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04화
2장 대륙의 힘
전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의지를 모두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수집 장치가 200개 정도 필요하다. 그것도 정확한 지점에 건설해야 하는데, 지도로만 확인해서 점을 찍은 거라 실제로는 수집 장치를 만들 수 없는 지점도 있을 테니 20개 정도는 더 지어야 할 거다.
200개의 토목공사를 왕국의 경계와 관계없이 진행해야 한다.
나는 우선 체프코트 가문의 관계자와 이야기를 했다.
“마나뱅크를 다시 찾자는 말씀이시오?”
“예, 마나뱅크는 존재합니다. 단지 모든 링크가 끊어지고 다시 연결이 안 될 뿐이죠.”
“그건 이론적으로 그럴 거라 믿소만, 그걸 어떻게 찾자는 거요?”
“전 대륙에 걸쳐 마법장치를 설치하고 사람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면 가능합니다.”
“허, 말이 쉽지.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구려.”
불가능하지 않다니까. 하면 돼. 하면.
나는 답답함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사실 조금 더 쉬운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기사용 마나뱅크를 법사용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커흠, 렌 경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려. 그런데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소이다.”
역시 마법사들은 지난 발표를 듣고 기사용 마나뱅크를 어떻게든 자기들이 쓸 수 있게 바꾸고 싶어 했군. 욕심이 안 날수가 없지. 그러나 마나뱅크의 단서를 쥐고 있는 미스틱 엑스라는 존재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
“저도 마법사이니 마나뱅크가 기사보다는 마법사에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미스틱 엑스 경께서는 로엔의 의지가 우선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의 실험을 도우면서 깨달은 건데, 충분히 변경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어떻게든 미스틱 엑스 경을 설득하면 되지 않겠소?”
“제 얘기가 그 얘깁니다. 대륙의 힘을 모아 그분을 설득하자는 거지요.”
“무슨 이야긴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구려.”
“대륙의 사람들이 모두 의지를 모으면 웬만한 기적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걸로 마나뱅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으면 좋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땐 기사용 마나뱅크의 용도변경을 위해 의식을 행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도와주신다면 제가 진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건, 미스틱 엑스 경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바꾸는 거구려.”
“이미 미스틱 엑스 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강제로 바꿀 수 있으면 그것도 세상의 섭리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고. 그래서 제가 방법을 생각한 것이죠.”
“아하, 이제 보니 렌 경께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마나뱅크를 원하고 계셨구려.”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도 마법삽니다.”
“알겠소. 지금이야말로 전 세계의 마법사들이 힘을 모을 때이구려.”
“예, 기사들도 협조할 것이고, 일반인들도 마족의 계약자들과 싸우기 위함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협조할 겁니다.”
“물론이오. 마나뱅크를 부활시키는 것은 전 대륙이 뜻을 모을 수밖에 없는 큰 일이 아니겠소?”
마나뱅크를 되찾자!
이보다 더 마법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테마는 없다.
동시에 기사용 마나뱅크가 이미 활성화되어 크리드 경을 비롯해 몇몇 상급기사는 수련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니 기사들도 더 이상 마법사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협조를 하기 시작했다.
기사와 마법사가 힘을 합치니 각 왕국들은 순순히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수집 장치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를 위한 자금도 지원을 해 주었다.
물론 그들이 현재 아는 수집 장치와 송신탑의 목적은 마나뱅크를 찾는 것이고, 마법사들은 그게 실패할 경우 기사용 마나뱅크를 변환하는 의식이 쓸 힘을 모으려는 속셈이다.
저마다 속마음은 다르지만 결국 힘을 합쳐서 일을 진행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나는 그걸 지으면 마나뱅크를 찾을 수 있다고만 말했고, 그걸 마나뱅크를 찾는데 쓰자는 말은 안 했다.
마나뱅크야 그냥 내가 찾아주면 되는 거고, 수집 장치와 송신탑까지 모두 완성되면 그때 비로소 마족을 막기 위한 결계 이야기를 꺼낸 후 바로 의식을 진행하면 된다.
“어쨌든 이걸로 마족의 계약자들이 눈치 못 채게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네. 하지만 그래도 그놈들이 방해를 하긴 하겠지?”
마나뱅크의 부활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기는 할 거다. 마법사들이 강해지면 아무래도 세상을 점령하기가 힘들 테니까.
이제는 그들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막는 게 아니라 그들이 공격할 생각을 포기하도록 하는 거다.
안 그러면 200개나 되는 수집 장치를 다 지켜야 하니 이보다 더 귀찮은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 중 하나를 찾아서 수집 장치를 역이용하는 방법을 흘리자.
그럼으로써 그들은 수집 장치가 완성되는 것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돕게 될 것이다.
나는 일단 마족의 계약자가 하나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팍팍 밀어주기 위해 계약자를 찾는 것이다.
*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왜 요즘은 마족의 계약자들이 안 나타나는 거지?
나는 정보원들의 보고서를 자세히 읽으면서 혹시라도 의심나는 부분이 있나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말 세상은 평화롭고, 마족의 계약자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예상했던 수집 장치를 파괴하려는 움직임도 전혀 없다.
마족의 후계자를 하나 찾아서 밀어주려던 계획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마족의 계약자들이 수집 장치를 파괴하려 자신이 나설 것 같지는 않다. 부수고는 싶어도, 괜히 나서면 표적만 되고 부순다고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하고 자신은 망하는, 그런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계약자 노릇을 해야겠군.”
비상수단이다.
이건 크리드 경을 비롯해 영지 내의 누구에게도 밝혀서는 안 되는 비밀임무다. 미리아도 안 된다.
나는 조용히 짐을 쌌다.
“혼자 외출하시는 거예요?”
“아, 실비아 공주. 그렇게 됐어. 잠시 조사할 것이 있어서 미스틱 엑스 경하고 마리만 데리고 갔다 올게.”
“크리드 경은 같이 안 가나요?”
“크리드 경은 기사들 지도해야지. 지금은 그들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시기니까.”
지도 받는 기사들 중 실비아 공주도 포함되어 있고, 그녀의 마나수련 능력이 아주 뛰어나 멀지 않아 정령기사가 될 것 같다는 보고는 받았다.
내가 그 부분을 칭찬하니 실비아 공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녀오실 때까지 수련하고 있을게요. 어쩌면 그때 정령계약을 할 수도 있겠네요.”
“오, 그 정도였단 말이야? 대단하네.”
나는 이제 침실에서도 정령기사의 보호를 받게 되었구나. 후훗.
“그런데 정령계약을 하면 혹시 출산에 영향을 미치나요? 아니면 마나수련 자체가 출산을 어렵게 하는 효능이 있다던가.”
“그런 건 없을걸. 이론적으로는 오히려 더 몸이 건장해져서 아이를 가지기 쉽게 되거든.”
결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이가 안 생기니까 살짝 불안한 모양이다.
내가 괜찮다고 하니 실비아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더욱 열심히 수련할게요.”
“응, 나도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당분간 영지에 머물면서 실비아 공주와의 시간을 더욱 많이 가지도록 할 테니 힘내자고.”
무슨 힘을 내자는 건지. 실비아 공주는 얼굴을 더욱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마차를 타고 남들 모르게 영지를 빠져 나오는 게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임무가 가장 비밀스럽고 음험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마족의 계약자 노릇을 해야 하니까 말이지.
“마기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웨어울프킹의 심장을 조금 가공해서 마기를 떼어내려고. 나에게는 삭풍의 창이 있어서 이게 없어도 마기를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네요. 이제 웨어울프킹의 심장은 필요가 없으니 활용해도 되겠어요. 그런데 컨셉은요? 마족의 계약자라면 고유의 능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마법으로 속일 건가요?”
“아니, 마법은 안 쓰고 비스트워리어로 활동할 거야. 여기 렉스를 살짝 분장시켜서 사자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마수로 만들고, 나도 적당한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삭풍의 창에도 해골 몇 개 걸고 할 거야.”
“풋, 그 정도면 누가 봐도 바바리언 출신의 비스트워리어라고 보겠네요.”
“암, 조금 무식해 보여야 남들이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할 테니까. 마리 너도 기사 그만두고 여자 바바리언으로 분장해. 대검 말고 도끼 들라고, 자이언트 액스 말이야.”
“노력해 볼게요. 바바리언의 행동패턴과 대화방식에 대한 데이터도 있긴 하거든요.”
“좋아, 그럼 넌 서피를 목에 걸고 다녀. 서피도 저렇게 반투명한 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하게 칠해서 화려한 모습으로 바꾸자고.”
“샤아아아, 나도 원래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 마계에서의 원래 육체는 그랬다.”
“오호, 정말? 소환할 때에는 항상 영체로 나와서 투명해 보이더니 진짜 육체는 꽃뱀이었구나.”
“샤아아아, 꽃뱀은 아니다. 꽃뱀은.”
“알았어. 화려하면 거기서 거기지 뭐 따지고 그래. 아무튼 적당한 아지트를 하나 찾아서 자리를 잡고 분장을 하자고.”
야수군단을 이끄는 비스트킹 야쿰, 그게 내 새로운 신분이다. 마리포즈는 여자 바바리언인 모리안이 되었고, 렉스는 스렉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서피는 피서다.
렉스와 서피는 왜 우리들만 멋지게 이름을 바꾸고 자신들은 앞뒤만 바꿨냐고 항의를 했지만 습관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너무 바뀌면 헷갈릴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신분으로 대륙의 남쪽 정글지대인 툼양토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