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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91화 (191/250)

로엔의 마나뱅크 191화

*

유적은 거대한 지하궁전이었다. 입구는 땅굴처럼 좁았지만 들어가면 통로가 꽤 넓어지고 석벽도 손질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원숭이들의 소굴인 것 같은데.”

크리드 경이 통로를 조금 조사하더니 말했다. 정리는 되어 있어도 원숭이의 몸 냄새가 통로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매일 청소하는 건가요? 어째 먼저 지나간 사람의 흔적이 없더라니.”

“앞에 들어간 사람들이 무사할 가능성은 극히 적겠군.”

“그나저나 갈림길이 나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세 갈래 길이다. 여기도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어서 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이놈의 원숭이들이 제대로 유적을 관리하고 있는 셈이다.

“잠시만요. 일단 한 번 살펴볼게요.”

뿌우를 보내는 게 제일 확실한데, 여기는 가능하면 소환을 안 하는 게 좋겠다. 가끔씩 벽에 새겨져 있는 룬어를 보고 깨달은 건데, 이 유적 안은 정령력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그것도 꽤 강렬해서 유적에서 퍼진 기운이 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다.

정령력이 이정도로 억제되면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에도 문제가 발생할 터인데, 원숭이들이 여기서 나는 거 맞아?

아직 의문투성이인 유적이지만 계속 들어가면 뭔가 나올 테니 지금은 생각보다는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일단 가운데 길로 가지요.”

“왼쪽부터 가는 게 낫지 않아?”

“통로가 복잡하면 한쪽부터 파는 사람이 있는데, 미로에서는 그게 제일 위험해요. 벽이 움직이거나 일방통행 환상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염려 말아요. 저는 절대 공간 감각이 있어서 미로에서 안 헤매니까.”

“와, 렌, 그런 감각도 있었어?”

“원래 나는 공간 감지와 설계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어. 거기에 살짝 몇 가지 마법을 걸면 적어도 물질계 안에서는 좌표가 흔들리지 않거든. 섀도우 플레인처럼 공간 자체가 일그러져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럼 길을 잃을 걱정은 없는 거군.”

“예, 벽이 움직여서 막아도 그걸 부수고 지나가면 되니 괜찮아요.”

“좋아. 그럼 계속 중앙쪽으로 가 보자고.”

내 설명에 미리아와 크리드 경은 힘을 얻었는지 내 뒤를 따라왔다.

어느 정도 나아가니 또 세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는 잠시 그동안 지나왔던 길의 굴곡과 경사를 가늠해 보고 다시 중앙의 길로 향했다.

환상으로 막혀진 길도 있었지만 그걸 구분 못할 나는 아니다. 오히려 환상 아닌 가짜 벽도 다 찾아서 뚫으면서 지나갔다.

몇 번 그렇게 나아가니 대략적인 미로의 구조를 알만 했다.

“이건 트리키아식 미로에요. 직선 같지만 묘하게 뒤틀린 통로와 연이은 교차로, 그리고 길이 위아래로 이어져 사실은 3층에 걸쳐 만들어진 최대 규모의 미로이니 보통 사람은 한번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지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지? 원숭이들이 바로바로 치우나?”

“아마 그럴 거예요. 해적들이 한꺼번에 들어온 게 아니라 한두 달에 걸쳐 온 거라 이미 먼저 들어온 자들은 대부분 원숭이들에게 당했을 것 같네요.”

“그럼 그림녹은 어디 있을까? 이놈들도 이용만 당한 걸까?”

“그건 그들을 만나봐야 알겠죠. 그림녹은 몰라도 샤키라는 놈은 음모에 제대로 가담한 놈이고, 아마 원숭이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겠죠. 궁금한 것은 그놈이 왜 원숭이들에게 협조를 했는가 하는 점인데, 어쩌면 이미 마물이 되어서 조종을 당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가.”

“아무튼 이제 통로 몇 군데만 더 지나면 빠져나갈 수 있어요.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한번 조사를 해 보자고요.”

나는 슬슬 지겨워하는 크리드 경을 다독이며 계속 나아갔다. 예상대로라면 다음 통로만 지나면 유적의 중앙지구로 진입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맞아서 우리는 거대한 대공동 안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은 원숭이들의 마을이군.”

대공동 안에는 돌로 만든 집이 백여 채 있었고, 거리와 지붕에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통로 입구 쪽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원숭이들이 놀라서 말했다.

“우끼, 침입자다! 설마 이곳까지 오다니.”

“어서 종을 울려. 끼끼끼.”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말을 하는 원숭이도 있네요.”

파지지직

경비병 원숭이들이 종을 울리기 전에 내 손이 먼저 흔들렸고, 그들은 뇌전에 까맣게 타 버렸다.

“어떻게 하지?”

“마법으로 변장을 하죠. 원숭이로 변해서 내부 상황을 조금 볼 필요가 있겠어요.”

“흐, 살다보니 원숭이로 변장을 다 해보는군.”

크리드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내 마법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곧 우리는 원숭이로 변한 채 그들의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리는 렉스와 함께 입구를 지켜, 들어오는 자들이 있으면 막거나 제압하라고.”

“예, 애매한 상황이면 그냥 제거를 해도 되나요?”

“그건 네 판단에 맡길게.”

렉스와 마리포즈면 후사가 직접 오지 않는 한 다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서피 너는 이리 와. 우리랑 같이 간다.”

“샤아아, 알았다.”

서피는 렉스의 목띠로부터 나와 허공을 살살 날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해양에서 전투가 없어서 유감이다. 모처럼 내 본래의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게. 해양전투준비를 나름 철저하게 했는데 소용이 없었네.”

말은 그렇게 해도 바다위에서 안 싸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 한 몸 지키기도 바쁜데 배와 선원들까지 보호하면서 싸우려면 아마 미치는 상황이 한두 번쯤은 나왔으리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원숭이들의 마을로 진입했다. 그런데 이곳의 원숭이들은 모두 말을 할 줄 알았다. 수는 대략 300정도. 아직 멍청해 보이는 놈도 있지만 눈에 살짝 마기를 띤 놈들은 꽤 영리하고 힘도 강해 보였다.

“아무래도 말을 튼 놈만 이 안에 들어오는 모양이네요.”

미리아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응, 이 안에 마력이 꽤 강해서 그걸 빨아들여서 마기화 하는 중인 거 같아. 보통 생물이라면 살기 어렵겠지만 반마족화 된 놈들이라면 오히려 점점 강해지는 거지.”

“이 원숭이들이 다 반마족이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0분의 1만 마족화 된 정도? 하지만 이 안에서 계속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어.”

내가 설명하면서도 조금 섬뜩하다. 이걸 발견하지 못한 채로 몇 십 년 정도 더 있었다면 정말 원숭이들과 인간의 제대로 된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사라는 놈이 자기 몸보신을 위해 저주받은 가짜 유물을 퍼뜨리면서 유적으로 해적들을 불러모았고, 그게 우리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럼 이 원숭이들을 어떻게 해?”

“다 제거하자고.”

“전부 다?”

“얘들은 진짜 살려두면 안 돼. 섬 밖에 있는 원숭이들은 몰라도.”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제거해?”

소란을 피우면 후사가 달려올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집단 다굴을 당할 수도 있는 거다.

“어쩔 수 없지. 독을 쓰자.”

“독이 있나?”

크리드 경이 끼어들었다.

“마녀의 저주로 독을 만들 수 있어요. 주재료는 제 피가 되는 거죠.”

블러드 포이즌이라는 거다. 마녀들 사이에도 거의 금기시 되어 이제는 사라진 방법인데, 여기에 미리아의 신성력까지 주입하면 마기에도 반발작용을 일으키는 기가 막힌 물건이 탄생 된다. 그러니까 대 마족용 독인데, 내가 그동안 그놈들을 상대하면서 꾸준히 연구 개발해 온 놈이다.

“그런데 저 많은 원숭이들을 모두 중독 시키려면 렌의 피가 모자라지 않을까?”

“피를 섞어야지. 원숭이 몇 마리를 몰래 처치한 후에 내 피와 섞으면 충분한 양이 될 거야.”

이건 원래 인간끼리 싸울 때는 쓰면 안 되는 금기 중에 하나다. 그러나 마기를 머금은 원숭이 떼를 처리하는데 방법을 가릴 생각은 없다.

나는 외곽 지역에 있는 원숭이 몇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피에 내 피를 섞으며 저주를 걸었다.

거기에 미리아가 축복을 하니 저주와 축복이 섞여있는 기묘한 독이 완성되었다.

원래 이놈은 그렇게까지 즉효성 살상력은 없는데, 신성력이 마기를 자극하면 약효가 오히려 몇 배나 증가될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걸 마신 원숭이는 하루 만에 죽을 수밖에 없다.

서피는 피에 담긴 독기를 느끼는지 움찔 하며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서피 자체도 독을 쓸 수 있는 마수인지라 이게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느끼는 모양이다.

“으, 아무리 나에게도 마녀의 피가 흐른다지만 독약을 만드는 것은 마음에 안 내킨다.”

“나도 그래. 하지만 이게 가장 효율적이니 어쩔 수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완성된 독약을 원숭이들이 마시는 우물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원숭이들이 저녁을 먹고 물을 마시러 왔다. 한 무리씩 한무리씩 와서 우물물을 마시고 어떤 놈은 아예 몸을 씻기까지 했는데, 이미 물과 닿아 동화되어 버린 포이즌 블러드는 약간의 비린내만 날 뿐 보통 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원숭이들은 인간의 피냄새가 물에서 난다고 더 좋아했다. 쥬스 같은 느낌이라나 뭐라나.

이 식인 원숭이들을 모두 제거하면 후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놈들이 이렇게 불어날 때까지 수십 년은 걸렸을 것이다. 후후후.

우리는 그 안에서 하루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원숭이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꾸이이이! 배가 아프다.”

“내장이, 내장이 녹아.”

“꾸엑, 피가! 내 피가!”

집에서 비틀거리며 튀어나온 원숭이들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하루 종일 물을 안 마시고 지내는 원숭이는 없을 테니 이제 순차적으로 모든 원숭이들이 이렇게 죽어갈 것이다.

우리는 굳은 얼굴표정으로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두 번 다시 쓰고 싶지 않은 수법이지만 때로는 독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얼마 후, 원숭이들의 태반이 죽었을 때, 드디어 대공동 한쪽으로부터 후사가 나타났다.

“우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왕, 우리는 죽어요.”

“독인가 봐요, 꾸우욱.”

“우쿠쿠쿠, 이런, 내 수하들이, 내가 어떻게 키운 놈들인데!”

크오오오오

후사의 몸이 갑자기 세배쯤 커지며 공동 안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포효했다. 저렇게 되니 거의 고릴라처럼 보인다.

저게 후사의 마족형 모습인가? 거의 야수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끼, 내 너희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꾸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후사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자 땅에 쓰러져 꿈틀대고 있는 원숭이들의 몸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빠져나왔다. 이미 죽은 자들 중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자들 역시 마찬가지 몸 안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마기가 빠져나오며 순식간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아차, 저놈이 아직 살아있는 원숭이들의 마기를 모두 흡수하기 시작했네요.”

지독하다.

일족의 생명력을 모두 빨아들여 자신의 힘으로 변환할 수 있구나.

들은 바가 있다.

어떤 마족은 수하와 계약을 할 때 생명의 맹약이라는 것을 한다고 한다. 마기를 나누어주는 대신 언제든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마족들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목숨 걸로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후사와 계약한 마족이 그런 습성을 가진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긁어부스럼을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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