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32화
퍽, 퍽, 퍽
허공에서 크리드 경과 발데스가 교차될 때마다 발데스의 몸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후두두둑
“우왓! 산성 체액이 비처럼 쏟아지네.”
허공에서 싸우면 땅에 있는 사람은 곤란한 거구나. 나는 얼른 방어막을 머리 위에 쳐서 쏟아지는 산성액을 막았다. 그러나 산성액에서는 그놈의 구더기가 생겨난다.
“뿌우야, 어서 이것들 좀 치워봐.”
“대전 전체에 뿌려진 거는 빨리 못 치운당. 아니면 아예 사람들까지 날아가 버린당.”
“아, 그렇지.”
결국 우리도 모두 나는 게 속이 편하겠군.
“마리야, 렉스의 발에 벽타기 능력을 걸어.”
“예.”
렉스는 하늘을 날지 못하니 거미처럼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미리아의 허리를 잡고 플라이 마법을 써서 천정에 붙었다.
미리아는 덩굴 중 일부를 늘어뜨려서 의자와도 같은 형태로 만든 후 그곳에 앉았다.
“이쪽이 유리한 거 같은데 결판은 안 나네.”
미리아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 역시 그동안 많은 전투를 치러왔기 때문에 이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멸자들은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위험한 존재다. 이쪽은 내가 마나파동포까지 쓴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9서클 마법 이외에는 별다른 숨겨진 카드가 없다. 하지만 발데스가 아직까지 발악을 안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다.
그게 무엇일까?
소환에 특화된 파리의 왕. 체액은 강력한 산이고, 유한자였을 당시에는 검사였다고 한다.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육체를 포기하고 곤충이 된 자.
그런 자가 불리한 상황에서 믿는 힘이라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물질계이니 고위마족이 쓸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다. 지금 크리드 경이 발하는 날개의 파워를 보면 발데스는 저 저주로 인해 힘의 대부분을 쓴 것과 같다.
그것을 역으로 당한 상황이니 이대로라면 발데스는 약화되어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뭘까?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정말 한계돌파다. 발데스가 광전사가 아닌 한 자신의 본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힘을 몰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신체를 만들어 새롭게 물질계로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다.
“아! 혹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놈은 다른 마족과 연락을 하며 정보를 공유한다고 했다.
“크리드 경, 잠시 물러서세요.”
나는 일단 싸움을 중지시켰다.
크리드 경은 두 말 없이 물러났다.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발데스는 갑자기 싸움이 멈추자 파란 눈빛을 발하며 나를 보았다.
“뭐지? 여기서 싸움을 멈출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나도 이대로 끝을 내고 싶은데 말이야.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거든. 너 다른 마족 소환할 거냐?”
“크크크, 어떻게 알았지? 나 혼자의 힘으로 승산이 없어지면 크툴로스를 소환하려 했지. 그놈도 이미 너에게 계약자를 잃어서 화가 난 상태란 말이지. 그리고 솔직히 네놈이 다른 고위마족과 싸워 이긴 것을 아는데, 나라고 해서 필승을 다짐할 수는 없잖아? 나의 세계라면 몰라도 이곳이라면 아무래도 이계의 존재인 나보다 네놈 쪽에 유리한 부분도 있고 말이야.”
역시, 생각해보면 발데스는 이미 물질계를 놓고 하는 게임에서 탈락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만큼 이놈이 나와 열심히 싸우는 이유는 강제소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분풀이의 성격이 강하다.
파즈스의 경우 다른 자들까지 모두 탈락시키라고 오히려 나를 도왔지만 발데스의 성격은 그게 아닌 것 같다.
크툴로스는 누군지 몰라도 내가 죽인 계약자와 관계된 마족인가 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더 이상 발데스를 궁지에 몰면 연이어 또 다른 고위마족과 싸워야 한다. 고위마족 둘과 싸우는 것은 이미 각오한 바 있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특히 지금은 단순히 마족을 퇴치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들의 힘을 남겨서 의식의 파워-소스로 써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데스에게 말했다.
“발데스, 넌 과거 검사였다고 했지?”
“그렇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네가 명예를 아는 검사였다면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크리드 경과 결판을 내는 게 어때? 아까 보니 둘의 실력이 비슷한 거 같았는데 말이야.”
“크크크,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 육체가 필요해. 그러니까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 강대한 힘이 필요한 거지.”
“호오, 뭔가 꿍꿍이가 있었군.”
“응, 이번 계획이 완성되면 모든 마족은 너희들이 만든 경기에서 탈락하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 네가 싸우면 넌 계약자뿐 아니라 현생체까지 잃는 거라서 완벽한 패배가 확정되잖아? 그러니까 일단 네 현생체를 나에게 주고 과거의 모습만으로 크리드 경과 결판을 내라고.”
“크하하핫, 그걸 나에게 믿으라는 거냐? 네놈의 말대로 모두 경기에 탈락하게 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비굴하게 내 육체를 제공하여 다른 마족들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를 하다니,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다.”
“알아. 그러니까 승부를 보자는 거잖아. 만약 네가 크리드 경을 이기고 내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다른 마족들 중 경기를 계속할 수 있는 자가 남아있다면, 그땐 내가 발데스 너의 계약자가 되어줄게.”
“호오, 그건 구미가 조금 당기는군.”
“미리 얘기하지만 난 나의 계획이 성공할 거라 믿고 있어. 그러니까 크리드 경이 져도 내 계획대로라면 모든 마족이 경기에서 탈락할 거고, 난 너와 계약하지 않아도 돼.”
“크크크, 도발하지 마라. 안 그래도 네놈의 제안은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좋다. 받아들이지. 난 유한자인 네놈이 무슨 수를 써도 이 경기를 완전히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시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나도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가끔 생각하거든.
수도 없이 계속 들어오는 고위마족들을 모두 탈락시키겠다니.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건 고위마족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자라고 봐야한다.
“이 내기의 유효기간은 10년이다. 그 안에 모든 마족이 경기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면 넌 나와 계약을 해야 한다.”
“10년이면 적당하군. 단, 네가 이 정보를 다른 고위마족에게 흘리지 말아야 해.”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 좋다.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되었다.
발데스는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곧 그의 육체가 파리 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대전 한 구석에서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던 구더기들도 모두 그쪽으로 몰려 들어갔다.
원래 발데스가 있던 자리에는 키가 작고 뚱뚱한 인간 형태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둔해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짧지만 팔은 길고, 전신이 근육질이라 힘도 대단할 것 같았다.
인간형으로 변신한 발데스는 양손에 세 갈레의 날이 있는 창인지 검인지 구분이 안 가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가시가 돋아난 파리 다리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내 육체에 담긴 힘은 고스란히 저곳에 있다. 저자가 나를 검으로 이기면 마음대로 써라.”
“나 크리드, 발데스 경과 정정당당히 검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지.”
크리드 경도 바닥에 착지해서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크리드 경은 검의 폼멜에 박혀 있는 엘레멘탈 마정석을 뽑아 나에게 던져주었다.
마정석의 힘도 쓰지 않고 스스로 가진 힘만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의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 남은 것은 크리드 경이 이기기만을 기다릴 뿐.
만약에 크리드 경이 지면?
일단 발데스는 돌려보내고 다른 마족을 잡아 의식을 행하면 된다.
결계를 치고, 10년 안에 물질계에 남은 모든 마족들을 처리하는 것으로 나는 발데스와의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의식이 실패하면 어차피 마족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계속되니 그냥 발데스와 계약을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때에는 나 스스로를 가두고 버틸 거다.
어차피 200년 후면 이반 경이 새로운 신이 되어 물질계를 관리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숨어살면 발데스는 추방당할 것이고, 그때는 나의 영혼도 무사하게 된다.
“아, 맞다. 엘시아의 영혼도 내 놔라.”
“크크크, 그녀의 영혼은 이미 나의 것이다. 필요하면 대가를 지불해라.”
“대가까지 지불하면서까지 되찾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의 영혼까지 내기에 거는 걸로 하지. 대신 난 이것을 걸겠다.”
나는 삭풍의 창을 꺼내들었다.
“흐, 그것은 영혼으로 만들어진 무기로군. 내가 엘시아의 영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좋다. 영혼과 영혼의 무기라면 서로 대등하다 할 수 있지.”
내기를 할 때는 모든 것을 걸고 화끈하게.
나는 크리드 경을 보며 말했다.
“파리에게 세상이 지배당하는 것을 보기 싫으면 꼭 이겨주세요. 크리드 경.”
“이 봐, 내기는 자네가 하고 왜 싸우는 건 내가 싸워야 하는 거지?”
크리드 경은 혀를 한 번 차고는 몸을 돌려 발데스쪽을 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전신에서 필승의 투지가 오러처럼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크리드 경이 지면 나는 200년간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엘시아가 했던 것처럼 육체에 석화마법을 걸고 노화를 최대한 막으면서 안 죽는 게 중요하다. 죽으면 자동적으로 내 영혼이 발데스에게 들어가 버리니까 말이야.
어쩌다 보니 이자 하나를 처리하는데 꽤 애를 먹게 되었지만 그래도 좋은 것 하나는 알았다. 발데스가 소환에 대해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한 것처럼 다른 고위마족들도 내가 그들을 소환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되면 서로가 서로를 소환할 수도 있는 것을 알았다. 이건 정말 조심해서 대비책을 마련해야겠다.
강력한 소환금지 마법을 준비하던가, 아니면 소환되는 순간 함정에 빠지도록 따로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좋아요. 그럼 시작해요.”
나는 둘의 대결을 선언하고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내 운명이 걸리지 않은 싸움이라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이 없을 텐데, 현 물질계 최강의 기사와 이계에서 불멸자의 위치까지 오른 검사의 대결이라니!
내가 기대에 찬 눈으로 구경을 하는 것처럼 미리아를 비롯해 다른 일행들도 숨죽이고 둘의 대치상황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