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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24화 (224/250)

로엔의 마나뱅크 224화

*

회색의 공간이다. 대정령들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정령계가 편하면서도 불편한 게 거리 감각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냥 감각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이동을 하는 개념이 거리이동이 아니라 일종의 텔레포트가 기본이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환경이 확 바뀌면 사람이 적응하기가 힘들다.

“큿, 오염되었다더니 정말이네.”

사방에서 침습해 들어오는 기운이 찝찝하기 짝이 없다. 섀도우 플레인보다 오히려 더 독한 기운인 것 같다.

나는 곧 의지력으로 외부의 기운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정령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곳이다. 원래 정령계는 크고 작은 정령들이 엄청나게 돌아다닌다. 모든 공간이 왕국의 수도에 있는 중앙광장처럼 붐비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텅 비어있다. 그야말로 고요와 적막만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저놈인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거대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그놈의 주변으로는 다른 회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령들이 조금 있다. 그런데 정령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지 않고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가 거대한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주변의 정령들을 다 잡아먹고 있는 중인가? 그래서 이곳이 텅 비어 있었군.”

대정령들이 저놈을 빨리 처리하고 이 공간을 정화하고 싶어 하는 심정을 이해하겠다.

하급 정령을 잡아먹는 상급정령이라니, 그야말로 식인종을 보는 문명인의 심정일 것이다.

나는 일단 최대한 기척을 숨겼다. 아직까지는 저놈이 나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으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관찰을 할 생각이다.

고오오오오

정령에게 입이 달려있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상상한 모습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타락한 정령은 입을 크게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몇몇 정령들이 나타나 무엇에 홀린 듯이 타락정령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멀쩡한 정령이었다. 아마도 이 경계의 바깥쪽에서부터 온 듯 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점점 변해갔다. 오염되어 타락하는 게 이렇게 빠르다니 놀랍다.

타락정령은 소리를 질러서 배가 고픈지 다시 주변의 정령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저걸 반복하면서 힘을 키우는 거군. 대정령들이 빨리 어떻게 하고 싶어할만 하네.”

이 공간은 심각하다. 대정령이 직접 이걸 정화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도 자칫 잘못 접촉했다가는 오염당할 확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자신의 무한성이 깨어질 확률이 10만분의 1만 되어도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모험을 하는 존재들은 대부분 유한자들이다. 무한자들은 자신의 영원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유한자들을 이용한다.

그래서 식자들은 말한다.

기적을 일으킬 힘은 무한자들에게 있지만,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유한자뿐이라고.

그리고 현재 대정령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유한자는 바로 나, 렌이다.

“좋아. 어떻게든 해 보자.”

어차피 할 수밖에 없지만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해야 할 것 같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흐르면 정말 저 탐욕스러운 타락정령이 대정령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라서 이 세계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볼 게 있다.

“포트라, 듣고 있지? 저놈 크기가 얼마나 되? 이곳은 거리 감각이 거의 작용하지 않아서 저놈과 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고, 실제 크기도 감이 잘 안 잡히네.”

“정령계에서 크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소용이 있으니까 묻는 거지. 물질계 기준으로 거리와 크기를 계산 좀 해줘봐.”

“너와의 거리는 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저놈 크기는 지름이 대충 10킬로미터 정도 된다.”

“역시 그럴 것 같았어. 젠장.”

이놈의 대정령들의 무개념함은 알아줘야 한다.

10키로미터짜리 괴물하고 싸우는 게 인간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않는다. 정령계 내에서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크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

“마나파동포를 쏴도 바늘로 찌른 수준도 안 되겠네. 쩝.”

무엇보다 여기서 쏜다고 해도 저기까지 닿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접근을 하면 저놈이 눈치를 챌 거고, 그 다음에는 100킬로를 가는 동안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일단 현재 타락정령과 나와의 거리를 고정시켰다. 상대적인 거리감각을 마법으로 발동시켜 이동을 해도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단 100킬로미터 안에 접근을 안 하면 들키지는 않는다는 거고.”

정령계에서 거리감각을 익히고 물질계에서 날아서 이동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도 일이다. 마치 세계의 법칙을 거슬리는 것처럼 몸에 부담이 간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타락정령도 거리 감각이 있다. 이 공간 자체가 정령계의 규칙을 많이 무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제국에 가면 제국법에 따르라는 말이 있지. 결국 이 타락공간의 법칙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게 먼저겠군.”

나는 계속 공간을 날아서 이동했다. 정말로 넓은 공간이고, 마치 또 다른 하나의 세계와도 같았다.

중력은 없지만 집중을 하면 타락정령쪽으로 인력이 느껴진다. 만약 저놈이 계속 커진다면 이 인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이 공간의 모든 존재들은 결국 타락정령쪽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계속 날다보니 다른 작은 타락정령들도 몇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직 정신까지 오염되지는 않는 듯 발버둥을 치며 대형타락정령으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내가 의지력으로 방어벽을 칠 테니 그 뒤로 숨어.”

“앗! 고마워요.”

“넌 원래 물의 정령이었니?”

“예, 그런데 몸이 더럽혀져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놈한테 먹히는 게 싫은 거구나.”

“어떤 정령도 저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덩어리 속에 파묻히기는 싫어할 걸요. 더군다나 먹히면 저도 저렇게 되는 거잖아요. 아, 이미 냄새도 나고 더러워졌긴 하지만요.”

슬픈 목소리다. 정령에게 이렇게 선명한 감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하급의 정령은 아닌 듯하다.

거의 뿌우급의 정령도 이 공간에 빨려 들어왔구나. 하지만 그들은 이성이 강하기에 아직 버티고 있다.

“미안, 너를 원래대로 되돌려 줄 방법은 나도 모르겠다.”

“알아요. 이건 대정령님도 힘들 거예요. 단지 저를 완전히 소멸시키면 다시 새로운 정령으로 태어나겠죠.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지금 너무 불쾌하고 괴로워요.”

“그런가. 그럼 내가 저 큰 놈을 처치할 수 있게 도와줄래?”

“저걸 없앤다고요? 당신한테 그런 힘이 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 힘은 너에게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넌 저 큰놈에게 먹혀야 해.”

“나한테 그런 힘이 있다면 꼭 저놈을 없애고 싶어요. 방법을 말해주세요.”

“여기서 버텨봐야 저놈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점점 이성이 마모되어 결국 사라져 버릴 거야. 그러니 차라리 지금 저놈 속으로 들어가서 너의 의지로 저놈의 몸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게 어떨까 싶어.”

“그게 가능할까요?”

“내가 마법으로 너의 몸을 보호하고, 또 살짝 변질시키면 가능할 거 같아.”

오염된 물질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더 지독한 오염물질을 뿌리는 거다. 타락정령은 인간으로 치면 일종의 암세포인데, 그곳에 이중으로 오염된 정령을 집어넣으면 내부분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로 되는 것은 아니고, 계속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런 이성이 남아 있는 정령을 일종의 시한폭탄으로 만들어서 들여보내는 거다.

“좋아요. 당신의 계획이 그럴 듯 하군요. 저에게 마법을 걸어주세요. 그러면 저는 더 이상 여기서 버티지 않고 저 지독하게 큰 나쁜 놈한테 갈게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지 못해서 미안.”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저는 이미 원래의 제가 아니니까.”

나는 오염된 물의 정령에게 흑마법을 이용한 저주를 걸었다. 그러자 검게 변한 물의 정령은 사악하게 웃고는 서서히 타락정령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 마리를 더 집어넣으면 저놈이 내부분열을 할까?”

계산이 잘 안 된다. 하지만 숫자도 숫자지만 시간이 흐르면 확실하게 타락정령을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몸속에서 커지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깨닫게 될 거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다.

마치 대정령이 타락정령의 존재를 알았을 때에는 스스로 손쓰기 위험하다고 판단될 정도로 커버린 뒤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타락정령 속에서 더 타락하고 오염된 정령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는 계속 돌아다니며 이성이 남아있는 정령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타락정령이 괴성을 지르면 새로 진입한 정령들을 붙잡고 제정신을 차리게 한 후 설득을 했다.

대부분의 정령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승낙을 했다. 자신들이 자폭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이미 변질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고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여 명의 정령을 검게 물들여 회색의 타락정령의 몸 안으로 침투시켰다. 그러자 어느 순간 타락정령의 몸 표면에 검은 점이 하나둘 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오

분노의 감정이 느껴진다. 드디어 내부의 이질적인 변화를 눈치 챘구나!

너는 소리를 질러라. 나는 계속 작업을 할 거다.

나는 타락정령의 괴성에 신경 쓰지 않고 또 다른 정령들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공간이 울리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내가 신이 되려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육체를 포기하고, 새로운 정령의 육체를 얻어 무한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걸 오염시키다니. 네놈을 저주한다. 꼭 찾아내서 흡수해 버리겠다.”

이 기운은 마기다. 타락정령으로부터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설마 인간의 영혼이 타락정령의 안에 들어가 있었나?”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 저게 자연스럽게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완전히 의도적으로 만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놈도 마족의 계약자다. 저자는 물질계를 지배하려는 생각보다 아예 자신이 대정령과 비슷한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스스로의 육체를 버리고 영혼을 정령화 시켜서 이곳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서서히 힘을 키웠겠지.

무서운 자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잠든 채 성장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깨어나서 나를 찾으러 다니려는 것 같다.

피하거나 숨을 수 있을까?

힘들겠지.

이 공간은 저자가 만든 것과 같다. 찾으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제는 저 큰 덩어리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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