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Preparation Step (2/18)

1. Preparation Step

시푸른 물빛 새벽이 내려앉은 설원에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눈을 맨발로 푹푹 밟으며 내달리는 여인은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쳤음에도 추위에 전혀 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는 오랜 핍박을 당한 듯 퀭한 얼굴과 군데군데 벌어진 상처들 때문이리라.

긴 대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성채에 당도한 여인이 빠르게 계단을 밟았다. 극도로 주변을 경계하는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새파랗게 빛나다 사라졌다.

얼어붙은 습기로 축축한 나무 계단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져 균형이 흐트러지는 몸을 잽싸게 다잡아 올라간 여인이 어느 문을 거의 부술 듯 열어젖혔다.

“다리야 님!”

작은 방 안은 벽난로의 열기로 후끈했다. 두꺼운 담요에 둘둘 싸맨 뭔가를 품에 안은 채 앉아 있던 거구의 중년 사내가 여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갈리나, 네가 여길 어떻게…,”

“나가셔야 해요! 얼른, 여기서 벗어나세요!”

열린 입술 안에서 터져 나오는 희부연 김 사이로 갈리나의 필사적인 얼굴이 보였다. 어찌나 열을 내며 달려왔는지, 검붉은 머리 위로도 옅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대체 어딜 간단 말이냐. 아직 내 누이의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

적의가 역력한 청회색 안광이 다리야의 눈에서 번뜩였다.

“이대로 자하카의 혈통을 끊어버릴 작정이십니까?”

갈리나의 일갈에 다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가 품 안에 있는 담요를 살짝 들추자 그 안에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작은 늑대가 색색 콧숨을 내쉬었다.

“아기라도 살리려면, 지금 밖엔 없습니다.”

다리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제 품에 있는 늑대를 갈리나에게 안기려 하자, 그녀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제게 맡기지 마세요. 저는 오래 달리지 못할 거예요.”

성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당황할 시간 따위 없다. 갈리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리야 님께서 직접 아기와 함께 떠나십시오. 두 분이 마지막 자하카 혈통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아기와 다리야 둘 중 하나라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 갈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누이는,”

“야낙 님의 영육은 제가 잘 거두겠습니다. 결코 화마가 살라 먹게 두지 않을 것이며, 설원에 얼게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미물에게 상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검은 늑대들에게 난도질당하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마치 기도하듯 간절했다. 갈리나가 제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리야의 머리 색과 똑같은 은회색 머리칼 한 줌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낡은 머리 장식에 둘둘 말려 있었다. 자하카 여인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머리 장식에 야낙의 머리칼 한 줌을 수습해 겨우 감아 둔 것이었다.

그 비루한 머리 장식이 소중한 보옥이라도 되는 듯, 갈리나가 다리야의 손에 조심스레 쥐여 주었다.

“아마도, 선조들의 곁에 편안히 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

“끝까지 살아남은 누군가가 해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바깥의 소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휘장이 쳐진 뒷문으로 다리야의 어깨를 거칠게 밀친 그녀가 얼른 가라고 종용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는 다리야와 시선을 깊게 얽은 갈리나가 주문을 걸듯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리말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던 다리야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이었다.

“그에게 가세요.”

다리야가 적의를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살아남으라더니, 우리를 가장 혐오하는 종족에게 가서 목숨을 구걸하란 말인가!”

“지금으로선 그에게 가는 게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그리말디는 날 보자마자 목을 베고 머리를 박제할 거야!”

다리야의 손등 위로 갈리나의 손이 지그시 겹쳐졌다.

“그는 당신을 절대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그 의미심장한 행동에, 제 손안에 있는 머리 장식을 내려다본 다리야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갈리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그를 문밖으로 밀어 버렸다.

망설일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등 뒤에서 닫혀 버린 문을 허망하게 보던 다리야가 이내 계단을 올라오는 요란한 발소리들을 듣고 얼른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드문드문 벽에 걸린 횃불이 바람에 아우성쳤다. 사방에서 불길한 불씨가 흩날렸다. 새벽하늘은 조용히 불티를 삼키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리야는 횃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을 내달리는 그가 무섭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성 아래 대로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이었다.

미명보다 시푸른 몇 쌍의 안광이 어지러운 잔상을 남기며 다리야가 있는 성채로 다가왔다. 검은 늑대들이었다.

다리야는 두 발로 계단을 내려가길 포기하고 품에 안고 있던 담요 끝자락을 입에 문 채 난간을 짚었다. 난간 너머로 훌쩍 뛰어오른 그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순간적으로 몰아친 돌풍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것은 거대한 늑대였다.

다리야는 필사적으로 설원을 달렸다. 아기가 잠들어 있는 담요가 그의 주둥이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먹구름 낀 잿빛 하늘을 닮은 늑대는 어두운 곳에서 보면 흰 설원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오직 서슬 퍼렇게 빛나는 청회색 안광 한 쌍만이 그 존재감을 발했다.

다리야를 발견한 늑대들이 방향을 틀어 그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크르륵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다리야의 뒷발을 금방이라도 낚아챌 듯 할퀴었다.

다리야는 이대로 그들을 완벽히 따돌리지 못할 것을 예감하며 빠르게 담장을 넘었다. 검은 늑대들 또한 새카만 그림자의 잔상처럼 맹렬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성채 밖으로 착지한 그들은 추격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 짧은 찰나에 사라져 버린 다리야 때문이었다. 그들의 잇새에서 부연 김이 훅 끼쳐 나왔다.

늑대들이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다리야의 냄새를 좇던 그때, 별안간 뒤쪽에서 섬광처럼 빠른 신형이 허공을 자르듯 그들 사이를 갈랐다.

그에게 습격당한 늑대의 목덜미에서 흐른 피가 설원을 검붉게 적셨다. 맥없이 튕겨 나간 동료를 뒤로한 채 검은 늑대들이 다리야를 천천히 둘러쌌다.

그르르르…….

낮은 그로울링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당겨졌다. 콧잔등을 사납게 구긴 늑대 한 마리가 다리야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거친 포효와 함께 순식간에 뒤엉킨 늑대들이 흰 눈보라를 일으키며 설원을 뒹굴었다.

순백의 평원에 붉은 얼룩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 피를 드러내기에 늑대들은 너무 검어서, 얼핏 보면 다리야의 상태가 더 위중해 보였다. 그러나 저 앞으로 달아나는 다리야를 그들은 결국 좇지 못했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담요 자락을 다시 입에 문 다리야가 경고하듯 검은 늑대들을 응시했다. 그의 턱 끝에서 떨어진 피가 담요를 적셨다.

그 안에서 꾸물거리는 작은 늑대의 존재감을 눈에 새기듯, 검은 늑대들은 몸을 낮춰 컹컹 짖기만 했다.

다리야는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 * *

타닥 타닥, 벽난로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이 내려앉은 그리말디 저택에 옅은 햇살이 드리워졌다. 서북부 해안가 부근은 늘 날씨가 궂어 해를 보는 날이 드물었다.

갈라진 구름의 균열을 비집고 내리친 햇살 몇 가닥에 저택 총관 러셀이 얼른 복도의 창을 모조리 열었다. 실내의 눅눅한 벽면과 융단이 잠시라도 해를 쬘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어두운 복도에 아치형 햇살이 빠르게 드리워졌다.

커튼을 차례로 열며 걷던 러셀이 넓은 홀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가 지날 때마다 벽면 곳곳의 맨틀피스에 쌓여 있던 먼지가 폴폴 날렸다.

제 주인이 발견했다면 한바탕 볼멘소리를 들어야 할 일이지만, 그에겐 그것을 닦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올라, 손가락 마디로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방문을 가볍게 두드린 그가 잠시 시차를 두고 기다리다 이내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가겠습니다’ 하는 통보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그가 한밤중처럼 어두운 방 안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구름도 옅고, 모처럼 해가 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방 주인은 마치 태풍이라도 만난 듯 창문을 꼭꼭 걸어 닫고 두꺼운 커튼까지 모조리 쳐 버려 혼자 밤 한가운데 내팽개쳐진 사람 같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러셀은 아직 의자 등받이 위로 슬쩍 솟은 검은 머리만을 내보이는 제 주인을 향해 말했다.

“……분명 아침에 커튼을 걷어 두고 간 것 같은데요.”

검은 머리통이 비딱하게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날이 궂잖아.”

의자 팔걸이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손목이 툭 튀어나왔다. 위스키가 조금 남은 투명한 글라스를 느슨하게 든 손가락은 너무도 무력해서, 금방이라도 잔을 떨굴 듯 위태로워 보였다.

러셀이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빠르게 젖히기 시작했다.

“모처럼 해가 난단 말입니다. 이렇게 계속 커튼을 치고 계시니 바깥 날씨가 어떤지도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마지막 커튼까지 다 젖힌 뒤에야 몸을 돌린 러셀이 갑작스럽게 들이친 햇살에 눈살을 찌푸린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검은 머리칼은 햇볕을 받아 어두운 고동색을 띠었다. 창백한 피부가 감싸고 있는 붉은 눈이 이지러졌다. 아, 하고 낮은 탄식을 흘린 남자가 짧게 내뱉었다.

“눈부셔.”

어두운 곳에서는 진한 핏물처럼 불투명한 눈이 햇살을 받으면 탁한 루비처럼 약간은 투명해진다.

불멸자, 섀넌 그리말디.

보통 인간들은 그의 붉은 눈에 홀리지만, 러셀은 한 번도 저 눈이 아름답다 생각해 본 적 없다.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간 영혼뿐 아니라 제 피와 내장까지 살라 먹을 수 있는, 사탄의 눈이었다.

“개 냄새가 나.”

“예?”

“개 냄새가 난다고.”

내친김에 섀넌에게서 가장 가까운 창문을 열기까지 한 러셀이 그의 뜬금없는 말에 순간적으로 바깥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저택에 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예민한 제 주인의 오감 탓에 저택에 개는커녕 이동 수단으로 쓰는 말조차 키우지 않는데, 개 냄새는 무슨.

러셀은 그저 핑계라 짐작하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가끔은 햇볕도 좀 쐬시고 그래야죠.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의 터무니없는 농담에 짧게 웃은 섀넌이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우다가, 이내 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야. 정말 개 냄새가 나.”

“인근에 민가도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개 냄새가 날까요.”

“그거야 난 모르지.”

붉은 눈이 러셀을 쳐다본다. 러셀은 창밖에 대고 공연히 숨을 몇 번 들이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새로 들어온 민가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분명 그런 건 없을 거다. 저택 주변으로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다. 섀넌이 이 부근의 토지를 통째로 사들여 이 저택만을 남겨 놓고 민가는 모조리 허물어 버린 탓이다.

“흠…….”

밖을 보던 러셀은 갑자기 제 곁으로 훅 다가온 기척에 순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수 창을 닫은 흰 손이 다시 쑥 거둬진다. 러셀이 뒤를 돌았을 때 섀넌은 제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군.”

태연한 얼굴로 커튼을 친 섀넌의 얼굴 반쪽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찰나 스치는 붉은 안광에 러셀은 시선을 피했다.

“뭐가 말입니까?”

그가 아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꾸 개 냄새가 난다느니 이상하다느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통에 약간 불안해진 러셀이 물었다. 감각이 예민한 제 주인이 뭔가 평소와 다른 기척을 감지했다면, 그건 정말로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러셀은 혹여 자신이 관리하던 저택의 살림에 변화가 있었는지를 머릿속으로 따져 보았다. 세탁물에 들어간 향수가 조금 진했다든지, 제가 먹을 요리에 쓴 향신료가 과했다든지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일지라도, 평소와 다른 변곡점이 분명 존재할 터다.

세탁물은 오전에 분명 잘 체크했고, 오늘 요리엔 향신료를 쓰지 않았다. 그럼 뭘까. 러셀이 고민하는 동안 섀넌은 비척비척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잔을 빙글 돌리며 꿈을 헤매듯 천천히 중얼거렸다.

“흠, 뭔가……, 아주 불쾌한,”

―그리말디!

그 순간, 밖에서 별안간 천둥이 치는 듯한 포효가 들렸다.

섀넌의 말에 잔뜩 귀 기울이고 있던 아주 공교로운 타이밍이라, 러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섀넌을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섀넌이 대수롭지 않게 한쪽 눈썹을 까딱이고는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러셀이 빠르게 방을 나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폭신한 의자에 몸을 푹 기댄 섀넌이 느슨하게 웃었다.

“개 냄새 맞다니까.”

* * *

“그리말디!”

러셀은 멀리서 벼락처럼 포효하고 있는 잿빛 머리칼의 노인을 응시했다. 상당한 거구에 비루한 옷차림, 둘둘 뭉쳐 품에 안고 있는 넝마 같은 담요…. 전형적인 떠돌이 비렁뱅이의 모습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거지인가.

그런데, 저 비렁뱅이가 제 주인의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걸까.

이 저택은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구식 건축물이라 외곽이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다. 물론 구색만 갖추려고 대강 파낸 거라 폭도 좁고 수심도 얕아 해자라 부르긴 민망한 수준이지만, 도개교가 내려가 있지 않으면 보통 사람은 통과하기 퍽 번거로운 장애물이었다.

게다가 방문자를 주눅 들게 할 정도로 끝모르게 둘러싸인 투박한 석축 벽,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철제 대문……. 아무리 천지 분간 못 하는 비렁뱅이라도 모르고 발을 들이긴 힘든 곳이라는 얘기다.

러셀의 시선이 사내의 뒤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대문을 스쳤다. 역시나, 새까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러셀이 다시 남자의 용모를 주목했다. 그때 마침, 아주 오랜만에 내리쳤던 햇볕의 장막이 하나둘 사라지며 묵직한 구름이 밀려들었다.

빠르게 드리워지는 잿빛 하늘 아래, 러셀은 그늘이 생긴 남자의 눈에서 희번득한 안광이 스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굳어 섰다.

‘인간이 아니다.’

러셀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가 남자의 모습을 관찰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로 두드러진 주름 탓에 퍽 노인일 거라 예상했는데, 자세히 살핀 남자는 생각보다 젊은 중년이었다.

청회색 눈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이따금 서슬 퍼런 안광이 스쳤다.

남자는 러셀의 생각처럼 단순히 빵 한 조각 얻어먹기 위해 악귀의 은신처에 발을 잘못 들인 불쌍한 비렁뱅이가 아니었다.

“그리말디!”

남자의 음성이 마치 짐승의 포효처럼 저택을 뒤덮었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 거대한 체구, 단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목소리.

잿빛 늑대 자하카.

러셀은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자신의 생각조차 의심스러웠다. 자하카가 왜 여기에? 떠도는 비렁뱅이들보다 더욱더 이곳에 오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다면 그게 바로 자하카다.

“그리말디! 다 듣고 있지 않소!”

그러나 그 자하카는 지금 마치 잃어버린 옛 연인을 부르듯 애타게 섀넌을 찾고 있었다. 서로 마주치면 누구의 목이 먼저 따일지를 경계해야 하는 사이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 발로 불멸자의 저택에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러셀은 순간적으로 저택의 주변을 휙 둘러봤다. 다수의 늑대가 달려들면 모르겠지만 일대일로 붙는다면 불멸자가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늑대들은 대체로 무리 지어 나타나는 편이고, 저자 또한 어딘가에 혈족들을 이끌고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저 미친 자는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러셀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눈앞의 상황을 애써 외면한 채, 저택의 최상층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제가 있던, 그리고 제 주인이 틀어박혀 있던 방이었다. 커튼이 굳게 닫힌 창문을 봐 봤자, 그 안에 있는 주인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러셀이 그토록 투시해 보려 했던 주인은 언제부터인지 기척도 없이 일층 정문에 나와 있었다.

“자하카.”

입에 잘 담지 않는 이름인 듯 생소한 발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음에도, 그 순간 남자의 고함이 뚝 그쳤다. 러셀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서로에게 머무른 두 쌍의 눈이 형형했다. 기이하게 눈을 빛내던 섀넌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를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점점 내려가 남자의 품에 안긴 담요에 닿았다.

“응접실로 들여.”

섀넌이 나직이 말을 남기며 몸을 돌렸다.

* * *

다리야의 시선이 벽면에 박제되어 걸린 늑대의 머리에 닿았다.

품 안에서 꾸물거리는 아기를 괜스레 단단히 부여안은 그가 시선을 내렸다가, 아까부터 재밌다는 듯 제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섀넌과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박제 장식을 하나 더 늘릴까도 생각해봤지만, 내가 요즘 그다지 의욕이 없어서.”

내가 조금만 사냥 의욕이 있었다면 너는 저 벽면의 박제 장식이 되어 있을 거라는, 지독히도 오연한 포식자의 경고에 다리야는 시선을 내리깐 채 필사적으로 찻잔만 응시했다.

그리말디가 자신을 보자마자 머리를 박제할 거라 했던 다리야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불멸자들과 늑대들의 관계란 그러했다.

불멸자들은 늑대족을 ‘수간으로 태어난 야만족’이라며 멸시했고, 늑대들은 불멸자들을 ‘죽음에서 비롯된 살인귀들’이라며 혐오했으니까.

그 중 특히 섀넌은 한때 늑대를 박제하여 제 저택에 장식해 두길 좋아하는 놈으로 늑대족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영속의 권능을 누리는 악마이자, 만부의 피로 빚어진 선신이여.”

그러나 다리야는 지금 그런 이에게 무릎을 굽혀야 하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밤의 환희이며 영혼을 태우는 차가운 불이시여.”

섀넌의 시선이 찰나 러셀과 마주쳤다. 둘의 눈에 비친 감정은 약간의 당황이었다. 섀넌이 제게 정수리를 내보이는 다리야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자하카에게서 저런 말을 듣다니,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누가 지껄여도 충분히 낯 뜨거울 칭호를 그에게서 들으니 손등에 오소소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허벅지 위로 올려놓으며 자세를 삐딱하게 고친 섀넌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 느슨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서로 당장 이를 드러내며 목을 따겠다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종족이, 응접실에서 다정스레 마주 앉아있는 것으로 모자라 한쪽이 무릎까지 굽힌 모양새라.

다리야는 상대에게 고개 숙이는 순간에도 품 안의 담요를 아직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섀넌이 작게 한숨을 쉬며 제 입술과 턱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 행동의 기저에 미약한 비웃음이 깔린 듯해서, 다리야는 공연히 담요 자락을 꽉 쥐며 떨어지지 않는 말을 내려놓았다.

“…피의 맹약을 지켜 주시길 청합니다.”

이례적인 상황에 흥미가 생긴 듯했던 섀넌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이 스쳤다. 눈에 띄게 놀라는 러셀과 잠시 시선을 맞췄던 그가 미심쩍은 눈을 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피의 맹약?”

다리야는 대답 없이 바닥만 응시했다. 잠시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섀넌은 그 대답을 기다려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난 살면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도대체 이 늑대 새끼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잠시 흥미가 일었던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이를 착각했거나 뭔가 단단한 오해가 있음이 분명했다. 섀넌의 눈에 옅게 돌던 이채가 금세 사그라졌다.

“핏덩이까지 데리고 내 저택에 들어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라니.”

그 말에 다리야가 움찔 굳으며 품 안의 아기를 내려다봤다. 그리말디가 이미 아기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는 이상, 담요로 둘둘 말아 숨기는 건 불필요한 짓일 터다.

결국 그가 천천히 아기를 섀넌의 발치로 내려놓았다. 그가 담요를 살짝 젖히자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어린 늑대가 드러났다.

섀넌이 옅게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로 살짝 코를 막았다. 피 냄새가 진한 것으로 보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쟁이인 듯싶은데, 대체 저걸 제게 내보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바닥에 내려진 늑대는 낑, 끼잉,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다리야가 담요를 살살 도닥이며 그런 아기를 달랬다.

조금 전 저택 앞에서 그리말디를 그렇게 목놓아 불러도 꼼짝 않고 잠들어 있던 늑대는 포식자의 앞에 놓인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 몸을 뒤채며 울었다.

“야낙의 핏줄이오.”

다리야가 당황한 듯 늑대를 계속 달래며 얼른 말했다.

“야낙?”

그 울음소리에 짜증을 억누르고 있던 섀넌이 처음 듣는 이름을 서툴게 발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 발치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이 핏덩이를 당장 움켜 터뜨려 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야낙이 누군지 제가 알게 뭐란 말인가.

다리야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가 담요를 완전히 젖히자 그 안에 드러난 늑대가 예상보다 훨씬 작아서, 섀넌은 너무도 당황했다.

조금 과장해서 한입에 씹어 삼켜도 될 만한 크기였다. 까마득한 옛날에 쥐었던 인간의 심장이 대충 저만하지 않았었나.

“이 아기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 당신이,”

섀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다리야는 잠시 틈을 두고 말을 골랐다. 불멸자를 마주쳐도 절대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수의 동료와 함께라면 모를까 혈혈단신으로 그를 대면하고 있자니 포식자의 발톱 아래에 수그리고 있는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핏덩이 아기를 내보이는 꼴이 마치 악귀에게 제물을 바치는 듯하지 않은가. 이 아기를 먹어 달라고.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지금 상황에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지만, 다리야의 입에서 나올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안전하게 키워 주길 바라오.”

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섀넌에게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사는 불멸자라 할지라도 생전 이렇게 황당한 말은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것은 말을 하는 다리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인뿐 아니라 온 늑대들을 통틀어도 불멸자에게 이런 부탁을 한 늑대는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섀넌은 길게 웃지 않았다. 황당한 헛소리도 정도껏이지, 여기서 다리야가 더 나아간다면 그때는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귀찮은 마음이 더 우세라, 섀넌이 피곤하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다섯을 세겠어. 그 안에 여기에서 나가도록 해. 하나.”

“성년이 될 때까지만이오!”

섀넌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 발치에 있는 늑대의 앓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둘.”

“당신들에겐 고작 이십 년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다리야는 몹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비장하기까지 했다.

요즘 시라트에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인가. 이를테면 광견병 같은 것. 그래서 이런 미친 늑대가 생겼나. 섀넌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른 채 숫자를 마저 이었다.

“셋.”

“말도 안 되는 청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넷.”

“그러나 당신은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요!”

“다ㅅ…,”

“내게는 피의 증표가 있소―!”

낑낑 앓던 늑대의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섀넌이 마지막 숫자를 셈과 동시에 다리야는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살기를 거둔 섀넌이 기묘한 눈으로 다리야의 손에 들린 머리 장식을 바라봤다. 다리야의 머리 색과 비슷한 잿빛 머리칼이 가지런히 감긴 머리 장식은 무척 오래된 것인지 나무의 색이 검게 바래져 있었다.

“그건 자하카에 대대로 내려온 여인들의 머리 장식이오. 내 증조모의 증조모,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지. 정확히 언제부터 내려온 것인지는 나도 모르오.”

섀넌은 그저 말없이 머리 장식을 관찰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기실 완전히 처음 보는 장식이었다.

‘내가 자하카와 피의 맹약을 맺었다면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지금껏 잊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자신은 살며 피의 맹약이라는 것을 딱 한 번,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뭣 모르고 맺은 적이 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제 곁에 있는 러셀이므로 절대 착각 따위 할 리 없었다.

제가 빌어먹을 늑대 따위와 맹약을 맺어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역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군. 나는 이런 장식을 본 적이 없어.”

그가 다시 심드렁해진 얼굴로 다리야를 마주했다. 제 말을 완전히 헛소리로 치부하는 듯한 눈빛에 조급해진 다리야가 주절주절 변명했다.

“너무 오래되어 나무가 삭고 훼손되기도 했었소. 그래서 아마 원형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요. 다시 한 번 봐주시오.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소!”

당연히 섀넌이 이 장식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다리야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 전에, 제가 맺은 맹약에 관해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눈을 가늘게 뜬 섀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다리야가 얼른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에게 머리 장식을 건넸다. 그러나 섀넌은 그 장식을 잡지 않고 그저 깊게 응시했다.

닿을 듯 말 듯, 머리 장식 위를 배회하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치 맹수가 먹이의 크기를 가늠하듯 느리게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는 그의 모습에 다리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몸을 도사린 뱀처럼 장식을 응시하는 섀넌의 눈이 붉게 빛났다.

다리야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저 거무죽죽했던 머리 장식의 균열 사이사이로 마치 방금 흐른 듯한 피가 스며 나오고 있는 탓이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장식을 놓칠 뻔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두려운 마음을 다잡고 섀넌이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무 위로 배어 나오던 피는 점점 더 짙어져 나중에는 다리야의 손을 타고 흐를 지경이 되었다. 그 일부가 아래로 톡, 톡, 떨어져 작은 늑대의 정수리 위에도 붉은 점이 생겼다.

섀넌의 손이 이내 거둬졌다. 다리야는 그제야 자신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손이 거둬지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기류 또한 완전히 물러나 별안간 숨통이 확 트였다.

손을 타고 흐르던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붉은 얼룩이 졌던 늑대의 정수리 또한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양 보송보송했다.

“……그리말디의 피가 맞다.”

섀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다리야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집어삼켰다.

정신 나간 뱀파이어 같으니. 어떻게 제가 맺은 피의 맹약을 잊는단 말인가.

섀넌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어 하마터면 다리야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의 진위를 의심할 뻔했다.

“……조금 혼란스럽군.”

특유의 권태가 완전히 사라진 섀넌의 눈은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분명 자신은 언젠가 이 장식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제 피를 적셔 장식의 주인과 거래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억은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사실이 섀넌을 혼란케 했다.

“혹 이것에 관해 전해진 다른 얘긴 없었나?”

“장식을 소유하는 여인들에게만 은밀히 내려오는 이야기라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오. 어렴풋이 듣기로는, 당신이 과거에 우리 자하카에게 목숨 빚을 졌던 것으로 알고 있소.”

목숨 빚이라는 말에 순간 섀넌의 눈이 벽에 박제된 늑대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아주 찰나여서, 다리야도 러셀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빚을 지는 과정에서 맹약을 맺은 게 아닐까 생각하오.”

당혹감이 서린 섀넌과 달리 다리야는 도리어 아까보다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단 이곳에서 그를 대면하는 일이 힘든 것이지, 피의 맹약이 증명되었으니 그는 절대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못할 터다.

“이젠 맹약을 지켜 주시겠소?”

불멸자를 속박할 수 있는 유일한 규율. 바로 불멸자 자신의 피로 맺어진 맹약이다.

당사자에게 지키지 못하면 그 후손에게라도, 얼마나 백세의 시간이 흘렀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력한 힘의 구속.

목숨 빚……,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섀넌의 표정이 기묘했다. 뭔가 떠오른 일이 있는 듯도 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듯도 했다. 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정확한 기한이 언제라고? 기준을 제대로 해. 성년이란 게 너희 종족 기준인 거야, 인간들의 기준인 거야.”

바닥을 향해 있는 다리야의 눈이 분주히 움직였다. 단순히 나이가 차 성인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사교계 파티니 뭐니 하며 성년식을 또 따로 치러야 하는 인간들에 비해, 늑대 사회 기준의 성년은 너무 짧다.

못해도 20여 년은 이 아이가 저자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할 텐데…….

“……인간들의 성년식 기준이오.”

고심 끝에 나온 대답에, 붉은 눈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느리게 턱을 매만지며 다리야를 내려다보는 섀넌은 마치 갈등하는 듯 보였지만 기실 고민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숨을 조여 오는 침묵이 흘렀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시선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작은 늑대에게 향했다.

“……나, 섀넌 그리말디.”

섀넌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는 애초에 선택권이 없는 일에 쓸데없이 골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뜨거운 밤의 환희이며 영혼을…….”

눈살을 찌푸린 그가 말 중간을 한숨과 함께 얼버무리며 무료하게 말을 이었다.

“……로서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의 선조와 맺었던 맹약을 지키겠다.”

얼핏 보기엔 지루하고 성의 없어 보였지만 기실 그는 제법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도대체 과거 자신이 무슨 연유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든, 그 맹약의 증표가 눈앞에 있는 이상 이는 불가항력이었다.

“내 피로 말미암아 지금부터 그대의 혈육은 내 울타리 안에서 안전할 것이며, 누구도 그를 해할 수 없음이라.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고 내 율례를 지키니, 그가 내 보호 아래 무사히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 이에 내 모든 권능을 바치겠다.”

다리야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섀넌을 올려다봤다. 사실 이건 일방적인 요청과 수락이 아닌, 쌍방 간의 거래에 가까운 상황이니 그 어떤 감사의 말도 필요치 않았다.

이것으로 그는 최소한 제 어린 조카의 안전만은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지 20여 년 정도의 시간을 번 것뿐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조금 전 섀넌이 피의 증표를 확인할 때부터 이미 훌쩍 뒤로 물러나 있던 러셀은 숨죽여 두 사람을 바라봤다.

촛불 빛이 드문드문 드리워진 어둑한 응접실 안.

넝마를 걸친 채 무릎 꿇고 있는 설원의 필멸자와, 깨끗한 소파에 다리를 길게 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불멸자의 모습.

그리고 그들 사이에 놓인 아주 작고 하찮은 갓난쟁이까지.

이지러지는 주홍빛 불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유화처럼 잠시간 정지되어 있었다.

* * *

섀넌은 커튼을 반쯤 치고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하카가 방문하기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러셀은 혹시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닐까 아주 잠깐 의심했다.

그러나 아까와 달라진 것은 분명히 있었다.

“내 집에 개 냄새가 진동하는군.”

테이블 위, 더러운 담요에 둘러싸인 늑대 때문이다.

“앞으로 꼼짝없이 20년 이상은 이 냄새를 계속 맡아야 한다는 얘긴데…….”

부러 ‘인간들의 성년식’을 기준으로 잡은 다리야가 맹랑하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더 길게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감히 제 앞에서 나름의 머리를 굴린 게 아닌가.

그의 시선이 이제 막 저택의 철문을 나서는 다리야를 좇았다.

자신이야 그가 가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이지만, 그는 이쪽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리야는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이쪽을 올려다봤다.

저토록 아끼는 혈육을 포식자의 집에 맡겨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야 말해 무엇할까. 그저 자신과의 맹약을 믿기에 저지른 짓일 뿐, 어지간한 위협이 아니고서야 이런 미친 짓은 저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라트 설원을 검은 늑대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했나.”

섀넌은 조금 전 다리야에게서 들었던 시라트의 상황을 곱씹는 중이었다. 혼잣말처럼 들린 질문에 조금 늦게 정신을 차린 러셀이 얼른 예, 하고 대답했다.

시라트 설원은 북부의 가장 끝에 있는, 영원한 늑대들의 땅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의 왕은 단 한 번도 바뀐 일이 없었고, 자하카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영좌는 무척 견고했다.

그러나 섀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지금 자하카의 영좌는 몰락을 맞은 모양이다. 반역이든, 혹은 적자와 서자 간의 양위 다툼이든 간에. 결국은.

“그럼 저게 성년이 되었을 때 이미 시라트는 완전히 검은 땅이 되어 있겠군.”

그가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백세의 시간 동안 자하카가 얼마나 빛나는 영예 안에 살았는지는 몰라도, 이제 남은 것은 저 초라한 사내와 움키면 터질 것 같은 작은 핏덩이뿐이다.

촤악, 커튼을 완전히 닫은 섀넌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성년식을 치러도 결국 죽을 확률이 높겠네.”

성년이 되어 죽으나 지금 죽으나, 어차피 결과론적으로는 똑같다.

그러나 섀넌은 필멸자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에 제 사활을 걸어 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사고방식은 섀넌으로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위스키가 들어 있는 디켄터의 마개를 연 섀넌이 잔에 술을 채우는 동안, 러셀이 그에게 둘둘 말린 양피지를 내밀었다.

섀넌이 싸늘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

빌어먹을 자하카 놈의 냄새가 배어 있는 탓이다. 마치 아주 더러운 것을 만지듯, 섀넌이 눈살을 찌푸린 채 검지와 엄지로 양피지를 집었다.

“뭔데.”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기랄.”

러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피지는 섀넌의 욕설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련 없이 양피지를 떨궈 버린 섀넌이 술잔을 집었다.

“역대 자하카 직계 혈통의 이름이랍니다. 다리야가 떠나기 전 주고 간 것이니, 이름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개새끼한테 이름까지 지어 줘야 해?”

섀넌의 대꾸에도 아랑곳없이 러셀이 끈질기게 양피지를 주워 내밀었다.

“자고로 모든 존재는 이름이 생겨야 유의미해지는 법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거죠. 섀넌 님께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러셀의 말을 끊은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그에게서 양피지를 빼앗아 펼쳤다. 무신경한 눈으로 이름들을 훑던 섀넌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음.”

북부 특유의 억양이 반영된 이름들은 입에 담기도 번거롭고, 어감도 어딘가 우아하지 않고 투박했다.

‘자하카’ 성만 하더라도 벌써 러셀은 여러 번 발음을 틀렸다. ‘자흐아카’라고 했다가 ‘자흐카’라고 했다가, 방금은 아예 ‘자, 하카’라고 끊어 말하지 않았는가.

매번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발음을 틀리면 무척 품위가 떨어져 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미쳐 버릴 지경인데 애 이름마저 그 모양이라면, 자신은 러셀이 아이를 부르는 걸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로 화병이 도질지도 모른다.

육체적으로는 쇠하거나 병들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뱀파이어에게 화병이란 게 얼마나 번거롭고 위험한 질병인가.

섀넌은 혀를 차며 러셀에게 양피지를 다시 넘기고는 힐끗 늑대를 바라봤다. 다리야가 함께 두고 간 담요 안에 몸을 파묻은 채 눈만 빼꼼히 내놓은 늑대는 갑자기 떨어지게 된 낯선 곳을 매우 두려워하는 듯했다. 게다가 몹시 낯선 상대의 붉은 눈도.

제가 짐승을 싫어하는 걸 감안하고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저건 특출나게 못생겼다. 박제해서 제 저택에 걸어둔다 해도 그다지 장식의 기능을 하지 못할 만큼.

윤기가 돌지 않고 부스스한 늑대의 잿빛 털은 꼭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혀 더러워진 눈 같았다.

드넓은 설원을 호령한다는 자하카의 모색치고는 그리 존귀해 보이지도, 강해 보이지도 않는 초라한 색이다. 멍청하게 꿈벅대는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을 보던 섀넌이 결국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윈터.”

“예?”

뜬금없이 튀어나온 섀넌의 말에 러셀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이름.”

그의 대답에 러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늑대의 이름을 말하는 건가? 북부식 이름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느낌이다.

윈터, 윈터 자하카…, 성과 합쳐 몇 번 입안에서 중얼거려본 러셀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어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러셀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북부식 이름을 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아이가 커서 시라트로 돌아가면, 그 이름 때문에 늑대들에게 쓸데없는 미움을 사게 될 텐데요.”

섀넌이 그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빼내어 미련 없이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어차피 돌아가자마자 죽을 텐데 뭐.”

“…….”

러셀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정한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라트의 늑대들에게 이름으로 배척당할 일 따위 생기기도 전에, 검은 늑대들이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바엔, 자기들이 부르기 편한 이름이나 붙여 주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장작을 더 가져다 놔.”

퍼뜩 상념을 지운 러셀이 고개를 돌려 섀넌을 바라봤다. 잔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모두 마신 섀넌이 불청객을 보듯 창가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겨울이야.”

바람이 유리를 두드리며 창이 가볍게 흔들리는 소음이 들렸다. 러셀은 커튼 틈새로 아주 가느다랗게 보이는 회색 허공을 괜스레 응시했다.

어느덧 초겨울이었다. 북부 시라트에서 찾아온 것이 비단 늑대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쪼로록,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에 위스키 향이 번졌다.

섀넌이 혀를 차며 늑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때에 절어 있는 듯 지저분한 저 잿빛 털이 마음에 안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일단….”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작게 진저리쳤다.

“저거 좀 씻겨. 냄새나니까.”

기껏 이름을 지어 주고는 정작 본인은 그 이름을 불러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러셀이 그의 눈치를 보며 늑대를 담요째로 둘둘 말아 안았다.

늑대는 러셀에게 안긴 채 흑요석처럼 반질반질한 눈을 끔벅이며 섀넌을 바라봤다. 그러나 러셀이 문을 닫아 시야가 막혀 버리자, 늑대는 다시 담요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 * *

의자 등받이 위로 비죽 솟아 있던 검은 머리가 옆으로 픽 기울었다. 술잔을 든 채 옆으로 비어져 나온 손이 무기력하게 흔들리며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달각달각 울렸다.

침실에 홀로 남은 섀넌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늑대 새끼와 맹약을 맺은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목이라도 따고 싶은 심정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를 느릿느릿 말아 불을 붙인 섀넌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허공에 느긋한 곡선을 그리는 흰 연기 속 환영처럼, 아주 오래된 어느 날의 기억을 몰래 꺼내 보았다.

담뱃잎이 담겨 있던 금빛 케이스가 탁 닫혔다.

그래, 어쩌면 그때 맺은 걸지도 모른다.

어려서 그렇다는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등신 같고 철없던 시절의 어느 날에.

뱀파이어는 날 때부터 만개한 성인의 몸으로, 자연에서 태어난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숲에서 어느 날 갑자기 빚어지는 그들은, 눈을 뜨고 가장 처음 발견한 인간을 잡아먹고 그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자신들 스스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제 본질과 욕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살생으로 완성되는 존재인 만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뱀파이어들은 통제 불능이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식욕과 성욕이 강하고, 제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에 있어 그 어떤 거리낌이나 죄책감도 없는 족속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혈기가 왕성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이든 씹어 삼키고, 으스러뜨리고, 내키는 대로 찢어발기는 그들의 욕구는 식욕이라기보단 살욕에 가까웠다.

그즈음의 섀넌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박제한 늑대의 머리를 제 저택에 장식해 두는 게 유행이었다. 가문 하나를 하룻밤 사이에 멸문시킬 정도로 왕성한 살욕을 마음껏 풀 만한 유희 거리로는 가장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들보다 먼저 태어난 뱀파이어들 또한 인간에게 무분별한 해를 끼쳐 번거로운 추문을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숲에 사는 짐승을 건드리는 게 낫다고 여겨 그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 나이 때의 불멸자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잔학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늑대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빠르면 절대 호승심을 부리지 말고 물러나라고 경고했었다. 어쩌면 그것들은 숲의 늑대가 아니라 ‘시라트의 늑대족’일지도 모른다고.

섀넌은 북부 끝 설원에 사는 늑대족을 이런 남부 시골 땅에서 마주칠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 말을 비웃었다.

늑대의 발톱에 뱃가죽이 뚫리기 전까진.

“하아……, 후….”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간 옆구리를 움켜쥔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 쏟아지는 느낌이 꼭 내장이 줄줄 쏟아지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고작 이 정도로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빌어먹을 늑대 발톱의 독성 때문에 출혈이 심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기랄 너무 아파…….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냐…?

그때 어디선가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잔뜩 몸을 웅크린 섀넌이 풀숲 사이로 깊이 몸을 숨겼다. 그러나 우습게도 지나가는 이는 웬 어린 소녀였다.

“이봐.”

섀넌이 힘겹게 소녀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소녀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정말로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아 배를 한껏 움켜쥔 섀넌이 가까스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야!”

정신은 아득해지고 몸은 자꾸 아래로 푹푹 꺼져, 급한 대로 손에 잡은 건 소녀의 머리채였다. 졸지에 머리채를 잡혀 뒤로 넘어진 소녀가 왁 소리를 질렀다.

“귀먹었냐? 사람이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해!”

머리에 꽂혀 있던 나무 장식이 섀넌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휙 딸려갔다. 피가 흥건한 손으로 머리 장식을 움킨 섀넌이 어느새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자신을 경악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소녀를 노려봤다.

“내 꼴 안 보여?”

“보, 보여요.”

소녀가 두려운 얼굴로 주저앉은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섀넌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채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했다.

“보이면 좀, …어떻게, 든…, 해 봐.”

살려줘, 섀넌이 필사적으로 소녀의 발목을 움킨 채 힘겹게 중얼거렸다.

“힉, 이거 놔요!”

소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의 손을 떨쳐내려고 발길질하자, 섀넌이 더욱 그녀에게 매달렸다.

“빌어먹을!”

욕설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보는 소녀도 놀라고 섀넌 본인은 더 놀랐다. 후드득 떨어진 피가 마른 잔디에 금세 흥건하게 고였다.

“씨발…….”

섀넌이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나 좀, …살려 줘.”

“가, 가서 의사를 불러올게요.”

몸을 일으키려는 소녀를 우악스럽게 다시 주저앉힌 섀넌이 고개를 저었다.

“의사 말고! 윽…, 의사는 안 돼. 그냥, …일단, 지혈만 좀 해 주면 돼. 내가 지금…,”

“지혈로 안 돼요.”

“……뭐?”

“그 상처는 지혈 안 된다고요.”

“…….”

섀넌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숨만 몰아쉬었다. 그저 우연히 지나가는 보통 인간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뭔가를 알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여자 또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섀넌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자신과 같은 불멸자인가, 아니면 저를 이렇게 만든 놈과 동족인가.

하지만 지금 그딴 게 중요한가? 누구든 상관없다. 누구든…, 자신을 살려 주기만 한다면.

“알면, 좀, …어떻게 좀 해 봐. 나 좀…, 살…….”

섀넌은 그대로 제 피가 흥건한 잔디에 얼굴을 처박고 혼절해 버렸다.

절반이 넘게 탄 담뱃재가 긴 손가락 사이에서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달각, 얼음이 든 잔을 빙글 돌리던 섀넌이 애써 그날의 기억을 더 끄집어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혼절해 버린 뒤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라곤 없었다.

‘깨어나 보니 가관이었지.’

엎어졌던 잔디 위에서 눈을 떠 보니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제 친우 카일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다행히 몸은 회복되었지만, 그때 그 일로 한 십 년간 카일에게 놀림을 받았다.

누구나 어릴 때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기억이 몇 개쯤은 있다. 섀넌에겐 그 일이 그랬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이제 와 새삼 다시 꺼내 보니 꼭 남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섀넌은 코끝에 스치는 미약한 늑대의 냄새를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핏덩이를 아무리 씻겨도 제 저택에 밴 이 낯선 냄새는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 * *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던 섀넌의 손에서 빈 잔이 스르륵 떨어졌다. 깔린 융단 위로 크리스털 잔이 소리 없이 뒹굴었다.

―살려 주면 당신은 나한테 뭘 해 줄 건데요?

―뭐든…, 뭐든 다…….

―뭐든?

빌어먹을 맹약……, 안 돼…, 제기랄, 안 돼…!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 열어 놓은 커튼 새로 불쾌한 햇살이 들이쳤다.

눈을 뜬 섀넌은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등받이에 고개를 기댄 채 거꾸로 뒤집힌 시야에 웬 개새끼의 얼굴이 가득 들어온 탓이었다.

놀라 상체를 세운 섀넌이 낄낄 웃는 소리를 들으며 짜증스럽게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카일.”

낮게 잠기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짧게 부른 섀넌이 제 앞에 앉는 상대를 노려봤다.

“늑대 보모 되셨다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웃는 제 친우에게 욕을 할 기운도 없어서, 섀넌이 새 잔을 들어 말없이 술을 따랐다.

“왜 왔어.”

“언제는 꼭 이유 있어서 온 것처럼.”

카일은 신기하다는 듯 늑대의 덜미를 들어 올려 여기저기 관찰했다.

“이거 자하카 혈통이라며.”

다루는 손길이 험악해서 불편한지, 늑대가 바둥거리며 작은 앞발로 카일의 손목을 팍팍 밀어냈다. 미약하게 발톱을 세워 할퀴기까지 하는데도 카일은 이리저리 늑대를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멋대로 늑대를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하는 꼴이 왠지 못마땅해진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죽이지 말고 도로 갖다 놔.”

“이 정도로 이게 죽겠어? 목이라도 비틀면 모를까.”

카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 손으로 늑대의 목을 틀어쥐었다. 약하게 힘이 들어갔는지 늑대가 켁, 하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이 미친 새끼가!”

섀넌이 기겁하며 그에게서 늑대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당황했다.

섀넌으로서는 늑대와의 첫 접촉이었다. 두 손으로 안아 든 감촉이 예상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말캉해서, 섀넌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인가 보네.”

러셀에게 전해 듣고는 설마 섀넌이 정말 늑대족과 맹약을 맺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카일은, 그저 잠깐 목을 틀어쥐는 시늉을 했을 뿐인데 기겁하며 달려드는 섀넌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이내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섀넌의 술잔을 집어 들었다.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잠시 굳었던 섀넌이 내색하지 않고 늑대를 바닥에 내려놨다. 조금만 힘을 주면 으스러질 듯 지나치게 연약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꺼내어 뜨끈한 인간의 심장을 쥔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기분이 이상했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질색하며 떨어뜨렸을 것이다.

손에서 미약하게 늑대 특유의 체취가 묻어났다. 손을 씻고 싶어진 기분을 억누른 채 섀넌이 카일의 손에서 잔을 낚아챘다.

“시비 걸지 말고 꺼져.”

“에이, 오랜만에 보는데 좀 웃어 줘.”

대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고작 몇십 년을 살아도 눈치가 귀신인 인간이 있는가 하면 몇백 년을 살아도 눈치를 말아먹은 뱀파이어가 있는 법이다. 카일은 후자 중에서도 아주 환장하는 부류였다.

어릴 때야 그럭저럭 어울리기 좋았지만, 삶 자체에 권태를 느낀 지 오래된 지금의 섀넌에게는 최악의 친구였다.

긴 세월을 살아가는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이런 권태기가 오곤 한다는데, 모든 뱀파이어가 겪는다는 고비도 이 눈치 말아먹은 놈에겐 빗겨 가는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 돌아올 거야.”

카일이 돌연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네가 없어서 심심해.”

섀넌은 몇백 년을 살며 때가 탈 대로 탄 불멸자의 얼굴이 저토록 철없고 순진무구할 수 있다는 것에 순간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를 한심하다는 듯 보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카일은 세상 외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뭘 해도 재미가 없다고. 남부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 물론 로렌스가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은 요즘 남색에 몰두하는 것 같더라. 같은 시기에 태어난 친구는 그 녀석과 나, 너, 이렇게 셋뿐인데 한 놈은 남색에 눈 돌아가 있지 한 놈은 병든 노인네처럼 시들해졌지. 요즘 같아선 나도 사는 재미가 없거든?”

말끝을 길게 끌며 불쌍한 표정을 지은 카일이 섀넌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봤다. 졸지에 면전에서 병든 노인네처럼 시들하다는 얘길 들은 섀넌은 그 말에 반박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카일은 저를 완전히 무시하는 섀넌의 태도에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제 할 말만 했다.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 사이에 몇 명과 잤는지, 혹은 그중 몇을 먹었는지를 떠드는 카일의 말을 소음처럼 내팽개친 채 섀넌은 그저 술을 기울였다.

본래 뱀파이어들은 성욕이 강하다. 섀넌 자신도 한때는 그 욕구에 몰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섹스가 언제인지, 아니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한때는 쾌락에, 또 한때는 금욕적인 성직자의 삶을 흉내 내는 데 몰두하다 또 한때는 예술을 탐닉하거나, 학자처럼 책에 틀어박혀 지식을 축적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흥미를 느꼈던 생태학을 너무 지나치게 깊이 탐구해서일까, 언제부턴가 그 모든 게 다 무의미하고 고루하게 느껴졌다.

“벌써 백 년 가까이 되어 간다고!”

한 귀로 흘려보내던 카일의 소음이 귀에 성가시게 들러붙었다.

“그런 걸 다 세고 있어?”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물론이지! 친구여, 네가 돌연 이 폐허 같은 저택에 틀어박혔을 때부터 나는 매일 신께 기도드렸어. 제발 내 친구가 하루빨리 돌아오게 해 주세요…….”

극단의 배우처럼 과장된 연설을 마친 카일이 제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시늉을 했다.

한때 섀넌과 함께 왕도에서 성직자 생활을 한 적도 있었던 카일이기에 그 모습이 아직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는 성호를 긋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한 오십 년 정도는 이해해 주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지니까 좀 걱정돼. 그러다 네가 콱 죽어 버릴까 봐…….”

사람을 대면하는 거라곤 러셀이 전부인 섀넌으로서는 오랜만에 접하는 카일의 다채로운 감정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삶에 흥미를 잃어버린 뱀파이어들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을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근데, 섀넌.”

섀넌은 그저 말없이 담배를 말아 불을 붙였다. 어차피 카일이 하는 말은 거의 쓰레기 같은 소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저 늑대가 네 카펫에 뭔가 해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거 괜찮은 거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섀넌의 입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안 돼!”

검붉은 융단에 작은 물 얼룩을 졸졸졸 만들어 내던 늑대가 섀넌의 손에 달랑 들어 올려졌다. 뚝뚝뚝 떨어지는 오줌에 기겁한 섀넌이 늑대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러셀! 빌어먹을 러셀―!”

꼭 카펫에 실례를 한 장본인이 러셀이라도 되는 양 욕설을 섞어 그를 부르는 동안 카일은 아예 의자 아래로 엎어져 박장대소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러셀이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조용히 헛숨을 들이켰다. 살벌한 섀넌의 목소리에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싶었는데, 실수한 이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섀넌의 손에 들린 늑대의 꼬리와 뒷발 끝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웬 물이 떨어지는가 생각하던 러셀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제 이마를 짚었다.

갤러리 벽면의 그림은 물론 바닥에 깔린 융단, 심지어 섀넌은 쓰지도 않는 식기들까지, 이 저택에 있는 모든 기물은 적어도 백 년 이상은 된 희귀품이다. 한때 섀넌이 악착같이 모았던 명인들의 수작.

그 귀품 중 하나에 오줌을 싸 버린 당사자는 당연하게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저를 안아 올린 섀넌의 손가락에 축축한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에 바빴다.

* * *

“빌어먹을 개새끼…!”

“진정해, 섀넌.”

당장 늑대를 움켜 터뜨릴 기세로 달려드는 섀넌을 몸으로 막아선 카일이 그의 가슴팍을 다독였다.

“놔! 맹약이고 나발이고, 저 개새끼를 창밖으로 던져 버릴 거니까!”

검붉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눈 깜짝할 새 저를 스쳐 지나가는 섀넌을 하마터면 놓칠 뻔한 카일이 그를 잡아 벽에 가두듯 밀어붙이고 온몸으로 버텼다.

“어후…, 너 요즘 흡혈도 안 한다며. 이렇게 혈압 올리면 곤란해.”

창밖으로 애를 던져 버릴 거라는 말에 기겁한 러셀은 늑대를 품에 안은 채 창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섀넌 님, 진정하십시오. 지, 짐승이 사람처럼 화장실을 가리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하하…, 이 정도는 익숙해지셔야…,”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하는 러셀의 말이 섀넌의 고함에 묻혔다.

“내가 미쳤지. 그 빌어먹을 자하카 놈을 다시 데려와!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새빨간 안광을 살벌하게 내뿜는 섀넌의 눈에 러셀은 다리가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독주와 담배에 절어 늘 반쯤 풀려 있던 섀넌의 눈이 저토록 명료해진 것을 상당히 오랜만에 보았다.

스스로 화를 삭이려는 듯, 섀넌이 눈을 질끈 감고 열 오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짧은 침묵 끝에 별안간 날뛰던 기세를 싸늘하게 가라앉힌 그가 낮게 말했다.

“……차라리 박제를 해서 내 침실에 장식해야겠어.”

어린 늑대를 박제해서 장식한다는 말에 러셀은 순간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았다. 아무리 종족이 달라도, 움키면 으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아기를 두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 어린 아기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러셀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제 주인의 화가 괜히 저한테까지 미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그 개새끼가 성년식을 치를 일도 없으니 맹약은 영원히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가?”

어느덧 노발대발하며 날뛰는 단계를 벗어난 섀넌은 소름 끼치게 이성적인 얼굴로 이상한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지하실에 가두는 거야. 생필품은 그때그때 조달하고, 음식도 계속 넣어 주면 그 안에서 죽지는 않겠지. 감히 내 저택의 지하실을 침입할 놈은 없을 테니 성년이 될 때까지 안전할 거고.”

그의 비이성적인 태도에 카일과 러셀은 그저 말없이 서로 눈만 마주쳤다.

“성년식을 치를 때가 되면 지하실을 개방해. 놈이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하다 맞아 죽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때부터 난 자유니까.”

섀넌이 이제야 러셀을 바라봤다. 제 생각이 어떠냐는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러셀이 헛숨을 삼켰다. 어떻게 이 어린 아기를 지하실에 감금해 놓고 알아서 크기를 바라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율례가 어쩌고 해가면서 비장하게 말할 땐 언제고…….

그러나 러셀은 이제야 제 말을 들어 줄 것 같은 섀넌에게 좀 더 신중한 한마디를 건넸다.

“그건 감금이지 양육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기가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 ‘안전하게 키워’ 달라던 다리야의 청을 지키라는, 아주 기본적인 한마디.

밀려드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섀넌의 입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하필 저건 왜 사람도 아닌 개새끼의 몸을 하고 있어선…….”

정말 말 그대로 야만족이 따로 없지 않은가. 늑대를 바라보는 섀넌의 시선에는 경멸과 혐오가 담겨 있었다.

늑대는 러셀에게 몇 번이나 씻겨진 이후에 거의 기절한 듯 자고 있었다. 러셀이 뭘 그렇게 많이 처먹였는지, 작은 배가 터질 듯 불룩했다.

저렇게 많이 처먹이니 그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싸지르는 거다. 세상 편하게 미동도 없이 잠든 꼴을 보자니 더 화가 치밀었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조금씩 늑대로 발현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카일의 물음에 러셀이 늑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제 주인이 술이나 퍼마시고 자는 동안 지하 서고에서 늑대족에 관한 서적을 찾아 정독한 보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자하카는 그 반대입니다.”

시라트 설원에 사는 늑대족의 본질이 인간인지 짐승인지는, 오직 그 자신들만이 안다. 최초의 늑대족은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늑대족은 자신들이 달의 신비로운 정기를 받아 탄생한 거라고 하지만, 뱀파이어는 그들을 ‘수간으로 태어난 돌연변이 야만족’이라고 칭하며 조롱해 왔다.

“아시는 대로 그들은 혼혈이니, 어떤 대에서는 그 형질이 짙고 또 누군가는 그 형질이 옅을 수도 있겠지요. 개체마다 다른데 자하카 혈통이 유독 늑대의 형질을 많이 타고났기에 어미의 태내에서부터 늑대의 몸으로 빚어진다더군요.”

러셀이 내려놓는 기척에 잠에서 깬 늑대가 테이블 가장자리를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테이블에서 뛰어내려 섀넌이나 러셀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몇 번 점프를 시도하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섀넌이 빈 잔을 그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고는 등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이대로는 안 돼.”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러셀 네가 놈과 별채로 가. 난 저 녀석과 한 저택 안에서는 도저히 단 하루도 숨 쉬고 살 수 없으니까.”

“예? 별채는 창고나 다름없는데요?”

섀넌이 말없이 러셀을 쳐다봤다.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는 무언의 질문에 러셀이 펄쩍 뛰었다.

“어떻게 거기서 지낸단 말입니까?”

“그럼 내가 나갈까.”

“…….”

순간 말문이 막힌 러셀이 잠시 카일에게 시선을 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카일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의미 모를 소리로 꺙꺙 짖으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도는 늑대의 앞발에 치인 위스키 잔이 위태롭게 달각거렸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기가 지내기에 거긴 너무 춥습니다! 애초에 사람 살라고 만든 공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쟨 사람이 아니잖아.”

“저는요? 저는 무슨 죕니까? 아기를 내쫓고 싶다고 저까지 내쫓으시면 어떡합니까?”

섀넌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쫓는 게 아니야, 러셀. 그 별채도 내 저택의 일부야. 내 담장 안에 있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하지.”

“아무리 그래도…,”

“늑대족은 설원에 사는 종족이야.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거기에 비하면 여긴 여름이지. 게다가 내 창고는 사방이 막혀 있고, 지붕도 있어. 그 정도면 천국이지, 안 그래?”

러셀이 기가 막혀 헛숨을 내뱉었다. 이미 섀넌 본인도 은연중에 그 별채를 ‘창고’라고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에 뭐라 단단히 항변하려 입을 열고 숨을 들이켠 러셀이 제게 정면으로 마주쳐 오는 붉은 눈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당장 지금부터 그 개새끼 데리고 창고로 나가.”

달각, 작은 앞발에 치여 테이블 끝으로 밀려난 위스키 잔이 결국 아래로 떨어지는 찰나, 섀넌이 순식간에 그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잔을 받았다.

무슨 착각을 한 건지, 늑대가 헥헥거리며 그를 향해 두 발을 쳐들었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섀넌이 때 탄 솜뭉치 같은 앞발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저건 철없던 날의 업보다.

그러나 철없던 날에 저지른 작은 실수로 인해 20년이나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늑대는 단춧구멍만 한 눈으로 뭐가 보이기는 하는 건지, 열심히 제 냄새를 맡으려 코를 내밀고 있었다.

정작 맹약을 맺은 당사자는 백골이 된 지도 한참이 지난 시점에, 몇 대나 아래인지도 모르는 어린 후손 놈을 상대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약조를 이행해야 한다니.

그 긴 세월 동안 대대로 맹약의 증표를 쥐고 있으면서 제게 부탁할 일이 그리도 없었나?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미적대고선, 결국 제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저 핏덩이 애새끼나 잘 키워 달라는 것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번거롭다, 번거로워. 참으로 귀찮고 더럽고 열 받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잔 바닥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입안으로 흘려 넣으며, 섀넌은 이 한 줌 핏덩이와 자신 사이에 이어진 붉은 맹약의 끈을 보았다.

이 갓난쟁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끊어지지 않을 지독한 끈이었다.

* * *

이제 그만 꺼지라는 재촉에도, 카일은 뻔뻔하게 몇 시간을 더 버티며 섀넌이 즐겨 마시는 홍차의 찻잎을 탈탈 털어 쓸데없이 우리고 버리길 반복했다.

섀넌은 바다 건너 타지에서 어렵게 공수한 햇잎을 다 거덜 낸다며 욕을 했지만 그런 그를 말리는 것조차 귀찮은지 그냥 두었다. 곁에서 그걸 지켜보는 러셀은 섀넌의 닦달을 저토록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카일에게 내심 감탄했다.

요란한 방문객이 떠나고, 차가운 밤이 낮을 완전히 집어삼키자 러셀은 저택 곳곳에 불필요하게 켜진 초를 모두 끄고 최소한의 불빛만을 남겨 놓았다.

이 넓고 오래된 저택에 사는 이라곤 자신과 섀넌뿐이었으므로, 여타 시종들이 있는 다른 저택처럼 모두가 잠들 때까지 홀을 밝혀 둘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도 섀넌은 밤눈이 무척 밝았기 때문에 복도에 몇 개 남겨 놓는 불빛은 모두 러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더는 이 본채에 불빛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자신은 이제 꼼짝없이 작은 짐승과 함께 별채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 저택엔 밤눈이 소름 끼치게 밝으신 불멸자만 살고 계시니 불빛이 다 무슨 소용인가.

러셀이 결국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남은 초를 모조리 끄기 시작했다.

섀넌이 있는 최상층의 초를 다 끄고 아래로 내려온 러셀이 계단참 벽면에 있는 마지막 초를 끄려 숨을 모았을 때,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제가 입바람을 불기도 전에 초가 꺼진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촛대의 불마저 완전히 꺼져 사위가 온통 깜깜했다. 그대로 몸이 굳은 러셀이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쉬….”

“…….”

“그대로.”

익숙한 제 주인의 음성에 러셀은 순간 안도하며 멈췄던 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숨도 쉬지 마.”

내뱉던 숨을 도로 들이켠 러셀이 그 상태로 굳었다. 조심스럽게 눈만 굴려 바라본 섀넌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붉은 안광만이 선득하게 스칠 뿐이었다.

제 주인에게서 다른 지시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러셀은 슬슬 한계에 달했다. 언제까지 숨을 참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러셀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더 길게 호흡을 누르고 있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그가 가느다랗게 숨을 내뱉기 시작할 때, 섀넌이 한 번 더 숨 쉬지 말라 경고했다.

“……저더러 죽으란 말인가요?”

섀넌에게선 별다른 대꾸가 들려오지 않았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그는 제 말을 아예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저택에 누군가 침입한 듯한데, 섀넌의 태도로 보아 우연히 들어온 좀도둑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창고에 재워 둔 아기가 떠오르고, 러셀은 조금 불안해졌다.

제 주인은 인간의 피를 취해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이 저택에 칩거한 이후로 그는 사냥마저 귀찮아했다.

뱀파이어에겐 섭식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차와 술을 입에 달고 살며, 거의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저택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민가에서 아무나 한 명 골라 대충 섭식을 해결하곤 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치자면 나흘에 단 한 번, 작은 오트밀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며 겨우 연명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 냄새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개새끼의 냄새인지 울타리 밖에 있는 개새끼들의 냄새인지 헷갈린단 말이야…….”

그 말인즉, 누군가 작정하고 그를 습격하면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치워 버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택 주변에 누군가 있단 말입니까?”

러셀이 극도로 목소릴 낮춘 채 묻자 섀넌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누군가들’이겠지.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

“당신이 모르시면 누가 안단 말입니까…?”

신경질적인 러셀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마냥 평온하기만 했다.

“며칠 내내 개 냄새만 맡았더니 후각이 마비되었나 보지.”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섀넌을 향해 급히 고개를 돌린 러셀이 어느새 사라진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는 이내 헛숨을 내뱉으며 계단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소리도 없이 귀신처럼 사라진 주인에게 놀란 것이 아니라, 갑자기 풀린 긴장 탓이었다.

* * *

정원으로 나온 섀넌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자 한결 기척이 명확해져 이제는 제 저택을 둘러싼 늑대가 몇 마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제야 섀넌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자하카의 혈통을 제거하려는 늑대들이 다리야의 냄새를 좇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마 처음엔 그들도 다리야가 설마 불멸자의 저택에 아기를 맡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의 냄새가 이곳에서 진동한다 하더라도 쉬이 믿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자신이 정원 외곽 쪽 창고에 아기를 내놓은 순간, 저들은 짙게 풍겨오는 체취를 곧바로 감지했다.

요 며칠 익숙하지 않은 늑대의 냄새가 저택 안에 진동하는 바람에 저들이 저택 주변을 맴도는 것을 섀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흡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세월이 오래되어 감각이 둔해진 탓이 가장 컸다.

“하아….”

섀넌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어차피 상관없다. 내쫓으면 그만이니까.

‘……아니지.’

그의 시선이 정원 끝에 있는 별채에 닿았다.

내쫓아선 안 되겠군. 그리말디가 자하카를 보호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소문이 날 테니.

다 죽여야 뒤탈이 없겠어.

판단을 끝낸 섀넌은 어둠 속에서 저택 담장을 넘는 검은 그림자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네댓 마리의 검은 늑대들이 모두 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섀넌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르르르…….

음침한 달무리 같은 울음이 희미하게 깔렸다. 낮게 긁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내뱉는 숨을 감지한 섀넌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로 살짝 코를 막았다. 정말이지, 저들의 냄새는 고약하기 짝이 없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늑대들은 마치 그림자로 빚어진 듯 새까맸다. 낮게 울리는 그로울링은 허공을 할퀴는 메마른 바람을 닮아 있었다.

늑대들이 이를 드러내며 경고하듯 을러대는 그 소리에 섀넌은 그저 눈썹만 까딱였다.

“아무리 그 근간이 짐승이라 해도,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을 하였으면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섀넌이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느슨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쯧쯧쯧……, 그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미개하기 짝이 없군.”

섀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중앙에 있던 늑대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까드득, 꽈드득.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척추와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얼핏 혹한에 얼어 있던 만년빙이 녹으며 생기는 균열이 비틀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늑대는 점차 앞발이 들리고 사람과 비슷한 골격을 갖추어 갔다. 그가 섀넌의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는 이미 이족 보행하는 반인반수가 되어 있었다.

섀넌은 마치 흥미로운 듯, 혹은 비웃는 듯 입꼬리만 살짝 올려 보였다.

“그리말디.”

늑대에게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유 없이 악귀의 거처를 먼저 침입하지 않는다.”

두 발로 서 있는 늑대는 그야말로 괴수 같았다. 이족 보행하는 반수의 늑대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면한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새삼 섀넌은 인간들이 묘사하던 반인반수의 괴물, 혹은 악마의 모습이 어쩌면 이들을 실제 목격하고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족들은 뱀파이어의 근간이 악마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자신들은 인간을 미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을 지녔다. 그러나 저들의 몰골은 흉물스럽다 못해 아주 처참하여 웃음이 날 지경이다.

괴괴한 몰골로 남의 저택 울타리를 함부로 넘는 흉수 주제에, 감히 누가 누굴 더러 악귀라 칭하는가.

섀넌은 상대가 흉물스러운 몰골로 제 눈을 더럽히고 있는 것과, 감히 저를 내려다보는 건방진 태도 중 무엇을 먼저 지적할지 잠시 고민했다.

“다리야의 냄새를 추격하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더군.”

섀넌이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늑대는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만 묻지. 그대는 자하카를 지지하고, 그의 핏줄을 보호하려 하는가?”

섀넌은 그저 기묘한 얼굴로 눈썹만 치켰다. 그것을 부정이라 여겼는지, 검은 늑대의 푸른 눈이 섀넌의 뒤쪽에 있는 창고를 날카롭게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면 왜, 자하카의 아기를 데리고 있는 거지?”

그가 위협하듯 섀넌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듣기로는 그리말디가 제대로 된 섭식 활동도 하지 않고 칩거한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 데다가, 저 뒤쪽에 있는 자하카의 아기는 그리말디와도 거리가 상당하여 자신들이 돌발행동을 하면 대처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전혀 긴장하거나 경계하는 기색 없이 묘한 표정을 지은 섀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났나?”

“……뭐?”

“하고 싶은 말 다 끝났냐고.”

“…….”

검은 늑대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럼 이제 내 차례.”

섀넌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사뿐히 걸음을 내디뎠을 때, 늑대는 그저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몸의 긴장을 끌어올리기도 전에 별안간 숨통이 콱 조여들었다. 그리말디는 어느새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끄윽…….”

한 손으로 늑대의 목을 틀어쥔 섀넌이 천천히 그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그들을 둘러쌌다.

붉은 눈이 하늘을 힐끗 올려다봤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손톱처럼 날카롭게 이지러져 있었다.

“차라리 만월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낮춘 채 사납게 짖는 늑대들에게 아랑곳없이, 섀넌은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럼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었을 텐데.”

늑대의 목을 움킨 희고 가느다란 손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이내 그 손에서 뼈가 어그러지는 듯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압력으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늑대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피가 새어 나왔다.

“참…, 가엾게도.”

쿨럭,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침과 함께 늑대가 왈칵 피를 쏟아 냈다. 완전히 목이 꺾인 그를 섀넌이 바닥으로 툭 팽개침과 동시에 날카로운 울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 * *

다행히 아직 아기는 무사했다. 본채에서 연결된 지하 통로를 달려 별채로 들어간 러셀은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창을 통해 제 주인을 바라봤다.

아니, 사실 제 주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이는 잔상과, 그를 쫓다가 한발 늦게 착지해 허공에 대고 입질을 하는 검은 늑대들만 겨우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 별안간 통째로 뽑혀 나간 늑대의 머리가 창 앞으로 날아와 쾅 부딪혔다. 커튼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유리에 바짝 얼굴을 대고 있던 러셀이 기겁하며 뒤로 자빠졌다. 박살 난 유리창에 새빨간 피가 질척하게 흘렀다.

엉덩방아를 찧은 러셀이 바닥을 구르는 늑대의 머리를 보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헛숨을 들이켰다.

“멍청하게 앉아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섀넌의 질책이 귓가를 스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러셀이 어느새 창고 안으로 들이닥쳐 한 손으로 아기를 안아 올리는 섀넌을 쳐다봤다.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리고.”

섀넌이 러셀에게 아기를 넘겼다. 거의 던지듯 제 품에 디미는 아기를 얼결에 받아든 러셀이 떨리는 다리를 추슬러 얼른 일어났다. 부리나케 벽면으로 붙던 러셀이 섀넌의 눈 밑에 가느다랗게 난 생채기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다치셨습니까?”

물론 제 주인이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지금껏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얕은 생채기 한 번 난 적이 없던 그가, 게다가 그리 아끼는 얼굴에 흠집을 냈으니 그 사실이 경악스러워서였다.

그의 말에 섀넌이 손끝으로 제 눈 밑을 가볍게 쓸었다. 모르고 있었는지, 손가락에 맺힌 피를 본 섀넌이 그제야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길 수 있는 거 맞아요? 아니 어떻게, 마, 만월도 아닌데, 몇 되지도 않는 늑대들한테,”

벌벌 떨리는 러셀의 목소리는 곧 커다란 늑대의 포효에 먹혀 버렸다. 러셀은 입을 벌린 채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품에 있던 아기는 진즉부터 낑낑 울기 시작했으나 누구도 그 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깨진 창으로 휘몰아쳐 들어온 바람에 촛불마저 꺼지고, 러셀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지옥처럼 빛나는 두 개의 회백색 안광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결국,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내가 저 악귀를 주인으로 모시다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순간적인 두려움이 의무를 내팽개치고 본능을 앞세웠다. 맹수가 이를 드러내며 달려와 제 코앞에서 입을 벌리는 찰나가 지독히도 길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품 안에 있던 아기를 머리 위로 쳐든 러셀이 몇 초간 그대로 굳었다.

팔을 타고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질겁하며 몸서리친 러셀이 번쩍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붉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섀넌?”

두려움에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죽었나요?”

여전히 붉게 가려진 시야를 어떻게든 확보하려 눈을 끔벅이던 러셀이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향해 물었다.

“아직 죽진 않았어.”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들려오는 제 주인의 목소리에 안도한 러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제 손에 있던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두리번거렸다.

“섀, 섀넌 님! 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저는 앞이 보이지 않아요!”

쯧쯧쯧……,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섀넌 님…? 제가 보이십니까?”

러셀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질문을 하며 눈을 쉴새 없이 깜빡거렸다.

“물론. 아주 잘 보이지.”

여전히 불그스름한 시야로 익숙한 제 주인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한 팔에 아기를 안은 섀넌이 그를 경멸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기를 방패로 쓴 것도 모자라, 아예 집어 던져 버리는 네 빌어먹을 생존 본능도 아주 잘 보았어.”

러셀이 다급히 제 눈을 손으로 마구 비볐다. 그리고 그제야 제 머리와 팔을 온통 뒤덮은 무언가의 정체가 검은 늑대의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러셀이 두려운 눈으로 섀넌을 올려다봤다.

“너는 어찌 내 권능을 그리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설마하니 저 짐승들한테서 하찮은 네놈 목숨 하나 지켜 주지 못할까 봐.”

그 순간의 섀넌은 마치 사탄으로 가장한 신 같았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붉은 안광을 빛내는 제 주인을 보며, 러셀이 굳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굶주린 지 오래되셨잖아요, 얼굴을 내어 줄 정도로 꽤 고전하셨고……, 물론 변명할 거리는 많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한마디라도 더 내었다간 자신을 식사 거리로 삼을 것 같은 섀넌의 눈빛에 러셀은 그저 고개를 수그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래로 굴러떨어진 러셀의 시야에 별안간 붉은 털 뭉치가 휙 들어왔다. 기겁했던 러셀은 내색하지 않고 섀넌이 건넨 아기를 얼른 품에 안았다. 저 대신 피를 뒤집어쓴 아기의 털은 온통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기가 낑낑 울고 있다는 것도 인지할 수 있었다. 러셀은 섀넌의 눈치를 보며 아기를 살살 도닥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엔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아기를 품에 추스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확 들이닥쳤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진짜.”

너무 놀라 이번엔 아기를 으스러뜨릴 듯 꽉 부여안기 일보 직전에, 러셀은 가까스로 카일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둘러본 카일이 재밌다는 듯 휘파람을 휘익 불어 댔다.

창고 한구석에서 수건을 찾아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닦던 섀넌이 그를 보자마자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넌?”

“가는 길에 늑대들 흔적이 있기에 혹시 몰라 다시 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다 누워 있잖아.”

늑대들 특유의 체취와 뒤섞인 피비린내가 주변에 짙게 깔렸다. 섀넌의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였다면 굳이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칩거가 그를 얼마나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새삼 실감한 카일이 손등으로 가볍게 코를 막으며 섀넌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섀넌의 눈 밑에 난 얕은 상처를 보고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설마, 다쳤어?”

아무리 그래도, 만월이라면 모를까, 달의 정기가 그리 강하지도 않은 오늘 같은 날 꼴같잖은 늑대 놈들 상대로 이렇게까지 고전을 치르다니. 부실한 섭식 탓에 회복도 더딜 텐데……. 카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섀넌의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놈을 찾아야겠어.”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섀넌이 손끝으로 제 상처를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

“놓친 놈이 있단 말야?”

“아니, 그 자하카 놈.”

섀넌은 말라붙어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일단 저택에 진동하는 이 냄새들을 다 지워야겠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다리야를 찾아야 한다.

“애초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혹시라도 다리야가 입을 잘못 놀려 자신이 늑대족의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어디 있을까. 자하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그리말디라니.

수치스러운 조롱을 받음과 동시에 온갖 늑대 놈들이 툭하면 오늘처럼 제 저택을 침입해 자하카 애새끼를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성가시다……, 몹시 성가셔.

섀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그저 냄새나는 개새끼 하나를 20년 데리고 사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놈이 떠날 때 어디로 간다는 말 없었던가?”

섀넌의 질문에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섀넌이 낭패한 얼굴로 일전에 다리야가 떠났던 저택의 철문에 시선을 던졌다. 냄새의 경로를 추적해 대상을 찾는 건 아무리 오감이 예민한 뱀파이어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찾아볼게. 친하게 지내는 추격자 놈들이 있거든.”

카일이 가볍게 끼어들었다. 마치 아주 간단한 일을 거든다는 투였다. 그러다 퍼뜩 생색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는지 진지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어.”

“추격자 놈들이랑 어울린다고?”

섀넌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런 녀석들이랑 왜 어울리는 건데?”

날 선 질문에 카일이 허허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도와줘, 말아?”

“…….”

그에게 욕이나 퍼부을 요량으로 입을 열었던 섀넌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천박한 놈들이랑 어울리든지 말든지, 지금 그들이 필요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놈들이 아니라면 다리야를 찾는데 이 넓은 땅덩어리를 개처럼 킁킁거리며 샅샅이 훑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니.

아기를 불안하게 부여안고 있는 러셀을 빤히 보던 섀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그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안았다.

빌어먹을 늑대가 러셀의 목전까지 달려들었던 그때, 러셀이 그 큰 덩치를 꾸깃꾸깃 웅크리며 제 머리통만 한 아기 뒤에 숨으려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게다가 피를 뒤집어쓰자 기겁하며 아기를 내팽개칠 뻔하지 않았던가.

제가 얼른 안아 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갓난쟁이는 늑대에게 물려 죽는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목이 부러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런 녀석에게 아기를 맡기자니 불안하고, 창고에 두자니 계속 귀찮은 것들이 꼬일 것 같아 참으로 곤란하다.

마음만 먹으면 쉬이 으스러뜨릴 수 있는 이 작은 개새끼가 이렇게나 성가실 수 있다는 것에 섀넌은 진심으로 놀랐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기는 가쁜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창고를 가득 메운 피비린내를 뚫고 아기에게서 낯선 유취가 풍겼다. 섀넌은 밀려드는 불쾌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 *

윈터가 그리말디 저택에서 지낸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난 어느 날.

“…….”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섀넌이 턱을 괸 채 복잡한 시선으로 상대를 내려다봤다. 꼬리를 다리 사이로 한껏 내린 채 섀넌을 올려다보는 윈터의 앞에 작은 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귀한 물건은 일부러 다 치워 둔 상태라 저번 같은 대참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불상사다.

“너는 아주 기본적인 것도, 심지어는 네가 저지른 것을 수습할 줄도 모르는 놈이구나.”

섀넌이 차분히 그를 비난했다. 이 하찮은 핏덩이에게 혈압을 올려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러셀은 저택에 부족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멀리 나가 있는 상태였고, 지금 이 저택엔 섀넌과 윈터 둘뿐이었다. 그런 고로 윈터가 먹고 싸는 모든 일은 섀넌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려는 윈터의 앞발을 잡아 다시 끌어온 섀넌이 그의 정수리를 바닥으로 눌렀다.

“네가 얼마나 미개한 놈인지 똑똑히 보라고. 응? 이 등신 같은 머저리야.”

섀넌과 윈터의 사이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아니 어색하다기보다는 서로를 무척 싫어했다. 윈터는 섀넌 쪽으로 아예 고개도 돌리려 하지 않았고, 그가 오면 구석으로 숨기 바빴다.

“하아…….”

수건으로 윈터가 싸질러 놓은 오줌을 성의 없이 닦던 섀넌이 문득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는 벽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툭하면 아무 데나 오줌을 갈겼다. 그때마다 섀넌은 몇 번이고 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해야 했다.

이 저택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품고 심혈을 기울여 보존된 곳인지 저딴 천박한 개새끼가 알 리 만무하다. 홀과 응접실, 침실, 갤러리, 계단의 난간과 석벽 하나하나에 당시 왕성을 건축하던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예술가의 혼이 깃들어 있는 이 귀한 고택이 미천한 짐승의 배설물로 더럽혀지고 있는데 어찌 맨정신으로 그 꼴을 볼 수 있겠는가.

“……윈터.”

한숨과 함께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을 부른 섀넌이 생경한 기분으로 다시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윈터가 저택에 온 이래 처음으로 불러 본 이름이다.

한 줌 애새끼, 냄새나는 개새끼, 미개한 짐승 따위로 부르는 것보다 훨씬 간편했다.

개새끼에게 손수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이름을 부르며 정 붙이는 건 바보 같은 짓 같아서 일부러 부르지 않았는데, 막상 불러 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다 여기며 섀넌이 몸을 일으켰다.

“윈터.”

그가 구두 끝으로 윈터의 턱 아래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억지로 고개가 들린 윈터가 폴짝 뛰며 그의 발을 이리저리 피했다.

“꼬리 치는 것까진 나도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싫어하는 기색은 숨겨야 하는 거 아닌가?”

“…….”

“기름진 식사와 깨끗한 침대, 안락한 울타리, 그 모든 걸 내가 제공하고 있는데 말이야.”

섀넌은 일부러 심술 궂게 윈터의 배 아래로 구둣발을 집어넣어 자꾸만 넘어지게 했다. 윈터가 그를 피해 몇 발짝 달아나면 다시 발을 집어넣어 발등으로 들어 올리고 떨어뜨렸다.

조금만 툭 건드려도 쉽게 중심이 흐트러져 발랑 뒤집히는 꼴을 보다 보니 열 받는 게 조금 가시는 것도 같았다.

“한 번만 더 내 집에 함부로 오줌을 갈기면 그 쓸모없는 좆을 떼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

그러나 이 짓도 몇 번 하니 재미가 없어졌다. 욕도 상대가 알아듣고 열이 받아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바닥을 닦았던 수건을 주워 들려던 섀넌은 괜히 짜증이 나서 그것을 발로 툭, 차 버렸다.

윈터는 다가가지 않고 벽에 붙어 앉아 그걸 멀뚱히 바라봤다. 마치 코에 눈이 달린 것처럼 어디든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고 돌아다니는 그가, 유독 제 배설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섀넌은 웃기다고 생각했다.

저도 더러운 걸 아는 모양인데.

대체 알면서 왜 실수를 하는 거야.

……일부러 그러나?

섀넌이 미심쩍은 눈으로 윈터를 흘겼다. 어느새 윈터는 섀넌으로부터 숨듯 다리야의 담요 안으로 쏙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굴처럼 동그랗게 파인 담요 안에서 섀넌을 보는 눈에 청회색 안광이 미약하게 스쳤다.

아무리 멍청한 개도 최소한 밥 주는 사람한테는 꼬리를 흔드는 법인데, 저건 그런 일머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디 먹고살겠니, 이 개 놈 자식아.

어차피 상대가 알아듣지도 못할 욕을 실컷 퍼붓던 섀넌이 문득 뭔가를 고민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가지고 온 깨끗한 물과 날고기가 담긴 그릇, 바닥을 닦던 수건, 구석에 웅크린 윈터를 조용히 번갈아 보던 섀넌이 혀를 찼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지.”

마치 선전포고처럼,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린 섀넌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벽에 등을 꼭 붙인 채 섀넌이 움직이는 경로를 소리 없이 눈으로 좇던 윈터는 그가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는 것을 영문 모르는 얼굴로 쳐다봤다.

섀넌이 제 발치에 있는 그릇을 그의 앞으로 툭 찼다.

“먹어.”

윈터는 섀넌이 한 공간에 있으면 먹는 것조차 편히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섀넌은 윈터가 그릇을 다 비우고 물을 마시고 배설하는 그 모든 과정을 면밀히 지켜볼 심산이었다.

불가피하게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지성체인 자신이 미개한 짐승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게 낫지 않겠는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서로 눈싸움만 하길 수십 분. 섀넌은 아예 서재에서 책을 가져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윈터는 섀넌이 이례적으로 계속 방 안에 있자 귀를 양옆으로 바싹 눕힌 채 잔뜩 경계했다. 그러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고기가 있는 그릇 쪽으로 다가갔다. 섀넌의 시선이 책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듯 힐끔거린 그가 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찹찹찹……, 조용했던 방 안에 윈터가 식사하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섀넌은 그 소리에 힐끗 윈터를 보고는 다시 책에 눈을 고정했다.

윈터 혼자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고 휑한 방 안에서, 그렇게 두 종족은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섀넌이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었다. 처음에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윈터의 냄새를 견디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럭저럭 참을 만해… 지긴 개뿔 빌어먹게 역겨웠다.

불현듯 불쾌함이 치솟은 섀넌이 순식간에 윈터의 앞으로 다가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뒷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윈터가 허공에 대고 앞발을 버둥거렸다.

누가 제 덜미를 낚아채도 발톱 한 번 세울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한 존재라니. 피의 맹약이 아니었다면 이 하찮은 아기는 벌써 자신의 영양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웬만해선 짐승의 피는 잘 먹지 않지만, 감히 제 저택에 아기를 데리고 온 자하카의 괘씸함을 생각하면 한입에 씹어 삼킬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섭식을 안 한 지 꽤 오래되긴 했지…….’

섀넌은 갓 태어난 아기의 피가 얼마나 신선하고 달콤한지 잘 알고 있었다. 종일 잠을 자느라 살짝 열이 오른 체온이 풍미를 더욱 돋우고, 어미의 젖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 냄새도 역하지 않은, 갓난쟁이의 피.

잠시 까마득한 과거의 식사를 생각하다, 어느 순간 튀어나온 송곳니를 혀끝으로 살짝 만져 본 섀넌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악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이 냄새에도 식욕이 돋는 모양이었다.

“…….”

섀넌이 눈을 감으며 깊게 심호흡을 토해냈다. 늑대족 특유의 흙 비린내와 야만적인 냄새, 뜨끈한 체온과 피가 섞인…, 이 빌어먹을 냄새…….

“……젠장할.”

결국 결단을 내린 섀넌은 오래도록 쓰지 않은 낡은 욕조를 꺼내와 물을 받았다.

윈터는 가장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아까부터 섀넌이 커다란 욕조를 질질 끌고 들어와 그 안에 뜨거운 물을 채우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섀넌이 제게 다가오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꺙꺙 짖기 시작했다. 구석에 딱 달라붙어서 짖는 꼴을 보며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꼴에 짖을 줄도 아는군.”

필사적으로 섀넌의 손길을 피하려 애쓰는 듯했으나 윈터는 너무도 허무하게 그의 손에 달랑 들려 옮겨졌다.

제 손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윈터를 지그시 누르며, 섀넌은 어차피 저항해 봐야 소용없는 걸 알면서 할퀴고 물어뜯는 그의 어리석음에 탄식했다.

윈터의 저항은 욕조 안에서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섀넌은 그제야 한 줌만 한 늑대의 작은 몸에 비해 욕조가 너무 크다는 걸 깨달았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캉캉 짖으며 섀넌의 손을 있는 대로 할퀴고 다시 구석으로 도망가길 여러 차례, 어느새 옷이 흠뻑 젖은 섀넌이 피로한 눈으로 사방팔방에 물이 흥건하게 튄 방 안을 바라봤다.

먹고 싸고 자고 씻고…, 그 모든 기본적인 일이 이 빌어먹을 개새끼에겐 당최 왜 이리도 문제투성이인가.

물에 젖은 윈터는 평소보다 훨씬 하찮게 보였다. 그냥 볼 땐 몰랐는데 다리도 가늘고 몸통도 왜소하니 도저히 그 자하카의 혈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과연 이 늑대가 커서 일전에 봤던 그 늑대들처럼 사람 말도 하고, 싸움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 섀넌은 조금 의심스러웠다.

실랑이에 질려 버린 섀넌이 다시 윈터를 달랑 들어 욕조로 데려갔다. 욕조가 너무 크고 깊어서 더 겁을 집어먹는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제 와서 다른 걸 찾아보기엔 그도 너무 지쳐 있었다.

섀넌은 아예 윈터를 품에 안아 제가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한 팔로 꽉 고정해 두니 윈터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제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더러운 개새끼와 한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말도 못 하게 찝찝하고 불결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무의미한 실랑이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차피 이미 버린 몸……, 섀넌은 최대한 빨리 이 고비를 넘기고자 우악스럽게 윈터의 몸을 문질렀다. 제 손바닥의 반절도 되지 않는 작은 발을 네 개 모두 쫙쫙 쥐어짜듯 씻기고, 며칠 전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궁둥이도 팍팍 문질렀다.

평소 자신이 씻을 때 쓰던 향수를 목욕물에 인정사정없이 풀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씻기자 윈터에게서 늘 나던 좋지 않은 냄새가 조금 사라진 것도 같았다.

그렇게 한바탕 씻긴 뒤 바닥에 내려놓자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 혼비백산하여 다리야의 담요 안으로 쏙 뛰어들어 갔다. 바닥에 있는 물 때문에 몇 번 미끄러져 엎어지기도 했으나 지금껏 섀넌이 본 그의 달음박질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기껏 제가 쓰는 향수를 탈탈 털어 씻겨 놨더니 또 저 더러운 담요 안에 들어가는 게 못마땅해진 섀넌이 지친 몸을 일으켜 욕조 밖으로 나왔다.

“후…….”

한숨이 저절로 나올 만큼 진절머리가 났다.

“이리 와.”

섀넌이 깨끗한 수건을 들고 다가가자 윈터는 아예 다리야의 담요 안으로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나와 얼른.”

담요를 살짝 들춰 빼꼼히 보이는 앞발을 끄집어낸 섀넌이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는 윈터를 억지로 들어 수건으로 감쌌다.

하찮고 마른 몸이 발발 떨리는 게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그르릉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해 끙끙 앓는 듯한 소리만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 여차하면 할퀴려는 심산인지, 초라하게 젖은 앞발에는 작은 발톱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한 일이라곤 식사나 챙겨 주고 제가 싸지르는 배설물이나 치워 준 것밖에 없는데 부모의 원수 보듯 떨고 있으니 심기가 참으로 불편하다.

섀넌은 이 저택에 살며 단 한 번도 궁둥이를 댄 적 없는 맨바닥에 주저앉아 윈터의 털을 말리고 닦는 데에 집중했다.

몸이 너무 연약하니 다루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제가 조금만 삐끗해도 이 작고 하찮은 몸은 수플레처럼 부드럽게 으스러질 것 같았다.

섀넌의 까만 머리칼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엉망으로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쓸어 올리던 그의 시선이 문득 정면에 보이는 거울로 향했다.

거지가 따로 없는 몰골이다.

스스로의 몸은 돌보지 못한 채 남의 몸이나 닦아 주고 있다니, 지금껏 살며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리저리 뻗치고 흐트러진 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섀넌은 커튼이 굳게 닫혀 있는 창 쪽을 바라봤다.

젖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간 섀넌이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려다봤다. 주기적으로 도시로 나가 생필품과 식재료를 사 오는 러셀이었지만 이번만큼 그가 기다려진 적이 없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섀넌이 다시 커튼을 쳤다. 며칠 내내 섀넌이 반복적으로 한 일이라곤 개의 식사를 가져다주고, 물을 갈아 주고, 배설물을 치워 준 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 탓에 섀넌은 강제적으로 한동안 술에 취하지 못했다. 섀넌은 제가 취하지 않은 명료한 정신으로 일상을 보낸 게 대체 몇십 년만인지를 헤아리기도 하고, 더불어 카일이 다리야를 찾아내면 당장 놈의 목을 따 박제 장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며칠 뒤 섀넌은, 카일의 다리야 추적과 관련한 일로 인해 귀가가 조금 더 늦어질 거라는 러셀의 전보를 받았다.

* * *

섀넌은 그 날 이후 매일 윈터를 씻겼다. 한 번 씻길 때마다 점점 더 특유의 냄새가 사라져 왠지 모르게 재미가 붙은 것이다.

이젠 제법 요령이 생겨 손쉽게 윈터를 씻긴 섀넌이 문득 그를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가까이 코를 대고 맡아도 이제는 제가 쓰는 것과 같은 향수 냄새 외에 다른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털에서도 점점 윤기가 흐르고 모질도 부드러웠다. 늘 약간 축축했던 코는 섀넌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보송보송했다. 오늘따라 몸도 더 뜨끈해서 손에 들고 있자니 감촉이 꽤 좋다.

다만 한 가지만 좀 거슬렸다. 오후부터 틈만 나면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질질 흘리니 그게 몹시 추잡스러워 보인 것이다.

냄새 문제가 해결되니 이제는 콧물이냐.

코가 늘 축축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콧물을 흘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왜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윈터를 바닥에 내려놓은 섀넌이 문득 그릇에 시선을 고정했다. 윈터가 식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 섀넌은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 들어간 방 안 곳곳에 토사물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윈터가 아플 수도 있는 생명임을 상기했다.

“아…….”

섀넌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아프기까지 하나. 먹고 자고 싸는 거 말고 한 게 뭐가 있다고 병이 났단 말인가.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귀찮은 얼굴로 능숙하게 찬물에 수건을 적신 섀넌이 윈터의 등에 얹고 담요로 둘둘 감쌌다. 그가 빠르게 저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은 해열제나 감기약을 먹을 일이 없으니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러셀이 알 텐데, 지금은 그가 없으니 혼자 이 드넓은 저택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야 했다.

급기야는 러셀의 방까지 뒤진 섀넌이 어렵게 그의 서재 책상에서 약병이 즐비하게 들어있는 서랍을 찾았다. 항우울제, 두통약, 신경안정제, 수면제, 각성제 등 온갖 종류의 약병들을 죄 뒤집어엎고 나서야 해열제를 찾아낸 섀넌이 순식간에 윈터의 방으로 향했다.

윈터는 이제 끙끙 소리까지 내며 앓기 시작했다. 혹한에 내팽개쳐진 것처럼 몸을 떨었고, 혀를 길게 빼문 채 힘겨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섀넌은 해열제를 무심코 제 위스키에 희석했다가 그게 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다시 물을 가져와 희석하고는 윈터에게 먹였다.

작은 주둥이를 억지로 벌려 오랜 시간 씨름한 끝에 약을 먹인 섀넌이 지쳐 그 곁에 드러누웠다. 한 번도 앉아 본 적 없던 바닥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는 것으로 모자라 거기에 드러눕기까지 한다는 걸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계속 차가운 수건을 덮어 주고 토사물을 치우기의 반복이었다. 동이 터 올 때가 되어서야 윈터의 숨소리가 조금 안정되었고, 들끓던 열이 가라앉았다.

그를 지켜보던 섀넌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순간 그냥 자 버렸다.

* * *

날이 밝은 뒤 퍼뜩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린 섀넌이 관성처럼 윈터의 목 언저리를 쓸어 보았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윈터의 코도 만져 보고, 낮게 그르륵거리는 소음이 섞여 있던 숨소리도 확인했다.

섀넌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제가 윈터의 방에서, 그것도 바닥에 걸인처럼 드러누워 잠이 들었었던 것을 인지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침착하게 대처했지만 사실 그는 적잖게 놀랐었다. 아주 어린 아기들은 어른이 쉽게 걸렸다가 낫는 감기에도 자칫 죽는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지난 몇십 년간 감정의 기복을 겪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 며칠 이 작은 늑대로 인해 분노하고, 놀라고, 걱정하는 등의 다채로운 감정 변화를 겪고 나니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섀넌은 흐트러진 제 몰골을 보고 정작 자신은 어젯밤부터 거울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놈은 좀 나아진 것 같으니 나도 좀 씻을까.

……에이, 관두자.

몸을 일으키려던 섀넌은 이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 기척에 잠에서 깬 윈터가 꾸물거리며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으나 그걸 떼어 내는 것도 귀찮아 그냥 두었다.

화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질색팔색하기도 이제는 지친 것이다. 더러운 오물이 손끝에 닿으면 치가 떨릴 정도로 혐오감이 들지만, 그 오물을 아예 온몸으로 매일 뒤집어쓰고 지내다 보면 도리어 무뎌지는 법이다.

그렇게 다시 잠든 섀넌이 제 얼굴을 핥는 혀의 감촉에 기겁하며 일어난 때는 오후였다. 온 얼굴에 침 범벅을 해 놓은 윈터에게 질색하며 욕을 퍼부은 건 예정된 일이었다.

아무리 무뎌진다 해도 오물이 더럽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것처럼.

* * *

저택 앞에 마차를 세우고 마부에게 삯을 치른 러셀이 짐을 내리기도 전에 얼른 제 주인의 방부터 찾았다. 그러나 그가 주인을 만난 곳은 최상층에 있던 그의 방이 아니라, 홀 옆에 붙어 있는 윈터의 방이었다.

“저택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이왕 나간 김에 실컷 딴짓하고 온 게 분명해. 그렇지?”

섀넌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러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게 기어들어 올 리가 없지.”

러셀은 제 주인의 불평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들이 많은 탓이었다. 윈터의 방은 러셀이 저택을 떠났을 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크 침구와 폭신한 쿠션들, 다리야의 넝마 대신 자리 잡은 깨끗한 털 담요.

“……창고를 뒤져 보니 있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이 꽤 있지 뭐야.”

그것들을 유심히 보는 러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섀넌이 짧게 변명했다. 그러나 러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가장 해괴한 광경은 따로 있었다.

섀넌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평온하게 고개를 괴고 잠든 윈터와 그 바로 옆에서 태연하게 책을 보는 섀넌이었다.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러셀은 제 주인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잠시 머리가 돌아 버린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제가 떠날 때만 해도 섀넌은 ‘저 냄새 나는 개새끼와 단둘이 저택에 남아 있는 자신을 생각해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거듭 반복하여 제 귀에 못을 박지 않았던가.

그렇게 접근조차 싫어하던 존재의 바로 곁에서 평화롭게 책이나 읽는 꼴이라니…….

“있었지. 아주, 많이.”

섀넌은 여전히 책을 읽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짧게 대꾸하는 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러셀이 금세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다리야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그것 때문에 이토록 그대의 귀환이 늦어졌으니, 부디 영양가 있는 소식이길.”

섀넌의 서늘한 대꾸에 러셀이 난색을 표했다.

“다리야는 이미…….”

그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그제야 겨우 섀넌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져 그에게 향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을 못 이긴 러셀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라트 설원으로 향했다는데요.”

섀넌의 눈썹이 비틀렸다. 몇 초간의 짧은 침묵이 끝난 뒤 그가 물었다.

“제 발로 간 거야, 끌려간 거야.”

지금 시라트 설원은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검은 늑대들이 장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후자로군.”

섀넌은 다리야가 스스로 사지에 걸어 들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제 저택을 침입했던 늑대들은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늑대족의 단체 규율은 의외로 매우 체계적이고 엄격하다. 추격대는 애초부터 여러 조로 나뉘어 움직였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제 저택에서 죽었으나 어떤 일부는 다리야를 찾아 끌고 가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섀넌이 책을 탁 덮었다. 그것은 얼마 전 러셀이 정독했던 늑대족 관련 서적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윈터를 들어 폭신한 쿠션 위에 올려 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러셀은 또 한 번 눈을 의심했다. 무심한 표정에 비해 그 손길이 매우 조심스럽고, 털 담요까지 덮어 주는 모습이 아주 다정하지는 않아도 제법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는 섀넌은 윈터의 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들어 올리지 않았고 윈터 또한 섀넌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그저 섀넌이 뉘어 주는 자세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곱게 죽진 못하겠군.”

섀넌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낮게 말했다. 한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늑대의 머리를 박제한 장식이 유행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마도 다리야는 지금쯤 머리가 잘렸을 것이다. 그 머리는 긴 장대에 꽂혀 검은 늑대가 장악한 성채 위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을 터. 강한 개체를 죽여 그 증거를 천하에 알림으로써 검은 늑대들의 영좌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추적을 중단할까요?”

“아니.”

짧게 대꾸한 섀넌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러셀은 그저 침묵한 채 그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몇 분간의 숙고 끝에 걸음을 멈춘 섀넌이 분명한 어조로 일렀다.

“다리야의 소식은 계속 열어 두고, 사람을 고용해서 동부 리버펠의 별장을 청소해 둬.”

“거긴 갑자기 왜…….”

“아무리 냄새를 지웠어도 놈들은 금방 눈치챌 거야. 여긴 이제 버리자고.”

섀넌은 거의 백 년 가까이 칩거했던 저택을 떠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윈터를 계속 키우기에 이곳은 시라트 설원에서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다리야마저 그들에게 사로잡혔으니 검은 늑대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자하카 혈통을 죽이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될 것이다.

“놈들이 작정하고 만월에 습격하면 지금으로썬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해.”

일전에 습격당한 경험으로 보건대 앞으로도 그런 일은 계속 있을 터, 섀넌은 지금 시라트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오늘부터 짐을 미리 꾸리겠습니다.”

“다 버리고 가. 필요한 건 그곳에도 다 있으니.”

“다요?”

“마차는 두 대로 움직이고, 너는 그 마차를 타고 곧장 리버펠로 가. 나와 윈터는 남부를 경유해서 간다. 그리고 떠날 때 이 저택은 태워 버려.”

러셀이 입을 벌렸다.

이곳을 버리자고 했던 섀넌의 말은 단지 비워 두고 이주를 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늑대들이 더는 추적하지 못하게 흔적을 다 지워 버리자는 뜻이었다.

섀넌이 칩거에 들어갈 때 그가 가진 수많은 저택 중에서 굳이 이 저택을 선택한 이유는 그만큼 이곳을 아꼈기 때문이다. 섀넌이 가장 신경 써서 보존해 온 이 저택은 몇백 년 전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몹시 고풍스러운 동시에 우아했다.

요즘 귀족가는 저택에 쓸데없이 해자를 두르거나 담장을 높게 쌓지 않지만, 이곳은 마치 하나의 성곽처럼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외부인을 쉽게 들이지 않는 섀넌의 성향에 딱 맞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 어떤 장인에게 의뢰해도 이와 똑같은 저택은 절대 구현해 내지 못할 텐데…….

“이 저택을 꽤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섀넌이 성의 없이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필요한 사항은 모두 일렀으니 더는 할 말 없다는 태도였다. 이 저택, 그리고 이 안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희귀품과 예술품에 그는 일말의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늘 이런 식이다. 그는 뭔가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듯하다가도 필요에 따라 그것을 버리거나 파괴하는 것에 작은 아쉬움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윈터를 특별히 아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그래야만 성가신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섀넌의 사고방식을 러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여기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러셀은 섀넌이 저토록 명료한 정신으로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길고 길었던 섀넌의 권태가 한 단계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러셀은 가는 길에 전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일이 듣는다면 참으로 좋아할 소식이었다.

* * *

짐을 꾸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더 지체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러셀은 며칠 뒤에 바로 삯 마차 두 대를 불러들였다.

짐이라곤 품에 안고 있는 작은 늑대뿐인 섀넌이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확인하고는 러셀을 돌아봤다. 이번 이사는 무척 오랜만이긴 했지만, 긴 세월 수십 번도 더 반복한 이사에 이골이 난 자답게 러셀의 일 처리는 빠르고 깔끔했다.

“그럼, 리버펠에서 보도록 하지.”

섀넌이 마차 문을 닫기 전 러셀을 향해 짧게 인사했다. 그에게 인사를 올린 러셀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뒤이어 출발했다.

미리 곳곳에 불을 내두었던 저택은 두 마차가 차례로 출발한 뒤 완전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은 한바탕 폭우를 퍼부을 듯 묵직한 구름을 드리운 채 저택에서 치솟는 연기를 집어삼켰다.

* * *

곧장 동부 리버펠로 향했던 러셀은 남부를 경유해서 온다던 제 주인이 먼저 저택에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간에 몇 번 삯 마차를 갈아타기도 했지만, 보름간 마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여관 한 번 들르지 않고 온 자신보다 일찍 도착한 섀넌을 보니 조금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훨씬 전에 도착해 적응을 마친 섀넌은 러셀이 저택으로 미리 보내 두었던 생필품과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제가 마실 차와 술, 담뱃잎까지 모두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생각보다 늦었군.”

테라스의 그늘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그가 러셀을 보고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피곤과 때에 절어 수척해진 러셀은 섀넌의 발치에 고개를 괴고 안락하게 자고 있는 윈터마저도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저택의 묵은 먼지들을 좀 치워 줘. 처음 들어왔을 땐 도무지 발 디딜 곳이 없어서 난감했지 뭐야.”

담배를 말고 있는 섀넌의 발치로 햇살이 쏟아졌다. 떠나온 해안가의 저택과 달리 이곳은 꽤 따뜻하고 쾌청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너도밤나무 숲에 둘러싸인 저택은 아직도 낙엽이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섀넌이 제 발치에 뒹구는 낙엽 하나를 툭 차자,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윈터가 낙엽 위로 돌진하며 뒹굴었다. 허리를 숙인 섀넌이 그런 그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동 중에 꽤 정이 붙으셨나 봅니다?”

자신과 달리 평온하고 느긋한 둘을 못마땅히 보던 러셀이 넌지시 물었다. 그 말에 섀넌이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 싸늘하게 실소를 흘렸다.

“누가? 내가? 이놈이랑? ……그 정도까진 아냐, 러셀. 설마하니 내가 아무리 돌아 버려도 늑대족 놈들과 정을 붙일까.”

섀넌이 윈터에게서 손을 떼며 그를 발끝으로 제게서 멀찍이 밀어냈다.

“이동하면서 이 녀석의 냄새를 지우느라 꽤 번거로웠어. 어째서 늑대 놈들은 그렇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거지? 그 예민한 후각으로 정작 자기 냄새는 맡지도 못하는 모양이야.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더군….”

윈터를 쓰다듬었던 제 손가락을 닦아 내듯 만지작거리며, 섀넌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묘한 눈으로 보던 러셀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민가가 꽤 생겼더군요. 토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버려진 땅이라 생각했던 것인지, 이미 오래전에 정착해서 사는 이들이 많은 듯했습니다.”

섀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한쪽 발로는 계속해서 바닥에 있는 윈터를 툭툭 건드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그의 발 한쪽은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동작이었다.

윈터가 그 발을 요리조리 피하다 자빠져 뒹구는 것을 보던 러셀이 물었다.

“돈을 주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할까요?”

“아.”

섀넌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짧게 대꾸했다.

“그럴 필요 없어.”

“주변에 민가가 있으면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러셀의 질문에 섀넌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기묘한 느낌이 들어 잠시 그를 관찰한 러셀의 낯빛이 일변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섭식을, 하셨군요. 오랜만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섀넌에게선 전에 없던 활기가 깃들어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곳까지 들어오며 본 민가만 해도 십수 채, 정확히는 몰라도 그 안에 살고 있었을 사람은 최소 십수 명일 터다.

섀넌이 칩거하는 동안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흡혈만 해왔기 때문에, 러셀은 제가 모시는 주인이 인간의 피를 탐하는 살인귀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할 일이 많습니다.”

러셀은 두려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섀넌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새삼스레 유난은.”

섀넌이 픽 웃었다. 아무리 저를 주인으로 모신다 해도 러셀의 근본은 인간이었다.

흙에서 난 풀과 짐승의 고기를 먹고, 동족을 먹는 것은 죄악이라 여기는 평범한 인간. 섀넌은 간혹 그가 자신을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러셀은 섀넌의 첫 맹약 상대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섀넌도 생각이 짧았고 러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러셀은 지금은 섀넌의 손에 멸문한 그리말디 가의 마구간지기였다.

‘이 하찮은 목숨을 살려만 주신다면, 당신이 죽는 날까지 평생 당신의 노예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비웃음이 담긴 그 질문에 러셀은 미친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여 댔다.

그저 아주 흔한 애원. 당시 러셀은 눈앞의 잔혹한 살풍경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모든 인간이 그렇듯 생존에 제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섀넌은 죽음을 앞둔 인간들이 으레 그런 말로 목숨을 구걸한다는 걸 몰랐고, 앞으로 살며 제 정체를 아는 시종 하나쯤은 필요할 것 같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섀넌에겐 그저 인간 하나를 먹지 않고 놔두면 되는, 실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러셀은 당장의 목숨을 구한 대신 평생 죽지 못하는 삶을 갖게 되었고, 온갖 질병과 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기나긴 고통의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맹약의 구속력으로 삶은 계속되지만, 저 멀쩡해 보이는 껍데기 안에서는 지독한 병마가 진탕을 치고 있는 것이다.

섀넌은 자신의 처지가 러셀과 비슷하다 여기며 낙엽 사이를 뒹구는 제 두 번째 맹약을 내려다봤다. 좋든 싫든, 이 아기가 자라 무사히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 자신의 운명은 이 아기와 같이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담뱃재를 바닥으로 툭 털어 낸 섀넌이 윈터의 턱 아래를 구두 끝으로 살살 건드렸다. 고개가 들린 윈터가 끼웅, 하는 소리를 내며 앞발로 그의 발등을 쳤다.

“……빨리 이 녀석이 커 버렸으면 좋겠는데.”

뒤늦게 불어온 찬바람이 스산하게 저택을 휩쓸었다. 북부에는 진작에 찾아온 겨울이 이제야 리버펠에도 닿는 모양이다.

마른 낙엽이 뒹굴던 정원은 점점 메말랐다가 다시 푸르러지고, 창창하게 흘러넘치는 여름에 젖었다가 다시 메마르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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