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242화 (242/250)

로엔의 마나뱅크 242화

6장 지하세계

영지로 돌아온 나는 일행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에리뉼이라는 자가 다른 마족들을 선동하는 거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결계가 쳐진 후 이곳에 갇힌 고위마족들은 더 이상 불멸자가 아니게 된 셈이거든. 힘이 다 소모되면 소멸하니까. 유한자가 된 셈이지. 에리뉼은 그 점을 이용하는 느낌이었어.”

불멸자들의 특성은 천 년이든 한 시간이든 큰 구별이 없다는 거다. 무한한 시간을 존재하는 자들. 그들이 지금 시간의 굴레에 얽매버렸다.

물론 원래 자신의 세상에 있는 본체는 여전히 불멸자이겠지만 이곳 물질계에 갇힌 그들의 일부는 이미 불멸성이 깨어진 이른 바 시한부 인생과도 같다.

인간으로 따지면 다음 달에 죽는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당연히 그들은 동요하고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다시 불멸성을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들이 불멸성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물질계를 벗어나 본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이곳 물질계를 지배하여 새로운 불멸자로 거듭나는 것.

물질계를 벗어나려면 결계를 제거해야 하니 나를 찾아와야 한다.

그리고 물질계를 지배하려면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하지만 이미 불멸성을 잃고 힘을 전부 소모하면 소멸해 버리는 그들은 이제 계약자에게 큰 힘을 보내주기가 힘들다.

자칫 잘못하면 계약자들이 그들을 먹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아마 지금쯤은 대부분 기본 계약에 의한 힘 이외에는 전혀 계약자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에리뉼은 그런 자들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 같다.

현재 물질계에서 유일하게 불멸성을 유지하고 있는 마족이 바로 그다.

그런 만큼 다른 마족들과 계약을 해서 단기간에 승부수를 던지게 한다. 그리고 실패하면 그 마족의 남은 모든 힘을 흡수하는 것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한 에리뉼이 이런 식으로 다른 마족들의 힘을 통째로 흡수하면 정말 신이 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물질계에 악신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

“한 세계에 두 명의 신이 탄생할 수 있어?”

미리아가 물었다.

“포트라에게 물어봤는데, 가능하데.”

“으, 그럼 200년 후에 이반 경이 신이 된다는 예언이 맞아도 에리뉼이 신이 될 수 있는 거네.”

“응, 그래서 문제가 심각한 거야. 어쩌면 우리 물질계가 영원히 선신과 악신의 싸움장이 될 수도 있거든.”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게 이 부분이다. 차라리 이계의 신이 이곳을 점령하면 그건 또 나름대로 나쁘진 않다.

발데스처럼 먹잇감이 필요해서 영역을 확장하려는 자가 아닌, 개중에서도 정상적인 자가 신이 된다면 나름의 평화는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우리 물질계는 서로 대립하는 두 명의 신이 탄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지독하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환생을 계속하는 한 말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어차피 우리는 에리뉼과 싸우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자네가 방법을 찾게.”

크리드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몰라서 지금 고민하는 건 아니고요.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일단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려는 겁니다.

“마리포즈, 넌 의견 없어?”

“현 상황을 최대한 단순화 하면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마족들이 에리뉼에게 흡수되기 전에 하나라도 더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에리뉼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막을 뿐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방법도 찾아야 합니다.”

“에리뉼의 힘의 약화라. 그 점에 일단 초점을 맞춰보죠. 황당한 거라도 좋으니 생각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

“…….”

없구나. 하긴 나도 지금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고민 중이니 어쩔 수 없지.

사실 포트라에게도 이미 물어봤는데,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얄미운 건 포트라는 이미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느낌이었다.

왜냐고? 선신이든 악신이든 그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둘 다 근본이 이곳이기 때문에 누가 이기든 물질계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정령계와는 상관없는 일이란다.

포트라를 비롯해 다른 대정령들이 우려했던 바는 바로 다른 세계의 식민지화 되는 것이었는데, 결계가 쳐진 상황이라 이제는 안심하는 중이라고 한다.

확 결계를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그들의 사정이 그렇다니 내가 욕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들은 계약에 따라 나를 끝까지 돕기로 되어 있고, 에리뉼과 싸울 때 포트라를 소환할 수도 있으니 지금은 그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기로 했다.

젠장, 9서클이 되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대정령한테 아부하고 신급 존재와 싸워야 한다.

위에는 위가 있고, 삶에 고난은 필수요소인 건가?

아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딱 에리뉼까지만 어떻게 처리하면 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신력을 소모해서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인간답지 않게 200년 정도는 살 테니까 큰 문제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에리뉼 문제는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

지금은 에리뉼이 계약을 통해 마족의 힘을 흡수하지만, 더욱 강해지면 계약이고 뭐고 없이 그냥 통째로 삼킬 가능성도 있다. 그 단계까지 가면 막기 어렵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에리뉼이 마족과 계약을 하잖아. 그럼 우리도 그들과 계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잉, 뭔 소리야?”

“에리뉼과 싸우자고 마족들을 선동한다던가. 말하자면 에리뉼을 흡수하면 그들이 불멸성을 되찾을 수 있잖아.”

“그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마족들과 접촉을 하면 우리를 제거해서 결계를 부수려 하지 않을까?”

“우리가 결계를 친 걸 숨기면 될 것도 같거든. 뭣 하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엘프쪽에서 마족에게 에리뉼에 대한 정보를 흘릴 수도 있고.”

“오호, 숲의 힘을 이용해서 고위마족들과 접촉을 하면 되겠군.”

나쁘지 않다.

미리아의 의견이 가지는 좋은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가 마족과 싸울 일이 적어진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에리뉼과 싸우면 에리뉼은 힘의 흡수를 온전히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힘의 소모가 있다.

이건 실현 가능성도 높다. 마족들에게 에리뉼의 힘이 더 강해지면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을 거라고 이야기 해주면 된다. 그러면 마족들도 생각이 있으니 알아서 싸울 것이다.

더군다나 에리뉼을 제거하고 그의 불멸성을 흡수하면 마족들은 다시 불명성을 얻고, 더 나아가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임의 승자가 되는 새로운 방법인 것이다.

“좋았어. 미리아. 그거 좀 부탁할게.”

“응, 내가 장로에게 말해볼게. 이야기의 전달만 하는 거니까 장로도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이걸로 한 가지 대응책은 세워진 건가. 말로 때워서 두 적을 서로 싸우게 하는 거니까 굉장히 좋다. 우리는 오히려 마족들을 지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만 영원한 적은 없고, 때에 따라서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다.

“저도 한 의견 말씀드려도 될까요?”

케이니 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는 습관처럼 지도를 펴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에리뉼의 본거지가 이곳 물질계라고 하셨는데, 그의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모르겠어요. 지금은 에리뉼을 아는 사람도 없고, 신이었던 에리뉼의 다른 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물질계를 포기한 거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뉼은 우리가 모르는 추종자를 가지고 있든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힘을 공급받는 근원이 있지 않겠어요?”

“그럴 가능성이 있겠군요. 혹시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나요?”

“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모르는 곳이라면 이제는 지하세계 정도밖에는 없잖아요. 바다 위까지 다 뒤졌으니까.”

“지하에도 사는 자들이 있나?”

크리드 경이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있긴 있어요. 드워프 종족을 비롯해 몇몇은 거의 지하에서만 살아요.”

“그렇군. 나는 왜 몰랐을까.”

“드워프 왕국은 지금 쇄국 정책을 펼친 지 300년 가까이 됐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드워프를 만나본 적도 없죠. 어쩌면 그들이 에리뉼과 접촉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케이니 양은 일종의 소거법으로 우리가 접촉하지 않은 존재들을 찾다가 그쪽까지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확실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촉이 왔다. 이건 마족과 계약하면서 운명적으로 얻은 나의 직감이니 아마 거의 확실할 거다.

드워프를 비롯해 지하에 사는 종족들이 에리뉼에게 힘을 공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하세계라, 여행하기에는 상당히 힘든 환경이겠군.”

“그럴 거예요. 전에 조사한 바로는 땅속에 들어가면 엄청 덥다고 하더라고요. 때로는 용암이 흐르는 곳도 있어서 보통 사람은 유독한 연기에 숨도 못 쉬고요.”

전생에 나는 그곳에 두어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외부의 모든 존재와의 접촉을 꺼려했고, 극히 일부분만 지상에 나와 살면서 꼭 필요할 때만 인간과 교류를 했다.

어쨌든 지하로 내려가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섀도우 플레인과는 또 다른 게 여기는 영혼 상태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한 번 들어가면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더군다나 자칫 잘못하면 드워프들과 싸워야 할 가능성도 크니 그 좀을 조심하자.

“그럼 일단 준비를 해서 그쪽을 찾아봅시다. 드워프들의 지도자를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그렇게 하지.”

“저기, 나는 지하는 좀 힘들 것 같아.”

“미리아는 엘프의 속성을 지녀서 지하는 안 가는 게 좋아. 넌 그냥 장로와 함께 다른 마족들을 선동하는 일에 집중해 줘.”

“응, 그렇게 할게.”

이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역시 혼자 궁리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는 게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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