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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16화 (216/250)

로엔의 마나뱅크 216화

6장 비겁한 계약자

“통운의 무리가 밀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가? 결국 왕국군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나와 결판을 내기로 했나보군.”

예상대로다. 통운이라는 자는 남에게 속는 것도 싫어하고,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인 것 같다.

자신이 왕국군과 싸워서 전력이 약화되면 나와의 싸움에 불리해 질 거라고 판단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어부지리를 얻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다.

나쁜 판단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나를 이기고 남은 전력으로 왕국군까지 상대하기는 힘들 테지만, 밀림에 진을 치고 다른 부족들을 통합한 후에 다시 천천히 밖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잔머리만 굴리면 남의 위에 서지 못한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왕국군이 앞에 있는데 군을 뺀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밀림의 원주민들은 통운을 진정한 전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소리네가 물었다.

“싸워야지.”

“군대끼리? 아니면 브롬처럼 대장끼리만 붙을 거야?”

“대장만 싸우고 싶은데, 아마 통운이 거부할 거야. 그자는 지금 자기 군대의 힘이 더 크다고 생각하거든. 안전하게 이길 수 있는데 굳이 대장전으로 불확실한 승부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헤에, 그럼 피해자가 많이 나겠네.”

소리네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염려 마. 오히려 군대로 싸우면 승부가 쉽게 날 거야.”

“어째서?”

“내가 보기에 통운은 이미 부하의 신망을 잃었어. 통운에게 마기를 직접 주입받은 자가 아닌 평범한 원주민 전사들은 싸움이 시작되면 얼마 안 가서 흩어질 거야.”

“정말? 원주민 전사들은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예외가 있어. 추장이 비겁자라고 생각되면 충성의 맹세를 취소하거든. 난 이번에 통운을 철저하게 비겁자로 몰아붙일 거야.”

“야쿰이 하는 일이니 틀림없겠지. 그럼 난 마음 편하게 구경이나 할게.”

“응, 혹시 모르니 통운이 자기 부하들을 학살하지 못하도록 바닥에 풀이나 좀 심어줘.”

“그건 이미 충분히 심어 놨어. 내 말 한마디면 2미터 정도로 쑥 자라날 테니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못 보게 될 거야.”

“그걸로 충분해. 그럼 우리도 전력을 모아서 진군하자. 영역 경계선에 진을 치고 있다가 오면 싸우자고.”

“왕국의 토벌대와 싸웠던 늪지대를 말하는 거지?”

“응.”

어차피 싸울 장소는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소수로 다수를 막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늪지대 입구이고, 더군다나 이쪽은 거인들이라 늪에 빠져도 무릎 정도까지만 잠기기 때문에 금방 다시 나올 수 있다. 압도적으로 이쪽에 유리한 지형인 것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서 예상보다 일찍 싸울 장소에 도착했다. 그 다음에는 목책을 세 겹으로 쳐서 임시 요새와도 같이 꾸몄는데, 이것 역시 인간은 건너오기 힘들어도 거인족은 목책 너머로 공격을 하거나 아예 그걸 뛰어 넘어서 건널 수 있기에 넘어가서 공격하다가 불리하면 다시 돌아와 쉴 수도 있다.

“거인족은 공격을, 야수들은 늪을 건너오는 자들에게 역격을 하도록.”

나는 일일이 그들의 위치를 정해주며 지시를 내렸다. 몇 번 모의전투 연습까지 하고나니 이틀이 지났고, 드디어 통운의 군대가 늪지대 너머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족이다.”

“정말로 야쿰 추장이 거인족을 부리는구나.”

원주민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들은 말로만 듣던 거인족을 직접 보니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다.

“활을 준비하라. 덩치가 크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쪽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 손가락을 까닥해서 거인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패를 걸어라.”

처처처척

이미 거인족들은 화살 공격에 대비해서 등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커다란 문짝과도 같은 방패를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책에 방패를 걸고 그 뒤에 섰다.

슈슈슈슈슈슉, 파파팍

원주민들의 화살은 아무래도 파괴력이 떨어진다. 공성용 바리스터 같은 것은 없으니 거인의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화살은 없었다.

“우리도 반격한다.”

우오오오오

거인이 함성을 지르자 미리 쌓아두었던 통나무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산에서는 바위를 주로 던지지만 밀림에는 바위가 거의 없어서 대신 나무를 준비했다. 나무든 바위든 사람이 깔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게다.

“우왓! 피해라.”

거인과의 싸움은 처음이지? 얘들은 손으로 던지는 게 그냥 다 공성무기야. 진형이고 방패고 소용이 없거든.

자고로 거인과의 싸움은 얼마나 빨리 거인의 발밑으로 파고드냐에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목책을 치고 그 앞에 해자나 마찬가지인 늪지대까지 있으니 원주민들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황이다.

“정지!”

나는 한 차례 공격이 끝난 후 거인들을 멈추게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통운, 뒤에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네놈의 비겁한 잔머리는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보고 비겁자라는 거냐? 기습으로 겨우 얻은 요새도 버리고 도망가 숨은 네놈이야말로 비겁자다.”

저자가 통운이로군.

화가 나면 이마에 뿔이 돋아난다고 들었는데, 이미 머리에 세 개나 되는 뿔이 나 있다.

“나는 요새를 쳐서 함락시켰고, 다시 왕국 깊숙이 쳐들어가 마법탑 세 개를 부쉈다. 나 칸 야쿰은 한 번도 왕국군을 눈앞에 두고 물러난 적이 없다. 그리고 밀림의 법칙에 의하면 내부의 적보다 외적을 먼저 치게 되어 있는 법인데, 네놈은 왕국군을 눈앞에 두고 나와 먼저 싸우기 위해 물러났다. 통운은 전사라 할 수 없는 자이다.”

“웃기지 마라!”

파지지직

통운의 뿔에서 강력한 뇌전이 일었다. 내가 정곡을 찌르자 말문이 막히며 분통이 터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내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해도 그걸 남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통운에게만 들으라는 게 아니다. 통운의 부하들 중 상당수가 복잡한 시선으로 나와 통운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 역시 통운이 왕국군을 놔두고 나를 치러 온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건 밀림의 오랜 규칙인 것이다.

반대로 외적과 싸워 힘을 소모한 원수는 힘이 회복될 때까지 치지 않는 규칙도 있다.

그런데 통운은 왕국군을 유인해서 요새근처까지 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도 규칙위반이다. 자기가 혼자 싸우기 싫다고 이미 요새탈환에 힘을 쓴 우리에게 적을 붙이려 한 것이다.

통운은 이런 규칙을 무시하지 않고 따랐어야 했다. 부하들과 있을 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나를 만난 이상 집요하게 통운의 비겁함을 파고들어줄 것이다.

“통운, 나는 이미 대부분의 동족들에게 협조를 받기로 했다. 그들은 나의 계획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동족의 힘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너는 어떠한가? 네가 스스로 떳떳하다면 각 부족의 사자들을 모아 전사의 심판을 받아라.”

전사의 심판은 불명예스러운 짓을 한 자가 전사로 칭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판정을 받는 의식이다. 밀림에 사는 원주민의 남자는 모두 전사여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실격판정을 받으면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을 정화하는 게 도리다.

“야쿰! 네놈이 뭐라고 음해를 하든 난 전사이고 위대한 칸이다!”

“칸도 전사도 스스로 칭하는 게 아니다. 위대한 영혼과 밀림의 동족들이 주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넌 전사도 칸도 아니다.”

“목책 뒤에 숨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야쿰, 내 너를 죽여 내가 옳음을 증명하겠다!”

후훗, 넘어왔군.

내가 일대일 대결을 요구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만, 이렇게 몰아붙이면 할 말이 없어진 저놈이 오히려 먼저 싸우자고 할 거 같았거든.

물론 이렇게 안 되어도 이미 통운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내 말에 넘어가서 통운을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 전면전이 붙어도 우리가 조금만 버티면 저들중 대부분이 스스로 이탈을 해 버릴 거라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필요가 없다.

통운이 먼저 나에게 일대일 대결을 걸었다.

나는 두 말 없이 목책 너머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중앙에 좁게 난 늪지 사이의 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통운의 무리와 우리의 목책 중간지점에 선 나는 손가락으로 통운을 가리키고는 까닥거렸다.

“와라, 통운. 항상 무리 뒤에 숨어서 남을 조종만 한 네놈이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 지 한 번 봐 주겠다.”

“나는 최강이다! 너를 벼락으로 지져 버리겠다.”

다른 힘도 대부분 소용없지만 특히 벼락은 나에게는 정말 의미 없거든. 오히려 뿌우가 뇌전의 기운을 흡수해서 더 기운이 강해지겠는걸.

나는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서서 어디 한 번 공격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네놈의 그 잘난 벼락이 얼마나 짜릿한 지 한 번 봐주지. 먼저 쳐라.”

“이놈!”

꽈드드드등

세 개의 뿔로부터 각각 전기 스파크가 발생하더니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졌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뿌우야, 알아서 막아라.”

“염려마랑. 세긴 해도 다 먹을 수 있당.”

펑, 파지지지지

내 주변에 공기의 막이 생겨나며 뇌전을 막았다. 공기의 막은 맹렬하게 회전하며 마치 실타래처럼 뇌전의 기운을 둘둘 말았고, 시간이 지나자 모두 흡수해 버렸다.

“배부르당. 또 쏘면 다 못 먹을 수도 있당.”

“괜찮아. 어차피 결계로브를 뚫을 수준은 아니야.”

나는 일부로 겨우 그거냐는 듯한 썩소를 날리며 손가락을 옆으로 까닥까닥 저었다.

“이게 너의 분노인가? 비겁자의 분노는 역시 미약하구나.”

“크으, 너를 꼭 죽여 버리겠다.”

부욱

통운의 등이 꼽추처럼 굽어지며 팔뚝만한 뿔이 두 개 솟아났다.

드드드드

검은 색의 뇌전이 등의 거대한 뿔로부터 발생되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뿌우가 흡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마기를 품은 뇌전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나는 전투자세를 잡고 파멸의 창을 앞에 세웠다. 이제부터 진짜로 시작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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