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209화 (209/250)

로엔의 마나뱅크 209화

*

확실히 적은 수로 큰 수를 이기면 명성이 급격히 올라간다.

요 며칠 새 다른 부족으로부터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나의 무혼에 경의를 표했다.

한 마디로 ‘너 강한 거 인정하니까 이쪽으로는 오지 말고 계속 문명인과 싸워라’라는 소리다.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2천의 토벌대를 일방적으로 부순 전적이 있으니 이번에 올 토벌대는 그 수준이 아니다. 만단위의 병단이 오는데, 그때는 주변 부족들이 알아서 힘을 모아주지 않으면 답이 없다.

답이 없으면? 그냥 다음 단계의 계획을 실행하면 된다.

바로 역공이다.

그 정도 병력이 움직이면 틀림없이 수비에 빈틈이 생길 터이니 그게 내가 노리는 바다.

그런데 그 경우 주변 부족들이 어떻게 될 지는 내가 알바가 아니다. 토벌대가 왔다가 내가 없다고 그냥 돌아갈 리는 없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인근 부족들은 토초화 될 게 뻔하다.

강한 적이 있으면 뭉쳐야 한다. 아니면 당할 뿐. 불을 지른 것은 나이지만 선택은 그들이 하는 거다.

지금은 그저 새로운 야수를 붙잡아 현혹시킨 후 강화하고 집단전 훈련을 시킬 뿐이다.

하루 한 마리, 목표를 삼고 포획사냥을 하니 이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이미 야수의 수가 50마리를 넘었다.

그리고 드디어 미리아가 찾아왔다.

“와, 렌. 그렇게 하니까 정말 원주민 같다. 풋, 남자 샤먼이라니. 상식 파괴야.”

“여자 워리어도 있는데 뭘. 아무튼 잘 왔어. 이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고 왔으니 어쩔 수 없지.”

“미안, 다른 사람에게는 말 안할게. 그리고 나는 나쁜 짓도 잘 해. 그냥 렌하고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되거든.”

“이런 애가 성녀라니, 하아. 알았어. 그럼 넌 뭐 할래? 샤먼은 내가 하는 중이고, 워리어는 마리가 맡았어. 그리고 저기 미스틱 엑스가 신상 역을 하고 있거든.”

“뭐야? 호호호호호호. 미스틱 엑스 아저씨는 저렇게 안 움직이는 거야?”

미스틱 엑스는 전신에 금칠을 한 채 지금도 단 위에 앉아있다. 그는 미리아가 자신을 보고 웃는데도 눈동자 하나 돌리지 않았다.

“이 지역 전체에 결계를 치는 중이거든. 결계 관리는 역시 미스틱 엑스가 전문이니 딱이지. 그런데 너 뭐 할 거냐고.”

“나야 무조건 마녀지.”

“마녀는 나라니까.”

“샤먼 말고 마녀. 그거 서로 역할이 달라. 보통 마녀가 겸임하기는 하지만 큰 부족은 따로 한다고.”

“어, 정말? 그거까지는 몰랐네.”

“마녀는 마법사 계열이라 피의마법을 쓰고, 샤먼은 엘프 비슷하게 동식물과 영혼을 이용해서 치유마법을 쓰거든.”

“내가 이미 피의마법을 쓰고 있으니까, 네가 샤먼 해 그럼.”

“아, 그래? 그럼 내가 샤먼 해야겠네. 쳇, 나도 피의마법 잘 쓰는데.”

얘가 자기 피를 뽑고 싶었던 거네. 미리아야, 마녀를 동경하는 것은 좋은데 그쪽으로 너무 가면 안 된단다.

“팔뚝 그어서 피 흘리는 거는 나 혼자로도 족하거든. 넌 성녀니까 샤먼 하라고, 영혼도 보고 동식물과 대화도 나누고.”

“응, 그러지 뭐. 결국 내가 하는 일은 어디서나 비슷한 거 같아.”

“한 우물을 파야지. 그럼 넌 이제부터 소리네라는 이름을 써, 나는 야쿰이니까 칸 야쿰이라고 부르고, 마리는 모리안, 미스틱 엑스는 그냥 금상이라 이름이 없고, 렉스는 스렉, 서피는 피스야.”

“알았어. 위대하신 칸 야쿰! 샤먼 소리네가 인사드려요.”

“쩝 샤먼 자리 빼앗기고 진짜 마녀가 되어 버렸네. 난.”

“남자 마녀라니, 너무 웃기다.”

“됐어. 그런데 넌 이제 근처 나무들을 이용해 엘프식으로 결계를 칠거야?”

“아니, 이곳에서는 그거 하면 안 돼. 옛날에 장로가 이쪽 칸 하고 계약을 맺었거든, 남쪽 밀림지대는 칸의 영역이라 엘프들은 힘을 안 쓰기로 했어.”

“그런 거였어?”

“응, 대신 마녀는 고목으로 조각을 해서 땅에 박음으로써 주변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 결계를 치잖아. 그거 할게.”

“맞다. 마녀는 그게 있었지.”

뭔가 조금 부족하다 싶었더니 영역의 경계선에 나무조각을 안 세워놨었네. 미리아가 오길 잘 했다. 역시 원래부터 이쪽에 인연이 있는 사람이 하나는 필요해.

미리아, 아니 소리네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나무로 조각을 해서 곳곳에 세웠다. 보기만 해도 귀기가 도는 그런 조각으로 딱 봐도 강력한 마녀가 세운 티가 났다.

이걸로 우리 부족은 누가 봐도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조각들을 볼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자들 중 하나가 왔다.

바로 마족의 계약자인 통운의 사자다.

그자는 이미 통운에 의해 마기를 받았는지 머리에 작은 뿔이 나 있었다. 반마족의 형태 그대로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이곳 밀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크로니스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야쿰이시여.”

“칸 야쿰이다.”

“밀림은 넓고 동족의 수가 적지 않지만 칸의 칭호는 우리 부족의 칸 통운님께만 허락됩니다.”

“하, 크로니스는 싸움을 걸러 온 것이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 이 경우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적이 강대하니 대결의 날짜를 정하고 그전까지는 다른 방법으로 경쟁을 하자고 칸 통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방법?”

“문명인을 얼마나 많이 죽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결 날짜까지 많이 죽인 쪽은 수하 셋을, 적게 죽인 쪽은 수하 하나를 동반하고 대결을 하자고 하십니다.”

“셋과 하나라.”

“대결은 일 년 후가 될 것이고, 그 사이 문명인에게 패하면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 거절한다.”

크로니스는 내가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하자 조금 당황한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거절에는 이유가 있고, 그는 그것을 알아내서 조율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크로니스는 곧 다시 나에게 물었다.

“정당한 규칙인데 거절하신다면 스스로 칸이라 칭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문명인과 싸우는 것은 내가 원래 해야만 하는 임무이지 내기를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수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지금 부족민이 많은 통운에게 유리한 것. 승부를 가르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지요?”

“다른 동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문명인의 왕국 하나를 먼저 멸망시키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하지.”

“그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야쿰께서는 아직 힘이 많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내 일은 내가 걱정한다. 통운은 왕국 하나도 멸망시킬 재주가 없으면서 감히 칸을 칭하려 하는가?”

“…….”

크로니스는 이를 악 물고 화를 참고 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왕국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모아온 세력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다른 동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라는 대목도 그렇다.

통운은 부족들을 통합하여 칸이 된 후에 문명인과 대대적으로 싸우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먼저 싸워서 칸의 자격을 얻자고 하니 애초의 계획과는 크게 다르다.

왕국을 멸망시키는 쪽이 칸이 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왕국을 멸망시키기 전에는 칸을 칭하지 못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칸 통운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훗, 과연 통운이 왕국을 멸망시킬 능력이 되는지 지켜보겠다고 전해라.”

크로니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왔다가 썩어가는 얼굴로 돌아갔다.

차라리 서로 일대일로 싸워서 결판을 보거나 그냥 부족전쟁을 벌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소리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들은 통운에 대한 정보와 저 사자라는 녀석을 보면 그는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자신의 전력을 보존한 채 주변을 선동하는 취미가 있는 거 같아.”

“우와, 나 그런 사람 제일 싫어하는데.”

“나도 싫어. 그래서 불을 지른 건데, 정말 전쟁을 벌이면 난 손가락 빨면서 응원해주도록 하지. 하하하.”

칸을 하고 싶으면 왕국을 멸망시켜야 한다. 이건 정식으로 합의한 내용이기 때문에 명예를 아는 부족민이라면 할 수밖에 없다.

며칠 후, 다른 부족들로부터 우리의 대결을 지지하고 인정한다는 사자가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는데, 대결 내용에 다른 동족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 들어가서 통운으로부터 더 이상 통합을 하자는 압력이 가해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당연하지. 자신의 세력은 뒤로 빼돌리고 동족의 피로 문명인과 싸우려는 자는 칸의 자격이 없다.”

나는 엄숙하게 선언했고, 다른 부족의 사자들은 크게 감명 받은 표정으로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렇게 나와 통운의 통 큰 내기는 시작되었고, 모든 부족들은 이 대결의 승자가 칸의 칭호를 쓰는 것을 인정했다.

자, 통운. 이제 너의 실력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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