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28화
포트라가 작업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은 바로 공간의 합일이다.
아공간을 해체하여 기존의 공간에 더하는데, 이때 서로 다른 성질과 규칙의 공간을 전혀 충격 없이 하나로 융합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걸 보자마자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 연구를 하면 수십 년 후에나 가능해질까?
“좋았어. 결계 이후에 해야 할 연구테마로 삼아야겠군.”
공간을 다른 공간과 융합시키는 기술이라. 성공하면 효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더군다나 융합이 가능하면 분할은 더욱 쉬운 법이니 아공간을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칙을 가진 복수의 공간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해질 것 같다.
마나뱅크를 몇 개로 나누어 관리할 수도 있고, 미스틱 게이트의 투영공간인 미스틱 섀도우와 같은 아공간을 몇 개 더 만들어서 서로 연결하는 생각해 봐야겠다.
“아니지, 효용성과 활용법은 연구가 끝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일단은 저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먼저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타락정령의 공간을 깨끗하게 정화하여 기존의 정령공간에 융합시킨 포트라가 돌아왔다.
“너 말이지. 이거 웬만하면 흉내 내지 마라. 그놈이 깨어날 수 있다.”
“어, 그런가?”
“그러니까 새로운 궁극마법이 개발될 때마다 이 세계의 수명이 5천년은 줄어든다고 보면 돼.”
“쩝, 나는 별로 상관없긴 한데, 알았어. 그냥 이론적으로 연구만 살짝 하고 실험으로 구현화 시키는 것은 포기할게.”
어차피 영겁에 가까운 세계의 수명인데 그거 5천년 정도 줄어들어도 큰 상관없지 않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걸 입 밖에 냈다가는 대정령들에게 칼 맞고 죽을 지도 모르니 참자.
어쨌든 기존의 공간개념을 뛰어넘는 신급 공간관리를 보았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만드는 아공간들이 조금 더 정교해질 것이다.
나는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포트라에게 말했다.
“시험은 끝난 거지? 그럼 알아서 협조해 줄 거라고 믿을게.”
“그래라.”
“그리고 가끔 소환을 할 테니 튕기지 말고 나오라고.”
“내가 이 나이에 소환에 직접 응해야 한다니, 알았다. 하지만 고위마족과 싸울 때는 가능한 한 부르지 마라.”
“야, 고위마족하고 싸울 때 안 부르면 내가 널 소환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거의 없지만 심심할 때 소환해서 같이 아공간 주머니를 제작한다던가 하면 돼지. 하던 사업은 계속 해야 할 거 아니냐.”
“어휴, 도대체 재물을 얼마나 모아야 만족을 할 거냐. 내가 보기에 물질계에서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중 태반은 네 궁전 보물창고에 들어갔을 거 같거든.”
“반이라니! 어림도 없다. 아직 20% 정도에 불과하다. 절반이나 모으면 더 이상은 안 모을 테니 염려마라.”
“절반이상이 되면 안 되는가 보군. 어쨌든 고위마족이 셋 이상 나오면 소환할 테니 그런 줄 알아.”
“거 참, 웬만하면 싸울 때는 부르지 말라니까. 차라리 화염의 대정령을 소환하라고, 그놈은 싸우는 거 좋아하니까.”
“내가 대정령을 둘이나 소환해도 되는 거야? 그게 공간융합마법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거 같은데.”
“아차, 그건 그렇다. 다른 대정령은 소환하지 마라.”
“그럼 싸울 때 불러도 나오라고.”
“꼭 필요하면 나가도록 하지. 어차피 고위마족은 정령계에도 피해를 줬으니 한두 번 정도는 싸워도 될 거다.”
“그럼 됐어. 난 간다.”
“배웅하지는 않겠다. 잘 가라.”
슉
환경이 급격히 바뀌고 나는 어느새 물질계에 있었다.
눈을 뜨니 역시 전신에 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유체이탈 상태로 타락정령과 싸우기 위해 너무 무리를 한 것이다.
“크윽, 이제 이걸로 끝이다. 당분간은 절대로 유체이탈 안 해야지.”
나는 이를 악 물고 고통을 참았다. 내가 몸을 덜덜 떨자 미리아가 얼른 치유를 해 주었지만 고통만큼은 줄일 수가 없었다.
약 한 시간 정도 지나니 겨우 몸이 안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고통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보니 정말 영혼과 육체의 연결에 문제가 조금 생긴 것 같다.
미리아도 겨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령계가 무섭긴 무섭나 보다. 섀도우 플레인에 갔을 때보다 네 영혼이 더 힘들어 보였어.”
“그냥 정령계에 갔다 오는 거면 큰 문제가 없는데, 타락정령이라는 놈하고 싸우느라 오염이 조금 됐을 거야.”
의지력으로 오염을 막긴 막았는데, 그래도 완벽하지는 못했나보다.
“어쨌든 이걸로 의식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니 가능한 한 빨리 실행을 하자고.”
“응, 엘프의 숲의 힘도 조금은 끌어올 수 있을 거야. 장로도 협조하기로 했으니까.”
“오호, 잘 됐네. 인간의 의지력을 안정화 시키는 부분이 조금 부족했는데 숲의 힘이 안정화에는 최고지.”
“그럼 그쪽으로 보조를 할게.”
미리아는 그 동안 나의 의식을 도우면서 마법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섀도우 플레인에 진입할 때부터 계속 숲의 힘을 이용해서 나를 도왔기 때문에 힘의 조율에 대해서는 마리포즈에 거의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얘가 마녀나 성녀가 아닌 그냥 정식 마법사가 되었어도 대성할 재목이었다는 거지. 대단하다. 미리아. 내 첫 제자다워.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고위마족 세 명분의 에너지를 모으는 것인가? 정령계에서도 싸우고, 물질계에 돌아와서도 싸우고, 정말 난 전투를 하려고 환생한 게 아니란 말이지. 쩝.”
불만이 많지만 그래도 이제 끝이 보인다.
지금 드래곤의 신전에 모아 둔 에너지는 고위마족 한 명 분이다. 원래는 삭풍의 창을 분해해서 반 명 분의 힘을 더할 수 있다고 계산했었는데, 아무래도 삭풍의 창은 당분간 들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계를 친 이후 이 세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 고위마족의 현생체들이 모두 나를 노리고 덤벼들 게 거의 확실해진 이상 무기를 없앨 수는 없다.
“두 명을 소환해야 하는 거네. 차례차례 소환해서 하나씩 제거해야지.”
사실 두 명이 아니라 소환할 수 있는 놈들은 모두 해야 한다. 일단 결계가 쳐지면 소환을 안 해도 떼로 뭉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나라도 수를 줄여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분의 에너지로 결계에 비상용 구멍을 뚫어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한 놈도 안 놓치고 싹 다 잡아버리고 싶지만 너무 많이 오면 한 명 정도는 비상용 구멍으로 방출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야 말로 우리 쪽 전력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나는 크로드 경에게 단단히 준비를 하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의 검에 강화된 엘레멘탈 마정석을 끼웠다.
“이게 있으면 크로드 경에게 빙의하는 물의 정령이 엄청 강해질 거예요. 또 웬만한 원소계열 공격은 다 무시할 수 있으니 유사시에 도움이 될 겁니다.”
“물의 정령이 강해진다면 내 힘도 강해지겠군.”
“이 마정석의 힘이 너무 강해서 오랫동안 쓸 수는 없어요. 오히려 몸이 상할 수 있으니 이번 전투에만 쓰세요.”
“큿, 일회용이었군.”
“그건 아니고, 나중에 크리드 경이 더 강해지면 아예 검에 제대로 박아 넣어 드리죠. 마나뱅크에 부지런히 마나를 저장하시고, 그걸로 꾸준히 육체를 강화하세요.”
“그건 말 안 해도 최대한 열심히 하고 있네. 급하게 서두르면 안 되는 일이니 시간이 해결해 주겠군.”
“맞아요. 엘레멘탈 마정석의 기운을 견뎌낼 수 있는 육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천천히 하세요.”
솔직히 엘레멘탈 마정석은 내가 계속 쓰고 싶다.
그런데 냉정하게 전력분석을 해 보니 지금은 크리드 경을 강화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위마족을 상대로 근접전이라는 미친 짓이 가능한 유일한 기사가 바로 크리드 경이다. 그가 있기에 다른 사람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빨리 준비를 끝내고 3일 안에 떠나도록 하죠. 고위마족의 현생체가 위험하기는 해도 드래곤의 신전에서 미리 대비를 해 놓고 싸우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예요.”
“후훗, 렌 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거의 틀림없겠지. 그 사이 나는 엘레멘탈 마정석으로 내 몸이 얼마나 강화되는 지 시험을 해봐야겠군. 적응도 필요하니.”
“너무 자주 실험하지는 마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몸이 견디지 못하고 상하면 오히려 문제가 되니까요.”
“한두 번이면 돼. 사실 적의 힘도 가늠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고위마족이라는 놈들이 워낙 이상한 능력이 많아서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전력비교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예, 그 부분은 임기응변이 많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들이 가지는 파워에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대응을 못할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크리드 경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내가 9서클이 된 이상 고위마족과 일대 일로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나 혼자 싸울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나중이 문제다.
나 혼자 고위마족 두 명은 아무래도 힘이 들고, 정말 셋이 같이 튀어나오면 위험한 것이다.
하물며 그 이상이 나오면 도망가야 한다. 물론 미리 뚫어놓은 비상구로 잽싸게 한 명을 추방하고 싸우는 것이니 셋을 상대할 준비를 하면 넷까지는 어떻게든 된다.
과연 크리드 경이 고위마족 한 명을 맡아줄 수 있을까?
적어도 다른 둘을 처리할 때까지 만이라도 버텨줄 수 있다면 성공이다.
나머지는 포트라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소환에 응해주냐 하는 것이고, 그놈이 제때 튀어나와준다면 고위마족 하나는 맡아줄 거다.
하지만 대정령은 쉽게 나오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만의 규칙이 있어서 그게 다 맞아 떨어져야 소환에 응해준다.
왜냐하면 대정령도 물질계에 나오는 순간 힘의 한계가 생기고, 자칫 잘못해서 돌아가는 게 늦어지기라도 하면 정령계 전체에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뭐, 이번에는 마족에 의해 정령계도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소환에 응해준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작 전투상황이 되어서 딴 소리를 안 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때의 대비도 해야 한다.
“아무튼 꼭 필요할 때에는 안 나올 확률이 높다는 거지. 필요 없을 때에는 안 불러도 나와서 같이 사업하자고 하는 주제에 말이야.”
애초에 포트라 말고 다른 대정령과 계약을 할 걸 그랬나?
아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래도 그놈하고 같이 싸우는 게 나한테는 상성이 제일 좋다. 어떤 능력을 쓸 수 있는지도 대충 아니까.
나는 섬으로 떠나는 배에 탄 후 침실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면서 고위마족과의 싸움을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계속 상상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싸웠을 무렵, 우리는 드디어 드래곤의 신전이 있는 섬에 도착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