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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49화 (249/250)

로엔의 마나뱅크 249화

*

이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무의미하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크기도 사실은 큰 의미가 없다.

나의 의지력은 거의 무한자에 가깝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본능 때문에 이런 크기와 형태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만약 내가 불멸자가 되면 아마 이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어 에리뉼처럼 엄청나게 큰 공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정령계의 타락정령을 보고 깨달았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유한자로 남아 있으려면 나의 영혼의 형태를 바꾸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이곳에서 나는 캐씨와 힘을 합쳐서 영혼의 일부를 떼어나 공간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의 색이 아닌, 캐씨의 색도 아닌 전혀 다른 색이니 내 영혼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유한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불멸자의 영혼에 침식을 할 수 있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다.

이제는 색의 조합이 만 단위의 덩어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조합에 필요한 파랑과 초록의 덩어리들을 만들어내는 데에만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작업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들면 들수록 완성되었을 때의 성취감이 커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색 구름의 크기도 컸다.

“또 하나 완성!”

“냥, 뭐 이리 크냐? 이게 정말로 우리가 만들어 낸 거 맞냐?”

눈앞에 있는 색의 구름은 우리의 영혼보다 천배는 커 보였다. 아무리 구름 상태로 만들어 부피를 최대한 늘렸다고 해도 이렇게 커질 수가 있다니!

“형태유지 때문에 억눌려져 있기는 해도, 우리 영혼이 가진 잠재력이 그만큼 크다는 거야.”

“너의 사역마가 되니까 내 영혼도 같이 커진 거구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캐씨는 이 안에서 정말로 강하게 성장했다. 말하자면 이건 우리의 영혼수련과도 같다.

캐씨와 나는 영혼의 끈이 이어져 있어서 서로의 의지력을 공유한다. 단지 발현하는 색이 다를 뿐이다.

스스스스스

색의 구름이 주변의 회색을 변화시키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만들어내자마자 주변과 동화를 해 버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작업한 공간을 살펴보았다. 지평선 끝까지 온통 초록과 파랑의 향연이다. 지평선이라는 것은 나의 감각의 한계를 의미하는데, 보통 물질계보다 수십 배 먼 거리까지 느낄 수 있다.

위를 보아도 회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도 마찬가지.

이 정도 넓이면 물질계에 사는 인간들이 모두 들어와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냥, 내가 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 넓이다.”

“그런 거지. 원래 아무 생각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작업을 하다보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이루는 법이라고.”

“냥, 그런데도 에리뉼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걸까? 우리는 여전히 그놈의 영혼 속에 갇힌 거잖아.”

“후훗, 지쳤나보네. 캐씨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만의 영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어. 에리뉼은 이제 우리를 녹일 수 없다고.”

“냥, 녹일 수 없다고 해도 영원히 가둘 수는 있잖아.”

“그건 아닐걸. 에리뉼이 우리를 녹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놈은 움직일 거야. 하하하.”

나는 웃었다.

불멸자는 아니지만 그동안 접해온 자들로부터 그들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 나다.

에리뉼은 영원을 사는 자라서 천년이나 이천년의 시간도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영원히 가둘 수는 없다. 우리를 가둔다는 것은 싸움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그가 신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를 영원히 가두면, 그는 영원히 신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우리를 녹일 수도 없게 되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우리는 기다리면 된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에리뉼이 참지 못하고 움직이면 그때에는 정말 대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도 시간은 공평하지만 우리는 유한자로써 영원을 사는 거고, 에리뉼은 불멸자로써 영원히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영원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니 그만큼 고통도 적다. 하지만 에리뉼이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터.

유한자가 불멸자를 이기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네놈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냥, 드디어 에리뉼이 말을 걸었네.”

캐씨가 먼저 놀라서 외쳤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지금 상태를 알 수 있는가? 에리뉼. 너는 이미 졌다.”

“웃기지 마라. 그런 시덥지 않은 장난을 쳤다고 해도 내가 눈 하나 깜박할 것 같으냐?”

“석상은 눈을 깜박일 수 없지. 어쨌든 너는 이제 신이 될 수 없는 거다. 에리뉼.”

“흥, 인간의 정신력이 무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는 언젠가는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언제 같은 소리 하네. 우리는 영원히 이대로 가는 거다. 에리뉼.”

“흥, 네놈이 영원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거꾸로지. 우리는 영원한 고통이 뭔지 몰라. 하지만 너는 알지. 우리는 이론적으로만 아는 거고, 너는 실감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건!”

“이제 나와 캐씨는 잠을 잘 거야. 만년에 한 번씩 깨어나서 작업을 한 번 하고 다시 만 년 자고 그럴까 하고 생각중이거든. 그러니 너도 같이 자자고. 영원히 신이 될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말하면 이건 거짓말에 가깝다. 하지만 정말 에리뉼이 버티기로 들어간다면 만년동안 잠을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각오는 하고 있다.

유한자의 특권 중 하나가 바로 잠을 잘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불멸자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를 찾는 자가 있으면 계속 깨어 있어야 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말이 만년이지 이건 그냥 막연한 생각이다. 문제는 이게 에리뉼에게는 막연한 생각이 아닌 피부로 와 닫는 생생한 고통의 현장이라는 거다. 이놈은 이미 수만 년간 지하세계에서 신이 되기만을 꿈꿔온 놈이니까.

“크으으, 네놈이 정말 끝까지 반항을 하겠다는 거냐.”

“내 영혼을 녹이고 육체를 빼앗겠다는 데 그럼 끝까지 반항 안 하면 어쩌라고? 다시 한 번 말하지. 에리뉼, 넌 이미 졌다.”

“웃기지 마라.”

“참,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말을 안 했는데, 예언에 의하면 앞으로 200년 후에 신이 탄생한다. 너 말고 다른 신 말이야. 그러니까 난 그때까지만 너를 방해하면 돼. 하하하.”

이게 결정타다. 에리뉼은 내 득의에 찬 웃음소리를 듣고 이성을 잃었다.

“크아아아아아!”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신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에리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 속에 현신한 것이다.

“왔구나. 마나파동포!”

그가 규칙을 깨고 들어온 순간 영혼세계는 사실 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나를 직접 소멸시키기 위해 힘을 쓴다면 나도 그와 싸우기 위해 힘을 쓸 수 있다.

선수필승!

마나파동포는 그대로 에리뉼의 신상 한 가운데를 관통했다. 워낙 큰 놈이라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격파로 인해 신상 전체를 약간 흔들리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내 주변에 퍼뜨려 놓았던 색의 공간에 힘을 주입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나는 색을 이용해 거대한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

공간의 마법진이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그동안 이 안은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문양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허용된다.

“포트라 소환!”

고오오오오오오오

“잘 불렀다. 마법사 렌. 불멸자를 소멸시킬 최초의 유한자여.”

“대기의 대정령!”

“포트라, 저놈이 스스로 자기 영혼 속에서 형상화해서 현신한 이상 저거 부수면 완전 소멸하는 거 맞지?”

“그렇다.”

이 질문도 의도된 거다. 에리뉼에게 자신이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시킴으로써 정말로 소멸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포트라에게 전에 물어보았던 것으로, 불멸자가 소멸하려면 스스로 죽음을 자각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한다.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 죽음의 매력에 빠져든다나 뭐라나?

포트라는 공간 전체를 강력한 대기의 힘으로 가득 채웠다. 더 이상 이 안은 에리뉼의 회색공간이 아니었고, 우리의 힘은 일순간이지만 에리뉼을 충분히 압박할 만큼 커졌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내 영혼 속이다! 너희들은 나를 이길 수 없다.”

“그 말 거꾸로 바꿔서 반사다. 이제 이곳은 너의 공간이 아니다. 네 영혼속도 아니다. 우리들은 너를 이길 수 있다.”

나는 차갑게 외치며 마나파동포를 연속해서 발사했다. 그러자 에리뉼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고, 포트라는 바람으로 변해 구멍을 후벼 팠다.

“좋은 게 있군. 새롭게 창조된 영혼의 힘이라니. 렌, 너는 정말로 신이 될 자격을 갖추었구나.”

포트라는 허공중에 뿌려져 있는 우리가 만든 색을 휘어 감아서 에리뉼의 몸에 생긴 구멍에 쑤셔넣었다. 그러자 정말로 에리뉼의 몸이 초록색 계열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라져라. 우리 사대 대정령은 더 이상 그대를 불멸자로 인정하지 않겠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역시 사대 대정령이 무섭긴 무섭구나. 불멸성을 빼앗는 판결을 내리다니.

에리뉼의 전신에 쩌적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중에 터져버렸다.

동시에 그의 회색 공간이 우리들의 색으로 바뀌었다. 포트라가 끝없이 넓은 공간 전체에 우리의 힘을 퍼뜨린 것이다.

“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 공간은 너의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확하게 너의 색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하지. 에리뉼의 남은 힘을 어떻게 쓸 것인지 정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오호, 이 불멸자의 힘을 내 마음대로 쓰라고?”

“네가 흡수하는 건 안 된다. 아니면 네가 신이 되던가.”

“쩝, 신은 한 한다고 말했잖아. 그럼 잠시 기다려 봐. 고민 좀 해볼게.”

이건 일반 10서클 기적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다.

고위마족을 소멸시켜 얻는 힘과도 비교가 안 된다.

그야말로 불멸자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키면서 나온 힘이라면 세계의 규칙을 반영구적으로 고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니면 대륙의 형태를 바꾼다던가. 왕국 하나를 천 년간 허공에 띄워서 천공의 왕국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 결단을 내리고 포트라에게 말했다.

“일단 이곳 지반을 강화해야겠어. 이곳이 붕괴되어도 대륙에 영향이 거의 없도록 하거나, 아니면 아예 붕괴가 안 되게 하면 돼.”

“그것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몽뱃이 하나의 종족으로써 살아가도록 하자고. 그들은 신벌을 받은 드래곤의 후예이지만 전혀 새로운 종족이잖아. 야수나 마물이 아닌 자신들만의 문명을 이룰 자격이 있다고 봐.”

“네놈 같은 놈이 신이 안 된다니 안타깝군.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게 이미 70%는 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아무튼 알겠다. 하지만 몽뱃이 하나의 종족으로 이성을 가지고 문화를 구축하면 드워프와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그들의 신을 죽인 자니까, 그들의 본능에 근본적인 공포를 심어주고 싶어. 지상으로 나오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냥, 그럼 우리 드워프들은?”

“캐씨 너도 그들의 신을 죽이는 데 일조를 했잖아. 너도 그들의 본능에 공포를 심어주라고.”

“냥, 그럼 나는 몽뱃이 고양이 울음소리에 공포를 느끼게 하겠다. 그리고 드워프들에게 고양이를 많이 기르고 더 소중하게 다루라고 하겠다.”

“하하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포트라. 어때? 우리가 하려는 일이 다 이루어질까?”

“충분하다. 너의 판정과 힘의 사용은 아주 공정한 편에 속하고, 몽뱃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럼 이제 나가자. 나는 대기의 정령, 이런 지하공간은 별로 오래 있고 싶지 않다.”

“좋았어. 그럼 부탁해.”

포트라는 투명한 문을 하나 만들어서 열었다. 정령의 문이다.

우리는 그곳을 통해 단숨에 지상으로 나왔고, 캐씨는 자기가 원한 킹 랄파오의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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