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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01화 (201/250)

로엔의 마나뱅크 201화

로엔의 마나뱅크 9권

1장 힘을 담는 그릇

그레진저를 소멸시킨 후, 우리는 뒤처리를 했다.

크리드 경은 신전 외부로 나가서 해적들을 상대했는데, 해왕호의 선원들과 그림녹의 부하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나서서 진실을 밝히자 다들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순순히 크리드 경의 지시에 따라 유적을 벗어났다.

그 뒤 크리드 경과 미리아는 먼저 미스틱 게이트로 돌려보내고, 나와 미스틱 엑스는 여전히 신전에 남아 이곳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섀도우 플레인 전체에 결계를 치는 작업.

그걸 위해서는

일, 4대 대정령의 힘이 모두 필요하고,

이, 고위마족 셋을 동시에 소멸시켜 기폭제로 써야 한다.

삼, 엄청난 양의 의지력을 미리 모아 놓아야 하고,

사, 일단 마법진이 발동한 이후에는 의지력이 모두 소모되기 전에 그것을 보충할 힘의 근원과 연결을 해야 한다.

여기서 사 번은 마나뱅크의 마나가 있으니 준비가 된 셈이다.

일 번은 내가 직접 정령계를 돌아다니면서 대정령의 동의를 구하면 되는데, 우선 포트라부터 만나서 담판을 지을 계획이니 내가 9서클의 경지에 도달하면 진행할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이 번인데, 고위마족 셋을 동시에 소멸시키는 게 말이 쉽지 그레진저 같은 놈 셋을 상대하려면 정말 미칠 거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이쪽 피해가 클 것이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 신전을 보니 좋은 수가 떠올랐다.

“일단 그레진저의 힘은 고스란히 남았고, 삭풍의 창을 분해하면 이것도 고위마족 반 명분의 힘은 발휘할 거란 말이야. 가만, 발데스 스팅도 분해하면 힘이 되려나? 이건 반 명분까지는 안 되겠네.”

대략 합쳐서 1.5인분이다. 이제 1.5인분만 더 모으면 이 번이 해결되는 거다.

그러니까 고위마족 셋이라는 게 힘의 크기를 말하는 거지 정말로 딱 셋을 모아서 한 번에 소멸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문제는 파즈스의 삭풍의 창이나 그레진저처럼 힘을 남겨놓고 소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또 그 힘을 손실 없이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신전이 그 장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내 마나뱅크처럼 궁극마법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마나뱅크와 다른 점은 아공간이 아닌 현실공간을 변형시켜서 만들었다는 점인데, 어떻게 보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신 무한한 힘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용량의 한계가 있는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엄청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막대한 힘을 저장할 수 있는 곳이고, 그걸 제어, 조종하는 힘이 있다.

지금 미스틱 엑스는 신전의 에너지원 위에 앉아서 그레진저의 힘을 저장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곳이라면 충분히 고위마족 세 명분의 힘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길 관리하는 자아가 파괴된 점인데, 새로운 관리자를 설정해야겠지?”

“제가 할까요?”

“마리야, 너는 나를 보호해야지. 솔직히 지금 난 너 없으면 좀 힘들어.”

단순한 보디가드가 아니라 마리포즈는 내 비서와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원하는 데이터가 바로 튀어나오고, 내가 설계도를 그리면 알아서 분석한 후 잡다한 미세조종까지 싹 해 버리는 게 바로 마리포즈라는 자아다.

“넌 안 돼. 그런데 문제긴 문제다. 여기 관리할 정도면 고급 자아가 필요한데, 지금 나는 하급 자아밖에 못 만드니…….”

고급 자아는 9서클이 되어서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만들 수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민민포즈처럼 기존의 자아를 분열시켜야 하는데, 이게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가능하면 안 하는 게 좋다.

하지만 지금 이 신전을 관리하려면 그 방법이라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마리포즈는 이미 한 번 분열을 해서 다시 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고, 마나뱅크의 자아인 미스틱 엑스라면 분열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마나뱅크 자체가 훅 날아갈 수 있는 것도 문제다.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역시 아니야. 자아의 분열은 성공해도 수명을 단축시키지. 마나뱅크는 앞으로도 반영구적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괜히 분열했다가 수명이 짧아지면 그건 정말 못할 짓이지.”

나는 결국 포기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내가 직접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는 거다.

“에고, 당분간 이 신전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가. 쩝.”

관리자가 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곳의 에너지원과 내 몸 안의 마나서클을 연동시키는 방법을 써야 하니 신전을 벗어나는 순간 내 마나서클도 멈춰 버린다.

“렌 경, 어차피 이곳에 계실 거라면 그냥 제가 관리하는 게 나을 거예요.”

마리포즈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보니 마리포즈의 말이 맞다. 그냥 그녀에게 이곳을 관리하라고 하고 내가 여기서 지내면 되긴 된다.

“예, 제가 하는 게 맞아요. 그 경우 렌 경이 꼭 필요할 때에는 이곳을 나가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다른 마족의 후계자가 나타나면 싸우러 가야 하니, 마리포즈가 여기를 지키는 게 맞긴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기 싫을까?

정말 나는 이제 비서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 사장이 된 걸까?

그러고보니 포트라는 비서가 없나? 설마 본인이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는 거는 아니겠지?

자꾸 생각이 옆으로 센다. 감정적으로 마리포즈에게 이곳의 관리를 맞기는 게 싫은 것이다.

사실 마리포즈를 처음 내 비밀연구실에서 데리고 나올 때, 마음속으로 이제는 그녀를 가두어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시 생각이 나 버렸다.

어쩔 수 없는 건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죽이고 이성에 따라 판단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가 쓰고 있던 침묵하는 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관리해 줄게.”

“우왁! 깜짝이야.”

정말로 놀랐다. 이게 웬 뜬금포냐?

침묵하는 모자는 내가 습관처럼 쓰고 다니지만 지금까지 나한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원래 말을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모자니까 당연히 거의 말을 안 하지만, 정말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한 마디도 안 할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내 제자였던 엘시아에게 말을 걸고, 내 마나뱅크의 계정을 그녀에게 알려준 뒤로 다시 침묵했다.

만든 것은 난데, 이놈은 나는 무시하고 여제자한테만 기적을 일으켜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습관적으로 쓰고 다닐 뿐, 아예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입을 열다니!

“너 왜 갑자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자아다.

“네가 원했으니까.”

“난 항상 네가 말하기를 원했거든.”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았어. 나는 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 너는 내가 말을 안 해도 충분히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건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왜 말을 한 건데?”

“반복질문은 멍청해 보이니까 하지 마. 네가 진심으로 원해서 말해준 거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는데?”

“마리포즈를 여기 남기기 싫다고 했잖아. 그녀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고.”

“어, 그러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지.”

“이해해, 나도 마리포즈가 여기 관리자가 되는 게 싫거든. 그녀는 내 조카와도 같은 존재이고 자아가 만든 자아이자 점점 성장하고 있으니 더욱 많은 경험을 쌓기를 원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내 생각과 성격은 기본적으로 너와 같아. 태어난 후 수십 년간 네 생각만 읽으면서 지냈으니까.”

“그런가? 그렇겠네. 정말.”

“나를 벗어서 지금 미스틱 엑스가 앉아 있는 장소에 놔. 그러면 내가 저걸 관리해 줄게.”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지금까지는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이제는 조금 안정된 장소에서 쉬고 싶기도 하거든.”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나는 침묵하는 모자를 벗어서 신전의 에너지원 위에 놓았다. 그러자 우우웅 하는 공기 진동과 함께 신전 전체가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스틱 엑스가 살짝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빠르다. 침묵하는 모자는 대단히 훌륭한 관리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의 나에게 필적할 만큼.”

“응, 내가 만든 자아 중 가장 뛰어난 게 너와 저 녀석인 건 맞아. 사실 다시 9서클이 되어도 너희같은 존재는 만들어내기 어려울 거야.”

그리고 마리포즈도. 얘는 내가 만든 게 아닌데 정말 기적처럼 훌륭한 자아로 성장했다.

침묵하는 모자가 마리포즈에게 더욱 경험을 쌓게 해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너희 셋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아일 거야. 다들 성격도 좋고.”

나는 마리포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생의 나는 결혼도 못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었지만 이렇게 아이와도 같은 존재를 남기기는 했구나.

로엔의 인생도 결코 허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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