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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36화 (236/250)

로엔의 마나뱅크 236화

4장 결계의 의식

이제 마지막으로 고위마족 하나를 소환해서 처치하면 바로 마법의식을 시작할 수 있다. 힘든 작업이었고, 의외의 문제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마법사로써 큰 영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싸움이 끝남과 동시에 의식을 시작할 거예요. 그래야 마족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마법진이 발동을 할 테니까요.”

“알겠네. 어서 시작하지.”

크리드 경은 이미 전투준비가 끝난 듯 했다. 평생 한 번 싸워보기도 힘든 자들과 연속해서 싸우면서 우는 소리 한 번 안 하는 그가 믿음직스럽다. 그리고 싸울 때마다 계속 강해지는 느낌도 난다. 역시 기사는 실전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일까?

마법사의 경우는 명상과 연구를 통해서 성장하고, 실전으로 응용력을 얻는다. 기사 역시 수련을 통해 성장하지만 실전에서 얻는 게 마법사보다 상대적으로 큰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돌려 미리아를 보았다.

나를 제외하고 짧은 시간 내에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게 바로 미리아다. 그녀의 강함은 정말 나이에 비해 사기적이라 할 수 있고, 숲에서의 전투력은 거의 8서클 마도사에 준한다.

그리고 렉스, 마리포즈와 같이 있는 렉스는 고위마족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렉스는 계속 마기를 흡수하며 강해졌고, 나는 렉스가 죽지 않게 방어적인 면만을 강화했는데 이게 서로 상승작용을 했다. 위험할 때는 항상 나를 몸으로 막아서 보호하려는 렉스는 이미 일반 개의 수명을 넘어서서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가능하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아 참, 서피야.”

“샤아아, 말해라. 주인이여.”

“여기 결계 쳐지면 너도 돌아가기 힘들거든. 그러니까 이번 전투가 끝나면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의식은 그 뒤에 시작할 테니까.”

“그런가? 이제 나는 해방되는 건가.”

“그래, 그동안 실컷 부려먹어서 미안했다.”

“너는 좋은 주인이다. 나는 예전의 힘을 모두 회복했고, 이제는 더욱 강해졌다. 아마 나의 세계로 돌아가 육체를 재구성하면 지금과는 또 다른 강함과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 이왕이면 그냥 마수 수준이 아니라 신수라 불릴 정도까지 올라가 보라고.”

“나에게 불멸자의 길이 열릴지는 아직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사양하지 않겠다.”

막상 헤어지려니 조금 아쉽네. 딱 10년만 더 부려먹으면 좋겠구먼. 아니, 물질계에 남은 고위마족들을 다 처리하고 에리뉼과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만 서피가 있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서피는 보내는 게 맞다. 나는 이 녀석과 계약을 할 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고, 이 약속은 결계가 쳐지면 지키기 어렵게 된다.

물론 의식의 일부로 다른 차원으로 빠지는 구멍을 세 개 뚫어놓기는 했다. 고위마족을 단번에 추방시킬 수 있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위험할 때 쓰려고 만든 것이라 서피가 쓰도록 놔두리라는 보장이 없다. 위기가 세 번 이상 닥치면 구멍을 모두 쓰게 될 테니까.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피는 이번 전투로 헤어져야 한다.

또 다른 약속인 예전의 힘을 되찾게 해주겠다는 것은 지켰으니 이걸로 서피와의 계약은 양쪽이 모두 충실하게 이행한, 훌륭한 계약으로 끝맺음을 짓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아쉽네.

서피와의 계약을 잘 이행했기 때문에 다른 이계의 고위마수들을 꽤 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결계를 치면 그걸 못 하잖아.

원래 마법진에는 내가 그동안 소환한 자들과의 계약내용도 적어 넣게 되어 있다. 마수 서피를 소환한 자라는 타이틀이 나의 마법진에 적히게 되는 것이다.

이게 충실하면 할수록 소환진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뭐, 결계를 치고 에리뉼까지 처리하면 현실적으로 물질계에서 나보다 강한 자가 없는 셈이니 굳이 이계의 마수까지 소환할 일은 없다. 하지만 연구를 위해서는 소환도 하고 파괴와 창조도 해 봐야 하는 법이다. 뭐든지 경험이니까.

“휴우, 마음을 비우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미 소환해 놓은 뿌우를 보았다.

뿌우는 처음 내가 포트라에게 소개받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다.

그때에도 단순한 소정령급은 아니었고, 꽤 머리도 좋고 힘도 좋아서 써먹기 편했지만 지금은 포트라를 소환해도 같이 존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원래 대정령을 소환하면 주변에 있는 소정령들은 버티지 못하고 모두 역소환 당해 버리는데, 뿌우는 소정령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마법진의 중앙에 앉아있는 미스틱 엑스, 원래 마나뱅크의 자아인 그는 지금 전 세계에서 모아지는 의지력을 하나로 뭉쳐 힘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지만 전투 후에 남아있는 마족의 힘을 수집하여 기존의 힘에 더하는 역할이다.

이런 거대한 힘을 다루고 조율하는 일에는 미스틱 엑스만한 존재가 없다.

“그런데 렌, 한 가지 물어도 돼?”

미리아가 내 생각의 사이를 끊고 끼어들었다. 내가 의식을 시작하지 않고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심심했나?

“뭔데?”

“렌은 마법사인데 사역마 안 키워? 나 이번에 돌아가면 고양이라도 한 마리 키워볼까 하는 참이거든.”

“고양이라, 괜찮네. 검은 고양이를 키울 거야?”

“아니, 하얀색의 털이 많고 뚱뚱한 애로 하려고. 검은 색에 날씬한 애는 너무 영리해 보여서 별로야.”

“그래, 털은 좀 날리겠지만 그건 공기청정 마법을 걸어놓으면 되니까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렌은 사역마 안 키우냐고.”

“나는 정령하고 계약했잖아. 말하자면 저기 뿌우가 내 사역마 같은 거야.”

“켁, 뭔가 사역마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든다.”

“나도 이쁜 여자 정령하고 계약할 걸 그랬나? 하하하.”

“그것도 별로야. 그냥 작고 귀여운 동물이 좋은데.”

“나는 뿌우로 만족할래. 저놈이 그래도 꽤 쓸모가 있거든.”

“하긴 뿌우가 도움이 많이 되지. 그럼 나중에 내 고양이를 같이 기르자.”

“알았어.”

“고양이가 생기면 내가 매일 축복마법을 걸어줄 거야.”

“으, 그건 좀. 어렸을 때부터 매일 축복마법을 받으면 나중에 어떤 고양이가 될지 상상도 안 간다. 어쩌면 렉스처럼 몸이 커질지도 모르잖아.”

“에이, 그렇지는 않을걸. 그냥 예뻐지고 건강해지는 축복만 걸어줄 거야.”

“그래, 네 고양이니까 당연히 예쁘고 건강할 거야.”

사역마는 주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성녀인 미리아의 사역마라면 당연히 장수할 것이고, 머리도 똑똑할 거다.

나는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고, 이미 렉스라는 훌륭한 친구도 있지만 미리아는 자신만의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녀도 마법사이니 사역마를 가질 수 있지.

사실 마도가문의 마법사들은 사역마를 잘 키우지 않는다.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사역마에게 정과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 마도사들이나 사역마를 키우지 젊은 수련마법사는 그런 사치는 꿈에도 못 꾼다.

어쨌거나 사역마도 다 이번 의식을 끝내고 돌아가서의 이야기다.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니 의식의 시작에 집중하자.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그런데 문득 미리아가 갑자기 왜 사역마 이야기를 꺼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굳이 잡담을 할 아이가 아니다.

“미리아, 혹시 그거 예언한 거니?”

“응? 뭐가?”

“갑자기 사역마 이야기 꺼낸 거 말이야.”

“아!”

미리아는 그때서야 자신이 나의 의식집행을 방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기분나빠하지 않아도 방해는 방해이고, 평소라면 절대로 이 타이밍에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맞는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오러클 능력이 발현된 거야.”

“사역마, 고양이, 이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네. 뭘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알았어. 일단 일을 진행하자.”

뭐가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미리아의 오러클 능력은 아주 강력하다. 나는 이제부터 상당히 곤란한 일을 경험할 것이고, 고양이나 사역마가 그 일을 해결하는 열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미리아의 예언은 모두 즉효성이고, 해결책도 노골적으로 제시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몇 년 뒤에 일어날 일 같은 것은 예언을 안 한다. 바로 오늘, 거의 지금 이 순간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다.

예언이라는 것을 인지했으니 다행이다. 무심코 모르고 지나갔다면 한참 헤맸을 것이다.

“시작합니다!”

나는 약간 큰 소리로 마법진 가동을 선언하고 고위마족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부르는 자는 타락정령을 만들어낸 고위마족이다. 포트라가 정령계를 정화시키고 남은 부정한 찌꺼기들을 모아 소환의 단서를 만들어 주었다.

이 고위마족의 이름은 바포메트, 산양의 모습을 한 고위마족으로 마녀들이 가끔 소환을 하려 시도하는 꽤 인지도 높은 자였다.

위이이이이잉

불덩어리가 천정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산양의 머리를 한 자가 나타났다. 하늘로 솟아오르다 구부러진 뿔, 역관절의 발굽. 그리고 이마의 펜타그램이 돋보이는 자였다.

크기는 약 5미터, 거인 사이즈다. 크리드 경이 싸우려면 고생 좀 하겠네.

“누구냐? 나를 소환한 자는?”

“바포메트, 그대가 계약자로 하여금 정령계를 오염시키려 한 자인가?”

“그건 그자의 의지였다. 나는 그자가 스스로의 형태를 바꾸어 무엇으로든 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지.”

“바포메트, 그대의 힘은 오염과 타락에서 나온다고 들었다. 나는 그대의 계약자와 싸웠고, 이제 그대와도 싸우겠다.”

잔말은 필요 없지.

나는 바로 바포메트에게 대결신청을 했다.

그러나 바포메트의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이 노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주를 맛보고 싶은 게로구나.”

“이곳 물질계를 탐낸 너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다. 덤벼라.”

“흐흐흐, 아무리 다른 세계에서라지만 유한자가 나에게 덤비는 일이 있다니, 우습구나. 나는 숭배당하는 자. 모든 차원의 부정한 힘을 원하는 자는 나의 이름을 부른다.”

알아, 인지도가 높다는 거지. 그만큼 힘도 세고.

하지만 지금 밀림의 마녀들은 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아. 갸들도 마나뱅크에 폭 빠져 있거든.

넌 생각보다 네 힘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소멸할 거고.

나는 필승의 신념으로 첫 주문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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