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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38화 (238/250)

로엔의 마나뱅크 238화

어둠에 갇혀 있는 공간이 점점 밝혀지는 느낌이다.

결계를 친다는 것은 경계선을 안다는 것이고, 그건 바로 섀도우 플레인의 지리를 모두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인해 나는 섀도우 플레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리퍼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런! 의식하면 안 되는데, 슬리퍼의 위치가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마치 그놈이 나를 만나러 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기억조작으로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자꾸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최대한 자제를 하자. 아무리 내가 유한한 수명을 가진 자이고 기껏해야 수백 년밖에 못 산다고 해도 세계의 수명을 막 줄일 수는 없다.

‘노 리스크 노 게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의 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할수록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는 중인 거다.

원래 마법사가 다 그렇지만 내가 지키려고 발버둥 친 이 물질계를 내 손으로 파괴하지는 말자.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이번 마족 사태가 끝나면 가능한 한 마법 자체를 안 쓰고 살기로 했다. 지금까지 너무 마법을 남발한 경향이 있으니 이제는 조용히 살아도 된다.

그러고 보니 요즘 실비아와 너무 소원했다.

지금도 이미 몇 주나 만나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고위마족들을 상대하려면 싸우기 적당한 장소에서 대기해야 하니 한 달 중 보름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해를 해 준다고 해도 솔직히 사람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번에 돌아가면 조금 더 잘 해줘야겠다.

너무 연구에만 시간을 쏟지는 말자.

나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애초에 이번 생에는 청춘을 즐기는 게 목적이었다. 마법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살아보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연구하게 되고, 새로운 마법을 자꾸 창조하고 싶어진다. 나는 역시 뼛속까지 마법사인 건가?

진심으로 연애할 생각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여자 만날 시간은 따로 챙긴다는 뿌우의 말이 자꾸 가슴에 와 닿는다.

결계가 쳐졌다. 내가 모았던 고위마족의 힘과 세상 사람들이 송신탑을 통해 보내준 의지력이 거의 다 소모될 때쯤이다.

겨우 힘의 크기를 맞춘 셈이다.

좋았어. 이제는 유지다.

“미스틱 엑스, 게이트를 연결해 줘.”

“대규모 직결 게이트를 오픈합니다.”

위이이이잉

마나뱅크의 마나가 나를 통해 섀도우 플레인으로 흘러나간다. 의지력으로 만든 통로를 따라 결계 전체에 퍼지며 계속해서 힘을 보충하는 방식이다.

일단 게이트가 열린 후에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마나뱅크인 미스틱 엑스가 알아서 관리를 하게 된다.

지금 마나뱅크에 축척되어 있는 막대한 마나는 결계를 200년간 유지하는 데 쓰일 것이고, 이후에는 힘이 떨어진 결계 자체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 사라지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에는 이반 경이 신성을 얻어 이 세계의 관리자가 될 테니 다른 마족들이 들어와도 소용이 없다. 아마 들어오라고 해도 잘 안 들어올 것이다.

“이제 된 건가.”

드디어 의식이 끝나고 나는 제정신을 찾았다. 그동안 섀도우 플레인 전체를 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었는데 이게 내 두뇌를 꽤 자극시켰는지 두통이 심하게 밀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마법진 위에서 걸어나왔다.

미리아가 얼른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괜찮아? 기력이 하나도 없어 보여.”

“괜찮아. 조금 어지럽고 머리가 아픈 것뿐이야. 웃!”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데 머릿속 한 군데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누군가 섀도우 플레인에 쳐진 결계에 충격을 가한 게 그대로 느껴지는 거다.

“후훗, 벌써 결계가 쳐진 것을 눈치 챈 고위마족이 있나보다. 열심히 두들겨 대고 있네.”

쿵, 쿵, 쿠쿠쿠쿠쿵

충격이 점점 많아졌다.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하긴 원래 자신의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테니 다들 당황했겠지. 확인해 보려 섀도우 플레인에 들어가 보면 전에 없던 장벽이 떡 하니 쳐져 있을 테고.

이놈들, 너희들은 이제 독안에 든 쥐새끼 신세라고. 하하하하.

나는 웃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물질계를 우습게보았던 자들을 모두 가두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나는 일행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미스틱 엑스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남아 계속 명상을 해야 하고, 결계를 가동한 나 역시 그들의 움직임을 느끼기 때문에 때때로 이상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다.

“혹시 갇힌 고위마족들이 이판사판으로 물질계에서 난동을 부리지는 않을까?”

크리드 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놈은 오히려 얼마 못 가요. 이제 그들의 힘은 소모가 될 뿐 보충이 안 되거든요. 오히려 남은 힘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숨긴 채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놈들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거 찾아내서 뿌리를 뽑는 게 꽤 귀찮을 거예요.”

일종의 현지화다. 자신의 본거지와 링크가 끊긴 상황이니 이곳 물질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려는 자가 나타날 수 있다.

이게 잘못되면 불멸자는 아니더라도 그에 필적한 귀찮은 존재가 물질계에 새로 탄생하는 셈이 되는데, 가령 왕국을 하나 세워서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잡는다던가 하는 짓을 벌이면 정말 처치하기도 애매하고 놔두기도 좀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에리뉼이 그런 놈들을 알아서 정리해 줄 것 같아요. 적어도 음모의 주체자라면 고위마족들이 어떻게 숨든 다 찾아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놨겟죠.”

그래서 나는 나를 찾아오는 놈과 날뛰는 놈을 상대하면 될 거 같다.

“그런데 렌 경을 찾아온다면 우리 영지에 피해가 나지 않을까?”

“그건 이미 생각해 놨어요. 저는 당분간 영지 바깥지역에서 살 거고, 신분도 감출 거예요. 적어도 우리 영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해야죠.”

미리아의 숲 건너편에 따로 전투를 위한 장소를 만들 거다. 그리고 평소에는 영지에 있다가 누군가 찾아오면 미리아의 숲을 통해 빠르게 그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나 뿐 아니라 크리드 경을 비롯해 고위마족과 싸우는 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생활공간과 싸움공간을 분리시킬 계획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리아의 숲이다.

엘프의 숲이라는 게 생각보다 오묘해서 숲의 주인이 길을 열어주면 한두 시간 만에 숲을 가로질러 갈 수 있고, 아니면 며칠이고 헤매게 되어 있다.

거의 공간 왜곡 수준이기 때문에 적은 우리가 있는 곳이 영지 반대편이라고 인식할 것이고, 그곳은 영지와 꽤 떨어진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히게 되어 있다.

실제로 그곳으로부터 미스틱 게이트로 오려면 한참을 돌아서 와야 하기 때문에 직선거리는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지만 길을 따라 이동하는 거리는 웬만한 영지 두어 개는 관통해서 지나야 하는 것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크리드 경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준비를 해 놓았군. 역시 마법사들은 머리가 복잡해. 생각할 게 그리 많으니 마법사를 하는 거겠지?”

“그러게요. 미리미리 다음 상황을 준비하는 체스 형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현실에 대한 임기응변이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자네가 임기응변에 뛰어난 것은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니 별로 염려하지는 않네. 그냥 내가 너무 현재에만 집중하며 사는 가하고 생각해 보았을 뿐이지.”

“현재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미래는 현재로부터 나오니까요.”

“자기 역할이 다 있는 거겠지. 그럼 이제 돌아가세.”

“그러죠.”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쿵쿵 울려대는 결계의 진동을 살짝 꺼 버렸다. 이걸 계속 듣다가는 신경쇄약에 걸릴 것 같았다.

얘들이 빨리 포기하고 결계는 그만 건드렸으면 좋겠네. 결계가 깨질 리는 없겠지만 내 머릿속이 시끄러운 건 귀찮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매일 몇 시간씩 명상을 하며 결계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하루 종일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드래곤의 신전을 나왔다. 그리고 배를 타고 섬 주변에 몇 가지 마법을 걸어 해류의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이건 포트라의 힘을 이용했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섬 주변에 돌풍이 불며 계속 해류의 방향을 바꾸게 되어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도 이제는 이 섬에 배를 타고 도착하지 못하리라.

돌아오는 길에 항구에서 해적들에게 그 섬 주변으로 가면 거의 확실하게 난파를 할 거라고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 주었다. 그걸 무시하고 그쪽에 접근하는 놈은 아마 살아 돌아오기 힘들 것이다.

모든 게 끝났다.

꽤 오랫동안 준비했던 결계가 완성되니 일단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곧 피로감으로 바뀌었고, 나는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미리아가 계속 축복을 걸어주고, 마리포즈도 피로회복용 마사지를 해 주었지만 나는 거의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아아,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아. 그런데 이게 또 기분이 좋네.”

“쉬는 건 좋지만 너무 멍하니 있으니까 조금 불안하다. 일어나서 체조라도 해 봐.”

“체조하기 싫어. 그냥 잠만 자고 싶어.”

“이거 혹시 저주 아냐? 고위마족들이 결계를 친 자에게 저주를 걸 가능성도 있지?”

“아무래도 저주인 거 같긴 해. 그런데 그냥 당분간은 이렇게 있을래. 영지로 돌아가면 알아서 풀게.”

“어머, 알고도 그냥 걸려준 거였어?”

“응, 합법적으로 쉬고 싶었어. 근데 솔직히 내 정신력이 너무 강해서 저주를 걸리려 해도 걸려주기가 쉽지 않네.”

나 노력했다. 저주에 걸려서 무기력증에 한 번 빠져보고 싶었다.

세상 너무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고, 돌아오는 도중에라도 푹 쉬겠다고 마음을 열어 밀려오는 저주를 튕기지 않고 수용을 한 거다.

좋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래도 돌아가면 열심히 살아야겠지? 마족 놈들을 하나하나 때려잡고, 나중에는 에리뉼까지 처리해야지.

지금은 쉬자.

나는 미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또 다시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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