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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25화 (225/250)

로엔의 마나뱅크 225화

스으으으

타락정령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아니, 이것은 거리가 멀어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다.

타락정령이 움직이고 있다. 나에게서 반대방향으로 이동했다.

다행이군. 처음부터 이쪽으로 왔으면 시간이 부족할 뻔 했다.

나는 내가 방금 전에 설득했던 정령에게로 이동했다.

“도와줘. 저놈과 싸우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무엇이지? 싸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게.”

“네 속에 내가 들어가고 싶어. 그리고 우리 둘이 저놈에게 흡수되는 거야.”

“그러면 너도 저놈의 일부분이 되는 거야?”

“아니, 나는 저 안에서 싸울 거야. 그러니까 흡수되기 전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

“알았어. 그럼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너를 감싸줄게.”

슈욱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불의 정령이었던 모양인데, 이미 오염되고 거기에 내가 저주를 걸어 검은 색으로 변해버린 육체가 나를 완전히 감쌌다.

이걸로 괜찮을까? 나를 감싼 정령이 완전히 흡수되어 녹아버리기 전에 내가 저놈의 내부에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몇 명 더 붙이자. 저놈이 올 때까지 다른 정령들도 설득을 해서 합치는 거야.”

“나는 상관없다.”

“그래, 그럼 저쪽으로 이동해자고.”

나는 최대한 타락정령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어차피 타락정령은 나를 찾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피해 다녀도 언젠가는 이쪽으로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 그리고 나를 도와줄 정령의 수다.

한참을 바쁘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다보니 다시 이성이 있는 정령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설득을 했고, 다행히도 이번 정령은 이성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금새 협력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시작된 저주와 합체.

다행히도 오염된 정령들은 서로 잘 뭉쳐졌다. 기존의 속성도 모두 무시하고 불과 물이 서로 반발하지 않고 섞였다.

“좋았어. 뭉치면 뭉칠수록 좋겠군.”

이번 정령은 꽤 강력한 존재였던 것 같다. 어쩐지 거의 완벽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더라니. 단숨에 나를 감싼 정령의 층이 몇 배나 두꺼워졌다.

나는 일이 잘 풀리는 느낌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방심을 할 수는 없다.

이론적으로 저 타락정령이 인간의 영혼을 기본으로 해서 변형된 것이라는 데에서 이번 작전이 효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한 작전이다.

적의 몸속에 들어가 내부에서 파괴하는 작업은 마법사라면 가능한 한 피하려 하는 일인 것이다.

만약 타락정령이 된 인간의 영혼이 스스로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상태라면 내외의 구분이 없다. 형태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적에게 포위를 당하러 들어간 셈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인간의 습성과 상식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는 안에 들어온 나를 공격할 방법이 없다.

그럴 경우 단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바로 소화능력이다. 자동적으로 나를 흡수해서 녹이려고 타락정령 덩어리가 움직일 것이고, 그것만 버티면 나는 비교적 안전하게 저놈을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는군.”

드디어 반대쪽의 공간에 대한 탐색을 끝냈는지 타락정령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급격히 커지는 타락정령의 몸체는 어떻게 보면 더러운 진흙이 묻은 풍선처럼 보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냄새가 느껴졌다. 불결함의 냄새다.

영혼이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은 타락정령이 정말 초특급 오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염체도 종류가 있는 법.

내가 안에 침투시킨 저주는 신성력과 흑마법을 혼합한 예술적인 저주이기 때문에 다른 마기를 품은 육체와 영혼까지 파괴할 수 있다.

“그래도 저게 완전히 퍼져서 저놈이 죽으려면 한 달은 걸리겠네. 쩝.”

정령계에서 한달을 머무를 수는 없다. 이곳의 시간흐름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정지되어 있는 게 아닌 이상 가능하면 빨리 물질계로 돌아가야 한다.

유체이탈 상태로 오래 있으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섀도우 플레인을 여행할 때 이미 경험을 한 바 있다.

고오오오오오

타락정령이 다시 괴성을 질렀다.

나는 그 울음소리에 맞추어 타락정령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성이 없이, 본능에 의해 괴성에 이끌려 다가가는 모습으로 보이려 했다.

몇 번 관찰을 했기에 내 연기가 그럴 듯 했는지 타락정령은 나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냥 사방에서 다가오는 자신의 먹잇감 중 하나로만 인식한 듯 했다.

가까이 가니 타락정령의 눈이 보였다.

그 눈은 덩치에 비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크기가 수십 미터나 되었고, 열 개도 넘게 달려 있었다. 사방을 모두 동시에 살필 수 있는 모양이다.

눈으로부터 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연극무대의 조명장치처럼 주변에 빛의 기둥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거에 걸리면 왠지 안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진실의 시야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타락정령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멍하니 끌려 들어가는 연기를 하는 도중이라 급격히 움직일 수는 없었다.

거의 다 접근을 했을 때, 눈빛 중 하나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뭐지? 넌 정령이 아니다!”

지나갔던 눈빛의 기둥이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급하다. 나는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는 얼른 타락정령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슈욱 퍽

“이런, 자동흡수가 아니었나?”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냥 생명체의 가죽에 닿은 것처럼 푹신푹신한 느낌만 들 뿐이다.

“에잇, 마나파동포!”

대정령의 가호로 정령계에서도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열 수가 있다. 그리고 9서클이 된 이후에는 마나가 스스로 밀려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열고 뽑아내면 된다.

타락정령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그래봐야 전체적으로 보면 티도 안 나는 수준이지만 내가 파고들 틈은 생긴 셈이다.

거기에 충격파로 인해 주변도 너덜너덜 해졌다. 예상대로다.

나는 구멍을 헤집고 타락정령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역시 안쪽에서 흡수하는 기능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듯 나를 둘러싼 정령이 서서히 타락정령의 몸에 섞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림없다!”

타락정령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구멍 바깥쪽으로 긴 촉수와도 같은 것들이 파고 들어왔다.

촉수들은 부드러운 듯 했지만 표면에 작은 날이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살을 헤집고 곧바로 나에게로 다가왔다.

“마나파동포!”

촉수들이 모두 소멸했다. 그리고 충격파로 인해 내부가 커다란 공간이 생겨났다.

“예상대로군. 안쪽은 약해. 충격파만으로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야.”

고오오오오오

괴성이 들려왔다. 타락정령에게 어느 정도 충격이 갔나보다.

츠츠츠츠츠

뭔가 이상하다. 더 이상 촉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묘한 진동이 더 안쪽에서 느껴졌다.

“혹시?”

피표면에 내가 파고들자 아예 살을 한 덩어리 떼어내려는 건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떨어져 나가면 망한다. 늦기 전에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마나파동포!”

아까 난 구멍은 금새 다시 메워졌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붙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 공격을 가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생겼다.

“5킬로미터를 파고들면 중심부분이겠지? 몸을 두 쪽으로 가르기 전에는 나를 도려낼 수 없을 걸.”

슈우우욱

나는 최고 속도로 타락정령의 몸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중간에 살이 메워지려 하면 다시 마나파동포를 쐈다.

9서클이 되어서 다행이다. 이걸 몇 방씩이나 연속해서 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칙이나 다름없는 오버파워다.

나는 그냥 9서클이 아니라 마나뱅크를 가진 9서클 대마법사인 것이다. 그것도 모든 마법사가 필사적으로 백여 년을 모은 마나가 가득 찬 마나뱅크다.

이게 있으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섀도우 플레인 전체에 200년간이나 결계를 유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나뱅크에 모인 마나야 말로 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

촤악

“웃!”

나는 급히 멈췄다. 주변 환경이 변해버렸다. 아까는 생명체의 근육사이로 파고든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그냥 물속처럼 느껴진다.

“드디어 내부로 들어왔나.”

나를 감싸고 있는 정령들이 녹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이 물은 일종의 소화액같은 것일까? 타락정령의 내부구조가 생명체와 비슷하게 가죽과 근육, 그리고 내부의 소화액이라는 구분이 지어진 것 자체가 이놈을 구성하는 인간의 영혼이 스스로의 한계를 깨지 못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내장이 아니라 물이라는 것은 점점 내부로부터 완전히 변화를 하려 하는 중이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추측과 관찰만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지금 나는 싸우는 중이다.

“마나파동포!”

충격파가 사방으로 물을 밀어냈다. 순간적이지만 빈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빙결!”

촤아아아악

역시 물이니 얼긴 어는구나. 9서클 빙결마법이 통했다. 원래는 대상을 영원히 얼려서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공격마법이지만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사방의 물을 얼리는 데 썼다.

이렇게 되니 나는 물속에 떠 있는 하나의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얼음덩어리는 안이 비어있고,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안전과 행동의 자유는 확보했다. 내가 이 안에 있는 한 타락정령은 나를 공격할 수단이 없다.

“크크큿, 지금쯤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고 있겠네. 나를 어떻게 제거하고 또 계속해서 퍼지는 저주를 없앨 건지.”

나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때, 내 앞쪽에서 물이 뭉쳐서 하나의 인간 형태를 이루었다.

“네놈이 내 몸속에 들어오다니! 틀림없이 저주도 네놈이 건 것이겠군.”

“오, 내부에서 실체화 할 수 있다니? 그런데 그걸로 끝이지? 따로 능력을 써서 나를 공격하거나 하지는 못하잖아. 그런데 왜 나타난 거냐.”

“타협하자. 그렇지 않으면 내 앞으로 수백 년간 힘을 새로 모으는 한이 있어도 내부를 완전히 동결시켜 너를 가두어 버리겠다.”

“협박을 하다니. 하지만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아까도 느꼈겠지만 내 공격마법은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다 뚫고 나갈 수 있거든. 오히려 내부를 동결시켜주면 더 좋다고, 액체보다는 고체가 부수기 쉽거든.”

마족의 계약자들을 비롯해서 힘과 권력을 소유한 나쁜 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습관이 있다.

상대를 무시하다가 꼭 자신이 불리할 때만 타협하자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야기하면 타협을 하자고 제안할 때에는 타협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대로 밀어붙여서 상대를 궁지로 몰아놓고 발악을 하려하는 순간 마지막 한 수로 끝장을 내면 된다.

“꺼져. 나는 바쁘다고, 네놈이 하도 커서 다 부수려면 며칠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거든.”

나는 실체화 된 마족의 계약자를 무시하고 얼음벽 내부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임기응변, 내부가 액체면 얼려서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내벽에 마법진을 새겨서 얼음덩어리를 마법진의 핵으로 써먹어 줄 테다.

나는 심지어 상대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완벽한 무시다.

타락정령의 의식체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곧 액체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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