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85화
깨워서는 안 되는 존재와 대화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슬리퍼는 점점 잠에서 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아직 말만 걸었을 뿐 소원을 빌거나 기적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것을 빌면 슬리퍼가 급격히 잠에서 깰 가능성이 높다.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된다. 이름을 자꾸 들으면 잠에서 깨어나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포트라도 신도 다 슬리퍼라고만 부른 거다.
빨리 대화를 끝내고 계속 자라고 하자.
그 뒤로는 가능하면 어떤 존재도 슬리퍼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때 슬리퍼가 약간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하다. 넌 나를 깨울 자격이 있는데, 너의 육체는 아직 영혼만큼 성숙하지 못했구나. 어째서지?”
아, 이놈이 내가 말을 안 하자 자기가 먼저 생각하고 말을 하네. 이러면 잠에서 깰 텐데.
우선 대답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환생을 해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런 거군. 이 세계의 비밀이 또 하나 밝혀졌구나. 내가 깨어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네.”
젠장, 환생을 하는 게 슬리퍼를 깨우는 요인의 하나인건가? 기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그가 깨어날 확률이 높아지는 거군.
아마 슬리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져도 그가 깨어날 가능성이 높을 거다.
어쨌든 지금은 원래 목적대로 결계를 칠 방법만 알아내고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자. 그게 최선이다.
“마력이나 정령력으로 의지력을 대체할 수는 없는가?”
“있어. 하지만 많은 힘이 필요해.”
있구나! 이거야말로 내가 알고 싶었던 거다.
왜냐하면 난 지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게 섀도우 플레인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고는 믿기 어렵다.
실재로 마나파동포는 섀도우 플레인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방법만 알고, 궁극마법을 쓴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섀도우 플레인에 마법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을 거다.
“많은 마나가 있다. 그걸 모아 섀도우 플레인에 존재하는 결계도 부수었지. 그러니 반대로 그것을 이용해 결계를 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다오.”
정식 요청이다. 분명히 이놈은 무엇이든 내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게 되어 있다. 대신 그만큼 잠에서 깨어나는 거다.
그냥 대화가 가장 영향력이 작고, 이런 지식의 전수가 그 다음이고, 실재로 기적을 일으키거나 힘을 발휘하게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지식의 전수를 하나 정도 한 걸로는 아직 괜찮다고 본다.
200년 후에 이반 경이 와서 신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거다. 그것도 큰 문제는 안 될 거다.
요컨대 이놈에게 직접 힘을 쓰라고 하지 않는 한 웬만하면 깨우지는 않을 거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이제는 배짱이 생기고 냉정해졌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여전히 긴장을 유지한 채 슬리퍼의 대답을 기다렸다.
슬리퍼는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하다가 말했다.
“마나가 충분히 많다면, 그걸로 결계를 유지할 수 있어. 하지만 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강력한 의지력이 필요해. 그리고 방아쇠가 되는 영혼들도.”
“영혼을 꼭 소모해야 하는가?”
“그게 싫다면,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방법을 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계의 불멸자를 소환해서 그들의 힘을 쓰는 거야.”
“이계의 불멸자들에게 부탁을 하라고?”
“아니, 그들을 소멸시킬 때 발생하는 힘을 이용하면 되.”
“아하, 그것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
“그럴게.”
드디서 슬리퍼가 승낙을 했고, 나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정확하게 그 지식은 머리가 아닌 내 영혼 자체에 각인되는 듯 했다.
아마 이것도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이 세계의 숨겨진 비밀 중 하나이리라. 궁극마법 중 하나인 차원결계에 대한 이론과 구현방식, 그러니까 마법진의 도식이다.
4대 대정령의 힘을 모두 끌어 쓰고, 고위마족 셋을 동시에 소멸시켜 기폭제로 쓴다. 엄청난 양의 의지력을 미리 모아 놓아야 하고, 일단 마법진이 발동한 이후에는 의지력이 모두 소모되기 전에 그것을 보충할 힘의 근원과 연결을 해야 한다.
안전장치, 기폭장치, 구현장치, 유지장치로 구분되는 마법진들은 그야말로 이 세계의 지식을 모두 집약시킨 정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것이구나. 이게 가능하구나.”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마 내가 영혼상태가 아니었다면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으리라.
“고마워. 이제 난 갈 테니 너는 계속 자.”
나는 슬리퍼가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마치 남이 아닌 오랜 친구처럼 생각되었다.
아, 지식을 전수받으면 이런 영향을 받는 건가?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 것은 슬리퍼도 나를 가깝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분이 묘하다. 저런 존재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니. 오싹한 느낌도 든다.
“그래, 난 조금 더 잘게. 나중에 내가 보고 싶으면 또 와. 내가 깨어나도 너를 삼키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도 되.”
유혹하는 거냐? 나에게 너로부터 벗어날 자격을 주고 언제든 원하면 와서 깨우라는 거지?
무섭다. 이건 정말 경계해야 한다. 이제는 그에 대해 생각만 해도 그 힘이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
내가 그를 생각하면 그도 나를 생각한다. 꿈을 꿀 것이다.
슬리퍼가 영생자, 그러니까 신을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역시 정식 신은 아니지만 환생을 하면서 기억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그는 나를 기억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게이트를 나왔다. 뒤쪽에서 슬리퍼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대화를 할 때는 못 느꼈는데, 그 사이 그의 기운이 계속 강해졌던 것이다.
“우우웃!”
게이트를 나와 호수의 바닥에 들어서자 나는 강렬한 추위를 느꼈다. 영혼이 느끼는 추위는 침식과 연관이 깊다. 내 몸 전체가 상당한 침식을 받았구나.
이거 잘못하면 원래대로 못 돌아가고 셰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
일단 셰이드가 되면 생각자체가 점점 사악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미리아가 이걸 정화시킬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 게이트쪽으로 걸어오던 돌인형들이 갑자기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팍, 팍, 팍
돌인형들이 내 영혼과 접촉을 하는 순간 분해되었다. 그러자 그 부분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것은 정화의 힘이다. 미리아가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순수한 신성력이다.
“돌인형들은 신성력으로 게이트 주변의 침식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이었던 자는 새롭게 탄생한 불멸자의 영혼이 침식당하는 것을 경계한 모양이다.
아마 이런 상태로 내가 신이 되면 그건 악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가능하면 영혼이 순수한 상태로 불멸자가 되라고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신세를 진 셈인가? 후훗.”
이미 떠나간 신이지만 그의 배려는 확실하게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어느새 내 영혼의 침식이 모두 사라지고 돌인형들은 다시 게이트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호수 위로 올라와 얼른 육체와 재결합을 했다. 미리아와 숲의 힘을 이용한 마법진이 아니라 렉스의 목띠에 있는 힘을 이용하고 마리포즈가 조종을 하게 한 임시마법진이라 시간을 너무 끌면 안 된다.
“우욱!”
고통이 심하다.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이런 고통이라니, 침식을 당한 후유증이 세긴 세구나.
나는 몸을 웅크리고 한참 괴로워했다.
마리포즈는 그런 내 몸을 주물러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주며 조금씩 마나를 흘려 넣음으로써 고통으로 인해 근육과 신경이 얽히지 않게 도와주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얻긴 얻었지. 그만큼 귀찮은 일도 있었지만.”
영혼 한 구석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슬리퍼와의 끈이 연결된 것 같다. 이제 나는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순간이라도 그의 도움을 원하게 된다면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이건 무서운 유혹이다.
내가 세상을 원망하고 그가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는 깨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최종병기의 스위치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다.
“후우, 이 산을 다시 봉인해야겠어.”
“그게 가능할까요?”
“이 안에 존재하는 자의 위험성을 생각할 때, 신은 산을 다시 봉인시킬 방법을 만들어 놨을 거야. 그걸 찾아보자고.”
나는 일행과 함께 일단 주변을 찾아보았다.
과연 호수 반대쪽에 드래곤어로 새겨진 석판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게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어서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가, 내가 섀도우 플레인에 다녀온 다음에 나타난 것이다.
“이전 신은 섬세한 성격이었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드래곤어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부분은 뿌우를 불러내 포트라에게 보내 물었다. 그렇게 뿌우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심부름을 세 번 하니 내용을 전부 알 수 있었다.
역시 산을 다시 봉인하는 방법이다. 나는 석판에 새겨진 문자 중 몇 개에 마나를 흘려 조작을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구구
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땅이 갈라지며 산이 아래로 내려갔다.
산 안에 있는 나까지 땅속에 파묻히는 게 아닌가 하고 살짝 염려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 순간이동을 했다. 다시 평야가 된 대지 위로 우리는 옮겨졌다.
“휴, 이것으로 방법은 알아낸 셈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머리도 복잡하고 속도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기는 얻었다.
그 후 나는 조용히 영지로 돌아왔고, 라큐 왕국 쪽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들었다.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평야지대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놀랍게도 거대한 산맥이 솟아났다가 얼마 후에 다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러한 천재지변에 크게 놀라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당혹해 했다.
그래서 나는 미스틱엑스의 이름으로 발표를 했다.
강력한 존재에 의한 기적이 발생했지만 미스틱엑스를 비롯한 데빌헌터의 주요 맴버들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에 가서 정리를 했다.
진실과는 살짝 다르고, 거짓말은 아니지만 왜곡된 정보다.
사람들은 그 발표문을 보고 강력한 존재가 마족의 계약자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왜냐하면 데빌헌터가 출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리를 했다는 게 마족의 후계자를 제거했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정확한 사항을 물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나는 다시 케이티 양에게 지시를 내려 라큐 왕국에 지원물자를 보내도록 했다.
수확 이후라 큰 피해는 없었고, 예상과는 다르게 산이 다시 지하에 봉인이 되었기에 내년부터 당장 농사를 지어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피해가 난 것은 사실이니 물자를 보냈고, 이것은 크게 호응을 얻었다.
원래는 훨씬 더 많은 물자를 보낼 계획이었지만 평야가 멀쩡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 결국 우리 영지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자가 쌓여 버렸다.
이게 웬 횡재인지 모르겠지만 내 영혼에 슬리퍼에 대한 기억이 각인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