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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35화 (235/250)

로엔의 마나뱅크 235화

“그럼 그대의 의지는 어떠한가? 우리가 또 하나의 그대를 소멸시켜도 그대는 상관없는가?”

나는 일단 화제를 바꾸기로 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질문은 피해갈 수 없다. 지금은 신경을 안 쓰다가도 막상 우리가 에리뉼과 싸울 때에 나타나면 아주 곤란하다.

혼이 분열되었다면 지독한 원수지간이거나 형제 이상의 사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서로 인식을 못 하는 상태였다면 상관없지만 이미 이자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신은 이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나는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하든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또 말을 번복하지도 못한다.

“한 번 포기한 세계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큰 시름을 덜은 것 같다.

“그러면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는가?”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두고 나왔다. 그대가 나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좋지 않은 과거의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아까 그대의 질문에는 대답해 주겠다. 에리뉼은 부족한 부분을 다른 고위마족의 힘으로 채우려는 것 같다.”

“부족한 부분?”

“그는 분열된 존재. 완전했을 때에도 물질계를 관리하는 데 부족함을 느꼈던 나다. 드래곤이 떠날 때 세상의 근원이 되는 힘 중 일부를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에리뉼은 나의 미련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부족함을 채워서 다시 신이 되고 싶을 것이다.”

“과연, 경기에 참가한 고위마족들의 힘을 모은다는 거군.”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 그들이 남긴 힘을 모아서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치려고 하고 있으니까.

고위마족들이 물질계로 들어올 때 가져온 힘은 결코 작지 않다. 그들의 불멸성에 타격이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냥 쉽게 버리고 떠날만한 힘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물질계의 지배권을 놓고 게임을 하는 중이다. 아마 일정 기간 내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힘의 소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게임을 하려면 끊임없이 힘을 투입해야 한다.

마족의 계약자들의 계약기간이 100년이라고 했다. 실패하면 영혼을 빼앗겨 버리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이 소모한 힘을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혼을 빼앗기는 조건은 그저 계약자들이 최선을 다 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채찍질과 같은 거다.

그렇게 에리뉼은 고위마족들이 힘을 소모해 가면서 게임을 하도록 유도한 후, 충분한 힘이 모이면 자신이 나서서 신이 될 계획인 거다.

그는 이 게임에 승자가 없을 거라고 예측했고, 그쪽에 베팅을 한 셈이다.

“그자는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거대한 도박장으로 만들었군. 안에 살고 있는 유한자들이 아무리 괴로워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은 거야.”

“유한자들의 고통은 일시적인 것이다. 수천 년 정도 혼란이 있어도 다시 천년만 지나면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아득한 옛 전설로만 남을 것이다.”

신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나는 에리뉼에게 분노했지만 그는 유한자들의 일시적인 고통에 대해 말했다. 이것이 유한자와 불멸자의 생각의 차이인가?

“나는 유한자로써, 혼란의 시대를 겪어야 하는 피해자로써 에리뉼의 음모를 밝히고 대응할 것이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나의 일부분이 소멸되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겠지만 나는 감수하겠다.”

여기까지 말한 이상 지금 내가 소환한 신은 에리뉼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소환을 해제하고 잠시 휴식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포트라, 내가 결계를 쳐서 모든 마족들에게 물을 먹이면 에리뉼은 어떻게 될까? 그놈은 원래 태생이 이곳이니 파워가 끊기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러면 아마 그놈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겠지. 어쩌면 다른 마족들의 힘을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

다른 고위마족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라 결계가 쳐지면 계속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계를 유지하는 나를 찾아 공격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리뉼은 다르다.

그는 오히려 다른 마족들을 잡아먹고 다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모아서 세계를 지배하겠지.

그것으로 사실 상 물질계의 신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쇄국정책을 친 왕국 내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나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결국 가장 마지막에 그놈이 나타나겠네. 나만 처치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될 테니까.”

“그럴 가능성이 클 거다. 다른 마족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 마족을 처리하고 흡수하기 바쁠 테니, 중요한 것은 섀도우 플레인에서 수련하고 있는 네 동료의 존재를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네. 만약 이반 경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든 이반 경을 제거하려 할 거야.”

반대로 이반 경의 존재를 모르면 그자는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설령 나를 이기더라도 2백년 후에 신이 된 이반 경은 그자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일 테니까.

“또 한 가지 문제는 에리뉼이 슬리퍼를 기억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건 아닐 거야. 내가 아까부터 생각해 봤는데, 신이 분열을 하면서 기억도 둘로 나뉜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소환한 신이 기억하는 부분은 에리뉼이 전혀 모른다고 봐야 해.”

슬리퍼의 존재를 가르쳐 준 것도 신이고, 그는 자신이 남긴 섀도우 플레인의 빛의 구체도 알고 있다.

내 가설이 맞는다면 에리뉼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맞아, 분열했다면 기억의 공유는 없는 게 당연하지. 넌 분열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잘 아는구나.”

“잉, 포트라 너는 분열 해 본 것처럼 이야기 한다?”

“대정령은 원래 하나였지. 그러다가 물질계가 생성되면서 넷으로 나뉜 거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다른 태초의 기억과 비밀을 가지고 있고, 이후에 같이 경험한 것들만 지식을 공유한다.”

“아하! 그런 거였군.”

포트라가 입증을 해 주었으니 틀림없겠지.

에리뉼은 빛의 구체도, 슬리퍼도 모른다.

최악의 사태는 어느 정도 막은 셈이다.

“그럼 이제는 내가 살아날 궁리만 하면 되는군.”

내가 당해도 200년 후에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물론 환생의 의식을 미리 실행해 놓기는 할 것이다. 밑져야, 아니 죽어도 본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죽기는 싫다. 내가 왜 일 다 해놓고 에리뉼같은 놈한테 당해 죽어야 하는가?

“포트라, 그놈의 힘이 어느 정도일까? 정말 한계가 없는 무한자의 힘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가늠이 잘 안 되거든.”

“그냥 그놈이 너 죽어 그러면 넌 죽을 걸? 언령에 의한 죽음을 막는 데만 상당한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쩝, 그래도 막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당연하지. 넌 9서클 마법사니까. 문제는 그놈은 그 정도 능력을 마구 쓸 수 있고, 넌 한번 한번을 사력을 다 해서 막아야 한다는 거지. 이건 내가 도와줄 수가 없는 거야.”

“매정한 놈, 네 불멸성에 손상이 갈 가능성이 있어서 못 도와주는 거지?”

“얘야, 내가 어떻게 되면 물질계는 난리가 난다. 마족이 해를 끼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대자연재해가 일어난다고.”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서 싸워야 한다고 치고. 일단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안 되겠네. 나 혼자 살아남기도 바쁘니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 지켜줄 여력이 없겠어.”

“아마 그럴 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견적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기존의 고위마족이 마나파동포를 한 번 쏘고 헥헥 대는 나였다면, 에리뉼은 지금의 나처럼 마나파동포를 수십 방이라도 연속으로 쏠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기적을 남발할 수 있는 자와의 싸움이라.

이건 정말 이반 경이 신이 되어서 나타나기 전에는 답이 안 나오잖아.

아, 유한자의 설움이여!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연속해서 몇 번 숨을 몰아쉬니 그나마 답답한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그놈이 신은 아니니 뭔가 해결방안이 있을 거야.”

문제는 해결방안이 뭔지 지금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고, 의식은 얼마 후에 시작할 거고, 그 뒤에 물질계에 남은 마족들은 나와 그놈이 하나씩 처리를 해 나가서 최종적으로는 둘이 맞붙어야 한다는 거다.

사건의 종결을 위한 시간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고 점점 빠르게 흘러간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타임 리미트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죽어도 본전이다.

죽기 싫은 것이지, 죽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젠장, 죽어보자고!”

나는 결심을 굳히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막상 죽으려고 하니 삶에 대한 욕망이 불길처럼 치솟아 오른다.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에리뉼, 내 꼭 너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말 거다.

네가 소멸하나 내가 죽나 한 번 해 보자.

다시 한 번 독하게 마음을 먹으니 이제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 의식 속에서 나를 지켜보던 포트라는 낄낄 대고 웃으며 그게 성공하면 난 최초로 불멸자를 소멸시킨 유한자가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분위기를 전환해서 새로운 고위마족을 소환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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