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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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평화로워졌다. 이제 마족은 사라지고, 에리뉼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게 위기가 사라지면 꼭 서로 싸우기 마련이라 굳이 진실을 알려서 이제부터 내부다툼을 하세요라고 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송신탑을 이용한 마법이 성공하고, 마나뱅크가 되돌아옴으로써 마족들이 섣불리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고만 알렸다.
그리고 우리 데빌베인은 대륙의 수호자이자 숨어있는 마족의 계약자들을 찾아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 사실 이런 권력을 위해서 진실을 밝히지 않은 면도 있다.
나도 고생을 많이 했으니 얻는 게 있어야지.
미스틱 게이트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왕국을 세우라고 말했지만 나는 더 이상의 권력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에 점잖게 거절을 했고, 콘돌스핀 가문이 십대가문의 대표가 되는 것에만 주력했다.
그 결과 십 수 년 만에 정말로 콘돌스핀 가문이 대륙 십대마도가문의 대표가 되었고, 나는 정식으로 파우스 스승님의 뒤를 이어 콘돌스핀 가문의 가주가 되어 30대에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진정한 최강의 마법사는 은거한 미스틱 엑스라고 알려졌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마도가문의 운영은 여전히 파우스 스승님께 맡겼다.
영지의 일은 케이니 양이 알아서 하는 중이니 내가 할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꽤 힘이 드는 일이어서 지금까지도 나는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나마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지금은 공간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실비아 공주는 얼마 전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
기대했던 대로 이번에는 딸이다. 앞에 태어난 두 아들과 함께 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나쁘지 않아. 이번 생은.”
나는 소파에 누워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리포즈의 무릎을 베고 있는데, 마리포즈는 포도를 까서 내 입속에 넣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실비아 공주가 해 주는 일이지만 그녀는 아직 몸조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개인비서이자 보디가드인 마리포즈가 대역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렌 경, 미스틱 섀도우는 왜 계속 확장하시는 건가요?”
마리포즈가 갑자기 물었다. 나의 영지인 미스틱 게이트를 투영하는 가상공간인 미스틱 섀도우는 지난 십 수 년간 계속해서 확장해서 이제는 영지 전체와 똑같은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허무의 공간이고, 셰이드 이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나름 소중한 곳이다.
“공간의 반전현상을 이용해서 만일 대륙 전체에 엄청난 재앙이 닥치면 미스틱 게이트와 미스틱 섀도우를 일시적으로 바꿀 거야. 그러면 재난을 벗어날 수 있거든.”
“그게 가능한가요?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데요.”
“그들은 공간이 뒤바뀐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걸. 이게 이번 생에서 내가 한 연구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 앞으로도 계속 연구를 진행해서 바꾼 상태에서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아낼 거고.”
“저는 원리조차 이해를 못 하겠어요.”
“나중에 가르쳐 줄게. 너는 내 마법의 기록자와도 같은 존재니까.”
“헤헷, 영광이에요.”
“하지만 그런 연구도 이제는 다 귀찮아지고 있어. 아아, 무기력증이 더욱 강해지는 걸 보면 어떤 마족이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 하는 모양이네.”
“그게 가능해요?”
“결국은 그들이 어느 정도로 결심을 하는가 하는 거지. 본신이 타격을 입을 각오로 결계를 뚫으면 뚫릴 수도 있다고 봐. 하지만 결계를 곧 다시 막힐 거고, 그러면 들어온 자는 갇히게 되지. 무의미한 일인데 왜 자꾸 들어오려 하는지 모르겠어.”
“적어도 주인이 없는 세계이니 정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보죠.”
“쩝, 이반 경이 빨리 신이 되어야 할 텐데.”
“그때까지 살아계시는 것만 해도 큰일이겠어요.”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런데 실비아 공주님은 나이를 안 드시는 것 같아요. 렌 경도 그렇지만 그분도 거의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우시잖아요.”
“내가 표면적인 육체노화는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어. 하지만 내부의 노화까지 막지는 못하니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오래 살지는 못 할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 공주가 정령기사로써 크리드 경의 경지에까지 오르면 수명이 확 늘어날 텐데, 결국 그녀는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면 100년 전후의 수명밖에 가지지 못한다. 앞으로 수십 년 후에는 그녀와 이별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오래 사는 게 별로 좋은 건 아니야. 다음 생에는 일반인 정도의 수명으로 만족해야겠어.”
“다음 생에도 이번 생의 기억을 다 가지실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 같지 않아요?”
“아니야. 지금 나는 렌이지 로엔이 아니잖아. 다음 생에도 전생의 기억을 가질 뿐 자아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때는 그 때의 삶에 충실하겠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전승자로써 무한히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나도 모른다고 봐야 해. 이제 첫 전생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름대로 규칙을 정해 나가고 있잖아. 수명이라든지. 자아의 확립이라든지. 유한자는 유한자로써 만족하며 살아가야 해. 그래야 삶이라는 게 재미있어지니까.”
“그렇군요. 저도 반영구적인 자아는 아니니 언젠가는 소멸하겠죠? 저에게는 전생의 축복은 없을 거고요.”
“그걸 모르겠어. 인공자아가 소멸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의 또 하나의 연구과제가 바로 그거거든. 너를 비롯해 내가 탄생시킨 자아들을 전생시키는 것. 하지만 이건 조심해서 연구해야 해. 세상의 금기에 해당하는 비밀을 또 하나 밝혀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으니까.”
“헤헷,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역시 렌 경은 저의 창조주시네요.”
“너를 창조한 것은 너의 아버지야. 너의 아버지를 내가 만든 건 맞지만. 굳이 말하자면 넌 내 손녀와도 같은 거지. 어쨌든 소중한 내 가족임에는 틀림없으니 이상한 길로 들지 말고 계속 바르게 자아를 발전시켜 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배운 것 같거든요.”
“여자는 시집을 가기 전에는 모든 감정을 배웠다고 할 수 없단다.”
“시집은 안 갈래요.”
“그래, 솔직히 나도 널 시집보내기는 싫구나.”
나는 마리포즈를 보았다. 이 아이에게 인간의 성욕과 번식에 대한 본능을 주입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완벽한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만약 인공자아도 환생을 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주고 싶다.
좋아. 그걸 연구해 보자.
아직 시간은 많으니 한 150년 정도 그것만 파면 답이 나오겠지.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멍하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았다.
*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실비아 공주는 80년을 살았고, 나는 그녀가 죽은 후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은거에 들었다.
그동안 미리아는 숲에서 혼자 살며 거의 대부분 잠을 잤는데, 내가 그녀를 방문해서 입에 키스를 하자 깨어나서 배시시 웃었다.
또 하나의 삶이라고 할까? 마녀이자 하프엘프가 된 미리아와 나는 같이 살기 시작했고,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솔직히 미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지 무척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하고 아무런 특수능력이 없는 인간 아이였다.
심지어는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없어서 내가 마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빠가 9서클 대마법사이고 엄마가 마녀에 성녀인 하프엘프인데 마법적인 재능이 없다니!
그래도 소중한 내 자식이다.
나는 그 아이를 숲에서 15년간 기르고 성인이 되는 날 외부로 내보냈다. 인간 아이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것 같은 숲의 생활을 견디기 힘들 거라 생각했고, 아이도 동의했다.
이제 숲에는 미리아와 나 둘만 남았다.
그러나 그날 밤 미리아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예지몽을 본 것이다.
“캘던이 마족과 연애를 할 거 같아요. 이걸 어쩌죠?”
“뭔 소리야?”
“그 아이에게 당신이 받은 저주가 이어졌어요. 마족을 만나게 되는 운명의 저주 말이에요.”
“잉, 그게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이야?”
“그러게요. 지금까지는 마족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이번에 하나 들어왔나 보네요.”
“으, 저번에 며칠 동안 머리가 심하게 아프더니, 그게 그거였군. 큰일이네. 캘던이 엄하게 마족의 계약자가 되면 상황이 웃기게 되는 건데.”
“꿈에서 본 게 다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뭔가 조금 이상하게 꼬인 것 같아요.”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캘던을 찾아야겠군. 끄응, 외출합시다. 좀 한가하게 살려고 했더니 그놈이 일을 만드네.”
“호호, 좋잖아요. 거의 50년 만에 숲을 벗어나는 건가요?”
하필이면 다른 좋은 능력은 하나도 안 이어받고 어째 저주만 달랑 가져간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마족과 얽히는 것을 그냥 방관할 수는 없다.
그래, 어차피 이번 인생은 마족하고 얽힌 것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지. 조금만 더 버티자. 이반 경, 빨리 나오라고요.
나는 그렇게 아들이 사고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랜 은거를 깨고 세상에 다시 나갔다. 아무쪼록 이번 모험이 내 생의 마지막 모험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로엔의 마나뱅크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