터가 깊숙이 성기를 꽂아 넣은 채 사정하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서, 섀넌은 누가 만져 준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파정해 버렸다. 성기 끝에서 흰 체액이 분출되자마자 윈터의 아랫배에 뭉개졌다.
애써 절제한 윈터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에도, 뒤를 가득 채운 성기의 감촉은 아직도 무척이나 버거웠다. 그러나 어쩐지 윈터가 허리를 뒤로 물릴 땐 기이한 상실감마저 들었다.
너른 등을 따라 일직선으로 파인 등줄기를 훑으며, 섀넌은 손끝으로 그의 꼬리뼈 부근을 더듬었다. 어릴 때 꼬리를 자르려다 실패한 흉터가 희미하게 만져졌다.
섀넌은 그 순간 묘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제 한 손에 우습게 들어 올려지던 한 줌 핏덩이가 아름다운 인간으로 화하고, 변이와 성장을 거듭하며 결국 제 몸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강건하고 너른 어깨를 가진 사내로 장성했다.
그 20년의 시간이, 결코 무의미하고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매 순간이 기적처럼 반짝이는 나날이었음을.
왜 그 당시에는 몰랐을까.
눈꺼풀에 시큰한 열이 올랐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의 외곽이 물기로 너울졌다. 윈터의 목을 끌어안아 제 어깨에 고개를 묻게 한 섀넌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저미듯 안타깝게 조여 오는 마음 때문인지, 아랫배를 가득 메운 압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흐읏……!”
배 속을 쳐올리는 성기는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감각에 섀넌은 몸서리쳤다.
아픔 때문에 아래에 몰린 열기가 사그라들다가도 제 위에서 헐떡이며 몰두하고 있는 윈터를 보면 통증과 상관없는 전율이 흘렀다.
귓가에는 온통 그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귓불과 목덜미에는 뜨거운 숨과 축축한 입술이 음탕하게 오갔다. 몸 안에서 요동치며 빠르게 배 속을 짓찧는 성기는 제 몸을 꿰뚫을 기세로 계속,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호기롭게 윈터의 허리를 감았던 다리는 어느새 고통으로 활짝 벌어져 애꿎은 시트만 발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섀넌은 땀에 젖은 그의 체취를 들이켜며 몰아치는 그의 열락을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으, …아, 하아…….”
그때 별안간 상체를 세운 윈터의 성기가 깊숙이 치고 들어오며 소름 끼치도록 기묘한 열기를 일깨웠다. 사정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흐읏…….”
꽉 다물린 잇새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알 수 없는 지점을 툭 건드리고 물러난 성기가 다시 끝까지 치달았을 때, 섀넌이 허리를 뒤틀었다.
“읏, 잠깐, 윈, …흐으, 읏…….”
윈터가 허공에 흔들리는 발목을 잡아 그 안쪽 복숭아뼈를 혀로 핥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섀넌의 발목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가 문득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윽…, 섀넌…….”
갑자기 수축하며 윈터의 것을 조인 내벽이 움찔 경련했다. 흥건히 젖은 점막이 제 성기에 꽉 들러붙는 느낌에, 그의 안에서 얕게 허리를 흔들던 윈터가 전율했다.
또 한 번 사정액이 내벽을 적셨다. 섀넌은 저조차도 알 수 없는 지점을 짓눌린 채, 뜨겁게 쏟아지는 체액을 견디며 몸서리쳤다.
“아, 아아, 윈, 흐읏….”
“아, 씨발…….”
미간을 찌푸린 윈터가 섀넌의 발목을 제 어깨에 걸친 채 이를 악물고 허리를 흔들었다.
탁탁탁탁, 빠르게 배 속을 짓치던 성기가 곧바로 연달아 사정했다. 들러붙는 내벽을 뿌리치며 귀두 끝까지 주욱 뒤로 물러난 성기가 다시 배 속 깊은 곳을 콱콱 두드리고 뜨겁게 사정하며 쑥 물러나길 반복했다.
“아, 아아…! 윈, 흐으, 하…, 흐읏, 너무 빨ㄹ, 흐윽……!”
성기를 빠듯하게 물고 있던 구멍 틈새에서 흰 정액이 찌걱찌걱 넘쳐 흘렀다. 짧고 굵게 연달아 몰아치는 타격을 견디지 못한 섀넌이 거의 울먹이며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아흑, 윈, ……아, 후으, 하아…….”
몽글몽글하고 알싸한 열락이 온몸으로 진하게 퍼져 나갔다. 통증과 비슷한, 그러나 아프다기엔 너무도 짙은 쾌감이 배 속부터 머리끝까지 차르륵 치달았다.
머리 위로 불꽃이 떨어져 내리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윈터의 성기가 깊숙이 들어찬 아래부터 온몸으로 들불 같은 환희가 내달렸다. 배 속이 처음으로 단맛을 느낀 혀처럼 질척하게 녹아 흐르는 듯했다.
투둑, 툭 섀넌의 손끝에 걸린 시트가 찢어졌다. 푸릇한 핏줄이 도드라진 커다란 손이 그 손을 떼어 내 깍지를 꼈다. 섀넌의 손을 내리누른 윈터가 다시 급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
윈터에게 박힐 것을 결심한 순간에도 모든 걸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늘 제가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었던 쾌락이 남의 통제 아래에 놓이는 경험은 섀넌을 몹시 당황케 했다.
뜻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그저 윈터가 허리를 쳐올리는 대로 범람하는 쾌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몰아쳤다가 쑥 물러나는 그 가파른 오르내림에 몸서리치며 신음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윈터에게 울며 애원하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킨 섀넌이 애써 감당하기 버거운 쾌감을 견뎌 냈다.
“흐윽…, 읏…….”
“아파요?”
제가 어디를 건드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던 윈터가 상체를 숙여 그의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훑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뒤채느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옆으로, 베개를 움킨 손이 바르작거렸다.
꽉 다물려 경직된 턱 끝과 목덜미, 판판한 굴곡을 따라 흐른 시선에 흰 정액을 뚝뚝 떨구는 섀넌의 성기가 보였다. 제 물건을 아래에 꽂은 채 발발 떨며 사정하는 모습이 지독히도 요사스러웠다.
윈터가 그의 성기를 쥐고 느리게 흔들었다. 그 손길을 따라 섀넌이 움찔거리며 정액을 쏟아 냈다.
“하으, 아…, 읏.”
“……좋아서 우는 거 맞죠…?”
“흐읏, 아…….”
“여기 이렇게 찔러 주면…, 좋아요…?”
그가 섀넌의 안에 깊이 박아 넣은 채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느슨히 웃었다.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성기가 각도를 달리하며 예민한 내벽을 건드릴 때마다, 섀넌의 몸이 움찔 경련했다.
“아아…! 아, 아아, 윈터, …윈터, 아흑….”
좋아서, 그리고 아파서, 좋고 아파서 우는 게 맞긴 했다. 그러나 섣불리 대답했다간 우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베개에 뺨을 묻은 섀넌은 그저 숨만 몰아쉬며 작게 대답했다.
“조금, 만…,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윈터가 허리를 멈추고 섀넌의 얼굴을 살폈다. 몇 번이나 물었다 놓친 아랫입술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입술을 손끝으로 덧그리며, 윈터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싫어요.”
“하아, 윽…, 흐읏…!”
상체를 세운 윈터가 제 검지의 마디를 구부려 살짝 깨물었다. 그의 치아 끝과 입술 안쪽이 금세 붉게 물들고, 긴 손가락 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피를 섀넌의 벌어진 입안으로 흘리며 아예 제 손가락을 그의 입에 물린 윈터가 깊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흐…, 읏…….”
섀넌의 입속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손가락에 막혀 다물지 못하는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혀가 다 보였다. 타액과 섞인 피를 꼴깍 삼키는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나 진짜, 읏…, 오랫동안 참았으니까…….”
뿌리 끝까지 처박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 더 깊이 그 몸을 헤집고 싶어 안달 난 윈터가 한 손으로 침대를 지탱한 채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의 등 근육이 단단하게 곤두서고 둔근이 바짝 조여들었다.
배 속을 가득 메운 성기가 더 들어갈 수 없는 좁은 틈을 억지로 찢어 벌리듯 가르며 꾸역꾸역 귀두 끝을 밀고 들어왔다.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섀넌에게도 다급하게 조여드는 근육이 느껴졌다. 홧홧하게 쓸리던 점막에 뜨거운 체액이 쏘아지고 흩뿌려졌다.
“하윽……!”
“그러니까, 이번엔 당신이, 하아……, 좀 참아 봐요…, 응?”
까득, 날카로운 송곳니가 제 손가락을 꿰뚫는 느낌이 선득했다. 그러나 윈터는 멈추지 않고 그의 안을 깊숙이 짓찧었다.
무른 과일처럼 차진 점막이 제 성기를 쥐어 터뜨릴 듯 조여도, 도리어 그의 쾌감만 더 자극할 뿐이었다. 뿌리 끝까지 제 것을 머금은 내벽이 안쓰러울 정도로 들러붙었다. 찌걱찌걱, 맞물린 성기와 점막이 마찰하며 젖은 소리를 냈다.
제 성기를 좁은 내벽에 콱콱 짓이기며, 윈터는 참았던 것을 쏟아내듯 절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섀넌.”
“흐읏, 읏, …아, 아……!”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하아…, 사랑해요, 섀넌, 사랑해요…….”
채워지기 무섭게 비워진다.
터질 듯 가득 차오른 쾌감이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나면 어쩐지 금방이라도 섀넌을 놓칠 것 같은 불안감과 공허함이 잠식한다.
늘…, 언제나 알 수 없는 얼굴…….
아무리 들여다봐도, 속눈썹이 맞닿을 듯 가까이 있어도 늘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제발…….”
알 수 없는 애원의 말을 내뱉은 윈터는 느슨하게 풀려 제 아래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시 한 번 깊게 그의 안을 짓뭉갰다.
“으…, 하으, 하아…, 아흑…….”
고개를 마구 뒤채며 허리를 뒤튼 섀넌이 신음했다. 손가락을 혀로 애무하듯 움직이는 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윈터가 그의 입에서 손을 빼내며 고개를 가까이 내렸다. 섀넌의 입안이 온통 붉었다.
윈터가 그 입술을 빨고 혀로 핥으며 애원했다.
“사랑해 주세요, 섀넌…, 나 좀 사랑해 줘요.”
“흐읏…….”
땀에 젖은 두꺼운 어깨와 목덜미를 훑고 올라간 손이 윈터의 양 뺨을 감싸며 깊게 시선을 얽었다.
“……지금도 충분히 아끼고 있어.”
그와 코끝을 맞댄 채 섀넌이 낮게 읊조렸다.
“좋아, 읏…, 좋아해…,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으니까….”
윈터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그의 귓바퀴에 입술을 묻은 섀넌이 움직임을 종용하듯 두 다리를 감았다.
“계속해 줘….”
윈터의 귓바퀴와 귓불을 타고 내려온 섀넌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어져 나왔다. 이미 한 번 꿰뚫었던 상처를 헤집으며 다시 파고들었다.
순간 윈터의 몸이 경직되며 그에게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아…, 섀넌…, 섀넌…, 너무 좋아요, 죽을 것 같아….”
“하아, 아읏, 아, 흑…!”
침대 헤드에 부딪히는 섀넌의 머리를 감싼 윈터가 빠르게 그의 안을 짓찧었다. 찰싹, 찰싹, 젖은 소리가 둔부와 부딪히는 장골 사이로 튀어 올랐다. 이미 흥건하게 적셔 놓은 안으로 다시 뜨거운 열락이 범람했다.
“키스, 흣…….”
새빨간 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윈터의 뺨과 귓불을 스쳐 입술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물어뜯길 듯 거칠게 뒤덮였다.
그러나 틈을 가르고 들어온 혀는 부드러웠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입천장, 뺨 안쪽의 살갗을 느리게 헤집는 입맞춤은 단내가 가득했다.
흥분으로 경직되어 올라온 승모근과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섀넌이 상체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윈터의 어깨를 잡고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자 흰 체액이 엉겨 붙은 성기가 제 안을 드나드는 게 여실히 보였다.
윈터가 성기를 밀어 넣을 때마다 홀쭉한 뱃가죽 위로 그 윤곽이 불룩하게 올라왔다.
하…, 섀넌은 저도 모르게 신음과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이렇게나 깊이 들어오는구나. 이렇게나 깊이…….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배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섀넌이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게 싫은 듯했다. 그런 윈터의 목덜미를 당겨 입을 맞춘 섀넌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읏.”
주르륵, 빠듯하게 아래를 채우고 있던 성기가 힘겹게 빠져나갔다.
구멍 틈에서 새어 나온 정액이 침대 시트 위에 짙은 자국을 남기며 스몄다. 아래가 찢어져 옅게 피가 섞인 그 자국을 윈터가 보지 못하게 가린 섀넌이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꿨다.
안쪽 근육이 뭉쳐 후들거리는 다리를 벌려 윈터의 위에 올라탄 그가 고개를 기울여 다시 입 맞췄다. 그러고는 스스로 제 엉덩이 뒤에 손을 내려 윈터의 성기를 잡아 구멍에 맞췄다.
그 정도로 쑤셔 박고 흔들어댔으면 좀 적응할 만도 한데, 회복력이 지나친 제 구멍은 어느새 다시 꽉 다물려 있었다. 귀두 끝부터 힘겹게 꾸역꾸역 제 배 속으로 밀어 넣는 섀넌의 둔부를 쥔 윈터가 가볍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흣…….”
“미안해요. 당신 신음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제 겨우 반절이나 삼켰을까. 도저히 스스로는 못 넣을 것 같았다.
잠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윈터를 노려보던 섀넌이 결국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윈터가 그의 허리를 안아 확 주저앉혔다.
“흑…….”
“울지 마세요, 섀넌.”
어느새 눈가로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훔친 윈터가 싱긋 웃었다.
“당신이 우니까 더 미치겠어요.”
“천천히…, 흐읏…, 부드럽게 해 줘.”
섀넌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이며 속삭였다. 울며 애원할 뻔한 걸 겨우 참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몸을 끌어안은 윈터가 입을 맞췄다. 제 품에 폭 안기고도 한참 남을 정도로 가느다란 섀넌의 몸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또 연약했다.
이렇게나 기묘하고, 찬란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맞물린 신음이 입술 안으로 뭉개졌다. 한 손으로 섀넌의 유두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입 안으로 울리는 그의 신음이 듣기 좋았다.
“…윈터, 조금만…, 흐윽, 아, 살살….”
“힘들어요? …하아……, 여기 만져 줄까요?”
젖꼭지를 긁고 매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섀넌의 성기를 잡았다. 묽은 정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만져 주며, 윈터가 섀넌의 턱 끝과 입가에 키스했다.
“하, 으…….”
“좋아요…?”
섀넌이 안식처를 찾듯 젖은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버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에게서 풍기는 수컷의 땀 냄새와 야성적인 흙냄새는 이제 익숙해지다 못해 섀넌을 안심케 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강건한 어깨를 움킨 그의 몸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하아…, 섀넌…, 당신 안쪽,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요?”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두 개의 청회색 달이 맹목적으로 일렁였다.
땀에 젖은 은백색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데도, 섀넌의 눈에 그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뜨거워…, 읏,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섀넌…, 하아, 섀넌…….”
둔부를 움킨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는 허리를 단단한 두 팔로 꽉 감싼 채 주저앉히자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높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개를 기울여 길게 드러난 섀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그의 둔부를 움킨 윈터의 눈에서 청회색 안광이 스쳤다.
검은 하늘이 파랗게 밝아올 때까지, 그는 섀넌을 옥죄고 휘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 * *
아직도 땀 냄새와 비릿한 체액 냄새가 뒤섞인 시트 위에 엎어져 있던 윈터가 창으로 내리치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해가 뜨는 걸 봤었는데, 마지막으로 섀넌의 안에 사정하고는 그대로 넣은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창가에 서 있는 섀넌은 마치 빛 속에 내던져진 존재 같았다. 햇볕이 드리워진 검은 머리칼 몇 올이 옅은 고동색을 띠며 가늘게 흔들렸다.
코끝에 스치는 담배 냄새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섀넌.”
“일어났어?”
낮게 잠긴 목소리에 몸을 돌린 섀넌이 빈 디켄터 안에 담배를 툭 떨구고는 윈터를 바라봤다.
하체에만 아슬아슬하게 덮인 얇은 이불 위로 드러난 두툼하고 너른 등이 보기 좋았다. 강건하고 균형 있게 잘 짜인 등 근육에 햇살이 들러붙어 탄력 있는 음영을 만들었다.
모양 좋게 옴폭 들어간 등줄기를 따라 둔덕진 곡선을 따라가던 섀넌의 시선이 이불로 가려져 있는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그렇게나 큰 좆이 제 몸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동시에, 이상하게 그 순간을 상기하자 윈터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래서 몸정이 무섭다는 거로군.’
섀넌은 차분한 얼굴 뒤로 그런 속내를 숨기며 입을 열었다.
“조금 추워도 어쩔 수 없어. 담배 연기가 다 빠져나가려면 창을 좀 열어 둬야 하니까.”
“당신이 추울 것 같은데요.”
윈터가 나른하게 웃으며 제 옆을 툭툭 쳤다. 섀넌이 말없이 침대로 올라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윈터가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섀넌이 제 가슴팍으로 안겨 든 윈터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넘기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젠 좋았단다, 무척.”
고개를 든 윈터가 묘한 눈으로 섀넌을 바라봤다. 코끝을 스치는 담배 냄새, 차분한 섀넌의 말, 어젠 좋았단다….
어쩐지 예전과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는 기분이라, 그가 옅게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불길하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섀넌이 약간의 장난기를 머금은 눈으로 윈터를 바라봤다.
“어제 일은 성년식 파티 후에 있을 수 있는 아주 흔한 실수야. 그러니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내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
“…라고 할까 봐?”
윈터가 인상을 쓰며 푸스스 웃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진짜 가슴 아파.”
“가슴 아플 것까지야.”
섀넌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그가 느리게 제 입술을 머금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윈터가 확인하듯 물었다.
“…실수 아니죠?”
“물론이지. 실수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산뜻한 즉답에도 윈터는 어딘지 완전히 안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햇살이 가로지른 청회색 시선이 섀넌을 가만히 탐색했다.
“……다른 걸 더 묻고 싶은데, 지금 말고 나중에 물을게요.”
뭔데 그러느냐고 되물으려던 섀넌은 잠시 그런 그와 시선을 맞대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지금 말고 나중에 대답해 줄게.”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제 아이의 뺨을 감싼 섀넌이 지그시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진득이 빨고, 입술 틈새로 들어오는 혀를 부드럽게 옭아맨 섀넌이 고개를 더 기울여 깊게 입맞춤에 응했다.
농밀하게 얽히던 입술이 뜨거운 호흡과 함께 떨어지고, 이내 섀넌의 턱 끝과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내려갔다.
윈터가 섀넌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으며 가운을 젖혔다. 그리고 곧바로 드러나는 맨 살갗 위로 입술을 묻었다. 섀넌의 살갗에서 옅은 물 냄새와 보송보송한 향이 났다.
“언제 씻었어요?”
“조금 전에.”
“허리 안 아파요?”
“…….”
불멸자의 회복력을 간과한 듯한 그 질문에, 섀넌이 윈터를 힐끗 내려다봤다.
윈터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만 이렇게 아픈 거예요?”
“밤새 그렇게 움직여댔으니 아플 수밖에.”
섀넌이 윈터의 등과 허리를 천천히 매만졌다.
물론 관계 직후에는 허리가 좀 아작 날 것 같긴 했다. 제 위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윈터의 것을 스스로 빼낼 때도 고역이었다.
팽팽하게 들어차 있던 그의 물건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 순간은, 평생 그 부위로 배출 행위를 해 본 적 없는 섀넌에게 소름 끼치도록 생경한 감각이었다.
게다가 배 속 가득 질척하게 고인 윈터의 흔적을 긁어내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까지 구태여 제 아이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섀넌은 그저 웃기만 했다.
방금 허리가 아프다고 해놓고 제 젖꼭지를 습관처럼 입에 머금는 윈터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섀넌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밤새 그러고도 아침부터 또 하고 싶어?”
“나흘 밤낮으로 해도 부족할걸요.”
코끝으로 섀넌의 가슴팍을 간질이던 윈터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섀넌이 그런 그의 뺨을 감싸 짧게 입을 맞췄다.
“난 괜찮지만 넌 그렇게 하면 죽어.”
윈터를 밀어낸 그가 침대에서 빠르게 일어나며 가운을 여몄다.
“미적대지 말고 얼른 씻어. 러셀이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에.”
등 뒤부터 팔까지 차례로 뜨거운 체온이 감겼다. 뒤에서 섀넌을 안은 윈터가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졸업식 참석 안 할 거야?”
“아….”
잊고 있었는지, 윈터가 귀찮다는 듯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성년식이랑 졸업식을 같이 치르지 않는 건 정말 비효율적이에요. 지난밤 파티에 찌든 학생들이 졸업식 따위 얼마나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겠어요?”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야.”
벽면에 걸려 있던 가운을 집어 윈터에게 휙 던진 섀넌이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서 러셀의 마차가 오고 있었다.
“러셀이 오고 있어.”
“말 안 해도 알아요.”
윈터가 가볍게 투덜대며 어깨 위로 대충 가운을 걸쳤다. 창틀에 손을 짚은 섀넌에게 다가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턱을 잡아 제 쪽을 보게 돌렸다.
깊게 입을 맞추려는 윈터를 피해 고개를 뒤챈 섀넌이 짧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을 쳤다.
“나가, 얼른. 러셀이 보기 전에.”
“우리 꼭 부모님 몰래 섹스한 청소년 같지 않아요?”
윈터가 가볍게 농을 던지며 뒷걸음질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르르 눈을 접어 웃은 윈터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손을 흔들었다.
“이따 봐요.”
탁, 침실 문이 닫혔다. 창가에 기댄 채 침실을 나가는 윈터를 보던 섀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지워졌다.
이내 차게 식은 얼굴로 몸을 돌린 섀넌이 창밖을 내려다봤다.
……하찮은 인간조차 제가 키운 자식과 간음하지 않고, 하물며 짐승과 몸을 섞지 않는데.
차라리 죄악감이라도 느끼면 좋겠지만 애초에 자신은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살아있는 것들의 보편적인 관념과 윤리 의식 따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은 태생부터가 몰염치한 사람이라, 간밤의 충동을 후회는커녕 제 감정만 더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밤새도록 품고 있었던 윈터의 몸이 전과는 다른 의미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제 몸에 들어왔던 성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쁘게 헐떡이던 숨이, 델 듯 뜨거운 체온과 갈라진 근육 사이로 맺힌 땀이, 강건하게 저를 뒤덮던 바위 같은 등이, 그가 실어다 준 무서울 정도로 감당키 힘든 전율이, 그 모든 게 하나하나 가슴을 철렁하게 할 만큼 찬란하고 경이로웠다.
그간 섀넌은 끊임없이 제 감정을 연륜에 비춰 정의 내리려 애썼다. 그러나 기실, 애초에 정의 내릴 필요 없었던 감정이었던 것이다.
역시 자신은 그를 보내기 싫은 게 맞다.
아니, 절대 보낼 수 없다.
추운 극지방의 미개한 짐승 사회에서, 자신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윈터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윈터 또한 자신과 같은 걸 원하고 있으니 다른 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빌어먹을 늑대 새끼들이 길길이 날뛰든 말든…….
몇십 년만 조금 불편하게 지내면 그만이다. 아무도 모르는 변경에 숨어서, 아이가 제 곁에서 늙어가고 죽는 것을 섀넌은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자신을 멸시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윈터와 함께, 자신도 이 긴 생을 마무리할 테니.
그것만큼 완벽하고 황홀한 끝이 또 있을까.
섀넌이 몸을 돌려 문을 바라봤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코트 보관실에서 겉옷도 안 찾아가시고, 대체 어젯밤에 어딜 가셨던 겁니까? 두 분 다 안 계신 줄도 모르고 밤새 연회장에 있었습니다.”
러셀이 화를 내든 말든, 태연히 커튼을 친 섀넌이 물었다.
“계속 홀에 있었나?”
“당연히 아니죠! 카일 님이 빈 객실 하나를 잡아 주셔서 거기서 자고 왔습니다. ……집에 안 들어간 학생들이 많아서 조식은 잘 챙겨 주던데요.”
“뭐, 그럼 됐네.”
섀넌이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성큼성큼 침실 밖으로 걸어갔다.
“그리 넋 놓고 서 있지 말고 어서 카일에게 마차를 보내.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윈터 졸업식은 안 가십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러셀의 질문에 걸음을 멈춘 섀넌이 잠시 생각했다.
“…….”
갈리나가 몇 년을 매달려 설득하면 모를까, 그 고작 몇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윈터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자신과 윈터 사이엔 20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쌓인 견고한 믿음이 있지만, 갈리나는 동족이라는 그 쓸모없는 연결고리 외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윈터는 제게 올 테고, 이제 섀넌은 그런 윈터에게 얼마든지 제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다.
“……졸업식이라고 해 봐야 고작 몇 시간이야.”
게다가, 뱀파이어 셋이 모여 있는 케인타운에서 그녀 홀로 윈터를 납치할 수도 없을 테니…….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니 알아서 금방 다녀오겠지.”
“아, 예…….”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 얼른 움직여.”
섀넌이 드레스룸 문을 활짝 열었다. 벌써 해가 중천으로 치솟고 있었다. 서둘러 옷을 차려입어야 할 때였다.
* * *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지루한 표정들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네이비색 정복을 입은 윈터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이튼홀 이사장의 연설을 듣다 이내 슬쩍 강당을 빠져나왔다.
어디든 사람이 북적였다. 혼잡한 인파를 피해 복도와 계단을 오가던 윈터가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여인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같은 냄새를 풍기는 두 사람이 인파를 사이에 둔 채 서로 마주 봤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상대를 가만히 보던 윈터가 몸을 돌려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계단을 오를수록 사람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고요한 꼭대기 층까지 올라온 윈터가 어느 빈 교실로 들어갔다.
윤리학 선생이 늘 매만지던 교탁을 손끝으로 훑으며 창가로 다가간 윈터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다.
“……몇 달 전부터 돌던 개 냄새가 당신의 것이었군요.”
그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하카.”
“그리말디. 윈터 그리말디예요.”
윈터가 제 호칭을 정정했다. 잠시 벌어진 침묵을 갈리나가 먼저 깼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걸 알고 있었나요?”
윈터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억양이었다.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차갑게 대꾸한 윈터가 몸을 돌려 창가에 살짝 기댔다.
검붉은 머리의 여인은 제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본 동족이었다. 꼭 남다른 북부식 억양과 그 냄새 때문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몇 달 전 파티에서, 섀넌이 만났던 개가 당신이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나요? …‘개’라고?”
갈리나의 질문에 윈터가 대수롭지 않게 싱긋 웃었다.
“늑대는 원래 갯과니까요.”
“그건 불멸자들이 우리를 조롱할 때나 하는 말이에요.”
“내가 그 불멸자 손에서 자란 개인데, …무슨 문제라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이던 갈리나가 헛숨을 흘렸다. 그녀가 몇 발짝 다가와 교탁에 손을 짚었다.
“……그리말디가 정말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군요.”
“음, 섀넌은 원래 불필요한 말은 굳이 하지 않아요.”
“자하카…, 당신이 모르는 게 아주 많,”
“그리말디.”
윈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윈터 그리말디.”
부드러운 음성에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호칭을 거듭 지적받았음에도, 갈리나는 그를 그리말디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흰 설원 위에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자하카의 영예가 다 스러져 가는데, 자신들에게 마지막 등불과도 같은 그가 제 존재를 부정한다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윈터,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케인타운에 올 때만 해도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직 윈터를 데려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정작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갈리나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말디는 당신의 앞날 따위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을 테니 이런 얘길 해 주지 않은 거겠지만, 누구든 타고난 숙명이 있답니다. 당신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요. 당신은…,”
“나도 내가 누군지 알아요.”
“…네?”
순간 말문이 막힌 갈리나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윈터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게 중요할까요? 나한테 자하카는 그저 오래된 서적에서나 나오는 이름 중 하나일 뿐인데.”
갈리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섣불리 말을 얹었다간 영영 기회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가 윈터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신이 마지막 자하카라면요? 그 책에 이런 얘긴 나와 있지 않겠죠. 당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 당신의 외숙부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잠깐.”
그녀가 교탁을 지나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윈터가 손을 들어 그만하라는 신호를 했다. 순간 걸음을 멈춘 갈리나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궁금하지 않아, 당신의 얘기.”
창턱에 기대어 있던 윈터가 똑바로 서며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매무새를 정돈했다. 그의 얼굴에 옅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점점 지워졌다.
결국엔 차가운 멸시만이 남은 눈이 갈리나를 정확히 응시했다.
“난 평생을 그리말디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자하카로 살아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딱딱한 구둣발이 대리석 바닥을 찧는 소리가 조용한 교실 안에 울렸다.
갈리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긴 세월 그를 기다리며,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예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거라 믿었고, 돌아와야 했고, 그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존재였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한다. 어떻게든….
“자하카!”
갈리나를 지나친 윈터가 교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갈리나가 소리쳤다. 윈터가 문을 잡은 채 잠시 멈췄다.
“불멸자들의 맹약에 관해서도 알고 있나요?”
윈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신들에 관한 일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버리더니, 그리말디에 관한 얘기를 꺼내니 이제야 관심을 보이는 듯한 그의 태도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갈리나는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불멸자들에게 맹약은 절대적인 규율이죠. 오래전부터 그리말디는 자하카와의 맹약에 얽매여 있던 몸이었어요. …바로 그리말디가 당신을 억지로 떠맡게 된 이유죠.”
윈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긴 섀넌의 입을 통해 더 자세히 듣는 걸로 하죠.”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버릴 듯한 윈터를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건 갈리나 쪽이었다.
“당신 어머니의 머리칼이 감긴 머리 장식.”
다급하게 내뱉은 말에 마침내 잠깐의 적막이 불현듯 찾아왔다.
갈리나가 그의 청회색 눈에 옅게 번지는 당황을 포착했다. 아주 작은 틈일지라도, 지금 그녀로선 절대 놓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본 적 있는 모양이군요. 자하카 대대로 내려온 맹약의 증표. 이제 내 말에 신빙성이 좀 생겨요?”
부정하고 싶었으나, 윈터는 분명 그 머리 장식을 본 일이 있었다.
‘네 고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어.’
그렇게 말하며 제 앞으로 머리 장식을 지그시 밀어놓던 섀넌의 희고 가느다란 손끝도.
섀넌은 늘 자신을 아꼈지만, 윈터는 그가 제 존재를 그리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간혹 발현으로 달라진 제 모습을 보는 섀넌의 눈빛에, 열 살 때 저를 납치했던 늑대족들을 보던 경멸의 시선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도 경멸하는 늑대족인 자신을, 그가 어떻게 키우게 되었을까. 윈터는 그 궁금증이 늘 마음속 저변에 깔려 있었으나 습관처럼 외면했다.
갈리나는 틈을 파고들어 윈터를 흔들어 놓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당신을 향한 그리말디의 의무는 이제 끝났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리말디 본인이 몹시 기다려온 순간이죠. 애초에 그는 당신이 성년이 될 날 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너는 성년이 될 때까진 계속 내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해.’
‘나는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갈리나의 말끝에 섀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보통 성년이 되면 다들 독립을 하잖아.’
제 질문이 난처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변명처럼 에둘러 내려놓던 말도.
윈터는 마음속에 치솟는 의심을 부정했다. 섀넌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을 키우게 된 계기가 무엇이든, 심지어 저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해도.
“…정확히는, 당신이 인간 사회에서 성년식을 치르는 날이 그가 책임져야 할 맹약의 기한이었죠.”
저 낯선 동족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보다, 윈터는 그의 말을 더 믿고 싶었다.
“……얘기 잘 들었어요, 갈리나. 행여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와 내 관계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
갈리나가 절망적인 한숨을 흘렸다. 윈터가 조금이라도 흔들렸다고 느낀 건 자신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리말디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저토록 맹목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말을 더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뭔가를 뒤늦게 눈치챈 갈리나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당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윈터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알았든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그리말디에게서 들었나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황이 난 매우 불편하다는 거야.”
“……당신, 내가 보낸 편지를 봤군요.”
“…….”
“맞죠?”
갈리나의 질문에 윈터가 무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추격자들은 누구나 만날 수 있으니까.”
“…….”
별안간 갈리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온몸을 옥죄고 있던 절망감이 한순간에 탁 풀어지며 희열마저 차올랐다.
제가 그리말디에게 보낸 편지를 그가 읽었다면, 그렇다면…, 일이 더 쉬워질 터다.
그녀가 빠르게 말을 꺼냈다.
“혹시 그가 당신과 계속 함께 살겠다고 하던가요? 절대 그럴 수 없을 텐데요. 난 어제 그리말디에게 확답을 얻었거든요.”
“……어제도 섀넌을 만났었나요.”
윈터의 질문에, 갈리나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흔들어 보였다.
윈터의 시선이 곧바로 그 시계에 들러붙었다.
체인 끝에 매달린 은빛 회중시계는 섀넌의 것이 맞았다. 파티 전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직접 챙겨 줬던 바로 그 시계였으니까.
“이 시계가 뭘 의미하는 건지는, 편지를 읽어 본 당신이라면 아주 잘 알겠죠. 안 그래요?”
윈터가 성큼성큼 갈리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긴장한 갈리나가 교탁에 허리를 기댄 채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흔들리는 회중시계를 힐끗 본 윈터가 갈리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멸시가 그 시선에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윈터가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낚아채듯 시계를 가져갔다.
제게서 성큼 멀어지는 윈터의 등 뒤에 대고 갈리나가 다급히 외쳤다.
“아직도 날 못 믿어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 데도? 그리말디는 이미 당신을 버렸어! 당신을 시라트로 돌려보내야만 비로소 그의 맹약이 끝나는 거야! 그리말디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이제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 당신은 지금 속고 있다고요!”
“…….”
“그 같은 불멸자가 어떻게 당신과 계속 함께 살겠어요?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잖아요. 맹약 덕분에 이제껏 그에게 머리가 박제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일인 걸요!”
어떻게든 그의 걸음을 붙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를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린 태생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지! …태어날 때부터 본능처럼 각인된 그 감정은 쉬이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야. 고작 20년 키운 애새끼 하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윈터의 등 뒤로 사뭇 다른 억양이 쏟아졌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을 흉내 낸 건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윈터를 데려가려면 데려가! 그 아이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한은 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해 줄 거지만, 내 울타리를 떠나는 순간 그걸로 끝인 거야!”
그러나 그녀의 말은 쾅 닫히는 문소리에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 * *
“……한 직후에 무조건 냄새를 지워. 일이 커질지도 모르니까 죽이진 말고 잠깐만 발을 묶어 두면….”
카일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섀넌이 서재로 다가오는 빠른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왈칵 열린 문으로 윈터가 들어섰다.
“어, …윈터 왔어? 졸업식은? 벌써 끝났어?”
카일이 웃으며 윈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윈터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섀넌을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카일이 섀넌과 윈터의 눈치를 살폈으나 섀넌 또한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음, 홀에서 잠시 기다려 줘, 카일.”
섀넌이 차분히 카일에게 부탁했다. 어쩐지 윈터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카일이 얼른 일어나 어색하게 웃으며 서재를 나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섀넌이 말을 멈추고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갈리나를 만난 모양이군.”
윈터가 실어온 공기에 익숙한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섀넌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무리 그래도 졸업식엔 같이 갔어야 했나…, 급히 카일과 의논할 일이 있어 따라가지 않았더니, 결국 이런 성가신 상황이 발생했다.
그를 보던 윈터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훑었다. 카일과 대화를 나누던 테이블 위에는 서류 여러 장과 낡은 머리 장식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윈터는 그 장식에 감긴 은백색 머리카락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머리 장식에 닿아 있는 것을 안 섀넌이 짧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제 맹약에 관한 얘길 들은 게 분명하다. 그래…, 그랬겠지. 윈터를 설득하기 위해 그 말을 가장 먼저 꺼냈겠지.
당연히 맹약이 끝나면 맡긴 물건을 돌려받듯 윈터를 수월하게 데리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면한 불멸자에게선 당사자가 시라트로의 귀환을 원치 않는다는 얘기나 들었으니 그녀 입장에선 몹시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그녀가 고작 몇 분 동안 지껄인 헛소리 따위로, 윈터와 제 관계가 그리 쉬이 흔들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나한테 언제 얘기하려고 했어요?”
“……오늘 말하려 했어. 네가 졸업식에 다녀오면.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그래도 남의 입을 통해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오늘요?”
차분한 섀넌의 말을 자른 윈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섀넌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쳐다봤다.
“날 버리는 일이 당신에겐 그렇게 가벼운 일이었나 보죠?”
“…뭐?”
“널 사지 멀쩡하게 키워서 시라트로 돌려보내는 게 내 의무였으니, 이제는 네가 태어난 곳으로 꺼져 줘야겠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나요?”
섀넌이 작게 헛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윈터에게서 저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쩐지 기운이 확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오해야, 윈터. 날 그렇게 못 믿어?”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결이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섀넌이 제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리며 조용히 화를 삭였다.
“…….”
생전 처음 본 갈리나의 말 한마디에 조르르 달려와 화를 낼 만큼, 설마 그렇게나 나를 못 믿을까…….
“그렇다고 하면.”
섀넌이 그를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그렇다고 하면 네 고향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려고?”
윈터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뺨을 거칠게 움켰다.
“왜 대답을 못 하는데. 난 이 정도도 못 물어봐? 당신이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얘기잖아. 지긋지긋한 애새끼, 네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한 너를 해할 일은 없어.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진!”
섀넌이 그의 손을 쳐내며 순식간에 그에게서 멀어졌다. 서재 책상을 등지고 선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지…….”
섀넌이 사나운 실소를 흘리며 그에게 잡혔던 제 뺨과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네 평생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준 장본인인 나보다 오늘 처음 본 동족의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믿음직스러웠나? 나에 대한 믿음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면서, 잘도 내 앞에서 낯간지러운 소리를 지껄여댔군.”
“어차피 당신은 나한테 단 한 마디도 털어놓을 생각 없었잖아!”
“그래! 굳이 안 해도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널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이제 와 그 빌어먹을 옛날 일이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릴 것 같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섀넌의 시선이 윈터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시계로 향했다. 심해처럼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게 식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고작 옛날 일 따위로 이러는 거 같아?”
순간 표정이 일변한 섀넌은 말문이 막혀 헛숨을 들이켰다.
시계, 씨발…….
등신같이 기분이 들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갈리나……. 악다문 잇새로 욕설을 내뱉으며, 섀넌이 조용히 화를 삭였다.
“말끝마다 성년, 성년, 하시더니,”
울컥 치솟은 감정을 억지로 누른 듯 형편없이 덜걱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한 기한은 내 성년식이었나 봐요? 어쩐지, 당신이 왜 그렇게 별것도 아닌 파티에 집착하시나 했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혼자 등신같이 안도했잖아.”
새빨갛게 충혈된 눈시울을 일그러뜨리며, 윈터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거 같아요? 당신이 나 몰래 내 동족과 접선한다는 걸 알았어도, 지금껏 내게 숨긴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도 다 괜찮았어. 당신이 그 가증스러운 입으로 날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끝까지 당신을 믿었다고!”
“…좀 더 믿어 보지 그래, 윈터.”
“그럼 이 시계가 뭘 뜻하는 건지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 봐요.”
“……그래, 알아. 그녀의 말이 다 맞아. 내가 그 시계를 준 것도 사실이고.”
섀넌이 열 오른 숨을 한 차례 몰아쉬며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소름 끼치게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널 진짜 보낼 생각이었다면, 간밤에 너와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았겠지.”
“당신은 원래 아무 의미 없이 그런 짓 잘하잖아…?”
“…….”
“말해 봐, 적선이었어? 아…, 당신은 적선이든 강제든 내키지 않는 건 안 한다고 했으니, 그냥 하룻밤 즐긴 건가? 이제 다신 안 볼 새끼니까?”
도저히 윈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말이었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화가 점점 절제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다.
그래, 어디까지나 백번 양보해서, 간밤의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자신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이상한 얘길 들었으니, 충분히 오해할 법했다.
“그동안 되게 힘드셨겠어요. 나 같은 괴물 새끼 키우느라…….”
그러나 지난밤 그토록 서로에게 진심을 퍼붓고, 제가 얼마나 온몸으로 그를 받아 주었는지 알고 있다면 절대로, 저런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맹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애새끼니까…, 내가 성년식 치를 날만 좆 빠지게 기다리면서, 의무를 다하고 나면 나 따위 뒈지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라고! 날 볼 때마다 그런 생각으로 견디셨어요?”
섀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알았다. 아이는 자신을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맹약 따윈 둘 사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온전히 채워진 적이 없어. 당신을 안았을 때도 마찬가지야. 당신의 그 새빨간 눈을 보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기분이 어떤지, 날 싫어하고 있는지 좋아하고 있는지 전전긍긍하며 살피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내가 어디까지 당신을 믿어 줘야 하죠?”
제게 쏟아지는 말을 견디며, 섀넌은 켜켜이 분노가 쌓였다.
갈리나의 편지는 받자마자 태워 버렸으니, 그 시계가 의미하는 바도 결국은 그녀의 입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을 믿었다면 이런 식으로 화를 낼 게 아니라 제게 다시 확인해 봤어야 했다.
어떻게 그녀의 말만 듣고, 저 알량한 시계 나부랭이 하나만 보고 저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처음부터 견고하지 않았던 관계.
얇은 유리 위를 딛고 서서, 단단한 바위를 디뎠다고 착각한 꼴이었다.
그토록 아껴 주어도 신뢰를 얻는 일은 완전히 다른 영역인 모양이다. 섀넌은 아이가 내내 저를 불신하고 있었다는 것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 오해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그렇게 윈터를 제 곁에 둔다고 해서, 그게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까.
아끼는 상대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다는 게 이렇게나 절망스러운 일인 줄은 예전엔 알지 못했다.
“…그래, 이해해, 윈터. 날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해.”
어차피 태생부터가 서로를 증오하고 믿지 못하는 족속들인데, 우리라고 해서 다를까.
세상 모든 불멸자와 늑대족이 서로를 멸시해도 우리 둘만은 각별하다고 생각했던 건 저 혼자만의 등신 같은 착각이었다.
결국…, 결국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머저리같이…….
“…이럴 거면 애초에 내게 꼬리를 치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네가 계속 이렇게 건방지게 굴었다면 맹약이 끝나자마자 네 머리를 잘라 시라트에 던져 버렸을 거야.”
둘 사이로 날 선 적막이 휩쓸었다. 지난밤 서로를 그렇게나 원하고 갈망했던 두 존재 사이엔 이제 좁힐 수 없는 싸늘한 간극만이 남아 있었다.
저문 달은 모든 것을 앗아 갔고 타는 태양은 조악했던 믿음의 민낯을 까발렸다.
한참이나 섀넌에게 박혀 있던 청회색 시선이 이내 떨어졌다.
“하려면 지금 하세요. 아니면 영영 기회 없을 테니까.”
윈터가 허리를 숙여 테이블 위에 있던 머리 장식을 집었다.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해서, 섀넌은 치솟는 배신감에 눈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나한텐 대체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
별안간 사나운 실소를 흘린 윈터가 머리 장식을 든 손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들을 가리켰다. 신분 위조 관련 서류와 타지에서 매입한 저택의 등기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니면, 그냥 말도 없이 날 버려 두고 다른 도시로 도망가려고 했어요? 내가 어디서 뒈지든지 말든지 당신이랑 더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을 못 하다니 유감이구나, 윈터. 네가 나를 딱 그 정도까지로 알았던 거겠지.”
섀넌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가. 난 늘 말했어. 네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당장 내 앞에서 꺼지고 시라트에 가서 그놈의 왕 노릇 하며 잘 살아.”
“그게 진짜 당신의 진심이에요?”
“…그래.”
섀넌의 대답에 눈을 지그시 내리감는 윈터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희게 굳었다. 한참이나 뭔가를 억누르듯 참던 그가 꽉 다문 잇새로 낮게 말했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이래.”
“그런 건 너 따위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실소를 흘린 섀넌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오늘 이후로 다시 내 눈에 띄면 그 예쁜 머리통을 잘라 박제해 버릴 테니.”
입가를 비스듬히 올려 웃은 윈터가 비척비척 뒷걸음질로 멀어지며 사납게 빈정댔다.
“당신이야말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엔 차게 식은 경멸이 드리워졌다.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서재를 나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향해 얽혀 있는 시선은 누그러질 줄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바로 조금 전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철컥,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서로의 세상이 끝나는 순간 같았다.
혼자 남은 섀넌이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굳었다.
이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움직인 그가 느리게 창가로 다가갔다. 곧 아래로 내려온 윈터가 저택을 나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정원 나무의 마른 가지를 쳐내던 러셀이 윈터에게 뭐라 말을 걸었으나 윈터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그저 성큼성큼 걸어 철문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창턱을 짚고 있던 손끝이 희게 셌다. 움츠러들던 손이 이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를 보내더라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섀넌은 그제야 모든 게 너무 많이 어긋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게 다 너무 늦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윈터는 훨씬 더, 너무도 멀리 앞서 있었고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에게 제 진심이 통할 수 있는 숱한 타이밍들을 전부 놓쳐 버렸다.
다 끝났다.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신기루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아이는 결국 허상이 되어 흩어져버렸고, 그와 보낸 모든 시간은 진정 신기루였다.
섀넌은 온몸을 사무치는 이 공허함이 그저 순간의 감정일 거라 여겼다. 그래야만 했다. 이미, 모든 게 다…….
“섀넌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둘이 왜 싸워?”
카일과 러셀이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목이 꽉 막혀 머리가 지끈지끈해질 지경이었다. 터질 것처럼 열기가 몰려 시큰해진 제 눈꺼풀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던 섀넌이 커튼을 닫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잠시 틈을 두고 몸을 돌린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싸우긴 누가 싸웠다는 거야.”
그가 책상 앞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습관처럼 서랍을 더듬었다. 서랍 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낸 그가 말아 두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그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야.”
“예…?”
“응?”
카일과 러셀이 동시에 되물었다.
“윈터는 시라트로, 나는 원래 살던 대로. 서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거라고.”
“……어…, 그럼 저것들은 다 취소?”
카일이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들을 가리켰다.
후견인과 피후견인, 두 명의 낯선 이름이 적힌 신분 위조 서류였다.
* * *
“지금쯤이면 항구에 도착했을 거야.”
팔짱을 끼고 문간에 기대어 선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말했다.
말없이 위스키를 들이켜는 섀넌을 힐끗 본 카일이 엘리자베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짓으로 카일을 재촉했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머뭇거리던 카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잡을 거야?”
“그 배은망덕한 것을 내가 왜.”
“…혹시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을 굴리며 헛숨을 내뱉은 섀넌이 비어 버린 잔을 채웠다. 저 말을 윈터도 하고 카일도 하고 러셀도 한다.
분명 자신이 후회할 거라고.
“……내가 왜.”
그가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렸다.
“내가 왜 후회를 해. 20년 동안 빌어먹을 애새끼 키우느라 고생한 게 누군데. 후회한다면 그 애새끼가 해야 하는 거고 나는 그저 아주 지긋지긋하지. ……그딴 천박한 짐승 새끼 어디 가서 뒈지든지 말든지.”
담배를 입에 문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불을 붙였다.
“…윈터 입장에선 충분히 화낼 수 있는 거잖아. 넌 그 애를 잡아먹는 불멸자이지만 그 여자는 윈터의 동족이야. 당연히 동족의 말에 신뢰가 더 가지 않겠어?”
섀넌을 달래기 위한 말이었으나 카일은 도리어 그 말이 섀넌을 더 화나게 한다는 것을 몰랐다. 섀넌은 잠시 누그러졌던 배신감이 새삼 다시 솟구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와 자신이 겨우 그 정도의 관계였다면, 어젯밤 그런 등신 같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몸이 반으로 쪼개어지는 듯한 고통을 희열이라 착각하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와 마음을 나누는 그런 짓은 절대…, 절대로.
까득,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감돌았다. 입술 안쪽을 짓씹어 배어 나오는 제 피는 섀넌에게 당연히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으나, 대신 간밤에 고통을 잊으려 입안 가득 빨아들였던 다른 이의 피 냄새가 코끝에 감도는 착각이 들었다.
“……다들 그만 꺼져. 시끄럽게 짖어대지 말고.”
“섀넌, 윈터가 배를 타면 그땐 정말로 못 잡아. 해풍이 냄새를 다 지워 버리면 끝이야.”
엘리자베스가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섀넌은 묵묵부답이었고, 어느새 다 비운 디켄터를 들고 러셀을 향해 설렁설렁 흔들어 보이는 그의 눈은 인간 사회에 등을 지고 칩거했던 20년 전의 공허함이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카일을 향해 나가자고 턱짓했다.
문을 돌아 나가는 엘리자베스를 따라 몸을 일으킨 카일이 러셀을 향해 말없이 섀넌을 가리키며 눈짓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러셀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
그들이 자신을 두고 눈깔로 뭐라고 지껄이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섀넌은 그저 제 숨결에 밴 위스키 향이 이 저택에 깔린 윈터의 냄새를 얼른 가려 주길 바랐다.
애초에 천박한 늑대 새끼에게 정을 주는 게 아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했던 생각대로, 차라리 지하에 감금해놓고 날고기나 던져 주며 알아서 클 때까지 방치했어야 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신이 그를 얼마나 아끼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제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애써 키워 놨더니, 결국 제 동족에게 돌아가는 꼴을 보라지.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있나.
섀넌은 쉴새 없이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뻥 뚫린 듯 공허한 가슴을 분노로라도 채우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보는 상실감이 섀넌은 몹시 낯설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게 이렇게나 성가실 정도로 아픈 일일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갖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 눈앞에 있다면 갈가리 찢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다리야의 말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
‘당신들에겐 고작 이십 년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래, 고작…, 고작 이십 년이었다. 아주 짧은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수도자처럼, 그렇게 자신은 원래대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다가, ……자신을 둘러싼 온갖 무의미한 시간에 질식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 * *
작은 캐러벨 범선은 얕은 파도에도 출렁임이 심했다.
거대한 증기선에 밀려 하급 노동자들을 운반하는 데에나 주로 쓰이게 된 범선의 갑판 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역시나 가난한 광부들뿐이었다.
때에 찌든 코트를 걸친 광부들 사이로 옷차림과 체구부터 눈에 띄는 청년이 난간에 팔을 걸친 채 해풍을 맞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이 가느다란 은백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휩쓸었다.
윈터는 멀어지는 부두를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제 옆에 있는 여자와 자신 사이의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되도록 빠른 루트로 경유할 거지만, 시라트가 여기서 가까운 곳은 아니니 꽤 힘든 여정이 될 거예요.”
그런 그를 살피던 갈리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윈터에게선 대꾸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배를 타는 내내 자신이 그 어떤 말을 쏟아 내도 계속 그랬다.
“지금 날 당신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시라트에서는, 난 당신에게 절대 악역이 아니란 거 알아 줘요.”
제 말에 몇 번이고 돌아오는 침묵에 지친 갈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 우린 서로를 전적으로 믿어야 해요. 시라트에 돌아가면, 모든 상황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해질 겁니다.”
“서로를 믿을 만한 시간이 있었나요, 당신과 내 사이에.”
“믿음이 시간에 비례한다면 당신이 날 따라나서는 일은 없었겠죠.”
갈리나의 즉각적인 대꾸에, 윈터가 말없이 난간에 걸쳐진 제 손을 바라봤다.
……차라리 그의 침실 박제 장식으로 남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섀넌은 끝까지 저를 붙잡지도, 죽이지도 않았고, 살아있는 망령처럼 제 몸을 휩쓰는 이 해풍은 더는 그가 자신을 절대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정말로 타고난 숙명이란 게 있는 걸까. 제 숙명이 시라트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섀넌의 숙명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게 스쳐 지나갈 인연이었던가.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기어이 시라트로 향하고 있는 이 현실이 윈터는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나를 시라트의 왕좌에 앉혀 놓을 생각인가요.”
윈터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당신이 날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계획이 약간 틀어져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날 그 자리에 앉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스러졌던 자하카의 영예가 다시 이어지는 거죠. 당신이 마지막 자하카의 핏줄이니까.”
“내 몸에 흐르는 피를 제외하고는, 내게서 자하카를 찾을 수 있는 구석은 아무것도 없어요. 늑대족 아무나 앉혀 놔도 나보단 나을걸.”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필사적인 갈리나의 대답에, 윈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자하카에 집착하죠? 피를 먹고 사는 불멸자보다 당신들이 더 피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
“……죽은 야낙 님의 배 속에서 당신을 끄집어낸 게 바로 나예요.”
귓전을 때리는 바람 소리가 잠시 멀어졌다.
“차기 시라트의 왕이셨던 야낙 님은 당신을 낳기도 전에 검은 늑대들에게 처절하게 짓밟혔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윈터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갈리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윈터와 시선을 맞대고 있었지만, 이 순간은 어딘가 아주 먼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배 속에서 이미 스스로 태막을 찢고 나와 있더군요. 야낙 님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질식하기 직전이었어요. 보통 태어날 땐 인간의 몸으로 빚어지는데, 당신은 태내에서부터 이미 늑대였죠. 다리야 님께선 보자마자 아셨어요. …이 아이가, 야낙을 대신할 유일한 ‘자하카’라고.”
윈터는 그제야 갈리나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푸석푸석한 검붉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해 틀어 올린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마주해 왔다.
마모되지 않은 결연한 의지가 굳은살처럼 박인 그녀의 얼굴에는, 윈터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필사적인 세월이 담겨 있었다.
제게는 이 모든 게 불합리하고 낯선 일이었지만 저쪽에선 목숨 건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 지금 당장 서로를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
길게 토해 내는 회고를 무의미하게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흘려보낸 윈터가 이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제 태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지금 제 인생의 모든 페이지를 뒤덮은 건 너른 정원과 고요한 대저택, 그리고 그 안에서 늘 아름다운 얼굴로 차를 마시는 섀넌뿐이었다.
비록 그와의 관계가 자신만 열심히 매달리고 구걸하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할지라도, 제겐 오직 그것만이 세상 전부였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여전히 자신은 그 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꼭 알아야 해요.”
그래서 윈터는, 제게도 같은 감정을 강요하는 갈리나의 태도가 무척 불편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알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어쨌든 나는 불멸자의 손에 자랐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처참한 과거가 지금 당장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도.”
미간을 좁힌 갈리나가 난간을 짚으며 윈터에게 다가왔다.
“내게서 이런 얘길 들으면서도 당신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헛웃음을 흘린 윈터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얘기를 짜증스럽게 넘기는 듯한 태도에, 갈리나도 덩달아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당신의 부모를 죽이고, 외숙부마저 처참하게 머리를 잘라 성곽에 효수했던 자가 지금 당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냐고요!”
“내가 분노해 주길 바라요? 얼굴도 모르는 내 혈육을 죽인 원수라면서, 당장 다 갈가리 찢어 놓겠다고 날뛰는 게 당신이 원하는 반응인가?”
윈터는 찡그리는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어쩌죠. 내게서 그런 반응을 원했다면 날 불멸자 집에 달랑 던져 놓고 떠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갈리나는 한기가 도는 시선을 마주하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차가운 멸시가 담긴 그의 말이, 그리말디와 똑 닮아 있었던 탓이다.
“말해 봐요, 갈리나. 당신들에게 난 뭐지? 쓸모없는 아기였을 땐 짐짝처럼 던져 놓고, 써먹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니 이제 와 멋대로 물건 집어가듯 시라트로 데려가는 이 상황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요?”
“…말했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땐 그게 당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
“예, 그렇겠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그러니까 군말 없이 당신을 따라나서는 것 외에 내게서 다른 그 어떤 것도 섣불리 바라지 말아요.”
해풍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바람은 일정한 방향도 없이 그들 사이를 거칠게 휘젓고 검은 망망대해로 유령처럼 흩어졌다.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야겠으니까.”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 사이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섞였다.
결국, 갈리나는 더 쏟아내고 싶은 모든 말을 다 삼켰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그를 불멸자의 울타리 안에 고립되도록 방치한 것은 매우 큰 실수였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갈리나는 혈육이라는 강력한 고리의 힘을 믿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들과 동족이자 자하카의 피가 흐르는 강한 늑대였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차츰 제 태생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거라 여겼다.
“…….”
윈터가 제 검지 마디를 손으로 매만졌다. 섀넌에게 물린 잇자국이 아물기엔, 그 일은 불과 어제였다.
지금껏 윈터는 제 존재의 본질을 외면하려고만 했었다. 섀넌에게 숨기기 급급했고, 단지 그와 한데 섞이기만을 갈망했다. 그런다고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나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노력이었다.
숨기고, 조르고, 매달리고,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애원하고……, 그렇게 아무리 애써 봤자, 자신은 그를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늘 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붉은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자신을 언제 좋아해 줄지, 혹은 언제 자신을 버릴지 전전긍긍하고 매달리던 모든 순간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섀넌이 제게 줄 수 있는 애정은 한계가 있었을 테고, 애초에 짐승인 자신은 감히 그 이상을 바랄 수 없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래서…,”
윈터에게서 한숨 섞인 말이 공허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뭘 할 거죠?”
갈리나는 마치 준비한 대답처럼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을 검은 늑대에게 데려갈 거예요.”
* * *
잠이 필수가 아니라는 건, 반대로 언제든 언제까지고 잘 수도 있다는 얘기다.
섀넌은 거의 열흘을 내리 잤다. 침실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커튼 틈새로 아주 미세하게 찔러 들어오는 바늘 같은 빛에, 섀넌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빌어먹을 러셀…….
갈라진 목소리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게을러터진 제 종은 침대 시트를 미처 갈지 못했다.
물론 이 침대에서 윈터와 자신이 무슨 행위를 했었는지 알았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잽싸게 시트를 갈았겠지만, 그는 알지도 못하고 꿈에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얼굴을 뒤덮은 이불과 시트, 베개에서 온통 그날의 냄새가 가득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마치 형벌처럼 폐부로 밀려드는 특유의 냄새에, 섀넌은 억지로 다시 수마에 잠기길 반복했다.
제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감과 뜨거운 체온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꿈결 속에서 건져지길 몇 차례.
방을 들락거리며 섀넌의 눈치를 살피던 러셀조차 잠든 고요한 밤에, 섀넌이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제기랄.”
아무래도 시트를 갈아야겠다.
무능하고 일도 더럽게 못 하는 제 종 대신 신경질적으로 이불과 베개를 걷어 내 바닥에 떨어뜨린 섀넌이 시트를 잡아 뜯듯 당겼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시트와 함께 뜯어진 매트리스 안에서 하얀 솜과 깃털이 튀어나와 폴폴 날렸다.
섀넌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부스스한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껏 겪어 본 그 어떤 일보다도 최악이었다.
매트리스가 터진 걸 무시하고 시트를 확 걷어 낸 섀넌의 머리 위로 흰 깃털 몇 개가 나풀나풀 내려앉았다.
메마른 입술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이튿날 아침 습관적으로 섀넌의 침실에 들어간 러셀은 눈앞의 광경에 아연했다.
마치 맹수가 와서 진탕을 치고 간 것처럼, 베개와 침대 시트, 매트리스며 그 모든 것들이 죄다 갈가리 찢어져 침실 전체에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 헤드와 다리는 완전히 부서져 한쪽이 주저앉았고, 위스키를 담았던 디켄터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바닥을 뒹구는 솜과 깃털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껏 섀넌을 모시며 그의 공간이 이토록 난장판이 된 것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러셀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얀 솜이 드러나 엉망으로 뒤집힌 매트리스가 꼭 내장이 다 튀어나온 짐승의 사체 같았다.
뭐라도 수습하기 위해 망연한 얼굴로 걸어 들어가는 러셀의 발치를 따라 깃털이 폴폴 나뒹굴었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깃털을 보며, 러셀이 막막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것 좀 보시라니까요…?”
“음….”
목소릴 낮춘 러셀이 열어 준 침실 문으로 고개를 내민 카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했다.
침실은 러셀이 아침에 본 그대로였다.
“전 도저히 무서워서 단둘이 한집에 못 있겠습니다.”
러셀이 몸서리치며 속삭였다. 러셀의 전보에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그리말디 저택으로 온 카일은 제 생각보다 그리 다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고, 제 생각보다 섀넌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래서, 섀넌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러셀이 바닥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작게 말했다.
“아래층 손님방에서 자고 계십니다.”
“제 방은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손님방에서 잔다고?”
카일이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제법 커서, 깜짝 놀란 러셀이 황급히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조용히 좀 하시라니까요…!”
“네가 아무리 그렇게 간지럽게 속삭여도 섀넌 귀엔 다 들릴걸.”
그의 말에 러셀이 제 입을 꼭 닫았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앙다문 그가 영 이상한 각도로 고갯짓했다.
“뭐라고? 아래?”
“…….”
러셀이 계속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아래로 내려가 보라고?”
그러나 극도로 소음을 줄인 채 전전긍긍하는 건 러셀 혼자뿐이었고, 카일은 평소와 같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니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좀 내려가서 살펴 보시라고요. 아니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든가…!”
겁이 많은 러셀은 행여 섀넌에게 잘못 걸려 자신도 저 침대 매트리스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될까 두려웠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맹약에 얽매인 몸이라 죽지는 못할 터였고, 스스로 내장을 쓸어 담아 제 뱃가죽을 꿰매는 짓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러셀, 일단 심호흡 좀 하고, 진정해. 네 이런 호들갑이 오히려 섀넌의 심기를 더 건드릴 거야.”
카일의 말을 따라 천천히 심호흡하던 러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술은 더 주지 마.”
“예….”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카일을 바라봤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저 한량 같은 뱀파이어 뿐이라니…, 러셀은 제 처지가 새삼 서글프게 느껴졌다.
“섀넌…?”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카일이 조심스럽게 어둠에 뒤덮인 방 안을 둘러봤다. 섀넌은 죽은 듯 고요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가 반 정도 남아 있는 디켄터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널브러진 잔이 보였다. 쏟아진 술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은 듯 테이블 위에 옅은 얼룩만을 남겼다.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 마지막 흡혈이 언제였어?”
섀넌의 곁으로 다가간 카일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섀넌은 여전히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듣고 있잖아, 섀넌. 좀 일어나 봐.”
“…….”
뭔가 이상함을 느낀 카일이 다시 테이블 위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위스키의 색깔이 어쩐지 이상하다. 원래라면 맑은 황금빛으로 투명해야 할 술은 불순물이 잔뜩 섞인 듯 탁했다.
“…아.”
그제야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빈 약병들을 본 카일이 짧게 탄식했다. 러셀이 제조한 이상한 약을 죄다 들이부은 모양이다.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저 정도를 한 번에 복용하면 틀림없이 골로 간다.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카일이 어쩐지 조금 불길한 얼굴로 섀넌을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음.”
카일이 낮게 침음했다. 설마, 저따위 약으로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러셀이 좀 해괴한 약을 많이 만들긴 하지만…, 아직까지 불멸자 죽이는 약을 만들었단 소린 못 들은 것 같은데.
별안간 카일이 섀넌의 위로 훌쩍 올라탔다. 어쩐지 섀넌이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섀넌…? 섀넌! 눈 좀 떠봐!”
섀넌의 양쪽 어깨를 잡아 흔들던 카일이 다급히 그의 뺨을 쳤다.
“섀넌!”
밀랍처럼 미동도 없이 닫혀 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짜증 섞인 붉은 눈이 카일을 올려다봤다.
“…제기랄.”
굳게 닫혀 있던 핏기 없는 입술이 달싹이며 잔뜩 쉰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대답 안 하면 좀 적당히 하고 꺼져 줄 줄도 알아야지.”
“뒈진 줄 알았잖아, 이 미친놈아.”
카일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길게 내뱉었다.
“안 뒈진 거 알았으면 좀 내려와. 역겨우니까.”
그제야 섀넌의 위에 올라타 앉아 있던 카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섀넌이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식도 없는 새끼. 저딴 약에 내가 죽을 것 같아?”
“하도 시체처럼 누워 있기에 혹시나 했지.”
카일이 머쓱하게 제 턱을 매만지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약은 왜 섞어 마신 거야? 그림이 안 좋잖아, 그림이. 인간이 봤으면 자살 현장인 줄 알았을 거야.”
“러셀이 만든 약을 먹으면 중간에 안 깨고 푹 잘 수 있어서.”
“그걸 말이라고 해? 인간들 수면제가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라고.”
“내 노예 새끼가 다른 건 몰라도 제약 실력은 최고거든…….”
맥없이 중얼거리며 비척비척 걸어 구겨진 셔츠 위에 가운을 걸치는 섀넌을 물끄러미 보던 카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오, 섀넌….”
그가 과장된 탄식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제 새끼 떠났다고 이렇게나 슬퍼할 줄이야….”
카일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린 섀넌이 테이블에 나뒹구는 잔을 집어 들고는 온갖 약이 잔뜩 섞여 불투명한 위스키를 따랐다.
“계속 처자고 싶을 정도로 슬펐어?”
위스키를 마시던 섀넌이 그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꽤 많은 양을 채운 위스키를 오래도록 나눠 끝까지 다 마신 섀넌이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대꾸했다.
“…슬픈 게 아니라 조금 화가 난 것뿐이야.”
메말라 갈라지던 그의 목소리가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그 애새끼를 쫓아가서 머리통을 터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주 조금.”
디켄터에 남아 있는 위스키를 아예 잔에 꽉 차도록 다 들이부은 섀넌이 맥없이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있는 섀넌을 조심스레 살피던 카일이 머뭇거리다 운을 뗐다.
“그…, 저기 있잖아, 섀넌.”
잔을 들이켜는 섀넌에게선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추격자들 말이야.”
“…….”
“갈리나가 이곳에 올 때 함께 돌아왔는데.”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섀넌의 눈치를 살피던 카일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잔금을…, 치러 달라고.”
“잔금?”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세운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되묻다가, 이내 잊었던 것을 떠올린 듯 욕설을 내뱉으며 탄식했다.
처음 그들에게 자하카의 조력자를 찾아오라고 의뢰했을 때 일부만 치르고 남은 대가를 말하는 거였다.
“……아아, 잔금.”
섀넌이 산뜻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히 수긍하는 그를 카일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잔을 내려놓은 섀넌이 몸을 일으켰다.
“달라면 드려야지…, 잔금.”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카일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그 잔금이 다른 의미를 지닌 것 같았다. 전에 그가 선금을 치르며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 * *
“어차피 이제 쓸모도 없잖아.”
섀넌이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겨울 숲은 무척이나 건조하고 고요했다.
죽은 낙엽과 마른 가지가 쌓여 고르지 못한 흙바닥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시적시적 걸어가는 섀넌의 뒤로 카일이 따라붙었다.
“쓸모가 왜 없어? 너는 윈터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 없나 보지?”
추격자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개 먹이로 던져 줄 거라던 말을 기어이 실행하려 하는 섀넌을 그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우연히 우리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새끼가 몰래 여기저기 입 털고 다니면 그놈도 찾아 족쳐야지, 처리하기 번거로운 시신 뒤처리도 이놈들이 얼마나 잘해 준다고. 그리고 또…,”
“좀 닥쳐 봐, 카일. 어차피 이놈들 나타나기 전엔 그런 도움 없이도 잘 살았어, 우린. ……추격자들 생기기 시작한 게 뭐 얼마나 됐다고.”
“뭐 그래, 네 말도 맞지. …아주 호옥시나 윈터와 관련해서 이놈들 도움을 또 받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정 그놈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시겠다면야….”
섀넌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그놈의 늑대족 애새끼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
카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섀넌을 쳐다봤다. 온갖 환멸과 권태가 담긴 붉은 눈을 마주 보던 카일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입 닥치고 있을게.”
섀넌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왜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그들 정도면 자신들이 숲에 진입했을 때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일부러 느리게 거닐며 그들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늦는다.
마음만 먹으면 이 넓은 산을 금세 뒤져 놈들을 족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히히 웃는 소리가 다가왔다.
“영속의 권능을 누리는 악마이자, 만부의 피로 빚어진 선신이여…….”
마른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단 한 놈뿐이었다.
“다른 놈들은?”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다가오는 늑대를 향해 카일이 물었다.
“자, 잔금은 저 혼자 받기로 했습니다요.”
섀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치가 참 빠르기도 하지……. 그러나 제게 굽신거리며 다가오는 깡마른 늑대를 보자니 귀찮은 마음이 더 우세해졌다.
저 약한 늑대 하나 으스러뜨린다고 제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고, 카일은 여전히 저놈들을 유용하게 쓰고 있는 모양이니 그냥 원하는 잔금이나 치러 주고 끝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하카를 시라트로 돌려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늑대는 제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섀넌의 심기를 건드려 버렸다.
섀넌의 뒤에 선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허리를 굽신거리는 늑대는 불행히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저희들 도움이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히히 웃으며 제 양손을 맞잡은 늑대가 섀넌을 힐끗 올려다봤다.
소름 끼칠 만큼 무감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 늑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다를 늘어놨다.
“일전에 그분을 뵈니, 그리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헤헤……. 역시 자하카 핏줄을 타고나신 분이라 다른 늑대들과는 확연히 다르시더군요.”
미동도 없이 무표정했던 얼굴에 미세한 틈이 벌어졌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섀넌이 고개를 기울였다.
“……윈터를 본 적이 있나 보지?”
“아유, 그럼요. 그분이 여기서 얼마나 자주 사냥을 하는지 모르셨습니까요?”
안다. 너무 자주 나가서 자신이 주의를 시켰을 정도니까.
이 산속의 짐승이 씨가 마를 정도로 헤집고 다녔으니 아마 먼발치에서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는 동안 사냥을 못 해서 힘들었는데, 그분 덕분에 굶어 죽는 걸 겨우 면할 수 있었습니다요. 따지자면 은인이지요.”
섀넌이 황당한 소릴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추격자들은 이미 늑대 사회에서 도태된 존재들이라 동족을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윈터를 본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게서 사냥감을 얻어 갔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아무렴요, 아무렴요! 다른 늑대족들과는 달리 아주 신사적이시고, ……조, 조금 무섭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너희들이 내 아이와 말 섞을 일이 뭐가 있다고.”
“어……, 그게….”
섀넌의 반응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는지, 늑대가 그와 카일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윈터가 이유 없이 너희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단 말야?”
카일의 가벼운 질문에 늑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저를 뚫어지게 보는 두 쌍의 붉은 시선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사, 사실 아주 약간의…, 호의를 저희가 먼저 베풀었지요.”
카일과 섀넌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제가 시라트에서 편지를 가지고 돌아온 길이었는데 말입니다. 우연히 여기서 그분을 마주쳤는데,”
“편지.”
섀넌이 늑대의 말을 낮게 반복했다. 그가 말하는 편지가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잘 알았다.
추격자가 시라트에서 온 편지를 자신들에게 전달한 건 단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다.
금세 상황을 짐작한 섀넌이 제 생각을 의심하며 물었다.
“…그 편지를 윈터에게 보여 준 건 아니겠지.”
“…….”
카일이 헛숨을 내뱉으며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그걸 윈터가 먼저 봤다고? 우리가 보기 전에? 나한테 편지 줄 때 그런 말 없었잖아?”
“마, 말씀드릴 틈이 없지 않았습니까요? 굳이 알려드려야 할 일도 아니고…….”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섀넌은 순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윈터의 아슬아슬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이 시계가 뭘 뜻하는 건지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 봐요.’
처음부터 그것은 갈리나나 제 입을 통해 확인할 필요 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가 직접 편지를 봤으니까…….
“…아.”
섀넌이 짧게 탄식하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늑대가 툭 튀어나온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보안이 엉망이군.”
그가 차분히 중얼거렸다.
늑대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가 먼저 보든 상관없는 일 아닌가. 그리말디에게 전하는 편지였지만, 어차피 그 편지를 보내는 목적은 윈터에게 갈리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의뢰인의 손에 편지가 닿기도 전에 타인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는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
카일의 말에 늑대가 더욱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편지를 윈터 님에게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지는 정말 몰랐습니다요! 아니, 어차피 그분께서도 알아야 할 내용이지 않았습, …컥!”
말하는 도중에 숨통이 틀어막힌 늑대가 허공으로 올라간 발끝을 버둥거렸다. 그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쥔 채 들어 올린 섀넌이 아까와 같은 무감한 얼굴로 싸늘하게 읊조렸다.
“계약 파기야.”
“끄흑…, 컥……!”
“보안도 안 지키면서 잔금은 무슨.”
“잘못……, 살…, 커흑.”
가느다란 목뼈가 마른 가지처럼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의 코와 입 밖으로 튀어나온 피가 섀넌의 손을 적시고 손목으로 타고 흘렀다.
이내 숨이 끊긴 사체를 낙엽 위에 내팽개친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제 손을 털어댔다. 경악한 표정 그대로 굳은 늑대의 얼굴 위로 그가 털어대는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졌다.
“거봐, 이왕 떠날 거였으면 빨리 떠났어야지. …맙소사, 윈터가 이놈들을 만났을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찬 카일이 늑대의 사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끝으로 찍어 입에 가져갔다. 윽…, 맛이 왜 이래. 얼굴을 찌푸린 그가 침을 퉤 뱉었다.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어 피로 더럽혀진 제 손을 닦는 섀넌의 표정은 온갖 짜증과 분노가 뒤섞여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갈리나의 편지가 제 손에 왔던 시점이 언제였는가를 가늠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대체 언제부터.
섀넌은 아찔해지는 눈을 내리감았다.
홀에서 춤을 출 때도,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그에게 입을 맞출 때도, 그의 맹목적인 순종을 비웃으며 침대에서 제 물건이나 빨게 할 때도, 그를 상대로 계속 모호한 줄다리기를 했던 그 지긋지긋한 시간들 내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나 좀 봐줘요, 무슨 생각해요, 섀넌…. 유난히 제 표정을 살피고 눈을 들여다보던 아이의 얼굴을, 정작 자신은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환영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흔들렸다.
언젠가 마차 안에서 그 말을 했을 때 윈터의 표정이 어땠던가. 역시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자신은 온통 다른 생각에 갇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무조건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언제나 내 선택지는 당신이야. 섀넌이 원하는 거, 섀넌을 좀 더 오래 볼 수 있는 거, 섀넌과 함께할 수 있는 거…….
자신이 홀로 선택의 기로에 서서 그를 보낼지 말지에 대해 저울질할 때, 이미 그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날 버리지 말아요, 섀넌. 내겐 당신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섀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날 버리지만 않으면, 나도 당신을 절대 안 떠나요.’
윈터가 제 키를 훌쩍 넘어 성장할 때까지도 왜 자신은 여전히 그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여겼을까.
‘사랑해요. 사랑해요, 섀넌. 제발, 사랑해 주세요…….’
다 알면서 잘도 그런 애원을 했단 말이지.
다 알면서, 제 앞에서 그렇게 예쁘게 웃고, 매달리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안겨 오고…….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심히 지나쳐 버린 아이의 숱한 애원이 이제야 하나하나 비수처럼 되돌아왔다.
오랜 세월 산 자의 연륜이란 이따금 아집이 되는 법이다. 그 빌어먹을 고집을 앞세워 오직 제 판단만이 옳다고 여긴 섀넌은 아이의 진심을 가로막는 데 급급해 제 진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저무는 해의 빛살이 섀넌의 눈에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앞으로 카일이 햇볕을 등지고 섰다.
“섀넌, 왜 그래?”
그가 섀넌의 눈앞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섀넌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제 눈꺼풀을 손끝으로 눌렀다. 순식간에 목을 타고 올라온 열기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당신이야말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당신은 내 박제조차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이제 와 알았다고 해도, 어차피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정말 지독히도 엇갈렸다. 달려가 그를 붙잡을 자격조차 이제 제겐 없었다.
하나씩 어긋난 단추를 제 손으로 풀어 다시 채울 기회가 분명 있었음에도…, 그랬음에도.
그가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피곤해.”
섀넌이 제 손을 닦은 손수건을 늑대의 사체 위에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렸다.
“내려가자.”
* * *
코트 깃을 여민 윈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흰 설원을 내려다봤다. 땅도 하늘도 모두 하얘서, 지평선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얇은 면사처럼 허공을 휘도는 설풍이 한차례 그의 몸을 휩쓸었다. 제 얼굴을 가늘게 때리는 눈 알갱이를 만져 본 그가 이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갈리나가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추운가요?”
“…조금.”
그의 대답에 갈리나가 짧게 웃었다.
“늑대족은 태생적으로 추위에 강해요. 몇 주만 지나도 금세 적응할걸요?”
코트 깃을 세워 목을 감싼 윈터를 힐끗 본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 코트 따위는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렇다기엔 사람들이 죄다 짐승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윈터가 설원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가는 몇몇 늑대족이었다.
그들의 어깨와 등을 풍성하게 뒤덮고 있는 털가죽은 가공되지 않은 듯 결이 거칠어 보였지만, 제가 입은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따뜻해 보였다.
“과연 그럴까요?”
갈리나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딱히 되묻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시라트에 진입하기 전에 갈리나가 신으라고 권유했던 부츠를 신지 않은 걸 윈터는 조금 후회했다. 구둣발로 눈이 뒤덮인 협곡을 걷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힘들어도 첫 대면은 사람의 모습으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괜히 하슬라의 신경을 미리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하슬라.
검은 늑대이자 지금 시라트의 왕좌에 앉아 있는 이의 이름이었다.
윈터는 입속으로 그 이름을 조용히 발음해 보았다. 오는 내내 갈리나에게 몇 번이나 교정받았음에도 여전히 북부식 이름들은 발음이 어렵다.
발음뿐인가, 사실 갈리나의 억양이 너무 특이해서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것 자체가 수월하지 않았다.
푹 젖은 구두에 갇힌 발이 시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그나마 자신이 늑대족이기 때문에 이 정도인 거지, 아마 보통 인간이었으면 벌써 동상에 걸렸을 것이다.
거대한 산 하나를 관통한 듯한 긴 터널을 통과할 때는 그래도 좀 수월했다. 적어도 눈이 시릴 정도로 시야를 가득 메우는 흰 빛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고르지 못한 바닥과 벽면, 간혹 낮아지는 천장 때문에 허리를 잔뜩 수그려야 하는 게 단점이었다.
한때 왕도에서 발명된 증기 기관차의 철로를 어디까지 이을 것인가 하는 논의에, 어떤 정치계 인사가 이곳을 언급해 논란된 적이 있었다.
북부 끝 미지의 세계.
발을 들인 자는 있었을지 몰라도 다시 돌아온 자가 없어서, 아직 지도조차 정확히 그릴 수 없을 만큼 높고 험준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인간 사회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늑대족 관련 서적에서 본 지도가 아니었다면 영영 시라트라는 지명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런 곳에 사냥감이 있긴 한가요.”
“어머, 그럼요. 설원에도 있을 건 다 있답니다.”
갈리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묵묵히 좁은 터널을 걷던 윈터가 침묵을 깼다. 앞서가던 갈리나가 그를 돌아봤다.
“이곳 늑대들은, ……만월을 어떻게 보내죠?”
갈리나가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추켜 올렸다.
“뭐 평소처럼 보내죠. 왜요?”
윈터가 미간을 좁히며 미심쩍게 물었다.
“……만월에 몸이 변화하잖아요. …가끔….”
말을 멈춘 윈터가 뭔가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갈리나가 뒤늦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정기를 말하는 건가요, 혹시?”
“…….”
“만월에 발정기가 와요?”
“…원래 같이 오는 게 아니었나요.”
윈터의 질문에 갈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간혹 그렇게 주기가 겹치는 늑대들이 있긴 하죠. 자라면서 차차 안정되긴 하던데.”
“…….”
윈터는 자신을 내내 괴롭혔던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건 결코 저런 식으로 가볍게 떠들 만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은 늘 이 비뚤어진 광증을 섀넌에게 숨기느라 만월마다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 했는데, 이들에겐 그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일이란 건가.
그의 표정을 살피던 갈리나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아…, 혹시 지금도 만월이 오면 참기 힘들어요?”
윈터가 대답 없이 묵묵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갈리나가 얼른 그를 따라갔다.
“시종을 붙여 줄 수 있어요.”
다시 걸음을 멈춘 윈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침실 시종이요. 아직 누구한테 각인된 것도 아니잖아요. 자하카는 유독 발정기가 요란하기도 하고, 그 나이 때 발정기를 그냥 넘기는 건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잠시 갈리나를 보며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윈터의 얼굴이 일변했다.
돌연 사납게 정색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
“……그딴 역겨운 말은, 다신 하지 마세요.”
윈터가 그대로 갈리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없던 정도 떨어질 것 같으니까.”
섀넌이 입버릇처럼 이들을 경멸한다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윈터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 갈리나나, 그런 짓을 자연스러운 문화로 여기는 게 제 동족들이라는 것에 역겨움을 느꼈다.
제 근본이 이렇게나 천박했으니, 섀넌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 주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자꾸만 자신을 보며 저울질하던 그의 눈빛이 떠올라서, 윈터는 애써 이를 악물고 생각을 떨쳐 내야 했다.
“미안해요, 윈터.”
입을 벌린 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갈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얼른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윈터에게서 더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갈리나는 어쩐지 무안하고 어색한 그 침묵을 버티며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그 적막에 한참이나 내던져져 걷던 갈리나가, 어느 순간 앞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십 분 정도만 더 가면 돼요.”
윈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터널의 끝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저 앞에서는 벌써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설원의 빛이었다.
마침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윈터의 예상처럼 마냥 하얗지만은 않았다.
높다란 담장 대신 얼기설기 엮인 목책을 두른 작은 민가들, 끝없이 눈이 내리는 이 설원에서 어떻게 저렇게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목조와 석조 건물들은 흰 눈에 대비되어 하나같이 검게 보였다.
굵은 밧줄로 허술하게 이음새를 고정해 놓은 목제 다리는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흔들렸고, 그 다리 끝에 맞닿아 있는 거대한 석조 성은 얼어붙었다 녹기를 반복한 이끼가 틈새마다 가득 끼어 있어 마치 죽은 자들의 폐허 같았다.
윈터의 표정을 읽었는지, 갈리나가 말을 붙였다.
“저래 보여도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어요. 아마 그리말디보다 저게 더 나이 많을걸요.”
“…….”
“물론 보수를 그만큼 자주 해야 하지만.”
기이이익, 하는 둔중한 마찰음이 울리며 근처에 있는 커다란 목제 기중기가 뭔가를 가득 싣고 올라갔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윈터는 냄새로 곧장 알 수 있었다.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짐승의 사체였다.
이 설원 어디에 대체 저렇게나 많은 짐승이 있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배운 상식을 기준으로 여길 판단하려 하지 말아요, 윈터.”
거보라는 듯, 갈리나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있을 건 다 있다고 했잖아요?”
그때, 별안간 다리가 잘게 흔들렸다. 한쪽 난간을 짚고 균형을 잡은 윈터가 갈리나의 굳은 표정을 바라봤다.
“……하슬라가 와요.”
윈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건너편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 멈춰선 갈리나는 어쩐지 몹시 긴장한 듯했다.
가늘어졌던 눈발이 한 차례 거세게 휘몰아치고는 다시 물러갔다. 제 코트의 어깨를 뒤덮은 눈을 털어 내며, 윈터는 점점 가까워지는 무리의 선두에 선 인영을 관찰했다.
투박하게 깎아 놓은 바위처럼 이목구비가 깊은 남자는 얼핏 보기엔 새까맣고 짙은 눈썹과 푹 파여 그늘진 눈, 큰 코만 도드라져 보였다. 새까맣고 결이 거친 털가죽이 그의 어깨와 등을 가로질러 발목까지 뒤덮고 있었다.
그들이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윈터는 조금 전 갈리나가 왜 제 코트를 보고 비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 두꺼운 털가죽으로 무장한 것 같았던 그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상의를 아예 입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하카!”
쩌렁쩌렁 울리는 굵은 음성이 낙뢰처럼 다리 위를 휩쓸었다.
윈터가 딛고 있는 다리가 크게 출렁였다. 이제 지척까지 온 남자는 거의 뛰듯이 빠르게 다가왔다.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이 마침내 윈터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긴장으로 굳은 윈터의 어깨가 순식간에 딸려 갔다. 그는 짐승의 냄새가 진동하는 털옷으로 뒤덮인 남자의 품에 부지불식간에 안겼다.
하슬라는 윈터보다 키가 매우 작았지만 그 몸체는 매우 두꺼웠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나는 윈터를 꽉 안은 그가 등을 몇 차례 거칠게 다독였다.
다른 무엇보다 하슬라에게서 나는 냄새를 참을 수 없었던 윈터는 조용히 숨을 멈춘 채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윈터의 양쪽 팔을 붙들고 얼굴을 올려다보던 하슬라가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동처럼 곱상한 얼굴이야. 겉만 보면 인간인 줄 알겠어.”
그의 한쪽 팔을 놓고 살짝 삐딱하게 고쳐 선 하슬라가 이번엔 윈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말디가 애를 완전히 망쳐 놨군.”
윈터는 말없이 하슬라를 내려다봤다.
십 년 전 자신을 커다란 상자에 넣어 생포해 오려고 했던 자는, 지금은 죽은 줄 알았던 혈육을 만난 듯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윈터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제 일행에게로 몸을 돌린 그가 활짝 웃었다.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인 그가 큰 목청으로 외쳤다.
“마침내 내 조카가 무사히 귀환했으니, 오늘 같은 날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하슬라 자하카.
그는 윈터의 외숙부인 다리야, 어머니인 야낙과 한 형제로 자란, 선대 자하카의 서자였다.
이름 뒤에 자하카의 성이 붙어 있되 그만한 대우는 받지 못한 비운의 혼외자.
그러나 그의 몸에 자하카의 피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 선대 자하카의 관대함이 아니었다면 서자의 자격조차 얻지 못했을 자였다.
단 한 사람에게 각인되어 평생의 반려로 삼는다는 늑대족 중엔 간혹, 선대 자하카처럼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각인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그 아주 사소한 변수가 지금의 비극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왕비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해 버린 그는 제 정부가 저 아닌 다른 이와 몸을 섞고 잉태한 하슬라를 제 서자로 공표할 만큼 자애롭고, 사랑에 몹시 눈먼 자였다.
하슬라의 시선이 윈터의 옆에 있는 갈리나에게 향했다.
“아, 갈리나. 그대도 고생이 많았겠어. 이리 와.”
여전히 조금 경직되어 있던 갈리나는 하슬라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자하카.”
그에게 다가간 갈리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하슬라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윈터는 어깨까지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는 하슬라의 검은 머리칼을 보다 갈리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슬라가 지금 당장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거라는 건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환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주 찰나 윈터와 시선이 마주쳤던 갈리나가 조용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빌어먹을 냄새는 어디에나 진동했다.
윈터는 이끼가 낀 벽면과 거친 직물이 뒤덮인 침대, 옷이랍시고 가져다준 양모 바지와 짐승의 털가죽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내가 입고 있던 걸 계속 입는 게 좋겠군요.”
“그런 코트를 입으면 이곳 사람들에게 조롱이나 당할걸요.”
뒤에서 그런 그를 보고 있던 갈리나가 대꾸했다. 윈터가 진절머리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대체 이곳 사람들은 이 냄새를 어떻게 견디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서도 뱀파이어 냄새가 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윈터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윈터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씻어야겠어요. 오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렸으니까.”
“그러세요.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깨끗한 물인 거죠?”
갈리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깨끗한 물로 준비하라고 해 두죠.”
“…….”
제가 말하지 않았으면 대체 어느 정도로 더러운 목욕물이 들어왔을지 윈터는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갈리나가 잠시 방을 나가 있는 동안, 윈터가 코트와 셔츠를 벗었다. 땀과 추위에 젖은 몸에서 흰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등 뒤에서 헙,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다시 들어온 갈리나가 그의 몸을 보고 놀라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였다. 윈터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갈리나가 놀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당신…, 대체 그리말디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거예요?”
목덜미와 어깨와 팔을 얼룩덜룩하게 뒤덮은 잇자국이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어떤 것은 살짝 불그스름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것은 아예 피부가 괴사한 것처럼 검붉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제 몸을 내려다본 윈터가 무심히 다시 몸을 돌렸다. 굳이 설명하거나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불현듯 낮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분노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서, 손에 움켜쥐고 싶은 그런 목소리가.
‘오늘 이후로 다시 내 눈에 띄면 그 예쁜 머리통을 잘라 박제해 버릴 테니.’
생각할수록 좋은 결말이다. 어릴 적 보았던 늑대 박제처럼, 섀넌의 침실에 걸려 평생 그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편이…, 지금보다 훨씬.
그와 자신 사이에 그보다 더한 해피 엔딩이 있을까.
“치료해 줄까요?”
등 뒤에서 갈리나가 물었다. 부연 거울 앞에 선 윈터가 제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아뇨.”
벽난로에서 이지러지는 불길이 울퉁불퉁한 벽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윈터의 발끝에서 이어진 그림자가 유령처럼 너울졌다.
“이제 와 치료하기엔 늦었어요.”
시라트에서의 첫 밤이,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