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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00화 (200/250)

로엔의 마나뱅크 200화

검은 날개는 질량이 있는 물질이라기보다는 마기가 뭉쳐져서 형성된 에너지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감각에는 마치 실제 날개처럼 무게감이 느껴진다.

영혼을 모아 만든 삭풍의 창처럼 저것 역시 일종의 병기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삭풍의 창처럼 영혼을 파괴하는 힘이 있을 지도 모른다.

“크리드 경, 저 날개에는 접촉하지 마세요.”

“말 안 해도 저런 기분 나쁜 것을 벨 생각은 없어.”

크리드 경은 효율중시에 현실주의자기 때문에 자신의 검이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환상은 가지지 않는다. 그의 신념은 ‘벨 수 있는 것을 벤다’다.

크리드 경은 여전히 천정을 딛고 거꾸로 달리면서 그레진저의 머리를 노렸다. 그에게 있어 날개는 하늘을 나는 것보다 추진력으로 천정에 달라붙어 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인 것 같다.

그레진저는 크리드 경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게 상당히 기분 나쁜 듯 계속 피하면서 크리드 경을 노렸다. 거기에 크리드 경이 가끔 천정에서 떨어져 날개를 노리니 그쪽에 집중하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레진저는 나에 대한 경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내가 들고 있는 삭풍의 창을 유심히 보았다.

“그게 내 몸을 관통한 무기인가?”

얼라? 이놈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네.

그레진저는 마나파동포로 인한 상처를 삭풍의 창에 당한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힐만한 무기는 이것밖에 없는 모양이지?

확실히 마법으로는, 그것도 마법진이 아닌 단순한 주문마법으로는 그런 파괴력을 내는 게 불가능하긴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파동포가 사기라고 불릴 만 한 것이다.

나는 냉정하게 서로가 가진 무기에 대해 분석을 해 보았다.

그레진저는 브레스와 방금 생성한 날개,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마법도 사용한다고 했는데, 싸울 때 마법을 쓰는 성격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마법도 주의하긴 해야 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놈은 9서클 마법사잖아!

우와, 이거 냉정하게 생각할 게 아니네.

이 신전의 힘을 볼 때 그레진저가 9서클의 경지에 오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저놈은 지금 마법을 안 쓰고 육체능력으로만 쓸 수 있다.

어째서지? 그레진저가 9서클 마법을 쓴다면 이 싸움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질 것이다.

쓸 수 있는데 안 쓰는 건가? 싸움은 오직 타고난 육체로만 하는 성격일지도…….

그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 지금 그레진저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거다. 적어도 9서클의 마법은 못 쓰는 거겠지.

“뿌우야, 잠깐 나와 봐.”

“뭐냥, 나는 드래곤과는 싸우기 싫지만 원한다면 돌격해 주겠당.”

“싸움은 됐고, 포트라한테 저놈이 왜 마법을 못 쓰는지 아냐고 한번 물어봐봐.”

싸움 도중이라 급하긴 한데, 이걸 알아야 수를 쓸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놈이 마법까지 써대면 굉장히 황당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데 안 쓰는 건지 아니면 아예 못 쓰는 건지를 알아야 한다.

“알았당.”

뿌우가 있으니 실시간 질문이 돼서 좋구나.

그런데 그때 검은 날개가 펄럭이더니 그레진저의 발목을 물고 있는 렉스를 노렸다.

“에잇!”

나는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 삭풍의 창으로 검은 날개를 찔렀다.

파캉

역시 저 날개는 무기였던 거군. 예상이 맞았다. 삭풍의 창과 부딪친 날개는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을 냈다. 느낌으로 보아 날개에 접촉하면 육체와 영혼 동시에 타격을 받을 것 같다.

그나마 질량병기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막을 만 했다. 삭풍의 창과의 상성도 괜찮은 듯 서로 반발하니 적어도 막을 수는 있다.

나는 계속해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검은 날개로부터 렉스를 보호했다.

다른 한쪽 날개는 빗자루처럼 천정을 쓸면서 크리드 경을 노렸는데, 크리드 경은 정말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또 할 만 하다.

어쨌든 서피와 렉스가 그레진저의 마기를 빨아먹고 있는 중이니 시간이 흐르면 그레진저의 힘이 약해질 것은 명확하다. 그게 언제냐는 게 문제긴 한데, 검은 날개로 내가 아닌 렉스를 먼저 노린 것을 보면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피말리기식의 흡수공격은 강력한 자와 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어렵다. 그냥 신경을 분산시키는 게 주요 목적이라고 봐야 한다.

단번에 승부를 낼 마나파동포 같은 공격이 먹혀야 한다. 그래야 승부가 난다.

마나파동포를 다시 한 번 쏠 수 있을까?

나는 미스틱 엑스를 보았다. 미스틱 엑스는 나를 대신해서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열 수 있다.

이번에는 다른 쪽 심장을 노려서 쏘는 쪽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봤다. 그 기회를 내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렌, 저놈 진짜로 마법 거의 못 쓴당.”

뿌우가 돌아왔다. 그는 꽤 기분이 좋은 듯 오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오, 정말? 이유가 뭐래?”

“다른 세계로 완전히 옮겨가기 위해서는 이쪽 세계의 마법을 포기해야 했뎅. 그리고 나도 저놈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당. 저놈 허당이양.”

“그건 또 뭔 소리야?”

“원래 드래곤은 대정령과 계약을 한 존재라서 내가 무서워하는 거거등, 대정령과 계약한 존재를 하위 정령인 내가 공격하면 난리가 나니깡. 근데 그 계약 파기됐뎅. 이세계의 존재와는 계약이 자동 파기랭.”

“아하, 역시 고위마족은 물질계에서 힘을 잘 발휘할 수가 없구나.”

그레진저의 문제점을 알겠다.

저놈은 지금 자신이 이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살짝 망각하고 있다. 원래 물질계에 살았던 자였기에 싸우면서 옛날 생각을 하는 거다.

어쩐지 무리를 하더라니.

하지만 그레진저는 지금 이계의 존재, 즉 고위마족에 불과하다. 현재 자신의 세계에서 그토록 원하던 불멸자가 되었지만 이곳 물질계에서는 옛날보다 오히려 못한 면이 있을 정도로 힘이 제한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안심도 되니 슬슬 다시 마나파동포를 쓸 기회를 만들어보자.

나는 결심을 하고 비행마법을 시전해 하늘로 몸을 띄웠다.

적어도 비행능력만 따지만 나는 크리드 경보다 훨씬 능숙하다. 마법사는 원래 하늘을 나는 존재니까.

“렉스야, 물고 늘어지지 말고 그 날개 피해. 서피 너도.”

쟤들은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마기 빨아먹는 재미에 영혼이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니 렉스는 오히려 크왕 하게 부르짖으며 발목을 물었던 입으로 닥쳐 들어오는 검은 날개를 물어뜯었다.

“크왓! 어떻게 생명체가 내 섀도우 윙을 물 수가 있지?”

그러게. 저거 물어도 되는 건가?

“쿠오오, 이놈 이제 보니 상급마수구나. 영체를 물어뜯어 삼킬 수 있는 능력까지 있는 놈이 어떻게 물질계에 버젓이 존재할 수 있지?”

아항, 그러고 보니 렉스는 섀도우 플레인에서 셰이드도 물었지.

미안하다. 렉스야. 내 너의 능력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전개다.

그레진저가 비장의 무기로 소환한 저 섀도우 윙은 물질계의 존재라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맞다. 그런데 렉스는 오히려 이게 웬 닭날개냐는 느낌으로 가뿐하게 물고 마기를 빨아먹고 있다. 렉스의 표정을 보건데 복사뼈의 상처보다 저 날개로부터 빨리는 마기의 양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것을 본 서피는 순간적으로 다른 날개에 시선을 주었다. 자신도 그쪽에 붙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서피야, 너는 안 되니까. 마음 비우고 그 날개나 빨아라.”

“샤아아, 알겠다.”

역시 서피는 똑똑해서 자기 분수를 알아.

나는 크리드 경을 노리는 검은 날개를 삭풍의 창으로 찌르며 미소를 지었다.

뿌우는 지팡이 창을 들고 뇌전을 이용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미리아는 다시 천정 쪽으로 덩굴을 확산시키며 계속해서 그레진저의 전신을 덩굴로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미리아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외쳤다.

“신성한 힘이여. 사악을 봉인해 주세요. 마기봉인!”

촤아아아아

“오옷, 이건 뭐냐!”

사방에 자라있던 덩굴이 갑자기 요동을 치며 그레진저의 몸 쪽으로 대량의 신성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성력은 마기를 봉쇄하는 힘이 있었다.

“쿠오오오오오! 어떻게 이런 힘이!”

“꿈에서 아빠가 말했어. 내 신성력은 보기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물질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이고 현재 유일하게 남은 신의 파편과도 같다고. 이계의 존재인 너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성이야.”

미리아의 말이 맞다. 신성력이야말로 마기의 천적과도 같은 힘이지. 그리고 성녀는 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물과도 같은 존재인 거고.

주인이 나타나면 객은 힘을 못 쓰는 법이다.

미리아가 언제 저런 힘을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그레진저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검은 날개조차 덩굴이 뿜어대는 신성력에 대항하느라 파르르 떨리며 굳어버렸다.

이때다!

“미스틱 엑스, 가라!”

미스틱 엑스는 즉시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열었다.

“크왓, 좋다. 언제까지 나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지 보자.”

그레진저는 자신의 육체가 잠시나마 봉인된 것에 크게 자존심이 상한 듯 미리아를 노려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브레스다. 이번에는 미리아를 노리고 쏘려는 거다.

나는 즉시 동상을 움직여 미리아의 앞에 방어막을 쳤다. 그리고는 나 자신도 미리아의 앞에 날아가서 땅에 삭풍의 창을 꽂고는 주문을 시전 했다.

“공간왜곡 결계!”

우우웅

삭풍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주변으로 퍼졌다.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마법은 브레스에 의해 깨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삭풍의 창으로 인해 브레스의 힘이 약화될 것이다.

일차적으로 동상에 의해 막아지지 못해도 훨씬 약화될 터이니 이정도면 어떻게든 된다. 그래도 못 막으면 내가 입고 있는 결계로브의 힘이 있다. 어쨌든 미리아에게까지는 브레스의 힘이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만 막으면 이긴다!

나는 이를 꽉 다물고 버티기로 했다.

“죽어랏!”

화르르르륵

“마나파동포.”

이번에도 두 힘이 동시에 개방되었다.

브레스에 맞은 동상이 가루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내가 친 공간왜곡 결계도 계란 껍질 깨지듯 힘없이 부서졌다. 그러나 역시 삭풍의 창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밀려오는 브레스의 힘을 둘로 갈랐다. 동상과 결계로 인해 힘이 반감된 브레스였기에 삭풍의 창으로 감당이 되었던 것이다.

절대적인 공격마법이 내 앞에서 둘로 갈라지는 광경은 어떻게 말하면 장관이었지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크르르르, 이건. 설마 이게 삭풍의 창의 힘이 아니었다니!”

그레진저는 오른쪽 가슴에 뚫린 구멍을 보며 경악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미스틱 엑스의 공격은 정확하게 그의 오른쪽 심장을 파괴했고, 두 개의 심장을 모두 잃은 그는 더 이상 육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승부는 난 것이다.

“이 때다. 마력 봉인!”

촤아아아아아

시동어는 내가 외쳤지만 실제로 이 힘을 작동시킨 것은 미스틱 엑스다. 그는 신전의 에너지원을 총동원하여 그레진저의 몸에 남겨진 마력이 소멸되지 않도록 막았다.

처음 계약대로 이쪽이 이긴 이상 저 힘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안 돼!”

“안 돼긴, 너의 힘은 물질계의 평화를 위해 쓰일 테니 곱게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나는 차갑게 외치고는 마지막으로 그레진저에게 추방 주문을 사용했다.

원래 고위마족에게는 별 효과가 없는 추방주문이었지만 이미 모든 힘을 잃고 약간의 의식만 잔류사념처럼 남아있는 그레진저에게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냥 놔둬도 사라질 테지만 이렇게 추방에 의해 쫓겨나면 기분이 아주 더럽다고 배웠거든.

꼴좋다. 이 그지 같은 드래곤 놈아.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사라져가는 그레진저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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