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213화 (213/250)

로엔의 마나뱅크 213화

5장 또 하나의 계약자

“저쪽의 이동속도가 너무 빠르네요. 일반 도적단이라고는 믿기 어려워요.”

“도적단은 둘째 치고 인간의 이동속도가 아니네.”

“예.”

모리안은 내가 바로 알아듣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야수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데 평야라면 기마이동으로 이 속도가 나겠지만 산악지대는 무슨 수를 써도 힘들다.

그런데 벌써 반나절동안 도적단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소리네도 동감이라는 듯 야수들에게 체력유지의 축복을 걸면서 말했다.

“반나절동안 지치지도 않고 뛸 수 있다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야수라고 해도 이미 지쳤을 테니까.”

“그렇다면 정체가 뭘까?”

“일단 겉보기에는 인간이 맞당. 그런데 겁나게 빨리 달린당.”

먼저 가서 보고 온 뿌우의 말로는 백여명의 인간이 정말로 두 다리로 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속도가 전력질주를 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그걸로 반나절을 쉬지 않고 달린 셈이니 이건 이해하기 어렵다.

“마법으로도 힘들죠?”

“몇 명이라면 몰라도 백단위의 인원을 이렇게 빠르게 하기는 힘들어.”

“와, 야쿰이 마법으로도 힘들다고 할 정도면 정말 신기한 일인가보다. 어서 따라잡아 진상을 규명하자.”

소리네는 내가 평소 마법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힘들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좋아, 그럼 일단 따라잡고 보자고. 그룹 헤이스트!”

나는 비상수단을 썼다. 야수들의 움직임이 급격히 빨라졌지만 이건 30분도 못가서 효력이 떨어지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체력이 떨어져 쉬어야 한다.

소리네의 축복으로도 완전히 고갈된 체력을 회복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거리라면 20분 내로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 뒤에 10분 내로 결판을 보자고.”

대화고 뭐고 없다. 따라잡으면 바로 싸우는 거다.

우리는 산속을 그야말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뿌우가 앞에서 대기를 둘로 갈라서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여주는 한편 등 뒤로부터 강력한 바람을 일으켜서 밀어주었다.

이게 은근히 도움이 되어서 생각보다 몇 분 빠르게 앞에 달리는 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멈춰라!”

나는 일단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말로 달리던 자들 중 10명 정도가 멈춰 서서 우리를 보았다. 하지만 앞쪽 90여명은 여전히 계속 달린다.

뭐지? 설마 10명을 희생시킬 셈인가?

“피서, 네가 처리해. 나머지는 그대로 달린다.”

샤아아아아

피서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쑤욱 나갔다. 역시 허공을 날아서 이동하는 존재는 빠르다.

퍼퍼퍽

오, 10명의 도적이 피서와 싸운다. 그들은 용감하게 칼로 피서의 몸통을 내리찍었다. 그 힘이 상당한 듯 피서는 꿈틀거리며 칼을 피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힘이 거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본다. 거인의 벨트를 차고 있는 나와 비슷한 놈이 100명이나 있는 거다.

“에칭!”

나는 저주를 걸었다. 싸우던 자들은 갑자기 전신에 맹렬한 간지러움을 느끼며 움직임이 둔해지고 심지어는 무기를 놓고 열심히 몸 이곳저곳을 긁기 시작했다.

저주가 걸리는 것을 보면 생명체는 맞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리고, 또 강렬한 칼질을 할 수 있지?

그 사이 우리는 피서와 열 명의 도적을 지나쳐 앞서 간 자들을 거의 따라잡았다.

“멈추라고 했다!”

나는 다시 외쳤고, 이번에는 정말로 모두 멈춰 섰다. 겨우 따라잡은 것이다.

“덥쳐!”

크왕

스렉이 그대로 점프해서 무리의 머리 위를 날아 뒤쪽에 내려섰다. 이것으로 대충 포위를 한 셈이다.

도적들 중 하나가 당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멈추라고 하더니 대화도 없이 공격을 하다니.”

“멈추란다고 멈추는 놈이 바보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이쪽은 시간이 없거든. 일단 정리 좀 하고 얘기를 해도 하자고.

“크하하하하, 나를 속이다니! 겁 없는 놈이군.”

저놈이 도적단 두목이구나. 그런데 가만 보니 체형이 보통 인간은 아니다.

드워프와 인간의 중간 형태정도? 저런 체형을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보긴 봤는데, 그게 어디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이게 전생의 기억이라 가물가물 한 거 같기도 하고, 자주 본 체형은 아닌 것 같고…….

그런데 그때 도적단 두목이 말했다.

“얘들아,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다. 다들 본모습으로 싸워라.”

“본모습? 역시 변신한 거였군.”

“크하하하, 조금 다르지. 변신이 아니라 작아진 거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적들이 일제히 커지기 시작했다. 거의 5미터 정도로 두 배이상 키가 커졌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내 기억이 뭐였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이언트! 너희들 거인족이구나.”

“그렇다. 너희 소인족들이 평야를 점령하는 바람에 산속에 결계를 치고 살아야만 했던 우리가 이제 너희들을 처단하겠다.”

에고, 저놈들까지 튀어나왔구나.

도적단 두목의 말처럼 거인족은 험악한 산속에 거대한 결계를 치고 산다. 원래 그들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거의 원시인같은 생활을 하는데, 그중 마법을 지닌 몇몇이 인간과의 싸움을 피해 결계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인족들이 똑똑해지고, 또 작아져서 이렇게 도적단을 구성했다니. 보아하니 체격만 작아지고 힘은 그대로인 상태이니 상당히 무서운 전력이 아닐 수 없다.

거인들이 본모습을 드러내니 야수들이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현혹마법과 축복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 덤비는 것은 본능에 거슬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오직 스렉과 모리안만이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며 계속 공격했지만 거인들이 진형을 짜서 손에 든 무기를 붕붕 휘두르니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거인족의 두목으로부터 강렬한 마기를 느꼈다. 아까 작은 상태에서는 못 느꼈는데 본래 크기가 되니 갑자기 마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크하하하, 네놈의 몸에서도 마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경쟁자구나. 좋다.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결판을 내도록 하자.”

“그럴 수밖에 없겠군. 나는 칸 야쿰이다.”

“네놈이 밀림의 광왕 야쿰이었군. 소문으로 들었다. 나는 브롬, 거인족의 왕이다.”

광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었군. 나쁘지 않은데?

어쨌든 한 가지 좋은 점을 깨달았다. 브롬이 나를 경쟁자라고 부른 것을 보면 다른 마족의 계약자들의 눈에 내가 그들처럼 계약자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기를 뿜어내는 자는 무조건 그렇게 본다는 것이고, 자세하게 살피거나 구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브롬만 그렇고 다른 마족의 계약자들은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제대로 위장이 된 셈이라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나저나, 이 왕국 정말로 망하겠는데? 어떻게 마족의 계약자 둘이 같이 나타날 수가 있지.”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소리네에게 말했다. 그다지 큰 왕국도 아닌데 계약자가 둘이나 설치고 있으니 이거 안 망하면 정말 데빌 헌터에게 감사해야 할 거다.

덴판 제국만 해도 딱 한 명 나왔는데도 크게 휘청였다. 물론 그 한명이 황제여서 그런 거지만.

“어서 시작하자.”

브롬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성격이 급한 듯 했다.

계약자는 만나면 처리해야 한다. 그게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한 맹약이다.

“거인족 100명을 모두 죽이기는 조금 그러니 두목만 처리해야겠군.”

나는 결심을 하고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브롬, 너와 나 둘이 결판을 내자. 이긴 쪽이 진 쪽의 부하를 모두 흡수하는 것으로 하자.”

“크흠, 야수를 수하로? 그것도 나쁘지 않군. 거인족은 야수 길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알아. 곰을 고양이처럼 기르잖아. 내가 데리고 있는 야수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큰 놈들이라 거인족 취향이다.

그리고 사실 브롬도 자기가 패할 경우 부하들이 모두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족장이고, 부하들은 동족이니까.

“네놈을 죽여도 네 부하들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지. 물론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말이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도 약속하지. 네 야수들은 우리가 잘 길러주겠다.”

이것으로 약속은 끝났다. 남은 것은 둘 만의 대결 뿐.

나는 브롬 바로 앞까지 가서 섰다. 다른 거인들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기에 나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물러나 둥글게 공터를 만들었다.

야수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모리안 주변에 모여 얌전히 앉았다. 마치 새 주인을 가리는 전투를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듯한 느낌이다.

“와랏!”

브롬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거인족의 대결 규칙은 체격이 작은 쪽이 선공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래서 나한테 먼저 공격하라는 것 같았다.

마법을 쓰면 안 된다. 대결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말하자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원주민들도 그렇지만 거인들도 마법은 여성의 전유물이다. 남자끼리의, 특히 왕 끼리의 대결에서는 오로지 힘으로만 승부를 내야 승복을 한다.

상관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일대 일 대결을 걸었다.

내가 마법을 안 쓰듯이, 저쪽도 마족에게 받은 특수능력을 쓰지 못할 것이다. 물론 죽을 정도가 되면 쓰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단 다른 능력을 쓰게 되면 대결에서 이겼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스스로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압!”

내 지팡이가 브롬의 정강이를 때렸다. 브롬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곧 태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크하하하, 겨우 그 정도 힘으로 나 브롬에게 덤빈 거냐?”

“얼굴 찡그린 거 다 봤다.”

“그럼 이번엔 내 몽둥이 맛을 봐랏!”

위이잉

안 막을 거거든. 피할 거거든.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서 브롬의 몽둥이를 피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내 머리가 있던 지점을 지나 땅을 때렸고, 거의 지진처럼 땅이 갈라져버렸다.

“생쥐처럼 약삭빠르구나. 소인족은 비리비리하니 빠르기라도 해야지.”

보통 거인의 힘이 아니네. 마족과 계약하면서 힘이 몇 배는 세진 모양이구나. 원래부터 왕이었으니 제일 셌을 거고.

그냥 대결 안 하고 마법으로 어떻게든 제거할 걸 그랬나? 아니지. 여기서는 거인 100명을 수하로 거두는 게 중요하다. 솔직히 야수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했거든.

거인 100명까지 있으면 통운도 쳐서 그쪽 세력까지 다 먹어버리고 왕국을 위협할 수 있다. 딱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삭풍의 창을 꺼내 들었다.

“이 창에 찔리면 거인이라고 해도 단번에 죽는다. 조심해라.”

“크왓! 좋은 창이로군. 너를 죽이고 그 창은 내가 갖겠다.”

그건 그때 가서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삭풍의 창을 두 손으로 들고 브롬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