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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29화 (229/250)

로엔의 마나뱅크 229화

2장 파리의 왕

“제일 먼저 소환할 놈이 누구야?”

미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신전 내부에 엄청난 양의 덩굴을 키워놓았고, 요소요소에 바닥을 깨고 큰 나무들도 심어서 뿌리를 내리게 했다.

섬이라서 엘프의 숲의 힘을 직접적으로 끌어다 쓸 수는 없지만 이 정도까지 식물이 자라면 방어적인 측면에서는 꽤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신전의 힘을 끌어다 쓰는 매개체로 덩굴을 쓰기 때문에 미리아의 신성력이 몇 배나 강화되었다.

서피 역시 신전의 힘을 빨아먹고 예전의 크기와 힘을 되찾았다. 어지간한 고위마족이라면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울만한 힘이다.

이렇게 되자 렉스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느낌인데, 나는 렉스에게 9서클 강화마법을 3중으로 걸어주었다. 유지하는 마나는 렉스의 목띠가 있으니 충분히 감당이 된다.

렉스는 마법을 튕겨내고 물리적인 타격을 거의 받지 않으며, 파괴와 죽음의 마법으로부터 보호된다. 원래 정신마법에는 거의 면역이었으니 이정도면 불사의 괴수라 할 만 하다.

마리포즈는 직접 싸우지 않고 렉스의 등에 올라타서 그의 힘을 조절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크리드 경은 며칠 동안 명상을 계속해서 정신을 아주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물을 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니 그의 힘은 나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나는 일행들의 전력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미리아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꼭 잡아서 족쳐야겠다고 생각한 놈이 있어. 발데스라고. 다른 놈은 몰라도 그놈만큼은 무조건 소환해서 싸우려 했거든.”

“나쁜 놈인가 보다. 렌이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하다니.”

“나쁜 놈이지.”

로엔을 죽인 놈이니까. 그놈이 남긴 단검은 지금 내 품속에 있다. 그리고 그동안 발데스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충분히 해 놓았다.

내 옛 제자인 엘시아가 언젠가 발데스와의 계약을 깨기 위해 해 놓았던 연구자료가 꽤 많이 남아있었기에 그자의 속성과 모습, 그리고 대략적인 능력까지도 알아냈다. 그런 만큼 개인적인 감정을 빼도 첫 싸움 상대로는 제격인 셈이다.

나는 소환진 안에 그 단검을 올려놓고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악의 근원, 파리의 왕 발데스여. 나오라.”

우우우우우웅

마법진이 빛나며 크기 3미터 정도의 거대한 파리가 나타났다. 다리에 난 가시 하나하나가 웬만한 단검 크기이고, 검은 색으로 번뜩이며 빛났다. 녹색의 커다란 눈은 수백 개의 작은 눈알이 뭉쳐있는 듯한 모습인데, 각각의 눈알이 제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계속 움직였다.

“크크크, 나의 다리털로 소환을 하다니. 넌 틀림없이 렌이겠군.”

“어떻게 내가 렌인줄 알지?”

“배신자 엘시아가 결국 마나뱅크를 손에 넣지 못하고 죽은 뒤 그녀의 영혼은 나의 것이 되었지. 계약자가 배신을 한데다가 결국 세상을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패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 다리털이 남아있었기에 물질계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회수하려 했지.”

“그러다가 나의 소문을 듣게 된 거군.”

“데빌 베인의 렌이라는 자가 단검을 가져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자는 계약자를 찾아 죽일 뿐만 아니라 마족을 소환해서 소멸시키기도 했다고 하더군.”

이런, 문제네.

내가 발데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놈도 나에 대해 알만큼 아는 모양이다. 내가 자신을 소환해서 싸울 거라는 것을 예측했다면 당연히 대비책을 세워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싸움을 걸지, 아니면 적당히 타협을 해서 돌려보낼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떻게 할 거냐? 나와 싸울 거면 빨리 싸우고, 아니면 단검을 내 놔라. 그러면 나는 이 세계를 떠나겠다.”

발데스는 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재촉을 했다.

나는 소환의 매개체로 쓴 발데스 스팅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싸우기 위해 부른 게 맞아. 네가 준비를 했든 안 했든 소환의 목적을 바꿀 수는 없지.”

“크흐흐흐흐, 그럼 좋다. 싸우자.”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소환자와 싸울 준비를 하고 나온 고위마족이라, 이놈이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감추어 놓았을까?

하지만 상관없다. 적어도 발데스는 내가 9서클 대마법사가 된 것을 모른다. 마나뱅크의 모든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싸우기 전에 소환자로써 질문 하나 하자.”

“싸울 대상에게 지식을 전해줄 것 같으냐?”

“그게 네가 소환자인 나를 아무 제약 없이 죽일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하자고. 어때?”

“좋다. 그것도 나쁘진 않군.”

“고위마족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나? 모두가 공유하지는 않는 것은 알아. 하지만 친분이 있는 고위마족들이 있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다른 고위마족에게 정보를 주거나 받는 일이 있냐는 거지.”

“있다. 나는 특히 몇몇 고위마족에게 정보를 주고 있지. 그들 중 하나의 계약자가 네놈에 의해 죽었다. 그래서 네놈이 우리를 소환해서 싸운다는 정보도 얻었고.”

“역시 그런 건가? 그렇다면 내 싸움 스타일을 너무 다 보여주면 안 되겠군.”

“감출 여유가 있을까? 이제 질문이 끝났으면 시작하도록 하지.”

우우우웅

파리의 날개가 묘한 소리를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발데스의 권능 중 하나인 초음파 저주다.

물리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저주까지 거는 이중의 공격.

“사일런스 필드!”

소리를 차단해주는 공간이 형성되며 발데스의 초음파를 막았다. 그러나 소리가 멈췄다고 해서 저주의 파동까지 멈추지는 않았다.

“저주흡수!”

슈슈슈슈슉

미리 제작해 놓은 돌로 된 해골이 저주의 파동을 흡수하며 검게 변했다. 저주를 힘의 근원으로 하는 해골은 따닥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해골은 던전 길목에서 흔히 보는 놈이 아니지. 네 저주가 너를 공격하는 격이다.”

쉬익, 캉

해골이 들고 있던 시미터로 발데스의 다리 한쪽을 베어내려 했다. 그러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시미터가 튕겼다.

나름 전투력은 최상급에 해당하는 저주흡수 해골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몸이라니!

아니다. 저 다리가 흉기인 거고 몸뚱이는 그렇게 단단하지는 않을 거다.

“해골, 다리를 피해서 몸통을 노려라.”

“캬오.”

저주흡수해골은 나의 지시에 따라 몸을 날려 발데스의 다리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크리드 경도 저주흡수해골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발데스의 다리는 저주흡수해골을 쳐내려고 움직였고, 그 빈틈을 크리드 경이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푸슉

크리드 경의 검이 발데스의 배를 찔렀다. 그런데 뚫어진 뱃구멍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크리드 경은 본능적으로 몸에 정령의 방어막을 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촤아아아아아아

강력한 산성의 체액이다. 동시에 지독한 냉기도 느껴지는데 저 일대는 땅을 밟으면 안 될 것 같다.

날아서 싸워야 하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발데스가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땅은 얼어붙은 산성체액에 뒤덮일 것이고, 결국 우리는 싸울 공간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공중으로 뜨면 저 발데스란 놈도 같이 날아오를 거란 말이지. 파리와 인간이 허공에서 싸우면 누가 유리한 지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날면 안 된다. 그건 발데스의 능력을 일깨우는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발데스는 저주에 특화된 고위마족이다. 그는 상대의 행동에 따라 자동으로 발동되는 저주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늘을 나는 자에 대한 저주다.

반면에 상대가 하늘을 안 날면 본인도 날지 않는다. 강력한 제약이 걸린 저주인 만큼 발동되었을 때의 힘과 강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알고 있다.

저주흡수해골도 그 저주는 흡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저주가 남한테 걸리는 게 아니라 본인을 강화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발 디딜 땅이 계속 사라지면 결국 하늘로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주문을 시전했다.

“얼음에는 얼음으로, 프로즌 필드.”

촤촤촤촤촤

산성의 얼음조각 위로 두꺼운 마법의 얼음판이 형성되었다. 보통 사람은 그 위에 서 있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를 뿜어내지만 크리드 경은 엘레멘탈 마정석으로 몸을 강화, 보호하고 있는 몸이니 이 정도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좋았어.”

크리드 경도 발데스가 뿜어내는 산성의 얼음조각들이 부담이 되었었는지 내가 프로즌 필드를 깔자 얼른 그 위로 올라갔다.

발데스는 아쉬운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앞 다리 두 개를 무기삼아서 크리드 경과 맹렬하게 육박전을 벌였다.

놀랍게도 발데스는 크리드 경의 검술에 맞서서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내가 유한자였을 때 세상에 나보다 강한 검사는 없었지. 크크크.”

아, 그러셔요? 그런 놈이 왜 파리가 된 거지. 검을 든 갑옷의 전사 모습이 되면 알기 쉽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공격할 기회를 기다렸다.

발데스가 이번 싸움에 대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상 무리한 공격은 금물이다. 그것은 발데스도 마찬가지, 우리는 서로 비장의 카드를 숨긴 채 인내심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리아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미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벽에 붙어 있던 덩굴들이 수십 가닥의 줄기를 뻗어 창처럼 날카롭게 찔렀다.

파파파팍

확실히 덩굴의 힘은 크리드 경의 검격과는 다르게 발데스의 육체를 뚫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발데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었다.

그 틈을 크리드 경은 다시 노렸다.

푹, 촤아아악

다시 검이 발데스의 몸을 꿰뚫고, 그곳에서도 초록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이 정도 상처를 입었는데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는 건가?”

크리드 경은 발데스의 움직임이 전혀 둔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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