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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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라.”
“우와, 포트라! 정말 오랜만이다.”
전생에 포트라를 보고 지금 처음으로 직접 보는 거다.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푸른 피부의 슐탄의 모습, 이 모습조차 내가 상상한 것을 구현해냈을 뿐 원래 대정령은 형체자체가 없다.
“드디어 네가 왔구나. 기다린 지 오래 되었다.”
“사업은 잘 되냐?”
“너 때문에 손실이 컸다. 중간에 계약 위반에 가까운 요구가 몇 번이었는지 기억하냐?”
“아, 몰라. 나도 힘들었거든.”
“지독한 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환생의 비밀을 풀었었다니.”
“그러게. 나도 꼭 환생을 할 마음은 없었는데, 사실 환생보다는 젊어지는 마법을 더 열심히 연구했거든. 그런데 그게 불가능 한 거더라고.”
“가능하다. 네놈이 몰라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젠장, 역시 그런 거였나? 마법에 불가능은 없는데 내가 너무 쉽게 포기를 한 거군.”
“그러니까 그냥 젋어져서 한 300년쯤 살다 죽으면 너도 편하고 나도 편했을 텐데, 괜히 환생따위를 해서 내가 계약 없이 진명이 드러난 상태가 된 게 아니냐. 내가 조금만 냉정했으면 널 어떻게든 죽였을 거다.”
“웃기지 마. 그런 낌새만 보였으면 내가 네 진명을 이용해 뭔 짓을 했을지 대충 짐작을 했으니까 아무런 행동도 안 하고 마지못해 협조한 거잖아.”
“이놈아! 내가 정말 마음먹으면 못 했을 거 같냐?”
“응. 지금 생각해도 포트라 네가 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했을 거 같지는 않아. 그게 고위영격체의 사고방식이니까.”
“쳇, 부정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네놈이 다시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한 것도 있다.”
“알았어. 그 부분은 고마워. 내가 억지를 조금 쓰긴 썼지. 사기도 쳤고.”
“과거 이야기는 이제 되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대충 짐작은 가지만 네 입으로 말해야 그에 합당한 시련을 줄 수 있으니 말해라.”
“섀도우 플레인 전체에 이계의 고위마족들이 오고가지 못하게 결계를 치고 싶다. 이미 결계를 치기 위해 전 대륙인의 의지를 모을 준비는 끝났고, 결계를 유지할 힘으로 마나뱅크의 마나와 고위마족의 파워를 모을 거다. 그전에 사대 대정령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왔다.”
“확실히 그렇지.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친다는 것은 이 세계를 밀봉한다는 의미다. 유한자가 할 만한 의식은 아니지.”
“영원히 결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다. 200년, 200년 동안만 유지하면 된다. 그 후에는 신이 탄생해서 이 세계를 관리할 테니까.”
“어떻게 200년 후에 신이 탄생할 것을 알지?”
“알면서 왜 물어? 슬리퍼에게 물어봤다.”“이놈아! 그런 예언을 왜 물어봐. 그러다가 슬리퍼가 깨면 어쩌려고.”
“유한자의 특권이지. 어차피 우리는 얼마 못 살아. 죽으면 끝이라고. 슬리퍼가 깨는 게 두려우면 무한자들인 너희들이 처음부터 우리를 살기 좋게 관리해 주던가. 괜히 고위마족들이 판을 치게 놔두니까 우리로써는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그걸 방관하고 싶어서 그냥 놔둔 걸로 보이냐? 원래 정령은 물질계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 그저 존재하면서 기본적인 규칙을 지켜나갈 뿐이다.”
“그런 놈이 재물을 모은다고 인간들에게 아공간 사기를 치냐? 됐으니까 내가 무슨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지나 가르쳐 주라. 다른 대정령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미리 얘기해 주면 고맙고.”
“그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우리들도 고위정령들의 침입을 막고 싶으니 대충 형식적인 시험을 치르게 될 거다. 물론 그것도 실력이 없으면 실패하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너라면 충분히 성공할 거다.”
“수상한데? 내가 네 성격을 아는데, 넌 어려우면 쉽다고 그러고, 쉬우면 어렵다고 겁을 주거든. 솔직히 말해봐.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미리 대정령끼리 입을 맞췄지? 나를 어떻게 하면 알차게 부려먹을지 말이야.”
포트라는 대답을 못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구나. 이놈들이 미리 담합을 한 거야.
“나 그냥 갈까? 솔직히 물질계가 어떻게 되든 나 하나 먹고사는 데에는 별 지장 없거든. 오히려 고위마족 중 한명에게 붙으면 세상의 이인자가 돼서 평생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푸하하하, 다른 건 몰라도 네놈이 이인자에 만족할 성격은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안다. 넌 절대 다른 고위마족과 타협하지 못해.”
“쩝,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군. 알았으니까 무슨 시험인지나 말해봐. 할 만하면 하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 거니까. 슬리퍼 한 번 더 깨우면 되는 거니까 내가 크게 아쉬운 건 없다고.”
“그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라. 네놈이 그런 짓을 한 번 할 때마다 이 세계의 수명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아냐?”
“일만 년 후에 세상이 망하든, 이만년 뒤에 망하든, 나하고는 별로 관계없다고 생각되거든. 무한자인 너희들은 큰 문제겠지만.”
“독한 놈. 조금 기다려라. 다른 대정령들과 상의를 해 볼 테니까.”
역시 이놈들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군.
내가 슬리퍼로 협박을 안 했다면 정말 고생할 뻔 했다.
나는 조용히 명상을 하며 포트라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람의 정령들이 수도 없이 내 주변을 지나갔지만 나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자칫 외부에 신경을 썼다가는 내 자아를 잃어버리고 정령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잠시 후, 불과 물, 땅과 바람의 기운이 동시에 일어나며 나의 사방에 거대한 덩치들이 나타났다.
약간 의외다. 설마 4대 대정령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그대인가? 유한자의 한계를 벗어난 일을 벌이기 위해 우리들에게 힘을 빌리려는 자가.”
“내 이름은 렌, 섀도우 플레인에 이계의 고위마족들이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게 결계를 치고 싶다.”
“너의 뜻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지 않는다.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자격도 있지.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존재하는 법. 무엇인가?”
“결계를 치면 이미 들어와 있는 고위마족들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
아차! 그러네. 결계는 거대한 벽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워진다.
문제는 지금 물질계에는 상당수의 고위마족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고, 그들은 돌아갈 길이 막히면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다 때려잡죠. 뭐.”
“정말 다 잡을 수 있냐? 그놈들이 셋만 모여도 감당하기 힘들 거다.”
“셋이 힘들면 한 번에 하나나 둘씩 잡아야죠. 결계를 치자마자 내가 소환할 수 있는 놈들부터 하나씩 소환해서 처리하면 나머지는 몇 명 안 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위험 요소는 있다.”
“그렇다면 만약을 대비해서 추방을 할 수 있는 구멍은 하나 남겨놓을까요?”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일회용 출구를 두어 개 정도 만들어서 셋 이상 오는 놈들이 있으면 하나를 추방해 버려라. 한번 나가면 못 들어오니까.”
“그렇게 하지요.”
대정령들이 나한테 협조를 해줄 마음이 있군. 해결책을 같이 생각해 주는 걸 보니 말이야.
사실 지금 상태만 해도 그들이 나에게 쓸데없이 힘을 쓰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원래 따로따로 그들의 영역에 가서 면담을 했다면 시험도 네 번 받아야 하고, 무엇보다 편중된 정령력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힘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동시에 나타나니 내가 있는 곳은 일종의 중심지역이 되어 오히려 힘이 보충되는 중이다. 과도한 정령력이 내 영혼을 강화시켜 준다고 할까?
나는 약간 마음이 편해져서 그들이 무슨 시험을 내는지 기다렸다.
이윽고 포트라가 다른 대정령들을 대신해서 나에게 말했다.
“정령계도 고위마족의 영향을 작게나마 받은 바가 있지. 고위마족을 몰아내겠다는 렌이라면 마땅히 이것들의 청소도 해야 할 것이다.”
“정령계가 고위마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드루이드 같이 정령의 가호를 받는 자들 중에 마족과 계약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정령을 오염시켜 새로운 타락정령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지. 그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타락정령이라, 어둠의 정령과는 다른 거겠군.”
“우리는 작은 오염도 용납할 수 없다. 가능하면 빠르게 정화하여 정령계를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기를 바란다.”
“오염된 정령들의 수와 힘의 크기가 얼마나 되지? 설마 대정령에 필적한 놈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해라.”
“이런 젠장, 정말 대정령과 비슷한 놈이 있는 거군.”
혹시나가 역시나다. 이놈들이 나에게 쉬운 시험을 낼 리가 없지.
대정령급의 타락정령이라면 도대체 무슨 힘을 쓸까? 정보가 전혀 없는데 직접 가서 확인하라니, 이건 가서 죽으라는 말과 같다.
“제대로 된 정보를 안 주면 나 다 포기하고 차라리 슬리퍼를 깨울 거다.”
“그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에 담지 마라. 필요한 정보는 주겠다. 하지만 많이 주지는 못한다.”
뭔가 사정이 있나?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 포트라가 주는 타락정령에 대한 정보를 보았다.
그것은 뒤틀어진 정령의 군집체였다. 물과 불이 하나로 섞여 있고, 바람이 땅을 가두고 땅이 바람과 융합하려고 하는 중이다.
물질계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는 존재. 그것은 군집체이지만 다수가 아닌 단수였고, 그만큼 힘은 강했다.
“그런 걸 어떻게 제거하라는 거냐. 쩝.”
“엄살떨지 마라. 너에게는 마나뱅크가 있고, 그걸 이용해서 엄청난 공격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 그러네. 마나파동포라면 타락정령을 소멸시킬 수 있겠군. 하지만 그 정도 크기면 한 방으로는 안 되고, 적어도 수십 방정도는 쏴야 할 거 같네.”
충격파가 그렇게 마구 발생하면 정령들도 영향을 받을 것 같다. 무엇보다 마나파동포의 충격파는 주변의 모든 마나활동을 정지시키는 힘이 있다. 정령들의 활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뿌우는 영향을 받았다. 직접 맞은 부분은 아예 사라져서 자칫 잘못했으면 소멸해 버렸을 수도 있다.
“알았어. 방법을 생각해 볼게.”
최대한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마나파동포를 쏘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래도 이제는 내 자신이 9서클에 올라 게이트를 여는 즉시 쏠 수도 있고, 연속발사도 가능해졌다.
마나뱅크는 현존하는 최고의 공격마법을 나에게 제공해주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