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Reverse Turn (4/18)

3. Reverse Turn

케인타운의 사계절은 늘 포근했다.

계절이 몇 바퀴나 돌아 더는 유아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자란 윈터는 이제 섀넌이 일일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등교 준비를 할 만큼 의젓한 열네 살이 되었다.

이제는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며 테라스에 앉아 등교하는 윈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일상에 익숙해져 있던 섀넌이 오늘따라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윈터의 방 앞에 섰다.

“윈터, 늦었어.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심코 문손잡이를 돌리던 섀넌이 잠시 당황했다. 단 한 번도 잠겨 있던 적 없는 윈터의 방이 굳게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윈터?”

섀넌이 가볍게 노크를 하며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윈터가 안에 있긴 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옷 스치는 소리 하며 방을 돌아다니는 발소리, 약간 가쁜 듯한 숨소리를 듣자 하니 아직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윈터,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나와.”

대체 문은 왜 잠근 것인가. 평소의 패턴과 다른 윈터의 행동에 섀넌은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그 상태로 몇 초 기다리던 섀넌이 문득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애가 문을 잠갔다고 해서 자신이 얌전히 기다려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갈 거야.”

섀넌이 차분히 경고했다. 그제야 문 가까이 다가오는 윈터의 발소리가 들렸다.

―……섀넌, 나 오늘은 학교에 못 갈 것 같아요.

안에서 이제 막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소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섀넌이 단번에 그의 상태를 눈치채고 모르는 척 담담하게 물었다.

“왜.”

―……모, 몸이 안 좋아서요.

“그걸 꼭 이렇게 문 너머로 얘기해야 할까? 열어.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녜요, ……그냥, 좀 잘게요.

“마지막으로 얘기할게. 문 열어.”

―…섀넌, 나 좀 그냥 두면 안 돼요?

그냥 문손잡이를 강제로 돌려 열고 들어가려던 섀넌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물론 어릴 때처럼 툭하면 제 침실에 쳐들어와 같이 자자고 어리광을 부리던 나이는 지났지만, 이렇게 대놓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저를 거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섀넌은 지금 윈터가 반수의 몸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윈터는 여전히 불규칙한 발현을 반복하며 성장통을 겪고 있지만, 예전만큼 심하게 앓지는 않았다.

다만 윈터가 스스로 발현을 참아 보려다가 더 탈이 난다거나 변화한 제 모습 때문에 눈에 띄게 우울해지는 일이 많았다.

발현으로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그렇지, 문까지 잠가 둘 일인가…….

그냥 놔둘까 잠시 고민하던 섀넌이 문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틈새로 윈터의 발이 만든 그림자가 슬쩍 보였다. 문에 바짝 붙어 서서 귀를 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았어.”

―가요, 섀넌.

“그래, 갈게.”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섀넌이 문득 얼굴을 굳히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문틈으로 미약한 피 냄새가 느껴진 탓이었다.

문 아래 틈으로 보이는 윈터의 발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섀넌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윈터는 여전히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안 가요.

귀를 기울이며 섀넌이 정말로 멀어지는지 확인하고 있었는지, 윈터가 작게 물었다. 섀넌은 그저 대답 없이 계속 그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섀넌, 정말 갔어요?

“…….”

―섀넌 냄새가 계속 나는데…….

한참이나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던 윈터가 결국 뒤로 물러났다. 문틈으로 보이던 발 그림자가 사라지고, 몇 초 더 기다린 섀넌이 문손잡이를 가볍게 부수며 열고 들어갔다.

“섀넌…!”

놀라 소리치는 윈터보다 더 놀란 건 섀넌이었다. 섀넌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윈터의 머리와 방 안을 둘러봤다.

어쩐지, 저택에 계속 피 냄새가 돈다 했더니……. 자신이 요즘 통 사냥을 못 해 착각한 줄 알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윈터?”

섀넌은 윈터를 천천히 훑었다. 벌어지는 골격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진 셔츠와 바지, 평소 제가 늘 빗겨 주던 아름다운 은백색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 윈터의 다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은백색 꼬리.

그리고 윈터의 손에 들린 작은 주머니칼.

섀넌의 시선이 제 손에 닿자 마치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윈터가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곧장 곁에 있던 담요를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나가요!”

섀넌이 성큼성큼 걸어 담요를 휙 벗겼다. 그리고 끝이 조금 베여 피가 줄줄 흐르는 윈터의 귀를 확인했다. 아이의 얼굴은 평소의 그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발현 때마다 섀넌이 숱하게 보아 온, 반인반수의 얼굴이었다.

윈터가 다급히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비정상적으로 마디가 굵어지고 길어진 손톱이 섀넌의 눈에 들어왔다. 그 손마저 부끄러운지 제대로 펴지 못했다. 윈터는 지금 어딘가로든 제 온몸을 숨기고 싶을 것이다.

“바보 같기는.”

섀넌이 혀를 차며 윈터의 귀를 살폈다. 머리와 연결된 부위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혈관이 많이 모인 곳이라 그 조금 잘린 것만으로도 출혈이 상당했다.

“어디 좀 봐.”

섀넌이 제 다리 사이로 윈터를 끌어당기며 뒤를 확인했다. 꼬리 쪽은 더 심각했다. 고통 때문에 한 번에 자르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하느라 상처가 깔끔하지 못하고 너덜너덜했다.

“이걸 자르면 사람이 될 줄 알았어?”

윈터는 그저 훌쩍이며 울기만 했다.

“이 얼굴이며 손은 어떻게 할 거야. 골격이 달라졌는데 귀랑 꼬리만 자른다고 숨겨질 줄 알았다니. 생각 이상으로 멍청한 아이로구나, 윈터.”

“……섀넌이 싫어하잖아.”

윈터가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 모습은 내가 봐도 흉측해. 어떻게 해도 섀넌이 예뻐할 수 없는 모습이잖아요. 빌어먹을 꼬리랑 귀만 없었어도…….”

윈터가 우는 소리를 듣고 올라온 러셀이 방 안의 광경에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섀넌이 짧게 지시했다.

“소독약과 연고, 붕대를 가져와.”

러셀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섀넌은 윈터의 몰골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폈다.

객관적으로 이 모습이 흉물스러운 건 사실이다. 굳이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해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간 발현 때마다 숱하게 보아온 모습이라 섀넌에겐 별달리 혐오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발현한 윈터의 모습을 혐오하는 건, 오직 윈터 자신뿐이었다.

섀넌에게서 대답이 없자 윈터의 울음소리가 더 서럽게 커졌다. 그 소리가 피곤하다는 듯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싫다고 하든? 지금껏 내가 네게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이제는 너무 커 버려 예전처럼 한 품에 쏙 안지는 못하지만, 섀넌은 그를 제 품으로 끌어와 등을 다독였다. 그게 싫었는지, 윈터가 그를 밀어냈다.

“나가요, 섀넌.”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명령을 해.”

섀넌이 다시 그를 붙잡아 앉히는 동안, 러셀이 치료 도구를 들고 돌아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힐끗 그를 올려다본 섀넌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러셀을 향해 얼른 꺼지라는 듯 손짓했다.

“돌아앉아.”

섀넌이 윈터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등을 보이게 돌리며 말했다.

“나는 내 것에 흠집이 나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야. 네 몸이 이 꼴인데 내가 순순히 나가 줄 줄 알고?”

작은 등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뚝. 그만 울어.”

털이 복실복실한 회색 꼬리를 잡으며 경고하자, 윈터의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그가 제 꼬리를 만지니 놀라서 그런 것인지, 울지 말라는 경고에 다급히 울음을 삼키느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 ……아파요.”

갈라진 상처에 소독약을 붓자 윈터의 몸이 빠르게 경직되었다. 느슨하게 축 늘어져 있던 꼬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

열네 살짜리가 스스로 꼬리를 자르려 시도해 봤자 뭐 얼마나 깊게 벨 수 있었겠는가. 차라리 가위를 쓰지 그랬어, 칼보다 그게 효율적인데. 섀넌은 무의식중에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꼼꼼히 연고를 바른 뒤 붕대를 감으며 섀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흉은 남을 것 같았다.

윈터의 몸은 저와는 달라서, 그간 얼마나 그의 상처와 흉터에 각별히 신경을 썼던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 등신 같은 새끼가…….

“어떻게 키운 몸인데 함부로 흠집을 내.”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다.

“돌아앉아.”

꼬리 부분 처치를 마친 섀넌이 다시 그를 저와 마주 보게 돌려 앉혔다. 귀는 얇아서 처치하기가 더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이리저리 살피던 섀넌이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대자, 윈터의 귀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아파요!”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생살이 갈라진 귀를 그리 파닥거리는데 안 아플 수 있겠는가. 깨끗한 솜에 소독약을 듬뿍 적신 섀넌이 다시 조심스럽게 환부에 그것을 갖다 댔다.

“아아.”

털끝만 닿아도 유독 민감한 귀가 계속 파닥거렸다. 섀넌이 짜증을 억누르며 억지로 그의 귀를 붙들고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피를 닦아 냈다.

안 그래도 며칠 굶은 상태에 피 냄새를 계속 맡고 있자니 신경이 곤두섰다. 윈터는 윈터대로 신경이 곤두선 듯, 섀넌의 손이 닿는 곳마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연고를 바르며, 아직 소독약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윈터의 귀를 말리고자 섀넌이 호,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섀넌!”

갑자기 격렬하게 귀를 파닥거린 윈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섀넌은 윈터의 눈이 이렇게나 커진 것을 처음 보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뭘 하긴, 치료하고 있잖아.”

섀넌이 화를 억누르며 덤덤한 얼굴로 다시 윈터를 제 품으로 끌어왔다. 윈터가 귀를 움직이는 바람에 애써 발라 놓은 연고가 다 뭉개졌다. 섀넌이 혀를 차며 꼼꼼히 연고를 펴 바르고 다시 입바람을 호 불었다.

“으악.”

순간 귀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제 손으로 정신없이 털어 낸 윈터가 놀란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짜증을 꾹꾹 참고 있는데 윈터가 발작하듯 난리를 치니,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섀넌이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그, 그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긴 뭐가 뭐야, 자꾸.”

섀넌이 두 다리로 윈터의 몸을 꽉 옭아맸다.

“그러는 너는 뭔데 이렇게 날뛰는 거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건 그새 잊었어?”

“이상해요, 그거 하지 마세요!”

“그럼 자해를 하지 말았어야지.”

윈터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꽉 껴안은 섀넌이 그의 귀를 빠르게 처치했다.

소독약으로 젖은 털이 축축해 연고가 잘 스며들지를 않으니 계속해서 입바람을 불어 댔고, 그때마다 윈터는 몸을 이리저리 뒤채며 괴로워했다.

“제기랄, 흉터가 남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라.”

윈터가 하도 예민하게 반응하니 세심한 처치를 하지 못한 섀넌이 결국 연고를 뭉텅뭉텅 얹어 놓고 귀 한쪽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았다.

섀넌이 풀어 주자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서 훌쩍 떨어져 앉은 윈터가 담요를 온몸에 둘둘 말고 웅크렸다. 그 와중에도 귀를 움직이는지, 붕대가 계속 쫑긋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보던 섀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치료 도구를 정리했다. 피로 엉망이 된 침실은 러셀이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도 며칠 간은 계속 피 냄새가 머물러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는 윈터에게 다가갔다. 더는 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큰 몸이었지만 어른이라고 부르기는 턱없이 부족한, 섀넌의 눈에는 한없이 작은 몸이었다.

“더 흉한 몰골도 많이 봤어.”

섀넌이 그런 그를 품으로 깊이 안으며 말했다.

“이 정도쯤이야.”

“…….”

긴장으로 바짝 굳은 윈터가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겠지. 이게 네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걸.”

“나한텐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섀넌한텐 아니잖아요.”

잠시 말문이 막힌 섀넌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들어 한 마디도 안 진다. 쥐 콩만 한 게 따박 따박 말대꾸를 해대는 꼴이 아주 우스웠다.

“윈터, 나 봐.”

섀넌의 말에 반항하듯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윈터가 이내 힐끗 그를 쳐다봤다.

“내게 정말 예쁨 받고 싶었다면 이런 쓸모없는 일을 벌이지는 말았어야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뭐…?”

“빌어먹을 귀랑 꼬리만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어. 괴물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두려워. 거울 속에 흉측한 괴물이 있을까 봐….”

자꾸만 시선을 피하려는 윈터의 뺨을 잡아 억지로 저를 보게 한 섀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 모두가 널 더러 괴물이라 말해도, 심지어 너조차 그 말에 동감한다 해도, 너만은 너 자신을 괴물로 여겨선 안 돼.”

“…….”

“너마저 네 모습을 증오하면 세상에 널 사랑해 줄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그래서, 섀넌은 날 미워하나요…?”

윈터의 얼굴이 또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섀넌은 골격이 조금 달라져 동그란 곡선을 그리는 그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춰 주었다.

“내가 널 미워한다면 이런 짓은 할 수 없겠지. 그렇지 않니?”

섀넌의 말 어디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윈터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섀넌이 혀를 차며 얼른 그의 눈가를 쓸었다.

“이런 일로 울지 좀 마. 울면 지는 거야. 사람들의 비웃음만 더 살 뿐이라고.”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요….”

“그럴 땐 차라리 웃어. 웃음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장 좋은 가면이니까.”

윈터가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한 번 닫힐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섀넌이 손끝으로 계속 훑었다.

“울면서 웃으라고요…? 그게 더 이상해.”

“이딴 일에 질질 짜는 한심한 놈이 될 바에야 울면서 웃는 미친놈이 되고 말지. 안 그래?”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계속 차올랐다.

“…내가 미친놈이 되는 게 더 나아요? 섀넌은?”

“동정받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걸.”

섀넌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윈터의 눈물을 계속 닦아 주던 섀넌이 그의 뒤통수를 잡아 제 품으로 당겼다.

“다시는 네 몸에 흠집 낼 생각하지 마. 네 몸은 도자기와 같단다. 작은 흠집이라도 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도자기.”

“…….”

“아무리 애써도 본질은 바꿀 수 없어, 윈터.”

이마에 닿았던 입술이 늘 하던 것처럼 아래로 내려가 뺨에 닿았을 때, 윈터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입을 맞추기엔 서로 민망한 나이가 되어버려 입술을 맞대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뺨까지는 허용해 주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 헛숨을 흘린 섀넌이 미련 없이 윈터를 놔주었다.

“옷 갈아입고 내려와. 아니, 어차피 학교는 쉬어야 하니 좀 더 자든가.”

“…더 잘래요.”

“그래.”

섀넌이 피로 더럽혀진 융단을 힐끗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엉거주춤 일어나는 윈터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가 밖으로 나가며 침실 문을 닫았다.

방에 홀로 남은 윈터가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제가 두르고 있던 담요를 들춰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고간 때문에 바지 앞섶이 불룩했다. 안 그래도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땐 신체의 모든 부위가 다 커지는데, 갑자기 피가 몰리며 더 흉물스럽게 부풀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이것을 숨기려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섀넌이 자신을 안는 바람에 더 난처해졌다. 물론 다행히 섀넌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윈터는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부터 그가 자신을 만지면 종종 소름이 돋았다. 섀넌이 만져 주는 게 기분 좋은 건 변함없었지만, 왜인지 전처럼 안락한 느낌이 들지 않고 어쩐지 오싹했다.

그와 자신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제는 접촉만으로도 이렇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낯선 기분을 느끼는 걸까.

윈터는 이 모든 변화를 제 탓으로 여겼다. 자신이 괴물이기 때문에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거라고.

그는 가능한 섀넌이 이런 제 변화를 모르길 바랐다. 굳이 이런 얘길 꺼내서 섀넌과 자신이 확연히 다른 존재라는 걸 그의 입으로 설명하는 걸 듣고 싶지도, 그에게 새삼 상기시켜 주고 싶지도 않았다.

제게는 섀넌이 전부인데, 그에게 낯선 외부인이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앞으로는 혼자 해결해야 해.’

주위에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동족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교실에 처음 헨리 아치볼드가 왔던 날 섀넌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동족을 만난다는 게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걸 섀넌에게 말할 수는 없어.’

윈터는 홀로 침실에서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불룩 솟아오른 제 아래를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섀넌이 아무렇지 않게 제 귀에 바람을 불어넣던 순간이나, 몸부림치는 저를 꽉 끌어안던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서 더 난감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품으로 끌어와 안을 때 제 입술과 콧잔등에 닿았던 그의 쇄골과 목 언저리, 앞섶 사이로 힐끗 보이던 흰 살갗,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특유의 달콤한 체취…….

“…읏.”

윈터가 튀어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입술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그리고 제가 이 발현을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자신은 반드시 평생토록 섀넌과 같은 사람의 모습만을 하고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절대 이 흉물스러운 모습이나 짐승의 몸으로는 화하지 않으리라.

* * *

아래에서 기다리던 러셀이 윈터를 치료하고 내려오는 섀넌을 보고 빠르게 다가갔다.

“윈터는 좀 더 잔다니까 청소는 이따 저녁에 해. 피 묻은 융단은 그냥 버리고 새 걸로 다시 깔아.”

구급상자를 건넨 섀넌이 그대로 지나쳐 가려는데, 러셀이 두려운 눈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저기, 혹시…, 아무래도 윈터가, …미친 게 아닐까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던 섀넌의 얼굴이 일시에 확 찌푸려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러셀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오늘 일도 그렇지만, 제가 며칠 전에 진짜 이상한 광경을 봤거든요.”

잔뜩 목소릴 낮춘 러셀이 속삭였다.

“대체 무슨 얘길 하는,”

“쉿……!”

태연하게 되묻는 섀넌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러셀이 기겁하며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위층 계단참을 힐끗 올려다본 러셀이 섀넌의 팔을 붙잡고 홀 밖으로 끌고 갔다.

“얼마 전에 제가 주방에서 사슴 고기를 통째로 작업대 위에 올려놨었는데요.”

귀찮음이 역력한 기색으로 그에게 비척비척 끌려간 섀넌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런데?’ 하고 물었다.

“살 바르는 작업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윈터가 주방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수면제를 찾아 달라고요. 그래서 제가 약을 가져다드리려고 잠깐 주방을 비웠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글쎄…….”

별 흥미롭지도 않은 얘기로 뜸을 들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섀넌이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윈터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사슴 날고기를 손으로 잡아 뜯는 겁니다. 그 손 마디마디가…, 반인반수의 모습이었어요. 고기를 그냥, 이렇게…, 이렇게 뜯어 먹더라고요.”

손으로 뭔가를 뜯어 먹는 듯한 시늉을 한 러셀이 무시무시한 얘길 털어놓은 것 같은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잠시 표정 변화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섀넌이 물었다.

“그게 다야?”

“…예?”

“그게 뭐.”

“아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핏물 밴 날고기를 그냥 먹는다니요? 아무리 고기를 좋아해도 광인이 아니고서야…….”

광인이라는 말에 미간을 확 일그러뜨린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당황하는 러셀을 한심하다는 듯 보던 섀넌이 툭 말을 뱉었다.

“그게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애에겐 그게 더 입맛에 맞는 모양이지.”

차분한 섀넌의 말에도 러셀은 그다지 수긍하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솔직히, 다 익힌 고기를 무슨 맛으로 먹겠어. 나도 사양이야. 흙 씹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윈터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적잖이 신경이 쓰이던 참이다.

그런 그가 뒤에서 몰래 날고기를 먹기도 한다니 제게는 도리어 안심되는 일인데, 그걸 세상 기괴한 일처럼 여기는 러셀의 태도가 섀넌은 몹시 못마땅했다.

“늑대가 식육과 동물인 건 알고 있지, 러셀? 그들이 사냥한 고기를 굳이 불에 익혀 먹지 않는다는 것도.”

“그, 그럼 앞으로 식탁에 날고기를 올려야 할까요?”

“알아서 하게 놔둬. 몰래 그러는 걸 보니 숨기고 싶은 모양인데.”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러셀이 별안간 뭔가를 떠올린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그, 그럼 말입니다. 그럼, 혹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는가. 섀넌이 미간을 좁힌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혹시, 윈터가 절 잡아먹지는 않겠죠?”

섀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욕도 나오지 않았다. 맹약 때문에 죽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종종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러셀은 죽음을 몹시 두려워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섀넌이 고저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잡아 먹히는 게 그렇게 겁나면 매일 주방에 신선한 짐승을 잔뜩 가져다 놓으면 되겠네.”

헙…, 눈을 크게 뜬 러셀이 헛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막았다. 그 반응에 더욱 할 말을 잃은 섀넌이 짜증을 억누르듯 낮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등신같이 굴 때마다 맹약이고 나발이고 널 죽여 버리고 싶어져.”

“아니…, 무서운 걸 무섭다고 말도 못 합니까? 사실 저 같은 인간이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않습니까….”

러셀이 말끝을 흐리며 손을 달달 떨었다. 그 꼴을 한심하게 보던 섀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윈터는 자랄수록 더 늑대의 본성을 찾아갈 거야. 그때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 피곤해, 러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러셀을 잠시 노려보던 섀넌이 이내 그를 지나쳤다.

섀넌은 윈터가 어릴 때 종종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는 자신이 자다가 섀넌을 깨물 것 같다거나, 이가 간지럽다며 그 깜찍하고 작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곤 했다.

먹이를 사냥하는 것,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먹는 것, 상대를 물어뜯어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와 늑대 간에 비슷한 점이 꽤 많군. 섀넌은 문득 든 생각에 씁쓸한 헛웃음을 흘렸다.

* * *

간혹 윈터가 발현 때문에 눈에 띄게 우울해하거나 이상한 낌새를 보인 것을 제외하면, 섀넌은 그럭저럭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보통 아이들보다 성장이 더뎠던 윈터는 변성기가 찾아오면서부터 뒤늦게 불쑥 자라기 시작했다. 그 탓에 섀넌은 가끔 윈터의 등굣길에 동행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일부러 멀리서 구경하기도 했다.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혀 키운 보람이 있게도, 윈터는 또래들보다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체구가 컸다.

이제 고작 열여섯 살이 되었을 뿐인 아이가 보통 성인보다 큰 편인 제 키를 거의 따라잡았을 정도이니, 섀넌은 그가 아마 진짜 성인이 되면 자신보다 더 커지지 않을까 짐작하며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다만 모든 게 흡족한 일상에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은, 아이가 이렇게 크는 동안 시라트로 잠입한 추격자들이 여태 연락 두절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런 경우엔 무소식이 낭패다. 게다가 아치볼드 저택 사건 이후 몇 년간, 검은 늑대 놈들이 지나치게 조용하지 않은가.

얼마 전 카일이 구해 온 시라트 설원의 내부 지도를 펼쳐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은 창밖으로 들리는 마차 소리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러셀이 늘 모는 그리말디가의 마차가 아닌, 낯선 이의 마차 소리였기 때문이다.

곧장 저택 밖으로 나간 섀넌이 마차에서 내려 제집 대문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일전에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이튼홀의 교내 징계 위원장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이렇게 큰 저택에 사용인도 없고, 대문을 열어 주는 이도 없이 그리말디가 직접 철문을 밀고 나오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던 위원장이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말디 경. 이튼홀 징계 위원장 앨버트 맥코이입니다.”

섀넌이 큰 대문을 손수 닫고 걸어 잠그는 것을 보며, 그가 물었다.

“외출하시려는 길이셨습니까?”

“…예, 뭐. 무슨 용건이신지?”

“아, 안타깝게도, 선약은 취소하셔야겠습니다. 경의 피후견인께서 문제를 좀 일으켰는지라…….”

“윈터가?”

“같은 클래스의 학생을 폭행해서, 교내 진료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그 학생 어머님께서 오셔서 지금 사설 병원으로 옮긴 참입니다. 아무래도 같이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윈터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집사분과 함께 사설 병원에 계십니다.”

내내 침착하던 섀넌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윈터가 다쳤습니까.”

“아뇨, 경의 피후견인은 괜찮은데, 그에게 맞은 상대 학생이…, 출혈이 조금 심해서요.”

“아아….”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섀넌을 보며, 앨버트가 마차를 가리켰다.

“일단 타시지요.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섀넌은 별달리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마차에 올랐다.

볼드윈가의 외아들은 철제 삼각뿔에 머리가 찔렸다고 했다. 윈터의 말로는 눈을 찌르려고 했는데 빗나간 거라고.

“애 머리채를 잡고 이렇게, 이렇게 마구 찧었다고요!”

볼드윈 부인의 목청은 몹시 뾰족했다. 섀넌이 순간 찌푸려지는 얼굴을 느슨하게 풀며 애써 표정을 지웠다.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에 애새끼들끼리 싸우다 보면 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윈터를 거의 살인귀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처맞을 짓을 했으니 처맞았겠지…….

제 아이가 또래들보다 워낙 신체적으로 우수하니, 단지 절제하지 못해 일어난 작은 사고일 뿐이었다.

“악귀가 씐 게 분명해요! 우리 로빈도 똑똑히 봤다고 했어요! 저 애 눈이, 눈이…,”

“볼드윈 부인.”

섀넌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윈터에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볼드윈 부인의 손을 지그시 잡아 아래로 내렸다.

“일단, 진정하세요. 닥터 코넬께 긴급히 전보를 보냈으니 아마 오늘 밤이나 늦어도 내일 아침까진 와 주실 겁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고 한바탕 고함을 치려던 볼드윈 부인이 흠칫 놀랐다. 그녀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다, 닥터 코넬이요? 왕궁 수석 의관이신 닥터 코넬…?”

섀넌이 얼른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 다행히도 아이의 부상은 가벼운 수준이었다. 윈터의 말대로, 내려친 방향이 살짝 엇나가 그리 타격을 받지 않았고, 날카로운 모서리에 두피가 조금 찢어져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침 코넬 선생께서 바로 옆 도시에 머물고 계셨던 게 천운입니다.”

볼드윈 부인이 당황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섀넌이 그녀와 병원 복도를 걸으며 말을 이었다.

“왕도의 의료 수준은 다른 지역보다 몹시 뛰어나답니다. 특히 코넬 선생께서는 자상에 이골이 나신 분이지요. 아시다시피, 지금의 왕께서 젊었던 시절엔 검투를 매우 좋아하셨던지라…, 그러니 흉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차분한 섀넌의 설명에, 볼드윈 부인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열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제 손으로 직접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애지중지한 외아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던 걸 생각하면, 이보다 더 길길이 날뛰어도 속이 시원치 않을 상황이긴 한데…….

“그, 그분은 무척 바쁘시지 않나요? …닥터 코넬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지역마다 최소 수십은 된다고 들었어요.”

“부인의 귀한 아드님께서 저렇게 누워 계시는데 그깟 얼굴도 모르는 난치병 환자들 따위 알게 뭐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섀넌의 대답에 볼드윈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여기서 더 날뛰면 오히려 자신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자신은 그리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왕궁 수석 의관의 직위를 내려놓고 나라 곳곳의 난치병 환자들을 시료하고 계신다는 코넬 선생이, 고작 새끼손가락 반 마디도 안 되어 꿰맬 필요도 없는 제 아들의 상처를 친히 살피러 오신다는데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섀넌이 걸음을 늦추다가 이내 살짝 멈춰 서며 볼드윈 부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저 또한 마음이 몹시 무겁군요. 닥터 코넬이라도 모셔 오지 못했다면 제가 무슨 면목으로 부인을 뵈었을지…….”

섀넌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볼드윈 부인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 볼드윈 부인은 점점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이 되어 그저 커다란 섀넌의 손에 얹어진 제 손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물론 제 아이의 몸에 티끌 하나라도 상처가 나면 속상한 것이 부모 마음이지만, 이렇게까지 넘치는 대처를 하는 섀넌에게 더는 화를 낼 명분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새삼 이렇게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보니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들어왔다. 눈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의 유려한 얼굴 위로 수심이 드리워졌다.

“부모 없는 아이를 거두어 보살피는 일이 이렇게나 쉽지 않군요. 조심스러운 얘기입니다만, 윈터는 종종 발작을 앓는 아이라, 제가 아이의 병세에만 신경 쓰다 보니 인성에 관해선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요.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런…, 아픈 아이였군요. 저도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운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로빈은 그나마 건강해서 다행이지만…, 참 심려가 크시겠어요.”

안타까운 얼굴을 한 볼드윈 부인이 손수건으로 제 입을 가렸다. 자신도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몹시 힘든데, 이 남자는 아픈 아이를 키우고 있다니 그 고충 또한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친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이만한 애정을 쏟는 게 어디 쉬울까.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참 빼어난 얼굴 하며, 남과 다름없는 먼 친인척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인성 하며, 그야말로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사내가 아닌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여인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요. 모쪼록 제 보상이 부인께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진심으로요.”

섀넌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볼드윈 부인의 손등에 스칠 듯 말 듯 입을 맞췄다.

그가 느리게 제 손을 내려놓는 것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볼드윈 부인은, 섀넌의 손이 제게서 완전히 떨어지려는 순간 불쑥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결혼은….”

섀넌이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안 했습니다.”

어머나……, 섀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드윈 부인의 묘한 탄식이 따라붙었다.

* * *

하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더니 안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겨우 볼드윈 부인을 진정시킨 뒤 윈터를 데리고 마차에 올라탄 섀넌이 경직된 뺨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제 옆을 흘끗 바라봤다.

윈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섀넌은 빈말로라도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그가 괘씸했다.

“학교에서 예절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사과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재작년부터 시작된 변성기가 거의 자리를 잡아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윈터가 작게 대답했다.

“……그 새끼한텐 사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새끼한테 사과하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미안한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어?”

섀넌의 말에 윈터는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친구의 머리통을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박살 내려 한 건 잘못됐어, 윈터. 누가 그런 무식한 짓을 하래.”

섀넌이 그에게로 몸을 살짝 돌려 앉으며 말했다.

“지성체답게 참을 줄도 알아야지. 아니면 목격자가 없을 때 패든가. 아이들 다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널 변호해 주지도 못하잖니? 오늘처럼 귀찮은 일도 생기고 말이야.”

“……그럼 아무도 보지 않을 땐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가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그래도 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열린 마부석 창문 너머로 러셀의 탄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섀넌은 제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나를 번거롭게 만들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절대 들키지 마. 알겠어?”

“들키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윈터가 고개를 돌려 섀넌을 쳐다봤다. 이제는 자신과 눈높이가 거의 비슷해진 소년을 보며 고개를 기울인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머리는 장식이야? 머리를 박살 내든 눈알을 찌르든, 정 그러고 싶은 녀석이 있으면 네가 알아서 머리를 굴려야지. 어른들에게 안 들킬 자신 없으면 아예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야.”

“…들키지만 않으면 살인도 괜찮다는 말로 들려요.”

섀넌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윈터와 눈을 맞춘 채 그저 눈썹만 가볍게 치켜세웠다. 시선을 오래 맞대고 있자 윈터 쪽에서 먼저 눈을 피했다.

잠시 창밖을 보던 윈터가 침묵을 깼다.

“미안해요, 섀넌.”

그가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 제 손을 꽉 움켰다 놓으며 괴로운 듯 말했다.

“하지만, …난, ……난 그렇게 밖엔 할 수 없었어요.”

“알아.”

윈터가 조금 놀란 얼굴로 섀넌을 쳐다봤다.

“……알아요?”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열여섯 살짜리 애새끼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데 무슨 심오한 이유 따위가 있었겠는가.

“뭐, 때릴 짓을 했으니 때렸겠지. 물론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섣불리 그런 짓을 저지른 네 경솔함이 조금 유감이긴 하다만.”

“…….”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한참 그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윈터의 눈이 아래로 툭 내려갔다.

윈터는 아까부터 제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긁어 내리거나 쥐어뜯고 있었다. 내내 신경 쓰이던 참이라, 섀넌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섀넌…!”

섀넌이 미간을 좁힌 채 윈터의 손톱을 살폈다. 손톱을 물어뜯다 못해 아예 뽑아 버리려 한 건지, 손끝이 죄 엉망이었다.

윈터가 손을 웅크리며 빼내려 하자 섀넌이 더 힘주어 잡아당겼다. 예전에 저 몰래 귀와 꼬리를 억지로 잘라 내려다 들킨 일이 생각났다. 그간 별일 없었기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너 뭐가 문제야.”

“…….”

“대체 왜….”

입술 안쪽을 짓씹는 듯 굳은 윈터의 입매를 본 섀넌이 말을 멈추고 그의 턱을 잡았다.

“아!”

그가 거센 악력으로 양 뺨을 꽉 누르자 윈터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길쭉하고 날카로워진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윈터가 고개를 뒤채며 섀넌의 손에서 벗어났다.

섀넌이 치미는 화를 꾹꾹 누르며 낮게 물었다.

“발현 중인데 왜 말을 안 했어.”

“…통제, 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거의, 숨길 수 있었는데.”

윈터는 말을 하면서도 마치 욕지기가 치솟는 것처럼 계속해서 호흡을 불규칙하게 헐떡였다.

학교에 다니며 보통 인간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다 보니 본인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야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저한테까지 숨기면 어쩌자는 말인가.

섀넌이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윈터.”

그러나 윈터가 좀처럼 접촉을 허용치 않고 계속해서 그의 손을 쳐냈다.

“나 좀 놔둬요, 섀넌. 만지지 말아요.”

윈터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힐끗거렸다. 해가 완전히 저문 거리는 점점 차가운 밤으로 물들고 있었다.

“섀넌한테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아.”

제 손으로 입을 가린 윈터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통제가 잘되지 않는 모양인지, 입술 새로 언뜻 보이는 치아는 아까보다 더 길어졌다.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모르겠어요, 그냥…, 모르겠어. …당신을, 해칠 것만 같아.”

그 얘기에 섀넌은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웃음이 튀어나오기 직전 삼켜 버린 섀넌이 덤덤한 투로 물었다.

“너 따위가 날 어떻게 해할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윈터가 갑자기 화를 내며 섀넌을 쏘아봤다. 그르렁거림이 섞인 목소리와 순간적으로 스친 청회색 안광에, 살짝 놀란 섀넌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아이가 자신을 이런 시선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 좀 컸다고 이제는 제게 대들기라도 할 참인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윈터.”

섀넌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향해 말했다.

“러셀, 속도를 좀 더 올려. 윈터가 발현 중이니까.”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제스처였다.

“학교는 며칠 쉬어. 나가 봐야 징계나 받지.”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에는 구름에 가려져 희미한 만월이 떠올라 있었다.

* * *

윈터는 제가 섀넌에게 하고 싶은 게 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섀넌과 시선을 오래 마주하고 있거나 그의 손이 닿으면 어쩐지 가벼운 소름이 일었다가, 발끝의 피가 머리 위까지 치솟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발현이 시작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급기야는 정말로 발현이 시작될 때도 있었다. 이제 윈터는 섀넌의 냄새만 맡아도 발현의 전조를 느꼈다. 더 가까워지고 싶고 그를 만지고 싶어 손끝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자주 있으니 억지로라도 발현을 통제해 보려 애썼고, 골격이 벌어지거나 망할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는 등의 흉측한 변화는 이제 어찌어찌 참아지게 되었다.

윈터는 의식적으로 제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로빈의 목소리를 차단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윈터는 학교에서 교우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워낙 또래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그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 귀로 흘려듣던 로빈 볼드윈의 말에 갑자기 관심이 기운 건, 그가 제 어머니와 함께 욕실에서 있던 해프닝을 말할 때였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뭐가?”

“어떻게 아직도 어머니와 욕조에 같이 들어갈 수 있냐고.”

“뭐 어때? 엄마잖아. 난 어릴 때부터 쭉 그랬는데. 윈터 너는 네 부모님,”

로빈이 갑자기 말을 머뭇거리다 급히 고쳤다.

“…너는 네 후견인과 사이가 안 좋아?”

“좋아.”

“근데 왜?”

윈터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원래 인간들은 제 부모와 함께 목욕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건가.

윈터는 왜 자신은 섀넌과 그럴 수 없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도 어릴 때 섀넌과 함께 목욕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섀넌과 있으면 자꾸만 발현의 전조 증상이 나타나 어쩔 수 없었다. 물에 젖은 섀넌과 살갗을 맞대는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 오싹한 열기가 내달렸다.

“…좀 이상한 것 같아 그건.”

“그래? 난 아직 엄마가 씻겨 주는 게 편해. 고용인들 손길은 너무 억세거든.”

로빈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현을 참느라 다 뭉개진 손톱 끝을 쥐어뜯으며, 윈터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넌 안 이상해? 어머니가 만지면….”

“뭐가?”

“소름 돋잖아. ……좀 이상한 것 같아.”

“나는 네가 더 이상한 것 같아, 그리말디.”

로빈이 그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후견인이 널 만지는 게 싫어?”

“…아니, 좋아.”

“네 후견인이 널 만지는 게 좋다고?”

“그리말디! 얘 얘긴 귀담아듣지 마, 우리 중 누구도 엄마랑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놈 없어. 이놈이 이상한 거지.”

로빈 옆에 있던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로빈을 말렸다. 그러나 로빈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네 후견인이 널 만지면 기분이 이상해?”

“……조금.”

“왜?”

로빈이 별안간 윈터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여기가 딱딱해져서?”

“로빈! 그딴 역겨운 얘기 좀 그만해!”

옆에 있는 아이가 로빈을 재차 말렸지만 윈터는 순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로빈이 제 고간 쪽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로빈이 조금 놀란 듯 윈터를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그의 표정이 크게 일변했다.

“너 정말이야? 네 후견인이 만지면 여기가 선다고?”

로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몰렸다.

“네 후견인, 남자잖아?”

“그게 왜?”

“윈터 그리말디! 맙소사, 우리 클래스에 후견인이랑 간음하는 놈이 있었다니!”

로빈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그것도 같은 남자끼리!”

“……뭐?”

윈터는 간음이 정확히 어떤 행위인지는 알지 못해도 그게 아주 나쁜 의미라는 건 잘 알았다. 성서를 배우는 시간에 늘 외는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로빈, 그만해! 무슨 이상한 소리야 그게?”

옆에서 누군가 말렸지만 이미 로빈은 뭔가에 단단히 꽂힌 듯 계속해서 소리쳤다. 간음, 간음! 도리어 그 자신이 간음에 미친 자 같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윈터의 팔을 누군가 잡았다.

“그리말디, 참아. 쟤 요즘 어디서 질 나쁜 걸 배웠는지 툭하면 저래. 그냥 무시해.”

“질 나쁜 건 저 자식이야! 후견인이 만지는데 거기가 왜 서? 미친놈 아니야?”

“그게 간음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윈터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것을 불행히도 로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윈터 그리말디.”

로빈이 삐딱하게 윈터의 앞에 서며 이죽거렸다.

“너는 네 후견인이랑 섹스하고 싶은 거야.”

윈터는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내달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손톱이 길어지고 손가락 마디가 뒤틀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윈터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발현을 참느라 손이 엇나가 삼각뿔에 놈의 눈알을 정확히 처박지 못한 게 한이었다.

* * *

‘난 그런 게 아니야.’

섀넌을 향한 제 감정은 결코 죄악으로 불릴 만큼 더럽거나 나쁜 게 아니었다. 섀넌이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 자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섀넌을 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모르겠어요, 그냥…, 모르겠어. …당신을, 해칠 것만 같아.’

그러나 윈터는 해친다는 말 이외에 달리 이 충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더 가까워지고 싶고 그를 만지고 싶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보다는 좀 더 짙고 오싹한…, 차라리 그에게 먹히거나 그를 먹어 버리고 싶은….

‘너는 네 후견인이랑 섹스하고 싶은 거야.’

로빈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윈터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름 끼치도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제 성기가 커지는 것과 섹스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그럼 간음은? 시도 때도 없이 아래가 부풀어 오르는 게 죄악이란 말인가?

그러나 자신은 원래 그런 존재다.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변하는 건 제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런데 대체 왜…….

“윈터.”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았던 이마 위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윈터는 저를 주의 깊게 살피는 섀넌을 바라봤다. 눈앞이 흐려졌다. 하얗고 검고 붉은 섀넌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윈터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우리 클래스에 후견인이랑 간음…, 네 후견인이 널 만지면…, 질 나쁜…, 간음! 난 사람을 먹어. 네 후견인이…, 남자끼리! 정확히는 그들의 피를 마시지. 간음! …지는데 거기가 왜 서? 너는 네 후견인이랑 섹스하고 싶은 거야! 난 사람을 먹어. 네후견인이랑섹스하고싶은거야네후견인이랑섹스하고네후견인이랑섹후견인이랑 난 사람을 먹어. 섹스하고 싶은 거야!

취향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짐승을 먹을 때도 있고.

한치도 보이지 않는 검은 물속은 온갖 자극적인 목소리로 꽉 차 있었다. 그 음성들은 때로는 날카롭게 살갗을 긁기도 하고, 때로는 물처럼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윈터는 그 소리에 질식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중간중간 들려오는 섀넌의 안락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그를 끝도 없는 심해로 가라앉게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숨통이 확 조여왔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부림치던 윈터의 시야로 별안간 하얀 얼굴이 확 들어찼다.

이것은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물살에 하느작거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한 쌍의 붉은 눈이 이지러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흰 얼굴의 악마는 어느새 윈터의 코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허윽……!”

윈터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시야에 흰 얼굴이 들어찼다.

이제 막 물에서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는 그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벌어진 골격 위로 잔뜩 경직된 근육이 꿈틀거렸다.

“……섀넌.”

형편없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이제야 조금씩 뚜렷해지는 시야에 윈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양 손목을 짓눌린 채 제 밑에 깔려 있는 섀넌의 차분한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윈터. 나야. …진정해.”

섀넌이 천천히 그에게 잡힌 한쪽 손목을 빼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댄 섀넌이 아주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자 윈터가 기겁하며 으르렁거렸다.

“쉬…….”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섀넌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린 윈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쉬…, 옳지. 심호흡하고, …천천히…….”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듯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는 윈터와 시선을 맞춘 채, 섀넌이 아주 침착하게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혼란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던 윈터가 얼른 몸을 비켜주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시트 위에서 내려온 섀넌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콘솔 위에 있던 물잔을 내밀었다.

섣불리 그것을 받지 않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윈터를 향해 섀넌이 조금 더 물잔을 밀었다.

“마셔.”

떨리는 손을 뻗던 윈터가 순간 흠칫 놀라 제 몸을 여기저기 살폈다. 벌어져 있던 골격과 잔뜩 부풀어 경련하던 근육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이런 게 네가 말한 통제라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은데.”

섀넌이 혀를 차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윈터는 제가 가까스로 인간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다면 또 아래가 부풀어서…….

섀넌에게 받은 물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윈터의 시선이 조용히 제 아래로 향했다.

“…….”

안타깝게도, 완전히 인간의 몸을 유지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윈터가 말없이 이불을 끌어 올려 제 아래를 가렸다.

제가 잠들어 있는 사이 이게 계속 부풀어 있었다면, 혹시 섀넌도 봤을까. 제 추악한 속내를, 그도 알았을까.

“이제 좀 괜찮아?”

그러나 섀넌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못 본 건가. 얼핏 보기에도 눈에 띄게 튀어나왔는데…, 이걸 그가 정말 못 봤을까. 그래, 봤다면…, 봤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 없겠지.

“악몽 한 번 요란하게 꾸네.”

“…어떻게 된 거예요, 섀넌? 왜 당신이…….”

왜 당신이 내 밑에 깔려 있었나요. 그 말을 묻고 싶은데 어쩐지 입 밖으로 내기가 수치스러웠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깔았으니까 깔렸겠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섀넌은 윈터가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들고 있는 물잔을 빼앗아 제가 대신 마셨다. 콘솔 위에 빈 잔을 내려놓은 그가 윈터를 살피듯 응시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직 아픈 건가?”

그가 윈터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 주려는데 윈터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가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이제.”

요즘 들어 윈터가 제 손길을 순간적으로 피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라서, 그때마다 물러난 거리만큼 더 다가가기도 지친 섀넌이 결국 손을 뗐다.

윈터가 급히 말문을 뗐다.

“방금 그건,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당신 말대로, 악몽 때문에.”

두서없이 더듬더듬 내려놓는 변명에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레…. 괜찮아, 어차피 익숙,”

“피곤할 텐데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

섀넌은 순간 다급히 제 말을 자르고 들어온 윈터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는 마치 일분일초라도 저를 이 침실에서 빨리 내쫓고 싶어 안달 난 듯했다.

하, 가볍게 헛웃음을 흘린 섀넌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일에 서운함을 느낀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는 이 감정을 황당함이라고 정의 내렸다.

“많이 컸네. 나한테 명령도 할 줄 알고.”

“그런 거 아니에요.”

윈터가 급히 변명하며 섀넌을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그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부탁하는 거잖아요.”

“그래, 알았어. 나도 굳이 커다란 사내 녀석 침실에 오래 있고 싶은 건 아니니까.”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뒤로 몇 발 내디뎠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한쪽 눈을 가늘게 접으며 잠시 윈터를 보던 섀넌이 결국 몸을 돌려 미련 없이 침실을 나갔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윈터의 몸이 느슨히 풀렸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제가 섀넌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물이 놓여 있는 콘솔과 엉망으로 젖은 침대를 보며 제 기억에 없는 일의 경위를 떠올려 보려던 윈터는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한 그가 땀에 젖은 셔츠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버렸다. 온몸이 열에 팔팔 끓는 듯 아직도 체온을 발산하고 있었다.

윈터는 섀넌의 서늘한 살갗이 제게 닿아 있는 상상을 했다. 어릴 땐 발현으로 열이 들끓으면 그의 셔츠를 풀어 헤쳐 그의 온몸에 팔과 다리를 두르고 가슴팍과 배를 맞대고 있기도 했었다.

제가 그러면 섀넌은 늘 기꺼이 셔츠를 벌려 저를 안아 주었다. 뜨거운 신열이 들끓는 몸 위로 감기는 그의 서늘한 살갗이 얼마나 매혹적인 안락함을 느끼게 했던가.

그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며 낮게 신음했다.

물론 섀넌은 제가 원하면 지금도 기꺼이 그래 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맨 살갗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지난날로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윈터는 잘 알고 있었다.

* * *

윈터의 침실 문을 닫은 섀넌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제 입을 막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전혀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인지 좀처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윈터를 깨우려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에게 손목이 잡혀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던 순간을 다시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물론 다른 놈이었다면 손목이 잡힌 순간 놈의 목을 비틀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제 아이였기에, 섀넌은 사고가 멎어 버린 것처럼 그가 제 몸 위에 올라탈 동안 그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두려워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열여섯 살짜리치고는 제법 악력이 강했지만, 제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단지 그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윈터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저와 비슷한, 사냥하는 자의 눈.

섀넌이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제 손목을 문질렀다. 윈터가 너무 세게 잡는 바람에 뼈에 살짝 금이 갔던 탓이다. 회복은 금세 되었지만, 어쩐지 계속 그 찌릿한 통증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

별안간 섀넌이 실소를 흘렸다. 한 번 흘러나온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살짝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그는 어쩐지 신기하고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제 손을 거치지 않으면 먹고 자고 싸는 것 중 그 어느 하나도 할 수 없던 갓난쟁이가 걷고 말을 하고, 성장통과 발현을 겪으며 어느덧 단단한 수컷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제게 나가라고 명령하던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도 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괘씸한 존재가 또 있을까.

제 침실로 들어온 섀넌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한 번 더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 * *

붉은 눈이 초승달처럼 이지러졌다.

윈터는 섀넌의 웃는 얼굴을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손을 대면 얼어붙을 것처럼 새하얀 얼굴이 그의 한 손에 쏙 들어왔다.

자신은 어느새 섀넌보다 모든 것이 다 커져 있었다. 그럼에도 섀넌은 아이 다루듯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습관처럼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 짓눌리는 말캉한 입술의 감촉에 윈터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섀넌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끝으로 붉은 입술을 약하게 짓이겼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모양 좋게 들어가는 폭신한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자 섀넌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새처럼 쪼는 듯한 키스가 짧게 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인데, 좀 더 오래 입술을 맞대고 있을 수는 없는 걸까.

윈터는 섀넌의 손을 잡아 그의 손끝을 제 입술로 지분거리며 아쉬워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우아한 찻잔이나 화려한 보석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윈터는 그 손이 얼마나 강인하고 잔혹한지 알고 있었다.

난 사람을 먹어. 정확히는 그들의 피를 마시지.

취향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짐승을 먹을 때도 있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환청이 귓가에서 흔들렸다. 어릴 적 섀넌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제 윈터는 묘한 흥분이 차올랐다.

차라리 섀넌에게 먹혀 버릴까. 그의 일부가 될까.

내가 그와 하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의 아름다운 손이 제 피로 빨갛게 물드는 걸 상상하자 윈터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섀넌의 목덜미를 감싸 당긴 그가 서툴게 입술을 부딪었다. 짓눌린 입술 새로 섀넌의 호흡이 새어 나왔다. 아찔할 정도로 달았다.

더 가까워질 수는 없는 걸까. 혀를 넣어보면 더 달콤할 것 같은데. 윈터는 폭신하게 짓이겨진 섀넌의 입술 틈새를 혀로 살짝 핥아 보았다.

“하아, 흐…, 읏…….”

윈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락한 쾌감에 휩싸였다. 촉촉한 입술 안쪽 점막을 핥고, 약간 뾰족하게 튀어나온 그의 송곳니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그 단맛이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실금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붉은 눈이 초승달처럼 이지러졌다.

맞닿은 입술이 미묘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섀넌이 저와 입을 맞추며 웃고 있었다.

“윽, 흐읏…….”

윈터는 침대 위에 엎어진 채 번쩍 눈을 떴다. 미처 닫아 두지 않은 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이쳤다.

어두운 침실 안에서 홀로 깨어난 윈터는 침대 시트에 한껏 비비느라 열이 오른 제 아래와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은 속옷의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 빌어먹을 악몽이었다.

* * *

볼드윈 부인은 한동안 섀넌을 귀찮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파트너로 사교계 파티나 오찬에 몇 번 참석한 섀넌은, 로빈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면 그녀와의 관계를 칼같이 정리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섀넌이 그런 성가신 일을 감수하는 동안 윈터는 내내 지하 서고에 틀어박혀 있거나 늑대인 상태로 지냈다.

사고를 쳐놓고는, 정작 머리가 찢어진 장본인보다 더 오래 학교에 나오질 못하니 일정 기간 근신처분을 내리려던 교장도 오히려 인편을 보내 윈터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윈터가 아침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문을 펼쳐 읽고 있던 섀넌이 눈만 들어 그런 그를 확인했다.

“…사고는 네가 다 쳐놓고 그 뒷수습은 나만 하는 것 같네.”

그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린 섀넌이 신문을 홱 접으며 말했다.

한동안 볼드윈 부인에게 시달린 섀넌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에스코트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더니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맞추려 했던 게 몇 번이고, 차를 마시자고 불러놓고 저를 침실로 끌어들이려 개수작을 부린 게 몇 번이던가.

윈터가 예쁜 얼굴로 제 앞에서 아양이라도 떨어 주었다면 그나마 스트레스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윈터는 어째서인지 내내 서고나 방에 틀어박혀 지냈고, 혼자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섀넌은 정말이지 기분 더러운 나날이었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로빈이 너를 통해 초대장 같은 걸 주면 칼같이 거절해. 더는 볼드윈 부인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

“볼드윈 부인이요?”

“그래. 그들이 네게 뭘 주든 아무것도 받지 마.”

섀넌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가 너 때문에 볼드윈 부인 침실에 끌려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명심해.”

“……침실요?”

아까부터 자꾸 제 말을 따라 하며 되묻는 윈터가 짜증 나서,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윈터가 다급히 걸어와 그의 앞을 막고 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좀 비켜 줄래? 피곤하니까.”

“섀넌.”

윈터가 별안간 섀넌의 손목을 잡았다.

아이의 손은 부쩍 커져 있었다. 윈터 자신도 제 악력이 세졌다는 걸 아는 건지, 섀넌의 손목을 감는 손길이 빠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하긴, 얼마 전 발현 때 제 손목을 거의 부러뜨릴 뻔했으니 그 악력이야 말해 무엇할까.

“왜.”

섀넌이 눈살을 찌푸린 채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침실에 끌려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다시 물어왔다. 섀넌이 고개를 기울이며 윈터와 깊게 시선을 얽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묻는 것 같은데.”

섀넌을 응시하던 청회색 눈이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알면 그걸 왜 묻겠어요.”

그때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던 긴장감이 순간 확 사라졌다. 섀넌이 윈터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학교 늦겠어.”

윈터는 마지못해 섀넌의 손목을 느릿느릿 놓고는 작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섀넌.”

“그래.”

섀넌은 평소처럼 윈터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주고는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어쩐지 예전과 달리 깊게 가라앉은 듯한 아이의 눈빛에, 섀넌은 그저 옆으로 비켜서며 얼른 가라고 턱짓했다.

윈터가 지나간 자리로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그의 침실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 무심코 그 문을 닫고 가려던 섀넌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췄다.

문 옆의 작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띈 탓이었다. 한때 러셀이, 또 한때 자신이 정독했던 늑대족 관련 서적이었다.

‘…서고에 내내 틀어박혀 있더니 이걸 찾아냈군.’

섀넌은 갑자기 아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든 제게 물어보고 제게서 듣는 말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는 이제 자신과 그의 다름을 명확히 인지하고 선을 긋기 시작한 듯했다.

내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혼자 이런 걸 보고 있었던 건가.

섀넌이 슬쩍 책의 표지를 열었다. 가장 첫 장에 으레 보던 전 대륙 지도가 보였다. 늑대족 관련 서적인 만큼, 북쪽 가장 끝에 있는 시라트 설원의 위치가 진하게 표시되어 늑대족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가 손끝으로 그 영토의 경계를 가만히 덧그렸다.

맹약의 기한은 이제 고작 4년 남짓.

섀넌의 얼굴에 착잡한 감정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그는 아주 찰나 무너졌던 제 표정을 가다듬고 태연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침실 문을 조용히 닫은 그가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 윈터의 방에 있던 늑대족 관련 서적이 다시 지하 서고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한동안 서고를 들락날락하며 그 책이 언제쯤 다시 꽂힐까를 주시하던 섀넌은 이제 윈터를 말없이 관찰했다.

* * *

나른한 오후, 섀넌은 할 일 없이 테이블 위에 엎어져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달간 볼드윈 부인에게 시달리느라 도통 집에 붙어 있질 못했다.

모처럼 멍하니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게다가 훈훈한 여름 바람이 딱 좋게 살랑살랑 불어오니 살짝 잠이 든 것도 같았다.

한쪽 팔에 뺨을 괴고 단잠을 음미하고 있던 그때 저택 밖에서 러셀의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를 마친 윈터와 함께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섀넌 님, 다녀 왔…….”

후문을 열어 테라스로 들어서던 러셀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자신을 보고 다시 조용히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제가 잠을 자고 있는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러셀, 섀넌은요?”

“테라스에서 주무십니다.”

목소릴 낮춘 러셀이 윈터의 질문에 대답하는 소리도 다 들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섀넌은 조금 더 이 나른함을 즐기고 싶어 꼼짝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섞던 두 사람이 흩어지며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섀넌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을 즈음, 정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기척이 다가왔다.

선잠에 든 섀넌은 그게 윈터의 기척임을 알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잠을 자려는데,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제 곁으로 다가온 윈터의 시선이 느껴졌다.

“…….”

이내 이마 위로 흐트러진 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기는 손이 와 닿았다. 머리칼을 쓸어넘긴 손이 귓바퀴와 목덜미를 느리게 스쳤다.

……자는 사람을 왜 이렇게 건드리지.

‘귀찮게.’

모른 척하고 좀 더 자려던 섀넌이 결국 눈을 떴다. 제 얼굴 주변을 배회하던 손이 빠르게 거두어졌다.

“……깼어요?”

윈터와 시선이 마주친 섀넌이 옅게 눈살을 찌푸리며 부스스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였던 윈터의 표정이 어쩐지 기묘했다.

그가 자신을 내내 응시하고 있었던 건 알았지만,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찰나에 지나간 탓에 섀넌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사람을 그렇게 건드려 대는데 어떻게 안 깨겠어.”

기실 그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잠은 깨어 있었으나, 섀넌은 그저 그렇게 대꾸하며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평소엔 내 손끝만 스쳐도 싫어하면서, 정작 너는 그렇게 멋대로 나 만져도 되는 거야?”

퉁명스러운 물음에 윈터가 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작은 나뭇잎을 들어 보였다.

“이게 묻어 있어서.”

“아.”

그런 거라면 뭐…,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제 목 언저리를 쓸었다. 몇 달간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 때문에, 섀넌은 이 상황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너 잠깐 여기 앉아 봐.”

윈터가 섀넌에게서 조금 떨어진 의자를 당기자, 섀넌이 테이블을 툭툭 치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느릿느릿 옆으로 다가와 앉는 윈터를 날카로운 눈으로 좇던 섀넌이 조금 시차를 두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지하 서고엘 갔는데, 책 하나가 사라졌더군.”

섀넌이 차분히 운을 뗐다. 윈터가 늑대족 관련 서적을 읽었다면 그에 관한 생각을 묻고 싶었다. 혹시라도 제게 궁금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섀넌.”

그런데 윈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섀넌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음, 서고에 있던 늑대족 관련 서적을 말하는 거야. 지금쯤이면 다 읽었을 텐데?”

“네……?”

윈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섀넌은 그의 눈을 보고 확신했다. 분명 윈터는 그 책을 다 읽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과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윈터, 네가 만약 네 존재에 대해,”

“섀넌.”

윈터가 조용히 그의 말을 잘랐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섀넌의 손 위로 윈터의 손이 덮였다. 한동안 이런 식으로 먼저 제게 손을 뻗어 온 적이 없었기에, 섀넌이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미안해요. 이제 정말 잘할게요. 다시는 섀넌을 속상하게 하는 일 없을 거예요.”

“…….”

섀넌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윈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윈터가 고개를 기울여 섀넌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런 일로 나 미워하지 않을 거죠?”

섀넌은 그가 말하는 ‘이런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사고 친 일을 말하는 건지, 한동안 제게 어색하게 굴었던 일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지하 서고의 책을 마음대로 가져다 봐놓고도 모른 척한 걸 말하는 건지…….

헤아려 보니 최근 들어 마음에 안 드는 짓을 많이도 했구나.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지만, 윈터가 요즘 들어 제게 숨기는 게 많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늘 제 품 안에 있길 좋아하던 아이가 한 발짝 멀어진 것 같은,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

“…내가 널 왜 미워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대체 언제쯤 버릴 건지.”

섀넌이 뒤늦게 대꾸하며 윈터의 표정을 티 나지 않게 살폈다. 윈터가 그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으며 대답했다.

“그럼 됐어요.”

“윈터, 잠깐.”

깍지를 꼈던 손을 느리게 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윈터의 손을 힘주어 붙잡은 섀넌이 그를 올려다봤다.

“…너 아무 문제 없는 거지.”

“…….”

“혹시라도 내게 숨기는 게 있어선 안 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난 알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 말에 잠시 섀넌을 내려다보던 윈터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내가 당신한테 뭘 숨기겠어요.”

섀넌은 그 순간 제 아이가 갑작스럽게 낯설어 보였다. 마치 어딘가에서 시간을 건너뛰고 온 것처럼, 아이의 웃음에서 수컷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 탓이었다.

“…네가 뭘 숨기든,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만 알아둬.”

대답 없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윈터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곧 섀넌의 뺨에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천천히 제게서 멀어지는 그를 보며, 섀넌은 다시금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섀넌은 매번 처음 겪는 난관에 봉착했다. 조금 익숙해진 것 같으면 다시 또 낯설어지고, 그가 점점 자신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은커녕 본인이 아이였던 적도, 소년이었던 적도 없는 섀넌은 점점 더 낯설어지는 윈터의 생각을 알 길이 없어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다.

다행히 볼드윈 사건 이후로 윈터는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았으나, 더는 예전처럼 마냥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흐르던 묘한 거리감과 경계는 섀넌의 예상보다 길게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윈터는 자연스레 다시 섀넌에게 다가왔고, 그 모습은 그에게 의지하던 어릴 때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섀넌은 그런 그가 신경 쓰이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맹약 이행 완료까지 몇 년 남지 않은 시점. 윈터가 더는 엇나가지 않고 제 울타리 안에 얌전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면서.

* * *

계절은 늘 다채롭고, 아이가 자라는 시간에는 점점 가속이 붙는다.

물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겠지만, 적어도 섀넌은 그런 착각이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단추는 커팅이 너무 화려하지 않은 것으로 달아 보았습니다.”

의상실 재단사가 둥그런 단 위에 올라가 있는 윈터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섀넌을 향해 설명했다. 윈터는 전신 거울로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몇 년 사이 키가 훌쩍 큰 청년이 된 윈터는 길 가다 스치면 반드시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볼 만큼 눈에 띄는 외모였다.

어릴 땐 그저 보얗고 예쁘기만 했던 얼굴이, 이제는 앳된 티를 다 벗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로 성장하고 있어 섀넌은 가끔 그의 얼굴에서 다리야와 닮은 구석을 발견하기도 했다.

소파에 삐딱하게 앉은 채 그를 보던 섀넌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추는 됐고, 프록코트 원단이 원래 이렇게 어두운색이었나?”

“예? 아, 몇 번 가공하고 나면 물이 좀 빠지지요. 완성되면 경께서 고르셨던 그 색상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음……, 섀넌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침음했다.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라, 재단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원단을 대 볼까요?”

“아니, 일단 만들던 건 마무리 지어 봐.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재단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최고의 퀄리티를 보게 되실 겁니다.”

“섀넌, 갑자기 웬 새 옷이에요? 비슷한 옷이 이미 많은 것 같은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재단사에게 넘긴 윈터가 물었다.

“옷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사교 모임에 나갈 때 혹시라도 의상으로 고민할까 봐.”

“그런 데 안 나가는 거 알잖아요.”

윈터가 단 위에서 내려오며 가볍게 웃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섀넌이 그에게 다가갔다.

“좀 나가라는 뜻이야. 한창 사교 시즌이잖아? 작년부터 이튼홀 학생들끼리도 여러 모임을 갖는 것 같던데, 관심 있는 모임이 정말 단 하나도 없어?”

어느새 제 키를 다 따라잡고도 저를 훌쩍 넘어선 윈터를 올려다보며, 섀넌이 여러 옷을 갈아입느라 살짝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굳이 그런 델 가야 할까요?”

마디 하나가 더 긴 손이 섀넌의 손등 위를 덮었다. 윈터가 제 머리칼을 만져 주는 섀넌의 손가락 사이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어 제 뺨에 갖다 댔다.

“…멍청한 놈들과 쓸데없이 어울리는 것보다, 섀넌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좋은데.”

“네 또래 아이들이 멍청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 두는 게 좋아.”

환복하느라 잠시 풀어 두었던 크라바트를 손수 윈터의 목에 두른 섀넌이 그것을 매어 주며 말했다.

“그래야 네게 걸맞은 파트너를 고르는 안목도 생길 테지. 다른 건 몰라도 성년식 파티 때는,”

“성년식 때 파트너가 필수인 줄은 몰랐는데요.”

제 말을 자르고 들어온 윈터의 말에 섀넌이 눈썹을 까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제 알았으면 됐네.”

“그런 걸 꼭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성년식을 안 한다고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니잖아요.”

크라바트를 매만져 주는 섀넌의 키에 맞춰 허리를 살짝 굽혀 준 윈터가 넌지시 말했다. 섀넌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튼홀 학생들은 성년이 되면 제가 원하는 과목만 선택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학교의 정규 수업보다 사교계 데뷔와 가업을 잇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받거나, 진로를 정해 대학 진학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윈터 또한 몇 달 전부터 학교에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지만, 정작 그는 사교계에도 대학 진학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처럼 왕궁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지는 못해도, 이곳 소도시에도 꽤 품격 있는 성년식 파티가 있어. 명문가 자제들이라면 무조건 성년식은 그렇게 치러야 하는 거야. 네가 천박한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도 아닌데 왜 그걸 건너뛰어?”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섀넌도 모르잖아요.”

“모르긴 왜 몰라. 당연히….”

시라트에서 태어났겠지, 라고 말하려던 섀넌이 말끝을 흐렸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은연중에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폭탄이 있는 듯했다.

이제는 윈터도 제 정체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시라트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걸 섀넌도 모르지 않지만, 왜인지 두 사람 사이에서 그에 관한 얘기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오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거봐요, 모르시잖아요.”

윈터가 한숨처럼 웃음을 퍼뜨리며 섀넌의 뺨과 귓불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그는 최근 들어 섀넌의 뺨을 자주 만졌다. 제 손이 커진 걸 감안해도 섀넌의 얼굴은 너무 작았다. 한 손에 쏙 감기는 희고 매끄러운 뺨의 감촉이 좋았다.

“어쨌든 성년식은 제대로 갖춰 치러야 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섀넌은 그가 제 뺨을 만지고 있는 것을 놔둔 채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옷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토 달지 마.”

윈터의 손이 섀넌의 귓불과 뺨을 부드럽게 배회하다 느릿느릿 떨어졌다.

“어차피 반년만 지나도 못 입게 될걸요.”

이렇게나 크고도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는지, 윈터는 하루가 다르게 체격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작 반년 전에 맞춘 옷도 금세 소매가 짧아져 정식으로 개시하기도 전에 못 입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섀넌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때 가선 또 새로 맞추면 되지.”

케인타운에 새로운 원단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의상실에 들러 윈터의 옷을 주문하는 섀넌 때문에, 저택의 드레스룸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섀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윈터가 타고난 신체와 아름다운 외모를 이런 식으로 썩히는 것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윈터는 정해진 취향도, 관심도 없어 옷을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이맘때 아이들이 얼마나 제 외모와 옷, 장신구, 구두 따위에 신경을 쓰는지를 생각하면 그는 정말 이상한 아이였다.

물론 넝마를 걸쳐 놔도 빛을 발할 외모라는 걸 자기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것 같지만, 섀넌은 그가 좀 더 다른 아이들처럼 제 외모뿐 아니라 또래 이성에게 관심도 갖고 사교활동에도 적극적이길 바랐다.

그때 재단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주문하신 크라바트와 구두는 아직 도착 전이라, 시착해 보려면 내일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오늘 시착해 본 옷은 언제쯤 완성되지?”

* * *

재단사와 윈터의 옷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밖으로 나온 섀넌이 정면으로 내리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섀넌도 보통 남자의 평균을 넘어선 키 때문에 멀리서도 늘 눈에 띄었는데, 윈터는 그보다 한 뼘 이상이 더 크니 두 사람이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한 번씩 자신들을 유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섀넌이 고개를 돌리며 햇볕을 피하던 그때, 그의 이마 위로 커다란 손이 차양처럼 드리워졌다.

섀넌의 어깨에 팔을 두른 윈터가 그에게 손 그늘을 만들어 준 것이다. 윈터가 자신보다 커지니 이런 때에 써먹긴 참 좋다고 여기며, 섀넌이 길 건너편에 대어 둔 마차로 걸어갔다.

“바로 학교에 가면 수업 시간에 딱 맞겠군.”

수트 안쪽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그가 시간을 가늠해 보고는 윈터가 열어 주는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뒤따라 마차에 오른 윈터가 문을 닫으며 마부석에 연결된 창을 향해 말했다.

“러셀, 저택 먼저 들러 주세요.”

“예, 그러죠.”

러셀이 말고삐를 잡으며 대답하는 동시에, 섀넌이 얼른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안 돼, 그럼 늦어. 학교로 먼저 가.”

“아, 예, 알겠습니다.”

“아뇨, 집 먼저.”

“학교 먼저 가.”

“아…….”

러셀이 고삐를 쥔 채 제 뒤통수에 있는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철학 선생님은 수업에 늘 늦어서 괜찮아요.”

“그래도,”

“러셀, 집으로 먼저 들러 주세요.”

윈터가 섀넌의 말을 자르며 러셀에게 지시하고는 마부석 창을 닫아 버렸다.

“평소엔 섀넌이 늘 나 데려다주니까,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죠.”

윈터가 섀넌을 향해 몸을 돌려 앉으며 웃었다.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이제 종종 이런 식으로 제 말을 거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섀넌은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느덧 잘생긴 청년으로 장성한 아이가 멋들어진 얼굴로 웃으며 제게 매달릴 때면,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마음이 흐뭇해졌다.

“오늘만이야.”

섀넌이 짧게 새어 나온 웃음을 금세 지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싱긋 웃으며 제 곁에 가까이 붙어 앉는 윈터에게 밀려 마차 벽 쪽으로 옮겨 앉던 섀넌이 문득 그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손바닥과 손목의 경계 부근 살갗이 어딘가에 긁혀 조금 벗겨져 있었다.

“아, 크리켓 하다가.”

그가 손을 빼내며 긁힌 부위를 감췄다. 섀넌이 그걸 다시 잡아 소매를 내려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운동할 땐 조심하라니까.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이 정도로는 안 남아요.”

별것도 아닌 걸로 과민하게 군다는 듯, 윈터가 푸스스 웃었다.

그러나 섀넌은 필멸자들이 얼마나 별것 아닌 상처로도 평생의 흉터를 남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엔 별것 아닌 상처인데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 흉터가 평생 가기도 하고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네 몸에 흠집 나는 게 싫다고.”

섀넌이 혀를 차며 엄지 끝으로 그의 긁힌 상처를 매만졌다. 윈터의 입장에선 하찮은 상처라 굳이 연고를 바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섀넌에겐 아니었다.

이미 윈터의 손에는 그의 눈에 못마땅한 부분들이 몇 개 있었다. 안 그래도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나서부터 중지와 검지 사이에 펜대로 인한 굳은살이 생긴 게 못마땅했는데, 요즘은 크리켓 배트를 잡느라 검지와 엄지 사이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살면서 평생 흠집 하나 안 날 수 있겠어요. 내가 섀넌 같은 불멸자도 아닌데.”

제 손을 못마땅한 듯 만지작거리는 섀넌의 머리칼을 윈터가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미간을 구긴 채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섀넌과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기울인 윈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 흠집도 싫으시면서 학교는 어떻게 보내세요? …그냥 집에 가둬 두지, 도자기처럼.”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섀넌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랬다면 네가 이렇게 품위 있게 자라진 못했겠지.”

“그럼 이제 다 자랐으니까 지금부터라도 가둬 두는 건 어때요?”

윈터의 농담에 섀넌이 결국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고개를 숙인 섀넌의 목덜미가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옷깃 사이로 드러났다.

윈터의 시선이 말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섀넌.”

음? 무심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드는 섀넌의 목덜미로 윈터의 손끝이 닿았다.

“셔츠 깃이 안으로 말렸어요.”

“음.”

제 옷을 정돈해 주려는 듯 목깃 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에 섀넌이 고개를 다시 숙여 주었다. 목 뒤쪽으로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이제 됐어?”

“…아직요.”

드러난 목덜미 아래로 도드라진 뼈를 스친 손이 목과 어깨로 떨어지는 경계 부근을 느리게 훑고 물러났다.

고개를 든 섀넌이 무심히 제 셔츠 깃을 만져 보았다. 셔츠 깃은 집에서 처음 출발했을 때처럼 구김 하나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섀넌이 아까부터 내도록 자기만 보고 있었던 듯한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어두운 마차 안이라 그런지, 윈터의 동공이 검게 열려 있었다. 느리게 일렁이는 청회색 테두리와 그 안에 비친 자신이 또렷하게 보일 만큼.

“고마워.”

섀넌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짧게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제 옷의 단추 하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던 아이가 이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챙겨 줄 때가 많다. 섀넌은 이런 것으로 그의 성장을 새삼 실감하곤 했다.

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다. 저택의 철문 앞에 내려선 섀넌이 몸을 돌려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섀넌을 바라봤다.

“다녀올게요, 섀넌.”

그가 섀넌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느릿느릿 얽었다.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청회색 눈이 달처럼 이지러지며 반짝였다. 옅은 은백색 속눈썹이 그 위를 신기루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말과 달리 늦장을 부리는 모습에 섀넌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히 학교에 가기 싫은 모양이네.”

“싫다고 하면 안 보내실 거예요?”

윈터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뜨거운 햇볕을 머금은 듯 화사한 웃음이었다. 곡선으로 휘어지는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섀넌이 그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잘난 얼굴을 하고선, 또래들과 어울리지 않고 내내 저택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게 아무리 봐도 아깝다.

“얼른 타. 햇볕이 뜨거워.”

섀넌이 제 손에 깍지를 껴오는 윈터를 그대로 마차 안에 밀어 넣었다. 윈터는 마차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섀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섀넌,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생각 좀 해 보고.”

“아, 좀 가자!”

카일이 어린아이처럼 긴 다리를 구르며 과장되게 졸랐다.

“네가 그러니까 더 가기 싫어지는데.”

저택의 정원이 정면으로 보이는 테라스에 모여 앉은 세 사람은 겉보기엔 평범하게 오후의 티 타임을 즐기는 청년들 같았다.

그러나 세 사람 중 정작 차를 마시는 이는 섀넌 하나뿐이었다.

“오래 있어 달라고도 안 할게. 그냥 볼드윈 부인이랑 잠깐만 어울려 주면 돼. 내가 크게 투자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이튼홀 학부모들 모임에 나갈 때마다 볼드윈 부인 마주치는 게 얼마나 겁나는 줄 알아?”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 자주 나가지 않을 생각이야. 벌써 이곳에 머문 지 십 년이 넘었는데, 내 얼굴이 그대로인 걸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어.”

“어차피 윈터 졸업하면 여길 뜰 거잖아?”

순간 섀넌의 표정에 찰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카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건 그렇지.”

차를 삼키느라 대답이 한 박자 늦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내내 찻잔으로 입을 가리고 있어 카일의 시선에선 섀넌의 표정이 모호해 보였다.

“시라트로 잠입한 추격자들에게선 아직도 소식 없나?”

잠깐의 적막이 지나고, 섀넌이 갑작스럽게 화제를 툭 뒤집었다. 테라스의 그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잔디를 멀거니 보던 그가 찻잔을 내려놨다.

“벌써 몇 년째 연락 두절이야.”

섀넌을 따라 찻잔을 채워 한 모금 마셔 본 카일이 그것을 잔디에 촥 뱉고는 말문을 열었다.

“근데 섀넌, 너 그 조력자 왜 찾는 건데?”

“뭐…?”

섀넌이 황당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 조력자가 화이트팽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나만 신경 쓰는 거야?”

“그래서 그놈 찾아서 죽이려고?”

섀넌이 가만히 입가로 찻잔을 가져갔다. 두 쌍의 붉은 시선이 제게 몰려 있었다. 느긋한 자세로 삐딱하게 앉아 저를 응시하는 엘리자베스와 카일의 시선을 모르는 척 무시한 그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삼킨 뒤 대답했다.

“……일단은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다른 곳도 아니고 시라트 내부에 있는 놈인데, 그놈이 화이트팽에 대한 정보를 어디의 누구에게 흘릴 줄 알고.”

카일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게 말해, 섀넌.”

웃음기를 지운 그가 낮게 물었다.

“화이트팽이 문제인 거야, 윈터가 문제인 거야.”

러셀이 아침에 공들여 만들어 놓은 케이크를 포크 끝으로 죄 찔러 짓이기던 엘리자베스가 섀넌을 힐끗 쳐다봤다.

“윈터가 시라트로 돌아가면 너 대신 그자가 윈터의 유일한 구명줄이 될 텐데, 그자를 죽이려고 찾는 건 아닐 거 같아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시라트에 아직 자하카를 지지하는 이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윈터가 그곳으로 돌아가면 과연 무사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런 걸 알고 싶어서 그렇게 조력자 찾는 일에 목매는 거 아니냐고.”

대답 없이 차를 마시는 섀넌을 보던 엘리자베스가 발끝으로 카일의 정강이를 툭 찼다.

“섀넌 울겠어. 그만해, 카일.”

헛웃음을 흘린 섀넌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왜애? 윈터한테 정든 건 사실이잖아.”

섀넌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윈터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섀넌.”

농담처럼 시작한 목소리가 종국에는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맹약을 다 이행하고 나면 어떻게 할 건데.”

저택 밖에서 러셀의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시선을 피하며 저택의 철문을 멀거니 보고 있는 섀넌을 묘하게 응시하며, 엘리자베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시라트에 개입해서 윈터를 도와줄 거야?”

“이상한 소리 그만 지껄여.”

“하는 꼴을 보니, 일 년도 채 안 남은 것치고는 네가 퍽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더 짙어졌다. 윈터가 이제 막 철문을 넘어 러셀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섀넌이 자하카를 보호하고 있다는 얘기가 뱀파이어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한때 그들과 잠시 케인타운에 머물렀던 로렌스가 타지로 이주하며 소문이 더 빨리 퍼진 것이다.

지금이야 맹약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그냥 두고 보는 거지만, 맹약이 끝난 이후에도 섀넌이 늑대 새끼를 품에 끼고 시라트 일에 간섭한다면…, 그들에게 그건 더 이상 좌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맹약이 끝나면 쟤 죽든 말든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일종의 확인을 하고 있었다. 카일 또한 섀넌의 반응을 보기 위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어쩐지 둘에게 추궁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 섀넌이 차갑게 실소를 흘렸다.

“뭘 알고 싶은 거야. 내가 저 애새끼를 못 놓을까 봐?”

“응, 대답해 봐.”

섀넌 쪽으로 상체를 주욱 기울인 엘리자베스가 진지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찰나 섀넌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놔줄 거야.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딴 귀찮은 일에 왜 손을 대.”

섀넌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맹약이 끝나면 윈터를 놓을 생각이었다.

다리야가 더한 것을 요구했다면 자신은 성실히 이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야가 애초에 원한 건 윈터가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섀넌은 구태여 그 이상의 도움을 베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정말, 조금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정원을 가로질러 자신들 쪽으로 오는 윈터를 보며, 섀넌이 체념한 듯 솔직한 심정을 툭 내려놨다.

“하찮은 늑대 새끼에게 온갖 공을 들여 저만큼 아름답게 빚어놨으니, 어느 정도 애정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생각은 없어.”

엘리자베스와 카일이 서로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결국, 상체를 뒤로 물린 엘리자베스가 테이블 위에 삐딱하게 엎어졌다.

묘하게 팽팽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느슨히 가라앉았다.

“흠…, 예쁘긴 확실히 예쁘지.”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엘리자베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윈터를 위아래로 훑었다.

“늑대들은 저 건장한 몸이 참 마음에 들어. 무식하게 부푼 근육 하며, 그 사이로 흐르는 땀과 야성적인 체취 말이야. 저런 애들이 힘도 좋거든.”

입꼬리를 올려 웃는 엘리자베스의 입술 새로 송곳니가 비죽 튀어나왔다.

“네 맹약이 아니었으면 진즉 잡아먹었을 거야.”

섀넌이 구두 끝으로 엘리자베스의 발을 툭 찼다.

“애 상대로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야, 저렇게 큰 게 어딜 봐서 애야. 그리고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그래? 그저 난,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피사체를 감상하는 마음으로,”

“송곳니나 집어넣고 말해.”

“윈터, 오랜만이네?”

섀넌의 말을 못 들은 척한 엘리자베스가 윈터를 향해 번쩍 손을 흔들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보던 윈터가 섀넌과 눈을 마주치자 화사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의 뒤에서 따라오던 러셀이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고 흠칫 굳었다.

“수업이 벌써 끝난 거야?”

제 등 뒤로 다가와 양쪽 어깨에 손을 얹는 윈터의 손에 제 손을 겹친 섀넌이 물었다.

“네, 오늘은 철학 수업 하나밖에 없어서.”

윈터가 섀넌의 어깨를 가볍게 매만지며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일별하고는 섀넌을 향해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뭐 하긴, 네 후견인한테 제발 나랑 오늘 저녁 파티에 같이 가 달라고 말 좀 해줘, 윈터.”

섀넌 대신 카일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윈터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파티요?”

러셀이 빈 트레이를 가져와 엉망으로 어질러진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앞을 치웠다.

마시지도 않으면서 보기 좋게 채워 놓은 찻잔 하며 처참하게 짓뭉개진 케이크 따위를 트레이에 올리던 그가 엘리자베스와 눈을 마주치고는 움찔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런 러셀이 귀엽다는 듯 장난스레 그의 허리를 툭 친 엘리자베스가 대신 대답했다.

“왕도에서 유행하던 환등극이 드디어 이 촌구석에도 들어왔거든. 오늘 저녁 환등극 관람 후 기념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우리 카일이 볼드윈 부인에게 좀 잘 보여야 할 일이 있어서.”

“…….”

섀넌의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이 멈췄다.

“……카일이 볼드윈 부인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과 섀넌이 파티에 참석하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가 사뭇 낮아져서, 섀넌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윈터는 여전히 가벼운 웃음을 띤 채 섀넌의 목과 어깨를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아, 섀넌이 앞에 있으면 볼드윈 부인이 좀 너그러워지거든. 미혹은 쓰기 싫으니까 잘난 섀넌 얼굴 좀 빌리려고 그러지. 이 얼굴이 볼드윈 부인 취향이잖아.”

카일이 웃으며 섀넌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그의 뺨을 가볍게 툭 치려던 손이 섀넌의 어깨를 매만지던 윈터의 손에 막혔다. 섀넌의 뺨 대신 윈터의 손등을 치게 된 카일이 약간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아…, 그렇군요.”

윈터가 입가에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서늘한 청회색 시선이 섀넌에게로 툭 떨어졌다.

“근데 섀넌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가 보죠?”

부드럽게 제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에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나른한 한숨을 내쉰 섀넌이 대꾸했다.

“귀찮잖아.”

“그러지 말고 가자, 섀넌. 응? 한 번만 도와줘.”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과장되게 애원하는 카일을 보고 피식 웃은 섀넌이 대답에 뜸을 들였다.

“갈 거지? 응? 가자, 가줘, 섀넌, 가자아…, 응?”

“……잠깐 있다 오는 거라면 뭐.”

기실 섀넌은 애초부터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카일이 제게 주는 도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러다 문득, 섀넌이 정색하며 덧붙였다.

“대신 볼드윈 부인과 나를 한 방에 집어넣지는 마. 진짜 소름 끼치니까.”

“예에, 예, 알겠습니다. 대신 첫 왈츠까지는 좀 어울려 줘야 돼.”

섀넌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러셀.”

찻잔을 겹쳐 올려 둔 트레이를 들고 섀넌의 뒤쪽으로 돌아오는 러셀을 향해 친절하게 웃어 보인 윈터가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가 테라스 안쪽의 선반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찻잔을 정리했다.

무료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제 정면에 보이는 윈터에게 시선을 걸어 둔 엘리자베스가 말을 보탰다.

“볼드윈가 저택의 금고를 열게 하려면 왈츠 한 곡 같이 추는 거로는 어림도 없을…,”

“아.”

그때, 윈터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섀넌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갔다.

“윈터.”

눈 깜짝할 새 윈터에게 휙 다가간 섀넌이 깨진 크리스털 잔에 베여 피가 철철 흐르는 그의 손을 잡았다.

테라스 안을 느리게 휘돌던 바람을 타고 그의 피 냄새가 확 퍼졌다. 비어져 나온 송곳니 끝을 혀로 살짝 핥으며, 엘리자베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깨진 잔이 있었으면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러셀.”

희미한 웃음을 지은 윈터가 난처하다는 듯 러셀을 바라봤다. 러셀이 영문 모를 얼굴로 놀라 다가갔다.

“아니, 아깐 분명히….”

“대체 정신을 얻다 팔고 다니는 거야.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윈터가 돕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깨진 잔을 애한테 맡겨?”

“어…, 제가 들 때만 해도 잔이 멀쩡,”

“괜찮아요, 러셀.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일 보세요.”

윈터가 러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밀어냈다. 청회색 눈이 깊게 이지러지며 그를 응시했다. 어쩐지 그 눈빛에 묘한 압박을 느낀 러셀이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괜히 항변해 봐야 섀넌에게 욕이나 더 먹지 않겠는가.

섀넌이 손수건을 꺼내어 윈터의 손을 감쌌다.

“피가 많이 나잖아.”

안 그래도 요즘 여기저기 다쳐서 오는 일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 속상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얇은 크리스털을 정교하게 세공한 잔이라 어쩌면 그 조각이 안에 박혔을지도 모를 텐데….

“괜찮아요, 섀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섀넌이 혀를 차며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엘리자베스가 뭔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그런 그들을 말없이 관찰했다. 섀넌은 등지고 있어 못 봤겠지만, 찻잔을 매만지던 윈터를 정면으로 봤던 그녀는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크리스털 잔을 가볍게 으스러뜨리며 움키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너 몸은 또 왜 이렇게 뜨거워.”

윈터의 손을 살피던 섀넌이 이번엔 그의 이마를 짚었다. 윈터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자꾸 괜찮다는 거야. 감기가 아니면 어쩌려고.”

이제는 윈터 스스로 발현을 통제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섀넌은 그가 조금이라도 열이 나면 몹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결국, 기분이 완전히 어그러진 섀넌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파티 불참이야. 다른 날로 약속을 다시 정하든가. 아니면 알아서 미혹이라도 써.”

“뭐어?”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카일이 탄식했다. 그가 다시 섀넌을 설득하려 입을 열 때,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됐어, 그냥 손쉽게 해결해. 뒷일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미혹을 쓰는 편이 확실하지.”

“하…….”

“애가 아프다잖아.”

엘리자베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윈터를 쳐다봤다. 윈터는 여전히 섀넌을 내려다보며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윈터의 손에 감아준 손수건 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섀넌이 그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테라스에 카일과 덩그러니 남겨진 엘리자베스가 턱을 괸 채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크리스털 잔이 아니라 쇠도 씹어 삼킬 것 같은 큰 덩치의 청년을 여전히 아이 다루듯 하는 섀넌도 섀넌이지만, 잘 깎인 반반한 얼굴로 그런 그에게 시종일관 눈웃음을 짓는 윈터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늑대 새끼가 아니라 여우 새끼를 키운 것 같은데.”

“뭐가?”

영문 모르고 되묻는 카일의 턱밑을 손끝으로 툭 친 엘리자베스가 대답 없이 웃었다.

* * *

밤처럼 까만 머리 위로 아치형 봄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가느다란 의료용 집게로 윈터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던 섀넌이 조용히 말했다.

“잔이 깨진 것도 모르고 이렇게 세게 움켰단 말이야?”

한껏 고개를 숙인 채 제 손을 살피는 데 집중하느라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응시하며, 윈터가 느리게 대답했다.

“잠깐 다른 델 보다가.”

응접실의 창가 옆 소파에 가깝게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는 한동안 적막했다. 엉망으로 갈라진 살갗에서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배어 나왔다.

섀넌이 별안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음.”

상처 위로 소독약을 부으며, 그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되게 좋네…, 네 피 냄새.”

“…….”

윈터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위아래로 일렁였다. 그가 잠시 틈을 두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느라 끝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먹고 싶기라도 해요?”

“…아.”

섀넌이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짧게 웃었다.

“농담이야. 차라리 다른 짐승의 피를 마실지언정 네 피는 절대 먹을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섀넌이 뒷말을 성의 없이 흘리며 윈터의 손바닥에서 유리 조각을 빼는데 몰두했다. 그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는 입 밖으로 말을 내는 대신 그저 입술 안쪽을 꽉 짓씹었다.

“앞으로 러셀 일은 돕지 마.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인데 왜 그걸 네가 도와.”

머리칼 사이로 언뜻 보이는 흰 이마와 까만 속눈썹, 올곧은 콧날과 그 아래로 살짝 벌어져 있는 붉은 입술을 보던 윈터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에 가려져 있던 입술이 그제야 온전히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윈터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러셀이 엘리자베스를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요. 아예 식은땀을 흘리던데.”

“아…, 그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집게를 내려놓은 섀넌이 아직도 피가 짙게 배어 나오는 윈터의 손바닥 위로 다시 소독약을 부었다. 피가 씻겨 내려가며 드러난 살갗이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호, 하고 살살 입바람을 불며 상처를 살피는 섀넌을 응시하던 윈터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가 무언가를 참는 듯 억눌린 음성으로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러셀이 유독 엘리자베스를, …무서워하는 이유라도 있나 보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질문에 섀넌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예전에, 엘리자베스한테 사냥당할 뻔한 적이 있거든. 그 이후로 엘리자베스만 보면 반편이처럼 벌벌 떨지. 엘리자베스는 그 꼴이 우습다면서 더 괴롭히고.”

“아아….”

대답하는 윈터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계속해서 입바람을 불며 상처를 소독하던 섀넌이 물었다.

“아파?”

“…아뇨.”

“어릴 땐 이것도 못 참아서 아프다고 울었는데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꽤 귀여웠는데.”

소독약을 내려놓느라 살짝 몸을 옆으로 튼 섀넌의 셔츠 깃 사이로 유백색 살결이 언뜻 비쳤다. 오목하게 그늘이 고인 빗장뼈 위로 길게 뻗은 섀넌의 목선을 응시하던 윈터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지금은 안 귀여운가 보죠?”

“지금은 귀엽다기보단…….”

섀넌이 무심히 고개를 들어 윈터를 쳐다봤다.

“예쁘지.”

그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윈터의 뺨을 톡 쳤다. 그러고는 갈라진 살갗 위로 섬세하게 연고를 얹었다.

“흉터가 남겠는데.”

섀넌이 짧게 혀를 찼다.

“괜찮아요. 금방 아물 거예요.”

“그래도 당분간 사냥은 나가지 마. 상처 덧나니까.”

“…….”

순간 윈터의 얼굴이 굳었다. 갑자기 그에게서 말이 없어지자 고개를 든 섀넌이 그의 표정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모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외출의 목적까지 다 알고 계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윈터는 작년 즈음부터 종종 밤마다 외출을 했다.

본래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던 일이지만, 나이가 찰수록 만월에 치솟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어 점점 더 자주 사냥을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 사실을 섀넌이 모르길 바랐다.

“짐승의 냄새가 그렇게 진동하는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보기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윈터를 보며, 섀넌이 담담하게 말했다.

“인간의 음식을 먹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네가 굳이 그리 사냥을 나가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 나도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그가 이런 얘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섀넌은 몇 년간 윈터의 변화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윈터가 그의 앞에서는 철저히 인간의 몸을 유지한 탓이다.

그 때문에 섀넌은 제 아이가 늑대족이라는 사실을 간혹 잊다가도, 윈터가 밤마다 짐승의 냄새를 달고 돌아올 때마다 그 사실을 새삼 상기할 수 있었다.

“섀넌, 난 그저…,”

“그렇다고 숲의 짐승을 너무 많이 건드리진 마. 도가 지나치면 인간들이 눈치챌 수도 있어. 웬만하면 두 번 중에 한 번은 좀 참아 봐.”

“……그러다 러셀이나 섀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잖아요.”

섀넌이 별안간 코웃음 쳤다. 윈터의 손에 바르던 연고를 잠시 내려놓은 그가 시선을 맞댔다.

“진심으로 네가 날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윈터?”

“…….”

윈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네가 만월에 뭐가 되든, 상관없어.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컨트롤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윈터가 귀엽다는 듯 뺨을 툭툭 쓰다듬은 섀넌이 다시 그의 손에 집중했다. 연고를 바르는 내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윈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벽녘 안개처럼 서늘한 저음이 매끄러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른 것도, 당신이 통제할 수 있어요?”

“다른 거 뭐.”

윈터의 손 위로 얇은 거즈를 댄 섀넌이 손을 뻗어 붕대를 찾으며 물었다.

“또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나? 네가 내게 할 수 있는 짓이야 고작 그 하찮은 이빨로 날 물어뜯는 것뿐이겠지. 아니면 귀여운 발톱으로 날 할퀴거나.”

“…….”

그거 말고 내가 다른 걸 원하면요.

그것보다 더 더러운 짓을 하면. 그래도 당신은 지금처럼 날 봐줄 건가요.

“그런 것으로는 내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당신은 늘…, 다 안다는 것처럼 굴어.

섀넌의 무릎 위로 살짝 닿았던 손이 이내 다시 멀어졌다. 소파의 패브릭 시트를 긁으며 손끝을 움츠린 윈터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어요, 섀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그런 그의 이마 위로 별안간 서늘한 손이 닿았다. 입술 안쪽 살갗을 꽉 깨문 윈터가 뭔가를 견디듯 눈을 감았다.

“열은 여전하네.”

스스럼없이 다가와 제 이마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이 이내 떨어졌다. 그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윈터가 가느다랗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혹시 만월이 가까워지는 것과 연관이 있나?”

“…아뇨, 그냥, 가벼운 감기라니까요.”

“흠…, 감기라기엔 목은 붓지 않은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섀넌이 결국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약 먹고 쉬어. 더 아프면 부르고. 오늘은 계속 집에 있을 테니까.”

치료 도구를 정리하며 툭툭 내뱉는 섀넌의 말에 윈터가 쓴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열 살 어린애 다루듯 하시네요.”

섀넌이 도구들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윈터의 열을 재보려는 듯 그의 뺨과 목덜미를 차례로 어루만졌다.

“네가 70대 노인이 되어도 내겐 늘 어린아이로 보일걸.”

뺨을 쓸어내리는 섀넌의 손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윈터는 당장 그의 손목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소매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그의 살갗을 만지고 싶어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입술 안쪽이 피가 나도록 짓씹고 있는데 이내 섀넌의 손이 멀어졌다.

윈터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섀넌이 천천히 응접실을 벗어났다. 시적시적 걸어가는 그의 등 뒤로 서늘한 청회색 시선이 들러붙었다.

* * *

상대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무슨 상상을 해도 그것은 죄악이 되지 않는다.

행여 자신이 그를 강간하든, 죽이든, 그 살갗을 물어뜯든, 그것이 제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상대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색을 통해 우리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에 관한 추론뿐 아니라, 내면 깊은 곳의 자의를 깨닫는 과정에 도달할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까, ……그리말디?”

나이든 선생이 눈을 치켜뜬 채 안경 너머로 윈터를 응시했다. 학생들의 시선 또한 그를 따라 윈터에게 향했다. 윤리학 수업을 듣는 학생은 고작 다섯 명이 전부여서, 교탁과 학생들 사이의 거리는 매우 긴밀했다.

눈은 자신을 보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완전히 딴 세상에 가 있는 게 분명한 윈터의 표정을 보며, 윤리학 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턱을 괴고 있던 윈터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댔다.

“전 지금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데요.”

“그래, 네 내면에 집중하고 있는 거겠지.”

“맞아요. 이거야말로 오늘 수업에 가장 어울리는 활동 아닐까요.”

학생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해심이 깊은 선생은 제 수업을 따분해하는 학생들을 나무라지 않고, 이 또한 수업의 일환이라 여기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음, ……‘오늘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밤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모양이지?”

윈터가 손끝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윤리학 선생은 교탁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며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편안히 기다렸다.

“……아뇨. 사실 전 원하고 있어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윈터가 대답했다. 윤리학 선생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윈터는 그나마 제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성의껏 고민하며 대답해 주는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또래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 있어도 윈터는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처럼 그들과 동떨어져 보였다.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 탓도 있었지만, 표정과 손짓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특유의 태도가 다른 학생들과는 몹시 다른 탓이다.

“그럼 왜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말해 보렴.”

책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던 윈터의 손끝이 멈췄다.

“음,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아니까.”

“원하는 건 언제든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야, 윈터.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영영 네 머릿속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겠지.”

윈터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시도해 보라 말하는 윤리학 선생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상체를 앞으로 천천히 기울인 그가 윤리학 선생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선생님.”

“그래.”

“시간 다 됐어요.”

팅! 괘종시계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시간을 알려왔다. 동시에 학교 밖의 광장 시계탑에서 둔중한 종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양장 책과 노트, 펜을 챙겨 일어나 거의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윈터가 일부러 시간을 끌었음을 깨달은 윤리학 선생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매번 수업에 이토록이나 불성실한 걸 그리말디 경께서 아시면 몹시 탄식하실 거다.”

그가 농담처럼 뼈 있는 말을 던지며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는 윈터를 지그시 바라보자, 윈터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이 수업 듣는 학생 중엔 제가 제일 낫잖아요.”

윈터의 말에 선생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지.”

윤리학 선생은 꽤 수더분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수업에 그다지 집중하지도 않는 윈터의 태도 평가에 늘 만점을 줄 만큼.

“아, 윈터. 요즘도 달을 보니?”

창밖을 보던 윈터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네, 오늘은 만월이에요.”

“이런, 벌써 또 한 달이 지나갔군. 늙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윤리학 선생은 본래 하늘에 뜨는 달 모양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윈터가 그 모양을 기준으로 날짜 계산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천문학을 좋아한다고 여겨 툭하면 그에 관한 것을 묻곤 했다.

“오늘은 구름도 없으니 밤에 와이프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해야겠어.”

“꼭 사람 많은 큰길로 다니세요. 밤엔 위험하니까.”

윤리학 선생이 대수롭지 않게 픽 웃었다.

“그래, 요즘 신문에 흉흉한 기사들이 유독 많긴 하지.”

“…….”

“그럼 다음 주에 보자꾸나.”

옆구리에 두꺼운 양장 책을 낀 윤리학 선생이 인사를 건네고는 교실을 나갔다.

빈 교실 안에 홀로 남은 윈터가 창가로 다가갔다. 최상층에 있는 교실이라, 너른 잔디와 정원은 물론 후문 밖에 있는 러셀의 마차가 다 내려다보였다.

마차 주변을 서성이며 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러셀을 잠시 보던 윈터가 조금 초조해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면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석양이 희석되어 보랏빛으로 사라지는 저편에 희미한 만월이 얼굴을 내밀었다.

* * *

“러셀, 피곤하죠? 먼저 집으로 돌아가요.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으니까 저녁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되고.”

후문 밖으로 나온 윈터가 이제 막 마차 문을 열어 주려는 러셀을 만류하며 말했다.

“아…, 혹시 숲에 가시는 겁니까?”

윈터가 별달리 대답이 없자 러셀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섀넌 님도 오늘 사냥을 나가실 것 같던데, 어쩌면 밤새 저 혼자 저택을 지켜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섀넌이 오늘 밤 집을 비우나요?”

금세 제게서 등을 돌릴 것 같던 윈터가 되묻자, 러셀이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섭식하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되셨으니까요. 직접적인 말은 안 하셨지만, 오늘 늦을 거라고는 하셨습니다. 사냥 나가는 날엔 꼭 그렇게 얘기해 두시거든요.”

‘두 번 중에 한 번은 좀 참아 봐.’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윈터가 마차 문을 열었다.

섀넌의 말마따나, 안 그래도 요즘 케인타운 지역 신문에는 대량으로 훼손된 짐승들에 관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서쪽 산맥을 타고 넘어온 맹수가 생태계를 망치고 있는 것 같다는 둥, 도시 외곽 숲에서 불가사의한 거대 짐승의 발자국이 발견되었으니 산책을 자제하라는 둥 하는 우스운 내용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러셀. 집으로 가요.”

“아, 그러실 겁니까? 그럼…….”

러셀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석에 올랐다.

“러셀, 수면제 남은 거 있어요?”

그가 고삐를 당기려던 그때, 마부석 창으로 윈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 세월 홀로 제 몸의 병마와 싸우며 약학 연구를 해 온 러셀이 제조한 수면제는 늑대족인 윈터에게도 효과가 괜찮은 모양이었다. 언젠가부터 한두 번씩 찾던 수면제를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찾기 시작하자, 러셀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있긴 있습니다만…, 왜요?”

“어디에 뒀어요?”

러셀이 상체를 조금 뒤로 젖히며 제 뒤에 있는 마부석 창에 대고 물었다.

“…또 드시게요?”

“잠이 잘 안 와서요.”

결국 러셀이 고개를 완전히 돌려 작은 창 너머로 윈터를 바라봤다.

“섀넌 님께서 아시면 무척 화내실 텐데요. 자꾸 수면제에 의존하시는 건 좋지 않,”

“러셀.”

윈터가 입가를 올려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마주친 시선에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진 러셀이 머뭇거리다 결국 대답했다.

“…아, 음, 지하실 보관함에 옮겨 두었습니다. ……혹시 섀넌 님께 걸리면 저는 몰랐던 겁니다?”

탁, 대답 대신 마부석 창문이 닫혔다. 코앞에서 갑작스럽게 닫힌 문에 움찔 놀란 러셀이 눈살을 찌푸리며 쯧 하고 혀를 찼다.

하는 짓이 꼭 섀넌 같잖아.

기실 어디가 그렇게 섀넌 같으냐 물으면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다. 윈터는 섀넌처럼 대놓고 저를 괄시하거나 면박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사하게 웃는 낯을 하고선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특유의 오연함이 그의 기저에 늘 배어 있었다.

가끔 섀넌이 보는 앞에서만 뜬금없이 이상한 친절을 베풀거나 멋들어지게 눈매를 접어 웃는 표정을 빼면, 그 오연함은 섀넌과 꼭 한 틀로 찍어 낸 듯 똑같았다.

“……출발합니다.”

러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떨떠름하게 말하고는 고삐를 내려쳤다.

* * *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굳게 닫은 윈터가 빈 글라스에 물을 따라 러셀의 수면제를 삼켰다. 처음엔 효과가 꽤 좋았는데, 먹을수록 내성이 생기는지 요즘은 이것조차 잘 듣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오늘은 섀넌의 침실이 비어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

성체가 된 윈터는 섀넌으로선 절대 알 수 없는 다른 문제에 직면한 지 오래되었다. 주위에 알려 주는 이가 없어 저조차도 무어라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일종의 광증이었다.

책에는 상투적인 문장 몇 줄로 축약되어 있던 만월의 이 증세는 발현을 자유자재로 통제한 지 오래된 윈터에게도 몹시 큰 난관이었다.

윈터는 까딱 방심하면 제 통제를 벗어나 버리는 광증을 어떻게든 다스려 보려 퍽 애쓰고 있었다. 그 여러 시도 중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 바로 러셀의 수면제였다.

윈터는 얼른 이 광증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예전처럼 섀넌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이것만 잘 조절하면, 가끔은 적당한 핑계를 대어 어릴 때처럼 그의 침대에 함께 누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면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허용해 줄지도.’

그는 이제 섀넌에게서 제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는 제 욕망에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제가 섀넌에게 품은 욕망은 인간들의 기준에서나 죄가 될 뿐, 애초에 섀넌이나 자신 같은 존재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생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섀넌의 섭식 활동은 인간의 기준에서는 무분별한 살인이며, 그런 섀넌의 밑에서 자란 자신 또한 괴물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들키지만 않는다면.’

다만 윈터는 이런 제 욕망을 섀넌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만이 두려웠다. 섀넌에게 자신이 결코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의 대상은커녕 매우 괄시하여 식사 거리로도 삼지 않는 종족이 자신을 탐욕하고, 몸을 섞다 못해 하나가 되고 싶은 욕정을 느낀다는 걸 알면 섀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섀넌의 취향을 알아내 필사적으로 애써 볼까. 섀넌이 제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성적인 매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아닌 듯한데…….

자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산 그는, 역시나 자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많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남자와 뒹굴어 본 경험은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주로 어떤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꼈을까.

저를 키우는 동안에도 다른 이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을까. 제가 세상모르고 자는 동안, 그의 침실에 다른 이를 끌어들인 적도 있을까.

윈터는 얼굴도 성별도 모르는 이와 뒹구는 섀넌을 상상했다.

어린 시절 제가 함께 누웠던 그 침대 위에서, 발가벗은 누군가와 몸을 맞대고 있는 그의 나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여 주던 그 손으로 누군가를 애무하고, 제 뺨에 입을 맞추던 입술로 누군가와 키스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그의 물건도 자신의 것처럼 흉흉하게 발기할까. 흥분해서 내뱉는 신음은, 또 그 얼굴은 어떨까…….

습관적으로 입술 안쪽을 세게 짓씹던 윈터가 입안으로 확 퍼지는 비릿한 쇠 맛에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열 오른 숨을 길게 내뱉으며, 애써 발현을 억누른 윈터는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 * *

윈터는 어느 순간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아, 깼어? 미안.”

그가 손을 뻗어 습관처럼 흰 뺨을 감쌌다. 제 체온보다 늘 약간 서늘한 섀넌의 살갗이 기분 좋게 감겨 왔다.

“……섀넌. 오늘…, 안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일찍 와서 섭섭한 것처럼 말하네.”

섀넌이 이불을 벌리고 윈터의 옆자리에 누웠다. 당황한 윈터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같이 자려고 왔는데.”

“……네?”

윈터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먼저 섀넌의 침실 문을 두드린 적은 있어도, 섀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제 침실로 들어와 같이 자자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요?”

윈터의 질문이 어이없었는지, 섀넌에게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넌 꼭 이유가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내 침실에 들어왔었나?”

“……그건 아니죠.”

“불편하면 나갈게.”

“아뇨…! 아니에요. 전혀 불편,”

다급히 팔을 붙잡자 섀넌이 고개를 돌려 윈터를 바라봤다. 오싹한 전율이 배 속을 지르르하게 적셨다. 윈터는 벌써 제 아래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하지 않아요. 계속 있어 주세요.”

윈터는 제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 섀넌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이에 누워서, 그와 마주 본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늘 그의 가슴팍에 안겨 있거나 그를 올려다봐야 했는데, 윈터는 새삼 제 몸에 비해 섀넌의 체구가 작다는 걸 깨닫고 내심 놀랐다.

섀넌은 말없이 입가를 올린 채 윈터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윈터는 그의 눈 색깔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설원에 한 방울 떨어진 붉은 피처럼, 섀넌은 상대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흡혈을 하고 나면 혈색이 도는 건지 그가 사냥을 하고 온 날엔 입술 색이 몹시 붉었다. 밤처럼 새까만 머리와 흠결 없이 새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눈과 입술.

검고 붉고 하얀, 어디 하나 모호한 곳이 없는 섀넌의 강렬한 색채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왜 그렇게 보지?”

“……예뻐서요.”

“그런 말은 지겹도록 들었는데.”

“지겨워도 어쩔 수 없죠.”

이렇게나 예쁜걸요…, 윈터의 말끝이 희미하게 뭉개졌다. 갑자기 제게 확 가까워진 섀넌의 얼굴을 보며, 윈터는 이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제 입술에 짧게 맞닿았다가 떨어진 서늘한 입술의 감촉에, 윈터는 심장이 발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섀넌…?”

“뭐 어때. 어릴 땐 매일 이랬는데.”

남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해놓고 정작 섀넌은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튀어나온 목울대와 흰 살결, 쇄골의 음영이 보였다.

몇 번이고 베개 밑 시트를 쥐어뜯으며 참던 윈터가 결국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목에 손을 대자 섀넌은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끝까지 제 손을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니, 윈터는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섀넌….”

섀넌의 앞섶을 벌린 윈터가 그의 턱 끝과 목덜미, 도드라진 빗장뼈 사이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섀넌…….”

윈터가 섀넌의 몸 위에 올라탄 것은 순식간이었다. 섀넌의 손목을 쥐어 침대에 내리누른 윈터는 그의 손목이 생각보다 너무 가늘어서 놀랐다. 섀넌이 저항하려는 듯 손목을 비틀었지만 어쩐지 제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몸을 뒤채기만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윈터는 이 상황이 몹시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상대는 분명 섀넌이었고 지금 이 순간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샤.”

윈터가 고개를 내려 섀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들이켜는 숨 가득 들어오는 섀넌의 체취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제 몸에 깔린 섀넌의 다리 사이에 아래를 밀착하고, 윈터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렇게 느낌이 좋은데, 옷을 다 벗고 그와 맨 살갗을 맞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윽……, 섀넌, 섀넌….”

윈터가 섀넌의 입술을 물고 핥으며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섀넌은 아까부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말캉한 입술의 감촉과 촉촉한 안쪽 속살의 느낌이 너무도 좋아서, 윈터는 멈추지 않고 그의 입술을 깊이 탐했다.

그래, 어차피 이 또한 꿈일 것이다.

깨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공허하고 안타까운, 그런 꿈…….

* * *

“벌써 오셨습니까? 새벽에나 오실 줄 알았는데.”

홀 안으로 들어서는 섀넌을 본 러셀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이제 막 홀의 조명을 모두 끄고 저 또한 침실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새벽이라니.”

위층 계단으로 향하던 섀넌이 그를 힐끗 보고 되물었다.

“그…, 섭식 안 하신 지도 꽤 됐고, 오늘 늦게 들어오신다기에.”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 섀넌이 제 침실로 향하며 대꾸했다.

“음, 귀찮아서. 아직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야.”

“그럼 쉬십시오.”

그가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러셀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제 침실로 내려갔다.

방으로 들어온 섀넌이 피곤한 얼굴로 목을 옥죄는 크라바트를 풀며 창가 앞에 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순도 높은 월장석처럼 희고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소매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목을 좌우로 기울인 그가 심란한 얼굴로 창틀을 짚었다.

‘윈터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섀넌.’

‘어차피 맹약이 끝나면 쟤 죽든 말든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엘리자베스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괜히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다리야와 약속했던 시간이 고작 일 년도 남지 않았다니.

십수 년 전 윈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이 듣는다면 뛸 듯이 기뻐할 소식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알고나 있었을까. 그 하찮고 더러운 늑대 새끼를 이렇게나 아끼게 될 것을…….

섀넌은 아직도 갈등하고 있었다. 딱 약속된 의무만을 이행하고 돌아설지, 윈터가 돌아갈 시라트까지 제 울타리를 확장해 계속 그를 지켜볼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겉옷을 모두 벗고 셔츠를 풀어헤친 섀넌이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간만에 술이라도 마실까. 어차피 이젠 윈터의 발현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 아이도 스스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계속 술과 담배를 멀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술을 마시고 몽롱한 정신으로 잠이라도 청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심란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요즘은 식욕이 떨어져 사냥도 다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흡혈이 언제더라, 슬슬 사냥을 해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어쩐지 오늘 미약한 빈혈이 일더라니…….

일부러 잡생각을 하며 멀뚱히 천장을 보던 섀넌이 어느 순간 홱 고개를 돌렸다.

제 침실로 빠르게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을 감지하고는 어떠한 판단에 도달하기도 전에, 단단히 잠겨 있던 침실 문이 콰직 하고 부서졌다.

“윈터…?”

윈터가 제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오자 빠르게 몸을 물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섀넌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느덧 제 침대 위까지 올라온 그를 바라봤다.

“윈터, 무슨 ㅇ,”

“샤….”

뜨거운 숨이 훅 끼치며 섀넌의 입술을 덮었다. 섀넌은 잠시 그대로 굳은 채 눈을 깜빡였다. 윈터가 입술을 맞댄 채 평소보다 훨씬 커진 몸으로 저를 짓누를 때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그는, 그다음 순간 너무 당황하여 몸부림쳤다.

갑자기 축축한 혀가 입속으로 밀려 들어온 탓이었다. 가볍게 입술만 맞대는 정도의 접촉이야 어릴 때도 늘 했던 거니 그럭저럭 허용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이건, 이건…….

“흣…, 윈, 읍, ……윈터!”

그가 고개를 뒤챌 때마다 뜨거운 호흡이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윈터는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며 섀넌의 입술을 다급히 탐했다. 이따금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질척하게 얽힌 두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제 혀를 옭아매듯 빨아들이고 멋대로 입천장이며 뺨 안쪽의 매끈한 속살을 헤집는 혀를 섀넌은 순간 짓씹어 끊어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제가 그토록 애지중지 길러온 걸작에 흠집을 낼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고개를 뒤채며 말로 그를 설득할 틈을 만들어 보려 애썼다.

“윈, 읍……, 너 미쳤, …읏……!”

섀넌은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불쑥 들어온 커다란 손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밀어내며 한 손으로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섀넌…, 섀넌, 나 죽을 것 같아요…….”

섀넌의 손에 막혀 더는 입술을 겹치지 못하게 되자 윈터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의 입을 덮은 손바닥으로 뜨거운 체온을 품은 숨결이 훅 끼쳤다.

그에게 욕을 퍼부으려던 섀넌이 정말 괴로운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헐떡이는 윈터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어디가…, 어디가 아픈 건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섀넌이 너무 놀라 떨리는 목소릴 가다듬고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때 윈터의 골격이 더 뒤틀리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팽창한 근육이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호흡을 따라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당황한 섀넌이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그르륵, 메마른 자갈 위로 선득한 날붙이가 구르는 듯한 낮은 소리가 윈터의 입술 새로 뚝뚝 떨어졌다.

눈앞에서 이토록 극적으로 변화하는 윈터를 본 게 상당히 오랜만이었던 섀넌은,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윈터가 괴로운 듯 신음할 때마다 그의 골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가 벌어지길 반복했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볼수록 섀넌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새삼 당황할 것도 없이, 이런 그를 보살핀 경험이 숱하게 많지 않은가.

이것 또한 윈터의 발현 증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섀넌은 그제야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음.”

그러나 제 허벅지를 짓누르는 단단하고 묵직한 무언가를 느낀 섀넌은 살짝 침착함을 놓칠 뻔했다.

섀넌은 정말로, 정말로 제 아이의 성장을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윈터, 일단……, 진정해, 괜찮아, …진정, 읏…….”

윈터가 막무가내로 섀넌의 목 언저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얼굴은 다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튀어나온 귀와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무거워.’

언제 이렇게 자랐지. 눈으로 볼 때와 온몸으로 그의 무게감을 견디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샤…, 흐읏, 섀넌.”

윈터는 입술로 머금은 목덜미를 혀로 핥다 이 끝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뜨거운 호흡과 그 날 선 감촉에, 섀넌은 어쩐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윈터.”

몸을 빳빳하게 굳힌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경고했다.

“하아…, 섀넌…….”

“윈터, …잠깐, 진정해 봐, 잠ㄲ, 물지 말…, 음.”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했다. 목덜미를 파고든 날카로운 감촉이 몹시 낯설었다.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물린다는 게, 이렇게 소름 끼치는 기분이었나.

윈터는 온몸으로 그를 짓누른 채 살갗을 꽉 물었다. 당연하게도 흡혈을 시도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섀넌은 이 행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섀넌이 느리게 몸을 뒤채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윈터가 더욱더 그를 꽉 짓누르며 허리를 감아 안았다.

“……윈터. 나야. 날 봐.”

윈터의 뺨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한 섀넌이 단호한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순식간에 귀와 꼬리를 감춘 윈터는 아플 정도로 그에게 하체를 문질러대고 있었다.

“하아…, 섀넌, 읏, 섀넌…….”

또 입술이 덥석 깨물렸다. 윈터가 그의 가슴팍을 서툴게 더듬었다. 눈을 굴리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 섀넌이 제 아랫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는 윈터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떼어 냈다.

만월에, 자하카의 핏줄이라 그런지 힘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섀넌이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어 더는 제게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천천히 제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살갗은 금세 아물었으나 맺혀 있던 피가 손끝에 축축하게 만져졌다.

그 부위를 만지는 섀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조금 낯선 기분으로 저를 찍어 누르듯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을 바라봤다.

윈터가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손목을 잡아 침대에 눌렀다.

제 허벅지를 꿰뚫을 기세로 문질러 오는 아래의 감촉이 정확히 무엇인지 섀넌은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섀넌의 입술 근처로 뜨거운 숨결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눈물이 매달린 은백색 속눈썹이 내리감기며 윈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아, 섀넌…, 으읏…….”

“…….”

침착하자.

상대는 고작해야 제가 산 세월의 십 분의 일도 살지 않은 어린 애새끼일 뿐이다. 직접 품어 기른 애새끼를 상대로, 겨우 이런 일에 당황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다 문득, 불쾌한 축축함을 느낀 섀넌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젠장.”

뭐 때문에 바지가 이렇게 젖어 있는 건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비릿한 수컷의 냄새가 진동했다. 제 허벅지에 그저 꽉 문지른 것만으로도 사정한 윈터의 아래는 아직도 흉흉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신체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뜯어진 윈터의 바지 앞섶 사이로, 섀넌은 본 적 없는 그의 검붉은 성기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지나치게 잘 성장한 제 아이의 물건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컸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제게 처음 왔을 때 그의 몸이 딱 저 정도 크기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분출한 체액으로 희게 번들거리는 성기 끝을 보던 섀넌이 별안간 밀려드는 막막함에 눈을 감았다.

“미치겠네, 진짜…….”

낭패다. 정말 낭패였다. 섀넌이 그에게 짓눌린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애처로운 얼굴로 울먹이는 윈터를 쳐다봤다.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윈터는 아래로든 위로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울기는. 뚝 그쳐.”

그르륵, 사람의 소리가 아닌 흐느낌이 윈터의 목 안에서 울렸다.

“아파요, 섀넌.”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하는 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 사이로 간간이 들려왔다.

그래, 그것참 안쓰럽긴 한데……. 섀넌이 낭패한 얼굴로 윈터의 가슴팍에 손을 짚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참아, 윈터.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이러면 곤란하지.”

순순히 그에게 밀려 몸을 뒤로 물릴 것 같던 윈터가 다시 고개를 기울여 다가왔다. 순간 더 물러날 곳도 없는 헤드에 바짝 등을 댄 섀넌이 제 손목을 감는 윈터의 손을 내려다봤다.

“샤…….”

그렇게 부르지는 말지.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커진 윈터의 몸에, 제가 품어 키우던 어릴 적 윈터가 빙의된 것만 같았다.

“만져 주세요, 섀넌, 아파요…, 죽을 것 같아.”

한없이 연약한 말투로 애원하면서, 정작 제 어깨를 움키는 윈터의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의 다른 손에 잡힌 손목이 아릿할 정도로 옥죄었다.

그 순간 섀넌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직 강한 개체만이 권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늑대 사회에서, 자하카 혈통이 그토록 오래 영좌를 붙들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껏 상대했던 그렇고 그런 늑대들과는 확연히 다른 힘이었다. 한동안 굶은 몸으로도 몇 마리의 늑대들을 상대하는 데 무리가 없었던 자신이, 윈터 한 명을 앞에 두고 조금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러다간 어깨가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섀넌이 윈터의 손을 떼어 내려던 찰나, 다른 쪽 손바닥에 기묘한 감촉이 닿았다.

그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감촉이었다.

“만져, …주세요…….”

섀넌은 제 손에 닿은 윈터의 성기를 내려다봤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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