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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Drag Hesitation (6/18)

2. Drag Hesitation

“섀넌, 꼭 가야 해요? 피아노는 러셀도 잘 치잖아요.”

얼마 전 맞춘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빼입은 윈터가 그 외모에 걸맞지 않게 섀넌에게 기대어 오며 어리광을 부렸다. 포마드 젤을 발라 공들여 세팅한 그의 머리가 망가질까 봐, 섀넌이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

“러셀은 그저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운 열 살짜리 꼬마애 수준에 불과해. 몇 해째 왕실 연회에 초청되어 명성을 떨치는 실력자와는 비교조차 안 되지.”

러셀이 어쩐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은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으나, 섀넌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쯤은 봐 두는 것도 좋아. 그리고 사실 공연을 보러 가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니까.”

처음으로 사교모임에 윈터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케인타운의 부호들에게 미리 안면을 터놔야 성년식 파티의 파트너 또한 자연스럽게 고를 수 있지 않겠는가.

“…가든 말든 네 맘이지만, 이왕이면 또래들과 교류도 좀 하고, 그러다 마음 잘 맞는 여자애가 있으면 연애도 해 보고 그래야지. 그 좋은 나이에 왜 그렇게 집에 못 붙어 있어서 안달이야.”

러셀이 마차를 준비하려 자리를 비운 사이 윈터가 섀넌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왔다.

“다녀오면 섀넌도 내가 원하는 거 한 가지는 들어줘요.”

더 듣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게 뭔지는 뻔했다. 단둘밖에 없는데 일부러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는 윈터의 수작질에 섀넌이 코웃음 쳤다.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난 분명히 말했어.”

섀넌이 살짝 흘러내린 윈터의 머리칼 한 올을 쓸어 올려주며 눈을 맞췄다.

“파티든, 사교 활동이든,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돼, 윈터. 이제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으니까.”

잠시 그의 얼굴을 말없이 살피던 윈터가 쓴웃음을 흘렸다.

“됐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가기 싫다고 투정부릴 땐 언제고? 갈팡질팡하지 말고 딱 말해. 러셀이 문 앞에 마차를 대는 순간 더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섀넌이 그런 말 할 때 표정이 이상해서요.”

“뭐가.”

“갑자기 요즘 들어 나더러 자꾸 내키는 대로 하라는데, 그때마다 당신 표정이…….”

윈터가 말끝을 흐리자 섀넌의 표정이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건데.”

“꼭 어디 멀리 가 버릴 것만 같아.”

“…….”

“나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겠어요.”

섀넌이 별 시답잖은 소릴 한다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가 윈터에게서 떨어져 거울 앞에 섰다.

“……내가 가긴 어딜 가.”

공연히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섀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윈터가 그 뒤로 와 그의 크라바트를 매만져 주었다.

“그냥 표정이 그렇다고요. 설마 섀넌이 날 두고 어딜 가겠어요.”

일전에 의상실에서 섀넌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뒤에서 안은 자세로 크라바트의 주름을 만져 주던 윈터가 잠시 틈을 두고 물었다.

“안 그래요?”

“…….”

거울을 통해 마주한 시선이 어쩐지 따갑게 느껴졌다. 섀넌이 그의 손을 치우며 거울 앞에서 물러났다.

“허튼소리는.”

자신이 그를 두고 어딜 가겠는가. 오히려 어딜 가는 쪽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될지도 모르는데.

버리긴커녕 윈터가 언젠가 자신을 멸시한다 해도 저는 끝까지 윈터를 놓지 못하고 지켜볼 것이다.

그가 인간 사회에서 평범한 인간 여자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든, 늑대 사회에서 왕 노릇을 하든……, 아이를 낳고 늙어 죽는 것까지, 어쩌면 생각날 때마다 그 후손까지 가끔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너무 감정적이야.’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다. 섀넌은 애써 머릿속을 환기했다. 고작 애새끼 20년 정도 키운 정이라고 해 봐야, 몇 달 좀 허전하게 지내다 보면 금세 지워질 감정일 뿐…….

“윈터.”

“네?”

섀넌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서늘한 달빛이 엉겨 붙은 듯한 머리칼과 그 아래의 햇살 같은 얼굴을 느리게 훑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 네가 선택할 수 있다면,”

“마차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러셀이 열려 있는 문에 대고 노크하며 말했다. 잠시 러셀에게 시선을 준 윈터가 다시 섀넌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계속 들어보려는 표정이었다. 아냐, 섀넌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하고는 윈터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늦기 전에 얼른 가지.”

* * *

마차에 타서도 섀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음울해 보이는 얼굴로 창밖만 보는 그를 말없이 살피던 윈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잊어버렸어.”

“에이, 그렇게 금방?”

“내 나이 돼 봐. 방금 한 말은커녕 숨 쉬는 법도 잊을 때가 있으니까.”

윈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늙지도 않으면서 노인 같은 얘길 하시네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던 섀넌의 뺨으로 따뜻한 손이 닿았다. 그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한 윈터가 시선을 얽어 오며 싱긋 웃었다.

“나 좀 봐요, 섀넌. 아까 그 질문 말이에요.”

내가 하루 종일 너만 쳐다보고 있어야겠냐고 대꾸하려던 섀넌은, 그다음에 곧바로 이어진 윈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에,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

“…나는 무조건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섀넌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제가 무슨 질문을 할 줄 알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정말로 뭘 알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아서,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섀넌이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뭘 물을 줄 알고.”

“뭐든, 그냥 그렇다고요. 언제나 내 선택지는 당신이야. 섀넌이 원하는 거, 섀넌을 좀 더 오래 볼 수 있는 거, 섀넌과 함께할 수 있는 거…….”

“내가 하려던 질문에 그런 선택지는 없었어.”

“잊어버렸다면서요.”

순간 말문이 막힌 섀넌이 잠시 틈을 두고 운을 뗐다.

“…윈터, 네가 너무 고립되어 살아서 모르나 본데, 세상엔 나 말고 다른 선택지가 무수히 많아.”

“재고할 가치도 없는 선택지 따위가 무수히 많아 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재고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좀 더 신중히 들여다본 이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아.”

“…당신은 내가 다른 걸 선택하길 원해요?”

가볍게 던져진 윈터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인 섀넌이 낮게 말했다.

“너와 나는 태생부터가 완전히 다른 종이잖아. ……세상엔 혈연도 있고 지연, 학연 등등 무수히 많은 관계가 있는데, 무조건 내게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야.”

윈터가 섀넌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저와 마주 보게 돌렸다. 보석 같은 청회색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딴 것보다 우리가 더 강해요.”

평소처럼 부드럽고 공손한 말이었으나, 섀넌은 어딘지 모르게 그의 말이 어떤 절실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혈연, 지연 같은 건 명확한 이유가 있는 관계죠. 그 이유가 사라지면 무의미해질 것들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날 아끼고 사랑해 주잖아요.”

“…….”

“그런데 다른 무수한 선택지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섀넌은 그만 마음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수치스럽고 창피해졌다. 당장 윈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을 만큼.

그게 아니야…, 윈터. 그게 아니야.

이유가 없긴 왜 없어. 나야말로……, 맹약이라는 구속력이라도 없었으면 너 따위 내 인생에 절대 두지 않았을 놈인데.

“그러니까 나더러 다른 여자애랑 연애하라는 말 좀 그만하세요.”

윈터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섀넌을 흘겨봤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얼마나 귀여운지 저 자신은 알고 있을까. 섀넌은 가끔 제 아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를 꽉 끌어 안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주제에, 꼭 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무모함과 순수함이 바늘처럼 섀넌의 마음을 찔러 왔다.

윈터가 섀넌의 양 뺨을 감싸며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할 것처럼 다가와서는 제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윈터를 보며, 섀넌은 다시금 발가벗겨진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좋아해요, 섀넌. 내게는 당신이 유일해요.”

섀넌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 그가 가볍게 입술을 부딪었다. 애써 이성을 붙들어 맨 섀넌이 고개를 돌리며 그의 입술을 손으로 탁 쳤다.

“……너랑 대화하다 보면 나까지 멍청해지는 것 같아.”

섀넌의 손에 입이 막힌 윈터가 눈꼬리를 축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예쁜 척해도 안 봐줘. 처음으로 얼굴 비치는 자리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키스만 하는 건데 흐트러질 게 뭐가 있어요. 제 옷을 벗기는 상상이라도 하셨어요?”

“…….”

말문이 막힌 섀넌이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윈터가 몸을 기울여 그의 정면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좁은 마차 안에서 살짝 벗고 키스만 하는 것도 좋겠네요.”

아연한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쏘아보자, 윈터가 싱긋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한 번 해볼까요?”

어느새 제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안고 온몸으로 짓누르듯 다가와 있는 윈터 때문에, 섀넌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리 가, 무거워. 작지도 않은 몸으로 자꾸 들러붙으면 내가 귀여워해 줄 줄 알고?”

“귀여워해 달라고 이러는 거 아닌데…….”

코가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윈터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나한테 발정하라고 이러는 거예요.”

“이런 걸로 쉽게 발정할 몸이면 진즉 다른 사내놈들을 실컷 안았을 거야. 장난 그만해. 다 왔어.”

섀넌이 그를 가볍게 밀어냄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윈터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차 문을 열자마자 튕겨 나오듯 급히 내려서는 섀넌을 의아하게 보던 러셀이 그 뒤로 느릿느릿 따라 내리는 윈터를 바라봤다.

“이야, 멋지십니다. 역시, 타고난 체격이 있으셔서 옷맵시가 사네요.”

러셀의 칭찬에 윈터가 가볍게 웃었다. 평소였으면 타고난 게 체격뿐이겠냐며 윈터의 얼굴부터 머리 색, 손끝, 발끝까지 당연하다는 듯 차분한 자랑을 쏟아냈을 섀넌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러셀이 이상하게 생각하던 그때,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건너편 마차에서 나란히 내렸다.

“그리말디!”

섀넌이 옅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뭐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우리도 초대받아서 온 거거든?”

“너희들이 이튼홀 학부생과 학부모 모임에 무슨 자격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거지?”

“예술인이잖아. 몰랐구나, 섀넌? 나 여기 아트홀 명예 이사장이야.”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엘리자베스가 과장되게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어머나, 윈터 오늘 너무 멋지네? 푸른색 잘 어울린다.”

그녀가 능청스럽게 윈터에게 말을 거는 동안 섀넌이 카일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었다.

“너는 무슨 자격으로?”

“아아, 나는 명예 이사장 애인.”

아무래도 카일의 이번 콘셉트는 직업도 직분도 없이 시시콜콜한 사업만 잔뜩 벌였다가 망하길 반복하는 한량인 모양이었다. 케인타운에선 그가 하는 일도 없이 돈만 탕진하고 애인인 엘리자베스에게 빌붙어 산다는 소문이 이미 몇 년 전부터 퍼져 있었다.

섀넌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카일이 그런 그의 옆에 서며 줄지어 들어오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답장이 좀 늦네.”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낮게 말했다. 갈리나에게 답장을 보낸 지 기간이 꽤 지났는데 아무런 회신이 없는 걸 가리키는 말이었다.

섀넌이 힐끗 그를 보고는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발각되어 뒈졌나 보지. 아니면 내게 직접 찾아올 용기가 없든가.”

“윈터는? 알고 있어?”

“……아직.”

“아직도?”

카일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섀넌을 쳐다봤다. 섀넌이 그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 말할 거야.”

* * *

아트홀의 VIP실은 다른 홀보다 규모가 작았다. 소수의 인원만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꾸며진 별실이었다.

이튼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자리는 따로 떨어져 있었으므로, 섀넌은 무대를 기준으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는 수많은 또래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꼭 제 아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빼어난 미남이었다. 또래들과 섞여 앉으니 의외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무리가 없는 윈터를 보며 섀넌도 한결 안심했다.

“왜 이렇게 질질 끌어, 너답지 않게.”

섀넌의 옆에 앉아 있던 카일이 낮게 물었다.

“타이밍이 좀처럼 없었어.”

섀넌이 변명하듯 대답했다. 카일이 무료한 듯 발끝을 가볍게 구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뭐, 다른 건 모르겠고 윈터는 시라트보다 여기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 인기도 많으시고.”

카일이 어딘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섀넌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윈터와 떨어진 자리에서 몇몇 소녀들이 관극용 쌍안경을 얼굴에 대고 있는 게 보였다.

규모가 작은 별실이라 쌍안경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무대와의 거리가 가까운데, 굳이 그걸 통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뻔했다.

소녀들의 고개가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쌍안경으로 윈터를 본 몇몇이 옆자리의 친구에게 그 쌍안경을 넘겨주며 뭔가를 속삭이길 반복했다.

그것은 학부모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눈으로 봐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얼굴을 굳이 관극용 쌍안경까지 동원해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려 하는 심리가 우스웠다.

이렇게 좁은 홀에서 하나같이 쌍안경을 얼굴에 대고 한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이 약간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카일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곧 케인타운의 보석점에 천청석 품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데.”

연인이나 마음에 둔 상대의 눈 색깔과 비슷한 보석으로 장신구를 만드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귀족들의 문화였다.

착용한 보석을 보고 마음에 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하며 저들끼리 가십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런 식으로 은근히 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천청석 가격이 치솟기 전에 미리 사둬야겠어. 조만간 사교계 파티에 오는 소녀들이 죄 푸른 보석으로 휘감고 다닐 테니.”

먼 과거 섀넌이나 카일이 사교계 유명 인사였을 땐 여인들 사이에서 붉은 색감의 보석이 유행했던 것처럼, 이번 시즌 사교계엔 윈터의 눈 색을 닮은 천청석이 유행할 거란 뜻이었다.

“…그럴 만한 아이지, 윈터는. 모두가 탐낼 만큼 아름다우니까.”

담담하게 대꾸한 섀넌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 막 공연이 시작되려 하는 무대 쪽에 시선을 던졌다.

왕도에서 유행하던 환등이 뒤늦게 이곳 변방에도 들어오며 이제는 모든 무대를 죄다 환등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무료해진 섀넌이 윈터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공연이 이어지는 내내, 섀넌은 피아니스트와 가수의 얼굴 따위 단 한 번도 눈에 담지 않고 오직 윈터만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 위로 환등 빛이 드리워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맑은 달 같은 은백색 머리칼에 형형색색의 빛이 선연하게 들러붙었다. 그는 새벽하늘처럼 서늘한 동시에 정오의 햇살처럼 찬란한, 몹시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사내였다.

섀넌은 아주 오래도록 그의 얼굴에 시선을 걸어두었다.

* * *

섀넌의 걱정과 달리 윈터는 낯선 사람들에게 제 소개를 하는 것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헤프게 웃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예의를 갖춰 대화를 맞춰 주며 사람들의 호기심과 호감을 동시에 샀다. 사교 활동을 전혀 해 본 적 없는 숙맥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교계 인사들에게 처음으로 얼굴을 보인 자리인 만큼 섀넌은 너무 길게 머무르지 않고 적당한 때에 윈터와 함께 아트홀을 벗어났다. 뭐든 처음은 적당한 신비감을 주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섀넌, 오늘 나 잘했어요?”

즐비하게 늘어선 마차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러셀이 몰고 나오는 마차를 보며, 섀넌이 짧게 대꾸했다.

“뭐, 생각보다는. 제법.”

“그럼 이제 당신도 내가 원하는 거 한 가지 들어줄 차례네요.”

윈터의 말에 섀넌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 정도도 못 들어줘요?”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최근 들어 느낀 거지만, 윈터는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제법 뻔뻔한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차피 나 혼자만 좋은 일도 아니잖아요.”

지금처럼 말이다.

“……뭘 원하는지 안 들어도 벌써 알 것 같네. 안 돼.”

단호하게 일축하는 섀넌의 귓가로 별안간 미지근한 입술이 닿았다.

“키스만요.”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낮은 목소리에 섀넌은 약한 소름이 돋았다.

“……안 돼.”

“섹스하자는 것도 아닌데 너무 팍팍하시네요.”

그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윈터를 쳐다봤다. 누가 들었을까 겁나는 말이었으나 윈터는 뻔뻔하게도 웃고 있었다.

“뭐 어때요. 어제도 한 걸 오늘 안 하면 뭐가 달라져요?”

그가 고개를 숙여 섀넌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마치 뺨에 입을 맞추는 듯한 동작이었다.

“입술이 닳기라도 해요?”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보며 섀넌은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최근 하루도 빠짐없이 그와 입술이 맞붙긴 했다. 만월엔 부러 집에 들어가지 않아 다행히도 그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지만…….

섀넌은 왠지 모르게 가볍게 이는 소름에 티 나지 않게 몸서리쳤다. 한 번 선을 넘은 윈터는 제법 당돌하고 유연하게 그 선을 넘나들었다.

러셀이 잠깐 뒤돌아 있는 사이 제 앞에 있는 접시를 가져가는 척하며 기습적으로 짧게 입을 맞추거나, 러셀이 복도의 불을 모조리 끄며 돌아다닐 적에 별안간 계단 난간으로 밀어붙여 입을 맞추다가 그가 자신들을 발견하기 직전에서야 아슬아슬하게 물러나는 식이라 뭐라 반응하기도 애매했다.

그런 그가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심란해서 섀넌은 좀처럼 그의 수작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윈터와의 접촉이 싫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하긴, 정말 싫었다면 벌써 윈터는 손목이 부러지든 혀가 잘리든 둘 중 어느 한 꼴이 나지 않았을까.

“…달라져.”

섀넌이 윈터의 질문에 뒤늦게 대답했다.

“하면 할수록 닳는다고.”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러셀에게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한 섀넌이 윈터를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실 일전의 기억 때문에 서재에서 윈터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침실은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오늘 공연은 어땠어.”

러셀이 책상 위에 가져다 둔 디켄터를 열어 빈 잔에 위스키를 반쯤 채운 섀넌이 그것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재미있었어요.”

“거봐, 그런 경험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야.”

“공연은 잘 모르겠고, 내내 나만 보는 섀넌의 시선이 재미있던데요.”

“…….”

위스키를 삼키는 핑계로 잠시 대답을 보류한 섀넌이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나 정도 살면 더는 새로운 게 없어. 음악이든 그림이든 다 똑같아. 그걸 감상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오히려 더 신선하지.”

사실 그것마저도 이제는 지겨워진 지 오래였지만, 섀넌에게 윈터는 결코 지겨워질 수 없는 존재였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섀넌에게 윈터의 처음을 지켜보는 일은 그 어떤 것이든 무척이나 생경하고 신기한 일인 것이다.

“…내가 널 계속 보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다른 뜻은 없으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마세요, 섀너언…, 가슴 아프단 말이에요.”

윈터가 어리광을 부리듯 말끝을 길게 끌며 그에게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장난스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던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뺨을 밀어냈다.

“……윈터, 진지하게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렇게 장난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내용이니까.”

“전 늘 진지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퍽이나.”

윈터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소파에 가 반듯하게 앉았다. 섀넌의 얘길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은 그를 보던 섀넌이 책상 아래에 있는 서랍 손잡이를 매만지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 어쩌자고 이 얘길 지금껏 미루고 있었을까.

대체 어쩌자고.

소파에 앉은 채 제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는 윈터의 시선 때문에, 제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섀넌은 그저 티 나지 않게 입술 안쪽을 얕게 깨문 채 서랍을 열었다.

겹겹이 닫힌 서랍을 열고 또 열어 자물쇠로 잠긴 마지막 서랍까지 연 섀넌이 그 안에 고이 누워 있는 머리 장식을 집었다. 이렇게나 깊이 숨겨 둔 걸 그가 보는 앞에서 꺼내자니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윈터가 소파로 다가오는 섀넌의 손에 들린 머리 장식을 내려다봤다. 가지런히 정돈된 은백색 머리칼이 휘감긴 머리 장식은 척 보기에도 무척 오래된 물건인 듯했다.

소파에 앉으며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섀넌이 윈터의 앞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머리 장식을 내려다보던 윈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이게 뭐예요?”

“…윈터.”

섀넌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예전에 네가 봤던 늑대족 관련 서적, 아직 가지고 있겠지?”

윈터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년 전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땐 아예 모르는 척 발뺌했었는데, 이제는 어차피 숨겨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 건지 크게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섀넌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듯했다.

“어…, 아마 그해 겨울이 너무 추워서 벽난로의 불쏘시개로 쓴 것 같아요.”

당연히 아직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섀넌이 조금 당황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읽긴 했으니까.”

윈터가 제 관자놀이를 검지 끝으로 톡톡 쳤다.

“그럼 자하카에 관한 것도 알고 있겠네.”

“그들의 수장이죠.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시라트의 왕.”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윈터는 그들과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서적이라 시라트의 현 상황에 대한 내용까지 구구절절 적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윈터가 아는 건 매우 한정적일 것이다.

“그럼 그들의 특징도 알고 있나?”

“…늑대의 형질을 많이 타고나 다른 개체들보다 강하고, ……음, 잠깐, 이거 시험이에요?”

섀넌의 질문에 연달아 대답하던 윈터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마치 면접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시험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서.

“아냐, 더 대답하지 않아도 돼.”

섀넌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 지금부터 네 외숙….”

그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윈터의 외숙부인 다리야 얘기를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그와 제 사이에 있던 맹약에 관한 얘기도 해야 할 텐데.

“…….”

섀넌은 습관처럼 고개를 쳐드는 제 몰염치와 이기심에 새삼 놀라지도 않았다.

……사실 맹약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굳이 얘기할 필요 없지 않을까.

처음엔 맹약 때문에 억지로 떠안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자신 또한 그를 무척 아끼고 있다. 설령 기한이 끝난다 한들 그 마음이 한순간 사라져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시작이 어떻든 현재가 중요하니까.

굳이…, 그런 얘길 해서 여태껏 그를 위해 제가 해 온 모든 헌신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 필요는…….

“……네 고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어.”

섀넌은 곧바로 핵심을 꺼냈다. 윈터의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제게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눈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시선을 애꿎은 머리 장식 위로 떨어뜨린 섀넌이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내 손에서 자라긴 했지만, 네가 만약 동족들과 함께 고향에서 사는 삶을 원한다면,”

“원하지 않아요.”

윈터가 고저 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섀넌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익히 예상했던 답변이라, 섀넌은 당황하는 대신 얼른 말을 이었다.

“내 얘길 들어 봐, 윈터.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시라트의 상황이 조금 복,”

“잠깐만요, 섀넌.”

윈터가 또다시 그의 말을 중지시켰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얘기인 것 같아요.”

“그건 듣고 나서 판단할 일이야.”

윈터가 제 앞에 놓인 머리 장식을 손끝으로 밀어 다시 섀넌의 앞으로 되돌렸다.

“아뇨.”

몸을 일으킨 그가 섀넌에게 다가갔다.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나 봐요, 섀넌.”

일전에 저와 섹스하고 싶으냐고 물었던 그때처럼, 섀넌의 앞에 무릎을 굽힌 윈터가 양쪽 팔걸이를 짚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천천히 섀넌의 양손을 그러쥔 그가 한 손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손바닥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섀넌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윈터는 아랑곳없이 그의 손목과 손바닥에 입술을 지분거리다 제 뺨을 감싸게 했다.

윈터에게 잡힌 손으로 그의 양 뺨을 감싼 채, 섀넌은 저를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한 쌍의 구름 낀 만월을 내려다봤다.

“듣고 싶지 않아요.”

“윈터,”

“이러려고, 성년이 될 때까지로 기한을 정해두셨던 거예요?”

말을 잘린 섀넌이 순간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

“예전에, 제가 어릴 때 그러셨잖아요. 성년이 될 때까진 당신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섀넌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네 동족을 잡아먹는 게 역겹다고 느껴져도 어쩔 수 없어. 너는 성년이 될 때까진 계속 내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해.’

‘나는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절대 널 버리지 않아.’

…아.

있었군. 그런 말을 한 적이.

참 많이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제 말의 어느 구절도 그냥 흘려듣는 법이 없었다.

당시엔 성년이라는 단어가 아이에게 와 닿지 않을 말이었겠지만,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성년과 동떨어진 꼬마가 아니었다.

아찔한 기분에 눈을 내리감은 섀넌이 얼른 머릿속을 정리했다. 기한을 ‘성년’이라고 에둘러 말한 게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인간들의 성년식. 맹약. 기한이 정해져 있는 관계…….

섀넌은 그 모든 말을 그저 한데 모아 머릿속 한구석에 깊이 숨겨 두고는, 이 대화를 쉽게 넘어갈 만한 말로 차분히 둘러댔다.

“……보통 성년이 되면 다들 독립을 하잖아.”

그 말을 들은 윈터가 조금 안도한 듯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요즘 섀넌 표정이 그렇게 이상했던 거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섀넌과 시선을 맞췄다. 완전히 안도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낱낱이 탐색하는 듯한 그 묘한 시선에, 섀넌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섀넌.”

윈터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독립을 원치 않으면요…?”

“…….”

“설마…, 날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건 아니죠?”

섀넌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천천히 얽으며, 윈터가 낮게 물었다.

“아닐 거야. 그렇죠? 악마도 제 자식은 애틋한 법인데, 당신이 아무리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사는 살인귀여도, 날 두고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죠, 섀넌?”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가에서 나오는 말이 칼날 같았다. 섀넌은 처음으로 제 아이에게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강압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가 애써 차분히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지?”

“그럼 내가 먼저 당신을 버리면 그만이에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윈터의 대답이 따라붙었다. 섀넌이 짐짓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당황을 드러내지 않는 가장 좋은 가면은 웃음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날 어떻게 버릴 건데. 가출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럼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추격에는 영 소질 없으시잖아요.”

그러나 이어진 윈터의 말에 섀넌은 더 이상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윈터는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섀넌은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맹약의 기한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거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제 울타리를 벗어난 그의 안전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맹약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그는 반드시 얌전히 제 손안에 있어야만 한다.

“……날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네.”

섀넌이 애써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분히 대꾸했다.

“협박이 아니라 애원이에요.”

윈터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섀넌에게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둘 사이를 흐르는 미묘한 긴장은 아주 찰나 팽팽하게 당겨졌다가도 그의 웃음 하나에 확 느슨해지길 반복했다.

“날 버리지 말아요, 섀넌.”

“……네가 나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결코 네게 절대적인 애정을 퍼부어 주는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나보다 그들이 더 너를,”

“그래도 상관없어요. 행여 당신이 날 잡아먹는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이니까…, 그냥 곁에만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눈을 내리깐 윈터가 그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다. 손끝을 간질이는 속눈썹의 감촉과 뜨거운 숨결에 섀넌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제발, ……섀넌.”

“…….”

“버리지 않을 거죠?”

섀넌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윈터가 그의 손목과 손바닥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날 버리지만 않으면, 나도 당신을 절대 안 떠나요.”

섀넌의 손이 온통 뜨거운 체온 안에 가둬졌다. 어쩐지 그의 애원이 자신을 까마득한 설원 아래로 등 떠밀고 있는 것 같다고, 섀넌은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매번 아이에게 져주기 시작한 것이…….

한참의 침묵 끝에 결국 체념한 섀넌이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래, 네가 원하지 않는 얘길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섀넌은 앞으로도 그에게 절대 맹약이나 시라트에 관한 얘기를 꺼낼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맹세해 줘요…, 버리지 않는다고.”

응…? 윈터가 섀넌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으며 어리광을 부리듯 졸랐다. 고개를 숙인 섀넌이 그와 코끝을 맞댄 채, 서로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맹세해.”

윈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두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바스러졌다. 윈터의 얼굴에 특유의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키스해야 할 타이밍 맞죠?”

그의 말에 응해 줄 것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섀넌이 윈터의 입가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밀어냈다.

“아니.”

* * *

공연 관람 이후로, 그리말디 저택엔 온갖 초대장이 쇄도했다. 윈터가 이전에 이미 거절한 바 있는 모임에서도 그가 뒤늦게 사교계로 들어오려나 싶어 다시 바지런히 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들이 많은 모임은 수락하지 마. 헤퍼 보이니까. 남자들 모임 위주에 혼성 모임을 적절히 섞고, 자리를 너무 오래 지키진 말고.”

찌는 듯한 여름, 열어놓은 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초대장을 분류하며 말을 늘어놓던 섀넌이 잠시 행동을 멈췄다.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시력도 좋으면서 안경은 뭐하러 끼시는 거예요?”

섀넌의 콧잔등에 걸려 있던 안경을 조심스럽게 빼낸 윈터가 책상을 짚으며 그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섀넌이 고개를 돌려 공연히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최소한 내가 40대는 되어 있어야 하는데 얼굴에 변화가 없으니까. 앞으로는 더 자주 낄 생각이야.”

“이런 걸로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섀넌의 안경을 접어 한쪽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한 손으로 부드럽게 섀넌의 턱을 잡은 윈터가 저를 보게 했다.

“몇 년 지나면 나보다 더 어려 보일 것 같은데요.”

섀넌이 찰나 쓴웃음을 지었다. 몇 년 후에도 윈터와 자신이 계속 이 관계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가 애써 가벼운 대꾸로 제 복잡한 속내를 감췄다.

“……그럼 그때는 네가 내 후견인 하면 되겠네.”

“와, 생각만 해도 황홀해.”

과장된 윈터의 반응에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윈터가 그런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웃을 일이 아닌데…. 나 되게 질 나쁜 후견인이 될 예정이거든요.”

“어떻게 나빠질 예정인지 한 번 들어 볼까?”

결국 초대장을 내려놓은 섀넌이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윈터가 책상을 돌아 섀넌에게 다가갔다. 의자를 돌려 자신을 보게 한 윈터가 그에게 상체를 숙였다.

여름이 되면 윈터의 체취가 더 짙어진다. 섀넌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 냄새와 옅은 땀 냄새, 그 특유의 체온에서 풍기는 수풀 냄새가 뒤섞인 향이었다.

열렬하고 야성적인 그 냄새는 서늘하고 품위 있어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외모와 대비되어 묘하게 고혹적이었다.

“일단, 침실은 하나만 둬야겠죠.”

코끝에 스치는 그의 체취를 티 나지 않게 들이켜며, 섀넌이 더 말해 보라는 듯 담담하게 그를 쳐다봤다. 살짝 맞닿은 코끝을 비스듬히 엇갈려 고개를 기울인 윈터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리고 매일 밤 내 좆을 빨게 할 거예요.”

“싫다면?”

“지원을 끊어야죠.”

푸스스 웃어 버린 섀넌이 윈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네가 내 후견인이라는 건 인간들 앞에나 내세울 명분일 뿐이고, 실질적인 돈은 나한테서 나올 텐데?”

“그럼 반대로 해야겠네요. 밤마다 열심히 빨아드릴게요.”

“수작 부리지 마.”

그가 윈터를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윈터가 짓궂게 웃으며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한 번쯤은 넘어가 주는 관용을 베풀 줄도 알아야죠, 섀넌.”

창으로 들어온 햇볕이 비스듬히 윈터의 몸을 가로질렀다. 섀넌은 어쩐지 시큰해지는 눈꺼풀을 잠시 닫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떠 윈터를 올려다보는 그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미 숱하게 많은 관용을 베풀었는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시선을 내린 그가 책상 한쪽에 모아 둔 초대장을 가지런히 정돈해 윈터에게 넘겼다.

“크리켓, 독서회, 성서연구회, 그리고 남녀 함께 모이는 환등극 관람회. 이 정도만 참석하면 딱 좋을 것 같아.”

윈터가 아쉬운 얼굴로 초대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빼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성서연구는 뺄게요. 초대장 겉면만 봐도 지루하네요.”

“그러든지.”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요 몇 달 윈터는 군말 없이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고 섀넌이 권하는 모임에도 종종 나갔다. 두 사람 모두 일전에 서재에서 나눴던 대화는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윈터는 늘 그랬듯 끊임없이 섀넌에게 노골적인 애정을 표현했고, 섀넌은 늘 그랬듯 그것을 적당히 받아 주다 선을 긋기를 반복했다.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그 미묘한 관계를 섀넌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놔둬야만 했다.

윈터가 서재를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섀넌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깨끗한 종이를 꺼냈다.

「친애하는 G.

일전의 편지에 회신이 오지 않아 의아한 마음이 들어 또 한 번 펜을 듭니다. 아니, 사실 그보다는 당신에게 전해야 할 중요한 말이 있어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펜을 들었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대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아이는 시라트로의 귀환을 원하지 않

거침없이 종이 위를 내달리던 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쓰다만 글자 획의 끝부분이 점차 검게 번져 나갔다. 잉크가 종이에 동그랗게 스며들고 있는데도, 섀넌은 펜을 떼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저희는 자하카를 잊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태운 탄내가 마치 실제처럼 코끝에 스몄다. 얼굴도 성별도 모르는 이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분이 자하카의 마지막 핏줄이자, 시라트의 영좌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부정한 적 없으니까요.」

주홍빛 불길에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편지의 내용이 섀넌의 뇌리를 붙잡았다. 그가 방금 쓰다만 편지를 내려다봤다.

내 아이가 시라트로 귀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제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졌을 그들의 수많은 노력들에 비해 이 말 한마디가 몹시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졌다.

이 말 한마디로 충분할까. 그저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인고하며 기다려온 그들의 염원을 이토록 쉬이 꺼트려도 되는가.

시라트의 내부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섀넌은 인간 사회에서 혁명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지 잘 알았다.

시라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제가 윈터를 키우는 동안 그들은 검은 늑대들의 권세 아래에서 은밀히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 왔을 것이다.

그리말디가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잘 보호해 줄 거라 여기면서, 맹약을 이행하고 나면 틀림없이 자신들의 귀한 자하카를 돌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내가 미친 거야.’

눈을 지그시 감았던 섀넌이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이딴 편지로 대체 뭘 하겠다고…….

윈터와 제가 계속 함께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 편지를 보냈다간 상대방은 그리말디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불어 뱀파이어들은 자신을 천박한 쓰레기 취급하며 늑대족과 한데 묶어 멸시할 터다.

섀넌은 결국 쓰려던 편지를 구겼다. 불붙은 종이가 오래도록 쓰지 않은 벽난로의 새까만 장작 위로 툭 떨어졌다.

쓰다 만 문장이 완전히 연소 되는 것을 지켜보며, 섀넌은 멋대로 달아나려는 이성을 애써 붙잡았다.

* * *

더운 계절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왔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 계절의 옷차림을 섀넌은 가장 좋아했고, 더불어 제 취향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윈터를 데리고 모임을 나가는 것에 은근한 재미가 붙었다.

금색 자수가 화려하게 놓인 웨이스트코트에 어두운 색감의 심플한 프록코트를 걸친 윈터는 누가 봐도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싱그러운 젊음이 절정에 이른 청년이었다.

또래 소녀들은 그와 첫 왈츠 파트너가 되길 기대했고, 그게 안 되면 두 번째, 세 번째로라도 그의 청을 받고 싶어 일부러 춤을 추지 않고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첫 왈츠가 끝난 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홀 안에서 사람들은 일정한 대열에 맞춰 카드리유(quadrille)를 추고 있었다.

네다섯 명씩 묶여 크게 원을 돌다가도 다시 흩어져 일정 간격으로 파트너를 바꿔 가며 춤을 추는 사람들은 카드리유를 핑계로 제가 마음에 둔 상대나 다음 파트너를 탐색했다.

또 한 번 파트너를 보낸 섀넌이 제 앞으로 빙그르르 돌아온 볼드윈 부인을 보고 미소 지었다.

“부인.”

그가 가볍게 볼드윈 부인의 손을 잡고 허리를 감았다.

“요즘은 안경을 많이 쓰시네요.”

“나이가 드니 시력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섀넌은 유독 키가 큰 편에 속했고 볼드윈 부인은 여자 중에서도 유독 키가 작은 편에 속했다.

하여 볼드윈 부인이 그의 얼굴을 보려면 꽤나 고개를 많이 꺾어야 했으므로, 체면 때문에 섀넌의 턱 언저리에만 겨우 시선을 걸어 둔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일전에 저희 저택에서 열린 연주회에는 왜 참석하지 않으셨는지요. 오시길 고대했었는데.”

“음, 바빠서요.”

두 손을 맞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맞붙은 두 사람이 대열에 맞춰 한 바퀴 돌았다.

그 틈을 타 용기 내어 고개를 든 볼드윈 부인은 섀넌의 시선이 아예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경의 피후견인께선 눈에 띄게 수려하여 늘 젊은 영애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군요.”

남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거뜬히 차이 나는 큰 키 때문에, 윈터는 군중 속에서도 늘 홀로 튀었다.

그저 키만 컸다면 한 번 눈이 가고 말았겠지만, 으레 그다음은 그의 독특한 은백색 머리칼에, 청회색 눈과 수려한 이목구비에 두 번 세 번 고개가 돌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볼드윈 부인의 말에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린 섀넌이 가볍게 웃었다.

“부인의 아드님도 만만찮지요.”

“…그런가요.”

춤을 춘 이래로 처음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워진 볼드윈 부인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도 계속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녀가 애써 화젯거리를 꺼냈다.

“얼마 전 투자한 샤말란 경의 주얼리 사업 수익이 몹시 좋더군요.”

“그렇습니까.”

섀넌이 그녀를 한 바퀴 핑그르르 돌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듣고 싶군요.”

만약 볼드윈 부인이 그의 표정을 봤다면, 그가 자신의 투자 이야기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섀넌의 턱 언저리만 보고 있는 그녀는 그저 섀넌이 묻는 말에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좀 충동적으로 투자한 거라 걱정이 많았는데, 샤말란 경께서 시류를 잘 예측하시더라고요. 요즘 케인타운에선 이상하게도 불순물이 많이 섞여 탁한 회색기가 도는 하급 천청석이 인기라, 타지에서 헐값에 구할 수 있는 천청석이 이곳에선….”

샤말란은 카일이 이곳에서 쓰고 있는 성이었다. 볼드윈 부인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푸른 색감의 보석들이 유행할 걸 예측한 그의 혜안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중이었다.

따분한 얼굴을 한 채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섀넌의 표정이 어느 순간 아주 미세하게 일변했다.

“…지만, 전 아무래도 붉은색이 끌리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루비로 장식을 통일해 봤는데, 경께서 보기엔 어떠신가요?”

“음…….”

섀넌이 나직이 침음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아마도 틀림없이 제게 떨어지고 있을 시선을 의식한 볼드윈 부인이 제 목걸이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턱을 조금 들며 어깨를 폈다.

“부인.”

갑자기 귓가로 나직하게 스며드는 음성에 가슴이 철렁한 볼드윈 부인이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단지 춤 동작 때문에 가까워진 것이겠지만, 그가 저를 응시하며 속삭여 오니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플한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꼭 사람을 녹일 것만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이 유독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오해는 하지 말고 들으세요.”

오해라니…, 뭔가 자신이 오해할 만큼 이상한 말이라도 하겠다는 뜻일까. 긴장한 볼드윈 부인이 제게 속삭이는 말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혹시…,”

귓바퀴에 고였던 낮은 음성이 멀어졌다. 춤 대열에 맞춰 한 발짝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진 섀넌이 작게 물었다.

“이 저택에서 개를 키우나요?”

“…네?”

볼드윈 부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개……?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뭐라 되묻기도 전에, 춤의 대열이 크게 이동하며 아쉽게도 파트너가 바뀌어 버렸다.

아, 파트너가 바뀌기 전에 다음 왈츠를 누구와 출 건지 물어보려 했었는데…, 다 틀려먹었다. 볼드윈 부인이 소리 없이 혀를 차며 제 새로운 파트너와 손을 맞잡았다.

늦게 들어와 카드리유에 끼지 못하고 벽면에 붙어 서 있는 누군가를 자연스레 제 자리에 대신 들여보낸 섀넌이 주변을 둘러봤다.

윈터는 어느새 2층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입꼬리만 희미하게 올려 보인 섀넌이 얼른 몸을 틀어 홀을 빠져나갔다.

술잔이 담긴 트레이를 받친 서버들 몇몇을 스치고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섀넌의 등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말디.”

잠시 걸음을 멈춘 섀넌이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를 의식한 채, 인적 없는 후원까지 나온 섀넌이 그제야 멈춰 섰다.

그가 걸치고 있던 은테 안경을 천천히 벗어 땅에 떨궜다.

“인형 놀이가 퍽 즐거우셨나요?”

몸을 돌린 섀넌이 제 앞에 있는 낯선 여인을 바라봤다.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검붉은 머리의 여성은 단정한 드레스를 빼입었으나 이 지역의 부호들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섀넌은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눈치챘다.

“인형 놀이라니, 그쪽한텐 이 파티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지?”

“아뇨. 당신과 그분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자하카의 조력자이자 제게 편지를 보낸 장본인, 갈리나.

“좋은 걸 먹이고 좋은 걸 입혀,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지성체로 만들어 놓은 것을 인형 놀이에 비유하는 그 무식함은, 종족 특성인가?”

섀넌이 느리게 말을 내뱉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천천히 모로 기우는 고개를 따라 함께 기울어진 한 쌍의 붉은 눈이 명백한 경계를 품고 있었다.

“지성체라…, 그렇다기엔 아직 그분께 저에 관한 얘길 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그리말디.”

차분히 말을 건넨 갈리나가 섀넌을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당신이 말하는 지성체라는 게, 제 동족과 고향의 일은 등한시한 채 오직 멋들어진 수트를 차려입고 이 허례허식 가득한 파티를 즐기며, 인간 흉내를 내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을 뜻하는 건가요?”

“단면적인 것만 보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래요. 서로 날 세우는 건 여기까지 하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본격적인 대화를 준비하듯,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어깨에 힘을 빼고 두 손을 깍지 낀 갈리나가 침착한 얼굴로 섀넌을 마주했다.

“아이가 시라트로 귀환하길 원치 않아.”

그러나 일말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섀넌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너희들이 기다린 자하카는 그저 혈통만 공유한 껍데기일 뿐, 그 안에 깃든 건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거야.”

“…그 안에 깃든 게 뭔데요?”

“제 동족의 일에는 관심 없는, 그저 내….”

내 곁에서, 라고 말을 뱉으려던 섀넌이 잠시 틈을 두고 말을 고쳤다.

“…인간들 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늑대족이지.”

“그를 채워 준 건 당신이잖아요.”

섀넌이 잠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그래, 나야. 너희들이 그저 옛 영예의 허상만 좇으며 자하카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아이를 직접 키운 건 나라고.”

섀넌이 한 마디씩 말을 할 때마다 갈리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당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이었다.

“그,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설마, 소유권이라도 주장하시겠다는 건가요? 당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

“늑대족 부모 밑에서 자라도 발현 때문에 죽는 애새끼들이 많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갈리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빌어먹을 발현도 군말 없이 온몸으로 품어 주고 완벽하게 케어해 준 게 나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를 저만큼 사람 노릇 하게 키운 것도 나고! 그런 걸 생각했다면 내 저택에 달랑 애새끼 하나만 던져 두고 나 몰라라 하진 말았어야지!”

“…그땐, 그건 어쩔 수 없는,”

“그래, 그래…, 갈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이해해. 그러니까 이번엔 당신네들도 그 빌어먹을 이해심을 발휘해 봐.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어느새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진 그들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시선을 부딪쳤다.

갈리나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요, 그리말디.”

절망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섀넌이 초조하게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라트의 늑대들은 분열 직전이에요. 검은 늑대를 지지하는 세력과 자하카를 지지하는 세력이 물밑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죠.”

붉은 눈을 응시하는 갈리나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명료했다.

“이대로 가면 시라트는 붕괴하고 말 거예요. 그럼 뿔뿔이 흩어진 늑대족들이 인간 사회로 흡수되겠죠. 우리는 당신들처럼 은밀한 성향이 아니라, 어쩌면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어요. 그 일로 자칫 당신들의 존재까지 세상에 알려지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살고 있는 늑대족이 아예 없는 것처럼 말하네?”

“신체적으로 열세해 추방된 늑대들은 논외로 쳐주시죠. 그들처럼 절제력을 기르기란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그리말디.”

모두, 하나부터 열까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합당한 말이었다.

“누구에게나 타고난 숙명이 있는 거잖아요. 그걸 거부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당신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래 살았으니 잘 알겠죠. …우린 반드시 자하카가 필요해요.”

갈리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몇 번이고 연습한 말을 내뱉는 것처럼 차분했다.

“그리말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분께서 시라트를 원치 않는 것에 대해, 당신을 탓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무사히 그분을 보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

이제는 사탕발림으로 저를 설득시킬 생각인가. 그녀를 보던 섀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당신이 그분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압니다.”

그의 눈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살기를 보지 못한 갈리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그분을 아낀다면, 그분께서 시라트의 영좌에 무사히 앉을 수 있게 당신의 힘을 보태어 주세요. 그게 그분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니까.”

“아아….”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섀넌의 표정이 결국 돌변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어이없다는 듯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그랬던 거군.”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읊조렸다.

“깜찍하기도 하지. 빌어먹을 다리야…….”

처음부터 자신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쩐지, 그 증표를 들고 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애새끼 하나 잘 키워 달라는 것뿐이더라니…, 퍽 이상하긴 했다.

뱀파이어가 시라트 내부에 개입해 제 손으로 직접 늑대들의 왕을 추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 자신이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할지, 저들도 분명 모르지 않을 텐데.

윈터의 안전을 담보로 저를 교묘히 이용하려는 갈리나의 뻔뻔한 수작질을 듣자니, 섀넌은 치솟는 분노로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저들에게 자신은 이용가치 있는 체스 말이었던 것이다. 쉽게 소모되지 않는, 효율 좋은 병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결국, 이 관계를 놓지 못하면 꼴사나워지는 건 자신이 될 뿐이다.

“……우린 태생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지.”

섀넌이 화를 삭이려는 듯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낮게 읊조렸다.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여전히 자신은 늑대를 혐오한다.

제가 키운 애새끼가 예쁘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사실인데, 잊고 지낸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이들이 이토록 천박하고 비열하다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본능처럼 각인된 그 감정은 쉬이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야. 고작 20년 키운 애새끼 하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고저 없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분노로 꽉 다물린 잇새로 흘러나왔다.

“윈터를 데려가려면 데려가. 그 아이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한은 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해 줄 거지만, 내 울타리를 떠나는 순간 그걸로 끝인 거야.”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위로 걸쳐진 숄을 두 손으로 느리게 여며 주며, 갈리나의 눈을 응시한 섀넌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내 아이의 안전을 담보로 나를 아주 알뜰살뜰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나 본데,”

갈리나는 목 언저리부터 오싹하게 돋아난 소름에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금방이라도 제 살갗을 꿰뚫을 듯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언뜻 비어져 나왔다.

진득한 피비린내처럼 음산하고도 유려한 목소리가 차가운 숨결과 함께 와 닿았다.

“내가 너희들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 기대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아.”

“…….”

“내 심기 건드리고 싶지 않으면 맹약 끝날 때까지 조용히 꼬리 말고 납작 엎드려. 그럼 너희들의 자하카는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곱게 보내드릴 테니까…….”

그때 그들의 주변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둘 사이에 흐르는 첨예한 긴장과는 사뭇 다르게 가벼운 말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섀넌이 열 오른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갈리나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거닐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럼, 이만.”

섀넌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여전히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여인들에게 예를 갖추듯 허리를 살짝 굽히며 갈리나의 손을 잡아 그 끝에 입 맞추는 시늉을 한 섀넌이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 * *

“섀넌,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석 달 뒤에 우리가 갈 도시에서는 네가 샤말란 가문의 이름을 쓰는 게 어떨까?”

홀 안으로 돌아오는 섀넌을 발견한 카일이 그에게 따라붙으며 노래 부르듯 즐거운 투로 말을 붙였다.

“마침 딱 두 사람 관계에 넣기 좋은 이름이 두 개가 나왔는데,”

“한 사람이야.”

섀넌이 지나가던 서버의 트레이에서 위스키 한 잔을 집어 들며 대꾸했다.

“…음?”

“나 혼자니까 한 사람이라고.”

“윈터는?”

섀넌이 위스키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을 느리게 여러 번에 걸쳐 삼킨 그가 약간의 틈을 두고 대답했다.

“윈터는 안 가.”

제게 아는 체를 해 오는 누군가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는 섀넌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카일이 되물었다.

“왜?”

“왜긴 왜야. 빌어먹을 늑대 새끼가 인간 사회에 발붙일 데가 어디 있다고.”

멀리서 저를 발견한 볼드윈 부인이 다가오는 것을 본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섀넌의 뒤로 따라붙은 카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시라트로 돌려보낼 거야?”

“그래.”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올라가며, 섀넌이 말을 이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어리석었어. 빌어먹을 감정에 휩쓸려서는…….”

섀넌의 팔을 붙잡은 카일이 바로 앞에 있는 방문을 휙 열어 그를 끌고 들어갔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에게 끌려 들어간 섀넌이 삐딱하게 선 채 문을 닫는 카일을 바라봤다.

“샤말란과 그리말디가 침실에서 붙어먹는다는 소문이라도 내려고 작정한 거야?”

“아니, 섀넌…, 별안간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온 거야. 도대체 따라잡을 수가 있어야지.”

사실 최근 몇 달간 섀넌의 지랄맞은 성질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종잡을 수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는 기분과 온갖 변덕은, 그의 성정을 매우 잘 아는 카일로서도 조금 낯설 정도였다.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손을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보낸다고 했다가, 안 보낸다고 했다가, 또 보낸다고 했다가, 같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거라더니, 이번엔 또 갑자기 왜 이러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변덕 부리는 게 하루 이틀인가?”

“네 성격이 좀 지랄맞은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최근에는 좀, ……근데 너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많아? 갱년기야?”

테이블 위에 놓인 디켄터를 열어 위스키를 따른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제 눈꺼풀을 한 손으로 덮어 누르며 대꾸했다.

“그래, 갱년기인가 보지. 신경 꺼.”

“……조력자랑 접촉하고 나서 생각이 바뀐 거야?”

술을 들이켜던 섀넌이 힐끗 카일을 노려보고는 마저 술을 삼켰다. 이 드넓은 저택에 온통 개 냄새가 창천하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카일이나 엘리자베스가 눈치 못 챘을 리 없었다.

“…애초부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야. 지들끼리 시라트에서 물어뜯고 자멸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석 달 뒤면 끝인데.”

카일이 그런 섀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꼬리를 비죽 내리며 흠…, 하고 침음한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내내 윈터의 향방을 두고 고민하던 섀넌은 분명 조력자와 대화하는 와중에 어떤 계기가 생겼을 것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설득을 당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섀넌의 심기를 확 뒤집어 놨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섀넌.”

섀넌이 앉는 의자 맞은편으로 다른 의자를 끌어온 카일이 그와 마주 앉아 잠시 그를 측은하게 보다 물었다.

“아이 뺏기는 부모처럼 그년 앞에서 울었어? 오, 제발 내 아이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하면서.”

“……거의 그럴 뻔했어.”

위스키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섀넌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차갑게 대꾸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자가 가증스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대충 비슷한 꼴을 보였을 거야.”

“다행이네."

팔짱을 낀 카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윈터한텐 어떻게 말할 건데?”

“…….”

입 안을 가득 맴도는 위스키 향을 음미하며, 섀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날 버리지만 않으면, 나도 당신을 절대 안 떠나요.’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 섀넌은 아주 묘한 위압감을 느꼈었다. 분명 상대는 애원을 하고 있는데,

‘맹세해 줘요…, 버리지 않는다고.’

마치 자신이 협박을 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금고 있던 위스키를 천천히 삼킨 섀넌이 입을 열었다.

“……굳이 미리 말해서 들쑤실 필요는 없겠지.”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말은 점점 확신을 갖고 단호하게 변해갔다.

“말 안 할 거야. 그러다 맹약이 끝나기도 전에 사고라도 치면 번거로워져.”

잔에 남은 위스키를 모두 털어 마신 섀넌이 빈 잔을 탁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야겠어. 갈리나가 내 기분을 아주 완벽히 망쳐 놓았거든.”

카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윈터는 우리가 잘 데리고 있다가 곱게 집으로 모셔다 드릴게.”

방을 나가려던 섀넌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멈춰 서서 그런 카일을 의심스럽게 흘겼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익히 아는 카일이 황당하다는 듯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왜 이래, 정말? 기한이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가 그 전에 걜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잠시 그를 노려보던 섀넌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 * *

러셀에게 마차를 가져오게 한 섀넌이 한창 파티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시끄러운 저택을 바라봤다.

윈터를 홀로 남겨 두고 떠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있으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요청하신 마차가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저 멀리 보이는 철문 너머로 러셀이 몰고 온 마차가 보였다. 성큼성큼 잔디를 가로질러 밖으로 완전히 나온 섀넌이 마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출발하라는 말도 잊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섀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윈터를 제멋대로 빼돌려 함께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아이는 시라트에, 자신은 이곳에, 애초부터 길이 정해져 있던 일을 억지로 틀어 봤자, 그 아이의 운명에 자신만 불청객이 될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한 번쯤은 꿈꿔 봐도 되는 일 아닌가.

자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되지 않나.

‘이렇게까지 심란해질 줄이야.’

아이를 보낼 때가 다가오니 생각보다 마음의 타격이 컸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섀넌은 제 감정 상태에 스스로 당혹했다.

“……러셀, 이만 출발,”

마차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을 뒤늦게 인지한 섀넌이 마부석 창을 향해 출발을 명하려고 할 때, 갑자기 마차 문이 휙 열렸다.

“…조금 더 어울리지 않고 왜.”

“말도 없이 먼저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제 옆으로 훌쩍 올라타는 윈터를 피해 자리를 옆으로 옮긴 섀넌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홀에 안 보이기에, 어디서 누구와 즐겁게 뒹굴고 있기라도 하는 줄 알았지.”

“엘리자베스와 있었어요. 갑자기 춤을 추자고 하더니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고, 오늘따라 좀 이상하던데요.”

파티에 갈리나가 나타난 걸 눈치채고, 일부러 윈터와 만나지 못하게 데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네.”

심란한 속내를 가린 섀넌이 농담으로 받아치며 러셀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니까 왜 날 혼자 둬요?”

윈터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섀넌과 눈을 맞췄다. 섀넌이 그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갤 돌리자, 윈터가 그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당신은 누구와 있었어요?”

“음…, 여자.”

“누구?”

“누군지 말하면 네가 알아? 아직 사람들 이름도 다 못 외운 주제에.”

윈터의 손끝이 섀넌의 뺨과 귓불, 그 아래 목덜미를 느리게 스쳤다.

“이름은 몰라도 냄새는 구분하죠.”

섀넌이 얼굴을 굳혔다.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느낄 정도로 저택에 진동하던 냄새를, 자신들보다 더 후각이 예민한 윈터가 맡지 못했을까.

“당신한테서 개 냄새가 나는데요.”

“…그래, 맞아. 암컷이었거든.”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섀넌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듯, 청회색 눈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제 얼굴을 구석구석 핥는 듯한 시선에, 어쩐지 섀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잠시 그를 보던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수컷이랑 같이 있었어도 화가 날 판에, 암컷이라니 너무하네요.”

“이제는 하다 하다 개한테도 질투를 하는 거야?”

“에이, 당연하죠.”

윈터가 섀넌에게서 손을 떼며 정면을 바라봤다.

“……동족인데.”

가볍게 흘러나온 말에 섀넌이 조용히 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꼭 제가 누굴 만났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농담이었다. 구름 낀 밤하늘에 뜬 달처럼 서늘히 빛나는 청회색 눈은 오늘따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한 꺼풀 덮여 있었다.

끊긴 대화 사이로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섀넌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더는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칠 수 없었고, 윈터는 그저 가만히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예정된 긴장감이었다. 그간 자신들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친밀했던 것뿐, 자신과 그는 서로 너무도 다른 존재가 아닌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팽팽하게 당겨진 적막에 아슬아슬하게 휩쓸리던 섀넌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보여 줘, 윈터.”

갑작스럽게 깨진 침묵에 윈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때 말고는 통 본 적이 없어서.”

“……뭘요?”

윈터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다른 모습.”

섀넌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윈터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모습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싫어요.”

“어릴 땐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지금은 그보다 더 커졌겠지?”

섀넌이 제 허벅지 높이쯤에 손을 가늠해보며 물었다. 윈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보고 싶어서 그래.”

“갑자기 왜요…?”

“……그냥. 네가 하도 안 보여 주니까.”

“개들은 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요.”

“그런 하찮은 개들과 감히 누굴 비교해.”

윈터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싫어요.”

“보여 줘…, 한 번만.”

섀넌이 그의 허벅지에 지그시 손을 올렸다. 그가 윈터의 귓바퀴와 귓불, 목덜미를 차례로 매만졌다.

“네가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 물론 지금 모습도 아름답지만, 다른 모습으로는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하잖아.”

낭패감이 깃든 얼굴로 한숨을 내쉰 윈터가 습관처럼 섀넌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제 속내가 다 쓰여 있기라도 한 걸까. 아이는 언젠가부터 툭하면 이렇게 제 눈을 들여다봤다.

섀넌은 어쩐지 그의 시선에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이런 부탁을 해 놓고 시선을 피할 수는 없어 그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시선을 맞대고 있던 그가 결국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번 한 번만이에요. 정말 다신 안 보여 줄 거니까.”

섀넌이 입가를 희미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윈터의 시선이 섀넌의 허벅지 즈음으로 힐끗 내려갔다.

“그리고, …그보다는 훨씬 많이 컸어요.”

조금 전 섀넌이 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보며 가리켰던 위치였다.

“섀넌이 타고 다녀도 될걸요?”

“정말?”

섀넌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윈터도 결국 쓴웃음을 흘렸다.

“…오늘이 만월이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섀넌.”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이내 정색하며 그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그 말, 제법 무서웠어.”

* * *

“……진짜 해요?”

“해 봐, 얼른.”

저택 후정의 벤치에 앉은 섀넌이 팔짱을 낀 채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전 진짜 내키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 주세요, 섀넌.”

그가 잔디 위에 제 옷을 휙 휙 벗어 던지며 말했다. 섀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스트코트와 셔츠까지 완전히 탈의한 뒤, 바지 버클을 푼 윈터가 잠시 망설였다.

섀넌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러셀도 없고, 아무도 없잖아. 나밖엔 못 봐. 이제는 자유자재로 발현도 통제할 수 있으면서, 그렇게 되기까지 널 키우며 고생해 온 나한테 그 정도도 못 보여 줘?”

“아….”

윈터가 작게 탄식하며 결국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거역하겠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적인 돌풍이 휘돌았다.

후정을 휩쓰는 은빛 바람에 찰나 눈을 감았던 섀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윈터가 벗어 뒀던 옷들이 바람에 나뒹굴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섀넌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했다. 정원의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환한 달빛을 받은 늑대의 은백색 털이 눈부시게 빛났다.

섀넌은 이토록 완전한 늑대의 모습을 한 윈터를 못 본 지 꽤 오래되었다. 꽤 자란 모습도 본 적 있지만, 그의 기억 속에 제일 강하게 남아 있는 건 지저분한 잿빛 솜털을 두르고 단춧구멍만 한 눈을 깜빡이던 아주 어린 늑대였다.

한때 제 한 손에 달랑 들릴 만큼 작았던 늑대가 이제는 압도감을 느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이미 다 컸다는 윈터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길게 뻗은 주둥이와 뾰족하게 솟은 귀, 풍성하고 가지런하게 자라 우아한 윤을 내는 은백색 털, 날렵하게 잔디를 디디고 선 다리.

그리고 자신을 꿰뚫을 듯 응시하는 커다란 청회색 눈.

시푸른 달빛이 내려앉은 늑대의 자태는 미개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고했고, 그들을 경멸하는 섀넌조차도 한순간 매혹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 타고 다녀도 되겠는데.”

섀넌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르륵거리는 메마른 소리와 함께 뾰족한 주둥이가 살짝 벌어졌다. 날카로운 이빨이 종유석처럼 길게 비어져 나왔다.

섀넌의 앞으로 다가온 늑대가 고개를 낮춰 그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 섀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보드라운 털이 손가락 사이로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큰 눈이 천천히 열렸다 닫히며 자신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온 주둥이에서 뜨거운 숨이 훅 끼쳤다. 주둥이를 끝까지 다 벌리면 제 머리통도 삼킬 듯했다.

커다란 머리통과 귀를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쓰다듬던 섀넌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털이 풍성한 목덜미에 뺨을 묻었다.

어쩐지 목이 메어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

겨우 그 말 한마디만 내뱉은 섀넌이 잠시 눈을 감은 채 이 순간에 머물렀다. 헥헥 들썩이는 몸 안에서 생동하는 짐승 특유의 열기가 느껴졌다.

결국…, 그와 자신은 이렇게나 다른 존재다.

맹약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얽힐 일도 없었을…….

* * *

갈리나는 내내 케인타운에 머물렀다. 그러나 좀처럼 섀넌이나 윈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섀넌은 그걸 알면서도 그저 가만히 놔두었다. 서로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그들의 양상은 곧 깨져 버릴 박빙 아래 흐르는 물처럼 고요했다.

제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함인지, 윈터가 시라트로의 귀환을 원치 않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좀 더 신중히 지켜볼 심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갈리나는 정말 꼬리를 만 개처럼 납작 엎드려 자신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섀넌.”

섀넌의 눈앞으로 은백색 머리칼이 살랑였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앞 테이블에 걸터앉아 허리를 숙인 윈터가 섀넌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앞으로 흐트러져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넘긴 윈터가 붉은 눈을 마주했다. 섀넌은 제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이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든 선을 넘나들 것처럼 당돌하게 다가오던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 달라졌다.

입술 근처에 조금 길게 입을 맞추기도 하고, 러셀이 보지 않을 때 귓불과 뺨을 오래도록 매만질 때도 있었지만, 그 이상은 선을 넘지 않았었다.

정확히 말하면 석 달 전 그에게 늑대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한 그날 이후부터였다.

습관처럼 그가 키스해 올 거라 예상하고 입을 벌리는 섀넌의 뺨과 이마에 솜털처럼 가벼운 입맞춤만 짧게 머물렀다가 떨어진 게 몇 번째던가.

도리어 아쉬워진 쪽은 섀넌이었다. 갑작스럽게 휙 다가와 저를 당황하게 하더니, 다시 한 걸음 물러난 윈터의 행동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본격적으로 사교활동을 하며 또래들과 어울리다 보니 제게 향해 있던 성적 호기심이 자연스레 식은 건가 짐작하고 단념하려 해 봐도, 여전히 저를 보는 아이의 눈빛은 기묘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열렬한 시선은 시시때때로 차게 식어 섀넌을 탐색했고, 그런 윈터의 행동은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만 더 당길 뿐이었다.

섀넌이 제 뺨을 만지는 손을 가볍게 치우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성년식 파티가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제 슬슬 파트너를 골라야지. 이걸 왜 내가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여러 집안에서 윈터를 제 딸의 파트너로 삼고자 연락이 왔지만, 정작 섀넌의 눈에 차는 여자아이는 없었다.

지금은 죽은 지 오래된 옛 영주의 호화 저택에서 열리는 성년식 파티는, 장장 인근의 세 도시 청년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 만큼 서로를 탐색하고 엇갈리는 경쟁도 치열했다.

평생에 한 번뿐인 성년식에 함께 할 파트너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좋은 추억이 되기도, 떠올리기도 싫은 흑역사가 되기도 하니 그 또래 청년들이 여기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윈터 자신은 성년식 파티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저 가볍게 웃었다.

“아무나면 어때요. 결혼할 신부 고르는 것도 아닌데.”

“나조차도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성년식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물론 그 뒤로 여러 도시에서 신분을 바꿔가며 다양한 성년식을 경험해 봤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의미 있는 일이잖아.”

섀넌이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게다가 넌 그 처음이 마지막이 될 텐데 당연히 최고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면 좋겠지.”

성년식을 치르는 당사자보다 어쩐지 자신이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으나 섀넌은 개의치 않았다.

이 성년식이 섀넌 자신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었다. 맹약 이행이 완전히 맺어지는 날이자, 지금껏 애써 명분으로 앞세웠던 아이와 자신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는 날.

그날이 되면 이제는 정말로 아이와 자신 사이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서로에게 지독하게 얽혀 있는 정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아이를 붙잡아 둘 수 없고, 섀넌은 그 정에 휘둘리는 실수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섀넌의 시선이 제 앞에 걸터앉아 있는 윈터를 천천히 훑었다. 윈터의 왼쪽 어깨를 가로질러 휘감긴 붉은 끈이 그의 양팔과 손목, 그리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뱀처럼 지나 제 손가락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단단한 맹약의 끈은 섀넌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얽으며 손목을 타고 올라가, 섀넌의 몸을 온통 휘감았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돌아 다시 윈터에게 옮겨간 끈은 계속해서 끝을 모르고 둘 사이를 배회했다.

붉은 끈이 정신없이 뒤엉킨 커다란 손이 섀넌에게 다가왔다.

“내 처음을 당신이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따뜻한 손이 턱을 감쌌다.

“난 그거면 돼요.”

섀넌의 이마 위로 말캉한 입술이 실낱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순간 눈을 감았던 섀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윈터와 제 몸을 휘감고 있던 붉은 끈의 환영은 깨끗이 사라져, 조용히 자신을 탐색하는 한 쌍의 구름 낀 만월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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