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19화
7장 의식으로 얻는 것
시간의 흐름은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다.
송신탑의 건설에 박차를 가한 후 일 년이 지나자 예상대로 대륙의 모든 송신탑이 완성되었다.
그 사이 나는 칸 야쿰으로 정글의 원주민들을 통합해서 따로 의식준비를 했다.
정글에 세워진 마법의 탑은 대부분 거인족이 건설했는데, 확실히 그들은 크고 힘이 세서 일단 일을 시작하면 일반인의 10배 정도는 작업량이 나온다.
정글의 탑은 주재료가 목재로 되어 있다. 정글에서 남아도는 자원이라고는 목재 밖에 없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목재로 틀을 세우고 소리네의 축복받은 덩굴로 고정을 시키니 문명인의 송신탑과는 또 다른 기묘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밀림의 원주민들과 거인족이 서로 친해졌다.
몇몇 원주민들은 거인들에게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들의 부족에 와서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한 모양이다.
거인이라는 존재가 워낙에 많이 먹기는 하지만 밀림에는 먹을 게 은근히 많아서 한 부족 당 한두 명의 거인은 먹여 살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각 부족이 한두 명의 거인을 일종의 수호신처럼 받아들임으로써 백여 명에 달하는 거인족 전부가 정글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거인들도 척박한 북부의 산맥에 있는 자신들의 본거지보다 거대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이곳이 더 마음에 든 모양이라 일단 그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요소는 있다. 지금은 거인이 전부 100명에 불과해서 이렇게 원주민들과 공존을 할 수 있는데, 먹고 살기가 편해지면 수가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 때에는 어쩌면 원주민들과 거인들 사이에 생존을 건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어차피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므로 거기까지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
당장 원주민들은 문명인과 싸울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하고, 거인들은 조금 더 풍족한 먹거리를 원하는 거니까 일단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본다.
어쨌든 거인족의 도움으로 예상과는 다르게 밀림 쪽의 의식 준비가 먼저 끝났다.
원래 외부에 발표하기를 2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기간을 절반으로 줄여서 오히려 대륙의 송신탑 건설보다 보름정도 빠르게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할 거야?”
소리네가 그동안 참아왔던 궁금증을 풀겠다는 듯 물었다. 옆에 있는 모리안도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이다.
나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9서클 되어야지. 그래야 4대 대정령을 만나러 정령계를 갈 수 있고, 그들의 협조를 구한 후 의식을 시작해서 결계를 치는 거지. 그 다음에는 고위마족을 처치해서 힘을 모아 결계를 유지시키는 거고.”
“아, 9서클! 정말로 될 수 있는 거야?”
“슬리퍼를 만난 이후 내 몸의 마나서클이 점점 활성화 되고 있어. 아무래도 슬리퍼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그는 초월적인 존재가 많이 탄생하면 할수록 잠에서 깨어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무섭다. 그래도 칸 야쿰이 9서클 되는 건 보고 싶어.”
“현실적으로 내가 9서클이 되기 위한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안 돼. 그 중 하나는 엘프들이 구축한 숲의 힘을 이용하는 건데, 그건 저번에 이용해서 다시 그것을 쓰면 나 자신이 숲의 힘에 어느 정도 엮여버릴 수 있거든. 그러니 이번에는 밀림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스피리트 파워를 이용해야지.”
“아하, 원래부터 여기를 노렸었구나?”
“마법사는 한 가지 일을 해서 여러 가지 결과를 얻는 것을 좋아해. 송신탑 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9서클을 완성시키는 것을 한 번에 해야지 따로 하려면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나는 대륙에 존재하는 거대한 힘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 전생에 내가 한 일이 그러한 힘을 견제하고 필요하면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마녀의 혈마법도 연구를 했던 거다. 엘프들이야 워낙에 폐쇄적이라 연구가 힘들었지만 이쪽은 그나마 할만 했었다.
알고 보면 마녀들도 외로운 존재들이라 내가 가면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고, 내가 그들에게 룬마법을 가르쳐주면 그들도 보답으로 혈마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내가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혈마법을 배우니 기뻐하면서 내가 여자였다면 좋은 마녀가 되었을 거라고 칭찬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원주민들은 혈마법을 여자만 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마녀들도 마찬가지. 남자인 내가 혈마법을 쓰자 신기해하면서 영혼은 여자인 남자가 아닌가 하고 한참 고민했었다.
남자는 당연히 전사가 되어야 하고 마법은 여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은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상식이니 그 부분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 않는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내일 바로 시작하자고.”
나는 심장이 살짝 격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드디어 내가 9서클이 되는구나. 이미 한 번 되어봤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20세 9서클!
내 인생의 목표가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 마족들아, 너희들이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꿋꿋하게 연애해서 결혼도 하고 마침내 9서클도 된다. 그리고 너희들을 영구퇴치하기 위해 전 세계에 결계를 치지.
정확하게 말하면 200년 퇴치지만 그 뒤에는 신이 되는 이반 경이 알아서 관리할 테니까 난 신경 끄고 조용히 살만큼 살다가 죽어서 전생을 하면 된다.
이런 게 행복일까?
아마도 행복일 거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의 의식에 쏟을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둥, 둥, 둥, 둥, 둥
거인들이 그들 사이즈로 특별히 제작한 북을 치고 있다. 나의 마법의식을 구경하러 온 천여 명의 원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이들이 구경을 하면서 먹을 간식을 준비하는 데에만도 모리안과 소리네가 며칠을 고생했다.
준비는 완벽하다. 원주민들은 나의 의식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나는 향후 100년간 문명인들이 밀림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을 것을 약속했다.
그동안 노예로 잡혀갔던 원주민들을 꾸준히 해방시켜 돌아오게 해서 그런지 모든 부족이 나 칸 야쿰을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한 후 신상으로 화한 미스틱 엑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피를 흘렸다.
전사 모리안은 마법탑 앞에 꿇어앉아 그쪽의 힘을 조율해서 나에게 보내고 있다. 두 자아는 모두 에너지와 공간의 관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이미 주변의 마나는 모두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우우우웅
마법탑이 진동음을 내며 활성화되자 근처에 있던 마녀와 샤먼들은 대기의 기운이 확 바뀌는 것을 느끼고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입속으로 주문을 중얼거리며 주변에 모여드는 의지력을 느꼈다. 하급마정석으로 대충 만든 마법탑이지만 의지력을 모으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밀림 밖과는 상황이 다르다. 사실 의지력을 모으는 시설 자체가 밀림의 조각상에서 착안한 거다.
밀림의 각 부족마다 적게는 몇 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넘게 세워진 조각상은 그들의 조상들이 남긴 영혼의 힘, 즉 스피리트 파워를 모으는 장치인데, 이게 사실 상 송신탑 역할을 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세운 마법탑은 그들 조각상으로부터 발산한 의지력을 전달하는 중계소 역할을 할 뿐이다.
의지력이 점점 진하게 모이는 게 느껴진다.
이제 마녀들은 허공중에 반투명한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힘이 덩어리와 같은데, 약간의 잔류사념과도 같은 본능이 남아 있어 아직까지는 내가 모으는 거대한 의지력과 융합하려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 의식을 행한지 한 시간이 넘어가자 드디어 스피리트들이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게 보였다.
때가 되었다.
나는 영혼을 개방하여 이 장소에 모인 엄청난 양의 의지력을 받아들였다.
“와라, 밀림의 힘이여. 내 너의 의지를 받아 나의 뜻을 이루리라.”
고오오오오오오
나를 중심으로 마나의 회오리바람이 만들어졌다. 더욱 고차원적인 힘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가면서 마나가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육체와 영혼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영혼은 몰려든 의지력에 의해 부풀어 제 형태를 잃어가고, 육체는 마나의 회오리바람에 시달려 서서히 분해되어가는 느낌이다.
“으으, 생각보다 훨씬 힘들군.”
역시 인위적으로 9서클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는 무리가 있는 행위인가? 자칫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 죽게 된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고통을 관조했다.
이것은 순리에 의한 자연현상과도 같다. 이제는 그냥 지켜볼 뿐, 내 영혼과 육체가 파괴되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겨우 영혼이 부드러워졌다. 형태가 바뀌는 것을 받아들이니 오히려 자기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다른 공간속에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숨을 쉬고 있지도 않고, 피가 흐르는 느낌도 없다.
영혼의 상태다.
설마 강제로 유체이탈 한 걸까?
아니다. 공간 자체가 바뀌었다.
이 공간은 뭔가 기억에 있다.
“그렇군. 내가 환생을 기다리던 그 공간인가!”
나는 영혼 상태로 태어나기 전에 머물렀던 곳과 같은 공간속에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