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Double Reverse Spin(2권) (5/18)

루나틱 왈츠 2권

달혜나

1. Double Reverse Spin

“음…….”

섀넌은 난처한 듯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당장 이 음탕하고 괘씸한 아이를 침실 문 밖으로 던져 버린다 한들, 이미 닿은 ‘이것’의 감촉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윈터에게 제 손목을 내어 준 채, 끈적한 체액이 엉겨 붙은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물론 이 아이가 먹고 싸는 모든 일이 다 제 손에서 이루어졌던, 그런 시절이 있긴 했다.

“샤…….”

아이가 자신을 ‘샤’라고 부르던 그런 시절이.

“질질 짜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봐.”

섀넌의 손으로 제 것을 쥐게 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안달 내는 윈터를 차분히 달랜 섀넌이 그와 눈을 맞췄다.

멋모르던 꼬마에게야 미혹을 써서 고통을 덜어 주거나 할 수 있었지만, 아랫도리를 흉흉하게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윈터에게 미혹은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키우던 짐승과 흘레붙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자신이 지금 어떻게 그를 미혹할 수 있겠는가.

섀넌이 짧지 않은 고민을 하는 사이 윈터는 서툴게 제 것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안에 가둬져 함께 흔들리는 제 손을 보던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빼냈다.

“억지로 이러는 거 강간이야. 알아?”

“……흐윽.”

“울지 말고.”

“…….”

애처롭게 일그러진 은백색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윈터는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단순한 발현이라기엔 어딘지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섀넌이 검지를 들어 윈터의 눈앞에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청회색 시선은 그저 섀넌의 얼굴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제게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라는 듯, 그깟 손가락 따위 제 좆을 만져 주지 않을 바에야 필요 없다는 듯.

“개새끼가…….”

섀넌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섀넌이 그에게 밀려 거의 눕혀져 있던 상체를 세워 등받이에 다시 똑바로 기댔다.

그러고는 한쪽 발로 천천히 윈터의 어깨를 눌렀다. 금방이라도 저항할 듯하던 윈터가 스스로 느리게 몸을 물렸다.

“앉아.”

훌쩍, 울음을 삼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윈터가 무릎을 굽힌 채 살짝 앉았다. 흐트러진 은백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청회색 눈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섀넌은 그런 그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잔뜩 경직되어 올라온 승모근이 위아래로 가파르게 움직였다. 창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모양 좋게 꿈틀거리는 근육에 음영을 드리웠다. 넓게 벌어진 가슴과 그 아래 굴곡을 타고 흐른 시선이 장골 근처에서 멈췄다.

자신이 여자였다면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큼 아름다운 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섀넌은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취향이 아니었다.

울먹이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다. 윈터는 뭔가를 참기 힘든 듯 제 아랫입술을 피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쯧, 그 모습을 보던 섀넌이 혀를 차며 그에게서 발을 뗐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숨을 헐떡이며 제 입술만 쳐다보는 윈터와 코가 맞닿을 듯 가까워진 섀넌이 침착하게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눌렀다.

“멀쩡한 입술은 왜 깨물어.”

윈터의 입술 안쪽으로 엄지 끝을 살짝 넣어 만져 본 섀넌이 너덜너덜하게 짓씹힌 살갗의 감촉에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 찢어졌잖아.”

윈터는 섀넌이 말할 때마다 나오는 숨결이라도 들이켜고 싶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에게 고개를 내민 채 입술을 겹치려 하고 있었다.

“키스가 하고 싶은 거야, 섹스가 하고 싶은 거야. 하나만 해야 장단을 맞춰 주든가 하지.”

물론 자신이 장단 맞춰 줄 수 있는 건 키스까지다. 그것도 많이 봐준 거였다. 그건 아주 오랜 세월 산 불멸자로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만큼 숱한 연륜이 쌓인 자신이니까 가능한 포용이었다.

“지성체답게 말로 하라고. 응?”

섀넌이 무심결에 제 엄지 끝에 묻은 윈터의 피를 입술로 가져갔다. 인간으로 치면 손에 묻은 잼 같은 걸 빨아 먹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음….”

짐승 새끼의 피도 맛있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저도 많이 굶주리긴 한 모양이다. 입안에 도는 피 맛에 송곳니가 느리게 비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홀로 느긋한 섀넌과 달리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숨이 넘어갈 듯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윈터 때문에, 섀넌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웃음과 함께 확 퍼지는 섀넌의 숨결에 윈터가 안달 난 듯 숨을 헐떡였다.

하…, 별안간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낮게 한숨을 흘렸다. 상대의 숨결에 안달 나는 건 더는 윈터만이 아니게 되었다.

피 냄새, 돌겠네……, 빨갛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윈터의 붉은 입술을 보던 섀넌이 결국 그의 목덜미를 감싸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이건 단지 식욕이 부추긴 충동일 뿐이다. 내가 키운 짐승의 맛이 어떨지 제대로 혀를 대보고 싶은, 말하자면 일종의 호기심…….

개새끼한테 마운팅이나 당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 또한 그에게서 원하는 걸 취하는 게 훨씬 이득이 아닌가.

섀넌의 입술이 닿자마자 윈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경직되었다. 당장 제 입술을 다 뜯어먹을 듯 달려들 땐 언제고, 막상 제가 먼저 입술을 부딪어 오니 당황하는 윈터가 어이없어서 섀넌은 입술을 겹친 채 웃어 버렸다.

그 소리에 또 한 번 덴 듯, 윈터의 몸이 바짝 굳었다. 섀넌은 단단하게 경직된 윈터의 목덜미를 손으로 부드럽게 풀어 주며 살짝 입을 벌렸다.

비릿하고도 달콤한 피 맛이 나는 혀가 뜨거운 온기를 품은 채 섀넌의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섀넌은 등이 아플 정도로 저를 짓눌러 오는 윈터를 지탱하지 못해 결국은 다시 그의 아래에 깔렸다. 하도 깨물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입술 안쪽 점막을 혀로 핥을 때마다 윈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섀넌은 제가 지금 키스를 나누는 건지 그에게서 굶주린 갈증을 해결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어쨌든 제가 공들여 키워온 윈터의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는 약간 즐겁기까지 했다.

“으음, 읏…, 섀넌……, 섀넌….”

윈터는 자신조차도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처럼 서툰 손길로 섀넌의 허리와 가슴팍을 손으로 마구 만졌다.

섀넌은 될 대로 되라는 듯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둔 채 키스에만 몰두했다. 향긋한 피를 세게 빨아들일 때마다 윈터의 목 안에서 낮게 울리는 신음을 듣는 게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윈터의 손길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 제 바지춤 안을 파고들 때쯤, 입술을 잠깐 뗀 그가 윈터를 살짝 밀어냈다.

“섀넌…, 더 해 주세요…, 흐읏, …아파요, 섀넌, 아파요…….”

뭔가 말하려던 섀넌이 문득 윈터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바지에 마찰한 성기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 껍질이 다 벗겨지도록 비벼대니까 당연히 아플 수밖에.”

그가 혀를 차며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넘어 버린 선이라,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 진짜 환장하겠네……, 한숨을 내쉰 섀넌이 조심스럽게 그의 성기를 쥐었다. 손바닥이 홧홧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성기는 뜨겁고 묵직했다.

한 손에 다 담기지 않는 물건을 어루만지며 엄지 끝으로 귀두를 천천히 문지르자 윈터에게서 열 오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단단한 핏발을 세운 채 체액을 흘리는 귀두 끝을 내려다보던 섀넌이 시선을 뗐다.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이 나을 것이다.

사정한 체액을 뒤집어쓴 탓에 미끌미끌해진 성기를 느리게 위아래로 쓸며, 섀넌이 살짝 고개를 들어 입술을 겹쳤다.

“으으, 흣……, 섀넌…, ㅅ, 흑…….”

겹친 입술 안으로 윈터의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조금씩 배어 나오는 피 탓에 그의 타액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섀넌이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그의 성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서툴게 그의 손안에서 허리를 움직이던 윈터는 얼마 못 가 섀넌의 손을 적시고 말았다. 참을성 없는 어린 늑대의 성급함에 섀넌은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그와의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어릴 땐 그의 입술에서 우유 비린내가 났었는데,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달콤한 피 냄새가 났다.

자신과 비슷한, 사냥하는 자의 냄새였다.

* * *

가운을 느슨하게 걸친 섀넌이 커튼을 젖혀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마치 그의 몸에 금테를 두른 것처럼 반짝였다.

윈터는 잠에서 덜 깬 머리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까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섀넌의 침대에, 그것도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

순간 코끝에서 느껴지는 매캐한 냄새에 윈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했다.

그 소리에 몸을 돌린 섀넌의 손가락 사이에서 흰 담배 연기가 뱀처럼 스멀스멀 허공으로 퍼졌다. 햇살을 받아 희부옇게 산란하는 연기 너머의 섀넌은 마치 환영처럼 보였다.

“일어났어?”

도리어 윈터는 그제야 현실감을 느꼈다. 자신은 꿈에서조차 섀넌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섀넌.”

윈터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반쯤 위스키가 채워진 잔 위에 담배를 툭 떨어뜨린 섀넌이 그에게 다가갔다. 윈터가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은 좀 어때.”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남은 차가운 손이 윈터의 이마를 짚었다. 약간 촉촉하게 땀이 밴 손바닥이 닿자 윈터는 순간 몸을 긴장시켰다.

그걸 알아차린 섀넌이 이마를 짚던 손을 내려 그의 뒷목과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그러나 맨 살갗에 제 손이 닿자 더욱 긴장했는지, 손바닥 아래로 바짝 경직되어 곤두선 근육이 느껴졌다.

“괜찮으면 이거 걸치고 얼른 나가서 씻어.”

그걸 무시한 채 침대 옆 벽면에 걸려 있던 가운을 빼낸 섀넌이 윈터의 앞에 내려놨다. 그 가운을 물끄러미 보며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눈을 깜빡이던 윈터가 물었다.

“섀넌, 전 어제 분명 제 침실에서 잠든 것 같은데요.”

“음…, 그랬겠지.”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있죠?”

“글쎄,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짧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한 섀넌이 당황으로 굳은 윈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설마 진짜 모르는 건가.”

그가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윈터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함께 밤을 보낸 상대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좀 서운한 일인데.”

물론 일방적으로 밤새 싸지른 건 윈터 쪽이고, 서로 간에 취한 이득이 좀 다르긴 했지만.

조금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게 떨리는 윈터의 눈을 마주한 채, 섀넌은 그저 차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윈터는 곧 혼란스러워졌다. 불길한 얼굴로 이리저리 시선이 방황하는 윈터를 가만히 보며, 섀넌은 그가 간밤의 기억을 어느 정도나마 되짚어 보는 것을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저, …섀넌, 어제는,”

“그래, 어젠 좋았단다.”

윈터가 더듬더듬 운을 떼자 섀넌이 그 말을 잘랐다.

윈터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섀넌이 입가를 올려 웃으며 그런 그의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맛이 꽤 괜찮던데.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왜 너만 보면 송곳니를 세우는지 알겠어.”

윈터는 제 뺨과 귓불, 목덜미 부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다가 일어나는 섀넌을 바라봤다.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느릿느릿 창가 앞 테이블로 걸어간 섀넌이 팔팔 끓는 찻물을 제 찻잔에 따랐다. 은제 차 거름망을 잔 테두리에 대고 톡톡 터는 손과, 그의 평온한 뒷모습을 번갈아 보던 윈터가 급히 제 앞에 있던 가운을 걸치며 침대에서 나왔다.

“멈춰.”

섀넌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제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윈터를 제지했다. 윈터는 마치 주문에라도 걸린 듯 내딛던 걸음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몸을 돌려 창틀에 살짝 기댄 섀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 일은 발현 중에 있을 수 있는 아주 흔한 실수야. 그러니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내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섀넌, 그게 아니라, 어제는,”

“그러니까 너는 평소처럼 이대로 나가서 씻고, 아침 먹고, 나와 함께 예정대로 의상실에 가는 거야.”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섀넌…,”

윈터가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섀넌이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윈터는 몹시 낭패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일에 대해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차분히 제 할 말만 마친 섀넌이 그에게서 다시 등을 돌리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등 뒤에서 여전히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윈터의 시선이 찌르듯 와 닿았다.

그러나 섀넌은 그가 방을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재단사가 공단으로 둘러싸인 받침대에 들고 온 크라바트를 고르던 섀넌이 적당한 디자인을 골라 손에 들었다. 아까부터 저를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윈터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가 윈터의 목에 손수 크라바트를 둘렀다.

“음….”

그에게 크라바트를 매어 주던 섀넌이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윈터의 얼굴을 살폈다.

“내 아이에겐 푸른색이 잘 어울리니, 버튼을 청금석으로 달아 주면 좋겠군.”

“아, 혹시 짙은 색감을 찾으신다면 지금 들어온 게 한점 있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섀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단사가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은 피팅 룸 안에서, 섀넌은 그저 말없이 윈터의 옷매무새를 세심히 정돈했다. 그리고 윈터가 전신거울을 정면으로 보도록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뒤에서 그를 안듯이 팔을 둘러 비뚤어진 크라바트 주름을 바로 잡아 주던 섀넌이 문득 거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왜.”

시선을 돌린 섀넌이 그의 매무새를 마저 매만져 주며 말했다.

“아까부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음,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얘기라면 그렇지.”

“들어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윈터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와 가까이 맞붙어 옷을 정돈해 주던 섀넌이 순간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윈터가 그런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느슨하게 감긴 손목보다 섀넌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압박감을 느꼈다. 느리게 열렸다 닫히며 일렁이는 청회색 홍채는 사람을 옭아매는 위압감과 동시에 낯선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고개를 기울여 섀넌과 시선을 맞추려 애쓰면서, 윈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섀넌, 어제 일은…,”

“최상급 청금석입니다!”

재단사가 요란하게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

어느새 윈터에게서 순식간에 멀리 떨어져 선 섀넌이 차분한 얼굴로 손을 뻗어 그에게서 보석을 건네받았다. 그가 짙푸른 청금석을 윈터의 목 부근에 대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어. 테는 백금으로 둘러 줘.”

“예에, 아주 탁월하신 안목입니다! 하하.”

윈터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 자리에서 급히 잔금을 치른 섀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상실을 나왔다.

햇볕이 쨍하게 내려앉은 거리 때문에 눈꺼풀이 시큰했다. 맞은편 레스토랑 앞 노상에서 낡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노인이 섀넌과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 지었다.

바야흐로 만개한 봄이었다. 온갖 파티와 기념행사가 이틀에 한 번씩 열리는 시기. 거리에 굴러다니는 온갖 쓰레기들만큼이나 여기저기에서 거리 악사들의 연주가 쓸데없이 나뒹굴었다.

섀넌은 제 뒤로 따라 나오는 윈터의 기척을 느끼고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윈터가 뒤이어 올라타며 마차 문을 닫자, 어쩐지 조금 답답해진 섀넌이 창을 열었다.

“러셀, 어서 출발해. 늦겠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내를 눈에 담으며, 섀넌은 이 어색한 적막을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싶었다.

“또 어디 가세요?”

그러나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윈터였다. 섀넌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대답했다.

“집으로 가지.”

“선약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요.”

“음, 내 선약은 아니고. 널 가르칠 춤 선생이 오기로 했어.”

윈터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제 옆얼굴에 들러붙은 시선을 느낀 섀넌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년식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 춤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잖아. 파티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야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충분할 것 같아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아주 기본적인 이론일 뿐이야. 실전에서 그딴 춤을 췄다간 모두의 비웃음을 살걸.”

“어차피 제대로 듣지도 않을 수업을 늘리는 건 낭비 아닐까요?”

“괜찮아, 너에게 그 정도 낭비는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섀넌, 아까부터 왜 내 눈을 보지 않아요?”

돌발 질문에 섀넌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내내 창밖만 보고 있어 윈터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계속 제게 들러붙어 있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섀넌.”

“굳이 눈을 맞추고 해야 하는 얘기도 아니잖아.”

섀넌이 휙 고개를 돌려 그를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시콜콜한 걸로 자꾸 시비 걸지 마. 안 그래도 피곤하니까.”

“제가 간밤에 섀넌을 힘들게 했나 보죠?”

“…이제 와서 새삼. 네가 아기였을 때부터 숱하게 해 왔던 일이야.”

“내가 아기였을 때도 그런 식으로 내 좆을 만져 줬었나요.”

“…….”

섀넌이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내가 아기였을 때도 그렇게 키스하고…?”

충격에 할 말을 놓쳐 버린 섀넌이 애써 입을 열었을 때, 마차가 갑자기 급정차했다. 앞으로 살짝 몸이 쏠린 섀넌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이내 마차 문이 열리며 러셀이 말했다.

“다 왔습니다.”

섀넌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서 확 내려섰다. 표정이 좋지 않은 그를 약간 의아한 듯 보던 러셀이 뒤이어 내리는 윈터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섀넌을 바라봤다.

“삼십 분 정도 남았군요. 차를 끓일 시간은 충분하겠습니다.”

“케네스 선생이 도착하면 응접실 말고 곧바로 홀로 안내해. 좁은 응접실보다는 거기가 춤을 배우기에 적당할 거야.”

“예.”

허리를 숙인 러셀 앞을 섀넌이 빠르게 지나쳤다. 윈터가 그 뒤를 다급히 따라갔다.

* * *

“섀넌, 얘기 좀 해요.”

기어이 섀넌의 침실이 있는 위층 복도까지 쫓아온 윈터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그가 아침부터 제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섀넌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새파랗게 어린 애를 상대로 이런 어색함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만 불편할 뿐이었다.

“곧 케네스 선생 올 거라는 얘기 못 들었어?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른 옷 갈아입지 않고.”

“나 춤 배울 필요 없어요.”

“……윈터.”

섀넌이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다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 일에 관심이 많아. 이 넓은 저택을 러셀 혼자 관리하는 것도, 네가 이만큼 클 동안 내가 이상하리만치 똑같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한창 또래들과 어울려야 할 네가 후견인인 나와 지나치게 늘 붙어 다니는 것도. 생각 이상으로 우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는 거야. 너 하나 가르치기 위해서 입 무겁고 실력 있는 선생들 찾기가 얼마나 까다로운 줄 알아?”

“…내가 원한 게 아닌데, 꼭 그걸 알아야 해요?”

“말 한 번 건방지게 하네. 살면서 꼭 자기가 원하는 일만,”

“어차피 난 인간도 아니잖아요.”

“……뭐?”

“왜 나를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해요?”

별안간 섀넌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싹 잊어버릴 만큼, 윈터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섀넌은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껏 굳이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 사교계 데뷔 준비에 열을 올리거나, 아이의 교육에 신경 써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시라트로 돌려보내기 싫어서.

윈터가 그저 이곳에서, 인간들 틈에서 그들처럼 살길 원해서.

그리고 자신이 그걸 계속 지켜보고 싶어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시선만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섀넌의 당황한 표정을 보자, 윈터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섀넌.”

그가 고개를 기울여 섀넌의 표정을 걱정스럽게 살피며 양 손목을 잡았다.

“미안해요. 내가 지나쳤어요.”

“……미안한 거 알면 좀 떨어져.”

섀넌이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벗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야겠으니까.”

“무슨 생각요.”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아직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섀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윈터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춤 배울게요. 섀넌이 원하는 대로 다 할게요. 대신 섀넌도 내 말 좀 들어줘요.”

“무슨 말.”

윈터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짧은 한숨과 동시에 윈터가 대답했다.

“……이따가요.”

은백색 속눈썹 아래에 반쯤 감춰진 청회색 눈은 의미 모를 심해에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야겠으니까.”

* * *

홀에서 윈터가 춤을 배우는 것을 참관하려 했던 섀넌은 마음을 바꿔 서재에 틀어박혔다. 아래층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가 그의 심기를 더 어지럽혔다.

‘어차피 난 인간도 아니잖아요.’

‘왜 나를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해요?’

지금껏 윈터의 향방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윈터가 시라트로 돌아가길 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가 누구의 핏줄인지, 그의 동족들이 어디에 얼마나 살고 있는지, 그의 외숙부가 조카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일을 감수했는지, 섀넌은 그런 것들을 아직 윈터에게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래전 처음으로 제 동족을 목격한 아이가 저를 보며 지었던 그 복잡한 경계의 시선이 꽤 충격으로 남았던 탓이다.

왜 제게 선택권이 있다고 여겼을까.

제가 보내고 싶다고 해서 보낼 수 있고, 보내기 싫다고 해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라고 여겼을까.

……과연 그 모든 얘길 듣고도 윈터가 지금과 같을까.

깍지를 끼고 있던 하얀 손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엄지 끝으로 제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섀넌이 책상 옆 서랍을 열었다.

가장 첫 칸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서랍을 또 열고, 또 그 안에 있는 작은 서랍 중앙에 뚫린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은 그가 빠르게 그것을 돌렸다.

찰칵, 하고 열린 서랍 안에서 낡고 닳아 색이 검게 바랜 머리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히 휘감긴 은백색 머리칼의 색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섀넌은 미루고 미뤄 왔던 이야기를 윈터에게 해 줘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아직 어려서, 그저 제 머릿속이 복잡해서, 귀찮아서 등등의 이유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이야기.

그때 별안간 위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지며 곧바로 노크 소리가 났다. 누구의 기척인지 당연히 잘 알았다.

조금 전 다짐과 달리, 반사적으로 머리 장식을 깊숙이 밀어놓고 겹겹이 열려 있던 서랍을 빠르게 확 닫은 섀넌이 문가를 바라봤다.

―섀넌,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

언제 수업이 다 끝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래층에 울리던 음악이 멎은 지 한참 되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탓이었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섀넌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곧 열린 문으로 은백색 머리칼이 들어왔다. 먼저 고개를 넣어 섀넌의 표정을 확인한 윈터가 이내 안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거기 앉아.”

섀넌이 턱짓으로 서재 한쪽에 있는 기다란 소파를 가리켰다. 윈터가 중앙의 테이블을 돌아 소파에 앉는 것을 보던 섀넌이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어렸을 땐 저 소파에 한껏 몸을 늘어뜨려 누워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소파 높이에 비해 너무도 길어진 다리를 굽히고 앉는 모습이 조금 불편해 보일 지경이었다.

윈터가 제 정강이를 불편하게 가로막는 테이블을 앞으로 약간 밀어내는 동안 섀넌이 그 대각선 앞쪽 상석에 앉았다.

“그래, 할 말이 뭐지? 생각은 다 정리했어?”

섀넌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제 복잡한 생각을 억지로 갈무리하며 물었다.

“아뇨.”

“그럼 뭐하러 왔어.”

“…굳이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윈터의 말에 섀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선을 떨군 채 깍지낀 손을 초조하게 만지작대던 윈터가 고개를 들어 섀넌을 바라봤다.

“전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 어젯밤 일에 대해서, …섀넌이 ‘좋았다’고 했잖아요.”

달갑지 않은 화제에 섀넌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아침에 그런 말을 했었던가.

물론, 좋았던 건 사실이다. 아주 소량이었지만 오래도록 굶주리고 있었던 제게 윈터의 피는 몹시 달콤했고, 누군가와 그런 식으로 접촉한 게 상당히 오랜만이었던 탓도 있었다.

“그런데?”

“섀넌, 혹시 날 좋아하세요?”

섀넌이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좋아하지?”

“좋아하신다고요?”

“좋아하지 않고서야, 내가 널 그동안 어떻게 그리 애지중지 길렀겠어.”

윈터가 별안간 헛웃음을 흘렸다. 미간을 살짝 구긴 채 허탈한 웃음을 지은 그가 제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섀넌은 그 찰나의 순간 윈터가 새삼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다. 제 눈썹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치는 얼굴이 몹시 어른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난.”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삐딱하게 앉아 있던 섀넌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긴 소파의 가장 앞쪽, 자신과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아 있는 윈터와의 거리가 불현듯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윈터?”

윈터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섀넌의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그가 앉은 소파의 양쪽 팔걸이를 짚은 윈터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춰 섀넌을 올려다봤다.

“나와 섹스하고 싶은지 묻는 거예요.”

섀넌의 입이 맥없이 툭 벌어졌다.

* * *

섀넌은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려 애썼다. 분명 꿈도 아니었고 환청도 아니었다.

저를 양팔로 가두듯 팔걸이를 짚은 채 올려다보는 윈터의 청회색 눈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정확히 깨달았다.

“섀넌…,”

“잠깐.”

섀넌이 손을 가볍게 들어 그의 말을 잘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

섀넌이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윈터를 내려다봤다.

“혹시 넌, 나랑…,”

갑자기 말을 급히 멈춘 섀넌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아냐. 이건 못 들은 거로 해. 별로 묻고 싶지 않아.”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한순간에 백지처럼 하얗게 표백되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 그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니오’야.”

“그러면…,”

“내 말부터 들어.”

윈터가 뭔가를 말하게 놔두는 것이 두렵다는 듯, 섀넌이 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윈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홀연히 소파를 벗어나 어느새 책상 앞에 선 섀넌이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아냐, 이것도 알고 싶지 않아.”

사실 윈터의 눈에는, 섀넌이 실제 당황한 것에 비해 제법 차분해 보였다. 입을 가린 채 미동도 없이 서서, 무섭도록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혹시 간밤에 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윈터,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감정도 없는 일이야. 정말 그 어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알아들어?”

섀넌이 애써 차분한 말투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윈터를 지그시 쳐다봤다.

어느새 제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온 아이에게 반사적인 경계심이 생긴 섀넌이 책상에 몸을 지탱한 채 상체를 뒤로 뺐다. 윈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꼭 누군가에게 속아서 분한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원래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런 짓을 해요? ‘아무나’랑?”

“굳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

일그러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윈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섀넌을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바라온 일이면요, 섀넌.”

그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섀넌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메마른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천천히 팔을 뻗어 섀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이듯 말했다.

“어젯밤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간절히 바랐던 일이라면,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 윈터…….”

섀넌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차분히 일축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네. 네가 대체 왜 나한테 그런…, …윈터, 좀 물러나 줄래? 지금 이 상황이 난 몹시 불편한데.”

그러나 윈터는 물러나는 대신 상체를 더 앞으로 숙이며 책상에 양손을 짚었다.

또다시 조금 전처럼 섀넌을 양팔에 가둬 두는 듯한 자세였으나, 최소한 윈터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 섀넌은 거의 책상에 드러누울 듯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내가 섀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순순히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은 윈터의 태도에, 섀넌이 차분하게 그를 쳐다봤다.

“진심으로, 네가 나한테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해?”

“아뇨.”

윈터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랬다면 전 이미 어제와 같은 일을 숱하게 저질렀을 거예요.”

섀넌이 기가 막힌다는 듯 짧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내가 조금만 약했다면 날 범했을 거라고 네 입으로 지껄이는 거야?”

“아뇨,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섀넌은 제가 키운 아이의 놀라운 화술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당신의 침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막무가내로 그 흉흉한 물건을 들이밀 거라는 말이, 이 아이에겐 좋아한다는 고백이라니…….

자신은 맹세코, 아이의 교육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제가 뭘 그리 잘 못 가르쳤기에, 대체 뭐가 부족했기에 아이의 사회성이 이리도 형편없단 말인가.

섀넌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종일 입고 다닌 코트의 단추가 하나씩 어긋나게 끼워져 있었다는 걸 다 저녁이 되어서야 깨달았을 때의 찝찝함과도 같았다.

“…헛소리 그만해. 내가 어젯밤에 네 행동에 응해 준 건, 발현 중인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그렇다고 네게 억지로 맞춰 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사냥을 안 나간 지 오래되어서 피가 절실하기도 했지. 네가 그 입술을 무식하게 짓씹어 피만 내지 않았어도 내가 그렇게 기꺼이 응할 일은 없었을 거라는 뜻이야.”

“그럼 섀넌은 내가 싫은가요.”

“……네 보호자로서, 너를 키워 준 후견인으로서 물론 좋아하지.”

“그럼 좋아하는 거네요.”

섀넌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단호한 제 아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다시금 할 말을 놓쳐 버렸다. 윈터는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특유의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후견인으로서 좋아하던 감정을 이제는 연인으로 바꿔 봐요.”

후식에 내놓는 요리의 메뉴를 바꿔 봐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쉽고 가벼운 제안을 하는 투였다.

“……나는 남자를 연애 상대로 보지 않아, 윈터. 내가 살아온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명백히 이성애자였거든. 아무리 네가 예쁜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건 다 자란 수컷으로서, 암컷들이나 꼬시기 좋은 몸이란 뜻이지 내가 붙어먹고 싶다는 뜻은 절대 아니야.”

섀넌은 윈터 같은 어린애 따위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제 연륜을 바탕으로 절대 침착함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실제로 꽤나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두겠는데, 네가 여자였어도 마찬가지야. 난 키우던 짐승과 흘레붙을 만큼 분별력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별안간 윈터가 작게 코웃음 쳤다. 섀넌은 그가 제 말에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제법 충격적인 일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윈터 그리말디?”

여전히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띤 채, 윈터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 말 하기 양심에 찔리지도 않으세요?”

“무슨 말이야.”

“어제 분명 당신도 날 원했었잖아요. 난 똑똑히 기억해요. 발기한 당신의 좆이 바지를 뚫고 나올 것 같던데요.”

섀넌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노골적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윈터가 낯설었다.

“이해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게 긴 세월 이성애자로 살다가, 나 같은 수컷 새끼랑 키스하다 흥분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겠죠.”

섀넌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서늘한 시선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것도 평소엔 음식으로도 거들떠보지 않는 짐승 새끼랑 붙어먹고 싶어 좆이 근질근질했다는 걸 어떻게 쉽게 인정하겠어요.”

윈터는 보기 드문 그의 얼빠진 듯한 표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선을 의식한 섀넌이 그제야 애써 표정을 차분히 숨겼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자연스러운 일.”

윈터가 그의 말을 되묻듯 반복했다. 섀넌은 어쩐지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자극을 받으니까, ……제기랄. 그래, 조금 즐긴 건 사실이야. 그 점은 나도 부정하지 않겠어.”

그러나, 새파랗게 어린 짐승 새끼한테 이런 식으로 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 일이 앞으로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사절이야. 네가 그 잠깐의 유희에 의미를 갖다 붙일 정도로 어리석은 아이일 줄은 몰랐구나, 윈터.”

섀넌이 애써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만 저를 찍어 누르듯 양팔에 가두고 있는 윈터의 아래에 깔려 있어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당신에겐 무의미한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윈터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섀넌은 그의 시선에 붙잡힌 듯 꼼짝 않고 그를 응시해야 했다.

“내게 그건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아니야, 너는 그저…,”

“내겐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섀넌. 그러니까 더는 아무 의미 없다는 말 좀 집어치워요.”

“너야말로 이런 행동 집어치워. 정말 말도 못 하게 불편하니까.”

“난 지금껏 내내 불편했어요. 정말 내내…, 지긋지긋하게.”

그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섀넌을 응시하는 청회색 홍채가 빠르게 조여들었다가 확 느슨해졌다. 검게 커진 동공을 보던 섀넌은 당황해 입술만 달싹이는 제 얼굴이 윈터에게 우습게 보일 것 같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좀 참아 봐요.”

섀넌은 윈터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을 땐 그 감촉이 너무 익숙해서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뒤늦게 놀란 섀넌이 그를 밀어내려는 순간, 윈터의 입술이 그의 아랫입술을 짧게 머금고 떨어졌다.

“……키스 정도는 이제 괜찮잖아요.”

윈터가 낮게 속삭였다. 섀넌은 황당하고도 아연한 심정으로 그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봤다.

“응? 섀넌…, 나 좀 봐줘요….”

간절한 부름과 함께 콧잔등 위로 윈터의 호흡이 내려앉았다.

“좋아해요, 섀넌.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나 좀 예뻐해 주면 안 돼요?”

섀넌은 그가 저를 찍어누를 듯 압박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윈터.”

섀넌이 그를 밀어내려 가슴팍에 손을 얹자, 윈터가 그의 손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폈다.

“윈터, ……그만.”

고개를 기울여 다시 입술을 겹치려는 윈터 때문에 섀넌은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를 피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윈터는 더 가까이 다가와 입술을 맞부딪었다. 고개가 엇갈릴 때마다 코끝이 스치고 열기 실린 호흡이 부서졌다.

그러나 섀넌은 좀처럼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윈터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혼내고 싶지는 않았다.

“…떨어져. 정말 화날 것 같으니까.”

낮은 경고에 윈터가 여전히 섀넌의 손목을 잡은 채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섀넌은 그제야 제 아랫배 부근을 짓누르고 있다가 떨어진 묵직한 감촉을 인지했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시선에 앞섶이 불룩하게 솟은 윈터의 바지가 보였다.

지끈지끈해진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섀넌이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 윈터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책상에 얌전히 놓여 있던 서류들이 허공에 폴폴 날렸다. 그 뒤에 있는 커다란 창이 양쪽으로 활짝 열린 채 삐걱 소리를 냈다.

윈터는 평생 섀넌이 제 앞에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걸 본 일이 없었다. 순식간에 텅 빈 서재에 혼자 남은 윈터는 그저 황당하고 허탈한 얼굴로 휑한 창문을 바라봤다.

* * *

섀넌은 제 아이를 몹시 아낀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함에 이제는 전혀 고민이 필요 없을 만큼.

“끅, 끄흑…….”

케인타운의 외곽, 바다가 인접한 방파제 부근 어두운 골목 끝에서 한 남자가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내뱉었다. 그의 머리채를 움킨 채 고개를 기울여 목덜미를 물고 있던 섀넌이 이내 그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창백해진 남자는 잘게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그 위에 올라탄 섀넌이 아직 미약하게 생동하고 있는 심장을 찾아 셔츠를 찢었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 위로 검붉은 피가 점점이 튀었다. 남자에게선 더는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비릿한 해풍이 더욱 짙어졌다.

물에 뜰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체를 질질 끌어다 바다 밑으로 던져 버린 섀넌이 피로 젖은 손과 셔츠 앞섶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봤다.

섀넌은 갑작스럽게 돌변해 버린 윈터의 태도가 정말이지 당혹스러웠다. 물론 아이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자신 또한 그를 매우 아끼지만, 이제는 제게서 다른 것을 바라는 윈터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설었다.

아이의 성장을 함께하며 온갖 꼴을 다 본 보호자로서, 더는 아이에게서 놀랄 만한 모습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내가 돌았지…….’

아무리 굶주린 상태였다 해도, 그날 밤 왜 윈터에게 그런 식으로 응해 주었는지 섀넌 자신조차 모를 일이었다. 꿈속 어딘가에 잠겨 있는 듯 몽롱한 얼굴로 저를 욕망하던 윈터의 모습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이 지나고 나면 없던 일이 될 것 같은, 그러니 그 순간만큼은 자신도 조금 뻔뻔해져도 될 것 같은.

그리고 이튿날 그 일을 수치스러워할 윈터를 아무렇지 않게 안심시키면 그걸로 끝날 줄 알았다.

인간은 제가 키운 짐승의 살갗도 뜯어먹는데,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 키운 짐승의 피 조금 맛보는 것 따위가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는가.

물론 그 일로 아이가 제 감정을 착각한다 해도 섀넌은 얼마든지 그런 그를 아무렇지 않게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윈터와 처음 얘기를 나눌 땐 그랬다.

‘분명 당신도 날 원했었잖아요.’

근처 길가에 있던 수도 펌프를 마구 당겨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섀넌이 여전히 낭패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뒤처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사냥에 집중할 수 없는 지금의 그는 마치 충동적으로 첫 살인을 저지른 얼간이처럼 보였다.

오늘 사냥은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다. 마음이 심란해서 입맛도 떨어졌는지, 사냥감을 잘못 고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형편없는 놈이긴 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인간이기에, 짐승인 윈터보다 더 맛이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섀넌이 저도 모르게 전날 맛보았던 윈터의 피, 그리고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놈에게 너무 좋은 것만 먹여 키웠다. 그러니 늑대 새끼 주제에 그런 피 냄새를 가지고…….

‘발기한 당신의 좆이 바지를 뚫고 나올 것 같던데요.’

제기라알…….

섀넌이 소리 없이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미쳤지, 미쳤어!

이미 윈터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자도 아닌 자신이 백 년 가까이 금욕하던 와중에 그런 자극을 받았으니 몸이 반응하는 게 당연하다.

억지로 참아 온 건 아니지만, 제가 케인타운에 와서도 금욕하게 된 원인 중 8할 정도는 윈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놈을 키우느라 자연스레 섹스에 관심이 멀어진 게 아닌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빌어먹을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선생님?”

그때 갑자기 섀넌 쪽으로 환한 빛이 드리워졌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등유 램프를 손에 든 경관 하나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수돗가에 망연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던 섀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새빨간 피로 흠뻑 젖어 있는 섀넌의 셔츠 앞섶을 본 경관이 노골적인 경계의 태도를 취한 채 물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섀넌이 찰나 제 얼굴에 드러난 귀찮은 기색을 지우며 입꼬리를 올렸다.

“맙소사, 안 그래도 경관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제가 이쪽을 홀로 걷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섀넌이 성큼성큼 방파제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경관이 램프로 그 앞을 비추며 다급히 따라갔다.

“이 아래에 시체가 있지 않겠어요?”

“시, 시체요?”

깜짝 놀란 경관이 짧은 모자챙을 손가락으로 추켜 올리며 물었다. 섀넌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체 말입니다. 도움을 청해 보려 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난감했지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던 섀넌이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바로 여기입니다. 혹시 아직 살아있을까 싶어 제 힘으로라도 끌어올려 보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제 옷만 버렸지 뭡니까.”

섀넌이 새빨갛게 젖은 제 셔츠 앞섶을 보라는 듯 양손을 가볍게 벌렸다. 경관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어, 어디 말입니까?”

섀넌이 가리키는 쪽으로 다가간 경관이 허리를 숙여 방파제 아래에 램프를 비춰보았다. 아래에는 시커먼 바닷물밖엔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아니, 거기 말고, 조금만 더 아래로요. 맙소사, 제 눈엔 벌써 보이는데요. 경관님 눈에는 저게 안 보이십니까?”

경관이 상체를 더 바짝 숙이며 램프를 비춰보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몸을 낮춰 제대로 아래를 비춰 보려 하는 순간.

“윽!”

거칠게 머리채를 휘어잡는 손길과 함께 목덜미로 날카로운 고통이 파고들었다.

“으아악! 이게 무슨, 끅…, 윽……!”

뒤에서 저를 휘어잡은 상대의 무지막지한 힘에 저항하려 몸부림치던 경관의 몸이 금세 경직되었다. 옆으로 목이 꺾인 채 잘게 경련하던 그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숨이 부족한 듯 헐떡이던 경관의 눈이 이내 하얗게 뒤집혔다. 그리고 등을 가격하는 구둣발에 밀려 그대로 바다에 빠져 버렸다.

“끄흑……!”

남자의 의식은 아직 살아 있었다. 물 밖으로 쏙 올라온 머리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뱉기도 전에 다시 쑤욱 잠겨 들었다. 방파제의 낮은 턱에 걸터앉은 섀넌이 발끝으로 그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순간적으로 다량의 피가 빠져나가 안 그래도 의식이 혼미해지던 차라, 희게 질린 남자는 쉽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에게서 벗어나 어떻게든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어보려는 경관의 노력은 섀넌의 가벼운 발짓 몇 번으로 우습게 짓밟혔다.

섀넌은 무료한 얼굴로 제 발밑에서 발악하는 경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물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느릿느릿 일어났다.

곧 수면에 엎어진 채 떠오른 경관의 주변에 그의 모자와 꺼진 램프가 둥둥 떠다녔다. 순찰 중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자의 모습이었다.

섀넌은 바닷물에 젖은 제 구두와 바짓단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며 물을 털었다. 불필요한 살인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피는 너무도 형편없는 맛이라 도저히 참고 먹어 주지 못할 정도였다.

여러모로 뒷맛이 깔끔하지 못한 밤이었다.

* * *

“요즘 갑자기 왜 담배에 손을 대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섀넌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갑자기가 아니라 끊었던 걸 다시 하게 된 것뿐이야.”

섀넌은 제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에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는 자신보다 너무도 커버린 아이의 손이 담배를 든 제 손으로 향했다.

“안 돼.”

제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가져가려는 윈터에게서 손을 피한 섀넌이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섀넌도 하는데 왜 난 안 돼요?”

“건강에 안 좋아.”

섀넌이 창틀에 놓여 있던 재떨이에 담배 끝을 천천히 비벼 껐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필멸자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는지 알고 있기나 해?”

윈터가 말없이 섀넌을 내려다봤다.

서재에서의 그 대화를 나눈 지 며칠이 지난 시점. 은백색 신기루 같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더는 예전의 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명백히 욕망하고 있는 그 눈을 피한 섀넌이 그에게서 몸을 살짝 빼냈다.

“그날은 갑자기 왜 도망가셨어요…?”

“네가 멋대로 구니까 나도 내 멋대로 한 것뿐이야.”

부러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기실 섀넌도 그 행동이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나 또한 마찬가지야.”

“요 며칠 집에는 왜 안 들어오셨어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질문에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실소를 흘렸다.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이젠 사냥하는 것까지 네게 일일이 보고…,”

섀넌이 말을 멈췄다. 갑자기 제게 바짝 다가온 윈터 때문이었다. 섀넌이 은근슬쩍 제 등 뒤의 창턱을 짚었다.

…또 창문으로 도망가야 하나. 모양 빠지게.

그때 윈터가 섀넌의 손목을 단단히 감았다. 그가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자 섀넌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또 도망가실 거예요?”

“……안 도망가.”

저 질문을 듣지 않았다면 거의 도망갈 뻔했다.

“믿을 수가 있어야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가 내 손목을 부러뜨려도 언제든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어.”

그러나 섀넌은 전처럼 억지로 손목을 비틀어 빼내지 않고 애써 침착함을 그러모았다. 어른인 자신이 또 꽁무니 빼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주는 거야.”

손목을 옥죄고 있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래도 불안한지, 윈터는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다.

“만월에 내가 뭐가 되든, 다 통제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

“그래놓고 자꾸 절 피하시면 어떡해요.”

“네 몸뚱이야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지만, 마음까지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

차분하게 돌아오는 대꾸에 윈터의 표정이 불쌍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그런 그를 보던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자신이 공들여 천천히 타이르면 윈터도 머리가 있는 한 제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듣지 않겠는가.

“윈터,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어. 괜찮아. 경험이 없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단순한 쾌락과 연애 감정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해.”

“그럼 지금도 나랑 키스할 수 있어요?”

“개수작 부리지 마.”

고개를 기울여 섀넌을 살피듯 천천히 움직이는 청회색 눈이 아슬아슬하게 일렁였다.

“그게 그렇게 따로 노는 거면, 얼마든지 나랑 더 한 짓도 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

아, 그냥 도망갈까.

도망가서 다신 돌아오지 말아 버릴까…….

섀넌이 눈만 움직여 윈터 뒤쪽에 있는 괘종시계를 일별했다. 시간은 3시 정각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내가 내키지 않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게 적선이든, 강제든.”

별안간 윈터가 스스로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섀넌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꽉 짓눌린 입술에서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섀넌이 손끝으로 얼른 그의 입술을 빼냈다.

“…너 미쳤어?”

“이제 좀 내켜요?”

“…….”

“내가 다른 걸 바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윈터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에 흥건히 배어 나온 피를 핥았다. 순식간에 동공이 새빨갛게 확장된 섀넌이 숨을 멈췄다. 윈터의 혀와 이 끝을 붉게 물들인 피를 보던 그의 송곳니가 느리게 비어져 나왔다.

입술 표피가 살짝 맞닿았다. 굳게 다물린 섀넌의 입술을 지그시 누른 윈터가 피 물든 혀끝으로 그 틈새를 핥았다.

섀넌의 뺨을 감싼 그가 더 깊이 입술을 겹치려 할 때,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피한 섀넌이 한 손으로 윈터의 입을 막았다. 그가 여전히 숨을 참은 채 낮게 말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상처를 내서 날 유혹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윈터. 그건 잘못된 거야.”

윈터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섀넌의 손에 하관이 가려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호했다.

“그럼 어떡해요. 나한텐 이것밖엔 없는데.”

섀넌의 손바닥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울면 봐주실 거예요? 옷을 벗고 달려들면 봐주시겠어요?”

“내가 그런 거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해?”

별안간 윈터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가슴 만져 보실래요?”

애써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섀넌이 그에게서 손을 떼며 헛숨을 내뱉었다.

미친놈인가…?

살다 살다, 저런 말을 수컷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살아온 생에 회의가 들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미쳐도 미쳐도, 무슨 저렇게 세상 미친놈이 다 있지…….

윈터가 소리 없이 웃으며 섀넌의 손을 제 가슴에 얹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그날 밤 키스하면서 내 가슴 만졌어요, 안 만졌어요?”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졌어.”

“감촉이 꽤 좋았죠?”

순간 할 말을 놓친 섀넌이 아슬아슬하게 대답했다.

“그냥, …습관적으로 손이 간 것뿐이야.”

“그렇게 즐길 거 다 즐겨놓고 이제 와서 이러시면 양심에 안 찔리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추행한 줄 알겠어. 남의 손에 밤새 싸지른 건 너잖아.”

“그럼 섀넌도 싸세요. 저는 손뿐만 아니라 어디든 다 빌려드릴 수 있어요.”

“…….”

제기랄.

본래라면 섀넌은 제가 키운 아이가 좀 미친놈이라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친놈의 광기가 제게 향해 있으면 그건 크나큰 문제다.

섀넌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의 감촉을 외면하며 대꾸할 말을 찾던 그때, 창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윈터의 춤 선생과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대문을 넘어 정원으로 들어오는 소리였다.

시간이 다 됐군.

드디어 3시 정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힐끗 보며, 섀넌은 내심 안도했다. 기실 그가 여태 자리를 피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숨 막히도록 어색한 시간이 얼마 안 가 곧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가. 수업 시간이야.”

창밖을 힐끗 본 윈터가 별안간 얼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아아…, 섀너언…….”

그가 섀넌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며 진저리쳤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제 양팔을 붙잡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섀넌은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인간적으로 주 3회 수업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든 윈터의 표정이 너무도 익숙했던 제 아이의 그것이라, 섀넌의 마음이 약간 느슨해졌다.

제 어깨에 대고 머리를 비비느라 단정하게 잘 세팅되어 있던 짧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섀넌이 그 머리를 다시 잘 정돈해 주며 일축했다.

“인간도 아니면서 무슨 인간적인 대우를 바라. 얼른 내려가.”

“가기 전에 이건 먹어 주세요. 아깝잖아요.”

섀넌의 시선이 이끌리듯 윈터의 입술로 향했다. 아직 옅게 핏기가 맺혀 있는 그 향긋한 입술이 매혹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러셀이 오고 있어.”

“알아요.”

“알면 떨어져.”

맞닿을 듯 가까워진 코가 비스듬히 엇갈리고 조심스러운 입술이 닿았다. 섀넌은 비어져 나온 송곳니를 감추려고 입을 더 꽉 다물었다.

“섀넌 님, 홀에서 케네스 선생이 기다리고,”

열린 문에 대고 노크를 하며 들어온 러셀이 윈터와 섀넌을 번갈아 바라봤다.

“…계시는데요.”

창밖을 보는 윈터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책상 앞에 선 섀넌이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음, 조금 더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평소보다 더 붉어진 섀넌의 눈을 보니 어쩐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라, 눈을 굴린 러셀이 윈터를 쳐다봤다. 아랫입술을 감쳐 물고 손끝으로 제 윗입술을 매만지던 윈터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아뇨, 지금 가요.”

여전히 입을 가린 채 아무런 말이 없는 섀넌의 눈치를 보던 러셀이 제 어깨를 친근하게 짚는 윈터에게 떠밀려 서재를 나갔다.

홀로 남은 섀넌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온전히 내쉴 수 있었다.

* * *

맹약의 이행 완료 시점까지 정확히 아홉 달.

지금껏 숱한 고비를 넘겨 왔다 여겼지만, 섀넌은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이보다 더 큰 난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섀넌은 이를 악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든 아이를 보내느니 마느니 애틋한 고민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부질없어져 버렸다.

그는 벌써 보름째 의도찮은 방랑자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제가 이 나이에, 그 새파란 애송이를 마주치는 게 두려워서 놈이 학교에 있는 시간만 골라 집에 들어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잠깐.’

섀넌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그가 커튼을 확 열어젖히며 창턱을 손으로 짚은 채 생각에 빠졌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잖아.’

적당히 거리를 두다 기한이 지나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는 거야. 맹약이 끝났으니 저 혼자 어디 가서 뒈지든지 말든지…….

섀넌이 제 머리를 쥐어 감싸며 탄식했다. 뒈지는 건 안 돼. 어떻게 키운 애새낀데 그렇게 허망하게 뒈지게 둘 수는 없지.

게다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아홉 달을 버틴다? 백 년 가까운 금욕 기간 탓에 유혹에 약해진 자신이 그걸 해낼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제기랄…, 벌써 두 번이나 키스했잖아.

이러다간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된다. 매우 어려운 ‘처음’이라는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다음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섀넌은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창문 위쪽을 누군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섀넌이 힐끗 위를 올려다봤다. 거꾸로 매달려 인사하듯 손을 흔드는 카일을 본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창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문으로 출입하는 게 그렇게 귀찮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가볍게 창틀 안으로 뛰어내린 카일이 씩 웃었다.

“자기야, 너무 앙탈 부리지 마. 내가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고.”

“역겨운 소리 집어치워. 시답잖은 일이기만 해 봐. 창밖으로 던져 버릴 거니까.”

“추격자들에게서 소식이 날아왔어.”

의자로 돌아가 앉으려던 섀넌이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궁금하지?”

그가 카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일이 싱긋 웃으며 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작은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조력자를 찾았다는 뜻이야.”

* * *

「친애하는 섀넌 그리말디.

화이트팽으로 편지를 보낸 건 미안해요.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화이트팽의 존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다리야 님께서 예전에 잠시 가깝게 지냈던 뱀파이어가 있었던 터라,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것뿐입니다. 절대 발설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저 또한 그 사실이 드러나길 원치 않으니까요.

저를 찾으러 왔던 추격자들은 시라트에 잠입하자마자 발각되어 절반 이상이 사살되었습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검은 늑대는 9년 전 당신이 아치볼드 저택에서 들려 보낸 십여 동족의 머리를 절대 잊지 않았거든요.

덕분에 외부와 소식을 주고받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함부로 건드릴 용기는 없고, 장로들에게 본은 보여야겠으니 시라트 내부에 있을 간자를 찾아내겠다는 거겠지요.

물론 다행히도, 전 무사합니다. 게다가 발각된 추격자들의 절반 또한 가까스로 탈출해 저와 함께 있어요. 그렇기에 제가 이 편지를 적고 있는 거죠. 아마도 추격자들이 돌아가면 당신에게 몇 배의 대가를 더 요구할지도 모르겠군요.

각설하고, 저를 무척 오랫동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당신도 그동안 성실히 맹약을 이행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저희는 자하카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자하카의 마지막 핏줄이자, 시라트의 영좌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부정한 적 없으니까요.

제 이름은 ‘갈리나’입니다. 자하카께 제 존재를 알려 주세요. 저뿐 아니라 이 시라트에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저는 이곳에서 몇 가지 안배를 해 두고 있겠습니다.

모쪼록, 당신께서 끝까지 맹약을 잘 이행해 주시기를. 건강하게 성장한 그분을 다시 모시는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추신: 답장은 필요 없습니다. 제 얘길 잘 이해했다는 뜻으로 작은 증표 하나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머리 장식은 안 돼요. 작은 시계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행여 발각되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지요.」

역대 자하카의 이름이 적힌 양피지와, 화이트팽을 통해 제게 전달되었던 편지에서 보았던 그 필체였다. 섀넌은 램프 위에 종이를 태우며, 종이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응시했다.

추격자들을 만났다면 윈터의 이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편지 그 어디에도 윈터의 이름은 없었다. 마치 제가 지어 준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 그곳에서 윈터는 그저 자하카일 뿐이었다.

“뭐, 말은 되게 비장하네…….”

복잡한 섀넌의 표정을 보던 카일이 어색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체 무슨 안배를 어떻게 해 두겠다는 건지, 자세히 좀 써 주지 않고…, 거 참…….”

카일이 계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섀넌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의 내용은 권유가 아니라 사실상 통보였다.

“……어떻게 할 거야, 섀넌?”

램프의 뚜껑을 덮어 불을 끈 섀넌이 창을 열며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창틀에 손을 짚은 그가 저택 정원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만전을 기하고 계시다는데.”

종이를 태우느라 방 안 가득 퍼져 있던 탄내가 창밖으로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었다. 공허한 붉은 눈에 정원의 싱그러운 봄 풍경이 스산하게 맺혔다.

“……돌려보내 드려야지.”

* * *

섀넌은 의자에 앉은 채 홀 중앙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윈터를 보고 있었다. 케네스 선생은 윈터가 자꾸 치마를 밟는다며 혼을 냈고, 윈터는 혼이 나느라 잠깐 춤을 멈출 때마다 그녀의 얘기는 듣지 않고 섀넌만 쳐다봤다.

“그리말디, 스텝을 정확히 외우면 이런 실수를 할 일이 없단다.”

“네.”

“파티에서 네 파트너는 이보다 더 단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을 텐데, 그때도 이런 실력이라면 곤란할 거야.”

“…….”

“그리말디?”

계속 그의 발과 제 치마를 보고 있던 케네스 선생이 돌아오지 않는 대꾸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윈터보다 키가 한참 작아 고개를 많이 꺾어야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탓에, 케네스 선생은 윈터가 제 수업에 이토록이나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그럼요.”

윈터가 여전히 섀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케네스 선생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주자들을 향해 눈짓했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고, 케네스 선생이 스텝을 밟기 시작하자 그제야 겨우 섀넌에게서 눈을 뗀 윈터가 춤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섀넌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런 윈터의 발끝만 응시했다. 워낙 표정이 없어 당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케네스 선생과 연주자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윈터가 여전히 홀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겨 있는 섀넌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춤이 형편없다는 생각.”

섀넌이 여전히 다른 생각에 머물러 있는 듯한 얼굴로 대꾸하자, 윈터가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와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금세 섀넌이 그 시선을 피해 눈을 옆으로 돌렸다.

“섀넌.”

윈터가 고개를 기울여 다정한 얼굴로 섀넌을 바라봤다.

“나 좀 봐주세요.”

섀넌이 천천히 눈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저를 올려다보는 순종적인 청회색 눈을 보니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그는 유독 아이의 눈을 좋아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섬세하게 일렁이는 옅은 색소의 홍채는 미명이 움트는 새벽하늘처럼 충분히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다 자란 지금까지, 아이의 눈은 늘 제게만 맹목적으로 열려 있었다. 그에겐 자신이 세상의 전부였고 규칙이었으며 안식처였다.

기실 자신은 그런 기분을 조금 즐겨 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제 품 안이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절대적인 피난처라는 듯 답삭 안겨 오던 그 작은 몸. 그리고 아이가 낯선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습관처럼 제 손을 꼭 부여잡고 제 뒤로 숨던 순간의 그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말없이 저를 향해 열려 있는 그 눈을 보던 섀넌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배우기 싫으면, 배우지 않아도 돼.”

“네?”

“춤이든, 교양 수업이든, ……뭐든 다.”

“갑자기 왜요?”

“네가 원치 않는 것 같으니까.”

섀넌의 기분을 살피려는 듯 윈터가 조용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홀의 노란색 조명을 받은 청회색 홍채가 따뜻한 빛으로 일렁이며 느리게 열렸다.

윈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냐. 배울래요. 열심히 할게.”

“…이제 와서 무슨.”

“춤은 섀넌이 조금만 가르쳐 줄래요? 그럼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섀넌의 눈이 방황하듯 홀을 살폈다.

“러셀에게 해 달라고 하지 왜. 러셀도 제법…,”

“러셀은 케네스 선생님 배웅하면서 잠깐 외출했어요.”

섀넌은 웃느라 조금 가늘게 이지러진 윈터의 눈과 그 사이로 오뚝하게 떨어지는 콧날, 노란빛 조명이 고인 인중과 그 아래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왜 이렇게 아까부터 목이 메는 기분인지 모를 일이다.

시선을 떨군 섀넌이 공연히 부산스럽게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테이블보를 잡아당겨 빼냈다.

이것 또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겉옷을 벗고 얇은 포엣셔츠와 바지만 남긴 섀넌이 검붉은 테이블보를 치마처럼 허리에 감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홀 중앙에 서서 양팔을 벌린 채 윈터를 바라봤다.

섀넌이 제 부탁에 응해 주자 신난 윈터가 기분 좋게 달려왔다. 곧바로 제 허리와 손부터 잡으려는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섀넌이 턱을 살짝 든 채 말했다.

“인사부터, 제대로.”

“아.”

섀넌이 테이블보를 살짝 쥔 채 무릎을 굽히고는 윈터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가볍게 쥔 윈터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섀넌의 허리를 감쌌다.

“팔은 뻣뻣하고, 얼굴은 너무 가까워.”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섀넌이 제 허리를 감싼 윈터의 손을 떼어 내고는 정확한 위치를 감싸게 했다.

여전히 제게 굶주린 듯 고개를 기울여 다가오는 윈터의 턱을 잡아 살짝 뒤로 당기게 한 섀넌이 하나, 둘…, 하고 작게 속삭이며 미끄러지듯 스텝을 밟았다.

“리버스 턴(Reverse turn).”

약간 삐끗할 듯하면서도 스텝을 놓치지 않는 윈터를 보던 섀넌이 허리를 조금 젖혔다가 보폭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가 두르고 있던 붉은 테이블보가 반원으로 확 퍼지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그게 아니야, 보폭을 같이 이어 가야지. 그러면 서로 스텝이 엉켜서 도리어 치마를 더 밟게 된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섀넌이 스텝을 계속 이어가며 말했다. 천천히…, 그가 작게 속삭이며 윈터의 두 발 안쪽으로 부드럽게 발을 내디뎠다.

“터닝 록(Turning lock).”

얼결에 뒤로 물러나려던 윈터가 얼른 그 스텝을 따라가려다 발이 꼬여 버렸다. 서로 엇갈린 구둣발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섀넌이 흐트러진 그의 발을 구두 끝으로 툭툭 쳐 바로잡아 주며 말했다.

“막상 같이 춰 보니,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구나.”

“치마가 너무 거추장스러워요. 분명 여자들도 같은 생각일 걸요.”

“여자들 드레스에 불만 가질 시간에 네 우스꽝스러운 스텝을 먼저 돌아봐.”

“……아, 음악이 없어서 그런가?”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원래 이것보단 잘 추는데.”

“살며 들어본 핑계 중 제일 설득력 없는 핑계였어.”

섀넌이 다시 윈터의 손을 가져다 제 등을 감싸게 하며, 그의 손 각도를 조절한 뒤 맞잡았다.

“하나, 둘…, 하나, 둘….”

섀넌이 작게 박자를 세어 주자 윈터가 거기에 맞춰 가볍게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윈터의 말이 반쯤은 사실이었는지, 몇 발짝 떼지도 못하고 중단되던 춤이 이제야 조금 이어지기 시작했다. 섀넌은 위에서 저를 끈질기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윈터의 어깨너머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이 홀 한쪽으로 빠르게 스텝을 미끄러트렸다. 보폭을 맞춰 크게 한 바퀴 돈 뒤 윈터의 손에 지탱해 허리를 뒤로 젖히며, 섀넌은 생각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저를 욕망하는 게 분명한 늑대 새끼의 품에 안겨 춤을 추면서도 기분이 더럽지 않고, 도리어 그의 얼굴을 보면 목이 메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자신이, 진짜 섀넌 그리말디가 맞는가.

……지금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제가 아이를 보낼지 말지에 대해 멋대로 고민하면서 사교계 데뷔 준비나 시키는 동안, 제가 모르는 곳에선 이 아이의 귀환을 위해 치열한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심해.’

자신을 너무도 한심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다시 한 번 홀의 풍경이 빠르게 휘돌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이를 그곳으로 보내어,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저와 상관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 사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보내고 싶지 않아.’

섀넌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아, 미안해요.”

윈터가 또 테이블보를 밟은 탓이었다. 동작을 멈춘 섀넌이 괜찮다는 말도 없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목이 메다 못해 눈두덩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섀넌, 되게 잘 추네요.”

이마에 윈터의 음성과 함께 그의 숨결이 닿았다. 섀넌은 시큰하게 열이 오르는 눈을 깜빡이며 짐짓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 춤이 언제부터 있던 건지 알기나 해?”

“왈츠는 생긴 지 채 이백 년이 안 된 춤으로 알고 있는데요.”

“춤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야. 그 전에 이미 비슷한 춤이 숱하게 많았지.”

“……남자를 상대로 춤춰 본 적 있으세요?”

“음….”

섀넌이 애써 그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럼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춤을 추셨나요.”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춤을 췄기에 그들의 포지션까지 완벽히 다 외울 정도인가요. 그런 뜻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밤을 보냈는지를 간접적으로 묻는 것이기도 했다.

섀넌은 그의 유치한 유도 질문에 딱히 걸려들고 싶지도, 그렇다고 일부러 방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나이도 정확히 모르는 내가, 그런 걸 일일이 횟수로 꼽을 거라 생각해?”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군요.”

언제부터였는지 윈터가 흥얼거리던 멜로디는 멈췄다.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작게 박자를 세어 주던 섀넌의 목소리도 더불어 멈춰 버렸다.

그래서인지, 점점 동작이 빨라지던 두 사람은 어느새 왈츠를 관두고 마주르카(Mazurka)로 넘어갔다. 마치 경쾌하게 흐르는 선율 위를 가볍게 내달리는 듯했다. 섀넌이 두르고 있던 테이블보는 진즉 윈터의 발에 밟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섀넌이 빠르게 빙그르 돌자 윈터는 가까스로 스텝을 놓치지 않고 그의 허리를 받칠 수 있었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에게 못 박혀 떨어지지 못했다.

섀넌이 가볍게 위로 도약했다. 번쩍 올라가는 그의 허리를 가볍게 받친 윈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섀넌을 응시했다.

그다음 스텝은 두 사람 다 완전히 잊어버렸다. 어느새 바짝 붙어 코가 닿을 듯한 거리가 된 둘 사이로 엇갈린 호흡이 조심스럽게 흘렀다.

윈터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댔다. 섀넌의 기분을 살피는 듯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섀넌은 마치 사고가 멎은 사람처럼, 제 입술을 지그시 겹쳐 무는 윈터의 입맞춤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놔두었다.

이내 윈터의 목을 끌어안은 그의 눈이 감겼다.

* * *

“…거봐요, 당신도 흥분하잖아요.”

홀 벽면에 있는 반원 형태의 사이드 테이블에 섀넌을 앉혀 둔 윈터가 잠시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옷차림과 머리칼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이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건가요?”

윈터가 섀넌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으며 웃었다.

“그럼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겠네요.”

섀넌은 말없이 윈터의 목덜미를 당겨 입술을 빠르게 부딪었다. 윈터가 하는 말들이 듣기 싫었던 건지, 그저 그의 입술이 급했던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섀넌의 양옆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허리를 숙여 준 윈터가 그의 입맞춤에 깊게 응했다. 섀넌이 윈터의 목에 완전히 팔을 두르고 몸을 붙여 오자 그에게서 상기된 호흡이 새어 나왔다. 윈터가 한 손으로 섀넌의 허리를 감싸며 제 쪽으로 깊이 당겨왔다.

섀넌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완전히 몸을 밀착한 윈터의 손길이 점점 그의 앞섶을 더듬거리며 대담해질 때쯤, 섀넌이 그의 입술 안쪽 살갗을 가볍게 깨물었다.

순간적인 아픔에 미간을 찡그린 윈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섀넌은 그런 윈터의 호흡과 피 섞인 타액을 거칠게 빨아들였다. 섀넌의 입 안으로 혀를 얽고 있던 윈터는 어느새 그의 송곳니가 길게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 살갗을 꿰뚫을 듯 날카로운 선단이 혀끝으로 만져질 때마다 윈터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

“하아…….”

그때 섀넌에게서 나른한 신음이 섞인 한숨이 쏟아졌다. 잠시 입술을 떼고 윈터의 셔츠 앞섶에 손가락을 건 섀넌이 말없이 그와 콧날을 부딪었다.

“뭘 그리 갈등해요.”

“…….”

“먹고 싶죠?”

윈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섀넌은 맞붙은 하체 사이에 느껴지는 단단한 열기로 지금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의 피를 탐하는 건 성욕을 부정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윈터 또한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 또한 윈터 못지않게 발기해 있는 상태였으니까.

“뱀파이어들은 원래 식욕과 성욕이 같이 가나 보죠?”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거,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섀넌은 자신이 아이를 향한 애정과 욕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더해진 일시적인 흥분.

그는 오랜 세월 산 불멸자답게 제 알 수 없는 충동을 그런 식으로 정의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읏…….”

윈터가 섀넌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안 그래도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아래쪽이 그에게 짓눌렸다. 가까스로 등 뒤에 손을 짚어 중심을 잡은 섀넌이 윈터의 셔츠 앞섶을 양손으로 움키고 잡아당겼다.

“하아, 섀넌…….”

부딪힌 혀끝이 매끄럽게 비벼지며 점막으로 둘러싸인 틈새를 파고들었다. 뺨 안쪽 살갗과 입천장, 혀뿌리까지 깊게 침범해 온 혀가 입 안을 다 살라 먹을 듯 헤집었다.

제 혀를 옭아매고 거칠게 빨아들이는 아이의 목덜미를 감싼 섀넌이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허리 안쪽으로 뜨거운 살갗이 와 닿았다. 섀넌의 셔츠를 잡아 뺀 윈터가 그 안으로 손을 넣은 탓이었다. 허리 부근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더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안달 난 듯했다.

그때, 밖에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러셀이 저택 대문을 넘어 귀가하고 있었다.

* * *

“두 분 아직 홀에 계셨네요?”

두 손에 짐을 가득 든 러셀이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진 홀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수업이 이제 끝나서요.”

“윈터의 춤이 형편없어서 내가 손봐 주고 있었어.”

다급한 대답과 차분한 대답이 동시에 되돌아왔다. 러셀이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수업이 이제 끝났다니? 케네스 선생은 분명 제가 외출하면서 윈터와 함께 배웅했는데…….

“어…, 그러니까, 섀넌 님이 윈터의 춤을 가르쳐 주고 있었군요. 말하자면, 보충 수업?”

섀넌을 보던 그의 시선이 윈터에게 향했다. 윈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보가 벗겨져 맨몸을 드러낸 테이블 위에 짐을 내려놓은 러셀이 어째서인지 홀 중앙에 떨어져 있는 테이블보를 집어 들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던 리시안셔스 화분도 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춤을 춘 게 아니라 치고받고 싸웠다고 해도 믿을 만한 전경이었다.

“…춤 수업이 끝나면 홀이 늘 엉망이야. 신경 써서 청소해 주었으면 좋겠어, 러셀.”

섀넌이 침착하게 말하며 러셀을 지나쳐 홀을 나가는 복도로 걸었다.

“음…, 섀넌 님?”

“왜.”

“거기 그, …셔츠가 삐져 나왔는데요.”

섀넌이 천천히 제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셔츠의 반절 이상이 바지 밖으로 튀어나와 볼품없이 늘어져 있었다.

“……집인데 뭐 어때.”

섀넌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침착하게 일축하며 다시 차분한 걸음으로 홀을 나갔다.

그를 오랜 세월 모셔 온 러셀만이 아는 사실이었지만, 섀넌은 저런 차림새를 무척이나 증오한다. 셔츠를 바지 밖으로 내놓고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사람을 보면 품위도 교양도 없는 머저리라고 욕하곤 했다.

“러셀, 피곤하죠? 얼른 들어가세요. 나도 올라가서 쉬어야겠어요.”

“아, …예. 사 온 것들만 정리하고요. 홀도 좀 치워야 할 것 같고.”

“네, 네. 그러세요.”

윈터가 러셀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홀을 나갔다. 텅 빈 홀에 혼자 남은 러셀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케네스 선생이 왔을 때 제가 차려 놓았던 차와 디저트들이 다 식은 채 테이블 한 편에 엉망으로 쏠려 있었다. 러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은색 트레이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옮겼다.

* * *

“섀넌.”

“그만 따라와. 어디까지 들어올 생각이야?”

침실까지 따라 들어온 윈터의 기척을 느낀 섀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물었다.

“가능하다면 침대 위요.”

침착한 대답이 들려왔다. 발기한 아래를 감춰 보려 바지춤을 이리저리 매만지던 섀넌이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잇새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던 걸 마저 하고 싶어서?”

그가 일부러 실소를 흘리며 뒤돌았다.

“아뇨.”

“…….”

“단지 그것만 욕심내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막상 마주한 윈터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순종적이었다.

“당신이 날 봐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원한…,”

그가 섀넌의 손을 잡고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연인이 되고 싶어요, 섀넌.”

그 모습이 마치 프러포즈를 하는 연애 초짜의 모습 같아서, 섀넌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불멸자 앞에서 영원을 운운하는 고백 방식이나, 고루한 단어 선택, 약간 긴장한 듯 진지하게 굳힌 표정까지 다 최악이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을 웃기려고 한 시도였다면 성공이다.

“네 우스꽝스러운 말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았어. 나를 미친 듯이 안달 나게 해도 너를 침대에 들일까 말까인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내가 널 안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나를 안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당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날 밤처럼, 아니, 이번에는 제대로…….”

“제대로? 네가?”

섀넌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어떻게?”

“나름 연습해 봤어요. ……머릿속으로.”

연습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그 뒤에 이어 나온 말에 또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윈터는 여유로운 듯하면서도 묘하게 서툰 구석이 있었다. 그의 그런 태도가 우스워 섀넌은 더 이상 그를 봐도 목이 메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다른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갈리나의 편지를 태운 냄새가 코끝에 미약하게 맴도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섀넌이 천천히 뒷걸음질 쳐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것 역시, 이유 모를 충동이었다.

“나를 두고 무슨 상상을 했는지 말해 봐.”

마치 면접관 같은 태도였지만,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슬쩍 뒤로 기댄 섀넌의 모습은 상대를 매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윈터가 홀린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입 맞추는 상상을 했어요.”

“어디에?”

“당신의 머리칼에, 귓바퀴에, 뺨에, 턱 끝에, ……목덜미에, 어깨에, …그리고 당신의, …….”

윈터의 시선이 섀넌의 몸을 핥듯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셔츠 안에 감춰진 살갗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아는 섀넌이 눈썹을 가볍게 까딱였다.

“발칙하네. 그리고?”

“…당신을 만지고, 신음하는 당신의 입술에 내 좆을 물리고, ……물어뜯길 걸 각오하면서 허리를 흔들었어요.”

“괘씸하군.”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의 얼굴에 사정하면서…, 검은 속눈썹과 콧잔등, 뺨과 입술을 다 더럽히고, 적어도 꿈에서는…, 그런 일을 수백 번 반복했죠. ……그리고 또 그다음에는….”

그다음을 더 듣고 싶지는 않아서, 섀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음, 그런 짓이 날 기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반대라면 당신도 기쁘지 않을까요?”

섀넌은 윈터의 말에 너무도 성의껏 귀 기울이느라 순간 그 반대의 상황을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렸다.

늘 고급 향유로 관리해 온 결 좋은 은백색 머리칼을 엉망이 되도록 움켜쥐고, 맹목적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음영이 깊은 이목구비를 제 체액으로 짓뭉개는 상황을.

그러고 보면, 그날 밤 윈터는 내 손에 몇 번이고 쏟아 냈었지.

도저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셀 수도 없을 만큼 지겹도록 사정했었다. 나중에는 계속 그의 체액에 내내 젖어 있던 손끝이 쪼글쪼글해질 정도였다.

‘……세상에 나 같은 후견인이 또 있을까.’

먹고 싸는 것도 제대로 못 하던 어린 핏덩이를 데려다가 숱한 밤을 지새워 가며 멀쩡한 인간 몸으로 빚어 줘, 조금이라도 그를 건드리는 놈들은 알아서 다 처리해 줘, 학교에서 사고 치면 그 뒷수습에, 감히 후견인의 손을 자위 도구로 이용하는 천박함도 다 감싸 주며, 지금껏 좋은 것 먹이고 좋은 옷만 입혀 곱게 키워 준 은혜가 말로 다 못 할 지경인데.

침실에 멋대로 침입해 제 손에 밤새 싸질러댄, 발칙한 애새끼 얼굴에 딱 한 번 싸지르는 것쯤이야 기실 그리 큰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윈터가 머지않아 시라트로 돌아가 그를 지지하는 동족들과 어울리게 된다면 자신 같은 불멸자 따윈 까맣게 잊게 될 거다.

어쩌면 더러운 사탄의 손에 길러졌다고 뒤늦게 치욕스러워할지도…….

정말…, 그렇게 될까. 그땐 저 눈이 지금과는 달라질까.

섀넌은 조심스럽게 제 눈치를 살피며 바지의 단추를 풀어내리는 윈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순종적인 청회색 눈이 맹목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보자니 어쩐지 약간의 희열이 차올랐다.

물론 자신이 성적인 접촉을 멀리한 지 오래되어 더 쉽게 해이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섀넌은 제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확실히, 백 년간의 금욕은 제게서 성적 스킨십에 대한 면역력을 앗아가 버린 듯했다.

섀넌은 억지로 앞세웠던 얄팍한 죄악감이나 윤리 의식을 내팽개치고픈 충동이 일었다. 자신은 원래부터 그런 도덕적 관념들과는 동떨어진 존재다.

지금껏 살며 숱하게 비도덕적인 일을 저질러 왔는데, 상대가 윈터라고 해서 거리낄 게 뭐란 말인가.

“섀넌….”

열어젖힌 바지춤 사이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속옷 위에 입술을 묻은 윈터가 허락을 구하듯 섀넌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꿈에서 수도 없이 입을 맞춘 부위를 눈앞에 맞닥뜨린 남자의 긴장과 조바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섀넌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도리어 마음이 더 느슨해졌다.

“뭐 해?”

손을 뒤로 짚은 채 몸을 좀 더 느슨히 기댄 섀넌이 옅은 웃음을 띤 얼굴로 눈썹을 까딱였다.

“조금이라도 미숙하게 굴면 창밖으로 던져 버릴 거야.”

“차라리 저를 물어 죽이겠다고 해 주세요.”

윈터가 섀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속옷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 말 들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래로 당겨 내려간 속옷 위로 섀넌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끝에 닿는 윈터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어서, 섀넌은 눈을 내리깐 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색이….”

선단에 몽글몽글 맺힌 투명한 체액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며, 윈터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왜, 네 꿈속에선 내 좆이 흉측한 검붉은 색이기라도 했나 보지?”

“아뇨, 그래도 이것보단 진할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 연한 핑,”

“그만. 애써 반쯤 세워 놓은 걸 다시 가라앉힐 생각이 아니라면 색깔 감상은 거기까지.”

단호한 섀넌의 말에 윈터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말없이 입을 벌려 혀를 조금 내밀었다.

“아…….”

그다음 순간 섀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마치 제 선단에 맺힌 체액을 맛보려는 듯, 윈터의 혀끝이 그곳을 쓸고 지나간 탓이었다.

음, 하는 나지막한 침음이 윈터에게서 들려왔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조심스럽게 핥고 지나간 감촉은 다시 몇 배로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감촉으로 되돌아왔다. 혀 뒷부분으로 귀두 끝을 문지르며 입술을 살짝 벌려 머금은 윈터가 약하게 그의 것을 빨아들였다.

섀넌이 떨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소리 없이 일렁였다.

아, 원래 이런 느낌이었던가. 제가 잊고 지냈던 감각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진부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새로웠다. 속옷을 더 아래로 내리느라 잠깐 떨어진 윈터의 입술이 아쉬울 정도였다.

섀넌이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봤다. 커다란 손으로 제 것을 감싸 쥔 채, 느릿느릿 위아래로 훑던 윈터가 제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다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 것을 입에 무느라 숙여진 고개 탓에 윈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마 위로 늘어진 은백색 머리칼을 가볍게 움켜 위로 올린 섀넌이 제 것을 입에 담고 있는 윈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귀두 끝을 감싼 축축한 점막이 확 조여들 때마다 섀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읏, ……조금 더, …그 아래…, 거기….”

열심히 혀를 움직이며 제 반응을 살피는 윈터의 머리칼을 가볍게 움켰다 놓으며, 섀넌이 신음과 함께 작게 소곤거렸다.

그가 가르쳐 주는 대로, 맑은 체액이 맺힌 귀두 끝 바로 아래 일직선으로 주름진 부분을 혀끝으로 길게 핥은 윈터가 이번엔 조금 더 깊이 섀넌의 것을 머금었다.

한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리고 쓸어내리는 머리칼 사이로 섀넌의 한숨이 쏟아졌다. 어느 순간 그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조금, 읏……, 조금만 더, 하아, …깊이, 그래, 천천히…….”

제 뒤통수를 잡아 아래로 내리누르는 힘에 윈터는 순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입안 가득 섀넌의 것을 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깊게 머금었다.

“흐, 윽…….”

뿌리 끝까지 입술을 내리자 목구멍 안쪽으로 섀넌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윈터는 처음 겪어 본 반사적인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꿈에서는 알지 못한 감각이라, 그는 도리어 이 느낌이 기꺼웠다. 눈앞의 섀넌이 더는 제 망상이나 꿈속의 그가 아닌, 현실이라는 걸 일깨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읏, 이 세우지 마.”

치솟는 헛구역질에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이빨 끝이 뾰족하게 섀넌의 것을 짓눌렀다. 윈터가 천천히 그의 것을 혀로 조이다 뱉어 냈다.

“이러면 아파요? …난 섀넌이 그렇게 해 주면 기분 좋던데…….”

섀넌이 한숨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그래 봐야 어차피 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이었을 뿐일 텐데, 꼭 실제 겪은 일처럼 말하는 윈터가 우스웠다.

“……난 부드러운 게 좋아.”

섀넌이 잠시 틈을 두고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의 말을 새겨들은 듯, 다시 입술을 내린 윈터가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입안을 조였다.

섀넌의 것을 마음껏 머금고 빨아들이면서도 이가 닿지 않게 하는 방법을 몰라 무척 서투른 움직임이었다.

“…아래를, 읏, …혀로 감싸고, 윽, 너무 누르지…, 마, ……그래, 천천히, 하아…, 그렇게.”

아직도 불쑥 제 것을 찌르는 날카로운 감촉에 섀넌은 가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착실하게 신음하며 윈터의 머리칼을 종종 꽉 움켰다.

그 행동이 상상 속에서 섀넌의 입에 제 좆을 물릴 때의 제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에, 윈터는 섀넌이 지금 몹시 달아올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그의 머리칼을 헤집던 섀넌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윈터의 턱밑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여길 완전히 열어. ……그래야, 더, 하아…, 더 좋으니까….”

말끝을 대충 흐리며 고개를 뒤로 젖힌 섀넌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천천히 아래를 움직였다. 목구멍을 최대한 열어젖힌 윈터가 뿌리 끝까지 그의 것을 머금고 확 조였다.

“아아….”

제 뺨과 귓불, 머리칼을 이리저리 멋대로 어루만지며 신음하는 섀넌 때문에 윈터는 하마터면 도리어 제가 사정할 뻔했다.

꿈이나 상상이 아닌 실제 행위는 제 예상을 한참 넘어 놀라울 만큼 자극적이었다. 단순히 제 것과 비슷하리라 짐작했던 섀넌의 성기는 상상과 사뭇 달랐다.

숱이 많지 않은 체모는 솜털처럼 보드라웠고 아기처럼 연한 살갗은 그 누구에게도 만져진 적 없는 것처럼 순결해서, 제가 이 끝으로 조금만 힘주어 짓이겨도 살가죽이 다 벗겨질 것처럼 야들야들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주는 자극에 이따금 움찔거리며 맑은 체액을 울컥 토해 내는 요사스러움은 섀넌의 외모와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윈터는 섀넌의 모든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사랑스러워서 온몸이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그의 것을 입에 깊이 머금으면 코끝으로 체모가 스치며 향긋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읏……, 아, …좋아, 윈터, 흐읏……, 잘하고 있어.”

섀넌의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헐떡이는 신음 사이로 나오는 특유의 차분하고도 우아한 말투는 윈터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하아, ……읏, 입 벌려.”

낮은 한숨 끝에 억눌린 신음을 삼킨 그가 한 손으로 윈터의 양 뺨을 잡으며 입을 벌리게 했다. 붉은 혀 위로 흰 체액이 흩뿌려졌다. 입천장과 혀, 입술 주변으로 마구 쏘아져 내리는 체액은 매우 짙고 끈적했다.

스스로 제 것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거리낌 없이 윈터의 입속에 성기를 문지르는 섀넌의 찌푸려진 얼굴을 보면서, 윈터는 또 한 번 전율했다.

섀넌은 사정한 이후에도 한참이나 제 성기 끝으로 윈터의 입술을 덧그렸다. 고개를 기울인 채, 미끌미끌한 체액이 그의 입술에 엉망으로 짓이겨지는 걸 감상하듯 한참을 응시했다.

윈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몇 번 움직였다. 입안에 남아 있던 체액을 다 삼킨 그가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아직도 제 입술을 덧그리고 있는 섀넌의 성기를 깨끗이 핥아 삼켰다.

너무 오랜만의 사정이라 갑작스러운 탈력감과 여운이 짙게 맴돌았다. 여전히 작게 숨을 몰아쉬며 윈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상체를 세우며 섀넌에게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제게 얼굴을 가까이 내미는 윈터에게 섀넌도 고개를 살짝 내려 주었다.

“나 잘했어요?”

섀넌이 느슨한 얼굴로 웃었다.

“춤보다는, ……제법.”

“섀넌은 흥분하면 눈가가 붉어지는구나…, 몰랐어요.”

윈터가 엄지 끝으로 섀넌의 눈가를 매만지다 그 위에 살포시 키스했다. 마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붉어진 윈터의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섀넌이 차분히 말했다.

“이제 네 빈약한 상상력이 꽤나 구체적으로 변하겠네.”

“키스해 줘요.”

섀넌은 망설임 없이 기꺼이 입술을 겹쳐 주었다. 그의 입에 대고 사정한 마당에 키스 정도가 이제는 무슨 거리낌이 될까.

가볍게 몇 번 오갈 것 같던 입맞춤이 조금 길어지며 윈터가 더 몸을 밀어붙였다. 입술이 맞붙은 채로 그에게 밀려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온 섀넌이 그의 목덜미와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문득 궁금해져서, 슬쩍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역시 여전히 불룩하고 단단한 물건이 느껴졌다. 그런데….

“……음, 윈터, 잠깐만.”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섀넌이 잠시 입술을 떼고 그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너, 설마…….”

“섀넌이 내는 신음 소리가 너무 야해서…….”

“그래서, 누가 만져 준 것도 아닌데 혼자 갔다고.”

섀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오자 윈터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섀넌은 제 아이의 성감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얼른 벗어.”

“네?”

단호한 섀넌의 말에 윈터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 말의 의도를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해서,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더러운 걸 계속 입고 있을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당신 앞에서 바지를 벗어요.”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했잖아. 얼른 벗어.”

“벗으면, ……섀넌이 만져 주실 거예요?”

섀넌이 이마를 짚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벗어.”

윈터가 제 바지 앞섶의 단추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섀넌이 대신 그 단추를 휙휙 풀어헤쳤다.

“읏…, 섀넌…!”

놀란 윈터가 순간 그의 손을 막으려 했으나 섀넌에게 그게 먹힐 리 없었다. 섀넌이 순식간에 그의 바지를 속옷과 함께 홱 내리자, 커다란 성기가 퉁 튕겨 올라왔다.

섀넌이 아연하며 입을 벌렸다. 생각보다 흥건히 젖어 있는 속옷에 놀랐고, 아직도 사정 직전인 듯 흉흉하게 발기되어 있는 윈터의 성기에 두 번 놀랐다.

“……몇 번이나 간 거야?”

“…두 번요.”

어이가 없어진 섀넌이 입을 벌렸다. 자신은 맹세코, 정말 맹세코 발끝으로도 그의 것을 만져 준 적이 없었다.

윈터가 제 침실에 쳐들어온 그 날 밤엔 발현도 진행 중이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제 손만 닿아도 몸을 떨며 사정해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심한데.”

섀넌은 제 아이의 성 기능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침대에서 그를 좋아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매번 넣기도 전에 옷이나 침대 시트를 더럽히면 그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섀너언……, 그렇게 계속 쳐다보지 마세요. 쌀 것 같단 말이에요.”

별안간 윈터가 섀넌 쪽으로 몸을 숙이며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 시선만 닿아도 쌀 것 같다니 이것 참 보통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윈터가 섀넌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제 것을 쥐게 했다. 섀넌은 제 손안에 채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부피감과 단단한 감촉을 느끼며, 그나마 두 가지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몇 번을 싸고도 부피를 잃지 않는 정력, 그리고 크기.

“읏…….”

그때 윈터의 몸이 바짝 곤두서며 섀넌의 손을 또 한 번 적셨다. 섀넌은 뜬 눈으로 윈터의 키스를 받으며 생각했다. 제 아이가 타고나기는 참 잘 타고났는데,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타고난 것을 쓸 만하게 만들어 놓기까지 퍽 힘들 것 같다고.

“윈터, 만약 계속 이렇다면 이건 병이야.”

“너무 오래 참아서 그래요.”

윈터가 그의 귓바퀴와 뺨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사람이 가끔은 참을 줄도 알아야지.”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계속 참겠어요. 매일 상상으로만 하던 일을 이제 겨우 당신이 허락해 줬는데…, 아아…, 섀넌…….”

목덜미로 윈터의 뜨거운 숨이 퍼졌다. 제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맨 살갗 위를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노골적인 욕망이 담겨 있었다.

섀넌은 어느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그런 그에게 짓눌려 있었다. 윈터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서툴게 그에게 제 아랫도리를 밀어붙이며 신음했다.

그런 윈터의 흥분을 온몸으로 체감하다가, 우습게도 섀넌은 덩달아 발기해 버렸다.

“……윈터. …윈터, 그만. 진정해.”

섀넌이 윈터의 목덜미를 감싸 입술을 부딪으며 진정시켰다.

“조금만, 으, 읏……, 너무 세게 누르지 마. 조금만 살살…….”

섀넌이 윈터의 가슴팍을 지그시 밀어 상체를 살짝 세우게 했다. 꽉 맞붙어 있던 두 몸이 살짝 벌어지고 틈새가 생기자, 섀넌이 양손으로 윈터의 것과 제 것을 포개어 쥐었다.

그의 머리 양옆에 손을 지탱한 윈터가 서툴게 허리를 움직였다. 꼭 성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허릿짓이었다. 섀넌이 입술을 얕게 깨문 채 윈터와 제 성기를 함께 흔들었다.

새삼 다시 짚고 싶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정말로…, 정말로 제 아이의 쾌락에 이런 식으로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아, 섀넌, 읏…, 너무 좋아요, 어떡해…, 흣…….”

윈터는 섀넌의 손과 아랫배에 줄줄이 정액을 토해 내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 탓에 한층 더 질척해진 그의 성기가 계속 움직이며 마찰하자, 섀넌도 걷잡을 수 없는 쾌감이 차올랐다.

저를 내려다보는 윈터의 귓바퀴와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송곳니를 조금만 갖다 대도 피가 터질 것처럼.

제 아이는 흥분하면 귓바퀴와 목덜미가 붉어지는 모양이다.

“윽……, 하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윈터의 얼굴이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늘 잔잔하게 일렁이던 청회색 눈은 동공이 활짝 열려 맹목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었다.

“……키스.”

제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윈터에게 턱을 살짝 들어 고개를 내민 섀넌이 짧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윈터의 입술이 떨어졌다. 섀넌의 입안으로 윈터의 신음 섞인 열띤 호흡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음, 읏……, 아아….”

윈터의 두 팔 안에 갇힌 채, 그의 입술을 세게 빨아들이며 섀넌은 절정에 달했다. 어느새 비어져 나온 송곳니가 윈터의 입술 안쪽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온몸을 적시는 쾌락에 몰두할 뿐이었다.

헐떡이느라 떨어진 입술이 뺨과 귓불,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섀넌의 목덜미를 질근질근 씹으며 윈터는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응…, 읏, 윈터, ……그만.”

“안 돼, 조금만 더요…, 조금만…….”

“잠깐, …바로 만지지 ㅁ, 흐읏…….”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액이 엉겨 붙은 섀넌의 성기를 제 것과 함께 그러쥔 윈터가 그의 귀두 끝을 꾹 누르며 문질렀다. 그때마다 섀넌의 입에서 견딜 수 없이 야한 숨소리가 퍼졌다.

사정 직후에도 계속 윈터의 커다란 손에 가둬진 채 몇 번이고 끌어올려 지는 전율에 섀넌은 진저리쳤다. 윈터가 그런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평소 그리도 잘하는 표정관리조차 할 수 없었다.

섀넌은 쾌락에 헐떡이는 제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윈터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제 성기를 흔드는 윈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하아…….”

너무도 오랜만의 자극이었다. 서툰 윈터의 손 안에서 열 오른 쾌감이 찌르르하게 치솟다가도, 이내 다시 확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을 연달아 오르내리고 나니 절정이 다가올 때쯤엔 거의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아찔했다.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고인 쾌락을 견디지 못한 섀넌이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흐윽, 읏, 아아…, 윈터…….”

시리도록 서늘한 청회색 눈이 저를 다 살라 먹을 듯 뜨겁게 못 박혀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던 섀넌은 온몸에 자르르하게 퍼지는 아찔한 열락에 몸서리치며 신음했다.

엉망으로 질척해진 제 손과 윈터의 성기 사이에 남은 여운을 쥐어짜듯 지그시 흔들던 섀넌이 마침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성기를 한 손으로 덮은 채, 섀넌의 성기에 꽉 문지르며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이던 윈터가 뒤늦게 사정하며 그의 위로 완전히 엎어졌다.

섀넌은 저를 짓누르는 윈터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가 제 아랫배에 대고 뭉근하게 성기를 비벼대며 뜨거운 체액을 울컥울컥 토해 내는 감촉이 생생했다.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이 맞닿은 가슴팍으로 전해졌다. 제 심장 소리인지 윈터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미 그것은 자신의 박동이기도 했고 윈터의 박동이기도 했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손과 아래를 깨끗이 닦아 낸 섀넌이 홀로 셔츠와 바지를 단정하게 다 갖춰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는 이제야 미적미적 체액을 다 닦아내고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문득 윈터가 바지의 단추를 채우다 말고 다가와 섀넌의 옆에 앉았다. 섀넌이 습관처럼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슬슬 빗겨 주며 뺨을 어루만졌다. 제 어깨에 툭 기대어 오는 커다란 아이의 무게감이 이제는 익숙했다.

“섀넌.”

윈터가 제 뺨을 감싼 섀넌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우리 이제, 무슨 관계에요?”

“……무슨 관계긴, 서로 긴밀히 협조한 관계지. 너는 입으로, 나는 손으로.”

“그것뿐이에요?”

“그럼 뭘 더 바라?”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요.”

“묻는 것도 자유고 들어줄지 말지도 내 자유야.”

윈터가 맥없이 푸스스 웃었다. 섀넌이 미처 다 정돈하지 못한 윈터의 셔츠를 여며 단추를 채워 주며 말했다.

“잠은 네 침실에서 자. 귀신 무서워할 나이는 지났으니.”

“……뭐야, 내 머릿속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거예요?”

“네가 옷도 제대로 안 갖춰 입고 침대에 앉아 미적대고 있는 걸 보면 뻔하지. 잠은 안 돼. 어릴 때라면 모를까, 나보다 더 큰 사내 녀석 끌어안고 자는 취미는 없어.”

침대 위에 널브러진 윈터의 겉옷을 그의 가슴팍에 아무렇게나 안긴 섀넌이 윈터의 엉덩이 부근을 손으로 툭 쳤다.

“얼른 나가. 러셀이 보기 전에.”

섀넌의 귓바퀴와 뺨에 입술을 스치며 좀처럼 그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 있던 윈터가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잘 자요, 섀넌. ……오늘, 진짜 너무 좋았어요.”

윈터가 섀넌의 코끝과 뺨,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꼭 연인들이나 할 법한 간지러운 행동에 섀넌은 쓴웃음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윈터가 문을 닫고 완전히 나가자, 평온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섀넌이 쓰러지듯 뒤로 드러누웠다.

가볍게 흔들리는 침대 시트에 조금 전 행위의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가만히 천장의 문양을 눈으로 좇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리워졌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든 일에 초연한 건 아니다.

물론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세상은 늘 바뀌고 삶은 늘 다채롭다. 적어도 처음 맞닥뜨리는 낯선 일에 한해서는, 백 살 된 노인이나 이십 대 청년이나 똑같다는 뜻이다.

윈터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적어도 섀넌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얇은 유리처럼 연약한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제가 억지로 붙잡아둔다 해서 아이와의 관계가 영원히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것도.

섀넌은 그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다.

* * *

「친애하는 갈리나. 편지는 잘

찌익,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문장을 주욱 그었다. 미간을 찌푸린 섀넌이 다시 그 아래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G, 편지는 무사히 전달받았습니다. 당신을 찾는데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군요. 화이트팽으로 편지까지 보낼 능력이면 충분히 언제든 나와 접선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빌어먹게도

네가 대체 얼마나 잘난 작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첫 대화를 트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나는 매우 유감입니다.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

펜을 던지듯 내팽개친 섀넌이 군데군데 죽죽 그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버렸다.

윈터를 돌려보낼 땐 보내더라도, 순순히 그자가 시키는 대로 작은 시계 따위나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잠시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려 둔 채 가만히 생각에 잠긴 섀넌이 다시 새 종이를 꺼내어 펜을 집었다.

“…….”

그가 차분한 얼굴로 심호흡하며 종이 위에 첫 획을 그었다.

「G, 편지는 무사히 전달받았습니다만, 당신의 편지에는 중요한 이야기들이 전부 생략되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난 아직 당신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요.

당신이 그 먼 곳에서 윈터를 위해 어떤 안배를 해 두고 있다는 건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내가 무얼 믿고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게 내 아이를 보내야 하는지요? 당신들 내부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 없으나 현 시라트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나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9년 전 그들이 윈터를 생포해 데려가려는 걸 내가 직접 막았으니까요. 그때 당신의 힌트는 너무 늦었어!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았

그런데 맹약의 기한이 끝났다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윈터를 시라트로 돌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윈터 또한 분명 이곳을 더 좋아할

나는 그렇게 몰인정한 뱀파이어가 아닙니다. 자애와 포용으로 아이를 길러왔고 향후 아이의 안전에 대해서도 몹시 마음이 쓰이고 있습니다.

부디 다음번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가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섀넌은 펜대를 입에 문 채 새 종이를 꺼내어 품위 있고 공손한 말만을 골라 편지 내용을 다시 깔끔하게 옮겨 적었다.

얇은 종이에 잉크가 스며 번지기 전 블로터를 빠르게 좌우로 굴린 섀넌이 반듯하게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잠시 초조하게 손끝으로 책상을 톡도독 두드리다가, 다시 편지를 펼쳐 내용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고는 별안간 앞에 앉아 있는 상대에게 화를 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의자에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 양손을 제 배에 올려 둔 채, 그런 섀넌의 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카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응? 내가 뭘?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한심하게 보고 있었잖아.”

“기분 탓일걸…….”

카일이 딴청을 피우며 손끝으로 제 배를 톡톡 두드렸다. 사실 좀 이상하게 쳐다본 건 맞았다. 그의 눈에 섀넌은 매우 아슬아슬해 보였다.

얼마 전엔 방파제 근처에서 흡혈 흔적이 남아 있는 시체를 아무렇게나 바다에 던져 놓은 바람에, 뒤늦게 그걸 수습하고자 자신과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평소 섀넌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 엘리자베스는 그가 아예 미친 것 같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정말 미쳤다기엔 섀넌은 지금 너무도 명료한 정신 상태로 저를 노려보고 있다. 카일이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변명했다.

“…그냥 앞에 있는 게 너뿐이니까 쳐다본 거야. 이상한 오해하지 마.”

잠시 그를 계속 노려보던 섀넌이 그 앞으로 편지를 툭 던졌다. 불량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카일이 그 편지를 슥 가져갔다.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다시 칩거하는 건 어때.”

카일의 말에 섀넌이 눈썹을 비틀었다.

“윈터랑 같이 말이야. 어디 시골구석에서 조용히 살다가 윈터 뒈지면 그때 다시 돌아와. 시라트 내부 일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 아니면 나도 협조해 줄게.”

“…….”

“응? 우리가 마음만 먹고 숨으면 시라트의 늑대들은 절대 못 찾지. 일명 사랑의 도피!”

“사랑의 도피 같은 소리 하네.”

“부자간의 정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거야, 섀넌.”

카일의 말을 듣자마자 윈터의 고백이 불현듯 귓가에 스쳤다.

좋아해요, 섀넌, 정말 많이 좋아해요.

더불어 지난 밤에 그와 나눴던 행위와, 제 얼굴 위로 쏟아지던 열띤 신음도.

“……누가 부모고 누가 자식이라는 거야.”

“아, 그럼 뭐, 후견인과 피후견인 간의 사랑…, 어감이 좀 불순하긴 한데, 아무튼 좋은 생각이지? 시라트인지 뭔지 알게 뭐야. 솔직히 윈터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야? 지금껏 그리말디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어디서 야만 부족 같은 것들이 나타나서 자하카라고 떠받들면 걔가 좋아하겠어?”

“…….”

“아직 윈터한테 얘기 안 한 거지.”

정신없이 주절대던 카일이 별안간 낮게 물었다. 안 했어, 섀넌이 짧게 대꾸했다.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온갖 명분을 갖다 대며 보류하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다.

하지만 대체 언제가 적절한 타이밍이었을까. 나는 그저 맹약 때문에 널 보호하고 있는 거고, 그 기한은 네가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다. 너는 언젠가 저 박제 장식과 같은 모습을 한 네 동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말을,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는 게 과연 있기나 했을까.

카일이 의자에 다시 등을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라리 끝까지 말하지 말고, 같이 숨어 지내. 그냥 일평생 편하게 살다 가게.”

“다리야가 그러라고 내게 윈터를 맡긴 건 아니잖아.”

“그딴 거 알 바야?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던 핏줄 제 명대로 살게 끝까지 보살펴 주겠다는데, 그 정도면 감지덕지해야지.”

속 편히 지껄이는 카일을 보며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윈터를 왜 애지중지할까? 자하카의 핏줄이라서? 그저 그 핏줄이 아무 데서나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면 그걸로 만족할까? 그들이 윈터를 아끼는 건 자신들의 잃어버린 영좌를 되찾아줄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야. 영좌를 잇지 못하는 핏줄이라면 남보다 못하지.”

“그러니까 그딴 게 다 알 바냐고.”

잠시 대화가 멎었다. 불량하게 늘어뜨린 자세로 앉아 섀넌을 빤히 쳐다보던 카일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난 간다. 요즘 좀 바빠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일을 향해 손을 뻗은 섀넌이 그를 멈춰 세웠다.

“편지 다시 줘 봐.”

그가 카일에게 손을 까딱였다. 카일이 한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그에게 툭 던졌다.

* * *

「내내 시라트에 처박혀서 아이가 어떻게 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것들이, 이제 와서 그놈의 대의를 위한답시고 아이를 돌려보내라 통보하면 다인 줄 아는 모양이군.

내가 뭘 믿고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네놈에게 내 아이를 돌려보내야 하는 거지? 막말로 네놈이 다리야의 졸개였는지 검은 늑대들의 이중 끄나풀인지 내가 알게 뭐야. 그렇지 않나?

다음번엔 내가 납득할 만한 얘깃거리를 들고 ‘직접’ 찾아오는 게 좋을 거야.

비겁하게 숨어서 이딴 종이 쪼가리로 아이를 보내니 마니 하지 말고, 네놈들이 그렇게 대단하신 일을 도모하고 있다면 지금 아이의 안전을 쥐고 있는 내 앞에 그 빌어먹을 얼굴을 드러내.

추신: 시계? 시계 같은 소리 하네. 시발.」

필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품위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용을 몇 번이나 훑었다. 그리고 이내 안도하는 듯한 쓴웃음을 흘렸다.

섀넌의 편지를 보던 갈리나는 다리야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하 감옥에서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게 어떻게 지켜온 증표인데, 왜 그렇게 허무한 짓을 하신 거예요…!’

‘아냐, 갈리나. 생각해 봐. 그자의 성정이 얼마나 잔혹하고 불같은지 잘 알잖아. 아마 그보다 더한 걸 부탁했다면 나는 여기 다시 오지 못했을 거야. 그놈 손에 죽었을 테니까.’

갈리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다리야는 가까스로 그리말디에게 아이를 맡기고 도주하던 길에 잡혀 버렸다. 적어도 모두가 알기로는 그랬다.

‘…설마, 일부러 돌아오신 건가요.’

‘그래.’

다리야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축축한 어둠이 짙게 깔린 감옥 안, 그의 얼굴은 몹시 평온했다. 마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듯.

‘영겁의 세월을 사는 불멸자도 결국은 생동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리말디가 정말 모든 것에 다 무뎌졌다면 진즉 죽었겠지.’

‘하지만, 그가 세상으로부터 등을 진 게 벌써 백 년 가까이 되어 간다고요. 그런 자가 고작 그런 맹약 하나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까요?’

‘그가 삶에 권태를 느끼고 은둔하면서도 생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건, 뭔가 새로운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그게 내 조카가 될 거라고 믿어.’

갈리나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의 윗대, 그 위의 윗대보다 더 오래 산 불멸자의 속내를 한낱 몇십 년도 채 살지 않은 자신들이 어떻게 감히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자가 당장 오늘 죽을 생각인지 내일 죽을 생각인지도 모르는데, 당장 아이가 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맹약을 이행한다 쳐도 그 직후에는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일이다.

최악의 상황에선 아이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그리말디 저택의 박제 장식이 될 수도, 아니면 지긋지긋한 생을 마감하는 그리말디의 최후 만찬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건…, 이건 너무 모험이에요. 차라리 그자에게 확실히 자하카의 영좌를 되찾을 수 있게 도와달,’

‘인간 사회 법도상 아이가 성년식을 치르기까지 족히 20여 년이 걸린다는 거 알고 있어, 갈리나?’

‘불멸자들에게 그 시간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내쉬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라고요!’

‘우리 필멸자들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도 목숨을 거는데,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아. 섀넌 그리말디는 절대 내 조카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불멸자가 스스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면 모를까, 늑대족으로서 어찌 그들에게 대놓고 자신들의 영좌를 지켜 달라고 청하겠는가. 다리야는 그런 불명예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리나는 다리야의 무모함에 결코 긍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리말디에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정에 매달려보자는 꼴이 아닌가. 그 악귀 같은 자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가…….

‘아즈낙에게 말해. 검은 늑대들을 부추겨서 내 머리를 성곽에 효수하라고.’

그러나 차분하게 이어진 다리야의 말에 갈리나는 하던 생각을 내팽개치고 헛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막았다.

‘다리야 님, …그건, ……그건 안 돼요! 만약 아이가 그리말디에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이라도 살아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몸이었지.’

‘…….’

‘그건 자하카의 형질을 많이 물려받지 못했다는 뜻이야.’

갈리나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리야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난 약해, 갈리나. 내가 살아서는 자하카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 없어.’

약한 개체는 인정받지 못하는, 늑대 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율법을 다리야는 무척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저 자신을 다르게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곽에 걸린 내 머리가 백골이 될 때까지 시라트는 절대 자하카를 잊을 수 없을 거야.’

갈리나는 순간적으로 목에 탁 걸려 오는 먹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안타까움과 애통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다리야가 차분히 말했다.

‘내 조카가 그리말디의 위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시라트로 돌아올 때, 우리 또한 그만한 준비가 갖춰져 있어야 그의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겠지.’

거칠고 투박한 손이 창살 사이로 튀어나와 갈리나의 손등을 지그시 덮었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갈리나.’

‘…….’

‘그 아이야말로, 영원한 왕좌의 주인이야.’

타닥, 탁, 편지 끝이 주홍빛 불에 금세 타들어 갔다.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검게 사그라지는 우아한 필체를 응시하며, 갈리나는 덤덤하고도 결연한 다리야의 얼굴을 내내 머릿속에 그렸다.

그의 말은 전부 맞아 떨어졌다.

그리말디는 자하카를 아끼다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행여 편지가 발각될까 봐 일부러 답장 대신 시계 정도만 보내 달라고 한 건데, 이자는 그딴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발각되든 말든 제 다급한 성질을 어떻게든 쏟아내는 데에 급급해하고 있지 않은가.

짤막한 글에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그의 복잡한 감정이 행간마다 드러나 있어서, 갈리나는 그의 마음을 쉬이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답장은, 안 쓰십니까요?”

그녀의 곁으로 히히 웃는 소리가 다가왔다. 시라트로 잠입했던 추격자 중 하나였다. 잠입하다 발각되고는 고생을 많이 하였는지, 안 그래도 초췌했던 그의 뺨이 움푹 파여 있었다.

까만 재가 쌓인 벽난로를 들쑤시던 갈리나가 짧게 말했다.

“아뇨. 이번엔 답장 대신 제가 직접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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