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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02화 (202/250)

로엔의 마나뱅크 202화

그릇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마족 1.5인분의 힘만 모으면 된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그냥 잡는 거도 아니고 힘을 남기고 가게 만들어야 하는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사람들의 의지를 모을 준비를 해 보자.”

준비는 미리미리 해 놓아야 한다.

결계를 치는 것은 내가 9서클에 도달한 다음의 일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때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여 힘을 주세요! 라고 외친다고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지를 모을 수 있어요?”

마리포즈는 상상도 안 간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생각만 한다고 해서 의지력이 발생하고, 그것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일단 결계를 생성하는 의식을 행할 동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게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해야 해. 그리고 그 간절함을 의지력으로 바꾸어 수집할 장치가 필요하고, 수집한 의지력을 한 군데로 쏴 주는 송신 장치도 있어야 하지.”

“그걸 전 대륙 요소요소에 설치해야 하는 거네요.”

“응, 대륙의 모든 왕국들이 수집장치와 송신탑 건설에 동의를 해야 하는 거야. 그걸 위해서는 커다란 대의명분이 필요하지.”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데빌 베인이 모든 왕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전 대륙에 걸쳐 토목공사를 한다고 하면 그들이 쉽게 허락해 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다른 마도가문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세우려는 송신탑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분석을 할 거고, 그게 힘을 모으고 한 군데로 보내는 장치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이 간다.

의지력만 모을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그걸 그대로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 입장이라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모으는 게 의지력이 아니라 생명력이나 영혼력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데빌 베인이 단숨에 대륙을 통일할 수도 있다.

의지력을 하나로 모으려면 그런 의심은 일절 없이 순수하게 믿어야 한다. 그것부터가 이번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우쳐 주는 부분이다.

거기다가 결계를 치기 위해서 그걸 건설한다고 발표하면 다른 마족의 계약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지금 그들이 쉽게 발호하지 못하고 숨어서 힘을 모으는 이유는 데빌 베인이 열심히 대응하는 부분이 크지만 다른 이유로는 경쟁자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예 결계를 쳐서 더 이상 다른 고위마족들이 물질계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들은 앞뒤 볼 것 없이 데빌 베인을 공격해 올 것이다. 물론 송신탑도 안전할 수 없다.

“결계 설치를 발표하느냐 안 하느냐도 문제인 거지.”

“그건 발표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의지력을 모으려면 속일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결과적으로는 그런데, 가능하면 발표하고 바로 의식을 행하는 게 좋다고 봐. 그러려면 송신탑 건설은 남모르게 진행해야 하고.”

“대륙 전체에 하는 공사를 어떻게 남모르게 해요?”

“공사 자체를 모르게 하는 건 아니고, 그게 결계를 위한 거라는 것만 숨기는 거지.”

“그렇네요. 그럼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군요.”

“응,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마나뱅크의 부활을 떡밥으로 던지면 어떨까 해.”

“마나뱅크를 다시 다른 마법사에게 공개하시려고요?”

“그 부분이 애매한 건데, 정말 공개할건지 아니면 떡밥만 던지고 낚시를 할 건지 생각해 봐야겠어.”

“그게 낚시면 전 세계의 마법사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지 않을까요?”

“실패했다고 하는 거지. 아니면 일부만 성공했거나.”

“렌 경께서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대로 진행하셔도 될 거예요.”

“끄응, 사실 대충 계획은 있는데 아직 조금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천천히 고민을 해 봐야 해.”

이렇게 하면 저게 문제고, 저렇게 하면 이게 문제인 상황이다.

세상 일이라는 게 다 그런 편이기는 하지만, 대륙 전체를 상대로 떡밥을 던지는 문제니까 뒷파장이 어떻게 일어날지 충분히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놔야 하는 것이다.

마나뱅크를 공개하고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의외로 쉽다. 물론 기존의 마나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새로 계좌를 만들고 이용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은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나뱅크가 활성화 되면 또 다시 마법사 우위의 시대가 온다는 점이다.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셈이고, 크리드 경과 같은 최상위 기사는 탄생하기 어렵게 된다.

실제로 로엔이라는 이름은 마법사들에게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지만, 기사들에게는 은밀하게 원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데빌 베인의 활동을 하면서 새삼 깨달은 거지만, 고위마족이나 그 계약자들과 싸우려면 크리드 경처럼 뛰어난 기사가 접근전으로 붙어줘야 마법사가 편하다.

결국 마법사와 기사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 발전해야 하는 거지 한쪽이 너무 강해지면 전체적으로는 약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만 좋은 시스템은 의지력을 모으는 데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세상에 마법사는 아주 극소수이고, 이번에 모아야 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지력이다.

“좋았어. 이번에 부활하는 마나뱅크는 기사를 위한 장치라고 하는 거야.”

“예? 마나뱅크가 마법사 아닌 기사에게도 도움이 되나요?”

“일반 기사는 몰라도 크리드 경 정도가 되면 확실히 도움이 되지. 마나를 움직일 수 있으니까.”

“게이트는 어떻게 열어요?”

“정령력으로 열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수준의 상급기사용인 거지.”

“아, 그건 가능하겠네요.”

“일단은 기존의 마나뱅크로 비슷한 효과를 내게 한 다음에, 나중에 내가 9서클이 되면 정말로 정령력으로 작용하는 마나뱅크를 만들어서 따로 관리를 하면 될 거 같아.”

어차피 지금 그걸 만들었다고 해도 이용할 사람은 크리드 경 딱 한명 밖에는 없다. 다른 정령기사가 탄생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터. 하지만 그들에게 뻗어나갈 수 있는 미래를 제시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호응을 해 주고 수련에 박차를 가하리라.

“마법사들의 반발은 없을까요?”

“그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 기사용 마나뱅크를 만든 후에 기존의 마나뱅크를 되찾는 연구를 하겠다고 하면 되거든.”

“헤헤, 그러면 되겠네요.”

“그리고 기사가 정령과 계약을 하려면 어차피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잖아. 기사가 강해진다고 해서 마도가문이 크게 약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네.”

“좋아, 그럼 이걸로 가자.”

역시 마리포즈와 대화를 하다보면 생각이 잘 정리된다. 문제점을 바로 집어서 질문을 해주고, 보완점도 정확하게 계산해서 이야기를 해 주니 편하다.

나는 영지로 돌아가면서 계속 기사용 마나뱅크에 대해 어떻게 발표를 할지 생각했다.

제대로 된 떡밥 하나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왕국들과 기사, 마법사가 모두 나에게 적극 협조하게 만들려면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

*

대륙에 놀라운 소식이 하나 알려졌다.

그것은 바로 신비의 마법사 미스틱 엑스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미스틱 엑스는 바로 전설의 대마법사 로엔의 마지막 제자라고 했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로엔의 유물과 마법서를 얻고 로엔의 숨겨진 연구실에서 인공자아에 의해 성장한 마법사라는 것이다.

미스틱 엑스는 10대 마도가문의 대표를 모아 놓고 정식으로 발표를 했다.

“스승님께서 남기신 유서에 의하면, 마법사와 기사는 서로 힘을 합해야 하는 관계이지 경쟁하고 우열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마나뱅크가 마법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는 데 큰 도움을 주겠지만 그게 기사들의 길을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하셨고, 이에 다른 마나뱅크의 제작을 구상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마나뱅크라면 무엇입니까?”

마법사들은 마나뱅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런데 로엔의 유물을 이은 자가 그걸 언급하니 그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구경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 왔다. 저렇게 흥분해서는 마법 술식조차 제대로 못 쓸 텐데, 마도가문의 대표씩이나 되는 자들이 평정심이 좀 약하군.

뭐, 이해는 간다. 그들이 이곳까지 만사 제치고 달려온 이유가 혹시 마나뱅크를 부활시킬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니.

미스틱 엑스는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이 아닌 자아에 의해 자란 자답게 말도 잘 안 하고 감정자체가 거의 죽어있다는 컨셉에 딱 어울리는 느낌이다.

“데빌 베인의 크리드 경의 경우를 보면, 경지에 올라 몸 안의 마나를 스스로의 의지로 다룰 수 있게 된 기사는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른 정령기사는 정령력으로 게이트를 열고 마나뱅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로엔 경의 이론입니다.”

“으음, 그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구려.”

“기사용 마나뱅크가 활성화 되면 깨달음을 얻은 기사는 누구나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야말로 고위의 마도사에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강함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마나뱅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이 극에 달한 기사만이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기존의 마나뱅크는 하급 마법사도 쓸 수 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을 거라는 게 로엔 경의 예측이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커흠, 그건 좋은 의견이라고 봅니다만, 지금은 우리 마법사들의 마나뱅크가 사라진 상황이 아니겠소? 마나뱅크를 다시 만들든 사라진 것을 복귀하든 먼저 마법사들 것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만.”

“좋은 의견이십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8서클에 불과해서 마나뱅크를 새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단지 로엔 경이 거의 만들어 놓았던 기사용 마나뱅크를 보완해서 활성화 시키고 관리를 할 정도는 됩니다. 이에 여러분들의 협조를 얻고자 이렇게 발표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걸 마법사용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까?”

“아직 활성화를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직접 움직이는 것을 봐야 용도변경을 하든 겸용으로 개량을 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구려.”

“이에 저는 여러분들의 협조를 구함과 동시에, 사라진 정령술에 대한 지식을 공개하니 그것을 각 왕국의 재능 있는 기사들에게 대가를 받지 않고 전해줄 것을 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대가를 받지 않고…….”

“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저럴줄 알았다. 꼭 받을 때는 공짜로 받아놓고 줄 때에는 뽑을 거 다 뽑고 주려고 한다니까.

하지만 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면 그게 힘들어지지. 적어도 마도사는 언령의 영향을 받으니 맹세를 어기면 상당한 타격을 입거든.

나는 십대가문의 대표들이 혀를 쩝쩝 다시면서도 협정서에 사인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순히 그들뿐 아니라 정령술에 대한 지식을 배우기 전에 맹세를 하는 것을 규칙화 했고, 이것으로 정령술은 대륙의 마법사와 뛰어난 기사들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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