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39화
5장 에리뉼
내 무기력증에 대한 이유는 바로 결계의 유지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결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힘은 마나뱅크로부터 나오고, 그것을 조율하는 것도 마나뱅크다.
하지만 결계를 만든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내 의지력이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집중을 하면 평상시처럼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지만, 멍하니 있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리곤 했다. 어떻게 보면 엘프의 생활방식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나는 게을러졌다.
이게 정신적인 과부하에 의한 무기력증이다보니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진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게 또 편하고 즐겁다.
이번 생에서 원하던 삶의 한 종류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곤란하네. 마족들을 계속 때려잡아야 하는데.”
나는 소파에 누워 천정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실비아 공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데 방금 전에 간식을 먹어서 배가 상당히 부른 상태이고, 이대로라면 곧 잠이 들 것 같다.
“조금쯤은 쉬어도 되지 않아요?”
실비아 공주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처럼 내가 돌아와 며칠이고 같이 있어주니 좋은 모양이다.
그녀는 실질적으로 영지의 운영을 도맡아 하고 여러 사업까지 같이 진행하기 때문에 상당히 바쁜 몸이지만 내가 영지에 돌아온 이후에는 대부분의 일을 케이니 양에게 넘기고 거의 하루 종일 나와 있는 중이다.
“그게, 지금은 쉬면 안 되거든. 에리뉼하고 남은 마족들을 처리하는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빨리빨리 싸워야 해.”
“큰일이네요. 너무 위험한 것도 같고.”
“조금 위험하긴 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어. 무엇보다 이대로 놔두면 에리뉼이 점점 강해질 테니까 큰일이지.”
“그럼 어서 움직여요.”
“그러게. 안 되겠다. 마리야, 잠깐 들어와 봐.”
마리포즈는 내가 실비아 공주와 있을 때에는 옆방에서 대기를 한다. 그녀가 인공자아라는 것을 실비아 공주도 알지만 남편과 둘이 있을 때 다른 여자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예, 렌 경. 부르셨어요?”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 정상적으로 마족 처치 계획을 세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네가 내 대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잡아. 그러면 난 억지로라도 따를 테니까.”
“그렇게 할게요. 숲 너머에 전투장이 완성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응.”
이것으로 당분간 내 일은 없다. 마리포즈가 알아서 준비하고 때가 되면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을 하나 집어먹고는 실비아 공주에게 말했다.
“어쩌면 나 평생 이렇게 게으르게 살지도 몰라. 생각보다 결계에 들어가는 의지력이 많네.”
“저는 오히려 지금의 렌 경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지난 몇 년간 너무 많은 전투를 해 왔으니 이제는 쉬세요.”
“일이 마무리되면 쉬는 건 상관없는데, 연구를 할 기력도 없으니 좀 문제네.”
연구해야 할 과제는 꽤 많이 쌓였다. 원래는 돌아오면 바로 연구를 진행하려 했는데 이렇게 멍하게 지내다보니 이제는 시작할 엄두도 안 난다.
하지만 실비아 공주에게는 내가 연구를 안 하는 게 더 좋으리라. 아직 그녀는 젊고, 나와 결혼을 한 후에 우리는 신혼기간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래, 아무리 게을러도 밤일은 할 테니 당분간 연구고 뭐고 실비아 공주와 노닥거리고 노는 데 집중하자.
이 참에 아이도 하나 가지지 뭐.
사실 그동안은 아이를 가져도 그 아이가 나보다 먼저 죽을 거 같다는 생각에 약간의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다시 9서클이 되고 나서보니 인생이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산다고 내 아이까지 오래 살 수는 없는 법, 그냥 인생의 순리대로 살면서 슬픔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본다.
또 수명이 길다고 해서 꼭 늦게 죽으라는 법은 없다. 혹시 모르니 내가 살아온 흔적이랄까? 저번 생에는 아이를 가지지 못한 대신 자아를 만들었지만, 이번 생에는 아이도 낳을 만큼 낳기로 했다.
그러다가 실비아 공주가 죽으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인간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미리아와 같이 살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에리뉼에 대한 단서는 아직 찾지 못했지?”
“예, 케이니 양이 조직원들을 총동원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있는 것들은 모두 찾아서 보고하게 했는데, 오히려 잠잠해요. 결계가 쳐진 후에는 정말 마족의 그림자도 안 보이는 것 같네요.”
“태풍 전의 고요함인건가. 일단 소환할 수 있는 놈들을 하나씩 처리하다보면 상황을 알게 되겠지.”
처음에는 드래곤의 신전에서 계속 전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마족들끼리 서로 정보 교환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드래곤의 신전은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숨기기로 했다.
반대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전투장은 가능한 한 빨리 위치를 노출시켜서 마족들이 알아서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에리뉼만 아니었으면 그들이 나의 위치를 모르게 하고 천천히 하나씩 때려잡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힘들더라도 빠르게 많이 잡는 게 필요하다.
에리뉼, 그놈을 찾아낼 방법이 없을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놈이 다른 마족들을 다 흡수하기 전에 어떻게든 하는 게 훨씬 덜 위험할 거다.
내가 멍하니 있다가 고민을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케이니 양이 들어왔다.
“렌 경, 이변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어요.”
“오, 뭔데요?”
“남쪽에 거대한 구름이 끼고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비에 마법적인 성질이 감지되었다고 하네요.”
“구름과 비라, 이건 뭐 자연재해를 일으키려는 건가.”
어떤 놈인지 독하네. 발버둥을 쳐도 적당히 쳐야지 그런 식으로 힘을 소모하면 급격히 약해질 게 뻔 한 데 말이야.
나는 끄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직접 봐야겠어요. 구름이 보이는 곳까지 가죠. 하지만 그 비가 치명적인 게 아니라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보충도 안 되는 힘을 막 쓰는 놈은 거리를 두고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려잡는 게 좋겠죠.”
문제는 비의 성분이다. 이게 땅에 저주를 내려서 곡물이 못 자라게 하는 등 사람들이 살기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에고, 귀찮네. 정말 전투장이 완성되면 내가 결계를 쳤다고 대륙 내에 광고라도 해야 할까봐. 그래야 미쳐 날뛰는 놈이 나오지 않고 다들 조용히 나를 찾아오지.”
나는 한숨을 쉬며 밖으로 걸어 나갔고, 실비아 공주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배웅했다. 돌아와서 며칠 쉬지도 않았는데 또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긴 것이니 조금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올 때쯤이면 전투장도 완성 될 것이고, 이제는 거의 영지와 전투장 두 군데만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시를 대비해서 렉스와 크리드 경은 동행을 했다. 마리포즈는 전투장 건설을 위해 남았기 때문에 렉스의 목띠에 있는 힘을 정교하게 조절해 줄 사람은 없다.
그래도 우리들 셋이면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더라고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며칠을 가자 정말로 하늘에 검푸른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게 보였다. 특이한 것은 푸른 기운을 띠고 있다는 점인데,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상당한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케이니 양이 붙여준 정보원에게 물었다.
“저게 생긴 지 일주일 쯤 된 거죠?”
“예, 그 사이 비도 계속 왔습니다.”
“비에 대한 분석은 끝났나요?”
“가연성 물이라는 분석입니다. 기름이 아니라 물인데, 불에 잘 탑니다.”
“잉, 그러면 그 물을 마신 사람이나 동물들은 어떻게 되나요?”
“그게,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이 붙으면 내부에서부터 타오르기 때문에 끌 수가 없다는군요.”
“쩝, 연쇄마법 같은 거네요. 불에 잘 타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는 불을 싸지를 게 틀림없군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서 지금 대 화염장벽을 곳곳에 치려고 마법사가 파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식물들도 마찬가지겠죠?”
“예, 저 일대의 식물들은 기름먹인 장작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이건 또 웬 미친 짓일까? 그냥 어차피 소멸할 거 물질계에 최대한 피해를 주자고 결심한 건가?
문제는 지금 구름을 만든 놈이 있고, 아무래도 또 다른 마족이 불을 일으킬 것 같다는 점이다.
이놈들이 둘이 협동플레이를 하는 거다.
무슨 의도일까? 그냥 미친 짓이라면 황당한 거지만, 그게 아니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알아내야 한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일단 구름을 조사하기로 하고 크리드 경과 함께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렉스는 우리를 보며 컹컹 하고 짖었는데, 아무래도 렉스에게도 날개를 달아줘야 할 것 같다. 목띠의 힘을 이용해서 빛의 날개를 생성하게 하면 되겠지.
“거기서 기다려. 렉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렉스는 몇 번 짖고는 끄응 하고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냥 잠이나 자고 있어. 구름하고 싸울 생각은 나도 없으니 조사만 빨리 하고 갈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구름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