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20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는 공간, 멍하니 있다가는 백년쯤 지나가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다.
“기존의 마법의식이라면 이런 공간에 처박힐 리가 없단 말이야. 여기는 마나도 느낄 수 없는 곳이고.”
그렇다면 이번 의식이 일반적인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의식에 일반적이라는 수식어는 붙을 수 없지만, 적어도 룬마법과 정령력만으로 이루어진 마법의식은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가 나오기 힘들다.
“스피리트 파워! 그런가. 원주민들의 조상들이 남긴 영혼력을 동원해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네.”
죽은 영혼들이 환생을 위해 머무는 공간.
어쩌면 나는 원주민들의 조상들을 대신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쩝, 마법의 이치에 대해 이제는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난 물질계라는 좁은 우물안의 개구리인 건가?”
이곳에서는 마나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것이다. 또한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가는 방법 역시 모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내 영혼은 나의 것이라는 거야.”
이 공간 안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나자신뿐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나 자신만큼은 나의 의지가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그 부분에 감사하자.
“일단 내 감각기관이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부터 검토해보자.”
이 공간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소리, 몸으로 느끼는 감촉이 모두 없다. 물론 냄새도 전혀 없기 때문에 알고 보면 나는 모든 감각기관이 막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전에는 이걸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혼이 무슨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단 말인가?
그러나 섀도우 플레인을 여행하면서 영혼도 그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지력이 감각기관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을 느끼려 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잡아내려고 의지를 모았다.
과연 이곳이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일까?
그러다가 문득 주변 공간의 유한성을 깨달았다.
사방이 막힌 듯한 느낌, 그러니까 둥근 방 안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정확한 것일까?
나는 몸을 움직여 둥근 공간의 벽을 만져보려 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면 벽도 뒤로 물러난다.
그렇다. 저 둥근 벽은 벽이 아니라 내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한계인 것이다.
“좋았어. 적어도 이곳이 밀폐된 공간은 아니라는 게 확실하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아공간 중에는 정말 좁은 방처럼 작은 공간만 존재하는 곳도 있다. 말하자면 차원감옥같은 것인데, 그런데 갇히면 공간을 파괴하고 나오기 전에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개방된 공간이다. 전체가 얼마나 넓은지는 몰라도 섀도우 플레인이나 물질계처럼 하나의 거대한 세계일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면 우선 당면 과제는 나의 감각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존재나 사물이 있나를 찾아야 한다.
나는 머리를 맑게 하고 사방의 벽을 밀어내려 했다. 이론적으로 볼 때 단순히 감각을 넓히려는 시도보다는 현재 느껴지는 벽을 미는 게 옳은 것 같았다.
드드드드
굉장한 압력이다. 벽은 마치 나에게 그 이상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의지력은 거의 한계가 없는 수준이다. 밀릴 때까지 밀면 밀린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속 집중을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팍 하고 벽 한쪽이 허물어지며 다른 공간과 이어졌다. 그 공간 역시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한 가운데에 나처럼 다른 영혼이 멍하니 서 있었다.
“이봐요. 나를 느낄 수 있나요?”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영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사방을 살폈다.
“나를 볼 수 없어요? 내 공간과 당신의 공간이 이어졌는데, 여전히 사방이 둥근 벽으로 막혀 있나요?”
“누군지 모르지만, 그래요. 내 눈에는 사방이 막혀 있어요.”
이게 내가 뚫는다고 정말 뚫는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는 몸을 움직여 그 사람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정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내 공간은 그대로 있고 나만 이동을 해서 상대편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얻은 행동의 자유라고 할까? 이동을 한다는 느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나는…모르겠어요.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죠?”
역시 모든 기억을 다 잃었군. 이 공간에서 멀쩡하게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자는 목소리조차 성별이나 나이를 알 수 없게 변해있다. 이 상태에서 더 시간이 흐르면 어쩌면 이성이 완전히 붕괴되어 아예 말도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사방의 벽을 다시 밀었다. 그러자 점점 벽이 넓어지면서 아까처럼 다른 영혼이 있는 공간이 뚫렸다.
그렇게 계속 작업을 하니 이제는 수십 명의 영혼공간을 확보했다.
영혼들은 처음처럼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도 있었고 내 예상대로 아예 이성이 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에는 내가 죽어서 환생하기 위해 기다렸던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 달랐다.
딱히 무엇이 다르다고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여기는 사후의 공간이 아니야. 나는 살아있고, 육체와의 연결이 느껴져.”
그렇다. 나는 육체와 아직 연결되어 있다. 다른 존재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죽은 게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딜까?
추론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다.
“스피리트, 이자들은 원주민들의 조상이었군. 유사 영혼공간을 만들어 영혼들이 머물게 한 후 힘을 쓴 거야.”
그것을 깨달으니 영혼들이 몸에서 발하고 있는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다. 이걸 모아서 의식을 거행했더니 오히려 내가 안으로 달려 들어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의식 자체는 성공한 건가?”
내 육체에 형성된 서클을 확인해야 한다. 아홉 개의 서클이 형성되어 몸 전체의 구조가 마나의 흐름에 최적화되고 어떤 크기의 마나도 다 담을 수 있게 변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의식에 실패했다면 몸의 변화가 전혀 없거나 오히려 충격으로 인해 상당한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다.
나는 일단 나와 연결된 육체의 상태를 느끼려고 집중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아무리 집중을 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게 우선인가?”
나는 고민을 하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을 느꼈다.
영혼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대가 보이는군. 그대는 누구인가?”
웃긴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도 못하면서 내가 누군지를 궁금해 하다니?
“나는 칸 야쿰이다.”
“그게 누구인가? 그런 자는 알지 못한다.”
알 리가 없잖아.
나는 그들의 질문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뭔가 말의 뉘앙스가 묘하다. 내가 받아들인 뜻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뜻이 다른 것 같다.
나는 일단 마음을 열고 상대가 하려는 말의 진위를 이해하려 했다.
이미 이성이 거의 사라져서 말의 표현이 어색하기는 해도 이자들은 뭔가를 원하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전까지는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는데, 그래서 우리의 힘을 기꺼이 빌려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모르겠다. 그대인가? 그대가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는 건가?”
아차, 이제야 내가 왜 이 공간에 끌려 들어왔는지 알겠다.
나는 칸 야쿰이라는 가명으로 의식을 거행했고, 원주민들을 속여서 마나뱅크의 확보라고 한 다음 내 9서클 승급의 의식을 치렀다.
스피리트 파워는 영혼의 힘, 이것은 그들 원주민들만을 위한 그들 조상들의 가호다.
거짓은 순수한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스피리트들은 그들의 후손이 원하는 것과 다르게 자신들의 힘이 쓰이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게 그냥 마나와 정령력만을 동원해서 치루는 의식과의 차이였군. 이 힘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원주민들을 위해서만 기꺼이 힘을 빌려준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지금 느낀 건데 적어도 이자들이 지금 의식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잘못 대답을 하면 스피리트들은 즉시 힘의 방출을 중지할 것이고, 그러면 의식은 실패로 끝난다.
시간의 흐름은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되겠군. 아직 의식이 진행 중이라면 이곳의 시간은 거의 정지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마 내 육체는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에도 본능적으로 계속 주문을 외우며 의식을 구축하는 마법진을 조율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트랜스 상태라고 할까? 육체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중이니, 지금 돌아가면 아무도 내가 유체이탈을 했다는 것을 모를 터이다.
“나는 렌, 원주민들의 뜻을 모아 그들의 안전을 위해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너는 힘을 모을 자격이 없어 보인다.”
“내가 모으는 게 아니다. 자격 있는 자들이 모아서 나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건 그런 것 같다.”
영혼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것은 거대한 의지이다. 말하자면 나는 밀림의 스피리트들이 하나로 뭉친 청문회에 나온 셈이다.
“나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우리들의 세계에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모았다. 복잡한 과정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위한 움직임이다. 그러니 힘을 빌려다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원주민을 말하는군. 거대한 의지가 되니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소속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를 믿어라. 이번 일이 끝나면 너희들은 적어도 200년간 평화로울 것이다.”
“…….”
스피리트들은 잠시 침묵했다. 내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선언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다. 내가 200년 동안 원주민들의 평화를 위해 힘을 빌려준다는 계약을 제시했고, 그들은 이게 가치가 있는지를 정할 뿐이다.
“알았다. 우리가 힘을 빌려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좋다. 그럼 나를 돌려보내다오.”
“그대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어떻게 내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들어온 자가 알아서 나가라.”
“으, 이 무책임한 영혼들이.”
나는 기가 막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도 쓸 수 없는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방법이 있다.
“삭풍의 창, 소환!”
촹
영혼이 있으니 창을 소환할 수 있다. 나는 삭풍의 창으로 공간을 갈랐다.
촤악 하는 느낌과 함께 두꺼운 커튼이 찢어지듯 공간이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의식이 잠깐 멀어지며 육체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