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94화
한번 도망간 후사는 어디로 갔는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배에 털이 다시 난 다음에 올 생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적 중앙을 목표로 계속 나아갔다. 후사가 해골을 놓은 위치를 토대로 유적의 구조를 분석하니 어느 정도 중앙으로 가는 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막힌 통로를 부수면서 나아가니 드디어 통로를 구성하는 벽의 색이 바뀌면서 꽤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벽은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백금의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미스릴이네요. 돌은 흑요석의 일종인데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단단해요.”
“허, 마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대단해 보이는군. 저 미스릴 문양이 살짝 빛나는 것은 마법의 효과 때문인가?”
“맞아요. 크리드 경.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벽을 함부로 부수면 안 될 거 같네요.”
이 유적은 살아있다.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아마 내부의 벽을 부수면 침입자로 인식하고 방어체계가 발동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는 뭐가 나타나도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 돼요. 설령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럼 막거나 피하기만 해야겠군.”
“예, 가능하면요.”
가드가 나타났을 때 그걸 해치우면 안 된다. 그러면 더 강한 가드가 나타나거나 아예 유적 자체가 공격을 해 올수 있기 때문이다.
심하면 통로 자체가 무너져서 수천 톤의 바위에 깔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유적 내에서는 가능한 한 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일단 일행 전원에게 동화를 걸었다. 이것은 투명마법과는 또 다른 형태의 은신마법으로 우리의 몸 표면이 유적의 색과 모양처럼 변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와, 내 피부가 시꺼멓게 변했어. 미스릴 문양도 있네.”
미리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동화가 숲이나 산악지대같은 야외뿐 아니라 유적 내부에서도 걸 수 있다는 건 처음 안 모양이다.
“사실 흑요석의 색깔과 질감은 몰라도 미스릴 문양까지 흉내를 내기는 쉽지 않아. 그러나 나는 저 문양의 의미를 알 수 있으니 흉내도 낼 수 있는 거지.”
“어, 저거 해독이 되? 내가 보기에 저거 룬어가 아닌 거 같은데.”
“응, 드래곤의 문양이야. 원래는 조금밖에 몰랐는데 저번에 헬마니움 산에 갔을 때 제대로 배웠어.”
“아! 그럼 여기는 드래곤의 유적인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여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거라는 뜻이지.”
나는 나름 긴장을 하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유적인데 아직까지 작동하는 걸로 봐서는 드래곤들 중에 9서클 마법사가 있었다는 전설은 사실인 거 같아. 아무래도 룬어 자체가 그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도 진실일 지도 모르고.”
“에이, 설마. 그건 아닌 것 같아.”
“나도 거기까지는 믿지 않았는데, 저 드래곤어는 룬어처럼 자체적으로 마력을 지녀. 적어도 드래곤어가 룬어로 인해 만들어졌던가, 반대로 룬어가 드래곤어를 변형시켜서 만들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드네.”
그리고 드래곤어가 룬어보다 더욱 강력한 느낌도 든다. 심지어는 백마법조차 거의 차별 없이 구현해 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인데, 이건 정말 대단한 거다.
이걸 정말 모든 드래곤이 썼다면 드래곤들은 모두 마법사에다 백마법까지 쓸 수 있다는 소리가 되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드래곤이 거의 없지? 있어도 인간과는 거의 접촉을 안 하고 자신의 구역 안에 강력한 결계를 치고 숨어서 잠만 잔다. 심지어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의 드래곤은 지성체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그냥 본능적으로 결계능력이 있는 거대 마수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괜히 내려진 게 아니다.
“그런데 드래곤들은 거대하잖아. 하늘도 날고. 그들이 왜 이런 식의 통로가 있는 유적을 만든 걸까?”
“벽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로 볼 때, 여긴 드래곤을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자들의 신전이야. 그러니까 그때에는 우리 인간이 드래곤을 신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아하, 그러다가 마법도 배우고 어쩌고 해서 인간 자체의 문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학설 말이지?”
“맞아. 엘프들에게 물으면 조금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엘프들이 그 부분은 잘 이야기를 안 해주잖아.”
“응, 역사 이전의 정보는 장로만 알 수 있는데, 그걸 남에게 말하면 안 되는 규칙이 있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나 본데, 혹시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일단 단서만 찾으면 포트라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사실 포트라도 역사 이전의 이야기는 안 해준다. 알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을 보니 정말 사정이 있는 거다.
하지만 단서를 찾아서 물어보면 대답을 해 주는 게 계약자와의 관계다. 그러니까 질문을 구체화 하면 되는 셈인데, 모처럼 이런 초고대 유적을 찾았으니 꼭 단서 하나쯤은 나와 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오히려 후사보다 고대 드래곤의 단서에 더 신경이 쓰일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후사에게 집중을 하기로 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팔면 꼭 실수를 한다. 아무리 내가 마족의 계약자와 싸우는 데 이골이 났어도 그들이 약한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측에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싸움인데 집중을 안 하면 후회할 수도 있다.
“후사의 텔레포트 능력 말인데요.”
“오, 더 좋은 대처방법이 생각났나?”
크리드 경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아까 마법으로 차단을 하겠다고 하는 게 그다지 자신 없게 들렸나보다.
“그건 아니고 생각해보니 야외도 아닌 유적 내부에서 랜덤하게 텔레포트 할 리는 없고요. 가는 곳이 정해져 있을 거예요.”
“어디로 갈지 생각하고 텔레포트 한 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텔레포트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귀환마법과 비슷한 거 같아요.”
“렌 경이 그렇다면 그게 맞겠지. 그러면 그놈이 목표로 찍어놓은 지점을 찾아서 거기서 싸우면 되겠군.”
“예, 그래서 이제부터는 감지 장치를 설치하면서 이동을 해야 할 거 같아요.”
후사의 해골과 비슷한 건데, 이것은 그가 접근하면 나한테 신호를 보내는 기능이 있다. 유적 내부에서 제대로 작용할지 고민해 봤는데, 오래는 몰라도 하루 정도는 제대로 작용할 거 같다.
나는 벽에 새겨진 룬에 옆에 작은 판을 붙이고 그 위에 감지 마법을 걸었다. 이렇게 하면 유적을 훼손한 것이 아니고, 작은 판 자체를 동화 마법으로 흑요석처럼 만드니 미스릴 문양의 빛에 가려서 잘 알아보기 어려웠다.
“됐어요. 이걸 일정 거리마다 걸면서 가요.”
나아가는 속도가 거의 절반 수준으로 느려졌지만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면서 통로를 지나갔다.
다행히도 여기부터는 미로가 아닌 정말 신전의 내부 같은 느낌이어서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나아가니 드디어 큰 대전이 나왔는데, 앞쪽에 거대한 드래곤의 동상이 있고, 두 개의 화로에는 불이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화로 사이에 큰 비석과도 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드래곤어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드래곤어는 룬어처럼 마법이 담긴 언어이기 때문에 해석마법도 소용이 없다. 아마 현 시대에 이걸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드래곤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드래곤로드 펠치오라스가 떠나기 전에 추종자들에게 남긴 말이 적혀 있네요.”
“마지막 드래곤로드라, 정말 드래곤은 거의 멸종한 건가?”
“아니에요. 여기 적힌 내용에 따르면 다른 세계로 갔다고 하네요. 거의 대부분이 떠났데요. 음, 그러니까 그들은 드래곤로드가 신이 못 되고 인간 중에서 신이 나온 게 잘 못 되었다고 주장했다고 하네요.”
“허, 인간 중에서 신이 나왔다고?”
아하, 내용을 읽어보니 전후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원래 이 세계의 주인은 드래곤이고, 그때 인간은 드래곤보다 하위의 종족이라 아직 역사도 문자도 제대로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 중 뛰어난 자가 나와 결국 세계의 근원과 접촉하여 절대신성을 얻게 되니 이것은 드래곤로드들이 크게 자존심을 상해할만한 일이었다.
대대로 드래곤로드들은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 왔는데, 엄하게 그들이 부리던 인간 중에서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로드들은 종족회의를 열어 자신들을 배신한 이 물질계를 떠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종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남겨두니 나중에 그들이 이 힘을 얻어 인간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신을 부인하며, 드래곤을 새로운 신으로 삼길 것을 맹세하라는 것이다.
“쩝, 인간 신을 부인하고 드래곤을 영접하라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라는 거야.”
그런데 또 인간 신은 왜 물질계를 버리고 떠난 거지? 뭔가 한계를 느꼈다고 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어쨌든 드래곤들 대부분이 물질계를 떠난 이유는 알았다. 이걸 단서로 포트라에게 질문할 방법을 찾아봐야지.
나는 해석한 내용을 대충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속으로 정리를 했다.
“그런데 추종자들을 위해 힘을 남겨두었다는 게 뭘까? 혹시 그 힘 얻으면 이 유적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잠자고 있는 고대마수를 셋 정도 얻는다던가 하는 걸까?”
미리아는 드래곤이 남겼다는 힘에 관심을 보였다. 크리드 경 역시 그 부분이 신경 쓰이는 듯 손으로 턱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강력한 검이나 갑옷일지도 모르겠군. 난 개인적으로 날개달린 갑옷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기요. 여기서 날개달린 갑옷 같은 게 나와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그게 저주받은 물건이면 하늘을 나는 마수로 변해 버릴 수 있거든요.”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크리드 경은 웃었다. 순간적으로 개인적인 욕심을 드러내 버린 게 쑥스러웠나보다.
그런데 그때, 입구 쪽에서 후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날개달린 갑옷도 있다. 그들이 말한 힘 중 하나가 바로 이 저주받은 유물들이지.”
아하, 그러니까 드래곤들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추종자가 노예로 쓸 수 있는 마수로 변신시키는 저주아이템을 남겨둔 거로군.
그게 저 후사의 능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애초에 정말로 이 유적의 유물이었던 거야.
“그럼 설마 후사 네가 드래곤의 힘을 얻은 거냐?”
“그렇다! 나와 계약한 마족이 바로 이계에서 절대신성을 얻은 드래곤이지. 나는 이 세계의 원주인을 받들어 발칙한 인간들을 몰아내고 우리 원숭이 일족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아 놔, 무슨 드래곤이 원숭이랑 계약을 하냐. 아니지. 그들은 인간도 원숭이처럼 생각했던 거군.
내 이놈의 드래곤을 꼭 소환해서 잡아 족치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