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34화
*
발데스는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남긴 육체를 녹여 엄청난 힘을 축척할 수 있었다.
이제 고위마족 하나만 더 잡으면 의식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 정도의 힘이 필요한데, 이건 준비만 제대로 하면 발데스처럼 굳이 내기를 하지 않고 그냥 때려잡으면서도 모을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금 복잡해졌다.
나는 포트라의 의식을 소환해서 상의를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신이 이미 돌아왔다는 거군.”
“발데스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내가 느끼는 물질계는 여전히 신이 없는 공간이고 불안정한 상태다.”
“발데스는 에리뉼을 고위마족으로 인식했다더군. 이 세계에서 만났을 때에도 그렇게 느꼈다고 했거든. 단지 힘이 엄청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고.”
“물질계에서도 고위마족으로 인식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그럼 발데스가 오해한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런 고위영격체는 짐작이 곧 예언과도 같지. 증거가 없을 뿐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 에리뉼이 신이라고 치고, 그자가 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고위영격체들인 마족들을 모야 경기를 시작했을까? 자신은 참가도 안 하고 말이야.”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방법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군.”
“결국 슬리퍼한테 묻는 수밖에 없나?”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너는 관계없겠지만 네가 그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이 세계의 수명이 최하 백년은 줄어들 거다.”
“쩝, 그럼 누구에게 알아볼 수 있지?”
대정령도 모른다고 하고, 슬리퍼는 접촉하면 안 되고, 다른 고위마족들은 더더욱 모를 거다.
“가만, 그런데 말이야. 저번에 신을 소환했을 때에는 전혀 그런 사악한 느낌이 안 났거든. 그자는 정말 물질계를 포기했지만 나름 걱정은 해 주는 듯 했다고.”
“그렇군. 넌 이미 신을 소환했었지.”
“응, 그자가 고위마족이라는 느낌은 안 받았단 말이야. 마법진의 특성 상 신이 아니고 고위마족이라면 내가 바로 알았을 거라고.”
신을 소환하려 하는데, 가짜 신이 나타나서 분탕질을 치면 소환자는 망해도 보통 망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존재를 소환할 때에는 진가를 구분하는 장치가 아주 강력하게 되어있고, 속성 자체도 속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상하군. 렌 너의 말대로라면 발데스의 추측이 틀렸다는 건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에잇, 궁리해 봐야 소용없다면 또 다시 신을 소환해 보면 되잖아.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나도 옆에서 구경을 하도록 하지. 의식만이라도 같이 있으면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은 할 수 있을 테니.”
“좋았어. 그럼 당장 준비를 하자.”
나는 두 번째로 신을 소환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혹시 신이 정말 음모를 꾸민 존재이고, 현재 물질계의 신이 아닌 고위마족화 되어 있다면 싸울 준비도 해야 했다.
드래곤로드인 그레진저처럼 이계로 가서 물질계에서 쌓은 파워를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힘으로 불멸자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경우 다시 신이 되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밀 수도 있다고 본다.
자, 신이여.
내 앞에 나타나서 진상을 알려다오. 그대는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나는 최소한 신이 방관자이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마법진을 구축했다.
*
며칠 후, 드디어 마법진이 완성되고, 우리는 소환과 전투의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그 사이 크리드 경은 발데스와의 일전에서 얻은 게 있는지 계속 명상을 했었는데, 마지막 날에 나한테 와서 말했다.
“렌 경, 그대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마족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려는 것은 틀림없다고 믿는다. 나는 그대가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같이 싸울 것을 약속하겠네.”
아차, 크리드 경도 내가 보통 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구나. 하긴, 그동안 같이 싸우면서 본 게 있는데 내가 발휘하는 파워가 십년 정도의 수련으로는 어떻게 해도 낼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은 깨달았겠지.
아무래도 크리드 경은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나의 의도와 본성을 보고 그냥 믿기로 한 모양이다.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말 못할 사정이 있어요.”
“그렇게 하게.”
환생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특히 유한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몰라야 한다.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이가 들고 기력이 약해지면 결국 불노불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환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은 어떤 수단을 쓰던 자신들도 환생을 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환생을 할 수 있는 것은 9서클 마법사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자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극히 위험하고 성공확률도 적은 수법이 개발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자들의 희생이 뒤따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크리드 경에게는 나중에 적당히 말을 해줘야겠다. 물론 다른 자에게 전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필요하고, 본인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 한다.
내가 본 크리드 경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전생을 하려 하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모르는 것이다.
“그럼 이제 소환을 시작할게요.”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현재 해야 할 일에 대해 집중하기로 했다.
신을 소환하고, 이번에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집중을 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섀도우 플레인으로부터 이반 경이 흡수하고 있는 빛의 구체의 힘 중 일부를 빼서 신에 대한 매개체로 쓴다.
생각해보니 빛의 구체는 신이 남기고 간 힘인데, 이게 이렇게 순수한데 과연 신이 음모를 꾸몄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불멸자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직접 소환해보면 알겠지.
불멸자들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언령의 힘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기억의 소실이 없는 존재들이라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또한 영원히 기억을 해야 되는 거다.
한 마리도 거짓말의 신이 아니면 진실만을 이야기 하게끔 되어 있다.
콰르르르릉
대전 전체가 꽤 심각하게 흔들린다. 이것, 예전에 소환할 때랑은 다른데? 정말 문제가 있는 건가?
나는 마법진이 작동하는 방식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과부하가 걸리긴 걸렸는데,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곧 마법진은 안정되었고, 슈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뿌연 영혼과도 같은 그림자가 허공에 나타났다.
신의 사념체다. 예전에 소환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고, 마족의 낌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잊혀진 존재인 나를 부르는 자여. 그대는 왜 또 나를 소환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그대는 고위마족이 되어 이곳 물질계에 들어왔는가?”
“나는 물질계에 있지 않다. 그리고 떠나온 후 한 번도 물질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대는 왜 그것을 묻는가?”
휴, 일단 아니라네. 다행이긴 한데 그럼 발데스의 말은 뭐지?
“한 고위마족이 말했다. 에리뉼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대인 것 같다고.”
“에리뉼, 그건 내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
뭔 소리야!
“그 이름은 내 기억 속에 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기억인데,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포트라,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모르면 대정령한테 물어봐야지. 무슨 수수께끼 풀자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말해준 것을 지례짐작 했다가 오해한 거면 그때는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짐작이 가는 상황은 있다. 일단 조금 더 질문을 해 봐라.”
쩝, 무한자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유한자만의 것이지. 포트라는 옆에서 들으면서 정보를 분석하고 있을 뿐, 자신이 질문을 할 수는 없다.
“그대는 마치 그대가 둘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혹시 그대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가?”
“나는 단수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분열했는지는 장담을 할 수 없다.”
“아하! 분열을 했을 수 있다는 거군.”
이제 나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물질계를 완전히 버리고 떠도는 신이 있고, 물질계에 미련을 가지고 돌아온 신이 있는 거다. 원래는 하나였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나보네.
“이미 분열을 해서 남이 되었다면 에리뉼이 꾸미는 음모는 알 수 없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대는 그 음모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거군?”
“그건 모르겠다. 분열이 되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른 개체인 것처럼 완벽한 둘이 되지는 않을 거다. 내가 모르는 부분에서 또 하나의 나와 연결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쩝, 뭐가 이리 어려워.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소환한 신은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물질계를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지금 물질계는 주인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고위마족들이 소유권을 놓고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 게임을 벌인 주최자가 에리뉼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리뉼은 게임에 참가도 안 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대는 아는가?”
“그건…….”
신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대답해 줄지 말지 갈등을 하는 눈치다.
혹시 이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나? 이 신이 에리뉼의 의도를 짐작하고, 그것에 동의를 하면 일이 골치아파질 수가 있다.
분열된 존재가 다시 합쳐지거나 서로 힘을 합하면 물질계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누가 뭐래도 이자들은 이 세계의 원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