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22화
8장 대정령의 시험
“마족의 후계자가 이미 마나뱅크를 찾았다는 게 정말이오?”
“그런 모양입니다. 정글에서 사는 마녀와 샤먼들이 마나뱅크에 마나를 저장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나는 십대마도가문의 사자들이 와서 흥분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말에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로 대답했다. 극히 사무적인 말투, 그냥 정보를 전하는 자의 화법이다.
하지만 십대마도가문의 사자들은 내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도 냉정해지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그들에게 있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이럴 수가! 있을 수 없소. 마나뱅크는 우리 마법사들의 것인데, 어찌 미개한 자들에게 빼앗길 수 있단 말이오.”
“저들은 거인족을 동원해서 공사기간을 앞당겼고, 작은 확률의 모험임에도 강행하여 마침내 성공시켰으니 놀라운 집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마나뱅크를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이오?”
“약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마나뱅크를 찾은 것은 확실하나, 그것은 계좌를 개설하고 게이트를 연결하는 데 성공한 것일 뿐, 마나뱅크를 독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만큼 우리도 조금 늦었지만 마나뱅크를 찾아내면 이용하는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기존에는 우리 마법사만 계좌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제는 밀림의 마녀들도 만들 수 있게 된 것 뿐이구려?”
“그런 셈입니다. 기사들도 마나뱅크를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자들이 더 이용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게 미스틱 엑스 경의 말씀이십니다. 단지.”
“단지? 뭐가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의식을 통해 마나뱅크를 찾아낸 칸 야쿰이라는 마족의 계약자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는 사라지기 전에 마나뱅크를 독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선언했답니다. 그게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장 먼저 마나뱅크를 찾아낸 자이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그자가 정말 마나뱅크를 독점할 수 있다면 이 대륙은 모두 그자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누가 마나뱅크를 독점한 자를 이길 수 있겠소?”
마나뱅크를 독점하면 대륙을 지배할 수 있다.
그냥 확 내가 지배를 해 버려?
그만 두자. 말이 그렇지 대륙 지배가 쉬운 게 아니고, 또 한다고 해도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다.
“어쨌든 미스틱 엑스 경께서는 근시일 내에 의식을 거행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단 마나뱅크를 찾아내면 적어도 남에게 빼앗겨 버리지 않도록 어느 정도 안전장치를 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독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구려.”
사람들은 의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독점을 막을 수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심정은 조금 다르다.
독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독점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들은 미스틱 엑스가 마나뱅크를 독점할까 두려운 것이다. 대륙 전체를 이용한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의식이라면 마나뱅크를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전부터 의심해 왔음이 틀림없다.
사실 그래서 공사 기간이 미묘하게 길어졌고, 나는 이럴 것을 예상하고 칸 야쿰이라는 신분으로 또 하나의 의식을 준비한 것이다.
너희들이 의심을 하든 말든 의식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안 그러면 칸 야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니까. 안 그래?
뭐, 좋다.
이자들이 약간은 안심하게 해 줘야겠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미스틱 엑스 경께서는 기사용 마나뱅크를 독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구려.”
십대마도가문의 사자들은 내가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보자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틱 엑스 경께서는 로엔 경의 진전을 이을 때, 마나뱅크가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쓰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적어도 그분이 마나뱅크를 악용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맹세까지 했었다니. 우리가 잠시나마 미스틱 엑스 경을 의심한 게 부끄럽구려. 이 일은 그분께는 비밀로 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저도 괜히 그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단 사람들을 달래는 데 성공한 나는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다음 달 첫날에 바로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미리 일반인들에게 대륙 전체의 운명을 건 의식이 실행됨을 알리고, 그날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주기를 요청해 주십시오.”
“알겠소. 마나뱅크와 다시 접속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협조를 다 할테니 꼭 의식을 성공시켜 주시기 바라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기존의 마나는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이오?”
사자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 참, 미련이 많구만.
그건 정말 나도 불가능하다고. 이미 모든 계좌가 다 사라지고 한 덩어리가 된 마나를 어떻게 다시 원래대로 나눌 수 있다는 거야? 그건 그냥 내가 다 먹는 수밖에 없어. 그걸로 결계를 칠 테니까 내가 먹는 것도 아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일말의 희망을 가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돌아가서 의식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송신탑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칸 야쿰이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송신탑을 파괴할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를 해 주시고요.”
“크으, 칸 야쿰! 그자가 나타나도 우리가 전력을 송신탑을 지키고 있으니 파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야. 송신탑은 이미 대부분 가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강렬한 의지는 모두 송신탑에 흡수되어 힘으로 바뀌는 중이다. 이 정도면 의식이 충분히 성공하겠군.
나는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정령계로 가서 대정령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미 9서클이 된 나는 이제 정령계에 가서 대정령을 만나도 자아가 흔들리지 않고 그들과 대등하게 교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안전하고 편하지만은 않다.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치는 일은 한 마디로 이 세계 전체에 튼튼한 벽을 세우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일이다.
대정령들에게 이 일에 대해 협조를 구하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이라, 옛날 포트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시험이 생각난다.
포트라의 시험은 인정사정이 없었고, 까딱 잘못했으면 정말 나는 대기의 정령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그때 나는 과감하게 궁극마법을 써서 포트라를 공격했고,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까지 했다.
그렇게 발악에 가까운 행동으로 포트라의 시험을 벗어난 후에야 그와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나는 이미 케이니양을 매개체로 포트라와 계약을 한 몸이다. 그러니 적어도 포트라만큼은 큰 시험없이 나에게 협조를 해 줄 것이다.
생각이 길어도 별로 바뀌는 건 없다.
나는 일단 정령계로 가서 포트라를 만나 보기로 결심하고는 케이니 양을 불렀다.
“알겠죠? 케이니 양은 제가 정령계에 다녀올 때까지 이곳에서 잠들어 있어야 합니다. 섣불리 움직이면 게이트의 위치가 바뀌고, 그러면 전 안에서 헤매야 해요. 잘못하면 십년 뒤에나 돌아올 수도 있으니 그냥 잠들어 있는 게 가장 확실하거든요.”
“전 괜찮아요. 수면제를 주시면 바로 먹도록 하지요.”
“좋아요. 그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서 이 약을 삼키도록 하세요.”
내가 내민 것은 강력한 수면제로 먹는 순간 바로 잠이 든다. 그리고 가장 깊은 수면상태를 적어도 삼 일간 유지하게 되는데,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깨울 수 없다.
이곳은 영주관 안쪽에 있는 내 실험실이고, 밖에는 마리포즈가 지키고 있으니 방해받을 일은 없겠지.
나는 케이니 양이 침대에서 잠드는 것을 지켜보고는 주변에 미리 그려놓았던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그러자 케이니 양의 복부로부터 강력한 정령력이 발산되면서 허공 중에 은회색의 둥근 통로가 열렸다.
“역시 매개체가 있으니 좋군. 하프정령이라. 반은 물질계에, 반은 정령계에 존재하는 셈인가?”
케이니 양은 아직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 역시 언제라도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이다. 그걸 이용해 지금은 내가 가는 건데, 이 방법이 아니면 훨씬 복잡하고 강력한 마법진을 설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 마리야, 케이니 양과 내 몸을 잘 부탁할게.”
“예, 다녀오세요.”
마리포즈의 대답을 뒤로 나는 정령계로 진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