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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48화 (248/250)

로엔의 마나뱅크 248화

8장 지키는 자

회색의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나만 허공에 붕 떠 있다.

“이것이 에리뉼의 정신세계인가?”

나는 이곳에 들어오면서 에리뉼의 영혼과 접촉하며 나누었던 것들을 하나씩 기억해 내었다. 그것은 강력한 영혼의 메시지로써 우리 둘의 싸움에 대한 규칙이었다. 영혼에 새겨져서 바꿀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부분이다.

에리뉼은 나를 가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의 내면에 들어왔다.

내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영혼이 녹아 버린다면 에리뉼은 나의 육체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파괴하면 그것으로 에리뉼은 소멸한다.

“마나파동포는 쓸 수 없겠지.”

공간을 소멸시키는 강력한 공격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곳은 말하자면 섀도우 플레인과 거의 비슷한 영혼의 공간이다. 마법은 쓸 수 없고, 오로지 나의 의지로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허공 중에 에리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강력한 의지다. 거의 불멸자에 가까울 정도로군. 하지만 너에게는 아직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릴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리 나의 정신력이 강해도 천 년 만 년 유지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에리뉼의 말에 동의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에리뉼은 이 안의 시간을 외부보다 훨씬 빠르게 해 놓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이 회색의 공간에서 천년을 버텨도, 그건 내 시간관념에 불과할 뿐, 물질계에서는 하루도 안 지날 수도 있다.

“시간은 많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아라. 그리고 절망에 빠져 녹아버리는 거다.”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아. 나는 이미 많은 경험을 했고, 허무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데 익숙하거든.”

“크크크, 다른 어떤 공간도 지금 내가 만든 영혼감옥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은 상대적인 거야. 그리고 일단 나는 혼자가 아니거든.”

“냐옹, 그렇다.”

내가 영혼의 끈에 의지하여 캐씨를 부르자 그는 바로 내 옆에 나타났다.

“이런, 사역마까지 같이 들어오다니. 하지만 혼자든 둘이든 변하는 것은 없다.”

“있어. 혼자면 천년도 못 버티겠지만, 둘이면 훨씬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거든.”

“그래봐야 이 안의 시간은 영원하다. 천 년이든 이천 년이든 의미는 없다.”

“그건 영원히 존재하는 무한자의 이야기고, 나에게는 말도 못하게 큰 의미가 있다고.”

대화를 계속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서로가 목표하는 것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고, 그것은 상대의 파멸로 직결된다.

생존과 존재의 싸움, 영혼이 걸린 게임이다.

“캐씨야, 너에게도 이 공간이 회색으로 보여?”

“냥, 그렇다. 냄새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고, 색은 오직 회색만 있다.”

“그럼 난 무슨 색으로 보이지?”

“냥, 파랗게 보인다. 반투명한 파란 유령의 모습이다.”

“나는 네가 녹색으로 보여. 녹색의 고양이 유령이고 네 앞을 앞으로 내민 채 둥둥 떠 있어.”

“냥, 그럼 일단 렌의 눈을 통해 나를 보겠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역마는 서로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 남이지만 남이 아닌 관계가 바로 마법사와 사역마다.

캐씨는 나의 시선을 빌려 자기 자신을 보고 내 설명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모습이 파란색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캐씨의 시선으로 나를 보니 녹색으로 보였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다 녹색인가 보다. 너는 파란색이고.”

“냥,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색이 보이고, 서로 의사소통도 하니까 말이야. 이곳에서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라는 거야. 그러니까 개성이 있는 거지. 넌 파랑, 난 초록.”

“냥, 그래서?”

“회색은 에리뉼의 색이야. 이곳은 에리뉼의 영혼 안이고.”

“냥.”

“우리가 회색이 되면 지는 거고, 저 회색들을 다른 색으로 바꿀 수 있으면 이기는 거라고 봐.”

“냥, 이해는 잘 안 되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색을 어떻게 바꾸자는 거냐?”

“너와 나의 색을 조금씩 떼어내서 공간에 뿌리자고. 이게 좀 위험하긴 해. 영혼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저 회색 공간에 색칠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가치가 있어.”

“냥, 영혼을 떼어내서 공간을 칠하자고? 미친 짓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회색으로 변할 거라는 것은 알겠다. 해 보자.”

“좋아. 떼어난 부분은 의지력으로 복원을 하면서 계속 공간을 칠해가다 보면 뭔가 변화가 생길 거야.”

아니면 우리의 영혼이 붕괴되거나.

나는 뒷말은 생략했다.

사실 이건 가능성이 그다지 크다고는 볼 수 없는 도박과도 같다.

공간 전체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다. 그런 우리가 공간을 물들이려다가는 오히려 더욱 빠르게 녹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크기의 개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오로지 색만 남겼다.

이것은 색의 전쟁이다.

파랑과 녹색의 반란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회색으로 물들기 전에, 에리뉼을 다른 색으로 물들여 줄 것이다.

나는 의지력을 집중시켜 내 영혼의 일부를 떼어냈다. 생각보다 상당히 큰 손실감이 느껴졌지만 계속 집중을 하니 떼어낸 부분이 복구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복구하는 과정이 오히려 나의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냥,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거구나.”

캐씨는 나와 감각을 거의 공유할 수 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 순간 캐씨도 그것을 깨닫고 같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곧 공간 중에 내가 떼어난 녹색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캐씨가 떼어낸 파란 덩어리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냥, 우리 편이 늘은 느낌이다.”

“아니야. 이것들만으로는 도움이 안 돼. 하지만 이걸 섞으면 전혀 다른 색이 나오겠지? 너와 내가 아닌 또 다른 색이 말이야.”

약간의 차이만 있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나는 일단 녹색 하나와 파란색 하나를 합쳤다. 그러자 하늘색 계열의 덩어리가 하나 생겨났다.

나는 그것을 가루처럼 만들어서 허공에 작은 구름처럼 띄워놓았다.

“하나 완성. 이제 녹색 두 개와 파란색 하나를 합치자고.”

새롭게 만들어진 색의 구름은 확실히 나도 캐씨도 아닌 다른 영혼의 힘이 느껴졌다. 비슷하기는 해도 다르다.

캐씨도 차이를 느끼는 지 더욱 열심히 집중을 해서 자신의 영혼을 계속해서 조금씩 떼어냈다.

하나와 하나, 하나와 둘, 둘과 하나, 둘과 셋, 셋과 하나, 셋과 둘, 셋과 넷…….

갈수록 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덩어리가 개수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만큼 만들어진 덩어리의 크기도 커졌고, 우리는 그것을 모두 작은 구름처럼 만들어서 공간을 채워나갔다.

“냥, 이게 의미가 있을까? 회색의 공간은 무한히 넓잖아.”

“색의 혼합도 무한하니까 괜찮아. 적어도 이걸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회색으로 변질되지는 않을 거야.”

할 일이 없으면 점점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고, 결국 의지력이 흐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에리뉼의 공간을 침식해 들어가는 중이라 그만큼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색의 혼합이 이미 천단위로 올라갔다.

“냥, 신기한 게 아무리 영혼을 떼어내도 계속 복구가 된다.”

“그게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증거야. 이미 우리 주변은 모두 숲과 하늘의 색으로 바뀌었잖아. 회색을 찾으려고 해도 찾기 어렵게 됐다고.”

사방을 색의 구름으로 채우니 이제는 회색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저 바깥쪽은 여전히 회색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냥, 그런데 에리뉼은 더 이상 우리와 대화를 안 하나?”

“그놈은 우리가 허무의 공간속에서 생각하는 힘을 잃기를 원하잖아. 괜히 이야기를 걸어서 자극을 주면 그게 늦어지니까 무시하고 있겠지.”

“냥,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작업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아마 모를 거야.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걸. 그것이 이번 싸움의 규칙이니까.”

“냥, 그게 규칙이라고? 언제 그런 거도 정했냐.”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정한 거야. 그는 나를 삼키고, 내가 이 안에서 녹아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했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내가 무엇을 하든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고.”

둘이 하나씩의 규칙을 정함으로써 영혼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건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어야 정상이지만 에리뉼은 나의 영혼을 녹여서 자신이 흡수하기를 원했고, 나는 그냥 에리뉼의 영혼이 소멸하기만을 원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승산이 생겨났다.

나는 굳이 이 공간을 꼭 나의 색으로 물들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아닌 다른 색으로 물들여서 에리뉼을 변질시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건 나의 승리인 것이다.

에리뉼, 넌 나를 유한자라고 너무 무시한 거다.

혼자라면 몰라도 캐씨가 있으니 이렇게 새로운 색을 계속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것도 회색이 섞이지 않은 우리들만의 색이다. 변질된 공간에서는 에리뉼의 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에리뉼의 영혼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암세포와도 같다.

불멸자라고 자만한 자여. 어디 한 번 불치병의 공포에 시달려 봐라.

이 안의 시간이 무한에 가깝다면 언젠가는 회색보다 새로운 색이 더 많아질 거다. 그것으로 에리뉼은 끝장이 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확신을 준 건 바로 구름과도 같은 기운이 이제는 아예 공간 자체의 색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애초에 에리뉼의 계획대로라면 우리가 회색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반대로 공간이 초록색 계열로 물들어가고 있다.

에리뉼의 영혼은 조금씩 변질되어가고 있는 중이고, 그것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집념을 가지고 일을 계속했다.

고맙다. 미리아. 너의 예언이 나의 싸움에 작은 고양이를 더해 주었고, 그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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