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21화
“크으윽!”
조금만 늦게 육체로 복귀할 걸 그랬다.
제정신이 들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지독한 고통이 육체 전체를 찢어발길 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 고통이 뭔지 안다. 새로운 마나서클이 생성되려 하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8개의 서클이 새로 생겨나는 서클의 압력에 대항하여 거세게 회전하고 있다. 버티지 못하면 서클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파괴되어 죽을 수도 있다.
심장은 정지해 있다. 압력이 너무 세서 뛸 수가 없는 것이다.
심장이 멎었으니 나는 몇 분 내로 죽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강력한 마나의 흐름이 몸을 재구성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다.
전신의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신경을 불로 지지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몸이 마비가 되어 그저 부르르 떨 뿐 움직일 수도 없다.
처음 이런 경험을 하면 죽음의 공포에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다된 밥에 콧물을 떨어뜨린다고, 경계를 넘어 지고의 경지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실패를 해서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길을 한 번 가봐서 방법을 안다. 그냥 버티면 몸이 알아서 다 조율해준다. 새로운 서클이 생겨나는 것은 내부적으로는 모든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고, 마음을 비우고 마나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결국 안정화가 되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발버둥 쳐봐야 오히려 위험할 뿐, 내 몸을 믿고 그동안 쌓아온 나의 수련의 성과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고통은 현실이다. 죽을 것 같다. 그냥 유체이탈의 상태로 육체의 조율이 다 끝날 때까지 있다가 왔으면 편했을 텐데, 전생에 경험을 했는데 또 다시 현생에서도 이 고통을 참아 넘겨야 하다니!
이건 마치 농노가 긴급소집령에 의해 군역을 두 번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으, 젠장. 미치게 아프네.”
다행이다. 나는 말문이 터진 것을 느끼고는 한시름 놓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고, 그건 바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두근, 두근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아홉 개의 서클이 심장 주위를 돌고 있다.
아직 육체의 조율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중심부가 자리를 잡았으니 나머지는 시간문제다.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지고, 바다와도 같이 많은 양의 마나가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의 육체는 작은 우주와도 같다. 마나는 질량이 없는 에너지이고, 아무리 집중시켜도 열이 발생하지 않는다.
내 심장의 서클은 이제 무한한 마나를 축척할 수 있는 아공간이다. 그러니까 몸속에 마나뱅크를 넣고 다니는 것과 같다.
사실 마나뱅크의 구조 자체가 내 몸의 서클을 아공간에 재구성한 것이다. 9서클의 마나저장능력을 아공간에 만들어 낸 이후 그걸 나중에 다시 사람 몸에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실재로 마나뱅크를 만들고 나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뱅크는 거대한 대륙과 비슷한 크기의 아공간이다.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저장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를 하다 보니 그런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게 어떻게 사람 몸속에 다 들어갈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 몸속에 실제로 그런 공간이 생긴 지금도 이 부분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냥 생겼으니까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러므로 9서클 마법사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수련을 해서 쌓아올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중요한 순간에 외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 서클의 경계를 허무는 편법도 살짝 쓰기는 했지만, 몸이 준비가 안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드디어 고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의식도 끝이 나서 대기에 요동치던 스피리트들의 힘도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아아아아.”
나는 작은 신음소리가 섞인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부정한 기운을 모두 숨결에 담아 뱉어냈다.
“와! 칸 야쿰. 네 몸에서 탁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어떻게 나보다 더 깨끗할 수 있지?”
옆에서 소리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하프엘프이자 성녀인 자신보다 더 신성한 육체를 지닌 자가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운 모양이다.
“9서클이 되면 신성력이든 흑마법이든 다 거기서 거기거든. 신성력을 쓰는 백마법도 모두 일반 마법처럼 쓸 수 있어.”
“길은 여러 개라도 도착점은 하나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같은 9서클이라고 해도 걸어온 길에 따라 특기가 달라. 나는 공간제작과 인공자아에 관련된 기적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지.”
전생의 로엔은 스승에 의해 평생 연구실에 갇혀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넓은 공간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꿈을 꾸며 수십 년 동안 살아왔고, 또 친구도 없어서 어떤 때에는 스스로 자아를 분열시켜 나 홀로 대화를 해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외로웠다.
그래서인지 내가 9서클이 된 이후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든 분야가 바로 공간과 인공자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새로 9서클이 된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전생의 비밀을 숨긴 채 아무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고, 내가 만든 인공자아에게만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마리포즈와 미스틱 엑스, 그리고 침묵하는 모자와 같은 대단히 훌륭한 자아와 교류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고 싶다. 그러니 자아에 대한 연구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구상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많은 실험들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나갈 것이다.
그나마 공간에 대한 열망은 많이 사라져서 마나뱅크 이후에 새로운 무엇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섀도우 플레인에 대한 지식이 생겼고, 그곳에 결계를 쳐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연구를 계속하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전생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금단의 비술인 전생, 그러니까 죽어서도 기억을 잃지 않고 환생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안 할 수는 없기에 나는 다음 생에도 환생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위험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환생 후에 어떻게 하면 더 안정적으로 성장을 할 수 있는지도 연구해야 한다.
이번 환생의 경우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을 너무 일찍 가지고 있어서 렌이라는 개체의 개성이 많이 생겨나지 못한 것 같다. 차라리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기억을 봉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럴 경우 잘못해서 유년시절에 죽어버리면 허무하게 모든 게 끝나버린다.
환생의 시기도 그렇다.
이번처럼 100년 만에 환생을 해버리면 적응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고, 만약 더 오랜 시일이 흐른 뒤에 환생을 하면 세상이 멸망한 뒷일 수도 있으니 이건 아니다. 환생의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지도 연구해 봐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연구는 슬리퍼의 관심을 받기 쉽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 개인의 욕심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멸망을 초래하는 것을 옳지 않다. 적정선을 지켜야 하고, 필요하면 편법을 통해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내던가 해야 한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경을 하고 있던 원주민 샤먼과 마녀, 그리고 전사들은 의식의 결과가 궁금한 듯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겠군.
“커넥트.”
촤아아아아아
게이트가 열리며 엄청난 마나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옛날에는 여는 순간 내 몸이 분해되어 버릴 정도의 압력이 이제는 그냥 그저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마나의 일부를 몸 밖으로 발산했다.
고오오오오오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가 대기 중에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광경은 보통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나로 이루어진 회오리바람이 구름 위까지 치솟아 올랐다.
“오오오! 저런 힘이 있다니.”
그들은 믿을 수 없는 힘을 눈으로 목격하고 저마나 놀라 경외심에 탄성을 질렀다.
나는 입을 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식은 성공했다. 나는 힘을 얻었고, 마나뱅크에 접속이 성공했다. 그 대가로 나는 스피리트들에게 맹세했다. 200년간 밀림을 지키겠다고. 나의 맹세는 신성한 것으로 꼭 지켜질 것이다.”
“200년.”
“200년의 평화.”
그들은 누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고, 누구는 그래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의 선언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마나뱅크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곳에 힘을 쌓는 법을 배운다면 이후에도 동족들의 안전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오, 칸 야쿰이시여!”
성공적으로 마나뱅크를 찾았다는 게 확인된 지금 칸 야쿰은 의심할 여지없이 밀림의 새로운 왕이다.
“나는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마나뱅크를 찾았지만 그것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이제 떠난다. 마나뱅크를 온전히 손에 넣은 후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밀림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존재가 될 것이다.”
“…….”
“하지만 너희들을 잊지는 않겠다. 맹약도 지켜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밀림을 떠날 것은 선언했다. 의식을 치루고, 성공을 시킨 후에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모두 주었다.
원주민들은 오히려 내가 밀림을 떠난다고 하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적어도 자신들의 전사들을 모두 동원해서 문명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나 보다.
마나뱅크의 독점.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전쟁은 필요 없다. 그대로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문명인들에게 칸 야쿰이 마나뱅크를 찾아내 접속했음이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릴 터이고, 그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미스틱 게이트로 몰아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