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Natural Turn (3/18)

2. Natural Turn

계절이 두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왔다.

섀넌은 하루가 멀다 하게 윈터의 몸 크기를 재보며 왜 이렇게 크지 않는 거냐고 닦달했다. 일 년을 하루처럼 살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조급함이었다.

“서북부에서 윈터를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한 손으로 덜미를 잡아 올려도 거뜬했는데, 지금은 두 손으로 안아 들어야만 하지 않습니까? 까맸던 눈도 이제는 자하카 특유의 청회색을 띠고요. 이 정도면 많이 큰 건데요.”

섀넌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비틀다 어느새 혼자 의자 위에 올라가 앉은 윈터를 바닥에 내려놨다. 윈터는 요즘 응석이 늘어서, 잠깐 들어 옮기느라 닿는 섀넌의 손길에 매달리며 아예 안아 달라 난리였다.

“안 돼.”

이제 제법 목청이 커져 왕왕 짖어대는 윈터를 향해 섀넌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아 주는 것까지 바라지 마.”

식사도 챙겨 줘, 안락한 잠자리도 제공해 줘, 울타리 밖 늑대들로부터 철저히 보호해 줘, 심지어 배설물까지 다 치워 주는 제게 실제 부모처럼 살갑게 안아 주고 예뻐해 주는 것까지 바란다면 욕심이 지나치지 않은가.

제 다리에 앞발을 대고 캉캉 짖는 것을 내려다보던 섀넌이 혀를 차며 담배를 물었다.

고작 한 뼘 정도 자라는 데 2년이나 걸렸으니, 앞으로 대체 얼마나 더 걸려야 성년이 되는 걸까.

게다가 요즘은 툭하면 시끄럽게 짖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예전엔 잘 짖지 않았고 혹여 짖어도 그 소리가 작아 참을 만했는데, 요즘은 정말이지 미친개처럼 짖어 대니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윈터, 그러면 안 돼.”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다른 손으로 옮긴 섀넌이 무릎을 굽혀 윈터의 코앞에 제 검지를 갖다 대고 경고하듯 말했다. 윈터가 바닥에 궁둥이를 내리고 가만히 앉아 섀넌을 올려다봤다.

“시끄럽게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어차피 우린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그리고 윈터 또한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듣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섀넌은 그가 알아듣든 말든 늘 또박또박 말을 붙였고 윈터 또한 그가 알아듣든 말든 열심히 짖어 댔다.

섀넌이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공을 들어 휙 던졌다. 윈터가 기다렸다는 듯 거의 동시에 휙 튀어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공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반응 속도였다.

공을 물어오는 속도 또한 몹시 빨랐다. 쏜살같이 공을 물고 돌아온 윈터가 섀넌의 발치에 그것을 내려놓고 뿌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눈살을 찌푸린 채 침이 잔뜩 묻은 공을 손끝으로 집어 다시 휙 던진 섀넌이 저 앞으로 튀어 나간 윈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계속 함께 지내니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고 약간의 정이 붙기도 했지만, 섀넌은 아직 늑대를 향한 혐오감을 다 지우지 못했다.

물론, 모든 어린 생명이 그렇듯 간혹 귀여워 보일 때도 있고 웃음이 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섀넌에게 늑대란 사람들이 흔히 흉물스러워하는 파충류나 양서류와 동급이라, 아무리 아기 특유의 귀여움으로 처음만큼 혐오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들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인 것은 변함없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이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윈터가 사람이 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아기에게는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사람 아기들이 보통 언제부터 말을 시작하지?”

빨아들인 담배 한 모금을 다 내뱉기도 전에 또 공을 물고 제 앞으로 와 헥헥거리는 윈터를 보며 섀넌이 심란한 투로 물었다.

러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섀넌과 함께 덩달아 사회에서 고립된 채 산 탓에 언제 말을 배우는지 알기는커녕 사람 아기를 구경한 지도 오래되었다.

“글쎄요. 뭐 두어 살 정도면 제법 간단한 말은 따라 하지 않습니까?”

늑대족의 근간이 아무리 짐승이라도 결국은 사람의 피가 반 섞여 있는 혼혈이다. 언젠가는 윈터도 사람의 몸으로 빚어질 거란 얘기다. 어쩌면 이미 윈터의 몸 안에선 자신들이 모르는 어떠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를 터다.

사람이 되면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침을 잔뜩 흘리지는 않겠지. 경박스럽게 혀를 내밀고 종일 헥헥거리지도 않을 테고, 시끄럽게 짖는 대신 지성체다운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는 법조차 제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섀넌은 다시 심란해졌다. 차라리 다리야가 있었더라면, 자신이 다리야를 함께 거뒀다면…….

그가 혀를 차며 담뱃재를 떨궜다.

“……시라트는 요즘 어때.”

섀넌은 가끔, 다리야가 제 저택에 찾아왔던 날 그를 그렇게 그냥 보낸 것을 후회했다.

“2년 전에 성벽에 걸어 둔 다리야의 머리는 이제 거의 두개골만 남았다더군요. 시라트의 늑대들은 여전히 검은 늑대들에게 반발하는 중이고요.”

자하카의 머리를 성벽에 걸어둠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려 했던 검은 늑대들의 계산은 철저한 오산이었다. 오랜 세월 영좌에 앉았던 자하카 혈통을 잔혹하게 말살하고 그 머리를 효수하니, 오히려 늑대들의 반감이 거세어진 것이다.

오직 힘으로 우열을 정한다던 늑대족의 습성도 이제는 옛말인 모양이었다.

“……윈터가 나중에 시라트로 돌아갈 때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위스키 잔을 든 채 생각에 잠긴 섀넌을 관찰하던 러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섀넌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말을 제대로 해.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때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그때 공을 물고 온 윈터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헐떡였다. 섀넌이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몇 번 헛구역질을 하던 윈터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윈터.”

섀넌이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무심결에 안아 올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잘 놀다가 갑자기 왜 이래.”

쯧, 그가 담배를 비벼 끄며 혀를 찼다. 종종 윈터의 잔병을 넘겼던 터라, 섀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러셀 또한 익숙한 일이었는지 섀넌이 뭐라 지시하기도 전에 제 방으로 가 해열제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이 몇 번이고 먹인 해열제를 죄다 토한 윈터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자, 그들은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 * *

“감기가 아닌가 봅니다.”

“그럼 뭐지?”

“글쎄요.”

글쎄요, 라니. 러셀은 제가 말해 놓고도 너무 무책임한 대답인 것 같아 말을 덧붙였다.

“늑대족의 질병에 대해선 저도 잘 알지 못해서…….”

그러나 정작 섀넌은 그의 무성의한 대답에 화를 낼 여력이 없었다. 그저 제대로 눕지도 엎드리지도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채는 윈터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열이 높은 거지? 전에도 이렇게 뜨겁지는 않았는데.”

섀넌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축 늘어진 윈터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 들어 올리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다시 아주 천천히 윈터를 침대에 내려놓는 그를 보며 러셀이 불길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섀넌은 말없이 한참이나 윈터의 몸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마치 제 목소리만으로도 사방의 공기가 깨질까 두려운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덩달아 저도 목소리를 죽인 러셀이 불안하게 물었다.

“윈터의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섀넌은 윈터의 등에 손을 댄 채 그의 몸 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열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몸 안의 장기들은 끊임없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때, 다시 윈터가 밭은기침을 하다 왈칵 토사물을 쏟아 냈다. 엎드린 그의 등 뼈가 비정상적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걸 본 러셀이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바, 발현인가 봅니다.”

“발현……?”

섀넌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뒤늦게 섀넌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간 막연히 윈터의 발현에 대해 생각해 왔지만, 이렇게 일찍 찾아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 아이도 이제는 반인반수가 된다는 소리군.”

섀넌의 지시에 따라 책을 든 러셀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마구 넘겼다. 그가 늑대족 서적에서 발현에 관한 내용을 찾는 동안, 섀넌은 조용히 겉옷의 단추를 끄르며 목을 조이던 크라바트를 풀었다.

러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구절을 읽었다.

“보통은 반복되는 고열과 한기, 구토에 시달리며 관절과 내장이 뒤틀리고, 이는 성장통처럼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유아기에 이 고통을 버티지 못해 죽는 늑대들이 많아서, 늑대족은 출산하는 개체 수에 비해 성체까지 생존하는 개체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수트를 벗고 얇은 실크 셔츠 한 장만을 남긴 섀넌이 침대로 올라가 윈터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발현의 순간을 잘 케어하지 못하면 기형적인 몸을 갖게 되는 일도 있는데, 이런 경우 역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도태되어 동족에게 죽는 일이 많다. 하여 늑대족은 제 자손에게 발현이,”

“그만.”

섀넌이 윈터를 품에 안은 채 러셀을 바라봤다. 붉은 안광이 서늘히 빛나는 눈을 본 러셀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품에 안긴 윈터의 몸이 눈으로 보기에도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그 ‘변화’구나.

러셀은 머리로는 알았지만 도저히 눈앞의 괴괴한 광경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팔로 윈터를 품에 깊게 끌어안은 섀넌이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말했다.

“나가.”

러셀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며 급히 방을 나갔다.

섀넌은 윈터에게서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를 관찰했다. 품 안에서 작은 몸이 가쁘게 오르내리고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늑대들은 며칠 내내 아이를 안고 자신들의 체온으로 덥혀 주거나, 온몸을 직접 핥아 열을 내려 줄 수 있다지만 섀넌은 전자와 후자 중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첫 발현을 제대로 케어해 주지 못하면 자칫 아기는 죽을 수 있다. 처음을 무사히 넘겨야 그다음, 그다음 다음이 점점 편해지며 나중에는 스스로 원할 때 자유롭게 몸을 변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윈터…….”

섀넌은 윈터의 정수리에 대고 저도 모르게 간절히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윈터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마치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알아듣는 것 같다면, 그건 섀넌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섀넌은 그 작은 반응에 기대어 계속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 * *

러셀은 섀넌과 윈터가 들어가 있는 방 앞을 서성이기만 할 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온갖 토사물과 고름으로 얼룩진 침대 위에서 기괴하게 뒤틀리며 역시나 괴괴한 소리를 내는 윈터를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괴물 같은 생물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섀넌뿐이었다.

러셀은 저보다 오감이 훨씬 예민한 섀넌이 어떻게 그 악취를 견디며, 또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며칠을 뜬눈으로 보낼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벌써 사흘째, 러셀은 방 안에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괴괴한 울음소리를 듣고 작게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쉬……, 괜찮아, 윈터. 괜찮아.”

높은 열에 시달렸던 윈터는 이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섀넌은 그가 고열에 시달릴 때보다 더 두려워졌다. 체온이 낮은 자신보다 윈터의 몸이 더 차가우니 꼭 시체 같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애써 침착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몸이 계속해서 변형하고 있었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숨 쉬듯 토해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러셀.”

섀넌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을 러셀을 조용히 불렀다.

“……러셀!”

“예!”

뒤늦게 들어온 러셀을 섀넌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큰 소리 내게 하지 말라고 했지.”

붉은 안광이 짙게 밴 눈에 놀란 러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방 안은 무척 어두웠으나 섀넌의 안광 탓에 희미한 실루엣은 러셀도 감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섀넌의 팔 안에서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윈터를 힐끔거렸다.

“벽난로에 불을 더 지펴. 이 옆에도 화로를 갖다 놓고.”

자세한 상황을 몰라 아직도 윈터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줄 알고 있던 러셀이 깜짝 놀라 물었다.

“열이 그렇게 높은데요?”

“토 달지 말고 얼른 움직여.”

러셀에게서 진즉 시선을 뗀 섀넌은 오로지 윈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은 러셀의 눈에 섀넌 또한 괴물처럼 보였다.

한쪽은 짐승도 사람도 아닌 괴괴한 모습에, 한쪽은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시선을 맞대고 있는 두 존재의 눈에서는 각자가 품은 형형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 장면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러셀은 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섀넌은 계속해서 제 기운을 윈터에게 흘려 보냈다. 본래는 사냥하는 대상을 매혹할 때 쓰는 능력이지만 겁에 질려 숨을 쉬지 못하는 윈터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이게 윈터에게 정말 통하는 것인지, 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제 기운이 닿으면 당장 눈에 띄게 안심하는 듯해서 멈출 수 없었다.

“쉬…….”

윈터의 갈빗대는 본래의 형태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났다. 그 안에서 괴롭게 요동치는 내장이 한 번씩 발작할 때마다 윈터가 단말마를 내뱉듯 위액을 토해 냈다.

“맹약이 이어져 있는 한, 내가 너를 절대 죽게 놔두지 않을 테니.”

섀넌은 온몸으로 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투둑, 툭, 골격이 벌어지는 소리가 작은 몸을 끔찍하게 뒤덮었다.

“이것은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고통에 헐떡거리는 윈터의 이마에 죽음처럼 잔잔한 음성이 입맞춤과 함께 내려앉았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섀넌의 팔을 할퀴던 발톱이 어느샌가 힘없이 딱, 딱, 부러졌다. 역으로 꺾인 앞발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쥐어 펴 주며, 섀넌은 계속해서 그에게 알 수 없는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몇 번인가 러셀이 오가며 화로를 들이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듯했지만, 그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섀넌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윈터에게 몰두했다.

그렇게 연달아 나흘을 더 보내고, 지친 섀넌은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잠결에 윈터를 팔 안으로 꽉 그러안은 섀넌이 번쩍 눈을 떴다. 꽉 닫힌 커튼 사이로 햇살이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왔다.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달은 그가 급히 고개를 내려 윈터를 확인했다.

“…….”

그 순간, 섀넌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뽀얗고 통통한 뺨과 예쁘고 가느다란 은발을 가진 아기가, 그곳에 있었다.

“러…….”

당장 러셀을 부르려던 섀넌은 잠시 말없이 아기를 관찰했다. 제가 소리를 내면 당장 아기가 깰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무슨 색일까. 똑같이 청회색이겠지.

목소리는, 아기가 목소리를 낸다면 그 목소리는 어떨까.

섀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으로 아기의 뺨을 건드려 보고도 싶었다.

“……윈터.”

아기를 깨워 보고도 싶고, 이대로 영영 자게 가만히 놔두고도 싶은 모순적인 마음에 섀넌은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아기가 갑자기 뒤척이며 섀넌의 가슴팍에 이마를 콩 찧었을 때, 섀넌은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섀넌은 한동안 그 상태로 움직이지 못한 채 한참을 굳어 있었다.

* * *

윈터는 정말로 잘 깨지 않았다. 러셀이 그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을 때도 조금 뒤척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섀넌은 시간이 갈수록 아기가 눈을 뜨고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마음이 초조해졌다.

보통 인간의 아기들은 이 정도 크기쯤 되면 서툴게나마 걷기도 하던데, 윈터도 그럼 이제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걷게 되는 걸까. 윈터가 깨어나서 입을 열면 제일 처음으로 내는 소리는 무엇일까.

그가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무언가에 몰두한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저 가만히 눈 감고 숨 쉬는 아기를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건데도 아기는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그 작은 눈꺼풀이 조금이라도 움찔거리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섀넌은 어느 순간 제가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윈터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다 러셀이 방으로 들어오면 애써 무심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창밖을 보기도 했다.

윈터는 끼니도 넘긴 채 종일 잤다. 날이 환할 때 눈을 떠서 종알종알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거나, 그 작은 입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을 기대했던 섀넌의 바람과 달리 윈터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어두운 밤, 섀넌은 무료함도 잊은 채 윈터를 응시했다. 긴장이 풀린 러셀은 초저녁부터 잠이 든 것인지 더는 방을 들락거리지 않았다.

바람마저 고요히 잠든 시간.

섀넌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윈터의 눈꺼풀을 관찰했다.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에 비해 속눈썹이 무척 길어 꼭 은백색 초승달이 매달린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섀넌이 손끝으로 윈터의 속눈썹을 건드렸을 때, 느리게 청회색 눈이 드러났다.

“…….”

사람이 된 윈터와 첫 시선을 맞춘 순간이었다.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가 다시 열리고, 섀넌은 서늘한 달빛 홍채가 느리게 일렁이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안녕.”

짧은 인사와 함께 섀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말에 반응하듯 윈터가 손을 뻗어 왔다.

섀넌은 제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희고 작은 손을 생경하게 바라봤다. 그 순간 섀넌은 바보 같게도 아기의 손가락이 다섯 개가 맞는지를 세어 보았다.

누군가 이 얘길 듣는다면 크게 비웃겠지만, 꼭 자신이 아이를 낳은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섀넌은 기어이 아기의 양쪽 손가락을 모두 확인하고 이불을 들춰 발가락까지 모두 확인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윈터는 몹시 작았다.

“꺄아.”

윈터가 정체 모를 소리를 냈다. 섀넌은 마치 천둥소리를 들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에 한 번 놀랐고, 그다음엔 다른 이유로 놀랐다.

그저 까아, 야아, 하는 의미 없는 소리였지만 섀넌의 귀에는 윈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까, 꺄아.”

정말로 그렇게 들렸다.

“섀넌.”

그는 윈터가 제대로 발음할 수 있도록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따아아.”

섀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 입꼬리가 자꾸만 실실 올라가려는 것을 참았다.

이제 막 사람이 된 아기치고는 발음이 매우 정확하지 않은가. 섀넌은 그간 윈터가 말 못 하는 짐승이었을 때부터 끊임없이 말을 붙였던 보람을 느꼈다.

윈터를 안아 든 섀넌이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힌 그가 윈터에게 풍경을 보여 주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자, 봐. 저게 보름달이야. 너희 종족들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이지.”

섀넌은 의미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아기를 향해 속삭였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윈터의 시선이 검은 하늘에 걸린 만월로 향했다.

무엇이든 다 비출 듯 맑은 눈에 달이 녹아들었다.

섀넌은 그 눈을 홀린 듯 바라봤다.

* * *

윈터의 발현과 함께 혹독하게 찾아왔던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리버펠에 이른 봄이 찾아왔다.

윈터의 첫 발현 이후, 섀넌은 마치 뭔가에 씐 사람처럼 그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에만 몰두했다. 종일 그의 곁에 붙어 열정적으로 말을 시켰고, 처음엔 제 이름을 가르치려다가 영 되지 않으니 ‘배고파, 아파’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려 애썼다.

나이에 비해 제법 똑똑한 것 같다는 섀넌의 말과 달리, 윈터는 또래의 보통 인간 아기들보다 말이 더뎠다. 인간 아기들이 부지런히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며 말을 배울 때 윈터는 짐승의 몸으로 꺙꺙 짖기나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먐마! 맘!”

그래도 그 목청만은 대단했다. 갑작스럽게 목소릴 높인 윈터 때문에 하마터면 차를 쏟을 뻔한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놨다.

“맘맘맘먀!”

또 한 번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음과 함께 섀넌의 뺨으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수프에 불려 질척한 빵 조각이 그의 흰 뺨을 명중하기 직전, 섀넌이 가볍게 티스푼을 들어 그것을 막아 냈다.

“윈터, 음식을 던지면 못 써.”

“맘맘!”

“그건 품위 없는 짓이라고 몇 번을 말했지?”

“땨, 맘마마맘먀!”

그가 질린 얼굴로 의자에 앉아 허공을 마구 휘젓는 윈터의 발끝을 노려봤다. 윈터가 사람이 되면 조금 덜 번거로워질까 했는데, 사람 아기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인지 깨닫는 계기만 될 뿐이었다.

최근부터 윈터는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누워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발을 구르는 것에 재미를 붙인 듯했다.

섀넌은 차라리 윈터의 두 발을 꽁꽁 묶어 놔서 걷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한 곳에 내내 눕혀 놓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걸 실행에 옮길 만큼 아직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아이는 너무도 예뻤고, 섀넌은 육아가 힘들지언정 그런 그를 예전처럼 경멸하지는 못했다.

“윈터.”

“압바!”

“아파? 아빠?”

“맘맘…….”

그때 러셀이 이상한 말을 했다.

“아무래도 윈터는 백치가 아닐까요?”

섀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그가 재차 되묻자 러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말 그대로입니다. 보통 아기들 같았으면 지금쯤 벌써 간단한 의사 정도는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섀넌이 영 마땅찮은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윈터는 얼마 전까지 개였어, 러셀.”

“알죠. 하지만 아무리 그걸 감안해도,”

“흐음…….”

그의 말끝을 섀넌의 침음이 자르고 들어왔다. 섀넌은 손가락에 얇은 손수건을 감싸 묽은 오트밀이 범벅된 윈터의 입가를 닦으면서도 계속 침음했다. 그러다 문득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그가 윈터의 입과 턱을 꼼꼼히 닦으며 계속 웃었다.

“내 아이가 그리 멍청할 리 없지.”

“…….”

“본래 진짜 영재들은 유아기 발달이 느린 법이야. 그리 오랜 세월 살고도 몰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엄마 아빠도 못 부르는 놈들이 수두룩하다고.”

점점 표정이 이상해지는 러셀을 향해 섀넌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윈터는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발음이 정확한지. 벌써 자기 의사 표현을 똑똑하게 하잖아.”

잠시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윈터의 정체 모를 소리가 끼어들었다.

“맘먀―!”

러셀은 섀넌의 말을 반박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윈터는 소리를 잘 냈다. 아니, 잘 짖었다. 러셀의 귀에는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짐승이었을 때 깡깡 짖던 소리가 그저 사람 아기의 꺅꺅 비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섀넌이 손가락을 구부려 통통한 윈터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다 러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얼른 그에게서 손을 떼고 손수건을 구겨 버렸다.

“아파.”

그때 갑자기 매우 정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순간 행동을 멈춘 러셀과 섀넌의 시선이 단번에 윈터에게 향했다. 오트밀 죽이 담긴 볼에 아예 손을 담가 찰팍찰팍 두드리던 윈터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윈터, 뭐라고? 아파?”

“아바….”

섀넌이 이것 보라는 듯 눈썹을 치키며 러셀을 쳐다봤다.

“들었지? 벌써 아프다는 말도 할 줄 알고. 우리 윈터가 처음부터 사람이었으면 벌써 알파벳도 다 떼고 혼자서 책을 읽었을 거라고.”

“그….”

그냥 우연히 나온 소리 아닙니까,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데요.

“……러게 말입니다. 똑똑하네요.”

러셀은 하마터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실수를 가까스로 집어삼키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 좀 다녀와.”

섀넌이 윈터의 손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며 말했다. 러셀이 섀넌의 찻잔을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섀넌은 섭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도시에 다녀오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러셀은 제가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갈 때 섀넌에게 필요한 것도 함께 구매하는데, 찻잎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니 술이나 담배가 다 떨어진 것이리라.

“이번에도 피킨스 사의 담뱃잎을 사 오면 될까요?”

섀넌이 거의 몇십 년째 피킨스 사에서 나온 담뱃잎만 애용하고 있었기에, 러셀이 습관적으로 물었다. 그 말에 섀넌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멍청하기는.”

갑작스러운 면박에 당황한 러셀을 보며 혀를 찬 섀넌이 말했다.

“애한테 읽어 줄 책이 필요해.”

“…….”

러셀이 잠시 대답을 보류하며 머뭇거렸다. 그걸 굳이 지금 살 필요 있을까…? 윈터는 아직 제 코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다.

장담컨대, 섀넌이 지하 서고에 가득한 생태학 고서를 읽어 주든 꿈과 희망이 가득한 모험 이야기를 읽어 주든 윈터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보다 더 똑똑하신 제 주인께서 그걸 모를 리 없으므로, 그냥 러셀은 군말 없이 주인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 섀넌이 식탁 위에 있는 작은 공을 집어 러셀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리고 이 공이 낡아서 더는 소리가 나지 않으니 똑같은 새것으로 사 오고, 다른 장난감도 몇 개 더 사와. 음……, 윈터의 방 벽면에 그림을 걸어 두면 좋겠군. 윈터가 예술적 안목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그림은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게 우선 샘플 몇 개만 가져와 봐. 길거리에서 같잖은 붓질하는 놈들 말고, 아트홀에서 정식 데뷔한 화가들 작품으로.”

“예…, 뭐…….”

“애 침실도 다시 개조해야겠어. 걷기 시작하면 사고도 더 잘 칠 테니, 위험한 물건도 좀 치우고, ……아니 그냥 내 침실 옆 서재를 비우고 거기를 윈터 방으로 하면 좋겠군.”

주인의 까다로운 주문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기 위해 반복해서 되뇌던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딱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이제 막 몸을 일으켜 윈터를 안아 든 섀넌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을 의식하고는 머쓱한 얼굴로 변명했다.

“……내가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로워서 그래.”

아, 예에…, 러셀이 떨떠름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러셀은 제 주인이 언젠가부터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루 중 대부분을 담배나 술, 차 셋 중 하나는 꼭 입에 대고 있던 그가 차 이외에 다른 것을 입에 대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윈터를 능숙한 자세로 안은 섀넌의 등과 머리에 금빛 햇살이 들러붙었다. 러셀은 조금 묘한 기분으로 윈터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섀넌의 옆얼굴을 그저 말없이 바라봤다.

백 년 가까이 병처럼 앓고 있던 무기력이 사라진 제 주인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 * *

윈터의 곁에 붙어 목이 잠기도록 책을 읽어 주고, 끊임없이 말을 붙인 섀넌의 노력에 결국 윈터도 조금씩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발음을 구사할 수 있을 즈음엔 아주 천천히 걷는 것까지도 가능해졌고, 섀넌은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직접 함께 겪으며 제 생애 가장 긴 3년을 보냈다.

“S는 뱀. 뱀이 이렇게 기어간다고 생각해 봐. 그러니까….”

그리고 그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나 이거 알아!”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을 듯 수그리고는, 섀넌이 연필 끝으로 가리키는 알파벳을 유심히 보던 윈터가 별안간 왈칵 소리쳤다.

“S는 샤.”

윈터가 작은 입을 꼭 오므린 채 연필로 종이를 꾹꾹 눌러 뭔가를 썼다. 너무 힘주어 쓴 나머지 종이가 뚫릴 정도였다. 그가 뭘 저렇게 집중해서 쓰나 힐끗 보던 섀넌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직 네 이름도 못 쓰면서 내 이름은 어떻게 쓰는 거야.”

“러셀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어.”

제 이름의 스펠링 다섯 개조차 다 외우지 못한 아이는, 그보다 훨씬 긴 섀넌의 이름은 그림처럼 통째로 외운 듯 거침없이 써 댔다.

섀넌이 눈썹을 가볍게 치키며 연필 끝으로 윈터가 쓴 이름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읽지?”

“…샤.”

“섀넌.”

“……사넌.”

“섀넌.”

“샤, 스…, 새…….”

그러나 윈터는 아직 섀넌의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했다. 러셀은 잘만 발음하면서 아직 제 이름만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윈터가 섀넌은 못내 서운해서, 틈만 나면 아이의 발음을 교정해 보려 애썼다.

몇 번 섀넌의 이름을 조그만 입으로 중얼거리던 윈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넌이 이름을 바꾸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섀넌이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이름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윈터.”

“정말? 불쌍한 샤, 그 이상한 이름을 바꾸지도 못하고…….”

“뭐?”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블에 팔을 괸 윈터가 측은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섀넌이 등지고 있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윈터의 청회색 눈이 느리게 반짝였다.

달빛을 그러모은 듯한 은백발에 깨끗한 유백색 피부를 가진 아이는 서늘한 색감을 띠고선 햇볕처럼 따스했다. 섀넌이 손가락으로 윈터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네가 발음을 못 하는 거지, 내 이름이 이상한 게 아닌데.”

그의 말에 연필로 뭔가를 끄적인 윈터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말했다.

“바름은 중요한 게 아니야, 샤.”

그 와중에 또 단어를 틀리게 말해서, 섀넌은 속으로 웃음을 참고 ‘그럼?’ 하고 되물었다.

“윈터가 샤를 사랑하는 게 중요한 거지.”

“…….”

별안간 윈터가 종이를 거꾸로 돌려 섀넌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린 섀넌이 말없이 삐뚤빼뚤한 글자를 바라봤다.

조금 전 적은 섀넌의 이름 옆에는 ‘사랑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웠어.”

“샤는 바보야. 어제 우리가 같이 읽었던 책도 몰라? 공주님이 왕자님한테 한 말이자나.”

섀넌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아이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곧잘 외우는 모양이었다. 의자를 밟고 올라선 윈터가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와 섀넌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방긋 웃으며 자연스레 섀넌의 목에 팔을 둘렀다.

“샤도 윈터 사랑해?”

제게 폭 안겨 오는 작은 몸을 익숙하게 안아 들며, 섀넌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을 망설였다.

“……좋아하지, 예쁘니까.”

“윈터가 안 예쁘면 안 좋아할 거예요?”

윈터가 쓴 글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섀넌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안 예쁠 리가.”

“윈터가 개구리가 되면 어떡해.”

섀넌이 눈썹을 치키며 윈터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잠시 생각하던 섀넌은 간밤에 읽어 준 개구리 왕자님 동화책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널 애지중지 키워 주고 있는데, 네가 갑자기 못생긴 양서류가 될 리 없잖아?”

“마법에 걸릴 수도 있자나.”

“…….”

섀넌은 조금 질린 기분에 잠시 대꾸를 보류했다. 윈터는 참 예쁜 아이지만 질릴 정도로 호기심도 많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다. 러셀의 말에 따르면 이 시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윈터가 예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가. 제 인내심이 아직 건재한 것은 순전히 이 외모 때문이라 여기며, 섀넌이 그의 은백색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 넘겨 주었다.

“……윈터가 마법에 걸리면 샤가 뽀뽀해 줘.”

섀넌이 별다른 대꾸가 없자 초조하게 입술을 꼬물거리던 윈터가 머뭇머뭇 말했다. 섀넌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금세 알아채고 쓴웃음을 흘렸다.

윈터는 지금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된 왕자님을 저 자신으로, 그에게 입을 맞춰 마법을 풀어 주는 공주님을 섀넌으로 빗댄 것이다.

“응?”

섀넌에게서 계속 대답이 없으니 불안해졌는지, 윈터가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섀넌이 귀밑으로 내려온 윈터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개구리가 되면 그렇게 해 줄게.”

그럴 일이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윈터에게 설명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섀넌은 윈터를 제 옆에 앉히고는 그의 손에 다시 연필을 쥐여 주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마저 해.”

잠시 테이블 위의 종이를 보던 윈터가 손에 쥔 연필을 툭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샤, 나 아픈 것 같아.”

바로 조금 전까지 잘 놀아 놓고, 갑자기 기운이 없어진 그가 중얼거렸다.

섀넌이 미간을 좁히고 윈터의 눈을 바라봤다. 꾀병을 의심하려는 순간 윈터가 그의 목덜미에 뺨을 기대며 조금 더 확신하는 말투로 재차 얘기했다.

“윈터 아파.”

그는 아프다는 말을 참 자주 하는 아이였다. 제일 먼저 배운 말이 ‘아파’일 정도로 그는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엄살이 아니라 정말 툭하면 아팠다.

섀넌이 곧바로 그의 이마와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댔다. 방금 아이를 안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열이 갑작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열이 있네. 목도 좀 부은 거 같고.”

“아파요.”

“그래, 아픈 거 맞네.”

섀넌이 혀를 차며 그를 안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 발현 때 크게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섀넌은 윈터가 아픈 날엔 매우 예민해졌다.

성장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찾아올 발현이 또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그를 안아 든 채 약을 찾아 저택을 돌아다니는 동안, 윈터는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는지 섀넌에게 기댄 채 칭얼거렸다.

“윈터 아파, 샤.”

“조금만 기다려. 괜찮아질 거야.”

“윈터 재워 줘요.”

“응, 약부터 먹자.”

서랍을 뒤지던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늘 두던 곳에 두라 일렀는데, 러셀이 약을 다른 곳에 옮겨 둔 모양이었다.

“러셀.”

섀넌이 크리스털 잔에 물을 따르며 그를 불렀다.

“러셀!”

목청을 높이자 그제야 러셀이 지하실에서 우당탕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한 번에 듣는 때가 없어. 내가 늘 귀를 열어 두라고 하지 않았나?”

섀넌의 질책에 러셀이 허둥지둥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해열제.”

“아.”

섀넌에게 기댄 채 저를 물끄러미 보는 윈터를 흘끗 본 러셀이 얼른 찬장을 열었다. 워낙 잔병치레가 많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약을 옮겨 뒀으면 내게 말을 해 줬어야지. 그대가 잠깐 저택을 비운 사이에 윈터가 아팠으면 어쩔 뻔했어.”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하는 러셀은 잠시 노려본 섀넌이 그의 손에서 약병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얌전히 뺨을 기대고 있던 윈터가 약병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그 약 싫어.”

그가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며 섀넌의 팔 안에서 버둥거렸다. 섀넌이 얼른 그를 다시 추슬러 안으며 한 손으로 약병을 열었다.

“싫은 건 잠깐이야. 밤새 고생하고 싶어?”

“시러어!”

식탁 의자에 앉은 섀넌이 윈터를 제 허벅지 위에 억지로 앉히자 윈터가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섀넌이 그의 짧은 다리를 벌려 자신과 완전히 마주 보게 당겨 앉히는 동안, 러셀이 해열제 한 알을 꺼내 건넸다.

“씹지 않고 삼키면 하나도 안 써.”

“아니야!”

제 입가로 다가오는 물잔을 피해 고개를 돌린 윈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윈터.”

“윈터 이제 안 아픈 거 같아요.”

“그냥 눈 딱 감고 먹어.”

“아냐, 윈터 안 아파. 약 안 먹어도 돼.”

윈터가 섀넌의 팔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 탓에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이 흔들려 물이 넘쳤다. 말없이 침착하게 식탁 위에 물잔을 올려놓은 섀넌이 젖은 손을 털고는 윈터의 양팔을 잡았다.

“……화나게 할래?”

“윈터 방에 갈 거야. 놔 줘.”

“약 먹고 가.”

“싫어!”

양팔이 섀넌에게 단단히 틀어 잡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더 흥분한 윈터가 두 발을 버둥거리다 급기야는 마구 발길질을 했다.

쪼끄만 다리로 아무리 격렬하게 발길질해 봤자 그리 타격이 없는 섀넌은 윈터가 제 옆구리와 배를 마구 차도 그의 양팔을 절대 놓지 않았다.

“윈터, 자꾸 이러면 너, 윽!”

낮은 목소리로 윈터를 겁주려던 섀넌이 어느 순간 앞으로 홱 고꾸라졌다. 황급히 윈터를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한껏 수그린 섀넌이 신음했다.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윈터의 발길질이 영 좋지 못한 곳을 가격한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러셀이 저까지 덩달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섀넌이 부들부들 떨며 괴로운 소리를 내자 윈터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샤, 아파?”

“…….”

“샤…?”

윈터가 몸을 수그려 섀넌의 무릎 사이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섀넌에게서 우는 소리가 났다.

“샤, 울어요?”

“응…….”

“윈터가 아프게 한 거야?”

“응…….”

“미안해……, 많이 아파요?”

“윈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뭔데? 말해 봐! 윈터가 다 해 줄게요.”

“…약 먹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거둔 섀넌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멀쩡한 얼굴로 윈터를 얼른 낚아채듯 안았다.

“응? 그건 안, …아!”

눈 깜짝할 사이에 입으로 쏙 들어온 알약에 윈터가 놀라 혀를 내밀었다. 섀넌이 그 틈을 타 혀 안쪽으로 알약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말린 약초를 빻아 인력으로 일일이 빚은 약이라, 타액에 닿으면 금세 녹아 흩어져 버린다.

“자, 얼른 물 마셔.”

곧바로 입가에 닿은 물잔을 기울이자 약의 쓴맛을 느끼기 싫은 윈터가 얼른 물을 삼켰다.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로 몸서리치며 이미 반쯤 녹은 알약을 꼴깍 삼키는 그를 지켜보던 섀넌이 다시 물잔을 기울였다.

“더 마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섀넌이 주는 물을 발칵발칵 들이켠 윈터가 울상을 지었다.

“어차피 먹을 거면서 뭐하러 그렇게 힘을 빼.”

“…거짓말쟁이.”

“처음부터 순순히 먹어 주면 얼마나 좋아.”

섀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빈 물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대꾸했다.

“나빠!”

“약 안 먹는 네가 더 나빠.”

“미워!”

“나도 너 미워.”

바득바득 화를 내던 윈터의 표정이 일변했다.

“샤.”

그가 마치 청천벽력을 들은 얼굴로 되물었다.

“나 미워……?”

“그래. 아프다면서 약도 안 먹고, 발길질하고, 말도 더럽게 안 듣는데 어떻게 안 미워할 수 있겠어?”

섀넌이 그의 손과 얼굴을 씻기고 침실로 이동하는 동안 윈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웬일로 조용한가 싶었던 섀넌은 그를 침대에 눕히는 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울어, 갑자기?”

눈시울이 발개진 윈터가 울음을 참느라 입을 꾹 오므리고 있었던 것이다.

“샤, 나 미워하면 안 돼.”

“너도 나 밉다고 했잖아.”

“사람이 화나면 그런 말 좀 할 수도 있지.”

“뭐?”

황당해진 섀넌이 되묻자 윈터가 왁 소리쳤다.

“안 미워! 화나서 거짓말한 거야!”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올라가 그 옆에 누웠다.

“나도 거짓말 한 거야.”

“…….”

“너 안 미워.”

윈터를 제 품으로 당겨 안은 섀넌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니까 얼른 자.”

“샤.”

윈터가 그를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내려다본 섀넌이 작은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윈터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윈터의 입에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춰 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샤, 오늘은 나랑 같이 잘 거지?”

“응.”

평소엔 따로 침실을 쓰지만, 윈터가 아픈 날이면 섀넌은 늘 그의 침실에 함께 있었다.

섀넌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서늘하며 나직했다. 윈터는 어두운 침실에서 섀넌과 한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그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그는 가끔 꾀병을 부릴 때도 있었다. 제가 아픈 날엔 섀넌이 밤새 함께 있어 주니 차라리 매일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베개에 머리를 대면 금세 잠들어 버리는 윈터는, 매번 그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지 못했다. 윈터는 이 귀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 버리지 않으려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샤, 나한테서 좋은 냄새 나지?”

윈터가 작은 손바닥을 펼쳐 섀넌에 코에 갖다 댔다. 섀넌이 습관처럼 그의 손 냄새를 맡고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윈터는 꼭 손을 씻고 나면 섀넌에게 제 손 냄새를 맡게 했다. 물에 푼 향수 냄새가 섀넌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며 그것을 신기해했다.

“샤랑 같은 냄새지?”

그래서 꼭 이렇게 확인을 했다. 어차피 목욕물에도 같은 향수를 쓰니 윈터의 몸에서도 그 냄새가 날 텐데, 역시 제 몸에서 나는 체취는 스스로 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같은 냄새야.”

“나도 샤 냄새 맡을래.”

윈터가 그렇게 말하며 섀넌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목에 와 닿는 보드랍고 귀여운 감촉에 섀넌이 짧게 웃었다.

그가 윈터의 뒤통수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얼른 자라고 재촉하는 섀넌에게 몇 마디 더 건네던 윈터의 목소리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잦아들었다.

윈터는 그날 밤 개구리가 되는 꿈을 꾸었다.

* * *

러셀이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떴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중간에 윈터가 깨서 크게 울지도 않고, 섀넌도 자신을 쓸데없이 찾는 일 없었던 지난 밤.

러셀은 얼마 전 제가 새로 개발한 수면제의 효과에 감탄하며 모처럼 개운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섀넌의 침실을 찾았다가 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몸을 돌렸을 때, 갑자기 들려온 형언할 수 없는 괴성에 순간 굳어 버렸다.

그 비명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짐승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괴괴했다. 러셀은 전날 윈터에게 미열이 있어 해열제를 찾아 준 일을 떠올리고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윈터의 침실 앞까지 가서도 그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했다. 수면제의 효과가 지나치게 좋아 이런 소란도 듣지 못하고 내내 잠만 처자다니.

섀넌에게 온갖 욕을 먹을 것은 차치하고, 이번엔 또 얼마나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인가. 첫 발현 때는 늑대의 몸이었다지만 지금 윈터는 사람이다. 러셀은 멀쩡한 어린아이의 몸이 해괴하게 꺾이고 뒤틀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섀, 섀넌, 안에 있습니까.”

키야아악, 대답 대신 괴상한 비명이 들려왔다. 러셀이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익숙한 주인의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물을 좀 가져와. 이러다간 윈터의 목이 상할 것 같으니까.

욕설이나 질책 대신 간단한 지시를 내리는 섀넌의 목소리는 매우 침착했다. 러셀은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얼른 아래층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뜨거운 물을 말하는 건지, 차가운 물을 말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미지근한 물을 말하는 건지……, 러셀은 빈 저그를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다 결국 다 가져가 보기로 했다.

“…저, 여, 여기, 가져왔습니다!”

러셀이 문을 조금만 열고 커다란 저그 두 개와 빈 물잔이 든 트레이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열린 문틈에서 섀넌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장난해? 제대로 가져와.”

웃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러셀은 제 주인이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걸 잘 알았다. 결국 마지못해 방 안으로 들어선 러셀이 눈을 감은 채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협탁에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살짝 실눈을 뜨고 본 침대 위 풍경은 예전만큼 그리 괴괴하지는 않았다. 섀넌이 큰 담요로 윈터의 온몸을 덮어 감싸 안고 있는 탓이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섀넌은 두 다리와 양팔로 윈터를 옥죄듯 끌어안은 채, 기괴하게 뒤틀리는 그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냉수 좀 줘.”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섀넌이 한 손을 뻗었다. 온수와 냉수를 둘 다 가져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러셀이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섀넌이 러셀에게 다시 물잔을 건네고는 윈터의 양 뺨을 잡았다.

윈터가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러셀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 섀넌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주 잘 보였다.

러셀은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윈터의 양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눌러 입을 벌리게 한 섀넌이 그에게 제 입으로 직접 물을 넘겨 주었다.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것인지, 섀넌이 입술을 겹친 채 한참이나 애를 쓴 후에야 윈터는 겨우 소량의 물만 삼키고 나머지는 섀넌의 턱과 앞섶에 다 토해 버렸다. 섀넌의 흰 셔츠는 이미 지난밤의 토사물로 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그 광경에 너무 놀라 눈을 떼지 못하던 러셀은 담요 안으로 살짝 보이는 윈터의 옆얼굴이 얼핏 보기에도 몹시 기괴하게 우그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윈터는 아이도 짐승도 아닌 울음소리를 내며 괴롭게 숨을 헐떡였다.

아이라기보다는 괴수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윈터의 뺨을 쓸어내리며, 섀넌이 러셀의 손에서 다시 물잔을 빼앗아 한 모금 들이켰다.

“쉬……, 괜찮아, 윈터. 시원하지? 이제 괜찮아질 거야.”

한 번 더 윈터에게 같은 방식으로 물을 넘겨 준 섀넌이 그의 목 언저리를 쓸며 달래듯 속삭였다.

그 광경이 러셀의 눈에 몹시 기기묘묘해 보였다. 첫 발현 때도 이와 비슷한 감상이 든 적이 있었는데, 러셀은 그때마다 명백한 두려움을 느꼈다.

“계속 그렇게 구경만 할 거면 좀 꺼져. 쓸모없는 노예 새끼…….”

섀넌이 여전히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탓에 제게 하는 말인 줄 몰랐던 러셀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필요할 때 벽난로에 불을 더 땔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두고, 문밖에서 대기해.”

러셀이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실을 나갔다. 제주인이 원래 저토록 헌신적인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맹약이 걸려 있다지만, 너무 필사적인 거 아닌가.

‘맹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시는데요? 죽는 겁니까?’

러셀은 윈터가 자신들에게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섀넌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섀넌은 그때 이렇게 되물었다.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이 죽음밖에 없어?’

러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고 섀넌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위스키를 들이켰다.

‘자신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모습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고통을 매 순간 느끼며 영원히 사는 것. 그게 최악이지. 그에 비하면 죽음은 차라리 안락해. 그대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확실히, ……그렇지요.’

‘이왕 엎질러진 상황이니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그저 애완동물 하나를 들인 거야. 20년 기한이 있는,’

섀넌이 적당한 단어를 고르듯 제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역할극이랄까.’

러셀은 이제 조금 다른 걱정이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확실한 기한이 정해져 있는 관계에, 섀넌이 너무 많은 것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꺄아아악,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러셀이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침실 문을 바라봤다.

아이가 있는 힘껏 지르는 비명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러셀은 그전까지는 몰랐다. 짐승도 인간도 아닌 존재가 괴괴한 성대로 내지르는 소리는 끔찍했다.

―러셀!

귀가 터질 듯한 괴성 사이로 다급한 섀넌의 목소리가 들렸다.

“윈터, 쉬…, 괜찮아, 진정해.”

급히 윈터의 침실로 뛰어 들어온 러셀의 입에서 짧은 경악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든 듯한 윈터가 침대 측면을 비추고 있는 전신 거울을 보고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꽉 끌어안고 있던 섀넌이 안으로 들어선 러셀을 발견하고 턱짓했다.

“침실에 있는 거울들 다 치워.”

“괴물이야……! 싫어, 안 돼, 살려 줘, 샤, 살려 줘―!”

윈터는 놀랍게도 사람의 말을 했다. 가르랑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분명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다.

러셀은 그의 은백색 머리칼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짐승의 귀와 마디가 굵어져 울퉁불퉁해진 손가락,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 윤곽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얼른 커다란 거울부터 치워 나갔다.

섀넌은 극도로 공황에 빠진 윈터를 필사적으로 미혹했다. 그러나 한 번 거울로 제 모습을 본 윈터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윈터는 숨이 넘어가도록 울거나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변한 제 모습과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소리 지르지 마. 성대 망가져.”

섀넌이 그의 뒤통수를 눌러 제 품에 깊이 꽉 누르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발현 중에 윈터가 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생각해 보니 늑대에서 사람으로 발현할 땐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윈터가 발현 중에 어떤 혼란을 느끼는지 섀넌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거울을 미리 치워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섀넌은 계속해서 윈터의 등을 쓸어내렸다. ‘샤, 내 얼굴이 왜 이래?’, ‘괴물이야! 괴물이 내 몸에 들어왔어!’ 계속해서 겁에 질린 말을 쏟아 내던 윈터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섀넌의 미혹이 잠깐이나마 걸려든 것인지 윈터가 일순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르르르…, 낮은 울음을 흘린 그가 울퉁불퉁한 손을 뻗어 섀넌의 얼굴을 아무렇게나 만졌다.

“진정해, 윈터. 겁낼 필요 없어.”

뼈마디가 괴이하게 튀어나온 윈터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섀넌이 그와 깊게 눈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찮아.”

그를 잠시 홀린 듯 보던 윈터가 왈칵 구토했다. 섀넌의 턱 언저리로 토사물이 확 튀었다. 피 섞인 위액으로 섀넌의 앞섶을 적신 그가 이내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다시 혼절했다.

섀넌이 피로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온갖 토사물과 고름으로 얼룩지고 날카로운 손톱에 찢겨 엉망이 된 셔츠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섀넌은 몹시 고단해 보였다.

* * *

힘겨웠던 며칠을 보낸 뒤, 윈터의 이마를 짚어 본 섀넌이 고르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확인했다. 열도 내렸고, 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숨도 이상 없이 잘 쉬고 있다.

다만 섀넌은 조금 불안했다. 윈터가 발현 중 지나치게 비명을 질러 댄 바람에 그의 성대가 망가진 상태로 굳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윈터는 언제 그런 격변을 겪었냐는 듯 평화롭고 뽀얀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섀넌은 그저 조용히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몸을 씻고 싶었지만 그사이에 윈터가 깰까 봐 자리를 비우지도 못해서, 그저 깨끗한 셔츠로만 갈아입은 뒤 내내 그 옆을 지켰다.

발현 중에 기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윈터는 첫 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하루를 다 넘겨서야 깨어났다.

“……샤.”

윈터가 잠긴 목소리로 창밖을 보고 있는 섀넌을 불렀다. 섀넌이 몸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한밤중의 어둠에 잠긴 윈터의 눈에 청회색 안광이 스쳤다. 아직 잠이 다 가시지 않은 멍한 얼굴로, 윈터는 섀넌의 셔츠를 확인하듯 살폈다.

찬찬히 움직이며 저를 살피는 커다란 청회색 눈을 보며, 섀넌은 울적한 표정을 감추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윈터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윈터 아팠어.”

“그래, 윈터 많이 아팠어.”

섀넌이 그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윈터가 꼼지락 몸을 일으켜 섀넌에게 안겼다. 그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섀넌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풀을 먹여 빳빳한 깃과 소맷단, 일렬로 정갈하게 박힌 금색 단추를 확인하듯 매만지는 윈터를 보며 섀넌이 작게 물었다.

“왜.”

“꿈을 꿨는데….”

윈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어.”

“꿈을 꿨으면 꾼 거지, 모르는 건 뭐야.”

“내가 괴물이 되어서 샤 옷을 더럽히고, 샤를 찢었어.”

섀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켰다.

“그리고…, 엄청 아팠어.”

윈터가 문득 제 양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제 얼굴도 더듬었다.

“되게 무서운 꿈이었어.”

“그건….”

섀넌이 입술을 달싹이다 난처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이런 변화와 성장통을 계속 겪어야 할 텐데, 그때마다 윈터가 그런 충격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윈터에게 발현에 관해 설명해 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공연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첫 발현 이후로 어쩌면 자신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제가 윈터를 완전히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윈터가 사람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몇 년간, 그가 늑대라는 사실을 조금 잊고 지냈다.

섀넌 자신이 윈터의 본질에 대해 의식적으로 잊고 있으니 러셀 또한 함부로 입을 대지 못했고, 결국 윈터에게 그의 본질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윈터가 늑대족 사이에서 자랐다면 굳이 제 존재에 대해 따로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겐 숨 쉬듯 당연한 섭리가 이 뱀파이어의 울타리 안에선 당연하지 않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길 해야 할까. 윈터가 알아들을 법한 말만 하자면 할 수 있는 얘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섀넌은 왠지 모를 막막함을 느꼈다. 하나의 인격체가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한다는 게 얼마나 고차원적이고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섀넌이 윈터의 양 뺨을 가볍게 감싸 저를 보게 했다.

“그거 꿈 아니야.”

“……아니야?”

윈터는 아직 잠기운이 떨어지지 않아 노곤한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던 그가 별안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마법에 걸렸던 거구나.”

“마법도 아니야.”

“아냐? 그럼…?”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섀넌이 눈살을 찌푸린 채 머뭇거렸다. 결국, 제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내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목 안 아파?”

“목?”

갑작스러운 질문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섀넌이 그런 그를 안아 올렸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얘기하자.”

* * *

“……왜 머리만 있어?”

“그러게. 나도 후회되네.”

좀 고생스러워도 전신을 다 박제할 것을.

섀넌이 벽에 걸린 박제 장식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한때 얼마나 늑대 사냥에 열을 올렸는지, 그의 저택마다 그 지역에 사는 늑대 종들이 수없이 박제되어 있었다.

시신을 박제하는 과정은 생각 외로 몹시 번거롭다. 내장을 다 파내고 뼈와 가죽을 발라 건조하는 등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섀넌은 비교적 작업이 간단한 머리만을 잘라 전리품처럼 박제했었다.

윈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제 장식을 살폈다.

“내가 저렇게 생겼어?”

“저것보다 더 크지. 숲의 평범한 늑대와는 다르니까.”

섀넌의 손가락을 잡고 있던 윈터의 손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윈터는 작은데…….”

“다 자라면 그렇게 될 거란 뜻이야.”

“윈터 저렇게 안 생겼는데…….”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본질은….”

섀넌은 어려운 설명 대신 윈터가 알아듣기 쉬운 말을 택했다.

“그냥, 네 말대로 가끔 마법에 걸린다고 생각해.”

“샤도 저렇게 변해?”

순간 섀넌은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소릴 들었다는 듯 사납게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아니. 절대 아니지.”

처음 본 섀넌의 무서운 눈빛에 조금 놀란 듯하던 윈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러셀은?”

“러셀도 당연히 아니야.”

“그럼 나만…?”

“그래.”

윈터는 섀넌의 예상처럼 놀라지도, 울지도 않고 가만히 섀넌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희고 기다란 손을 물끄러미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나쁜 병에 걸린 거야?”

“아니.”

“그럼 좋은 병이야?”

“병 아니야. 그리고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지. 섀넌의 말을 들으며 벽에 걸린 박제 장식을 한 번, 섀넌의 손을 한 번 보던 윈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뭘 아는데?”

섀넌은 윈터가 제 말을 다 알아듣긴 한 건지 궁금했다. 윈터가 차분하게 제가 배운 말을 반복했다.

“윈터는 가끔 괴물이 돼. 병도 아니고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야.”

간략한 그의 말에 섀넌이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만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커가면서 조금씩, 윈터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겠지. 섀넌은 그 자연스러운 과정마저 제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단순히 걷고, 말을 배운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섀넌은 점점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리 와.”

윈터가 깨어난 게 한밤중이라, 섀넌은 억지로라도 윈터를 다시 재울 심산으로 그와 함께 침실로 돌아왔다.

“또 자?”

“밤이잖아.”

침대에 누운 섀넌이 이불 한쪽을 벌렸다. 저를 위해 만들어진 그 빈자리를 가만히 보던 윈터가 느릿느릿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처럼 섀넌의 품으로 바로 파고들지 않았다.

“……있잖아, 샤.”

제게 안기지 않고 어색하게 떨어져 눕는 윈터를 의아하게 보던 섀넌이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켰다.

“내가 자다가 샤를 깨물 수도 있어.”

“흠, …왜?”

“모르겠어. 그냥, …그럴 것 같아.”

윈터가 작은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조금 전 본 늑대 박제가 충격이긴 했던 모양이다. 정말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라, 섀넌이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내가 무는 쪽은 될 수 있어도 누구한테 물리는 쪽은 절대 아닌데. 그것도 하찮은 유아기의 늑대 새끼한테…….

“이리 와 봐.”

팔을 벌린 섀넌이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러나 윈터는 좀처럼 그에게 안기려 하지 않았다.

“얼른.”

섀넌이 재촉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몸을 뒤척이며 가까이 다가온 윈터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제 머리를 괴었다.

“왜 그럴 것 같은데?”

“몰라, …그냥, 이가 간지러워질까 봐.”

앞뒤가 다 잘려 심하게 일차원적인 윈터의 말을 섀넌이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어쨌든 윈터가 하는 말이 제 변화를 두고 한 말인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섀넌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잠시 말이 없던 윈터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샤, 나 계속 사람일 수는 없는 거야?”

“응, 그럴 수는 없어.”

“어떤 약을 먹으면 나을 수 있어?”

“병이 아니랬잖아.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섀넌은 그저 딱딱한 목소리로 짧은 말만 내려놓고 입을 다물었다.

달리 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자신이 윈터의 부모였다면 아이가 충격받지 않도록 좀 더 부드러운 말을 해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자신에겐 그런 재주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네가 무서워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너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중엔 네가 통제도 할 수 있게 돼.”

“통제가 뭔데?”

“음,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

응…, 윈터에게서 작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섀넌의 가슴팍에 다시 이마를 기댔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꿈속으로 숨어 버렸다. 섀넌으로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는 알 길이 없었다.

* * *

섀넌의 부름을 듣고 서재로 들어선 러셀이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봤다. 섀넌은 금줄이 달린 안경을 끼고 웬 서류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러셀이 티 나지 않게 그를 흘기며 맞은 편에 앉았다. 시력이 안 좋긴커녕 날아가는 새의 눈곱도 볼 수 있는 분이, 꼭 가끔 저런 식으로 기분을 낸다니까.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도 한참이나 서류를 들여다보던 섀넌이 그중 몇 장을 뽑아 러셀의 앞에 내밀었다.

“이곳 두 지역에 있는 저택 중 매물로 나온 게 있는지 확인해 봐. 우리가 살 만한 곳으로. 최대한 담장이 높고, 정원이 넓었으면 좋겠군.”

무심결에 시선을 내려 서류를 들여다본 러셀이 물었다.

“또 이사 가시려고요? 여기만큼 조용한 곳도 흔치 않을 텐데요. 아직 다른 늑대들이 찾아낸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이곳 두 지역 모두 제법 사람이 많이 모인 소도시라 섀넌 님께서 살기엔 아무래도 좀,”

“윈터를 입학시키려면 어쩔 수 없지.”

“……입학요?”

툭하면 괴물이 되어 버리는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다고? 단체 생활을 하다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러셀은 제가 순간 잘못 들은 거라 여기며 되물었다. 양손을 깍지 끼며 턱을 괸 섀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왕도에 있는 명문 사립 학교에 보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시라트의 늑대들에게 위치가 발각될 수 있으니, 적당한 소도시의 부르주아지 영식들이 다니는 그럭저럭 품위 있는 명문교를 찾아봐야지.”

“…….”

“일단 기숙 학교는 안 돼.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잘 알 테고…, 개나 소나 다 드나드는 싸구려 빈민층 수용소 같은 곳도 안 돼. 입학하는데 적어도 귀족이나 공익 재단 이사장의 추천서 정도는 필요한 곳이었으면 좋겠어.”

“……예, 뭐, 알겠습니다.”

섀넌은 자신과 러셀 외엔 사람도 없는 이 적막한 별장에 처박힌 상태로는 윈터의 교육에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시라트의 늑대들은 혈육과 함께 자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리를 이해하고 사회성을 기를 테지만, 제 아이에겐 그런 혜택이 애초에 없으니 대신 다른 것으로라도 그 빈자리를 채워 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한 섀넌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러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은 섀넌이 아닌 척하며 은근히 윈터 때문에 포기하고 있는 게 많다는 걸 잘 알았다. 처음엔 자연스럽게 술을 멀리하게 되었고, 윈터가 사람의 모습을 한 이후에는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이제는 윈터의 교육을 위해 사람 많은 소도시로 이주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소음과 냄새에 예민한 섀넌이 도시 한가운데에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맹약이 끝난 후에 뒤도 안 돌아보고 버릴 아이를 기르는 것치고는 상당히 투자를 많이 하고 계십니다……?”

윈터의 입학에 필요한 것들을 리스트로 미리 적어 보던 섀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반응을 살피며, 러셀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솔직히, 섀넌 님도 이제는 윈터가 그렇게 싫진 않으시죠?”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릴.”

평소처럼 러셀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려던 섀넌이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가 결국 손에 들고 있던 펜을 꽂아 넣고 안경을 벗어 책상 한편에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유효 기간이 있는 관계야.”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어차피 떼어 놔야 할 녀석인데, 쓸데없이 정을 붙여서 뭐할 것인가.

섀넌은 인간들이 제 수명의 절반도 안 되는 개나 고양이, 새 따위를 집에 두고 키우며 그들에게 정을 쏟는 것을 몹시 쓸데없는 일이라 여겼다.

굳이 왜 자신의 수명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에게 온갖 번거로움을 감수해가며 정을 주고, 또 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떠나보내는가.

맹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를 집에 들이긴 했으나, 섀넌은 절대 윈터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쏟고 싶지 않았고 아직까진 꽤 잘 지켜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지금이라도 맹약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자신은 고민 없이 윈터를 버릴 것이다. 보기에 꽤 예쁘고 귀여워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더는 그를 곁에 두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는데 굳이 불편함을 감수해 가며 그를 책임질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저, 내 손으로 기른 아이가 등신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검은 늑대 새끼들한테 당하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거지. …뭐, 사실 맹약이 끝나고 나서야 뒈지든지 말든지 나하고 상관은 없지만.”

“예에…….”

저를 빤히 보는 러셀의 시선이 어쩐지 불쾌해진 섀넌이 고개를 짧게 저으며 구구절절 말을 보탰다.

“그냥 재미가 들린 거야. 보기에 꽤 예쁘잖아. …인형 놀이와 비슷한 거지. 이왕이면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어디 가서 천박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정도는 되게 만들어 놓고 싶은.”

“예에.”

“…….”

러셀이 뭐라 따지지도 않았는데 거듭 변명하듯 제 감정을 정의하려 애쓰던 섀넌은 어쩐지 찝찝한 얼굴로 설명을 그만두었다.

“뭐 해?”

“예?”

“지시를 받았으면 얼른 움직여야지, 죽치고 앉아서 뭐 하는 거야.”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섀넌이 러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탁탁 튕기며 재촉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섀넌을 따라 얼결에 일어난 러셀이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전에도 그랬듯 제 소유물에 별다른 집착을 하지 않는 섀넌의 성향 탓에, 이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섀넌이 인간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오랜만이라, 굳이 그의 신분을 위조하는 수고도 필요치 않았다. 단지 윈터와의 관계 증명과 그의 입학에 필요한 절차만이 전부였다.

섀넌과 러셀은 전과 마찬가지로 저택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불태울 예정이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그들과 달리 윈터만이 울상을 지었다. 마차에 올라탄 섀넌이 윈터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며 말했다.

“왜 또 그래. 똑같은 인형 사 준다니까.”

윈터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입만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정 그 인형이 좋으면 여기에서 그 인형이랑 단둘이 살든가.”

“그건 싫어!”

윈터가 득달같이 소리쳤다. 섀넌이 차분하게 그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네 입으로 뭐라고 했지? 다시 읊어 봐.”

“……샤랑 떨어져 살 바엔 인형을 버리는 게 나아.”

“그럼 미련은 갖지 말아야지.”

윈터가 또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섀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섀넌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러셀을 향해 눈짓했다. 천천히 저택 주변의 마른 섶에 불을 놓은 러셀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윈터가 창가로 바짝 붙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섀넌은 이동하는 내내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가며 혹독하게 제 이름을 가르쳤다. 도시에 가서까지 저를 ‘샤’라고 부르는 미숙함을 보인다면 주변인들에게 무시당할 게 뻔하니, 이참에 제대로 발음을 교정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이다.

* * *

“그리말디!”

소도시 케인타운에 도착한 섀넌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달갑지 않은 상대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카일을 비롯해 저와 꽤 자주 왕래했던 몇몇 뱀파이어들이 잠시 뿌리 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카일을 본 섀넌이 이내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하며 아직 마차 안에 있는 윈터를 안아 옮겼다. 혼자 움직이면 나흘 안에 갈 거리를 보름 넘게 마차에 갇혀 이동하다 보니 피로감이 상당했다.

이내 윈터를 땅에 내려놓은 섀넌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카일이 고개를 한껏 기울여 윈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그때 그 개새끼야?”

낯선 이가 지나치게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저를 뚫어지게 관찰하니 두려움을 느낀 윈터가 섀넌의 다리 뒤에 숨었다.

“개새끼가 뭐야. 입에 걸레를 처물었나.”

섀넌이 제 손을 더듬더듬 잡아 오는 윈터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무심한 눈으로 카일을 훑었다.

“아아,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노망이 났는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손끝으로 제 이마를 톡톡 때리며 능청을 떤 카일이 몸을 잔뜩 기울여 섀넌의 뒤에 있는 윈터와 기어이 다시 눈을 맞췄다.

“안녕?”

윈터가 호다닥 반대편으로 피하며 섀넌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되게 귀엽네. 개 냄새는 여전하지만.”

그 모습에 웃던 카일이 이내 웃음기를 거두며 소매로 제 코를 가볍게 막았다. 섀넌이 그런 그를 노려보며 윈터를 안아 올렸다.

“개 냄새는 너한테서나 나는 거지. 애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일 거면 꺼져.”

카일의 표정이 대번에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익숙한 자세로 아이를 안아 들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는 섀넌의 모습은 그에게 충격적일 정도로 낯설었다.

“섀넌, 혹시 몇 년 사이에 머리가 돌아 버린 건 아니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카일을 노려보던 섀넌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작은 짐가방 한 개만 달랑 들고 내린 러셀이 뒤늦게 카일에게 묵례했다.

‘쟤 왜 저래?’

카일이 러셀을 향해 소리 없이 눈짓으로 물었다. 검지로 관자놀이 부근을 빙빙 돌리는 카일과 눈이 마주친 러셀이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개새끼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섀넌 님이 화내십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카일이 러셀의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계속 말을 붙였다. 제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빌어먹게 시끄럽네.”

“샤…, 저 사람 누구야?”

“친구.”

“아아, 친구….”

윈터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예전에 섀넌이 ‘친구’에 관해 설명하길, ‘있으면 귀찮지만 필요할 때 써먹기 좋은 거’라고 했다.

섀넌의 목에 팔을 감고 있던 윈터가 살짝 고개를 틀어 자신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카일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섀넌에게 작게 물었다.

“둘은 언제부터 친구였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의 질문이라, 섀넌이 잠시 틈을 두고 대답했다.

“아주 오래.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섀넌은 윈터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어?”

“…당연하지?”

“윈터보다도 더 먼저 태어난 거야?”

순간 할 말을 놓친 섀넌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너보다 먼저 태어났겠지.”

“으응……, 그래서 나보다 훨씬 큰 거구나.”

러셀이 저택의 대문을 여는 것을 가만히 보던 윈터가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섀넌만큼 커지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돼?”

“글쎄……, 그건 살아 봐야 알 것 같은데.”

“그때는 섀넌도 더 커져 있겠네?”

“음, …윈터, 배 안 고파?”

계속 그의 질문에 말려들었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섀넌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윈터는 질문도 많았지만 그만큼 산만해서 제가 하던 얘기를 끝까지 이어 나가는 끈기는 부족했다.

“어제 먹었던 송아지 고기 맛있었어.”

“그래, 러셀에게 해 달라고 하자.”

윈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등 뒤에서 들려오던 카일의 소음을 잊고 있던 섀넌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카일은 여전히 러셀과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열린 철제 대문 안으로 들어선 섀넌은 한동안 자신들이 지낼 저택을 휙 둘러봤다. 리버펠의 별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규모가 커서, 러셀이 혼자 다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 넓은 정원과 높은 담장이라면, 이 안에서 윈터가 개가 되어 뒹굴든 발현 중에 괴괴한 비명을 지르든 상관없으리라.

“책에서 본 적 있어, 이런 집.”

윈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섀넌이 걸음을 옮겼다.

“응, 이제 우리 집이야.”

* * *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이지만 신흥 대부호들이 자리 잡고 사는 남부 케인타운은 해안에 인접한 소도시라 늘 은은한 바다 냄새가 풍겨 왔다.

같은 해안가라도 섀넌이 홀로 칩거하던 서북부와는 달라서, 태풍만 오지 않으면 늘 잔잔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플리커 가에 있는 이튼홀입니다. 사립이고요, 이사장이 왕도의 명문교인 템퍼츠빈 교장과 연줄이 있어 제법 인정받는 곳이지요. 이곳 케인타운뿐 아니라 인근 도시의 부호들도 이튼홀에 자제들을 입학시킨다더군요.”

윈터의 입학 수속을 위한 서류를 정리하며 설명을 늘어놓는 러셀과 그걸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듣고 있는 섀넌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카일이 문득 윈터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입 모양만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개새끼.’

섀넌의 옆에 꼭 붙어 있던 윈터가 그 입 모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들려.”

섀넌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말했다. 카일이 머쓱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좀 친해져 보려고 하는 건데 왜.”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린 섀넌이 콧잔등에 걸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윈터가 기대고 있는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

“친해지려면 먼저 통성명부터 해야지. 윈터, 저 못생긴 녀석 이름은 개새끼야. 저 자식은 늘 저렇게 제 이름을 자랑하고 다니거든.”

윈터가 천진난만하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개새끼?”

“그래, 개새끼.”

카일이 과장되게 탄식을 흘렸다.

“말이 너무 심한데, 섀넌.”

그가 친근하게 웃으며 자세를 낮추고 윈터의 눈높이에 맞춰 다가왔다.

“카일 샤말란. 개새끼 아니고 카일이야, 내 이름.”

그가 윈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섀넌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윈터가 얼결에 손을 뻗자, 섀넌이 곧바로 카일의 손을 탁 쳐냈다.

“이 새끼랑 손잡지 마, 윈터. 더러워.”

섀넌의 말에 윈터가 금세 표정을 바꾸며 제 손을 섀넌의 수트 안쪽으로 감춰 버렸다. 절대 제 손을 못 잡게 하려는 듯한 그 강경한 태도에,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푸스스 웃어버렸다.

“진짜 너무해. 나는 네가 온다고 해서 선물도 준비했는데.”

카일이 짐짓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삐딱하게 기대어 앉았다. 섀넌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보고 있던 서류를 탁탁 쳐 가지런히 정돈했다.

“네가 좋아하는 건데, 관심 없어?”

“보나 마나 술 아니면 담배겠지.”

정리한 서류를 러셀에게 넘겨 주며, 섀넌이 찻잔을 들었다.

“오, 섀너언……. 담배라고 다 같은 담배가 아니지이.”

카일이 제 프록코트 안쪽에서 번쩍거리는 다이아가 장식된 케이스를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놨다. 케이스 겉면에 새겨진 로고를 힐끗 본 섀넌이 다시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피킨스.”

“피킨스라고 다 똑같은 피킨스가 아니야. 이건 왕도에서도 아주 소량만 파는 한정판 프리미엄 수제 햇담배라고! 어때? 마음에 들지? 당장 피우고 싶어 죽겠지? 내가 이걸 얼마나 힘들게 구했게? 그 사연을 얘기하자면 좀 긴데, 얼마 전에 내가,”

“끊었어. 도로 가져가.”

가차 없이 제 말을 자르고 들어온 섀넌의 단호한 거절에 카일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당황했다.

“아아, 담배 취향이 바뀐 거야?”

“아니. 끊었다고.”

카일이 놀란 눈으로 러셀을 쳐다봤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라, 러셀이 그저 말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카일이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섀넌이 술을 끊었다는 건 전에 러셀의 전보를 받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담배까지 끊었을 줄이야.

“…섀넌, 진짜 미친 거야?”

뱀파이어들은 오직 피만 흡수한다. 인간들이 먹는 음식과 차는 물론이고 술이나 담배 또한 하지 않는다.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해 환각 성분을 굳이 흡수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물론 인간들 앞에서는 간혹 음식을 먹고 억지로 그들의 흉내를 낼 때도 있지만, 본인이 진심으로 차나 술, 담배를 즐기는 건 섀넌뿐이었다.

몇백 년을 지켜보며 단 한 번도 섀넌이 차와 술, 담배를 멀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즐기는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끊어 냈다니 카일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뱀파이어야 원래 늘 변덕을 부리는 존재들이고, 그중에서도 섀넌의 성정은 유난히 지랄맞은 편이니 자신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사소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 밤에 올 거지?”

“어딜?”

“화이트팽.”

화이트팽은 온 대륙 곳곳에 있는 선술집의 통칭이다.

주로 해안가나 광산 인근 지역에 있고, 연고 없는 선원이나 광부들, 타지로 이동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이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계약직 시종들로 자신이 고용된 저택으로 가던 와중에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남자들은 긴 항해의 회포를 풀거나 부역을 가는 와중에 들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뱀파이어들이 가장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래된 뱀파이어들은 각자 나름의 사냥 노하우가 생겨 굳이 화이트팽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뱀파이어들에겐 매우 유용한 곳이었다. 삶에 권태를 느껴 모든 게 귀찮고 무기력한 뱀파이어들 또한 뒤탈 없이 하룻밤 섹스와 식사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이곳을 자주 찾는다.

그 외에도 화이트팽은 뱀파이어들끼리의 은밀한 연락망으로 쓰이기도 하니, 그들에게 여러모로 중요한 아지트가 아닐 수 없다.

“너 온다고 다들 기다려.”

카일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제 입술을 핥았다.

추잡한 카일의 행동을 보며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제 옆에 딱 붙어 카일을 주의 깊게 살피는 윈터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또 언제 발현이 있을지 모르는데. 괜찮을까.

그러고 보니 흡혈은 차치하고라도, 섹스를 안 한 지는 정말 오래되었다. 딱히 당장 하고 싶을 정도로 굶주린 건 아니지만, 백 년 가까이 금욕했으니 모처럼 한 번 정도는 해볼 만도 하지 않은가. 사실 이제는 섹스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조차 잘 안 나기도 하고.

어차피 슬슬 허기가 지긴 하는데.

윈터와 마차로 이동하느라 보름 넘게 흡혈을 못 했더니 살짝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하룻밤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샤, 나 배고파요.”

그때 윈터가 고개를 들어 섀넌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배가 고픈 것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섀넌이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카일을 향해 말했다.

“피곤해. 쉴 거야.”

“뭐…?”

카일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섀넌이 백 년 가까이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연명하고, 섹스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그로서는 제 친우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법했다.

“섀넌, 정말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제가 무슨 말만 하면 격한 반응을 보이는 카일 때문에 심적으로 피로해진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야.”

“생각해 봐, 섀넌. 섹스 중에 하는 식사를 생각해 보라고. 박고 흔들고 싸면서 흡혈할 때의 그 쾌감을 생각해 보란 말이야!”

카일은 허공에 대고 허리를 살짝 움직이기까지 하며 열변을 토했다. 섀넌은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시선을 돌렸고 윈터는 그저 카일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도시로 들어오면서 온갖 인간의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아픈 마당에, 카일이 역겨운 꼴을 보이며 시끄럽게 구니 섀넌은 당장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대체 백 년 전에는 어떻게 저런 녀석과 어울려 다녔는지 모를 일이다.

“섀넌, 섹스가 뭐야…?”

윈터의 물음에 카일이 재깍 반응했다.

“아, 강아지야, 그건 말이지, 아주 끝내주는 놀,”

“좀 닥쳐, 카일.”

그 말을 칼 같이 자른 섀넌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쫓다시피 응접실 밖으로 몰아냈다. 그에게 등을 떠밀려 복도로 나와서까지 카일은 당최 그 입을 멈추지 않았다.

“섀넌, 너 서긴 서는 거야? 욕구가 아예 없어?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카일이 하도 난리를 치니 정말로 자신이 한물간 늙은이가 된 것 같아서, 섀넌은 기분이 이상했다. 계단 난간을 짚은 채 허공을 노려보며 잠시 카일의 정신없는 헛소리를 듣고 있던 섀넌이 결국 혀를 찼다.

“……알았어, 알았다고. …섭식은 해야 하니까.”

“하, 내 이럴 줄 알았지. 미친놈, 갈 거면서 왜 튕겨.”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팔꿈치로 섀넌의 허리를 툭 쳤다. 섀넌이 불쾌한 얼굴로 제 옷을 털며 말했다.

“대신, 조금 늦게 가지. 자정 넘어서.”

“예에, 예에, 너 꼴리는 대로 하세요오.”

카일이 히히히 웃으며 계단을 단숨에 내려갔다. 그가 위에 있는 섀넌을 올려다보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너 근데, 담배 끊은 거 설마 저 애새끼 때문이야?”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린 섀넌이 잠시 틈을 두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

“…놈을 처음 인간으로 빚어 준 게 나야. 기껏 예쁘게 빚어놓은 몸이 망가지면 안 되지. 성년이 되기도 전에 폐병으로 죽으면 낭패잖아.”

자신이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담담한 투로 말하면서도, 섀넌은 괜히 짜증이 났다.

“그래, 네 애새끼 예쁘긴 예쁘더라.”

카일은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으며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위쪽 계단참 난간에 팔을 건 채 그를 내려다보던 섀넌의 표정이 찰나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윈터의 냄새를 맡고 식욕이 돋은 건가, 망할 잡종 같은 새끼. 사람 짐승 안 가리고 피를 탐하는 그의 게걸스러운 식성은 도무지 변하질 않는 모양이었다.

섀넌은 되도록 윈터를 카일과 함께 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간이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제 맹약이 깨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가 아닌가.

* * *

낯설고 휑한 침실에서 혼자 잠들기를 두려워하는 윈터를 겨우 달래 재운 섀넌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한 기분으로 밖을 나왔다.

별안간 그의 잔상이 위로 확 솟구쳤다. 인근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에 착지한 섀넌이 케인타운의 시내를 내려다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음습했고 이따금 취객의 욕설이나 고함이 울려 퍼졌다. 골목 드문드문 불이 밝혀진 선술집과 레스토랑, 곧 윈터가 다니게 될 학교의 파란 지붕도 보였다.

“…….”

섀넌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 년 만에 찾아가는 화이트팽인데 이렇게까지 안 내킬 수 있다니.

그래도 자신은 아직 한물간 노인네도 아니요, 카일의 개소리처럼 고자가 된 것도 아니니 지금쯤 한 번은 가볍게 몸을 풀 때도 되지 않았겠는가.

섀넌의 몸이 순식간에 어두운 허공에 잠겨 들었다. 축축한 밤거리 사이로 검은 바람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달음박질쳤다.

좁은 골목, 특별할 것 없는 낡은 건물 앞에 멈춰선 섀넌이 ‘화이트팽’이라 쓰인 간판을 확인했다. 변경 소도시에 있는 지점이라 그런지, 확실히 타지에 있는 화이트팽에 비해 몹시 비루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눈살을 찌푸린 섀넌이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세 쌍의 붉은 안광이 곳곳에서 스쳤다.

이미 단단히 홀려 제정신이 아닌 듯한 여자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힌 채 마음껏 더듬고 있는 카일이 보였다. 여자의 가슴팍에 입술을 묻고 있던 카일이 섀넌을 보고 짓궂게 웃었다.

그 건너편에는 예쁘장한 청년의 귀에 은밀한 농담을 속삭이는 로렌스가 있었고, 등불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서 체구가 큰 사내와 이미 한창 키스를 나누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사내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움키고 흐트러뜨리던 엘리자베스가 섀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네?’

립스틱이 붉게 번진 입술이 그렇게 물어왔다. 섀넌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섀넌이나 카일보다는 좀 더 먼저 태어난 뱀파이어로, 한때는 그들과 매우 가깝게 어울렸던 사이였다.

사내에게서 무슨 농담을 들은 건지 깔깔 웃던 엘리자베스가 그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향했다.

‘안부는 이따가.’

그녀가 섀넌을 스치며 짧게 말을 건네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의 고약한 흡혈 취향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이끌려 계단을 오르는 이름 모를 남자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누구든 제 내장이 밖으로 꺼내지는 걸 보면서 죽어가고 싶지는 않을 텐데…….

술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 열기로 짙어진 체취를 뿜어대는 인간들 사이에서 섀넌은 그냥 돌아가는 게 어떨까를 잠깐 고민했다.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모처럼의 유희를 앞두고도 별다른 기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이네요?”

“…점원?”

제게 잔을 건네며 말을 붙여오는 상대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진 섀넌이 짧게 물었다.

“아니, 나도 손님이에요. 여긴 원래 그런 곳이거든. 알아서 마시고 싶은 술 찾아 마시고, 돈은 저기 저 버킷에 넣으면 돼.”

그가 초행이라 생각했는지, 여자가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근데 그렇다고 공짜로 마시면 안 돼요. 누가 그러는데, 이 안에 감시하는 사람이 따로 있대.”

“…….”

섀넌은 순간적으로 숨을 참으며 여자에게서 풍겨 오는 냄새를 차단하고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자는 북부 출신인 듯 피부가 보얗고 오렌지빛 곱슬머리에 꽤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참 편하지 않아요?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런 거 하나 차릴까 봐. 서빙할 필요도 없어, 요리할 필요도 없어. 얼마나 좋아?”

“그러든지.”

아까부터 제 말에 계속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섀넌의 태도에 조금 무안해진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말이 별로 없으신 분인가 봐요.”

“…….”

지금껏 여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위스키 잔만 빙글 돌리던 섀넌이 뭔가를 인내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굶어 죽기 전에 섭식은 해야 하니까.

“저,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요. 대화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모양이네.”

섀넌에게서 이제는 아예 대꾸조차 들려오지 않자 더 머쓱해진 여자가 결국 그에게서 물러나려던 그때, 섀넌이 여자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대화가 왜 필요해.”

고개를 기울여 여자를 바라보는 섀넌의 눈이 붉게 빛났다.

“어차피 내게서 원하는 건 하나 아닌가?”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섀넌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자 여자가 뺨을 붉히며 웃었다.

“무슨 말이 그래요. 내가 뭘 원하는 줄 알고.”

“섹스 아니야?”

여자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섀넌을 쳐다봤다. 자신을 살피는 듯 좌우로 분주히 떨리는 눈을 보며, 섀넌이 씩 웃었다.

“아니면 말고.”

“……마, 맞아요!”

그가 그대로 뒤돌아 가려 하자, 이번엔 여자 쪽에서 섀넌의 팔을 붙잡았다. 섀넌이 느릿느릿 뒤돌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여자를 내려다봤다. 여자가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더듬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 어떻게 서로 통성명도 안 하고 갑자기…, 그러겠어요?”

“그래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섀넌이 말투를 바꾸어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 얼굴을 홀린 듯 보던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 마음에 들죠, 들어요. 사실 아까 그쪽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럼 일단….”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섀넌이 다시 여자를 향해 시선을 내리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사근사근 녹아내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물어오는 태도에, 여자는 그저 빠르게 고개만 끄덕였다. 섀넌이 산뜻하게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가며, 여자는 끊임없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으나 섀넌은 그저 한 귀로 흘렸다.

나무 바닥이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는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가장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간 섀넌이 곧바로 여자를 벽으로 부드럽게 밀어붙였다.

“저, 저기……, 그래도, 서로,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 을까요. 제 이름은…,”

“이름 같은 거 알아서 뭐 해.”

나지막이 속삭인 섀넌이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짙은 향수 냄새가 여자의 체취와 어우러지지 못하고 겉돌았다.

이러나저러나, 섀넌은 별 상관이 없었다. 향수 냄새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냥감이 가진 고유의 체취와 살갗 아래에서 흐르고 있을 피 냄새가 더…….

맥이 뛰는 귓불 아래를 살짝 머금은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섹스의 과정이 어쩐지 머릿속에 빤히 그려졌다.

한껏 열에 들떠 더 짙은 체취를 풍기는 보드라운 살갗을 만지고, 사냥감을 간 보듯 혀로 애무하다가, 상대가 제 아래에 깔려 신음하며 절정에 이를 때 이를 박아 넣고…… 그 살갗 아래에 흐르는 뜨거운 피를,

“……아.”

낮게 한숨을 흘린 섀넌이 차게 식은 얼굴로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귀찮아…, 그에게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상기된 숨을 몰아쉬던 여자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벌써 지겨워.”

“…네?”

섀넌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여자의 앞섶을 끌러 내렸다. 그가 별안간 애처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배고파.”

“……지, 지금요?”

멍한 얼굴로 되묻는 여자의 풍성한 곱슬머리를 섀넌이 손수 천천히 뒤로 넘겨 주었다.

“쉬…, 괜찮아.”

여자의 턱을 살짝 받쳐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게 한 섀넌이 가늘게 드러난 목선을 손끝으로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흐읏…, 여자에게서 단말마 같은 신음이 툭 흘러나왔다.

흰 살갗에 이를 박아넣은 섀넌의 눈이 붉게 빛났다. 어두운 방 안에서 싸늘하게 빛나던 안광은 곧 내리감는 눈꺼풀에 감춰졌다.

아주 오랜만의 흡혈이었다.

* * *

“뭐야, 왜 벌써 나와?”

이제 막 남자를 데리고 위로 올라가려던 로렌스가 아래로 내려오는 섀넌과 마주쳤다.

“벌써 끝났어? 너, 설마 진짜…….”

로렌스의 시선이 섀넌의 아래로 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섀넌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로렌스의 옆에 있던 남자의 멍한 눈이 섀넌을 향했다. 뺨을 새빨갛게 붉힌 채 좀처럼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섀넌이 얼른 미혹을 풀었다. 젠장, 잊고 있었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시간에 얼른 올라가지? 네 사냥감 나한테 발정 난 거 같은데.”

섀넌이 로렌스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치고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더는 이 냄새 나는 곳에 일 초도 있기 싫어졌다.

방금 그 여자는 제법 만족스러운 식사였지만, 굳이 여기에 남아서 또 다른 사냥감을 물고 올라갈 정도로 흡혈을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며 섀넌은 제게 남아 있는 향수 냄새를 느끼고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이리 짙은 냄새가 배다니……. 흡혈한 인간의 냄새가 몸에 밴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집으로 가자마자 목욕을 할 생각이었던 섀넌은 윈터가 혼자 저택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다가갔다.

“윈터.”

“샤…….”

잠에서 이제 막 깬 듯 뜨끈한 윈터의 몸이 섀넌의 품으로 안겨 왔다.

“왜 혼자 나와 있어.”

“몰라, 그냥 깼는데 섀넌이 없어서.”

“러셀은.”

“깨워도 안 일어나.”

그를 안아 들고 저택으로 들어가며, 섀넌은 속으로 러셀을 욕했다. 그리 잘 지켜보라고 일렀건만, 애가 깨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모르고 빌어먹을 잠이나 처자고 있다니…….

‘쓸모없는 노예 새끼 같으니.’

또 혼자 말도 안 되는 수면제를 제조해 처먹고 잔 게 분명하다. 보통 인간들이 먹는 약은 더는 그에게 듣지 않으니, 간혹 과하게 약을 제조하다 골로 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맹약이 걸려 있는 탓에 죽을 일은 없지만.

“얼른 자. 내일은 오전에 학교에 가 볼 거야.”

윈터를 침대에 눕힌 섀넌이 그 옆에 누워 그의 가슴팍을 다독였다.

“학교…?”

아직 잠기운이 남아있는 목소리로 윈터가 되물었다.

“응, 윈터가 다닐 학교.”

“……꼭 다녀야 해?”

학교에 다니게 되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섀넌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윈터는 툭하면 이렇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학교 안 다녀도 윈터는 똑똑하고, 친구도 필요 없는데…….”

“같은 말 또 하게 만들지 마. 다녀야 해.”

입을 삐죽거린 윈터가 말없이 섀넌의 가슴팍에 이마를 콩, 하고 찧었다. 섀넌은 그런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고는 천천히 등을 도닥였다.

“섀넌한테서 이상한 냄새나.”

“미안.”

섀넌이 낭패한 얼굴로 조용히 혀를 찼다. 자신만큼이나 후각이 예민한 윈터가 이 냄새를 못 맡을 리 없는데, 침대에 눕기 전에 겉옷이라도 벗을 것을 그랬다. 그냥 집에 있을 것을, 괜히 카일의 헛소리에 넘어간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윈터가 놀라운 질문을 했다.

“섹스하고 왔어?”

“……뭐?”

귀를 의심할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윈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오자, 섀넌이 놀란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아까 카인? 카일? 그 사람이 섹스랑 식사가…, 우응……, 뭐라고 했는데…….”

“안 했어.”

섀넌이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주워들은 단어를 여과 없이 내뱉는 윈터는 섹스가 식사나 놀이와 비슷한 무언가라고 여기는 듯했다.

섀넌은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오늘의 외출을 후회했다. 흡혈은 사실 조금 급했지만, 섹스는 아직 그리 간절하지가 않았다. 굳이 화이트팽에서 해결해야 할 만큼 자신이 무능한 것도 아니고, 괜히 카일의 호들갑에 휩쓸려 쓸모없는 짓을 하였다.

“왜? 카일이랑 섹스하기 싫었어?”

젠장할.

섀넌은 하마터면 오늘 마신 피를 토할 뻔했다. 치솟는 욕지기를 꾹꾹 누른 그가 애써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싫지.”

섀넌은 윈터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 스스로 외박을 금하기로 했다. 백 년 가까이 금욕해도 아무렇지 않은데, 윈터가 자랄 때까지 십수 년쯤 더 안 한다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자신만큼이나 소리와 냄새에 예민한 윈터가 있는 저택에서 그 짓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발현할지 모르는 아이를 두고 외박을 할 수는 없으니.

“그럼 윈터랑 하자. 섀넌이 섹스하러 나가서 늦게 오는 거 싫어. 윈터랑 집에서 하면 되잖아?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주면 윈터도 잘할 수 있어.”

“…….”

윈터의 등을 다독이던 섀넌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아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섀넌이 다시 천천히 그를 다독였다.

“……그래, 뭐든 배우면 잘하겠지. 우리 윈터는.”

“그러엄, 윈터가 얼마나 똑똑한데.”

“근데 너, 방금 그 말 다신 하지 마. 더 자랄 때까지 금지야.”

섀넌이 단호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내가 다시는 카일 그 새끼를 윈터랑 같이 두나 봐라.’

섀넌에게서 이토록 강경한 말투를 듣는 건 처음이라, 윈터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게 뭔데…? 집에서는 할 수 없는 거야?”

“아니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섀넌이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다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지금은 알 필요 없는 거야.”

“응….”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졸린 눈을 비비다 물었다.

“근데 섀넌…, 그럼 식사는 했어?”

“…….”

애새끼가 참……, 질문이 많기도 하지.

섀넌은 다시금 질린 기분을 느끼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응. 했어.”

“카일도 같이?”

“……응.”

“나랑은 왜 식사 같이 안 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섀넌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같이 차 마시잖아.”

“고기는 안 먹잖아. 빵도 안 먹고, 과일이랑 채소도…….”

“난 그런 거 안 먹어도 살아.”

“…….”

윈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섀넌은 그가 얼른 잠들길 기다리며 등을 쓸어내렸다.

“……섀넌은 나랑은 다르구나. 음식도 안 먹고, 나처럼 마법에 걸리지도 않고, 키도 크고, 예쁘고, 좋은 냄새…….”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가슴팍에서 작게 울렸다. 섀넌은 그래, 너랑은 다르지,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하며 그를 재웠다.

몇 마디 더 웅얼거리던 윈터의 말소리가 잦아들고 어느새 숨소리마저 고르게 가라앉을 때쯤, 섀넌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 같이 자자.”

완전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옷자락이 뒤로 당겨졌다. 눈을 감은 윈터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결에 하는 말인 건 알았지만, 섀넌은 순순히 다시 침대에 앉았다.

윈터의 옆에 다시 눕기 전 겉옷을 완전히 벗고 흰 셔츠 한 장만 남긴 섀넌이 벗어 놓은 옷들을 멀찍이 던져 버렸다. 그럼에도 윈터의 침실에 낯선 인간 냄새가 불청객처럼 떠다녔다.

저 옷은 아예 태워 버려야겠군.

섀넌은 포근한 윈터의 체취 사이로 제가 사냥한 인간의 냄새가 드문드문 겉도는 것에 괜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윈터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켜며 안온한 한숨을 내쉬었다.

뜨끈한 체온과 데운 우유처럼 몽글몽글한 냄새, 제가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 냄새가 섞인 윈터의 체취는 어느새 그에게 안락함을 가져다주었다.

* * *

푸른색의 첨탑을 올려다보며, 윈터는 섀넌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껏 살며 저런 높은 건물은 보지 못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저 건물 안으로 자신이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저 안에 사람 많아?”

“많겠지.”

“사람들이 윈터를 괴롭히면 어떡해? 독 사과를 먹이면?”

인간 관계를 동화책으로만 배운 아이의 터무니없는 걱정을 섀넌이 진지하게 일축했다.

“그럴 일 절대 없어. 행여 있다 해도 내가 절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섀넌은 평소처럼 윈터를 안아 주지 않았다. 애써 멋들어지게 입혀 놓은 옷이 구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첫 방문부터 후견인에게 안겨 오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와, 쟤 머리 봐!”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벽기둥 수십 개가 반원의 천장을 일렬로 견고하게 받치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높다란 원형 천장의 문양을 올려다보는 윈터의 턱밑을 손끝으로 쓸며 벌어진 입을 다물어 준 섀넌이 기둥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보통 인간 중에도 윈터와 같은 머리 색을 가진 이가 없지는 않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색은 아니라 몇몇 아이들이 윈터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중 친화력이 좋은 아이들은 이미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저와 비슷한 키를 가진 아이들이 다가오자 두려움을 느낀 윈터가 얼른 섀넌의 뒤에 숨었다. 섀넌이 그런 그의 등을 다독여 앞세웠다.

“쫄지 마. 다 근본 없이 천박한 애새끼들일 뿐이야.”

윈터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을 무시한 채 긴 복도를 가로지른 섀넌은 학교의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이튼홀의 교육 커리큘럼, 나이별 클래스 등급을 나누는 기준 같은 것들을 손수 확인하며 윈터를 최고 등급 클래스에 등록시켰다. 그나마 품위 있고 제법 명문이라 볼 수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모인 클래스였다.

굳이 그가 알 필요도 없는 학교의 설립 이념과 교육 철학, 교수진의 이력, 윈터와 같은 클래스에 있는 아이들의 명단까지 일일이 받아 내어 확인하는 섀넌의 곁에서 러셀은 피로감을 느꼈다.

“제 사촌의 혼약자 팔촌의 외가 쪽 막내아들인데, 4년 전 왕도 아트홀에서 일어났던 테러에 휘말려 일가가 모두 죽었지요.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아이가 안쓰러워 제가 거두었습니다.”

교장이 내민 찻잔을 들어 올린 섀넌이 우아한 얼굴로 설명을 마치고 한 모금 차를 마셨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아직 혼전이신 것 같은데, 창창한 때에 이렇게 어린아이를 거두어 보살피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교장은 젊고 아름다운 청년 후견인이 제 피후견인의 교육에 이토록 관심과 정성을 쏟는 것을 보며 감동했지만, 러셀이 보기엔 영 이상했다.

난임인 부부가 십 년의 각고 끝에 낳은 외아들이라면 모르겠으나 사촌의 혼약자 팔촌…, 어쩌고의 아들에게 쏟기엔 과한 애정이 아닌가.

“우리 그리말디가의 선조께서는 늘 어리고 약한 것들을 보살피는 데에 힘을 쏟으셨지요. 퀸턴 왕가의 집권 당시 왕도에 있던 수도원과 고아원은 모두 우리 가문의 후원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아아, 그 얘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보존되어있는 건물들이 몇 채 있지요. 이그리트 수도원에서 그리말디가의 문장이 새겨진 석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장의 맞장구에 섀넌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윈터가 결코 부족한 아이는 아닙니다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인지라…….”

수트 안쪽에서 실크를 바른 작은 상자를 꺼낸 섀넌이 그것을 내려놓으며 교장 앞으로 내밀었다.

“혹시 윈터가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열이 난다거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면 지체하지 마시고 즉시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리말디가의 마차는 윈터가 학교에 있는 동안 늘 후문에 대기시켜 둘 것입니다.”

상자를 열어보려던 교장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 하하, 그런 부분은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학교 내부에는 자체적으로 최고의 의료진이 구성된,”

“아뇨.”

섀넌이 가볍게 웃으며 교장의 말을 잘랐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교장의 손등을 제 손으로 슬며시 덮었다.

“곧장 그리말디가의 마차에 태워 아이를 집으로 보내세요.”

섀넌이 웃는 낯으로 그와 눈을 마주쳐 왔다. 교장이 등지고 있는 창가의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섀넌의 눈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새빨갛고 영롱한 게, 마치 보석을 보는 듯하구나……, 섀넌과 시선을 맞대고 있던 교장이 표정이 일순간 멍하니 풀렸다.

“그러고 보니…, 눈 색이 참 특이하시군요.”

그가 꿈결을 헤매는 듯 부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입꼬리를 올려 가볍게 웃은 섀넌이 교장에게서 손을 뗐다.

“부탁드립니다.”

“……아, …예, 예! 물론이지요. 명심하겠습니다.”

아주 찰나 넋을 놓고 있던 교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조금 전 섀넌이 내밀었던 작은 상자를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교장이 얼른 그것을 닫고 제 코트 안쪽에 잘 챙겨 넣었다.

“…교, 교사들에게도 미리 고지해 두겠습니다.”

요즘 품귀 현상으로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는 파이로프 원석 다섯 점이다. 보석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교장의 부인을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섀넌이 저를 문 앞으로 배웅하는 교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장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참으로 매력적인 사내다. 몹시 빼어난 외모 탓도 있겠지만, 중년 남자인 자신도 그에게 이유 없이 신뢰가 가는 걸 보면 분명 여자들은 더 할 것이다. 곧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해지겠군, 교장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섀넌과 러셀을 보냈다.

“……적어도 윈터가 학교에서 발현으로 낭패를 볼 일은 없겠네요.”

섀넌의 가식에 기가 질린 러셀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뿐일까.”

등 뒤에 여전히 들러붙어 있는 교장의 시선을 느끼며, 섀넌이 조용히 코웃음 쳤다.

“난 천박한 애새끼들이 개미처럼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오직 윈터만이 최상의 케어를 받길 바라.”

섀넌이 굳이 그리말디가의 이름을 드러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섀넌은 또래들보다 사회성도 떨어지고 말도 늦게 배운 윈터가 다른 이들에게 괄시당하지 않길 바랐다. 기한이 정해진 양육이라 할지라도, 제 울타리 안에서 키우고 있는 아이가 천한 인간들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어떻게 두 눈 뜨고 보겠는가.

복도를 걷던 섀넌이 잠시 멈춰섰다. 윈터가 있는 교실의 창문 앞에 선 그가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키에 비해 의자가 높은지, 앉아 있는 아이들은 모두 허공에 발을 달랑달랑 흔들고 있었고 윈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뒤통수들 사이에서 윈터의 아름답고 결 좋은 은백색 머리는 단연 돋보였다.

고개를 돌린 섀넌이 산뜻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학교 다니기 싫다고 그리 엄살을 부리던 것과는 달리, 윈터는 의외로 그럭저럭 잘 적응했다. 섀넌은 윈터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모처럼 조용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고, 가끔 은밀히 외출하기도 했다.

서북부 저택에서 칩거할 때엔 배고픔보다 귀찮음이 우세라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지만, 사방이 인간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섀넌 또한 흡혈 욕구가 들끓어 참기 힘들어진 탓이었다.

종종 윈터가 예기치 못한 발현으로 수업 도중에 집으로 돌아오거나 며칠씩 결석하는 날이 있긴 했지만, 섀넌은 그와의 규칙적인 이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열 살이 된 윈터는 섀넌이 홀로 교육할 때보다 더 빠르게 의젓해지고 있었다.

해가 기우는 오후, 이제는 제법 식탁 예절도 지킬 줄 아는 윈터의 접시에 커다란 미트로프를 덜어 준 섀넌이 신문을 넘겨 보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러셀, 나 물 좀 줘.”

윈터가 건너편에 서 있는 러셀에게 물잔을 든 손을 뻗었다. 러셀이 들고 있던 유리 저그를 기울여 그의 잔에 물을 따라 주는 동안, 신문을 훑던 섀넌의 표정이 별안간 굳었다.

“윈터, 잠깐.”

이제 막 물잔을 제 입으로 가져가는 윈터의 손목을 잡은 섀넌이 그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윈터가 갑자기 제 손목에 코를 묻는 섀넌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요?”

러셀 또한 그의 돌발 행동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아주 찰나 섀넌의 눈에 붉은빛이 서렸다.

잡고 있던 윈터의 손목을 당겨 제 쪽으로 휙 끌어온 섀넌이 그의 목덜미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 행동에 순간 러셀은 섀넌이 윈터의 목덜미를 무는 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교실에 새로운 친구가 온 모양이지?”

“네, 헨리라는 아이가 새로 왔는데 오늘 내 옆자리에 앉았어요.”

천천히 제 손을 놓는 섀넌의 질문에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물을 마셨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섀넌의 표정을 보며, 윈터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헨리 냄새가 나요?”

“……개 냄새.”

무심결에 혼잣말처럼 작게 대답한 섀넌이 순간 윈터를 바라봤다. 윈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

“아니, 너한테서 난다는 게 아니라. …그 헨리라는 친구는 어디서 온 앤데?”

섀넌이 얼른 오해를 바로잡으며 헨리에 관해 물었다. 윈터가 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포크로 미트로프를 짓이겼다.

“나도 몰라요.”

“정확한 이름이 뭔데.”

윈터가 애써 기억을 더듬는 듯 제 이마를 긁적이다 말했다.

“아치볼드. 음…, 헨리 아치볼드.”

아치볼드……, 섀넌이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턱을 매만졌다. 윈터와 러셀의 의아한 시선이 제게 들러붙어 있는 것을 뒤늦게 의식한 그가 표정을 풀었다.

“얼른 식사나 마저 해.”

* * *

“아치볼드가에서 개를 키우는지 확인해 봐.”

차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서재로 들어서는 러셀에게 대뜸 지시가 내려왔다.

“그 일가가 이곳으로 이사 온 게 최근이라, 아직 그 집에서 개를 키운다는 얘긴 못 들어봤는데요.”

러셀이 섀넌의 책상 옆에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황당함을 감추고 대답했다.

아무리 윈터와 같은 클래스에 소속되어 있는 아이들의 집안 내력과 시시콜콜한 내부 사정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섀넌이라지만, 이제는 하다 하다 남의 집 애완동물 현황까지 알아야 하나.

“그래도 확실히 알아봐.”

황당해하는 러셀과 달리 섀넌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한동안 윈터를 좀 더 주시하고. 혹시라도 평소와 다른 돌발상황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알려.”

러셀은 그가 왜 이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대수롭지 않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며칠간 섀넌은 윈터의 냄새를 예민하게 맡아 댔다.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묻는 그의 입술 사이로 간혹 송곳니가 비어져 나오는 때도 있었다.

러셀은 그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설마 섀넌이 윈터를 사냥하려는가 싶어 간담이 서늘해졌다.

* * *

섀넌이 코트 깃을 여미며 화이트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잿빛이었다. 한바탕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라, 웬만해선 눈을 구경할 일이 없는 이곳 사람들은 아침부터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드문드문 드리워진 램프 빛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는 제법 분위기 있어 보이던 선술집은 대낮의 거리 아래에선 몹시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차림을 한 섀넌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화이트팽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크로 만든 투박한 바에 나란히 앉아있던 카일과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일렁이며 타오르는 등유 램프를 꺼트린 섀넌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들의 곁에 앉았다.

“마시지도 않을 술잔은 왜 채워 놓고, 불은 또 왜 켜둔 거야. 어차피 누가 오지도 않을 텐데.”

카일이 웃으며 몸을 돌려 바에 등을 기댔다.

“혹시 모르잖아. 며칠 전인가, 갑자기 대낮에 들이닥친 미친놈이 하나 있었거든.”

“아마 이 가게에 주인이 없다는 얘길 듣고 돈이라도 훔치려고 들어온 거겠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먹히고 싶어 환장한 놈이네.”

이내 웃음기를 거둔 섀넌이 잠시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가게 안을 무심하게 훑었다. 그가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향해 뭔가를 요구하듯 손바닥을 툭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자베스가 의아한 얼굴로 섀넌을 바라봤다. 그 뻔뻔한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섀넌이 짧게 말했다.

“나한테 온 편지 있다며.”

“아, 진짜 정 없어. 보자마자 안부도 안 묻고 편지나 내놓으라는 꼴 좀 보라지. 버릇없게.”

엘리자베스가 카일의 목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빨리 내놔. 시간 없어.”

“네가 무슨 시간이 없어? 개새끼 보모 노릇 하는 거 외에는 하는 일도 없잖아.”

“개새끼 보모 노릇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해 본 적도 없는 것들이 입만 나불대면 다인 줄 아네.”

엘리자베스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제 입을 가렸다. 어머, 몰랐어요…, 그렇게 힘드신 줄은……. 눈꼬리를 애처롭게 내린 그녀가 가냘픈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섀넌을 쳐다봤다.

그러나 섀넌은 엘리자베스의 농을 받아 주는 성격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눈을 깜빡이며 섀넌을 잠시 보던 엘리자베스가 재미없다는 듯 제 앞섶에 손을 넣었다.

가슴골 사이에서 나온 돌돌 말린 종이를 본 섀넌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섀넌이 편지를 낚아채려 하는 순간, 엘리자베스가 곧바로 손을 뒤로 물리며 제지했다.

“누구한테 온 건지 안 물어봐?”

“거기 적혀 있겠지.”

얼마 전 윈터의 신변 관련해서 출신 증명 서류 위조를 의뢰했던 터라, 보나 마나 그 서류와 관련한 것이겠지 싶은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재촉하듯 손을 까딱였다.

쏴아아, 밖에서 눈 대신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가 낡은 선술집 안까지 새어 들어왔다.

순간 표정이 일변한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섀넌을 지그시 쳐다봤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닌데.”

풍성하게 굽이쳐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과 새하얀 얼굴이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선술집 안에서,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개새끼 보모 노릇 하시더니 이제는 아예 개새끼들이랑 붙어먹으려고 하시나 봐? 우리 섀넌이.”

“리즈, 살살 좀 말해. 왜 이렇게 화가 많아?”

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다독였다. 엘리자베스가 그 손을 치우며 섀넌을 응시했다.

“발신인이 ‘다리야 자하카’라던데. 너 혹시 늑대 새끼들한테 화이트팽에 대해 떠들고 다니니?”

순간 섀넌의 얼굴이 굳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뱀파이어들끼리 은밀하게 연통을 주고받을 때 쓰는 화이트팽의 존재를 다리야가 알고 있는 건 차치하고라도, 그는 이미 죽지 않았던가.

시라트의 성곽에 그의 머리가 걸린 지 십 년이 지났다. 백골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섀넌이 손을 까딱이며 낮게 말했다.

“네 멋대로 오해하는 건 상관없는데, 일단 그것부터 내놔.”

“하, 더러운 늑대 새끼랑 붙어먹는 주제에 당당하시네?”

“말조심해, 엘리자베스. 아까부터 붙어먹긴 누가 누구랑 붙어먹는다는 거야.”

기세가 흉흉해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카일이 진지한 얼굴로 섀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섀넌, 네 사정은 우리도 충분히 알아. 그러니까 우리 입장도 좀 생각해 줘. 자하카가 다른 곳도 아닌 화이트팽을 통해 네게 접촉했어. 이게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섀넌이 그 손을 탁 쳐내며 화를 짓씹듯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놈이 그 잘나신 추격자들 풀어서 알아오지 않았던가? 이미 죽었다며. 그 머리가 성곽에 걸렸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어! 내가 그놈 말고 또 접촉한 늑대가 있을 것 같아?”

“진정해, 섀넌.”

카일이 섀넌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비척비척 뒤로 물러난 섀넌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황당한 실소를 흘렸다.

“진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야. 저게 멱 따인 돼지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는 꼴 안 보여?”

“뭐?”

엘리자베스가 새빨간 안광을 빛내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카일이 그녀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섀넌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씨발, 나도 뭘 알아야 대답을 해줄 거 아니야. 하는 꼴을 보니 이미 내용도 다 봤겠네. 그럼 한 번 지껄여 봐, 나도 그 빌어먹을 늑대 새끼가 무슨 엿 같은 말을 남겨 놨는지 궁금해 죽겠으니까!”

섀넌에게서 등을 진 채 엘리자베스를 겨우 달래어 진정시킨 카일이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억지로 건네받았다.

“별 내용은 없어. 사실 우린 봐도 모르겠고.”

“빌어먹을, 남의 편지 내용을 멋대로 훔쳐봤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도 지껄이네.”

카일이 검지로 선술집의 나무 바닥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항변했다.

“발신인이 자하카인 편지가 다른 곳도 아닌 여기로 흘러들어 왔는데 어떻게 안 볼 수 있겠어. 너였으면 훔쳐본 거로 안 끝났을걸? 편지 보낸 놈, 받은 놈 둘 다 찾아서 족쳤겠지.”

화이트팽이 뱀파이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노출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반왕정을 도모하는 혁명 세력에 가담한 뱀파이어 두 명이 한심스럽게도 자신들의 연락책으로 화이트팽을 이용했다가 왕족에게 발각되었을 때였다.

화이트팽을 통해 뱀파이어들이 주고받는 것은 기껏 해 봐야 영생을 살며 필요한 신분 교체나 재산, 부동산 문제, 사냥의 뒤처리와 관련한 도움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이 혁명 세력의 핵심 연락망으로 의심을 받으며, 하마터면 뱀파이어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날 뻔했던 것이다.

본래도 인간사에 관심 두지 않는 것이 뱀파이어들의 대체적인 성향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정계 간섭이나 눈에 띄는 사회적 활동이 암묵적으로 완전히 금해졌다.

그 일이 있고 몇백 년이 지난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시라트의 늑대족이 화이트팽을 통해 뱀파이어와의 연락을 꾀했으니 엘리자베스나 카일의 입장에선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괜찮아, 난 너 의심 안 해. 너라고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겠어? 말만 저렇게 하는 거지, 리즈도 똑같아.”

카일이 변명하듯 천천히 말했다.

“나랑 리즈 둘밖엔 모르는 일이야. 다른 놈들에겐 아직 말 안 했어.”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마운 우정이네.”

실소를 흘리며 한껏 비꼬는 섀넌을 향해 엘리자베스가 으르렁거리며 맞받아쳤다.

“눈물 나게 고마우시면 이리 기어 와서 내 발이라도 핥든가.”

카일이 몸을 살짝 옆으로 옮겨 둘의 시선을 차단하며 말했다.

“얼마 전에 윈터 출신 증명 서류 부탁했다며. 그때 그 서류에 섞여 있었는데 각 지점으로 우편을 보내다 그것만 빠진 모양이야. 리즈가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크게 난처해질 뻔했어.”

“내놔. 이런 냄새 나는 곳에서 시간 끌고 싶지 않으니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굳은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이는 섀넌을 보던 카일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편지를 던졌다.

허공에서 날아오는 편지를 낚아챈 섀넌이 둘둘 말린 양피지를 신경질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짜증 섞인 한숨을 흘렸다.

섀넌이 빠르게 램프에 불을 붙이고는 그 위에 편지를 비춰 보았다. 극도로 은밀히 전달하기 위한 발신자 나름의 조치였겠지만, 이걸 화이트팽으로 보낸 건 몹시 어리석은 짓이었다.

주홍빛 램프의 불빛을 통과한 종이에 그림자처럼 작은 글씨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Archibald.]

투박한 필체로 쓰인 짤막한 글자를 본 섀넌의 안색이 급격하게 일변했다. 빌어먹을……, 섀넌이 낮게 욕설을 지껄이며 램프에 비춰 보던 편지를 그대로 태워 버렸다.

“……이걸, 씨발, 왜 이제 줘.”

“왜, 그게 무슨 뜻인데? 아치볼드가 누군….”

그때 밖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발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눈치챈 듯, 잠깐 굳었던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섀넌, 네 노예 새끼가 먹히고 싶어 환장한 모양인데.”

엘리자베스가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섀넌의 고개가 문 쪽으로 홱 돌아갔다.

“섀넌 님!”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온 러셀이 바로 정면에 보이는 제 주인을 보고 맙소사, 계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여기 함부로 발 들이면 안 되는 거 몰라?”

안 그래도 심각한 와중에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러셀이 달가울 리 만무했다. 그러나 섀넌은 단순히 짜증이 난 상태가 아니라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보였다.

섀넌과 카일을 보던 러셀이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흠칫 굳었다. 엘리자베스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섀넌 님께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다급히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사죄하려는 러셀의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간 섀넌이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러셀은 순간 새빨간 살기가 어른거리는 섀넌의 눈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윈터는 어쩌고 여길 와. 별일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네 쓸모없는 눈알을 뽑아 버릴 거야.”

“아…, 그게, 윈터가 수업이 끝나고도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찾아봤더니, 아치볼드가의 마차를 타고 떠났다더군요.”

섀넌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소름 끼치는 표정에, 러셀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펴, 평소와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기면…, 즉시 알려 달라고, 하셔서…….”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화이트팽에 발을 들였다고 화를 내는 줄 안 러셀이 벌벌 떨며 변명을 늘어놓던 그때, 별안간 섀넌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깜짝 놀란 러셀이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쳐다봤다. 두 사람 또한 자세한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 아치볼드가 대체 누군데?”

영문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카일이 물었다.

* * *

섀넌은 퍼붓는 비에 쫄딱 젖은 케인타운의 시내를 내려다봤다. 눈이 올 거라며 기대했던 사람들은 차디찬 겨울비가 쏟아지니 실망하며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드문드문 움직이는 인적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던 붉은 시선이 어느 한 저택에 멈췄다.

아치볼드가의 저택은 담장이 그리 높지 않았으며 시내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화이트팽을 나와 단숨에 이곳까지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섀넌은 충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러셀을 통해 알아본 아치볼드가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집안이었다. 조상 중 귀족의 작위를 받은 자도 없고, 눈에 띄는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지역의 다른 부호들처럼 어쩌다 흐름을 잘 탄 사업으로 갑자기 부자가 된 자들이었다.

분명 저 저택으로 처음 발을 들였던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아치볼드가의 저택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택이 밀집되어 있는 소도시에서, 윈터 또래의 어린아이를 낀 늑대 일족이 들어와 평범한 일가족을 죽이고 그들의 행세를 하고 있는 이유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살짝 벌어진 섀넌의 입술 새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어져 나왔다.

추운 겨울에도 흰 입김 한 번 뿜지 않고 살기 어린 숨을 조용히 내쉰 섀넌이 제 옆으로 다가온 카일과 엘리자베스의 기척을 느끼고 힐끗 시선을 주었다.

지붕의 난간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엘리자베스가 이를 드러내며 아치볼드가의 저택을 응시했다. 캬악, 하고 미약하게 바람 새는 듯한 으르렁거림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저 냄새나는 짐승 새끼들이 이곳 남부까지는 무슨 일로 왔을까.”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카일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낮게 말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 평소보단 적지만, 아직 초저녁이라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과 마차가 많았다.

카일이 저택 주변의 거리를 걷고 있는 인간들을 눈으로 좇으며 물었다.

“좀 더 기다리는 게 어때.”

소란 없이 끝내야 할 텐데, 불행히도 오늘은 만월이었다.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변의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안 돼. 그럴 시간 없어.”

섀넌이 짧게 대꾸하며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기울였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을 때,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뭔가를 눈치챈 카일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섀넌의 몸이 앞으로 휙 쏘아져 나갔다.

“야, 이……! 저 다혈질 저거!”

카일이 낭패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향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그녀가 섀넌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혼자 남은 카일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섀넌과 엘리자베스는 성질이 너무 불같아서 탈이다. 당장 아치볼드가 저택 담장 너머로 태연하게 활보하는 인간들이 많은데, 저렇게 대책 없이 쳐들어가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러나 카일이라고 별수 없다. 그저 따라가는 수밖엔.

“에이 씨….”

카일이 투덜거리며 얼른 그들을 따라 몸을 날렸다.

* * *

고요한 아치볼드 저택 안으로 붉은 잔상을 길게 남긴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착지했다. 갑자기 열린 커다란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드문드문 켜져 있던 촛불이 꺼지며 홀 안이 까만 적막에 잠겨 들었다.

휘익, 카일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사방에서 낮은 그로울링이 깔렸다. 이내 곳곳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늑대들이 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에서 내려오며 난간을 짚은 채 카일을 빤히 응시하는 여자의 눈에서 서슬 퍼런 안광이 스쳤다.

여전히 창틀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있던 카일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드레스 예쁘네?”

낮게 으르릉거리던 여자가 기괴하게 고개를 비틀며 몸집을 불려갔다. 드레스를 찢고 흉측하게 벌어지는 어깨를 본 카일이 휘익, 하고 또 휘파람을 불어 댔다.

“워, 워, 진정해. 이게 그렇게 화낼 말인가? 난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칭찬해 준 건데.”

크르륵! 하는 울부짖음이 카일의 말끝을 잡아먹으며 달려들었다. 카일이 미처 방어를 하기도 전에, 앞으로 끼어든 엘리자베스가 여자와 한 바퀴 뒹굴었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비명이 어둠을 찢어발길 듯 울렸다. 카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제 등 뒤에 열려 있는 창문을 꽉 닫고 커튼을 촥 닫았다.

“어우, 목청이 너무 좋으시네.”

이 정도면 그 소리가 밖까지 다 울릴 것 같았다. 아직 거리를 활보하는 인파가 있는 시각에 이런 소음은 곤란했다.

“자기야, 그 망할 아가리 좀 닥칠 수 없어?”

이제 막 여자의 목을 비틀어 바닥에 내팽개친 엘리자베스가 카일을 비난함과 동시에, 사방에서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홀의 대리석 바닥으로 촛대와 장식이 떨어지는 소리와 테이블이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집주인의 취향으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던 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벽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던 명화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흩뿌려졌다.

“와…, 아까워.”

그중 꽤 비싼 작품을 발견한 카일이 누군가의 목을 움켜쥔 채 탄식했다. 보란 듯이 그 명화에 늑대의 머리채를 잡아 콱콱 짓이긴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섀넌은 도중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질척한 피와 뇌수로 더럽혀진 명화를 감상하며 카일이 대꾸했다.

“지 애새끼 구하러 갔나 보지.”

* * *

저택 뒤편에 있는 별채 안에서, 섀넌이 피로한 듯 고개를 좌우로 휙휙 비틀었다. 그가 잠시 높다란 천장을 무심하게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적신 피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섀넌이 이마 위로 성가시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이 저택 어디에서도 윈터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놈들이 윈터의 냄새를 철저히 지웠거나, 이미 윈터를 다른 곳으로 빼돌렸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인데 어느 쪽이든 기분이 엿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별채의 작은 응접실 안에는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의 울음소리와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중년 남자가 그르륵거리는 소리만이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고개를 내린 섀넌이 응접실에 깔린 시체들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반인반수의 모습을, 또 누군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사용인 복장과 응접실 바닥을 구르는 케이크와 쿠키, 화려한 식기와 찻잔을 보던 섀넌은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그것들은 같잖은 역할극의 흔적이었다.

감쪽같이 아치볼드 행세를 하며 또래의 일족 아이를 윈터와 같은 클래스에 등록시키고, 자연스럽게 윈터를 저택으로 초대해 차와 디저트를 대접하며 꾀어 낸 걸 생각하면 통째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판이다.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린 소년이 무릎을 꿇고 발발 떨며 필사적으로 빌었다. 다른 이들이 반인반수나 늑대로 화해 자신을 공격할 때도 이 아이만큼은 끝까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리고 연약한 모습으로 제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심산이라는 걸 섀넌은 너무도 잘 알아서 더 화가 났다. 자신이 저만한 또래의 늑대 새끼를 키우고 있다고 해서 모든 어린 늑대들에게 관대해지는 건 절대 아닐 텐데…….

섀넌이 순간 달콤하게 녹아내릴 정도로 사근사근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 그럼 살려 주실 거예요?”

별안간 그르륵거리는 질척한 울음이 섀넌의 등 뒤로 확 달려들었다. 몸을 홱 돌린 섀넌이 제게 달려드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테이블 모서리에 콱 짓눌렀다. 그 한 번에 머리가 박살 난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질척하게 터져 나온 피와 뇌수에 늑대 아이가 아연하며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섀넌이 진득한 피에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가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켜 세우며 창가로 끌고 갔다.

공포로 몸이 굳은 아이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바깥을 보게 한 섀넌이 후원 건너편에 있는 본관을 가리켰다.

“네 일족들 지금쯤이면 다 죽었을 거야.”

“…….”

“저 안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나보다도 더 자비가 없거든.”

아이의 어깨가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으나 발작처럼 떨리는 몸은 어쩔 수 없었다.

“얼른 말하렴. 네가 입을 다물수록 네 그 작은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어지니까….”

긴 손가락이 아이의 목을 느리게 휘감았다. 뱀처럼 서늘한 살갗이 목에 들러붙는 감각에 아이는 숨도 쉬지 못했다. 퍼붓듯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던 아이가 결국 다급히 입을 열었다.

“죽이려고 한 거 아니에요! 검은 늑대들이…, 윈터를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요. 어차피 그 애에겐 거기가 고향이잖,”

“변명은 나중에. 묻는 말에나 대답하렴. 내 인내심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보, 본관 지하 창고 바닥에……, 아악!”

섀넌이 아이의 덜미를 잡아 거칠게 밖으로 끌고 갔다.

“말했잖아요! 말했잖아요! 이거 놔주세요!”

“말하면 살려 준다고 누가 그러든?”

어른의 보폭을 따라가지 못해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아이가 결국 섀넌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몸을 변형시켰다. 까드득, 꽈득, 초저녁 허공을 채운 빗소리 사이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섀넌은 긴 손톱으로 제 손등을 마구 할퀴며 반항하는 늑대 아이를 질질 끌고 건너편 본관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하나 남은 늑대의 배를 꿰뚫어 내팽개친 카일이 섀넌과 그의 손에 질질 끌려오는 늑대 아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걘 뭐야?”

섀넌이 대답 없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이따금 아이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으나 섀넌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이를 끌어다 앞장세운 섀넌이 지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코를 찌르는 시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곳에 온 늑대 일족들이 죽인 아치볼드가 사람들과 그들의 사용인의 시체가 못해도 스물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것들을 훑던 섀넌이 별안간 짧은 실소를 흘렸다. 사람이 간혹 너무 화가 나면 웃음이 나는 법이다.

“천박한 것들이…….”

감히, …누굴 건드려.

섀넌은 윈터를 무사히 제 품에 안고 나면 반드시 이 늑대 새끼의 머리를 통으로 잘라 시라트에 던져 줄 것이라 다짐했다.

아이가 섀넌의 눈치를 보며 벽에 기대어 세워진 지렛대를 집어 들고는 한구석에 쌓여 있던 커다란 상자 중 하나를 뜯어냈다.

혹시나 죽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윈터에게 손을 대려는 늑대 아이를 거칠게 잡아 옆으로 팽개친 섀넌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윈터를 확인했다.

아이의 흰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섀넌이 늘 향유를 발라 철저히 관리해 준 예쁜 입술에 재갈이 꽉 물려 있었다. 아이는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벌벌 떨었다.

얼른 그를 안아 든 섀넌이 입에 물려진 재갈부터 풀고 마찰로 발갛게 살갗이 까진 아이의 입가를 쓸었다.

늑대 아이는 윈터가 기절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마도 그들의 계획보다 윈터가 일찍 깨어났던 것이리라.

“샤, 샤…, 샤넌….”

윈터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섀넌은 그런 그의 뒤통수를 감싸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했다.

“쉬…,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섀넌을 따라 뒤늦게 아래로 내려온 카일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윈터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쟤 이제 죽여도 돼?”

“마음대로.”

늑대 아이가 애원하듯 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섀넌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저 제 품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윈터의 숨소리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섀넌이 손가락을 딱딱 튕겨 카일을 불렀다. 늑대 아이에게 이제 막 다가가려던 카일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죽이지 마.”

카일을 지나쳐 늑대 아이의 앞으로 다가간 섀넌이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섀넌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던 윈터가 헨리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저와 같은 반인반수를 보는 건 처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라트에 가서 이 말을 그대로 전해.”

“…….”

“한 번 만 더 내 아이에게 접근하면,”

공포로 완전히 젖어 든 늑대 아이를 똑바로 응시하는 섀넌의 눈에 새빨간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게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아.”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카일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저거 완전, 선전 포고 아닌가? 시라트의 늑대들이 저 얘길 들으면 그리말디가 자신들의 왕좌 다툼에 함부로 손을 댔다고 여길 것이다.

“……섀넌, 그냥 죽이는 게,”

“끼어들지 마, 카일.”

윈터를 품에 안은 섀넌이 천천히 몸을 돌려 카일을 바라봤다. 섀넌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몹시 오랜만이었다.

카일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다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를 남겨 확실하게 시라트에 경고를 해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밤중에 부른 삯 마차가 아치볼드가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늑대 아이는 비통하고도 두려운 얼굴로 묵직한 상자를 안고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었다. 윈터를 가둬 두었던 상자였다. 그 안에는 윈터 대신 저택 안에 있던 늑대들의 머리가 담겼다.

“조심해서 돌아가렴.”

섀넌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린 조카를 대하듯 부드럽게 웃으며 마차 문을 닫아 주었다. 늑대들의 머리를 가득 실은 마차가 유유히 아치볼드가를 떠났다.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응시하던 섀넌이 뒤에 있던 카일에게 몸을 돌려 손을 뻗었다. 윈터는 두꺼운 담요에 둘둘 싸인 채 카일에게 안겨 있다가 섀넌의 품 안으로 다시 안착했다.

섀넌이 윈터의 이마에 입술을 묻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를 휘감고 있던 날카로운 긴장감과 살기가 느슨하게 거두어졌다.

윈터의 손이 섀넌의 목덜미에 닿았다. 품 안에서 꾸물거리는 윈터의 움직임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섀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샤, 미안해요……. 나는, 헨리가…, 헨리가 같이 생물학 숙제를 하자고 해서, 그래서,”

“쉬……, 됐어. 괜찮아.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윈터는 여전히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어린아이였다. 친구의 저택 응접실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좁고 어두운 상자 안이었다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울먹이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다독여 준 섀넌이 카일과 엘리자베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몸에 묻은 피와 더러워진 손을 빗물에 대충 씻으며 털어 대던 엘리자베스가 섀넌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잠시 섀넌의 품에 안긴 윈터를 보던 그녀가 카일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일단 저것들은 다 태우고. 시신은 실제 아치볼드 일가만 남기는 게 좋겠지?”

카일이 복잡한 표정을 지우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저만한 시체들을 다 태우면 연기 때문에 시선을 끌 거야. 차라리 땅에 묻는 게 어때.”

“제기랄, 난 빠질래. 이렇게 많은 시체를 언제 다 묻어?”

둘의 언쟁에 섀넌이 피곤하다는 듯 일축했다.

“화재로 해. 연기가 솟으면 사람들이 몰려오겠지. 그들이 진입하기 전에 저택을 모조리 연소시키면 돼. 목격자가 많으니 단순한 사고로 마무리될 거야.”

엘리자베스가 살벌한 얼굴로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들어 보였다.

“이 비에……?”

땅을 무섭게 때리는 비가 퍼붓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섀넌만이 차분하게 우산을 쓰고 있었고, 카일과 엘리자베스는 완전히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러니까 더 적절하지. 늑대들의 비명은 빗소리에 다 묻혔고, 저택 하나를 다 연소시킬 만큼 큰불이 나도 다른 데로 번질 위험이 적으니까.”

섀넌의 시선이 잔디 위에 쌓인 시신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힐끗 고개를 돌린 윈터의 눈에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머리 없는 시신들이 들어왔다.

굵은 비가 퍼붓는 어둠 속에서도, 윈터는 기형적인 그들의 손 마디마디와 길게 비어져 나온 날카로운 손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침 아치볼드가 장남이 화약 제조업에 손을 대고 있던 자라, 실험 중인 샘플 몇 개쯤 집 안에 있어도 이상할 게 없어.”

말없이 다시 제 품에 고개를 묻는 윈터의 뒤통수를 습관적으로 감싸며, 섀넌이 말을 덧붙였다.

“시종 중 누군가의 실수로 그게 폭발한다 해도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잠시 시신들을 둘러보며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한 일가가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도륙당한 사건이라면 한동안은 케인타운뿐 아니라 제국 전체가 들썩거릴 것이다. 그 사건을 미수로 종결하기까지 안배해 두어야 할 일들도 제법 많을 테고.

“……그래. 화재로 해.”

어차피 태워 없애야 할 시신이 있다면 아예 저택을 통째로 불살라 버리는 게 깔끔하다. 엘리자베스가 신경질적으로 젖은 머리를 틀어 올리며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혼자 남은 카일이 어색한 얼굴로 섀넌을 바라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시선을 모르는 척 넘기며, 섀넌이 한쪽 구석에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러셀에게 다가갔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우산을 쓰고 있던 러셀이 바짝 긴장한 자세로 섀넌에게서 윈터를 건네받았다.

“후문으로 조용히 나가. 보는 눈 없는지 잘 살피고. 집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윈터부터 따뜻한 물에 씻겨.”

“예, …알겠습니다.”

윈터를 러셀의 품에 안긴 뒤 조금 풀어진 담요 자락을 잘 여며 준 섀넌이 러셀에게서 물러났다.

윈터를 넘겨 주었으니 이제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은 필요 없다는 듯 땅에 떨어뜨린 섀넌이 미련 없이 돌아서 빗속을 뚫고 시신들을 향해 걸어갔다.

러셀의 품에 안긴 윈터가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섀넌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두운 홀로 들어섰다. 비가 그렇게 쏟아졌는데도 온몸에서 빌어먹을 늑대들의 피 냄새와 탄내가 진동했다.

섀넌은 곧바로 윈터의 침실로 올라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것을 참고 먼저 몸부터 씻었다.

카일은 어린 늑대 하나를 그렇게 보낸 것을 내내 신경 쓰는 듯했지만 사실 섀넌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윈터의 성년식까지 버티기로 했다. 놈들에게 위치가 발각되었다 해서 도망가듯 이주하는 것도 한두 번이면 족하다. 어차피 도심에 있는 한 그들이 함부로 자신을 건드리지는 못할 터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건, 이제 그리말디가 자하카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공식적으로 일파만파 퍼질 거라는 점이다. 시라트뿐 아니라 다른 뱀파이어들도 알게 될지 모른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수치를 절대 감수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섀넌은 딱히 후회하지 않았다.

미천한 것들이 어딜 감히, 내 울타리 안에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함부로 건드린단 말인가.

이건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섀넌은 그런 꼴을 절대 그냥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냄새를 다 지운 섀넌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윈터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 기척에 윈터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청회색 안광이 희미하게 스쳤다.

“……샤.”

“아직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 러셀에게 같이 있어 달라 하지 않고 왜.”

“그냥…,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어.”

침대에 걸터앉은 섀넌이 윈터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윈터가 고개를 뒤로 빼며 그 손길을 피했다.

“…윈터?”

윈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여전히 허공에 손을 걸어 둔 채, 섀넌은 조금 당황했다.

단 한 번도 윈터는 제 손길을 피한 적이 없었다. 피하긴커녕 제가 손을 다 뻗기도 전에 먼저 뺨을 갖다 대던 아이였는데, 너무도 갑작스러운 거부의 표시에 섀넌이 낯선 기분으로 천천히 손을 거뒀다.

“……아치볼드 저택에 있던 사람들 말이야.”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순간적으로 나온 행동이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윈터가 작게 말문을 뗐다.

“그들도 나와 같은 괴물이었어.”

섀넌이 간과하고 있던 것을 뒤늦게 떠올리며 짧게 탄식했다.

그러니까 윈터는 지금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시체들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발현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괴물과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을 오늘 그는 처음 목격한 것이다.

리버펠에 살 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윈터는 학교에서 너무나도 많이 배우고 있었다.

가령 다른 아이들이 평범하게 속해 있는 가정의 형태와 제가 속해 있는 이곳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섀넌에게선 배운 적 없는 부모의 존재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섀넌과 자신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라는데, 사실 윈터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동족이야?”

학교를 다니며 어휘력이 부쩍 늘어난 윈터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섀넌이 잠시 대답할 말을 고를 때, 그가 연달아 질문했다.

“섀넌은 그들을 먹는 거고?”

윈터를 안고 카일과 함께 위로 올라갔을 때, 엘리자베스는 막 꺼낸 내장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혀로 받아 마시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섀넌은 그때 분노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 있었고, 자신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풍경이라 윈터의 눈을 가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섀넌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윈터가 제 손길을 피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섀넌은 어쩐지 조금 화가 났다.

그의 하찮은 목숨 하나 지키려고 저는 온갖 번거로움과 오늘 같은 치욕을 감수하고 있는데, 이 어린 것은 벌써부터 동족을 운운하며 자신을 추궁한다.

마치 제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섀넌이 조금 전 씻고 온 탓에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짧게 웃었다.

“그들을 먹냐고?”

“…….”

“난 인간을 먹어. 정확히는 그들의 피를 마시지.”

섀넌은 더 이상 윈터가 충격받지 않을 선에서 말을 고르지 않았다.

“취향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짐승을 먹을 때도 있고.”

윈터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경계와 두려움이 드리워졌다. 그 눈빛이 몹시 어이없다는 듯, 섀넌이 계속 피식거렸다.

섀넌이 손가락 마디로 윈터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붉은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그가 경고하듯 낮게 말했다.

“네 동족을 잡아먹는 게 역겹다고 느껴져도 어쩔 수 없어. 너는 성년이 될 때까진 계속 내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해.”

그리고 갑자기 봄눈 녹듯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혹시 내가 너를 잡아먹을까 두려워진 거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말렴. 내가 아무리 굶주려도 너는 절대 먹지 않아. 네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한은.”

윈터와 계속해서 시선을 맞춘 채, 섀넌이 그의 양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눌렀다.

“인간들처럼 직접 키운 걸 잡아먹는 악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아이를 침대에 고이 눕힌 섀넌이 다정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윈터의 머리칼을 쓸어 준 섀넌이 그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솜털이 바짝 곤두선 아이의 살갗 위로 그가 속삭였다.

“잘 자렴, 윈터.”

* * *

이튿날 아침, 아치볼드 저택 화재 소식이 대서특필된 신문을 펼쳐 든 섀넌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식탁 앞에 앉는 윈터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창밖엔 아직 간밤에 다 쏟아지지 못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 물든 아치형 창을 등진 채, 윈터가 평소처럼 러셀이 당겨 준 의자에 착석했다.

“힘들면 며칠간 학교는 쉬어도 돼.”

섀넌이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 손끝으로 접시 테두리를 꼼지락거리던 윈터가 대꾸했다.

“……그냥 가도 될 것 같아요.”

차를 한 모금 삼킨 섀넌이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우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지.”

대화가 평소와 크게 다른 건 아니었으나, 어쩐지 냉랭한 둘의 분위기에 러셀만 혼자서 좌불안석이었다.

윈터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우자 섀넌이 낮게 당부했다.

“잘 지켜봐. 혹시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예.”

섀넌은 들고 있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심란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어젯밤 본 윈터의 표정에선 단순히 두려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 *

“좀 찾아봤어?”

“아직. 아치볼드가에서 그 난리를 피운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야. 찾아볼 틈이 어딨었겠어.”

카일이 소파에 몸을 던지듯 기대며 섀넌의 질문에 대답했다. 등교한 윈터와 함께 러셀도 자리를 비운 저택에 세 불멸자가 모였다.

그들은 어제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한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솔직히 전혀 감을 못 잡겠어. 다리야는 분명 죽었다고. 설령 놈이 살아있다 한들, 시라트로 끌려간 게 몇 년 전인데 화이트팽으로 편지나 보낼 상황이겠어?”

티스푼 끝으로 찻잔 테두리를 가볍게 두드리던 섀넌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짧게 대꾸했다.

“다리야가 아니면.”

“뭐?”

“다리야가 아닐 수도 있지.”

삐딱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섀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말을 보탰다.

“우리 자기 어쩜 이렇게 순진할까? 거기 쓰여 있는 발신인을 곧이곧대로 믿는 등신이 내 애인이라니.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엘리자베스가 귀엽다는 듯 카일의 턱밑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럼 누군데.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어?”

카일이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섀넌이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제 턱을 매만졌다.

“예전에 다리야가 내게 윈터를 맡기고 떠날 때, 역대 자하카 이름이 적힌 양피지를 남기고 간 적이 있었거든. 어제 본 그 편지의 필체가 그때 그 필체와 같아.”

“그럼 다리야가 맞다는 뜻이잖아?”

“그 필적이 꼭 다리야의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누군가 다리야에게 적어 준 걸 수도 있지. 다리야가 윈터를 데리고 시라트를 탈출할 때부터 내내 품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 같던데.”

다리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던 그 낡은 양피지를 떠올리며, 섀넌은 한 가지 가정을 생각했다.

“다리야의 머리가 성곽에 걸리니 반발하는 늑대들이 많았다고 했지. 그만큼 자하카 왕조를 지지하는 놈들이 아직 많은 거야, 시라트엔.”

카일의 허벅지에 두 발을 올리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던 엘리자베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니까, 그놈들 중 하나가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말디? 말하자면 간자 노릇을 해 준 거지. 늑대들이 아치볼드가에 잠복해 있다고 미리 힌트를 준 거야. 맞지?”

“다리야가 아기 이름을 고민할 때 곁에서 함께 고민해 줄 만큼, 자하카를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누군가가.”

섀넌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설원에 지어진 투박하고 원시적인 그들의 성채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눈 때문에 늘 눅눅하고 쾌쾌한 방 안에서, 누이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있는 다리야와 그 옆에 있는 얼굴 모를 조력자. 함께 이름을 고민하다 낡은 양피지 조각에 역대 자하카의 이름을 끄적여 보는 자하카의 최측근.

다리야조차 다 외우지 못하는 자하카의 이름을 줄줄 꿸 정도로 그들에게 충심이 깊은, 정체불명의 늑대.

분명 다리야에겐 어떤 조력자가 있었고, 그 조력자는 아직 생존해 있으며 섀넌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추격자들은 어디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섀넌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망설이다 물었다. 왜? 하고 카일이 짧게 되물었다.

“다리야가 남기고 간 것 중 불에 안 태우고 남아 있는 유일한 물건이 하나 있거든.”

“아, 그 이름 적힌 양피지?”

“아니.”

섀넌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짧게 말했다.

“머리 장식.”

* * *

섀넌은 카일에게 제 맹약의 증표였던 자하카 여인들의 머리 장식을 쥐여 보냈다. 카일은 추격자들을 직접 만나 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섀넌은 진저리치며 싫어했다.

엘리자베스는 카일이 섀넌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맹약에 얽매여 있는 섀넌의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지는 못했다.

섀넌에겐 지금 윈터를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라 전면에 나서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와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발 벗고 도와줄 만큼 그들은 오래된 벗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윈터는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학교 숙제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섀넌 또한 그런 그를 지켜보다 서재에 틀어박혔다.

얼핏 보기엔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묘한 적막이 둘 사이를 내내 감돌았다.

늦은 밤, 여전히 자하카의 조력자에 관해 생각하던 섀넌의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제 베개를 끌어안고 들어온 윈터가 가만히 섀넌의 눈치를 살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섀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물었다.

“왜.”

“……같이 자고 싶어서.”

섀넌이 피로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윈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그를 안아 든 섀넌이 침대 위에 눕히고는 저도 그 곁에 누웠다. 한쪽 팔을 벌려 주자 평소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한 동작으로 그 팔에 머리를 괴며 안겨 든 윈터가 한참 뒤에 침묵을 깼다.

“섀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섀넌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몹시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이가 제 눈치를 보며 아까부터 할 말을 고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제 동족에 관한 질문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뭘 더 알고 싶은지 말해 봐. 대답해 줄게.”

“그냥……, 다 알고 싶은데….”

아이는 정확히 어떤 것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 구태여 제 존재에 관해 설명하고 싶지 않은 섀넌은 그저 그가 적당한 질문 거리를 찾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잠은? 잠은 더 많이 자야 하나요?”

“아니. 잠이 우리에게 필수는 아니야.”

윈터는 섀넌이 말하는 ‘우리’에 자신이 포함될 수 없다는 걸 예전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다.

늘 아름답기만 한 섀넌과 시도 때도 없이 괴물이 되는 자신이 같은 존재일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자신이 언젠가 섀넌만큼 자라게 되면, 겉모습으로나마 그와 한데 묶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영영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자신이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동족들을 때로는 섀넌이 먹기도 한다는 걸 안 이상,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책에서 본 것 같아요.”

윈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뭘.”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인간의 피를 마시며, 늙지도 죽지도 않고, 낮에는 관 속에 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사냥을 나오고, 햇볕을 받으면 타 죽는…, 그런 존재.”

“…….”

“그럼 섀넌은 그들과 동족인가요.”

그의 말투와 떨리는 목소리에 조급함이 여실히 묻어나서, 섀넌은 소리 없이 쓴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관 속에 누워 있거나 햇볕을 받으면 타 죽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비슷한 건 맞아.”

섀넌은 윈터에게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며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윈터에게선 예상외의 우스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거구나…….”

윈터는 그 뒤로 잠시 말이 없었다. 어린아이라서 제가 알고자 하는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내내 겉도는 말만 하는 거겠지만, 섀넌은 어쩐지 정작 그가 알아야 할 중요한 얘기들을 지나치게 빼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침묵 속에 내던져져 있던 섀넌이 이쯤에서 대화가 끝난 줄로 알고 눈을 감은 그때, 윈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섀넌, 날 먹지 않는다고 했죠?”

“…그래.”

“그럼 언젠가는 날 버릴 건가요?”

섀넌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

“그럼 나와 계속 같이 살 건가요? 난 섀넌의 동족도 아니고, 가끔 섀넌을 귀찮게 하는데…….”

윈터는 제 정체에 관한 것보다 섀넌의 정체, 그리고 그와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모든 질문에 정작 그 자신에 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섀넌은 왜 나와 함께 있는 건가요.”

아이에게선 계속해서 질문이 쏟아졌다. 섀넌이 대답을 하든 말든,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초조해 보였다. 섀넌은 어쩐지 복잡한 마음으로 짧게 대꾸했다.

“그래야 하니까.”

“왜요? 원래부터 나와 같은 괴물들을 좋아했나요?”

“……윈터.”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의문이 담긴 맑은 청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예쁘게 반짝였다.

아이가 굳이 먼저 묻지 않는 이상 섀넌은 언제까지고 이 얘기를 미루고 싶었다. 이 아이에게 제 맹약이나 시라트의 현 상황 같은 것을 구구절절 읊어 줄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엔 시기가 너무 일렀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겠지만, 안 그래도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섀넌은 굳이 지금 아이에게 그런 충격을 안겨 주어 번거로운 일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와 같은 괴물들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경멸하지. 하지만…,”

“그런데 왜 나를 곁에 두는 거예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종알종알 연달아 질문을 쏟아 내는 것에 약한 피로감을 느낀 섀넌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널 예뻐하니까. 그리고 어제도 말했듯이, 나는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절대 널 버리지 않아.”

“키우는 애완동물…, 같은 건가요. 다른 집에서 개를 키우는 것처럼….”

섀넌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것보단 더 아끼고 있어.”

이제는 단순히 짐승을 주워 기르는 심정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다른…, 뭐랄까. 매 순간이 낯설고 어려우며 필사적인, 조금 더 애틋한 그 무엇.

섀넌은 제 감정을 설명하는 데에 이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윈터를 향한 제 마음은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그러면, 정말로….”

윈터가 섀넌의 허리에 작은 팔을 두르며 힘주어 꼬옥 안았다.

“날 버리지 않으실 건가요. 끝까지…, 진심으로?”

아이는 몇 번이고 확인받고 싶어 했다. 조급하고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섀넌이 무의식중에 그의 등을 감싸 마주 안았다.

이 순간 섀넌은 간밤에 윈터가 보였던 복잡한 표정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섀넌을 향한 두려움이기도 하면서 자신이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네가 어제 본 우리들의 모습은 몹시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순리일 뿐.”

제 동족들을 눈앞에서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피를 마시는 포식자를 향한 경계인 동시에, 그 포식자에게서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작은 얼굴에 다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널 버리거나 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섀넌의 입술이 윈터의 이마에 닿았다. 그가 완전히 이해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섀넌은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

“끝까지. …진심으로.”

절대적인 신뢰감이 느껴지는 음성이 윈터의 이마와 작은 콧잔등, 그리고 가슴속까지 천천히 흘러내렸다.

서늘한 숨결에 오스스 소름이 돋은 것도 잠시, 윈터는 놀라울 만큼 안락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섀넌은 카일의 손에 들린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들려 보냈던 자하카의 머리 장식이 반년 만에 되돌아왔다.

“이걸 보낸 게 언젠데, 조력자를 이제야 찾은 거야?”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음, 완전히 찾은 건 아니고,”

“제기랄…….”

카일이 미처 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섀넌의 입에서 한숨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다리야는 시라트에서 효수당한 것까지 그렇게 잘 알아내더니, 그깟 조력자 따위 찾는데 반년으로도 부족하단 말이야? 그놈은 화이트팽으로 편지까지 보냈다고.”

“그때는 그들에게 시라트 내부 소식을 물어다 주는 간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검은 늑대들이 죄다 색출해 내서 제거하는 바람에 몇 달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

“…그럼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모르지, 나도.”

카일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등받이에 팔을 걸친 그가 머리 장식을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두는 섀넌을 빤히 쳐다봤다.

“……섀넌, 너 너무 곤두서 있는 거 아냐? 윈터 때문에 예민해진 건 알겠는데, 너 이러다 나중에….”

“나중에 뭐.”

카일이 말끝을 흐리자 섀넌이 서랍을 탁 닫으며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냐.”

카일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되돌렸다.

“여하튼, ……그래서 추격자들이 직접 시라트로 잠입할 거야. 가서 조력자를 빼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 일단 그와 접선할 기회라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나직이 말했다.

“대신 그만한 값은 정당하게 치러야 해. 먼저 대가를 받기 전에는 그들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야.”

“……다리야를 찾을 땐 그런 말 없었잖아?”

“그들도 이제 알아 버렸거든. 이 일이 네게 얼마나 중요한지.”

섀넌이 생각만으로도 치 떨린다는 듯 진저리쳤다. 그들이 원하는 대가가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겐 그다지 내어주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역겹고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뭐 어때. 피 좀 뽑아주는 게 무슨 대수라고.”

“넌 그게 혐오스럽지도 않아? 늑대족들이 우리의 피를 마신다는 게.”

카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혐오스럽다기보단 우습지. 그걸 마신다고 불멸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 사실을 그들에게 끝까지 함구하고 그깟 피 좀 흘려 주며 이용하는 건 명백히 우리 쪽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섀넌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최상위 포식자인 자신들의 피를 피식자들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혐오감.

섀넌뿐 아니라 모든 뱀파이어들이 같은 이유로 그들을 꺼린다. 오직 카일만이 그들을 이용하는 데에 거리낌 없었다.

카일이 다시금 평소와 같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양손을 펼쳤다.

“조금만 편견을 바꿔 봐, 섀넌. 마음은 늘 열려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 * *

어두운 숲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불쾌한 습기처럼 피어올랐다. 여유로운 카일과 달리 섀넌은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사방에서 몇몇 쌍의 푸른 안광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친구들.”

카일이 능청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새까만 그늘 속에서 점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섀넌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낡은 넝마를 걸치고 있는 그들의 용모는 반인반수의 늑대족들보다 더 흉측했다.

입술 밖으로 길쭉하게 튀어나온 치아들은 정돈되지 못해 들쑥날쑥하고, 가늘게 삭아 잇새가 다 벌어진 데다 새까만 치석이 끼어 있었다. 아마 사냥을 해도 뱀파이어의 식습관을 흉내 내느라 살코기를 뜯지 않는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안 그래도 구부정한 허리를 더 굽신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은 하나같이 깡마른 체형들이었다. 시라트의 늑대 사회에서 낙오된, 태어날 때부터 약했거나 아예 어딘가 하자가 있어 버려진 자들.

“오…, 그리말디…, 당신의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섀넌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잡았다. 섀넌이 불쾌한 듯 그 손을 홱 빼내자 몸을 움츠린 늑대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영속의 권능을 누리는 악마이자, 만부의 피로 빚어진 선신이여…….”

섀넌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름 돋는 칭호에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뜨거운 밤의 환희이며 영혼을 태우는 차가운 불이시여.”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손발의 말단이 굽어들 것 같은 말을 들으며, 섀넌은 속을 게워 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그들의 이런 태도를 즐기는 건 카일뿐이었다. 카일은 자신들 앞에 거의 엎어질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늑대들을 바라보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그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이르실 것인지요?”

“다 알고 온 거잖아.”

섀넌의 대꾸에 누군가 킥킥킥 웃었다.

“영을 부어 주실 건가요?”

그들은 뱀파이어의 피를 ‘영’이라고 불렀다. 숱하게 많은 생명을 흡수하고 재창조된, 생령이라고.

그러나 사실 자신들의 피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피였다. 그 안에 불멸의 기운이 깃든 것도 아니었고, 그저 흡수한 영양분을 토대로 흘러가는, 다른 생명체가 가진 것과 다를 바 없는 혈액.

“이번엔 네 차례야?”

카일이 친근하게 물어오자 섀넌 앞에서 굽신거리던 늑대가 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 있던 늑대 하나가 살살 눈치를 살피며 섀넌의 앞으로 섰다.

“뭐야, 두 명이나?”

카일의 물음에 늑대가 수줍어하며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위험 수당은 두 배입니다.”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신처럼 떠받드는 거 치고 계산은 다 받아 처먹네.”

그의 말에 겁을 먹은 듯 움츠리면서도 늑대들의 얼굴에는 역겨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 탓이었다.

뱀파이어와 늑대들의 후각은 인지의 결이 달랐다. 뱀파이어들은 모든 오감이 무척 예민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냄새의 흔적을 좇아 대상을 추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눈으로 훤히 들여다보듯 냄새의 경로를 추적하는 능력 측면에서 보면, 후각만큼은 늑대족에 조금 뒤처진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섀넌의 앞에 엎드려 있던 두 늑대 중 하나가 그에게 작은 칼을 내밀었다. 그러나 섀넌은 그걸 본 체도 하지 않고 제 주머니 안에서 깨끗한 칼을 꺼냈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몸을 드러낸 선득한 날붙이가 섀넌의 손안에서 반짝였다. 늑대들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는 신자들처럼 그의 손만 집요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초 안 걸리니까 잘 받아 마시라고.”

“히히히,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그들을 잠시 보던 섀넌이 정말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제 손목을 쭉 그었다.

순식간에 후두둑 쏟아지는 피를 받아 마시려 두 늑대가 그 아래로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옷이 행여 제 구두에 닿을까 봐, 섀넌은 손을 최대한 앞으로 뻗었다.

그의 말대로, 갈라진 피부는 몇 초 만에 다시 재생되어 아물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게걸스럽게 혀를 내민 채 필사적으로 섀넌의 피를 받아 마시던 늑대들은, 피를 뚝뚝 떨구던 붉은 속살이 흔적도 없이 흰 살갗 안으로 감추어지자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떨리는 눈으로 그 과정을 바라봤다.

이러니 뱀파이어들의 피에 불멸의 기운이 깃들었다고 오해할 수밖에.

그들의 말로는 불멸자의 피를 마시면 아주 일시적으로 회복력이 조금 상승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 그들의 맹목적인 신념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섀넌은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섀넌이 다 아문 살갗에 묻은 피를 닦자, 잠시 그걸 아쉬운 듯 보던 늑대들이 납작 엎드려 흙에 몇 방울 떨어진 피를 핥아 댔다.

그 모습을 보기 싫은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에게서 아예 등을 돌렸다. 카일이 손뼉을 딱, 치며 늑대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럼, 이걸로 계산 끝이지?”

늑대가 양손을 맞잡은 채 초조하게 비비며 웃었다. 방금 섀넌의 피를 받아 마신 그의 이빨이 붉게 젖어 번들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선금이지요.”

섀넌이 대번에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홱 돌아봤다. 그 시선에 움찔 놀란 늑대가 고개를 푹 수그리면서도 카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시, 시라트에 잠입하는 일인데 어떻게 이 정도만 받고 끝내겠습니까요……?”

섀넌이 살기를 드리우며 당장 그들을 찢어 죽일 기세로 다가가자 카일이 그 앞을 자연스레 막고 서며 웃었다.

“진짜 대단들 하시네. 응?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쳐.”

카일이 가장 앞에 나와 있는 한 늑대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신에, 만약 그자를 찾지 못하면…, 그땐 너희들이 우리 영양분의 일부가 되는 거야.”

히익…, 누군가 겁에 질린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과 거의 코가 맞닿을 기세로 눈을 맞추고 있는 늑대는 몸을 바짝 굳힌 채 감히 숨도 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알아들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좋겠지?”

카일은 여전히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늑대와 눈을 맞추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던 그가 상체를 다시 세우자, 그제야 숨을 내쉰 늑대가 더듬더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물론이지요!”

카일이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이제 꺼져. 기분 더러우니까.”

조금 전 처음 만났을 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늑대들은 달아나는 개떼들처럼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섀넌은 여전히 역겨운 얼굴로 이제는 핏자국조차 없는 제 손목을 무의식중에 계속 닦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섀넌. 금방 찾을 거야.”

“……이 일이 끝나면 저놈들을 다 찢어발겨 개 먹이로 던져 줄 거야.”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하시고.”

가자, 카일이 섀넌의 양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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