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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88화 (188/250)

로엔의 마나뱅크 188화

할테론은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항구였다. 그곳은 정상적인 도시나 마을이라기보다는 해적들이 잠시 배를 정박하고 쉴 수 있는 그런 은신처 같은 곳이었기에 사는 사람도 100여명에 불과했다. 그 100여명도 아마 거의 전직 해적들이 대부분이리라.

나는 갸로프가 이야기 한 대로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행들은 우선 마을 입구에 머무르게 했다. 우리가 타고 간 마차는 꽤 고급품이라 이런 곳에 들어가면 해적들이 도적으로 변할 지도 모르고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는 싫었다.

환영 마법으로 의상도 뱃사람의 그것으로 바꾸고 술집에 들어가 카운터에 앉았다. 우선 분위기를 보고 주인과 접촉을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싸구려 버번 한 잔을 앞에 놓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부분 그림녹이라는 해적의 세력 확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갸로프의 시대는 갔어. 소문에 의하면 심각한 저주에 걸렸다던데.”

“정말인가? 하긴, 갸로프가 멀쩡하면 지금 그림녹이 저렇게 설치게 놔두지는 않겠지.”

“어쩐지 데몬 헌터인가 뭔가 가입한다고 설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데빌 헌터다. 이놈들아. 그런데 갸로프가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네. 이건 샤키가 의도적으로 흘린 거겠지?

“그래도 갸로프가 돌아오면 그림녹이 안 되지 않을까?”

“그건 그래, 아직 그림녹에게 붙기에는 조금 이른 면이 있어.”

“젠장, 그놈한테 안 붙으면 영업하기가 까다롭다고. 갸로프의 수하들은 수전에서 2번이나 패한 이후 잘 나오지도 않잖아.”

“현실적으로 지금은 그림녹의 천하가 맞는데, 괜히 그쪽에 붙었다가 갸로프가 돌아오면 그것도 곤란하니…….”

이 해역의 주인이 바뀌냐 마냐의 기로로군. 그림녹이 능력이 있긴 있나 보다.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그 사이 이 정도까지 해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니.

아니면 그놈이 마족의 계약자와 정식으로 손을 잡았나? 아예 마족의 계약자 본인이면 더 좋고.

“그런데 소문이 정말일까? 그림녹이 거대 유적을 발견한 거 말이야.”

“그거야 그림녹 일당만 알 수 있는 거지. 우리에게 유적 위치를 가르쳐 줄 리도 없으니까.”

“그게 유적이 너무 넓어서 자기 쪽에 붙은 자들에게는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고.”

“헛, 그래서 요즘 바다에 배가 많이 줄은 건가?”

“그런가봐. 그림녹의 수하들 대부분이 유적에 보물을 찾아 떠났다는 것 같아.”

“정말 보물이 있데?”

“몇몇이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게 장난 아니야. 거의 최고급 마법 아이템을 몇 개씩이나 발굴해 왔더라고.”

“으음, 땡기는데? 일단 그림녹한테 붙어서 보물이나 찾으러 갈까?”

이것 봐라. 그림녹이라는 놈이 해적들에게 저주작업을 제대로 하나보네.

이런 식이면 얼마 못가서 마물화 된 해적들이 이 바다를 장악하게 되겠다.

갸로프의 경우나 다른 자들을 보면 저주 걸린 자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해양 마물로 변한다.

이런 식으로 해양마물이 늘어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손을 쓰기가 쉽지 않다. 바다는 그들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일은 조금 더 빨리 처리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지금 우리가 바다로 나가면 적지 않은 마물들과 싸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원래 마법사는 하늘에서 싸우면 싸웠지 물속에는 잘 안 들어가는 법인데. 쩝.

내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카운터 안에 있는 바덴더가 와서 술을 조금 더 따라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처음인 것 같은데, 뭣 때문에 온 거요? 내 잠시 지켜봤지만 당신이 해적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알겠거든. 혹시 첩자라면 싸울 준비를 한 후에 밖에 나가고, 아니면 아니라는 증거를 대야 할 거요.”

“첩자는 아니고, 증거는 여기 있어요.”

나는 갸로프의 검을 테이블 위에 꽂았다. 별로 특이하지 않은, 그냥 실용적인 숏소드라 아무도 그 검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단지 바덴더만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에 버번을 가득 채웠다.

“손님이 맞군. 그거 다 마시면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러죠.”

나는 잔을 들어 단숨에 버번을 비웠다. 독하고 싼 술이지만 맛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안에 뭔가를 넣었는지 마시자마자 바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다. 해적들은 외부인이 오면 먼저 취하게 해 놓고 대화를 한다고 했다. 멀쩡한 제정신인 놈은 절대 신용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룰이다.

그래서 바덴더는 나를 약에 취하게 만든 것 같다.

여차해서 전투가 벌어져도 저쪽에 유리하도록 하는 소심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이거 해독 안하고 들어가는 거 맞죠?”

내가 대놓고 물어보자 바덴더는 씨익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안쪽에 있는 문을 통해 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곧 다른 문이 열리며 바덴더가 들어왔다.

바덴더가 여기 주인이라는 것은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밖에서 사람 좋은 털보 아저씨의 인상이 안에서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현역 해적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두목은 잘 있소?”

“별로 잘 있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가 왔지요.”

“용건은?”

우리가 누군지는 묻지 않는군. 좋은 자세다.

“해왕호.”

“나한테 온 걸 보면 그거겠지. 사람과 용건이 맞으니 정말 두목이 보낸 게 맞군요. 배를 내어드리겠소. 그리고 거기 탈 선원도.”

“고마워요. 그런데 아까 살짝 들어보니 그림녹이라는 놈이 거대유적으로 해적들을 유혹한다던데, 많이 넘어갔나요?”

“수백 명은 유적으로 갔을 거요. 그림녹 본인도 유적에 간 걸로 확인되었으니까.”

“그럼 샤키라는 해적은 어디 있지요?”

“샤키가 진짜 배신자였군. 그자도 그림녹과 함께 유적으로 갔소.”

샤키에 대해 묻자마자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진다. 머리가 좋은 자다. 바로 샤키가 원흉이라는 것을 눈치 채다니. 말을 조금 아껴야겠다.

“그럼 우리도 유적으로 가야겠군요. 유적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있나요?”

“유적 위치야 조금만 노력하면 바로 알 수 있지. 우리쪽에 그림녹에게 거짓으로 전향한 자들이 몇 있고, 그들이 지도를 주더군. 사실 나는 그 유적을 별로 좋게 안 보고 있소. 정말 그렇게 훌륭한 보물이 많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넓어도 절대 남에게 쉽게 가르쳐 주지는 않을 테니까.”

“맞는 얘기네요. 하지만 해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보네요.”

“해적들은 보물 이야기가 나오면 속을 줄 알면서도 일단 가서 확인하는 습성이 있으니, 그리고 거기 갔다가 돌아온 자들이 있으니 조금은 진실성도 보이고 말이오.”

그런 거지. 알면서도 속는 게 이 세상의 사기수법이거든.

어쨌든 수백 명은 몰려갔다고 하니 늦으면 해양마물 수백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정말 이번 마족의 후계자는 저주 아이템을 찍어낼 수 있는 건가? 수백 개의 저주 아이템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텐데...

아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직접 저주를 건 다음 마물이 되면 조종해서 연기를 시키면 되겠구나. 굳이 일일이 아이템을 쓸 필요는 없겠어.

왜 거대 유적을 만들어 해적을 모으려 하는지 깨달았다. 그곳에 들어간 해적들은 마족의 후계자에게 잡혀 즉석에서 빠른 시간 안에 마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 말인즉, 그곳에 마족의 후계자가 있다는 소리다.

“서둘러야겠군요. 해왕호로 거대유적에 가서 그림녹과 샤크를 찾아야겠어요.”

“그럼 밤에 항구로 오라고, 준비 해 놓을 테니.”

“알았어요. 그럼 저는 일행과 같이 밤에 올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덴더는 한쪽에 있는 비밀문을 열어주었다. 가게 뒤쪽으로 바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에요? 설마 바덴더가 이름은 아니겠죠?”

“칼, 별명은 송곳수염이고.”

“그럼 칼, 밤에 봐요.”

나는 그길로 마을을 벗어나 외곽지역에 대기하고 있는 일행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럼 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겠군. 거대 유적 자체는 땅일 테니 싸우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고.”

“크리드 경의 말씀대로 일단 유적에 도착하면 육지를 탐색하며 그림녹을 찾게 될 거 같으니 바다에서는 가능한 한 조용히 있도록 하죠. 하지만 만약 적을 만나면 미리 구상한 대로 서피와 크리드 경이 주로 싸우고, 마리포즈가 배 아래쪽을 보호하면 될 거예요.”

“알았네.”

우리는 자잘한 것들까지 다시 한 번 정리하듯 상의를 한 후,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출항을 해야 하니 이게 육지에서의 마지막 취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결계로브의 영향으로 배에 타도 편히 쉴 수 있지만 미리아는 숲에서 떨어지게 되는 셈이라 벌써부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했다.

“흙을 조금 가져가서 배 위에 나무를 심을까?”

“대지와 닿지 않는 곳에서 나무를 기를 수는 없어. 나무가 불쌍하니까.”

“그래.”

“괜찮아. 내가 조금 참지. 뭐.”

“그런데 엘프들은 바다로는 안 나가나?”

“응, 숲의 힘을 쓰면서 엘프들 자체가 숲과 어느 정도 동화가 되었거든. 이제는 숲의 일부로써 사는 게 자연스러워. 나이가 들면 나무와 동화하는 게 엘프들에게는 영광스럽고 가장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거거든.”

그래서 엘프는 나이가 들면 상당수가 드루이드의 길을 걷는다고 한다.

궁극마법의 힘을 쓰기 위해서 종족 전체가 숲에 귀속된 셈이니 희생이 크다면 큰 거구나.

이렇게 종족 전체를 마법의식의 유지 장치로 쓸 수 있는 것도 엘프의 특성 중 하나이리라.

아무튼 바다 위에서는 가능한 한 마물이고 해적이고 안 만났으면 좋겠다. 수상전은 정말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좋고 싫고의 문제인 것이다.

그날 나는 유적탐사를 하다가 보물을 발견하는 꿈을 꾸었다.

잠깐 동안의 낮잠 중에 그런 꿈을 꾸다니. 유적탐사와 보물찾기라는 말 자체에는 상당한 마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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