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226화 (226/250)

로엔의 마나뱅크 226화

10권 세계의 수호자

1장 시험의 대가

얼음의 구체 내면에 마법진이 새겨지자 구체는 더욱 차가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벽에 닿은 액체 부분이 달라붙어 얼음이 더욱 두꺼워졌다.

“이것으로 얼음 덩어리가 10배는 커지겠지.”

사실 타락정령의 의식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육체를 버리고 영혼까지 바꿔가면서 이렇게 변한 놈을 얕볼 생각은 없다.

저쪽도 필사적이니 무엇인가 손을 쓸 것이고, 그게 무엇인지는 내가 예상할 수 없기에 더욱 위험하다.

가능한 한 빨리 이 상황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적이 대응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를 해야 계속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얼음이 두꺼워지자 나는 벽의 한쪽을 팠다. 마법진을 새길 때 일부러 남겨놓은 빈 공간이다.

사각사각

여름에 먹으면 좋을 것 같은 하얀 얼음가루가 소복하게 쌓였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별로 더러워보이지도 않지만 이건 일급 오염체다. 먹으면 죽는다. 지금 같은 영혼상태라면 영혼이 오염되어 버린다.

나는 얼음가루를 뭉쳐서 나와 비슷한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잘 다진 후 표면을 살짝 녹여서 얼음동상처럼 만들었다.

“위장!”

위장마법은 1서클에 불과하지만 눈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얼음 덩어리 외부에서 봤을 때 이상한 점을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나는 가짜 상을 만들기 위해 뚫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얼음 덩어리는 수십 미터 수준의 크기로 커져 있었기 때문에 옆쪽에 또 하나의 작은 공간을 만들기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웃차.”

얼음이 갈라졌다. 원래의 덩어리는 계속 냉기를 뿜어 내가 떨어져 나온 부분도 점점 복구가 되었다.

나는 새롭게 자리 잡은 얼음덩어리의 내벽에 다시 마법진을 새겼다.

이 짓만 계속 반복해서 해도 타락정령은 골치가 좀 아플 것이다.

뱃속에 얼음덩어리가 계속 생기는 느낌일까? 하지만 이정도로 타락정령이 소멸할 리는 없다.

“논디텍션.”

우우우우우웅

내가 있는 얼음덩어리는 묘한 울림과 함께 액체와 동화되어 존재감이 사라졌다. 타락정령이 의식체를 만들어 내부를 관조해도 저쪽에 있는 가짜 나를 먼저 찾도록 살짝 숨긴 것이다.

이것으로 일단 준비는 끝났다.

타락정령이 무슨 수를 써서 저것을 파괴하는 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너의 비장의 한 수를 보자. 타락정령.”

지금까지 마족의 계약자들과 싸우면서 내가 얻은 지식은 그들이 받는 힘의 한계성과 성격이다.

고위마족 자체가 이 물질계에서 쓸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계약자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고위마족들은 힘을 줄 때 평소에 마음껏 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나 둘 정도 주고, 결정적으로 위험할 때 승부를 보기 위해 쓰는 비장의 한 수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때의 특별한 능력은 일시적으로 그들의 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비장의 한 수는 하나 이상 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걸 여러 개 줄 정도면 이미 물질계는 그 고위마족의 손에 떨어졌어야 정상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러한 힘의 한계를 상정하고 대부분의 전략을 계약자가 가진 비장의 한 수를 보고 그것을 역으로 찔러서 승리하는 방법으로 세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적은 너무나도 크고, 내 궁극의 공격마법인 마나파동포로도 단숨에 소멸시킬 수가 없다. 하지만 단지 덩치가 큰 것만이 이놈의 전부는 아닐 터, 이제 내부에 숨어든 적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 지켜볼 차례다.

슈유유육

다시 의식체가 나타났다. 뒤쪽에서 보니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을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액체가 뭉쳐 사람의 모양을 이루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크크크, 네놈 때문에 내 계획이 10년은 늦춰지는구나. 하지만 덕분에 몇 가지 약점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저주는 하지 않겠다. 그냥 조용히 소멸해라.”

콰콰콰콰

오! 물이 움직인다. 의식체가 손짓을 하자 액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을 해서 거대한 수중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저러면 압력이 장난 아니다. 얼음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마법이 걸린 강철이라도 금새 찌그러질 정도로 수압이 형성될 것이다.

쩌적

“흥, 녹아서 내 몸의 일부가 되어라. 네놈의 힘도 모두 흡수해서 나의 성장요소로 쓰겠다. 네놈이 건 저주 역시 내가 저주와 동화되면 끝나는 문제지. 결국 네놈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하하하하하.”

오호, 저주를 걸었더니 아예 회색을 흑색으로 바꾸어 버리겠다는 거군.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발상이네.

나는 타락정령이 마법사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식으로 발상을 전환하는 자는 마법사 이외에도 있겠지만, 자신의 영혼이 변질되는 것을 무릅쓰고 실행에 옮기는 자는 미친 마법사 말고는 없다고 본다.

이놈은 매드 메이지다.

보통 미친놈은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마법사가 미치면 그건 답이 없다. 호기심과 연구열에 미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집요하게 세상과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린다.

이놈은 지금 세상을 정복하겠다던지, 스스로 신이 되겠다던지 하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냥 영혼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거다.

손익계산이 없이 그냥 일을 벌이고, 그게 주변에 어떤 파장을 주는지 전혀 생각지 않으니 이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

나도 그래서 항상 내 호기심에 한계를 두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자기 금제이고, 서클이 올라갈수록 더욱 강하게 스스로를 규제하도록 해 놓았다.

아마 정상적으로 교육받은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도사가 될 때 자신에게 이런 금제를 걸 것이다. 만약 도를 넘어선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드 메이지가 되면 금제가 발동해 힘의 상당부분을 못 쓰게 되는 방식이 주로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매드 메이지가 종종 나타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마법사들에게 있어 호기심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이 타락정령도 한계를 벗어나 일을 벌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타락정령! 네놈은 스스로의 속성을 물로 바꾸었구나. 나를 소멸시킨 후 시간을 들여 원래대로 혼합속성으로 변하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네놈이 지금 부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하하하하하.”

“앗! 네놈, 거기 있었나?”

“이미 늦었다. 마나파동포!”

내가 발사한 마나파동포가 타락정령의 의식체를 관통했다. 그리고 충격파가 뒤이어 퍼지며 그가 일으킨 거대한 소용돌이를 잠재웠다.

의식체가 힘을 쓰다가 공격당해서 소멸했으니 놈은 꽤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치 자다가 몽둥이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 깬 느낌이겠지.

하지만 그건 그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의 타격이 되지 못한다. 그냥 어느 정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일 터.

“속성을 물로 바꿨으면 이제 다른 속성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 후훗.”

타락정령은 나를 내부에서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물의 정령화 시켰다. 그런데 그의 몸은 4대 정령이 혼합되어 구성된 상태이니, 지금 다른 요소들은 타락정령의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나만 제거하면 외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다시 원래의 혼합속성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심은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몸의 변화를 줄 계획이니 겸사겸사 일을 벌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소멸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의식체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아직도 나를 감싸고 있는 오염된 정령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다른 정령들을 깨울 수 있지? 지금 타락정령은 물의 정령 이외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해. 아마 다들 잠들어 있어서 자신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들을 깨워서 알려줘. 이성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도록.”

“그건 쉬운 일이야. 우리 정령은 원래부터 자유로운 존재니까.”

“거대한 규칙 속에 엄하게 갇혀있지만 적어도 이렇게 다른 정령의 일부분이 되지는 않아.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서로를 돕고, 또 반발할 거야.”

촤아아아아아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정령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는 곧 묘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구그그그그그그그

세상이 붕괴되는 느낌이랄까? 반경 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타락정령의 몸이 원래의 속성에 따라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퍼지는 모양이다. 진동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보니 외벽부분은 이미 붕괴가 시작된 듯하다.

외벽이 갈라지면 내부의 액체부분은 밖으로 터져나갈 수밖에 없다. 타락정령이 오랜 기간 동안 모아서 정제해 놓은 힘이 바로 이 액체부분인데, 이게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 타락정령은 열 받아서 미칠 지도 모르겠다.

촤아아아아아

드디어 외벽이 갈라지고 내부의 액체가 밖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고여 있던 액체가 급격한 흐름을 보이는 게 그 증거다.

내가 있는 얼음 덩어리도 액체의 흐름에 휩쓸려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타락정령의 내부에 들어와 안으로부터 분열작업을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타락정령은 자신이 구성한 몸의 대부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가 변한 수속성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그릇이 없으면 물이 담길 수 없고, 물은 허공을 자유롭게 날 수 없다.

자. 이제 이놈이 얼마나 줄어드는 지 밖에 나가서 느긋하게 보도록 하자. 가능하면 마나파동포로 해결 되는 수준까지 작아졌으면 좋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